소설리스트

51화 (49/64)

폭풍속으로

요즘 들어 우현영은 잠을 제대로 이루질 못했다. 시작은 연회날이었다. 노비였던 석현이 관직에 오르고 다시 제 위치를 되찾은 바로 그 날. 그 날부터 시작된 악몽은 점점 주기가 짧아져 우현영의 밤을 망쳤다. 그늘진 눈 밑이 고생의 흔적으로 진하게 남아있었다. 우현영은 따뜻한 차를 따르며 어떻게든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그래. 비록 석현이 내금위로 들어가게 된 들 무슨 소용이랴. 아무리 그래봤자 우 씨 집안을 어찌 할 수는 없을 것이 분명한 것을. 뜨거운 물에 꽃잎이 떨어지며 향을 퍼뜨리자 우현영은 상념을 털어내고자 뜨거운 부분을 피해 컵을 집어 들었다. 그 때였다.

“아버지. 해랑입니다.”

갑작스런 해랑의 방문에 우현영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찻잔으로 향하던 얼굴을 돌려 문을 보았다. 문에 어른거리는 해랑에 우현영은 다시 잔을 내려놓고 해랑을 들였다. 해랑은 문을 열고 들어와 인사한 뒤 우현영의 맞은 편에 자리했다. 헌데 어째 행색이 영 꼬질거렸다. 흙먼지라도 뒤집어 썼는지 옷자락이 꾀죄죄했다. 우현영은 살짝 미간을 좁히고선 해랑에게 물었다.

“옷이 어째 그 모양이냐?”

우현영의 말에 해랑이 아차 싶었는지 제 옷의 상태를 살폈다. 이전에는 몰랐던 모양이었다.

“송구하옵니다. 사당에 가서 신주의 먼지를 털고 정리를 하는 동안 묻은 모양입니다.”

“사당?”

“예. 방금 사당에 들렀다가 내려오는 길이었습니다.”

우현영은 뜬금없이 사당을 방문했었다는 해랑의 말에 얼굴을 굳혔다. 이 집안 사람들 모두가 사당에 가길 꺼려하는데 해랑이 사당에 갔다? 우현영은 미심쩍은 얼굴로 해랑을 보았다.

“실은… 어릴 적부터 홀로 사당에 간 적이 많았습니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우현영은 해랑이 한 두 번 사당에 출입한 사실을 알긴 하였으나 이토록 자주 방문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옛날부터 해랑에게 특별한 일이 없다면 사당에는 출입하지 말라고 해왔기에 당연히 그런 줄로만 알았었다. 헌데 사당에 간 적이 많았다니. 우현영은 기가 찬 듯 바람 빠지는 소릴 내며 웃었다.

“내 그리 가지 말라고 일렀거늘 어찌 그리 많이 갔느냐?”

우현영의 말에 해랑이 주저하다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조상님들이… 외로우실까봐요.”

“뭐?”

“어릴 때 창문 너머로 보이는 사당이 홀로 어두운 곳에 있기에… 조상님들께서도 저처럼 외로우실까봐 그랬습니다.”

해랑의 말에 우현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해랑의 말 속에 묻어나는 외로움에 숨이 막혔기에 그랬다. 홀로 별채에 두었던 어린 해랑이 눈 앞에 그려졌다.

“…그랬구나.”

어린 해랑은 고운 성정으로 제 외로움과 함께 음지에 자리한 사당에 모신 조상님들의 외로움까지도 품었던 것이었다. 우현영은 자신의 모자람을 조상님들께서 꾸짖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사당에 가서 무얼 했느냐?”

날카로웠던 우현영의 목소리가 원래대로 차분히 가라앉았다. 우현영의 질문에 해랑이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펼쳐갔다. 우현영의 시선 역시 해랑의 손으로 향했다. 해랑이 손가락을 전부 펼치자 그 안에 있던 것이 드러났다. 천 조각이었다. 사당에서 해랑이 들고 온 비단 천 조각.

“그게 무어냐?”

우현영이 묻자 해랑은 잠시 고민했다. 허나 적당히 걸러 이야기 해야겠단 생각에 핏자국 같은 것을 본 얘기는 뺀 채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해서 이 옷 조각이 걸려 있기에 들고 왔습니다.”

“…….”

“아버지. 이 옷 조각이 왜 거기에 걸려 있었을까요? 이 집안 사람들 모두가 사당에 가지를 않았을텐데.”

옷조각을 보며 말하는 해랑을 보는 우현영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저 옷의 주인이 누구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 사실을 해랑에게 말 할 수는 없었다. 아니, 해랑 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아마… 오래전에 내가 사당 주변을 정리하다가 걸려 찢어진 모양이다.”

우현영의 말에 해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층 더 알 수 없다는 표정의 해랑에 우현영은 마음이 초조해져갔다.

“별로 신경쓰지 않아도 되니 갖다 버리거라.”

해랑은 예, 하고 짧게 대답하였다. 대답과는 반대로 옷 조각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다식은 찻잔을 들어올리는 우현영을 보니 더는 대화하기가 어려우리라 판단한 해랑은 몸을 일으켜 인사를 올렸다. 그대로 우현영의 방을 빠져나가려던 해랑은 아까부터 계속해서 궁금했던 것을 묻고자 걸음을 멈추었다.

“헌데, 아버지.”

“왜 그러느냐?”

태연히 자신을 보는 아버지에 해랑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티내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이 천은 우리 집안에서 이용하는 상단의 것이 아닌 듯 합니다.”

찻잔을 쥐고 있던 우현영의 손이 다시 미세하게 떨려오기 시작했다.

“선물받은 것들도 있지 않느냐?”

“그렇긴 하지요. 하지만,”

“해랑아.”

“……예.”

“지금 내 몸이 피로하니 그만하고 나가보거라.”

우현영과 해랑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한참을 말없이 서로를 바라만 보던 두 사람이었다. 먼저 풀어낸 것은 해랑이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방을 나가는 해랑의 뒷모습을 보던 우현영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뱉어내었다. 긴장이 탁 풀림과 동시에 손이 심하게 바들거렸다. 사실 두려웠다. 해랑이 모든 것을 알게 될까봐. 안 그래도 사헌부를 개혁하고자 제 형을 내친 아이인데, 과거의 일들을 알게 되는 순간 이 집안 전체를 완전히 뒤엎어 버릴까 무서웠다. 우현영은 떨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것일까. 과거는 마치 늪처럼 현재의 자신을 끌어 당기는 듯 했다. 과거의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순간, 우현영이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었다.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극심한 통증에 우현영의 손이 다급히 서랍을 열어 약 하나를 꺼내었다. 얼른 약을 삼킨 우현영은 차츰 통증이 가라앉는지 숨을 골랐다. 식은 땀이 맺힌 이마를 손등으로 문지르고는 눈을 감았다.

“죄가 무거우니 빨리 데려가시려는가…….”

자조적인 웃음을 짓는 우현영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친구였던 정수환이 그리 된 이후로 생긴 증상이었다.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갑자기 찾아왔다. 약을 먹으면 다행히 호전되었지만 증상 자체가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요즘은 통증이 나타나는 주기가 짦아져가고 있었다. 만약 이러다 급사라도 한다면……. 우현영은 수심에 쌓여 멍하니 잔잔한 찻잔 속만 들여다 보았다.

*

여느 때처럼 석현은 형민을 보필하고 있었다. 형민이 온갖 업무에 매달려 일을 처리하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석현은 문득 아버지를 떠올렸다. 어릴 적,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나라를 위해 하나라도 더 보탬이 되어야 한다며 밤 늦은 시간까지 일을 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항상 나라를 위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분이셨던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가 역모죄로 돌아가실 거라고는 어린 시절의 석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아직도 아버지를 생각하면 속이 뒤집히고 주체할 수 없는 화가 치민다. 석현은 눈을 질끈 감고 화를 억누르려 애썼다. 마음이 차분해지는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석현이 그러는 동안 형민은 잠시 붓을 내려놓았다. 잠깐 쉬려는 듯 형민이 기지개를 폈다.

“좀 쉬어야 겠다. 유 내관, 내 잠시 바깥 산책 좀 하고오리다.”

“예, 전하. 함께 나가시지요.”

“아니, 바로 앞에서 바람만 쐬고 올 것이니 석현이랑 둘이서만 다녀오겠다.”

“예. 그리 하시지요. 전하.”

형민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석현은 얼른 형민을 쫓아나섰다. 마침 날이 좋기에 형민은 뒷짐을 진 채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석현도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좋은 날씨를 만끽하였다. 그러다 이번엔 어머니와 여동생 생각이 났다. 같은 하늘 아래에 있지만 어디에 있는지도, 어떻게 지내는지도 전혀 모르는 어머니와 어린 누이였다. 자신의 신분이야 돌아왔지만 어머니와 누이의 신분까지는 돌아 올 순 없을까. 석현은 잠시 고민하다 형민에게 물었다.

“전하.”

“왜 그러느냐?”

“저… 제 신분이 돌아왔다 한들 제 어머니와 동생의 신분까지 돌아올 수는 없겠지요?”

석현의 말에 형민이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어려운 일이지. 자네의 공이 역모죄까지 없던 걸로 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저지르지도 않은 역모죄로 자신의 가족들이 고통받아야 하는 이 상황이 석현에겐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하지만 그도 잠시, 석현의 머릿속에 불쑥 치고 들어오는 생각이 있었다.

“허면, 역모죄가 사라지면 가능한 것입니까?”

형민이 황당한 듯 석현을 바라보았다. 이게 웬 허무맹랑한 말인가 싶었다.

“무슨 말인가, 그게?”

헌데, 석현의 두 눈을 보는 순간 형민 역시 진지한 얼굴이 되어 석현을 보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결연한 석현의 눈빛이기에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제 숙부가 역모를 일으키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아낸다면,”

석현의 말에 생긴 잠깐의 틈 사이로 형민은 마른 침을 삼켰다. 석현의 말에 형민의 온 신경이 곤두 섰다.

“증거를 찾아 전하께 가져온다면 저희 집안은 역모죄에서 벗어나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차분히 말하고 있지만 속에선 뭔가 끓어오르는 듯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말하는 석현이었다. 흔들림없이 자신을 보며 말하는 석현에 형민은 직감했다. 석현이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을. 자신이 그토록 알고 싶었던 진실을 어쩌면, 석현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작품후기]

벌써 51화네요 허허

긴 글 함께 해주셔서 넘 감사합니다 !

재미도 있어야할텐데..ㅎ....

노력하고 있지만 쉽지는 않네요 ㅎㅎ

그래도 최선을 다해 끝까지 잘 써보겠습니닷

늘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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