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0/64)

폭풍속으로

형민은 석현에게서 좀 더 끄집어내고 싶었다. 석현을 조금만 자극한다면 뭔가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억울한가?”

형민의 물음에 석현이 눈썹을 꿈틀댔다. 허나 곧 잠재우고는 고갤 숙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솔직한 심정으론… 그렇습니다.”

누군가 옆에 있었다면 이렇게 얘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말을 듣기라도 한다면 주위에선 펄쩍 뛸 것이 명확하였다. 이미 역모죄의 낙인이 찍힌 자에게서 억울하단 말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용납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석현은 꽤나 단호하게 말하였으나 속으론 형민을 살폈다. 역모죄의 목표는 결국 왕이 아니던가. 억울하다 말한다면 가장 분노할 사람은 바로 왕인 형민이기에 석현은 살짝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석현이 형민을 보지 못하고 있는 사이, 형민은 먼 곳을 내다 보고 있었다. 복잡한 심정으로 가득 찬 속을 달래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래. 그렇겠지.”

의외로 부드럽게 말하는 형민에 석현이 고갤 들었다. 형민의 입가엔 씁쓸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형민은 회한에 젖은 듯 보였다. 석현은 조용히 그런 형민의 곁에 서서 같은 방향을 내다 보았다. 말없이 그렇게 서 있자 잠시 후, 형민이 먼저 말을 꺼내었다.

“내가 왜 역모죄로 처벌받았던 자네를 내 곁에 두었는 줄 아는가?”

“…모르옵니다.”

“왕이란 자리는 모두의 말을 들어줘야 하지만 모두의 말을 믿어서는 안 되는 자릴세. 그래서 가능한 일이었지.”

아리송한 형민의 말에 석현은 생각에 잠겼다. 질문과는 동 떨어진 듯한 답변에 고개를 갸웃하던 것도 잠시,

“! 허면……?”

말뜻을 알아차린 석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형민을 보았다. 형민은 자신을 보는 석현에게 옅게 웃어보이고는 고갤 끄덕였다.

“그래. 난 수 많은 대신들이 대역죄인들을 처형해달라는 청을 들어주긴 했지만 그들이 대역죄인이라는 말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지.”

“전하……!”

“자네의 부친과 숙부 모두, 내가 믿고 있던 소수의 훌륭한 대신들이었어. 내 입으로 그 분들을 처형하라고 명하는 건… 너무도 괴로운 일이었다.”

담담히 말을 이어나가는 형민에 반해 석현은 온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처음으로 자신의 가족들을 믿어주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전하께서. 석현은 치미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할까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석현의 눈시울은 금세 붉어져갔다.

“미안하다. 네 가족들을 지켜주지 못해서.”

“아뇨, 아닙니다. 전하.”

“그러기엔 나의 힘이 아직도 많이 부족하구나.”

한숨섞인 형민의 말에 석현은 노의석과 해진의 얼굴을 떠올렸다. 마치 비웃는 듯한 그들의 얼굴에 석현의 속에선 화르륵 불이 올랐다. 당장이라도 찾아가 찢어 죽이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석현은 화를 억눌렀다. 그들을 천천히 옥죄고 무너뜨려 결국 처절히 망가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을 살며 고통받았으면 싶었다. 마음을 다 잡은 석현은 서늘한 눈으로 형민에게 물었다.

“헌데 전하. 제 숙부께서는 부관참시를 당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내 참형을 명했건만 이미 돌아가셨기에 부관참시를 했다고 들었다.”

“사인을 아십니까?”

“정기혁을 잡으러 가보니 이미 자살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형민의 대답에 석현이 피식 웃었다. 조소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미심쩍은 얼굴의 형민이 석현을 바라보자 석현이 입을 열었다.

“사실이 아닙니다.”

“뭐?”

“제 숙부님은… 자살한 것이 아닙니다.”

전하께 진실을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기회를 놓칠세라 석현은 주변을 둘러본 뒤 형민에게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갔다. 형민의 귀에 석현의 말들이 흘러들어오자 형민의 눈이 점점 커져갔다. 믿을 수 없는 말들이었다. 이제껏 알고 있던 사실들이 완전히 뒤집혀버리는 순간이었다.

“그게… 그게 정녕 사실이냐?”

형민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석현은 목이 매여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기가 막힌 듯 형민이 허, 하는 소리를 내었다. 그러더니 이내 괴로운 듯 두 눈을 감고 미간을 찌푸렸다. 한참을 그러던 형민은 깊게 한숨을 뱉으며 원래의 얼굴로 돌아왔다. 그리곤 천천히 석현을 마주보고는 웃어보였다. 그게 꽤 힘겨워보여 석현은 마음이 아팠다.

“석현아.”

“예, 전하.”

“앞으로 네가 해야 할 일이 많을 수도 있겠구나.”

“…무엇이든 분부만 내려주십시오.”

석현이 한 쪽 무릎을 꿇으며 앉아 대답하자 형민도 무릎을 굽혀 앉았다. 그리고는 석현의 어깨 위로 두 손을 얹었다.

“그들은 분명 한 번 더 나를 칠 것이다. 준비 단단히 해두거라.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예, 전하.”

석현은 주먹을 불끈 쥐며 강하게 대답하였다. 형민은 만족스러운 듯 석현의 어깨를 다독였다. 석현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빨리 그 순간이 오길 바랐다. 위기를 기회로 바꿀 그 순간이 오기를.

*

해랑은 더 심란해진 마음을 안고 궁 안의 거처로 돌아왔다. 옷 조각은 버리지 않고 손에 꼭 쥔 채로. 아무리 선물을 받았다고 한 들 이런 비단을 사용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도, 또 선물받은 비단들도 대부분 집안에서 늘 애용하는 상단의 것이 대부분이라고 어머니가 말씀하셨던 것도 해랑은 잘 기억하고 있었다. 게다가 아버지는 흰색 비단은 거의 입지도 않으셨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러 가지로 뭔가 찜찜했다. 옷 조각만 있었다면 이 정도로 깊게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혈흔까지 발견한 이상 그냥 넘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생각에 빠져있던 해랑은 창 밖을 확인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형민에게 가야 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일어나서도 옷 조각을 바라보며 고민하던 해랑은 결국 제 손에 꼭 쥔 채 어전으로 향했다.

어전으로 가보니 석현은 없었다. 아마 근무 시간이 아닌 듯 했다. 해랑은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형민에게 국정에 대한 보고를 시작했다. 해랑이 물 흐르듯 보고를 마치자 형민은 흡족한 웃음을 띄며 해랑의 수고를 치하했다. 보고를 마친 해랑은 형민에게 인사를 올리고 돌아가려는 듯 했다. 하지만 형민의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던 해랑이 다시 말을 꺼냈다.

“저….. 전하.”

“왜 그러느냐?”

“송구스럽지만… 전하께 긴히 한 가지 청을 올려도 되겠사옵니까?”

“무엇이냐? 말해보거라.”

형민이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해랑을 보았다. 해랑은 말하고나서도 한참을 쭈뼛거리더니 이내 손을 쑥 내밀었다. 내민 손을 천천히 펴자 그 안에 구겨져 있던 비단 조각이 드러났다.

“웬 비단 조각이더냐?”

형민이 고갤 갸웃거리며 묻자 해랑은 다시 엎드려 자세를 낮추며 말했다.

“이 비단을 파는 상단을 찾고 싶습니다.”

“상단을?”

“예. 어느 상단인지, 어디에 물건을 판매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형민은 흥미로운 듯 해랑이 내민 비단 조각을 집어들었다. 조각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형민은 씨익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그래. 내 사람을 시켜 알아보도록 하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해랑 역시 긴장되어있던 얼굴을 펼치며 환히 웃었다. 앞으로 제게 닥칠 풍파는 예상치 못한 채로.

*

낮에 형민과 이야기를 나눈 후, 석현은 형민에게 요청했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여 심야에도 자신이 와서 침소를 지키게 해달라고. 석현이 피로할까 걱정하는 형민을 설득시켜 결국 야밤에도 근무하기로 한 석현이 형민의 침소에 도착했다. 유난히 서늘한 날씨에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형민의 침소에 도착한 석현은 밤 근무를 위해 잠시 취침하러 온 사이 해랑이 왔다갔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딱 맞춰 자리를 잘 피해준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함과 동시에 씁쓸함이 든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잔뜩 상처받은 얼굴로 멀어지자 말하던 해랑의 얼굴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이 밤에 잠은 잘 자고 있을지, 끼니는 잘 챙겨먹고 있을지 별 걱정이 다 들었다. 자꾸 해랑에 대한 생각이 파고들자 석현은 고개를 털었다.

그 때였다. 갑자기 스산한 기운이 석현을 스쳤다. 이질적인 기운을 감지한 석현은 자세를 낮추어 조심스럽게 침소 안쪽으로 향하였다.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으며 침소 쪽으로 향하던 석현은 빠르게 스치는 그림자 하나를 발견했다. 워낙 순식간이라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놓쳤을 테지만 석현은 절대 놓치는 법이 없었다. 석현은 그림자가 사라진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그림자는 형민이 자고 있는 침소로 향하고 있었다. 석현이 빠르게 달려 먼저 침소 앞에 서서 주변을 경계했다. 침소를 지키던 군사들이 당황하여 소란스러워지던 그 때, 뭔가 석현 쪽으로 날아왔다. 순식간이었다. 석현의 바로 왼쪽 귀를 스쳐 날아온 것이 왕의 침소 기둥에 꽂혔다. 석현이 민첩히 움직혀 간발의 차로 피하지 않았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화살 촉 바로 뒷부분엔 종이가 묶여 있었다. 석현은 화살을 뽑아 빠르게 종이를 손에 넣었다. 그도 잠시, 그림자가 빠르게 사라졌다. 석현이 재빠르게 뒤를 쫓았으나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석현이 다시 침소로 돌아왔을 땐, 밖에서 일어난 소란으로 형민이 깬 모양이었다. 밖에 나와 자초지종을 묻던 형민은 석현이 오는 것을 보고 석현에게로 향했다.

“어찌 된 일인가?”

“누군가의 침입이 있었습니다. 여럿은 아니고 한 명이었습니다. 전하의 침소를 노리는 줄 알았으나 목적은 따로 있었습니다.”

“침입의 목적이 무엇인가?”

“이 것입니다.”

석현은 형민에게 손을 내밀어 잘 접힌 종이를 내밀었다. 화살에 매여졌던 종이였다. 형민은 기분 나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채 종이를 잡아 펼쳤다.

[작품후기]

늙 읽어주시는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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