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속으로
종이를 펼치는 순간, 형민과 석현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펼쳐진 종이에는 피처럼 검붉은 색의 글씨가 쓰여있었다. 글의 내용은 더욱 가관이었다.
[태양이 저물고 달이 떠오를 것이다.]
마지막 글씨를 읽은 형민의 입에서 기가 막히다는 듯 탄식이 뱉어졌다. 형민의 두 손은 떨리고 있었다. 치미는 감정을 삭히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분을 이기지 못하고 형민은 종이를 마구 구겼다. 이는 틀림없이 왕을 모욕하는 내용이었다. 태양은 곧 왕을 뜻하는 것이기에 태양이 저문다는 것은 왕조가 쇠퇴한다는 뜻이라고 밖엔 해석할 길이 없었다. 허면 달이 가리키는 것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노의석? 아니면 우해진? 형민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종이를 석현에게 건넸다.
“아무래도 알아 볼 필요가 있을 것 같군. 내일부턴 내 호위보다는 이 종이와 연관된 자들을 조사하거라.”
“예, 전하.”
피곤한 기색의 형민이 침소로 들어가자 석현은 구겨졌던 종이를 다시 펼쳐보았다. 기분 나쁜 핏빛 글씨에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석현도 당장에 구겨 던져버리고 싶었으나 그 종이를 잘 접어 옷 안쪽에 넣었다. 아무래도 일이 시작된 듯했다. 그들이 움직인게 분명하다. 석현은 혹시 모를 재침입을 경계하며 주변을 살폈다.
*
시작된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놀랍게도 새벽에 형민에게 보내진 문장이 그대로 도성 곳곳에 붙었다. 새벽 순찰을 도는 병사들을 잘도 피해 붙인 모양이었다. 백성들은 당연히 그 종이 앞에 모여들 수 밖에 없었다. 양반이나 평민이나 한데 모여 그 글을 읽고 해석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글을 읽지 못하는 이가 무어라 쓰여있는지 좀 알려달라 외치면 근처에 있던 양반이나 중인이 읽어주는 광경은 흔했다. 내용을 전달받은 이들은 해가 무엇이고 달이 무엇인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양반들이야 금세 알 수 있었다.
“태양이야 당연히 주상전하 아니겠는가?”
잘난체하듯 거드름피우며 말하는 한 양반에 나머지 사람들이 고갤 끄덕이며 동의했다. 나라에 태양이라 불릴 사람은 단 한 분, 왕 뿐이었다. 그렇담 대체 달은 누구란 말인가?
“그럼, 달은 누구인지 아십니까?”
어떤 이가 다시 묻자 잘난체하던 양반은 이번엔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 역시 잘 모를 수 밖에 없었다. 당사자인 형민 조차 짐작하질 못했으니까.
“그래서… 수거한 종이는 몇 장이나 되는가?”
형민이 심각한 얼굴로 유 내관에게 물었다. 유 내관은 걱정스런 얼굴로 형민을 살피며 수거된 종이를 내밀었다. 한 눈에 봐도 꽤 많은 양이었다. 형민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대략 쉰 장이 넘습니다. 전하.”
“하!”
형민이 날카롭게 웃으며 종이들을 노려보았다. 왕의 침소를 노리는 척하며 시선을 잡아두고 밖에서 더 한 짓을 꾸미고 있었다니. 미처 생각지 못한 자신을 탓하다가도 이내 이런 괘씸한 짓거리를 한 자들을 찾아내고 싶었다. 형민은 종이를 노려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겨 침묵을 지키다 이내 입을 열었다.
“모든 대신들을 어전으로 모이게 하라.”
*
어전에는 갑작스럽게 불려진 대신들로 가득 했다. 자신들이 왜 불렸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모두가 알았다. 아침에 붙은 글귀에 대한 얘기는 순식간에 도성 안 모든 이들에게 퍼졌기 때문이었다. 대체 누가 그 종이를 붙였을까에 대한 얘기도 잠시, 달이 가리키는 것이 대체 누구인지가 그들의 최대 관심사였다. 그 얘기로 가장 시끄럽던 순간, 갑자기 어전 안이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어전 입구에 들어선 해랑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해랑을 싸늘히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어전에 들어올 수 없는 천민이 들어오기라도 한 듯 기분 나쁜 티를 내었다. 해랑은 제게 내리꽂히는 모든 시선들을 온 몸으로 받아내면서도 차분한 얼굴이었다.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천천히 걸어서 자신의 자리에 섰다. 우현영만이 그런 자신의 아들을 안쓰러이 보고 있었다. 해랑이 제 자리에 서고 나서야 다시 어전은 대신들의 떠드는 소리들로 가득 찼다. 그리고 잠시 후, 어전 안으로 형민이 등장했다. 석현 역시 형민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대신들은 모두 허리 숙여 형민에게 인사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인사였으나 대신들의 표정엔 공손함 대신 불손함이 가득했다.
“대신들은 모두 들으라.”
형민은 바로 자리에 앉지 않고 선 채로 말문을 텄다. 덕분에 대신들은 허리를 채 펴기도 전에 다시 상체를 숙여야 했다.
“오늘 아침에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다들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오.”
단도직입적으로 시작한 형민의 말에 몸을 일으킨 대신들은 괜히 당황하여 시원찮은 목소리로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형민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이 안에서는 그런 이가 없다고 믿는 바이나,”
형민의 날카로운 시선이 어전 안의 대신들을 쭉 훑었다. 대부분의 대신들은 혹여 자신이 의심이라도 받을까 두려웠는지 한껏 몸을 움츠렸다. 당당히 몸을 펴고 선 자는 해랑과 해진, 그리고 노의석 셋 뿐이었다.
“혹여 범인으로 색출되는 이는 극형을 면치 못 할 것이다.”
“…예, 전하.”
떨떠름한 대답이 흐르고 형민은 언짢은 기색을 표하며 자리에 앉았다. 대신들은 서로 눈치를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해랑은 형민이 걱정되었다. 안 그래도 전부터 왕좌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인해 시달리던 형민이었다. 잠깐 잠잠하다 싶어 평온함을 찾아가던 형민이 다시 불안해 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그늘진 형민의 얼굴을 가만히 보던 해랑은 제 얼굴로 꽂히는 또 다른 시선에 고갤 돌렸다. 느껴지는 시선 쪽으로 고갤 틀자 그 곳엔 해진이 있었다. 해랑은 미간을 살짝 구겼다가 풀며 해진을 보았다. 해진은 무표정하게 해랑을 보더니 입꼬리를 죽 늘리며 기분나쁜 웃음을 지어보였다. 해랑의 미간이 다시 구겨지려는 찰나, 해진이 형민을 향해 몸을 틀고는 소리를 내었다.
“전하.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사옵니다.”
꽤나 여유롭고 부드러운 음성이 이 곳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해랑은 그 부조화에 소름이 끼쳐 몸을 떨었다. 석현은 해진을 죽일 듯 노려보았고 형민 역시 불쾌하였으나 티내지 않고 해진의 말을 들었다.
“그래. 무엇인가?”
해진은 한 걸음 더 나와 말을 이어갔다.
“소신은 내일이면 사헌부를 떠나게 됩니다. 허나 아직까지는 사헌부에 몸 담고 있는 바, 이 소문의 근원지를 알아 내고자 합니다.”
해진의 말에 석현과 해랑이 동시에 눈을 마주했다가 해진을 보았다. 의뭉스러운 해진의 표정에 어딘가 불안하던 순간, 해랑의 코 끝에 이상한 냄새가 스쳤다. 미약하지만 분명 이 곳엔 없던 냄새였다. 기분이 이상해진 해랑은 주변 이들을 둘러 보았으나 대신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다.
“헌데 전하. 달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직 알지 못했다.”
냄새는 조금씩 강해져갔다. 해랑은 무언가 잘못 되었음을 깨달았다. 제 예측이 빗나가지 않았다면 이건 틀림없이…….
“달오름이라는 걸 알고 계십니까?”
“그건 음인이 양인의 해오름과 같이 겪는 것 아닌가?”
“음인은 예전부터 달로 비유되어 왔습니다. 워낙에 희귀한 존재이면서도 자신을 숨겨야만 하는 존재이지요.”
“……그래서?”
“희귀한 존재이기에 신비한 음인을 따르고 음인의 지위를 높이고자 하는 이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특히, 가장 높은 권력을 가까이 두면 더더욱 빠르게 지위를 높일 수 있겠지요.”
그 순간, 해진이 느리게 고갤 돌려 해랑을 보았다. 동시에 어전 안이 이상한 냄새로 가득찼다. 해랑의 두 눈이 커지다 숨이 턱 막히며 무릎이 꺾였다. 틀림없는 해진의 체향이었다. 일부러 자신의 체향을 풀어 해랑이 음인이라는 것을 보이려는 것이 분명했다. 양인인 이들에겐 그저 시원한 향으로 느껴졌으나 해랑은 그렇지 못했다. 해랑은 무어라 말하고 싶었으나 말 한 마디 제대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석현 역시 놀라 해랑을 보았다. 위태로워 보이는 해랑에 석현이 뛰쳐나가려던 그 때였다.
“아무래도 음인이 하나 있는 모양입니다.”
해진이 저벅저벅 걸어가 해랑의 앞에 섰다. 더 짙어지는 냄새에 해랑이 결국 뜨거운 숨을 뱉으며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주저 앉았다. 식은 땀으로 온 몸이 젖었고 어떻게든 잡으려는 체향은 자꾸만 흘렀다. 형민은 놀라 몸을 일으켜 해랑을 보았고 우현영은 그렇게 숨기려고 했던 사실이 만 천하에 공개되는 순간 정신을 잃었다. 나머지 대신들 역시 해랑을 향해 고갤 돌렸다.
“만약 우해랑이 맞다면 우해랑을 간관 자리에서 탄핵시켜도 되겠습니까?”
“뭐라?”
“제 마지막 소임은 다 하고 떠나고 싶습니다, 전하. 부디 허해 주시옵소서.”
느긋하게 말하고는 제 앞에 무너진 해랑을 내려다 보던 해진은 유유히 자리로 돌아갔다. 형민은 갑자기 일어난 이 상황에 넋을 잃었다. 해랑이 음인일 줄은 꿈에도 몰랐으며 만약 우해진이 탄핵을 밀어 붙인다면 순식간에 진행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사헌부는 그만큼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몸에 힘이 쭉 빠진 형민은 자리에 털썩 앉았다. 형민이 혼란에 빠진 사이, 어전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모든 대신들이 해랑을 향해 손가락질 하기 시작했다. 음인은 해진의 말대로 이 나라에 거의 없는 존재였다. 사람들은 음인을 불길한 존재로, 혹은 미천한 존재로 여기기도 했다. 때문에 해랑에게 비난의 화살이 돌아가는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게다가 해진이 해랑을 범인으로 지목하기까지한 이 순간, 해랑이 끌어내려지는 건 순식간일 것이다.
해랑은 고통스러운 몸을 끌어 안은 채 아랫입술을 있는 대로 물고 있었다. 울지 않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괴로워도 이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서든 참고 버텨 무너지지 않으려 애를 썼다. 세게 문 입술에서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해랑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자꾸 거칠게 튀어나오는 호흡을 어떻게든 잡아보려고 애를 썼다. 정신이 아득해져갔다. 그래, 차라리 기절하면 나을지도 몰랐다. 멀어지는 정신에 몸이 옆으로 기우뚱하는 순간이었다. 기울던 몸이 누군가의 팔에 잡혀 멈추었다. 방금까지 코를 찌르던 악취가 갑자기 시원한 박하향으로 바뀌었다. 해랑이 힘겹게 눈을 떠보니 눈 앞엔 석현이 있었다. 석현은 형민에게 허락 받을 여유따위는 없었다. 고통스러운 해랑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기에 그대로 박차고 나와 해랑을 안았다. 석현은 해랑을 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해진을 보고 섰다. 해진이 무표정하게 석현을 보았고 석현 역시 해진을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석현은 살짝 입꼬리를 비틀어 웃어보이고는 해랑을 안은 채 빠르게 자리를 떴다.
[작품후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