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속으로
어전을 벗어난 석현은 해랑의 임시거처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해랑의 열이 차츰 내려가고 있었다. 해진이 뿌린 체향 속에서 벗어난 덕이었다. 비열하기 짝이 없는 해진의 행동에 석현은 치가 떨렸다. 반드시 복수하리라 다짐하면서 석현은 해랑을 꼭 안은 채 달렸다. 사람이 없는 외곽길로 달리던 와중에 갑자기 해랑이 몸을 들썩이며 숨을 토해냈다. 양인의 체향을 훅 들이킨 해랑의 몸 속이 완전히 균형을 잃은 듯 했다. 석현의 마음이 급해졌다. 빨리 약을 먹여야 해랑의 몸이 원래대로 돌아 올 것이다. 어금니를 꽉 문 석현이 땅을 박차고 앞으로 나아가려는데 축 늘어졌던 해랑의 손이 석현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아직 손에 힘이 들어가 있지는 않았다. 겨우 석현의 옷자락을 붙든 해랑에 석현은 걸음을 멈추었다. 한참동안 숨을 고르던 해랑은 느린 움직임으로 석현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이제, 알아서 갈게.”
비척이는 몸으로 기어이 석현의 품에서 벗어난 해랑은 몇 걸음 가다 결국 주저 앉아버렸다. 석현이 달려가 해랑을 다시 안으려 했으나 해랑은 석현을 애써 밀어냈다. 답답하면서도 속상해진 석현은 해랑과 마주 앉았다.
“도련님.”
“…….”
“가서 약부터 드신 후에 밀어내시지요. 그 땐 밀어내지 않으셔도 알아서 멀어지겠습니다.”
아픈 말을 하면서도 부드럽게 흐르는 석현의 음성에 해랑이 고갤 들어 석현을 보았다. 석현은 웃고 있었다. 미안함, 안쓰러움, 애정 그 모든 것이 뒤섞인 채로. 다 풀린 해랑의 눈가에 그제야 눈물이 고였다. 한참을 참아내던 울음이 석현의 따뜻함에 쏟아지고야 말았다. 석현은 담담히 해랑을 안아 다독였다.
“힘들면 우셔도 됩니다. 운다고 해서 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흐흑, 난, 나는…….”
“예. 압니다. 도련님은 음인이기에 귀하고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들이 비난할 상대가 아니란 말입니다. 오늘 일의 범인은 더더욱 아니고요.”
해랑이 하고팠던 말들을 석현이 차분히 늘어놓자 해랑은 더욱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속에 쌓였던 울분이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꺽꺽거리며 울어대는 해랑을 석현은 꼭 끌어안았다.
“전하께서도 도련님을 믿어주실 겁니다. 그리고 제가… 도련님의 뒤에서 힘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울음은 더욱 거세졌고 석현의 손이 조심스럽게 해랑의 뒷머리를 감쌌다. 그리고는 방금까지만해도 따뜻했던 두 눈을 매섭게 빛냈다.
‘꼭 복수 할 것입니다. 지켜 보십시오.’
*
해랑의 임시거처에 당도한 석현은 안고 있던 해랑을 침상 위에 눕혔다. 하도 울어 기진맥진한 덕분인지 해랑의 상태는 많이 양호해졌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석현은 약이 있던 자리를 찾았다. 환약 한 조각을 꺼내들은 석현은 침상에 걸터 앉아 누운 해랑의 입술을 살짝 벌렸다. 말라 비틀어진 입술 위엔 피딱지가 얹어있었다. 석현은 더욱 조심스럽게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열린 입술 새로 석현의 손가락이 천천히 해랑의 입 안으로 들어갔다. 해랑의 뜨거운 입 안이 손 끝으로 그대로 느껴졌다. 해랑의 말캉한 혀 위로 환약을 올려둔 뒤 살살 손가락을 빼내던 석현은 해랑의 혀 끝이 손가락을 스치자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겨우 약을 먹이고 나니 해랑은 금세 잠이 오는 모양이었다. 몽롱한 눈으로 석현을 가만히 보던 해랑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고마워’라고 말했다. 그 뒤 해랑은 까무룩 잠이 들었다.
“부디 좋은 꿈 꾸십시오. 도련님.”
석현은 해랑의 젖은 이마를 손바닥으로 닦아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전의 상황이 어찌 돌아갔을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빠르게 달려 어전에 도착한 석현의 눈엔 이미 텅 비어버린 어전만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어전 중앙, 용상에 홀로 앉은 형민이 있었다. 석현은 빠르게 형민의 앞으로 달려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석현아.”
형민의 허가없이 멋대로 튀어나간 석현은 형민에게 용서를 구하고자 했다. 안 그래도 정신이 없고 혼란스러웠을 형민을 더 힘들게 했을 것 같아 죄스러웠다. 석현이 형민에게 머리를 조아리자 의외로 담담한 형민의 목소리가 석현을 불렀다. 석현이 고갤 들어 형민을 보니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형민의 얼굴이 보였다. 한 바탕 난리를 치던 대신들로 인해 고된 모양이었다.
“예, 전하.”
“너는 해랑이가 음인인 것을 알고 있었느냐?”
형민의 질문에 석현이 살짝 당황하였으나 곧 침착히 대답했다.
“예, 알고 있었습니다.”
대답을 들은 형민은 어떠한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는 눈을 감은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런 형민을 지켜보던 석현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전하께선… 간관 나으리가 정말 그런 일을 벌인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석현의 말에 형민이 가만히 있다 실소를 터뜨렸다. 그리곤 감았던 눈을 떠 석현을 보았다.
“말하지 않았느냐? 모두의 말을 들어주기는 하나, 모두의 말을 믿지는 않는다고.”
안도하는 석현의 얼굴에 형민이 가볍게 웃어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형민의 표정은 금세 어두워져갔다. 이마를 매만지며 다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던 형민은 용상 아래에 앉아 있는 석현에게 말을 건넸다.
“아무래도… 오후가 되면 해랑이에 대한 탄핵절차가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예?”
“대신들이 모두 우해진 그 놈의 말만 믿고 우르르 따라 나섰네. 이제 사헌부에서 움직여 탄핵을 진행하겠지.”
“말도 안 됩니다. 이는 풍문탄핵과 다를 바 없지 않습니까?”
“그것이 가능한 곳이 사헌부 아니겠는가?”
“허면, 간관 나으리는 어찌 되시는 겁니까?”
“탄핵을 받으면 직무수행이 정지된다.”
석현은 형민의 말에 눈 앞이 아찔해졌다. 직무수행이 정지된다는 것은 곧 사헌부를 개혁하는 일에 지장이 생기는 것이다. 우해진이야 내일이면 사헌부에서 나오겠지만 이미 상정된 탄핵은 그대로 진행될 것이 뻔했다. 석현이 해야 할 일이 명확했다. 해랑에 대한 탄핵을 막아야 한다.
“전하. 당분간 새벽엔 소신이 전하의 곁을 제대로 지키지 못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석현의 말을 이해하려는 듯 형민이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더니 이내 옅게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그래. 상관없다.”
“찾아내겠습니다. 탄핵이 아닌 완전히 파면 되어야 할 이가 누군지.”
*
해랑은 해가 저물 즈음에야 정신이 들었다. 겨우 몸을 일으키고 제 머리맡에 있는 물 한 잔을 마시고 나서야 오전에 있던 모든 일들이 다시 눈 앞에 스쳐갔다. 그야말로 끔찍했다. 모든 이들의 앞에서 형인 해진으로 인해 달오름이 오고 무어라 말할 틈도 없이 범인으로 몰렸다. 심지어 아버지는 눈 앞에서 쓰러지시지 않았는가. 모두가 힐난하며 손가락질 해대던 모습이 아른거려 괴로웠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건, 쓰러지던 순간 저를 안아 여기까지 옮겨주던 석현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거리를 두자고 했었건만 결국 힘들 때 곁에 있어주는 건 석현 뿐이었다. 해랑은 제 입 속에 약을 넣어주던 석현의 손 끝을 느끼며 멍하니 앉아있다 이내 고개를 털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힘겹게 밀어내놓고선 그리워하는 꼴이 해랑 스스로 우습게 느껴졌다. 지는 해를 바라보던 해랑은 문득 형민 생각이 났다. 누구보다 당혹스러웠을 형민이 걱정되었다. 해랑이 옷을 챙겨입고 형민에게로 향하려 문을 여는 순간, 문 앞에 선 석현에 해랑은 놀라 뒷걸음질 쳤다. 석현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는지 어깨를 움찔거렸다.
“어, 어쩐 일이야?”
“그게… 전하께서 부르시기에…….”
“아, 응. 안 그래도 지금 가려고.”
“그럼 함께 가시지요.”
그렇게 어색한 동행이 시작되었다. 어색한 공기만큼 어색한 발걸음에 해랑은 하마터면 발이 꼬일 뻔하기도 했다. 아무렇지 않게 저벅저벅 걸어가는 석현이 야속할 지경이었다. 한참을 말없이 걷던 중 참다 못한 해랑이 먼저 석현에게 말을 던졌다.
“아깐… 고마웠어.”
당시엔 기운이 없어 제대로 말하지 못한 것이 안 그래도 마음에 걸렸던 터였다. 해랑이 민망한지 시선은 딴 데다 돌린 채로 말하자 그런 해랑을 보며 석현이 미소지었다.
“아닙니다.”
짧게 무심히 답하는 석현에 괜히 더 심통이 나는지 해랑은 걸음을 재촉했다.
“빠, 빨리 가자!”
해랑이 성큼성큼 나아가는 뒷모습을 보며 석현은 웃을 수 밖에 없었다. 허나 곧 있을 상황을 떠올리자니 마음이 무거웠다. 해랑이 크게 상처받을 것이 분명했다. 석현은 한참을 애틋한 눈으로 해랑을 바라보다 멀어져가는 해랑의 뒤를 얼른 쫓았다.
해랑은 다행히도 저를 반기는 형민을 보고 안도했다. 물론 형민의 낯빛이 그리 좋아보이지는 않았으나 오전보다는 나아보였다. 헌데 이상하게도 형민은 해랑을 불러놓고선 쉬이 입을 열지 않았다. 뭔가 생각은 속에 가득한 듯 보였으나 말을 꺼내지 않았다. 조금 초조해진 해랑이 마르는 입술을 적시며 형민의 눈치를 보았다. 말없이 가만히 있던 형민은 해랑이 먼저 말을 꺼내기 직전 쯤에나 입을 열었다.
“…너무 놀라지 말고 듣게.”
“예, 전하.”
겨우 한 마디 들은 해랑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 다음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는데 또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는 형민이었다. 해랑은 또 불안하여 연신 눈알을 굴렸다. 고개를 들어 형민을 보려고 하는 순간, 형민이 말을 이었다.
“자네의 탄핵이 진행될걸세.”
“…예?”
“우해진의 말을 믿은 대신들이 자네의 탄핵을 요구했고 아직 우해진의 손에 있는 사헌부는 바로 일을 진행시켰어.”
“어떻게 그런…….”
해랑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믿을 수 없었다. 풍문으로만 탄핵을 진행시킬 수 있는 사헌부의 폐단이 바로 자신에게 적용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해랑이 얼이 빠진 채 바닥만 보고 있으니 형민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 자네에게 면목이 없구만.”
“아뇨, 아닙니다. 전하.”
형민의 말에 놀란 해랑이 손사레를 쳐가며 부정했으나 눈시울은 이미 붉어진 채였다. 그런 해랑이 안쓰러운 석현과 형민은 그저 말없이 있을 뿐이었다. 해랑은 감정을 누르고 꾸벅 절을 했다.
“그래도 제가 진범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만 한다면 다시 돌아 올 수 있으니 괜찮습니다, 전하. 되돌아 오는 날부터 개혁은 다시 진행하면 됩니다.”
형민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소신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해랑이 심란한 마음을 안고 자리에서 일어나려하자 형민이 손짓을 하며 해랑을 다시 앉혔다. 일어나려던 해랑이 엉거주춤하며 앉았다. 도로 자리에 앉은 해랑이 영문을 몰라하던 그 때, 형민이 서랍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지난 번 해랑이 알아봐달라 청했던 비단 조각이었다. 이어서 형민은 유 내관을 불렀다.
“가서 그 것을 가져오게.”
유 내관은 형민의 말에 곧바로 나가더니 금세 무언가를 들고 왔다. 해랑은 고갤 틀어 유 내관이 형민의 앞으로 내려 놓는 것을 보았다. 해랑은 그게 무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두 눈이 커진 해랑이 형민을 보았다.
“전하, 이것은……!”
“그래. 네가 준 비단 조각의 원단이다.”
해랑이 건넸던 비단 조각의 원단이 잘 말린 채로 형민의 앞에 놓였다. 원단을 가져왔다는 것은 곧 원단의 출처를 알아냈다는 것. 긴장된 해랑은 앞의 일은 금세 잊은 채 형민의 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작품후기]
내일 못 올릴 것 같아서 오늘 두 편 호다닥 올리고 갑니다.
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