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3/64)

폭풍속으로

형민의 손이 부드러운 비단을 펼치더니 그 위로 조각을 올렸다. 비단 조각에 수 놓아진 문양과 같은 부분 위에 얹어놓자 딱 맞아 떨어졌다. 대체 어디서 이 비단을 구한 걸까. 해랑은 그 짧은 시간 동안 바짝 긴장하여 비단과 형민을 번갈아 보았다. 마침내 형민이 입술을 달싹거리자 해랑의 눈이 반짝였다.

“이건 유성상단의 비단이다.”

형민의 말이 떨어지자 해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집안에서 이용하는 명주상단이 아닐 것은 예상하였으나 집 근처 저잣거리의 상점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상단의 이름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궁금증이 아직 해소가 되지 않은 해랑이 형민에게 무언가를 더 물으려는데 머리 위로 석현의 떨리는 호흡이 느껴졌다. 해랑이 확인 차 고개를 들었다. 형민 역시 거의 동시에 석현을 올려보았다. 석현의 눈동자는 심하게 흔들리면서도 비단 조각에 고정되어 있었다. 형민과 해랑은 서로 눈을 마주했다가 다시 석현을 보았다. 형민이 먼저 석현에게 물었다.

“왜 그러느냐?”

석현은 형민의 질문에도 잠시동안 대답하지 못하고 서 있었다. 겨우 입을 뗀 석현의 입에선 믿지 못 할 말이 튀어나왔다.

“유성상단은… 저희 집안이 이용하는 곳입니다.”

석현의 말에 해랑은 기겁할 노릇이었다. 어째서 석현의 집안이 이용하는 상단의 비단이 자신의 집 사당에 걸려있단 말인가.

“그 비단 조각, 어디서 발견하셨습니까?”

석현이 날카롭게 묻자 해랑은 괜히 움츠러들은 채로 말했다.

“우리 집 사당 뒤쪽에서…….”

석현의 미간이 무섭게 구겨졌다. 예전에 사당에 갔을 때 보았던 핏자국이 떠올랐다. 노파가 했던 말들과 자신의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면 분명 이 비단 조각과 사당의 핏자국의 주인은 바로 숙부임에 틀림없다. 숙부는 해랑의 집 사당에서 살해당한 것이다. 석현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반면 해랑은 당최 이유를 몰랐기에 석현의 눈치를 보았다. 형민 역시 마찬가지였다. 형민은 석현이 매서워진 이유를 알고 있기에 더더욱. 그렇다고 해랑에게 실은 이러이러해서 그렇다, 라고도 말 할 수 없었다.

‘제가 말씀드린 모든 것은 절대로 간관 나으리께는 말씀드리지 말아 주십시오.’

석현이 제게 말하며 신신당부를 했었기 때문이었다. 형민은 두 사람 사이에서 눈치만 보다 헛기침을 크게 몇 번 하더니 비단을 접어 치웠다. 비단 조각만 도로 해랑에게 건넸다.

“자자, 이제 알았으니 되었느냐?”

“예? 예… 전하.”

얼떨떨하게 인사를 하면서도 해랑은 석현의 상태를 재차 확인했다. 혹시 석현의 집안과 뭔가 관계가 있는 걸까? 석현의 집안과 관계 될 일이 무엇이 있을까? 온갖 생각들이 해랑의 머릿속을 휘젓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불안함과 지끈대는 머리에 해랑은 얼른 제 거처로 향했다. 석현의 모습이 아무래도 계속 마음에 걸렸으나 차차 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한 편, 해랑이 돌아가고 난 이후에 형민은 석현에게 물었다.

“이 조각, 누구의 것이냐?”

“제 숙부의 것으로 보입니다.”

“이게 사당 뒤편에 걸려있다라면…….”

“분명… 제 숙부께선 간관 나으리의 댁 사당에서 살해당한 것입니다. 그 곳에서 살해되신 뒤, 범인들이 자살로 위장하기 위해 끌고가려다 옷자락이 걸려 찢긴 거겠지요.”

“허…….”

“그리고 역모죄를 뒤집어 쓴 뒤, 숙부는 부관참시 되신 것입니다.”

형민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토록 아끼던 신하들을 이리도 허무하게 제 손으로 보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간신배들의 세치 혀에 농락당해 비극을 완성시킨 건 결국 자기 자신이라니. 형민의 입에선 절로 한숨이 터져나왔다. 그런 형민을 위로한 것은 오히려 석현이었다.

“너무 마음쓰지 마십시오. 이미 벌어진 일이고 전하께선 그렇게 하실 수 밖에 없었다는 것도 잘 압니다.”

“…미안하다.”

“아닙니다. 저게 이 자릴 주신 것만으로도 망극할 따름입니다.”

형민은 손을 뻗어 접어둔 비단을 매만져보았다. 정기혁과 정수환의 얼굴이 떠오르자 형민은 눈을 감았다. 그야말로 충신들이었다. 늘 나라를 위해서만 움직이고 나라를 위한 것만 생각하는 이들이었다. 두 사람은 한참은 어린 자신을 따뜻하게 봐주고 지켜주려 했으며 가끔은 따끔한 말로 충언을 하기도 했다. 어릴 적 돌아가신 선왕께서 항상 하셨던 말이 떠올랐다. 진정 나라를 위하는 충신은 몇 없으니 그들을 곁에 두고 잃지 않도록 노력하라던 말씀이었다. 그 때엔 몰랐다. 충신을 지키는 일이 이리도 어려울 줄이야. 형민은 비단을 만지던 손을 떼며 동시에 눈을 떴다. 이젠 뼈에 새긴 선왕의 말씀을 지켜야 할 때이다.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느냐.”

형민의 말에 석현이 놀란 것도 잠시, 곧 입을 굳게 다물고 결연해진 두 눈을 빛냈다.

“네가 말한 대로 오늘 밤엔 조용히 나가 수상한 움직임을 파악하거라.”

“예, 그리 하겠사옵니다.”

“그리고… 만일을 대비해 병력을 더 충원하고 싶은데.”

“병력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

“예. 간관 나으리를 모시러 가는 길에 해주로 서찰을 보내놓았습니다.”

“잘했다.”

형민이 석현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제라도 곁에 있는 자신의 사람들을 지키면 되는 것이다. 다시는 과거를 반복하지 않도록.

*

거처로 돌아온 해랑은 밀려드는 생각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대체 이 옷조각이 왜 자신의 집 사당에 걸려 있던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는 왜 제게 거짓을 말하셨던 것인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게 의문 투성이다. 제대로 맞춰지는 부분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해랑을 더욱 미궁에 빠지게 만들었다. 안 그래도 사헌부에서 진행하는 자신의 탄핵에 대한 일도 머리가 아픈데 이 비단 조각까지 골치를 썩인다. 해랑은 도저히 못 참겠는지 두 팔에 머리를 파묻어 버렸다.

“대체 뭐지……?”

아무래도 다시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에게 되묻는 수밖엔 방법이 없었다. 우선은 해야 할 일들이 있었기에 해랑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 때였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이 곳을 아는 이는 석현과 형민 뿐이기에 해랑은 잔뜩 경계하며 문 앞으로 다가갔다. 숨 죽여 바깥의 소리를 들으려 애를 쓰고 있으니 곧 문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안에 계십니까?”

앳된 여자아이의 목소리였다. 해랑은 깜짝 놀라 문을 열었다. 문 앞엔 주혜공주가 어여쁜 옷을 차려입은 채 서 있었다. 갑작스런 공주의 방문에 당황할 틈도 없이 공주가 작은 입술 앞으로 고운 손가락 하나를 펼쳐 갖다대었다.

“쉿! 아바마마께 허락받고 상궁들 몰래 나온 것이니 들여보내 주시어요.”

“예, 어서 들어오시지요.”

얼결에 공주를 거처 안으로 들인 해랑은 어쩔 줄 모르고 섰다. 주혜는 해랑을 개의치 않고 침상에 걸터 앉았다. 작은 공주님의 거침없는 행동에 해랑이 저도 모르게 픽 웃자 주혜가 해랑을 보았다. 주혜의 시선을 느낀 해랑이 헛기침을 하며 표정을 지우자 주혜는 그제야 환히 웃었다.

“어인 일로 이 누추한 곳까지 오셨습니까?”

드릴 것이 없기에 해랑이 물 한 잔을 따라 주혜에게 건넸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잔을 받아 한 모금 들이킨 주혜는 잔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오전에 어전회의에서 있던 일을 들었습니다.”

“아…….”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어린 공주의 귀에도 들어갔다. 이미 궁 밖으로까지 새어나갔을 것이다. 해랑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 주혜는 그런 해랑을 가만히 보았다. 속을 알 수 없는 주혜의 까만 눈동자가 해랑을 주시하자 해랑은 다시 웃어보였다.

“음인이시라구요.”

“…예.”

주혜는 다시 한참을 말없이 해랑을 바라보기만 했다. 저를 바라보는 눈동자에 해랑이 몸둘 바를 몰라하자 주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두 눈이 반달처럼 접히자 새카만 눈망울이 더욱 빛났다.

“저도 그렇습니다.”

주혜가 말했다. 저도 그렇습니다, 라고. 해랑은 지금 자신이 무엇을 들은 것인가 싶어 멍하니 주혜를 보았다. 주혜의 입술이 재차 떨어졌다.

“음인이에요. 저도.”

“공주마마…….”

“이걸 알려주면… 좀 위안이 되실까 싶어 찾아왔습니다.”

해랑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입술 새로 터지는 흐느낌을 막아보고자 취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미 흘러버린 눈물은 막을 수가 없었다. 주혜의 위로는 해랑에게 너무도 크게 다가왔다. 그저 같은 음인이라는 것을 알려준 것 뿐이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해랑에겐 큰 힘이 되었다. 세상에 혼자인 것만 같던 자신에게 주혜가 다가와 손을 잡으며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고 얘기해주는 것 같았다. 해랑은 주체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연신 감사를 표했다. 주혜는 말없이 빙긋 웃으며 해랑을 바라봐 줄 뿐이었다. 그러다 주혜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으로 향했다.

“이제 그만 가봐야겠습니다. 시간이 늦어서요.”

“예. 부디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해랑이 울음을 겨우 참아가며 대답하자 주혜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문을 밀고 나갔다. 해랑은 그 이후로도 한참을 혼자 울었다. 슬퍼서 운 것은 아니었다. 너무나도 따뜻해진 마음으로 인해 응어리진 속이 녹아 흘러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

사헌부는 기어이 해랑의 탄핵을 진행했다. 어전회의 다음 날, 형민은 다시 한 번 더 대신들을 소집했다. 해진과 해랑 역시 자리에 참석하였다. 둘 다 자신의 직위를 내려놓기 전, 마지막 자리였다. 우현영은 건강 상의 이유로 불참하였다. 해랑은 역시 아버지께 가봐야 겠다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 섰다. 주변의 모든 이들의 시선이 느껴졌으나 최대한 무덤덤히 있었다.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진정으로 소중한 사람들이 제 곁에 있음을 알기에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부러 턱을 높이 들고 선 해랑을 본 형민은 재밌다는 듯 웃고는 입을 열었다.

“오늘부로 사헌부의 모든 관직은 새 인물들로 교체될 것이다. 고로 기존의 사헌부 대신들은 새로운 자리로 이동을 명받기 전까지 휴직 상태로 지낸다. 그리고 간관 우해랑에 대한 탄핵안이 올라와 대부분의 대신들이 동의하는 바, 간관 우해랑의 직무는 모두 정지되며 직위 또한 정지됨을 알린다.”

형민의 말이 끝나자 모든 대신이 허리 숙여 절했다. 해진은 웃고 있었고 해랑은 무표정히 있었다. 이 정도 쯤은 이제 아무것도 아니었다. 분명 다시 돌아 올 수 있을 것이다. 해랑은 해진 쪽을 바라보았다. 웃고 있던 해진이 시선을 느꼈는지 해랑 쪽으로 고갤 돌렸다. 언제 웃었냐는 듯 싸늘히 식은 해진의 눈과 마주친 해랑은 가만히 해진을 보았다. 그리고 씨익 웃었다. 해진의 미간이 좁아지는 것이 보였다. 해랑은 더 여유롭게 웃어주고는 고갤 휙 돌려 용상 쪽을 보았다. 옆 얼굴로 느껴지는 따가운 눈총 따위는 무시하고 형민의 말에 집중했다.

일정이 마무리되고 모든 대신들이 어전 밖으로 빠져나왔다. 해랑은 천천히 걸음하며 맨 나중에 어전을 나왔다. 헌데 어전 앞에는 해랑을 기다린 듯 노의석과 해진이 서 있었다. 해랑은 그들을 발견하고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가 이내 다시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노의석과 해진을 스치고 지나가려 하는 순간, 해진의 목소리가 울렸다.

“우해랑.”

해진의 목소리에 해랑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작품후기]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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