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4/64)

폭풍속으로

어느새 해진은 해랑의 코 앞에 다가와 있었다. 큰 키로 해랑의 앞을 가려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겼으나 해랑은 기죽지 않고 해진을 똑똑이 보았다. 노의석은 그런 해진의 뒤에 서서 능구렁이 같은 얼굴로 둘을 여유롭게 바라 볼 뿐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해랑이 모른 척 묻자 해진의 눈빛이 더욱 서늘해졌다.

“참 다행이지 뭐냐. 내가 나가 떨어지기 전에 너도 함께 끌어내려져서. 안 그랬으면 배알이 꼴려서 못 견뎠을 것 같거든.”

“그리 속이 좁으셔서 어쩌십니까? 저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만.”

덤덤히 말하지만 속엔 가시가 돋힌 해랑의 말에 해진이 해랑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언제까지 그렇게 나불거릴지 두고 보자.”

한참동안 서로를 노려보던 두 사람은 노의석의 헛기침 소리에 시선을 떼었다. 해랑은 다시 평온한 모습으로 돌아가 둘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그럼 이만 물러 가겠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듯하게 인사하고 멀어져가는 해랑의 뒷모습을 보던 해진이 코웃음을 쳤다. 노의석이 해진의 옆으로 다가와서는 함께 해랑을 바라보며 말했다.

“꽤나 강적이구만 그래.”

“그래봤자 저 낯짝도 며칠 뒤엔 사라집니다.”

“하긴. 그건 그렇지.”

노의석이 허허 웃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해진 역시 그의 뒤를 따랐다. 걸음을 옮기면서 고갤 틀어 해랑이 사라진 쪽을 보았다. 계획대로 잘 진행되기만 한다면……! 해진은 다시 정면을 바라보며 두 눈을 번뜩였다.

*

석현은 형민의 곁을 지키는 대신 저잣거리에 나와있었다. 실낱 같은 단서 하나라도 잡기 위해 하루를 쓰기로 맘 먹고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해가 중천으로 넘어가도록 건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혹시 지난 번 도성 곳곳에 붙었던 종이들을 붙이는 자들을 본 적이 있는지 물어보아도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다. 저잣거리에서 가장 먼저 나온다는 상인들에게 물어봐도 헛수고였다. 하나같이 이른 아침 도착했을 때 이미 벽보가 붙어있었다는 말 뿐이었다. 석현은 한숨을 쉬며 배를 채우기 위해 주막으로 들어섰다. 저녁 때가 되어서인지 사람들이 꽤 많았다. 홀로 자리를 잡은 석현이 식사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을 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와 석현의 근처에 자리를 했다. 건장한 사내들이었는데 생긴 것 또한 험악하여 공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그들은 밥과 술을 시키며 요란스럽게 행동했다. 양반이나 상인도 아니면서 돈은 꽤 있는 모양인지 거들먹거리며 이 것 저 것 시키느라 정신이 없었다. 주문을 마친 왈패들이 돈주머니를 짤랑거리며 시시덕거리는 것이 석현의 귀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많이 쳐줘서 당분간은 돈 걱정이 없겠어.”

“그래. 그치만 한 번으로는 택도 없어. 한 번 더 일을 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오늘 해시에 다시 오라고 했으니 뭔가 일을 더 주지 않을까?”

“그렇겠지. 내가 보기엔 이따 두목이 가서 또 큰 거 하나 물어 올 것 같아.”

그들은 신이 나서 낄낄거렸다. 별 시덥잖은 이야기라고 생각한 석현이 갓 나온 제 밥 한 숟갈을 떠올리던 그 때, 갑자기 확 낮아진 목소리가 석현의 귀에 잡혔다.

“지겨운 도적질보다야 새벽에 벽보 몇 장 붙이는게 훨씬 낫다.”

벽보라는 말에 석현은 반사적으로 눈동자를 굴려 왈패들이 모인 쪽을 보았다. 석현의 머릿속에선 어느 정도 상황이 파악되고 있었다. 아마 누군가가 저들에게 많은 돈을 주며 벽보를 붙이게끔 명령한 것이 틀림없다. 저들의 두목이라는 자는 여기에 없었으나 대신 지시를 내린 이에게 찾아갔겠지. 실마리가 조금씩 풀려갔다. 석현은 빠르게 살펴 남자들의 행색을 최대한 눈에 담았다. 마침 해도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절호의 기회였다. 저들은 분명 술과 함께 꽤 오랜 시간 이 곳에 머무를 것이다. 고로 먼저 나가 있다가 저들이 나오면 그 때부터 미행해서 본거지와 두목이란 녀석을 찾아내면 된다. 석현은 대충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어둠이 깔린 밖엔 사람도 줄어 있었다. 가게의 담 모퉁이를 돌아 그들을 기다리기를 한 시간 정도 지나자 시끄러운 말소리가 들렸다. 남자들이 나온 것이다. 석현은 빠르게 움직여 남자들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사내들은 제법 속도를 내어 이동했다. 사람 하나 없는 저잣거리 외곽을 걷던 그들은 주위를 살피며 자신들의 본거지로 향하는 듯 했다. 석현이 그들을 한참 쫓아가던 중, 갑자기 그들의 걸음이 멈추었다. 뭔가 낌새를 느끼기라도 했는지 주변을 살피더니 몸을 돌려 석현이 숨은 어두운 골목 쪽으로 다가왔다. 석현은 여차하면 공격할 생각에 자신의 칼자루를 소리 없이 쥐었다. 발자국 소리가 거의 코 앞까지 왔고 석현은 몸을 숙여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이상없다. 가자.”

더 살피지 않은 채 걸음을 돌려 다시 멀어지는 발소리에 석현은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원래 가던 길을 가는 이들을 확인한 석현 역시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따라가다보니 어느새 저잣거리를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그들은 저잣거리 뒤쪽에 위치한 버려진 묘들이 모인 터로 향하고 있었다. 그 곳은 예전부터 아무도 찾지 않는 신원 미상의 묘지들이 방치된 곳이다. 그 곳에서 귀신의 울음소리가 들린다거나 귀신에 홀려 들어간 사람들은 거기서 나오지 못했다는 둥 별 괴소문들이 퍼진 흉흉한 곳이었다. 그런 곳이라면 범죄를 저지르는 이들이 숨어 살기엔 적합하다. 석현은 검은 숲 속으로 사라진 이들을 쫓아 어둠 속으로 발을 들였다.

*

해랑은 거처에 있는 것들을 가지고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별채에 돌아와 서책들을 정리하다보니 어쩐지 허탈한 마음이 들어 정리하던 것을 멈추었다. 겨우 시험에 통과하여 관직을 맡아 나라를 위해 열심히 뛰었건만 돌아 온 것은 탄핵이라니. 울적한 기분이 들어 해랑은 창 밖을 내다 보았다. 사당 쪽을 보자니 더 마음이 갑갑해질 것 같아 부러 고갤 들어 하늘을 보았다. 해랑은 집에 오자마자 아버지께 비단 조각에 대해 여쭤보려 했었다. 이 일 때문에 더 빠르게 집으로 돌아 온 것도 없잖아 있었다. 헌데 아버지의 몸 상태가 생각보다 더 좋아보이지 않았기에 해랑은 조금 나중에 여쭙기로 했다. 아버지 곁에 있던 의원에게 물으니 아직 병세를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하였으나 파악하기로는 심병(心病)인 듯 싶다고 했다. 심병으로 인해 급사하는 경우가 많아 조심해야 한다는 의원의 말에 해랑은 덜컥 겁이 났다. 혹여 제 아버지가 잘못 되기라도 하면 어찌해야 할지 감조차 오질 않았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비단 조각에 대해 여쭤보기 어려울 것 같았다. 해랑은 근심거리만 더 끌어 안은 채 별채로 돌아왔다. 하늘을 바라보던 해랑은 한숨만 푹 쉬었다.

“뜻대로 되는게 아무 것도 없네.”

집 밖을 벗어나니 이리저리 부딪히고 깨지고 원하는 것이 손에 들어오는가 싶다가도 틈새로 빠져나가버리기도 했다. 집 안에 있을 땐 그저 나오고 싶어서 안달이었으나 막상 사람들 틈에 섞이니 몸도 마음도 지치는 일 투성이었다. 물론 후회는 없다. 그 과정 속에서 배우고 성장함을 느꼈기에 고단하여도 보람되었다. 하지만 그토록 바꾸고자 했던 세상은 꿈쩍하지 않는 다는 것이 해랑을 허탈하게 만들었다. 계란으로 바위친다는 말이 딱이다. 아무리 던져도 소용이 없다. 첫 단추가 너무 좋았던 것이 해랑을 더 지치게 만드는 걸지도 모른다. 해랑은 밤 하늘에 박힌 별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와 서책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정리하던 해랑은 거의 막바지에 고운 쪽빛 보자기에 쌓인 서책 하나를 발견했다.

“아…….”

짧게 탄식한 해랑은 조심스럽게 묶인 부분을 풀었다. 부드럽게 풀어지며 펼쳐진 보자기 속에는 화첩이 들어있었다. 오래 전, 해랑이 석현을 그려넣던 바로 그 화첩이.

“오랜만이네.”

옅게 미소지으며 해랑은 찬찬히 화첩을 넘겼다. 언젠간 이 화첩 안에 석현으로 가득하길 바랐던 적이 있었다. 당연히 그렇게만 될 줄 알았던 떄였다. 하지만 이젠 완전히 멀어져버린 관계일 뿐이었다. 석현을 그리다 달오름이 와 먹으로 새카맣게 번져버린 종이를 손 끝으로 매만지며 해랑은 예전 일들을 추억했다. 처음 석현을 만났던 날부터 석현과 저잣거리에 간 날들, 함께 정자에 갔던 일, 처음 몸을 섞었던 때와 헤어지기 전 날 이 별채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던 밤까지.

“역시 버리는게 좋겠지.”

해랑은 버리기 위해 쌓아둔 서책들 위로 화첩을 두었다. 굳게 먹은 마음을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정리를 다 끝내고 버리는 서책들을 차곡차곡 쌓아 밖으로 빼냈다. 다음 날 아침에 시종들을 시켜 모두 불태우라고 할 작정이었다. 해랑은 문을 닫고 들어와 누웠다. 스며드는 달빛을 멍하니 보았다. 이상하게 달빛을 보면 석현이 유난히도 떠올랐다. 해랑은 아예 눈을 감았다. 더는 석현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감았건만 눈을 감으니 더 아른거리는 석현이었다. 결국 해랑은 다시 눈을 떠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가 맨 위에 놓인 화첩을 집어들고 들어왔다. 화첩을 보자기에 다시 싸서 서랍 안에 넣었다. 해랑은 그제야 편하게 잠을 청할 수 있었다.

*

사내들은 묘지 근처의 다 쓰러져가는 집으로 들어갔다. 석현은 그들이 전부 들어가고 나자 집 뒤쪽에 난 조그만 창 근처로 다가가 안을 살폈다. 좁은 가옥 안에는 책상이 놓여있었고 그 위로 많은 양의 종이들이 쌓여있었다. 아마 벽보들임이 틀림 없었다. 또한 아까는 보지 못했던 다른 사내가 하나 있었다. 틀림없이 그들의 대장일 것이다. 석현은 몸을 낮추고 귀를 기울였다.

“벽보를 한 번 더 붙이라는 지시가 있었다. 축시가 되면 바로 시작할 것이다.”

“이 종이들을 붙이면 됩니까요?”

“그래. 돈은 더 두둑히 받았으니 맘껏 붙여보자.”

벽보를 또다시 붙인다니. 석현은 이를 갈았다. 분명 또다시 해랑을 궁지로 몰아 넣을 속셈이겠지. 석현이 분노하는 것도 잠시, 갑자기 안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석현은 뭔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여전히 안쪽으로 귀를 기울인 채 석현의 손은 칼자루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안에서 낮게 깔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쥐새끼 하나가 숨어든 것 같군.”

남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내들이 뛰쳐나왔다.

[작품후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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