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속으로
문이 열리는 소릴 듣자마자 석현은 동물적인 움직임으로 칼을 뽑아 들었다. 빠르게 앞쪽으로 튀어나가자 마자 사내들의 검이 눈 앞에서 휘둘러졌다. 칼 부딪히는 소리가 어둔 숲 속에 요란히도 울렸다. 달려드는 놈들을 차례로 쓰러뜨리면서 석현의 눈은 이들의 두목이란 자를 찾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놈은 이 싸움을 구경이라도 하는 듯 한 걸음 떨어져 뒷짐만 지고 있었다. 어이가 없던 것도 잠시, 사내들이 석현의 주변을 둥글게 둘러싸기 시작했다. 완전히 포위당하자 석현은 칼 끝을 아래로 떨구고 자세를 풀었다. 편하게 서서 저를 둘러 싼 이들을 가만히 바라보자 되려 당황한 건 사내들인 듯 했다. 두목인 자도 미간을 찌푸리고 경계하는 눈치였다.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던 그 때, 사내들 중 하나가 칼을 높이 쳐들고 석현의 뒤로 달려들었다. 석현은 기다렸다는 듯 자세를 낮추며 뒤도 보지 않은 채 떨구었던 칼을 순식간에 아래서 위로 올렸다. 달려들었던 남자는 찍소리도 못내고 석현의 칼에 당해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사내들이 석현에게 다시 몰려들었다.
“한 놈 줄었군.”
석현은 씨익 웃고는 맹수와 같이 눈을 빛내며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석현이 휘두르는 칼에 달려들던 이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전쟁터에서 다져진 전투 능력을 일개 왈패들이 당해낼리 만무했다. 자신의 부하들이 거의 당하자 놀란 두목이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려던 것도 잠시, 한꺼번에 둘을 처리한 석현이 몸을 날려 두목을 붙들었다. 덜미가 잡힌 남자는 분한 얼굴로 석현을 보며 물었다.
“넌 누구냐?”
“알 것 없다.”
“네 놈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석현은 남자의 목에 칼을 대었다. 서늘한 칼 끝이 목에 느껴지자 남자는 숨을 집어먹으며 다시 달려드려는 제 부하들의 움직임을 멈추었다. 목을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간 살이 베일 것이 뻔했다. 남자는 목을 뻣뻣하게 세운 채로 석현을 보았다. 칼보다 더 서늘한 석현의 눈빛에 남자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누구의 명으로 새벽에 벽보를 붙이러 다녔느냐?”
“말할 수 없다.”
완강한 남자의 태도에 석현의 칼이 남자의 목에 더 가까워졌다. 부하들의 얼굴엔 초조함이 역력했다.
“벽보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아는가?”
“…모른다.”
남자의 말에 석현은 겨누었던 칼을 거두고 사내들을 향해 소리쳤다.
“너희는 왕권을 흔드는 일에 도모했다. 이는 극형에 처할 수도 있는 일인 것을 알고 있느냐?”
석현의 말에 사내들이 술렁였다. 석현이 예상한 대로였다. 글을 모르는 이들에게 돈을 많이 주겠다는 명목 하에 위험한 일을 시켰을 것이 뻔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내들은 그저 돈을 많이 준다니까 그저 좋아서 일을 덥썩 받아 들인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벽보를 붙인 뒤에 바로 어둠 속에 숨어있었기에 어떠한 내용인지 사람들이 수근거릴 동안 아무런 정보를 얻지 못했을 게다. 석현의 손에 잡혔던 남자 역시 모르던 눈치였다. 아차 싶은 얼굴로 멍하니 있더니 석현 쪽으로 홱 고개를 돌려 물었다.
“별 내용 아니라기에 그냥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그래도 우리가 벌을 받아야 한단 말이냐?”
“너희가 내용을 알든 모르든 상관없다. 법엔 관용이 없거든. 설령 그 대상이… 무고한 자일지라도.”
말미에 남은 씁쓸함이 석현의 입가에 맴돌았다. 남자는 그제야 자신이 속았다는 걸 알았는지 분을 이기질 못했다. 석현이 이를 놓칠 리 없었다.
“단,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너희 모두 극형은 면하도록 해주겠다.”
석현의 말에 남자의 눈이 번쩍 뜨였다. 대체 누구인지 알 턱은 없으나 도와주겠다니 어떻게든 매달려야 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말만 하시오. 뭐든 할 테니.”
태도를 바꾼 남자에게 석현은 품에서 서찰 하나를 꺼내어 건네주었다. 남자는 건네 받은 종이를 보며 아리송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서찰을 건네고 자리에서 일어난 석현은 벽보로 가득한 작은 집으로 다가갔다. 집 근처를 다시 살펴보니 숲의 나무들과는 거리가 멀었고 집 주변엔 온통 흙이었다. 주변을 확인한 석현이 문 안을 들여다보니 책상 위에 작은 등불 하나가 있었다. 곧장 불 앞으로 다가간 석현은 등불을 쌓여있는 종이 위로 휙 던졌다. 불은 떨어지자 마자 종이로 옮겨 붙었다. 빠르게 타기 시작하는 종이들로 인해 매캐한 연기가 안을 메웠다. 석현은 문을 닫으며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당황한 사내들이 집에서 멀어졌다. 남자는 석현에게 다가와 물었다.
“무슨 짓이오?”
“증거는 없애야 하지 않겠는가.”
“이, 이 서찰은 어찌하라는 것이오?”
“지시하던 이에게 전달하게.”
“…그거면 충분합니까? 지시하던 사람이 누군지는 말 안해도 되는 것이오?”
고개를 끄덕이는 석현에 남자가 서찰을 품에 넣었다. 활활 타오르는 건물을 바라보던 석현은 멍하니 제 뒤에 선 사내들을 향해 고갤 돌렸다.
“불 구경 말고 어서 그 서찰이나 전달하게. 지금 당장.”
사내들은 석현의 말에 빠르게 사라졌다. 석현은 다시 불타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사실 지시를 내린 이가 누구인진 굳이 말로 꺼내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서찰을 보내면 더더욱 확실해 질 것이 뻔하다. 석현은 조금씩 무너져가는 건물에서 등을 돌려 걸었다. 저 건물처럼 서서히 무너뜨리고 말 것이다. 무너져서 완전히 바닥으로 내려앉는 것은 물론 재가 되어 사라지도록 만들 것이다. 칼자루를 쥔 석현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
나무로 된 서안 위로 주먹이 내리 꽂혔다. 주먹 옆엔 구겨져 나동그라진 서찰이 있었다. 서찰을 받은 해진은 있는대로 성질이 나서 씩씩거렸다. 그 옆에서 초조하게 바라보던 남자는 주먹이 서안에 꽂히기가 무섭게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석현에게서 서찰을 받은 왈패의 두목이었다. 처음엔 차분히 서찰을 읽는가 싶더니 이내 불같이 화를 내는 해진에 남자는 진땀을 뺐다. 해진이 받은 서찰은 바로 정기혁이 죽기 전에 쓴 서찰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이 정기혁을 죽이기 전에 받았던 서찰은 분명 아버지가 잘 보관하고 있다고 했었다. 헌데 이게 다시 제게 올 줄은 상상도 하질 못했다.
“이 서찰, 누가 보낸 것이냐?”
“그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남자는 말이 끝나자마자 바닥에 쓰러졌다. 남자의 대답을 들은 해진이 즉시 칼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허벅지를 베인 남자가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자 해진은 칼 끝을 남자에게 겨눈 채 말했다.
“일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도 못하고 걸리면 어쩌나. 응?”
“죄, 죄송합니다. 나으리.”
“꽤 쓸만 할 줄 알았건만… 여봐라.”
해진의 부름에 건장한 사내들이 달려왔다. 해진은 다시 자리에 앉아 피 묻은 칼날을 여유롭게 닦아 내며 지시했다.
“저 놈과 저 놈의 무리들을 모두 죽여 무덤가에 묻어라.”
“예. 나으리.”
“나으리, 제발, 제발 살려주십시오! 나으리, 제발!”
남자의 절규를 뒤로 한 채 해진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칼집에 칼을 넣었다. 그리고는 구겼던 서찰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정기혁의 서찰. 늘 눈엣가시같았던 정기혁의 모습이 떠올랐다. 처음엔 정기혁을 자신들의 사람으로 만들려고 노력한 적도 있었다. 아버지와 친분이 있는 집안이라는 걸 이용해 때때로 집에 초대하여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애초에 결이 다른 사람이었다. 정기혁이란 사람은. 그야말로 대나무와 같은 심성을 지닌 이였다. 옳고 그름이 매우 명확하고 자신만의 철학이 뚜렷한 사람이었다. 때문에 노의석과 해진이 아무리 자신들의 편에 속하게 하려고 해도 정기혁은 딱부러지게 거절했다.
‘현재의 전하께서는 어리시긴 하지만 아주 현명하고 어진 분이십니다. 그런 분께 더 힘이 되어 드릴 생각을 하셔야지요. 하물며 아무리 어리고 무능한 왕일지라도 저는 최선을 다해 보필할 것입니다.’
결국 죽일 수 밖에 없었다. 계획을 방해할 것이 뻔한 인물이기에 가차없이 제거했다. 더불어 정수환까지 함께 쳐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계획대로 완벽하게 일이 진행된 뒤엔 모든 것이 수월하게 진행될 줄만 알았는데……. 갑자기 나타난 변수, 정석현과 우해랑. 둘이 나타나선 계획을 자꾸 망쳐놓는다.
‘이 서찰도 정석현 그 놈이 보낸 것이겠지.’
해진은 이를 아득 물었다. 아무래도 일을 빠르게 진행해야 속이 풀릴 것 같다. 마침 시종이 노의석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오셨습니까.”
“많이 기다렸는가?”
“아뇨. 오시기 전에 일이 좀 있었습니다.”
“무슨……?”
방 안으로 들어온 노의석과 마주 앉은 해진은 바로 서찰부터 보여주었다. 서찰을 확인한 노의석의 눈썹이 출렁였다. 사나운 눈으로 서찰을 바라보던 노의석은 해진을 보았다. 대체 이 서찰이 왜 여기에 있는지를 묻는 눈이었다.
“어떻게 된건가?”
“누군가가 계획을 알아챈 듯 합니다. 아무래도 일을 좀 더 빠르게 진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지지부진할 필요는 없지. 어차피 병력도 많이 모아두었으니.”
“예. 어차피 벽보 사건으로 인해 우해랑은 물론이고 왕의 세력 또한 흔들리는 상황이니 이 때를 노려야 할 것입니다.”
“좋네. 그럼 정확히 닷새에서 엿새로 넘어가는 자정에 진행하도록 하세.”
“그리 하시지요.”
해진이 냉소를 띄웠다. 계획의 최종 단계를 목전에 두자 기분좋은 긴장감이 온 몸을 훑었다. 이제 정말 꼴보기 싫은 작자들을 모조리 저승으로 보내버릴 기회가 다가오고 있다. 우해랑, 정석현, 왕 모두 한 순간에 처치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가.
[작품후기]
좀 더 부지런떨어서 얼른 완결로 달려가야겠네요 ㅠㅠ
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