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6/64)

폭풍속으로

해진은 날이 밝자 본가로 향했다. 아버지의 병세가 위중하다고 하니 큰 아들로서 얼굴은 한 번 비춰야 하지 않겠는가. 큰 아들의 방문에 우현영은 기력이 쇠한 몸을 일으켰다. 해진은 무심한 말투로 우현영의 건강 여부를 물었다. 다행히 호전되고 있으니 걱정말라는 우현영에 해진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 뒤로 말이 없어진 해진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보였다. 우현영은 그런 아들을 기다리다 늘 마음에 담아두었던 말을 꺼냈다.

“해진아. 이제 해랑이에게도 모든 걸 알릴 때가 되지 않았느냐?”

우현영의 말에 해진이 멈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아버지. 정석현의 집안에 관련된 일들은 해랑이에겐 절대 알리지 마십시오.”

“어째서냐? 이젠 내 건강도 좋지 않아. 해랑이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충격이 덜 하지 않겠느냐.”

“아뇨. 영원히 덮어두십시오. 분명 그 녀석은 크게 상처받을 겁니다. 안 그래도 지금 여러 가지 일들로 상처가 클 테니 아예 모르는 게 낫습니다.”

우현영은 큰 아들의 처음 보는 모습에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늘 제 동생을 미워하기만 하던 아이가 이젠 해랑이를 걱정하고 있었다. 전의 일들이 모두 잊혀질 만큼 우현영에겐 이 순간이 크게 다가왔다. 그래서 잠시 잊었는지도 몰랐다. 해진의 본 성정이 어떠한 지를. 기운이 없으면서도 환히 웃으며 배웅하는 우현영을 뒤로 하고 해진이 마당으로 나왔다. 주변을 둘러보니 업득이 나와 시종들에게 일거리를 나눠주는 듯 했다. 해진은 업득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나으리.”

“내 자네에게 부탁 하나 함세.”

“무엇이신지요?”

해진은 품 속에서 서찰 하나를 꺼내어 업득에게 건넸다.

“이걸 해랑이에게 전달해주게. 오늘은 아니고 닷새 뒤 엿새로 넘어가는 자정에 말일세.”

“예. 그리 하겠습니다.”

해진이 엽전 두 냥을 함께 쥐어주자 업득은 신이 나서 허릴 숙였다. 대문으로 향하며 해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웠다.

*

석현은 궁에서 잠시 나와 저잣거리 너머의 무덤가로 향했다. 어제의 일이 있고 나서 서찰이 잘 전달 되었을지 신경이 쓰였다. 역시나 아무도 발걸음 하지 않는 무덤가는 음습하기 그지 없었다. 더 깊숙이 들어가 왈패들의 소굴로 향했다. 아직 남은 매캐한 탄 냄새가 석현을 반겼다.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안으로 향한 석현은 수풀을 헤치고 고갤 드는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동시에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눈 앞에 펼쳐진 처참한 광경이 믿어지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이게 대체……!”

왈패들이 모두 널부러져 있었다. 피로 물든 옷이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렸다. 숨이 붙은 자가 하나도 없는 듯 보였다. 서찰을 전달했던 두목 역시 이미 숨을 거둔지 오래인 듯 했다. 아마 그 자들이 죽였을 테다. 석현은 치미는 분노를 억누르려 애를 써가며 눈도 감지 못하고 죽은 자들의 눈꺼풀을 하나 하나 덮어주었다. 그 때였다. 뒤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석현은 놀라 고갤 돌렸다. 시선이 닿은 곳엔 간신히 명줄을 붙든 이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곧 끊어질 듯한 숨소리에 석현은 바로 그 이에게 향했다. 남자는 가늘게 뜬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의식이 거의 없는 듯 했다.

“이보게! 정신이 드는가?”

석현이 남자의 고개를 붙들어 제 쪽을 보게 했다. 남자는 흐릿한 시야에 석현이 담기자 석현을 알아보는 듯 했다.

“…나… 으리…….”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 사람… 들이…… 죽였… 습니다.”

힘겹게 말을 잇던 남자의 입에서 피가 토해졌다. 살리기엔 이미 늦어보였다. 석현의 얼굴이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곧……모두… 죽일 거라고… 모두…….”

말을 다 마치지 못한 채 남자의 고개가 힘없이 옆으로 떨어졌다. 깊은 탄식이 석현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살인귀가 또 다시 피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석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는 이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주변을 둘러본 석현은 참담한 마음을 안은 채 마음을 굳게 먹었다. 이젠 끝내야 한다고.

*

정오에 궁 밖으로 나간 석현은 해가 질 때 쯤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석현이 돌아왔다기에 어서 오라 인사를 하려고 고개를 든 형민은 석현의 꼴을 보고 기겁을 했다. 온 몸이 흙투성이였기 떄문이었다.

“자네, 흙 밭에서 구르고 왔는가?”

“……아닙니다.”

“근데 옷이 왜 이리 더러워졌는가?”

“실은…….”

석현은 왈패들을 만난 것과 서찰을 전한 것, 그리고 왈패들이 모두 목숨을 잃은 것에 대해 형민에게 알렸다. 더불어 그들을 묻어주느라 흙투성이가 된 것도. 형민은 한숨을 쉬며 비탄에 잠겼다. 애꿎은 백성들이 정치싸움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다는 것에 마음이 저렸다. 또한 관련 없는 이들까지 무참히 희생시키는 세력을 생각하니 치가 떨렸다. 더 이상은 두고 볼 수가 없다.

“전하. 사내 하나가 죽기 전에 남긴 말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그 자들이 곧 모두 죽일 거라고 했답니다.”

“하!”

형민이 큰 소리로 코웃음쳤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래. 이제 곧 쳐들어 올 모양이다.”

“예. 그래도 단단히 준비해 두었으니 걱정 마십시오. 해주에서도 아마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출발할 것입니다.”

“그래…….”

형민은 고갤 끄덕이면서도 얼굴에 진 그늘을 걷어내진 못했다. 아무리 준비를 해두었어도 그 자들에게 밀리는 순간 모든 것이 끝이었다.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석현과 해랑의 목숨도 위험해질 것이 뻔했다. 끔찍한 일이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자꾸 나쁜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애써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 누구보다 불안한 형민이었다. 자신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었으나 혹 제게 변고가 생길 시, 소중한 이들 중 하나라도 살리고 싶었다.

“석현아.”

“예, 전하.”

형민은 석현을 불러놓고도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석현은 위치도 그렇고 이미 자신과 함께 싸울 준비를 끝냈다. 그렇다면 해랑은? 해랑을 지켜낼 만한 좋은 수가 분명 있을 것이다. 좀 더 고심하던 형민은 이내 결심한 듯 입을 움직였다.

“내일 해랑이를 좀 불러오거라.”

*

해랑은 비단 조각을 들고 우현영에게로 향했다. 증세가 많이 좋아지셨다기에 한 번 더 묻고자 찾아간 것이었다. 해랑이 들어서자 우현영이 반겼다. 확실히 전보다 혈색이 도는 우현영에 해랑은 마음을 조금 놓았다. 안부를 물으며 한참을 얘기하다 해랑은 본론으로 들어서며 비단 조각을 우현영의 앞으로 내밀었다. 그 순간, 우현영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린 것을 해랑은 보지 못했다.

“아버지. 이 비단 조각이 아버지 옷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라고 하셨지요?”

“그, 그래. 또 무슨 일이냐?”

해랑은 급격히 어두워진 얼굴로 비단 조각을 내려다 보았다. 우현영은 불안함에 자꾸 마르는 입 안을 앞에 놓인 물로 적셨다.

“헌데, 아버지.”

해랑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며 고갤 들었다. 의심으로 가득한 두 눈이 우현영을 마주했다. 우현영은 마른 침을 삼켰다.

“우리 집안은 유성상단의 비단을 사용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해랑의 입에서 유성상단의 이름을 듣는 순간 우현영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해랑의 입에서 유성상단의 이름이 나올 것이란 예상은 아예 하질 못했다.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해랑이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알았느냐?”

“실은 너무 궁금하여 전하께 여쭈었습니다.”

우현영은 아차 싶었다. 자신이 말하지 않아도 해랑에겐 저보다 더 잘 알려줄 인물이 둘이나 곁에 있지 않은가. 판단을 잘못한 자신을 탓하며 우현영이 애써 웃어보였다.

“석현이의 부친이자 내 친구였던 수환이에게 받은 비단으로 만든 옷이다. 이제 되었느냐?”

“왜 지난 번엔 말씀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굳이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게 그리도 궁금했느냐?”

“……예.”

“자, 이제 되었으니 그만 나가보거라.”

“그럼 편히 쉬십시오. 아버지.”

해랑이 방을 나서고 우현영은 왼쪽 가슴을 움켜쥐었다. 다시 몰려드는 통증때문이었다. 빠르게 약을 찾아 입에 넣은 우현영은 숨을 몰아쉬며 해랑이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이번엔 제대로 짚고 넘어갔으니 해랑이 더는 묻지 않길 바랐다. 하지만 우현영의 바람과 달리 해랑은 옷감을 관리하는 덕이 할멈에게로 향했다. 덕이 할멈은 해랑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 집에서 일하며 옷감 관리를 했던 시종이었다. 이 집에 들어오는 옷감은 할멈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게다가 어느 상단 어느 집에서 들어온 옷감인지도 전부 꿰뚫고 있었다.

“할멈. 내 궁금한 것이 있소.”

“무엇입니까, 도련님.”

“혹시 우리 집에 유성 상단의 비단이 들어온 적이 있던가?”

“유성 상단이요? 한 번도 들어온 적이 없었는데요.”

“그럼… 정수환 어르신에게서 들어온 비단은 있었소?”

“있지요.”

할멈의 거침없는 대답에 해랑은 말문이 막혀 더는 묻지 못했다. 아버지의 말씀이 맞는 것이다. 개인에게서 받은 선물은 상단이 어디인지까지는 알지 못할 테니까. 고갤 끄덕이며 돌아서려는데 할멈의 웃음기 어린 말이 이어졌다.

“정수환 어르신이 보내셨던 하늘색 비단이 참 고왔는데 말이죠.”

“하늘색……? 하얀색이 아니고?”

“예. 대감 나으리는 하얀색 옷을 선호하지 않으시는 걸 아시고 늘 어여쁜 색의 비단을 보내셨습니다.”

자꾸만 마지막 매듭이 풀리지를 않는다. 해랑은 다시 복잡해진 머리를 붙들고 별채로 향했다. 이 비단 조각이 뭐라고 이렇게 매달리나 싶기도 했다. 아버지 말마따나 그냥 잊고 지내면 될 것을. 해랑은 허탈하면서도 심란한 마음을 안고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마당을 지날 때쯤, 갑자기 대문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설마하는 마음에 해랑이 달려가 대문을 열자 그 앞엔 예상대로 석현이 서 있었다.

“무슨 일이야?”

“전하께서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나를……?”

“예. 함께 가시지요.”

해랑은 잠시 당황하다가 얼른 밖으로 향했다. 석현에게 물어 볼 것이 있었지만 우선은 묻어두고 잠자코 석현을 따라 궁으로 말을 달렸다.

[작품후기]

늘 읽어주시고 선추코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정말루 힘이 되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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