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57/64)

당신에게로

“예? 연국(燕國)이요?”

형민에게 도착한 해랑은 앉자 마자 들린 말에 화들짝 놀랐다. 두 귀를 의심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형민과 석현을 번갈아 보았다. 석현 역시 처음 듣는 얘기였는지 눈을 크게 뜨고 해랑과 형민을 보고 있었다. 형민 만이 담담한 채로 해랑에게 말했다.

“그래. 연국으로 가거라. 사흘 뒤에.”

“사, 사흘 뒤요? 전하, 이렇게 갑자기 보내신다 하시면…….”

“어차피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것도 없지 않느냐. 가서 연국의 상황을 살피며 내게 서신을 보내거라.”

“가서 얼마나 있어야 합니까?”

“한…… 3년?”

“예에?!”

갑작스런 출국 명령에 해랑의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뜬금없이 연국으로 가라니. 해랑의 입장에선 당황스럽기 그지 없을 뿐이었다. 반면 석현은 금세 형민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대신 놀랐던 두 눈은 금세 슬픔이 어렸다. 이렇게 헤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니, 이렇게 헤어져야만 해랑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안전할 수 있는 것이다. 석현은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서글퍼져 차마 해랑을 볼 수 없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해랑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채로 형민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가서 다른 나라는 어떤지 보고 배우며 더 큰 사람이 되어서 돌아오거라.”

“예에…….”

떨떠름한 해랑의 대답에 형민이 피식 웃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하긴 했다. 갑자기 불러놓고는 사흘 뒤에 연국으로 가서 3년이나 있다가 오라니. 저였어도 얼이 빠질 상황이었다. 하지만 별 수 없지 않은가. 이 위태한 상황 속에서 해랑을 지키려면 이 방법 뿐이었다.

“그럼 전하. 떠나기 전에 다시 인사드리러 오겠습…….”

“아니, 아니. 그럴 필요 없네. 궁에는 이제 오지 않아도 된다네. 그냥 조용히 다녀오게. 괜히 대신들이 알았다간 더 피곤해지니까.”

“예, 그럼 소신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해랑이 몸을 일으켜 허릴 숙였다. 형민은 그제야 진지해진 얼굴로 해랑을 보았다. 마음이 아프지만 그래도 웃어보였다.

“그래. 부디 몸 조심하게.”

해랑이 문 밖으로 나간 뒤, 형민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 너무 매정히 떠나 보냈는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 않습니까? 나중에 다 이해해 주실 것입니다.”

“그래. 그렇겠지. 해랑이는 똑똑한 친구니까.”

착잡한 얼굴로 해랑이 나간 문만 한참을 보던 형민은 고갤 돌려 석현을 보았다. 석현 역시 착잡해 보이긴 매 한 가지였다. 형민은 석현을 가만히 보다 슬쩍 물었다.

“한 번 가보는게 어떤가?”

“예?”

“해랑이한테 한 번 가보게. 해랑이가 떠나기 전 날 밤이 딱 좋겠구만.”

형민의 말이 참으로 고마우나 석현은 제 처지가 그럴 수 없음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석현은 씁쓸히 웃으며 고갤 가로 저었다.

“아뇨. 전 그 분과 더는 사적인 일로 엮이고 싶지 않습니다.”

“예전의 그 일 때문에?”

“……예.”

석현의 대답을 들은 형민은 깍지 낀 손에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이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석현을 보았다.

“그렇다고 해랑이를 마음에서 내치지도 못하지 않았는가?”

형민의 말은 제대로 정곡을 찔렀다. 석현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숙였다. 형민은 더욱 더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이었다.

“해랑이 저렇게 떠나보내고 자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는가?”

이번에도 석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해랑을 품에 안고 난 뒤 느꼈던 가족들에 대한 죄책감은 끊임없이 해랑을 밀어내도록 만들었다. 그럼에도 석현은 여전히 해랑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떨쳐낼 수가 없었다. 해랑이 이대로 영영 자신의 곁에서 사라진다는 걸 생각하니 갑자기 덜컥 겁이 났다. 해랑을 밀어내긴 했지만 늘 제 근처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해 왔던 탓이었다. 만약 해랑을 이대로 보낸다면……. 이대로 놓쳐버린다면……. 3년 뒤의 자신이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거니와 살아 있다 한들 해랑의 마음에선 이미 자신이 없어져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물론 자네가 해랑이의 집안 때문에 고통받은 건 잘 알고 있네만, 그렇다고 해서 해랑이에 대한 마음까지 함께 묶어 고통받지 않았으면 좋겠네. 해랑인 좋은 사람이야. 그건 나도 알고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해랑이 역시 자신의 집안 때문에 고통받고 있지. 둘은 분명 함께 잘 헤쳐나갈 걸세. 고통이 배가 되는게 아니라 나눠갖게 될거야. 그러니 두려워 말게나.”

형민의 말에 석현은 완전히 말을 잃었다. 조용히 숨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 고개만 떨구고 있던 석현은 천천히 고갤 들어올렸다. 석현의 시야에 해랑이 닫고 나간 문이 들어왔다. 석현은 문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형민에게 물었다.

“혹시 어여쁜 꽃 하나만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석현의 말에 형민이 기분좋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내 하나 추천해주지.”

*

난데없이 연국으로 나가게 된 해랑은 집으로 돌아 온 이후부터 어영부영 짐을 싸기 시작했다. 부모님도 당황하시긴 마찬가지셨으나 어차피 관직에서 일하기는 힘드니 차라리 잘 되었다며 웃으셨다. 함께 연국으로 향할 시종 몇몇 역시 들떠 보였다. 특히 오월이는 처음 가보는 외국에 한껏 설레어했다. 웃지 못하는 건 해랑 뿐이었다. 아무런 매듭도 짓지 못하고 도망치는 떠나는 것이 싫었다. 이대로 탄핵 당한 채로 외국에 가는 것도, 비단 조각에 대해 풀지 못한 것도, 석현과 어정쩡하게 틀어진 채로 있는 것도. 터져나갈 것 같은 머릿속 때문에 벌써 내일이면 떠나는데도 해랑은 사흘동안 제 짐을 제대로 싸지도 못했다. 시종들은 신이 나서 온갖 것들을 다 챙겼는데 정작 진짜 가야 할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해랑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어거지로 짐을 챙겼다. 이제 정말 내일이면 떠나야 한다. 밤은 깊어져가고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이렇게 헤어지고 나면 석현인 날 완전히 잊겠지.’

해랑은 문득 치고 들어오는 아픈 생각에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역시 가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모든 것이 짜증스러워 해랑은 들고 있던 옷가지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대로 침상 위에 털썩 주저 앉은 해랑은 무릎을 껴안고서 얼굴을 묻었다. 모두가 미웠다. 해진은 말할 것도 없었고 제 아버지와 석현도 미웠다. 아직도 상사화가 눈 앞에 아른거렸다. 악에 받친 해랑이 악 소리를 지르며 베개 위로 엎어지는데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깜짝 놀란 해랑은 벌떡 일어났다. 하필 괴성을 질러댔을 때 누가 찾아오다니. 해랑은 창피함에 얼굴이 벌개졌으나 후후 숨을 불어 최대한 가라앉히려 애쓰며 문으로 다가갔다.

“누구야? 오월이니?”

건너편에서 넘어오는 대답이 없자 해랑은 잔뜩 경계한 채로 문 앞에 섰다.

“정운이니? 왜 대답이 없어?”

섣불리 문을 열고 싶지 않았다. 혹여 이상한 사람이 침입했을까 겁이 났기에 해랑은 문을 소리나지 않게 꼭 붙든 채로 되물었다. 그렇게 잠시의 시간이 흐른 뒤, 대답이 들렸다.

“도련님. 석현입니다.”

해랑의 손이 빠르게 문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문 앞엔 석현이 서 있었다. 갑작스런 석현의 방문에 해랑은 얼이 빠졌다. 다시는 이 곳에서 볼 수 있을거라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인물이 서 있다니. 해랑이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을 때 석현 역시 말없이 해랑을 보고 있었다. 촉촉해진 두 눈으로 해랑을 보던 석현은 옅게 미소지었다. 석현의 미소에 해랑이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석현을 얼른 안으로 들였다.

“뭐, 뭐야. 갑자기…….”

“죄송합니다. 몰래 들어온지라 언질을 드리지 못했네요.”

“괜찮아. 근데 무슨 일로 온거야?”

석현은 대답은 하지 않고 그저 해랑을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마치 해랑을 눈 속에 담아가기라도 하려는 듯 보는 석현에 해랑이 민망한 듯 웃었다.

“왜 그렇게 봐?”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쉽사리 시선을 떼지 못하는 석현에 해랑이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러다 문득 비단 조각이 생각이 났다. 해랑은 일단 어색하니 떠오르는 대로 석현에게 질문했다.

“근데 그 비단 조각말야. 그게 왜 우리 집 사당에 걸려있었을까?”

해랑의 질문에 석현이 그제야 고갤 돌려 창 밖을 보았다. 창 너머엔 어둠 속에 숨은 사당이 있었다. 사당을 바라보던 석현은 무언가를 떠올린 듯 희미하게 웃었다.

“그 비단은 저희 집안 어른들이 입으셨던 것입니다. 화려한 것을 즐기지 않으셨던 어른들이라 색이 없는 하얀 비단을 주로 입으셨지요.”

“그러니까, 그게 왜 사당에…….”

“아마 우 판서 나으리와 함께 사당에 가셨다가 걸린 것 아닐까요?”

“아…….”

해랑이 말을 잃고 석현이 바라보던 사당 쪽으로 고갤 돌렸다. 제 일도 아닌데 굳이 달려들었나 싶기도 하고 당사자인 석현이 되려 태연하게 말하니 머쓱하기도 했다. 해랑은 조용히 비단 조각을 꺼내어 석현에게 건넸다. 자기가 가지고 있을 필요는 더 이상 없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내일이면 여길 떠나니 이 것에 대해 파고 들 필요도 없지 않은가.

“미안. 내가 괜한 걸 궁금해했네.”

“아닙니다.”

석현은 다시 한 번 더 해랑을 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떠나려는 눈치였다. 해랑은 마음이 급해져 걸음을 옮기려는 석현을 붙들었다.

“근데 진짜로 왜 온거야?”

커진 눈으로 저를 보며 묻는 해랑에 석현은 잠시 고민했다. 본래의 목적을 솔직히 말 할 것인가, 아님 이대로 체념한 채 돌아설 것인가. 흔들리는 석현의 두 눈동자 속에 해랑이 담겼다. 여전히 하얗고 고운 해랑의 얼굴이. 내일이면 떠나 멀어질 해랑의 얼굴이. 석현은 더는 참지 못하고 팔을 뻗어 해랑의 손목을 붙들었다. 해랑이 어, 하는 사이 석현의 손은 해랑을 당겨 제 품으로 끌어왔다. 그대로 해랑의 얼굴이 석현의 가슴팍에 묻혔다. 해랑의 두 눈이 더욱 커져갔다. 해랑은 안긴 채 무어라 말도 못하고 쿵쿵 뛰는 가슴만 느꼈다. 그러다 손을 뻗어 석현을 밀어냈다.

“우린 안 된다면서?”

눈시울이 붉어진 해랑이 석현을 노려보았다. 석현은 입을 꾹 다문 채 바닥만 보았다. 속에서 수 많은 감정과 엉겨 붙은 자신의 진심을 어떻게든 꺼내고 싶었다. 진심만을 분리하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꽤 아팠다. 석현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해랑은 석현의 눈물에 깜짝 놀랐다. 석현은 조용히 울고 있었지만 너무 고통스러워 보였다. 석현이 안쓰러워 다가가려는 것도 잠시, 석현의 입이 떨어졌다.

“도련님을 늘 밀어내고 밀어내보았습니다. 헌데 그게 제 맘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모진 말을 하고 상사화를 드리고 결국 도련님의 입에서 가시 돋힌 말들이 나오도록 만들어도 제 속에 있는 도련님까지는 밀어내질 못했습니다.”

“……석현아.”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 찾아왔습니다. 오늘 도련님을 뵙지 않으면 평생 후회 속에서 살 것 같아서요.”

해랑이 그제야 고갤 들어 석현을 보았다. 비록 눈물에 젖어 있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따뜻하고 애정어린 눈길로 석현이 저를 내려보고 있었다. 해랑은 입술을 말아삼켜 올라오는 감정을 눌렀다. 잘 삼켜낸 울음을 뒤로 하고 해랑이 웃었다.

“이제서야?”

퉁명스럽게 뱉어진 말이었으나 해랑의 얼굴엔 웃음꽃이 피어있었다. 미안한 마음에 석현은 해랑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해랑의 팔도 석현의 등을 감쌌다. 해랑은 석현의 따스한 품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작품후기]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네요 ㅎㅎ

함께 해주셔서 넘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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