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59/64)

당신에게로

수탉이 울기 전, 석현은 떠났다. 비몽사몽한 채로 석현을 배웅했다. 석현은 멀쩡히도 해랑에게 입을 맞추어 준 뒤 바람같이 사라졌다. 석현이 가고 난 뒤, 해랑은 다시 잠을 청했다. 밤새도록 사랑을 나눈 탓에 모든 체력을 소진했다. 방바닥에 널부러진 짐이야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나중에 일어나서 정리하지 뭐. 대충 넘기며 여유를 부렸다. 얼굴엔 행복한 미소가 그득한 채로. 문제는 해랑이 출발해야 하는 시간은 예상보다 꽤 이른 시간이라는 것이었다. 밖에선 난리통인데 해랑만 세상 모르고 잠이 들어 있었다. 해랑이 겨우 잠에서 깬건 웬 요란스런 소리 때문이었다. 따사로운 햇살에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는데 몽롱한 정신 속에서 누군가 해랑을 불렀다.

“도련님! 도련니임!”

오월이였다. 문 밖에 서서 애타게 해랑을 부르는 오월이의 목소리가 울렸다. 해랑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빠르게 상체를 일으켜 밖을 본 해랑은 기겁을 하고 자리에서 벗어났다. 해가 벌써 중천을 넘어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배를 놓치고 말 것이다. 족히 다섯 시간은 걸리므로 빨리 이동해야 했다. 허둥대며 일어나 준비하려던 해랑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바닥에 흐트러뜨려놓은 짐들 때문이었다. 정리가 하나도 되지 않아 난리도 아니었다. 해랑은 부지런히 정리해놓지 않은 과거의 자신을 탓했다. 마음이 급해 오월이를 안으로 들였다. 오월이는 방을 보더니 놀래서는 번개같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래가지고 언제 출발하시겠어요!”

“미안, 미안. 빨리 준비해볼게.”

하지만 이래가지고는 오늘 안에 출발하지도 못 할 것 같았는지 오월이 몸을 세워 문으로 향했다.

“우선 정운이랑 몇 명 더 불러와서 도와드릴게요.”

“응. 고마워.”

“서두르셔야 해요!”

“알았어.”

오월이 재촉하며 별채에서 나가자 해랑은 얼른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신속하게 움직여 짐을 꾸리던 해랑은 자신이 제일 중요한 것을 잊고 있던게 생각났다. 얼른 서랍 앞으로 향해 안에 들었던 화첩을 꺼냈다. 이걸 놓고 갈 수는 없다. 석현이 떠오를 때마다 여기에 그려 채워넣을 것이다. 해랑이 소중히 서책을 끌어 안고 잠시 석현을 느끼던 그 때, 오월이 문을 벌컥 열었다.

“도련님! 정리 안하구 뭐하고 계셔요!”

화들짝 놀란 해랑이 다시 황급히 움직였다. 오월의 뒤에 있던 시종들이 그 모습에 킬킬거렸다. 여럿이 모여 짐을 꾸리니 예상보다 빠르게 마무리 되었다. 별로 가져갈 것도 없다 생각했건만 그게 아니었다. 만만히 본 제 잘못이 컸다. 해랑은 시종들에게 미안해서 당과 하나씩을 쥐어주었다. 그에 또 좋다고 천진하게 웃어대는 시종들에 해랑도 함께 미소를 띄웠다. 신시가 약간 넘어갔을 때, 마침내 짐이 모두 마당으로 나왔다. 마당엔 시종들의 짐과 오랜 외국 생활을 위한 생필품들과 식량등으로 가득했다. 우현영과 김씨 부인도 나와 해랑을 배웅했다. 워낙 시간이 빠듯하다보니 제대로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출발했다. 아쉬움 가득한 부모님의 얼굴에 해랑은 멋쩍게 웃고 집을 나섰다. 이제 정말 연국으로 향하는 것이다. 해랑은 간 밤의 일들을 떠올리며 환히 웃었다. 이렇게 헤어지는 거라면 하나도 슬프지 않았다. 잊지 않고 챙긴 꽃도라지를 손에 쥔 채 해랑은 포구로 향했다.

*

밤이 깊어가자 강녕전엔 묘한 긴장이 흘렀다. 벌써 자시가 넘어 자정으로 가까워져갔다. 모두가 침묵만을 지킬 뿐이었다. 그 누구도 숨소리조차 낼 엄두를 못 냈다. 석현은 칼자루를 꽉 쥔 채 형민의 뒷모습만 지켜 보았다. 며칠 째 놈들의 동태를 살폈으나 이상하리만치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습격을 최대한 미리 파악하고자 했으나 수확이 없었다. 이에 마음이 조급해지는 건 석현이었다. 누구보다 초조할 형민은 덤덤히 자릴 지킬 뿐이었다. 매일을 살얼음판 위를 걸었다. 한시라도 긴장의 끈을 놓았을 때 그들이 쳐들어 온다면 감당할 수 없을 일이 벌어질 것은 자명했다.

“유 내관.”

“예, 전하.”

침묵을 먼저 깬 건 형민이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던 형민이 눈을 떠 유 내관을 부른 것이었다. 유 내관은 숨 막히는 침묵이 깨어진 것이 반가웠는지 재빨리 대답했다. 형민은 덤덤하면서도 결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가서 내 칼을 가져오게.”

형민의 말에 강녕전 안의 모든 이들의 시선이 형민에게로 쏠렸다. 불안한 어명에 모두의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유 내관이 집어들고 온 칼을 받아든 형민은 찬찬히 칼 이 곳 저 곳을 살폈다. 오랜만에 집은 칼이었다. 평생 쓸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칼을 꺼내고야 말았다. 손에 쥐어야 했다. 이 칼로 누군가를 베어야 할지도 모른다. 손에 피를 묻혀가며 자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그리고 이 나라를 지켜야만 하는 것이다. 괴로움이 밀려왔으나 형민은 굴하지 않고 빠르게 칼을 뽑아들었다. 서늘한 쇳소리가 강녕전에 울렸다. 번뜩이는 칼날을 내려다보던 형민은 눈을 부릅뜨고는 앞을 보았다.

“혹, 내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너희들은 당황하지 말거라.”

“전하!”

모든 이들이 당혹스러움에 고갤 숙였다. 불길한 앞날에 대한 예언을 듣는 것처럼.

“당황하지 말고 계속해서 싸우거라. 싸워서 이겨 이 나라를 지켜다오.”

굳센 형민의 말에 누군가는 눈물을 글썽거리기도 했다. 부디 나라의 기둥이 쓰러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발만 동동 구르는 내관들과 상궁들 사이에서 석현만이 꼿꼿하게 서서 고갤 숙여 대답했다.

“예, 전하. 반드시 지켜내겠습니다.”

형민과 같은 눈빛이었다. 형민은 그런 석현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다시 검을 바라보며 형민은 자신의 운명을 탓했다. 왜 하필 나라의 왕으로 태어나서 가시밭길을 걸으며 살아야 하는 것인지. 그저 평탄한 삶을 살면 좋았으련만. 형민이 흔들리는 눈동자를 숨기기 위해 눈꺼풀을 닫는 순간, 자정이 되었다.

둥, 둥, 둥-

갑자기 밖에서 북소리가 울렸다. 침묵이 깨지고 강녕전 사람들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앉아있던 형민은 벌떡 일어나 석현을 보았다. 변고를 알리는 북소리였다.

“우선 이 곳에 계십시오. 제가 병사들과 함께 강녕전을 지키겠습니다.”

석현이 빠르게 말하고 나가려는 순간, 형민이 석현의 팔을 붙들었다.

“아니. 나도 나가 싸울 것이다.”

“전하……!”

“나라를 흔드는 자들을 보고도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느냐?”

“하지만…….”

형민은 난처해하는 석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부드럽게 다독이며 형민은 석현에게 말했다.

“걱정말거라. 내 이래 봬도 무술 실력이 출중하단 말이지.”

능청스레 한 마디를 던지고는 형민이 앞으로 나아갔다. 못말리는 상관에 석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뒤를 따랐다. 강녕전 문을 열고 나가자 저 멀리서 이미 벌어진 전투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강녕전 안까지는 밀고 들어오지 못한 모양이었다. 석현은 그 틈을 이용해 빠르게 병사들을 정비하고 대열을 세웠다. 형민은 대열 맨 뒤에 있도록 했으며 석현은 맨 앞에서 적들을 맞이하기로 했다. 우선 대문을 잠그고 적들을 기다렸다. 분명 담을 타고 넘어오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문을 부수려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를 대비해 뜨거운 물과 나무 틀을 구해 놓았다. 나무 틀은 문고리에 끼워 더욱 단단히 문을 고정시켰다. 뜨거운 물은 담을 넘는 이들에게 부을 작정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닫힌 문을 거대한 것으로 두들기기 시작했다. 또한 담을 타고 넘어오려는 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공격하라!”

석현의 지시에 뜨거운 물이 부어졌다. 속수무책으로 당한 이들이 도로 바깥으로 떨어지거나 담 안쪽으로 쓰러져 떨어졌다. 물을 많이 준비해두진 못했기에 소수의 적만 퇴치가 가능했으나 우선 될 수 있는대로 수를 줄여야했다. 적이 몇이나 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나무틀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조금 더 버티다 곧 부서질 것이 분명했다.

“궁수들은 준비하라!”

뜨거운 물이 바닥을 보이자 이번엔 활을 대기시켰다. 궁수들이 바닥에 앉아 담을 겨냥했다. 넘어오는 이들을 쏘아 쓰러뜨리기 위해서였다. 활을 최대한 아끼기 위해 우선 물로 버텨보았다. 하지만 적이 생각보다 많은 모양이었다. 끊임없이 담을 오르는 적들에 결국 활을 쓰게 된 것이다. 나무틀은 이제 거의 부러져갔다. 곧 문이 열릴 것이고 적들이 밀고 들어 올 테다. 석현은 칼을 꺼냈다. 얼굴엔 비장함이 서렸다. 해주 때와는 완전히 다른 무게감이 석현을 짓눌렀다. 더 크고 많은 것들을 지켜야 했다. 마른 침을 삼킨 석현이 전투 태세로 자세를 잡았다. 바로 그 때, 문이 쪼개지며 활짝 열렸다.

“네 놈들이 감히……!”

형민이 이를 갈며 소리쳤다. 노의석과 해진이 문을 넘어 강녕전 안으로 발을 들였다. 여유롭게 웃고 있는 이들의 뒤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병력이 늘어져 있었다. 능글맞게 웃으며 노의석이 형민을 향해 인사했다.

“전하. 소신이 전하께 무례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도 네 놈들이 무사할 것 같으냐!”

“무사해야죠. 무사하기 위해선…… 딱 한 가지 방법 뿐이겠지요.”

웃고 있던 노의석의 얼굴이 차게 식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해진이 수신호를 보내자 뒤에 있던 적들이 물 밀 듯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공격하라! 이 나라와 전하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

석현 역시 공격 명령을 내렸다. 순식간에 양 쪽의 병력들이 맞부딪혔다. 궁에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

해랑은 겨우 포구에 도착하고 나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해시가 되기 전에 도착했다. 들고 왔던 짐을 배에 싣기 시작하자 그제야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해랑은 처음보는 바다에 넋을 잃었다. 캄캄하지만 달빛에 비춰진 고요한 바다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몰랐다.

“바다는 참으로 아름답구나.”

해랑이 중얼거리자 짐을 옮기던 업득이 허릴 펴고 바다를 보았다. 업득은 예전에 한 번 와 본적이 있다며 제 옛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해랑은 그런 업득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중이었다. 난데없이 업득이 우왁하고 소리를 쳤다. 화들짝 놀란 해랑이 왜 그러느냐 묻자 업득이 품에서 급히 무언가를 꺼냈다. 웬 서찰이었다.

“이게 무어냐?”

“첫째 도련님께서 꼭 전달하라 하셨습니다요. 자정에 드리라 하셨는데 이제 떠나셔야 하니까 지금 드리겠습니다. 아휴, 하마터면 까먹고 못 드릴 뻔 했지 뭡니까.”

“형님이 내게……?”

처음으로 해진에게 받아 본 서찰이었다. 해랑은 뜬금없는 서찰에 고갤 갸웃거리며 종이를 펼쳤다. 천천히 글자를 읽어내려가던 해랑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 후로 급하게 서찰을 전부 읽은 해랑은 고갤 들었다.

“……말도 안 돼.”

해랑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한 동안 정신을 빼놓고 멍하니 있던 해랑은 몇 번이고 ‘말도 안 돼’를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말에 올랐다. 짐을 나르던 시종들이 해랑을 발견하고 움직임을 멈췄다. 서찰을 전달한 업득이 제일 당황하여 해랑에게 물었다.

“도련님, 왜 그러시는지요?”

해랑은 말 위에서도 잠시 멍을 놓다가 이내 정신이 번쩍 든 듯 말 고삐를 당겼다. 놀란 시종들이 다가오자 해랑이 소리쳤다.

“나 잠시 궁에 다녀올게!”

해랑이 탄 말의 앞발이 크게 들리더니 이내 질주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허망히 해랑이 사라지는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작품후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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