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0/64)

당신에게로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이 해랑을 뒤덮었다. 달리는 말 위에서 해랑은 울고 있었다. 서찰 속 해진은 반정을 일으킬 것을 고했다. 말이 반정이지 그냥 역모였다. 그 동안 대체 뭘 하나 했더니 역모를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던 것이었다. 저를 비웃는 듯한 제 형의 얼굴을 떠올리자 해랑의 눈 앞이 아찔해졌다. 포구에서 궁까지는 네 시간이 넘게 걸릴 것이다. 도착하면 이미 자정이 넘어 궁이 습격을 받고 있을텐데…….. 해랑은 자꾸만 말고삐를 당기는 것 밖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자꾸 넘치는 눈물에 시야가 가려져 해랑은 몇 번이나 소매를 들어올렸다.

‘전하, 석현아……!’

언제나 자신을 보며 환히 웃는 형민과 따뜻한 석현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해랑은 두 눈을 꾸욱 감았다 떴다.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형민이 왜 자신을 그리도 빨리 연국으로 보내려 했는지. 형민은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석현이 전 날 밤 찾아와 진심을 고백한 것도 마찬가지일 테다. 자신만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해랑을 더욱 괴롭게 했다. 두 사람은 스스로를 희생하려 하면서 어째서……! 해랑은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고 말 등 위로 더 붙어 속도를 냈다. 제발 늦지 않기를 간절히 빌면서.

*

아군과 적군이 뒤섞인 강녕전 앞뜰은 점차 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숫자에 기가 눌린 형민의 병사들은 고전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석현은 빠르게 적을 해치워갔다. 형민을 시선에서 떼지 않으며 적들을 물리치는 석현을 발견한 해진은 일부러 석현에게 다가갔다. 해진이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병사들이 쓰러졌다. 해랑과 달리 무술에도 능한 해진이기에 거침이 없었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해진을 발견한 석현은 매섭게 해진을 노려보았다. 해진은 씨익 웃으며 석현을 마주했다. 잔뜩 경계하는 석현을 여유로이 보던 해진은 매섭게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두 개의 검이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쇳소리를 신호탄으로 두 사람의 칼이 몇 번이고 맞부딪혔다. 팽팽하던 두 사람의 균형은 순간 안쪽으로 파고든 해진에 의해 깨졌다. 다행히 석현의 검이 빠르게 해진을 막아냈으나 깊게 밀고들어온 탓에 힘이 밀리고 있었다. 석현과 가까워진 해진은 비웃듯 픽 웃더니 석현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이리 가까이서 보니 네 아비뿐만 아니라 숙부와도 참 닮았구나.”

“!”

해진의 도발에 석현이 눈을 부릅뜨고 해진을 노려보았다. 해진은 뱀처럼 웃으며 석현을 더욱 건드렸다.

“네가 내 칼에 죽으면…… 네 숙부가 죽었을 때랑 비슷하려나?”

“닥쳐라!”

말을 마치며 킥킥거리는 해진에 석현은 완전히 이성을 놓았다. 해진을 걷어 차 밀어낸 뒤 가차없이 칼을 휘둘렀다. 석현의 칼을 간신히 막아낸 해진은 시종일관 웃으며 석현을 더욱 괴롭게 했다. 완전히 말려든 것이다. 흥분한 석현의 칼이 살짝 무뎌진 틈을 타 해진이 석현을 공격해왔다. 아차 싶은 석현이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으나 칼날이 옆구리를 스쳤다. 통증이 밀려올 새도 없이 다시 공격해오는 해진에 석현은 옆구리를 부여잡은 채 공격을 막아냈다. 피가 흘러 손을 적셨지만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어허. 빈 틈을 보여서 쓰는가?”

“크윽…….”

“자네 숙부도 빈틈을 보여서 죽었지.”

기괴하게 웃어제끼는 해진에 석현은 치를 떨었다. 당장에 저 입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뒤늦게 밀려온 고통에 자세가 무너졌다. 석현이 한 쪽 무릎을 꿇은 채 옆구리를 부여잡고 있는 그 순간, 해진의 칼이 다시 부웅 솟았다.

*

오랜 시간에 걸쳐 쉴 새 없이 달려온 끝에 해랑의 눈에 드디어 궁이 보였다. 해랑은 빠르게 궁으로 달렸다. 제발 별 일이 없길 바랐다. 해진이 일부러 배를 놓치게 하려고 한 짓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강녕전에 갔더니 형민이 당황하여 왜 연국에 가지 않았으냐고 물었으면 했다. 내일은 꼭 떠나라는 형민의 말을 뒤로 하고 나와 석현이 밤길을 배웅해주었으면 했다. 해랑은 간절히 소망하며 궁 안으로 발을 들였다. 강녕전을 향해 말을 달리던 해랑은 끔찍한 광경에 말에서 내렸다. 이미 반역자들이 쓸고 간 자리엔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피로 젖은 땅 위를 밟는 것은 너무 괴로웠다. 해랑은 차마 눈을 감지 못한 이들의 눈을 감겨주고는 다시 말에 올라 강녕전으로 향했다. 두 사람 모두 무사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강녕전에 다다른 해랑은 이미 격전이 벌어진 강녕전 앞뜰로 차마 들어 갈 수 없었다. 주변엔 반역자들로 인해 접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저들에게 들키면 분명 죽음을 당할 것이 뻔했다. 해랑은 강녕전으로 접근하려다 말을 돌려 외곽길로 향했다. 외곽길로 돌아 뒤쪽으로 가면 강녕전에 들어갈 수 있는 쪽문 하나가 더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몰랐으나 해랑은 예전에 형민이 알려주었었다. 서둘러 쪽문으로 향한 해랑은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당겼다. 워낙 작은데다 잘 사용하지 않는 문이라 소리가 크게 났다. 해랑은 움찔거리며 겨우 문을 열었다. 쪽문은 강녕전 건물 바로 옆 비좁고 어두운 골목에 나 있었다. 이 곳에 숨으면 아무도 모를 것이다. 해랑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강녕전 안뜰을 살폈다. 형민과 석현의 모습을 찾느라 두 눈동자가 분주히 움직였다.

“아……!”

해랑의 눈이 멈췄다. 형민의 뒷모습을 찾아낸 것이었다. 형민은 다행히도 병사들에 둘러 쌓여 있었다. 그렇다면 석현은? 첫 번째 안도의 숨을 내쉰 해랑의 눈동자가 다시 부지런히 움직였다. 아무리 눈동자를 굴려도 찾아 볼 수 없는 석현의 모습에 해랑은 초조해져갔다. 불안한 마음에 한 걸음 한 걸음씩 어둠에서 벗어나려는 순간, 누군가가 해랑의 앞에 갑자기 나타났다. 놀란 해랑은 아예 강녕전 아래 공간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제대로 몸을 숨긴 해랑이 다시 고개를 빼 자신의 앞에 미끄러지듯 앉은 남자를 살폈다. 낮은 시야로 인해 다리밖에 보이지 않아 천천히 눈동자를 올린 해랑은 하마터면 큰 소리를 낼 뻔했다.

‘석현아……!’

입을 두 손으로 꾹 틀어막은 채 해랑은 눈 앞의 석현을 보았다. 석현은 여기저기 상처를 입었는지 옷이 피로 물들어있었다. 고통스러워 보이는 석현에 해랑의 눈가가 다시 젖어들어가던 그 때, 석현에게 칼 끝을 겨누고 다가오는 해진이 보였다. 이 자체만으로도 끔찍한 광경이었다. 해랑은 순간 터져나오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흐느꼈다. 자신의 혈연이 사랑하는 이에게 칼을 겨누는 상황이라니. 차마 소리는 내지 못하고 해랑은 숨죽여 울었다. 그 때 해진의 칼이 공중을 갈랐다. 겨우 막아냈으나 부상을 입은 석현의 몸이 눈 앞에서 무너지려 했다. 해랑은 아예 눈을 질끈 감았다.

*

부웅 솟아오른 해진의 칼을 겨우 막아낸 석현은 이성을 찾고 공격을 막아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 번 무너진 이성을 복구시키는 데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자꾸만 상처가 늘어갔다. 출혈이 많아질수록 빠르게 지치는 법이다. 석현은 이를 악물었다. 버텨야만 했다. 지금은 수세에 몰렸지만 버티고 버티면 분명 역전할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이다. 석현은 다른 이들까지 상대할 여력이 없기에 강녕전 건물 앞쪽으로 뛰어 올라 미끄러지듯 착지했다. 그곳에 먼저 올라 겨우 숨을 고르고 있으니 해진이 유유히 계단으로 걸어 올라와 석현에게 다가왔다. 칼 끝을 겨눈 채 살의 넘치는 표정으로 다가오는 해진에 석현은 안뜰 상황을 빠르게 살폈다. 아직 형민을 엄호하는 이들은 잘 버티고 있었으나 이대로 가다간 모두 몰살 당할 게 뻔했다. 모두가 조금만 더 버텨주길 바라며 석현은 칼자루를 세게 쥐었다. 그 틈을 노린 해진의 칼이 공중을 갈랐다. 꽉 쥐었던 칼을 들어 빠르게 막아낸 석현이었으나 무거워진 몸을 이기지 못하고 중심을 잃었다. 다시 바닥에 주저 앉은 석현의 턱 밑으로 해진의 칼날이 들어왔다.

“그러게. 그냥 노비로 평생을 지냈으면 좋았으련만.”

비아냥대는 해진의 말에 석현이 화를 내려던 것도 잠시, 해진과 같이 미소를 띄웠다. 조소하는 석현의 얼굴에 해진의 눈썹이 씰룩였다.

“나와 같은 꼴이 되고 싶어서 발악을 하는군.”

“……뭐?”

“반역은 실패할 것이고 너희는 모두 반역자가 될 것이 뻔하지.”

“이게 감히!”

분개한 해진이 칼을 크게 휘둘렀다. 해진이 석현의 목을 향해 칼을 내리치려는 순간, 나팔소리가 울렸다. 움직임을 멈춘 해진이 입구를 보았다. 석현 역시 입구로 고갤 돌렸다. 모든 이들의 이목이 쏠린 가운데 멀리서 다가오는 많은 군사들이 보였다. 형민은 그들을 자세히 보더니 이내 환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해주부사 현류환이 왔군!”

반가운 이의 등장에 형민의 병사들이 환호했다. 석현도 웃으며 그들을 반겼다. 노의석과 해진은 당황한 듯 서로 눈을 마주했다. 마침내 류환과 주언이 강녕전 안으로 발을 들였다. 류환의 군대는 말을 타고 들어와 안뜰에 있는 반란군들을 걷어차내며 형민의 가까이로 왔다.

“전하! 소신 현류환, 전하를 끝까지 지키겠사옵니다.”

“그래. 참으로 고맙구나.”

“너무 늦지는 않았는지요?”

“아니. 딱 적당히 왔다. 석현이가 고군분투하고 있으니 자네들이 좀 도와주게.”

“예, 전하!”

류환, 주언과 석현은 서로를 보며 웃었다. 든든한 지원군이 오자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석현은 다시 힘차게 몸을 움직였다. 반란군은 당황하였는지 허둥대는 모습이었다.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석현은 맹렬한 공격을 명령했고 기운을 얻은 병사들은 기세좋게 반격했다. 지원군의 등장으로 완전히 전세가 역전되어갔다. 해진과 석현의 전투 역시 마찬가지였다. 석현의 도발과 지원군으로 흔들린 해진은 석현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아까완 반대로 석현이 해진을 밀어붙였다. 몰아치는 칼바람에 해진의 몸이 버티질 못하고 주저앉았다. 해진의 손에선 칼이 떨어져나갔다. 일부러 형민과 근접한 곳으로 해진을 밀어붙인 석현은 해진이 했던 것처럼 해진의 목에 칼을 겨누었다. 해진이 매섭게 석현을 노려보았다. 석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칼을 더 깊이 들이밀며 물었다.

“하나만 묻겠다. 왜 내 숙부님을 죽이고 반역자로 만든 것이냐?”

석현이 큰소리로 외치듯 묻자 해진이 형민 쪽을 스윽 보았다. 형민이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에 해진의 입에선 거짓이 술술 나왔다.

“난 그런 적이 없다. 당연히 네 숙부가 반역을 일으켰으니 반역자인 것이지.”

“이 서찰을 보아라.”

석현은 품에서 그 동안 모아두었던 서찰들을 꺼냈다. 서찰엔 숙부가 써왔던 나라에 대한 걱정과 애정이 그득했고 노의석과 해진의 행적에 대해 고발하는 내용도 적혀있었다. 서찰을 본 해진의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역시…… 지난 번 서찰을 보낸 것도 네 놈이군.”

석현은 해진의 말을 무시하고는 품에서 다른 물건들도 더 꺼냈다. 예전에 우현영의 방에서 난 숙부의 띠돈과 비단 조각이었다. 모두 숙부가 살해 당했을 때 남은 흔적들이었다.

“이 띠돈과 비단 조각. 모두 네 집에서 발견했다. 너와 우의정은 사당에서 숙부를 살해하고 너희가 모의하던 반역이 들키지 않도록 내 숙부님께 모든 죄를 뒤집어 씌웠어!”

“하!”

“다시 한 번 묻겠다. 왜 내 숙부님을 죽이고 반역자로 만든 것이냐?”

해진은 살기 가득한 눈으로 석현을 바라보더니 이내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광인(狂人)처럼 한참을 웃어대던 해진은 석현의 질문에 대답하기 시작했다.

“왜긴. 방해되니까 죽였지. 내가 이 나라를 갖고 싶다는데 자꾸 방해하니까!”

정신 나간 이처럼 소리치며 대답하고는 해진이 씩씩거렸다. 그에 이 모든 것을 처음 듣는 류환과 주언은 얼어붙었고 형민과 석현은 무표정하게 해진을 보았다. 그리고 해진이 앉은 곳 바로 근처에 해랑이 있었다. 석현과 해진의 말을 전부 듣게 된 해랑은 충격에 빠졌다. 자신이 지금 무얼 들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모든 사고가 정지된 채 초점잃은 해랑의 눈에서 눈물이 투두둑 떨어져내렸다.

[작품후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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