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1/64)

당신에게로

해진은 완연히 제 본성을 드러냈다. 만 천하에 자신이 저지른 일을 드러내고 나니 거침이 없어졌다. 이젠 석현이 아닌 형민을 향해 갔다. 해진의 폭주에 당황한 노의석 역시 형민에게로 왔다. 모든 반란군이 둘을 따라 형민에게 집중 공격을 퍼붓기 시작하자 석현, 류환, 주언 역시 이 들을 막기 위해 형민을 엄호했다. 무자비한 해진의 칼에 병사들의 희생이 끊임이 없었으나 곧 석현이 다시 해진을 막았다. 해진은 이성을 잃은 듯 보였다. 이 상태라면 석현 혼자서도 충분했다. 석현은 둔탁한 해진의 칼을 이리저리 막아내다 마침내 생긴 틈을 놓치지 않았다.

“커헉!”

날선 석현의 칼이 해진의 몸통을 갈랐다. 베어진 옷 사이로 피가 흘렀다. 큰 상처에 해진이 비틀거리자 석현은 다시 한 번 칼을 꽂았다. 해진의 입에서 붉은 피가 토해졌다. 오른쪽 가슴에 박혔던 석현의 칼이 빠져나오자 해진은 그대로 무너졌다. 우두머리가 무너지자 반란군은 목적을 잃고 혼란에 빠졌다. 노의석 역시 놀란 듯 보였으나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며 반란군이 형민을 공격하도록 계속 지시했다. 해진은 쓰러져 숨을 헐떡였다. 석현은 그런 해진을 무덤덤히 내려볼 뿐이었다. 일부러 급소를 피해 숨이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공격했다. 바로 저승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어떤지 자신과 똑같이 느끼게 하고 싶었다.

“……죽여라.”

허공을 바라보던 해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곧 덮쳐 올 죽음을 느끼는 듯 차분해진 말투의 해진에 석현은 그저 말 없이 바라 볼 뿐이었다.

“여기서…… 날 죽여.”

“그럴 순 없지.”

“하……. 생지옥이나 맛보라는 건가.”

“잘 아는군.”

비참한 결과와 미래에 해진의 입이 비틀렸다.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해진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웃으며 고갤 돌렸던 해진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다른 이들의 시야에선 보이지 않는게 제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너……!”

커진 해진의 눈동자엔 강녕전 아래에 숨은 해랑이 담겼다. 해랑은 건조한 눈으로 해진을 보고 있었다. 해진을 보고 있는게 맞는가 싶을 정도로 공허한 눈이었다. 해진의 반응에 석현 역시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악에 받친 노의석이 형민에게 달려들었다. 석현은 다시 형민을 엄호했다. 이제 반란군은 거의 전멸이었다. 노의석의 칼이 치솟아 날아들려했으나 류환의 검이 강하게 쳐내자 이내 힘없이 바닥으로 처박혔다. 연이어 류환의 발이 노의석을 걷어 차냈다. 제 칼처럼 바닥에 나뒹군 노의석은 류환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노욕입니다. 우의정 대감. 욕심을 좀 내려놓으시지요.”

류환이 조롱하듯 말하자 노의석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무거운 몸을 겨우 일으키는가 싶던 노의석은 자신의 옆에 쓰러져있던 궁수의 활을 집어 들었다. 빠르게 형민을 향해 겨냥하는 노의석에 몇몇은 형민을 감싸고 몇몇은 달려나와 노의석을 붙들려했다. 헌데, 활의 방향이 갑자기 틀어졌다. 석현은 당황하여 활이 틀어진 쪽으로 고갤 돌렸다. 설마 같은 편인 해진의 숨통을 끊기 위한 것일까. 하지만 석현은 시선을 돌린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곳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이가 눈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련님!!!”

노의석의 손가락이 튕겨졌다. 활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가기 시작했다. 이에 석현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노의석을 보던 모든 이들의 고개가 돌아갔다. 노의석의 화살이 향하는 곳엔 해랑이 서 있었다. 해랑을 발견한 형민도 큰 소리로 해랑을 불렀다. 해랑은 주변의 소리들을 아무 것도 듣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제 형을 원망스럽다는 얼굴로 바라 볼 뿐이었다. 활에서 튕겨져 나온 화살은 목표물을 향해 정확히 날았다. 퍽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렀다.

“크윽!”

화살은 목표물이었던 해랑 대신 해랑을 감싼 석현의 어깻죽지에 꽂혔다.

“괜, 찮으십니까? 도련님?”

저를 안은 채 힘겹게 웃으며 묻는 석현에 그제야 해랑의 정신이 돌아오는 듯 했다. 맑아진 해랑의 눈동자가 석현을 보고 있었다. 일부러 숨어 있으려 했다. 이 안에 있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폐만 끼칠 걸 알았기에. 헌데,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모든 사실을 알고 나선 도저히 가만히 있을 정신이 아니었다. 따져 묻고 싶었다. 피 흘리며 쓰러진 제 형에게 묻고 싶었다. 왜 그랬느냐고. 왜 석현의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느냐고. 왜 석현을 이리도 힘들게 하느냐고. 왜, 대체 왜…….

“석현, 석현아……!”

“저는 괜찮습니다.”

“미안, 흐윽, 내가 미안해. 내가……!”

해랑이 어쩔 줄을 모르고 발을 동동 굴렀다. 결국 자신으로 인해 다친 석현을 보니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어떻게든 참아보려 했으나 눈물이 쏟아졌다. 해랑을 달래고자 석현이 한 눈을 판 사이, 노의석은 두 번째 화살을 조준하여 당겼다. 거침없이 쏘려는 노의석을 막아보고자 류환이 달렸고 주언 또한 화살을 쏘았다. 허나 간발의 차로 날아간 화살은 어김없이 석현을 향했다. 그 순간, 해랑의 눈이 정확히 노의석을 노려보았다.

“석현아!”

놀란 형민이 큰 소리로 외쳐 나아가려 했으나 병사들에 막혔다. 석현은 노의석에게 등을 돌린 채라 뒤늦게 알아챘다. 이대로라면 속수무책으로 다시 화살이 꽂힐 것이다. 곧이어 또 다시 퍽하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석현의 예상과 다르게 고통이 없었다. 석현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의 몸에 꽂히지 않았다면 대체 어디로 날아갔단 말인가? 석현은 뒤늦게 제 몸을 덮고 있는 체온을 느꼈다. 설마. 아니겠지, 아니겠지. 그 찰나의 순간동안 석현은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자신이 상상하고 있는 그 불행한 광경이 아니길 간절히 빌었다.

“석… 현아.”

“! 도련님!”

허나 불행히도, 설마했던 상상이 현실로 눈 앞에 펼쳐졌다. 석현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쓰러지는 해랑의 몸을 받아 안았다. 해랑의 등에 기다란 화살이 꽂혀 있었다. 그 동안 아픔이라고는 모르고 지냈을 것 같은 그 하얀 살 위에 꽂혀 있었다. 어깨에 꽂힌 석현과 달리 해랑은 치명상을 입었다. 석현은 정신을 잃어가는 해랑을 끌어 안았다.

“도련님, 도련님!”

“나…… 괜찮, 아…….”

해랑은 어떻게든 의식을 잃지 않도록 애를 썼으나 소용 없었다. 자꾸 두 눈이 감겼다. 해랑의 가냘픈 손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석현은 몇 번이고 해랑을 불렀다. 이제 겨우 진정으로 다가갔건만, 이리 보낼 순 없었다. 고운 얼굴에 튀어 있는 핏자국을 문질러 닦아내주었다. 해랑의 뺨 위로 눈물이 투툭 떨어졌다. 석현이 우는 건지 해랑이 우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해랑아!”

형민이 달려왔다. 노의석은 류환의 칼과 주언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 왕좌를 노리던 이의 비참한 최후였다. 해진은 만신창이가 된 상태 그대로 옥으로 끌려갔다. 나머지 반란군 역시 모두 잡아들였다. 상황을 정리시킨 형민은 바로 석현과 해랑에게로 왔다. 류환과 주언 역시 함께였다.

“흑, 도련님, 제발……!”

그토록 강하던 석현은 숨이 넘어갈 듯 울고 있었다. 작은 해랑의 몸에서 빠져나가는 온기를 붙들기라도 하려는 듯 두 팔로 끌어안은 채 석현은 절규했다. 형민은 늘어진 해랑의 손을 붙들고 황급히 맥을 짚었다. 다행히도 아직 맥이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니었다.

“여봐라! 어서 가서 어의를 불러와라! 어서!”

“살아있는 겁니까?”

주언이 묻자 형민이 고갤 끄덕였다. 희망의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었다. 석현의 고개가 들려 형민을 보았다. 형민은 석현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리고는 차가워져가는 해랑의 손을 붙든 채 형민이 말했다.

“어째서 다시 돌아왔는가? 내 일부러 그리 멀리 보냈건만…….”

형민의 눈가가 일렁였다. 기어이 툭 떨어져 내리는 눈물에 류환과 주언 역시 고갤 떨굴 뿐이었다. 피로 물든 강녕전 앞뜰엔 슬픔만이 가득했다.

*

어둠 속이었다. 해랑은 칠흙 같은 어둠 속에 갇혀 있었다. 어딘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곳에서 해랑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분명 석현에게 날아오는 활을 대신 맞은 것까진 기억나는데……. 이승인지 저승인지 모를 일이었다. 뭐가 되었든 이 곳을 벗어나고 싶어 조금씩 발을 옮기려는데 갑자기 저 멀리에 무언가가 보였다. 그 곳엔 사당이 있었다. 부적이 모두 사라진 사당이 해랑의 앞에 놓여 있었다. 부적 하나 없는 사당은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해랑은 고갤 갸웃거리며 사당을 향해 다가갔다. 헌데 사당에 누군가가 있었다. 그것도 둘 씩이나. 흰 두루마기를 입은 남자 둘이었다. 해랑은 긴장하여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남자들은 해랑 쪽을 보고 있었다. 무표정인 듯 하면서도 미소를 띈 듯 보였다. 점점 거리를 좁혀가자 남자들의 얼굴이 보였다. 해랑은 그들을 자세히 뜯어보다 금세 알아채고는 바닥에 바싹 엎드렸다. 엎드린 해랑의 시야에 남자 하나의 옷자락 끝부분이 찢어진 것이 보였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정말 죄송합니다……!”

해랑이 울며 두 손을 싹싹 빌었다. 그들은 정수환과 정기혁이었다. 너무도 큰 죄를 지은 자신의 형 대신 해랑이 사죄했다. 두 사람은 엎드려 비는 해랑을 말없이 바라봐 줄 뿐이었다. 목이 터져라 외치는 해랑을 가만히 보던 둘은 점차 해랑에게서 멀어져갔다. 해랑이 고갤 들어 그들을 쫓아가려 해보았으나 해랑의 발은 제자리에서만 구를 뿐이었다. 결국 완전히 사라진 두 사람에 해랑은 망연자실해 자리에 다시 엎어져 울었다. 죽고 싶었다. 차라리 자신이 죽었으면 싶었다. 그렇게 한참을 죽을 듯이 우는데 어디선가 석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애타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였다. 해랑이 고갤 번뜩 들어 소리나는 쪽을 보니 석현이 달려오고 있었다. 해랑은 달려오는 석현을 보며 차마 웃지도 못하고 서 있었다. 석현은 해랑에게 뛰어와서는 가만히 해랑의 눈을 보았다. 그러더니 조용히 꽃 하나를 내밀었다. 상사화였다. 꽃도라지를 받은게 얼마전인데 다시 상사화를 내민다. 헌데 해랑은 내밀어진 상사화를 받았다. 받으며 웃어주었다. 반대로 석현은 울고 있었다.

“그래. 네가 이래서 내게 이 꽃을 주었구나. 그렇지?”

석현은 울며 말없이 고갤 끄덕였다. 그에 해랑은 일부러 더 밝게 웃었다. 휘어진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흘렀다.

“이제야 모든게 이해가 되네.”

해랑의 손 위에 들린 꽃잎 위로 이슬이 맺혔다. 맺혔던 이슬은 옆으로 흘러내려 겹쳐진 해랑과 석현의 손 위를 타고 내려갔다.

“석현아.”

해랑은 한층 평온해진 얼굴로 석현에게 말했다.

“이제 우리 정말로 멀어져야겠다. 그치?”

“…….”

“이제 그만 널 놓을게. 정말로.”

석현의 슬픈 눈이 해랑을 보았다. 해랑은 덤덤히 웃으며 석현의 손을 놓았다. 석현과 해랑은 서로를 마주보며 천천히 뒷걸음질쳤다. 둘은 열 보 정도 걷다 멈췄다. 걸음을 멈춘 석현은 해랑에게 활을 겨누었다. 해랑은 기다렸다는 듯 석현의 움직임을 지켜볼 뿐이었다. 마침내 활시위가 당겨지고 화살이 날았다. 화살은 정확히 해랑의 왼쪽 가슴에 콱 박혔다. 해랑은 다시 정신을 잃었다.

[작품후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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