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 휴전 (10/21)

9. 휴전

“그건 너무 커.”

“안 커. 조금씩 움직이면 딱 맞아.”

그는 나의 말에 반박하면서 눈앞에 놓인 것이 얼마나 알맞은 크기인가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아무리 그래도…….”

“어차피 주방이야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잘 쓰지 않을 테니까 식탁을 밀든 없애든 하고, 아이 침대랑 지금 있는 침대 중간에 칸막이를 하나 놓으면 딱 맞는다니까. 개인적인 공간이란 게…….”

그저 떨어지지 않고 혼자 잘 수 있을 만한 작은 침대나 보러 가구점에 왔더니만 그는 침대 밑으로 책장과 책상이, 그리고 그 위로는 수납공간이 있는 본격적인 가구를 사라고 권했다.

“아니, 우리한테도 없는 개인 공간을 어떻게 만들어줘. 그리고 그렇게 하면 나는 어디서 자라고.”

“어디서 자기는? 올라와서 자.”

“죽어도 싫어.”

“그 표정은 뭐야? 덮치기라도 할까 봐? 그럴 일 없어. 매번 시작은 네가 했다. 나한테 뒤집어씌울 생각이면 그만둬.”

……내가 어떤 표정이길래.

사람도 많은 곳에서 이상하게 흘러가는 화제를 애써 원래대로 돌리며 말했다.

“어차피 저기 작은 침대에 추락 방지가 다 되어 있으니까 저거 사고 내가 중간에서 자든지, 아니면 그 탁자라도 치우고 러그 위에서 자면 돼. 그러니까 아직은 이런 널따란 책상 같은 건…….”

내막을 전혀 모르는 직원은 아이를 위한 가구가 하나도 없다는 말에 재혁이 고른 침대를 추천해주었지만, 나에겐 그저 네 배나 비싼 침대를 사라는 의미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쪼그만 놈이 하나 들어왔다고 관사가 얼마나 좁게 느껴지는지. 어젯밤엔 발코니에서 한참 시간을 죽였다.

같은 방을 쓰는 상대와 결혼을 하든 외부인과 결혼을 하든, 대부분의 경우엔 아이를 낳아도 관사에서 나가지 않고 사는 걸로 알고 있지만, 그런 이들은 대체 어떻게 사는 건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도대체 아이가 있는 대원들은 어떻게 사는 거야.”

팀장님께 전화해서 물어봐야 하나 싶어 휴대전화를 꺼내며 혼잣말을 내뱉었는데 옆에 있는 녀석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옆 관사로 옮기잖아.”

“거긴 뭐가 달라?”

“방이 두 개 추가되어 있지.”

“뭐?”

같은 일을 하고 사는 사람들인데 고작 애 하나 딸린다고 방이 두 개나 추가되는 곳에서 살 수 있다니, 이건 명백한 차별 대우였다.

그동안 혼자 사느라 관심도 없던 사항들을 줄줄이 꿰고 있는 놈도 이상했고, 애써 돈 써서 지을 거 공평하게 다 똑같이 만들면 좋았을 것을, 나름대로 머리를 쓴다고 이렇게 운영하는 놈들도 이상했다.

“그럼 우린 왜 그 좁은 곳에서 사는 건데.”

“결혼한 사이가 아니라서?”

“그건 평생 불가능한…….”

“그리고, 잠깐 맡은 아이일 뿐이잖아, 승아.”

눈앞에 있는 서랍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자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성인이라도 될 때까지 계속 키울 생각이었어?”

“그건 아니지만.”

“그렇게 애정이 넘치는 것 같진 않던데. 네 성격에 조금만 일이 터져도 눈에 불을 켜고 가서 밤낮없이 뛰어들 텐데 이렇게 오래 키우면 애만 정서적으로 불안해질 뿐이야. 아무리 돌봐주는 분이 오신다고 해도 안정되는 부분이 없잖아. 어머니 퇴원하시면 차라리 다시 보내는 게 좋을지도 몰라. 아이가 하는 행동 보면 술 안 드실 땐 잘해주시는 것 같으니까.”

내가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하나 따위를 생각할 때 이놈은 아이의 정서까지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그의 말을 들을수록 내가 생각 없이 산다는 게 여실히 보이면서, 외면하고 있던 뒷일들이 덜컥 다가왔다.

“너 혼자 다 총대 메지 말고, 어머니가 나오시면 사회 활동을 할 수 있게 도와드려. 다른 분들처럼 일상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신다면 오히려 아이가 평범하게 자랄 수 있는 확률이…….”

“네 마음대로 평범 같은 단어는 쓰지 마. 평범이란 게 어떤지도 모르면서.”

단호하게 끊는 나를 보던 그는, 눈두덩을 지그시 누르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 그런데 너도 모르잖아, 평범한 삶이 어떤 건지. 그러니까 최소한의 도움을 드리면서 네 동생한테는 부모라는 존재를 돌려주고 좀 안정적으로 살게 해주는 게 어떻겠냐고.”

“사람은 쉽게 안 바뀌어. 그저 잠깐 착각 속에 빠졌다가 돌아올 뿐이야. 그런 흑백의 세상에서 살면서 모든 걸 잃어버리는 것보단, 차라리 어중간한 삶에서 타협하면서 지킬 수 있는 건 지키며 사는 게 더 나아.”

“시도해본 적도 없잖아.”

그는 아무렇지 않게 나를 노력 따윈 해보지 않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러더니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말인 척, 가벼운 말투로 말을 이었다.

“넌 이미 안 된다고 생각한 것들은 시도해보지도 않잖아. 알아, 내가 너희 남매 인생에 대고 뭐라 할 자격이 없는 거. 그래도 지금 같이 살고 있으니까, 그냥 네가 고를 선택지 중 하나로 넣어보기라도 하라고 말해준 거야. 이런 경우의 수는 네 머리에서 만들어지지 않을 걸 뻔히 아니까. 치료비든 주거 환경이든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도와줄…….”

“뭘 자꾸 도와준대? 왜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자꾸 네가 한다고 나서는데. 네가 지금 편의를 봐주는 것도 알고 있고,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긴 한데, 제발 내 삶에 일일이 끼어들면서 간섭하지 말라니까? 알아서 해결할게. 나한텐 부담스러울 뿐이라고.”

확률 운운하며 보편적인 환경에 관해 이야기하는 걸 보니, 녀석은 그저 책에서 읽은 수많은 이론과 들은 이야기들을 짜깁기해 훈수를 두는 게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처럼 모든 걸 마음대로 바꿔버릴 수 있고 치료를 할 수 있다면 이 세상 다른 사람들은 뭐 하러 괴로움을 느끼고 버티며 삶을 살아간단 말인가. 모조리 뜯어고쳐 다 똑같이 살아가면 될 일을.

나와 싸우는 것도 이제 지겨운 건지, 마주치던 시선도 돌려버린 채 애꿎은 매트리스만 꾹꾹 누르는 녀석한테 말했다.

“일부러 그러는 거야? 내가 거절할 수 없는 거 알고, 네가 잘났다는 거 알려주려고? 어떻게 해서든 올해 안으로 나갈 방법 찾을 테니까 아이한테 굳이 잘해주려고 하지 않아도 되고, 나한테 잘해주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어. 네가 지켜야 할 사람들이나 생각하면서 해야 할 일이나 해. 괜한 데 힘 빼지 말고.”

“……그래. 알았어.”

콧방귀를 뀌는 녀석이 뭐라도 한 마디 더 건넬 줄 알았지만 의외로 대화를 끊으며 침대나 사고 돌아가자는 말뿐이었다.

혼자 나왔으면 좋았을 걸, 왜 같이 나와서 말싸움 따위를 해야 했는지. 결국엔 내 결정대로 작은 침대를 샀다.

“내일 오전 중으로 배달 갈 거예요. 출발할 때쯤 전화할 테니까 만약 댁에 없으실 것 같으면 미리 말씀 주시면 되고요. 이건 서비스로 드리는 거예요.”

직원이 커다란 소시지 같은 보디필로를 들이밀었다.

“오늘 갖고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배달할 때 같이 가져다드릴까요.”

“배달할 때 가져다주세요.”

그는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나를 앞장섰다. 승아가 놀고 있는 키즈 카페는 바로 옆 건물이었기에 함께 걷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그 짧은 시간마저도 불편했다.

진지하고 고풍스러운 느낌의 클래식 음악이 풍기던 가구점과 달리 키즈 카페는 간판과 안내문까지 명랑하기만 했다. 형형색색의 장난감과 놀이기구, 그리고 아이들이 만드는 희로애락이 담긴 소음들이 공간을 가득 채워 입장했을 때부터 정신이 없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직원은 입장하는 재혁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헉, 저…… 죄송한데, 저희 카페는 뱀파이어분들의 입장을 거절하고 있어서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대기실에…….”

정석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과 다르게 그를 좋아하던 이였는지, 수줍게 사인과 사진 촬영을 부탁하는 모습이 연예인이라도 보고 있는 줄 알았다. 기다릴 필요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삼삼오오 모여 하하호호 하고 있거나 아이들과 놀며 밥을 먹이는 여자들 사이에서, 팀장님은 세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어딘가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아빠를 부르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허허 웃으며 손으로 대답을 하는 그의 모습은 여전히 낯설었다.

생전 처음 와보는 아이들만의 공간에서 두리번거리며 팀장님이 있는 곳으로 가는데, 사람들은 젊은 남자의 존재가 낯설었는지 나를 보며 웅성거렸다. 덕분에 눈치챈 팀장님이 먼저 인사를 했다. 혹시 몰라 팔다리를 다 가리는 옷을 입고 온 게 천만다행이었다.

“하도 안 오길래 어디서 또 주먹다짐이라도 하는 줄 알았네. 재혁이는?”

조금은 찔렸지만 주먹다짐은 아니었으니.

“설마요. 입장부터 거절당해서 쫓겨났죠, 뭐.”

“허, 그 녀석이라면 예외라도 시켜줄 줄 알았는데. 여기 자주 와야겠네. 바람직한 곳이야.”

쌍둥이들은 저보다 조그만 아이에게 ‘언니’라는 걸 강조하면서 뭐라도 하나 나누어주고 가르쳐주려고 과하게 친절을 베풀고 있었다.

이 순간에 쌍둥이들이 하는 행동이 최근 들어 나를 대하는 그 같아 보였다면 심각한 자의식 과잉에 빠진 게 맞을 터였다.

“몇 달은 더 치고받고 싸울 줄 알았더니 그렇게 친해질 줄 누가 알았겠어.”

“안 친합니다. 그냥 비즈니스 관계일 뿐이죠.”

“비즈니스…… 비즈니스 좋지. 그래, 비즈니스라도 하는 게 어디야.”

턱을 쓰다듬으며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팀장님의 눈빛엔 의문이 가득했다. 괜히 찔려서 티셔츠 목 부분을 잡고 끌어올리며 말했다.

“그리고 팀장님이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은데요. 팀장님이 만드신 판이라면서요.”

“그렇게 말하니까 굉장히 악인이 된 것 같잖나. 지금 당장이야 거지 같은 일투성이로 보이겠지만 다 지나고 생각하면 나한테 고마워하게 될걸.”

“언제쯤 그렇게 느낄 수 있는 겁니까.”

“다 끝났을 때?”

“대체 뭐가 언제 다 끝난다는 거죠.”

“적어도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끝나겠지.”

그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우스꽝스러운 레몬 캐릭터가 그려진 조그만 사탕을 내 손에 쥐여줬다. 윙크를 하며 손 키스를 날리는 캐릭터는 어딘가 약을 올리고 있는 듯 보였다.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봐.”

“지금도 충분히 잘 참고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만…… 저도 뭘 알아야 이쪽에 달라붙든 저쪽에 달라붙든 하죠.”

“그래서 말인데, 다음 주쯤 저 녀석 본가에 내려갈 거야. 그때 같이 내려갔다 와.”

그와 같은 놈들이, 아니, 그보다 더한 놈들이 바글거리는 그의 집에 내 발로 왜 들어가야 하는지. 밑도 끝도 없는 명령조에 소심하게 반항을 한번 해봤다.

“……제가 거길 왜 가야 하나요.”

“판이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알고 싶다며. 가서 직접 보라고. 저 녀석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좀 엿보고 말이야. 네 삶만 다 드러내는 거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었나? 내 눈엔 그래 보였는데.”

가지 않으려면 무슨 핑계를 대야 하나 굴리던 생각은, 팀장님이 의미심장하게 던진 말에 싹 사라졌다.

“며칠 정도요? 승아도 데려가라는 말씀인가요.”

인제야 나를 발견한 승아는 열심히 손을 흔들더니 내가 날리는 인사는 받지도 않고 자신에게 모형 당근을 건네주는 아이에게 집중했다.

“설마. 한 일주일 정도 있으면 될 것 같군. 승아는 그동안 우리 집에서 지내게 하면 돼. 한두 시간 지켜봤는데 우리 애들이랑 꽤 사이도 좋아 보인단 말이야.”

“그 녀석도 제가 같이 가는 거 알고 있는 겁니까?”

“알고 있지.”

이젠 둘이 대화를 하는 모습을 보면 엿듣고 싶은 충동이 생길 것 같았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어제 일 터질 줄 미리 알고 계셨습니까. 아무리 봐도 그놈은 알고 있던 것 같아서…….”

“그럼.”

“……서류 작업은 대체 왜 시킨 겁니까. 알았으면 차라리 잠이라도 재우시지요.”

“너무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면 곤란하잖나. 평소처럼 굴리고 있어야 안 이상해 보이지. 그래서 내가 들어가서 자라고, 자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도 귓등으로도 안 들어놓고 지금 와서 그렇게 쳐다보면 좀 억울한데.”

“잘나셨습니다.”

“그러니까 아직 여기에 있지.”

팀장님은 다 알고 있다는 듯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말인데, 부탁 하나만 해도 됩니까.”

말해보라는 듯 눈썹을 으쓱거리며 나를 향해 턱짓했다.

“관사 좀 옆 건물로 옮겨주시면 안 됩니까. 거긴 방도 있다면서요. 승아까지 있어서 지내기 불편한데.”

“네 입에서 비즈니스라는 말이 안 나오면 생각 좀 해보고.”

“제가 그놈이랑 꾸역꾸역 같이 살게 된 게 정말 팀장님 때문이었습니까.”

팀장님은 대답 대신 오래 놀았다며 슬슬 돌아가자고 아이들을 불렀다. 아이들은 아빠에게 대롱대롱 매달리며 더 놀다 가자며 떼를 썼고, 안 된다고 매정하게 말할 줄 알았던 팀장님은 묵직한 목소리로 한 자 한 자 목소리를 높여가며 물었다.

“여기서 제일 신나게 놀 수 있습니까!”

“네!!”

우렁찬 대답을 들은 팀장님은 아이에게 출동을 외쳤다. 아마 내가 팀장님을 알게 된 후 본 것 중에서 가장 꾸밈없는 웃음이었을 것이다.

***

“아빠!! 이거!!”

쌍둥이는 제자리에서 방방 뛰며 팀장님께 자신의 위치를 알리고 있었다. 그런 쌍둥이 사이에 있는 승아도 덩달아 껑충껑충하고 있었는데, 한참 동안 셋을 관찰하고 알아낸 결과는 아이들은 일단 뛰면 웃는다는 것이었다.

팀장님은 아이들이 부르는 곳을 향해 허겁지겁 달려갔다. 그 머리 위에서 어울리지 않게 달랑거리는 하트 핀이 조금 해괴해 보였다.

“으, 더워.”

명랑한 음악이 쉴 새 없이 나오는 놀이공원에는 평일 오후임에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표가 남는다며 함께 가자는 팀장님의 권유를 대차게 거절하고 싶었지만, 승아가 눈을 반짝거리며 기대를 보이는 바람에 차마 거절을 할 수 없었다.

그저 열심히 노는 아이를 지켜보기만 하면 될 줄 알았지만, 놀이공원은 생각보다 넓고 보호자 동반을 요구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휴식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쉴 새 없이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쫓아다녀야 했다.

놀이공원은 색 찰흙을 빚어서 만든 건물들이 줄지어 있었고, 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각종 캐릭터 덕에 지루할 틈이 없었다. 사방에서 나는 핫도그 냄새와 머리가 아플 정도로 퍼지는 팝콘 냄새에 절로 인상이 써졌다.

시각, 후각 할 것 없이 정신이 없었다. 사방에선 자진해서 스릴을 만끽하는 사람들의 자지러지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고, 그들을 놀리는 듯 시끄러운 음악에 맞춰 추임새를 넣는 직원들의 목소리가 혼을 쏙 빼놓고 있었다.

“처음 와봐? 엄청나게 두리번거리네.”

재혁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걸어가는 나를 보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자신의 머리 위에서 달랑거리던 꽃핀을 빼서 나의 머리에 꽂았다. 한 걸음씩 뗄 때마다 꽃핀이 박자에 맞춰 흔들렸다.

그는 사람들이 알아보는 게 조금 귀찮아졌는지 매장에서 새카만 모자를 사서 푹 눌러쓰고 있었는데, 모자를 써봤자 그의 덩치와 비율 덕분인지 앞으로 봐도 뒤로 봐도 눈에 띄어서 별 소용이 없어 보였다. 꽃핀을 빼서 다시 그에게 돌려주며 말을 걸었다.

“……너는 왜 온 거냐. 주목받는 게 싫으면 그냥 돌아가든지.”

확실한 건 그에게 다가오다가도 똥 씹은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나와 눈을 마주치고 돌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딱히 싫은 것도 아니었고 다만 푹푹 찌는 날씨에 긴팔 상의와 긴바지를 입고 돌아다니는 게 괴로워서였는데, 아마 그에겐 좋은 방어막이 되는 모양이었다.

“네 동생이 나를 너무 좋아해서?”

“성인군자 납셨다. 지금은 안중에도 없어 보이는데.”

“저길 봐라.”

그가 턱으로 까딱거린 곳에서는 아이들과 팀장님이 온 힘을 다해 우리를 부르고 있었고, 심지어 양 갈래를 한 직원까지 마법 봉을 흔들며 우리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하…….”

그들이 기다리고 있던 건물에는 ‘뽀니의 마법 나라’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고, 그 앞에서는 둥글둥글한 토끼 캐릭터가 별 모양 지팡이를 휘두르며 활짝 웃고 있었다.

아이들 손에 끌려 들어간 건물 내부는 이미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2~3분의 재미를 위해 한 시간을 투자하는 게 나쁘다고는 생각하진 않았지만, 무료한 시간이라고 생각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앞에서 까르륵거리며 웃는 아이들을 두고 30초 간격으로 무한 반복되는 화면을 넋 놓고 지켜보고 있던 탓에 이제 대사까지 다 외울 지경이었다.

오늘도 뽀니와 함께 악당을 물리치고 우리의 친구 세라…….

“……를 찾아 떠나볼 거예요. 호롤라 리루, 삐리롱!”

머릿속을 돌던 말은 어느새 입 밖으로 나와 화면 속 캐릭터와 하나가 되었다. 아무도 못 들었겠거니 생각하고 모른 척 있었건만, 꽤 목소리가 컸는지 사방에서 꽂히는 시선에 고개를 벽 쪽으로 돌려야 했다.

“삐리롱……? 백유운, 마법 쓰는 거에 관심이 많을 줄 몰랐네. 아프면 들어가서 쉬어. 승아는 나중에 데려다줄 테니까.”

팀장님은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했고, 옆에 있던 재혁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콧구멍을 벌름거리고 있었다. 얼마나 격하게 웃음을 참고 있는지 어깨까지 들썩거렸다.

“……관심 없습니다. 몸 상태 최상인데요.”

괜히 이마에 흐르던 땀방울을 닦아냈다.

시간이 지날수록 슬슬 다리가 아파오는지 승아는 재혁의 바지를 잡고 안아달라 조르고 있었다. 안 그래도 찌는 날씨에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 차라리 나한테 안기라고 했지만 계속 그의 다리를 붙잡고 있는 게, 그냥 그의 몸이 시원해서인 듯 보였다.

결국에 그에게 안긴 채 평화로이 졸고 있는 걸 보니, 나는 여기서 무얼 하는 건가 회의감이 들었다. 건물 안에서 햇빛을 피하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밖에 서 있었다면 아프다는 핑계로 정말 돌아갔을지도.

문을 열고 나온 직원이 노랑 망토와 뾰족한 마녀 모자 차림으로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마이크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그녀는 세상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하며 아이들을 이끌고 움직였고, 바닥에 널브러졌던 아이들은 금세 초롱초롱한 눈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네모나고 하얀 방에 갇혀서 뭘 하나 했더니 사방을 둘러싼 화면이 나오기 시작했다. 자신을 뽀니라고 설명한 토끼는 악당을 물리치러 가야 한다며 비장하게 동물 친구들을 모집하더니 우리에게 그들을 소개하고 길을 안내했다.

승아도 재혁의 품에서 고개를 들고 주변을 살피느라 바빴다.

“내려갈래?”

재혁의 물음에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보다 더 작은 방으로 우르르 몰려가자 천장에서 화면이 시작됐다. 직원은 화면이 시작되는 타이밍에 맞춰 다시 입을 열었다.

[어린이 여러분! 뽀니가 악당을 마주하러 갈 문을 열 수 있게 힘을 모아줘야 해요! 제가 뽀니야! 하고 외치면 여러분은 힘내! 하고 외쳐주세요! 자아, 뽀니야!]

“힘내!!!”

이런 황당한 요구에 누가 응해줄까 싶었지만 아이들은 꽤 진지하게 그녀의 요구에 답해주었고, 심지어 어른들도 우렁차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아마 입을 다물고 있는 건 나와 재혁, 그리고 무슨 놀이기구인지 모르고 들어온 듯한 커플이 전부였다.

슈팅 게임이라고 해놓곤 무슨 헛짓거리인가 했더니 마지막 방에는 영화관이라도 온 것처럼 개인 자리와 함께 마법 봉이 놓여 있었다. 앞을 가득 채운 스크린을 두고 나름대로 질서정연하게 자리에 앉자 악당이라기엔 깜찍하게 생긴 용이 불을 내뿜으며 씩씩거리고 있었다.

“나 참, 별짓을 다 해본다, 진짜.”

민망함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지만 마법 봉을 들고 있자니 화면에 뜬 놈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집중해서 마법 봉을 들고 열심히 버튼을 누르는데 옆에 있던 재혁은 심드렁하게 버튼을 누르며 말을 걸었다.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니야?”

“……난 원래 다 열심히 해.”

그를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주변에서 악당의 부하랍시고 둥둥 떠다니는 새하얀 새끼 용들이 왠지 옆에 있는 놈 같아서 남들이 다 중앙을 노릴 때 나 홀로 부하 놈들을 조준하며 이를 갈았다.

결과는 너무나 당연한 수준이었다.

“백유운, 자라나는 새싹들을 다 짓밟고 1등을 한 소감이 어때.”

팀장님은 손뼉을 치면서 감탄사를 내뱉고 있었고, 아이들은 제 아빠를 따라 손뼉을 치며 까르륵거렸다.

“예에, 뭐가 되었든 1등은 뿌듯하네요.”

건물 밖으로 나가자마자 내리쬐는 햇살에 힘이 다 빠지는 느낌이었건만, 아이들은 지치지도 않는 건지 바로 새로운 목표를 향해 뛰었다. 어쩔 수 없이 세 어른도 열심히 뒤를 쫓았다.

벌써 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도 낮에 달궈진 땅으로 공기가 후끈거렸다. 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좋지 않은 컨디션에 현기증이 일었다. 결국엔 어린이용 롤러코스터를 타러 간다는 아이들을 팀장님에게 모두 맡긴 채, 퍼레이드 명당이라며 찍어준 곳으로 양손 가득 짐을 들고 갔다.

“어으…….”

목이 타는 탓에 얼음 더미에 묻어놓고 파는 음료수를 샀건만 회전율이 너무 빨라 음료수는 미적지근했다.

커다란 광장이 있는 곳에 적당히 자리를 잡고 돗자리를 펼쳐 앉았다. 팀장님이 말한 쇼가 시작되려면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아 있었지만, 벌써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 꽤 많았다. 멍한 머리를 들어 올렸더니 눈부셔야 할 앞이 그늘로 가려 있었다.

“하, 말하기도 귀찮다. 시비 걸 생각이면 그냥 갈 길 가.”

새까만 우산을 들고 있던 재혁이 옆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힘들면 상가라도 들어가 있다가 나오든가.”

“그 정도는 아니야.”

“별 똥고집을 다 본다.”

“원인 제공자는 입을 열 자격이 없어. 조용히 하는 게 도와주는 거다.”

그는 피식 웃더니 내 머리를 잡아 제 허벅지에 눕혔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반항 한번 못 해보고 다리만 휘적거리다가 그의 허벅지에 눕는 신세가 됐다.

“팔다리 버둥거릴 생각 하지 말고 자. 빈혈기 있는 거 아니까.”

찔리는 게 있나 보지.

그와 몇 개월 함께 있어본 결론은, 뻗대며 거절하는 것보다 그냥 이용하는 게 서로가 편하다는 거였다.

“징그러운 새끼. 죽을 때가 다 됐나 보네.”

“그렇다고 치지, 뭐.”

그는 나의 말을 감정 없이 받아치며 손으로 나의 눈과 이마를 덮고 꾹 눌렀다. 익숙한 장면이 떠오르면서, 몸에 있던 열이 얼굴로 쏠렸다. 화끈한 얼굴을 가라앉히기 위해 괜히 쌀쌀맞은 말을 던졌다.

“난 일관성이라도 있게 살잖아. 넌 뭐냐. 날 바퀴벌레 취급하던 놈이 갑자기 왜 이래.”

“난 파릇한 10대 시절을 돈 주고 여자나 사서 끼고 다니는 깡패 두목쯤으로 취급받았는데 뭐 바퀴벌레 정도로 그래. 그리고…….”

그는 얼굴을 덮은 손가락을 가볍게 굴리다가 말을 이었다.

“놀리면 반응이 은근 재밌어.”

그의 팔을 치우며 한껏 노려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별일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오해한 것도 있고.”

“무슨 오해.”

그는 나의 미간에 자리 잡은 주름을 쭉 펴며 대답했다.

“됐다. 중요한 얘기도 아니고, 잠이나 자라. 나도 좀 쉬게. 너랑 얘기하면 내가 다 지쳐.”

누구의 기억이 더 정확하고 사실적인지 따지는 일은 이젠 의미가 없었다. 굳이 들추면 자신의 기억만 주장하며 싸우게 될 걸 뻔히 알았기에 포기했다는 게 맞을 듯했다.

무슨 일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든 이 생활을 지속해야 했고, 복잡한 세상에서 그와의 관계까지 정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목에 닿은 그의 허벅지와 내 얼굴을 덮은 그의 손에, 온몸으로 시원한 피가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나 아직 너 싫어. 근데 왜냐고 물어보면 할 말이 없다. 왜 싫어하게 됐는지 솔직하게 말하면 이제 기억도 안 나.”

그는 나의 말을 듣더니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싸우면서 감정 소모하는 게 더 싫어. 피곤해. 그러니까 잠깐 휴전 좀 해.”

“휴전? 난 전쟁을 치른 적도 없는데.”

“손 좀 잡고 좁아터진 관사 좀 옮기자고. 너도 한 공간에서 지내는 거 불편할 거 아니야.”

그는 끄덕거리며 나의 턱 끝을 쓰다듬었다. 간질거리는 느낌에 손을 쳐내자 그는 순순히 물러났다.

“뭐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

뒤로 손을 뻗어 몸을 고정한 그는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아니, 이제 생각해야지…… 어차피 다음 주에 본가 내려갈 거라며.”

나의 말에 그는 그다지 탐탁잖다는 표정을 지었다. 몸을 지탱하고 있던 손을 들어 모자를 벗더니 눌린 머리를 털었다.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는 자유로운 머리카락이 그에게는 왜 잘 어울리는가…… 를 분석하며 빤히 보는데, 역시 그냥 얼굴이 잘나서 그런 거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재수 없게 진짜.”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나의 말은 참 한결같았다. 그는 이제 기분이 나쁘지도 않은지 답답하게 닫혀 있던 셔츠의 제일 위 단추를 풀며 말했다.

“하루에 한 번씩 들으니까 식상하다. 다른 걸로 좀 바꿔줘.”

“미친놈.”

그는 내가 하는 욕은 다 우스운지 콧방귀를 뀌었다.

그와 우산에 가려 사람들이 보이진 않았지만 웅성거리는 소리가 심해진 걸 보니 인파가 꽤 몰리기 시작한 듯했다.

손을 뻗어 음료수를 집으려고 하자 그가 몸을 숙여 집어주는 바람에 얼굴로 덮친 그의 향이 코에 박혔다. 뚜껑까지 따려는 녀석에게서 병을 빼앗았다. 누워서 목구멍으로 액체를 콸콸 들이붓는데 녀석이 입을 열었다.

“너.”

“……왜.”

“널 돈 주고 샀던 놈 만나면 어떻게 할 거야.”

뜬금없이 던지는 말에 음료수를 잘못 들이켜 기침이 연거푸 튀어나왔다. 벌떡 일어나 제대로 된 숨을 쉬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목구멍이 따끔거리고 눈물이 고였다.

“뇌에 필터링이라는 게 없냐? 별걸 다 묻네.”

남우세스러운 질문을 툭 던져놓은 그는 데굴데굴 구르는 병을 집어 뚜껑을 닫았다.

“뭘 어째. 내가 좋다고 다닌 건데 누굴 탓하겠어. 그리고 어차피 씨를 말려버릴 건데 뭘, 그중에 있겠지.”

“씨를 말려? 가족을 말살해버리겠다는 말이 이렇게 위협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니, 놀랍네.”

“그거야 두고 봐야 아는 거고.”

애들이나 주고받을 법한 의미 없는 대화를 한참을 주고받았다. 해는 8시가 다 되어가서야 지기 시작했고, 쇼 시작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각에야 돌아온 팀장님과 아이들은 양손 가득 먹거리를 들고 있었다.

“이거 봐요!”

재혁의 무릎 위에 자연스럽게 앉은 승아는 품에 쏙 안길 만한 토끼 인형을 들고 우리에게 자랑했다. 셋이 약속이라도 한 듯 똑같이 생긴 토끼 인형은 옷 색만 다를 뿐이었다.

“귀엽죠?”

승아는 갸웃거리면서 어깨를 최대한 끌어올리는 게 자신을 봐달라고 어필을 하고 있었다. 피식거리기만 하던 재혁은 얼굴을 활짝 펴고 아이에게 미소를 날려주었다.

그에게서 귀엽다는 소리를 들은 아이들은 왜인지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하며 몸을 비비 꼬았다. 나름대로 조용하던 작은 돗자리 안은 아이들 목소리로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팀장님이 내려놓은 음식은 웬만한 성인 다섯이 먹어도 부족하지 않을 양이었다. 가장 깔끔해 보이는 샌드위치를 까서 승아에게 넘겨주었다.

“이제 인형 잠깐 내려놓고 이거 먹어.”

아이는 마지못해 샌드위치를 들었지만 먹지는 않고 뚱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쌍둥이 중 언니인 진주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승아에게 말했다.

“승아야. 음식 가려 먹으면 안 돼. 어, 학교, 학교 들어가서 음식 남기면 집에 못 가. 샌드위치 빨리 먹고 언니랑 또 놀자!”

설마 저런 게 통할까 싶었는데, 시무룩해진 승아는 쭈뼛거리다가 결국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었다. 막상 먹기 시작하니 맛있었는지 금방 얼굴을 펴고 오물거렸다.

음식에 관심도 없는 재혁이 아이들의 식사를 도와준 덕에 팀장님까지 편하게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팀장님은 한입 남은 햄버거 조각을 입에 털어 넣으며 말했다.

“오우, 드디어 시작하나 보다.”

명랑한 안내음 소리와 함께 일대의 전깃불이 전부 꺼졌다. 인형 탈을 쓴 사람들과 이상한 비닐 옷에 전구를 달고 살랑거리는 이들이 뭐가 그렇게 좋은지 아이들은 눈을 깜박거리는 것도 잊은 채 구경하고 있었다.

성이나 자동차를 모티프로 만들었을 법한 구조물은 바퀴 하나가 아이들보다 컸다. 끝없이 들어오는 구조물들을 보면서 생각한 건 예쁘다는 것보다 과연 저 바퀴 하나에 얼마나 많은 전구가 박혀 있는가였다.

눈앞에서 휘황찬란한 구조물이 왔다 갔다 하는 덕에 절로 눈이 바쁘게 돌아갔다. 구조물 맨 꼭대기에 서서 하늘거리는 원피스 차림으로 금색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사람이 과장된 몸짓으로 아이들에게 우아한 인사를 전하고 있었다.

“우아…… 공주님.”

입을 다물 생각을 못 하는 승아를 보고서 아, 시간 낭비는 아니었구나, 이래서 애들을 데리고 다니는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꽤 아이에게 정이 들긴 했나 싶었다.

손을 흔들라고 시키는 팀장님의 성화에 못 이겨 쌍둥이는 손 인사를 멈추지 못하고 있었는데, 재혁은 눈앞에 오가는 것에 관심이 없는지 모자를 푹 눌러쓰고 멍하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내가 듣기에도 거대한 음악 소리를 듣고 있기 거북했는지, 그는 큰 소리가 날 때마다 눈썹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괜히 신경이 쓰였다.

“승아 주고 다른 곳에 가 있다가 와. 시끄러우면.”

“괜찮아. 인파 뚫고 나가는 게 더 귀찮기도 하고.”

다행히 여름에 맞춰 각양각색의 해양 생물을 표현한 인형들까지 지나가자 잔잔한 음악이 시작되었다. 갑작스러운 분위기 반전과 사람들의 분주한 움직임에 뒤를 돌아보자 스테이지 위에서 영상물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게 진짜지.”

팀장님은 익숙하다는 듯 감탄사를 내뱉었고,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사이로 ‘소중한 사람과의 추억’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영상이 지나갔다.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연인과 함께하는 이 시간이…….]

감동을 끌어내기 위한 문구들을 보며 공감을 할 순 없었지만, 애달프게 울려 퍼지는 현악기 소리에 정신없던 하루가 정돈되는 느낌이었다.

잔잔한 선율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잠시, 형형색색의 불꽃들이 하늘로 솟구치며 터졌다. 소리만 들으면 어디서 전쟁이라도 난 듯싶었지만, 하늘은 연속적으로 터지는 빛들로 밝아지며 쉴 새 없이 일렁거렸다.

시차를 두고 터지는 불꽃들의 향연은 정말 짧았지만, 사람들의 감탄사로 발이 묶인 듯 계속 잔상을 남겼고, 떨어지는 금빛 가루에 절로 시선이 잡혔다.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넋을 놓고 하늘을 봤다. 별것 아닌 불빛에 며칠간 쌓인 응어리들이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저씨, 저기 봐요!”

시선을 떨구기가 무섭게 승아는 나에게 하늘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원하는 것을 쥐고 떼쓰는 것보다 눈치를 살피는 걸 먼저 익혀버린 아이였다. 스스럼없이 요구하고 얻어내는 다른 또래 아이들을 보니, 얼마나 일찍 철이 들어버렸는지 눈에 훤했다.

내가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참고 견디는 일을 반복하다가 비난의 화살을 나에게 돌리고, 결국은 남 탓만 하며 살아왔으니까. 그런 삶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결국엔 자신을 파괴하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아이의 삶이 나와 같아지기 전에 막을 수 있다면 막아주고 싶었다.

매 순간을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할 수 있지만, 살아온 날들이 잘되었다고 할 수 없다는 게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 느끼지 않았으면 했다.

그렇기에 이미 엉망인 나보다는, 재혁을 따르며 그와 같은 여유 있는 삶을 살길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뭔 생각을 그렇게 해.”

재혁이 여타 사람들과는 다른 방향을 보고 있는 나에게 물었다. 불꽃놀이의 불빛 덕에 모자에 가린 그의 얼굴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너 등 쳐 먹을 생각.”

그는 나의 밑도 끝도 없는 도발을 받아치며 웃었다.

“줘도 못 받아먹으면서 무슨. 할 수 있는 만큼 해보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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