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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분출된 욕망 (3/20)

3. 분출된 욕망

홍승표는 그날 후로 학교에 오지 않았다. 며칠째 빈자리는 이따금 김진호가 앉았다.

그가 출석하지 않은 첫째 날에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둘째 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게 며칠 반복되자 두영은 불안해졌다. 홍승표는 항상 갑자기 나타났다. 피식자가 경계를 풀고 나태해지는 순간을 노리는 맹수처럼. 그리고 지난번처럼 자신을 굴복시킬 것이다.

더 이상 생각을 이어 가는 게 버거웠다. 두영은 눈을 감고 수마가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잠깐 눈만 감고 있겠다는 걸 푹 자 버렸다. 베고 누운 팔이 끊어질 것처럼 저렸다. 정신이 들랑날랑하는 순간이었다.

“이주학 어디 병원에 입원했냐?”

불시에 들려온 이주학의 이름에 두영은 정신이 바짝 들었다. 이도 저도 못 하고 눈만 깜빡였다. 사건의 경위를 알고 있기에 더욱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전에도 그렇고, 저들은 왜 자꾸 제 앞에서 떠드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이 정도면 거의 저 들으라고 하는 소리가 확실했다.

“큰 병원에 입원했다고 들었는데,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다.”

이주학은 야간 순찰하던 수위에게 발견되어 병원에 실려 갔다. 조금만 늦게 발견했으면 저체온증으로 이승을 떠날 뻔했다.

그 일이 있고 다음 날 학교에는 이주학에 관해 몇 가지 소문이 떠돌았다. 첫 번째는 이주학 사망설이었고, 두 번째는 머리를 크게 다쳐 장애인이 되었다는 소문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주학은 죽지도 않았고, 장애인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머리를 크게 다친 건 사실이라 병원에 며칠 입원해 있어야 했다.

“근데 진짜 누구 같냐? 이주학 그 덩치를 반병신으로 만들 정도면 때린 놈도 한 덩치 할 것 같은데.”

쌍꺼풀이 묻자 곱슬머리가 대답했다.

“내가 걔 언제 한 번 크게 털릴 줄 알았다.”

“뭐라는 거야. 아주 이주학 앞에서 경고해 주지 그랬냐. 너 계속 나대면 바지 적삼 피똥으로 적셔요, 하고.”

두영은 뺨 안쪽 살을 깨물었다. 마지막으로 본 이주학의 모습은 방금 그들이 말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피똥은 아니지만, 아무튼 젖어 있었다.

오늘따라 쉬는 시간이 긴 것 같았다. 곱슬머리와 쌍꺼풀의 수다가 멈추지 않았다. 그때 두영의 빈 옆자리에 김진호가 앉았다. 그에게서 급식실 냄새가 났다. 그제야 두영은 지금이 점심시간인 걸 알아챘다.

김진호는 오자마자 이주학의 험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씹돼지가 존나 나대긴 했지.”

휴대폰 게임을 하던 김진호는 게임이 잘 풀리지 않는 모양인지 휴대폰을 신경질적으로 책상에 엎어 두었다. 쌍꺼풀이 김진호에게 물었다.

“넌 병문안 안 가?”

“미쳤냐? 가서 시다 짓이나 하게?”

“그 정도로 다쳤으면 반 불구 상태 아니야?”

“지 업보지 뭐.”

매정한 김진호의 말에 쌍꺼풀은 입을 다물었다. 김진호는 손을 위로 길게 뻗어 기지개를 켰다.

“아무튼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해. 그렇지, 허두영?”

팔이 저려서 조금 뒤척인 두영은 갑자기 제 이름이 거론되자 느린 굼벵이처럼 허리를 세웠다. 세 쌍의 눈이 저를 뚫어지게 보고 있자 손에 땀이 차고 심장이 날뛰기 시작했다.

의자에 삐딱하게 앉은 김진호가 물었다.

“넌 누가 그랬는지 아냐?”

흥미진진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곱슬머리가 끼어들었다.

“쟤가 뭘 알겠냐?”

“기다려 봐, 뭔가 아는 것 같은데.”

김진호는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듯 말하며, 갑자기 엉덩이를 앞으로 내밀더니 물먹은 솜처럼 늘어졌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자세였다. 머리를 느슨히 쓸어 넘기자 그의 손목에서 메탈 빛이 반짝였다. 홍승표가 차고 다니던 시계와 똑같은 디자인이었다.

쌍꺼풀이 시계를 발견하고 입을 뗐다.

“어? 그거 파텍 아니야? 미친, 니가 이걸 어떻게 가지고 있냐? 홍승표 거 그렇게 눈독 들이더니 기어이 훔친 거냐?”

“아! 시발 뭐래! 아는 형님이 싸게 싸게 팔아서 산 거야!”

전부터 김진호는 홍승표를 유심히 관찰했다. 어떨 때는 이주학보다 홍승표를 더 따르기도 했다. 하지만 제아무리 값비싼 것으로 치장해도 진짜는 이길 수 없었다. 홍승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가 있었고, 김진호는 그냥 후졌다.

5교시 시작종이 울렸다. 동시에 교실 문이 열리고 홍승표가 들어왔다. 창가에 맺힌 햇빛이 그의 길을 비췄다. 세상 혼자 사는 듯한 등장이었다. 진한 눈동자와 흑발이 블랙홀처럼 빛을 흡수했다.

그가 가까이 오자 김진호가 탐탁지 않은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홍승표는 밖에 나와 있는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두영을 향해 미소 지었다.

“안녕?”

태평한 인사에 두영은 말을 잃었다. 그날 이후로 자신은 매 순간 홍승표를 떠올리며, 생살이 남아나지 않을 정도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손에 물을 묻히기도 무서운 상태이다.

고개를 푹 숙인 두영은 몽땅한 거스러미를 뜯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런데 별안간 홍승표가 두영의 손을 덥석 잡았다. 커다란 그의 한 손에 두영의 두 손이 모두 가려졌다.

인사를 무시해서 화가 난 건가? 두영은 머뭇머뭇 시선을 맞췄다. 그는 여전히 나른한 낯짝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부드럽게 휘어진 입매는 여름의 녹수처럼 싱그러웠다.

“그때 잘 돌아갔어?”

그는 꺼림칙하게 다정한 목소리로 그날 일을 언급했다. 두영이 아랫입술을 꾹꾹 깨물고만 있자, 홍승표의 시선이 두영의 입술에 닿았다.

“거기 맨 끝, 책 안 펴니?”

언제 들어온지도 모를 교사가 두영을 지적했다. 두영은 허둥지둥 책상 서랍을 뒤졌다. 마음이 급해서 찾는 책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아침에 꺼내 온 것 같은데…….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손에 치여 책 몇 권이 바닥에 떨어졌다. 어수선한 행동에 하나둘 두영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수 쌍의 눈이 제게 향하자 두영의 손가락이 뻣뻣해졌다. 자신이 뭘 찾으려고 했는지 생각도 안 났다.

손에 땀이 고이고 눈앞이 흐려지는 순간이었다. 옆 책상에서 활짝 펼쳐진 교과서가 두영의 책상으로 넘어왔다.

“저랑 같이 볼게요.”

홍승표가 무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두영은 책상 중앙에 오작교처럼 펼쳐진 책을 멍하니 보았다. 그러다 그가 바닥에 떨어진 책을 주워 주는 모습에 얼른 정신을 차리고 같이 마저 주웠다.

그가 주운 책을 두영의 허벅지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아주 찰나, 그의 손이 제 허벅지 안쪽을 짧게 스치고 떨어졌다. 은근했지만, 노골적이었기에 모를 수 없었다. 그러나 두영은 아까처럼 주의를 끌고 싶지 않았기에 꺼림직한 티를 내지 않고 의자에 똑바로 앉았다.

이제 어색한 상황이 정리된 줄 알고 안심한 순간이었다. 홍승표가 교과서를 두영 쪽으로 전부 밀어 주며 거리를 좁혀 왔다. 숨소리가 의식될 정도로 가까웠다.

“너 눈 안 좋잖아. 난 여기서도 보여.”

두영은 눈을 끔뻑였다. 시력이 나쁜 건 사실이지만, 제 사정을 홍승표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무심코 옆을 돌아보자 홍승표가 턱을 괸 채 은은히 웃고 있었다.

“칠판 볼 때, 너 항상 눈을 게슴츠레 떠.”

홍승표는 떠오르는 이미지를 따라 하듯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러고는 두영의 손에 눈길을 주며 말을 이었다.

“아프겠다.”

“어?”

“손.”

두영은 냉큼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야무지게 말려 들어간 손을 본 홍승표가 갑자기 팔에 얼굴을 파묻고 어깨를 떨기 시작했다. 두영은 당황하여 교사를 한 번, 홍승표를 한 번 쳐다보았다. 대체 어느 부분에서 그가 웃은 건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지루한 수업이 하릴없이 이어졌다. 누구 덕에 완전히 잠이 달아났다. 모든 수업을 똘망똘망한 눈으로 버텨 내자 과목별 교사들이 네가 웬일이냐는 눈빛으로 관심을 줘서 진땀을 뺐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서둘러 교실을 빠져나온 두영은 육교까지 뛰어오느라 숨이 벅찼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면 이제 홍승표와 마주칠 확률이 줄어들 것이다.

육교를 마저 건넌 두영은 반대편 인도에 발을 딛고서야 걸음 속도를 줄였다. 기도 구멍이 틈도 없이 쩍쩍 말라붙은 느낌이었다.

두영은 고불고불한 골목에 들어섰다. 초행인 사람은 무조건 길을 잃고 헤매는 곳이었다. 한바탕 뛰어서 그런지 자꾸 맑은 콧물이 흘렀다. 두영은 수시로 훌쩍대며 차갑게 곱은 손으로 코를 문질렀다. 날씨가 중간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매해 양날의 검처럼 극단적이었다.

두영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걸었다. 다홍으로 물든 하늘이 건물 지붕에 가려져 한 뼘만 했다. 불현듯 영혼이 분리되는 감각에 두영은 가슴을 주먹으로 쳤다. 요새 자주 느끼는 이 기분은 죽음이 당장 제 눈앞에 있어도 남 일처럼 대할 것 같은 상태가 되게 했다.

낯설고 기이한 감각을 애써 몰아낸 두영은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갔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유재민이 밖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보나 마나 편의점에 가는 것이다. 두영은 그가 부디 맨손으로 돌아오지 않기를 응원하며 배웅했다.

가만히 있으면 안 좋은 생각만 하게 되어 일부러 일을 찾아서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해도 기운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날씨가 추워지면 우울해지는 빈도가 늘었다. 무기력함에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지만, 제 의지는 우울의 바다에 묵살되었다.

그 순간 차임벨이 울렸다. 두영은 유재민이 돌아온 줄 알고 얼굴 위에 밝은 가면을 썼다. 그러나 카페에 들어온 이는 유재민이 아니었다.

“안녕?”

홍승표가 군더더기 없이 인사했다. 오늘만 두 번째 받는 홍승표의 인사에 두영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진한 미소는 예전에 유재민이 해외여행 갔다가 사 온 보드카 초콜릿 같았다. 호기심에 먹어 봤다가 결국 끝까지 삼켜 내지 못하고 뱉었었다.

술과 초콜릿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방금 그 생각이 바뀌었다. 홍승표는 만인이 사랑하는 초콜릿과 술 같았다. 다크 초콜릿 같은 겉모습 뒤에 높은 도수의 잔인함이 있었다.

앞치마를 움켜쥔 두영은 시선을 떨어뜨렸다. 자신의 안전한 공간이 가장 불안한 홍승표에게 들켜 버렸다. 유일한 희망의 끈이 싹둑 끊긴 기분이었다.

“어, 어떻게…….”

“여기서 일해?”

“설마… 나 미행했어?”

“설마가 설마야.”

진실을 둘러대지도 않은 홍승표가 손을 위로 뻗어 천장을 짚어 보았다. 카페는 층고가 낮았고 테이블도 세 개만 있는 작은 공간이었다. 조용히 카페를 둘러보던 그가 입을 뗐다.

“좁아, 너처럼.”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못 알아들은 두영은 한쪽 눈을 찡그렸다. 그러자 홍승표가 검지로 자신의 입을 톡톡 두드렸다. 반사적으로 입술을 가린 두영은 순간 아차 했다. 당황해서 날것의 반응을 모조리 보여 주고 말았다.

뒤늦게 눈에 힘을 주고 홍승표를 노려보자, 그는 샐쭉 웃을 뿐이었다. 자꾸 그에게 말리는 듯한 기분에 두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 곤란한 표정에 홍승표는 한숨을 늘어트리며 말했다.

“그래 미행했어. 그럼 안 돼? 그래도 되는 사이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네.”

두영은 장이 꼬이는 감각을 여과 없이 느꼈다. 소매 안쪽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손목을 헤집었다. 겨우 아문 상처가 벌어지고 옅은 피가 스며 나왔다.

아무래도 홍승표는 자기가 하는 짓이 가벼운 장난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상대는 장난으로 던진 조약돌에도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저주받은 개구리 허두영이었다.

기다란 침묵이 오갔다. 두영은 제 심장의 울음을 들었다.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숨소리가 몸 안에서 구슬프게 울렸다.

“어떻게 생각해? 내가 손님인 거에 대해.”

그의 말대로 그는 손님이었고 자신은 일개 알바생이었다.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도 여전히 자신은 피식자고, 그는 포식자였다.

홍승표는 수기로 적은 듯한 메뉴판을 눈으로 훑으며 평범한 손님인 척 연기를 시작했다.

“추천 메뉴 있나요?”

목소리만 들으면 매너 좋은 손님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매너가 좋은 손님일지라도 만약 유재민이 그런 물음을 받았더라면 ‘눈이 없으신가요, 손님?’이라고 되물었을 것이다. 이미 과거에 실제로 벌어졌던 일이다.

두영은 누군가가 제 사지 관절을 틀어잡고 있는 것처럼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홍승표는 자신이 인기 메뉴를 알려 줄 때까지 기다릴 심산 같았다.

항상 의문이었다. 타인을 괴롭히면서 사는 인간들의 머릿속을. 그리고 아직도 깨닫지 못했다. 자신을 괴롭히는 낙으로 사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의지 타령은 다른 행성의 언어였다. 홍승표는 자연재해다. 자연재해를 어떻게 의지만으로 바꿀 수 있단 말인가? 원해서 태어난 게 아닌 것처럼 저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벗어날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부담스러운 시선이 몸에 엉겨 붙었다. 두영은 호흡하기 위해 입을 살짝 벌렸지만, 아무것도 내뱉지 못했고,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다 무언가 터져 나올 것 같아 도로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말의 기능을 상실한 것처럼 목이 멨다. 눈이 삽시간에 뜨거워지고 눈물이 매섭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가장 당황한 건 두영이었다. 두영은 뒤로 돌아서서 두 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닦았다. 거동이 불편해질 정도로 허삼혁에게 맞아도 눈물 한 방울 흘린 적이 없었다. 이주학이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수치를 주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홍승표 앞에서만큼은 잘 참아지지 않았다.

홍승표는 두영의 처연한 뒷모습에 표정을 구겼다. 사내새끼가 왜 우는지에 대한 짜증이 아니었다. 단순히 우는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아쉬움 때문이었다. 뒤돌아선 허두영을 제 앞으로 돌리고 싶은 충동이 들끓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손이 뻗어지지 않았다. 본능대로 행동하는 성미인데,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반응이었다.

이따금 녀석을 달래서 뚝 그치게 하고 싶다가도, 불쏘시개로 상처를 헤집으며 더 울리고 싶었다. 이 같은 충동은 오늘 처음이 아니었다. 녀석을 그 새벽녘에 처음 본 순간부터 제 안에 똬리 튼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만한 충동에 뒤따르는 에너지가 허두영의 찌질한 모습에 한순간 증발하곤 했다. 정도껏 해야 귀엽다고 볼 수 있는 거지, 저렇게 눈물 즙을 짜면서 싫다는 놈 붙잡고 할 만큼 궁핍하지도 않았다.

장난감은 말을 잘 들을 때가 예쁜 법이니까. 그러니까 허두영은 계속 가지고 놀기엔 한참 부족한 장난감이었다.

갑자기 모든 게 지겹고 싫증이 났다. 홍승표는 카페 출입문으로 몸을 돌렸다. 밖으로 나오자 서늘한 바람이 몸에 고인 열기를 거둬 갔다. 이마를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을 한데 쓸어 넘긴 그는 길목에서 빠져나와 앱으로 호출한 택시에 올라탔다.

맨션에 도착한 홍승표는 제게 인사하는 수위를 지나쳐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그러나 곧장 뒤돌아서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하는 수위를 발견하고, 다시 그에게 다가가 휴대폰을 빼앗아 대리석 바닥을 향해 내던졌다. 그러곤 신발 밑창으로 휴대폰을 짓밟았다. 화면 위에는 홍승민의 이름이 떠 있었다.

“내가 당신 얼굴 기억 못 할 거라 생각하는 거 아니죠?”

홍승표의 무뚝뚝한 어조에 수위가 당황한 표정을 빠르게 지우더니 허리를 깊이 조아렸다.

“저는 도련님을 어렸을 때부터 뵀습니다. 도련님이 너무 어릴 때라 기억 못하실 줄 알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퍽이나.”

그는 비웃었다.

“홍승민이 그렇게 말하라고 시켰겠지.”

홍승민은 홍승표의 큰 형이다. 그가 감시자에게 동생의 괴팍한 성격을 말하지 않았을 리 만무했다. 그걸 알고 있는 수위가 이렇게 티 내면서 전화했다는 건 홍승민과 짜고 치는 상황이라는 거다. 무뚝뚝한 동생의 성질을 긁어내기 위한 홍승민의 관심 유발 법이었지만, 제 알 바가 아니었다.

“나는 누가 나 감시하는 거 딱 싫어해요. 그러니 앞으로 티 내지 마. 어릴 때부터 봐 온 것 같으니까 오늘은 그냥 넘어가요. 대신 앞으론 그냥 넘어가진 않을 겁니다. 이것도 보고하려면 해요.”

그는 수위의 수그린 고개를 빤히 내려 보다가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벽에 붙은 거울에 옆머리를 기대고 삐딱하게 섰다. 수위에게 기억한다고 말했지만, 흐릿하게나마 남은 기억이었다. 짧고 굵게 떠오른 그날의 기억은 부모가 의사에게 자신의 진정제를 부탁하는 장면이었다.

약을 거부하다가 심한 발작을 했었다. 그날의 일이 트라우마로 남지 않은 건, 정신을 놓은 자신이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을 물어뜯었기 때문이다. 아마 펜으로 누군가의 눈도 찌른 것 같은데, 도중부터 기억이 끊겨서 정확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유혈이 사방에 낭자한 상태였다.

그 당시 수위는 정신을 놓은 자신을 병원이 아닌 방으로 옮겨 준 이였다. 병원에 가지 않았다는 건 제 성미를 알고 있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범상치 않은 회복력을 가진 그는 웬만해서 병원에 가지 않았다. 비정상적인 육체와 정신 때문에 항상 주치의가 딸려 있었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는 현관문에 매달린 우유 주머니를 괜히 손등으로 쳤다.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면서도 지그시 보는 짓을 반복했다.

문득 헛웃음이 나왔다. 허두영과 공통된 무언가에 집요하게 눈길을 주는 제 행동이 뜬금없이 징그럽게 느껴졌다. 저 자신도 그렇게 느껴지는데, 그 녀석은 얼마나 더할까 싶었다.

홍승표는 허물 벗듯이 교복을 탈의하고 욕실로 들어갔다. 느긋하게 씻고 나온 뒤 깡 생수를 들이켰다. 단번에 한 통을 비웠지만, 갈증이 해소되지 않았다.

복층으로 올라가 침대에 몸을 던졌다. 탄력 좋은 매트리스가 거구를 집어삼켰다. 천장을 보고 누운 그가 긴 팔로 주변을 쓸면서 휴대폰을 찾았다. 갖은 몸부림 끝에 휴대폰을 가져왔지만, 얼마 보지 못하고 구석에 내동댕이쳤다.

“재미없어.”

한숨처럼 중얼거린 말 한마디에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모든 게 지겹고 지루했다.

엎어져 누운 그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제 손을 빤히 쳐다보았다. 도드라진 힘줄이 꿈틀거렸다. 그러다 작은 감촉을 떠올리고 둥근 형태를 만들었다.

머리 크기가 이 정도였던 것 같은데. 목 굵기는 이 정도였나?

두 손으로 가득 감싸 쥐었던 녀석의 머리통이 쉽게 잊히지 않았다. 위태롭게 흔들리던 가냘픈 목도, 한계까지 벌어져 찢어진 입술 가장자리도, 쉴 새 없이 흐르던 눈물이 머릿속에 뚜렷이 각인되었다.

그 이후로 풀어진 성욕은 감당이 되지 않았다. 지난 며칠 동안 걸신들린 사람처럼 살냄새에 파묻혀 살았다. 그러나 애타는 절정 끝에 남은 건 지독한 허무함뿐이었다.

오랜만에 학교에서 본 허두영은 자신을 뒤통수 거나하게 친 사기꾼처럼 대했다. 혹은 불쾌한 변태 새끼처럼. 아마 현재 녀석의 경계 대상 일 순위는 자신일지도 모른다.

“순진한 허두영, 멍청한 허두영.”

그렇게 밥을 떠 먹여 주면 자신은 그 역할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녀석도 주어진 역할에 진지하게 임해야 했다. 똥개는 쓰다듬을 받으라고 존재하는 것이니까.

불현듯 전학 온 초반에 이주학이 농담처럼 떠들던 말이 떠올랐다. 자기가 허두영을 개통한 첫 남자라고 잔뜩 으스댔었다.

이주학의 말은 허풍일 가능성이 컸다. 매 순간 자신을 의식하느라 거짓말을 늘어놨으니까. 차라리 허영심이 큰 김진호를 상대하기가 더 편했다. 욕망에 늘 솔직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기에.

아니면 허두영에게 직접 물어보는 방법도 있었다. 그렇다면 아이처럼 울던 녀석을 달래 줘야 했다. 어찌나 서럽게 울던지 더 이상 건드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문득 홍승표는 다리 사이가 빠듯하여 시선을 내렸다. 중심부가 불거져 있었다.

“미친 새끼…….”

배반적인 제 생리현상에 저절로 욕이 나왔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쌓인 메시지 중 상위에 있는 사람에게 연락을 보냈다. 성사된 약속을 위해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벌써 궁핍하게 지낼 필요는 없었다. 허두영은 허두영이고 저는 저였으니까.

홍승표는 잦은 욕구 해소가 필요했다. 그거라도 없었으면 미치게 지루한 시간 속에서 진작 미쳐 버렸을 테니까.

태어나는 순간부터 불면증이란 병에 걸렸다. 누군가의 저주라고 죄를 뒤집어씌우고 싶을 만큼 깊게 잠이 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삼 대 욕구 중 하나가 채워지지 않는다면 나머지 욕구로 채우면 되었다.

부모마저 손을 놔 버린, 그만의 삶의 연장 방식이었다.

***

책상 사이를 돌아다니던 아이가 두영의 책상을 치고 지나갔다. 엎드려서 자고 있던 두영은 흐리멍덩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칠판에 '운동장으로'라고 써재낀 글을 발견했다. 며칠 전 수능이 끝났다. 대부분의 시간에 영화를 보았고, 체육 시간에는 밖에 나가 공놀이를 했다.

두영은 밖에 나가기 싫어 흐느적흐느적 움직였다. 사물함에서 체육복으로 꺼내 와 교직원 화장실로 향했다. 일 학년 때 뭣도 모르고 교실에서 옷을 갈아입다가 심한 장난을 당했었다. 그 이후로 웬만하면 교직원 화장실에서 몰래 옷을 갈아입는 편이었다.

화장실 안쪽에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고 빈칸에 들어갔다. 외투랑 마이만 벗고 체육복 상의를 걸쳤다. 턱 끝까지 지퍼를 채우고 바지도 갈아입었다.

운동장으로 가는 길에 소매를 두어 번 걷어 올렸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더 클 거라는 김춘녀의 말만 듣고 입학식 날 한 치수 큰 사이즈로 구입했더니, 이렇게 매번 소매를 걷어 입어야 했다. 조금 더 욕심을 부려 두 치수 크게 살 뻔했지만, 다행히 자신은 그 정도로 미련하지 않았다.

신발을 질질 끌며 운동장에 도착했다. 구령대 양쪽으로 날개처럼 뻗은 돌 벤치에 앉아 축구 경기 하는 얘들을 구경했다. 저들은 전생에 개가 아니었을까. 그게 아니라면 공 하나 던져 줬다고 저렇게 좋아할 수 없었다.

선생님의 감시 아래 있어야 하는 연약한 미성년자는 수능이 끝나고 교실과 운동장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민주주의 방식으로 채택된 건 후자였다. 발언권이 없었던 두영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칼바람에 살이 에이는 것 같았다.

드라이아이스를 머금은 듯한 입김이 풍성하게 퍼졌다. 두영은 손으로 빨간 코를 문지르고 허벅지 사이에 끼워 넣었다. 입고 있는 외투가 중학교 때 산 구제 옷이라 바람 한 점 제대로 막아 주지 못했다.

느닷없이 불어온 모래바람에 두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각막에 이물질이 굴러다니는 느낌이 들었다. 쉽사리 눈을 뜨지 못하고 손등으로 눈두덩을 마구 문지르는데, 제 앞에 그림자가 들어서는 게 느껴졌다. 두영은 한쪽 눈을 찡그린 상태로 고개를 들었다. 김진호가 햇빛을 등지고 서 있는 게 보였다.

“너 어제 월급 받았지?”

의도가 뻔히 보이는 김진호의 물음에 두영은 고개를 떨구었다.

“씹냐? 갚을게, 갚는다고.”

빌려 갈 때만 갚는다고 신신당부하는 그들의 말은 전혀 신뢰가 되지 않았다. 손톱 주변 살을 짓누르던 두영은 앞머리로 얼굴을 가리고 더듬더듬 말했다.

“지, 진짜 돈이 없, 으윽.”

두영이 말을 다 끝맺기도 전에 김진호가 두영의 뒤통수를 무식하게 짓눌렀다. 허벅지에 가슴팍이 닿을 만큼 구겨진 두영은 김진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꼼지락댔지만, 몸이 얼어서 조금도 힘을 줄 수 없었다.

“니가 하도 오랜만이라 잊었나 본데, 여기에 니 의견은 중요하지 않아. 너는 내가 뭘 시키든 착하게 “네.”라고만 하면 되는 거야.”

김진호가 두영의 뒷덜미를 쥔 손을 흔들며 말했다. 두영은 두통과 멀미에 신물이 올라왔다. 가슴도 압박되어 숨이 잘 안 쉬어졌다.

“왜 너는 이렇게 은혜를 모를까? 사람 존나 속상하게. 그러니까 이주학이 빨리 퇴원을 못 하는 거야. 니가 존나 속상하게 해서.”

한쪽 다리를 절게 됐다는 이주학의 이야기를 우연히 지나가다 들은 적이 있다. 자신이 한 짓이 아니지만 가담은 한 것 같아 두영은 내심 쫄렸다.

“너 진짜 모르냐?”

“…?”

“이주학 병신으로 만든 새끼 말이야.”

두영에게 손을 뗀 김진호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두영은 수그린 몸을 일으킬 생각도 못 하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자 김진호가 두영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그래 시발, 니가 뭘 알겠냐. 아무튼 학교 끝나기 전에 돈 가져와라.”

학교에 있는데 돈을 어디에서 어떻게 가져오라는 건가? 입술을 물어뜯은 두영은 여전히 허리를 굽힌 상태로 불가능한 명령에 대꾸했다.

“모, 못 가져와.”

자세 때문에 씨근덕대는 호흡이 섞여 말대꾸하는 것처럼 나갔다. 지레 겁먹은 두영과 더불어 김진호도 한순간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미간을 험상궂게 구겼다.

“너 뭐냐? 혹시 뭐 잘못 먹었음? 아님 이주학 없으니까 좀 나댈 봄 해?”

두영의 뒤통수를 보며 헛웃음을 지은 김진호가 무릎을 접고 두영 올려다봤다. 그러곤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주학이 지금까지 너 소중해서 안 건드린 거라고 생각하지?”

얼토당토않은 그의 말에 순간 두영은 뒷골이 당겼다. 소중? 절대 이주학과 자신의 관계에서 쓸 수 없는 단어였다.

“그런 생각한 적 없……!”

“시발 작게 말해.”

두영이 눈에 심지를 키우고 쏘아보자 김진호가 별안간 피식 웃더니 두영의 뺨을 손등을 툭툭 쳤다.

“내가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기어오르고 싶으면 박은식을 생각하면서 참아. 걔가 왜 그렇게 됐는데, 다 너 때문이잖아. 그런데 착하게 있지는 못할망정 이렇게 지 꼴리는 대로 따박따박 말대답이나 하니, 박은식이 얼마나 얼탱이가 없겠냐, 안 그래? 이주학이 걱정하는 게 그거야. 너도 박은식처럼 될까 봐. 근데 넌 착하니까 안 그럴 거잖아. 넌 오래오래 우리 밑에서 꼬리나 흔들어야지, 박은식 몫까지. 그러니까 깝치지 마. 그 영상처럼 되기 전에.”

김진호가 두영의 귓바퀴를 매만졌다. 끈적한 손길을 쳐내려고 하자 김진호가 귀를 뜯어낼 듯이 잡아당겼다. 그에 두영의 눈에 열감이 차올랐다. 김진호는 몽롱한 시선으로 두영의 얼굴을 훑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뒷말을 덧붙였다.

“아무튼 학교 끝나기 전이야. 그때까지 돈 안 가져오거나 튀면 곧 퇴원할 이주학한테 오늘 일 꼰지를 줄 알아.”

두영은 자리를 떠나는 김진호를 얼떨결에 계속 응시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이쪽을 보고 있는 홍승표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패거리 중심에 따분한 표정으로 있었다. 이주학의 부재로 공석이 된 왕의 자리는 홍승표가 차지한 듯했다.

더 이상 안 어울리는 줄 알았는데…….

두영은 입술을 씹으며 시선을 피했다.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었나 보다. 안 그러면 이 속 쓰림의 원인에 마땅한 이유가 없었다.

홍승표는 카페를 그렇게 떠난 이후로 제게 먼저 말을 걸지도, 다가오지도 않았다. 가끔 시선이 느껴져 돌아보면 그는 다른 곳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멍청하고 미련한 건 자신의 전매특허였다. 그런 일을 당하고도 그 이전에 홍승표에게 받았던 관심을 기대하고 있었다. 홍승표의 손은 따뜻했으니까, 제 몸에 상처 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할수록 무너지는 것도 저 자신이었다.

짧게 맛본 달콤함이 눈을 감으면 떠올라서 쉽게 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듯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자신은 이미 그 대가를 치렀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가 주는 달콤한 관심에는 대가가 뒤따라올 것이다.

어쩐지 명치 안쪽이 허해졌다. 원래도 텅 빈 육체 덩어리일 뿐이었는데, 지금은 그보다 더한 무력감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차라리 바람에 휘둘리는 먼지가 저보다 훨씬 알찬 인생을 살았다. 적어도 눈에 들어가는 것만으로 상대의 눈물을 뽑아낼 수 있으니까.

김진호는 부자연스러운 거동으로 자리에 돌아갔다. 홍승표가 빤히 쳐다보자 김진호가 턱을 치켜올렸다.

“뭐, 뭘 봐.”

홍승표는 별다른 대꾸 없이 직각으로 세운 무릎에 팔을 괴고 김진호의 가랑이 사이에 눈길을 주었다. 그의 노골적인 시선에 다른 아이들도 김진호의 중심부를 보았다. 당황한 김진호는 한 계단 아래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허, 참나, 며칠 안 뺐다고 갑자기 이러네.”

차라리 말을 안 하는 게 나을 뻔했다. 본인도 그렇게 느꼈는지 좁은 어깨가 아래로 처졌다. 한 번 바뀐 분위기는 처음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홍승표의 날 선 반응 때문이었다.

홍승표는 김진호를 향한 시선을 꺼뜨리고 두영을 보았다. 초라한 몸이 찬 바람을 묵묵히 맞으며 죽은 듯이 있었다. 이미 동사한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로 작은 움직임조차 없었다.

그는 제 안에 감도는 불편한 기운을 없애기 위해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선명한 산등성의 형태를 눈으로 더듬었으며 들썩거리는 몸짓을 다리를 꼬아 짓눌렀다.

한 시간의 수업이 끝나고 종이 울렸다. 홍승표는 두영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때 김진호가 촐싹거리며 떠들기 시작했다.

“똥개 새끼 오늘 학교 끝나고 튀는지 잘 감시해라. 아주 뼈까지 발라 먹을 예정, 헉!”

김진호가 벤치 두어 칸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몇 명은 꼴사나운 김진호의 태도를 비웃었고, 몇 명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모르는 척했다. 김진호는 옷에 묻은 먼지를 털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열이 뻗친 얼굴로 말했다.

“시발 방금 누가 나 밀쳤냐?”

“너 혼자 넘어졌어 미친 새끼야. 쪽팔려서 남 탓하는 것 봐.”

다른 친구의 대꾸에 김진호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씩씩댔다. 그러고는 짝퉁 시계에 흠집이 났는지 확인했다. 기스 하나 없이 멀쩡한 것을 확인한 김진호는 고개를 들었다가 홍승표와 눈이 마주치고 움찔거렸다. 그러곤 무의식적으로 손을 등 뒤로 숨겼다.

홍승표는 김진호를 내려다보며 한쪽 입꼬리를 느슨하게 올렸다.

“등에 뭐가 묻은 것 같아서 털어 준 건데, 힘 조절을 못 했다.”

“…뭐?”

홍승표는 싱겁게 웃어 주고 두영이 사라진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지금쯤 자기 뺨을 때리고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뚜껑 덮은 비대에 앉은 두영은 자신의 낡은 신발을 내려다보며 멍하니 있었다. 교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다시 교직원 화장실을 찾았지만, 영 기력이 없어 아까부터 이 상태였다.

체육복을 입은 사람은 저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니 이제 수능도 끝났겠다 굳이 체육복으로 갈아입을 필요가 없었다.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겨우 옷을 갈아입은 두영은 가지런히 갠 체육복을 품에 안고 문고리 잠금을 풀었다. 반쯤 문이 열리자 그 너머에 또 다른 거대한 벽이 서 있었다. 두영은 냉큼 문을 닫았지만, 찰나의 기회를 놓치지 않은 홍승표가 문틈 사이에 손을 집어넣었다.

“아야.”

홍승표가 우는소리를 냈다. 깜짝 놀란 두영은 문에 끼인 홍승표의 왼손을 덥석 잡고 이리저리 살폈다. 피가 나거나 찍힌 자국이 없었지만 그래도 혹시 몰랐다. 원래 보이지 않는 상처일수록 아픈 법이니까.

두영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홍승표를 올려다봤다.

“괘, 괜찮아?”

“…….”

아프다든지, 괜찮다든지 아무 말이나 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홍승표는 입을 꾹 다물고 두영의 얼굴을 보기만 했다. 두영은 재차 물었다.

“마, 많이 아파…?”

“…오른손잡이라 괜찮아.”

왼손잡이가 듣기에 퍽 이상한 말이었다. 아마 자신이 왼손잡이라 하는 말 같았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문 두영은 그의 손을 놔주고 뒤로 물러섰다. 그리자 홍승표가 자연스럽게 안쪽으로 들어와 문을 잠갔다. 두영은 문고리가 잠기는 소리에 고개를 퍼뜩 들었다.

“왜, 왜… 왜…….“

뒷걸음치다가 비대에 털썩 주저앉은 두영은 적군에게 패배한 소년병처럼 홍승표를 올려다봤다.

“너 이주학이랑 잤어?”

“…뭐?”

“김진호는?”

“안 잤어!”

“그럼 아까 김진호가 말한 영상은 뭔데?”

두영이 눈을 홉뜨고 되물었다.

“어떻게… 호, 혹시 들렸어?”

홍승표가 덫을 놓은 사냥꾼처럼 웃었다.

“입 모양으로 파악한 건데, 내가 맞게 봤나 보네. 아무튼 영상 주제가 뭔데. 섹스 비디오?”

순간 두영은 눈꼬리를 바짝 세웠지만, 금세 꼬리를 말고 들릴 듯 말 듯 대답했다.

“몰라도 돼.”

순간 서늘한 기운을 내뿜은 그가 짤막한 날숨을 내뱉었다.

“그래 뭐, 그건 됐고. 이제 어떡할래?”

홍승표가 문에 등을 기댄 채 느긋하게 물었다. 시선을 떨군 두영은 체념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뭐를?”

“뭐긴, 너한테 뜯을 돈 말이지.”

체육복을 조몰락거리던 두영은 돈 소리에 고개를 퍼뜩 쳐들었다. 왜 그걸 홍승표가 물어보는 건지 이해가 안 됐다.

이제 그가 이주학의 자리를 대신하는 건가? 그러려고 이주학을 그렇게 죽사발을 내 놓은 건가? 그런 거에는 관심 없어 보였는데…….

두영은 입술을 뜯었다. 또 저 혼자 기대하고 저 혼자 실망했다. 고작 걸레 하나 주고받은 사이일 뿐인데 말이다.

시선 끝에 그의 바지 앞섶이 보였다. 자연스럽게 지난 일을 떠올라 구역질이 목젖을 후려쳤다. 조금 전까지 기대니, 실망이니 했던 스스로가 역했다.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아직도 그 비릿한 맛이 입 안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도 자신은 홍승표에게 무언가를 계속해서 기대했다.

그날 일로 역정을 내야 할지, 평소 왕따 허두영처럼 기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누구 하나 이런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알려 주지 않았다.

불현듯 물비린내를 머금은 기억이 머리끄덩이를 휘어잡았다. 그 기억엔 무언가를 강요하는 이주학이 있었고, 벽돌을 든 그 아이가 있었다. 만약 자신이 이주학의 명령에 응했더라면 박은식은…….

한순간 피가 빠르게 식었다. 죄책감 때문에 더 이상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그새 자신이 저지른 죄를 잊고 아무나 붙잡고 관심을 갈구하고 있었다. 그런 걸 받을 자격조차 없는 저인데.

목구멍을 조인 두영은 턱을 치켜들었다.

“그걸… 네가 왜 신경 쓰는 거야?”

“왜긴, 나는 너한테 돈 뜯으면 안 돼?”

“그건 아니고…….”

“그건 아니고? 넌 돈 뺏겨도 괜찮다는 거야? 이게 이렇게 합법적인 일이었어?”

“그것도, 아니고…….”

두영은 소심하게 고개를 숙였다. 뒷덜미를 긁적인 홍승표가 무릎을 굽히고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어색한 침묵에 피가 마르는 순간 화장실 실내등이 꺼졌다. 눈이 먼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깜짝 놀란 두영은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러자 홍승표가 두영의 허벅지를 잡아 누르며 못 일어나게 막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발작하듯 몸부림을 치자 홍승표의 손아귀 힘이 강해졌다.

“으윽.”

허벅지가 터질 것 같아 작게 앓는 소리를 내자, 홍승표의 손아귀 힘이 조금씩 풀렸다.

“가만히 있어.”

홍승표가 두영의 허벅지를 토닥토닥 어루만지며 진정시켰다. 암순응이 느린 두영은 애매한 곳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홍승표가 피식 웃자, 두영은 그 소리에도 흠칫 놀라며 변기 뚜껑 위에 두 발을 올리고 몸을 보호했다.

아예 빛이 없는 것도 아닌데 눈먼 사람처럼 구는 두영의 모습에 홍승표는 의문을 가졌다. 그는 두영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았다. 두영이 움찔거리며 얼굴을 물렸다. 이 정도는 분별 가능한가 보다.

자세를 뒤척인 홍승표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신경 쓰냐고 물었지? 나도 걔네들처럼 네 돈으로 탱자탱자 놀 거야.”

그 말에 두영이 어둠을 빌려 눈을 부릅떴다. 홍승표의 입술이 부드럽게 휘었다.

“뺨이나 때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멀쩡하네.”

눈을 끔벅인 두영은 곧 그 의미를 알아채고 부라린 눈을 잽싸게 숨겼다. 홍승표는 나른한 표정으로 두영의 얼굴을 감상했다. 늘 초연한 표정을 짓던 허두영이 어둠 속에서는 여러 표정을 만들었다.

“그래서 돈은 있고?”

두영은 꾹 참다가 팔 아래로 눈가를 거칠게 문질렀다. 홍승표는 곧장 두영의 팔을 잡고 끌어 내렸다. 굵은 눈물이 그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녀석의 눈동자 크기만 한 눈물방울이었다.

어두운 곳에서도 하얗게 빛나는 피부와 빨간 입술이 눅눅하게 젖었다. 문득 무슨 맛이 날지 궁금했다.

“…그만 울어. 달래는 법 몰라.”

두영이 반대쪽 팔을 들어 다시 눈을 비비려고 하자, 홍승표가 두영의 두 손목을 교차해서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눈 그렇게 비비지 마. 각막 다쳐”

두영은 어룽진 시야로 홍승표를 보았다. 병이든 약이든 하나만 주지. 홍승표는 참으로 가지가지 했다. 겨우 눈물을 멈춘 두영은 소심하게 대꾸했다.

“내가 알아서 해. 신경 쓰지 마…….”

처음으로 세게 말했지만, 축축하게 젖은 목소리가 하찮게 떨려서 우스웠다.

“내가 도와줄게.”

뜬금없는 홍승표의 말에 두영은 물음표를 띄웠다. 그는 혀로 입술을 축이고 말이 이었다.

“대신 내가 하자는 거 해.”

더 들어 볼 것도 없었다. 두영은 머리를 뒤죽박죽 내저었다. 홍승표의 긴 눈매가 가늘게 접혔다.

“내가 어떤 말을 말할 줄 알고 들어 보지도 않고 거절하는 건데.”

"이, 이상한 거잖아.”

"안 이상해.”

"이상…….”

"안 이상해.“

살짝 올려다보는 홍승표의 얼굴은 장난기 하나 없이 진지했다. 달이 뜬 밤하늘을 향해 소원을 비는 신앙심 깊은 소년처럼 진중한 모습이었다. 두영은 기울어진 마음에 힘을 주었다. 그는 저와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이었다. 비록 언어는 같을지 몰라도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천차만별이었다.

거머리 같은 시선을 비스듬히 피한 두영은 짤막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후…….”

홍승표가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 순간 화장실 안으로 누군가가 들어오며 불이 켜졌다. 기척을 한껏 죽인 홍승표와 두영은 서로를 빤히 바라보며 침묵을 유지했다. 금방 화장실이 비워지고 두영은 작게 읊조렸다.

“안 도와줘도 돼.”

눈도 깜빡이지 않고 두영을 보던 홍승표는 기지개를 켜듯 천천히 일어섰다.

“잘 생각해 봐.”

매몰차게 거절했는데도 홍승표는 기회를 거두지 않았다. 얼마나 상부상조하는 일이길래 이렇게 기회를 여러 번 주는 것일까? 그가 자신과 하고 싶었던 게 뭐였을까? 지난 일의 연장선이 아닐까…….

두영은 화장실을 떠나는 홍승표의 뒷모습을 벌어진 문틈 사이로 보았다. 종이 울렸다. 그와 대화하는 것에 모든 힘을 써먹어 일어날 기력조차 없었다.

홍승표는 교실 뒷문을 열고 들어갔다. 두영의 자리에 김진호와 그의 친구들이 모여 있었다. 김진호는 탐탁지 않은 얼굴로 홍승표에게 물었다.

“똥개 새끼 어디 있는지 아냐?”

홍승표는 김진호의 말을 무시하고 자리에 앉았다. 발끈한 김진호가 목에 힘을 주었다.

“야, 너 아까부터 뭐임? 불만 있으면 말로 하든가. 사람 무안하게 시발…….”

손목을 매만지던 홍승표가 김진호에게 눈길을 주었다. 김진호는 금방 꼬리를 말고 시선을 돌렸다.

그는 어렴풋이 이주학을 밟은 게 홍승표라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이주학의 병문안을 갔을 때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지 물었음에도, 이주학은 자존심이 상하는지 입을 꾹 다물고만 있었다.

그 반응에 자연스럽게 홍승표가 떠올랐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자신을 시다처럼 부리는 이주학이 하나도 불쌍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홍승표의 사람 깔보는 듯한 시선은 이주학보다 더 심했다. 이주학이 대놓고 사람을 무시했다면, 홍승표는 은은하게 자기 아래로 봤다. 그게 너무 자연스러워 덩달아 상대도 그에 맞춰 행동하게 됐다.

더불어 이주학이 유독 똥개 새끼에게 집착했던 것처럼, 홍승표의 행동도 예사롭지 않았다. 가볍게 말을 걸고, 우연인 척 어루만지고 고작 왕따 새끼를 대하면서 손길은 지극히 조심스러웠다.

소문 속 홍승표는 누구보다 더럽게 놀았다. 생긴 것도 기생오라비 같아서 단순한 소문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억 단위의 시계도, 여유로운 행동도 모두 가증스러웠다.

김진호가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일어나는데 뒷문이 열리고 두영이 들어왔다. 두영은 제게 몰려든 시선에 주눅이 들었다. 체육복을 보호막처럼 끌어안고 덤덤한 표정으로 사물함을 향해 걸어가는데 김진호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어디 숨어 있다가 이제 옴? 튄 줄 알았네.”

빈정거리던 김진호는 두영의 불거진 눈가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울었냐? 뭔 짓을 해도 안 우는 새끼가…….”

당황한 두영은 시선을 떨구었다. 입술을 말아 물자, 불현듯 김진호가 외마디 소리를 내며 무언가 깨우친 사람처럼 행동했다.

“설마, 내가 울린 거냐?”

설레발을 이자까지 끌어다 친 김진호가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곤 비죽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동료 밥을 떼어먹은 왕초처럼 얍삽했다.

두영은 문득 저에게 집중된 진한 시선을 느꼈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누구의 눈빛인지 알 수 있었다. 참아 내려고 했지만, 눈동자가 저절로 그를 향해 움직였다.

김진호는 찰나에 움직이는 두영의 시선을 발견하고 고개를 틀었다. 그 시선 끝에는 홍승표가 있었다. 어둠을 조각낸 듯한 홍승표의 눈동자가 가느다란 눈매 뒤로 숨었다. 누구든 멈칫할 만큼 완벽한 미소였다.

짜게 식은 김진호는 두영의 멱살을 강하게 틀어잡고 밀쳤다. 사물함 자물쇠에 요추가 찍힌 두영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별안간 화를 내는 김진호가 두영의 귓구멍에 속삭였다.

“안 되겠다. 너 그냥 오늘 남아라. 아지트 가서 뒤지도록 처맞을 줄 알아.”

그가 말을 끝내자 폐건물의 꿉꿉한 냄새가 코끝에 스쳤다. 이주학 없이 아지트에 불려 가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거기서 일어날 일이야 뻔했지만, 어쩐지 오늘은 느낌이 달랐다.

“하, 학교 앞 편의점에서, 돈 뽑아서 줄게…….”

“늦었어 시발. 도망치기만 해 봐. 니 할머니 어디서 일하는지 아니까.”

김진호는 두영의 뺨을 손등으로 치고 자리에 돌아갔다. 두영은 땅에 처박은 시선을 들어 교실을 우두커니 둘러보았다. 모두가 제 일과 상관없다는 듯이 등을 보인 채 있었다.

사람마다 정해진 팔자가 있다고 한다. 자기 팔자를 꼬는 사람은 정해진 길을 벗어나는 이들일지도 몰랐다. 두영은 자신이 팔자대로 가고 있는 건지, 꼬고 있는 건지 헷갈렸다. 무얼 선택해도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답이 없는 것일 수도 있었다. 제게는 최악과 차악, 그 둘뿐이었다.

두영은 순간적으로 번쩍이는 빛에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연달아 터지는 셔터 소리에 고개를 들자 교실 창문이 청테이프로 도배되어 있었다. 축축한 손이 옷 안쪽으로 들어와 제 몸을 징그럽게 어루만졌다.

그때였다.

“허두영 정신 안 차려?!”

누군가의 부름에 두영은 정신을 번뜩 차렸다. 고개를 돌리자 종례를 하러 온 담임이 교탁 앞에 서 있었다.

“야 이 새끼야, 아까부터 너 부르는데 한 번에 못 알아들을래? 마지막까지 내 속 터지게 해야겠어?! 어서 자리로 돌아가!”

쏟아지는 책망에 두영은 느린 걸음으로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그에 담임이 갑갑한 한숨을 늘어뜨렸다.

두영은 창문을 향해 힐끔 시선을 던졌다. 분명 청테이프로 도배되어 있던 창문이 제 환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한나절의 하늘을 완연히 비추고 있었다. 까맣게 점철된 응어리가 가슴에 고였다. 갑자기 세상이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호흡을 처음 배운 물고기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손톱을 세워 손목을 긁자 빨간 크레파스 자국이 길게 그려졌다. 손톱 안쪽에 살점이 계속해서 쌓여 갈 때쯤, 반복적으로 울리는 둔탁한 소리가 두영의 바스러진 신경을 건드렸다.

두영은 눈동자만 움직여 소리의 행방을 찾았다. 정체는 책상을 두드리는 홍승표의 손가락이었다. 짝꿍으로 지내면서 알게 된 그의 습관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을 보라는 행동 같았다. 두영은 눈꺼풀을 반쯤 올려 떴다. 곧바로 습윤한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말해.”

점성 강한 눈빛은 무언가를 요구했다. 두영은 머뭇거렸다. 만약 홍승표를 믿었다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망가지면 어떡하지? 제 인생이 이보다 더 처참해지면 어떡하지?

하지만… 홍승표는 자신을 때리지 않았고, 돈을 빼앗아 간 적도 없었다. 멀쩡한 수건을 걸레로 만들어도 화내지 않았고, 이주학의 징계에 대해서도 비밀을 지켜 주었다. 펜스테몬에서 일하는 것도, 아침에 우유 배달하는 것도 떠벌리지 않았다.

홍승표는 정말 이상했다. 그 이상함이 자신을 얼마나 멍청이로 만드는지 아마 홍승표는 모를 것이다.

두영은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와줘……."

“다시 말해.”

홍승표는 두영의 입 모양으로 뜻을 이해했지만, 제대로 된 확인을 위해 다시 물었다. 두영은 입술을 깨물고 망설였다. 그러다 첫 호흡을 터뜨리듯 재차 말했다.

“…도와, 줘.”

종례가 끝났다. 홍승표는 두영의 팔뚝을 잡아채고 교실을 나섰다. 무자비한 힘에 두영은 속수무책 끌려갔다. 중앙 현관으로 내려가는 동안 홍승표는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고,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두영이 앞으로 고꾸라지려고 하면 팔을 고쳐 잡기만 할 뿐이었다.

교문에 도착하자 그 앞에 택시 한 대가 정차해 있었다. 홍승표는 뒷자리에 두영을 태우고 자신도 따라 탔다. 묘한 기류를 느낀 택시 기사는 몇 번이나 백미러로 뒤를 훔쳐봤다.

두영은 등을 꼿꼿이 세우고 불편하게 앉았다. 택시를 타 본 적이 드물어 막연히 어색하기만 했다. 버스랑 지하철도 무서워서 잘 타지 않았다.

무작정 그가 이끄는 대로 오긴 했지만,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몰라 불안했다. 목적지를 들으니 홍승표의 집이었다. 곁눈으로 쳐다본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조급해 보였다. 턱 위로 근육이 불거졌고, 그 아래 목덜미까지 핏줄이 이어진 상태였다.

시선을 느낀 홍승표가 옆을 돌아봤다. 두영은 냉큼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시선을 내던졌다. 손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그냥 허벅지 밑에 깔고 앉았다.

택시에서 내린 두영은 자연광을 받는 고급맨션을 멀거니 올려다봤다. 이 시간에 여기 온 건 처음이었다. 못 볼 걸 본 것처럼 기분이 이상했다.

또다시 홍승표에게 팔뚝이 잡혀 맨션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수위가 허리를 90도 꺾어 인사했지만, 홍승표는 눈곱만큼도 관심을 주지 않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홍승표가 밖에서 버튼을 누르고 두영을 기다렸다. 두영은 땅만 쏘아보며 요지부동으로 있었다. 머리칼을 쓸어 넘긴 홍승표가 한숨을 늘어뜨리며 말했다.

“내려.”

두영은 축축한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렀다.

“그냥 집에 가면…….”

“내려.”

“나, 나중에 시키는 대로 다 할게……. 그러니까 지금은…….”

삐딱하게 선 홍승표는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넌 내가 무슨 부탁을 할 줄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말해 봐. 분위기 못 읽어?”

“…도, 돈?”

“…….”

홍승표의 눈썹이 모나게 치켜 올라갔다. 두영은 곧바로 "아, 아닌가……." 하고 얼버무렸다. 홍승표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가 두영의 팔을 잡고 끌어냈다. 두영이 발끝에 힘을 주고 버텼지만, 가소롭다는 듯이 웃은 홍승표가 두영을 한 손으로 가볍게 잡아당겼다.

덤처럼 끌려 나온 두영이 얼결에 그의 품에 안겼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가벼운 몸에 홍승표는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흡사 종이 인간이었다.

그는 두영의 팔뚝을 잡은 채 현관문 앞으로 걸어갔다. 도어록 위를 거니는 손이 몇 번의 헛손질을 하자 홍승표가 잇새로 욕을 씹었다. 두영은 처음 보는 홍승표의 모습에 움찔 굳었다가 현관문이 열리는 동시에 정신을 차리고 버둥거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보기 좋게 안쪽으로 끌려 들어갔다.

두 번째로 찾은 그의 집은 새벽에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보였다. 천장까지 까마득하게 펼쳐진 통창 너머로 다홍빛 노을이 촛농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넓은 거실에는 침대처럼 큰 소파만 달랑 있었고, 나머지는 공터였다. 어제 이사 왔다고 해도 될 정도로 생활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감상은 사치라고 증명하듯 홍승표가 두영의 팔뚝을 고쳐 잡고 복층 계단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두영은 다시 발끝에 힘을 주었다. 미지의 세계만큼 두려운 건 없었다. 올려다본 복층은 일 층과 달리 어두웠다. 지하 세계를 거꾸로 뒤집어 놓은 것 같았다.

“호, 홍승표……!”

두영은 홍승표의 이름을 다급하게 불렀다. 홍승표가 특정 언어에 반응하는 개처럼 뒤를 돌아봤다.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고 부른 건데 그가 이리도 쉽게 반응을 보이자 두영은 당황함에 입을 뻐끔댔다.

“왜 부르―.”

“흐윽……!”

두영이 지레 쫄아 계단 중턱에서 주저앉았다. 퍽 난감한 표정으로 눈썹 산을 긁적인 홍승표는 두영을 짐짝처럼 어깨에 이고 계단을 마저 올라갔다. 요란한 짐짝은 한순간도 가만있지 않았다. 침대에 내려 주자 녀석은 뒤집힌 애벌레처럼 꿈틀대더니 냉큼 침대 반대편까지 기어갔다.

기어이 침대에서 내려간 허두영은 이제 겁먹은 표정을 숨기지도 않았다. 산만하게 움직이는 호박색 눈망울 위로 도망칠 각을 세우고 있는 게 뻔히 보였다.

천천히 거리를 좁히자 벽에 바짝 붙어 선 녀석이 암막 커튼 뒤로 몸을 숨겼다. 홍승표는 무심한 표정으로 커튼을 걷었다. 그러자 온몸에 노을빛이 드리워진 녀석이 드러났다.

“너한테는 이 천 쪼가리가 방공호처럼 느껴지나 봐? 아님 어디가 좀 모자란 건가?”

“…….”

“얼굴 숙이지 마.”

두영이 입술을 뜯으며 턱을 들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그 말에 두영의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 저를 짓누르는 듯한 홍승표의 시선을 감당하지 못하고 슬금슬금 고개를 숙이자 홍승표가 다시금 야단을 쳤다.

“얼굴 숙이지 말라고 했어.”

두영은 대체 그가 뭘 원하는지 몰라 조심스럽게 홍승표의 뺨 언저리를 보았다.

“그런 표정 짓지 마. 입술도 그만 씹어.”

입술을 뱉은 두영은 곧 있으면 숨도 쉬지 말라고 할 것 같아서 천천히 호흡을 멈췄다. 그러자 홍승표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더니 곧 탄식 비슷한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의 얼굴 위로 짙은 박명이 내려앉았다. 노을이 사라지자 복층에 어둠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두영을 집요하게 주시하던 홍승표는 문득 살얼음을 끼얹은 듯이 떠는 두영의 손에 시선을 주었다. 가끔 허두영은 비 맞은 고양이처럼 오들오들 떨 때가 있었다. 아마 고질병을 앓고 있는 듯싶었다.

홍승표는 외투 주머니에서 미니 초콜릿을 꺼냈다. 며칠 전 찾은 클럽 테이블에 굴러다니던 초콜릿이었다. 단 걸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무슨 생각으로 초콜릿을 챙겼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만, 이렇게 빛을 발하는 초콜릿을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나왔다.

초콜릿 포장지를 벗긴 홍승표는 두영의 입가에 초콜릿을 가져다 댔다.

“아 해.”

두영이 입을 앙다물고 못 들은 척하려고 하자, 홍승표가 두영의 턱을 쥐고 코앞으로 잡아당겼다.

“아, 하라고.”

재차 말한 홍승표가 두영의 입술을 억지로 벌리고, 초콜릿 한 덩어리를 집어넣었다. 두영은 홍승표의 눈치를 보며 초콜릿을 오물오물 녹여 먹기 시작했다.

홍승표는 나른한 시선으로 두영의 입술을 구경하다가 불쑥 어루만졌다. 두영은 이도 저도 못 하고 그의 다정한 쓰다듬을 받았다. 얼굴에 열이 홧홧하게 퍼지고, 입 안에 든 초콜릿이 눈 깜짝할 새 녹았다.

“이제 초콜릿값 해야지.”

그는 당연한 걸 요구하듯 지껄였다. 빛이 사라진 공간인데 그의 눈에는 이채가 번뜩였다. 헤픈 미소를 날리던 얼굴은 무겁게 가라앉은 지 오래였다. 홍승표는 웃을 때와 무표정일 때 차이가 컸다.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아서 복도를 지나칠 때 종종 못 알아본 적도 있었다.

그 순간, 귀 옆에서 탁! 소리가 울렸다. 깜짝 놀란 두영이 어깨를 비죽 세우고 고개를 들었다. 홍승표가 손끝을 마찰해 낸 소리였다.

“넌 조금만 가만두면 샛길로 새 버리네. 방금 무슨 생각했어?”

“…어?”

한참 늦게 대답하자 홍승표가 혀를 찼다. 그의 낯에 서서히 짜증이 깃들었다.

“날 죽이는 상상을 하든 상관없으니까.”

잠시 말을 멈춘 홍승표가 두영을 위아래로 천천히 훑었다. 그러곤,

“벗어.”

라고 직접적인 의미를 담아 명령했다.

두영은 옷단을 움켜잡고 뒷걸음쳤다. 곧바로 발뒤꿈치가 벽에 부딪쳐 크게 움찔거리자, 홍승표가 느긋하게, 그러나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지 마. 내가 뭘 원하는지 너도 다 알고 따라온 거잖아.”

“아, 안 벗으면…….”

“내가 벗겨 줘?”

사늘한 분위기를 풍기며 묻자 두영이 빠르게 도리질 쳤다. 후드집업 밑단을 잡은 두영은 굼뜬 거북이처럼 밍기적거리다가 불쏘시개 같은 그의 시선에 천천히 지퍼를 내렸다. 니트 구멍에서 머리를 빼내자 가는 머리칼이 민들레 홀씨처럼 일어났다.

이너로 입은 반소매와 속옷만 남았다. 이것도 벗어야 하는 건지 고민하는 순간 두영의 생각을 빠르게 눈치챈 홍승표가 답을 내려 줬다.

“그것도 벗어.”

티셔츠 앞섶을 두 손으로 움켜잡은 두영은 제 발등만 노려봤다. 이대로 버티다 보면 그냥 보내 줄지 모른다는 헛된 기대를 품었다.

홍승표는 두영을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었다. 목이 다 늘어난 티셔츠를 걸치고, 낡아서 해진 양말을 신은 녀석은 어울리지 않게 맛있는 냄새를 풍겼다.

긴 종아리 곡선을 거슬러 올라갔다. 뼈마디가 있는 곳마다 산호 빛을 띠었다. 제법 근육이 붙은 허벅지와 좁은 골반이 보였다. 그중에서 가장 보고 싶은 부분이 티셔츠에 가려져 있었다.

침 넘어가는 소리가 음량을 최대치로 키운 듯이 자극적이었다. 먼지 부대끼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만큼 적막해진 순간, 별안간 홍승표가 두영의 속옷 앞섶을 잡아당겼다.

“털도 안 나나.”

무심하게 중얼거린 홍승표의 말에, 맞는 줄 알고 가드를 올렸던 두영은 재빨리 그의 손을 쳐내고 티셔츠를 아래로 주욱 잡아 내렸다. 두영의 붉어진 귓바퀴를 보던 홍승표는 뒤로 몇 걸음 걸어가 침대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두영을 뚫어지게 응시한 채 바지 버클을 풀었다.

“이리 와.”

두영은 다정한 그의 부름에 흠칫 떨었다. 머뭇머뭇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홍승표가 본인의 다리 사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와서 여기 앉아.”

자신을 압박하는 분위기와 그의 부드러운 말투는 서로 다른 사람이 내뿜는 기운처럼 느껴졌다. 꾸물거리던 두영은 천천히 걸음을 떼며 그에게 걸어갔다. 두툼한 허벅지 사이에 무릎을 꿇고 앉자 커다란 손이 두영의 턱을 들어 올렸다.

홍승표는 두영의 입술을 엄지로 쓸며 말했다.

“어떻게 하는지 알려 줬잖아. 그때만큼만 하면 돼.”

그는 마치 덧셈을 알려 주고 복습을 하라는 듯이 가볍게 말했다. 그래서 지난 일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두영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홍승표의 속옷을 젖혔다. 그러자 이미 한계치까지 부푼 성기가 튕겨 나왔다.

입술을 오물거린 두영은 우뚝 솟은 성기를 보다가 눈을 치켜떴다.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의 얼굴이 어둠에 잠식되어 시선을 받는 것만으로 불안감이 커졌다.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은데, 그가 풍기는 기운 자체가 눅눅하고 무거웠기에 더욱 그랬다.

다시 그의 성기에 시선을 주었다. 자신의 것과 크기뿐만 아니라 모양도, 색도 달라서 징그러웠다. 두 번째 본다고 감상이 달라지거나 하지 않았다. 작게 심호흡하자 그 숨이 은밀한 곳에 부딪쳐 제 얼굴로 되돌아왔다. 이 묘하고 갑갑한 분위기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두영은 더 이상 미루지 않고 그의 성기를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상한 맛이 났다. 혀 위로 미끌거리는 점액이 달라붙어 기분이 나빴다. 당장 뱉고 싶어서 얼굴을 살포시 구기자, 머리 위에서 웃는 소리가 났다. 귀두 끝만 오물오물 문 채 힐끗 시선을 들어 올리자 비스듬히 웃고 있는 홍승표가 보였다.

“맛있어?”

그의 손이 두영의 눈썹을 가볍게 쓸었다. 눈썹을 쓸고 지나간 자리에 끈적한 젤리가 들러붙은 것 같았다. 홍승표는 성기 밑단을 쥐고 위아래로 흔들다가 두영의 얼굴 위에 문질렀다. 눈 아래의 도톰한 살을 밀어 올리자 탄력 있는 살이 금방 제자리를 찾아 돌아왔다.

홍승표는 한참을 한 주먹쯤 되는 얼굴 위에서 노닐다가, 두영의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넣고 그대로 침대 위로 밀쳤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푹신한 침대에 버둥거리던 두영은 문득 등 뒤로 바짝 붙은 기척을 느꼈다. 발작하듯 다리를 휘두르자 둔탁한 소리가 귓전에 스쳤다.

두영은 발뒤꿈치로 무언가를 가격한 것 같아 식은땀이 좔좔 흘렀다. 천천히 뒤로 돌자 턱을 움켜쥔 홍승표가 보였다.

“미, 미안……! 일부러 그런 거, 아냐…….”

아래로 향해 있던 홍승표의 시선이 날카롭게 치올라 갔다. 그는 대관절 혀를 내밀었다. 삐죽 나온 혓바닥 끝부분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아파.”

어눌한 발음으로 아픔을 호소한 홍승표는 갑자기 짜게 식은 표정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너 말이야, 내가 이주학 이름 쓴 것도 비밀로 해 줘, 김진호한테 털릴 뻔한 것도 구해 줘. 제비도 이렇게 매정하지 않아.”

홍승표가 흥부인 척 거들먹거렸다.

“도, 돈…….”

“시발 앞으로 그 입에서 디귿만 나와도 혼날 줄 알아. 그리고 무슨 박을 탈지는 내가 정해.”

그가 내뱉은 언어가 허공에 알알이 떠다녔다. 홍승표는 두영을 밀어 눕히고 그 위에 올라탔다.

“처음인 걸 감안해서 다정하게 해 줄게.”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두영은 눈물을 떨구었다. 흘러내리는 눈물 자국을 느슨히 따라간 홍승표는 눈물이 시트에 스며드는 순간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왜 울어?”

“…….”

“울지 마. 아직 시작도 안 했으니까.”

“안 하면… 안 돼?”

“넌 그냥 포기하면 안 돼?”

사고는 궁지에 몰릴수록 유연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닭장에서 살아가는 자신은 언제나 선택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지금 하는 선택도 스스로를 시궁창에 몰아넣는 짓일지 몰랐다.

저항할 의지가 빠르게 소멸했다. 찰나에 드러난 두영의 체념에 홍승표는 가는 눈웃음을 지었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감각에 몸이 제 의지와 상관없이 연신 움찔거렸다. 엉덩이 사이로 들어온 손가락이 배 안쪽에서 가위질을 하거나 거칠게 드나들었다. 뒤돌아보기 무서웠다. 홍승표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상상만으로 겁이 났다.

“좁아.”

홍승표가 작게 읊조렸다. 처음부터 성기를 들이밀었지만, 조금도 틈을 내주지 않는 구멍에 열이 뻗쳤다. 심혈을 기울여 구멍을 넓히는데 녀석은 이것도 버거운지 연신 바스락대며 움찔거렸다. 종국에는 개처럼 엎드린 자세에서 아예 납작 엎어져 시트에 얼굴을 처박았다.

“엉덩이 들어.”

홍승표는 우악스러운 힘으로 두영의 골반을 잡고 엉덩이를 세웠다. 차츰 제 안에 자리 잡아 가던 그의 손가락이 불쑥 빠져나갔다. 두영은 그 감각에 시트를 강하게 움켜잡았다. 벌어진 구멍으로 바람이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그때, 제 몸 위로 그림자가 늘어졌다. 굴곡이 많은 그림자에서 강한 남성성이 느껴졌다.

“퉤.”

홍승표는 위로 솟은 엉덩이를 손으로 잡아 벌리고 드러난 속살에 침을 뱉었다. 스스로 젖지 않는 구멍에 맞는 극약처방이었다. 뒷구멍에 박아 보는 건 처음이라 필요한 도구를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때 훌쩍 코 먹는 소리가 들렸다. 홍승표는 융기된 자신의 성기를 손으로 훑으며 두영의 뒤통수를 쳐다봤다. 내내 조용히 있더니, 숨죽여 울고 있었나 보다.

그는 앙상할 정도로 튀어나온 두영의 날개뼈와 척추를 눈으로 더듬으며 내려가, 벌름거리는 구멍을 눈에 담았다. 그러곤 재차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으으…….”

“참아.”

매정한 명령에 두영은 이를 앙다물었다. 덜컥 불안해진 기분에 팔을 버둥대다가 무언가를 손으로 쳐 버렸다. 홍승표의 휴대폰이었다. 그 순간 지독한 셔터가 저를 향해 강렬히 터졌다. 흠칫 놀라 급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보이는 건 눈앞의 욕망에 한껏 진중해진 홍승표의 얼굴이었다.

눈을 내리뜨고 있던 홍승표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휴대폰을 쥔 두영의 손을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미소를 지었다.

“신고라도 하게?”

그렇게 물은 홍승표는 딱히 두영의 손에서 휴대폰을 뺏어 가지 않았다. 그는 두영의 엉덩이 사이에 성기 끝을 맞췄다. 성기가 천천히 진입하자 두영이 앞으로 기어가려고 버둥댔다. 홍승표는 솥뚜껑만 한 손으로 두영의 등짝을 짓눌러 납작 엎드리게 만들었다.

“힘, 풀어…….”

귀두를 간신히 박아 넣은 홍승표는 긴 호흡을 내쉬었다. 끊어 먹을 듯이 조이는 구멍 때문에 저절로 턱에 힘이 들어갔다. 녀석은 비싼 싸구려 장난감이었다. 쉽게 망가질 게 뻔하지만 그럼에도 함부로 대하고 싶었다.

단번에 뿌리 끝까지 집어넣자 녀석의 등이 발작하듯 꿈틀거리다가, 이내 지쳐 나가떨어진 듯이 잠잠해졌다. 구멍이 약간 찢어진 게 보였다. 빛 한 점 없는 곳에서, 유일하게 달빛을 받는 것처럼 빛나는 녀석의 몸에 핏빛이 섞이자 더욱 도색적으로 느껴졌다.

빠듯한 조임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비좁은 내벽이 제 성기에 맞춰 벌어져 있다고 생각하니 만족감이 상상 이상이었다.

홍승표는 두영의 손에 쥐어진 제 휴대폰을 보다가 상체를 숙여 녀석의 몸 위로 엎어졌다. 깔린 몸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는 게 느껴졌다. 허리를 천천히 움직이자 내내 죽은 것처럼 있던 녀석이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흐으… 윽…….”

서서히 힘을 실어 무자비하게 내장을 들쑤셨다. 그에 거대한 침대가 출렁거렸다.

두영은 납작 엎드려서 받는 그의 성기가 뱃가죽을 뚫고 나올 것 같아 두려웠다. 한계치까지 벌어진 아래가 쓰라렸고, 배 속이 엉망진창으로 뒤집히는 것 같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다리를 버둥거리자, 홍승표가 다리로 두영의 오금을 짓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막았다.

“아앗… 흐윽…….”

두영은 시트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꼈다. 언어가 되지 못한 옹알이만 연신 쏟아졌다. 홍승표는 두영의 머리 양옆에 손을 짚고 큰 포물선을 그리며 성기를 처박았다. 그의 성기에서 나온 투명한 분비물로 인해 살가죽이 맞닿았다가 떨어질 때마다 끈적한 소리가 울렸다.

쉴 틈 없이 울려 대는 찰진 소리가 복층 가득 퍼졌다. 평소보다 이르게 오는 절정의 기운에 홍승표는 속도를 높였다. 잔뜩 펌핑된 그의 근육이 한순간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더니 그의 입에서 진한 탄성이 터졌다.

두영은 제 안에서 꿈틀거리는 그 느낌이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아 울컥 토기가 올라왔다. 목구멍을 간신히 조이고 그가 제 위에서 내려가기를 기다렸다. 때마침 홍승표가 상체를 세웠고, 두영은 저를 감싼 온기가 사라지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제 끝났다는 생각에 두영은 눈물로 젖은 얼굴을 팔 아래로 벅벅 문질러 닦으며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

“윽……!”

“아직이야.”

홍승표가 두영의 발목을 잡고 주욱 끌어당겼다. 녀석을 앞으로 발라당 뒤집자 울어서 엉망으로 부은 얼굴이 보였다. 척척해진 피부 위로 가는 머리카락이 중구난방 달라붙었다. 콧물까지 흘러 인중이 반짝거렸다. 그 모습이 마치 익사 직전에 건져진 사람 같았다.

녀석의 몸에 허술하게 걸려 있는 티셔츠를 마저 벗겨 냈다. 불을 켜지 않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확신했다. 허두영의 젖꼭지는 제 예상대로 연한 산호색임을.

타인의 살에 굳이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지만, 녀석이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생각을 마친 홍승표는 곧바로 제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다. 하지만 손을 뻗는 순간 지레 겁먹은 녀석이 몸을 작게 웅크렸다.

우스웠다. 이렇게 싫어하는 모습을 보이는데도 만지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자신이.

홍승표는 두영을 뒤에서 껴안듯이 팔을 두르고 상체를 세웠다. 무릎으로 선 두영은 얼결에 벽을 손으로 짚었다. 그러다 엉덩잇살을 벌리고 들어오는 살덩이를 눈치채고 무릎걸음으로 도망쳤다. 홍승표는 두영을 바짝 따라붙으며 기어이 성기를 뿌리 끝까지 쑤셔 넣었다.

벽과 두툼한 몸 사이에 끼인 두영은 은은하게 올려 치는 그의 허리 짓에 기겁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언뜻 옅은 바람이 뒷덜미에 불어왔다. 그러곤 부드러운 것이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게 무엇인지 인지하기도 전에 홍승표가 위로 빠르게 쳐올리기 시작했다.

“하으, 으윽…….”

“하아…….”

뜨거운 숨결이 귓가에 스치자 두영은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그 숨결이 따뜻하다고 느낀 스스로가 혼란스러웠다. 양극에 있는 감정들이 저를 잡아먹으려고 달려들었다. 눈을 감으면 좀 진정될까 했지만, 오히려 홍승표가 주는 지독한 고통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문득 서러움이 몰려왔다. 한번 울음이 터지니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곧 혼절할 것처럼 울고 있으니 홍승표가 혀를 차며 허리 짓을 멈추었지만, 끝까지 성기는 빼지 않았다.

“왜 우는데.”

“흑, 으흑… 지, 집에 보내, 윽, 보내 줘… 할머니… 할머니…….”

“할머니?”

“흐으… 할머니…….”

홍승표는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녀석이 벽에 이마를 박은 채 계속해서 울었다. 어찌나 서럽게 우는 벽지도 따라서 울었다. 그에 비해 우는 소리는 턱없이 작았다. 아까도 침대에 얼굴을 묻고 몰래 울더니, 당장 까무러치게 목 놓아 울어도 되는 상황에서도 허두영은 숨죽여 울었다.

그러나 녀석이 얼마나 서럽게 울든 제 알 바 아니었다.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티끌도 안 들었다. 오히려 녀석의 눈물이 자극이 됐으면 됐지, 조금도 제 욕망을 사그라뜨리지 못했다. 허두영이 학교에서 왜 구멍 취급 당하는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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