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호기심 (4/20)

4. 호기심

말도 못 하는 병신 새끼 허두영. 줄여서 '말병'은 두영의 초등학생 때 별명이었다. 더불어 거지새끼 허두영도 있었다.

낯선 곳만 가면 입을 꾹 다무는 버릇 때문에, 새 학기에 친구 한 명 못 사귀고 저 홀로 이상한 아이가 되어 있었다. 머리를 자주 안 감아서 늘 떡이 져 있었고, 항상 똑같은 옷만 입고 다녀 일주일만 지나면 자연스럽게 거지새끼라고 불렸다.

매일 속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것, 아침저녁마다 양치질해야 하는 것, 손톱이 길면 제때가 깎아야 하는 것, 어제 신은 양말을 오늘도 신으면 안 된다는 것, 안 씻으면 몸에서 냄새가 난다는 것. 어찌 보면 당연한 것들도 아이는 어른에게 배워야 알 수 있었다.

두영에게는 그런 어른이 없었다. 허삼혁의 짜증과 김춘녀의 피곤에 찌든 모습을 볼 때면 두영은 불안과 걱정으로 위경련이 왔다. 저들이 날 버리고 떠날까 봐, 그래서 밤을 지새우는 날이 많았다.

불안정한 형태의 가족은 두영에게 희망을 빼앗아 갔다. 이것만으로 충분히 망한 인생인데, 어린 날의 트라우마 때문에 사람들이 많은 곳에만 가면 공황 증세가 찾아왔다. 모두가 자신을 흉보는 것 같았다. 그 사진으로 자신을 알아보고, 손가락질하고, 비웃는 것 같았다.

이런 제 속마음을 드러낸 건 그 아이가 유일했다.

박은식.

고등학교를 입학해서 만난, 웃는 게 햇살 같은 쾌활한 아이였다.

비록 모든 과거를 말하지 않았지만, 집이 많이 가난하다거나 아빠가 알코올 중독에 걸렸다는 얘기를 소소하게 건넸다. 다행히 박은식은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담담하게 두영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해 봄은 하루하루가 꿈같았다. 수업 시간에 간식을 몰래 나눠 먹었고, 체육 시간엔 서로의 짝꿍이 돼 주었고, 이동수업은 늘 같이 다녔다. 학교가 끝나면 박은식의 집에서 라면을 끓여 먹기도 했다.

봄날의 햇살 같은 박은식은 사교성이 좋았다. 그렇게 이주학과도 친해졌다.

그 이후로 두영은 빠르게 박은식과 멀어졌다. 이유를 물었지만, 박은식은 일방적으로 두영을 피할 뿐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저와 같이 있는 모습을 이주학에게 보여 주기 싫은 듯해서 두영은 그의 생각을 따르기로 했다.

그 이후로 두영은 더 이상 박은식의 집에 놀러 가지 않았고, 수업 시간에 몰래 먹던 과자가 무슨 맛이었는지 잊어버렸다. 두영은 봄이라는 상자에 박은식과의 추억을 몽땅 눌러 담았다. 다음 계절은 없었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났다.

여름 방학식. 지금은 쓰지 않는 구 체육관. 학교 구석에 있는 건물이라 그 주변으로 사람이 다니지 않았다.

‘삼 분 버티면 그냥 보내 줄게.’

‘흐…….’

‘대답.’

창고로 쓰는 시설이었지만 샤워실 물은 멀쩡하게 나왔다. 두영은 팬티 한 장 차림으로 물세례를 받았다. 네 번째 물세례에 몸이 버티지 못하고 철퍼덕 넘어졌다. 꼴사나운 모습에 이주학이 비열하게 웃었다.

한여름이라도 찬물을 연이어 맞았더니 이가 사정없이 부딪쳤다. 맨바닥에서 냉기가 올라왔다. 입술은 진작 파랗게 변했고, 가슴 돌기가 뾰족하게 솟았다. 이주학은 연한 색소의 그것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삼 분만 숨 참으라니까? 그럼 교복 돌려줄게.'

이주학이 물로 가득 찬 대야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엔 두영의 교복이 담가져 있었다.

두영이 침묵으로 일관하자 이주학이 수도를 틀어 두영에게 조준했다. 거센 물살 때문에 살가죽이 뚫릴 것 같았다.

진전이 없는 상황에 잔뜩 성이 난 이주학이 뒤편에 서 있는 박은식을 불렀다.

'너, 얘랑 제법 친하지 않았냐?'

'그닥.'

박은식이 곧바로 부정했다. 이주학은 박은식을 물끄러미 보더니 두영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러곤 물이 고인 바닥을 터벅터벅 밟으며 다가와 두영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너 쟤랑 친했지?'

'…….'

‘똥개 새끼 또 기어오르지. 니네 아빠 일수 아줌마한테 돈 빌린 거 아냐?’

두영은 물방울이 맺힌 눈꺼풀을 힘겹게 뜨고 그와 시선을 맞췄다. 그제야 이주학이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목사 와이프인 우리 엄마는 모르는 게 없어요. 그거 내가 갚아 줄게. 그 일수 아줌마 남편이 현금 부자인데, 괜히 현금 부자겠냐? 사채꾼이라고 사채꾼. 그러니까 제대로 대답해. 박은식이랑 친했어, 안 친했어?’

두영이 대답을 하지 않고 있자, 성질 급한 이주학이 두영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가득 쥐고 뒤로 당겼다. 그리고 물이 나오는 호스를 두영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두영은 입 속을 파고드는 물에 몇 번이나 헛구역질했고 결국엔 맹물을 토했다. 한참 숨을 고른 두영이 힘없이 대꾸했다.

‘…쟤 몰라.’

두영의 속눈썹에 맺힌 물방울이 낙하했다. 흘러내린 물방울은 핏기 없는 뺨을 지나쳐, 도톰한 입술 사이로 스며들었다. 물에 부르튼 입술이 코팅된 것처럼 반질반질했다. 누런 눈으로 두영의 몸을 훑던 이주학이 별안간 큰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들 다 나가 있어.’

그의 욕망이 숨을 터뜨리는 순간이었다.

***

눈을 뜬 두영은 현실과 꿈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낯선 천장을 멀거니 보며 여기가 어딘지 조각난 기억을 더듬었다.

“아.”

순간적으로 선명해진 기억에 벌떡 일어났다가 도로 엎어졌다. 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아팠고, 엉덩이 사이가 말도 안 되게 쓰라렸다.

부력에 저항하듯 팔다리를 움직여 앞으로 기어갔다. 바닥을 짚고 서자마자 무릎이 꺾여 철퍼덕 넘어졌다. 아파할 새도 없이 엉덩이 사이에서 무언가 흘러나오는 걸 느꼈다. 그 정체를 확인한 두영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바닥에 내동댕이친 제 옷을 대충 껴입고 맨션을 벗어났다.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집까지 걸어왔는지 그 과정이 싹둑 끊겼다. 몸과 영혼이 분리되어 육신만 먼저 집에 당도한 것 같았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주저앉은 두영은 벽에 붙은 거울에 시선을 두었다. 그제야 자신이 어떤 꼬라지인지 인지했다. 앞섶이 벌어진 셔츠와 뒤집어 입은 니트, 한쪽 팔만 겨우 껴 넣은 후드 집업과 활짝 열려 있는 바지 버클은 누가 봐도 겁탈당한 모습이었다.

두영은 착잡한 표정으로 거울 속의 소년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마주 보고 있기 힘든 얼굴이었다. 빠르게 씻고 방에 들어왔다. 냅다 찬물로 씻었더니 이가 요란스럽게 부딪쳤다. 씻으면서 몇 번이나 속을 게워 냈더니 지구가 저만 빼고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옅게 숨을 내쉬면서 속을 진정시켰다. 불현듯 기분이 찜찜해졌다. 힘없는 모가지를 꺾어 가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다 한쪽 구석에 허물처럼 벗은 옷을 발견했다. 누가 보기 전에 얼른 치우는데 처음 보는 팬티가 있었다.

제게는 이런 스판 짱짱한 팬티가 없었다. 동네 옷 가게에서 9,900원 한 세트로 산 속옷이 전부였다. 눈을 끔뻑이던 두영은 힘없이 팬티를 떨구었다.

“그냥… 죽을까?”

급하게 나온다고 홍승표의 팬티를 입어 버렸다. 두영은 무릎을 꿇은 채 바닥에 이마를 갖다 댔다. 찬 바닥에서 올라온 냉기에도 수치스러움이 가라앉지 않았다.

진짜 죽고 싶었다.

그럼에도 일은 해야 했다. 두영은 멀리서 자신을 알아본 수위 아저씨가 공동 현관문을 열어 주자 걸음에 속도를 높여 문을 통과했다. 그냥 전처럼 무심하게 대해 주셨으면 좋겠는데 요즘은 먼저 인사를 해 주셔서 조금 난처했다. 어색하게 인사를 받은 두영은 엘리베이터에 허겁지겁 올랐다.

일단 손빨래한 속옷을 챙기긴 했지만, 어떻게 전해 줘야 할지 막막했다. 애초에 이런 집에 사는 홍승표가 겨우 속옷 한 장에 큰 미련을 두지 않을 텐데 말이다. 문제는 그 뻔한 사실을 맨션에 다 와서 깨달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의 집에 책가방까지 놓고 온 걸 오늘 아침에 일어나면서 기억해 냈다.

자신의 멍청함이 지긋지긋해 머리를 거울 벽에 콩콩 박다가 이내 다시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자꾸 머리를 때리니까 안 그래도 나쁜 머리가 더 나빠지는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소중하게 대해 주면 그나마 멀쩡해질 거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어루만졌다.

잠깐 멍을 때린 것뿐인데 어느새 활시위를 떠난 화살촉처럼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두영은 녹슨 장난감처럼 삐그덕 삐그덕 걸었다. 아직도 온몸이 다채롭게 욱신거렸다.

생각해 보니 굳이 얼굴을 마주한 상태로 속옷을 돌려줘야 하나 싶었다. 우유 보관함이나, 손으로 주나 다 똑같았다. 나름 홀가분해진 두영은 우유 보관함 입구를 여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두툼한 현관문에 이마를 세게 박았다. 묵직한 소리가 전실에 똬리를 틀었고, 제 심장은 매섭게 추락했다.

두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튀었다. 그새 일 층에 내려간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중이었다. 기분이 싸해지는 건 다년간 쌓아 온 인생 데이터라고 했다. 이를테면 촉이란 거다.

하지만 사람들이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다. 같은 촉을 느꼈다는 가정하에 자신을 믿고 계획을 수정하는 사람이 있는가에 반면, 일이 어떻게 흘러가든 멀뚱히 두고 보는 사람도 있었다. 두영은 후자였다.

머리는 당장 비상계단을 이용하라고 말했고, 마음은 안일했고, 몸은 피곤했다. 아직도 느껴지는 엉덩이 사이의 이질감에 엘리베이터 쪽으로 마음이 서서히 기울었다.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양쪽으로 갈라지자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틈 사이로 펑퍼짐한 트레이닝 바지를 입은 다리가 보였다. 이 이른 새벽에 펜트하우스에 올 사람은 우유 배달원과 집주인밖에 없었다.

두영은 들고 있는 검은 봉투를 떨어뜨렸고, 그 안에서 홍승표의 팬티가 삐죽 튀어나왔다. 좀도둑처럼 도망치느라 우유 주머니에 넣는 걸 까먹었다.

볼캡을 깊게 눌러 쓴 홍승표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속옷에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이거 입고 갔었어?”

“그, 그러니까… 나는 내 거인 줄 알고……. 아! 대신 깨끗이 빨았어!”

두영은 속옷을 잽싸게 주워 홍승표의 코앞에 내밀었다. 그는 미묘한 표정으로 속옷을 받고,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둥근 챙이 홍승표의 얼굴 반을 집어삼켰지만, 그만의 특유 분위기는 가릴 수 없었다. 두영은 볼록 튀어나온 그의 바지 주머니를 힐끗 보다가 비상계단 쪽으로 몸을 틀었다.

“나는, 이만…….”

“기다려.”

홍승표는 금방이라도 달아날 것 같은 두영을 붙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두영은 홍승표의 손길을 피하려다가 발이 꼬여 하찮게 넘어졌다.

“…….”

“…….”

누구의 탓도 할 수 없는 어색한 분위기에 두영은 입술을 꾹꾹 씹었다.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온 홍승표가 두영을 무 뽑듯이 일으켜 세우고 목줄 매듯 뒷덜미를 잡았다. 그는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며 낮게 읊조렸다.

“음, 너무 이른대.”

“…어?”

“혼잣말.”

가볍게 미소 지은 홍승표가 자연스럽게 두영을 집으로 데려갔다.

“납치가 쉽네.”

얌전히 따라오던 두영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거리를 벌렸다. 피식 웃은 홍승표는 편의점에 다녀온 모양인지 홈바에 포장을 뜯지 않은 담배를 올려 두었다.

“씻고 나올 거니까 도망가지 말고 기다려.”

그는 두영의 입술을 빤히 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두영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싱겁게 웃은 홍승표가 화장실로 들어가고 그제야 긴장이 풀린 두영이 벽을 타고 주르륵 무너졌다.

어제 같은 상황이 또 벌어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럼 홍승표는 대체 왜 자신을 집에 데리고 들어온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제의 일이 아직도 생생했다. 허삼혁이나 이주학 패거리에 비하면 그리 폭력적이지도 않았다. 피가 조금 났지만, 맞아서 살이 터진 것보단 나았다. 제게 뭔가를 더 요구하지도 않았고, 사진 같은 것도 찍지 않았고……. 잠깐만. 진짜 안 찍었나? 도중에 기절을 해서 정확하지 않았다.

아득하게 들려오는 물줄기 소리와 은은한 간접 등에 졸음이 쏟아졌다. 홍승표는 공과금이 아까운 모양인지 집에 불을 켜지 않았고, 대리석 바닥도 차가웠다. 아직도 연탄을 때우는 자신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은연중 있는 놈들이 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한겨울의 바깥 공기보다는 따뜻했다. 그리고 홍승표의 몸은 따뜻하니까 이 정도의 차가움은 괜찮은가 보다, 하고 납득하게 됐다.

두영은 커다란 통창에 오롯이 걸린 달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달빛이 흐려질 때마다 눈을 한 번씩 뒤집어 깠지만, 얼마 못 가고 눈이 스멀스멀 감겼다. 모가지가 자꾸 꺾여 무릎에 턱을 얹었다. 눈만 감고 있겠다는 걸 어느새 진짜 잠이 들고 말았다.

문득 뺨 언저리가 간지러워 손을 휘저었다. 계속해서 제 곁을 맴도는 모기 한 마리 때문에 짜증이 나 팔을 크게 휘저었더니, 무언가를 손등으로 세게 쳐 버렸다. 그러다 여기가 어딘지 떠올리고 기분이 싸해졌다.

“깬 거 알아.”

이대로 계속 자는 척을 하려고 했던 두영이 머쓱하게 눈을 떴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나체쇼에 고개를 냉큼 돌렸다. 한순간이었지만, 굴곡진 몸에 송골송골 맺힌 물방울이 생생했다.

왜 옷도 안 입고… 혹시 자랑하는 건가?

뭐가 됐든 생눈으로 보기 꺼림칙한 비주얼이었다. 홀짝 일어난 두영이 현관문 쪽으로 방향을 틀자, 뒤따라 일어난 홍승표가 두영의 뒷덜미를 잡고 마주 보는 상태로 돌렸다.

“뭐지? 이렇게 대놓고 도망간다고?”

“…….”

“수능도 끝났는데 학교 꼭 가야 해?”

홍승표가 목에 두른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말했다.

학교를 빠진다니. 두영은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이주학이 집까지 찾아와 괴롭히지 않은 건 자신이 학교에 꼬박꼬박 나가서였다. 게다가 학교를 빠졌다가 졸업도 하지 못하면 그 흔한 편의점 알바도 구하기 힘들었다.

시선을 바닥에 꼬라박은 두영은 고개를 희미하게 끄덕였다. 그런 두영을 물끄러미 보던 홍승표는 별안간 옷방으로 두영을 끌고 가 문가에 세워 뒀다.

“여기 서서 나 옷 입는 거 구경해.”

짓궂게 웃은 홍승표가 두영이 손수 손빨래해서 준 속옷에 다리를 꾀어 넣었다. 두영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십, 수백을 넘나드는 옷은 겨울 외투만 종류별로 있었다. 모두 매장에서 파는 새 옷 같았다.

옷방 안쪽에 걸린 전신 거울에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비쳤다. 후드 집업 소매의 낡은 시보리와 빗질을 하지 않은 헝클어진 머리카락, 홍조 때문에 붉은 뺨과 제 앙상한 발목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뭐 해, 가자.”

어느새 옷을 다 갈아입은 홍승표가 말했다. 그는 인터폰으로 엘리베이터를 호출하고 집을 나섰다. 뒤따라 엘리베이터에 탄 두영은 모퉁이에 바짝 붙어 섰다. 목덜미에 진득한 시선이 달라붙자 힐끔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큼지막한 그의 손이 기습하듯 뻗어 왔다.

두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몸을 관통하는 충격이 없었다. 눈을 천천히 뜨자 코앞에 홍승표의 가슴팍이 있었다. 그는 1층 버튼을 누른 손으로 두영의 뒤통수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내가 때릴 줄 알았어?”

잔잔한 홍승표의 숨결이 두영의 이마를 간지럽혔다. 시선을 살짝 들어 올리자 웃고 있는 그의 입술이 보였다.

“걱정 마, 넌 때릴 데 없으니까.”

무생물처럼 깜빡이지 않는 그의 눈에 자신이 비쳤다. 홍승표는 말을 참 이상하게 했다. 어쩔 땐 봄바람처럼 부드러웠고, 어쩔 땐 사지육신을 찌르는 겨울바람 같았다. 지금은 후자처럼 들리는 전자였다.

이주학을 가볍게 무너뜨린 그는 자신을 어디에 가두거나 멍이 생길 정도로 때리지 않았다. 도리어 제 머리를 값비싼 자기처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그러나 그의 다정함은 양날의 검이었다. 어느 쪽으로 다가가도 다치는 건 자신이지 그가 아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먼저 내린 홍승표가 버튼을 누르고 두영을 기다렸다.

“안 내려?”

쉴 틈 없이 멍을 때린 두영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맨션을 나섰다. 다섯 걸음 떨어진 곳에서 보는 그의 뒷모습에서 뭔가가 떠오를 듯 말 듯 했다.

아 맞다, 가방.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몰라 뒤에서 꼼지락거리는데, 기민한 홍승표가 알아서 뒤를 돌아봤다.

“뭔데?”

“가, 가방…….”

“안 들려. 크게 말해.”

“가, 방…….”

“하아.”

그의 입에서 담배 연기 같은 입김이 허공에 퍼졌다. 타인의 한숨은 보고 있는 것만으로 피가 마르는 듯했다. 꼭 자신의 하찮은 존재를 향한 한숨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기어이 고개를 떨구자 곧 시야에 깨끗한 운동화가 들어찼다. 그 운동화는 초겨울의 칼바람도, 뾰족한 겨울비도 모두 막아 줄 것처럼 든든해 보였다. 기척 없이 제 얼굴로 뻗어 온 그의 손에 두영은 흠칫 놀랐다. 노골적인 반응에 홍승표는 미간을 살짝 구겼다.

“사람 면전에 대고 놀라면 상처받아.”

“미안…….”

“나는 안 받았지만.”

무심코 눈을 게슴츠레 뜬 두영이 홍승표를 흘겼다. 그가 알싸한 새벽처럼 웃자 어쩐지 코끝이 찡했다.

두영은 입을 오물거리며 할 말을 골랐다.

“가방을… 니네 집에 두고 온 거 같아.”

“가방?”

홍승표가 담배 한 개비를 꼬나문 채 되물었다.

“그래, 못 보던 가방이 있었어.”

전봇대에 한쪽 어깨를 기댄 홍승표가 두영의 피딱지 진 입술을 눈에 담았다. 시선이 중첩될수록 두영의 어깨가 안쪽으로 말려들어 갔다. 오징어도 아니면서 시종일관 메말라 가는 녀석을 이해할 수 없었다. 손톱 주변도 엉망진창이었다. 정서 불안 그 자체였다.

저 정도면 정신과 상담을 받아 볼 법한데도 허두영은 몸이 보내는 신호를 알아채지 못했다. 아무래도 자신을 돌볼 여유가 없는 듯했다. 이유야 물어보지 않아도 뻔했다. 새벽부터 밤 자정까지 쉴 틈 없이 일만 하는 것 같았으니까.

잠시 침묵을 가진 홍승표가 잇새로 담배를 문 채 어눌하게 말했다.

“2580#.”

두영이 말갛게 뜬 눈으로 홍승표를 올려다봤다. 홍승표는 입술을 비스듬히 끌어 올렸다.

“앞으로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2580#. 집 비밀번호야. 네가 가지고 나와.”

“…….”

“못 알아먹어? 같이 가 줘?”

두영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고 냉큼 그의 집으로 뛰어갔다. 홍승표는 혀를 찼다. 한 번을 돌아보지 않는 똥개를 뒤따라갈지 진심으로 고심했다. 그러다 뒤뚱뒤뚱 걷는 뒷모습에 실소가 터졌다. 허두영은 첫 경험의 후유증이 큰 모양이었다.

아직도 두 손에 그날의 감촉이 남아 있었다. 땀에 젖은 매끈한 피부, 아파서 낑낑대는 신음, 울어서 짓무른 눈두덩, 말랑한 엉덩이. 하체만 남은 짐승도 어제처럼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두영은 몇 번의 실신을 반복하며 그를 받아 냈다.

자유롭게 유영하는 홍승표의 시선이 제 아랫도리에 닿았다. 뚜렷한 존재감이 공간을 가리지 않고 불거졌다. 이제 자신이 이주학과 김진호와 다르다고 부정할 수 없었다. 다른 점이라면 녀석을 먹어 봤냐 아니냐의 차이였다.

지금이라도 집에 따라 들어가서 덮칠까 고민하던 그는 눈앞에 보이는 택시를 세웠다. 갓 뗀 걸음으로 학교에 올 허두영을 상상하자 웃음이 비죽 샜다.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반응이었다.

아슬아슬하게 학교에 도착한 두영은 교실 뒷문에서 숨을 골랐다.

홍승표의 집에서 가방을 가지고 나왔을 때 그가 보이지 않아 당황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그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전봇대 옆에 서서 홍승표를 기다렸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 이해가 안 됐지만, 그땐 뭐에 홀린 듯이 그래야만 하는 줄 알았다.

뒤늦게 자신의 미련함을 알아챘을 땐 사방에 등교하는 아이들투성이였다. 항상 고요한 새벽에 혼자 등교하다가 처음으로 그 사이에 섞여서 걷자니 머릿속이 아노미 상태였다. 학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식은땀 범벅이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수십 쌍의 눈동자가 두영에게 쏟아졌다. 가장 날카롭고 뜨거운 시선의 주인공은 김진호의 것이었다. 입구에서 더 들어가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데 등 뒤로 탄력 있는 벽이 닿아 왔다.

홍승표였다.

“안 들어가고 뭐 해?”

“아…….”

그는 두영의 벌어진 턱을 부드러운 손길로 닫아 주었다. 두영은 너무 자연스러운 손길에 이상함을 못 느끼다가 뒤늦게 삐죽 나온 소매로 턱을 문질렀다. 홍승표의 표정이 사늘하게 가라앉았지만, 두영은 미처 보지 못했다.

그는 두영을 교실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얼떨결에 교실에 들어온 두영은 어색한 걸음걸이로 자리에 가서 앉았다. 홍승표가 옆에 있으니 쳐다보는 시선이 확 줄었다.

반장이 티브이를 틀자 방송부에서 틀어 준 영화가 나왔다. 지루한 영화를 보는 이들은 드물었다.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거나, 엎어져 잠을 잤다.

두영은 책상 위에 올린 제 가방을 조몰락댔다. 홍승표가 두영의 가방을 자기 책상 쪽으로 잡아당겨 베개처럼 베고 엎어졌다. 아까부터 그 혼자 불알친구처럼 구는 턱에 퍽 난감했다.

문득 집요한 시선이 옆통수에 느껴졌다. 안 봐도 김진호일 게 뻔했다. 그는 입술이 댓 발 튀어나왔지만, 홍승표를 의식하고 기분대로 행동하지 않았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김진호가 저 혼자만 불안한 건지 홍승표는 눈을 감은 채 일정한 호흡을 내쉬었다. 그게 너무나 편안해 보여 자꾸 시선이 같다.

그는 김진호처럼 눈에 띄게 행동하지 않아도 세상이 알아서 그의 중심으로 돌아갔다. 거대한 자력을 품고 있는 게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신경 쓰일 이유가 없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큰 소매가 자꾸 손등을 가렸다. 손이 시려 소매 안으로 따뜻한 숨을 불어 넣는데 별안간 홍승표가 두영의 목깃을 뒤집어 깠다. 깜짝 놀란 건 둘째치고 그가 제 옷을 벗기는 건 줄 알고 순간적으로 모든 사고가 굳어 버렸다.

무언가 확인을 마친 홍승표의 입매가 느슨히 풀려 있었다. 그는 두영의 목깃을 정리해 주고 손을 뗐다. 웃을 듯 말 듯 한 그의 표정에 두영은 어딘가 찜찜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소매를 까뒤집었다. 그리고 낙뢰가 정수리에 꽂히는 충격에 휩싸였다.

와이셔츠가 제 게 아니었다. 지금 와서 깨달은 게 우스울 만큼 셔츠가 펑퍼짐했다. 스판 팬티를 연이은 낭패였다. 머리가 나쁘다곤 해도 이 정도로 정신없게 굴진 않았는데, 어제 이후로 제 안에 무언가 망가진 것처럼 모든 일이 엉망진창이었다. 덜컥 서럽기까지 했다.

“내, 내가 깨끗하게 빨아서 줄게…….”

“됐어, 그냥 너 입어. 잘 어울려.”

손끝으로 입술을 쓸던 홍승표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러다 불쑥 손을 뻗어 두영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헐렁한 소매를 위로 살짝 걷자 푸른 멍이 드러났다.

“…원래 멍이 잘 들어?”

두영은 뭐라고 대답할지 고민하다가 그냥 도리질 쳤다. 사실 저도 잘 몰랐다. 항상 멍이 사라지기 전에 새로운 멍이 생겨 그 위를 덮어 버렸다.

홍승표는 두영의 멍을 고요하게 바라보다가 한 줌 손목을 감싸 쥐었다. 두영이 팔을 뒤로 빼려고 하자 손아귀에 힘이 실렸다. 멍이 있는 자리라 조금만 세게 잡혀도 저릿저릿했다.

그는 애써 무표정을 유지하는 두영에게 물었다.

“아파?”

낯선 질문에 두영이 대답을 미루자 홍승표는 한쪽 눈썹을 들썩였다. 그러곤 고심하는 표정으로 악력을 조절했다.

“지금은?”

속삭임과 비슷한 물음에 두영은 숨이 안 쉬어졌다. 어쩐지 홍승표가 조이는 게 제 손목이 아니라 목인 것 같았다. 의식하고 내쉬는 호흡만큼, 눈을 깜빡이는 것만큼 신경 쓰이는 게 없었다. 지금이 딱 그랬다.

“너 밥은 제대로 먹어?”

두영은 쏟아지는 질문에 눈앞이 아찔했다. 그는 뭐 하나 제대로 답해 주지 않는데도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원래 이 정도로 말을 안 하고 있으면 상대가 제풀에 지쳐 먼저 포기했다. 그런데 홍승표는 포기가 아니라 다른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방법을 바꿨다.

“뭘 먹기는 해? 숟가락 들다가 혼절하겠네.”

“머, 먹고 있어.”

소심하게 대꾸하자 홍승표가 비웃음을 가득 실어 보냈다. 그러고는 두영의 팔을 팔랑팔랑 흔들며 누가 들어도 시비조로 말했다.

“이게?”

두영은 끈 떨어진 인형처럼 나부끼는 제 손목이 부끄러웠다. 자연스럽게 가까이 있는 홍승표의 손목과 비교하게 됐다. 아예 태생이 다른 종족 같았다.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졌다. 어느새 교실에서 떠드는 사람은 홍승표와 두영, 단 둘뿐이었다. 두영은 주변을 의식하고 떠드는 것을 멈췄다. 그런데 홍승표가 아예 손으로 턱을 받친 채 두영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는 두영이 관심을 주지 않으면 길쭉한 손가락으로 두영의 말랑한 볼을 콕 찔렀고, 계속해서 무시하면 턱 아래를 강아지 다루듯 간지럽혔다.

가만히 만짐을 당하던 두영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홍승표의 검지를 말아 쥐었다.

“하지, 마…….”

거절 뒤에 일어날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며 말한 건데, 홍승표는 나른하게 웃을 뿐 제 손을 움켜잡은 두영의 손을 떼어 내지 않고 괴롭힘을 멈췄다.

두영은 멋쩍게 그의 손을 놓았다. 손등으로 아래턱을 문지르며 불필요한 타인의 감촉을 지웠다. 화상을 입은 듯한 열감이 오래도록 머물렀다.

데워 줄게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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