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5. 낙하하는 감정 (5/20)

5. 낙하하는 감정

홍승표는 3개월짜리 전학생 주제에 학교의 숨겨진 장소를 곧잘 찾아냈다. 사람이 다니지 않는 시간대도 적절히 이용했고, 대체로 그곳은 도서관과 양호실이었다.

이날은 강당 창고였다. 한겨울에 땀으로 젖은 두영은 허공에 떠다니는 먼지를 멍하니 헤아리다 쾌남처럼 재채기했다.

“푸힝!”

재채기 한 번에 골이 울렸다. 바지 버클을 채우던 홍승표는 두영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리고 터벅터벅 걸어와 두영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감기야?”

두영은 끌어안은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고개를 내저었다. 자세 때문에 허리가 아팠지만, 그의 얼굴을 보는 것보다 나았다.

“먼지 때문에 그래?”

그러나 홍승표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질문하는 사람이었다. 두영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공기 방울이 터지듯이 작게 대답했다.

“…응.”

“옷 입어 나가게.”

두영이 일어나기 위해 먼지가 쌓인 바닥을 손으로 짚는 순간, 홍승표가 남아도는 체력으로 두영을 달랑 일으켜 세웠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라 두영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곧바로 홍승표가 한쪽 팔로 두영을 받쳤다.

그의 품에 안긴 두영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까마득한 시선에 머리채가 휘어 잡혔다. 홍승표를 뒤에서 받아 낼 때 단 한 번도 그의 얼굴을 마주 보지 않았다. 서로의 숨결이 스칠 정도로 얼굴이 가까워지자 그의 체취가 진하게 풍겼다. 절정의 문턱과 다를 바 없었다.

두영은 홍승표의 가슴팍을 밀쳤다. 그는 쉽게 밀려나 주면서도 부축하는 손길을 거두지 않았다. 작은 실랑이에 두영의 허벅지에 걸린 바지가 발목까지 내려갔다. 셔츠가 커서 아랫도리가 가려졌지만, 수치스러운 건 별개였다.

두영은 머쓱하게 뒷덜미를 쓸며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화가 난다는 의미가 아니라 실제로 배 안쪽이 그랬다. 그 순간 무언가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적막이 무섭게 내려앉았다. 두영은 아예 철푸덕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샐쭉 미소 지은 홍승표가 두영의 손목을 잡고 자꾸 뜯어내려고 했다.

그때, 이질적인 시선을 느낀 두영이 환풍기 너머에 시선을 주었다. 거기서 누군가 두 사람을 훔쳐보고 있었다. 관음하던 이는 자신의 존재가 노출되자 잽싸게 튀었다. 홍승표는 두영이 얼음장처럼 창백해지자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일어섰다.

“기다려. 저 새끼 죽이고 올게.”

그대로 가 버릴 줄 알았던 홍승표가 다시 돌아와 두영의 어깨에 자기 외투를 걸쳐 주었다. 그러고는 외투 주머니에서 사용감이 없는 물티슈를 꺼내 내밀었다.

“늦게 올 것 같으니까 먼저 교실에 가 있어.”

홍승표는 잠시 망설이더니 두영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겨 주고 홀연히 떠났다. 떠나는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던 두영은 방금 홍승표가 어루만진 부분을 제 손으로 쓰다듬었다. 왜 자꾸 저를 조심스럽게 만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게 너무 낯간지러워 배꼽 부분이 조여들었다.

교실에 도착했을 땐 점심시간이라 사람이 없었다. 두영은 부르르 몸을 떨며 겉옷을 여몄다. 점심에는 히터 가동이 멈추어 사늘한 기운이 완연했다.

따뜻하게 몸을 감싸는 그의 옷에서 마른 나뭇가지와 축축한 흙 내음이 났다. 그래서인지 조금 전의 일로 딱딱해진 몸이 느슨하게 풀렸다. 동시에 허탈한 기분도 들었다.

기대와 실망.

좋음과 싫음.

섹스와 강간.

양극에 있는 단어가 처절한 싸움을 벌였다. 저항할 의지를 빼앗긴 두영은 책상에 엎어져 출구가 보이지 않는 구렁텅이를 헤맸다.

비까지 내려 하늘이 어두컴컴했다. 손을 아래로 뻗어 발목을 주물렀다. 비가 오거나 찬 바람이 불면 왼쪽 발목과 손목이 쑤셨다. 아픈 건 싫지만, 부정적인 기분이 조금 상쇄되는 듯하여 참을 만했다.

오래 걸릴 것 같다는 말과 달리 홍승표는 금방 돌아왔다. 그가 두영의 책상 위에 빵과 두유를 내려놓고 앞자리 의자에 마주 보고 앉았다.

“먹어.”

두영이 먹지 않고 멀뚱멀뚱 보고만 있자, 홍승표가 직접 빵 봉지를 뜯어 두영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리고 의자 등받이에 한쪽 팔을 걸치고 손바닥에 턱을 괴었다.

얼결에 빵을 받은 두영은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고마워…….”

“고맙긴. 나 좋으라고 주는 건데.”

홍승표는 가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할 때가 있었다. 무슨 의미인지 물어보고 싶어도 그가 혼잣말이라며 귀찮아할까 봐 그냥 속에 쌓아 두기만 했다.

한입 가득 베어 문 빵은 슈크림 빵이었다. 달짝지근함이 입 안에 가득 퍼졌다. 문득 그의 소매에 얼룩진 자국을 발견했다. 저건 마치…….

“내 피 아니야.”

두영의 시선을 의식한 홍승표가 무덤덤하게 말하며 얼룩진 팔을 내렸다. 두영이 시선을 들자 맑게 웃는 홍승표가 보였다. 그를 향한 궁금증이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관음증 변태는 어떻게 됐어? 네가 때렸어? 동급생이야? 이주학 패거리야? …핸드폰으로 촬영하진 않았대?

시선을 떨군 두영은 목 뒤로 넘어가는 빵과 함께 궁금증도 삼켰다.

다 먹은 빵 봉투를 네모난 딱지 모양으로 접고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두유는 따뜻해서 조금만 더 조몰락대기로 했다.

“추우면 옷을 두껍게 입어.”

홍승표가 두영의 굽은 손가락에 시선을 주며 말했다. 두영은 자신이 입고 있는 외투 주인을 떠올리고 주머니에 넣은 쓰레기를 도로 꺼냈다.

“옷 돌려줄게.”

“됐어, 너 입어.”

“아냐, 아냐.”

“입어.”

“괜찮…….”

“입으라고.”

그가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두영은 두유를 쥔 손을 꼬물거렸다. 오늘 날씨는 영하에 가까웠고, 찬비가 땅을 적는 데다 뼈까지 스며드는 칼바람이 불었다. 두영은 가벼운 차림의 홍승표를 힐끗 보았다.

“…안 추워?”

“안 추워. 나 체온 높은 거 네가 잘 알잖아.”

본인의 신체적 특징을 자신이 당연하게 알고 있을 거라고 말하는 모습이 천연덕스러웠다. 근데 맞는 말이라 두영도 딱히 부정하지 못했다. 뒤에서 자신을 껴안은 홍승표의 체온은 뜨뜻한 온돌 같았다. 한여름에도 땀이 잘 안 나는 체질인데 홍승표와 그 행위를 하고 나면 온몸이 땀범벅이 되었다.

갑자기 얼굴에서 심한 열감이 느껴졌다. 두영은 제 속내가 들킬까 봐 급히 눈을 내리뜨고 입술을 뜯었다.

“그건?”

“어, 어?”

두영은 혀가 꼬여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홍승표는 갑자기 이상해진 두영을 묘하게 보다가 말을 덧붙였다.

“두유는 안 먹어? 훔쳐 갈 정도로 좋아했잖아.”

“아… 이건 따뜻해서……. 그, 그리고 훔친 거 아니야.”

“그래, 그래.”

두영은 그가 진짜로 안 믿는 건지, 장난을 치는 건지 헷갈렸다.

‘진짜 안 훔쳤는데. 나도 받은 건데.’

구구절절 해명하고 싶었지만, 말주변이 한참 부족해 금방 포기했다.

“그래도 식기 전에 먹어.”

“응…….”

두영은 제 귓불을 조몰락거렸다. 뜨거운 게 제 손인 건지, 귓불인 건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열이 흘러넘쳤다. 홍승표와 함께 있으면 그의 뜨거운 체온이 제게 스며드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가 불편하면서도 내심 옆에 있고 싶었고, 조금이라도 더 머물고 싶어 은연중 뭉그적거리기도 했다.

자신의 미련한 행동에 가슴 한편이 씁쓸했다. 그러다 손안에 든 온기가 제 착각이 아니라는 생각에 입술 끝이 저절로 말려 올라갔다. 너무 오랜만이라 스스로도 어색한 미소였다.

순간 저를 둘러싼 분위기가 서늘해졌다. 고개를 들자 홍승표가 음습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두영의 입꼬리가 한순간에 하강 곡선을 그렸다. 혹시 비웃는 것처럼 보였나? 그렇다면 이번만큼은 당장 해명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그때였다. 홍승표가 별안간 의자를 거칠게 밀어젖히고 일어섰다. 화들짝 놀란 두영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홍승표를 간신히 올려다봤다. 그는 허공을 향해 알 수 없는 눈빛을 던지고 연신 마른세수를 했다. 얼핏 착잡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홍승표가 불시에 두영을 내려다보며 미간을 구겼다. 그러고는 토막 난 숨을 내쉬며 말했다.

“밥, 먹으러 가자.”

두영은 눈꺼풀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저 밥이라는 게 좆밥의 밥인가. 대책 없는 해석이 무궁무진하게 늘었다. 그렇지만 조금 전의 홍승표는 너무 예고도 없이 훅 들어왔다.

말귀를 못 알아먹는 듯한 두영의 모습에 홍승표는 다시 말해 주었다.

“식당 가게 일어나.”

두영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는 사실이 더욱 놀라웠다. 그리고 이내 빠르게 마음이 식었다.

‘급식실 가기 싫은데.’

사람이 많은 곳에만 가면 찌질해지는 제 모습을 홍승표에게 보여 줄 생각을 하니, 벌써 손바닥에 식은땀이 났다. 심지어 그와 함께 다니면 1, 2학년의 시선도 따라붙을 것이다. 그는 여러모로 눈에 띄는 존재였으니까.

“뭘 그렇게 긴장해. 처음이야?”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하던 홍승표는 두영의 긍정 같은 침묵에 미소를 거뒀다. 그러고는 두영의 손목을 잡고 자리에서 빼냈다.

“걱정 마, 나도 처음이야.”

두영은 그의 손길에 교실을 문을 지나쳐 복도를 거닐었다. 그의 보폭은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넓어 숨이 찼지만, 어쩐지 다른 의미로도 숨이 가빴다. 마치 이상한 나라로 끌려가는 어느 동화 속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아 심장이 널뛰었다.

“허두영.”

스산한 바람이 깃든 목소리가 두영을 불렀다. 두영은 뒤를 돌아보았지만, 긴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못 알아들을 목소리가 아니었다.

“박은식…….”

그 이름을 작게 중얼거린 순간 애틋함과 섬뜩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홍승표는 갑자기 우뚝 멈춰 선 두영의 몸뚱이를 잡아당겼다. 두영은 종이짝처럼 날아와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부딪쳤다.

“왜 그래?”

창백한 두영의 낯빛에 홍승표가 물었다. 두영은 좀 전의 설렘이 갑자기 끔찍하게 느껴졌다. 역함이 뚫고 나올 기세로 목구멍을 두드렸다. 두영은 제 몸에 닿은 그의 손길을 모두 쳐 내고 도망쳤지만, 몇 걸음 채 가지 못하고 붙잡혔다.

“뭔데?”

홍승표가 사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물었다.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팔을 마구 휘젓던 두영이 실수로 홍승표의 턱을 손등으로 쳐 버렸다. 도리어 깜짝 놀란 건 두영이었다. 홍승표는 두영의 당황한 표정을 날 선 눈으로 주시하다가, 제 턱 주변을 안타깝게 맴도는 손을 고쳐 잡았다.

“미안하면 같이 밥이나 먹어.”

제대로 듣지 않고 고개부터 끄덕거린 두영은 홍승표의 손에 들린 휴대폰 카메라 렌즈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두영의 눈빛이 한순간에 먹이를 노리는 살쾡이처럼 변했다. 그 시선을 발견한 홍승표는 머리 위로 휴대폰을 천천히 들었다.

두영의 시선이 그의 손을 따라 움직이자 홍승표가 고즈넉한 가을바람처럼 웃었다. 그러고는 두영이 입은 겉옷 주머니에 휴대폰을 넣어 주고 식당을 향해 걸었다.

손이 잡힌 상태로 그를 얌전히 따라가던 두영은 뒤늦은 민망함에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도 홍승표 특유의 세상만사 초월한 듯한 모습에, 조금 전 자신이 저질렀던 무례가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느껴졌다.

두영은 주머니 위로 홍승표의 휴대폰을 움켜쥐었다. 무섭게 낙하하던 기분이 다시 상승곡선을 달렸다.

느지막이 도착한 급식실은 걱정했던 것보다 한산했다. 두영은 홍승표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며 식판에 반찬을 담았다. 급식실이 처음이라는 홍승표는 행동이 여유로워 전혀 처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수저를 챙기던 홍승표가 숟가락만 두 개를 들고 젓가락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새끼 고양이처럼 그를 따라 하던 두영은 아무 생각 없이 숟가락을 들었다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홍승표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미소가 비스듬히 걸린 그의 입술을 발견했다. 뒤늦게 그가 장난치는 것임을 알아챈 두영은 숟가락을 뻣뻣하게 내려놓았다. 홍승표가 한쪽 눈썹을 까딱이며 말했다.

“왜 이건 안 따라 해?”

두영은 입을 뻐끔거리다가 그대로 다물었다. 홍승표는 실없이 웃으며 젓가락을 두영의 몫까지 챙기고 앞장섰다.

금붕어 똥처럼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가던 두영은 숟가락을 야무지게 쥔 김진호와 눈이 마주쳤다. 곧바로 시선을 피했지만, 각막에 각인이 될 만큼 강렬한 눈빛이었기에 어딘가 찜찜했다. 다행히 김진호와 친구들은 빈 식판을 들고 급식실을 떠났다.

메인 메뉴는 진작 거덜 나서 풀 반찬만 남았다. 두영은 깨작깨작 밥풀을 씹어 먹었다. 공간이 주는 어색함 때문에 밥이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 홍승표가 두영의 밥 위로 시금치를 올려 주었다. 아무래도 홍승표는 편식을 하는 모양이었다. 두영은 소여물을 씹듯 시금치를 꾸역꾸역 삼켰다.

두영이 채 썰린 당근과 밥 몇 숟갈을 남기자, 먼저 식판을 비운 홍승표가 물이 담긴 컵을 두영에게 밀어 주며 말했다.

“너 편식하네?”

불쑥 치고 들어온 지적에 두영의 입술이 오리처럼 삐죽 튀어나왔다.

‘자기는 시금치 싫어하면서.’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한 뾰로통한 반응이었다. 홍승표는 두영의 튀어나온 부리에 시선을 고정하고 말을 이었다.

“허겁지겁 먹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깔끔하게 먹고. 밥 남기는 건 예상외지만.”

두영은 물컵을 둥글게 말아 쥐었다. 설익은 당근은 맛이 강하게 나서 싫었고, 여기 오기 전에 빵을 먹어서 배가 고프지 않은 데다 낯선 공간이 불편해서 음식이 목 뒤로 넘어가지 않았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였지만, 자신은 그것마저 허락되지 않았다. 가난한 왕따도 싫어하는 음식이 있을 수 있었고, 배가 부르면 밥을 남길 수 있었다. 왠지 홍승표한테 돈 한 푼 빼앗긴 적이 없는데 무언가 도둑맞은 기분이었다.

“…먹으라고 하면, 먹을게.”

두영은 금방 꺼질 듯한 촛불처럼 말했다. 홍승표는 손끝을 관자에 괴고 두영을 진득하게 보았다. 두영은 그의 올가미 같은 시선에 고개를 떨구었다. 그가 저렇게 자신을 볼 때마다 금방이라도 제 얼굴로 뺨 싸대기가 날아올 것 같아 두려웠다.

“그러게, 남길 수도 있지.”

그러나 날아온 건 긴장한 게 억울할 정도로 싱거운 대답이었다. 힘이 빠진 두영은 어깨를 축 누그러뜨렸다.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객기를 부린 건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급식실에서 나오자 아침부터 줄기차게 내리던 비가 그쳐 있었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실에 가다 보니, 얕은 웅덩이를 피해 요리조리 걸어야 했다. 그래서 자연스레 홍승표와 거리가 벌어졌다.

두꺼운 구름층 사이로 빛기둥이 쏟아졌다. 그 아래 홍승표가 멈춰 섰다. 눈을 살며시 구긴 그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 모습이 잡지에 실린 화보 같아서 저절로 눈길이 갔다.

두영은 처음 그를 제대로 보았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만 해도 홍승표는 빛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어둠만큼 빛과도 잘 어우러졌다.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이 있는 사실처럼 그의 존재도 당연했다.

넓어지는 빛의 면적이 두영의 발끝에 다다라서 사라졌다. 하늘은 또다시 비가 또 쏟아질 것처럼 그새 먹구름투성이가 됐다. 어쩐지 사무치게 추웠다.

홍승표는 가만히 서 있는 두영에게 걸어가 그의 턱 아래를 간지럽혔다. 두영은 고개를 흔들어 그의 손길을 쳐 내고 앞장서서 걸었다. 그러나 홍승표에게 팔이 붙잡혀 빙글 돌려 세워졌다.

홍승표는 두영을 내려다보며 잿빛 톤으로 말했다.

“성깔 있는 고양이 같았지만 너랑 안 어울려. 넌 위축돼야 볼만하거든. 지금처럼.”

두영은 입술을 씹었다. 뭘 해도 허술한 자신이 싫었다.

“먼저 교실에 가 있어.”

홍승표가 집게손가락을 입에 대고 연기를 뻐끔대는 시늉을 했다. 소각장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이 배부른 짐승 같았다. 당장 먹이를 사냥하지 않아도 굶어 죽을 걱정이 없는, 사냥당하지 않을 확신이 있는 그런 맹수였다.

교실에 들어가자 모두가 짠 듯이 두영을 바라보았다. 잔뜩 위축된 두영은 어색한 걸음걸이로 자리에 가서 앉았다. 책상 위에 두고 간 두유는 한 줌의 따뜻함도 없이 차가워져 있었다.

옆이 휑하여 팔뚝을 쓸었다. 생각해 보니 요새 혼자 다닌 적이 별로 없었다. 홍승표는 도장 깨기를 하듯 학교 구석구석에서 제 몸을 탐했고, 자신은 군말 없이 그의 장난감이 되어 주었다.

힘으로 짓누르는 그가 무섭고 아팠지만, 행위가 끝난 후 제 머리를 다정하게 어루만져 주는 손길이 좋았다. 그때만큼은 자신을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그뿐만 아니라 김진호가 시비를 걸어오는 빈도도 줄었다. 그것만으로 숨통이 트여 조금 살 것 같았다.

그때 옆자리 의자가 땅을 긁으며 뒤로 빠졌다. 김진호였다. 빈자리에 엉덩이를 붙인 그는 수다쟁이란 별명에 어울리지 않게 입을 굳건하게 다문 상태였다. 그러다 포자가 터지듯 아가리를 열었다.

“때깔이 고아졌네? 화색이 아주 존―나 돌아.”

빈정거리는 김진호에게 얼핏 초조함이 엿보였다. 그는 자꾸 교실 문을 힐끔거렸고 다리를 정신없이 떨었다. 그러다가 두영의 의자를 발끝으로 툭툭 차며 말을 이었다.

“너는 벨도 없냐? 홍승표나 졸졸 따라다니게? 걔 옆에 있으면 뭐라도 떨어질 줄 아는데 그런 거 좆도 없어.”

은유가 아닌 실제 좆이 떨어졌지만, 두영은 말을 아끼기로 했다.

두서없이 빈정거리던 김진호가 이제야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내일 이주학 퇴원한다.”

두유를 쥔 두영의 손등 위로 뼈가 불거졌다. 염산을 들이마신 듯 명치가 쓰라리기까지 했다. 그간 조용했던 김진호가 왜 갑자기 시비를 거는지 알게 되었다. 이주학이 퇴원한다는 소식에 의기양양해진 것이었다. 김진호는 창백해지는 두영의 낯빛에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뭘 쫄아 새삼스럽게. 아무튼 난 말했고, 내일부터 수급 다시 시작한다.”

두영은 김진호가 뭐라고 떠들던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주학이 학교에 오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감히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의 화풀이 대상은 당연히 가장 만만한 자신이 될 것이었다.

그때 김진호가 휴대폰 화면에 무언가를 띄우고 두영의 책상에 올려 두었다. 두영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쪽을 향했다. 그가 띄워 둔 화면을 보자 끔찍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두영이 잽싸게 손을 뻗었지만, 김진호가 먼저 휴대폰을 낚아채고 두영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김진호는 두영의 얼굴을 코앞으로 바짝 당겨 와 낮게 속삭였다.

“넌 행복하면 안 돼.”

두영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라고, 이주학이 너한테 전하라더라. 근데 왜 행복하면 안 되냐?”

김진호가 빈대 같은 얼굴을 하고 물었다. 두영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틀었다. 어깨를 으쓱거린 김진호가 두영의 목깃을 정리해 주며 덧붙였다.

“홍승표 그렇게 믿지 마라. 걔나 이주학이나 똑같은 거 모르겠냐? 차라리 내가 훨씬 낫지. 적어도 난 위선은 안 떨잖아? 다 널 위해서 해주는 말이니까 새겨들어. 같은 반찬으로 딸 친 동지로서 해 주는 나의 위선이니까.”

제 얼굴에 뿌려지는 김진호의 숨결이 더러웠다. 나불거리는 김진호의 입을 당장 틀어막고 싶었지만, 조금 전 그가 내뱉은 말로 인해 불가항력 상태가 되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문드러진 속이 따끔했다. 차라리 자극을 자극으로 느끼지 못하게 아예 제 존재 자체를 없애고 싶었다.

불현듯 어수선한 교실이 돌연 조용해졌다. 주변을 두리번대던 김진호는 문틀에 어깨를 기대고 선 홍승표를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씨발…….”

나직이 뇌까린 김진호가 홍승표의 자리에서 떠났다. 큰 보폭으로 유유히 걸어온 홍승표는 차갑게 얼어붙은 두영을 조용히 응시했다. 그리고 불쑥 두영의 턱을 잡고 들어 올렸다. 두영은 코끝에 퍼지는 겨울바람 내음과 알싸한 담배 냄새에, 그제야 홍승표가 왔음을 알아차리고 눈을 끔뻑였다.

“왜 이렇게 힘이 없지? 쟤들이 또 돈이라도 내놓으래?”

새로운 흥밋거리를 찾은 듯한 말투였다. 두영은 고개를 짧게 내저었다. 그런데도 그의 시선은 거둬지지 않았다.

가끔 홍승표가 자신을 빤히 쳐다볼 때면 속이 읽히는 것 같아 거북해질 때가 있었다. 그래도 홍승표 옆에 있으면 몸은 힘들지라도 정신은 피폐해지지 않았다. 그게 자신이 부릴 수 있는 유일한 사치였다.

솔직히 이제는 뭐가 정답이고, 뭐가 틀렸는지 판단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김진호의 말대로 자신은 벨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서 더 이상 무너질 게 없는 지경에 도달한 건지도 몰랐다. 설령 그가 저를 강제한 사람일지라도…….

두영은 뭉개진 초점에 힘을 주고 일찍이 하지 못했던 말을 전했다.

“밥… 잘 먹었어.”

의자에 앉은 홍승표가 콧잔등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누가 침 뱉은 음식 먹는 줄 알았어.”

직설적이고 단순한 대답이었다. 두영은 입술이 간지러워 살짝 말아 물었다. 홍승표는 혼탁한 시선을 두영의 입술에 고정하고 물었다.

“넌?”

나른한 감상평 요구에 두영은 망설였다. 솔직히 저도 급식이 별로였다. 그러나 기회가 없었던 급식을 먹게 해 준 홍승표에게 차마 맛없다고 하기 망설여졌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식당 밥이 마냥 끔찍하진 않았다. 더해서 제법 먹을 만했다고 보정까지 됐다.

“나는… 괜찮았던 것 같아.”

홍승표는 괴상한 걸 들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진심이야? 너무 배고팠던 게 아니고?”

“…아니야.”

소심하게 대꾸하자 홍승표가 피식 소리 내 웃었다.

“알았어.”

그의 짤막한 대꾸에 두영은 끝까지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홍승표는 신기했다. 그의 타고난 여유로움이 제 요동치는 암울을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만들었다. 사실 정말 별거 아닌 걸 수도 있었다. 지금 심각하게 고민하던 일들도 나중에 돌이켜 보면 여유롭게 웃음 짓고 넘어갈 일일지도 몰랐다.

제 시야를 가린 끈적한 안개가 증발했다. 어쩐지 햇볕을 한 움큼 가득 쥔 기분이었다.

반장이 집에서 가져온 개인 노트북을 교실 티브이랑 연결해 따로 준비한 영화를 틀었다. 한국형 누아르 영화였다. 두영은 영화 한 편을 제대로 본 적이 드물었다. 그 한풀이를 학교에서 대신해 주려는 듯이 쉬는 시간까지 꽉꽉 채워 영화를 틀어 주었다.

평소였으면 재밌게 봤을 텐데 오늘따라 골반과 허리, 고관절이 욱신거려 집중이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아침에 홍승표와 창고에서 한 짓 때문인 것 같았다. 참다 보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점점 식은땀이 날 정도로 힘들어졌다. 편한 자세를 찾지 못한 두영은 연신 뭐가 마려운 듯이 끙끙댔다.

“왜 그래?”

옆에서 휴대폰을 하던 홍승표가 두영의 불편함을 눈치채고 물었다. 두영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이 시선을 저 멀리 내동댕이쳤다. 무시당한 홍승표는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숨 막히는 침묵에 두영은 먼저 꼬리를 말고 꾸물꾸물 대답했다.

“허리가 아파서…….”

손으로 턱을 받친 홍승표가 불쑥 손을 뻗어 두영의 허리를 쓸어 주었다.

“여기?”

두영은 잠자코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홍승표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다가 위로 손을 번쩍 들었다. 교탁에서 자기 계발을 하고 있던 교사가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 순간 두영은 보았다. 홍승표의 입술이 짓궂게 치켜 올라가는 것을.

“짝꿍이 아픈 것 같은데 보건실에 데려다주고 오겠습니다.”

“혼자 못 갈 정도니?”

교사의 말에 영화에 집중하고 있던 몇 명이 두영에게 시선을 보냈다. 낯빛이 백지장처럼 하얘진 두영은 어서 교실을 떠나야겠다고 마음먹고 우물쭈물 일어났다.

그때, 동시에 일어난 홍승표가 두영의 무릎 뒤를 자기 무릎으로 거침없이 찔렀다. 저항 없이 무너진 두영은 얼떨결에 홍승표의 부축을 받았다.

“보시다시피, 혼자 못 걷네요.”

뭐 이런…….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댄 두영이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보건실에 도착하고 난 후였다. 두영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홍승표를 쳐다보았다. 그는 한 손에 파스를 든 채 느긋이 걸어오고 있었다.

“뒤로 돌아.”

두영은 냉큼 침대 머리에 등딱지를 바짝 붙였다.

“안 붙여도 돼.”

“어디 붙이면 돼?”

홍승표는 두영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도리어 벌어진 거리를 좁혔다. 하필 이 타이밍에 보건 교사가 전화를 받으러 밖에 나가기까지 했다. 입술을 곱씹은 두영은 엉거주춤 손을 뻗었다.

“그, 그럼 나 줘. 내가 할게.”

홍승표는 두영의 손을 물끄러미 보다가 덥석 잡아당겨 제 허벅지 위에 두영을 엎드리게 했다. 두영이 포복으로 벗어나려 했지만, 홍승표가 두영의 팔딱대는 등을 손으로 짓누르고 서슴없이 바지를 젖혔다. 엉덩이 골이 드러난 두영은 포기하지 않고 연신 발버둥 쳤다.

“씁, 얌전히 있어.”

“내, 내가… 으읏.”

볼기짝을 얻어맞은 두영은 당황하여 석고처럼 굳어 버렸다. 분명 아이를 체벌하는 듯한 맴매였다. 아프지 않았지만, 기분이 묘하여 더 이상 반항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얌전히 그의 손길을 받아야만 했다.

홍승표가 차가운 질감의 파스를 등허리에 한 장, 그 아래 엉덩이 골에도 한 장 붙였다. 잘 접착되도록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이 간지러웠다. 등 쪽이라 감각이 둔했지만, 그의 손끝이 파스의 경계선을 넘어선 건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두영은 손을 뒤로 뻗어 그의 손을 붙잡았다.

“이제, 됐어…….”

주섬주섬 일어난 두영은 바지와 셔츠를 여미며 홍승표와 조금 거리를 둔 채 침대에 앉았다. 느긋한 시선으로 보건실을 둘러보던 홍승표는 보건 교사의 빈자리를 묵묵히 응시하다가 입을 뗐다.

“원래 이래? 넌 딱 봐도 며칠 굶은 환자 같은데 다들 너한테 신경을 안 써. 왜 아무도 너를 돕지 않아?”

처음 들어 보는 괴상한 질문에 두영은 눈을 끔뻑였다. 숨 쉬듯 당연한 것에 의문을 가진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익숙해서, 너무나 익숙해서 두영은 미처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홍승표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몰라? 너 바보야?”

직설적인 깎아내림에 두영은 그저 뺨을 쓸었다. 바보라면 바보라고 할 수 있었다. 공부도 못하고 배운 것도 없으니까.

“뭘 또 수긍하고 난리야.”

홍승표가 헛웃음과 함께 말했다. 두영은 머쓱하게 이불을 긁적댔다. 사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변화시킬 수 없는 것에 의문을 가지면 더 괴로운 법이었다. 옛날부터 이주학이 제게 곧잘 하던 말이기도 했다.

자신의 인생을 돌이켜 보면 이주학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매 맞는 엄마, 매 맞는 자식, 아들이 귀한 할머니, 그게 당연한 허삼혁.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어찌 보면 지긋지긋한 굴레였다.

문득 옛날에 옆집에 살던 무당 누나가 제게 해 준 말이 떠올랐다. 누나는 저보고 박복한 팔자를 타고났다고 했다. 아무리 굿을 해도 그 팔자는 절대 바꿀 수 없다며 안타깝게 제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때는 너무 어렸기에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다가 서서히 깨달았다.

박복한 팔자는 행복해질 수 없는 거구나, 하고.

태어날 때부터 제대로 된 보호자가 없던 어린아이는 세상의 폭력에 무방비하게 노출됐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도움을 요청할 보호자나, 상처를 감싸 줄 어른이 없는 아이는 당연히 가장 쉬운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인생에서 두영이 습득한 생존법은 순응이었다.

그 깨달음을 얻은 이후부터 무슨 일을 당해도 딱히 반발심이 들지 않았고, 바꾸려고 하지 않았고, 저항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사람들도 제게 참으라고만 했지 싸워서 이기라고 하지 않았다.

그걸 어기고 딱 한 번 이주학에게 달려든 적이 있었지만, 보기 좋게 나가떨어졌다. 그렇게 무언가를 시도하고 상처받느니, 처음부터 포기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어떨 때는 그냥 그렇게 합리화를 할 때도 종종 있었던 것 같다.

자신은 행복해질 자격이 없는 게 맞았다. 회피의 끝에 행복이 있을 리 없었다.

문득 이 상황이 소름 끼치게 싫었다. 왜 자신이 보건실에 있는 건지 의아했다. 그 순간 홍승표가 제 발목을 움켜잡았다. 붙잡힌 발목을 빼내려고 힘을 주자 홍승표가 손아귀에 힘을 주고 버텼다. 그러고는 덤덤한 손길로 두영의 신발을 벗겨 냈다.

“아, 잠시…….”

그를 말리기도 전에 구멍 난 양말이 드러났다. 하필이면 빨래가 밀려 신을 양말이 이것밖에 없었다. 홍승표는 조약돌같이 생긴 오목조목한 발가락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 이불로 발을 감싸 주었다.

“아무튼 쉬어.”

두영은 자신이 누울 때까지 지켜보고 있을 것처럼 구는 홍승표 때문에 느릿느릿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조금이라도 떨어지겠다고 베개 끄트머리에 머리를 뉘자 한 사람은 족히 누울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홍승표는 능청스럽게 그 공간을 차지하고 이불까지 가져갔다. 두영이 일어나려고 하자 그는 두영의 옆머리를 잡고 도로 눕히더니, 기어이 부산스럽게 깜빡이는 두영의 눈두덩까지 손으로 덮었다.

“어서 자.”

“…….”

“눈 깜빡이지 마. 간지러워.”

두영이 계속 눈을 깜빡이자 홍승표가 손을 치우고 지그시 시선을 겹쳤다.

“왜?”

할 말이 있는 듯해서 물어보면 정작 두영은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가끔 지독하게 입을 다무는 모습에 홍승표는 불현듯 갈증에 시달렸다.

“무슨 생각해? 지금 생각하는 거 다 말해 봐.”

그는 스스로도 알 수 없는 호기심에 이질감이 들었다. 말하고도 괜히 물어본 것 같아 후회했지만, 이내 직접 들어야 이 답답함이 조금은 가실 것 같아 인내심을 가지고 녀석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똥개는 입을 달싹거릴 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제야 그는 두영의 대답이 아닌 목소리가 듣고 싶었던 것임을 깨달았다. 얼핏 불만을 내비친 홍승표가 손에 옆 머리를 괴고 두영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귀여운 척하는 거야? 굳이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두영은 시종일관 자기 듣고 싶은 대로 듣는 홍승표가 여러모로 이주학보다 더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냥 상대를 해 주지 말아야 그가 입을 다물 것 같았다.

긴장 속에 눈을 감은 두영은 나긋한 숨결이 제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걸 느꼈다. 조심스레 한쪽 눈을 뜨고 확인하자 홍승표가 자신이 베고 있는 베개에 머리를 뉘고 있었다. 그는 하품을 쩌억 하며 부정확한 발음으로 말했다.

“잘자. 먼저 일어나면 깨워 주고. 도망치지도 말고.”

몇 번 몸을 뒤척이던 홍승표는 곧 고른 숨을 내뱉었다. 미라처럼 뻣뻣하게 누운 두영은 제 몸 위에 올라와 있는 홍승표의 팔에 시선을 슬쩍 주었다. 고작 팔 한 짝인데 쌀 한 가마니처럼 무거웠다. 당장 치워 버리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그의 호흡이 일정해지는 순간이었다. 묵직한 팔을 조심스럽게 들고 옆으로 옮기는데 싸늘한 시선이 제게 날아와 꽂혔다. 무심코 옆을 보자 홍승표가 눈을 살벌하게 뜬 채 제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발칙한 새끼.”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으슥했다. 두영은 손에 힘이 풀려 제 배 위로 홍승표의 팔을 떨어뜨렸다. 그게 신호탄이 되었다. 홍승표는 별안간 두영을 깔아뭉개고 목덜미를 세게 깨물었다. 두영은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다 사레가 들려 얼굴이 시뻘게질 정도로 캑캑거렸다.

등을 쓸어 주는 손길을 거부하며 계속 발버둥 치자 홍승표의 표정이 사늘하게 굳었다. 그는 두영을 억지로 붙들고 제 아래 눕혔다.

“내가 오냐오냐해 주니까 자꾸 기어오르는 거지?”

“흐으…….”

방금까지 다정했던 홍승표는 온데간데없었다. 두영은 자신을 뒤덮은 그의 그림자에 덜컥 목이 멨다. 그가 두려웠다. 힘으로 찍어 누르는 그를 볼 때면 묵혀 둔 기억이 수면 위로 아득바득 기어 나왔다. 그 기억에는 하수구를 역류하는 오물 냄새가 났다.

두영은 눈물을 터뜨렸다. 소리 없이 헐떡이는 울음에 무력감이 엿보였다. 은근한 다정함 속에 잠시 잊고 있었던 그의 강압적인 모습이 파도처럼 자신을 덮쳐 왔다.

차라리 계속 이렇게 대하지. 걸레도 빌려주지 말고, 급식실에 데려가 주지도 말고, 겉옷도 덮어 주지 말고……. 그렇다면 이렇게 곤두박질치는 기분을 느끼지도 않았을 텐데.

“울지 마, 짜증 나니까.”

홍승표는 흥미가 깡그리 사라진 말투로 말했다. 짓누른 두영의 손목을 놔주고 몸을 세웠다. 두영은 태아처럼 몸을 웅크리고 숨을 죽였다. 한숨을 흐트러뜨린 홍승표는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쓸어 넘겼다. 그리고 침대를 벗어나 아예 양호실을 떠났다.

홀로 남은 두영은 허공을 멍하니 보다가 눈가를 거칠게 문질렀다. 바닥에 발을 딛고 일어서는데 눈앞이 아찔하게 점멸했다. 간신히 침대에 걸터앉아 넘어지지 않았지만, 평생 친구로 남은 현기증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갑자기 일어나면 이렇게 되는 걸 알면서도 잘 고쳐지지 않았다.

두영은 뇌가 아득한 저편까지 굴러갔다가 한참 만에 제자리로 돌아오는 걸 느꼈다. 들쑥날쑥한 기분도 한곳에 쓸어 모아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발견했다.

정갈하게 정리된 제 신발을.

두영의 연한 눈동자가 짱돌에 맞은 호수처럼 너울거렸다. 이런 짓을 할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잘 신경 쓰지 않았던 것들이 이제는 현미경으로 확대한 것처럼 자세하게 보였다. 앞코가 무너진 신발이라든가, 헤진 교복이라든가, 추위에 떨면서도 얇게 입고 다니는 자신의 옷차림이라든가…….

그리고 낯선 감정 하나가 제 안에 똬리를 틀었다. 그건 흔들 다리를 걷는 기분과 비슷했다. 불안하면서도 계속 걷게 되는 그런 느낌.

그 어떤 위로도 먹히지 않는 지금 상태에 속이 문드러졌다. 가난에서 오는 초라함 때문인지, 그로 인한 수치심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현기증이 완전히 가라앉았다. 그러나 두영이 양호실에 나온 건 한참이 지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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