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새해 (6/20)

6. 새해

새해가 물들었다. 티브이에서 새해 소망을 비는 사람들이 나왔다. 두영은 무심하게 채널을 돌렸다. 처음 맞는 스무 살도 아니면서 새삼스럽게 원대한 포부를 세워야 할 것만 같았다. 떠오르는 건 로또 당첨밖에 없었다.

제 인생은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다. 미래도 창창하지 않다. 만약 누군가가 제 젊음이 부럽다고 한다면 넙죽 팔아넘기고 싶었다. 그럼 그 돈으로 허삼혁의 빚을 갚고, 아담한 집을 사서 할머니랑 단둘이 살고 싶었다.

행복한 상상을 했는데 도리어 우울해졌다. 두영은 티브이를 끄고 이불속으로 꾸물꾸물 들어갔다. 얼굴만 바깥쪽에 내밀고 천장을 멀뚱멀뚱 보았다. 숨을 내쉴 때마다 입김이 나왔다. 가로세로 두 뼘 창문에는 서리꽃이 자라 있었다.

난방 텐트를 사고 싶은데 생각보다 비싸서 망설여졌다. 살지 말지 고민하다가 수면 양말을 꺼내 신었다. 인간의 몸은 쓰레기 같았다. 왜 환경에 맞게 진화하지 않는 걸까. 20년이나 산 집이 아직도 적응되지 않았다.

새해만 되면 무기력해지는 정도가 심해졌다. 연초라 마땅한 알바도 없어서 더 우울했다. 두영은 눈을 감았다. 티브이에서 보았던 장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새로운 시작을 기대하는 모습이 참 반짝반짝했다. 달동네에서 바라보던 도심의 별빛 같았다.

***

신년이 끝나고 하는 첫 우유 배달이었다. 칼바람이 두영의 귀를 무참히 뜯어 갔다. 목도리를 콧잔등까지 여민 두영은 동상에 걸릴 것 같은 손가락을 안쪽으로 말고 자전거 핸들을 잡았다. 그렇게 도착한 맨션을 올려다봤다. 가장 꼭대기 층에 있는 홍승표의 집 테라스만 은은하게 빛났다.

그는 그날 이후로 방학식까지 학교에 오지 않았다. 배달을 하러 가도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양호실에서 너무 싫은 티를 냈나? 그러나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복합적인 거북함이라 어쩔 수 없었다.

미안함이 마음 한 켠에 도사리고 있던 두영은 그를 보면 사과부터 해야지 마음을 먹었다가도 정작 보면 아무 말도 못 할 것 같아, 이대로 얼굴을 보지 않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두영은 발뒤꿈치를 살짝 띄워서 걸었다. 할 일을 마쳤음에도 문 앞에서 잠시 뭉그적대다 한숨을 폭을 내쉬었다. 이도 저도 아닌 자신의 초라한 행동이 못나 보였다.

방향을 틀어 엘리베이터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순간, 문이 열리고 홍승표가 나왔다. 그는 두영을 향해 서슴없이 손을 뻗었다. 두영은 눈을 질끈 감았지만, 제 몸에 닿는 손길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천천히 두 눈을 떴다.

제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 떨기 환상이었다.

갑자기 가슴이 먹먹할 만큼 쓸쓸해졌다. 두영은 제 배를 쓰다듬었다. 배꼽으로 스며든 찬 바람에 내장이 서슬 퍼렇게 떨렸다. 그건 공허함이 지르는 악다구니였다.

맨션 밖으로 나온 두영은 구부린 손가락 마디로 눈두덩을 밀가루 반죽처럼 뭉갰다. 손을 떼자 피곤함에 짙은 쌍꺼풀이 생겼다.

자전거를 사무실에 돌려주고 오전 단기 아르바이트 장소로 향했다. 정신없이 일을 끝내자 그새 점심시간이 되었다. 집에 가는 길에 우체국에 들러 등기 우편을 수령했다. 집에 아무도 없을 때 와서 직접 찾아가야 했다.

두영은 새것의 냄새가 나는 주민등록증을 엄지로 쓸었다. 무인 즉석카메라로 찍은 사진 속 남자는 표정도, 시선 처리도 엉망이었다. 더 보고 있기 민망해서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었다.

이제야 진짜 성인이 된 것 같았다. 일할 수 있는 폭이 넓어졌지만, 하자 있는 자신이 갈 곳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상관없었다. 숙식을 제공해 주는 공장에 들어가 어떻게든 버티면서 다닐 생각이었다.

아침부터 속이 허한 게 아무래도 배가 고픈 모양이었다. 맥도날드가 보였다. 매장 안에 사람이 많아 짧게 고민을 마치고 편의점에 들어가 삼각 김밥 하나를 샀다. 안에서 먹으려다가 알바생이 자꾸 쳐다보는 것 같아 밖으로 나왔다.

인적이 드문 구석에서 배를 채우다가 사람이 오는 것 같으면 등 뒤로 삼각 김밥을 숨겼다. 타인의 시선이 신경 쓰이는 건 자신의 만성 고질병이었다. 이제는 제 일부처럼 느껴졌다.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막막했다. 이런 하자 인간이 기숙사에 들어가서도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남은 삼각 김밥 조각을 한입에 털어 넣은 두영은 길 구석에서 나왔다. 어떻게 가다 보니 홍승표가 사는 맨션을 지나쳐야 했다. 문득 그가 집에 있을지 궁금했다. 평소에 뭐 하면서 지낼지도 궁금했다.

홍승표와 있으면서 한 짓이라고는 맨살을 부대낀 것뿐이라 그에 관해 아는 게 없었다. 그와 함께한 고작 그 며칠이 꿈 같았다. 저를 망치는 악몽이었지만, 눈 뜨면 계속 되짚어 보게 되는 이상한 나라의 백일몽이었다.

“허두영?”

변성기가 오다 만 듯한 목소리가 두영을 불러 세웠다.

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김진호가 있었다.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인간을 만나자 두영은 당황했다.

삼선 슬리퍼를 질질 끄시며 다가오는 김진호는 하얀 롱패딩을 입었다. 그게 꼭 사슴벌레 유충 같아 소름이 돋았다. 그를 보자 자연스럽게 이주학도 떠올랐다. 이주학은 퇴원 후에도 학교에 오지 않았다. 듣기로는 출석 일수가 부족하다고 하던데, 졸업이 가능할지나 모르겠다.

“야! 올만이다? 여서 뭐 하냐?”

김진호는 이제 갓 스물이 되었는데 벌써 백수 티가 났다. 면도를 하지 않았는지 입 주변에 왕초 같은 수염이 샤프심처럼 콕콕 박혀 있었다.

“벌써 일 다니냐? 똥개 새끼 부지런도 하다. 돈 벌었으면 담배 좀 사 줘 봐라.”

자신에게 맡겨 놓기라도 한 듯이 담배를 찾는 김진호의 모습에 두영은 내적 한숨을 쉬었다. 학교를 벗어났지만 여전히 자신은 똥개 새끼였다. 얼른 담배를 사 주고 이 상황에서 벗어나는 게 마음 편할 것 같았다.

두영은 김진호와 함께 편의점으로 향했다. 합 갑만 사면 될 줄 알았는데 김진호는 한 보루를 골랐다. 체크 카드를 내미는 두영의 손이 살짝 떨렸다.

그때 알바생이 민증을 요구했다. 두영은 주머니에서 갓 만든 따끈따끈한 민증을 꺼내 내밀었다. 나이를 확인한 알바생이 의심의 눈초리를 멀끔히 거뒀다.

“오올, 민증 뽑았냐? 이리 줘 봐 구경 좀 하게.”

계산을 치르고 밖에 나오자 김진호가 두영의 민증을 채 갔다. 두영은 김진호가 어떤 말로 제 살을 후벼 팔지 긴장했다. 그러나 김진호는 사진을 뚫어지게 볼 뿐, 별 대꾸 없이 두영에게 돌려줬다.

편의점 앞에 자리 잡은 김진호는 금연 구역 표지판을 무시하고 입술에 담배를 꽂았다. 매캐한 연기가 두영의 코를 간지럽혔다. 불량하게 쭈그려 앉은 김진호가 잔뜩 뜸을 들이며 물었다.

“…너, 아직도 홍승표랑 노냐?”

갑자기 홍승표의 이름을 듣게 되자 기운이 쑥쑥 빠졌다. 곁눈으로 두영을 지켜보던 김진호가 입술을 삐뚜름하게 치켜세웠다.

“거 봐, 내가 말했지? 너한테 떨어지는 건 좆도 없다고. 크큭…….”

김진호가 나라 팔아먹은 매국노처럼 비열하게 웃었다. 그러다 무언가 떠오른 듯이 급하게 덧붙였다.

“야. 너 나랑 일해서 돈 벌 생각 없냐?”

3년 동안 저한테서 돈만 뜯어 간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두영은 오늘 처음으로 김진호에게 눈길을 주었다.

“…무슨 일?”

슬쩍 관심을 드러내자 김진호가 입술 끝을 씰룩거렸다.

“니가 등골 빠지게 일해서 한 달에 버는 돈, 나랑 일하면 하루에 다 벌 수 있다. 어떰? 존나 군침이 싹 돌지 않냐?”

그의 말대로 군침이 살짝 돌긴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의심이 갔다. 세상에 쉽게 돈 벌 수 있는 일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힘들게 노동만 하는 자신의 노예근성이 자본 세상이 세뇌하여 만든 산물일 수도 있겠다고. 사실은 그보다 쉽게 돈을 벌 수 있는데 부자들이 방법을 꼭꼭 숨겨 놓은 것이다. 그럼 말이 달라졌다.

그때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피곤하니까 쉽게 당이 떨어졌다. 이번 달은 저번 달에 비해 많이 쪼들려 학교에 나가지 않는 만큼 일을 찾아서 해야 했다. 밀린 월세도 버거운데 빚쟁이까지 찾아왔기 때문이다.

정작 빚의 주인인 허삼혁은 집에 있지도 않았다. 결국 두영은 가족들 모르게 몰래 모으던 돈을 빚쟁이에게 주어 대충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두영의 심장이 초조하게 뛰었다. 김진호는 항상 자신을 기만했다. 이번에도 기만하는 걸 수도 있었지만, 혹시나 싶은 마음이 있었다. 어쩌면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라고 믿고 싶은 걸지도 몰랐다.

불현듯 선이 뚜렷하고 두툼한 입술이 떠올랐다. 그 입술의 주인도 거짓말을 잘했다. 나른하게 웃는 얼굴로, 단정한 목소리로…….

두영은 끊어지는 날숨을 목 뒤로 삼켰다. 알맹이가 없는 입김이 잿빛 허공에 흐트러졌다.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김진호는 답을 내놓지 않는 두영의 모습에 초조한 듯 말했다.

“지금 내 꼴이 이래도 일하고 있거든? 아는 형님이 꽂아 준 건데 그 형님이 멀쩡한 놈 데리고 오면 인셉 팍팍 준다고 했다. 어떠냐? 개꼴리지?”

“무슨… 일인데?”

“그냥 서빙 같은 거야. 아, 너는 서빙 힘드나? 그럼 걍 방에 들어가 손님 술 시중이나 들어.”

“술집이야?”

“야! 요새 술집은 니가 생각하는 그런 술집이 아냐. 존나 건전해 조온나. 억지로 술 강요도 안 하고 그냥 옆에서 술만 잘 따르면 돼. 진심 내 팔다리를 건다.”

저렇게 말하니 더 묻고 싶은 말도 목에 걸린 듯 나오지 않았다. 김진호의 말대로 한 달 월급을 하루에 벌 수만 있다면 당장 급한 불을 끌 수 있었다. 비밀스럽고 불법처럼 느껴지던 일이지만, 어차피 자신은 평범하거나 고상한 일을 할 수 없을 테니, 돈이라도 많이 버는 일을 택하는 게 나았다.

문득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술집에서 일했다던 엄마가 생각났다. 너무 어릴 때라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엄마를 이렇게라도 찾아서 닮고 싶은 걸까. 허삼혁이 저주처럼 내지르던 말 중에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불안하게 입술을 뜯던 두영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김진호가 기분이 좋은 듯이 활짝 웃으며 두영의 등딱지를 팡팡 때렸다.

“으유 시발! 너 나한테 존나 고마워해라! 그럼 오늘 저녁에 여기서 보자.”

“그… 내가 저녁에 하는 일이 있어서…….”

“아 씨. 그럼 11시 반까지다.”

김진호는 그새 철이 든 모양인지 한껏 너그러워졌다. 사실 11시도 조금 빠듯했으나, 카페를 마감한 뒤에 쉬지 않고 뛰어오면 될 것 같았다. 섣부르게 결정한 것 같아 가슴 한 켠이 걸렸다. 그러나 입맛을 가릴 처지가 못 됐다. 일단 1월만이라도 돈이 되는 것이라면 뭐든 해야 했다.

어쩐지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기대에 찬 표정을 숨기기 위해 두영은 목도리에 얼굴을 깊숙이 파묻었다. 어쩌면 이 가난을 제가 끝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티브이에서 봤던 빛을 품은 사람들이 떠올랐다. 새 출발의 희망을 논하는 그들처럼 지금 자신도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을지 몰랐다.

김진호는 조용히 담배를 태우며 두영을 쳐다봤다. 그러다 짤막해진 담배꽁초를 바닥에 버리며 터무니없는 물음으로 두영의 공상을 끊어 냈다.

“너 이주학이랑 잤냐?”

어쩐지 질문에 기시감이 느껴졌다. 예전에 홍승표가 제게 물어봤던 질문이었다. 두영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잤느냐의 의미를 되물었다. 그러자 김진호가 눈썹을 와락 구기며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섹스 말이야.”

두영은 애써 무표정을 유지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하, 씨발 돼지 새끼… 내가 구라일 줄 알았어. 이주학이 너에 대해 뭐라고 떠들고 다녔는지 아냐? 자기 전용 구멍이란다. 그런 놈이 누가 자기한테 호모 새끼 게이 새끼라고 하면 존나 야생 멧돼지처럼 튀어나와서 주먹이나 휘두르고… 존나 뭐 어쩌라는 겨! 근데 그게 다 구라였던 거지, 시발…….”

두영은 눈을 내리깔고 김진호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저에 대해 어떤 소문이 돌고 있었는지 대충 알고 있기에 김진호의 말이 딱히 놀랍지 않았다.

“그럼 홍승표는?”

같은 질문. 그러나 주어가 바뀌었다. 두영은 땀이 찬 손을 바지에 문지르며 뻣뻣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홍승표와 자신이 한 짓은 뭐였을까? 자신은 몸만 대 줬을 뿐, 쾌감은 오로지 홍승표의 몫이었다.

게다가 그 관계는 자신이 이주학의 이름을 적어서 시작된 것이었다. 만약 홍승표와 있었던 일을 솔직하게 말한다면 그렇게 된 원인도 말해야 할지 몰랐다. 그건 절대 함구였다.

김진호는 두영이 연신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자 의외라는 듯이 헛웃음 지었다.

“진심? 뭐야, 그 새끼는 줘도 못 먹었네.”

쭈그려 앉아 있던 김진호가 두 팔을 하늘 위로 쭉 뻗으며 일어났다.

“아무튼 오늘 저녁 11시 반이다. 늦지 마라.”

“…응.”

사슴벌레 유충은 다리가 저린지 뒤뚱뒤뚱 걸으며 자리를 떠났다.

눈을 게슴츠레 뜬 두영은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봤다. 비가 오는 날에는 항상 안 좋은 일이 생겼다.

하늘에게 빌었다.

오늘이 지나고 비가 내리기를.

해가 지자 하늘이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농도 짙은 겨울비 냄새가 났다.

두영은 빠르게 카페를 마감하고 약속 장소로 달음질했다. 골목이 어두워 물웅덩이를 발견하지 못하고 시원하게 밟아 버렸다. 흠뻑 젖은 옷감이 맨살에 들러붙었다. 마치 가지 말라고 자신을 붙잡는 것 같았다.

늦은 줄 알고 걱정했는데 김진호는 보이지 않았다. 또 속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뒤에서 자동차 경적이 울렸다. 두영은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하얀색 비엠더블유가 쌍라이트를 번뜩이며 빗물을 뚫었다. 조수석 창문이 내려가고 운전석에 앉은 김진호가 보였다.

“야, 타!”

눈을 깜빡인 두영은 조수석에 탈지, 뒷자리에 탈지 고민했다. 그러다 빗소리를 뚫고 들려오는 김진호의 고함에 냉큼 뒷자리에 탔다.

“니 뭐함? 내가 니 기사냐?”

“아, 미안… 앞으로 갈게.”

“됐고, 그냥 거기 앉아. 앞자리까지 물 묻히기 싫으니까.”

억수로 쏟아지는 비에 이미 등까지 젖은 상태였다. 차를 소중히 대하는 김진호의 시선이 따가워, 두영은 편하게 기대지도 못했다.

빨간 신호에 차가 정차했다. 김진호는 백미러를 들여다보며 왁스로 떡칠한 머리를 정리했다.

“이 차 어떰? 오 년 풀 할부로 산 건데 존나 쾌적하지 않냐?”

외제차로 자기애를 채운 김진호가 말했다. 저렇게 말해도 두영은 차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도착해서 형님 보면 인사 잘해라. 내가 존경하는 형님이니까.”

“응.”

“근데 꼬라지가 그게 뭐냐? 어휴, 시발… 속 터진다, 속 터져.”

두영은 허벅지에 올려 둔 손가락을 꼬물거렸다. 얼굴에 달라붙은 젖은 머리카락, 축축한 옷, 걸을 때마다 뿌직하고 물이 나오는 신발을 지적당하자 차가운 몸과 반대로 얼굴이 뜨끈해졌다.

“용모 단정 모르냐?”

잔득 빈정거린 김진호는 “하긴 그 얼굴이면 어딜 가도 프리패스지.”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시발 존나 불공평하다. 니는 왕따 당한 거 원망하지 마라. 신이 공평하게 맞춘 거니까.”

두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창밖에 시선을 내던지고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은 척한다고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었다. 왕따라는 어감은 몇 번을 들어도 낯이 가려졌다. 그게 저를 지칭하는 단어일 뿐인데도 말이다.

네온사인이 가득한 밤의 거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 쏟아지는 사람들로 인해 머리가 어지러웠다. 금요일 밤이라 더 심했다. 비명 같은 웃음소리,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몸, 화려한 옷차림. 지독한 향락의 거리였다.

두영은 휘청이는 사람들에게 치이며 겨우겨우 김진호의 뒤를 따라갔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숨쉬기도 버거웠다.

도착한 곳은 한 클럽이었다. 입구에 검은 양복을 입은 커다란 덩치가 수문장처럼 서 있었다. 당당하게 출입하려던 김진호는 가드에게 어깨를 붙잡히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용모 단정 탈락.”

가드의 단호함에 김진호는 당황한 표정을 역력히 드러냈다. 그는 뒤늦게 표정을 관리하고 서글서글 웃었다.

“아이고 형님! 저 여기 막내로 들어온 직원이에요! 이거 철용 형님 번호! 문자도 보여 드릴까요?”

김진호가 얼굴을 들이대며 말하자 가드가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고는 언짢은 표정으로 입장을 허락했다. 곧바로 두영을 훑은 가드는 별다른 말 없이 턱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바짝 긴장해 있던 두영은 허리를 꾸벅 숙이고 입장했다.

“시발… 존나 불공평하다.”

김진호의 입술이 댓 발 튀어나왔다. 두영은 김진호가 뭐 때문에 기분이 상했는지 알 수 없어, 눈치를 보며 조용히 따라갔다.

아래로 내려오자 시끄러운 비트에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초록색 레이저 조명이 사방을 가르고 다녔고, 이따금 번쩍거리는 섬광이 터졌다. 헐벗은 사람들이 몸을 흐느적대며 상대방에게 몸을 비볐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 광경에 두영은 정신을 놓고 있다가 누군가와 부딪쳤다. 상대가 들고 있던 술병이 기울어 남자의 가슴팍을 적셨다. 사과를 하긴 했지만, 하도 주변이 시끄러워 남자가 들었을지 의문이었다. 그때 김진호가 두영의 팔목을 잡아챘다.

“야! 정신 똑바로 안 차릴래?!”

두영은 고장 난 인형처럼 고개를 뻣뻣하게 흔들었다. 혀를 찬 김진호가 두영의 손목을 잡아당기며 앞장섰다. 그는 도착한 사무실에 두영을 밀어 넣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곧 형님 오시는데 나 쪽팔리게 하지 마라. 씨발 정신 안 차릴래?”

그가 말을 끝내자마자 사무실 문이 열리더니 김진호가 존경하는 형님이 나타났다. 우애가 서로 좋은 줄 알았는데 직접 보니 김진호 혼자만 좋은 것 같았다. 남자는 두영을 발견하고 눈썹을 둥글게 세웠다. 이마에 주름이 생길 정도였다. 자기를 박철용이라고 소개한 남자가 말했다.

“어려 보이는데, 몇 살?”

머뭇거리는 두영을 대신해 김진호가 넙죽 대답했다.

“저랑 동갑입니다, 형님.”

두영은 남들에게 제 실제 나이를 말하고 다니지 않았다. 그래서 김진호의 대답이 딱히 놀랍지 않았고, 굳이 정정해 줄 생각도 없었다. 분명 놀릴 거리만 될 게 뻔했다. 앞으로도 제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홍승표가 유일했다. 자신이 그의 비밀을 유일하게 알고 있듯이.

“젖살이 다 안 빠졌나 보네. 진호한테 대충 얘기 들었는데, 사람 많은 데는 힘들다고? 그러면서 용케 여기로 일하러 왔네.”

“…죄송합니다.”

“뭐? 아니야, 아니야. 내가 아기 뭐라고 하는 게 아니고 장해서 한 말이야. 낯가린다고 술집에서 일 못 한다는 건 다 옛날이야기지. 마침 오늘 방 터져서 선수들이랑 아가씨들 부족했는데 잘됐다. 일단 하루만 일해 보고, 괜찮은 것 같으면 계속 다녀 봐요.”

반은 알아듣고, 반은 못 알아들은 두영이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진짜 스무 살 맞아? 좀 불안불안한데.”

“걔 스물 맞습니다. 아침에 민증도 확인했어요.”

연신 제 나이가 김진호의 입에서 나오자 두영은 괜히 양심에 찔려 시선을 바닥에 꽂았다. 박철용은 김진호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고 누군가를 호출했다.

곧 입술이 얇고 어딘가 좀생이처럼 생긴 사람이 사무실에 들어왔다. 좀생이가 두영에게 따라오라며 손짓했다. 얌전히 따라간 곳은 의상실이었다.

좀생이는 두영에게 맞는 옷을 찾아내 건넸다. 일자로 떨어지는 검은색 슬랙스와 가슴골까지 파인 오버 사이즈의 셔츠였다. 시폰 재질의 셔츠는 몸 선이 내비칠 만큼 얇았고, 풍성한 소매가 조금만 움직여도 하늘하늘 움직였다.

옷을 다 갈아입고 멀뚱멀뚱 서 있자 또다시 불쑥 나타난 좀생이가 두영의 머리를 만져 주었다.

“조금 젖었지만 이대로 들어가도 괜찮겠다. 화장은 안 해도 될 것 같긴 한데… 음, 입술이 많이 텄네. 립밤만 바르자.”

모든 준비를 마친 좀생이는 두영을 의상실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고 있을래? 사장님한테 준비 다 됐다고 말하고 올게. 아오, 진짜! 왜 하필 회장님 떴을 이런 일을 시키고 지랄이야. 내 거 TC 다 뺏기기만 해 봐.”

날쌔게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까 박철용의 말대로 클럽이 많이 바쁜 모양이었다.

두영은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로퍼를 신은 자신의 발이 어색했다. 뒤꿈치가 헐거울 정도로 커서 발가락에 힘을 주고 걸어야 했다. 좀생이는 어차피 앉아만 있을 거라며 상관없다고 했다.

눈 한 번 깜빡인 것뿐이데 제 앞에 낯선 신발이 있었다. 좀생이가 돌아온 줄 알고 의심 없이 고개를 들었으나, 처음 보는 남자가 싱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아까 왜 사과 안 하고 그냥 갔어?”

“…네?”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돼 대답이 늦었다. 남자는 술을 진탕 마셨는지 발음이 불분명했다. 게다가 뭐가 그리도 신난 건지 실실거리며 웃었다. 제법 잘생긴 얼굴이라 그게 꼭 이상하지는 않았지만, 어딘가 상태가 맹해 보였다.

남자는 자기 턱을 매만지며 두영을 노골적으로 훑었다.

“아까 나랑 부딪쳤잖아. 봐 봐. 니가 날 이렇게 젖게 했어.”

남자는 자기 셔츠 앞섶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두운 물빛 계열의 셔츠라 티가 별로 안 났다. 조명도 어두워서 더욱 눈에 띄지 않았다. 두영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자세히 보려고 하자, 남자가 갑자기 미소를 터뜨렸다.

“귀엽네. 새로 왔어?”

느끼한 말에 두영은 입을 꾹 다물었다. 닭살이 돋은 팔뚝을 벅벅 문지르고 싶었지만, 남자의 상태가 조금 이상한 것 같아서 참았다.

“내 방에 가서 놀래?”

허락을 구하는 말투였지만, 이미 남자는 두영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내 방’이 있는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두영이 발끝에 힘을 주고 멈춰 섰다.

“기, 기다리라고…….”

“누가?”

두영은 좀생이의 이름을 몰랐다. 난처함에 아랫입술을 꾹꾹 깨물자 립밤의 이상한 맛이 느껴져 혀를 날름거렸다. 그때 머리 위에서 더운 숨이 느껴졌다. 눈을 치뜨자 남자가 혼몽에 젖은 눈으로 두영을 보고 있었다.

“…개 꼴리네.”

남자가 뭉개진 발음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나 여기 단골이라 내가 데려갔다고 하면 사장이 이해해 줄 거야. 괜찮지? 아아, 그렇지 그렇지, 이걸 안 줘서 쉽게 안 따라오는 거였어.”

남자가 바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오만 원권 지폐를 네 장 꺼내서 두영의 앞섶에 집어넣었다.

“너 가져. 이제 잘 따라오는 거야. 알았지?”

묘하게 아이 다루듯이 말하는 남자가 다시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도착한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남자의 친구들이 있었다. 이미 한창 술판을 벌였는지 테이블이 엉망진창이었다. 디귿 형 소파 왼편에 앉은 남자가 방금 문을 열고 들어온 친우를 보며 말했다.

“야, 내가 쟤 하이 상태 되면 밖에 못 나가게 잘 지켜보라고 했지?”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대꾸했다.

“그렇긴 한데, 뭐 오늘은 사고 딱히 안 친 것 같으니까 함만 봐주자. 근데 걘 누구냐? 처음 보는 얼굴인데. 신입?”

“그런가 봐. 귀엽지?”

남자가 두영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두영이 움찔거리자, 그들이 음험하게 웃었다. 낯선 이들의 웃음소리에서 익숙함이 느껴졌다. 무리 지어 저를 위협하던 이주학 패거리가 떠오르는 소리였다.

갑자기 손발이 떨렸다. 때마침 남자가 두영의 어깨에 걸친 팔을 내렸다. 두영은 슬금슬금 물러나 냉큼 문 아귀를 벌리는데, 남자가 두영의 손등을 덮었다. 그리고 문고리에서 두영의 손을 강제로 떼어 냈다.

“어디 가, 놀자는데. 너도 다 알고 고분고분 따라온 거 아냐?”

“기, 기다리고…….”

“나랑 있으면 괜찮대도?”

그 상황을 지켜보던 남자의 친구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뭘 너랑 있으면 괜찮냐? 여기서 니가 제일 위험해.”

“일단 들어와서 술부터 먹여. 얘 울겄다.”

남자는 두영의 손목을 잡고 자리 안쪽에 들어갔다. 그러고는 자기 무릎 위에 두영을 앉히고 입가에 술잔을 들이댔다. 두영은 입을 꾹 다물고 술을 거부했다.

“술 싫어?”

“…….”

“과일은? 아님 돈이 좋아?”

다정한 목소리로 질문 폭탄을 던지던 남자가 다시 지갑에서 오만 원짜리를 다발로 꺼내 두영의 얼굴 앞에 흔들었다.

“어때? 이제 대 줄만 해?”

술을 권하는 게 아니라 대 줄만 하다니……. 두영이 어리바리한 표정을 짓자 남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설마 여기 이런 데인지 모르고 왔어?”

“에이 설마. 여기 사장 그런 걸로 깔끔 떠는 인간이잖아.”

“우리한테나 깔끔하지 저런 애들한테는 존나 잔인해지는 인간이야.”

“그래서 불만 있냐?”

“있겠냐? 존나 효도하면서 살려고.”

“야, 쟤 긴장한 것 봐라.”

“완전 처음인가 보네. 일단 빨리 술로 적셔.”

친구들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지, 제정신일 때 한 번 맛봐야지. 겁먹은 것 봐… 너무 귀엽잖아.”

두영은 정육점에 전시된 고기가 된 기분이었다. 남자의 무릎에서 일어나려고 다리에 힘을 주자마자 얼굴에 진한 알코올이 부어졌다.

“아이고, 입에 넣어 준다는 걸 세수를 시켜 버렸네.”

남자는 잔에 양주를 가득 따라 다시 두영에게 건넸다.

“비싼 술이야, 니가 오늘 나한테 받은 팁보다. 그니까 입 벌려, 다른 게 들어가기 전에.”

남자가 두영의 턱을 쥐고 입을 강제로 벌렸다. 할딱거리는 두영을 남자는 습한 시선으로 보다가 별안간 입을 맞췄다.

“읏.”

“아, 시발.”

놀란 두영이 남자의 입술을 깨물자 남자가 피 묻은 입술을 손으로 쓸며 두영의 뺨을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시발 개좆 같은 년이 돈이나 벌러 나왔으면 예쁜 짓이나 쳐 하든가 어디서 이빨을 놀려.”

순식간에 변한 남자의 분위기에 그의 친구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 위로 밀었다.

“쟤 눈깔 더 돌기 전에 이거 먹이고 빨리 끝내.”

두영은 머리끄덩이가 붙잡힌 상태로 테이블 위에 올라온 걸 보았다. 플라스틱 약통이었다.

***

늘어지는 몸뚱이를 간신히 일으킨 홍승표가 엉망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흐느적거리는 동작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무음으로 해 둔 티브이를 끄고 다시 소파에 드러누웠다.

불면의 밤이 길어질수록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남들보다 두 배를 사는 느낌이었고, 두 배로 지루했다. 저주 같은 무료함은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숙제였다. 옛날처럼 무모하게 노는 것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도 전부 지겨웠다.

자극에 무뎌지면 더 센 자극을 찾게 되기 마련이었다. 그러다 보니 도덕적인 감상 따위 내던진 지 오래였다. 추잡하면 추잡할수록 단전에서 끓어오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제 숨통을 틔워 주었고, 그 덕분에 삶의 연장선을 그려 낼 수 있었다.

그의 극단적인 쾌락주의는 부모와 자식 간의 사이를 갈라놓았지만, 쌍방으로 미련이 없었다. 유일하게 남은 보호자는 그의 친형제뿐이었다. 형제는 동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억지로 부수고 개조하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동생의 삶을 미리 보고 온 듯이 반응했다.

홍승표가 학교를 다니기 훨씬 전에는 부모가 주는 약을 작은 형이 몰래 버려 줄 때가 있었다. 부모의 말을 빌리자면 약은 심성을 맑게 해 주고 착한 아이가 되게 해 준다고 했다. 당연히 개 같은 소리였다. 사지육신 늘어지는 독한 신경 안정제일 뿐이었다.

며칠째 한숨도 자지 못해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이명이 찾아왔다. 수면제가 있었지만 먹지 않았다. 기억만 뭉텅이로 날아갈 뿐 잠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약에 취하면 무의식에서 기어 나온 행동을 반복적으로 하게 됐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이 떠돌아다녔고, 눈에 띄는 전부를 망가뜨렸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상관없었다.

문득 저만큼이나 못 자는 사람이 떠올랐다. 허두영은 피곤하면 눈가가 붉어졌는데, 그게 꼭 한바탕 손님을 받고 나온 남창 같았다. 물론 손님은 저였고.

녀석은 새벽에 다른 일도 하는 건지 학교에만 오면 겨울잠을 자듯 한 번도 깨지 않았다. 그러나 같은 불면증을 앓고 있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었다. 허두영이 기나긴 밤을 헤매다 겨우 쪽잠에 든 것임을.

녀석에게 제 약을 줄까 하다가도 깊은 곳에서부터 거부감이 들었다. 약을 공유하는 건 일상이었다. 그러나 허두영만큼은 쉽지 않았다. 녀석의 고유색을 흐트러뜨릴까 봐 망설여졌다. 이제는 그것도 끝났지만.

처음은 흥미로웠고, 두 번째는 관심이었고, 세 번째는 욕정이었고, 네 번째는 지겨움이었다. 그 지겨움을 이끈 건 이따금 녀석이 보이는 찌질한 면모였다. 그때마다 속이 뒤집히는 듯해서 난폭하게 다루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러다 결국 이 꼴이 났지만 말이다.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잡는 성격인데, 허두영이 자신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일 때면 모난 성격이 튀어나왔다.

“배가 불렀지.”

처음으로 만족스러운 장난감이었는데 내심 아쉬웠다. 학교에 꾸준히 간 것만 해도 허두영이 얼마나 저를 즐겁게 해 줬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캐나다의 보딩 스쿨 생활보다 막장으로 얼룩진 그 후의 학교가 훨씬 제 취향이었다. 짧지만 제법 만족스러운 학교생활이었다.

홍승표는 담배를 입에 물고 테라스로 나갔다. 얼음장 같은 공기를 마시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연기를 한입 가득 머금고 뱉어 내자 잿빛 연기가 뿌옇게 흐트러지고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이 드러났다.

한국에서 보기 드문 지형이었다. 복층 펜트하우스에 무리하게 통창을 세운 건, 지평선을 물들이는 황혼을 보기 위함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땅값이 싼 곳에 이런 맨션을 세울 리 없었다.

지평선 끄트머리에 걸린 해가 완전히 사라졌다. 하늘의 색이 빠르게 박명하더니, 서늘한 바람이 그의 체온을 씹어 삼켰다.

홍승표는 피우다 만 담배꽁초를 제 손바닥에 문질렀다. 채 꺼지지 않은 불씨에 손바닥 위로 작은 구덩이가 생겼다. 내일이 되면 완벽히 사라져 있을 상처이기도 했다. 무감각한 그의 눈빛은 따분함으로 술렁였다.

“너 요새 뭐 하고 다니길래 얼굴 보기가 힘드냐?”

이다민이 시끄러운 클럽 음악을 뚫고 말했다. 홍승표는 바에 상체를 늘어뜨리고 앉아 술잔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유리컵에 담긴 얼음이 달그락 움직였다.

“야, 이러고 있을 거면 룸을 잡아. 이게 무슨 청승이야.”

“재미없어.”

“그 얼굴로 재미가 없으면 나랑 좀 바꾸자. 존나 걸레로 살아 보게.”

“이미 걸레면서.”

“뭐? 근데 그렇긴 해.”

이다민이 빠르게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에 빠져도 입만 둥둥 떠 있을 성격이라 옆에 두기 피곤했다. 홍승표는 미간을 살포시 구기고 말했다.

“너 시끄러워. 좀 닥치면 안 되나?”

“클럽 와서 시끄럽다고 하는 걸 보니 약 했나 보네.”

수다쟁이의 말에 대꾸하기 귀찮았다. 그는 구부러진 등을 펴고 휴대폰 화면을 보았다. 그동안 쌓인 부재중 전화와 문자를 무덤덤하게 보던 중, 갑자기 그는 의욕적으로 연락 기록을 지우기 시작했다.

이다민은 홍승표가 하는 짓을 멀거니 보다가 찡찡거리기 시작했다.

“야 심심하면 혜민 누나랑 놀아 줘. 누님이 너 오신다고 먼 길 납시셨단다. 걸레 새끼가 뭐가 좋다고.”

“고추가 커서?”

“미친놈. 근데 아까부터 뭐 하냐? 안 하던 짓이나 하고. 이런 건 미리미리 없애라고.”

“그냥… 혹시 모르니까.”

혹시는 개뿔. 제 번호를 주기는커녕 허두영의 번호도 몰랐다. 애초에 녀석이 휴대폰을 가지고 다니는 모습조차 보지 못했다.

배는 맞추고 번호를 물어보지 않았다니…….

“나는 병신인가?”

홍승표가 나직이 자책했다. 이다민은 홍승표의 뻐끔거리는 입술을 보고 “뭐?”하고 물었지만, 홍승표는 자연스럽게 그를 무시했다. 이다민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말했다.

“호출할 때만 폰 쓰는 놈이 오늘따라 왜 이러실까. 야, 형님한테만 솔직하게 말해 봐라. 너 여자 생겼지?”

홍승표는 한쪽 입술을 오묘하게 끌어 올렸다. 무시로 일관하던 그가 미묘한 반응을 보이자 이다민은 저가 더 흥분하여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그 순간, 누군가 홍승표의 등 뒤로 무게를 실으며 안아 왔다.

“야, 홍승표! 너 왜 내 연락 씹어?”

장혜민이 긴 생머리를 이마 뒤로 쓸어 넘기며 초승달처럼 웃었다.

“누나 이 새끼 여자 생겼대.”

“아 진짜? 그래서 내 뜨거운 플러팅을 거절한 거였구나!”

“뭐?! 아니 누나 거짓말이지? 세상에 많고 많은 게 남잔데 왜 하필 이 새끼를…….”

“많고 많은 남자가 다 승표 같지 않잖니.”

“이 새끼가 얼마나 문란한데!”

“그래그래 자기소개는 그만하고. 근데 오늘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 얘들 다 따끈따끈한 스무 살 애기들이지? 귀여워라.”

장혜민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클럽은 미자를 갓 탈출한 성인들로 인산인해였다. 그들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눈들을 번뜩였지만, 장소를 골라도 한참 잘못 골랐다.

클럽 피피(P.P)는 웬만한 얼굴로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물관리가 빡센 곳이다. 홀과 테이블을 제외한 룸은 추천 멤버십 전용이라 돈만 많다고 예약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피피를 찾는 사람은 대부분 뒷배가 있다. 그래서 일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단 한 번도 문을 닫은 적은 없었다.

그새 클럽은 동물의 왕국으로 변했다. 티브이를 보는 것만큼 재미있었지만, 머리가 점점 조여 왔다. 붐비는 사람들의 체취에 코가 썩어 문드러지는 듯했다.

룸을 잡고 자리를 옮겼다. 한적한 곳에 들어오니 이제야 숨이 좀 트이는 것 같았다. 검은색 가죽 소파에 늘어진 홍승표는 모가지를 뒤를 젖히고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를 멍하니 보았다.

“그래서, 여자가 생겼다고?”

장혜민이 끊긴 대화를 이었다. 강제로 떼어 내고 싶은 관심이 아닌 그저 가벼운 호기심이라 딱히 짜증이 나지 않았다. 뒤따라 들어온 이다민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누나 어린놈이 뭐가 좋다고 궁금해해.”

“어려서 좋은 거지. 남자는 잘생기고 어리면 끝이야. 동갑이야? 연상이야? 치사하게 혼자 즐기는 거 아니지?”

장혜민은 잡식성이다. 육체적 만족만 된다면 상대가 사람이 아니어도 됐다.

“왜 누나가 치사하대? 이 이야기 그만해.”

입술이 댓 발 튀어나온 이다민이 찡찡거렸다. 장혜민은 그를 가볍게 무시하고 홍승표의 여자 친구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드러냈다. 몇 번 파트너를 교환하다 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담배를 입에 문 장혜민은 이다민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이다민이 자연스럽게 불을 붙여 주었다.

“너랑 동갑이면 귀엽겠다. 여자애 어떻게 생겼니? 귀여워? 예뻐?”

일단 성별부터 틀렸지만, 홍승표는 정정해 주지 않았다. 이분법으로 나누기엔 허두영의 외모는 묘했다. 둥근 이마와 헤어 라인을 보면 여자 같았고, 짙은 눈썹과 뚜렷한 티존을 보면 소년 같았다.

귀밑으로 이어진 턱선은 살짝 각이 져서, 어느 각도로 보느냐에 따라 성숙함이 널을 뛰었다. 여백 없이 들어찬 이목구비는 화려했지만, 전체인 조화로 보면 연한 수채화 느낌이었다.

“여기로 불러서 같이 놀자.”

몽환에 빠져 있던 홍승표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포기하지 않는 장혜민의 집념이 슬슬 지겨웠다. 그는 사회인으로서 자리를 잡은 여성이지만, 이쪽으로는 천진난만했다. 순수하게 쾌감만 즐기는 성욕자였다.

홍승표는 장혜민을 향해 서늘한 시선을 던졌다. 움찔거린 장혜민이 이다민을 보며 말했다.

“…뭐야? 쟤 진짜 생겼나 봐.”

입술을 말아 올린 홍승표는 장혜민의 손에 걸린 담배를 빼앗아 입에 물며 어눌하게 말했다.

“걘 걸레가 아니라서 안 돼. 그러니까 그만 찾아.”

“미친 개소름.”

이다민이 팔뚝을 쓸며 토하는 시늉까지 했다. 홍승표가 미국에서 했던 모든 방탕한 짓을 알고 있기에 나온 반응이었다.

“사진 없어? 너 눈 높잖아. 예쁘게 생겼니?”

장혜민의 호기심은 멈추지 않았지만, 홍승표는 아무것도 답해 주지 않았다. 당장 얼굴을 몰라도 저런 반응인데, 진짜 실물을 보게 된다면 득달같이 달려들게 뻔했다. 특히 장혜민의 직업 때문에 더욱 보여 줄 수 없었다. 엔터테인먼트 특성상 장혜민은 분명 녀석의 가슴팍에 명함을 꽂아 넣을 것이다.

홍승표가 점잖은 척 겸양을 떨자 대화는 점차 다른 주제로 바뀌었다. 이다민과 장혜민은 적막이 내려올 틈도 없이 수다를 떨었다. 홍승표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볐다. 그들의 대화를 적당히 흘려들으며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술기운이 오른 이다민이 주머니에서 하얀 가루를 꺼냈다.

“너도 할래?”

홍승표는 거절의 의미로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다민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한 번도 안 한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하는 사람은 없던데. 넌 이걸 어떻게 참냐. 독한 새끼.”

이다민의 후한 평가에 홍승표는 짤막한 웃음을 지었다. 각성 상태에 돌입한 이다민과 장혜민은 말이 더 많아졌고, 행동반경도 넓어졌다.

점점 룸 안은 저 두 사람이 초대한 지인들로 가득 찼다. 홍승표는 제 앞에 퍼진 이들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며 동떨어진 듯이 있었다. 대체로 그가 어울리는 이들은 나사가 빠진 사람이었다. 죄책감이나 윤리 의식이 없었고, 문제가 생기면 적당히 무마시켜 줄 뒷배가 있었다.

부모 잘 만나 누리면서 사는 만족감은 그 누구보다 본인들이 가장 잘 알았다. 실패를 번복해도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었기에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이 가진 특권이었다.

“왜 혼자 동떨어져 있어?”

단발머리 여자가 홍승표에게 말을 걸었다. 초면인 것 같은데 그는 홍승표를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대했다. 눈을 치뜬 홍승표가 여자를 나른하게 응시했다.

“누구더라?”

“나 유연서. 다민이가 니 얘기를 나한테 자주 해서 내적 친분이 과다해.”

“야, 유연서. 걔는 안 돼. 여자 친구 있어.”

갑자기 끼어든 이다민이 유연서의 말을 가로챘다.

“정말? 어디 있는데?”

유연서가 당연한 듯이 룸에서 홍승표의 애인을 찾았다. 홍승표는 묘하게 불쾌했지만,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기분이었다. 그러다 발정 난 짐승들 사이에 있는 녀석을 상상하자 진짜 기분이 저조해졌다.

만약 실제로 허두영이 여기 있다면 자신은 그 녀석을 제 옆에 앉혀 놓고 가까이 다가오는 놈들을 다 쳐낼 생각이었다. 그럼 쭈구리 같은 허두영은 낯선 공간에 잔뜩 주눅 들어, 제 팔에 매미처럼 달라붙어 있을 것이다.

“음, 아닌 거 같은데.”

유연서의 부정에 홍승표는 시선을 돌렸다. 유연서가 귓등 뒤로 머리카락을 넘기고 싱긋 웃었다.

“애인 있는 사람이 여기 있으면 안 되지. 그건 그냥 파트너 아냐?”

상당히 정상적인 사고가 흥미로웠다. 이다민의 친구라길래 똑같을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다민이 친구가 눈이 높은가 보네, 오자마자 승표를 노리고. 애기야, 나는 어때?”

장혜민의 장난스러운 말에 유연서가 예의상 웃어 보이며 룸을 빠져나갔다. 장혜민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아쉬워?”

홍승표가 물었다.

“당연하지. 누가 먼저 채 가면 어떡하니?”

장혜민의 솔직한 대답에 홍승표는 공감했다. 누가 봐도 먹음직스러운 건 잽싸게 채 가야 했다. 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사내 녀석들 사이에서 허두영은 유독 단내를 풍겼다. 비록 덜 익었지만, 그렇다고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건 못 할 짓이었다. 맛있는 건 냉큼 따먹어야 하는 법이다.

홍승표는 두 다리 위에 팔을 얹고 상체를 숙였다. 까만 머리카락이 앞으로 쏟아졌다. 커튼처럼 가려진 시선에 제 휴대폰이 보였다. 그는 눈을 찌르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홀에서 했던 것처럼 무의미하게 메시지창을 돌아다녔다.

인정하기 싫지만, 짜증을 돋우는 허두영의 찌질함은 자꾸 보면 재밌었고, 우는 모습은 지겨움을 넘어 처음 느끼는 기분을 선사했다. 예를 들면 덜 울게 하고 싶다거나, 눈물로 젖은 얼굴로 닦아 주고 싶다거나…….

특히 우물처럼 파인 보조개가 마음에 들었다. 그 보조개를 보는 순간, 지금까지 허두영이 제 앞에서 웃은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값비싼 선물도 아니었다. 고작 매점에서 사 온 따뜻한 두유였다. 단지 녀석의 튀어나온 척추뼈가 신경 쓰여 안 하던 짓을 한 것뿐인데, 허두영은 상상도 못 한 값어치로 돌려주었다.

불현듯 기분이 찜찜했다. 뭐 때문인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홍승표는 지금껏 한 번도 의식하지 못한 사실을 깨닫고 피가 빠르게 식었다. 여태껏 허두영과 얼굴을 마주 보며 관계를 한 적이 없었다.

“아니, 하아… 왜 그런 병신 같은 짓을…….”

전화번호에 이은 두 번째 머저리 짓이었다. 홍승표는 착잡함에 담배를 입에 물고 뻑뻑 피워 댔다. 잘근잘근 씹은 필터가 금방 눅눅해졌다.

관계 내내 허두영은 아파서 울었고, 힘들어서 울었다. 적어도 좋아서 울진 않았다. 비 맞은 개새끼처럼 끙끙 앓던 녀석은 저를 항상 밀쳐 낼 뿐, 끌어당긴 적도 없었다.

그는 장초를 테이블 위에 비볐다. 어금니를 딱딱 부딪치다가 코트를 챙겨 들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냐는 이다민의 물음에 건성으로 손을 흔들었다. 밖으로 나오자 오합지졸로 튀는 비트가 그의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발 디딜 틈도 없는 홀을 지나쳐 지상으로 올라왔다.

공기가 눅눅하다고 느끼긴 했는데 실제로 비가 우박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팝콘처럼 튀어 오르는 물살을 보자, 우산을 써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대리기사가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비길래 근처 편의점으로 향했다. 생수 하나를 사서 나온 그는 편의점 처마 아래 서서 생수 모가지를 비틀었다. 그때 어느 여자가 처마 안쪽으로 불쑥 들어와 그에게 아는 체했다. 홍승표는 별다른 반응 없이 물을 마시며 물끄러미 여자를 쳐다봤다.

“그새 나 까먹은 거 아니지?”

손으로 홍승표를 살짝 밀친 유연서가 보드랍게 웃으며 말했다.

“왜 말도 안 하고 그냥 갔어? 화장실에 간 사이에 너 없어서 서둘러 나왔잖아.”

“그래?”

“응 그래. 근데 그게 다야?”

“나랑 자려고 따라 나온 거 아냐?”

“너 정말… 듣던 대로 말할 때 머리를 안 거치고 뱉는구나.”

“그래서, 아냐?”

유연서는 난처한 듯 웃으며 곧 긍정했다. 피식 웃은 홍승표는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봤다.

“누구 기다려?”

유연서의 물음에도 홍승표는 휴대폰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혹시 여자 친구?”

그제야 홍승표는 유연서를 한 눈으로 보았다. 이다민의 친구라고 하더니, 말도 많고 호기심도 많았다. 여자는 눈매를 둥글게 휘며 웃었다. 렌즈를 꼈는지 눈동자가 연한 갈색이었다. 홍승표는 무심코 손을 뻗어 여자의 눈가를 쓸었다. 눈물 같은 빗물이 손가락에 묻어났다.

여자는 허두영이 아니다. 녀석이 울었다면 방금 닦아 낸 정도로 안 끝났을 것이다. 걔는 주룩주룩 울었으니까. 지금 내리는 비처럼.

뺨이 상기된 유연서가 조금 높아진 톤으로 물었다.

“호텔로 갈까? 우리 집으로 가도 돼.”

여자는 말을 또박또박했지만, 동공이 크게 확장된 상태였다. 홍승표는 안겨 오는 약쟁이를 옆으로 밀어 내고 목을 둥글게 돌렸다. 비만 오면 눅눅한 습기 때문인지 편두통이 찾아왔다. 진통제로도 잠재워지지 않는 두통은 숨골을 꾹꾹 눌러 주는 방법밖에 없었다.

한순간 익숙한 향이 맡아졌다. 처음은 자신이 착각한 줄 알았다. 화려한 밤의 거리와 허두영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빗물에 실려 온 냄새는 분명 허두영이었다.

홍승표는 주변을 둘러봤다. 다들 우산을 쓰고 있어서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직원이에요! 이거 철용 형님 번호! 문자도 보여 드릴까요?”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홍승표의 시선이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향했다. 이름이 곧바로 떠오르지 않은 건, 당장 변기 물에 처박고 싶을 만큼 왁스 범벅을 한 머리 때문이었다. 김진호가 가드에게 굽신거리며 휴대폰 화면을 보였다. 그 뒤로 굳은 얼굴을 한 허두영이 있었다.

비에 젖은 머리가 둥근 이마에 달라붙었다. 추운지 눈가와 코끝이 붉었다. 습관처럼 물어뜯는 입술 위로 네온사인이 번쩍거렸다. 눈두덩 위로 짙은 아이홀이 생겨 있었고, 그 아래 연한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젖은 바지는 다리에 달라붙어 가는 몸 선이 훤히 드러났다.

“하.”

홍승표는 짜증이 담긴 날숨을 내뱉었다.

어울리지 않기는 시발.

허두영은 퇴폐의 거리와 지독하게 어울렸다. 꼭 그 꼴이 매음굴에 팔린 남창 같았다. 불안하게 주변을 두리번대는 모습에서 배덕함이 묻어났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번씩은 돌아보는 외모에 불쾌함이 들끓었다. 통제할 수 없는 화가 솟구치기 시작하자 저도 모르게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별안간 뒤에서 잡아당기는 힘에 홍승표는 우뚝 멈춰 섰다. 뒤를 보자 유연서가 그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다시 허두영이 있었던 곳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이미 녀석은 사라지고 없었다. 블루와 핑크빛의 네온사인 간판만 어지럽게 산란했다.

왜 이곳에 허두영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것도 김진호와 함께. 자신이 학교를 나가지 않은 사이에 화해라도 한 건가? 갑자기 친해진 건가? 그럴 가능성이 있었나?

도대체 허두영이 무슨 생각으로 여기에 온 건지 도저히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왜 그래? 뭐라도 봤어?”

유연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홍승표와 같은 곳을 보았다. 마른세수를 한 홍승표는 비바람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겨울비 냄새에 허두영의 체취는 금방 사그라졌다.

그는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것 같은 발에 힘을 주었다. 제 무의식이 더 이상 허두영의 불우한 삶에 깊게 파고들면 안 된다고 말했다. 지금 뛰쳐나가면 녀석과 더럽게 얽힐 것임을, 관계가 뒤집힐 것임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누군가에게 맞추는 삶도, 어딘가에 얽매이는 것도 죽기보다 싫어하는 저로선 영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도 미련한 자신은 녀석을 놓쳤던 곳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허두영의 흔적을 찾았다.

불현듯 양호실의 마지막 기억이 떠올랐다. 녀석은 무언가에 질려 버린 듯한 모습으로 자신을 진심으로 거부했다. 그런 모습을 봤으면서도 한심하게 미련을 두는 스스로가 의아했다. 그저 몸 정이라기엔 너무 저돌적으로 굴었다. 고작 비루한 똥개 새끼인데…….

“…호텔로 가.”

홍승표는 한숨처럼 늘어지게 말하며 클럽 입구에서 시선을 틀었다. 금방 잊을 것이다. 평소처럼 술을 진탕 마시고 섹스를 하고, 또 술을 진탕 마시고 섹스를 하면 자연스레 녀석의 존재는 제 머릿속에서 사라질 것이다.

잠깐 가지고 놀 장난감에 심취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이렇게 예민하게 구는 거다. 처음은 다 그러니까.

그는 유연서가 호텔 방 예약하는 것을 힐끗 보고 한쪽 벽에 어깨를 기댔다. 담배를 꺼내 물었지만, 불붙이는 걸 잊고 멍하게 있었다.

허공에서 방황하던 시선이 고인 웅덩이에 닿았다. 그러다 하늘을 보기도 했고, 행인을 따라가기도 했다. 무언가 떨쳐 내려는 듯이 주변을 무의미하게 둘러봤지만, 같은 궤도를 도는 행성처럼 원래 자리를 찾아갔다. 허두영을 놓친 클럽 입구였다.

안 젖은 곳을 찾는 게 쉬울 만큼 모든 땅이 겨울비로 얼어붙었다. 그 안에 유독 한 발자국이 진하게 남아 있었다. 자신의 눈에만 각인 된 허두영의 발자국이었다. 홍승표는 작은 오차도 없이 같은 곳을 반복적으로 보았다. 삼켜 넘기는 침이 메슥거렸다. 담배 맛이 개운치 않았다.

유연서가 본인의 차 키를 대리기사에게 건네고 홍승표에게 돌아왔다.

“니 차 타고 호텔 같이 갈 거야. 아침에 집에 갈 때는 니가 데려다줘.”

검정 세단이 이들 앞에 멈추어 섰다. 홍승표는 유연서를 먼저 태우고 뒤따라 올라탔다. 단추를 몇 개 풀어헤쳤다. 창문을 열자 찬 바람이 몰아쳤다. 조금 숨이 트였다.

“창문 좀 닫아, 추워.”

유연서의 단발머리가 엉망진창으로 흩날렸다. 홍승표는 귓등으로 흘리고 등받이에 몸을 늘어뜨렸다.

낮보다 환한 도시를 등지고 그곳과 점차 멀어졌다. 홍승표는 창틀에 팔꿈치를 괴고 손끝으로 눈썹을 덧그렸다. 떨리는 왼쪽 다리 위로 반대쪽 다리를 얹어 못 움직이게 했다. 딱딱하게 다문 턱 근육을 이완시켰다. 의식하지 않으면 이 가는 소리가 날 정도로 이가 부딪쳤다.

저 멀리 금빛 조명으로 빛나는 호텔이 보였다. 천박한 도시의 네온사인과 사뭇 달랐다. 그는 손등에 튄 빗물을 물끄러미 보았다. 흩날리는 궤적은 허두영의 눈물 같았다.

녀석은 한 번 울면 금방 그치지 않았다. 지켜보는 사람이 질릴 정도였다. 그러다 제 앞에서만 운다는 걸 알게 됐을 때, 누군가가 제 장기를 움켜쥔 듯이 온몸이 조여 왔다. 불쾌감보다 환희에 가까웠다.

허두영의 매 맞는 역사는 이주학에게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아비한테 학대당했고, 생모는 집을 나갔다고 했다. 허두영은 기나긴 세월 동안 폭력에 노출됐다. 그래서 답답할 정도로 상식적이지 않았고, 시궁창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녀석이 더럽고 추잡한 곳에서 당할 수모를 떠올리자 애써 가라앉힌 불편함이 스멀스멀 다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홍승표는 꼰 다리를 풀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었다. 옆에서 치근덕대는 손길을 치워 내자 유연서의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찰나에 보았던 허두영의 불안한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

수동적이고 겁 많은 성격.

두유 하나에 부스스 웃는 얼굴.

깊게 팬 보조개.

생각을 멈춘 홍승표는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제 몸에 기대 온 몸뚱이를 옆으로 밀쳤다.

“아.”

약 기운 때문에 흐느적대던 유연서가 창문에 머리를 부딪치자 외마디 소리를 냈다. 눈을 뒤집어 깐 유연서는 구둣발로 홍승표의 정강이를 찍었다. 눈썹을 구긴 홍승표가 대리기사의 셔츠 주머니에 오만 원권 몇 장을 찔러 넣었다.

“아까 그곳으로 최대한 빨리 돌아가요. 10분 내로 도착하면 그거에 세 배 얹어 줄 테니.”

다시 찾은 클럽은 비가 쏟아지는데도 줄이 지네처럼 늘어졌다. 홍승표는 바로 입구 쪽으로 향했다. 가드는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제지하지 않았다.

계단을 두세 칸씩 밟고 내려갔다. 홀의 분위기는 한창 절정이었다. 누군가가 샴페인을 딴 모양인지 동시다발적으로 환호성이 터졌다. 홍승표는 눈동자를 바쁘게 움직이며 복잡한 사람들 틈을 돌아다녔다. 번쩍거리는 조명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한 뭉텅이로 엉킨 사람들을 거구로 밀치고 지나가자 한 남자가 꼴사납게 넘어졌다. 남자는 인상을 와락 구기며 고개를 쳐들었으나, 홍승표의 예민한 얼굴을 발견하고 언제 쏘아봤냐는 듯이 너털거리며 일어났다.

사지육신을 늘어뜨린 사람이 아까보다 늘어났다. 구석진 곳에서 은밀하게 약을 거래하는 사람도 보였다. 홍승표는 잇새로 욕을 씹었다. 엉망진창이었다. 이런 곳에 허두영이 있다고 생각하니 지저분한 상상이 날로 범람했다.

그때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 제 앞을 지나쳤다. 홍승표는 곧바로 그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목이 졸린 김진호가 팔을 거칠게 휘저으며 그의 손을 떨쳐 냈다. 피가 몰린 얼굴로 뒤돌아선 김진호는 홍승표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니가 여길 왜…….”

대화하기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다. 홍승표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다시 김진호의 멱살을 잡고 관계자 전용 출입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벽 쪽으로 김진호를 내던졌다. 홍승표는 벽을 타고 무너지는 김진호를 보며 말을 씹어 뱉었다.

“어디야?”

“씨발 깜짝이야! 갑자기 나타나서 뭐 하는……!”

“허두영 어디 있어.”

불쾌한 감정을 오롯이 드러내던 김진호가 삽시간에 정색했다.

“…니가 걔를 왜 찾냐? 씨발 왜 찾는데.”

“찾을 만해서 찾아. 허두영 어디 있어?”

눈썹 산을 모나게 세운 김진호가 벽을 짚고 일어났다. 그러고는 홍승표를 향해 비릿하게 웃었다.

“너희 씹질 안 했다며? 못 한 거냐? 안 한 거냐?”

“누가 그래?”

“허두영이 그러더라. 줘도 못 먹는 등신 새끼.”

홍승표는 기대에 찬 표정으로 함부로 지껄이는 김진호의 얼굴을 변기에 처박고 싶었다. 아무래도 허두영은 자신과 한 짓을 섹스라고 정의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했던 짓은 뭐였을까? 허두영은 그걸 뭐라고 생각했을까?

그는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쓸어 넘기고 뒷덜미를 감쌌다. 그 순간 아찔한 두통과 이명이 찾아왔다. 당장 눈앞에 있는 것을 처참하게 짓밟고 싶은 충동이 들끓었다. 하지만 녀석을 찾기 전까지 이성을 잃으면 안 됐다.

홍승표는 깊은 바다 내음이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김진호의 뺨을 손등으로 툭툭 쳤다. 점점 세기를 더하는 손짓은 김진호가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였다. 그는 저항하는 김진호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김진호가 최대한 자존심이 상하도록 손등과 손바닥만으로 양 뺨을 연달아 후려쳤다.

“씹, 팔! 읏, 적당히, 해, 이 미친 새끼야!!”

홍승표는 김진호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러고는 천천히 몸을 숙여 바닥에 나가떨어진 김진호와 시선을 맞췄다.

“허두영이 나랑 안 잤다고?”

“…….”

“걱정 마. 내가 예쁘게 뚫었으니까.”

피와 멍으로 얼룩진 김진호의 눈이 심지를 바짝 세웠다. 그 표정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아 홍승표는 김진호의 얼굴을 짱돌처럼 쥐고 벽에 처박았다.

어느새 주변을 둘러싼 관리자들이 홍승표를 제지했다. 그는 팔을 크게 휘둘러 들러붙은 날파리들을 떼어 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윽박지르며 나타난 박철용은 홍승표와 걸레짝처럼 널브러진 김진호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VIP 단골 목록 중 최고 상단에 있는 홍승표를 알아본 박철용은 목소리 톤을 다듬었다.

“대, 대체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사람 하나 찾아내.”

“…예?”

“이 새끼랑 같이 온 남자애 찾으라고.”

홍승표는 신발 앞코로 김진호의 얼굴을 건드리며 말했다. 박철용은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다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신입이라면 지금 손님을 받고 있어서…….”

“손님?”

딱딱하게 되물은 홍승표는 곧바로 홀로 나갔다. 룸이 있는 지하로 내려가 초입부터 눈에 띄는 문이란 문은 모조리 열어젖혔다. 열심히 허리를 놀리는 뒷모습이 보이면, 안에 들어가 직접 얼굴까지 확인하고 나왔다.

몇 번째 문인지 알 수 없었다. 문고리를 잡는 순간 안쪽에서 날카로운 파열음이 났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방 주인들은 누가 들어온 줄도 모른 채 무언가에 열중한 상태였다. 그때 귀에 익은 흐느낌 소리가 들려왔다.

테이블 위로 올라간 홍승표는 양주병을 손에 쥐고 안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문득 발에 치이는 게 있어 눈을 내리뜨자 플라스틱 약통이 시선에 걸렸다. 그 안에 든 물건은 최근 클럽에서 암암리 공유되는 신종 마약이었다.

홍승표는 양주병을 든 손을 어깨높이까지 쳐들어 눈앞에 있는 머리통을 후려쳤다. 남자가 머리를 부여잡고 쓰러지자, 헐벗은 허두영이 나타났다.

넥타이에 눈이 가려진 녀석은 긴 셔츠 소매가 뒤로 묶여 양팔을 못 쓰는 상태였다. 발목에 걸린 바지와 허벅지 아래까지 내려간 속옷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 와중에 허두영의 몸에 올라탄 남자가 녀석의 엉덩잇살을 벌리고 들어가려 했다.

퓨즈가 끊기는 건 한순간이었다. 홍승표는 남자의 머리카락을 가득 쥐고 바닥에 끌어 내렸다. 얼굴을 인정사정없이 밟고 난 후, 곧바로 다른 새끼를 노렸다.

두영은 입을 가득 채운 살덩어리가 빠져나가자 숨통이 트여 캑캑거렸다. 그리고 지옥에 온 듯한 소리에 바짝 굳어 버렸다. 자신을 강제한 남자들의 비명이었다. 유리가 와장창 깨지는 소리에 깜짝 놀란 두영은 몸을 작게 움츠리고 숨을 죽였다. 사지를 결박한 옷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갑자기 사방이 조용해졌다. 그러다 제 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에 두영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앞으로 포복했다. 눈이 가려진 상태라 소파 끝에 다다른 줄도 모르고 무작정 허공을 짚었다.

두영은 몸이 훅 꺼지자 곧 닥쳐올 고통에 눈을 질끈 감았지만, 누군가가 안정감 있게 제 몸을 들어 올려 다시 소파 위에 내려놓았다. 두려움에 잠식된 두영은 발작하듯이 몸부림쳤다. 갑자기 시야가 환해졌다. 두영은 당장 뭐가 보일지 몰라 눈을 뜰 수 없었다.

“크흡, 흐웁…….”

부르튼 입술 사이로 흐느낌이 터졌다. 두영은 무릎을 세우고 몸을 움츠렸다. 그 순간 익숙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저절로 눈이 뜨였다. 홍승표가 야차 같은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매섭게 눈을 뜬 그는 두영을 품에 안듯이 팔을 두르고, 결박한 소매를 풀었다. 홍승표의 어깨 너머를 보게 된 두영은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바닥에 널브러진 남자들의 사지가 비정상적으로 뒤틀려 있었다.

두영은 홍승표가 제 뺨을 감싸자 흠칫 놀라 그 손을 쳐냈다. 그의 표정이 음습한 것을 넘어 살벌해졌다. 홍승표는 두영의 팔뚝을 잡아채고 룸 밖으로 끌어냈다. 사람들이 미어터지는 홀을 무력으로 뚫고 지나가자 두영이 끈 떨어진 인형처럼 휘청거렸다.

클럽에서 나온 그는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는 건물과 건물 사이에 두영을 밀어 넣었다. 아스팔트 바닥에 빗물이 고여 그 모습이 꼭 밤바다 같았다. 고개를 깊게 숙인 두영은 바다 위에 서 있는 자신의 맨발과 홍승표의 신발을 뿌연 시야로 보았다.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홍승표가 나직이 말했다.

“얼굴 들어.”

“…….”

“얼굴 들어!!”

천둥 같은 고함에 두영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얼굴을 들었다.

“눈 떠.”

“흐윽…….”

“그만 울고.”

“큽… 흐으…….”

“그만 울라고 말했어.”

두영은 그의 말 한마디에도 흠칫흠칫 놀라며 울음을 참았다.

홍승표는 벌게진 눈으로 두영을 몰골을 천천히 훑었다. 무작정 끌고 오는 바람에 바지가 벗겨져 품이 큰 셔츠가 허벅지를 간신히 가리고 있었다. 한쪽 어깨 밑으로 셔츠가 흘러내려 작은 돌기가 드러났고, 부르튼 입술 주변에 불투명한 점액질이 묻어 있었다.

홍승표는 피가 빠르게 식어 가는 감각을 몸소 느꼈다. 단추를 풀기 위해 손을 들었지만, 이미 한참 전에 풀어 놓은 상태라 얼굴만 착잡하게 쓸었다.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런 식으로 돈 벌고 싶었어?”

“…….”

“등신처럼 울고만 있지 말고 말해!”

연이은 고함에 어깨가 비죽 솟은 두영은 젖은 얼굴을 손등과 손바닥으로 처연하게 닦았다.

“시발, 나랑 좀 잤다고 해 볼 만해? 몇 번 남자랑 자 보니깐 만만하던?! 그렇게 당하면서 뭘 믿고 따라가? 적당히 모자라야지. 학습 능력이 정도껏 없어야지!”

불같은 화에 두영은 다시 눈물을 쏟아 냈다. 홍승표는 숨죽여 우는 정수리를 노려보다가 움푹 파인 쇄골을 발견했다. 주파수가 맞지 않는 라디오처럼 빗줄기가 일정하지 않았다. 공기가 차고 바람이 셌다.

그는 긴 코트를 벗어 두영에게 입혔다. 코트 깃을 세우고 옷을 여며 주자, 이번에는 웅덩이를 밟고 선 맨발이 신경 쓰였다.

“하아.”

한숨이 절로 샜다. 홍승표는 두영을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안긴 몸이 흠칫 떨었지만,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울지 마.”

두영의 머리꼭지에 턱을 괸 그는 한풀 꺾인 목소리로 두영을 달랬다. 앙상한 등을 가만가만 쓸어 주자 두영의 떨림이 점차 잦아들었다. 범람하던 눈물도 멈추었다.

그는 두영을 데리고 빛이 있는 거리로 나왔다. 이번에는 힘으로 잡아끌지 않았다. 정차된 차로 가서 뒷문을 열자 깜빡 잊은 여자의 존재가 떠올랐다. 눈썹을 까딱거린 홍승표는 일단 두영을 차에 태웠다. 차체의 움직임에 잠에서 깬 유연서는 낯선 이와 눈을 맞춘 상태로 굳었다.

“누구…….”

유연서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뒤따라 차에 오른 홍승표가 두영을 달랑 들어 창가 쪽으로 옮겼다.

세단형 SUV는 내부가 잘 빠졌지만, 가운데 앉은 홍승표 때문에 자리가 비좁았다. 품이 많이 남는 코트를 입은 두영은 그의 품에 반쯤 파묻힌 채 숨죽였다. 이 정도로 붙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홍승표는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그 옆에 앉은 유연서는 널찍하게 가부좌까지 틀었다.

자동차는 한강 위를 달렸다. 건너편 다리에서 막차 운행을 하는 지하철이 보였다. 두영은 빠르게 달리는 지하철을 보다가 코를 훌쩍였다.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기에 훌쩍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히터 좀 높여요.”

“아, 넵.”

두둑한 팁을 받은 대리기사가 날쌔게 반응했다. 홍승표의 손이 두영의 등을 가로질러 허리께를 토닥였다. 그 손길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차는 맨션 앞에 정차했다. 유연서는 차에서 내리는 홍승표를 보며 말했다.

“야 홍승표, 이게 무슨 개 매너야? 쟨 뭔데?”

두영은 저에 대해 얘기하는 것 같아 뒤를 돌아보려고 하자, 홍승표가 두영의 뒤통수를 감싸 자기 가슴에 묻었다. 그는 조수석 창문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저 여자 데려다주고 돌아와서 경비실에 차 키 맡겨요. 오늘 운전 좋았어요.”

한쪽 입술을 끌어당긴 그는 또 한 번의 두둑한 팁을 대리기사에게 건넸다. 유연서가 헛웃음을 크게 내뱉었다. 눈썹을 까딱거린 홍승표가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내 차로 집에 데려다 달라며.”

“미친… 저거 완전 또라이 새끼 아냐.”

차창이 올라가고 홍승표는 숙인 허리를 세웠다. 까만 세단이 빨간 눈을 부라리며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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