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흠뻑 젖은 가랑비
샤워실 바닥에서 올라오는 찬기보다, 제 몸을 깔고 앉은 이주학의 욕망에 더 소름이 끼쳤다. 두영은 제 입술에 흩뿌려진 그의 숨결에 경악했다. 온몸으로 저항하며 그를 밀쳐 냈지만, 육중한 이주학의 덩치는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다.
이보다 소름 돋는 입맞춤은 없을 거다. 당장 제 입술을 도려내고 싶을 정도였다. 두영은 손을 휘저어 이주학의 옆통수를 후려쳤다. 옆으로 돌아간 이주학의 머리가 천천히 원위치를 찾았다.
‘시발…….’
욕을 뇌까린 이주학이 물에 젖은 두영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잡아당겼다.
‘밤새 여기 갇혀 있고 싶어 그러지? 그래서 이렇게 뻐기는 거지?’
두영은 턱에 힘을 주고 이주학을 노려봤다. 차라리 대야에 코를 박고 죽는 게 나았다.
그는 두영의 입을 벌리기 위해 두툼한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두영은 고개를 마구 내저으며 거부했지만, 턱이 벌어지고 불쾌한 손가락이 혀를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두영은 턱주가리에 힘을 주고 손가락을 아득 씹었다.
‘아아악! 시발 개또라이 새끼가!’
뺨을 얻어맞은 두영은 뇌가 나뒹구는 감각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턱이 빠질 것 같았지만 아픈 느낌은 아니었다. 그저 이주학에게 깔린 이 상황이 거지 같을 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추위에 턱이 떨렸다. 한여름 무더위에 동사한 최초의 사람이 될지도 몰랐다.
돌연 쾅, 하고 크게 걷어차이는 소리가 샤워실에 울렸다. 그 소리를 못 들은 이주학은 두영의 입술을 탐하는 데에만 혈안 되어 있었다. 누군가가 물이 고인 샤워실 바닥을 찰팍찰팍 밟으며 다가왔다. 이주학의 덩치에 가려져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이름 모를 이가 팔을 천장 위로 높게 쳐들었다. 그의 손에는 벽돌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이주학의 머리를 한 획으로 내려쳤다. 눈 깜짝할 새 벌어진 상황에 두영은 저를 깔고 앉은 이주학이 사라졌음에도 일어날 수 없었다.
벽돌을 휘두른 이는 박은식이었다.
그와 어울리지 않는 무심한 표정에서 얼핏 두려움이 엿보였다, 두영은 제 처지도 잊고 겁에 질린 박은식을 위로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고치 속에 갇힌 것같이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어서 멀리멀리 도망치게 해야 하는데 입도 벙긋거려지지 않았다. 마치 꿈 같았다.
아, 그렇구나. 꿈이구나. 그래 꿈이었어.
그러나 상관없었다. 꿈이어도 박은식을, 이 지옥에서 박은식을,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서 박은식을…….
두영은 목이 찢어져라 박은식을 불렀다. 이미 지나간 시간을 바꿀 수 없듯이 육신은 저 바다 너머로 깊이깊이 가라앉았다.
꿈에서도 박은식을 구해 내지 못했다. 지독한 자기혐오가 조류처럼 밀려왔다.
***
홀연히 잠에서 깬 두영은 천장을 멍하니 보았다. 방금 꿈을 꾼 것 같은데 눈을 뜨자마자 무슨 꿈인지 기억이 날아가 버렸다.
새벽에 겨우 잠이 들었다가 깬 것이라 정신이 혼탁했다. 시계를 보니 겨우 한 시간 지나 있었다. 항상 세 가족이 단칸방에 붙어 잤기에 혼자 자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아무리 선잠을 자더라도 허삼혁이 있는 게 훨씬 게 나았다.
두영은 땀에 젖은 손으로 핼쑥한 얼굴을 쓸었다. 그러고는 땀 때문에 몇 배로 차가운 손을 허벅지 사이에 끼워 넣었다. 전기장판을 최고 온도로 올렸음에도 몸은 쉽사리 따뜻해지지 않았다.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던 두영은 이불에 매달린 보푸라기를 발견하고 냉큼 떼어 냈다. 눈에 띄면 그 자리에서 바로 떼는 게 두영의 오래된 습관 중 하나였다.
그래서 갓난쟁이 때부터 덮고 자던 두영의 애착 이불은 지금도 덮고 자기 충분했다. 다만 숨이 많이 죽어, 한겨울에는 그 위로 이불을 두세 장씩 더 덮어야 했다.
묵묵히 떼어 낸 보풀을 쇠똥구리처럼 굴려 방바닥 한편에 두었다. 입이 찢어지게 하품하자 윗입술이 찢어졌다. 하도 손으로 뜯어서 입술이 멀쩡할 때가 없었다. 건조해서 찢어지는 일도 다반사였다.
찢어진 입술을 쪽쪽 빤 두영은 비실비실한 몸을 겨우 일으켜 앉고 스트레칭을 했다. 추워서 웅크리고 자느라 뻐근해진 몸이 곳곳에서 비명을 질렀다. 그때 벽에 걸린 코트에 시선이 닿았다.
두영은 천장으로 뻗었던 팔을 천천히 내리고 입술을 불안하게 뜯었다. 곰팡이가 핀 벽과 어울리지 않는 코트는 홍승표의 옷이었다. 그의 집에서 도망칠 때 급하게 훔쳐 입고 나왔다.
정지 화면처럼 가만히 있던 두영은 갑자기 발라당 누워 이불을 찼다. 소리 없이 끙끙대다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얌전히 누워만 있었다. 그러다 다시 코트에 힐끗 시선을 주었다. 무생물 주제에 자신을 쳐다보는 듯해서 두영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씨근덕댔다.
주말 내내 홍승표의 집에 있었다. 자발적으로 남은 게 아니라 그가 보내 주지 않았기에 거의 감금된 상태나 다름없었다.
하루 세끼 다 챙겨 먹어 본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배를 채우고 나면 복층으로 끌려갔고, 거기서 또 몸을 섞었다. 기절하듯이 잠이 들고 깨어나면 또 몸을 섞는 무한 굴레였다. 심지어 잘 때조차 성기를 빼지 않았다.
화장실까지 따라 들어오려던 홍승표는 두영이 대놓고 기겁하면 왜 그런 표정을 짓느냐며 괴롭혔다. 말로는 안 한다면서 팬티를 벗겼고, 그만한다면서 엉덩이 사이를 손으로 헤집었다.
홍승표는 사람이 아닌 건가? 어떻게 하체가 식지도 않고 그렇게 벌떡벌떡 서 있을 수 있는 거지?
두영은 그의 집에서 평생 흘릴 눈물을 다 흘린 듯했다. 달래 주는 손길조차 싫어 거부하면, 홍승표는 곧바로 사늘한 얼굴을 하고 분위기로 압박해 왔다. 자기 때문에 울고 있는데 자기가 꼭 달래 줘야 한다는 심보는 무엇이고, 아랫도리를 세우고 들이대는 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원래 이렇게 하는 거야.’
갑자기 떠오른 홍승표의 괴상한 말에 두영은 이불에서 팝콘처럼 튀어나왔다. 그러고는 애먼 베개를 주먹으로 퍽퍽 내리꽂았다. 원래 그렇게 하는 거라던 홍승표는 제게 쉴 틈 없이 이상한 자극을 선사했다. 싫다고 울던 자신은 정사 내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냥 다시 옛날처럼…….
퍼뜩 정신을 차린 두영은 옹골지게 말아 쥔 주먹으로 다시 베개를 팡팡 때렸다.
뭐가 다시야. 뭐가 옛날처럼이야.
두영은 씩씩거리며 체중을 실어 베개를 꾹꾹 눌렀다. 그러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멍을 때렸다. 왜 갑자기 홍승표가 변해 버렸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원래 그렇게 해야 했다니, 대체 왜?
두영은 무릎을 세우고 다리를 끌어안았다. 이제 씻고 밖에 나갈 준비를 해야 하는데 새벽 댓바람부터 쓸데없는 데에 기운을 썼더니 준비가 여의찮았다.
겨우겨우 일어난 두영은 이불을 개고 방에서 나왔다. 슬리퍼를 질질 끌며 대야 앞에 쭈그려 앉는데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다. 부어 있는 항문으로 맥박이 둥둥 뛰는 게 느껴졌다. 살다 살다 그 부위로 심장 박동을 느껴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 집에 있는 동안 제 발로 걸어 다닌 적이 없었다. 아직도 중력을 무시하고 떠 있는 기분이다. 그래서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히 내디뎌야 했다.
씻는데 물이 차가워서 얼굴 가죽이 찢어질 것 같았다. 당장 망태 할아버지가 제 코를 뜯어 가도 그것만 가져가시는 거냐며, 인심 좋게 강냉이도 몇 개 뽑아 얹어 드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안을 끝냈을 땐 얼굴에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두영은 차갑게 곱은 손으로 로션을 대충 바르고 집에서 나왔다.
흐릿한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코트 목깃을 여몄다. 매해 겨울에 교복처럼 입는 외투를 클럽에 두고 와서 당장 입을 만한 게 없었다. 어차피 홍승표에게 옷을 돌려줘야 했기에 겸사겸사 입었다.
콧속을 파고드는 새벽 공기에 뇌가 바짝 얼어붙었다. 이상하게 코트는 따뜻하지 않고 무겁기만 했다. 홍승표가 덮어 줬을 때는 분명 따뜻했는데. 어쩐지 냄새만 좋은 델리만쥬를 먹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클럽에 두고 온 제 옷이 훨씬 따뜻했다.
두영은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에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훑었다. 거울 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오늘따라 괜스레 시선이 갔다.
주변에 누가 있는지 확인하고 팔을 나비처럼 위아래로 펄럭였다. 품이 많이 남는 옷이라 어떤 행동을 해도 굼떠 보였다. 소매가 길어 손톱조차 보이지 않았고, 어깨선도 축 처져 쭈구리 같았다.
입으로 쩝 소리를 낸 두영은 초라해 보이는 제 모습에서 시선을 떼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어 그래, 오늘 많이 춥지? 안 그래도 옷 얇게 입고 다니는 애가… 어머, 두영이 너 여자 친구 생겼니?”
두영을 빠르게 훑은 강순자가 눈을 크게 뜨고 다가왔다. 두영은 그가 이렇게 나올 걸 예상했기에 냉큼 자전거 짐칸에 오늘치 할당량 우유를 싣고 사무실에서 나왔다.
뻣뻣하게 대처한 것 같아 후회했지만, 돌이키기엔 너무 많이 나와 버렸다. 괜히 마음이 쓰여 일하는 내내 기분이 별로였다. 자신의 뇌는 우울한 생각을 하나 물려 주면 그것으로 사골 육수까지 끓여 먹으려고 했다.
두영은 홍승표가 사는 맨션에 도착하고 나서야 사무실에서 쇼핑백을 빌린다는 걸 기억해 냈다.
‘어떡하지. 이 옷은 우유 주머니에 안 들어갈 것 같은데.’
두영은 입술을 꾹꾹 깨물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의 집은 여전히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우유를 바닥에 내려놓고 서둘러 외투를 벗는데 현관문 안쪽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두영은 제 앞으로 다가오는 문을 1초 정도 굳은 채 응시했다. 곧바로 쿵, 하는 소리가 울리더니 연달아 이명이 찾아왔다. 정신을 차렸을 때 자신은 바닥에 나자빠져 있는 상태였다. 인지하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으…….”
뒤늦게 통증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말도 못 하게 아파서 일어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때, 타인의 힘이 두영을 벌떡 일으켜 세웠고 따뜻한 손길이 뺨을 감쌌다.
눈을 몇 번 깜빡이며 흐릿한 초점을 선명하게 맞춘 두영은 눈앞에 당황한 얼굴을 한 채 서 있는 홍승표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보기 드문 그의 표정에 두영은 아픈 것도 잊고 시선을 빤히 맞췄다.
흑색 눈동자가 갑자기 크게 흔들렸다. 두영은 뒤늦게 코밑이 뜨끈해진 걸 느끼고 손등으로 쓸었다. 검붉은 피가 갓 짠 물감처럼 묻어났다.
한쪽 콧구멍을 거즈로 틀어막은 두영은 소파에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홍승표가 준 아이스 팩을 콧잔등에 살살 갖다 댔다.
갑자기 따뜻한 곳에 들어와서 그런지 틀어막지 않은 콧구멍에서 맑은 콧물이 줄줄 나왔다. 홍승표가 훌쩍이면 피가 목뒤로 넘어간다고 차라리 닦으라며 휴지를 손에 쥐여 주고 욕실로 향했다.
곧이어 들려오는 물소리에 두영은 신경이 곤두섰다. 손발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어떤 자세로 앉아 있어야 할지 모든 게 신경 쓰였다.
발가락을 꼬물거리며 넓은 집을 둘러봤다. 이 집에서 있었던 일들이 모두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그와 한두 번 몸을 섞은 게 아닌데 유독 어제의 기억이 뚜렷한 잔상으로 남았다.
공간이 주는 시각적 흔적과 묘하게 남아 있는 지난 열기, 소파가 부대끼는 소리와 뭐에 홀린 듯이 그를 받아 주던 자신. 꿈에서나 그럴 법한 자신의 모순적인 모습에 불현듯 얼굴이 뜨거워졌다.
홍승표가 허리에 수건을 두른 채 욕실에서 나왔다. 두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최대한 민망한 티를 내지 않으려는데, 이쪽으로 찰박찰박 걸어오는 발소리에 얼굴 근육이 엉망으로 꿈틀거렸다.
옆자리가 움푹 꺼지는 게 느껴졌다. 두영은 슬그머니 거리를 두었고 홍승표는 벌어진 만큼 거리를 다시 좁혀 왔다. 그러고는 두영의 머리 위에 큼지막한 손을 턱, 하니 올려놓더니 시선이 겹치게 고개를 돌렸다.
이 와중에도 두영은 콧물이 자꾸 흘러 휴지를 코에서 뗄 수 없었다. 두영의 상태를 파악한 홍승표가 나직이 웃으며 두영의 뒷덜미를 감싸고 제 쪽으로 끌어당겨 왔다. 그러고는 두영의 코에 박힌 거즈를 살살 돌리며 빼냈다.
두영이 콧잔등을 살짝 찌푸리자 홍승표도 콧잔등을 살포시 구기며 두영의 빨간 코를 휴지로 감쌌다.
“흥 해.”
뭐, 뭐를 해? 당황한 두영은 그저 눈만 끔뻑였다. 이번에도 두영을 따라 눈을 느리게 끔뻑인 홍승표가 대수롭지 않게 말을 덧붙였다.
“흥, 하고 코 풀라고.”
“내, 내가 하께…….”
두영은 코가 야무지게 잡힌 상태라 코맹맹이 소리가 절로 나왔다. 홍승표는 웃고 있었지만, 누구보다 진지한 상태였다. 그가 농담하는 게 아니란 걸 여실히 느낀 두영은 그의 눈치를 보며 소심하게 코를 풀었다. 그러나 홍승표는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인지 눈썹 산을 삐딱하게 세웠다.
“좀 더 세게.”
“흐, 흐응…….”
“…앙탈 부리는 거야? 귀엽긴 한데.”
말끝을 줄인 홍승표가 두영의 얼굴을 제 쪽으로 더 가까이 당겼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두영은 목에 힘을 주고 버텼다.
“아라써, 아라써… 제대로 푸면 대자나…….”
두영은 급한 마음에 코를 시원하게 풀었다. 만족한 듯이 웃은 홍승표가 사용한 휴지를 아무렇지 않게 손에 쥐었다. 두영이 냉큼 손을 뻗어 이리 달라고 했으나, 홍승표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는 헐어 버린 두영의 코밑에 바셀린까지 발라 주곤 검지 끝으로 두영의 콧방울을 툭 건드렸다.
“어지러워?”
두영은 대답 대신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현기증이 뱃고동처럼 둔하게 밀려왔다. 그는 기울어지는 두영의 몸을 안정감 있게 받쳐 주고 말했다.
“많이 어지러우면 좀 쉬었다가 가.”
그 말을 듣자마자 두영은 각성제를 들이부은 듯이 정신이 말똥해졌다. 그가 하는 말은 상냥한 배려처럼 들렸지만, 잘 생각해 보면 그 의도가 불순했다. 특히 아랫도리만 간신히 가린 저 수건이 가장 음란했다.
눈을 부릅뜬 두영은 녹슨 철문처럼 고개를 빳빳이 내저었다.
“괘, 괜찮은 것 같아.”
“같은 건 또 뭐야.”
멋쩍게 코를 훌쩍인 두영은 이만 돌아가려고 소파에서 일어났지만, 홍승표가 도로 끌어다 앉혔다. 붙잡힌 손목이 아팠다. 아무래도 그는 힘 조절을 할 줄 모르는 모양이었다.
흑백이 뚜렷한 홍승표의 눈동자 위로 작은 이채가 띠었다. 그는 시간의 흐름을 놓친 사람처럼 두영을 주시했다. 그리고 얼굴을 비스듬히 기울여 입을 맞췄다.
두영은 가늘게 눈을 뜨고 코앞까지 다가온 홍승표의 얼굴을 보았다. 살포시 닿았다가 떨어지는 입맞춤은 그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느껴졌다.
다시금 맞물린 입술 틈에서 기포가 촉촉하게 터지며 자그맣게 울렸다. 가만히 듣고만 있어도 몸이 나른해지는 백색 소음이 세상의 잡음을 야금야금 먹었다.
음미하듯 입술을 움직이던 그가 점점 체중을 싣고 두영에게 기댔다. 두영은 팔꿈치로 몸을 지탱한 채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홍승표가 집요하게 따라오며 입술을 비벼대 곤란했다. 두영은 그를 밀어 내려고 넓은 가슴에 손을 얹었다가 닿는 곳마다 맨살이라 손끝을 파르르 떨며 거뒀다.
점점 진해지는 분위기에 두영은 일부러 소파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잽싸게 일어나 벌레가 기어다니는 듯한 입술을 소매로 벅벅 문지르며 현관 쪽으로 걸어가는데, 홍승표가 두영의 손목을 잡아챘다.
“가지 마, 밖에 비 오잖아.”
창가로 시선을 돌리자 진짜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두영은 입술을 뜯으며 홍승표의 얼굴을 힐끗 보았다. 그가 새까만 눈을 하고 자신을 강아지처럼 올려다보고 있었다. 살짝 마음이 약해진 두영은 시선을 떨어뜨렸다가, 그의 하체를 가린 수건이 텐트처럼 솟아 있는 걸 발견했다.
하마터면 머리를 쓰다듬어 줄 뻔한 두영은 짜게 메마른 시선을 다시 창밖으로 던졌다. 침묵이 내려앉은 순간, 갑자기 몸을 일으킨 홍승표가 두영을 홈바로 이끌었다.
“줄 게 있어.”
그는 홈바 위에 있는 작은 상자를 두영에게 건넸다. 머뭇거리며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짙은 색의 카드 지갑이 들어 있었다.
“열어 봐.”
두영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지갑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 안에 자신의 민증이 있었다.
“이게, 왜…….”
“네가 나 자고 있을 때 도망친 날, 그날 새벽에 가서 찾아왔어.”
이렇게 예고도 없이 그가 주말 일을 언급할 줄 몰랐다. 두영은 소파 등받이에 걸려 있는 코트를 힐끔 보았다. 다행히 홍승표는 훔쳐 입고 간 코트에 대해 나무라지 않았다.
어설프게 시선을 떨군 두영은 거칠거칠한 손으로 질 좋은 가죽을 쓸었다. 카드 지갑 측면에 브랜드 로고가 각인되어 있었다. 명품에 대해 잘 모르는 자신의 눈에도 낯익은 브랜드였다. 무명천을 엮어 만든 동전 지갑과 감히 비교조차 할 수도 없는 값비싼 것에 어쩐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리고 민증과 함께 꽂혀 있는 노란색 종이 다발에 다시 한번 마음이 무거워졌다. 자신의 동전 지갑에는 이렇게 큰돈이 들어 있지 않았다. 돈이 한 푼도 없는 걸 알고 있었기에 지갑을 찾겠다고 발을 동동거리지 않았던 거다.
두영은 홍승표와 지갑을 번갈아 보았다. 평소 눈치가 빠른 그가 오늘따라 늦장을 부리며 반응했다.
“지갑 선물은 돈이랑 함께 주는 거라고 매장 직원이 알려 줬어.”
미신 같은 건 손톱의 때만큼도 믿지 않을 것 같은 홍승표가 저런 말을 하니 신기했다.
두영을 물끄러미 보던 홍승표가 별안간 손을 뻗어 두영의 입술을 어루만졌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흠칫 놀란 두영은 그의 손을 쳐냈다. 지갑이 바닥에 떨어지고 내용물이 밖으로 빠져나갔다.
토독토독 내리는 빗소리가 의식되는 고요였다. 머리칼을 쓸어 넘긴 홍승표가 한숨을 쉬듯 입을 달싹거렸다. 그러고는 성큼 거리를 좁혀 두영을 팔 사이에 가두고 홈바를 짚었다.
“왜? 마음에 안 들어?”
화를 낼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홍승표는 취향을 물어보았다. 두영은 불편한 분위기에 손톱 거스러미를 뜯었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홍승표가 두영의 양 손목을 한 손으로 구속하고 재차 물었다.
“이게 아니야?”
두영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냥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취향을 혈액형처럼 머리에 외우고 다니는 사람이 있을까? 처음 들어 보는 물음에 난감하기만 했다.
그때 홍승표가 두영을 달랑 들어 홈바 위에 앉혔다. 두영은 제 앞에 지는 그림자에 눈을 끔뻑였다. 그렇게 입술이 맞닿았다.
두영이 고개를 내젓자 홍승표가 고개 각도를 비스듬히 기울여 더욱 깊게 파고들어 왔다. 홍승표는 빠듯하게 벌어진 입 안을 엉망진창 헤집곤 두영의 골반을 잡고 제 몸통 쪽으로 잡아당겼다.
은근히 배꼽 아래에 비벼지는 단단한 무언가에 두영은 정신을 퍼뜩 차리고 홍승표를 밀어 냈으나, 서로의 가슴팍이 바짝 밀착된 상태라 팔이 제대로 휘둘러지지 않았다.
입천장을 살살 긁어 대는 감각이 소름 끼쳤고, 뒷덜미를 쓸어 주는 손길에 허리가 떨렸다. 숨이 가빠 속눈썹을 파르르 떨자, 눈을 게슴츠레 뜬 홍승표가 두영의 아랫입술을 물고 천천히 물러났다.
그가 입 안에 고인 타액을 단물처럼 삼켰다. 숨 고를 시간만 자애롭게 하사한 그는 다시 입술을 들이댔다. 두영은 냉큼 고개를 돌려 홈바 밑으로 내려가려 했다. 그러나 고작 다리만 버둥거린 것이 전부였고, 실수로 그의 허리를 감싼 수건을 차 버렸다.
수건은 바닥에 떨어지지 않았다. 발기한 그의 성기에 건조대에 널린 수건처럼 걸려 있을 뿐이었다. 시선을 돌릴 타이밍을 놓친 두영은 하염없이 그의 것을 관망하다가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홍승표는 대수롭지 않게 수건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우뚝 선 성기를 두영의 허벅지 안쪽에 비볐다. 그러다 기습적으로 두영이 티셔츠 안쪽에 머리를 들이밀고 젖꼭지를 빨았다.
“앗…….”
어깨를 둥글게 만 두영은 홍승표의 머리를 감쌌다. 그러다 슬금슬금 올라오는 진저리 나는 감각에 참지 못하고 그의 머리를 밀어 냈다.
홍승표는 두영의 두 손목을 등 뒤로 모아 결박했다. 입술로 작은 젖꼭지를 오물오물 씹다가 혀끝으로 간질이듯 가지고 놀았다. 여유로운 손으로는 두영의 바지를 벗기고 팬티를 내려, 밖으로 드러난 성기를 망설임 없이 입에 물고 게걸스럽게 빨았다.
“하으, 응…….”
두영의 허리가 조율이 잘 된 현처럼 튕겼다. 홍승표는 점점 힘을 받고 서는 성기의 능선을 입술로 그리며 두영의 옷을 모조리 벗겼다.
달빛도 들지 않는 어두운 공간, 녀석의 몸이 별 조각을 품은 듯이 은은하게 빛났다. 습윤한 눈동자를 보자 짓궂게 대하고 싶은 마음이 제 안에 꿈틀거렸다.
홍승표는 두영의 성기를 뿌리까지 머금고 천천히 움직였다. 갈 곳을 잃고 헛도는 녀석의 다리를 제 어깨에 얹은 채 허벅지를 찰떡처럼 주물렀다.
매끈한 허벅지 근육이 꿈틀거리는 건 녀석이 간신히 참고 있다는 신호였다. 볼이 파이게 성기를 흡입하고 서서히 속도를 높이자 녀석이 뭐가 마려운 개처럼 끙끙대기 시작했다.
“흐으, 그만… 읏!”
두영이 부르르 떨며 사정했다. 홍승표는 두영의 아랫배에 입술을 맞춘 채 눈을 치뜬 상태로 씨익 웃었다.
“토끼야?”
“그, 그건… 그건 네가…….”
울먹이는 녀석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당장 품에 안아 토닥여 주고 싶을 정도로 안쓰러운 모습이지만, 그건 제 성기를 허두영의 구멍에 쑤셔 박고 해도 늦지 않았다.
눈을 벌겋게 뜬 홍승표가 두영을 홈바에서 내려 직각으로 엎드리게 했다. 뽀얀 엉덩이 사이에 코를 파묻자 녀석이 갓 잡힌 활어처럼 바르작거렸다.
그는 두영의 움직임을 최대로 제한하고 아랫구멍을 게걸스럽게 핥았다. 여린 살갗을 앞니로 갉작거리거나, 엉덩잇살을 한가득 깨물고 자국을 남겼다. 입에 침을 모아 가글 하듯이 구멍을 빨자, 꿀쩍꿀쩍하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입을 떼어 낸 그는 깜빡임을 잊은 눈으로 벌름거리는 구멍을 주시했다. 흥건하게 젖은 구멍이 제 침을 삼켜 내지 못하고 줄줄이 뱉어 냈다. 아쉬운 마음이 무섭게 들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 내지 못하면 제가 준 것들을 허두영이 모조리 뱉어 낼 것 같았다.
홍승표는 축축해진 구멍을 손가락으로 난잡하게 쑤셨다. 그의 손길에 젖은 구멍에서 물장구치는 소리가 났다.
“아, 으아, 흐……!”
간신히 발뒤꿈치를 세운 채 서 있는 두영의 몸이 처량하게 떨렸다. 잔뜩 피가 몰린 성기는 사정이 임박한 상태였다. 손장난을 끝낸 홍승표가 자신의 성기를 구멍에 맞추고 느린 진입을 하기 시작했다.
“너무 조여…….”
낮은 목소리가 속삭이듯 읊조렸다. 두영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간신히 사정을 참아 내는 것이 자신의 한계였다. 빠듯한 조임에 혀를 찬 홍승표가 두영을 뒤에서 껴안아 들고 복층으로 올라갔다. 두영은 홍승표가 자신을 침대에 내려 줄 때까지 이를 악물며 사정을 겨우겨우 참았다.
침대에 엎어진 두영이 냉큼 앞으로 기어갔으나, 홍승표에게 붙잡혀 다시 성기가 꾀어졌다. 그는 두영의 납작한 몸 위에 엎드려 연결된 곳을 천천히 움직였다. 그러다 단번에 뿌리까지 처박고 빼지 않았다.
“아, 흐……. 아흐으…….”
“…뭐?”
그의 물음에 두영은 입을 앙다물었다. 아프다고 생각만 했는데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꺼냈나 보다. 두영은 시트에 얼굴을 처박고 고개를 짧게 내저었다.
눈썹을 살짝 찡그린 홍승표가 두영의 몸을 돌렸다. 또 그새 물만두가 된 허두영이 호두 턱을 바들바들 떨며 울음을 참고 있었다.
두영을 유심히 보던 홍승표가 두영의 머리 양옆에 팔꿈치를 괴고 아래를 천천히 비볐다. 깊이 박아 넣은 상태로 뭉근하게 움직이니, 두영의 창백한 낯빛이 다시 열로 물들기 시작했다.
“흐으, 으응, 읏…….”
“아직도 아파?”
두영은 대답 대신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다는 거야, 아프다는 거야? 말을 해야 알지.”
“…….”
“천천히 하는 게 좋아?”
이번에도 두영은 대답이 없었다.
“어쩔 수 없네. 나 꼴리는 대로 해야지.”
무표정하던 홍승표가 별안간 성기를 퍽 쑤셨다.
“아욱!”
“아프면 말해.”
“처, 천천히… 흐윽… 해 줘…….”
무르녹은 목소리에 홍승표가 눈을 접고 맑게 웃었다.
“알았어. 다음에 천천히 해줄게.”
“왜… 아앗……!”
“지금은, 내가 좀, 급해서…….”
홍승표는 두영의 오금을 누르고 거센 추삽질을 시작했다. 두영은 그가 자신에게 말뚝을 처박을 때마다 내장이 심장까지 올라오는 것 같았다. 반대로 그가 나갈 때는 내장이 몸 밖으로 딸려 나가는 듯했다.
그의 불알이 두영의 엉덩이를 묵직하게 때렸고, 굵은 좆이 내벽을 거칠게 긁으며 퍽퍽 드나들었다. 어느새 절정에 도달한 두영은 허리를 들썩이며 묽은 정액을 질질 흘렸다.
“하아… 크흣.”
홍승표가 낮게 목을 울렸다. 씹어 삼키는 듯한 조임에 순간 그의 눈앞이 흐무러졌다. 그는 두영의 팔을 제 목에 두르고 통제를 벗어난 짐승처럼 추삽질을 하기 시작했다. 내벽의 야릇한 지점을 세게 긁자 두영이 발작하듯 허리를 들썩였다.
그는 성기를 내벽 깊숙이 파묻고 사정했다. 극적인 쾌감에 온몸이 두들겨 맞는 기분이었다.
팔에 힘을 풀고 완전히 두영의 몸에 밀착했다. 녀석의 뾰족한 직각 어깨에 입술을 비비다가 둥근 아치형 목덜미에 코를 파묻었다. 퍼즐이 완벽하게 맞춰지는 듯한 결합이었다. 아주 오래전에 잃어버린, 오랫동안 찾아 헤맨 무언가를 이제야 되찾은 것처럼 고양된 기분이었다.
한 번도 느낀 적 없었던 노곤함에 눈꺼풀이 힘없이 닫혔다. 홍승표는 새로운 느낌이 두렵지 않았다. 오랜 세월 길을 잃고 헤매다, 겨우 태고에 도착한 그런 안락감이었다.
두영은 당황함에 눈을 빠르게 끔뻑거렸다. 저를 깔고 엎어진 홍승표가 성기를 빼지 않은 상태로 잠이 들었기 때문이다. 벗어나고 싶어도 그의 덩치나, 족쇄처럼 제 몸에 두른 그의 팔 때문에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그때보다 한참이나 못 미치게 했는데 홍승표가 왜 기절하듯 잠이 든 건지 의아했다. 잠을 못 잔 건가? 새벽에 내 물건을 찾으러 가느라? 어쩐지 두영은 어제 도망친 것에 대해 양심이 쿡쿡 찔렸다. 그리고 뒤끝이 지저분한 허탈함이 따라왔다. 사무치게 씁쓸하고 공허한 기분이었다.
맞닿은 그의 가슴에서 심장의 울림이 느껴졌다. 그에 두영은 그가 저와 같은 사람이었지, 하고 홀연히 생각했다. 참 이상했다. 정 없이 세상을 보는 홍승표가 그 어떤 사람보다 따뜻하다는 게.
추운 건 싫었다. 추움은 얄팍한 마음을 더 얄팍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래서 그의 체온을 좀 더 나눠 받고 싶었다. 얼른 이곳을 떠나야 하는데 졸음이 쌓인 눈꺼풀이 스멀스멀 감겼다.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그의 울타리에 있고 싶었다.
***
수면욕, 식욕, 성욕. 3대 욕구가 모두 채워진 홍승표는 나른함에 취했다. 녀석의 정액을 먹었으니 식욕이 채워진 게 맞았다.
약간의 꿉꿉한 시트를 팔다리로 감던 그의 손끝에 말캉한 무언가가 닿았다. 홍승표는 찌뿌듯한 눈에 힘을 주어 주변을 돌아보았다. 시선 끝에 새우처럼 옹송그린 두영이 있었다. 두영의 튀어나온 등뼈를 보던 홍승표는 자신만 삼 대 욕구를 채운 것 같아 기분이 석연치 않았다.
그는 두영 쪽으로 돌아눕고 팔을 길게 뻗었다. 겨우 손끝에 스치는 녀석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처량한 뒷모습을 짧게 훑었다. 숨을 쉴 때면 갈비뼈의 형태가 뚜렷이 드러났다. 평소에 뭘 먹는 걸 본 적이 없긴 하지만, 이 정도면 아예 굶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로 말랐다.
문득 홍승표는 두영의 엉덩이 사이에 말라붙어 있는 정사의 흔적을 발견했다. 그냥 무시하고 자려다가 찜찜함에 다시 눈을 떴다. 수건에 따뜻한 물을 적셔 와 허두영의 몸을 닦았다. 그렇게 보게 된 녀석의 몸은 생각보다 엉망이었다. 흐린 눈을 하고 봐도 죽음 직전에 건져진 사람 같았다.
“이상하네. 오늘은 별로 안 괴롭힌 것 같은데.”
그는 두영의 몸 곳곳에 남은 이빨 자국을 눈 한 번 깜빡거리지 않고 보았다. 겨우 키스마크일 뿐인데 성취감, 정복감, 희열감이 느껴졌다. 그러다 등에 납작 붙은 허두영의 뱃가죽에 연민이 들었다.
녀석을 이 집에 가두고 제가 주는 먹이만 먹게 하고 싶은 마음. 그게 연민일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 이 기분을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 몰랐다. 사람의 감정은 잘 모른다. 뇌가 있다고, 심장이 뛴다고 모든 감정을 이해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온몸이 광이 나게 닦아 주었더니, 허두영이 비 맞은 고양이처럼 오들오들 떨었다. 그는 두영의 몸에 시트를 덮어 주고 그 옆에 누워 관자를 손으로 받쳤다. 등허리를 토닥토닥 다독이니, 녀석이 몸을 아주 작게 옹송그렸다. 그게 꼭 새끼 고양이 같아서 엉덩이를 두드려 주면 고롱고롱 울 것 같았다.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아, 있었다. 딱 한 번.
자고 있을 때 도망친 녀석을 생각하면 땅콩 한 대는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잠귀가 밝은 편인데 어째서 그날은 죽은 듯이 자고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빈 옆자리를 발견했을 땐 어이가 없어서 잠이 확 달아났다. 발칙한 파트라슈를 어떻게 조질지 독창적이고 획기적인 계획을 세웠지만, 막상 얼굴을 보니 그럴 마음이 사라졌다.
홍승표는 두영의 턱선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다가 목을 움켜쥐었다. 조금만 힘을 주면 부러질 것 같은 굵기였다. 머리통도 작아서 한 손으로 터뜨릴 수 있을 듯했다. 보는 사람이 조마조마한 이기적인 몸뚱이였다.
창문을 뚫고 들어온 노을이 녀석의 머리카락을 다홍빛으로 물들였다. 어쩐지 그 모습이 피 칠갑을 한 듯해 홍승표는 암막 커튼을 쳤다.
숨소리도 없이 자는 녀석의 모습에서 오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어제도 오늘처럼 몇 번의 정사를 나눴고 엉켜서 낮잠을 잤다. 그러나 달랐다. 무언가가 변화하고 있었다. 좀 더 짙게, 좀 더 강하게 제 무의식을 옭아맸다.
따뜻한 곳을 찾는 허두영의 본능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신경 쓰였다. 녀석은 제 인생에서 처음 보는 종류의 사람이었으나, 동시에 아주 처음은 아니었다. 볼 때마다 흐릿한 기시감이 들었고, 이따금 애틋했다. 마치 언젠간 사라질 꿈속 인물처럼.
홍승표는 피식 웃었다. 뭐가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이딴 생각이나 하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그렇기에 더욱 이 원인 모를 이끌림에 저항하지 않았다.
딱히 저항할 이유도 없었다. 늘 새로운 자극을 원하는 자신이 이렇게 재밌는 장난감을 놓칠 리 없었다. 쓸데없는 짓이나 할 시간에 녀석의 말랑거리는 엉덩이를 한 번이라도 더 조몰락거리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로웠다.
행동파인 홍승표는 바로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시트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부드러운 몸을 사정없이 조몰락거렸다. 그러자 두영이 홍승표에게 등을 보이고 태아처럼 웅크렸다. 똬리를 튼 모습이 관절 망가지기 딱 좋아 보였다.
그는 두영의 처량한 자세를 바꿔 주다가, 생각보다 유연한 몸에 짙은 흥미를 느끼곤 관절을 이리저리 꼬아 보았다. 그러고 보니 녀석은 어느 자세를 해도 잘 받아먹었다. 홍승표는 새로운 놀이에 눈빛을 빛냈다가 금방 흥미를 접고, 바르게 눕힌 두영의 몸에 시트를 꼼꼼히 여며 줬다.
딱히 자신을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허두영과 있을 때면 짓궂은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해졌다. 울리고 싶었고, 괴롭히고 싶었고, 어쩔 땐 저로 인해 화내는 모습도 보고 싶었다. 그리고 우연히 봤었던 그 미소도 한 번 더 눈에 담고 싶었다.
죽은 듯이 자고 있던 두영이 연속으로 재채기했다. 홍승표는 이불로 꽁꽁 감싼 두영을 품 안으로 끌어당겨 와 이마와 이마를 맞대었다. 열은 없었다.
“…추운가?”
제 체온을 옮겨 주기 위해 더 꼭 껴안자 녀석이 미간을 모으고 입술을 뚱하게 내밀었다. 홍승표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두영의 주름진 미간을 살살 쓸었다. 금세 평온한 얼굴로 돌아온 두영이 홍승표의 목덜미에 이마를 비볐다.
홍승표는 일순 호흡을 멈췄다. 잠결에 나온 행동인 걸 알고 있지만, 서툰 애새끼처럼 반응했다. 허두영은 곤란한 상황이 오면 얼굴을 숨겼다. 숨기는 방식이 고약해 버릇을 고쳐 주고 싶다가도, 목에 닿는 숨결이 따뜻해 곤란한 버릇 하나쯤은 있을 수 있지, 하고 넘어가게 됐다.
또다시 수마가 쏟아졌다. 이대로 하루가 끝나도 전혀 허무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두영의 가랑이 사이에 제 허벅지를 쑤셔 넣고 담쟁이덩굴처럼 몸을 얽었다. 만약 눈을 떴을 때 이번에도 녀석이 없다면 오체분시해 버릴 생각이었다. 호박색 눈은 따로 보관해 볕이 잘 드는 곳에 배치할 것이다.
나른한 숨을 내쉰 그는 아주 찰나 피부를 찌르는 전자파를 느꼈다. 어금니를 딱딱 부딪치며 휴대폰을 들었다. 이다민의 전화였다. 화면을 넘겨 그동안 쌓인 메시지와 부재중 전화를 확인했다. 각자 몇백 통씩 쌓였지만, 8할은 이다민의 지분이었다.
계속 무시하면 받을 때까지 할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이 꿀 같은 휴식이 깨질 수 있었다. 오늘 계획은 허두영이 일어나면 한 끼라도 함께 먹는 것이다. 그 누구도 자신의 계획을 방해할 수 없었다.
그는 철두철미한 계획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기로 했다. 노곤한 몸을 겨우 일으키고 두영의 머리를 살짝 들어 베개를 넣어 주었다.
“잘 자.”
나른한 목소리를 남기고 그는 계단을 내려가 전화를 받았다.
“응.”
―이제야 전화를 받으시네. 야! 그날 유연서랑 같이 나간 거 아녔어?
“…걔가 누군데?”
정말 누구인지 몰랐지만, 기억해 내려고 하지도 않았다. 홍승표는 바닥에 떨어진 카드 지갑과 돈을 주워 홈바에 올려 두었다. 문득 소파 아래에 무언가가 반짝였다. 그는 소파로 걸어가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반짝이는 것을 손에 쥐었다. 허두영의 주민등록증이었다.
창백하고 연한 인상의 소년이 카메라 렌즈를 서툴게 보고 있었다. 등이 구부정한 걸 보니 무인 즉석 사진기에서 찍은 모양이었다.
―이제 약도 안 하는 놈이 벌써 기억력 후달리면 병원부터 좀 가 봐라. 그날 클럽에서, 어… 그러니까, 너 여자 친구 생겼냐고 혜민 누나가 물어본 날 너한테 말 걸은 여자애 있었잖아.
민증으로 턱 아래를 긁적이던 홍승표는 미간을 살짝 구겼다. 방대한 설명에도 안 떠오르는 것이라면 굳이 기억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으! 있잖아! 그래! 단발머리! 아오 썅! 내가 왜 이걸 설명하고 있어야 해? 니가 대리기사로 데려다줬다며!
“아, 맞아. 그 대리기사가 운전을 잘했어.”
대리기사를 떠올리니 유연서의 존재도 자연스럽게 기억났다. 근데 그게 인제 와서 뭐 어쨌다고 3일 동안 받지도 않는 전화를 받을 때까지 꼬박꼬박 걸었는지, 벌써 머리가 지끈거렸다.
―야 유연서 개빡쳤어. 내가 니 몫까지 등짝 몇 대나 맞은 줄 알아?
“아 그래?”
―오는 물고기 가리지도 않으면서 왜 안 하던 짓이나 하고 다니냐?
“아 그래?”
―시발놈이. 너 대충 듣고 아 그래만 할래?
“아 그래?”
전화기 너머 이다민이 답답해 미치겠다는 듯이 큰 소리를 질렀다. 홍승표는 귀에서 휴대폰을 멀리 떼어 내고 계단 쪽을 보았다. 약쟁이의 악다구니가 허두영에게 닿았을지도 몰랐다.
그는 두영이 입고 온 코트를 어깨에 걸치고 테라스로 향했다. 민증은 코트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저녁 공기가 단번에 느껴졌다. 목깃까지 단단히 여미고 코를 파묻었다. 허두영의 체취가 맡아져 기분이 몽롱해졌다.
“그래서 왜 전화했는데?”
―으흐흐. 이 형님이 다 들었다. 니가 어떤 남자애 데리고 간 거. 여자 친구가 아니라 남자 친구인 거 왜 안 알려 줬냐?
“우리가 그런 것까지 설명할 사이는 아니잖아?”
―웃기지 마. 새파랗게 어릴 때부터 나랑 파트너 교환하던 놈이 갑자기 이렇게 나오면 당연히 궁금하지. 게다가 너 남자랑 안 하잖아? 이렇게 또 나보다 앞서가냐. 으으 분하다!
“분하면 너도 하든지.”
―누구랑? 니 애인이랑?
“…….”
홍승표는 녹아내린 서쪽 노을의 발자취를 눈으로 되짚으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까만 눈에 시커먼 응어리가 똬리를 틀었다. 그의 비상한 두뇌가 일어나지도 않은 이미지를 고화질로 출력했다. 깊숙한 곳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불쾌감에 굳은 얼굴이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니가 집에 섹파 데려간 건 처음이지 않냐? 니 그 개코 때문에 다른 사람 집에 가는 것도 싫어서 맨날 호텔만 갔던 놈이 대체 무슨 일이야? 재밌는 건 형님이랑 나눠야지.
“…좀 생각해 보고.”
이다민은 고상한 척하는 재벌 집 사생아로 태어나 자기 아비에게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는 모범생이었다. 홍승표보다 네 살 많았으나, 성격이 무르고 나약했다.
이다민을 처음 만난 곳은 뉴욕에서 열린 사교 파티장이었다. 홍승표는 그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하는 이다민이 재밌어 보여 말 한마디를 걸었을 뿐이었다. 그날 이후로 이다민은 홍승표를 일방적으로 따르기 시작했다. 인원 보충으로 끼워 준 집단 섹스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이다민은 첫 흡연도, 첫 섹스도, 첫 마약도 전부 홍승표에게 배웠다. 다만 홍승표는 단 한 번도 이다민에게 그런 것들을 직접 권한 적은 없었다. 그저 답답해 보이는 인생을 조금 긁어 준 것뿐이었다. 그렇게 이다민은 홍승표를 따라다니며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은 스펀지처럼 쪽쪽 빨아 먹었다.
점점 이성과 본능의 경계선이 흐릿해진 이다민은 가족이 있는 집에서 난교를 벌이다가 부친에게 죽기 직전까지 처맞았다. 식물인간이 될 뻔한 이다민은 그 일을 계기로 각성했고, 어쩌다 보니 홍승표와 파트너까지 교환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래서 홍승표는 이다민이 저런 말을 하는 게 이해됐지만, 납득이 되는 건 아니었다. 지금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파트너 교환이 불쾌하게 느껴졌다.
허두영이 다른 남자, 아니 여자라도 그 아래 깔려 헐떡이고 있으면 퓨즈가 끊길 것 같았다. 그런 상상만으로 구역질이 올라왔다. 저 혼자 가지고 놀고 싶었고, 그의 존재를 저만 알고 싶었다.
―그리고 그날 왜 그랬냐? 내가 뒤처리하느라 얼마나 피곤했는지 알아? 엄마한테 존나 혼났어. 근데 그 엉망으로 만든 미친 새끼가 무슨 생각으로 거길 또 찾아갔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야 이 미친 새끼야, 지 발로 다시 거길 찾아가는 건 뭔데? 웨이터가 오늘 새벽에 너 온 거 봤다니까 구라 칠 생각 마라.
“뭐 좀 찾느라.”
―뭐 놓고 갔었어? 없었던 것 같은데.
“있어. 옷이랑 신발이랑 지갑.”
―…너 발가벗고 집에 갔냐?
입술을 휜 그는 통보 없이 전화를 끊었다. 집에 들어와 코트를 벗고 소파에 던졌다. 홈바를 지나칠 때 무언가 거슬렸지만,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다시 복층으로 올라가 허두영을 죽부인처럼 껴안고 잘 생각에 기분이 몽글몽글해졌다.
그러나 침대 위에 허두영은 없었다. 문득 올라오기 전에 느꼈던 의문이 무엇이었는지 알아차렸다. 그는 1층 홈바 위를 살폈다. 지갑의 위치가 틀어져 있었다. 분명 자신은 이 위치로 놓지 않았다.
홍승표는 카드 지갑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하―. 시발 허두영.”
지갑과 돈은 그대로 두고 본인의 물건만 쏙 빼 갔다.
역시 허두영은 쉽지 않았다.
이 자식은 선수다. 잠재적 꾼.
두영은 거칠게 호흡하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6시밖에 안 됐는데 칠흑같이 깜깜했다. 간간이 켜진 주황빛 가로등을 빠르게 지나쳤다. 한시도 쉬지 않고 달렸더니 겨우 늦지 않게 펜스테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숨도 고르지 못하고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다 벽에 기대고 서서 후들후들 떨리는 허벅지를 부여잡았다. 지각할 것 같아서 무작정 뛰었더니, 그 후폭풍이 이제야 몰아치는 듯했다. 엉덩이 사이의 말 못 할 쓰라림도 느껴졌다. 굳이 직접 만져 보지 않아도 부어 있을 게 뻔했다. 항상 그랬으니까.
몸은 힘들지만, 다행히 정신은 개운했다. 오랜만에 잠을 푹 자서 그런 듯했다. 그래도 그렇지, 잠깐 눈만 붙이고 있겠다는 걸 이렇게까지 꿀잠을 잘 줄은 전혀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홍승표의 체온이고 뭐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왔을 것이다.
두영은 뒷맛이 영 시원치 않았다. 그의 집에서 도망친 게 이번으로 두 번째이기 때문이다. 말하고 나올 수도 있었지만 홍승표는 통화 중이었고, 만약 말을 했더라도 그가 안 보내 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나왔는데 후회만 마일리지 적립처럼 쌓여 갔다.
홍승표는 카페 위치도 알고 있었고, 우유 정기 고객이라 언젠간 보게 될 사람이었다. 진짜 자신은 왜 이렇게 멍청해서 몸이 고생하는지 한숨만 나왔다.
움직일 때마다 바지 주머니에 든 물건이 제 허벅지를 쓸었다. 지갑에서 급하게 빼 온 것들이었다. 장 볼 목록을 적은 종이 쪼가리와 동전 몇 개가 전부였다. 이상하게 민증은 없었다. 계속 찾아보려다가 홍승표에게 도망치는 걸 들킬까 봐 그냥 서둘러 나왔다.
불현듯 지갑을 주던 홍승표의 눈이 떠올랐다. 마치 칭찬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눈을 반짝였었다.
“으…….”
두영은 몸서리쳤다.
“아이는 무슨.”
아이가 그렇게 흉측하고, 징그럽고, 검붉은 것을 달고 있을 리 없었다. 두영은 타인의 것을 볼 기회가 많이 없어서 남성 평균 사이즈가 어느 정도인지 몰랐다.
목욕탕도 한 번도 안 가 봤기에 더욱 비교 대상이 없었다. 과거를 돌이켜 보면 몇 개 나오겠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비교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문득 두영은 어중간하게 시선을 내려 제 가랑이 사이를 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퍼뜩 쳐들고 뺨을 때렸다. 비교할 대상이 잘못됐다. 홍승표의 것은 두 손을 사용해서 잡아도 기둥이 남았는데, 그에 비해 제 것은…….
“우…….”
두영이 심통이 난 아이처럼 주둥이를 내밀었다. 자신의 얄팍한 자존심이 홍승표의 남성성에 짓뭉개졌다. 두영은 시기를 놓쳐 포경수술을 안 했다. 늘 신경 써서 씻기 때문에 냄새가 나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발기 전 성기가 통통한 어묵 꼬치 같을 뿐이었다.
“내 건 너무 대롱대롱해. 홍승표 건 출렁출렁한데…….”
무의식적으로 뱉고 본 말에 두영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다시,
“출렁…….”
이라고 작게 읊조렸다. 멍하니 탈의실 흰 벽을 노려보던 두영은 별안간 이마로 벽을 박았다.
“미친, 출렁이라니.”
한 번 의식하자 ‘출렁’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나지 않았다. 두영은 ‘출렁’이 떠오를 때마다 벽에 머리를 박아 단기 기억상실을 노렸지만, 아프기만 할 뿐 효과는 미미했다.
탈의실 구석에 쭈그려 앉은 두영은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그만 생각하라고오.”
생각을 만질 수 있다면 당장 밧줄로 꽁꽁 묶어 바다에 내던지고 싶었다. 출렁이는 바다에 말이다.
두영은 또다시 벽에 머리를 박았다. 출렁거리는 이미지가 눈앞에 아른거려 미치겠다. 그만 생각하라고 염불을 외워도 오히려 바이러스처럼 증식했다.
먹을 거칠게 휘갈겨 그린 듯한 음모와 탄탄한 복근. 살짝 그을린 피부색과 짙은 색의 유두. 넓은 가슴과 좌우로 떡 벌어진 어깨. 침을 삼킬 때마다 크게 들썩이는 목울대. 그리고 선이 뚜렷한 입술, 매끄러운 피부, 깊은 눈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두영아, 안 나―.”
“으악!”
“…뭐야? 왜 놀란… 어? 두영, 어디 아파? 지금 네 얼굴 엄청 빨개.”
문틈으로 얼굴만 빼꼼 내민 채 있던 유재민이 아예 탈의실 안쪽으로 들어왔다. 두영은 저도 모르게 사물함 문 뒤로 숨어 버렸다. 그에 유재민이 다가오다 말고 주춤했다.
“진짜 어디 아픈 거야?”
“아, 아닛효……!”
두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말을 더듬는 데다가 음 이탈까지. 아주 쌍으로 협업을 이뤘다. 이건 그냥 무슨 일 있으니 의심해 달라는 말투였다.
유재민이 가자미눈을 하고 두영을 응시했다.
“뭐야? 진짜 안 아픈 거 맞아?”
“네, 넵. 하나도 안 아파요. 진짜의 진짜.”
두영은 얼굴 근육을 딱딱하게 굳히고 무표정을 유지했다. 계속 의심하던 유재민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어울리지도 않게 거짓말을 하며 세상 똥꼬 발랄하게 앞치마를 매는 두영이 안쓰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안 아프면 다행이고. 오늘 원두 새로 들였는데 아침에 정리 다 못 했어. 추스르고 나오면 그것부터 도와줄래?”
“네!”
“…아무래도 진짜 아픈 거 같은데.”
“특히 머리가.” 유재민이 마지막 말을 중얼거리며 탈의실을 나섰다.
혼자 남은 두영은 사물함 문을 이마로 밀어 닫고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얼굴에 몰린 열이라도 식히고 나가야 할 것 같았다.
유재민과 짧은 대화를 하는 동안에도 머릿속은 홍승표로 가득했다. 몽글몽글하지도 않은데 왜 자꾸 몽글몽글하게 떠오르는지. 하필이면 그 생각이 흥분에 젖은 홍승표라 유재민의 눈을 똑바로 볼 수도 없었다.
자신에게 크나큰 배신감을 느낀 두영은 탈의실에서 나와서도 여전히 유재민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하필 오늘따라 손님도 많았다. 남자 손님이 올 때마다 자꾸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 난처했다.
“아, 진짜 왜 이러지…….”
괜히 혼잣말만 늘어 머쓱하게 주변을 살피는 일이 많아졌다. 홍조가 올랐을 게 분명한 뺨을 손등으로 쓸었다. 그러다 얼음을 입에 물고 오물거렸다. 주문받는 발음이 엉망이지만, 워낙 머릿속이 어마어마하여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두영아.”
“……!”
이름만 불렸을 뿐인데 두영이 크게 움찔했다. 눈을 가늘게 뜬 유재민이 갑자기 음흉하게 웃더니 팔꿈치로 두영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너 야한 생각하지?”
“네?!”
두영은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봤다. 동여맨 앞치마 앞섶은 판판했다.
“뭐야, 허두영? 거기 왜 보는데? 진짜 야한 생각 했어?”
“아,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냐. 너 방금 거기 섰는지 안 섰는지 확인…….”
“아아, 사장니임.”
두영이 간절하게 바라보자 유재민은 샐쭉 웃고는 큼지막한 토마토 세 덩어리를 블렌더에 갈기 시작했다. 그리고 벤티 머그잔에 가득 담아 두영에게 건넸다. 의아하게 토마토 주스를 받아 든 두영은 의심의 눈초리로 유재민을 보았다.
“마셔.”
“…감사합니다.”
“남자 정력에 좋대.”
“푸읍……!”
간신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 참변을 막을 수 있었다. 유재민은 당황한 두영을 대신해 주문받았다. 하필 타이밍도 구리게 ‘이 카페에서 잘나가는 게 뭐예요?’라고 물어보는 손님이었다. 이날 카페는 그 손님을 마지막으로 일찍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