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 삼각형의 일상 (9/20)

9. 삼각형의 일상

새벽 일찍 눈을 뜬 두영은 이불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새벽 배달이 오 일 근무에서 삼 일 근무로 줄었기 때문이다. 우유만 따로 시키는 정기 고객이 줄어든 탓에 대기업 새벽 배송과 협력하기로 했다. 개인 인력이 줄어드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두영은 강순자의 배려로 오래 일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일이 줄어든 사실이 딱히 서운하지 않았지만, 새로운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조금 무거울 뿐이었다.

세상의 변화는 너무 빨랐다. 따라잡기 급급했고 혹여나 잠시 멈춰 서서 숨이라도 고르면, 어느새 저만 여기 두고 세상은 저 앞에 가 있었다. 따라잡을 수 없다는 사실에 미칠 듯한 고립감을 느꼈다. 그건 망망대해에 빠진 미아와 다름없었다.

몸이 전기장판 아래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두영은 살짝 뒤척이다가 옆으로 돌아누워 멍을 때렸다. 눈동자만 움직여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눈 한 번 감았다가 뜨면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숨이 막힐 때쯤 두영은 느릿느릿 일어나 구부린 등을 하고 이불의 보풀을 떼어 냈다. 그러다 또다시 멍한 시선으로 방 어딘가를 응시했다.

한참 만에 이불에서 벗어난 두영은 전부터 눈여겨보고 있던 공장에 전화하여 면접 일정을 물었다. 면접은 매일 있는 모양이었다. 마침 이른 시간에 전화해서 당일 면접도 가능했다.

특근 수당이 있는 야간으로 갈 생각이다. 셔틀버스도 있어서 교통비를 절약할 수 있었다. 정거장을 확인했더니 달동네 바로 아래였다.

오목조목 따졌을 때 졸업한 후 첫 직장으로 안성맞춤이었다. 문제는 자신의 낯가림과 사회성이었다. 과연 낯선 곳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이렇게 상상하는 것만으로 피가 빠르게 식고 등에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데 솔직히 막막했다.

입술을 뜯던 두영은 벌러덩 드러누워 곰팡이 핀 천장을 보았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니 죄책감이 들었다. 갑자기 앞날도 불안해졌다. 우울한 생각이 끝도 없이 번식해 머리를 괴롭혔다.

천장을 수놓은 곰팡이가 제게 손을 뻗쳤다. 퀴퀴한 냄새는 비릿하고 축축했다. 얼굴 위로 뚝뚝 떨어지는 건 곰팡이의 침이었다. 두영은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손에는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았다.

일어나자고 생각했지만,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도 버거웠다. 몸이 축 늘어지고 무거운 공기가 저를 짓눌렀다.

그냥 죽어도 되지 않을까? 이 세상에 대해 알고 싶은 것도 없는데. 그럼 괜히 사서 고생하는 게 아닐까? 내가 뭐 때문에 사는 거더라?

“…할머니, 보고 싶다.”

더 말하고 싶었지만, 떠오르는 사람은 할머니뿐이었다. 그때 또 다른 잔상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두영은 눈을 감았다. 왜 이럴 때 홍승표가 떠오르는 건지, 조금 어이가 없었다.

두영은 입을 살짝 벌렸다가 다물었다. 한숨을 쉬는 것도 기력이 있어야 가능했다. 벌써 벅찬 오늘 하루는 이대로 눈을 감으면 끝이 나 있길 빌었다.

부스스 눈을 뜬 두영은 시간을 확인했다. 아쉽게도 겨우 10분밖에 안 지났다. 깔끔하게 포기한 두영은 홀짝 일어나 세안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밖으로 나오자 날카로운 바람이 뺨을 후려쳤다. 하필 면접장이 도심 근처라 앞길이 막막했다. 목도리로 얼굴을 꽁꽁 싸맨 두영은 괜찮다고 자신을 달래며 발을 내디뎠다.

도착한 버스 정류장은 한산했다. 왠지 하루가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지만, 그건 단순한 희망 사항일 뿐이다. 사람이 많은 시내버스는 차마 올라타지 못하고 그냥 보내 버렸다. 연달아 오는 두 번째 버스도 그냥 보내 버리고, 세 번째 버스에 겨우 올라탔다.

그렇게 안심하기도 잠시, 버스에 타자마자 식은땀이 미친 듯이 흐르기 시작했다. 버스 안의 사람들이 전부 자신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시선은 비린내가 나는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를 흉보고, 비웃으며 손가락질하는 듯했다.

가끔가다 제 상상이 실제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숨이 가빠지고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오로지 시선을 정면에 둬야만 했다. 무심코 고개를 틀었다가 저를 보는 시선과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그들의 눈동자에 비친 그 시절의 제 모습에 토를 할지도 모르리라.

봉을 잡은 두영은 식은땀 때문에 자꾸 손이 미끄러져 손가락 마디가 아릴 정도로 봉을 움켜잡았다. 숨이 가빠지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간신히 두 다리로 버티고 서서 최악의 상황을 면하는 것뿐이었다.

평범한 척을 하자고 마음을 먹었으나, 평범한 게 뭔지 혼란스러워졌다. 순간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변했다. 하차 문 통로에 어중간하게 서 있으니 사람들이 인상을 쓰며 두영을 밀치고 지나갔다. 자신이 통로를 막고 서 있는 걸 알고 있었지만,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바닥만 보고 있던 두영은 슬쩍 시선을 올렸다. 우연히 눈이 마주친 사람이 자신을 한심한 눈초리로 보는 듯했다. 결국 정지 버튼을 누르지도 못하고 내려야 할 정거장을 그대로 지나치고 말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처했다. 집에서 미리 보고 온 약도는 면접장이 전부였다. 대책 없는 자신을 죽이고 싶었다.

자책하는 동안 저를 실은 버스는 외곽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내릴지 말지 고민하던 두영은 눈 딱 감고 내렸다. 앞에는 산이 있고, 뒤에는 강이 있는 어느 읍이었다. 이런 곳에서 객사할 걸 생각하자 호흡이 거칠어졌다.

두영은 반대편 정류장을 향해 걸어갔다. 무턱대고 차도를 건너다가 차에 치일 뻔했다. 운전석 창문이 열리고 육두문자가 두영의 뒤통수를 푹푹 쑤셨다. 두영은 제대로 된 사과도 하지 못하고 정류장을 향해 정신없이 걸어갔다.

버스를 한참 기다렸지만,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잘못 선 게 아닌지 몇 번이나 확인하고 의심했다. 저 멀리 천천히 달려오는 버스 한 대가 보였다. 두영은 번호판도 제대로 보지 않고 냉큼 올라탔다. 다행히 버스는 외각을 벗어나 달동네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린 두영은 집으로 돌아갔다. 눈이 오면 미끄럽고, 여름은 더워서 싫었던 달동네가 오늘만큼은 너무나 그리웠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여기였다.

“흐웁… 크흡, 흐으…….”

내내 참았던 울음이 목을 비집고 터졌다. 저가 못나서 그런 건데 서럽게 눈물이 났다. 안 넘어가는 침을 억지로 삼키고 울음을 참았지만, 턱이 바들바들 떨리면서 더 끅끅거렸다. 손등과 손바닥으로 눈두덩이 뭉개지도록 닦고 또 닦았다. 그새 축축해진 손이 찬 바람에 얼어붙었다.

누구한테 말하기도 창피한 제 존재가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 왜 이렇게 사는지 가슴이 먹먹했다. 평범한 사람처럼 다니지 못했고, 평범하게 살지도 못했다. 그런 자신이 창피해서 어디에 티 내지도 못하고 죽이며 살았다. 자신은 하자 덩어리다. 허두영은 불량품이다.

“왜 울어?”

땅만 보고 걷던 두영은 멈칫했다. 집 앞에 다 와서 듣게 된 목소리는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의 것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홍승표가 낡은 벽에 기대고 서 있었다. 그가 여기를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마땅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또 미행당한 건가? 이번에는 대체 왜…….

“넌 볼 때마다 울고 있네.”

두영은 어깨랑 가슴을 들썩이며 어린아이처럼 숨을 골랐다. 길바닥에서 우는 게 궁상떠는 걸로 보였을까 봐 목도리로 허겁지겁 눈물, 콧물을 닦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해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불현듯 홍승표의 집에서 도망친 게 떠올랐다. 심지어 그의 호의를 두고 온 채였다. 이번에는 진짜 저 커다란 손에 처맞을지도 몰랐다. 그러려고 손수 집까지 온 게 분명했다.

두영은 눈치를 살살 보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얼어붙은 땅을 박차자 발바닥이 얼얼했다. 물속을 달리는 것처럼 다리가 시원하게 뻗어 나가지 않았다. 뒤에서 소리도 없이 따라붙는 기척에 등골이 오싹했다. 목덜미가 붙잡히는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으으!”

“어딜.”

“하짓, 으으! 하지 마!”

“아무 짓도 안 해. 가만히 있어. 좀!”

두영은 허리에 감긴 홍승표의 팔을 잡아 뜯었다. 단단한 올가미는 몸부림이 거세질수록 더 강하게 조여 왔다.

“안 건드려.”

“거, 거짓말!”

“하아…….”

홍승표가 두영을 뒤에서 껴안듯이 달랑 들고 집 앞으로 향했다. 얇은 샷시문이 바람에 덜컹덜컹 흔들렸다.

“열어.”

“…….”

“문 떼어 버리기 전에 열어.”

두영은 입술을 앙다물고 문을 노려봤다. 문 안 열어 줄 거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열어 주지 않을 거다.

그 순간 생리적인 불쾌감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가 자신의 몸을 더듬고 있었다. 두영은 두피까지 소름이 쫙 돋았다.

홍승표는 한 팔로 두영의 허리를 감싸고, 다른 한 팔로는 두영의 옷에 달린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마지막으로 바지 주머니에 깊숙이 손을 집어넣자 두영이 새파래진 얼굴로 소리쳤다.

“어, 없어! 거기 없어!”

“그럼 어디 있는데.”

귓가에 바짝 입을 붙이고 말하자 두영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두영은 무심결에 우편함 쪽을 쳐다보았다. 냉큼 눈을 깔았지만, 덜컹거리는 소리에 다시 시선이 올라갔다. 홍승표가 우편함을 뒤지고 있었다.

“찾았다.”

원하는 것을 찾은 홍승표가 비열한 깡패처럼 웃었다. 두영은 재빨리 열쇠 구멍을 손으로 막았다. 열쇠를 꽂지 못하게 기를 쓰자 홍승표가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알았어, 알았어, 안 열게. 자 열쇠 받아.“

열쇠를 돌려준 홍승표는 깨지기 쉬운 물건을 다루듯 두영을 조심히 내려 주었다. 땅에 발이 닿은 두영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곧바로 두영을 부축한 홍승표가 진한 눈썹을 구겼다.

“넌 다리에 힘이 없어? 뛰는 폼도 엉성하고……. 아무튼 도망치지 마.”

문만 노려보고 서 있던 두영은 엉망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훌쩍대는 소리가 커서 들이켜는 걸 멈췄더니 맑은 콧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두영은 뒤에 서 있는 홍승표를 힐끗힐끗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코를 훌쩍였다. 다행히도 그는 이런 자신을 더럽거나 우습게 보는 것 같지 않았다. 안심한 두영은 조금 긴장을 풀고 대놓고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두영을 가만히 지켜보던 홍승표는 피식 웃었다. 한쪽 어깨를 벽에 기대고 서서 담배를 물었다. 두영은 그가 왜 가지 않고 저러고 있는지 다시 불안해졌다.

바람에 휘날리는 연기가 두영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홍승표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말했다.

“좀 이상한데. 눈을 너무 안 마주쳐.”

“…….”

“역시 어제 한 짓이 찔려서 그런 건가?”

두영은 불안한 모습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홍승표는 담배를 들지 않은 손으로 두영의 자해를 제지했다.

“사람을 따먹고 도망치는 경우가 어디 있어?”

얼토당토아니한 구라에 두영은 무심코 홍승표에게 시선을 주었다. 시선을 마주한 그가 옅게 눈웃음을 지었다. 그제야 두영은 홍승표의 장난이었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외투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카드 지갑이었다. 어두운 집에서 봤을 땐 검은색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명도 낮은 녹색이었다.

“개도 공 물어 오면 칭찬받던데, 나는 내가 깽판 친 곳에 다시 가서 네 물건 찾아왔어. 나한테 뭐 할 말 없어?”

카드 지갑을 망연히 보고 있던 두영은 느린 동작으로 고개를 들었다. 홍승표는 고개를 꺾고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제 앞으로 드리워진 그림자는 구름 뒤에 숨은 태양의 흔적 같았다.

순간적으로 압도된 그의 기백에 두영은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홍승표는 두영의 입술을 빤히 보며 인내심 있게 기다려 주었다. 두영은 그의 인내에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고마, 워…….”

홍승표의 얼굴에 진한 만족감이 스쳤다. 어쩐지 두영은 마주 보고 있기 민망해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때 제 주머니가 묵직해졌다. 곁눈으로 확인하자 홍승표가 제멋대로 두영의 외투 주머니에 지갑을 넣은 것이었다.

“잃어버리지 마.”

“…응.”

두영은 멋쩍게 손등으로 턱을 쓸었다.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가 적응되지 않았다. 항상 홍승표는 이런 식이다. 제멋대로 찾아와 엉망진창 날뛰었고 다른 날은 강아지풀처럼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자신은 그런 홍승표에게 정신없이 휘둘려야만 했다.

홍승표가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집 안 들어가?”

두영은 열쇠를 조몰락거리며 망설였다. 문틈을 벌리면 홍승표가 쳐들어올 것 같았다. 두영은 열쇠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몸을 돌렸다. 한 발짝 떼자마자 솥뚜껑만 한 손이 두영의 팔뚝을 붙잡았다. 크게 움찔댔더니 홍승표의 한쪽 눈썹이 까딱였다.

“어디 가?”

두영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 간다고 해야 하지. 마땅히 갈 곳이 없는데. 학교, 일, 집 말고 떠오르는 데가 없었다.

정말… 아무 데도 없었다.

조금 이르지만 카페라도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두영은 우물쭈물 대답했다.

“카, 카페…….”

“일찍 가네?”

“응.”

두영은 그에게 붙잡힌 팔을 꼼지락거리며 시선을 떨구었다. 바닥에 버려진 담배꽁초에 시선을 고정하고 침묵을 달랬다. 불씨가 아직 살아 있는 담배는 잿빛 연기를 은은히 흩날렸다.

홍승표는 두영의 시선이 닿은 곳을 같이 보고 있다가 천천히 입술을 벌렸다. 담배 연기 같은 입김이 겨울바람에 매섭게 사그라졌다.

“그냥 나랑 안 놀래?”

두영은 눈을 끔뻑였다. 그가 말하는 ‘논다’는 단순히 또래 친구가 노는 장난이 아닐 것이다. 피시방에 간다거나, 저녁에 라면을 끓여 먹는 것 말이다.

그때 그의 손이 두영의 턱 아래를 간지럽혔다. 두영은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쳐내고 당황했다. 홍승표는 허공에 쓸쓸히 떠 있는 자신의 손을 보다가, 자연스럽게 이마를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러고는 아이홀이 짙게 생길 만큼 눈을 힘주어 떴다.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는데, 방금은 정말 놀자는 거야.”

오늘따라 홍승표는 이상했다. 분명 그의 손을 벌레처럼 쳐냈는데 기분 나빠하지 않아 했다.

“뭐 좋아해?”

오히려 제게 듣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듯, 따로 원하는 게 있다는 듯이 대화를 이어 가려고 했다.

“내 말 듣고 있어?”

“어, 어…?”

두영이 느지막하게 대답했다. 홍승표는 별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재차 물었다.

“뭐 좋아하냐고.”

두영은 멍한 얼굴로 생각했지만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애초에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깊게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홍승표는 약지 끝으로 눈썹을 긁적였다.

“없어? 음식이나, 가고 싶은 장소라든지, 영화 장르 같은 거 말이야. 아, 나 하나 아는 거 있다. 너 당근 싫어하잖아, 맞지?”

순간 두영은 눈썹을 살포시 구겼다.

“덜 익은…….”

“응?”

“덜 익은 당근이… 싫은 거야.”

“아아.”

홍승표가 경쾌한 추임새를 냈다. 그러고는 입술 양 끝을 길쭉하게 늘렸다.

“알겠어, 기억할게. 그럼 좋아하는 건?”

두영은 홍승표가 원하는 대답이 있을까 봐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꾸 그의 눈치를 보게 됐고, 틀렸을 경우 홍승표의 반응까지 지레 예상하게 됐다. 두영은 어깨 아래로 늘어뜨린 목도리를 손톱으로 갉작였다. 올이 풀리는 것도 모르고 계속해서 헤집다가 한참 만에 대답했다.

“…몰라.”

“왜?”

왜냐니. 두영은 입술을 깨물고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홍승표는 두영을 빤히 내려다보며 외투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게, 모를 수도 있지. 나도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

겨울의 찬기가 느껴지는 듯한 목소리에 두영은 무심결에 고개를 들었다. 홍승표는 불을 뿜어내는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위태롭게 사그라질 느낌이었다. 가득 찬 헛간. 그러나 주인 잃은 물건으로만 가득한 그런 느낌.

“그럼 같이 찾으러 다닐래?”

“어?”

“좋아하는 거.”

좋아하는 걸 찾는다니. 어쩐지 만화 주인공이 모험을 떠나자고 하는 것 같았다.

“싫어?”

한 걸음 다가온 홍승표가 흐트러진 두영의 목도리를 똑바로 여며 주었다. 직접적으로 살이 닿지 않았지만, 가까이 붙은 것만으로 홍승표의 따뜻한 체온이 전해졌다.

목도리에 코를 파묻은 두영은 입술을 오물거렸다. 예전에 홍승표가 그렇게 당하면서 왜 따라가냐고 다그친 적이 있었다. 맞는 말이었다. 너무너무 맞는 말이라 두영은 이따금 명치 아래가 따끔할 때가 있었다.

지금 홍승표를 따라가면 이번에도 자신이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 짓을 반복하는 것일까? 홍승표는 거짓말을 워낙 잘하니까.

두영은 빨갛게 물든 손을 겉옷에 문지르며 대답을 골랐다. 그가 건넨 초대장의 답변이었다.

“미안…….”

클럽에서 있었던 일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괜한 짓을 해서 당하지 않아도 될 일을 너무 많이 경험했다. 더 이상 그런 일은 그만 당하고 싶었다.

그러고 보면 홍승표와 한 일은 그렇게 끔찍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도리어 출렁이는 생각만…….

“윽, 미안…….”

순간적으로 떠오른 이미지에 두영은 냅다 사과를 갈겼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날이 지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다. 그러나 한 번 떠올리자 순식간에 얼굴에 열이 몰렸다. 머리도 나쁘면서 왜 이런 건 잘만 기억하는 건지. 살짝 억울해지기까지 했다.

원래도 사람 눈을 잘 못 쳐다봤지만, 지금은 다른 의미로 홍승표를 볼 수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인 두영은 홍승표의 손이 제게 다가오는 걸 발견하고 흠칫 뒤로 물러났다.

너무 노골적으로 피한 것 같아 뒤늦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 홍승표가 사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두영은 뭔가 큰 실수를 한 것 같아 불안했다.

뒷덜미를 쓸던 홍승표가 두영을 지나쳐 달동네를 내려갔다. 그의 걸음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빨랐다. 두영은 그새 시야에서 사라진 그의 흔적을 눈으로 더듬다가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싫어서 피한 게 아닌데. 무슨 생각하는지 들킬까 봐 피한 건데.

여전히 홍승표가 무서웠으나 예전만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다시 내려가 그를 붙잡기에는 자신에게 그럴 만한 명분이 없었다. 만약 붙잡는다 해도 그 후엔 어떻게 할지 아무것도 안 떠올랐다.

쭈그려 앉은 자세 때문에 외투 주머니에 있는 것이 배를 찔렀다. 두영은 저를 공격하는 것을 밖으로 꺼냈다.

짙은 녹색의 지갑은 어쩐지 보고만 있어도 따뜻했다. 두영은 차갑게 굽은 손으로 지갑을 열었다. 가장 먼저 자신의 민증이 보였다. 그제야 홍승표가 여기를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알아차렸다.

문득 자신이 왜 길바닥에서 궁상맞게 앉아 있는지 생각했다. 면접 보러 갔다가 미아처럼 길만 헤매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럽고 막막해서 세상과 동떨어진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좀 괜찮아졌다.

두영은 손안에 초록을 세게 움켜쥐었다. 시선은 내리막길 끝자락 어딘가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

창밖을 내다보는 고갯짓은 이미 습관이 된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손님이 없어서 더 그런 것일지 몰랐다.

두영은 좀 자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려다가, 방향을 살짝 틀어 이마 뒤로 시원하게 쓸어 넘겼다. 그리고 유리창을 보았다. 어느덧 해가 져서 유리창에 제 모습이 비쳤다. 머리카락이 정전기 폭탄을 맞은 듯 들쑥날쑥했다.

입으로 쩝 소리를 낸 두영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빗었다. 역시 사람은 평소 안 하던 짓을 갑자기 하면 안 된다. 부스스해진 머리카락이 금세 단정히 가라앉았다.

홍승표가 할 때는 멋져 보였는데……. 인상이 달라서 그런가?

홍승표의 숯을 문지른 듯한 모발과 뚜렷한 눈썹에 비해 자신은 모든 게 다 흐릿했다. 늙은 호박색의 눈동자. 누구는 고양이 눈깔이라고 불렀고, 누구는 부엉이 눈깔이라고 했다.

이것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심한 놀림을 당했다. 똑바로 바라보면 그것대로 욕을 처먹었고, 안 보면 안 본다고 머리통을 처맞았다.

두영은 불현듯 든 울적한 생각을 고개를 내저으며 떨쳐 냈다. 이미 지나간 과거였다. 이제 학교도 졸업이었고, 절 괴롭히는 기억으로부터 차츰차츰 멀어지는 연습을 해야 했다.

카페는 방금 내린 커피 향으로 가득했다. 커피를 딱히 좋아하지 않지만 냄새는 좋아했다.

두영은 제 앞에 있는 머그잔에 시선을 두었다. 유재민이 블렌더로 잔뜩 갈아서 준 토마토 주스였다. 정력이니 뭐니 했던 그날 이후부터 유재민은 시시때때로 토마토 주스를 갈아서 두영에게 주고 있다. 그래서 잊을 만하면 그날 일이 떠올랐다.

또다시 창밖을 내다본 두영은 두껍게 겉옷을 껴입은 사람들을 구경했다. 바람이 불지 않는 사무치게 추운 날씨였다. 가게 안쪽에는 아직 치우지 않은 트리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유재민이 수입품이라며 들여온 나무였다. 가게 층고보다 높은 트리는 머리 부분이 직각으로 꺾여 있었다.

그 또한 로망이라고 말하던 유재민은 아직 크리스마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중이었다. 원래 크리스마스는 그런 것이라며 넉살 좋게 웃었지만, 두영이 보기에는 그냥 치우기 귀찮아하는 것 같았다.

오늘따라 하루가 길었다. 한가하게 앉아만 있으려니 자꾸 바깥을 힐끗거리게 됐다. 유재민이 선곡한 플레이 리스트가 카페 안에 은은하게 퍼졌다. 두영은 속살거리는 노랫말을 들으며 등을 구부정하게 숙였다.

“두영, 누구 기다려?”

빈 테이블에 앉아 레고를 조립하던 유재민이 말했다. 두영은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뒤늦게 인지했다.

“…저한테 하신 말씀인가요?”

“여기 너 말고 누가 있어. 아까부터 창밖만 보는데 진짜 누구 기다리는 거야?”

그랬나? 자신이 창밖만 보고 있었나?

블록에 시선을 고정한 유재민이 고개를 들고 두영을 보았다.

“누구 기다리냐니깐.”

“아뇨……. 그냥 봤어요. 올해는 눈 안 오나 봐요.”

“하늘 쓰레기 안 오면 좋지.”

로망 청년이 다 뒈진 낭만을 고하듯 말했다. 두영도 눈이 오는 날이 싫었다. 땅이 얼면 집으로 올라가는 길이 미끄럽기 때문이다. 평소보다 몇 배는 다리에 힘을 주고 올라야 해서 겨울 내내 근육통을 달고 살아야 했다.

‘넌 다리에 힘이 없어? 뛰는 폼도 엉성하고…….’

두영은 오늘 아침에 홍승표가 제게 했던 말을 떠올리고 입술을 붕어처럼 내밀었다. 홍승표는 모든 사람이 자기처럼 튼튼한 몸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잘난 유전자로 기만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싹 다 고소가 가능해야 했다.

앞치마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자 카드 지갑이 손에 걸렸다. 동전 지갑보다 작아서 가지고 다니기 편했지만, 안에 든 종이 때문에 제법 부피가 있었다. 그가 준 돈은 여전히 남의 돈 같아서 통장에 넣지 않았다. 집은 허삼혁 때문에 위험했다. 그래서 뚱뚱한 지갑째로 들고 다녔다.

홍승표는 정말 지갑만 주려고 온 것일지 몰랐다. 그런 그를 매몰차게 내쫓아 버렸다고 생각하니 속이 쓰렸다. 그렇다고 사과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지난 홍승표의 전적을 생각하면 무조건 덮어놓고 의심해야 했다.

오늘 아침 일은 그냥 잊으면 되는 거다. 아예 없었던 일처럼. 애초에 만나지 않은 것처럼.

그때 차임벨이 울렸다. 두영은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리하면서 입구를 보았다. 팔짱을 낀 남녀가 들어오고 있었다. 두영은 머리를 다듬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커플 손님을 멍하게 보고 있다가 주문받기 위해 일어났다. 방금 무엇을 기대했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두영은 일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고양이 한 마리를 만났다. 꼬리를 바짝 세운 고양이는 두영의 장딴지에 머리를 비볐다. 예전에는 자동차 밑에 들어가 얼굴도 안 보여 주더니, 이제는 안면 좀 익혔다고 먼저 아는 체를 했다.

“미안해. 오늘은 줄 게 없어.”

어육 소시지로 시작된 고양이와의 만남은 그 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고양이는 기분이 좋은 듯 발라당 드러누웠다. 두영은 미안한 마음에 고양이가 만족할 때까지 배를 벅벅 문질러 주었다. 둥글게 말린 솜방망이가 두영의 손을 때렸다. 발톱을 숨기고 있어 아프지 않았다.

어미를 뒤따라 차 밑에서 기어 나온 새끼 고양이가 두영을 향해 엉덩이를 씰룩였다. 그러고는 로켓처럼 뛰어오더니 두영의 손에 작은 생채기를 만들었다. 철없는 새끼 고양이는 어미와 달리 아직 힘 조절을 할 줄 몰랐다.

가장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새끼가 몇 마리 더 있었는데 지금은 한 마리뿐이다. 시체도 보이지 않았다. 눈을 말갛게 뜨고 두영을 올려다보던 고양이가 “앩옹”하고 울었다.

“그렇게 예쁘게 울어도 줄 게 없어. 미안해.”

고양이 궁둥이를 팡팡 두드리던 두영은 손이 시려 그만 일어났다. 매번 간택 받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고양이는 미련 없이 꼬리를 하늘거리며 길을 떠났다. 다행히도 독립적인 고양이였다.

두영은 집으로 향하는 갈림길에 멈춰 섰다. 할머니를 보러 갈까 고민하다가 그냥 집과 가까운 길목으로 방향을 틀었다.

달동네 초입에 들어섰다. 두영은 주머니에 있는 지갑을 수십 바퀴째 굴리며 오르막길을 올랐다. 듬성듬성 불이 켜진 가로등을 지나치고, 쓰레기가 쌓인 길목을 지나쳐 집에 도착했다.

또 뭐가 잘못됐는지 부엌과 방 형광등이 켜지지 않았다. 차단기를 확인했지만, 딱히 문제도 없었다. 전구 갈아 끼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전구가 아니라 초크 다마를 갈아 끼워야 했나 보다.

차단기 뚜껑을 내린 두영은 방문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아직 암순응이 되지 않아 사방이 캄캄했다.

“앗!”

두영은 방으로 올라가는 턱에 걸려 엉덩방아를 찧었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주저앉아 나직이 앓았다. 아까까지 아무렇지도 않았던 기분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가라앉았다.

아픔을 갈무리한 두영은 천천히 일어나 방에 들어갔다. 맨바닥에 누워 몸을 둥글게 말았다. 어둠 어딘가에 던진 시선은 공허했다. 다시 끝이 보이지 않는 무저갱으로 추락했다. 식인 곰팡이가 제 몸을 한입에 집어삼켰다.

두영은 어둠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지갑을 얼굴 앞으로 가져왔다. 촉감 놀이를 하듯이 두 손으로 조몰락거렸다. 신기하게 땅을 치던 기분이 나아졌다.

그때였다. 창밖으로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두영은 방 모퉁이에 등을 붙이고 앉아 열린 방문 너머를 노려봤다. 그림자의 정체가 허삼혁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자 심장이 날뛰기 시작했다.

두영은 무릎을 세워 제 몸을 방어했다. 신경이 뾰족하게 곤두섰다. 그때 샷시문 고방유리를 관통한 그림자가 부엌 시멘트 바닥에 늘어졌다. 그런데 무언가 좀 이상했다. 달빛을 받은 그림자는 공중에 떠 있는 듯이 좌우로 은은하게 흔들렸다.

똑똑―

알루미늄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두영의 몸이 흠칫 떨렸다. 문밖의 사람은 허삼혁이 아니다. 제 아비는 열쇠의 위치를 알았으니까.

그럼 대체 누구지? 이 시간에 올 사람이 있었나? 왜 몸이 흔들리는 거지?

마치 줄에 매달린 사람처럼.

그 순간 테이프 찢어지는 소리가 뇌를 헤집었다. 귀를 틀어막은 두영은 창문으로 들어온 달빛이 무언가에 의해 가려지자 무심코 시선을 들어 올렸다.

창문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남자는 얼굴이 파랗고 혀가 턱까지 나와 있었다.

너무 놀라면 비명도 안 나왔다.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혀를 내민 남자가 굳어 있는 두영을 빤히 보다가 방향을 틀었다. 남자가 사라졌다는 안도감도 잠시,

우체통을 뒤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두영은 심장이 내려앉았다. 뭘 어떻게 해 보기도 전에 샷시문이 덜컹 열렸다. 두영은 방문에 시선을 고정한 상태로 굳어 버렸다. 가위에 눌린 것처럼 눈꺼풀이 감기지 않았다.

혀를 내민 남자의 모습이 정면에 드러났다.

박은식이었다.

그는 공중에 뜬 다리로 두영에게 매끄럽게 다가와, 과거의 기억을 단편적으로 보여 주었다.

‘허두영 초콜릿 먹을래? 네 눈 호롱이 닮았어. 호롱이 사진 보여 줄까? 문화생활 좀 즐겨라. 뭐래, 나 존나 실버거든? 아는 척하지 말라고. 씨발 말 걸지 마! 너 때문에 내가 죽은 거야. 네가 죽었어야 했는데. 넌 행복하면 안 돼. 날 위해 행복하지 마. 평생 불행하게 살아.’

저주처럼 악독하게 쏟아지는 말이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까지 거짓인지 분간이 안 됐다. 길게 빠져나온 박은식의 혀가 두영의 발치에 닿았다. 두영은 제 다리를 끌어안고 몸을 작게 웅크렸다.

“…미,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사과하면 뭐 해. 되돌릴 수 없는데.’

두영은 소리 없이 울었다. 박은식은 그런 두영을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몸을 숙여 두영의 팔뚝을 덥석 잡아챘다. 겨울바람을 몰고 온 박은식의 손은 화상을 입을 것처럼 뜨거웠다.

두영은 주먹을 휘둘러 박은식을 쳐냈다. 턱이 돌아간 박은식은 눈을 부릅뜨고 죽일 것처럼 달려들었다. 두영은 숨을 곳도 없는 방구석을 기어다니며 그를 피했지만, 금방 뒷덜미가 붙잡혔다.

“으윽! 놔……! 놔아!!”

“…영! 정신 차려 허두영!!”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두영은 저절로 눈이 떠졌다. 가장 먼저 보인 건 여유로움을 무너뜨린 홍승표의 얼굴이었다. 그는 두영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숨을 불어 넣어 주었다. 과호흡으로 정신을 놓기 직전이었던 두영이 천천히 자기 호흡을 되찾기 시작했다.

입술을 떼어 낸 그가 붉어진 두영의 눈가를 엄지로 쓸었다.

“왜 울지?”

“…….”

“울지 마.”

홍승표가 두영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커다란 손이 옷 위로 불거진 척추뼈를 하나하나 매만지다가 떨어졌다. 곧바로 두영은 멀어지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목을 조이는 듯한 적막에 두영은 머뭇머뭇 손을 놓았다. 그러자 홍승표가 두영의 손을 도로 붙잡고 방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다리 사이로 두영을 끌어당겼다.

“잡고 있어도 돼.”

이마에 닿아 오는 따뜻한 숨결에 두영의 긴장이 누그러졌다. 꽁꽁 얼어붙었던 수도가 천천히 녹아내리듯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우는지도 몰랐던 두영은 홍승표가 제 얼굴을 닦아 주는 손길에 눈물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뒤늦게 눈에 힘을 주었지만 쉽사리 멈추지 않았다. 그냥 어서 빨리 이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박은식이 어둠 속에 숨에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샷시문 걸쇠가 제대로 맞물리지 않아, 문이 깃발처럼 바람에 휘날렸다. 문이 여닫힐 때마다 녹슨 경첩 때문에 찢어지게 웃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어깨가 비죽 솟은 두영은 무의식적으로 홍승표의 품 속에 파고들었다. 귀를 틀어막고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자 홍승표가 제 손으로 두영의 손등을 덮었다. 두영은 조심스럽게 눈을 치떴다. 홍승표는 아까부터 자신을 보고 있었는지 마주친 시선에 흔들림이 없었다.

나른한 얼굴로 돌아온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뭐라고 말하는 듯하여 두영은 스스로 귀를 막은 손을 내렸다.

“여기서 나갈래?”

두영은 망설였다. 여기서 그를 따라가면 이번에도 자신은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 짓을 반복하는 걸까? 따라갔다가 후회만 하게 되면 어떡하지? 제 마음을 돌이킬 수 없으면…….

눈을 끔뻑거리자 새끼손톱만 한 눈물이 젖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홍승표는 눈물의 궤적을 따라 눈동자를 움직이다가 다시 시선을 맞췄다.

“나갈래?”

입술을 오물거린 두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홍승표는 달동네 아래 세워 둔 차에 두영을 태웠다. 보닛을 돌아 운전석에 오른 그는 겉옷을 벗어 두영에게 덮어 주고 히터와 열선시트를 켰다.

“추우면 말해.”

두영은 빠르게 따뜻해지는 좌석을 느끼며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두영을 물끄러미 보던 그가 불시에 조수석 쪽으로 팔을 뻗었다. 두영이 흠칫 놀라며 무릎을 세웠다. 덩달아 홍승표의 손도 허공에서 주춤했다.

도망칠지 말지 궁리하는 두영의 얼굴에 홍승표는 조수석 문을 달칵 잠갔다. 그리고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안전벨트 매야지.”

홍승표는 두영의 안전띠를 채워 주고 운전석에 바로 앉았다. 차 시동을 걸며 외눈으로 힐끗 바라본 녀석의 모습은 처연했다. 고개를 깊이 숙이고, 내리뜬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정성스레 달래 줘야만 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큰 도로로 빠져나온 그는 자연스럽게 제집으로 향했다.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려 두영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조수석으로 걸어갔다. 손수 문을 열어 주고 안전띠도 대신 풀어 주었다. 그런데도 두영은 고집스럽게 내리지 않았다.

“내려.”

홍승표는 기다려 주는 대신 두영을 차에서 끌어냈다. 순식간에 집까지 올라와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갔다. 신발을 느릿느릿 벗는 두영을 중문에 서서 기다리고 거실 소파에 데려다 앉혔다.

부엌에 들어간 그는 절제된 동작으로 코코아를 탔다. 머그잔을 들고 돌아서자, 달빛을 받으며 멍하니 앉아 있는 녀석이 보였다. 그 모습이 신성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렇다고 거리감이 느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모두가 공유하는 신이 아닌 저만의 것으로 숨겨 두고 싶었다.

천천히 거리를 좁힌 그는 두영에게 머그잔을 내밀었다. 멍하니 있던 두영이 기척을 느끼고 움찔거렸다. 그러다 제 앞에 있는 머그잔을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건네받았다.

두영이 습관처럼 현관 쪽을 힐끔거리자 홍승표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또 도망가려고?”

속삭이듯 묻는 말에 두영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내가 아주 쉬운가 봐. 말도 씹고.”

“아, 아니야……. 안 쉬워…….”

두영의 말에 홍승표는 입술을 가볍게 당겼다.

“나 안 쉬워?“

“응… 그런 적 없어.”

울어서 그런지 녀석의 목소리는 묘하게 기운이 빠져 있었다. 홍승표는 소파에 앉아 자신의 큰 덩치를 두영에게 치댔다. 목덜미에 입술을 묻자 머그잔을 쥔 녀석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접었다.

“오늘도 도망치면 세 번째야.”

두영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홍승표는 제 물음이 무시당하자 눈썹을 일자로 늘어뜨렸다.

“봐 봐. 이게 쉬운 거 아니면 뭔데?”

이 정도로 물고 늘어지면 허두영은 반응을 보여야 했다. 그러나 무슨 고집인지 머그잔만 내리 보고 있었다.

입술을 씰룩거린 홍승표는 두영의 앞에 쭈그려 앉아 목을 꺾어 그를 올려다봤다. 그제야 두영이 눈을 크게 뜨며 반응을 보였다. 홍승표는 두영이 튀어 나갈 것을 대비해, 양팔을 뻗어 소파를 단단히 짚고 탈출구를 봉쇄했다.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뜨는 행위를 반복하자 허두영의 뾰족해진 경계심이 서서히 누그러지는 게 보였다. 그는 두영의 반응을 살피며 엄지로 붉어진 눈가를 쓸었다.

“왜 울었어?”

“…….”

“그래, 어디까지 무시하나 한번 해보자고.”

“너, 넘어졌어.”

“넘어졌다고?”

“응. 아파서… 그랬어.”

홍승표는 두영의 말을 믿지 않았다. 녀석은 거짓말을 할 때면 눈을 내리뜨고 어눌하게 말했으니까.

그는 작은 단칸방에 들어가는 순간 보았던 장면을 떠올렸다. 허두영은 자신을 보고 있었지만, 동시에 자신을 보는 게 아니었다. 제 위에 덮어씌워진 다른 형상을 보고 있었다. 그 얼굴은 당장 혼절이라도 할 것같이 핏기가 없었다.

그는 떠오른 생각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너 약 해?”

환각을 본다면 약물 복용의 가능성이 있었다. 요즘은 브로커를 안 거쳐도 쉽게 구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두영은 무슨 말인지 이해 못 한 표정으로 그를 보기만 했다. 대충 대답이 된 표정에 홍승표는 가능성 하나를 깔끔히 배제했다.

“아니면 됐어.”

그렇다면 정신적인 문제와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녀석의 가정환경과 학교생활을 생각하면 쉽게 납득이 됐다.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알바를 전전하고, 아비한테는 폭력을 당하고, 마땅한 친구 한 명 없이 돈이나 뜯기는데 성격에 하자가 없을 리 만무했다.

착취당하는 사회적 약자. 아무도 지켜 주지 않는 하찮은 존재. 애초에 자신과 태생이 달랐다.

홍승표가 바닥에 철퍼덕 앉아 두영의 종아리를 잡았다. 두영이 다리를 뒤로 뺐으나 손에 힘을 주어 놔주지 않았다.

두영은 눈동자를 굴리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거리자 홍승표가 어서 말하라는 듯이 눈을 깜빡였다. 잠시 머뭇거린 두영이 한숨 같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집에… 왜 왔어?”

“너 미행하다 보니 그렇게 됐어.”

“미행?”

“아는 고양이가 많던데?”

두영은 입을 둥글게 벌리고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옆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귀 끝이 발갛게 물든 두영은 창 너머의 밤하늘을 끈질기게 보았다. 혼잣말하는 모습을 들켜 민망했다.

홍승표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두영의 다리를 잡고 있는 손이 오금까지 천천히 올라갔다가 다시 아래로 내려와 아킬레스건을 꾹꾹 지압했다. 차가운 녀석의 두 발을 손으로 감싸고 열을 전해 주며 말했다.

“나 거부하지 마.”

그의 말에 두영은 창가에 고정한 시선을 거두고 홍승표를 보았다. 두영의 발을 보고 있던 그는 고개를 들어 시선을 지그시 맞췄다.

“나 피하지 마. 도망도 치지 말고.”

무릎으로 바닥을 짚고 선 그는 두영의 뒷덜미를 감싸고 고개를 기울였다. 입술이 닿으려는 순간 두영이 홍승표의 가슴에 손을 얹고 더 다가오지 못하게 제지했다. 약한 힘이라 무시할 수 있었지만, 홍승표는 스스럼없이 멈춰 주었다.

“안 돼?”

항상 자기 멋대로 행동하던 그가 허락을 구했다. 홍승표가 두영의 목덜미에 이마를 기대고 좌우로 움직였다. 머리카락의 바스락거림에 느슨해졌던 두영의 신경이 다시 뾰족해지는 듯했다.

두영의 상태를 파악하던 홍승표는 다시 입술을 들이댔다. 맞닿은 입술에서 촉촉한 물소리가 났다. 깨지기 쉬운 유리처럼 대하는 홍승표의 조심스러운 입맞춤에 두영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몸이 그가 주는 열기로 서서히 녹기 시작했다.

점점 서로의 코끝이 뭉개지는 격한 입맞춤에 홍승표의 숨도 거칠어졌다. 그는 두영을 번쩍 들어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일어나려는 두영의 허리에 두 팔을 두르고 강하게 끌어당겼다.

“내 이름 불러 줘.”

그가 이마를 맞대고 낮게 속삭였다. 입술을 깨문 두영은 그의 허벅지에서 일어나기 위해 엉덩이를 들썩였지만, 홍승표가 두영의 엉덩이를 꾸욱 눌렀다. 가랑이 사이로 단단한 기둥이 느껴졌다. 피부 안쪽까지 소름이 끼쳤다.

“이름 불러 주면 놔줄게.”

그의 당당한 요구에 두영은 불안한 시선으로 홍승표를 보았다. 입술을 야금야금 뜯자 그가 가볍게 입을 맞추며 뜯지 말라고 말했다. 눈을 끔뻑인 두영은 홍승표의 어깨에 얹은 손을 둥글게 말았다. 심장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날뛰었다.

“호, 홍승표…….”

“응.”

“승표야…….”

눈을 나른하게 뜬 홍승표는 두영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고운 미성은 낮지도 높지도 않았다. 호흡이 잔뜩 실려 약간 허스키하게 느껴졌고, 그로 인해 허두영이 무슨 말을 하건 속살거리는 것처럼 들렸다. 납작한 몸 안에 든 심장이 제법 묵직하게 박동했다. 그것마저 자장가처럼 느껴졌다.

그는 두영의 목덜미를 잡고 얼굴을 고정했다. 다시 입술 틈을 벌리고 혀를 집어넣었다. 옷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고 녀석의 맨살을 쓸었다. 숨이 가빠져 허두영이 우는소리를 내면 거칠게 휘젓던 혀를 부드럽게 자맥질했다.

홍승표는 할딱이는 두영을 게슴츠레 뜬 눈으로 지켜보며 키스를 멈추지 않았다. 등허리를 살살 어루만지다가 입가심으로 씹기 좋은 돌기를 엄지로 건드렸다. 얇은 몸뚱이가 흠칫 떨며 옷 안에 들어온 손을 밀어 냈다.

소리 없이 웃은 홍승표는 다시 두영의 입 안을 거칠게 휘저어 정신을 교란했다. 그러자 두영이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흐느적거리는 몸을 겨우 지탱했다.

“키스 좋아해?“

입술을 살짝 떼어 낸 홍승표는 마치 누가 숨어서 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속살거렸다. 천천히 이성이 돌아온 두영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것만으로 답이 된 듯 그가 눈을 가늘게 접고 소년처럼 웃었다. 끈적거리는 분위기가 한순간에 맑게 개는 미소였다.

그 미소를 홀린 듯이 보고 있던 두영은 갑자기 입술 도장을 꾹꾹 찍는 홍승표 때문에 정신을 차렸다. 그새 순수한 소년은 사라지고 욕망에 눈이 먼 남자가 있었다.

“위로해 줄게.”

홍승표는 두영의 눈두덩에도 입술을 꾹 눌렀다.

“위로해 주고 싶어.”

녀석이 무슨 환각을 보았든 제 알 바가 아니었다. 지금 제집에 허두영이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방법이 추잡해도 상관없었다. 허두영을 한입에 집어삼킬 수만 있다면 착한 척이든, 순진한 척이든 뭐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털을 바짝 세운 고양이를 달래려면 긴 인내가 필요했다. 그루밍을 해 주고 엉덩이를 토닥이며 긴장을 풀어 주어야 했다.

그때 마주 닿은 복부 사이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홍승표는 살짝 몸을 떨어뜨려 확인했다. 두영이 자기 배를 손으로 벅벅 긁고 있었다. 흡사 병적인 손길에 홍승표는 두영의 손을 잡아 떼어 내고 다정히 물었다.

“왜 그래?”

“…간지러워.”

“배가?”

“다… 그냥 전부 다 간지러워. 근데 긁어도 안 시원해…….“

두영은 손등과 목덜미에 손톱자국이 남을 만큼 긁어 댔다. 온몸에 뜨거운 열이 퍼지고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한 느낌 때문에 미칠 것 같았다. 홍승표가 위로니 뭐니 다정하게 군 순간부터 갑자기 이러기 시작했다.

입술 양 끝을 말아 올린 홍승표가 잔잔히 웃으며 말했다.

“나도 그래. 나도 너만 보면 간지러워.”

어느 순간부터 허두영을 보면 추운 곳에서 따뜻한 곳으로 들어간 것처럼 몸이 간질거렸다. 혈관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심장이 갉아 먹히는 것처럼 간지러울 때가 저도 있었다.

그러나 두영은 홍승표의 말에 그저 눈을 끔뻑일 뿐이었다. 그러다 비밀 이야기를 하듯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나… 이 없어.”

“…….”

“잘 씻어서… 진짜 없는데.”

살짝 억울한 듯한 말투에 홍승표는 두영을 묘하게 바라보았다. 까마득한 적막에 두영은 괜히 말했다고 후회했다.

그 순간 가만히 있던 홍승표가 입바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두영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큭큭대기 시작했다. 쉽게 그치지 않는 그의 웃음에 두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렸다.

겨우 웃음을 갈무리한 홍승표는 잔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래 넌 이 없어. 내 이가 너한테 옮겨 갔나 봐.”

아무래도 허두영의 사고회로는 독특한 듯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튀는 게 제법 마음에 들었다. 그는 입꼬리를 알랑거리며 두영의 입술을 입으로 갉작거렸다. 항상 긴장한 채로 있던 두영이 지금만큼은 그의 키스를 서슴없이 받았다.

이걸로 확신할 수 있었다. 허두영은 키스를 좋아한다고.

홍승표는 두영의 두 발목을 잡고 아래를 들쑤셔졌다. 방금 사정한 두영은 어딜 건드려도 날카롭게 반응했다. 묵직한 살 기둥이 예민한 내벽을 빠르게 드나들었다. 두영은 배 속이 뒤집히는지 손으로 배를 감쌌다. 홍승표는 곧장 두영의 손을 제 목에 걸었다.

“앗… 하으…….”

“아파?”

허리 짓을 멈추지 않은 채 걱정을 한 다발 담아 물었다. 안타깝게 흔들리는 두영의 턱 아래 정액이 묻어 있었다. 홍승표는 그것을 냉큼 핥아 먹고 입술을 빨았다. 부드러운 키스에 비해 하체는 난폭하기만 했다.

홍승표는 사정감이 물씬 느껴질 때 성기를 밖으로 빼냈다. 거친 날숨을 내쉬며 힘줄이 돋은 손으로 성기를 치댔다. 치솟은 정액이 두영의 다리 사이로 흩어졌다.

그는 뻐끔거리는 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잘게 털었다. 두영이 진저리 치며 거부했지만, 홍승표는 엎어져 기어가는 두영을 따라가면서까지 손을 난잡하게 움직였다.

“들려? 네 안에 싸지도 않았는데 여기는 이렇게 젖어 있어.”

찔껄찔꺽. 젤을 한가득 뿌린 것처럼 눅진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가 잔상이 남을 만큼 손목을 빠르게 털자 두영이 엉덩이를 바짝 치켜들고 엉망진창 들썩였다.

“아흑, 흐읏!”

두영은 몰아치는 자극에 발등으로 소파를 팡팡 내려쳤다. 홍승표는 두영의 반응을 집요하게 살피며 쑤셔 넣은 손가락을 가위질하거나, 갈고리처럼 구부린 손끝을 민감한 지점에 맞춰 무자비하게 짓눌렀다.

“그만, 아아……!”

절정 직전에 그의 손이 빠져나가고 곧바로 성기가 박혀 왔다. 처음부터 주먹으로 내리꽂는 듯한 추삽질에 두영은 물에 빠진 사람처럼 할딱였다.

아찔한 성감이 배꼽 아래에 잔뜩 몰려 있다가 홍승표가 한 번씩 강하게 내리찍을 때마다 불꽃처럼 터지는 듯했다. 그 감각에 발가락과 손가락이 안쪽으로 굽어 들어갔다.

두영은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자극에 무언가라도 붙잡아 흔들리는 제 몸에 안정을 주고 싶었다. 하다못해 홍승표의 몸이라도…….

그때 홍승표가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앉아 허벅지 위에 두영을 앉혔다. 두영은 제 속마음이 홍승표에게 들킨 것 같아 그의 목을 끌어안고 그 위에 얼굴을 문지르며 울음을 참았다. 홍승표는 두영의 귓바퀴에 입술을 붙인 채 천천히 움직이다가 불시에 퍽, 하고 올려 쳤다.

“깊어… 깊어…”

두영의 입에서 가는 신음이 옅게 흩뿌려졌다. 홍승표는 두영의 살갗에 닭살이 피어나는 걸 발견하곤 밀착한 몸을 조금 떨어뜨려 그 사이를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허탈하게 웃었다.

“뒷구멍으로 간 거야, 아니면 내 배에 자지 문질러서 간 거야?”

그의 복근에 두영의 정액이 흘러내렸다. 한순간 미소를 거둔 홍승표가 불알이 부서지게 성기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외피가 벗겨질 것처럼 조이는 두영의 구멍에 욕이 저절로 나왔다.

“아으, 흐으, 아앗!”

일정한 세기로 퍽, 퍽, 처박는 삽입은 절정에 다다를수록 더욱 거세졌다. 두영의 몸이 사정없이 흔들리고 내벽이 매섭게 조였다.

“아아! 크흣……!”

홍승표가 성기를 깊이 쑤셔 넣고 사출했다. 두세 발로 끝나지 않는 사정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문득 두영은 배가 부른 듯한 착각에 손으로 배를 감쌌다.

그는 두영의 오금 아래 팔을 집어넣고 들었다. 단단한 성기가 빠져나가자 소파 위로 정액이 후두둑 떨어졌다. 홍승표는 물끄러미 제가 싼 정액을 보다가 정액 웅덩이에 두영을 앉혔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좌우로 움직여 두영의 엉덩이를 정액 범벅으로 만들었다.

기운 없이 늘어진 두영은 홍승표가 하는 짓을 가만히 당해 주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버둥거렸다. 그러나 오금이 그의 팔에 걸린 상태라 어쩌다 보니 합심해서 엉덩이를 문댄 꼴이었다.

울대뼈를 들썩이며 웃은 홍승표가 다시 두영의 구멍에 성기를 끼웠다. 흠뻑 젖은 구멍은 조금만 움직여도 물장구치는 소리가 났다.

“왜 이렇게 물이 많아? 야하게.”

“흐아… 으으…….”

“잘 들어 봐. 물속에서 하는 것 같아.”

천천히 움직이던 그가 점점 속도를 더해 갔다. 검은 음모가 체액과 뒤섞여 크림처럼 뭉개졌다. 그새 또다시 절정에 도달한 두영은 애처롭게 몸을 떨었다. 홍승표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연신 허리를 쳐올렸다. 휘몰아치는 쾌감에 관자놀이가 뻐근할 지경이었다.

순간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진한 탄성을 내뱉었다. 영원히 손안에 간직하고 싶은 황홀한 감각이었다. 녀석의 몸 밖으로 나오고 싶지 않았다.

간신히 혼몽에서 빠져나온 홍승표는 지쳐서 늘어진 두영을 보고 혀를 찼다. 눈물, 콧물, 침으로 범벅된 얼굴은 잔뜩 무르녹아 자칫 잘못 건드렸다간 그 형체가 뭉개질 것 같았다.

덩달아 다른 의미로 위화감이 들었다. 허두영은 도저히 저와 같은 햇살을 받고,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행성에서 살아가는 존재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 괴리감이 사뭇 대단하여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그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두영의 뒷덜미를 잡고 자신을 보게 했다. 초점이 흐릿해진 녀석의 호박색 눈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입을 맞췄다. 아직 숨을 고르지 못한 허두영이 받아 낼 수 있을 정도로 혀를 얽자 녀석이 어리숙하게 제 혀를 빨아 오기 시작했다.

눈을 가늘게 접은 홍승표는 괜히 두영을 놀리고 싶어 고개를 틀었다. 그러자 두영이 혀를 빼꼼 내보인 채로 얼굴을 붉혔다. 서서히 이성이 돌아오는 듯한 모습에 홍승표는 급하게 제 혀를 물려 주었다.

그는 다시 허물어지는 두영을 보고 안심했다. 녀석이 먼저 흥에 취해 입술을 들이대는 건 드물었다. 비록 제정신이 아닌 상태지만, 무엇이 됐든 이런 좋은 기회를 코앞에 두고 놓칠 수 없었다.

홍승표는 두영을 안아 들고 욕실로 향했다. 샤워기 물을 틀자 두영이 화들짝 놀라며 주변을 두리번댔다. 그는 두영을 바닥에 내려 주고 벽을 짚고 서게 했다.

무릎을 접고 앉은 홍승표는 연유 범벅을 한 복숭아 같은 엉덩이를 잡아 벌렸다. 푹 절인 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자 두영이 파르르 떨며 돌아섰다. 홍승표가 두영의 허벅지를 잡고 다시 돌려세우려고 했지만, 두영이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다.

한쪽 눈썹을 치켜세운 그가 말했다.

“정액 빼야 해. 뒤 돌아.”

“나, 나중에…….”

“지금 해, 전처럼 배앓이하기 전에. 여기는 양호실 없어.”

“그럼… 내가 할게.”

“거기까지 손 안 닿잖아.”

“쭈, 쭈그려 앉으면…….”

홍승표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으로 두영을 보다가 잡은 허벅지를 놔주었다. 두영이 냉큼 그와 거리를 벌리고 벽 쪽에 찰싹 붙어 섰다. 불량한 자세로 두영을 올려다보던 홍승표가 나른하게 말했다.

“해.”

“…….”

당당하게 관람객을 자처하는 홍승표의 모습에 두영은 입을 뻐끔거렸다. 당연히 그가 욕실에서 나갈 줄 알고 혼자 하겠다고 한 건데…….

살짝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긴 홍승표가 두영의 매끈한 다리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얼른 해, 씻고 자게. 아니면 내 정액을 계속 품고 싶은 건가?”

“나 혼자…….”

“응. 혼자 해.”

“거, 건드릴 거잖아.”

가만히 듣고 있던 홍승표가 갑자기 습한 한숨을 내뱉었다. 두영은 그의 피곤한 듯한 모습에 주눅이 들었다. 눈을 뒤집어 깐 그는 진한 쌍꺼풀을 유지한 채 손으로 입술을 쓸었다.

“처음만 네가 했지 지금까지 항상 내가 빼 줬어. 서툴게 빼서 배 아프면 어쩌려고 그래? 네가 혼자서도 잘하는지 확인하려고 보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마. 얼른 하고 자자. 나 피곤해.”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는 정말 피곤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두영은 의심이 덕지덕지 묻은 눈길로 홍승표를 보았다. 그가 하품하며 눈을 비비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두영은 입술을 꾹꾹 깨물다가 결국 홍승표에게 등을 보인 채 쭈그렸다. 배가 눌리는 자세가 좀 불편하여 아예 맨바닥에 철퍼덕 앉았다. 엉덩이를 살짝 들고 손을 뒤로 뻗었다. 구멍 주변을 배회하는 손은 누군가의 짙은 시선 때문에 곧바로 움직이지 못했다.

짙게 심호흡한 두영은 손가락 하나를 조심스럽게 집어넣었다. 묽은 정액이 가는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일순 사방이 조용해졌다. 홍승표가 샤워기 물을 잠근 것이었다. 잠시 머뭇거린 두영은 등 뒤를 힐끗 보았다. 홍승표가 두영의 시선을 눈치채고 싱긋 웃어 보였다.

“계속해.”

다시 벽 쪽으로 고개를 돌린 두영은 손가락을 느릿느릿 움직였다. 부예진 샤워부스 내부는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와 금방 꺼질 듯한 숨소리, 그리고 아래를 헤집는 소리로 가득했다.

홍승표는 두영의 꿈틀거리는 전완근을 보았다. 안쪽으로 몰린 견갑골과 복숭아색으로 물든 발뒤꿈치. 농도 짙은 시각적 자극에 제 깊은 곳에 똬리 튼 흉악한 감정이 올라오려 했다.

벽에 이마를 기댄 두영은 별안간 구멍을 비집고 들어온 손가락에 깜짝 놀랐다.

“아, 안 건드린다고……!”

“도와줄게. 깊숙이 넣어서 휘저어야 금방 빠져.”

“내 크기 알잖아.” 홍승표가 두영의 귓바퀴에 입술을 붙인 채 속삭였다.

그는 버둥거리는 두영을 뒤에서 껴안고 중지를 집어넣었다. 두영이 홍승표의 팔을 급하게 붙잡고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아무리 힘을 주어 끄집어내려 해도, 그의 손은 더 깊게 들어올 뿐이었다.

“힘주는 거 맞아? 더 쑤셔 달라고 밀어 넣는 게 아니고?”

“아니, 야… 흣…….”

“정말 아니야? 내 손가락 조이는데?”

홍승표가 젖은 두영의 머리에 코끝을 비비며 대꾸했다. 할딱이던 두영은 갑자기 서러움이 복받쳐 아이처럼 울음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큽… 안, 한다고… 흑, 그랬으면서…….”

비 맞은 새끼 짐승처럼 낑낑거리는 모습에 홍승표는 억지로라도 두영을 범하고 싶었다. 그러나 두영이 스트레스 때문에 요절한 개복치처럼 정신을 놓아 버렸다.

엷은 헛웃음 뱉은 홍승표는 품 안에 늘어진 두영을 부축하고, 구멍 안쪽 깊숙이 쑤셔 넣은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렸다. 덩어리진 정액이 타일 위로 툭툭 떨어졌다. 이따금 예민한 지점을 고의로 긁고 지나가면 녀석이 잠결에도 달뜬 호흡을 내뱉었다.

“하아, 진짜 씹어 먹을까…….”

진심으로 허두영의 골수까지 빨아 먹고 싶었다. 발뒤꿈치부터 머리까지 제 안에 욱여넣고, 세상과 동떨어져 저만 아는 존재로 남기고 싶었다. 잔인한 욕망이 깊은 곳에서부터 아가리를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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