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음습한 갈망 (10/20)

10. 음습한 갈망

“영수증 필요하세요?”

“버려 주세여.”

두영은 내부에 있는 쓰레기통에 영수증을 버렸다. 포장 손님은 두영이 커피 만드는 걸 지켜봤다. 별 의미 없는 행동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두영은 타인의 시선이 언제나 불편하고 늘 긴장됐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안녕히계세여.”

숨도 쉬지도 않고 인사를 끝낸 손님이 불 켜진 방 안의 바퀴벌레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두영은 소매를 추어올리고 설거지를 시작했다. 설거지 양이 그리 많지 않아 다시 의자에 멍하니 앉아 시간을 때웠다. 그러다 부정적인 생각이 날을 세우고 달려들어, 두영은 의자에서 발딱 일어나 유재민의 컬렉션을 마른 수건으로 조심조심 닦았다.

원래도 자주 멍을 때렸지만, 요새는 그 빈도가 감당 못 할 정도로 늘었다. 미련하게 생각이 많아 봤자 별 쓸모도 없는데 말이다.

차임벨이 울리고 롱패딩을 껴입은 손님이 들어왔다. 손님은 패딩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메뉴판을 훑었다. 두영은 계산대 앞에 멀뚱멀뚱 서서 주문을 기다렸다.

그때 짧은 시간 차를 두고 또다시 차임벨이 울렸다. 두영은 문 쪽에 시선을 주지 않고 습관적으로 어서 오세요, 하고 말했다. 그러다 롱패딩의 주문을 받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이를 보고 멈칫했다. 홍승표였다.

긴 다리로 느긋하게 걸어오는 그는 모델이라고 해도 될 만큼 완벽한 비율이었다. 골반을 살짝 덮는 무스탕과 그 안에 검은색 터틀넥을 입었다. 워싱 된 청바지는 그의 긴 다리와 잘 어울렸다. 날씨에 비해 얇게 입은 것 같지만, 평소 그의 체온을 생각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밖에 바람이 많이 부는지 적당히 짧은 그의 머리카락이 다소 정돈되지 못했다. 홍승표의 나른한 얼굴과 어울려 원래 그런 스타일 같았다.

“…나나 초코 무스 라떼.”

“…예?“

두영은 홍승표를 보느라 주문을 놓쳐 버렸다. 롱패딩은 무표정으로 두영을 지그시 보다가,

“바나나, 초코 무스, 라떼.”

라고 약간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주문했다. 두영은 면목이 없어 눈을 내리뜨고 포스기를 꾹꾹 눌렀다. 테이크 아웃인지 묻는 말에 롱패딩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 카드를 단말기에 꽂았다. 자세히 보니 귀에 블루투스 이어폰을 꽂은 상태였다.

“영수증 필요하세요?”

“…….”

“…앞에서 대기해 주세요.”

두영은 영수증을 제 옆에 내려놓고 아까부터 가타부타 말도 없이 뚫어지게 보는 홍승표에게 시선을 주었다. 한 걸음 다가온 그는 미리 생각해 둔 메뉴를 읊었다.

“아아 하나, 여기서 먹고 갈 거고 포인트 적립은 없어. 결제는 카드로 할게.”

“…카드 받았습니다.”

“넌?”

“네?”

“넌 뭐 마실 건데?”

“오늘은… 안 마셔도 돼.”

홍승표는 며칠 전부터 카페에 부지런히 얼굴을 비추기 시작했다. 그러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과 두영이 거절한 음료를 제멋대로 골라 시켰다.

그의 호의를 거절한 두영은 홍승표를 힐끗 보았다. 오늘만큼은 원하는 걸 들을 때까지 단말기에 카드를 꽂지 않겠다는 그의 결연한 의지가 느껴졌다. 얼른 앞서 주문받은 음료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가 저러고 있으니 일이 진행되지 않았다.

결국 두영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얼른 추가하고 홍승표를 향해 무언의 압박을 보냈다. 부드럽게 웃은 홍승표가 단말기에 카드를 꽂았다. 결제를 마친 두영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홍승표를 발견하고 눈을 끔뻑였다.

“카드, 뽑아도 돼.”

“왜 나는 안 물어봐?”

두영은 자신이 뭘 빼먹었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딱히 없는 것 같은데…….

홍승표가 작위적으로 한숨을 폭 내쉬며 말했다.

“영수증.”

두영은 좀 떨어진 곳에 있는 롱패딩을 보다가 다시 홍승표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는 지금까지 영수증을 챙겨 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갑자기 무슨 변덕인지 알다가도 몰랐다.

“…영수증 필요하세요?”

“아뇨. 버려 주세요.”

두영은 영수증을 북북 찢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시도 때도 없는 그의 장난에 피가 말렸다. 커피 석 잔을 내리는 동안에도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의식하고 싶지 않아도 워낙 노골적인 눈빛이라 어쩔 수 없이 의식하게 됐다.

“주문하신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나왔습니다.”

등을 보인 채 앉은 롱패딩이 귀에 꽂은 이어폰 때문에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작게 한숨을 내쉰 두영이 커피를 손에 들고 바 밖으로 나오던 때였다. 홍승표가 두영의 손에서 커피를 낚아채곤 롱패딩이 앉은 테이블로 걸어갔다.

롱패딩은 머리 위에 드리워진 거대한 그림자에 움찔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홍승표가 말없이 제 귀를 톡톡 두드리며 이어폰을 빼라고 지시했다.

“여기 직원이 커피 가져가라고 하잖아.”

“…하, 한가해 보여서 갖다주는지 알았지, …요.”

“여기가 다방이야?“

롱패딩은 홍승표의 눈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멋쩍게 카페를 떠났다. 홍승표는 다시 두영에게 돌아가 자기 몫의 커피만 들고 가까운 테이블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아담한 사이즈의 카페는 그의 존재만으로 비좁게 느껴졌다.

“지금 나오는 노래, 네 취향이야?”

“…아니. 사장님.”

“메뉴판 그림도?”

일부러 일을 찾아서 하고 있던 두영은 그의 말에 멈칫했다. 수기로 작성한 메뉴와 디저트 그림은 모두 두영이 그린 것이었다. 두영은 앞으론 그림 따위 안 그리겠다고 다짐하며 물 묻은 개수대를 마른 수건으로 벅벅 닦았다.

홍승표는 일하는 두영의 뒷모습을 구석구석 핥으며 물었다.

“원래 평일만 카페에서 일하지 않았나?”

“사장님이 주말 알바 필요하면 카페에서 하라고 허락해 주셨어.”

주말 알바를 구하는 두영의 사정을 유재민이 우연히 알게 되었고, 그는 주말에도 카페에서 일하라고 허락했다. 원래 펜스테몬은 주말에 문을 열지 않았다. ‘주말은 놀아야 한다.’라는 유재민의 유년 시절부터 깊이 각인된 가치관 때문이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홍승표가 손끝으로 눈썹을 쓸었다.

“사장이 남자야?”

등을 보인 채 서 있던 두영은 더 이상 할 일이 없어 홍승표를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홍승표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언뜻 불만스러움이 엿보였다.

“넌 언제 쉬어?”

그의 물음에 두영은 조금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최근에 좀 쉬었어.”

“그래서 앞으로 쉴 날은 없다?”

돌려 말했으나 홍승표는 정확히 핵심을 꿰뚫었다. 두영은 그를 만나고 불가피하게 잘린 알바가 몇 개 있었다. 그의 집에 한번 발을 들이면 홍승표가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옷을 숨겼기 때문이다. 두영은 살다 살다 옷을 빼앗긴 선녀의 마음을 이해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더 이상의 위험은 피하고 싶었다. 두영은 홍승표가 사 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속으로 정리한 생각을 조심스럽게 입 밖으로 꺼냈다.

“나는… 여기에서 오래 일하고 싶어. 사장님 좋은 분이시고, 월급도 꼬박꼬박 챙겨 주시고, 외진 곳에 있어서 손님도 많이 안 오고… 그리고 메뉴도 몇 개 없어서…….”

분명 생각을 정리한 것 같은데 횡설수설하게 됐다. 혀가 꼬인 두영은 땅에 시선을 처박으며 손목의 상처를 헤집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일하는 거… 재밌어.”

처음에는 실수를 많이 해서 하수구에 흘려보낸 커피만 수십 잔은 될 것이다. 그런데도 사장님은 한 번도 자신을 혼내지 않았다. 눈치도 주지 않았고, 큰소리를 낸 적도 없었다. 그것만으로 여기서 일할 이유는 충분했다.

“그런데?”

가까이에서 들린 목소리에 두영은 움찔했다. 퍼뜩 고개를 들자 홍승표가 바에 몸을 기댄 채 서 있었다. 한쪽 손으로 턱을 받친 그가 두영을 빤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걸 나한테 왜 말하는데? 여기서 일하는 거야 네 자유 아니야?”

무심하게 대꾸한 홍승표가 갑자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설마 여기서 일하는 것도 그 새끼들 허락 맡아야 했어?”

두영은 그가 말하는 그 새끼들이 누군지 몰라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였다.

“김진호랑 이주학 말이야.“

단순히 이름만 들은 것뿐인데 심장이 철렁했다. 두영은 건조해진 입술을 혀로 축이고 절제되지 않는 손의 떨림을 등 뒤로 숨겼다.

한창 학교생활을 할 때는 이 정도로 떨지 않았다. 그때는 항상 체념하고 있던 상태라 그들이 기습적으로 제게 무리한 요구를 해도 아무렇지 않은 척을 어떻게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홍승표를 통해 그들의 이름을 듣게 되자 이상하게 오한이 들었다. 뼛속 깊이 각인된 상처 때문인 것도 있었고, 지금 제 앞에 있는 홍승표가 잠시라도 그들과 어울렸던 사이였기에 그런 것도 있었다. 지긋지긋했던 그 생활은 여전히 제 곁을 맴돌며 매 순간 자신을 못난이로 만들었다.

저도 모르게 긴장한 두영은 시선을 바닥에 내리꽂은 채 느릿느릿 대답했다.

“두 사람은… 내가 여기서 일하는 거 몰라. 찾아와서 행패 부릴까 봐, 그래서 말 안 했어.”

홍승표는 두영의 여린 어깨가 떨리는 걸 발견하고 힘준 미간을 풀었다. 그러고는 뒷덜미를 주무르며 멋쩍게 대꾸했다.

“잘했어.”

나긋한 칭찬에 두영은 그를 힐끗 보았다. 홍승표가 다정한 눈을 하고 자신을 보고 있었다. 두영은 문득 기분이 이상해져 볼 안쪽 살을 깨물었다. 손목의 상처를 헤집던 손에 다른 의미로 힘이 들어갔다.

바에 몸을 늘어뜨리고 있던 홍승표가 갑자기 직원 통로를 통해 안쪽으로 들어와 자해하는 두영의 손목을 잡아챘다.

“넌 어째 손톱이랑 입술을 가만두지 않네.”

병적인 제 습관을 홍승표에게 지적받자 불현듯 창피했다.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유독 홍승표를 통해 듣게 되면 그게 무슨 말이든 수치스러움이 두 배가 됐다.

홍승표는 민망해하는 두영의 얼굴을 고요하게 내려다보다가 불쑥 아래턱을 살살 긁어 주었다. 두영은 당황해하면서도 그의 손길을 얌전히 받았다.

마른침을 삼킨 홍승표가 자연스럽게 고개를 기울여 다가갔다. 두영은 제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에 이성을 빠르게 되찾고 냉큼 손으로 입술을 가렸다. 눈꼬리를 세운 그가 두영의 손등에 입술을 비비며 시선을 빤히 맞췄다.

“손 치워 봐.”

“지, 지금 알바 중…….”

“알아. 너 알바 중인 거.”

두영은 홍승표의 어깨 너머를 보았다. 아무리 카페가 외진 곳에 있더라도 그 앞으로 사람이 지나다녔다. 이럴 때마다 홍승표는 세상 창피한 게 없어 보였다. 그때 차임벨이 울리고 누군가가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두영은 홍승표를 냅다 밀치고 포스기 앞으로 달려갔다.

“두영! 일찍 문 닫고 가라니까 아직도 왜 이러고 있어?”

유재민의 목소리에 두영은 고개를 퍼뜩 쳐들고 그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사장님이 왜……. 여행 가신다구 하시지 않으셨어요?”

“응, 갔었지. 근데 날씨가 구려서 그냥 왔어. 어때 일은 혼자 할 만했어? 손님이 별로 안 왔어야 하는데.”

“안 힘들었어요. 손님도 별로 안 왔어요.”

“그래 다행이네.”

보드랍게 웃으며 말한 유재민이 직원 의자에 앉아 있는 홍승표를 발견하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친구? 두영이가 친구 데려오는 건 처음이네.”

“아, 그…….”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 두영은 입술을 오물거렸다. 친구라고 하면 홍승표가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았다. 그때 얌전히 있던 홍승표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냥 친구 아니고 남자 친구.”

그의 기습 발언에 두영이 석고상처럼 굳었다. 친구는 친구인데 앞에 주어 하나가 더 붙었다. 두영은 시선을 유재민한테 고정한 채 더듬더듬 변명했다.

“사, 사장님 그게…….”

“그치. 남자겠지. 저게 여자일 리 없지.”

대수롭지 않게 받아친 유재민이 홍승표를 대놓고 위아래로 훑으며 물었다.

“이름은?”

홍승표는 뻔히 자기 이름을 묻는 걸 알면서도 못 들은 척했다. 유재민의 눈썹이 예민하게 치켜 올라갔다.

“두영이랑 친구 맞아? 나이 구라 친 거 아니고?“

두영이 식은땀을 뽈뽈 흘리며 홍승표 대신 대답했다.

“도, 동갑 맞아요.”

“세상에.”

격한 유재민의 반응에 이번에는 홍승표가 눈썹을 까딱거렸다. 그에 두영은 얼른 유재민에게 다가가 둘 사이를 가르고 섰다. 혹시나 유재민이 홍승표한테 처맞을까 봐 걱정됐기 때문이다.

홍승표는 골격 자체가 큰 떡대였고, 유재민은 서서히 체력이 무너지는 중인 평범한 30대 남성이었다. 혈기로나, 나이로나 홍승표가 우위였다.

홍승표는 유재민의 팔뚝에 닿은 두영의 손을 송곳 같은 시선으로 보았다.

“뭐야, 허두영. 이리 안 와?”

그는 어이가 상실한 말투로 두영을 책망했다. 유재민은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두영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얼굴 좀 펴, 친구. 더 나이 들어 보여.”

“아저씨는 너무 웃지 마시죠. 입가 주름 심하니까.”

환장의 도가니에 두영은 입술을 꾹꾹 씹었다. 눈가의 주름을 씰룩거린 유재민이 여유로운 어른의 모습을 보였다.

“아저……. 그래, 너희들한테 나는 아저씨겠지. 그래 쿨하게 인정.”

한 번 짚고 넘어간 순간부터 쿨한 인정이 아니지만, 아무도 지적하지 않고 넘어갔다.

두영은 카페 마감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대상이 정해져 있지 않은 인사를 꾸벅한 다음 몸을 돌렸으나, 홍승표에게 팔뚝을 잡혀 제자리에 서게 됐다.

“같이 가.”

“아니야. 두영이 이리 와. 오늘 내가 데려다줄게.”

두영은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는 유재민의 행동에 난감했다. 부담스러운 두 쌍의 시선에 억지로 끌어 올린 두영의 입꼬리가 경련을 일으켰다.

“저 혼자 가, 갈게요.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니, 데려다줘야겠어. 얼른 일로 와.”

두영은 식은땀이 맺힌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그냥 유재민의 차를 타는 게 이 상황을 벗어나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 같았다. 한 발짝 앞으로 걸어 나가는 순간이었다. 홍승표가 두영의 팔을 굳세게 붙잡았다.

“제정신이야?“

두영은 제 팔을 움켜쥔 홍승표의 손을 보다가 그와 시선을 맞췄다.

“그, 그럼 너도 같이…….”

“뭘 같이야. 내 차 타. 내가 데려다줄게.”

그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유재민이 차 키를 든 손으로 홍승표를 가리키며 손을 휘적휘적 흔들었다.

“넌 안 돼, 이 날도둑 자식아.”

“저거 타지 마. 저거 술 마신 것 같으니까.”

“저어거? 어디 어른한테…….”

“잘 봐. 저게 술주정이고 꼰대란 거야.”

두영은 입으로 총을 쏘는 두 사람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정리가 안 될 것 같은 상황은 다행히 어른 경력 15년 차 유재민이 물러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유재민에게 꾸벅 인사하고 돌아서던 두영은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유재민의 목소리에 멈칫했다. 가까이 와 보라는 손짓에 두영은 홍승표를 힐끗 봤다가 총총 걸어갔다. 유재민이 가까이 다가온 두영에게 은밀히 속삭였다.

“쟤! 너 괴롭히는 거 맞지?!”

“아, 아니에요.”

자세만 은밀했지 그의 목소리는 달팽이관이 아릴 정도로 컸다.

“관상이 딱 등에 칼 꽂을 상인데……. 하여간 친구는 잘 사귀어야 해. 저렇게 양아치 같은 애들은 니 인생에 하등 도움 안 돼요.“

“사, 사장님… 목소리가요, 너무 커요…….”

“그러니? 괜찮아 들으라고 이러는 거야.”

두영은 속이 쓰려서 배에 손을 얹었다. 흐르는 시냇물처럼 사는 유재민이 대체 홍승표의 무엇이 마음에 안 들었기에 이렇게 적대감을 드러내고, 숨 한 번 쉴 때마다 빈정거리는지 당황스러웠다.

앞담도 뒷담도 아닌 험담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홍승표가 터벅터벅 걸어와 두영을 등 뒤로 숨겼다.

“내가 양아치면 그쪽은 뭔데? 사장이면 직원한테 사적으로 붙지 마.”

두영은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고 입을 틀어막았다. 경악을 틀어막은 것과 진배없었다. 홍승표는 불나방 같았다. 웃어른 공경 따위 없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카페에서 잘리게 할 생각인 것 같았다.

아노미 상태로 인해 두영은 더 이상 발언권을 얻지 못했다. 멘탈이 처참히 부서져 분진 가루처럼 흩날렸다. 더 이상 깨질 것도 없겠다 싶은 순간, 유재민이 쐐기를 박았다.

“나는 두영이 애비다 인마.”

두영이 제 귀를 의심하며 입을 떡 벌렸다. 평소에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막 나갈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유재민을 가소롭게 보던 홍승표가 아비라는 말에 진중한 표정을 했다. 그러고는 두영에게 눈으로 물었다.

‘진짜야?’

두영도 얼결에 눈빛으로 대답했다.

‘아니…….’

머리를 긁적이던 홍승표가 갑자기 씩 웃으며 옷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그러고는 뭔가를 골똘히 보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두영에게 시선을 주고, 다시 휴대폰을 보고, 또 두영을 보는 동작을 반복했다.

순간 두영은 불쾌한 감각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저를 보면서 볼 영상은 딱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두영이 사색이 된 채로 홍승표의 휴대폰을 빼앗았다. 홍승표는 두영이 그럴 거라고 예상한 듯 쉽게 빼앗겨 주었다.

허겁지겁 영상을 확인한 두영은 휴대폰 화면에 꽉 들어찬 고양이 한 마리에 멈칫했다. 고양이가 뚱땡이란 놀림에 왜웅하고 서럽게 우는 영상이었다.

[왜애앩웅우.]

고양이는 뚱땡이란 소리가 정말 싫은지 울음에 한이 맺혀 있었다.

[왜액액앩앩웅!!]

뚱땡이까지는 아니고 살짝 통돼지 같은데…….

두영은 울부짖는 고양이가 귀여워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때 머리 위에서 가볍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홍승표가 입 동굴을 드러낸 채 달빛보다 환히 웃고 있었다.

그의 눈이 깊은 우물에 비친 북극성처럼 반짝거렸다. 혹은 자신이 우물 속에서 올려다보는 별 하나일지도 몰랐다. 왠지 소원을 빌면 이뤄질 것만 같았다.

홍승표는 자신을 멀뚱멀뚱 보고 있는 두영을 향해 나지막이 속삭였다.

“내가 데려다줄게. 응?”

두영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의 속삭임을 머릿속으로 연신 되뇌었다. 잠시 꿈을 꾼 것 같았다. 불쾌하고 불안했던 순간의 감정이 한순간에 일단락되었다.

두영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자 홍승표가 승자의 미소를 띤 채 두영을 자기 차에 태웠다. 두영은 안전띠가 채워지는 동안에도 멍하게 앉아 꿈결을 헤맸다.

차에 시동이 걸렸다. 그제야 두영이 눈을 깜빡거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납치가 쉽네.”

“…….”

반박하고 싶었지만, 멍청했던 제 모습을 떠올리면 맞는 소리였다. 역시 저는 학습 능력이 죽어도 오르지 않을 모양이었다.

홍승표가 부드럽게 골목을 빠져나가 큰 도로로 진입했다. 두영은 어색하게 바깥을 구경했다. 초저녁에 퇴근하고 집에 가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아직 소음이 사그라지지 않은 세상에 속해 있어서 그런지 자신이 외톨이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진짜 네 아빠 아니지?”

홍승표가 히터 세기 조절하며 불쑥 물었다. 두영은 그의 손을 보면서 대답했다.

“아빠 아니야. 사장님 아직 젊으셔.”

“진지하게 말해서 놀랐네.”

빨간 신호에 차가 멈췄다. 홍승표는 외투를 벗어 두영의 몸에 덮었다. 두영은 그의 옷에서 풍겨 오는 진한 숲 내음에 기분이 편안해졌다. 겨울의 찬 공기와 어울리는 그의 체취는 희한하게 따뜻하면서도 차가운 느낌이었다.

외투 안쪽에 붙은 부드러운 털이 두영의 턱을 간지럽혔다. 두영은 아랫입술을 꾹꾹 깨물며 슬그머니 올라가려는 입 근육에 힘을 주었다.

보닛 위에 비친 붉은 신호가 초록으로 바뀌었다. 옆 차가 출발하는데 홍승표의 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두영은 홍승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가 핸들에 옆머리를 괸 채 두영을 관찰하고 있었다.

반대편 국도에서 오는 자동차의 라이트가 홍승표의 얼굴로 쏟아졌다. 그의 이목구비가 빛 버무림에 환해지다가 점차 짙은 음영으로 물들었다. 그 모습이 각막에 각인된 듯 두영은 그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때 뒤차가 경적을 울렸다. 홍승표는 느긋하게 허리를 세우고 액셀을 밟았다. 다시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두영은 순간적으로 멈춘 호흡을 내뱉었다. 또다시 온몸이 가려웠다. 그러나 무턱대고 긁었다간 홍승표가 저번처럼 이가 많다는 둥 얘기할까 봐 꾹 참았다.

문득 두영은 아직도 제 손에 있는 그의 휴대폰을 떠올리고 눈을 끔뻑였다. 그러곤 휴대폰의 테두리를 쓰다듬거나, 두 손으로 조몰락거리며 내내 가만히 있지 못했다.

저도 모르게 한숨 같은 호흡을 내쉬었을 땐 너무 큰 소리를 낸 것 같아 곁눈질로 홍승표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도 그는 창틀에 팔꿈치를 얹고 정면만 주시하고 있었다.

두영은 차가 다음 신호에 멈추었을 때 홍승표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그는 무뚝뚝하게 휴대폰을 받고는 다시 두영에게 내밀었다. 화면에는 다이얼 번호가 띄워져 있었다.

“번호 찍어 줘.”

그의 말에 두영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 반응을 오해한 홍승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알려 주기 싫어?”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런 뭔데? 휴대폰 없다는 말이 하고 싶은 거면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있는데, 잘 안 들고 다녀서…….”

“왜?”

두영은 폴더폰을 들고 다녔었다. 지금 그 폴더폰마저 없는 이유는 이주학이 두영의 휴대폰을 장난감 같다며 가지고 놀다가 계단에서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그 후로 휴대폰은 배터리가 빨리 닳았다. 처음엔 불편했지만, 원래 전화도 문자도 잘하지 않았기에 지금은 없이 다니는 게 익숙했다.

두영은 이 구구절절한 내용을 홍승표에게 다 설명해야 하는지 망설여졌다. 그런데 홍승표가 드물게 포기라는 것을 했다.

“됐어. 안 들어도 돼지 새끼겠지.”

홍승표가 한숨처럼 말했다. 두영은 그가 제 속내를 읽은 게 신기해서 눈을 맑게 뜨고 쳐다봤다.

“쉽지가 않아…….”

“어?”

“혼잣말.”

“아, 응…….”

두영은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느덧 달동네 초입에 도착했다. 차를 타고 오니까 금방이었다. 두영은 겉옷을 그에게 돌려주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

스스로 뱉은 말에 귀가 간지러웠던 두영은 냉큼 차에서 내리다가 안전띠를 풀지 않아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다. 귓바퀴를 붉히고 주섬주섬 안전띠를 풀자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려와 더욱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차에서 내린 두영은 문을 살포시 닫았다. 그대로 떠날 줄 알았던 홍승표가 차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렸다. 반대쪽에서 유유히 걸어오는 그의 모습에 두영은 뒷걸음질 쳤다.

그 순간 단숨에 거리를 좁힌 홍승표가 두영의 팔뚝을 잡아채고 품 속으로 잡아당겼다. 두영이 서 있었던 자리로 오토바이가 바람을 일으키며 지나갔다.

“정신 똑바로 안 차려?”

홍승표가 사늘한 얼굴로 낮게 읊조렸다. 두영은 자신이 분위기를 말아먹은 것 같아 의기소침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홍승표의 신발과 그 앞에 낡은 제 신발이 보였다.

눈에 띄게 선명한 격차에 방금까지 차 안에서 평범하게 대화를 나눈 상황이 모두 꿈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자신이 느낀 설렘이 모두 같잖기만 했다.

두영은 화가 난 듯한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사과했다.

“미안…….”

“됐어.”

홍승표의 ‘됐어.’가 저의 쓸모를 말해 주는 것 같아 가라앉은 기분이 도통 나아지지 않았다. 이따금 그와 함께 있을 때면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을 느끼곤 했다. 적색 신호인 걸 알면서도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휩쓸려 있었다.

“이제 갈게.”

두영은 헤어짐의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그러나 몇 발자국 가지 못하고 뒤돌아서야 했다. 홍승표가 졸졸 따라왔기 때문이다. 그는 뻔뻔하게 시선을 맞춘 채 어깨를 으쓱였다.

“산책 중이야. 신경 쓰지 마.”

두영은 입술을 꾹꾹 깨물며 다시 달동네를 올랐다. 듬성듬성 불이 켜진 가로등 아래를 걸어가는데 뒤에서 나는 발소리에 신경이 예민해졌다.

“여기는 가로등 안 고쳐?”

갑자기 말을 걸어온 홍승표 때문에 두영의 어깨를 움찔거렸다. 두영은 잠시 숨을 고르고 대답했다.

“그건 불 안 들어온 지 오래됐어.”

“그래? 너무 위험한데…….”

장승처럼 거대한 홍승표가 어두운 골목에서 퍽치기당할 걱정을 했다. 애초에 그를 건드릴 사람은 없겠지만, 만약 실수로 건드리게 된다면 그 사람은 오늘이 자기 제삿날이 될 것이다.

“이 동네는 연탄을 피우나?”

“그렇긴 한데, 아닌 집도 많아."

“너네 집은?”

“…연탄.”

두영은 말을 얼버무리며 대답했다. 그냥 전기매트를 사용하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말걸.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너도 연탄 배달해?”

오늘따라 말이 많은 홍승표 때문에 두영은 퍽 곤란했다. 안 그래도 숨이 차서 죽을 것 같은데 말이다. 뇌에 산소가 통하지 않아 판단력이 더욱 흐려졌다. 굳이 안 해도 될 물음에 그만 답하고 말았다.

“옛날에, 한 번…….”

“으음.”

가볍게 목을 울린 홍승표가 더 이상 말을 걸어오지 않아 두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허두영.”

두영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뒤를 돌아보자 홍승표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한 계단 아래 서서 말했다.

“같이 걷자고.”

어쩐지 그는 평소 늘어진 모습과 달리 새로운 세상을 발견한 아이처럼 싱그러웠다. 두영은 제 심장이 오르막길에 못 이겨 날뛰는 것이라 생각하며 그와 함께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꾸 앞서는 홍승표에 거리는 다시 좀 전처럼 벌어졌다. 타고난 보폭 차이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두영의 집 앞에서 멈춘 홍승표가 뒤늦게 도착한 두영을 돌아보며 다시 번호를 물었다. 숨도 고르지 못한 두영은 천천히 숫자를 말하며 홍승표를 힐끗 올려다봤다. 집 앞에 가로등 하나가 있는데 항상 불이 켜졌다가 꺼졌다가 자기 마음대로였다. 하필 오늘은 불이 안 들어오는 날이었다.

어둠으로 얼룩진 길목은 홍승표의 휴대폰 화면을 중심으로 밝아졌다. 두영은 그의 얼굴을 힐끔힐끔 훔쳐보다가 불시에 치켜뜬 까만 눈동자와 마주쳐 재빨리 눈을 내리떴다.

“집에 누구 있어?”

“아마 할머니 계실 거야.”

두영은 껌이 즐비한 땅을 내려다보며 신발 앞코를 콩콩 두드렸다. 어색한 이 상황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었다. 집은 방음이 안 되는 편이다. 홍승표가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해서 할머니가 들어 버릴까 봐 걱정이었다.

그때 조금 떨어져 있던 홍승표의 신발이 제게 다가오는 게 보였다. 고개를 들자 홍승표가 얼굴을 비스듬히 기울여 입을 맞춰 왔다. 부드럽게 포개진 입술 새로 따뜻한 숨결이 느껴졌다. 얼어붙은 것들이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의 혀가 입술을 벌리고 들어왔다.

“하으…….”

두영은 무심코 내뱉은 민망한 소리에 홍승표를 밀치고 뒤로 서너 걸음 물러났다. 홍승표는 고개를 기울인 자세 그대로 두영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자꾸 피할래?”

눈꼬리를 뾰족하게 세운 홍승표의 얼굴에 두영은 심장이 아렸다. 그 순간 내리막길 끝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두영은 홍승표를 지나쳐 냅다 아래로 튀어 나갔다.

“할무니!”

그렇게 큰 목소리가 아님에도 후미진 골목에서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두영은 목소리를 큼큼 다듬고 다시 김춘녀를 불렀다. 귀가 안 좋은 김춘녀는 세 번 만에 두영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앞을 보았다.

“똥강아지, 일 끝나고 이제 왔어?”

“응. 근데 할무니 오늘 쉬시는 날 아녔어?”

“몸이 근질근질해서 폐지라도 줍자고 나왔지.”

두영은 제 뺨을 쓸어 주는 건조한 손길에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정신을 퍼뜩 차렸다. 김춘녀가 홍승표에게 눈길을 주며 물었다.

“두영이 친구야?”

순간 두영은 한 시간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홍승표와 유재민. 쌍방으로 서로를 혐오하던 두 사람이었다. 홍승표는 예의범절, 어른 공경 따위 없는 망나니였다. 그가 할머니한테도 무례하게 굴까 봐 지레 불안했다. 그러나 걱정은 기우였다.

“안녕하세요. 두영이 친구예요.”

“아이고, 친구 인물이 훤하네.”

“그런 말 많이 들어요.”

두영은 두 눈을 깜빡이며 홍승표를 낯설게 보았다. 눈앞에 있는 홍승표는 제가 아는 홍승표가 아닌 것 같았다. 눈매를 사르르 구부리며 웃는 게 억울할 정도로 상냥해 보였다.

“할미가 벌어 먹고사느라 바빠서 두영이 친구 본 적이 없었는데. 이리 보니까 기분이 좋네.”

“할머니이…….”

“아 그렇지, 밥은 먹었어?”

“으응.”

“아니요.”

두영은 재빠르게 홍승표를 쳐다봤다. 그는 순진한 얼굴로 김춘녀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고 있었다.

홍승표는 열린 방문 너머로 저녁이 차려지는 걸 구경했다. 고작 라면을 끓이는 두영이 정신없이 허둥거리자, 보다 못한 김춘녀가 두영을 방으로 들여보내고 라면을 마저 끓였다.

구석에 자리를 잡은 두영은 손님보다 더 어색하게 앉아 곁눈질로 그를 힐끗 쳐다봤다. 안 그래도 좁은 방에 그가 있으니 닭장 우리가 된 것 같았다.

제집처럼 편하게 있던 홍승표는 긴 다리를 쭉 뻗어 발끝으로 두영의 몸을 툭툭 건드렸다. 그에 두영은 옆으로 조금 옮겨 갔다. 흥미로운 표정으로 방을 샅샅이 뜯어보는 홍승표가 부담스러웠다. 방 안을 훑는 그의 눈길이 발가벗은 저를 향한 시선 같아 창피했다.

평소 보이지 않던 벽지 곰팡이가 오늘따라 너무 커 보였고, 뒤집어 까진 장판이 지저분해 보이고, 해진 이불이 신경 쓰였다. 두영은 제발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때 김춘녀가 사각 교자상을 들고 턱을 넘어왔다. 상을 받으려고 일어나던 두영은 저보다 먼저 일어나서 상을 채 간 홍승표의 모습에 재차 당황했다.

“아이고 고마워요.”

“밥 값해야죠.”

어쩐지 숨 막히는 기분에 두영은 부엌으로 가 수저와 물을 챙겼다. 홍승표랑 김춘녀의 것만 젓가락 짝을 맞추고 제 몫은 대충 아무거나 주워 들었다.

냄비 뚜껑을 열자 한 솥은 끓인 듯한 라면이 보였다.

“할머니… 몇 개를 끓였어?”

“너무 적나? 모자랄 것 같아 다섯 개 끓였는데.”

홍승표의 덩치만 보고 많이 끓인 모양이었다. 김춘녀는 앞접시에 라면을 덜어 그에게 건넸다.

“많이 먹어요.”

입술에 미소를 머금은 홍승표는 그릇을 받으며 싹싹하게 대답했다.

“잘 먹겠습니다.”

두영은 자꾸 그에게 향하는 눈에 힘을 주고 제 그릇과 김춘녀의 그릇에 물을 조금 부었다. 홍승표는 매우 싱거워 보이는 듯한 두 사람의 앞접시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의 시선을 눈치챈 김춘녀가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설명을 늘어놨다.

“내가 뜨거운 걸 잘 못 먹어서 이렇게 먹으니까, 두영이가 언제부터인가 따라 하더라고.”

두영은 괜히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먹는 내내 홍승표가 신경 쓰여 음식이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몰랐다. 남이 끓여 준 라면은 입에도 대지도 않을 것 같았는데, 다행히 그는 평범하게 그릇을 비워 갔다.

짧은 기간 동안 관찰한 홍승표는 결벽적인데 집 청소는 대충 하는 인간이었다. 아마도 밖은 더럽지만, 제집은 무결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옷에 아주 작은 오물이 묻으면 바로 쓰레기통 행이었고, 기본 티는 한 번 입고 버렸다. 그런 삶이 있다는 걸 홍승표를 통해 처음 알았다.

겨우겨우 제 몫을 비운 두영은 설거지한 다음 홍승표를 배웅했다. 그런데 그가 자동차를 주차한 곳이 아닌 위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두영은 그를 따라갈지 말지 고민하다가 결국 홍승표의 뒤를 밟았다. 달동네의 길은 개미굴 같아서 그가 길을 잃어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금방 돌아갈 생각으로 겉옷을 안 걸치고 나왔더니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어금니를 다닥다닥 하고 부딪치자, 그 소리를 들은 홍승표가 겉옷을 벗어 두영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난간 가까이에 선 홍승표는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봤다. 가파른 벽을 타고 올라온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난간에 기댄 그는 가로등 밑에 서 있는 두영을 바라보았다.

“아빠는?”

홍승표가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자기 아들을 죽자고 패는 면상을 한번 보고 싶었는데, 기회를 아쉽게 날렸다.

두영은 그의 물음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요새 집에 잘 안 들어오셔.”

겨울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선 두영은 어딘가 아슬아슬했다. 급하게 따라 나온다고 신은 슬리퍼와 구멍 난 하얀 양말이 보였다. 그 부분을 유심히 보자 두영이 반대쪽 다리 뒤로 구멍 난 양말을 숨겼다.

생긴 대로 노는 귀여운 짓에 홍승표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가 서서히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제대로 보았다. 허두영을 중심으로 낙후된 배경을.

희미한 불빛의 가로등과 사각지대가 많은 시시티브이. 다닥다닥 붙은 판자촌이 뿜어내는 빛은 겨울바람에 사그라질 한낱 촛불이었다.

새삼 허두영의 세상이 확연하게 다가왔다. 녀석은 고작 몇천 원에 벌벌 떨었고, 몇 푼 아껴 보겠다고 긴 거리를 걸어 다녔다. 추위도 잘 타면서 얇게 입고 다니는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안 입는 게 아니라 못 입고 다닌 것이었다.

허두영의 결핍은 자신이 짐작했던 것보다 꽤 큰 것 같았다. 그러나 사실이 어떻든 제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연민이나 동정심 따위 들지 않았다. 단지 예상하지 못한 변수에 작은 탄식만 나왔다.

왜 허두영은 고아가 아니지?

허두영의 할머니를 보는 순간 묘한 불쾌감이 대가리를 쳐들었다. 할머니가 있다고 들었지만, 둘 사이가 어떤지는 몰랐다. 피멍을 달고 있어도 그냥 등교하게 내버려 두는 걸 보고 방관하는 쪽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할머니를 부르며 달려 나가는 녀석의 얼굴은 그게 아니었다.

홍승표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완전히 제 소유라고 생각한 장난감이 사실은 진짜 주인이 있는, 돌아갈 곳이 있는 장난감이라는 생각에 쓰레기 같은 불쾌감이 몰려왔다. 문득 카페 사장이라는 작자가 떠올랐다. 은근히 허두영 주변에는 쓸모없는 부속물이 많았다.

그는 괴상한 생각에 집착하며 불편한 속내를 숨겼다. 그러곤 단 몇 걸음 만에 거리를 좁혀 두영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나 간다.”

작은 머리통을 가볍게 쓰다듬은 그는 올라왔던 길을 내려갔다. 두영은 홀연히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막연하게 보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는 단호함에 저 먼 과거의 기억이 불쑥 기어 나왔다.

우리 엄마도 저 길을 저렇게 내려갔겠지. 그 눈 내리는 추운 날에.

엄마와 홍승표는 비슷하면서 달랐다. 이따금 끔찍하게 다정해지는 점이 비슷했고, 생사를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 달랐다.

두영은 방금 꿈에서 깬 것처럼 몽롱했다. 홍승표의 체취가 스며든 옷을 움켜잡았다. 그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제자리에 서서 후미진 골목을 바라보았다.

신발을 질질 끌며 집으로 돌아왔다. 찬 바람을 너무 오래 맞고 서 있었더니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바람에 덜컹거리는 알루미늄 문 걸쇠를 단단히 걸어 잠그고 방에 들어갔다. 김춘녀는 벌써 요를 깔고 드러누운 상태였다.

두영은 방 불을 끄고 꾸물꾸물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가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다시 몸을 일으켰다. 무릎걸음으로 좌식 탁상에 간 다음 서랍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오랜만에 전원을 켰지만, 배터리가 없는 모양인지 켜지지 않았다.

두영은 바로 충전기를 꽂은 채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다렸다. 기다림 끝에 전원이 들어온 휴대폰을 확인하니 몇 개의 광고 문자와 몇 통의 부재 전화가 와 있었다. 두영은 가장 최근에 온 번호를 엄지로 쓸었다.

뭐라고 저장할까 고민하는데 갑자기 화면이 꺼져 당황했다. 휴대폰 배터리를 분리하고 재조립했다. 다행히 전원이 다시 켜졌지만, 어딘가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두영은 메모지를 꺼내 열한 자리 숫자를 꾹꾹 눌러 적었다.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되었다.

“똥강아지… 안 자?”

“에구, 미안 할무니. 이제 잘 거예요.”

두영은 휴대폰을 끄고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머리맡에 충전 중인 휴대폰이 이상하리만치 의식됐다. 자꾸 확인하고 싶어서 손이 근질근질했다. 그러나 김춘녀를 깨울까 봐 휴대폰을 힐끗 보기만 하고 참았다.

오늘은 김춘녀와 함께 잠이 드는 주말 밤이다. 평일은 혼자라는 이유로 깊게 잠들지 못했지만, 지금은 다른 의미로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두영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유독 다른 날보다 긴 새벽이었다.

***

홍승표는 침대에 널브러져 휴대폰에 쌓인 메시지를 가볍게 훑다가 눈에 띄는 메시지에 눈썹을 구겼다. 휴대폰을 침대 저 멀리 내던지고 베개에 얼굴 파묻었다. 침구에 스며든 허두영의 체취가 옅어졌다. 크게 숨을 들이쉬어도 자신을 자극하는 게 맡아지지 않았다.

요즘 배 속에 거지가 들었는지 허기가 심해졌다. 뭐라도 집어넣기 위해 일어났지만, 막상 무엇으로 배를 채워야 할지 떠오르는 게 없었다. 결국 다시 침대에 드러누워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어느새 침대에 널브러져 있는 게 일상이 되었다. 과거의 자신이라면 절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한 달 전만 해도 저를 짓누르는 적막감이 싫어 파티란 파티는 모조리 참여했다.

파티가 끝난 후에는 보통 함께 호텔을 들어가고, 각자 따로 나왔다. 간혹 달라붙는 몇몇이 있었지만, 제가 손을 쓰기도 전에 누군가가 알아서 뒷일을 처리해 주었다. 그 누군가는 아침부터 한 시간 간격으로 제게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그는 구부정하게 앉아 시트 주름을 쓸었다. 손끝에 옅은 색의 머리카락이 딸려 왔다. 홍승표는 눈을 빛냈다. 단번에 누구 머리카락인지 알 수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바닥에 굴러다니는 책 한 권을 주워 들어 머리카락을 책갈피처럼 끼워 넣었다.

책과 휴대폰을 들고 일 층으로 내려갔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고 다시 소파에 드러누워 가슴 위에 책을 얹었다. 바지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꺼낸 순간 전화가 걸려 왔다. 번호를 확인한 홍승표는 미간을 찡그린 채로 전화를 받았다.

“왜.”

―오랜만에 한 전화인데 너무 퉁명스럽게 받네.

홍승표는 큰형의 서운한 목소리에도 개의치 않았다.

“할 말 해.”

―나 한국이야. 오랜만에 형이랑 밥이나 먹자.

“혼자 먹어.”

―형 서운하게 하지 말고.

“혼자 드시라고.”

홍승표는 일 분도 채 하지 않은 통화가 벌써 지겨웠다. 일방적으로 통화를 끊고 휴대폰을 머리맡에 내동댕이쳤다. 그러고는 잠시 멍을 때리다가 소파에서 흐느적흐느적 일어났다. 밥 얘기를 하니 정말 밥을 먹어야겠다. 저 혼자가 아닌 허두영과 함께 말이다.

간단하게 샤워를 마치고 스포티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대충 말린 머리카락을 가볍게 손보고 신발을 신었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데 문 앞에 홍승민이 서 있었다. 홍승표는 매끈한 미간을 와락 구겼다.

“얼굴 좀 펴.”

미소를 머금은 홍승민이 부드럽게 타박했다.

“나랑 밥 안 먹는다더니 약속이 있었나 보네.”

“알았으면 이제 가.”

복도로 나온 홍승표가 현관문에 등을 기댔다. 홍승민의 손에서 약 봉투를 발견하고 싱겁게 웃었다.

“꾸준히도 챙기네.”

“사랑스러운 막내니까.”

홍승표는 약 봉투를 받아 들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홍승민도 그를 따랐다.

“생각보다 한국 생활이 잘 맞는가 보군. 거의 출석했던데.”

홍승민은 동생의 행적을 보고 받는 걸 숨기지 않았다. 홍승표는 목덜미를 쓸며 대답했다.

“생각보다 덜 막장이라.”

“다행이군. 대학은 갈 거니?”

“글쎄.”

“좋은 머리 뒀으면 고민하지 말고 가. 대학 졸업장은 있으면 편하니까.”

“더 놀고 싶어.”

“그렇게 놀아 놓고 부족하다는 게 신기하군.”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홍승민이 진심으로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홍승표는 입술을 가볍게 당기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부모 대신 두 형들이 홍승표를 챙겼다. 유독 극성은 큰형 홍승민이었다. 그의 애정을 홍승표도 느꼈지만, 가족애로 느껴지진 않았다. 동지애나 의리. 이따금 그렇게 느껴졌다.

홍승표는 멀리서 차에 시동을 걸며 걸어갔다. 그러다 홍승민이 계속 따라오는 걸 알아채고 자리에 멈춰 섰다.

“왜 자꾸 따라와?”

안경을 추어올린 홍승민이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 나랑 저녁 안 먹어?”

“약속 있어.”

“누군지 말도 안 해 주고.”

홍승표가 눈썹을 살짝 구기면서 웃었다. 지금껏 자신이 누굴 만나도 홍승민은 상대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이미 뒷조사로 다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누구인지 뻔히 알고 있으면서 티 나게 떠보고 있다.

홍승표는 차에 타기 전 홍승민을 향해 손을 하늘하늘 흔들며 작별 인사를 고했다.

“잘 가고. 다시 오지 말고.”

“귀엽게 구네.”

“알아.”

차에 시동을 건 홍승표는 맨션을 빠져나와 일부러 큰 도로를 몇 바퀴 돌았다. 뒤에 따라오는 차가 있는지 확인하고 제대로 된 목적지로 향했다.

딱히 허두영의 존재를 숨기려는 건 아니다. 허두영은 지난 미국에서 만난 진드기 같은 이들과 달랐으니까. 그 사실을 홍승민도 분명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무턱대고 허두영을 처분하지 않을 걸 알고 있지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홍승표는 빨간 신호에 차를 멈추고 목을 뒤로 젖혔다. 그리고 조수석에 내던진 약 봉투를 바라보았다. 허두영이 자신을 어디까지 이해해 줄지 궁금했다. 제 형제는 동생만 과보호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폭력적인 손길이 닿는 곳도 그들만의 ‘방식’으로 보호했다.

약발이 들지 않는 나태와 분노는 단순한 병으로 치부하기에 아주 독하고 잔혹했다. 자신이 지닌 병으로 수없는 사람을 병신으로 만들었다. 과도한 처사인 걸 알지만, 딱히 그들에게 미안함이나 연민을 느끼지 않았다. 제 병에는 타인을 향한 감정이 거세된 듯한 증상도 있었다.

다행히도 허두영은 제 분노를 끓어오르게 할 만큼 구질구질한 녀석이 아니었다. 가끔가다 보이는 답답한 행동이나 모자란 듯한 성격 때문에 성질이 돋았지만, 그건 제 발로 찾아 들어간 화였기에 딱히 허두영 탓도 할 수 없었다.

만성 불면증으로 인해 모나진 자신의 성격이 녀석 앞에서는 한결 너그러워졌다. 그 답답한 행동이 귀여워 보일 만큼.

“…누가 보면 사귀는 줄 알겠네.”

자조적으로 중얼거린 홍승표는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고 핸들을 잡았다. 타이밍 좋게 신호가 바뀌었다. 액셀을 밟으면서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들었다. 번호를 누르려고 했지만, 문득 떠오른 생각에 다시 내려놓았다.

허두영은 휴대폰을 들고 다니지 않았다.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청년이었다. 속삭임 같은 목소리를 당장 듣지 못한다는 게 조금 아쉬웠다. 그렇다고 단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문명 없이 다니는 허두영은 길을 걸을 때 땅만 보고 걸었다. 그러다 길고양이를 발견하면 그냥 지나치는 법 없이 친근하게 인사도 했다. 시간이 붕 뜨면 멍을 때렸는데 그때마다 살짝 벌어진 입에 무언가를 물려 주고 싶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타인의 시선을 끄는 허두영을 어딘가에 가둬 두고 싶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속내에 홍승표는 입천장을 씁쓸하게 쓸었다.

골목 어귀에 차를 세우고 카페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는 도착한 카페에 들어가지 않고 찬 바람을 맞으며 안을 들여다봤다. 고동색 베레모를 쓴 뒤통수가 왔다 갔다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두영은 잠시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이며 테이블을 박박 닦았다. 차임벨을 들었지만, 일부러 시선을 주지 않았다. 장신구 사이사이를 야무지게 닦고 닦은 데를 또 닦았다. 더 이상 손 델 곳이 없는 걸 확인한 두영은 바 안쪽으로 들어갔다.

주말 카페 오픈은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유재민이 열고 싶을 때 열고, 닫고 싶을 닫으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홍승표가 정확한 오픈 시간을 대체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늘 의문이었다.

또 미행당한 건가?

두영은 속으로 홍승표를 노려보고 어제와 똑같은 플레이 리스트를 재생시켰다.

“내가 늘 먹던 거랑 핫초코 하나 줘.”

소리도 없이 다가온 홍승표가 바에 몸을 기댄 채 주문했다. 디저트도 몇 개 추가한 그는 테이블로 돌아가 다리를 꼬고 앉았다.

디저트는 냉장고에서 꺼내기만 하면 되니까 핫초코와 커피만 만들면 됐다. 커피 머신기 소리는 언제 들어도 시끄러웠다. 두영은 볼에 바람을 빵빵하게 불어 넣고 소음을 참았다.

다 만든 음료와 디저트를 쟁반에 올린 두영은 그를 부르려다가 망설였다. 그러고는 직접 쟁반을 들고 바 밖으로 나왔다. 테이블 위에 음식을 세팅하자 홍승표가 눈을 빛내며 두영을 올려다봤다.

“이 정도는 시켜야 이런 서비스가 오는 거였어?”

“한가해서…….”

홍승표는 손바닥에 턱을 괴고 진하게 웃었다.

“고마워.”

이런 반응을 예상한 건 아니라 두영은 머쓱하게 뒷덜미를 쓸었다. 몸을 돌리는데 홍승표가 두영의 손목을 잡고 옆자리에 앉혔다.

“아침 안 먹었잖아.”

그는 마시멜로를 띄운 핫초코를 두영에게 건넸다. 마찬가지로 초콜릿 무스 조각 케이크와 레드벨벳 조각 케이크도 내밀었다.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인 두영은 그가 손에 직접 쥐여 주는 포크를 야무지게 움켜잡았다.

홍승표는 두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아이스커피를 냉수 마시듯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곤 남은 얼음 조각을 어금니로 깨 먹었다. 마치 맹수가 뼈를 씹어 먹는 소리 같아, 두영은 소심하게 케이크를 퍼먹었다.

저절로 그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떠올랐다. 그가 힘주어서 제 살갗을 깨물면 눈물이 핑 돌 만큼 아팠다. 그런데도 저는 이 자국을 남기고 만족하는 홍승표의 표정에 아픈 것도 잊고 심장이 떨렸다. 아무래도 부정맥인 것 같았다.

두영은 자신이 만들고 자신이 해치운 머그잔과 접시를 설거지했다. 어제보다 한가한 일요일 카페는 손님 한두 명이 다였다. 차라리 손님이 한두 명이라도 있으면 이렇게 어색하지도 않았다. 좁은 공간에 홍승표와 단둘이라니. 몇 번을 겪어도 적응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설거지를 마친 두영은 개수대 주변에 튄 물기를 마른행주로 세월아 네월아 닦았다. 한번 타이밍을 놓치니 점점 뒤를 돌아보는 게 겁이 났다. 분명 홍승표가 작살 같은 시선으로 자신을 보고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더욱 뒤로 돌 수가 없었다. 곧바로 다른 일이나 할 걸 후회가 됐다.

“알바 끝나고 뭐 해?”

별안간 뒤통수 근접한 곳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두영은 화들짝 놀랐다. 냉큼 뒤를 돌아보자 홍승표가 코앞에 있었다. 그는 손으로 개수대를 짚고, 불편한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두영을 팔 사이에 완전히 가두었다.

“어차피 손님도 안 오잖아.”

“이, 일하고 있어서…….”

“하, 드럽게 모벙생이네.”

홍승표는 두영의 입술을 깨물었다. 눈을 질끈 감은 두영의 손이 홍승표의 옷자락을 안타깝게 붙잡았다. 부드럽게 머금고 떨어지는 입술 틈에서 촉촉한 물소리가 났다. 반복적으로 입술을 포개던 홍승표는 두영이 숨이 차서 입을 벌리는 순간 혀를 집어넣었다.

“입 좀 더 벌려 봐, 응?”

홍승표가 두영의 턱을 두 손으로 감싼 채 낮게 속삭였다. 그의 눈동자 위로 노골적인 색채가 번졌다. 머뭇거린 두영은 좀 전보다 입을 살짝 더 크게 벌렸다.

숨을 고를 새도 없이 뜨거운 덩어리가 입 안을 헤집었다. 날것의 음식을 삼킨 기분이었다. 홍승표가 고개 각도를 비스듬히 틀어 더 깊게 입을 맞춰 왔다. 두영은 제 숨을 빨아먹는 거대한 존재가 자꾸 몸을 치대니 받아 주는 게 벅찼다.

“스, 하웁, 표야…….”

이름을 부르면 잠시라도 멈춰 주는 그가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두영을 밀어붙였다. 두영은 평소와 살짝 다른 홍승표의 모습에 겁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는 키스만으로 이렇게 이성을 잃지 않았다.

두영은 온몸을 실어 홍승표를 밀쳤다. 침으로 축축한 턱을 닦으려고 손을 드는 순간 홍승표에게 붙잡혔다. 뺨이 깨물린 두영은 당황한 표정으로 홍승표를 보았다. 가끔가다 그가 하는 행동이 개 같다고는 생각했는데, 오늘은 진짜 발정이 난 개처럼 행동했다.

두영은 불안하게 그의 어깨 너머를 바라봤다. 아직 사람들이 한창 활동하는 시간이고, 어제처럼 사장님이 기습적으로 방문할 수 있어 불안했다. 흔들리는 두영의 눈동자를 발견한 홍승표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괜찮아. 내가 너 가리고 있어서 밖에선 안 보여.”

그는 두영을 달래면서 목덜미에 코를 파묻었다. 두 팔로 한 줌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고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두영은 갑자기 얌전해진 홍승표의 행동에 눈을 끔뻑였다. 방금까지 자신을 몰아붙인 사람과 동일 인물 같지 않았다.

“오늘 일 끝나고 내 집으로 와.”

이런 분위기에서 자기 집으로 오라는 건 목적이 투명했다. 두영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미안…….”

두영의 거절에 홍승표는 팔에 힘을 실었다.

“왜?”

“할머니가 기다리셔서…….”

“그런데?”

두영은 그의 반문에 조금 곤란했다. 야간 일을 하는 김춘녀의 고정 휴무일은 주말이었다. 게다가 김춘녀는 한시도 가만 있지 않았고 여기저기 일을 도와주러 다니기 바빴다. 그래서 주말 빼고 같이 밥 먹을 시간이 없었다.

“할머니가 야간 일을 하셔서… 그래서 주말 아니면 잘 못 봐.”

그리고 허삼혁은 일주일째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두영은 이 불완전한 평화가 소중했다. 허삼혁이 없는 집을 상상하면 숨통이 트였다.

홍승표가 살짝 구부러진 등을 펴고 똑바로 섰다. 두영은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시선이 불편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홍승표가 두영의 턱을 잡고 들어 올렸다.

“눈 피하지 마.”

어딘가 갑갑해하는 것 같은 홍승표의 얼굴에 두영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 기분이 안 좋아 보…….”

“그딴 시궁창에 돌아가서 뭐 하게?”

높낮이 없이 격양된 목소리에 두영은 목구멍을 조였다.

“곧 죽을 늙은이 뭐가 좋다고.”

순간 두영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고 그의 입술과 눈동자를 번갈아 쳐다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홍승표는 굳게 입을 다물 뿐이었다. 그제야 두영은 그가 말실수한 게 아님을 알아챘다.

두영은 지금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입을 뻐끔거렸다. 자신이 홍승표에게 한 실수가 있는지 생각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왜, 그런 말을…….”

힘없이 꺼져 가는 두영의 목소리에 홍승표는 눈썹 앞머리를 살짝 구겼다. 그러고는 터진 수도꼭지처럼 말을 토해 냈다.

“넌 의지박약이야. 시궁창 같은 곳에서 벗어날 의지가 없어. 어렸을 때부터 맞고 자라 폭력에 길들어진 거라고. 등골이나 빨리면서 누가 누굴 부양해. 덜떨어졌으면 얍삽하기라도 하든가.”

두영은 저를 향해 쏟아지는 오물을 저항 한 번 못 하고 뒤집어썼다. 홍승표는 두영의 허벅지 사이에 다리를 집어넣고 빈틈없이 밀착한 상태로 말을 이었다.

“네가 그렇게 맞을 동안 네 소중한 할머니는 뭐 했는데? 맨날 술만 처먹는 인간, 자기 몸으로 낳았다고 품는 늙은이가 뭐가 좋아. 넌 그냥 보험이야 착취당하는 거라고. 지금까지 일하지 말고 공부하란 소리 한 번이라도 들은 적 있어? 당연히 없겠지. 돈도 안 벌어 오는 애비 대신 너라도 벌어야 굶어 죽지 않을 테니까.”

공부. 두영은 단 한 번도 공부하라는 말을 들어 본 적 없었다. 모두가 입시로 스트레스를 받을 때 두영은 외로이 자유로웠다. 자신은 공부에 관심이 없었고, 대학 안 가도 충분히 먹고 산다는 말을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들으면서 컸으니까.

“단 한 순간도 억울한 적 없어? 네 인생이 왜 그렇게 시궁창인지. 진짜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손자였으면 진작 애비랑 너를 분리해야 했어. 그것도 안 되면 손주 대신 처맞아 주던…….”

살과 살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세게 울렸다. 얼굴이 옆으로 돌아간 홍승표는 그 상태로 눈동자만 굴려 두영을 보았다.

그리고 발견했다. 눈가를 붉게 물들인 채 겨우 참아 내고 있는 두영을.

두영은 홍승표의 뺨을 때린 손을 말아 쥐었다. 그런데도 떨림이 멈추지 않아 반대쪽 손이랑 깍지를 끼었다.

“나, 는… 어떤 취, 급을 당해도 괜찮고… 어떤 소릴 들어도 괜찮지만… 할머니, 우리 할머니 욕은… 하지 마.”

습윤한 목소리가 모스부호처럼 끊겼다. 홍승표는 당장 사람 하나 죽일 것 같은 얼굴이었다. 뼛속까지 얼릴 칼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휘날리는 듯한 재앙이었다. 두영은 무섭지 않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눈앞에 실핏줄이 그려진 그의 눈을 보고 있으면 무력감이 휘몰아쳤다.

홍승표가 손끝으로 입술을 쓸며 얼굴을 다시 돌렸다. 점점 빨갛게 부어오르는 그의 뺨을 두영은 무심코 감쌀 뻔했다.

그의 눈동자가 희석되지 않은 원액처럼 가라앉는 순간이었다.

“시발.”

홍승표가 나직이 욕을 뇌까렸다. 이성이 돌아온 그는 그제야 곡예를 타는 듯한 두영의 숨소리를 인지했다. 괴물 앞에 선 피식자처럼 간신히 버티고 선 두영의 모습에 홍승표는 착잡하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방금까지 아슬아슬한 표면 장력처럼 쌓인 분노가 한순간에 증발했다. 머저리 같은 자신은 이 순간에도 제 뺨에 남은 허두영의 손길을 음미하고 있었다. 스스로가 불러온 말로에 비웃음 말고 줄 게 없었다.

침음을 삼킨 홍승표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카페를 나섰다. 두영은 홍승표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덩그러니 서서 바닥만 노려보았다.

완연한 저녁이 되자 가로등이 깜박깜박 반짝이며 켜졌다. 느지막이 정신을 차린 두영은 몸에 밴 행동대로 움직였다. 고무장갑을 손에 끼우고 개수대를 돌아봤으나 텅 비어 있었다.

“아… 아까 했지.”

눈을 느리게 끔뻑인 두영은 일단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무작정 칼을 들고 과일을 깎았다. 그러나 하나를 다 깎기도 전에 손을 그어 버렸다. 기다란 상처를 벌리자 새빨간 피가 곧바로 흘러나왔다. 혼란스러운 기분이 조금 상쇄되는 듯하여 일부러 상처를 치료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그렇게 매섭게 흐르는 시간을 아무 대가 없이 보내 주던 두영은 벽에 등을 기댄 채 주르륵 무너졌다. 아무래도 오늘 일은 그르친 것 같았다. 이만 문 닫고 퇴근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도무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한동안 찬 바닥에 앉아 있어야 했다.

그의 뺨을 때린 손이 아직도 저릿저릿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는 뒷모습은 다음 계절을 향해 떠나는 바람 같았다.

우리 엄마도 그렇게 갔는데. 아버지가 때려서.

“내가 때려서…….”

작게 읊조린 두영은 음식을 잘못 먹은 것처럼 속이 더부룩했다. 참지 못한 구역질이 목구멍을 비집고 올라왔다. 두영은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개수대에 얼굴을 박고 속을 게워 냈다. 계속되는 토악질에 눈알이 터질 것 같았다.

이 순간에도 게워 낸 음식이 아깝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못마땅했다. 애초에 저와 어울리지 않는 음식은 입에 대지도 말아야 했다. 그게 호의가 됐든, 배려가 됐든, 애정이 됐든 전부 마찬가지였다.

입을 헹군 두영은 얼굴에 맺힌 물을 옷소매로 훔쳤다. 그 순간 음습한 바람이 두영의 목덜미를 핥고 지나갔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감각에 뒤를 홱, 돌아보았다. 카페는 저 말고 아무도 없었다. 갑자기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허두영.’

“―!”

바람 같은 속삭임이 귓가에 스쳤다. 두영은 재빨리 탈의실로 들어가 구석에 몸을 구겨 넣었다. 귀를 틀어막고 눈을 질끈 감았다. 한참을 부동자세로 있다가 천천히 두 눈을 떴다.

공중에 떠 있는 발이 코앞에 있었다. 박은식의 발이었다.

“으윽! 오지 마! 오지 마!!”

구석에 내몰린 상태로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비루한 몸뚱이를 더 작게 옹송그릴 뿐이었다. 그때 박은식이 두영의 어깨를 잡아챘다. 두영은 더 크게 몸부림쳤다.

“놔! 놔아!!”

앞에 있는 것을 마구잡이로 밀쳤다. 박은식이 당황한 듯 물러났지만, 다시금 두영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영아! 정신 차려!”

귀에 익은 목소리에 두영의 발작이 서서히 멈추었다. 두영은 머리를 감싼 팔을 내리고, 질끈 감은 눈을 떴다. 그러자 한껏 당황한 유재민이 보였다. 순간적으로 안심한 두영은 묵직한 눈물을 후두둑 떨어뜨렸다.

“어… 왜, 왜 오셨…….”

“네가 어제처럼 늦게까지 일하고 있을까 봐! 대체 무슨 일이야?”

“아… 죄, 흑… 죄송…….”

얼굴을 찡그린 두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흉측하게 흔들리는 자신의 목소리를 타인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았다. 넘어오는 울음을 억지로 집어삼켰더니 목이 찢어질 것 같았다.

유재민은 두영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작고 동그란 뒤통수를 손으로 쓰다듬고 들썩거리는 등을 반복적으로 쓸어 주었다. 다정한 위로에 두영은 결국 눈물을 왈칵 터트렸다. 유재민은 헐떡이는 두영을 계속 다독여 주며 진정할 때까지 기다렸다.

뒤죽박죽 호흡하던 두영이 차츰 진정했다. 유재민은 두영을 품에서 떼어 내고 얼굴을 살폈다.

“찐빵 됐네.”

“죄송합니다…….”

손등으로 얼굴이 뭉개지도록 닦은 두영은 유재민이 가져다준 물을 꼴깍꼴깍 마셨다. 그러고는 잘못한 강아지처럼 눈치를 살폈다.

“왜 또 눈치를 보는 거지요?”

“죄송…….”

“악! 뭐 또 뭐가 죄송한데?!”

고개를 숙인 두영은 소심하게 머그잔을 조몰락거렸다. 유재민이 한숨을 늘어뜨리며 물었다.

“귀신이라도 본 거야?”

두영은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헉, 진짜?”

“…네.”

두영은 양심에 찔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유재민에게 비정상적인 모습을 보인 데다가 거짓말까지 늘어놓으려니 그를 볼 면목이 없었다. 그렇지만 자신의 비밀을 누군가에게 말하는 건 힘들었다. 때론 진실보다 거짓말이 평화를 유지하기 편했다.

호들갑을 다 떤 유재민이 휴지를 뽑아 두영에게 건넸다. 두 손으로 휴지를 받은 두영은 얼굴을 벅벅 닦으며 웅얼웅얼 말했다.

“죄, 킁, 송합니다.”

“또 한 번만 죄송하다고 하면 시급에서 뗀다?”

두영은 코를 들이마시고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그리고 힐끔 눈치를 봤다.

“안 까 인마. 얼른 일어나, 집에 데려다줄게.”

“이, 이제 괜찮아요.”

“뭐래 찐빵이.”

두영은 제 뺨을 손으로 쓸었다. 만지는 걸로 부었는지, 안 부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카페 메인 조명은 꺼지고 은은한 간접 조명만 켜진 상태였다. 소름이 쫘악 끼친 두영은 서둘러 카페에서 벗어났다.

골목 어귀에 주차한 유재민의 차는 작고 아담한 스포츠카였다. 두영은 무의식적으로 홍승표의 차와 유재민의 차를 비교했다. 이 차도 안락하고 따뜻했지만, 어쩐지 홍승표의 차만큼 편하지 않았다.

차는 유유히 골목을 빠져나갔다. 아까부터 차 내부에서 반복적으로 무슨 소리가 울렸다. 두영은 뭔지 잘 몰랐기에 입을 다물고 창밖만 내다보았다. 의문의 소리는 목적지에 도착하고 풀렸다. 조수석 안전띠 미착용 알림이었다. 유재민도 뒤늦게 알아채고 두영을 멀거니 보았다.

“…여기 오는 길에 단속 카메라가 있었나?”

“죄송하…….”

습관처럼 사과하려던 두영은 시급을 깐다는 유재민의 말을 떠올리고 대답을 끝맺지 못했다. 피식 웃은 유재민이 손목을 돌리며 말했다.

“집이 어디야? 집 앞까지 데려다줄게.”

“여기 세워 주셔도 돼요. 근처예요.”

두영은 뻑뻑한 어조로 또 한 번의 거짓말을 늘어놨다. 몇 년 전 달동네는 S자형 큰길을 뚫고 아스팔트를 깔았다. 자동차로 달동네 중턱까지 오를 수 있었고, 미끄럼 방지 패드도 깔아 훨씬 걸어 올라가기 편했다.

두영은 차 문을 열고 나왔다. 허리를 꾸벅 숙이고 방향을 틀자 유재민이 두영을 불러 세웠다.

“두영아!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네 아빤데 그거 하나 못 들어주겠니?”

능청스러운 그의 말에 두영은 손바닥을 살짝 흔들어 보이며 인사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사장님.”

보드랍게 웃은 유재민이 두영을 따라 손을 마주 흔들었다.

두영은 떠나는 유재민의 차를 조용히 지켜보다가, 올라가야 할 길에 눈길을 주었다. 끝없이 이어진 계단은 계속 걷다 보면 하늘에 닿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곳엔 천국은 없었다.

데워 줄게 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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