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졸업식
두영은 오랜만에 학교에 가려니 긴장이 돼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졸업식. 드디어 학교생활을 마침표 찍는 날이었다.
불투명한 기대와 알 수 없는 섭섭함이 공존했다. 분명한 건 제 학교생활의 추억을 곱씹는 아름다운 시간은 아니었다.
이르게 도착한 교실은 냉기가 가득했고 의자가 얼음장 같았다. 괜히 일찍 온 것 같아 후회했으나, 사무실은 집과 학교 한중간에 있어 일이 끝나면 바로 학교에 오는 게 체력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훨씬 나았다. 뭐 이것도 이제 마지막이지만.
“마지막…….”
나지막이 중얼거린 두영은 얼굴 앞으로 왼손을 가져와 조용히 응시했다. 뺨을 때린 것에 대해 사과하고 싶어 새벽에 그의 집 앞에서 몇 번이나 망설였다. 그러나 문 한 번 두드려 보지 못하고 맨션에서 나와야 했다.
벨이라도 눌러 볼걸.
뒤늦게 후회가 밀려온 두영은 책상에 엎어져 구부린 팔 안쪽에 머리를 마구 문질렀다. 그와 유일한 공통점이 같은 학교에 다닌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졸업까지 하면 그 유일함마저 사라진다.
그러니까 부디, 홍승표가 졸업식에 왔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그를 볼 기회가 영영 없을 것 같았다.
두영은 차갑게 굳은 손을 허벅지 틈에 끼워 넣었다. 몇 번 값비싼 옷을 입어 봤다고 이깟 추위에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괜히 자존심이 상해 허벅지를 꼬집었다. 공허함을 덜어 낼 때는 자해만큼 좋은 게 없었다.
그러나 손에 힘이 없는 건지, 허벅지 살이 얼어서 그런 건지 아무리 세게 꼬집어도 아프지 않았다. 도리어 더 우울해질 뿐이었다.
쓸쓸한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겨울의 울부짖음일지 몰랐다. 마지막 한 자락의 체온까지 앗아 가는 냉골에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두영은 공허한 시선으로 옆자리를 바라봤다. 멀대처럼 큰 자리의 주인이 없으니 바깥 경치가 훤히 보였다.
오늘이야말로 눈이 내릴 것 같은 웅장한 풍경이었다. 푸르스름한 하늘 아래 벌거벗은 나무가 바들바들 떨었다. 넓게만 느껴지던 운동장이 오늘따라 작아 보였고, 저 멀리 떨어진 건물이 새삼 낯설게 느껴졌다.
이 풍경을 보는 것도 마지막이었다. 시원도 하지 않고, 섭섭도 하지 않았다. 학교는 제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으니 저도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을 것이다.
그때 복도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곧 교실 문이 열리고 쌍꺼풀과 곱슬머리가 들어왔다. 그들은 패딩 안에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아직 젖살이 덜 빠진 앳된 얼굴이라 차림이 미숙해 보였다.
“아 학교 개추워!”
뒤늦게 교실에 들어온 이가 큰 소리로 말했다. 그는 옆 반 김면식이었다. 김면식은 두영을 발견하고 잠시 멈칫했다. 그러고는 교실을 둘러보며 무언가를 확인했고, 쌍꺼풀과 곱슬머리에게 다가갔다.
“왕따 혼자다. 이거 말 걸어도 되는 거냐?”
김면식이 제 친구들에게 빈정거리다가 두영을 겨냥했다.
“야 왕따, 오늘은 혼자냐? 맨날 붙어 다니는 재수 없는 새끼는 아직 안 온 거냐, 올 일이 없는 거냐?”
아무래도 재수 없는 새끼는 홍승표를 말하는 것 같았다. 저런 말을 들을 정도로 학교에서 홍승표와 그렇게 붙어 다녔었나? 그래 봤자 한 달도 채 안 될 텐데 말이다.
잠시 머뭇거린 두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다시 책상에 엎어졌다. 자신이 김면식에 관해 아는 건 몇 개 없었다. 그가 이주학과 중학교 동창이라는 점과 고등학교에 올라와서 사이가 틀어졌다는 것뿐이었다.
김면식과 친구들은 다시 자기들만의 이야기를 꾸려 가기 시작했다.
“너네는 부모님 오시냐?”
“쪽팔리게 왜 와? 설마 너는 오냐?”
“어 시바. 그래서 존나 쪽팔려. 누나까지 온대.”
“누나 예쁨?”
“꺼져 새끼야.”
그들의 수다를 불가피하게 듣게 된 두영은 생각보다 졸업식에 불참하는 가족이 많아 조금 안심했다. 초등학교랑 중학교 졸업식은 가족이 꽃을 들고 오는 경우가 많아, 두영은 혼자 있는 게 어색할 때면 화장실에 가서 숨었다.
하지만 이번 졸업식은 따로 강당에 갈 필요도 없었다. 교실에서 티브이로 송출되는 교장 선생님 연설을 듣고 담임과 인사하면 끝이었다. 저들과 자신은 처지가 달랐지만, 오늘은 혼자라는 존재가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다. 새삼 사람 마음이란 게 참 간사했다.
그때 푹신한 무언가가 제 머리를 후려쳤다. 두영은 엎어진 몸을 천천히 일으켜 그 정체를 확인했다. 칠판 지우개였다. 책상 위에는 하얀 분말 가루가 흐트러진 상태였다.
너무 오랜만에 당한 일에 두영은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어야 했다.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쪽으로 시선을 보내자 김면식이 교탁에 몸을 기대고 서 있는 게 보였다.
“뭐해? 안 주워 오고.”
김면식이 말했다.
쌍꺼풀과 곱슬머리는 서로의 머리를 맞댄 채 피식피식 웃음을 흘렸다. 두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지우개를 주워 교실 앞으로 걸어갔다. 열 걸음 채 되지도 않는 거리가 지구 반대편처럼 멀었다. 낡은 나무 바닥의 삐걱거림이 제 숨소리와 같아서 그대로 건물과 함께 무너지고 싶었다.
김면식이 가까이 다가온 두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두영이 그의 손에 지우개를 올려놓는 순간, 김면식이 손을 뒤로 빼며 지우개를 떨어뜨렸다.
두영은 그 장면이 슬로모션처럼 보였다. 그래서 시간이 정지한 사람처럼 떨어지는 지우개를 망연히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추락하는 건 지우개가 아니었다. 자신의 너덜너덜한 마음이었고, 존중받아 마땅하지 않은 자신의 존엄이었다.
김면식이 자리에 멀뚱멀뚱 서 있는 두영을 보며 말했다.
“얘 원래 이렇게 굼뜨냐? 존나 답답해서 개때리고 싶네.”
곱슬머리가 대답했다.
“아서라. 쟤는 이주학 전용이라 이주학 친구들도 쉽게 못 건든다.”
“하, 그럼 돼지 새끼랑 빠구리 뜨는 사이냐?”
“미친놈, 지 꼴리는 대로 해석하는 거 보소? 이주학 전용 셔틀이라고 병신아.”
두 사람의 대화를 잠잠히 듣고 있던 쌍꺼풀이 입을 뗐다.
“근데 이주학 호모 맞는 것 같아. 옆 반 전철민이 걔 어떤 아저씨랑 모텔 들어가는 거 봤대.”
“으엑, 아저씨? 시발 그럼 누가 박히는 거냐?”
“어른 공경하려면 대 줘야지.”
쌍꺼풀과 곱슬머리가 까마귀 떼처럼 웃었다. 그 둘과 달리 김면식은 홀로 정색하며 토하는 시늉을 했다.
“아저씨? 염병하네. 걔 아동 성애자야.”
김면식의 말에 곱슬머리가 미간을 와락 구겼다.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너 이주학 싫어한다고 너무 막 뱉는 거 아니냐?”
“아, 맞다고! 옛날에 그 새끼랑 피씨방 갔는데, 이주학이 휴대폰 놓고 화장실 가길래 심심해서 걔 휴대폰 본 적 있었거든? 근데 갤러리에…….”
조용히 듣고 있던 두영은 김면식의 입에서 나온 단어에 피가 싸하게 말랐다.
아동 성애자.
그 한 단어에 꽂혀 더 이상 김면식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한순간에 제가 있는 곳이 눅눅한 암실로 변했다. 몸 위로 벌레가 기어다니는 기분이었다. 등 뒤를 감싸는 역겨운 숨결에 토악질이 올라왔다.
김면식은 계속해서 떠들었다.
“그래서 내가 그 자식 돌아오자마자 이게 뭐냐고 따졌더니, 갑자기 그 새끼가 회까닥 돌아서는 주먹부터 휘두르잖아. 아니, 존나! 내가 그 멧돼지 새끼를 어떻게 이기냐고!”
잔뜩 흥분한 김면식이 별안간 두영을 쳐다보았다.
“야.”
두영은 저를 가둔 암실에서 빠져나와 김면식과 시선을 애매하게 맞췄다.
“너는 내가 이주학 폰 본 거 어떻게 생각하냐? 너도 내 잘못 같냐?”
허리를 굽힌 김면식이 바닥에 떨어진 지우개를 주워 두영의 얼굴에 문질렀다. 분필 가루가 얼굴에 있는 구멍이란 구멍에 모조리 들어와 눈을 뜰 수도, 숨을 쉴 수도 없었다.
“콜록, 콜록…….”
“묻잖아 넌 어떻게 생각하냐고. 아니면 지금 니 애인 편드는 거냐? 진짜 돼지 새끼한테 엉덩이 대 주는 거야?”
“솔직히 그 영상도 돌아다니는 마당에 똥개라고 안 따먹혔을까.”
쌍꺼풀의 말에 곱슬머리가 거들었다.
“아, 그러네. 그 영상이 있었지? 하기야 뒤진 놈만 불쌍하지. 이주학은 느낌만 냈고.”
때 지난 연민에 김면식이 미간을 와락 구겼다.
“존나 역겹지 뭐가 불쌍하냐? 당할 만했으니까 당했겠지. 사실은 존나 즐기고 갔을, 윽!”
김면식이 뒤로 넘어지면서 대화가 끊겼다. 두영은 그를 깔고 앉아 주먹을 어깨 위로 쳐들었다. 그리고 김면식의 얼굴을 향해 고공 낙하하는 순간, 배가 걷어차이며 뒤로 멀찌감치 날아갔다.
“씨발롬이! 처돌았나?!”
바닥에서 벌떡 일어난 김면식이 두영의 복부를 두어 번 걷어차고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고는 다시 두영의 얼굴을 지우개로 문질렀다.
“왜? 너도 몸캠이라도 찍혔냐? 니 얘기 하는 것 같아 찔렸냐고!”
두영은 팔다리를 휘두르며 저항했지만, 어느새 이쪽으로 와서 일을 거드는 쌍꺼풀과 곱슬머리 때문에 얼굴을 그대로 대 주고 있어야 했다.
한참 만에 두영을 억압한 손길이 떨어졌다. 두영은 분필 가루 때문에 눈을 뜰 수가 없어 바닥을 더듬어야 했다.
그때였다. 저를 비웃는 그들의 웃음 속에서 카메라 셔터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두영은 손으로 막아 낼 새도 없이 위액을 울컥 쏟아 냈다.
“아 미친 더럽게!”
“야! 빨리 얘들 오기 전에 치워!”
닦을 만한 것을 찾던 김면식이 두영의 니트를 억지로 벗겨 냈다.
“정신 차리고 닦으라고!”
두영은 자신이 쏟아 낸 오물을 제 옷으로 묵묵하게 닦았다. 그리고 유령처럼 일어나 교실에서 걸어 나왔다. 일부러 다른 건물에 있는 화장실로 향했다. 종업식은 내일이라 3학년 건물 빼고 텅 비어 있었다.
두영은 세면대에서 세수를 하고 뒤통수도 물로 적셨다. 잘 닦였는지 확인할 수가 없어 그만 포기하고 니트를 손빨래했다. 손이 너무나 시려서 잠시 멈추고 손에 입김을 불었다.
두영은 물이 고인 세면대에서 거울로 시선을 옮겼다. 모든 게 거꾸로인 세상에 한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당장 창밖으로 뛰어내려도 이해될 만큼 많이 지쳐 보였다.
입술 양 끝을 억지로 끌어 올렸다. 애매하게 비틀어진 입이 우스꽝스러웠다. 차가운 공기와 달리 눈이 뜨거웠다. 어금니를 꽉 깨물자 앞턱이 호두처럼 오돌토돌해졌다.
니트 물을 쥐어짜 낸 다음 화장실 제일 끝 칸에 들어갔다. 변기 뚜껑을 닫고 앉아 멍을 때렸다. 아직도 목에 가루가 낀 것처럼 칼칼했다. 옷이 젖어 있는 상태라 너무 추웠다. 이빨이 타닥타닥 부딪치고, 힘을 준 목 근육이 뻐근했다.
학교는 역시 자신을 반겨 주지 않았다. 이주학이 없어도 제 존재는 여전히 밑바닥이었다. 홍승표가 있어서 유지된 평화는 그가 사라지자 한순간에 박살 났다.
홍승표의 말대로 이런 삶을 사는 건 다 제 탓일지 몰랐다. 자신이 살아 있어서 일어나는 일은 저만 사라진다면 다 끝나는 일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부정하던 것들을 인정하자 딱히 두렵지도, 불안하지도 않았다. 그냥 속이 텅 빈 것처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아채지 못했다. 화장실 밖으로 나와도 하늘은 여전히 먹구름 범벅이라 시간을 가늠할 수 없었다. 두영은 느릿느릿 교실로 향했다. 도착한 교실은 아무도 없었다. 이미 졸업식이 끝난 상태였다.
두영은 발바닥에 타르를 범벅한 듯한 걸음으로 천천히 교실에 들어갔다. 가방을 챙겨 메고 교탁 앞에 서서 교실을 둘러봤다. 처음인 것 같았다. 이렇게 자세히 교실을 둘러보는 것이.
1년을 지낸 교실인데도, 3년을 다닌 학교인데도 낯선 공간 같았다. 교실의 찬 공기도, 오래된 나무 바닥도, 여름마다 쟁탈전한 선풍기도, 시간 맞춰 틀어 주던 에어컨도, 낙서로 가득한 책상도, 높이가 들쑥날쑥한 의자도, 양파를 올려 두던 사물함도 전부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었다.
시선의 종착점은 홍승표의 책상이었다. 두영은 조금 망설이다가 발을 내디뎠다. 그의 책상을 손으로 쓸고 의자를 빼서 앉았다. 옆얼굴을 눕히자 차가운 플라스틱 감촉 때문에 닭살이 돋았다.
모두가 떠난 학교는 소름이 끼치는 적막만 가득했다. 그토록 끔찍하게 여긴 학교였는데, 지금은 자발적으로 남아 누군가를 생각하는 장소로 바뀌었다. 과거의 저라면 감히 상상도 못 했을 일이었다.
점심도 되지 않았건만 하늘이 우중충하여 교실 분위기도 음침했다. 무언가가 보일 것 같아 불길했다. 두영은 이만 교실을 등지고 나왔다. 두고 온 물건이라도 있는 듯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교문을 지나쳐 골목에 들어섰다. 방학 동안 다니지 않았던 길이라 새삼 어색했다. 날씨 때문에 어딘가 을씨년스러운 골목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지만, 걸음에 속도가 붙지 않았다. 도리어 제자리에 멈춰 설 뿐이었다.
두영은 무기력한 제 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앞으로 계속 이 상태로 살아야 하는 게 아닌지 막막했다.
홍승표의 뺨을 때린 벌을 받는 걸까? 자신이 감당하기에 너무 커다란 벌이었다. 그럼 자기의 화를 못 이겨 아들을 때리는 허삼혁은 얼마나 큰 벌을 감당하고 있는 걸까? 이주학은? 김진호는?
두영은 팔로 눈가를 거칠게 문질렀다. 갑자기 찬 바람이 불어 눈이 시렸다. 가빠지는 숨을 가다듬고, 멈춘 걸음을 다시 내디뎠다.
오늘따라 골목의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
새벽의 쪽빛이 창으로 들어왔다. 홍승표는 빛의 각도로 시간의 흐름을 예측했다. 며칠 날밤 새우니 정신이 몽롱했다. 가끔 등장하는 허두영의 환각을 볼 때면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얼마나 깊은 정신적 교감을 했다고 이러는지 어이가 없었다.
곧바로 기분이 빠르게 낙하했다. 주워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삐딱선 타는 게 느껴졌다. 이 모든 불쾌한 감각의 원인은 그날 예정에도 없이 홍승민을 만났기 때문이고, 녀석이 찾는 할머니 때문이었다. 억지인 걸 자신도 잘 알았다. 그냥 누구 하나 좆빠지게 원망하고 싶은 것뿐이었다.
그날의 실행되지 않은 그의 계획은, 일이 끝난 허두영을 집으로 데려와 배부르게 먹인 다음 차가운 몸의 체온이 제 체온과 같아질 정도로 끌어안고 뒹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귀가 본능이 투철한 녀석 때문에 모든 계획이 틀어졌다.
“답답한 새끼…….”
그는 억지로 화를 참으면 눈이 터질 수 있다는 걸 그날 처음 경험했다. 아직도 한쪽 눈이 불그스름했다.
차라리 허두영이 저를 욕하고 때렸다면 이리도 찝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녀석은 입을 다무는 걸 택했다. 갓 태어난 새끼처럼 오들오들 떨며, 맞을 거라고 확신하는 녀석의 표정에 괜히 입 안이 썼다.
그러나 자신이 내뱉은 말은 후회하지 않았다. 그쪽으로 타고난 성적 지향이 없는 이상 맞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눈도 못 뜰 정도로 처맞으면서 감히 누가 누굴 부양하는지.
다만 감정적으로 몰아붙이던 자신을 죽이고 싶었다. 그건 저답지 않은 불찰이었다. 비뚤어진 제 욕망을 드러내는 게 아닌, 녀석을 위해서 해 주는 말처럼 잘 달랬어야 했다.
“…미친놈.”
홍승표가 자조하며 중얼거렸다. 이러다가는 녀석의 발이라도 핥을 것 같았다.
늘어진 몸을 일으킨 홍승표는 욕실로 들어가 몸에 찬기가 스밀 때까지 찬물로 씻고 나왔다. 졸업식이니 대충 편한 사복을 입고 느지막이 학교로 향했다.
교실에 들어서자 교장이 한창 연설이 중이었다. 그는 자리에 앉아 빈 옆자리에 시선을 주었다. 가방이 걸려 있는 걸 보면 학교에 온 것 같은데 가방 주인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 다른 자리에 앉아 있는지 교실 구석구석을 훑었다. 눈에 띄는 외형이라 이렇게 지독할 정도로 안 보일 리 없었다. 다시금 불만족스러운 기분에 열이 뻗쳤다.
의자에서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문득 허두영의 책상에 하얀 가루가 묻어 있는 걸 발견했다. 홍승표는 손끝에 의문의 가루를 묻혀 냄새를 맡았다. 분필이었다. 눈썹을 까딱거린 그는 분필이 묻은 손으로 앞자리에 앉은 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허두영은?”
질문을 받은 이는 자기 어깨에 묻은 하얀 가루를 보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나도 몰라.”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언제야?”
“몰라. 내가 왔을 땐 이미 빈자리였어.”
홍승표는 작게 한숨을 뱉었다. 허두영이 있을 만한 곳을 생각하며 다시 몸을 일으키는데, 애타게 찾는 이름 석 자가 정확히 귀에 꽂혀 들어왔다. 기민하게 주변을 둘러봤다. 분명 여기 있는 사람 중 누군가가 허두영의 이름을 말했다.
그는 한쪽 귓바퀴를 잡아당기고 소리에 집중했다. 교장의 연설이 거슬려 티브이를 끄고 싶었다. 누군가가 한 번 더 말하기를 고대하는 일순간, 특정한 곳으로 시선이 향했다. 그리고 매끈한 미간을 구겼다. 얼굴은 아는데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다시 앞자리에 앉은 이에게 물었다.
“쟤들, 이름이 뭐야?”
“…누구? 아아, 쌍꺼풀 진한 얘는 박승준이고, 곱슬머리는 이철호야.”
홍승표는 그들을 무심한 시선으로 보았다. 휴대폰을 보며 쥐새끼처럼 낄낄대는 게 당장 짓밟고 싶었다. 그는 소리 없이 그들에게 다가가 박승준의 휴대폰을 빼앗았다. 화면에는 하얀 가루를 범벅 한 허두영이 있었다.
서늘한 얼굴로 모든 사진을 확인한 그는 메신저 앱에 들어갔다. 오늘 날짜가 찍힌 대화방에 모조리 들어가 사진이 공유됐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아직 삼자에게 공유하지 않았다.
그때 담임이 목을 울리며 홍승표에게 눈치를 줬다. 마침 그들의 뒷자리가 비어 있어 자연스럽게 착석했다. 그리고 졸업식이 끝날 때까지 납작한 두 뒤통수에 시선을 고정했다.
졸업식이 마무리 지어지고 사람이 빠졌다. 홍승표는 빼앗은 휴대폰을 미끼로 그들과 함께 구 체육관으로 이동했다. 동시에 대화방에서 같이 떠들던 김면식을 소환했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자, 김면식이 해맑은 얼굴로 체육관 안쪽에 들어섰다. 홍승표를 발견한 김면식은 그 앞에 주눅 든 채 서 있는 이철호와 박승준을 발견하고 딱딱하게 말했다.
“이게 뭔 상황이지?”
홍승표는 손에 걸린 담배를 까딱거리며 말했다.
“뭐 하긴, 담배 피우잖아.”
“너 이주학이랑 놀지 않았냐?”
“다리뼈를 부러뜨리며 놀았지.”
넌지시 이주학을 먼지 나도록 팬 그날을 언급하자 김면식이 눈을 크게 떴다.
“와씨! 그게 너였냐? 난 진짜 돼지 새끼 줘 팬 사람 만나면 형님으로 모시려고 했는데! 형님 반갑습니다!”
홍승표는 장난스럽게 손을 내민 김면식을 물끄러미 보다가 스스럼없이 마주 잡았다. 그리고 그를 제 앞으로 잡아당겨 얼굴에 무릎을 꽂았다. 단번에 정신을 놓은 김면식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옷을 뒤져 휴대폰을 찾았다.
잠금을 풀고 갤러리에 들어가는데 언뜻 뒤쪽에서 소란스러움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자 쥐새끼 한 마리가 출입문 쪽으로 몰래 걸어가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친 이철호가 움찔 놀라며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벽에 붙어 섰다.
홍승표는 이철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너, 폰 이리 내놔. 잠금 풀어서.”
겁을 잔뜩 집어먹은 박승준이 끼어들었다.
“사, 사진 지울게. 허두영 사진 때문이지?”
눈동자만 움직여 시선을 옮긴 홍승표가 대뜸 한숨을 늘어뜨리며 중얼거렸다.
“이래서 머리가 나쁜 새끼들은 답도 없다니까.”
발끈한 이철호가 씨근덕대며 지껄였다.
“야, 막말로 니가 왜 지랄인데? 니한테 피해 가는 거 없잖아!”
“그, 그래! 우리가 가만있을 것 같아? 폭행죄로 신고할 거야!”
“신고?”
홍승표가 낮은 목소리로 응수하며 눈을 치떴다.
“신고해 봐 그럼. 너희들이 원하는 그림이 나오는지 확인해 보게. 다만 경찰이 오기 전까지 너희 뼈가 멀쩡히 붙어 있을 거라고 착각하지 마.”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그가 시선을 피하는 두 사람을 느리게 훑었다.
“너희들이 왜 당장이라도 쌀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아? 내가 말로만 겁주는 게 아니란 걸 너희도 알아서야. 니네, 부모나 선생들은 하나도 안 무섭잖아. 근데 나는,”
홍승표가 한 템포 쉬고 말을 이었다.
“먼지 나게 때려.”
아슬아슬한 공기층이 한계를 모르고 높아졌다. 홍승표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카메라 앵글을 그들에게 조준했다.
“뭐 해? 얼른 안 벗고.”
홍승표가 피가 마를 정도로 건조하게 요구했다.
클럽에서 허두영이 손님을 받을 뻔한 날. 그날만 생각하면 두개골이 나사로 조여지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그날 클럽을 가지 않았더라면, 일찍이 룸에서 빠져나오지 않았더라면, 호텔로 향하던 길에서 돌아가지 않았더라면 허두영은 두 번 다시 재기할 수 없을 만큼 망가졌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자신이 없는 사이에 또 무슨 일이 터졌다. 허두영과 관련된 일에 조금씩 늦을 때마다 말로 설명 못 할 만큼 기분이 더러웠다.
이미 지나간 일을 후회해 봤자 늦었다. 그러니 과거의 실수를 거름 삼아 저 쥐새끼들을 곱게 찍은 뒤, 지금쯤 어딘가에 숨어서 외로이 울고 있을 녀석에게 선물할 것이다.
널 괴롭힌 인간들이 이렇게 하찮은 존재라고 덧붙이며.
이때 박승준이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홍승표가 한쪽 눈썹을 들썩이며 말했다.
“울지 마. 비위 약하니까.”
“찌, 찍지 말고 한 번만 봐주라. 제발…….”
“너도 허두영 찍었잖아.”
그의 단조로운 대꾸에 이철호가 가방을 바닥에 내던졌다.
“씨발! 니를 찍은 게 아니잖아요. 그리고 어차피 왕따 새끼는 이미 팔릴 대로 팔린……!”
박승준이 급하게 이철호의 입을 틀어막았다. 홍승표가 사늘한 얼굴로 그들을 응시하며 낮게 읊조렸다.
“방금 했던 말 다시 말해.”
“…….”
“허두영이 얼마나 팔릴 대로 팔렸는지 떠들어 보라고.”
성큼성큼 그들에게 걸어가며 말하자, 지레 겁을 먹은 박승준이 뒷걸음질 치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홍승표가 한쪽 발을 들어 박승준의 명치를 즈려밟았다. 곧바로 이철호가 그에게 달려들었지만, 손쉽게 제압당하고 쓰러진 김면식의 몸뚱이 위로 내던져졌다.
“이, 이주학! 이주학!”
박승준이 크게 웅얼거렸다.
“이주학?”
눈썹을 구긴 홍승표가 나직이 되물었다.
“옛날에… 이주학 휴대폰에 허두영 섹스 비디오가 있다는 소문이 돈 적 있었어. 그, 근데 누구는 평범한 나체 사진이라고 하고, 누구는 아예 없다고 하고…….”
평범한 나체 사진. 홍승표는 그 단어를 속으로 되뇌며 계속 말하라는 의미로 박승준의 명치를 꾸욱 눌렀다.
“이, 이주학은 입만 열면 구라라서 우리도 걔가 한 말은 거의 걸러 들어……. 이주학이 졸업 직전까지 눈에 띄게 나대긴 했지만, 사실 고등학교 갓 입학했을 때만 해도 그렇게 대단하지 않았어. 그, 근데 박은식 영상 때문에…….”
박은식. 어딘가 처음 듣는 것 같지 않은 이름이었다. 홍승표는 그 이름을 언제 들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허두영이 그 이름을 웅얼대며 이상한 모습을 보였을 때인 것 같았다.
덩달아 떠오른 기억이 몇 가지 더 있었다. 허두영은 근처에 휴대폰이 있으면 섹스에 집중하지 못했다. 자신이 휴대폰으로 무엇을 하고 있으면 옆에서 뭐가 마려운 듯이 불안해했고, 카메라 앵글이 본인에게 향하는 걸 병적으로 싫어했다.
먼지가 떠다니는 구 체육관 창문 틈 사이로 가느다란 빛이 들어왔다. 빛줄기는 홍승표의 가슴을 관통했다. 그는 허공에 망연히 던진 시선을 금방 회수하지 못했다. 따로 맞추려고 하지 않았던 퍼즐이 한순간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는 바닥에 널브러진 쥐새끼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일말의 존엄이 없었다. 그저 기어다니는 벌레를 보며 어떻게 밟아 죽일지 고민할 뿐이었다.
밖으로 나온 홍승표는 휴대폰 전화번호부를 뒤지다가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새로운 습관이 빠르게 자리 잡아 틈만 나면 허두영에게 전화하려 했다.
카페로 바로 갔을까? 아니면 진짜 어디 숨어서 울고 있을지도 몰랐다. 당장 녀석이 뭐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다.
홍승표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려다가 피 묻은 제 손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제 피가 아닌 쥐새끼들의 피였다.
더러운 오물을 씻기 위해 가까운 수돗가로 향했다. 수압을 적당히 조절해 손을 씻었다. 벌레 새끼들은 몇 대 때리지도 않았는데 거품을 물고 기절해 버렸다. 싱겁다 못해 맹물을 들이켠 기분이었다.
손을 씻어도 불쾌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종국에 손이 떨려 둥글게 말아 쥐었다. 아득바득 튀어나온 힘줄을 보다가 수도꼭지를 내리쳤다. 몇 번이나 반복적으로 내리찍은 탓에 살이 찢어지고 피가 흘렀다. 그런데도 고양된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녀석을 향한 무수한 소문 중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간간이 허두영이 보이던 정신적 트라우마의 원인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녀석의 불우한 자아가 완성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아직 퍼즐이 더 필요했다. 어쩐지 흐릿한 안개가 제 시야를 가로막고 있는 듯했다.
그 순간 그가 옆을 돌아본 건 지극히 우연이었다. 학교 건물에서 두영이 나오고 있었다. 홍승표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 다시 두영에게 눈길을 주었다. 졸업식이 끝난 지가 언제인데 이제 학교에서 나오다니. 그동안 어디에서 뭘 했는지 상상하는 것만으로 턱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자연스럽게 기척을 죽이고 두영의 뒤를 밟았다. 녀석은 꼭 시련 맞은 주인공처럼 힘없이 걸었다. 차림도 어찌나 초라한지 셔츠 위에 마이만 걸친 상태였다. 뒤통수에는 지워지지 않은 하얀 가루가 묻어 있었다.
추위를 타지 않는 홍승표마저 코끝이 아릴 정도로 추운 날씨였다. 허두영의 젖어 있는 머리카락과 훤하게 드러난 목덜미가 많이 추워 보여 보폭을 크게 벌리고 거리를 좁혔다.
그 순간 갑자기 멈춰 선 두영에 그는 반사적으로 남의 집 대문에 납작 달라붙었다. 홍승표는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왜 숨었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호흡을 나눠서 뱉은 그는 얼굴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
뒷모습뿐이지만, 녀석은 울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초라하게 무너진 모습에 눈을 뗄 수 없었다. 희미하게 떨고 있는 어깨를 어떻게 해 주고 싶었다.
한동안 고개를 떨구고 있던 허두영이 크게 숨을 쉬었다. 울음을 삼킨 듯했다. 다시 앞으로 걸어가는 녀석을 조용히 뒤따랐다. 느린 걸음으로 골목을 지나 인도 위를 걷고 육교에 다다랐다.
홍승표는 서서히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배경 삼은 두영을 올려다봤다. 녀석의 입에서 흘러나온 입김이 잿빛 하늘과 뒤섞였다. 허두영은 맑으면서 탁했다. 허여멀건 낯빛이 평소보다 고단해 보였고, 추락할 듯 위태로웠다. 성냥 한 개비만 팔아도 당장 사 주고 싶을 만큼.
두영이 맞은편 인도에 닿자 홍승표는 차도를 한가운데 두고 두영을 응시하며 나란히 걸었다. 앞서가는 것 같으면 속도를 줄였고, 뒤처지는 것 같으면 보폭을 넓혔다.
타인에게 자신을 맞추는 안 어울리는 짓을 하다 보니 빈번히 다리가 꼬여 넘어질 뻔했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녀석의 느린 걸음을 완벽하게 맞출 수 있었다.
허두영은 귀가 시린 건지 빨갛게 곱은 손으로 귀를 덮었다. 몇 초도 안 지나서 손을 입술에 붙이고 따뜻한 숨결을 불었다. 그러다 제자리에 멈춰 서서 재채기까지 했다.
홍승표는 피식 웃었다. 이 날씨에 젖은 머리로 다니니까 감기에 걸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곧 두영이 모퉁이를 꺾어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 멀어지는 뒷모습을 홍승표는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았다.
허두영의 결핍은 자신의 갈망을 부추겼다. 녀석을 온전히 외톨이로 만들어 제 품에 숨기고 싶었다. 결핍이 하나 더 늘어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오히려 녀석이 망가지면 망가질수록 좋았다.
그렇게 스스로 일어날 수 없을 만큼 망가진 허두영을 자신이 세상 밖으로 꺼내 주어 다정히 보듬어 주고 싶었다. 그로 인해 녀석의 세상이 오로지 저로만 가득하다면 발바닥도 핥아 줄 수 있었다.
***
두영은 손에 든 부적을 묵묵히 보았다. 이미 카페 내부 곳곳에 몇 장 붙어 있었다. 붉은 획을 따라 움직이던 두영의 눈이 이제 막 들어온 손님을 향해 돌아갔다.
커피를 후딱 만들고 손님을 내보낸 두영은 재고 정리를 위해 서랍을 열다가 멈칫했다. 문 안쪽에 부적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두영은 유재민을 슬쩍 쳐다봤다. 시선을 느낀 유재민이 두영을 보지 않은 채 말했다.
“부적은 많아야 좋아.”
“그, 그런가요.”
“응. 내 맘이 그러네.”
“아아… 사장님 맘…….”
귀신 퇴치용 부적은 카페 구석구석에 붙어 있었다. 어쩐지 자신의 거짓말이 후폭풍을 불러일으킨 것 같아 양심이 콕콕 쑤셨다.
밤이 깊어지자 비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그래서 손님이 파산 직전처럼 없었다. 이럴 때마다 두영은 일개 알바생 주제에 사장보다 걱정이 많았다. 카페가 당장이라도 문을 닫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두영은 귀신보다 그게 더 무서웠다.
그래도 얼마 전까지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오던 단골손님이 있었다.
“아팠을까…….”
두영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맞아서 아픈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자신이 홍승표의 뺨을 때려 버렸다.
아비의 핏줄은 어디 가지 못하는 건가. 저항할 수 없는 무력감에 급속도로 우울해졌다. 몸도 으슬으슬한 게 아무래도 몸살 기운이 오려는 모양이었다. 코를 훌쩍거리자 자연스럽게 한 기억이 떠올랐다.
‘흥, 해.’
흥 하라니……. 할머니도 저를 그렇게 챙겨 주지 않았다.
두영은 고개를 빠르게 내저었다. 조금만 방심하면 생각이 샛길로 샜다. 괜히 손바닥으로 뺨을 어루만지다가 찰싹, 하고 때렸다. 그 소리를 들은 유재민이 부적을 붙이다 말고 미어캣처럼 고개를 비죽 들었다.
“왜? 너무 많이 붙이는 것 같아?”
“아, 아니요.”
두영은 미적지근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몸 상태가 갈수록 안 좋아진 두영은 유재민의 등쌀에 조퇴했다. 일찍 퇴근한 김에 김춘녀가 일하는 식당에 들를까 했지만, 도저히 기운이 없어서 포기했다.
오르막길을 느릿느릿 오르던 두영은 사방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려 잠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비바람이 멈추고 차가운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쓰나 안 쓰나 똑같은 것 같아 맨몸으로 다시 계단을 올랐다. 분명 앞만 보고 똑바로 걷는 것 같은데 몸이 자꾸 기울어졌다. 물컹한 젤리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두영은 벽을 짚고 함몰된 계단에 주저앉았다. 뭐 하나 제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몸도 마음도 타인에게 휘둘리기만 했다. 이럴 거면 네발짐승으로 태어났어도 됐을 텐데.
허공에 흩어지는 입김이 제 체온 같아 잡아 두고 싶었다. 귀가 뜯어지게 시렸지만, 막상 누가 뜯어 간대도 아프지 않을 것 같았다.
겨우겨우 집에 도착한 두영은 양치만 빠르게 하고 방에 들어왔다. 옷을 몇 벌이나 껴입고 최고 온도로 올린 전기매트에 누웠으나, 하나도 따뜻하지 않았다. 몸에서 냉기를 자체 생산하는 것만 같았다.
약을 먹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비틀비틀 일어난 두영은 약과 함께 물을 들이켰다. 눈을 감았다가 뜨자 여전히 자신은 이불에 누워 있는 상태였다. 애초에 일어난 적이 없었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때 방문이 열리고 김춘녀가 들어왔다. 그는 식은땀으로 젖은 두영의 얼굴을 다정한 손길로 어루만졌다. 두영이 느리게 눈을 깜빡이자 김춘녀가 아스라이 사라졌다. 또 열몽(熱夢)에 시달린 것이었다.
눈물 한 방울이 콧등을 가로질렀다. 차라리 아무것도 느끼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사무치지 않았을 텐데. 이렇게 쓸쓸하지 않았을 텐데…….
또다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샷시문이었다. 두영은 무거운 눈꺼풀에도 억지로 눈을 떠 방문을 뚫어지게 노려봤다. 열몽에 시달리지 않겠다는 발악이었다.
방문 상단 중앙에 달린 작은 고방 유리 너머로 그림자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두영은 숨이 멎었다. 불길한 직감이 뒤통수를 후려치는 순간, 방문이 벌컥 열렸다.
겨우 데운 방 안으로 칼바람이 휘몰아쳤다. 술 냄새와 재떨이 냄새. 경운기처럼 울리는 거친 호흡 소리. 지긋지긋한 허삼혁이었다.
수염이 너저분하게 자란 허삼혁은 마지막 집을 나설 때 입은 옷차림 그대로였다. 그동안 씻지 않았는지 악취가 풍겼고, 겉모습은 꾀죄죄했다. 길에서 만났으면 그냥 지나칠 정도였다.
두영은 바들바들 떨리는 팔로 몸을 지탱해서 앉았다. 허삼혁이 방에 들어오다가 자기 발에 걸려 넘어졌다. 두영은 제 몸 위에 엎어지려는 허삼혁을 재빨리 피해 방 모퉁이로 기어갔다. 바닥의 찬기가 뼈 안쪽까지 뚫고 들어왔다.
“시, 팔… 애새끼가, 끅, 인사 또 안 하지이…….”
허삼혁은 술에 녹은 혓바닥으로 어눌하게 말했다. 목에 뭐가 걸린 것처럼 딸꾹질도 했다. 두영이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마중하자 허삼혁이 혀를 찼다. 그러곤 비틀비틀 일어나 구석에 움츠리고 있는 두영에게 다가갔다.
“야, 끅, 요즘 살 만해졌냐? 젊을 때, 돈이나 벌 것이지이, 왜 누워 있고 지랄이야아……!”
갑자기 화를 쏟아 내는 허삼혁의 모습에 두영은 체념한 듯 눈을 내리떴다. 좁은 골방에는 숨을 곳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입술에 본드 칠 한 것같이 조용히 있어야 했다.
그때 허삼혁이 팔을 높이 치들어 두영의 뺨을 갈겼다.
철썩-!
순간적으로 세상의 모든 소리가 멎었다. 그러다 차츰 이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두영은 옆으로 고개를 꺾은 채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혼이 실시간으로 빠져나가는 듯했다. 머리가 멍해 현재가 꿈같고, 꿈이 현재 같았다.
허삼혁이 두영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잡고 쳐들었다.
“하늘 같은 아버지가, 끅, 자식새끼 때리는 건 교육이야. 다 너 잘 크라고, 끅, 때리는 거라고…….”
두영은 달라붙은 목구멍이 벌어지지 않아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어야 했다. 미간을 찌푸린 허삼혁이 두영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죽어 가는 척 지랄 말고 안 일어나? 죽을 거면… 지금까지 모아 둔 돈 내놓고 죽어 이 더러운 새끼야.”
“…….”
“씨팔러미, 지 애미년 닮아서 또 나 무시하지.”
허삼혁이 까무잡잡한 손으로 귀싸대기를 날렸다. 그걸로 만족하지 못하고 배를 걷어차자, 두영이 거칠게 기침하며 피가 섞인 침을 노란 장판에 뱉었다.
두영은 초점이 나간 눈을 망연히 떴다. 시궁창의 현실이 보였다. 자신을 지켜 줄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아마 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차라리 지금 허삼혁에게 맞아 죽는 게 시궁창에서 벗어날 유일한 방법 같았다.
아무 반응도, 저항도 없는 두영의 모습에 허삼혁은 매질을 멈추었다. 그러다 두영이 흘린 코피가 바닥에 웅덩이처럼 고이자 불쾌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물귀신 같은 새끼… 벌레 같은 새끼… 죽을 거면 혼자 나가 죽어 이 미친년아.”
이미 자신은 죽은 것과 다름없는데도 허삼혁은 죽으라고 염불을 외웠다. 코피는 하염없이 흘러 그 궤적을 따라 제 영혼도 빠져나갔다.
‘흥, 해.’
또다시 떠오른 지난날의 기억에 두영은 눈꺼풀을 끔뻑였다. 이딴 상황에서도 저는 홍승표를 생각했다. 그는 갑자기 나타나 제 박복한 삶에 끼어들었고 텅 빈 제 안에 자리를 잡았다. 아픈 것도 모르고 그를 생각할 만큼, 잘 울지 않았던 자신이 그를 떠올리며 눈물지을 만큼, 어느새 홍승표는 제 무의식 속에 가득 들어차 있었다.
두영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다시금 날아오는 발길질을 두영은 무심코 막아 냈다. 한참 늦은 반항에 당황한 허삼혁이 이내 다시 두영을 향해 다리를 휘둘렀다. 두영은 뒤로 밀리지 않기 위해 허삼혁이 밟고 선 이불을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허삼혁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나자빠졌다.
“이 버러지 같은 새끼가!!”
눈을 부릅뜬 허삼혁이 두영을 깔고 앉아 목을 졸랐다. 정말 죽일 것처럼 두 손에 힘이 가득 실렸다. 허삼혁의 팔을 할퀴고 잡아 뜯던 두영은 순간적으로 손끝에 힘을 싣고 허삼혁의 눈을 찔렀다.
“으아아악!!”
두 손으로 눈을 감싼 허삼혁이 악을 질렀다. 두영은 그의 급소를 무릎으로 올려 치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방을 벗어나는 순간, 범람하는 현기증에 착지를 잘못하여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나뒹굴었다.
온몸이 망가진 배기통처럼 덜컹거렸다. 이를 악문 두영은 바람에 열렸다 닫히는 샷시문으로 기어갔다.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팔다리를 어떻게든 움직였다.
그리고 정신없이 내달렸다.
허삼혁이 윽박지르면서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꿈속을 달리는 것처럼 다리가 굼뜨게 움직여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어서 깨고 싶은 악몽이지만, 이 꿈에서 벗어나면 홍승표도 실존하지 않는 인물일까 봐 두려웠다. 자신이 있을 곳은 꿈도 현실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어쩌면 저 자신이 눈 뜨면 사라지는 꿈 같은 존재일지도 몰랐다.
허삼혁이 쫓아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을 땐 한참이 지난 후였다. 그래도 불안하여 구멍가게 처마 밑으로 들어가 고장 난 자판기 옆에 바짝 몸을 붙였다. 근처 가로등이 고장 난 상태라 어둠 속에 은신할 수 있었다.
기도가 빈틈없이 달라붙은 듯 호흡이 버거웠다. 두영은 훌쩍거리는 소리로 제 위치가 들킬까 봐 소매를 끌어당겨 코를 막았다. 코피가 잘 멈추지 않았다.
무릎을 세워 두 팔로 다리를 끌어안았다. 허벅지에 심장이 쿵쿵 부딪쳤다. 두영은 물웅덩이에 고인 맨발을 내려다봤다. 정신없이 도망치느라 가지고 있는 게 없었다.
음습한 바람이 식은땀으로 젖은 몸을 핥았다. 잡아 두지 못하는 시간이 하릴없이 흘렀다. 서서히 얻어맞은 부위에서 말 못 할 고통이 피어났다. 더 이상 달리는 건 불가능했다. 기운이 없었고, 발바닥도 아팠다.
그 순간 희미한 빛이 시야각 테두리에 스며들었다. 두영은 빛이 스며드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 공중전화 부스가 있었다.
잠시 고민한 두영은 무릎을 짚고 천천히 일어났다. 절뚝절뚝 걸어가 수화기를 들었지만, 수중에 있는 돈이 없었다. 바지 주머니를 뒤지고 구멍가게 주변도 훑었다. 전부 무의미했다.
길 잃은 미아처럼 망연히 서 있던 두영은 무언가에 이끌린 듯이 커피 자판기를 향해 걸어갔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잔돈 구멍에 손을 집어넣었다. 손끝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백 원 세 개였다.
다시 공중전화 부스로 돌아간 두영은 동전을 넣고 얼마 전에 외운 번호를 꾸욱 꾸욱 눌렀다. 그러나 발신음이 네 번 울리기도 전에 급하게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막상 홍승표가 전화를 받으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뇌가 무르녹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두영은 손에 쥔 이백 원을 먹먹하게 바라보았다. 손등으로 얼굴을 거칠게 문질렀다. 침을 꿀꺽 삼키고 조금 전 누른 번호를 다시 눌렀다.
***
하늘이 무너질 것처럼 쏟아지던 비가 점점 가늘어지더니 지금은 아예 그쳤다. 휘몰아치는 바람이 싸늘한 소리를 내며 창문에 몸통을 부딪쳤다. 홍승표는 계절의 발악을 눈으로 지켜보다 테라스에서 집으로 들어왔다. 찬 바람을 맞으면 정신이 맑아질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소파 팔걸이에 엉덩이를 걸쳤다. 신경을 돌리기 위해 켜 뒀던 티브이에서 이름 모를 심야 영화가 상영되었다. 화려한 액션 신이 나왔지만, 무음으로 해 두었기에 잔잔한 무성영화가 되었다.
건조한 눈으로 화면을 응시했다. 화면 속 인물들이 단순한 덩어리로 보였다. 시각을 통해 뇌로 전해지는 정보가 없었다. 육체는 이곳에 있지만 정신은 다른 곳에 있었다.
왜소한 뒷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실제로 보이는 환각에 홍승표는 두 발로 서서 그에게 다가갔다. 갸름한 얼굴에 손을 뻗자 그 얼굴이 연기처럼 사그라졌다. 움켜쥔 손을 멍하니 보다 얼굴을 쓸었다.
생수 모가지를 꺾어 단숨에 물을 비웠다. 쓰레기를 버리고 홈바에 올려 둔 휴대폰을 성의 없이 바라보았다. 전화가 왔지만 굳이 받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무시했다. 전화도 금방 끊겼다.
홍승표는 무심한 얼굴로 휴대폰을 응시했다. 어쩐지 전화가 또 올 것 같았다. 예상대로 전화가 왔다. 그런데 이번에도 금방 끊겼다. 전처럼 5초를 버티지 못했다.
어쩐지 손톱 거스러미처럼 신경 쓰였다. 홍승표는 휴대폰을 쥐고 부재중 전화를 확인했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이 시간에 지역 번호로 올 전화가 뭘지 생각했다. 그 순간 세 번째 전화가 울렸다. 이번에는 곧바로 받았다.
“예.”
―…….
상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의아해서 화면을 보니 이미 상대 쪽에서 전화를 끊어 버렸다. 홍승표는 삐딱하게 선 자세를 바로 했다. 육체를 떠난 정신이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방금 온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을 걸어도 받지 않았다.
엄지로 화면을 쓸어 날씨 앱을 켰다. 이번 겨울은 몇 년만의 한파였다. 밤이 되니 기온도 영하로 내려갔다. 그는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손에 잡히는 대로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 허두영인지 확실하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무사히 잘 있는지 확인만 하고 오는 거다.
시동을 켜고 초반부터 속도를 높였다. 큰 도로로 나오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불현듯 마음이 급해졌다. 좀 더 속도를 올려 목적지로 향했다.
달동네 초입에 차를 주차했다. 길이 좁아서 여기서부터는 걸어 올라가야 했다. 계단을 서너 칸씩 밟고 올랐다. 오늘따라 꺼진 가로등이 많았다. 올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동네가 위험했다. 불이라도 나면 떼죽음을 당할 곳이었다.
도착한 허두영의 집은 불이 꺼져 있었다. 자는 것 같았다. 무사한 것만 확인하면 그냥 갈 생각이었는데, 막상 여기까지 오니 얼굴이라도 봐야 했다. 할머니는 야간 일을 한다고 했고 아비는 집에 안 들어온 지 꽤 됐다고 했다. 혼자 웅크리고 자고 있을 허두영을 떠올리자 뱃속에 똬리 튼 멍울이 꿈틀거렸다.
그때 안쪽에서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홍승표는 정중하게 노크했다.
“두영아.”
“…….”
“문 열어, 허두영.”
대꾸 없는 침묵에 홍승표는 눈을 가늘게 떴다. 우편함에 손을 집어넣고 열쇠를 찾았지만 잡히는 게 없었다. 짧게 생각을 마친 그는 그냥 문을 떼어 내기로 했다. 어차피 낡은 문이니 새로 달아 주면 될 문제였다.
홍승표는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잠긴 줄 알았던 문이 도리어 쉽게 열렸다. 순간 지독한 술 냄새가 차가운 공기 중에 퍼졌다. 문을 마저 열어젖히자 마흔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맨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아, 시팔……! 어떤 새끼야아!”
다짜고짜 쌍욕을 퍼붓는 남자의 얼굴에서 언뜻 허두영의 생김새가 보였다. 녀석의 타고난 줄 알았던 음울한 분위기는 아비한테 물려받은 흔적이었다.
흐느적거리며 일어난 남자가 곧바로 주먹을 휘둘렀다. 홍승표는 그를 가볍게 피했고 남자는 주먹을 뻗은 방향으로 엎어졌다.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몸뚱이가 썩은 생선 같았다.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허두영 주변에는 썩은 것들 천지였다. 어디서부터 물갈이해야 할지 감도 안 잡혔다.
문턱을 밟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중구난방으로 널브러진 잡기들 사이에서 뒤꿈치가 해진 허두영의 신발이 보였다. 홍승표는 안쪽으로 더 들어갔다. 반쯤 열려 있는 방문을 손끝으로 밀자 끼익, 소리가 났다. 천천히 드러난 방 내부는 재해가 닥친 듯이 엉망진창이었다.
제 장딴지 정도 오는 턱을 밟고 방에 들어갔다. 곤죽이 되도록 밟힌 이불을 발끝으로 치우자 그 아래 검은 자국이 드러났다.
싸늘한 눈빛으로 방바닥에 고인 핏자국을 응시한 그는 고개를 들어 벽지에 스민 흔적을 손으로 쓸었다. 하나하나 훑지 못할 만큼의 양이었다. 허두영의 지독한 삶이 이 작은 방 안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머리에 찬물을 부은 것처럼 정신이 깨었다. 홍승표는 벽에서 시선을 뗐다. 방을 나가기 위해 몸을 돌리는데 발에 무언가 치였다. 내리뜬 눈으로 확인하니 구형 휴대폰이었다. 단번에 누구 것인지 떠올릴 수 있었다.
그는 휴대폰을 주워 들고 전원을 켰다. 여기저기 눌러 보던 손이 무언가를 보고 멈칫했다.
[승표]
간단하게 저장된 이름에서 애정이 느껴진다면 그건 자신이 머저리라서 그런 걸까. 착각은 달고 맛있었다. 착각이 아니라면 더 좋겠지만.
그대로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그는 밖으로 나갔다. 제 안방처럼 길바닥에 드러누운 남자에게 성큼성큼 걸어가, 남자의 머리 쪽에 멈춰 서서 한쪽 발을 들어 올렸다.
그대로 짓밟으려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도로 발을 내렸다. 제게는 식충이일 뿐이지만, 허두영은 다르게 생각할 수 있었다. 멋대로 행동해서 허두영이 또 저와 눈도 안 마주치려고 한다면 곤란했다.
홍승표는 발끝으로 남자의 머리를 살짝 쳐서 깨웠다.
“아저씨, 허두영 어디 있어?”
“…싸가지 없는 새끼. 쓰벌래미 새끼……. 다리 몽둥이를 콱 분질러서…….”
남자는 술주정과 잠꼬대를 같이 부렸다. 미간을 찡그린 홍승표는 남자의 몸을 밟고 지나쳤다. 그리고 어수선하게 꼬인 골목을 미친 사람처럼 돌아다녔다. 달동네는 뒤집힌 빙하 형태의 개미굴이었다. 어딜 가도 길이 비슷해 같은 길목을 몇 바퀴째 돌았다.
허두영이 보이지 않아서 손이 떨렸다. 극심한 신경통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마다 깨부쉈다. 통제되지 않는 분노에 주먹 옆면으로 벽을 쳤다.
꺼진 가로등 밑에 망연하게 선 순간이었다. 저 멀리 공중전화 부스가 눈에 띄었다.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주변으로 눈이 흩날리는 게 보였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바닥이 하얘질 만큼 눈이 쌓여 있었다.
그는 구멍가게를 지나쳐 공중전화 박스로 걸어갔다. 그러다 하마터면 지나칠 뻔했다. 그림자 속에 숨은 작은 실루엣을.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는 녀석은 그림자와 완벽하게 동화한 상태였다. 숨이 멎은 것처럼 작은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홍승표는 덜컥 떠오른 불길한 예감을 떨쳐 내고 발소리를 죽인 채 두영에게 다가갔다.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몸을 낮췄다. 두영은 코앞에 다가온 기척을 알아채지도 못했다.
“허두영.”
나직한 부름에 두영의 어깨가 희미하게 떨렸다. 두영은 추위에 움츠린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망망대해에서 방향을 잃은 미아가 육지를 만나 숨이 트이는 순간이었다.
두영은 눈앞에 있는 이가 현실감이 없어 곧바로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한참 만에 얼어붙은 입술이 달싹거렸다.
“스…….”
쉬어 버린 제 목소리에 놀라 입을 다물었다. 마른 입술을 침으로 적시고 입가에 맴도는 이름을 다시 소리 내 불렀다.
“승, 표…….”
겨우 토해 낸 이름이 엉망으로 늘어졌다.
두영은 아무런 반응이 없는 홍승표가 저를 돌덩이처럼 보는 것 같아 덜컥 겁이 났다. 손으로 땅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한 자세로 오래 있어서 몸이 쉽게 펴지지 않았다. 겨우 두 발로 서서 앞으로 한 발 내딛는 순간 곧바로 무릎이 꺾였다.
하릴없이 고꾸라지는 몸을 홍승표가 가벼이 받아 냈다. 너른 품에 안기자 안도감이 쏟아졌다. 어느새 익숙해져 버린 그의 체온은 얼음처럼 얼어 버린 긴장을 허물어뜨렸다.
홍승표가 두영의 팔뚝을 잡았다. 두영은 자신을 떼어 내려는 건 줄 알고 고개를 내저으며 홍승표의 품에 더 파고들었다.
“괜찮아. 잠깐이면 돼.”
몸을 녹이는 다정한 말씨였다. 홍승표는 두 손으로 두영의 귀를 덮고 코끝을 마주 비볐다.
“약속할게. 정말 잠깐이면 돼.”
두영의 눈동자가 물처럼 파동 했다. 그의 약속에 달라붙은 몸을 천천히 떨어뜨렸다. 하지만 손에 쥔 옷을 고집스레 놓지 않았다. 홍승표는 두영의 손을 열이 오른 눈으로 보았다. 길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아이의 처절한 발버둥처럼 느껴졌다.
그는 겉옷을 벗어 두영에게 입히고 지퍼를 목 끝까지 채웠다. 그리고 신발을 벗어 흙탕물로 지저분해진 두영의 맨발에 신겼다.
두영은 몸을 낮춘 홍승표의 어깨를 짚고 말했다.
“안, 그래도 돼…….”
초라한 거절에도 홍승표는 두영의 두 발에 묵묵히 운동화를 신겨 주었다. 흰색 반소매를 입은 홍승표의 주변으로 음습한 바람이 불었다. 넓은 어깨가 쓸쓸해 보여 두영은 문득 서글퍼졌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홍승표의 뺨을 쓸었다. 멈칫한 홍승표가 두영을 올려다봤다.
“…아팠어?”
홍승표는 허탈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전혀.”
그는 감질나게 만져 오는 손을 제 손으로 덮고 빈틈없이 밀착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얼굴을 기울였다.
“하나도 안 아팠어.”
맞는 순간도 맞은 후도, 녀석을 카페에 외로이 두고 나서는 순간 깨끗이 잊어버렸다.
두영은 제 손을 잡은 홍승표의 손을 유심히 바라봤다. 다쳤는지 피가 흘렀다. 왜 다친 거냐고 물어보려는데 홍승표가 갑자기 몸을 세우고 두영의 얼굴을 감쌌다.
겨울바람보다 사늘한 시선이 두영의 얼굴을 훑었다. 두영은 그가 어느 부분을 보는지 알아챘다. 허삼혁에게 맞은 뺨이었다. 많이 흉할 텐데 뚫어지게 보고 있으니 민망했다. 고개를 숙이려고 했지만, 얼굴이 잡혀 있어서 그러지 못했다.
결국 눈만 내리뜬 두영은 하얀 땅을 딛고 선 맨발을 보았다. 홍승표의 발은 저보다 한참 크고 따뜻했다. 그가 가진 건 전부 따뜻했다. 그래서 홍승표가 주는 모든 것을 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열 기운 때문에 정신이 몽롱했다. 그래서 안 하던 짓도 쉽게 할 수 있었다. 두영은 홍승표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그리고 바보처럼 해죽 웃어 버렸다.
홍승표의 눈동자가 술렁였다. 아슬아슬해 보이던 그의 분위기가 차츰 나른해졌다. 예민하게 뜨고 있던 눈도 가늘게 접혔다. 단꿈에 빠진 이의 얼굴이었다.
두영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어둠 속에 긴 시간 홀로 있었다. 허삼혁에게 도망쳐 도착한 곳은 벼랑 끝이었고, 결국 제 발로 죽음을 찾아 들어간 것이었다. 모든 걸 체념하고 동사자가 되길 기다렸다. 그런데 홍승표가 동사자를 찾으러 스스로 벼랑 끝에 들어왔다.
다시 까치발을 들어 새가 부리를 쪼듯 입을 맞췄다. 큰 운동화의 뒤꿈치가 벗겨졌다. 스치듯이 입술을 문지르고 아랫입술을 살짝 핥자, 잠시 굳어 있던 홍승표가 두영의 뒤통수를 손으로 감싸고 얼굴을 비스듬히 기울었다.
가볍게 포개진 입술이 따뜻했다.
온몸에 열이 돌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