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 허허바다의 마음 (14/20)

14. 허허바다의 마음

“할무니.”

“우야.”

“나 머리 많이 길었지?”

두영은 오랜만에 김춘녀와 늦은 아침을 함께했다. 메뉴는 숙주나물과 달걀 두 개를 푼 사골 라면이다.

“응? 많이 길었지?”

김춘녀가 두영에게 힐끗 눈길을 주었다.

“할미가 밥 먹고 잘라 줄게.”

“나 미용실 가 보려구.”

“돈 아깝게 왜 돈 주고 깎아. 할미가 잘라 줄게.”

두영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 미리 덜어 놓은 식힌 라면을 먹었다. 폭삭 익은 배추김치도 야무지게 씹었다.

“저기 밑에 이발소 새로 생겼는데 처음 와서 머리 자르면 할인해 준대.”

“아이고 우리 똥강아지 사춘기가 이제 찾아왔나 보네.”

김춘녀의 걸쭉한 너스레에 두영은 피식 웃었다.

어제 카페를 찾아온 홍승표는 평소와 이미지가 달랐다. 뒷머리를 짧게 쳐서 훨씬 싱그러웠고 단정한 귓바퀴에 시선이 자꾸 빼앗겼다. 한층 짧아진 머리카락을 이마 뒤로 쓸어 넘기면 성숙한 분위기가 물씬 풍겨, 이상하게 보고 있는 것만으로 심장이 간지러웠다.

물론 홍승표는 원래도 성숙했지만, 뭐랄까… 더 범접할 수 없는 어른이 된 것 같았다. 또 저만 홀로 성장이 멈춘 것 같아 기분이 조금 울적해지기도 했다.

국물까지 싹싹 긁어 먹은 두영은 설거지를 후딱 마치고 방에 들어갔다. 김춘녀가 벌써 이불을 깔고 드러누운 상태였다.

“두영아 나는 좀 잘란다.”

“오늘은 집에서 쉬시게?”

“좀 자다가 김 씨 여편네 작물 서리나 하러 가야지. 쉬어도 쉬는 것 같지 않고, 몸도 근질근질해서 가만히 못 있겠네.”

“그래도 좀 쉬어요. 나 할머니 옛날처럼 갑자기 쓰러질까 봐 걱정돼.”

“우리 똥강아지만 두고 할미가 먼저 가겠어?”

느리게 눈을 끔뻑인 두영은 갑갑한 명치 안쪽으로 한숨을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쾌활한 척 대꾸하는 김춘녀에게 사실 당신이 걱정이 아니라, 당신이 아팠을 때 생기는 일이 두렵다고 말하고 싶었다.

잠옷처럼 입는 옷 위에 외투를 걸쳤다. 어차피 이발소만 갔다 오는 거라 대충 입어도 상관없었다. 발목이 긴 두툼한 흰색 양말을 신고 삼색 슬리퍼에 발을 꿰었다.

“할머니 나 나갔다 올게.”

김춘녀는 바닥에 머리만 대면 잠드는 사람이라 딱히 배웅해 달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조용히 집을 나선 두영은 낯선 곳에 갈 생각에 벌써 속이 울렁거렸다. 잔뜩 긴장한 탓에 팔과 다리가 같이 나갔다. 조화롭지 않은 제 몸짓을 보고 있자니 며칠 전에 홍승표에게 배운 호신술이 떠올랐다.

그날 홍승표는 드물게 포기라는 것을 선언했다. 저도 제 체력이 저질인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월등한 신체를 타고난 홍승표가 저를 보고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을 땐 살짝 억울하기까지 했다.

그는 야매 호신술 말고 다른 운동을 권했지만, 두영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엉성한 폼을 더 이상 홍승표에게 보여 주기 싫었기 때문이다. 매해 체육 수행평가 때마다 반 아이들이 저를 보며 수군거렸다. 못 들은 척, 그래서 의연한 척 행동했지만, 사실 자신은 그 순간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홍승표를 생각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이발소 맞은편에 도착해 있었다. 두영은 일단 평범한 행인처럼 이발소 앞을 자연스럽게 지나다니며 손님이 많은지 확인했다. 총 두 사람이 있었는데 직원과 손님 같았다.

“후…….”

새로운 곳에 가는 건 딱 질색이다. 심장이 드럼처럼 쿵쿵 날뛰고, 호흡이 가빠지는 감각이 불쾌했다. 두영은 견인 일 순위 차량 뒤쪽에 들어가 쭈그려 앉았다. 하나뿐인 손님이 나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릴 생각이었다.

한 시간이 지나서 손님이 나왔다. 두영은 심호흡을 진하게 내쉬고 드디어 이발소에 입성했다. 직원이 정해 준 자리에 로봇처럼 걸어가 앉았다. 그리고 머릿속에 정리해 둔 생각을 더듬더듬 말했다.

숱만 쳐 주세요. 너무 짧게는 말고요. 진짜 짧게 자르시면 안 돼요오……. 앞머리는 눈썹을 안 넘게…….

“다 됐어요. 학생이 숱은 많은데 모질이 얇아서 혼자 세팅하기 쉬운 머리야. 대부분 동양인은 뻣뻣한 직모여서 다운 펌을 꼭 해야 하거든? 진짜 부모님께 고맙다고 해.”

머리카락 칭찬은 처음이었다. 아마 단골을 만들려는 입바른 소리일 수 있었다. 이미 자신은 세상에 찌든 성인이었기에 이제 저런 말에 속지 않았다.

위풍당당하게 결제를 하고 나온 두영은 왠지 어제보다 더 성장한 것 같아 걸음걸이부터 당차졌다. 그러나 길목에 주차된 트럭 창문에 얼굴을 비추는 순간 자신감이 하락했다.

“눈썹 아래로 잘라 달라구 했는데…….”

숱만 쳐서 눈에 띄게 짧아지지 않았지만, 목과 귓바퀴를 덮는 부분을 쳐 냈더니 훨씬 단정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부탁했던 것보다 앞머리가 짧았다. 눈썹이 훤히 드러나자 세상 만만해 보였다.

두영은 손으로 앞머리를 꾹꾹 누르며 집으로 돌아갔다. 달동네 초입으로 들어서는데 누군가가 두영을 뒤에서 와락 껴안았다. 발이 땅에 들릴 정도였다.

대낮부터 길을 활보하는 변태가 두영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거친 숨을 쉬었다. 이리도 대담하게 굴 정도면 단순 변태가 아니라는 말이다. 곧바로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왜 전화 안 받아?”

홍승표가 두영을 시계추처럼 흔들며 말했다.

“왜 전화 안 받냐고.”

“지, 집에 두고 나왔어. 미안해.”

휴대폰 없이 다니는 게 익숙해서 새카맣게 잊고 있었다.

“근데 여긴 어쩐 일루…….”

“너 전화 안 받아서.”

단순히 전화를 안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찾아온 홍승표가 민망했다. 두영은 땅에 발을 딛고 뒤를 돌아봤다. 올려다본 홍승표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홍승표는 두 손으로 두영의 뺨을 감싸고 세심하게 뜯어보았다. 둥근 눈썹을 엄지로 어루만졌다.

“예쁘다.”

눈을 크게 뜬 두영이 손으로 퍼뜩 이마를 덮었다.

“아, 그, 나는, 짜, 짧게 자르지 말아 달라구 했는데…….”

못나게 변명부터 늘어놓는데 별안간 홍승표가 흐무러지게 웃었다. 순간 두영은 할 말을 잃고 웃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순수한 미소가 온전히 저를 향해 있었다. 심장이, 아니 모든 장기가 저릿저릿했다.

정신을 차린 두영이 큼큼 목을 울렸다.

“그, 그만 봐…….”

홍승표는 신기한 것을 관찰하는 것처럼 두영을 끈질기게 보다가 이만 놔주었다. 흰색 볼캡을 눌러쓴 그에게 시원한 향이 났다. 두영의 시선을 눈치챈 홍승표가 한쪽 입꼬리를 길게 끌어 올리며 모자챙을 검지로 살짝 들췄다.

“운동 갔다가 씻고 머리를 안 말렸어. 그래서 엉망이야.”

“운동?”

“그냥 웨이팅하고 수영.”

“…왜?”

“너 진짜 운동 싫어하네.”

그냥 갑자기 안 하던 운동을 하길래 물어본 건데……. 근데 두 개나 한다고? 하나만 해도 요절할 것 같은데.

홍승표는 생각보다 시간을 알차게 잘 썼다. 몸이 찌뿌둥한 걸 못 참았고 생각난 건 바로바로 해야 했다. 저와 달리 낯선 곳도 서슴없이 갔고, 생각대로 안 되면 될 때까지 몰아붙이기도 했다. 자신과 닮은 구석이 단 하나도 없었다.

모자를 벗은 그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쓸어 넘긴 뒤 다시 모자를 고쳐 썼다. 그러곤 두영의 코끝을 가볍게 툭 건드렸다.

“넌 갑자기 생각에 빠지면 사람 빤히 보는 거 알아? 민망할 정도로.“

두영은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정작 민망하다고 한 홍승표는 두영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눈을 게슴츠레 떴다.

“싫다고 한 적은 없어. 계속 나 봐 줘.”

애틋한 부탁에 두영은 입술을 오물대며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목울대를 들썩인 홍승표가 두영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말했다.

“오늘 나랑 놀래? 머리도 예쁘게 했잖아.”

두영은 눈을 끔뻑거렸다. 홍승표랑 놀고 싶었다. 그가 평소 어디를 가고 어떻게 노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설렘 뒤에 불편한 기분이 두영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김춘녀는 쉬는 날 제대로 쉬지도 않고 소일거리를 했다. 오늘도 말은 서리라고 했지만, 김춘녀가 짬짬이 찾아가서 돌봐 준 작물이기도 했다.

쪽방에서 자는 왜소한 몸을 떠올리자 가슴이 먹먹했다. 한 번 싹이 튼 죄책감은 순식간에 몸집을 부풀렸다. 누가 그러라고 하지 않았는데 왜 이런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야 하는지 답답했다.

구름 뒤에 숨은 태양이 존재를 드러냈다. 쏟아지는 초봄의 햇살이 각막을 쑤셨다. 미간을 엷게 찡그리자 커다란 손이 차양처럼 그림자를 만들어 주었다. 고개를 기울인 홍승표가 시선을 지그시 겹치며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이대로 집에 들어가기엔 날이 좋잖아.”

햇살처럼 반짝이는 그의 얼굴에 두영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승낙을 받은 홍승표는 곧바로 두영을 차에 태우고 운전석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두영의 안전띠를 매 주었다. 두영은 손톱으로 안전띠를 갉작거렸다. 차에 타는 게 아직 적응이 안 돼서 매번 안전띠 착용을 까먹었다.

“멀미 심하면 말해.”

“응. 근데, …우리 어디 가?”

“우리 영화 보러 가.”

기분이 좋아 보이는 홍승표가 나긋나긋하게 말하며 두영의 턱을 간지럽혔다. 두영은 손등으로 턱을 쓸었다. 간지러운 게 손등으로 옮겨 왔다. 저를 짓누르던 죄책감도 잠잠해졌다.

차는 한강 위를 달렸다. 긴 다리를 건너고 넓은 차선을 지나 목적지에 당도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복잡한 인파에 숨통이 조여 왔다. 두영은 잔뜩 주눅이 들어 홍승표의 넓은 등판만 보고 가쁘게 따라갔다.

“저기요.”

갑자기 튀어나온 청년 무리가 두영을 막아섰다. 그들은 깔끔하게 차려입은 남녀 한 쌍이었다.

“안녕하세요! 저희가 학교에서 학생들 대상으로 뮤지컬을 준비하고 있는데, 제목은 ‘울어도 괜찮아’라는 힐링 뮤지컬이에요! 서로의 슬픔과 상처를 보듬어 주기 위해 만든 뮤지컬이지만, 좀 더 깊은 내면을 표현하기 위해 지금 길거리 인터뷰를 하고 있거든요. 혹시 시간이 되신다면 지금 인터뷰 가능하실까요? 만약 저희와 한 인터뷰가 마음에 드신다면 전문 상담 선생님께 안내도 해 드리고 있구요. 뮤지컬 티켓도 함께 드리고 있습니다!”

안광을 번뜩이며 말하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두영은 홍승표를 찾기 위해 두리번댔지만, 엉뚱한 사람들하고만 눈이 마주쳤다. 이 많은 인파가 전부 저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우습고 하찮은 자신에 대해 누군가가 수군거렸다.

‘쟤 때문에 친구가 자살했다며? 무슨 생각으로 여길 와? 양심도 없나 봐. 말로만 미안하다 하고 결국 너도 똑같은 자식이야. 이기적인 새끼. 허두영은 살인자.’

머릿속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점점 눈앞이 까마득해졌다. 누군가가 제 목을 조르는 듯했다. 아무리 고개를 쳐들고 자맥질을 해도 저 깊은 바다 밑으로 하염없이 가라앉았다. 아무도 저를 잡아 주지 않았다. 아무도…….

“뭐 해.“

불쑥 들려온 홍승표의 목소리에 두영은 아래로 떨군 시선을 들어 올렸다. 홍승표는 청년들을 가로막고 섰다. 두영을 지그시 내려다보던 그는 대뜸 모자를 벗어 두영에게 씌워 주고 손을 잡아끌었다.

두영은 제게 맞춰진 보폭을 묵묵히 따라 걸었다. 정신이 없어서 그의 발뒤꿈치를 몇 번이나 밟아버렸지만, 그는 짜증 한 번 내지 않았다.

조금 전 그가 나타난 순간 안심보다 당황이 컸다. 사람 많은 곳에 가면 아무것도 못 한다는 것을 완벽하게 들켜 버렸다. 지금 제 모습을 홍승표가 어떻게 생각할지 무서웠다. 애초에 머리 같은 걸 자르지 말았어야 했다. 괜히 어울리지도 않는 짓 하겠다고 밖에 나온 자신이 한심했다.

“허두영.”

날이 좋아도 집에 돌아갈걸.

“두영아.”

“…어, 어?”

두영은 저를 부르는 목소리를 뒤늦게 인지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모자챙이 앞으로 흘러 내려와 홍승표의 다리밖에 보이지 않았다. 목 안으로 웃은 홍승표가 두영을 끌어안듯이 팔을 두르고, 두영의 머리 크기에 맞춰 모자 끈을 조여 주었다.

“취향이 뭐야?”

“…?”

“영화 말이야. 좋아하는 장르 있어?”

머뭇거린 두영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저었다. 주변을 보니 어느새 건물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무서운 건?”

“…조금, 안 될 거 같애…….”

“있네, 취향.”

“대, 대신 다른 건 다 괜찮아.”

“후회하지 마.”

“무서운 건, 빼고…….”

두영의 힘 없는 주장에 홍승표가 담백하게 웃었다.

아직 상영 시간까지 여유 있어 패스트푸드로 늦은 점심을 해결하기로 했다. 홍승표는 두영이 햄버거 하나를 먹을 동안 두 개를 해치우고 세 번째 햄버거 포장지를 뜯고 있었다. 어쩐지 평소보다 많이 먹는 것 같아서 두영은 저도 모르게 홍승표를 빤히 쳐다봤다.

“공복에 운동했거든.”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홍승표가 알아서 대답해 주었다. 두영은 자신이 그에게 눈치를 준 것 같아 고개를 숙이고 햄버거 먹는 데에만 열중했다.

기다란 감자튀김을 입에 문 두영은 창밖을 구경했다. 밖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저와 달리 어색하지 않고 자유로워 보였다.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을 당당하게 누리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그리고 부러웠다.

그때 무언가가 입술을 쿡 찔렀다. 고개를 돌려 홍승표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가 감자튀김을 손에 들고 제게 내밀고 있었다.

두영은 겸연쩍게 감자튀김을 받아먹었다. 홍승표가 두영의 입에 묻은 케첩을 엄지로 닦아 주고 천연덕스럽게 핥아 먹었다. 두영은 표정 관리가 안 돼 냉큼 빨대를 물고 콜라를 마셨다. 모자챙으로 못난 얼굴을 가릴 수 있어 다행이었다.

시간을 적당히 때우고 상영관이 있는 층으로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사람이 바글바글해서 두영은 몇 번이나 어깨가 치였다. 그러자 홍승표가 두영의 손을 잡고 아무렇지 않게 앞장서서 걸었다. 두영은 신경이 온통 손으로 쏠려 더 이상 주변을 신경 쓰지 않게 됐다.

에스컬레이터에 오른 두영은 제 얼굴만 한 인형을 내려다봤다. 오는 길에 홍승표가 뽑아 준 기념품이었다. 머리와 몸통이 가분수인 인형은 새처럼 생겼다. 병아리 같기도 하고 참새 같기도 했다.

두영은 고개를 꺾어 천장을 올려다봤다. 층고가 높아 천장이 까마득했다.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에스컬레이터 반대편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고개 숙여.”

바로 옆에서 속살거리는 낮은 목소리에 두영은 움찔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한 칸 아래에 서 있는 그가 두영의 어깨에 턱을 얹었다. 두영은 은근히 홍승표에게 안겨 있는 자세가 불편했다. 이쪽을 쳐다보는 시선이 더 늘어난 것 같아 마주 잡은 손이라도 풀기 위해 꼬물거렸다. 그러자 홍승표가 커다란 손으로 아예 깍지를 끼더니 두영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멋대로 놓지 마.”

홍승표가 가볍게 나무랐다. 두영은 귓가에 스치는 뜨거운 숨결 때문에 닭살이 돋았다.

상영관 어귀에 도착하자 그가 직원에게 모바일 티켓을 보여 주었다. 카펫이 깔린 바닥을 밟고 공간 끝으로 걸어 들어갔다. 홍승표가 안내해 준 자리에 앉은 두영은 앉을 생각이 없어 보이는 홍승표를 올려다봤다.

“금방 올게.”

“어, 어디…….”

“주전부리 사러.”

“그럼 나도…….”

“거기 사람 미어터지니까, 여기서 그 새랑 기다리고 있어.”

두영은 따라가고 싶은 마음에 엉덩이를 들썩였지만, 고개는 끄덕끄덕 흔들기만 했다. 더 이상 홍승표를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아래를 다르게 움직이는 두영의 몸짓을 묘하게 보던 홍승표는 왔던 길을 도로 내려갔다.

두영은 고개를 푹 숙이고 다리 위에 올린 인형을 조몰락거렸다. 그러다 힐끗 눈을 치뜨고 극장 내부를 천천히 둘러봤다. 상영관 맨 뒷자리라 앞쪽이 훤히 보였다.

티브이에서 보던 여느 극장과 달리 여기는 좌석이 다닥다닥 붙어 있지 않고 한 쌍씩 여유롭게 띄어져 있었다. 좌석 주변에는 낮은 칸막이 같은 게 있어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조금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극장이란 곳을 처음 와 봐서 모든 게 신세계였다. 홍승표가 영화 제목을 말해 주지 않았기에 뭘 보는지 몰랐지만, 자리 채워지는 속도를 봐선 흥행 중인 영화인 것 같았다.

방금 상영관에 들어온 탈색모 남자가 자기 자리를 찾는 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게 보였다. 그의 뒤로 연달아 사람들이 들어왔다. 두영은 매번 홍승표가 들어오는 건 줄 알고 기대했다가 그가 아님을 확인하고 실망했다.

그 순간 화면이 켜지고 스피커에서 바주카포 터지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이 정도로 소리가 클지 몰랐던 두영은 심장을 부여잡고 미어캣처럼 주변을 두리번댔다. 그가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영화가 시작됐다.

두영은 홍승표를 찾아 나서기 위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 빈 옆자리에 모르는 남자가 앉았다. 상영관 입구에서 자리를 찾던 탈색모였다. 탈색모는 어정쩡하게 일어선 두영을 보며 옆자리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앉아. 안 앉고 뭐 해.”

두영은 탈색모의 말을 들을지 말지 고민하다가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거, 거기 주인 있어요.”

“알아, 나 홍승표 친구니까 앉으라고.”

“…….”

“눈빛 봐라. 아주 범죄자 취급하네? 걔도 나 여기 있는 거 알아.”

남자의 말이 신뢰 되지 않았지만, 두영은 일단 자리에 앉았다. 승표가 돌아올 걸 믿었기 때문이다.

의자 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허리를 세웠다. 여차하면 뛰쳐나갈 자세였다.

“야 편하게 좀 앉아라. 보는 사람 불편하게.”

“……!”

탈색모가 두영의 가슴팍을 손으로 누르고 리클라이너에 눕혔다. 의자인 줄 알았던 게 순식간에 침대처럼 변했다. 두영은 동사한 시체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촌스럽긴. 너 홍승표랑 친구냐? 나도 홍승표랑 친구야.”

그 말에 두영은 남자를 힐끔 보았다.

“뭐야. 그 표정 뭔데. 나 홍승표보다 삭았어? 그리고 너 벙어리야? 사람이 물어보는데 입을 조개처럼 다물고 있어.”

거친 말투와 막무가내인 행동. 두영이 뼈저리게 겪었던 인간군상이었다.

탈색모는 키가 크고 골격도 컸지만, 삐쩍 말라서 쭉정이 같았다. 얇은 눈썹과 진한 쌍꺼풀 때문에 첫인상이 화려했고, 삐죽이는 입술은 독을 머금고 있었지만 맹독이 아니라 어설펐다. 그냥 무표정으로 있는 게 탈색모와 어울렸다. 그럼 아주 조금은 유순해 보였으니까.

화면에 나오는 영상이 광고인 걸 알아챘을 땐, 상영관은 빈자리 없이 사람들로 들어찼다. 시간은 자꾸 흐르는데 홍승표가 돌아오지 않아 걱정됐다.

“야. 이름이 뭐냐?”

두영은 못 들은 척 인형만 조몰락댔다. 눈썹을 세운 탈색모가 의자에 한쪽 다리를 올리고 그 위에 팔꿈치를 얹었다.

“말 안 하냐? 혓바닥 없어? 홍승표는 혀 잘 쓰는 사람 좋아해.”

탈색모의 목소리가 큰 탓에 앞자리에 앉은 사람이 연신 뒤를 힐끔거렸다.

“너 걔랑 무슨 사이야? 얼마나 혀를 잘 쓰길래 홍승표가 너를 챙기냐고.”

엄지와 검지 끝을 둥글게 이어 붙인 탈색모가 입 앞에서 그 손을 흔들었다. 그의 서슴없는 행동에 두영은 손톱 거스러미를 뜯었다. 아까 먹은 햄버거가 넘어올 것 같았다.

“이게 계속 사람 무시하네. 진짜 걔 애인이야? 섹파 아니고? 안 믿기는데……. 야 모자 좀 벗어 봐.”

두영은 제게 뻗쳐 오는 손을 피해 리클라이너에 등짝을 찰싹 붙였다. 무릎도 방어막처럼 세웠다. 우뚝 멈춘 탈색모의 손이 모자챙만 가볍게 올려 치고 빠졌다.

“민망하게……. 내가 너 때리냐? 얼굴 좀 보자니까 괴물 보듯 피하네.”

두영은 살짝 올라간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탈색모는 사람을 하대하는 게 익숙해 보였다. 공공장소에서 패악을 부려도 창피함을 몰랐다. 사람 위에 선 사람. 이주학이 학교에서 왕처럼 다닌 것과 비슷했다. 차이점이라면 탈색모는 학교라는 울타리 밖에서도 왕처럼 군다는 점이었다.

두영은 모자챙 아래로 남자의 다리가 불안하게 떨리는 걸 보았다. 게다가 그는 입구 쪽을 반복적으로 살피며 입술을 뜯었다. 마치 두려운 존재를 기다리는 것처럼.

불시에 고개를 돌린 탈색모와 시선이 겹쳤다. 두영이 급하게 눈을 내리뜨자 남자가 한껏 질린 표정을 드러냈다.

“이렇게 구린데 왜 만나지? 니 싸구려 옷이랑 그 모자 존나 안 어울려.“

두영은 무심결에 입고 있는 옷을 움켜잡았다. 낡은 체크 남방과 조끼가 금방이라고 해질 것처럼 초라하게 느껴졌다.

“아, 좀 말 좀 해 봐. 시발 답답해 뒤지겠네. 어른이 물으면 대꾸하는 시늉이라도 하지? 잠깐, 그러고 보니 너 몇 살이야? 중딩 아냐?”

중딩이란 소리에 두영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자 탈색모가 기대감 어린 시선으로 두영을 보았다. 두영은 부담스러운 시선에 다시 입을 꾹 다물었고 결국 남자는 뒷목을 부여잡았다.

“와씨……! 밀당 장난 없네. 아주 사람을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혼자 흥분하고, 혼자 맞장구치는 모습이 기괴했다. 다짜고짜 하는 호구조사는 취조를 방불케 했다. 그 순간 탈색모가 두영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꼬라지를 보니 아무것도 모르는 얘 같은데, 혹시 원조야? 돈 받고 해? 그럼 나중에 먹버 당하면 형한테 전화해. 남자는 처음이긴 한데 홍승표도 하는 걸 나라고 못 할까.”

“알았지?” 탈색모가 마지막 말을 두영의 귓가에 속살거렸다.

두영은 냉큼 남자를 밀치고 귀를 틀어막았지만, 탈색모가 두영의 손목을 움켜쥐고 억지로 끌어 내렸다. 비리비리한 쭉정이는 생각보다 힘이 좋았다.

“아니면 홍승표랑 셋이서 할래? 걔가 그렇게 하자고 안 해? 미국에서 홍승표가 얼마나 문란하게 살았는데. 조만간 우리도 한 침대에서 볼 거 같은데, 그때 여자 한 명 껴서 넷이 해도 되고.”

뇌를 거치지 않고 나오는 말이 하나같이 추잡했다. 홍승표보다 더한 인간은 처음 봤다.

“자세히 보니 입도 작네. 홍승표 거 입으로 해 주기 안 힘드냐? 걔는 지 좆만 한 얼굴에 박고 싶을까.”

“…들어…….”

“뭐?”

“안… 힘들어요. 커서 좋아요.”

탈색모는 무표정으로 두영을 보다가 갑자기 허리를 접고 웃기 시작했다. 소리 없이 몸을 들썩이며 웃는데 어딘가 소름이 끼치는 모습이었다. 마치 엑소시스트의 한 장면 같았다. 겨우 웃음을 갈무리한 남자가 구부린 허리를 펴고 눈에 고인 눈물을 닦았다.

“하, 간만에 웃었다. 너 존나 웃기다. 그렇게 겁먹은 얼굴로 뭐가 커서 좋다는 거야? 홍승표 섹파 중에 커서 좋다고 한 사람은 네가 유일해. 너 되게 잘 받아먹나 봐? 그러니 걔가 잠수를 탔지, 재밌는 장난감 혼자 가지고 놀려고.”

두영은 열이 몰리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탈색모는 두영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걔 요새 약 안 해? 그럼 약 쌓아 둘 텐데, 그거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또다시 쏟아지는 질문에 두영은 눈을 끔뻑거릴 뿐이었다. 홍승표가 먹고 있는 약이 있다는 걸 방금 처음 알았다.

“그거 찾아서 뿌려야 날 무시 못 하는데. 근데 이젠 학교도 졸업했겠다 어디에 약을 뿌려야 하나? 아니면 누구한테 먹여야 하나?”

탈색모는 두영을 음흉한 눈빛으로 훑으며 말을 이었다.

“암튼 잘 받아먹으면 나랑도 함 해 봐. 내 것도 좀 크거든. 튜닝을 아주 제대로 해서.”

이를 훤히 드러내며 웃은 남자가 약간 숨을 헐떡였다. 동공도 살짝 풀려 있었다. 비정상적인 모습에 두영은 어깨에 얹힌 남자의 팔을 치웠다. 그리고 상영관에서 나왔다.

사람이 없는 복도를 묵묵히 걸어가다가 썩은 나뭇가지처럼 무릎이 꺾였다. 입을 틀어막고 넘어오는 신물을 간신히 참았다. 현기증이 가라앉을 때까지 바닥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그때 맞은편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우르르 나왔다. 영화가 끝난 상영관이었다.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사람들로 인해 두영은 하찮은 모래알처럼 휩쓸렸다. 라운지로 나왔을 땐 슬리퍼 한 짝이 없어진 상태였다.

두영은 소심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까 홍승표와 상영관에 들어가기 전에 있었던 라운지가 아니었다. 턱 끝까지 물이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식은땀이 빗물처럼 흐르고 알몸으로 쫓겨난 사람처럼 몸이 덜덜 떨렸다.

‘집에 어떻게 가지? 가지고 있는 돈 얼마 없는데. 휴대폰도 없는데.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더 많을 텐데. 여길 어떻게 벗어나지? 그냥 죽을까? 그럼 할머니는?’

극단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에 호흡이 뚝뚝 끊겼다. 일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달팽이관에 꽂혔다. 두영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손에 팝콘을 들고, 다른 손에 음료수를 든 홍승표가 보였다.

“승표… 승표야…….”

두영은 아직 저를 발견하지 못한 홍승표에게 걸어가며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하지만 홍승표 옆에 부자연스럽게 서 있는 어느 여자를 발견하고 멈춰 서야 했다. 단발머리의 여자는 홍승표의 팔에 팔짱을 끼고 어여쁘게 웃었다.

“아…….”

두영은 외마디 탄식을 내뱉었다. 부자연스럽지 않았다. 부자연스러운 건 저 자신이었다. 제게 없는 자유로움이 저들에게는 있었다. 아니, 이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 당연하게 소유한 걸 저만 가지고 있지 않았다. 착취당한 건 저뿐이었다.

“우욱…….”

두영은 입을 틀어막았다. 배를 채운 음식물이 기어코 넘어오려 했다. 화장실을 향해 몸을 트는 순간 어느 커플과 부딪쳐 나동그라졌다. 커플이 들고 있던 팝콘이 주변으로 흩어졌다.

“아니 씨발 진짜! 앞 좀 보고 다녀요!”

“욱……!”

두영은 내내 참아 왔던 구토를 바닥에 쏟아 냈다. 욕을 한 남자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누군가가 두영의 팔뚝을 붙잡고 일으켜 세워 주었다. 유니폼을 입은 영화관 직원이었다. 문득 두영은 주변이 소란스러운 걸 느꼈다.

무심코 시선을 들어 올렸다. 제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경멸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두영은 바닥 밑으로 꺼져 가는 느낌을 받았다.

비웃음과 조롱 사이에 박은식도 있었다. 그는 배를 부여잡고 오열하듯이 웃었다. 초승달처럼 구부린 눈 안쪽에 피눈물이 차올랐다. 활짝 벌어진 입 안으로 피눈물이 들어가 치아 사이에 협곡처럼 스며들었다.

“손님 괜찮으세요? 많이 안 좋으시면, 윽!”

두영은 가증스럽게 걱정하는 척하는 직원을 밀치고 도망쳤다. 다 저를 어떻게 해 보려고 하는 기만 덩어리였다.

화장실에 들어간 두영은 아무 문이나 열고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벌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집에 노모가 쉬지도 않고 일하는데 저는 제 즐거움을 선택해서.

'그러게, 왜 약속 안 지켜?'

어느새 따라 들어온 박은식이 두영을 다그쳤다. 귀를 틀어막아도 음성은 끊이지 않았다.

'행복해지지 않는다며.'

속죄하기 위해 자아를 포기했다. 멋대로 휘둘러지는 인형 같은 삶을 살겠노라 죽은 박은식에게 약속했다. 제 몸은 제 게 아니었다. 외톨이의 삶은 박은식에 대한 속죄였다. 그리고 박은식이 제게 내린 형벌이었다.

'너는 행복해지면 안 돼. 날 두고 너만 행복하면 안 돼.'

“응… 안 행복할게……. 절대 안 행복할게……. 행복해지지 않을게…….”

나는 행복하면 안 돼.

홍승표는 기둥에 등을 기대고 결제한 팝콘과 음료수를 기다렸다. 주문하는 사람들에 비해 직원의 수는 한참 부족해 보였다. 그런데도 매니저는 가슴 속에 사직서 하나 품고 있는 현자처럼 주문을 받았다.

히어로물의 새 시리즈가 개봉한 탓에 극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물론 홍승표도 같은 영화를 며칠 전에 예매했다. 뭐를 좋아할지 모를 땐 가장 인기 있는 영화를 고르는 게 안전했다.

홍승표는 습관처럼 티셔츠 허리춤을 손으로 쓸었다. 허두영이 동아줄처럼 잡아서 쭈글쭈글해진 부분이었다. 거리에서 한 번 떨어진 게 무서웠는지 녀석은 제 옆에 찰싹 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모자를 쓴 후에는 타인의 시선에 조금 둔해진 것 같았지만, 혼잡한 층으로 올라오자 안 그래도 새하얀 녀석의 낯빛이 다시 시체처럼 창백해졌다. 보고 있기 안쓰러워 미리 상영관에 앉혀 두고 저 혼자만 주전부리를 사러 나왔다. 불안한 얼굴로 절 기다릴 걸 생각하면 아랫배가 당겼다.

극장이 처음인 허두영에게 여러 가지를 경험하게 하고 싶었다. 휴대폰으로 근처에 사람이 없을 만한 식당을 검색했지만, 지역 자체가 핫플레이스라 그런지 성에 차는 곳이 없었다. 그냥 호텔로 데려가 룸서비스를 시키는 게 좋을 듯했다.

호텔 매니저에게 메시지를 보내는데 누군가가 제 앞에 멈춰 섰다. 시선을 아래 두고 있어서 통굽 부츠가 먼저 보였다. 살짝 눈을 치뜨자 단발머리 여자가 싱글벙글 웃고 있는 게 보였다. 홍승표는 그를 무시하고 도로 메시지를 작성했다.

“왜 나 무시해?”

“안 사요.”

“지금 나한테 장난치는 거야? 그 얼굴로 하니깐 그냥 웃기네.”

홍승표는 매니저에게 온 응답 메시지를 확인하고 다시 여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너 누구신데.”

“반말이야 존대야.”

“누구냐고.”

“진짜 기억 안 나? 나 유연서, 다민이 친구. 그때 나 버리고 갔었잖아.”

홍승표는 무심한 시선으로 여자를 보다가 주문 번호가 불려 그곳으로 몸을 틀었다. 라지 사이즈 콜라에 빨대 두 개를 꽂고, 허두영 몸통만 한 팝콘을 품에 안았다.

“데이트해? 옷 편하게 입고 팝콘이나 들고 있으니 이제야 니 나이로 보인다.”

졸졸 따라온 유연서가 팝콘 몇 개를 집어 먹었다. 홍승표는 가던 길을 멈추고 유연서를 내려다봤다.

“몸이 달았으면 나 말고 다른 놈을 노려. 눈도 좀 낮춰 보고.”

“…너 진짜 또라이네. 얼굴값 안 한다고 들었는데 안 하긴 무슨, 존나 많이 하는구만.”

“최근에 눈이 좀 높아져서.”

“그래서 손도 잡고 다녔어? 보디가드처럼 사람도 쳐 내고.”

홍승표는 눈썹을 까딱였다. 유연서가 다시금 팝콘을 한 주먹 쥐고 덧붙여 말했다.

“아까 봤어, 손깍지 끼고 데리고 다니는 거. 나도 오늘 다민이랑 영화 보러 왔거든.”

“그럼 네 친구랑 놀아.”

“싫엉. 걔는 나 버리고 다른 데 갔단 말이양.”

유연서가 작위적으로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홍승표는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상영관으로 쪽으로 몸을 틀었다. 유연서가 계속 따라오며 말을 걸었다.

“그 애가 뭐가 그렇게 좋아?”

“섹시해서.”

“뭐야 그냥 어린애 같던데. 그래 봤자 피피에서 룸 뛰는 애잖아.”

재차 걸음을 멈춘 홍승표는 유연서를 향해 삐딱하게 섰다. 무표정으로 내려다보자 유연서가 조금 당황해했다.

“아, 아냐? 그때 룸 들어간 애 잡아 온 거잖아.”

“그래서?”

“응?”

“걔가 술을 따라 주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인데. 너 나 좋아해?”

내내 미소를 띠고 있던 유연서가 삽시간에 정색했다.

“하… 시발. 이다민 이 새끼 나오기만 하면 멱을 따 버려야지.”

유연서는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단발머리를 한 손으로 쓸어 넘긴 유연서가 살쾡이처럼 눈을 치뜨고 홍승표를 노려봤다.

“너 몇 달 동안 연락 없이 잠적했잖아. 그동안 이다민은 너랑 연락이 안 된다고 지랄도 그런 지랄이 없겠다시피 생지랄 했어. 걔는 너 하는 거 분신처럼 따라 하고 살아야 직성이 풀리는 애인데 갑자기 지 인생의 나침반이 사라졌으니 얼마나 심신이 고달프겠어. 안 그래?”

가만히 듣고 있자니 엉뚱한 곳으로 원망으로 쏟아졌다. 홍승표는 유연서의 원래 눈동자 색을 짧게 응시하다가 한숨을 늘어뜨렸다.

“착각하나 본데, 난 이다민한테 그러라고 시킨 적 없어.”

“웃기지 마. 그럼 미국에서 잘살고 있는 애 건들지 말았어야지.”

“건든 적 없다니까 그러네. 본인이 자기 인생 지루해서 자발적으로 나한테 붙은 걸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굳이 따지고 보면 내가 이다민한테 이용당한 거 아냐?”

“…쓰레기 새끼.”

홍승표는 한쪽 입꼬리를 비죽 끌어 올렸다. 그냥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지난 일을 떠올리게 만든 유연서에게 칼을 꽂고 싶었다. 아직도 룸에서 허두영을 그따위로밖에 끌고 나오지 못한 자신을 죽이고 싶었다. 그러니 딱 그만큼만 유연서의 생살을 뜯어내는 것이다.

“너희들이 어떤 관계인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너만 이다민을 친구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이다민은 너에 대해 별생각이 없어.”

“…….”

“내 얘기 자주 들었다며, 이다민한테. 근데 난 미국에서 네 얘기를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어.”

홍승표는 눈이 휘어지게 웃었다.

“네가 이다민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건 내 탓이 아니지.”

유연서의 눈빛이 매섭게 뜨였지만, 감정적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다민과 친구라길래 똑같이 의지박약에 머리 빈 꼴통일 줄 알았다. 그러나 유연서는 안에 쌓인 분노를 스스로 다스릴 줄 아는 모양이었다. 그래 봤자 철없는 동생과 뒷바라지하는 누나 같았다.

불현듯 뒤쪽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유연서가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홍승표는 끈질긴 접촉에 슬슬 화가 났다. 유연서의 목적이 자신이 아니란 것쯤 진작 파악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저를 잡아 두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유연서가 다시금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다민 지금 어디 있는지 안 궁금해?”

“어. 안 궁금해.”

“궁금해해야 할 텐데? 걔 지금 제정신 아니야.”

유연서가 손등 위를 코로 흡입하는 척하며 말을 이었다.

“니 애인 위험할걸?”

갑자기 주변이 어수선해졌다. 사람들이 한 곳을 집중적으로 보고 있었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씨발 진짜! 앞 좀 보고 다녀요!”

제법 큰 싸움이 일어날 것처럼 굴더니 상황은 금세 진정됐다. 흩어지는 사람들 사이로 직원이 바닥을 청소하는 게 보였다. 홍승표는 유연서의 말이 거슬려 상영관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그 순간 바닥을 치우는 직원의 손에서 낯익은 물건이 보였다. 본능적으로 걸음이 그쪽을 향했다.

“그거 이리 줘요.”

홍승표가 갑자기 말을 걸자 직원이 화들짝 놀랐다. 홍승표는 개의치 않고 내민 손을 까딱거렸다.

“이, 이거 말씀이신가요?”

직원이 끈 떨어진 삼색 슬리퍼를 내밀었다. 손에 착 감기는 슬리퍼는 단번에 누구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코앞으로 가져와 냄새를 맡자 직원이 괴상망측한 표정을 지었다.

슬리퍼에서 허두영의 체취가 났다. 홍승표는 음료수와 팝콘을 직원에게 건네고 곧장 화장실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영화관에서 몸을 숨길 만한 곳은 그나마 사적인 공간, 화장실이 유일했다.

“허두영.”

홍승표는 두영의 이름을 부르며 닫힌 문 하나하나 노크했다. 볼일을 마치고 나가는 남자들이 그를 이상한 눈초리로 보았다.

“두영아 여기 있는 거 알아. 문 열어.”

유일하게 닫힌 마지막 문 너머를 향해 말했지만, 아무런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머리를 쓸어 넘긴 홍승표가 문짝 상단을 잡았다.

“셋 셀 때까지 안 열면 문 뜯어 버릴 거야. 하나, 둘, 셋…….”

홍승표는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팔에 힘을 주고 문을 잡아당겼다. 문짝을 완전히 뜯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우지끈 소리가 나더니 상단의 경첩 하나가 덜렁거렸다.

그는 칸 안쪽에 시선을 고정한 채 분리된 문짝을 바닥에 내던졌다. 두영이 양변기와 벽 사이에 주저앉아 귀를 틀어막은 채 애처롭게 떨고 있었다.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은 홍승표가 두영의 굽은 어깨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곧바로 매몰차게 뿌리쳐졌다. 그가 서늘한 얼굴로 소리를 차단한 두영의 손을 뜯어냈다.

“나야, 허두영. 눈 떠, 눈 뜨라고!”

“흐으! 흑, 켁, 콜록…….”

사레가 걸린 두영이 온몸을 들썩이며 기침했다. 속눈썹이 눈두덩에 파묻힐 정도로 눈을 질끈 감은 상태였다. 홍승표는 발버둥 치는 몸을 허벅지 사이로 끌고 와 두 팔로 결박했다.

“쉬이, 괜찮아, 나 여기 있어. 괜찮아.”

홍승표는 얇은 귓바퀴에 입술을 붙이고 속삭이며 나락으로 떨어진 두영의 영혼을 현실로 이끌었다. 한참 동안 떠는 몸을 어루만지고 안정감을 찾을 수 있게 온 힘으로 껴안았다. 차츰 진정한 두영이 너른 품에 안겨 축 늘어졌다. 잔떨림만 남은 손이 홍승표의 옷자락을 절박하게 붙잡았다.

멈추지 않을 것처럼 달래 주던 홍승표가 갑자기 픽 웃었다. 그러자 혼이 빠진 인형처럼 있던 두영이 미약한 반응을 보였다. 홍승표는 두영의 발을 손에 쥐고 주물렀다.

“네가 무슨 유인원이야? 왜 이렇게 맨발을 좋아해.”

여유로운 말투와 달리 그의 표정은 어둡게 가라앉았다. 손에 쥔 발이 차가웠다. 게다가 축축했다. 옷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어 맨살을 쓸었다. 두영이 조금 움찔거렸지만, 파고든 손길을 밀어 내지 않았다. 식은땀으로 흥건한 몸은 감기에 걸리기 쉬웠다.

홍승표는 두영이 입은 상의를 벗기기 위해 밑단을 들췄다. 순간 이쪽을 쳐다보는 구경꾼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그들을 향해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한 명 한 명 뚫어지게 응시하자 그들은 곧 머쓱해 하며 자리를 떠났다.

그는 두영의 옷을 마저 벗기고 저가 입은 후드티를 두영에게 입혔다. 얇은 반소매만 걸친 그는 두영을 안아 들고 칸에서 나왔다. 때마침 화장실 안으로 들어온 매니저가 바닥에 나뒹구는 문짝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한 팔로 두영을 거뜬하게 받친 그는 지갑에서 꺼낸 명함 한 장을 매니저에게 건넸다.

“거기로 전화하면 뒷일은 그 명함 주인이 최대한 잘 처리해 줄 거예요. 좀 크게 불러도 상관없으니까…….”

잡히는 대로 현금을 꺼내 매니저의 앞섶에 꽂았다.

“먼저 가서 엘리베이터 좀 잡아 주면 좋겠는데. 그 돈은 혼자 챙겨요.”

깔끔하게 정산을 치른 매니저는 엘리베이터를 잡기 위해 화장실을 나갔다. 그동안 홍승표는 때가 탄 볼캡을 두영에게 씌우고 그 위에 후드도 덮어씌웠다. 두영은 혼이 빠져나간 인형처럼 눈동자에 초점이 없었다.

홍승표는 세면대에 두영을 앉히고 손에 물을 묻혀 얼굴을 닦아 주었다. 그러면서 오늘 날씨를 묻듯이 덤덤하게 물었다.

“옥수수밭 본 적 있어?”

그의 가슴팍을 움켜쥔 두영의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미국에 콘 벨트 구역이 있는데 한국의 몇 배나 되는 면적이 전부 옥수수밭이야. 빽빽하고 성인 남성 키만큼 자라서 잘못 들어갔다간 시야가 가려져 길을 못 찾고 실종된대. 그렇다고 무작정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가면 옥수수 잎이 억세서 살이 베이고 자칫하면 각막도 다칠 수 있어서 위험해.”

무생물처럼 있던 두영이 그의 이야기에 슬쩍 관심을 드러냈다. 홍승표는 세면대 위를 손으로 짚고 두영과 눈높이를 맞췄다.

“광활한 옥수수밭에 있다고 상상해 봐. 널 보는 사람들은 전부 옥수수야.”

“…….”

“길이 보이지 않는 건 옥수수가 높이 자라서 그런 거고, 너에 대해 떠드는 것 같으면 날카로운 이파리로 공격하는 거구나, 하고 생각해. 여기서 중요한 건 고작 옥수수라는 거야. 네가 천 퍼센트로 이겨.”

홍승표가 콧잔등을 살짝 찡그리며 마지막 한 문장을 장난스럽게 말했다. 두영의 붉은 눈가를 엄지로 쓸고, 뾰족한 윗입술도 간지럽게 어루만졌다.

“그런데도 도저히 못 빠져나올 것 같으면, 그냥 그 자리에 있어. 내가 찾으러 갈게.”

물막이 덧씌워진 두영의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그러자 굵은 눈물이 무겁게 떨어졌다. 공허한 눈망울에 구름이 걷히고 볕이 차츰 들었다.

“우리는 지금 옥수수밭을 탈출할 거야.”

두영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고개를 엉망으로 끄덕였다.

엘리베이터를 호출한 매니저가 화장실로 돌아왔다. 홍승표는 두영을 앞으로 안아 들고 안정감 있게 추어올렸다. 밖으로 나오자 호기심 짙은 시선이 죽창처럼 날아왔다. 홍승표는 대기 중인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후 닫힘 버튼부터 눌렀다. 닫히는 문틈 사이로 유연서와 함께 있는 이다민이 보였다.

지하 주차장에 도착해 녀석을 조수석에 태웠다. 근방에 있는 호텔에 도착한 후 미리 부탁한 룸 케어를 돌려보내고 곧바로 욕실부터 들어가 샤워했다.

홍승표는 식은땀 범벅인 두영을 씻기고 가운을 입혔다. 감기에 걸릴 수 있으니 미리 타이레놀도 한 알 먹였다. 낯선 공간을 경계하는 두영은 입에 대 준 물을 꼴깍꼴깍 받아 마시면서도 큰 동공을 바쁘게 움직이며 주변을 탐색했다.

그는 두영을 침대에 앉히고 젖은 두영의 머리를 적당히 말렸다. 마무리로 얼굴과 고생했을 발바닥에 로션을 꼼꼼하게 발라 준 다음 침대에 눕혔다. 아직 호텔 룸이 어색한 두영이 얼굴 앞으로 모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느리게 눈을 끔뻑대는 두영이 불시에 시선을 겹쳐 왔다. 얇은 눈꺼풀 위로 진한 아이홀이 그려졌다. 늘 나른하게 눈을 뜨는 녀석이 자신을 올려다볼 때면 나오는 눈매였다.

일부러 굼뜨게 움직이는 홍승표의 눈 깜빡임에 두영의 신경이 뭉크러졌다.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거리자 홍승표가 두영의 입술을 살살 어루만지며 기다렸다. 두영은 조금 어물거리다가 속삭였다.

“왜 너는… 나한테 잘해 줘?”

“글쎄, 잘 모르겠어.”

무심한 대답에 두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리고 시무룩하게 눈을 내리떴다. 홍승표는 저를 향한 시선이 사라지자 혀로 입술을 축였다.

“오히려 나는 네가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것 같아.”

갑작스러운 책임 전가에 두영이 다시 시선을 맞췄다. 홍승표는 불순물 없이 투명한 눈동자에 비친 머저리를 보았다. 정말 무슨 짓을 당하지 않고서야 이렇게 머저리 같을 수는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용서해 줄게. 나 몰래 우유에 뭐 탔지? 그게 아니라면 내가 이렇게 덜떨어진 놈처럼 굴 이유가 없잖아.”

덜떨어진 농담에 두영이 난처한 듯 웃자, 홍승표는 귓속에 벌레가 들어온 것처럼 간지러웠다.

“왜 웃어?”

나직하게 묻자 두영이 멋쩍어하며 미소를 거뒀다. 홍승표는 방금까지 유려하게 휘었던 두영의 입술을 가만가만 매만지며 재촉했다.

“또 웃어 봐.”

두영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봄날의 새순처럼 부스스 웃었다. 수채화에 유화를 끼얹은 것처럼 이질적이었지만,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나른한 표정을 지은 홍승표는 입가에 맺힌 미소를 오래 응시했다. 그러다 새가 부리를 쪼듯 입을 가볍게 맞추고 떨어졌다. 촉촉한 포말 소리에 두영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싸늘함에 눈을 뜬 두영은 주변을 둘러봤다. 넓은 침대에 저 혼자밖에 없었다.

옆을 돌아보니 커다란 창으로 도시의 야경이 보였다. 달동네에서 막연히 내다보던 지상의 별들이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데 왜인지 쓸쓸했다. 아마 이 야경을 멀리서 보았던 과거의 저가 쓸쓸했기 때문인 거 같았다.

그때는 달동네도 이처럼 반짝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두가 잠드는 밤에 저만 외로이 환한 야경을 보는 게 더 비참한 것 같았다. 문득 잠결에 머리를 만져 주던 손길이 그리웠다. 정확히는 그 손길의 주인이 보고 싶었다.

두영은 곤란할 정도로 푹신한 침대에서 낑낑대며 내려왔다. 이불이 흘러내려 아무것도 입지 않은 나체가 드러났다. 울긋불긋한 몸은 병에 걸린 사람 같았다. 자기 전에 홍승표와 나눈 정사의 흔적이었다.

낯선 곳이라 긴장한 두영을 홍승표는 아주 오래 달래 주었다. 전희도 평소보다 길었고 끈질겼다. 결국 흐물흐물 녹은 두영이 울면서 넣어 달라고, 어서 박아 달라고 보챈 후에야 홍승표는 아량을 베풀어 주듯이 아래를 채워 주었다.

어느 순간부터 홍승표는 섹스 중에 시키는 게 많았다. 그리고 아주 익숙해 보였다. 자신과 동갑인데 언제 그렇게 경험치를 쌓았는지 궁금했다.

따라가기 급급해서 겨우 홍승표의 페이스에 맞추다 보면 불현듯 우울해질 때가 있었다. 자신은 홍승표가 처음이라 모든 걸 그에게 의존해야 했다. 그래서 이따금 원래 이렇게 좋은 건지, 누구랑 해도 다 좋은 건지, 그럼 여자랑 하면 어떤 기분인지 궁금한 게 많았다.

두영은 정사에 관한 지식만큼 체력도 없어서 금방 나가떨어졌다. 그런데 홍승표는 그런 자신을 번쩍번쩍 들어 자세를 바꾸었다. 그리고 지치지도 않고 아래를 파고들었다. 그럴 때마다 홍승표가 하체만 남은 짐승 같아서 두려웠다.

한숨을 쉰 두영은 홍승표가 제 몸에 남긴 자국을 손으로 쓸었다. 상체도 심하지만, 하체가 더 가관이었다. 음경을 들춰 그 아래 흔적을 유심히 보았다. 짐승한테 물린 것 같은 이 자국이 수두룩했다.

그때 시선이 느껴져 냉큼 고개를 들었다. 아치형 통로에서 홍승표가 어깨를 기대고 삐딱하게 서 있었다. 두영은 머쓱하게 뒷덜미를 쓸며 바로 섰다. 홍승표의 눈길이 제 하체에 고정된 상태였다.

가까이 다가온 그는 근처 의자에 걸쳐진 가운을 두영에게 입혔다. 끈을 적당히 조이고 눌린 두영의 머리칼을 이마 뒤로 쓸어 넘겼다.

“안 배고파?”

그가 말을 끝내자마자 밖에서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두영은 낯선 이의 방문이 덜컥 불안했다. 트레이를 끌고 들어온 남자는 식탁 위에 음식을 세팅했다. 그러다 자기를 빤히 보고 있는 두영에게 힐끔 시선을 주었다.

홍승표는 두영의 귓바퀴를 손으로 주무르며 나직이 속삭였다.

“보지 마.”

명령어를 입력한 컴퓨터처럼 두영은 고개를 숙였다. 홍승표는 조금 떨고 있는 두영을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감싸 안았다.

“추워? 열은 없는데.”

커다란 손으로 두영의 이마를 짚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고개를 좌우로 흔든 두영은 입천장이 간지러워 혓바닥으로 꾹꾹 눌렀다.

홍승표는 세팅을 마친 직원에게 죽을 추가 주문하고 두둑한 팁을 건넸다. 두영은 홍승표의 씀씀이에 조금 놀랐다. 적어도 몇십만 원은 될 듯한 돈이었다. 두영의 표정을 발견한 홍승표가 기민하게 생각하더니 대뜸 피식 웃었다.

“유일하게 대화가 되는 벨보이거든.”

“…벨보이?”

“응. 심부름꾼이라고 생각하면 편해. 예전에 가끔 여기 머물 때, 그땐 나이가 안 돼서 술 반입을 못 했거든.”

결국 홍승표의 말은 돈으로 직원을 사서 술을 반입했다는 것이었다.

홍승표가 두영의 손을 잡고 소파로 걸어갔다. 소파에 두영을 앉힌 그는 음식 덮개를 치우고 옆에 앉았다. 차려진 음식은 뭐가 뭔지 몰랐지만, 모두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두영은 홍승표가 접시에 덜어 준 음식을 오물오물 씹었다. 방금 만든 요리는 따끈따끈해서 입에서 녹았다.

옆에서 시원한 목 넘김 소리가 들렸다. 홍승표가 캔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는 소리였다. 단번에 한 캔을 비운 그가 자신을 물끄러미 보는 두영을 향해 캔을 흔들어 보였다.

“마실래?”

“…….”

“마셔 본 적 있어?”

그의 질문에 두영은 고개를 짧게 내저었다. 눈을 깜빡거린 홍승표가 유리잔에 맥주를 반 정도 채워 두영에게 건넸다. 호기심이 동했던 두영은 조심스럽게 한 모금 머금었고,

“으…….”

곧바로 오만상을 찌푸렸다. 목 안으로 부드럽게 웃은 홍승표가 두영을 따라 하듯 코를 찡그리며 과일을 내밀었다. 무심코 과일을 받아먹은 두영은 방금 너무 스스럼없이 받아먹은 듯하여 손등으로 입가를 문질렀다.

“별로야?”

“조금…….”

어른처럼 마시고 싶었는데 미숙한 반응을 보여 창피했다.

배를 채우고 난 뒤 홍승표는 다른 방으로 두영을 이끌었다. 두영은 가는 길에 여기저기 둘러봤다. 이곳은 룸이 아니라 하나의 집 같았다. 작은 풀도 있었고 가는 곳마다 소파인지 침대인지 모를 의자도 있었다.

방금 들어온 방은 커다란 스크린이 달린 홈시어터였다. 극장에서 본 리클라이너가 있었고 심지어 더 푹신했다. 홍승표는 리모컨을 들고 조명을 조절했다. 은은한 간접 등만 켠 그는 홈시어터를 나가 술과 과일을 챙겨서 돌아왔다.

“오늘 나는 너랑 영화를 보는 게 계획이야. 호러든 로맨스든 상관없어.”

정말로 어떤 장르든 상관없는지 홍승표는 가장 앞에 뜬 영화를 재생했다. 스크린에 푸른 바다가 나왔다. 자연 다큐멘터리 영화였다. 내심 두영은 이 영화가 홍승표의 취향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멍하니 화면을 보는데 옆에서 캔 뚜껑 따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다. 마침 옆을 돌아본 홍승표가 두영과 시선을 맞춘 채 잠시 고민하더니, 새로운 캔을 따서 두영에게 건넸다.

두영은 살짝 멍해지던 감각을 되뇌었다. 맥주를 받아 들고 조심스럽게 맛보았다. 여전히 맛이 없었지만, 아까만큼은 아니었다.

꾸준히 홀짝이다 보니 벌써 알딸딸해졌다. 발가락까지 시뻘게진 두영은 홍승표가 주는 과일을 아기 새처럼 받아먹으며 옅은 한숨을 폭폭 내뱉었다. 심장이 빨리 뛰는 것 같아 가슴 위에 손을 얹자 옆에서 지그시 보고 있던 홍승표도 손을 뻗어 두영의 가슴에 손을 대었다.

“심장이 빨리 뛰어.”

“으응…….”

귀여운 척하려고 한 게 아닌데 저절로 말꼬리가 늘어졌다. 두영은 눈에 힘을 주고 다시 근엄하게 말했다.

“우웅.”

혀가 흐물흐물 녹아 버린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저를 보는 홍승표의 표정이 즐거워 보여 마냥 안 좋지는 않았다. 홍승표와 시선을 겹친 채 눈을 느리게 끔뻑였다. 옛날에는 그의 시선이 두려웠다. 숨통을 조이는 눈빛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저를 숨 쉬게 했다.

두영은 리클라이너 등받이에 편하게 기대앉아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했다. 화면 속 푸른 파도가 제 앞으로 쏟아지는 것 같았다. 사방으로 수평선만 가득 있어 가슴이 갑갑할 때쯤 혹등고래가 아주 잠깐 수면 위로 올라왔다. 두영은 드넓은 무채색의 바다를 헤엄치는 고래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고래에게 바다는 자기 세상이고, 집이었다.

“고래는… 바다가 안 무섭겠지?”

두영이 소곤소곤 말하자 홍승표가 영화 음량을 줄였다. 그는 신중한 얼굴로 대답을 골랐다.

“바다에서 태어났으니까 안 무서울 것 같은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

두영은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발을 딛고 사는 세상이 무서웠다.

“그럼… 바다를 무서워하는 고래두… 있을까?”

“없을걸.”

홍승표의 즉답에 두영은 세운 무릎을 끌어안고 시무룩하게 시선을 내렸다. 손으로 턱을 받친 홍승표는 푸른 어둠에 물든 두영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나지막하게 살을 덧붙였다.

“바다보다 인간이 위험하지. 자기를 해칠 수 있으니까.”

“그럼 고래는… 사람이 무서운 거야?”

“글쎄. 고래가 돼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네.”

홍승표가 나긋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바다가 무서워?”

바다가 무섭냐는 홍승표의 말이 두영은 다르게 들렸다.

사람이 무섭냐고. 사는 게 지치냐고.

두영은 맥주를 홀짝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왜?”

“수영을… 못해서.”

“별거 없어. 나중에 내가 가르쳐 줄게.”

캔 입구에 입술을 붙인 두영은 자그마한 목소리로 "응."하고 대답했다. 자신의 심각한 고민이 홍승표를 통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마음이 한결 편해지고 절 붙잡은 과거들이 희석되는 것 같았다.

더 말하고, 더 치유받고 싶었다.

“여덟 살 때… 아버지 심부름하다가… 폭우 때문에 하수구 물이 역류해서… 물에 빠진 적이 있었어.”

두영은 꼬부랑거리는 발음으로 더듬더듬 설명하기 시작했다. 손톱 주변을 엉망으로 헤집자 조용히 경청하고 있던 홍승표가 의자에서 일어나 두영을 자기 다리 사이에 앉혔다. 그리고 피가 고인 두영의 손가락을 입에 물고 쪽쪽 빨아 먹었다.

홍승표의 입가에 피가 묻었다. 두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엄지로 그의 입가를 슬그머니 닦아 주었다.

“그래서 어떻게 나왔어?”

“동네 아저씨가… 구해 주셨어.”

스스로 꺼낸 과거는 막상 말하려니까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두영은 음울한 시선을 바다에 던졌다. 어느새 심해까지 내려간 화면을 보며 맥주 맛이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곤 누가 들을세라 낮게 속삭였다.

“아버지 친구셨는데… 옷 빌려주시겠다고 따라오라고 해서 갔는데…….”

카메라 셔터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플래시가 눈앞에 터지고 그날의 기억이 번쩍번쩍 떠올랐다.

남자의 집에는 비밀의 방이 있었고 아이만 출입이 가능했다. 남자는 두영에게 그 방에 들어가 옷을 벗고 기다리라고 했다. 암막 커튼이 쳐진 방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겁에 질린 두영은 벗은 옷을 도로 입고 잠긴 문 앞에 서서 아저씨를 불렀다.

그렇게 방에 들어온 남자의 손에는 갈아입을 옷이 아니라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거기서부터 기억이 끊겼다. 지옥에서 빠져나온 두영은 집에 돌아가자마자 허삼혁의 매질을 받았다. 물에 빠져 심부름한 물건을 모두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물에 떠내려간 건 담배와 술이었다. 고작 담배와 술 때문에 생긴 그해 두영의 비밀이었다.

두영은 홍승표가 어떤 반응으로 절 위로해 줄까 기대했지만, 그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거듭 불안해지고 괜히 말한 것 같아 후회했다. 술기운을 빌려 말한 건데 오히려 술이 깼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얼른 숨 막히는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여, 여자랑 자면… 좋아?”

“뭐?”

홍승표의 낮은 목소리가 음산했다. 그냥 아무 말이나 내뱉고 본 두영은 뼈저리게 후회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홍승표가 두영의 턱을 잡고 들어 올렸다.

“그게 왜 궁금한 건데. 너 여자랑 자고 싶어? 묻잖아. 대답해.”

“나, 나는 너랑만… 하고 싶어.”

사늘했던 홍승표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화가 난 것보다는 짜증에 가까웠다. 마치 뜻밖의 말을 들어서 당황한 본인에게 부리는 짜증 같았다. 마른세수를 한 홍승표는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다 리클라이너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기대고 한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갑자기 홍승표가 왜 저러는지 알 수 없었던 두영은 다시 맥주를 홀짝거렸다. 빠르게 뇌가 뭉크러지고 얼굴이 터질 것처럼 뜨거워졌다. 불현듯 극장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울적한 표정을 지은 두영이 음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혀… 잘 쓰눈 사람이 좋아?”

“그건 또 뭔 개소리야.”

다시금 두영의 턱을 붙든 홍승표가 손을 약하게 흔들었다. 술 몇 모금 만에 발음이 어눌해진 두영이 홍승표 면전에 대고 한숨을 폭 내쉬었다. 홍승표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뭔데.”

“먹버가… 뭐야?”

미간을 구긴 홍승표가 손끝에 관자를 괴고 두영을 비스듬히 기울어진 각도로 보았다.

“누가 너한테 그런 말 가르쳤어?”

두영은 상영관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그 사람이… 너랑 나랑 셋이서 하재. 여자분도 데려오신대. 나 보구… 중딩 같대. 그리구 내 얼굴이 니 좆만 하대.”

“…….”

“또… 니가 모은 약 뿌려 버린다고 했구, 조만간 한 침대에서 보자구도 했구……. 아, 니가 미국에서 걸레처럼 굴었대. 여러 명이랑 하눈 거… 조, 좋아한댔어.”

말을 마친 두영은 어떻게 하지 못할 만큼 우울했다. 특히 마지막 말을 할 때는 제 생살이 파이는 기분이었다. 굳이 사실 확인을 안 해도 홍승표의 과거가 어땠을지 예상됐다. 그런데 예상했다고 해서 사실을 들었을 때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다.

만약 홍승표가 저 하나로 만족 못 하는 날이 온다면…….

“아까… 여기 뉴구 들어왔을 때… 난 그 사람이랑 해야 하눈 건 줄 알았어. 직원인지 몰랐어.”

두영은 허공을 멍하니 보았다. 눈꺼풀에 무거운 추라도 달린 것처럼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자신이 뱉는 목소리가 음울해서 듣기 싫었다.

“승표야…….”

하지만 이 말은 하고 싶었다.

“나는… 너랑만 하면 안 돼? 다른 사람이랑은… 하기 싫은데…….”

왜소한 두영의 등이 둥글게 굽었다. 스크린을 향해 있는 얼굴 옆면이 퍼렇게 물들었다.

홍승표는 착잡함에 한숨도 안 나왔다. 아니 감히 쉬지도 못했다. 지금 허두영은 자기 몸에 대한 통제권을 타인의 손에 쥐여 주고 있었다. 게다가 당연하게 그런 식으로 쓰일 거라고 생각했다. 끔찍한 자기 취급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심해처럼 암담했다. 바다만큼 공허하고 깊은 상처였다.

그는 응어리 같은 게 목에 걸렸는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한참 만에 다문 입을 벌리고 소리를 뱉을 수 있었다.

“너는, 내가 어떤 사람인 줄 알고 그런 말을 해?”

정신을 깨우는 홍승표의 목소리에 두영은 무엇이든 답해 주고 싶었다. 알코올로 뭉크러진 뇌에 힘을 주었다.

“상관… 없어.”

“내가 무슨 생각하는 줄 알고 상관없대.”

“어어.”

두영이 바보 같은 소리를 냈다. 허탈하게 웃은 홍승표가 두영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뜨끈한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또 얘기해 봐, 네 어릴 때 이야기.”

두영은 과거를 담은 기억 상자를 뒤졌지만 몇 개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나마 재미있는 이야기를 골랐다.

“옛날에… 무당 누나가 옆집에 살았는데…….”

“누나?”

“으응. 선녀님 모신다구… 누나라고 부르라 했어. 그 눈나가 나보구 팔자가 더럽게 꼬인 박복한 놈이래. 그래서 집에 가서 할무니한테 말했더니, 할무니가 옆집으루 가셔서 누나랑 머리채 잡구 싸웠어.”

그때 기억을 떠올리자 두영은 부스스 웃음이 나왔다. 홍승표는 두영의 올라간 입꼬리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근데 할무니한테… 아직 말 안 한 거 있어.”

홍승표는 양쪽 눈썹을 들썩이며 눈짓으로 뭐냐고 물었다.

“내가 누구 대신 벌을 받았대……. 그래서 억겁의 벌을 받는 중이래.”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죄까지 대신 받아. 이유는 안 알려 줬어?”

두영은 끈 떨어진 인형처럼 머리를 대각선으로 끄덕였다.

“어어. 안 알려 줘써…….”

더운 한숨을 푹푹 내쉰 두영은 홍승표의 어깨에 턱을 괴었다. 감기 걸렸을 때 빼고 제 체온이 처음으로 홍승표보다 높아진 상태였다. 상대적으로 시원한 그의 목덜미 뺨을 비볐다. 일부러 힘을 주듯이 이마로 파고들었다.

“그럼 박은식은?”

기습적인 물음에 두영은 굳어 버렸다. 몸이 뜨겁다고 자만한 게 빠르게 식는 기분이었다. 그 상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홍승표는 두영의 마른 어깨에 입술을 눌렀다.

“박은식도 네가 받는 억겁의 벌 중 하나야?”

귓속을 파고드는 목소리가 오싹했다. 파도 소리가 죄를 고하라는 듯이 두영의 등을 떠밀었다.

“아니…….”

박은식은.

은식이는.

“내가 죽였어.”

어디서 박은식이 훔쳐 듣고 있는 것 같았다. 극장에서 봤던 모습으로 나타날까 봐 두려웠다. 그때 입술 위로 홍승표의 손이 닿아 왔다. 두영은 조각난 정신을 일깨웠다. 흐린 초점을 맞추자 한쪽 눈을 찡그린 홍승표가 보였다. 그는 처참하게 씹히는 두영의 입술을 벌리고 자기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쯧. 입술 좀 그만 괴롭혀. 키스할 때마다 피 맛 나잖아. 정 심심하면 차라리 내 손을 씹어.”

자신을 바라보는 홍승표의 검푸른 눈동자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문득 두영은 헝클어진 그의 머리카락을 만져 보고 싶었다.

“머리, 만져도 봐도 돼?”

“얼마든지.”

홍승표의 흔쾌한 수락에 억겁의 벌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처럼 느껴졌다. 두영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칼을 깃털처럼 간지럽게 쓸었다. 눈을 감은 홍승표는 노곤한 짐승처럼 나른한 숨을 뱉었다.

편안해 보이는 그의 얼굴에 두영의 손길이 더 대담해졌다. 그의 머리카락을 이마 뒤로 쓸어 넘기고 목덜미의 까칠까칠한 부분을 어루만졌다. 어제 그가 머리를 자르고 카페에 온 순간부터 내내 만져 보고 싶어서 손이 미친 듯이 간지러웠다.

문득 홍승표의 벌어진 가운 사이에 짙은 유륜이 눈에 띄었다. 두영은 홍승표를 힐끔 보고는 조심스럽게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그의 심장이 뚫고 나올 기세로 뛰었다.

살짝 스치듯이 젖꼭지를 건들자 뜨거운 숨이 두영의 이마 위로 쏟아졌다. 홍승표의 목울대가 꿈틀거리는 것에 두영은 묘한 고양감이 들었다.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았지만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좌우대칭이 완벽한 복근을 손끝으로 어루만지며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 먹물을 휘갈긴 듯한 음모는 머리털과 달리 뻣뻣하고, 꼬불꼬불했다.

애정 어린 손길로 음모를 쓸던 두영은 그의 가운을 벌렸다. 적당히 힘을 받은 살덩어리가 드러났다. 두영은 제 발등에 쿠퍼액을 묻히는 묵직한 성기를 움켜쥐고 느리게 훑었다.

“하아…….”

고개를 뒤로 젖힌 홍승표가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아직 최대치로 발기하지 않은 성기는 외피가 조금 늘어졌다. 두영은 뿌리 쪽으로 살가죽을 내려 귀두 능선대가 드러나게 했다. 반대쪽 손으로 기둥 중심부터 귀두까지 반복적으로 훑자 순식간에 단단해진 성기가 배꼽 위로 솟았다.

두영은 그의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홍승표가 나른하게 뜬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는 옆으로 앉아 있는 두영을 마주 보는 자세로 돌리고 두 다리를 팔 받침대에 걸쳤다. 자연스럽게 가운이 벌어지고 발기한 두영의 성기가 드러났다.

“계속해.”

홍승표는 다시 등받이에 몸을 늘어뜨렸다. 자기는 구경만 하겠다는 태도에 두영은 입술을 오물거렸다. 조금 난감했지만 전처럼 어디 숨어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흥분되고 홍승표를 기분 좋게 해 주고 싶었다.

두영은 두 손을 겹쳐 융기한 성기를 힘 있게 훑었다. 요도에서 나온 점액질에 손 안쪽이 찐득거렸다. 조금 전보다 미끌미끌해서 움직이기 수월했다. 점점 팔을 쓰는 반경이 넓어지다 보니 두영이 입고 있는 가운이 한쪽 어깨 밑으로 흘러 내려갔다.

“읏…….”

두영은 갑자기 젖꼭지가 만져져 어깨를 움츠렸다. 그것 때문에 잠깐 손을 멈추자 홍승표가 멈추지 말라는 듯이 젖꼭지를 잡아당겼다. 입술을 말아 문 두영은 다시 그의 것을 세게 움켜잡고 흔들었다.

전에 홍승표가 이 정도로 힘을 주고 쥐어야 제 아래 구멍이랑 비슷한 조임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두영은 모범생처럼 배움을 실천했지만, 아무리 그가 알려 준 대로 흔들어도 홍승표는 쉽게 사정하지 않았다.

서서히 전완근이 뻐근해 팔을 흔들다가 멈추고, 다시 흔들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게다가 엉덩이 안쪽이 간지러워 집중력까지 흐트러졌다.

“지금 허리 흔드는 거야?”

홍승표가 다소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다. 어느새 두영이 스스로 허리를 흔들며 의자 좌판에 엉덩이를 문지르고 있었다. 더 대담하게 상체를 젖힌 두영은 다리를 조금 더 크게 벌리고 앉아 홍승표의 성기 끝을 제 회음부에 문질렀다.

끈적한 점액질이 가랑이 사이를 적셨다. 귀두로 여린 살을 꾹꾹 누르다가 위아래로 움직여 제 고환을 들췄다. 자발적으로 하는 행동이 묘하게 흥분되어 발가락이 안으로 굽었다.

무심코 시선을 들어 올린 두영은 멈칫했다. 홍승표가 화난 것처럼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빛이 살벌했고 턱 위로 근육이 꿈틀거렸다.

그 순간 두영은 몸을 지탱하고 있는 팔이 꺾여 의자 밑으로 추락했다. 바닥에 부딪치기 직전 홍승표가 두영의 등을 손으로 받쳤다. 안정감이 느껴지는 지지대였다.

그런데 홍승표는 두영을 위로 끌어 올리지 않고 도리어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두영은 불안한 얼굴로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홍승표에게 완전히 의지해야 하는 자세였다. 그가 만약 팔에 힘을 푼다면 자신은 곧바로 바닥에 떨어질 거다.

홍승표는 두영의 두 다리를 팔에 걸며 협탁에 올려진 과일을 덤덤한 시선으로 훑기 시작했다. 마치 적당한 크기를 가늠하는 표정이었다. 결정을 내린 그는 청포도 한 알을 들고 의자 끝에 엉덩이를 걸쳐 앉았다. 두영은 절벽에 매달린 기분으로 그의 목에 두른 팔을 더 단단히 조였다.

그 순간 엉덩이 사이에 무언가가 닿았다. 표정을 굳힌 두영은 그가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지 비상하게 눈치챘다.

“하, 하지, 흣…….”

과일이 아래를 벌리고 들어오는 감각이 섬뜩했다. 고개를 내젓고 엉덩이를 씰룩댔지만, 홍승표는 청포도 한 알을 끝까지 집어넣고 야무지게 닫힌 구멍을 엄지로 쓸었다.

“맛있어?”

태연하게 묻는 그의 얼굴은 진심이었다. 진지하게 두영의 맛 평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영이 당황하여 어물거리자 홍승표는 눈을 접고 웃었다. 방금 그가 한 짓과 어울리지 않는 천진난만한 미소였다.

홍승표는 바짝 붙은 두영을 떨어뜨리고 오물거리는 구멍을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청포도 한 알을 또 손에 쥐고 집어넣으려 했다. 두영은 그의 손길을 피해 엉덩이를 흔들었다. 그러나 자세 때문에 한계가 있어 벗어날 수 없었다.

자꾸 버둥거리자 배에 힘이 들어가서 이미 먹힌 과일이 반쯤 모습을 드러냈다. 두영은 누가 보는 앞에서 변을 보는 것 같아 수치심이 들었다. 그때 홍승표가 대가리를 빼꼼 내민 과일을 도로 꾹 눌러 집어넣었다.

“아래 입이 자꾸 오물거리는 게 배고픈 거 같아서 안쓰러워. 뭐라도 먹여 주고 싶어.”

두영은 일말의 표정 변화도 없이 지껄이는 홍승표가 미친 것 같아 눈을 마구 깜빡였다.

“위로 아무리 먹여도 살 안 찌잖아. 그럼 아래 입에 먹여 봐야지.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보단 낫잖아. 안 그래?”

허무맹랑한 말을 진지하게 하니깐 두영은 설득당할 뻔했다. 고개를 끄덕거릴 뻔한 걸 뇌에 힘줘서 참았다. 하지만 홍승표는 두영의 허락이 중요하지 않았다.

“아, 해.”

“하지… 하지 마…….”

“내가 어떤 사람인지 상관없다며.”

뻔뻔하게 대꾸한 홍승표가 엄지 한 마디를 구멍에 집어넣고 잘게 진동을 주었다. 두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옅은 신음을 흘렸다. 그러자 홍승표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내가 널 보면서 어떤 생각 하는지 알아? 어디 가둬 두고 섹스만 하고 싶어. 네 구멍을 내가 주는 걸로만 채우고 싶고, 내가 싼 정액이 여기 안쪽에 스며들었으면 좋겠어. 네 옆에 나만 있었으면 좋겠고, 나 말고 다른 사람은…….”

홍승표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의 목울대가 무겁게 들썩였다. 배설하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참아 낸 듯 보였다.

그는 두영을 리클라이너에 눕히고 버둥대는 다리를 가슴팍에 닿을 정도로 눌렀다. 자기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복숭아 모양으로 갈라진 엉덩이 사이에 코를 박았다.

“힘줘서 내 입에 뱉어.”

“응, 아으, 하앗……!”

뒤에서 처박는 힘에 두영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두영이 주저앉으려 하자 홍승표가 두영의 한쪽 다리를 잡아 올린 채 성기를 짧고 굵게 쳐올리다가 마지막은 강하게 들이박으며 사정했다.

간신히 발끝으로 선 두영은 홍승표의 어깨에 뒤통수를 문질렀다. 그는 두영의 턱을 붙들고 입술을 지저분하게 빨았다.

“후읍… 흐우…….”

두영은 코로 힘들게 숨을 쉬며 홍승표의 혀를 빨아 주려고 애썼다.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홍승표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두영의 나머지 다리도 잡아 들었다.

갑자기 몸이 들린 두영은 홍승표의 뒷덜미를 잡고 끙끙 앓았다. 내리뜬 눈으로 본 제 아랫배가 부자연스럽게 튀어나와 있었다. 안쪽이 예민해질 때로 예민해진 상태라 홍승표가 조금만 허리를 들썩여도 배 속이 오싹했다.

그가 리클라이너에 털썩 앉자 그 반동에 두영이 정액을 찔끔찔끔 뱉으며 사정했다. 홍승표의 몸에 완전히 기대 눕자 등허리가 둥글게 휘었고 엉덩이는 그의 치골에 눌려 봉긋했다.

홍승표가 다시 아래에서 위로 쳐올리기 시작했다. 드나드는 소리가 철퍽철퍽 울렸다. 그는 두영의 어깨에 턱을 괴고 처량하게 흔들리는 성기를 손에 쥐었다.

“아읏! 잠깐, 흐앗…….”

내장이 건드려지는 감각과 직접적으로 성기가 훑어지는 자극에 두영은 미칠 것 같았다. 그가 두영의 오므린 다리를 제 다리로 활짝 벌렸다. 좀 더 수월해진 삽입에 그의 성기가 한계치도 모르고 배 속 깊은 곳까지 쳐들어왔다.

“하아, 헉……!”

탄성을 뱉으며 사정한 홍승표가 이어진 아래를 뭉근하게 비비며 두영의 배를 다정하게 쓸었다.

“다 먹어.”

“흐으…….”

“흘리지 마.”

경고처럼 말을 남긴 홍승표가 다시 두영을 안아 들고 홈시어터에서 나갔다. 두영은 그의 것을 물고 배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홍승표가 두영을 위아래로 움직이면서 걸어 결국 정액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말 안 듣네.”

순식간에 말 안 듣는 아이가 된 두영은 씨근덕대며 가슴을 들썩였다. 욕실로 가는 초입에 전신 거울이 있었다. 그 앞에 멈춰 선 홍승표가 거울에 두영을 비추며 허리를 들썩였다.

은근하게 쳐올리던 움직임이 점점 거세지자 두영이 가슴을 앞으로 내밀고 입을 달싹였다. 아찔한 성감에 눈앞이 흐려지고 단전에 뭉친 쾌감이 터질 것 같았다. 사정 직전의 순간 홍승표가 두영의 성기 밑동을 세게 쥐었다.

“아아… 놔, 놔아…….”

“거울 봐야지.”

두영이 고개를 내저으며 거부했다. 홍승표는 아래를 연신 쳐올리면서 계속 거울을 보라고 보챘다. 두영은 서럽게 눈물을 떨구며 거울을 응시했고, 홍승표가 인형처럼 들고 있는 어느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거울 속에 자신은 어딘가 나사 하나 빠진 사람처럼 눈이 풀린 상태였다. 목 넘김을 모르는 모양인지 침을 줄줄 흘렸고, 홍승표가 성기를 쑤셔 박을 때마다 입을 벌리고 이상한 신음을 터뜨렸다.

낯선 이에게서 시선을 뗀 두영은 홍승표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과녁을 노리는 화살촉 같은 시선을 하고 있었다. 모든 걸 투시하는 눈은 제 속내를 읽고 있는 것 같아 부담스러웠다.

두영이 허리를 들썩이며 제 성기를 움켜쥔 그의 손을 잡아 뜯었다.

“제발, 놔, 아아!”

홍승표가 큰 손으로 성기를 젖 짜듯이 흔들기 시작했다. 숙련된 손놀림에 두영의 허리가 발작하듯 들썩였다. 저도 모르게 아래를 조이자 홍승표가 눈에 힘을 주고 두영을 노려봤다.

사정한 두영은 그대로 홍승표에게 안겨 욕조로 들어갔다. 이제 끝난 줄 알고 저를 씻어 주는 손길을 얌전히 받는데 홍승표가 또다시 아래를 파고들어 왔다.

“물이 들어… 으읏…….”

“물이 들어와?”

“흐으… 으응…….”

홍승표가 욕조 턱 위에 두영을 앉히고 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벽에 기댄 두영은 배 속을 가득 채운 내용물이 빠져나가는 감각에 저도 모르게 구멍을 조여 그의 손가락을 붙잡았다. 좀 더 안쪽을 만져 주길 원해 엉덩이도 슬쩍슬쩍 흔들었다.

“빨리… 승표야 빨리… 네 거 빨리…….”

두영은 평소 맨정신에 할 수 없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으며 더 본능적으로 굴었다. 알코올로 무르녹은 뇌는 아무 생각도 못 하게 했다.

“하… 시발…….”

매섭게 성기를 찔러 넣은 홍승표가 난폭하게 아래를 휘둘렀다. 두영은 그가 주는 고통과 쾌감에 목이 쉬도록 울었다. 난타당하는 배 안쪽이 눈도 제대로 못 뜰 정도로 아팠지만, 그만한 쾌감이 전신을 감싸고 성기가 뜨거워졌다.

두영은 홍승표의 목을 끌어당겨 입술을 비볐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입술을 혀로 할짝대자 홍승표의 눈이 시꺼멓게 가라앉았다.

“우으… 후웅…….”

두영은 목구멍까지 넘어온 그의 혀를 쪽쪽 빨며 아래 품은 것을 세게 조였다. 두툼한 기둥이 내벽을 무식하게 뚫고 지나갈 때마다 예민한 점막이 경련했다. 몸이 부서질 만큼 철퍽철퍽 쑤셔 박던 홍승표가 두영의 얼굴 옆에 팔꿈치를 괴고 벌건 눈으로 뚫어지게 쳐다봤다.

“더, 졸라 봐. 어서…….”

“가고 싶어… 흐아… 빨리……!”

귀두가 간신히 걸쳐질 만큼 성기를 빼낸 홍승표가 뿌리까지 한 번에 퍽! 박아 넣었다. 두영은 장기가 망가지는 것 같아 본능적으로 홍승표의 어깨를 밀쳤다.

홍승표는 두영의 등 뒤로 팔을 둘러 자신을 밀어 내지 못하게 결박했다. 멈추지 않고 잔인하게 박음질하며 두영의 입술을 지저분하게 물고 빨았다. 눈물을 흘리면 그것도 핥아 먹고 인중을 적신 콧물도 깨끗하게 핥았다.

점점 술이 깨는 두영은 이성을 잃은 홍승표가 무서워서 그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불렀다. 그러나 그는 무슨 말만 하려고 하면 두영의 입에 혀를 쑤셔 넣었다.

절정에 도달한 두영이 들썩거리며 발작하는데 홍승표의 몸짓이 워낙 드세서 티가 안 났다. 두영은 강렬한 쾌감에 목소리도 나오지 않아 홍승표의 짐승 같은 욕망을 그대로 받아 주고만 있어야 했다.

더 미치겠는 건 홍승표는 후반부로 갈수록 사정까지 도달하는 시간이 늦어진다는 점이었다. 이 속도로 계속 쑤셔질 걸 생각하자 앞이 캄캄했다. 배 안쪽을 주먹으로 사정없이 빻는 것 같았다. 너무 강한 쾌감에 숨도 제대로 안 쉬어졌다. 앞이 흐려지고 정신이 까마득해졌다.

그 순간 홍승표가 갑자기 살 기둥을 빼냈다. 두영은 작살에 꾀인 물고기처럼 등허리를 경련했다. 거칠게 긁힌 내벽이 빠르게 조여졌다가 풀어지고 다시 콱 조여졌다.

“숨 쉬어 천천히, 깊게 들이쉬고…….”

나긋한 홍승표의 달램에 두영은 아득히 먼 곳에서 정신을 붙들어 왔다. 녹아내린 뇌로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쉽게 파악할 수 없었다.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두영이 색색 숨을 내쉬며 홍승표에게 눈길을 주었다. 걱정이 만연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가 두영의 숨구멍을 틀어막은 손을 천천히 내렸다. 침으로 흥건한 그의 손에 두영은 자신이 과호흡에서 갓 벗어난 상태임을 알아챘다.

“괜찮아? 어지러워?”

너무나 다정하고 걱정스러운 말투에 두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홍승표는 미간을 살포시 구기더니 두영을 안아 들고 욕조에서 나왔다. 그러고는 자기가 싼 정액을 적당히 긁어내고 빠르게 씻겼다.

커다란 타월에 돌돌 말린 두영은 홍승표에게 안겨 중앙 룸까지 왔다. 그는 두영이 괜찮은 걸 몇 번이나 확인한 다음 드라이기를 꺼내 머리를 말려 주고 물을 건넸다.

그의 보살핌을 받는 내내 두영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전에도 섹스가 끝나면 홍승표가 뒤처리를 해 주었지만, 지금은 뭐랄까… 한도를 넘어선 다정함이었다. 이런 극진한 대접을 자신이 받아도 되는지 망설여졌다.

새 가운을 입고 나온 홍승표가 고개를 숙인 두영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안색을 확인했다.

“많이 안 좋으면 응급실 가고.”

“괜찮, 아…….”

“정말?”

두영은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그러다 홍승표의 가운 한가운데가 들춰져 있는 걸 발견했다. 마지막에 저만 싸고 홍승표는 사정하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다시 하면…….

마침 두영의 눈길을 따라 고개를 숙인 홍승표가 피식 웃었다.

“신경 쓰지 마.”

홍승표의 말과 달리 독립된 주체성을 가진 성기가 힘차게 꺼떡거렸다. 마치 신경 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제 손에 물이 있는 걸 까먹은 두영이 혀로 마른 입술을 축이곤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냥… 해도 돼.”

두영은 홍승표의 어깨 언저리를 흐린 눈으로 보다가 말이 없는 그의 얼굴을 슬쩍 확인했다. 그리고 입을 앙다물었다. 그가 사늘한 얼굴을 한 채 저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덜 말린 머리칼을 쓸어 넘긴 홍승표가 물잔을 쥔 두영의 손에 시선을 주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숙인 두영은 극장에서 물어뜯어 엉망이 된 제 손톱을 발견하고 주먹을 쥐었다. 자신의 불안정함을 홍승표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한숨을 집어삼킨 홍승표가 별안간 몸을 일으킨 후 프런트에 전화했다. 30분이 지나고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아까 보았던 벨보이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안쪽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직접 쟁반을 들고 돌아온 홍승표가 식탁에 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함께 가져온 상처 치료 키트로 두영의 손을 치료했다.

치료가 끝난 두영은 미리 덜어 놔서 식힌 죽을 야금야금 먹었다. 그러다 너무 저만 먹는 것 같아 홍승표에게 조심스럽게 권했다. 아기 새처럼 입을 벌린 홍승표가 눈을 반짝이며 기다렸다. 두영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의 입에 죽을 직접 떠먹여 줬다.

그릇을 깨끗이 비운 두영은 홍승표가 주는 약을 받아먹고 침대에 누웠다. 내심 신경 쓰였던 그의 분신은 오래 걸리긴 했지만, 결국 고집을 꺾고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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