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문드러진 진실
날이 밝아 오기까지 먼 새벽이었다. 그런데도 도심의 거리는 유흥으로 번쩍였다. 홍승표는 기다란 줄을 무시하고 클럽 입구에 섰다. 그의 얼굴을 알아본 가드는 바로 브이아이피 룸으로 그를 안내했다.
룸으로 가기까지 광란의 길이 펼쳐졌다. 홍승표는 복도에서 물고 빠는 이들을 슬쩍 보고 지나쳤다. 분위기에 취했는지 서로의 낯짝을 중요하게 보지 않는 모양이었다.
미로처럼 얽힌 길을 지나 브이아이피 룸에 도착했다. 문 안쪽에서 요사스러운 기운이 느껴졌다. 홍승표는 검은색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고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문 하나를 두고 신세계가 펼쳐졌다. 태고의 동산처럼 옷을 벗고 다녀도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옷을 갖춰 입은 홍승표가 이단아 같은 존재였다.
브이아이피 룸은 침대와 샤워 시설이 갖춰진 곳이었다. 벌써 남녀 여러 쌍이 침대에 얽혀 있었다. 겨우 자정이 넘었을 뿐인데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그는 룸 안쪽에 눈길을 주었다. 그곳에 이다민이 촛농처럼 늘어져 있었다. 원래라면 홍승표가 앉았을 상석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그를 알아본 이들이 먼저 다가와 알은체했다.
“야 홍승표! 얼마 만에 보는 얼굴이야.”
“쟤가 어쩐 일이야?”
처음 보는 얼굴들 같은데 저를 몇 번 본 듯이 굴었다. 도저히 떠오르지 않아 곁눈질만 하고 끝냈다. 마침 녹진한 몸으로 침대에서 벗어난 유연서가 홍승표를 보고 멈칫했다. 그러다 느슨한 미소를 지으며 홍승표에게 걸어왔다.
“네가 여길 왜 왔어. 애인이랑 헤어졌어?”
뒤따라온 남자가 유연서를 뒤에서 껴안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얘 알아?”
“딱 두 번 봤어. 이다민이 하도 나불거리길래 얼마나 잘났는지 확인해 보려고 했는데 존나 비싸게 굴잖아.”
“아! 얘가 그 홍승표구나. 워, 고딩이 존나 살벌하게 생겼네.”
남자의 입에서 나온 그의 나이는 한창 활발하게 활동했던 시간에 멈춰 있었다. 딱히 정정해 주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에 그들을 지나쳐 이다민에게 걸어갔다.
이다민은 한쪽 소매를 걷어 올린 채 몽롱한 시선을 하고 있었다. 근처 테이블에 주사기와 약을 태운 흔적이 보였다. 상태를 파악한 홍승표는 이다민의 머리털을 쥐고 늘어진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곤 팔을 높이 쳐들어 이다민의 뺨을 후려쳤다.
짝, 짝, 짝, 짝.
연이은 소리에 하나둘 시선이 모였다. 다섯 손가락을 곧게 편 홍승표는 같은 곳만 노렸다. 일방적인 폭행은 제정신이 아닌 이들이 보기에도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다민이 뒤늦게 반항을 시작하며 팔을 휘둘렀다. 홍승표는 이다민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바늘 자국이 남은 팔 안쪽을 발로 짓밟았다.
“아아아악! 야 이 씹……! 홍승표! 갑자기 찾아와서 뭐 하는 짓이야?!”
“넌 좀 더 맞아야 해.”
이다민의 멱살을 움켜쥐고 다시 팔을 휘둘렀다. 그때 방관자처럼 보고 있던 어느 남자가 홍승표의 팔을 잡아챘다. 홍승표는 곧바로 남자의 얼굴에 팔꿈치를 꽂았다. 뒤로 나자빠진 남자는 가랑이를 훤히 드러내고 기절했다. 홍승표는 눈살을 찌푸리고 시선을 거뒀다.
겁을 먹은 이다민이 뒤로 기어가며 처절하게 가드를 부르라고 외쳤다. 호출로 들어온 가드 세 명은 기절한 남자와 이다민, 그리고 홍승표에게 차례로 시선을 주었다.
“빠, 빨리 이 새끼 쫓아내……!”
난감한 표정을 지은 가드들이 천천히 홍승표를 둘러쌌다. 홍승표는 포복해서 도망가는 이다민을 눈으로 좇으며 말했다.
“난 쟤만 조지면 끝나요.”
“여기서 나가 주십시오.”
“안 되겠는데.”
한순간에 룸은 난장판이 되었다.
홍승표는 뒤에서 덮쳐 오는 가드를 몸을 틀어 피한 동시에 가드의 정강이를 발로 차서 무게중심을 무너뜨렸다. 앞으로 쏠린 가드의 명치에 무릎을 꽂은 다음 목덜미를 한 손으로 쥐고 다른 방향에서 기습하는 가드에게 내던졌다.
곧바로 반대쪽에서 체중을 싣고 달려온 가드가 홍승표의 허리를 껴안고 무식하게 밀었다. 덩치가 큰 가드라 홍승표는 휘청거리며 테이블을 손으로 짚었다. 그는 유리병으로 가드의 머리를 내리치고 팔꿈치로 등을 마구 찔렀다. 같은 곳을 반복적으로 찧자 가드의 팔이 한순간 풀렸다.
홍승표는 무릎으로 가드를 쳐올린 다음 바닥에 내팽개쳤다. 발등으로 가드의 옆구리를 못 일어날 정도로 친 후에야 비로소 홍승표의 발길질이 멈추었다.
그 순간 거친 호흡을 하던 홍승표의 뒷머리로 유리잔이 날라와 산산이 조각났다. 서늘한 낯으로 뒤를 돌아보자 안색이 새파래진 이다민이 있었다. 그 옆에 서 있던 가드가 덩달아 긴장하며 홍승표를 보았다.
목덜미를 손으로 쓸자 피가 묻어났다. 홍승표는 불시에 눈을 치켜뜨고 어리바리해 보이는 가드를 응시했다. 약간 커진 동공으로 눈꺼풀을 깜빡이지도 않고 쳐다보자 가드가 울 것처럼 겁을 먹었다.
오늘 처음 들어온 신입은 앞서 깨진 선임들을 보고 멍청하게 굳어 있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저가 던진 게 아니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피 묻은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긴 홍승표는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피곤하단 듯이 손을 휘저었다. 울먹인 막내 가드가 고개를 조아리며 선임 두 명을 질질 끌고 룸을 빠져나갔다.
이다민은 테이블 아래 처박혀서 덜덜 떨고 있었다. 홍승표는 그 앞에 쭈그려 앉았다.
“나, 나한테 왜 이래 미친 개또라이 새끼야……!”
한쪽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이다민이 눈물을 질질 짜냈다. 그런 이다민을 조용히 지켜보던 홍승표가 무심한 시선으로 주변을 훑었다.
“걔보단 덜할 줄 알았는데… 내 주변도 쓰레기 천지네.”
비릿한 체액 냄새도, 시큼한 약 냄새도 전부 악취였다.
홍승표는 이다민이 몸을 숨긴 테이블을 옆으로 밀쳤다. 테이블에 쌓인 술잔과 술병이 바닥으로 와르르 떨어지며 파열음이 퍼졌다. 곳곳에 파편이 튀자 구경꾼들이 호들갑을 떨며 물러났다. 그러면서 끝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처량하게 몸을 만 이다민은 팔로 자기 머리를 감쌌다. 당장 짓이겨도 시원찮을 만큼 하찮은 모습이었다.
“처음으로 하는 데이트였어. 네가 다 망쳤고.”
“하, 데이트? 네가? 그딴 귀찮은 짓을 왜 하는데. 걔가 뭐라도 돼?”
“뭐라도 돼. 귀찮은 짓을 할 만큼.”
어쩌다 보게 된 허두영의 웃는 얼굴을 저는 또 한 번 보겠다고 머저리가 되는 걸 택했다. 자신은 맞지도 않은 돌멩이를 주워다가 녀석에게 왜 던졌냐고 따지는 뻔뻔한 개구리였다. 그렇게 해서 허두영을 옆에 둘 수 있다면 기꺼이 몇 번이라도 거짓말을 할 것이다.
이다민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점점 웃음이 커지더니 벌러덩 드러누워 끅끅대기 시작했다. 겨우 웃음을 갈무리한 이다민은 눈꼬리에 고인 눈물을 검지 끝으로 새초롬하게 닦았다.
“세상 사람 다 지 밑으로 보면서 어디서 개소리야. 그딴 말은 지조 있는 사람이 해야 씨알이라도 먹히지. 니가 언제부터 지조 있게 굴었다고 태세 전환을 해, 이 뻔뻔한 새꺄.”
틀린 말 하나 없는 이다민의 말에 홍승표는 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나는 왜 그렇게 살았을까.”
입 밖으로 꺼내고 보니 더 크게 와닿았다. 생각 이상으로 문란한 삶을 살아왔다. 겨우 스물한 해 살았는데 너덜너덜해질 지경이었다. 그에 비해 허두영은 순수했다. 과거에 사로잡혀 본인을 더럽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그건 더러운 축에도 끼지 못했다.
갑자기 홍승표는 정숙한 얼굴로 고해성사하듯 말했다.
“걔는 내가 처음이라 어떻게 건드려도 재밌어. 항상 기대되고 짜릿해.”
아무리 허두영에게 수지맞지 않는 장사여도 이젠 무를 수 없었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멀리 와 버렸다. 허두영은 끝까지 저를 책임져야 했다.
이다민이 질색하며 홍승표를 보았다.
“…갑자기 걔가 왜 불쌍해지냐.”
“불쌍해서 나 같이 정신 나간 놈을 만났잖아.”
거짓 한 톨 없이 진실만 말한 홍승표는 바닥에 떨어진 냅킨을 주웠다. 그리고 이다민의 턱주가리를 잡아 벌려 입에 냅킨을 구겨 넣었다.
“아, 이걸 말 안 했네. 나 이제 약 안 모아.”
겁에 질린 이다민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캐나다에서 있었던 일, 범인이 누구인지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 그 당시에 먹지 않는 약 모으고 있었던 거 너랑 홍승민만 알고 있었으니까. 어차피 그 일이 아니더라도 한국에 올 생각이었어. 넌 헛짓거리 한 거고. 덕분에 내가 얼마나 비정상인지 알았으니까 앞니 두 개만 뽑을게.”
홍승표는 몸부림치는 이다민을 무력으로 짓누른 후 순식간에 앞니를 뽑았다. 초반에 잘 다져 놓은 덕에 손쉽게 빠졌다.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쓰는 이다민이었다. 몇 개 더 뽑을까 했지만, 봐주었다. 어쨌든 이다민이 지껄인 말 덕에 허두영이 평생 저하고만 잔다고 말했으니까. 그건 누가 들어도 프러포즈였다.
홍승표는 기절한 이다민을 바닥에 버려 두고 일어났다. 주변을 둘러보니 자신의 치정문제를 관심 있게 보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그중 유연서가 있었다. 홍승표는 터벅터벅 걸어가 손에 든 것을 유연서에게 보여 주었다.
“니 몫까지 뽑은 거야. 이다민 일어나면 고맙다고 해.”
“미친 새끼…….”
한쪽 입술을 비죽 끌어 올린 홍승표는 바지 주머니에 이빨을 집어넣었다.
“앞으로 내 눈에 띄지 마. 너든 쟤든 고의든 실수든.”
지긋한 시선을 던지고 룸에서 나왔다.
바닥을 두드리는 비트에 머리가 갈라질 것 같았다. 바퀴벌레처럼 증식하는 인간들이 거북했다. 사람 많은 곳에 가면 발작하는 허두영의 병이 옮은 것 같았다.
밖으로 나오자 비가 내렸는지 땅이 눅눅하게 젖어 있었다. 홍승표는 서늘한 새벽 공기를 들이마시며 흥분을 다스렸다. 습관적으로 문 담배를 질겅질겅 씹으며 클럽 맞은편에 있는 좁은 골목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허두영을 매섭게 다그치던 곳이었다.
무의식적으로 바지 뒷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메시지 앱에 들어갔지만 허두영에게서 온 것은 없었다. 녀석은 저를 매번 기대와 실망이라는 양극에서 날뛰게 했다.
홍승표는 휴대폰으로 아래턱을 툭툭 건드렸다. 그때 낯익은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한쪽 다리를 저는 남자는 살이 많이 빠지고 행색도 초라했지만 분명 이주학이었다.
허두영을 다그쳤던 골목으로 사라진 이주학은 한참이 지나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곳은 사람 다니는 길이 아닌 그저 건물과 건물 사이였다. 뭐가 있길래 덩치를 구기고 들어간 건지 문득 호기심이 동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이주학의 뒤를 밟았다. 길이 끊긴 줄 알았는데 몇 단으로 쌓인 실외기 너머로 희미한 빛이 보였다. 납작한 판자를 치우자 또 다른 골목이 나왔다.
듬성듬성 홍등을 띄운 길은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그것마저 사라졌다. 어둠에 적응한 눈을 앞서 걷는 이주학에게 고정했다. 꽤 거리를 좁혀 다가갔지만, 이주학은 미행하는 존재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골목을 따라 계속 전진하던 이주학이 삼거리 지점에서 좌측 길목으로 꺾었다. 그곳이 목적지인지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적당히 거리는 두고 멈춰 선 홍승표는 새카만 그림자에 몸을 숨겼다. 검정 옷을 입어 그의 모습이 완벽하게 감추어졌다. 곧 골목 안쪽에서 이주학 말고 또 다른 기척이 느껴졌다. 뒤꿈치를 세워 걷는 경계 가득한 발소리였다.
낯선 이가 은밀하게 속삭였다.
“돈은?”
“그, 그거부터 줘.”
“돈부터 내놔. 안 그러면 못 줘.”
“…내가 너희들 뭘 믿고? 양 속인 거 아냐? 맞지? 시발 맞네!”
“안 닥쳐? 멍청한 새끼가 지금 뭐 하는지 광고할 일 있어? 자꾸 이딴 식으로 나오면 나는 안 팔면 그만이야. 코딱지만큼 사는 인간 너밖에 없으니까 아쉬운 놈이 기어야지.”
“시발…….”
아무래도 이주학이 말발에서 밀린 것 같았다. 아쉬운 놈은 손끝을 비굴하게 떨며 돈을 건넸다.
“이제 빨리 줘.”
“기다려 확인하고 줄 거야. 너 저번에 한 장 빼고 줘서 내가 얼마나 깨진 줄 알아? 싹수 노란 놈인 거 알겠는데, 그런 짓도 사람 가려 가면서 해야 하는 거야. 자, 받아. 두 번은 할 수 있는 양이야. 그리고 내가 오지랖이 넓어서 하는 소리지만, 이건 배 안 찬다고 두 공기 먹어도 되는 밥이 아니야, 돼지 새끼야. 그리고… 야, 너 혼자 안 왔냐?”
“뭔 개소리야 혼자 왔는데.”
“시발 그럼 저 새끼는 누군데.”
이주학은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시커먼 그림자로 도배된 안쪽에 빨간 불똥이 떠 있었다. 브로커는 멍청하게 서 있는 이주학을 밀치고 잽싸게 내뺐다. 희생당한 돼지는 그림자 밖으로 나오는 이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홍승… 표?”
홍승표는 얼간이처럼 굳은 이주학을 보며 매캐한 연기를 내뿜었다. 그리고 주저앉은 다리에 눈길을 주었다.
“다리 괜찮아? 내가 다리 부러뜨린 것 같은데.”
눈을 부릅뜬 이주학이 얼굴 살이 떨릴 정도로 분노했다.
“니 때문에, 내가 니 새끼 때문에!!”
절뚝거리며 일어난 이주학이 홍승표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홍승표는 담배꽁초를 튕겼고, 눈에 불티가 튄 이주학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물웅덩이에 철퍼덕 엎어졌다.
“으으으! 으윽! 시바알!!”
이주학이 맨땅을 주먹으로 치며 울분을 쏟아 냈다. 화풀이 대상이 없어 화가 난 것 같았다. 홍승표는 이주학을 발로 밀친 후 신발 밑창으로 몸을 더듬었다. 이주학이 벗어나려고 몸부림치자 홍승표는 휘어진 발목을 짓밟았다.
“으아아악!!”
“닥쳐 좀.”
멱따는 소리에 홍승표는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다시 이주학의 몸을 발로 더듬으며 휴대폰을 찾았다. 발끝에 치인 휴대폰이 땅에 떨어졌다.
홍승표가 휴대폰을 주워 들자 갑자기 이주학이 육지로 올라온 생선처럼 팔딱거렸다. 그러곤 홍승표를 향해 달려들었지만 반쯤 돌아 버린 눈과 달리 발길질 한 번에 나가떨어졌다.
홍승표는 엎어진 이주학의 등을 무릎으로 찍어 누르고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휴대폰 잠금을 강제로 풀고 사진첩에 들어갔다. 최근 사진부터 마지막 사진까지 빠르게 훑었다. 그러나 원하는 사진과 영상이 보이지 않았다.
“시발 안 놔?! 썅 놓으라고! 휴대폰 내놔!!”
이주학이 홍승표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졌다. 홍승표는 이주학의 손을 거칠게 잡아떼고 단숨에 뒤로 꺾었다. 팔꿈치가 견갑골에 닿을 만치 젖히자 무언가 뚜두둑,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홍승표는 울부짖는 이주학을 무시하고 만족할 만큼 팔을 꺾은 후에 미련 없이 놔주었다. 탈골된 팔이 맨땅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얼굴 옆면을 웅덩이에 담근 이주학이 눈물을 서럽게 쏟아 냈다.
“시발… 나한테, 크흡, 왜 그래…….”
“허두영 찍은 사진 어디 있어?”
“하… 씹… 미친 새끼……. 존나 시발…….”
홍승표는 이주학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거칠게 끌어당겼다. 비스듬히 내려다본 얼굴은 눈물, 콧물, 침으로 지저분했다. 더러운 얼굴을 씻겨 주기 위해 도로 웅덩이에 처박고 좌우로 문질렀다. 다시 건진 얼굴은 전보다 깨끗해졌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이주학이 핏줄 터진 눈을 부라렸다.
“그지 새끼랑 어울리는 거… 안 쪽팔리냐? 마, 말도 제대로 못 하고 행동 굼뜬 거 안 답답하냐고. 움츠려 다니는 꼴 보기만 해도 우, 울화통이 다 터지던데…….”
“말 돌리지 마. 사진 어디에 있어.”
“넌… 허두영 아다 니가 처음 따먹은 것 같지? 내가 너 아까워서 해 주는 말인데… 허두영 그 새끼 닳고 닳은 새끼야. 시발 걔는 이미 한참 전에 된통 당했어.”
홍승표는 눈매를 살짝 찌푸렸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순간 이주학은 당황한 듯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허, 허두영이… 말했으니까.”
홍승표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이주학의 눈동자를 보았다. 허두영이 술기운을 빌려 제게 비밀처럼 해 주던 이야기였다. 그걸 돼지 새끼가 어떻게 알고 있고, 왜 숨기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더 신경 쓰이는 건 따로 있었다.
“이상해.”
“…?”
“허두영이 나한테 밉보여야 할 이유가 있어?”
아까부터 이주학은 허두영을 헐뜯고 싶어서 안달 난 것처럼 보였다. 자신이 허두영을 미워하고 실망하길 기대하는 것 같았다. 아직도 허두영을 포기하지 못한 것이라 생각하자 순식간에 속이 뒤틀렸다.
“시비 걸지 마, 이주학. 난 지겹도록 들은 소문의 허두영 사진만 빼내면 돼. 박은식 영상 따위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어.”
박은식이 어떤 심경으로 죽었건 저와 상관없었다. 증거를 찾아 이주학의 죗값을 치르게 할 생각도 없었다. 그저 타인의 손길이 덕지덕지 묻은 허두영을 깨끗이 씻겨 온전히 제 것으로 만들고 싶을 뿐이었다.
“이거 안 필요해?”
홍승표는 두 마디쯤 되는 비닐 팩을 흔들었다. 눈을 부릅뜬 이주학이 파블로프의 개처럼 침을 줄줄 흘렸다. 금단 증상이 심한 걸 보니 오랜 기간 약을 복용한 것 같았다.
약쟁이가 턱을 덜덜 떨며 망가진 팔을 꿈틀거렸다.
“야, 약 줘……. 제발…….”
“사진 위치 말해.”
“내 방… 내 방 컴퓨터…….”
어처구니가 없게도 바로 대답했다. 홍승표는 헛웃음이라도 짓고 싶었지만, 얼굴 근육이 굳어 버린 촛농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주학이 구매한 약의 양은 1온스였다. 겨우 1온스의 약이 허두영의 짓무른 트라우마에 대한 값어치였다.
한두 방울씩 비가 내렸다. 홍승표는 이주학을 짓누른 무릎을 펴고 두 발로 단단히 섰다.
“아까, 나한테 왜 이러냐고 물었지?”
그가 무심한 얼굴로 비닐 팩에 든 가루를 웅덩이에 뿌렸다.
“아아! 안 돼……!”
“넌 그렇게 태어난 거고, 난 이게 당연한 거고. 이게 입장 차이야, 이주학.”
절망한 이주학이 흙탕물에 얼굴을 처박고 물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밑바닥까지 떨어진 모습이 도저히 같은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어깨를 적시는 빗물이 굵어졌다. 홍승표는 약이 들어 있었던 비닐 팩을 땅에 버리고 몸을 돌렸다. 이제는 한겨울이 아니건만, 몸을 둘러싼 바람에 뼛속까지 아렸다.
두영은 희미한 진동 느낌에 눈이 떠졌다. 이불 속에서 몸을 웅크린 상태로 손만 밖으로 빼내 휴대폰이 있는 곳을 더듬거렸다. 겨우 손에 쥔 휴대폰을 이불 속으로 가져와 화면을 켜는데, 화려한 조명이 각막에 쏟아져 저절로 눈이 찌푸려졌다.
새 알림은 홍승표가 보낸 메시지였다. 팝업으로 확인한 내용은 단순히 자고 있냐는 물음이었다. 지금 시간은 새벽 두 시 반이었다. 두영은 메시지 앱을 터치해서 들어갔다. 읽은 표시가 뜨자마자 홍승표에게서 전화가 왔다. 두영은 조금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 잤어?
“응.”
잤지만 잔 것 같지도 않아서 그냥 안 잤다고 했는데 목이 잠겨서 거짓말한 것이 바로 들통났다. 홍승표가 나른한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내가 깨웠나 보네. 미안.
“아, 아냐. 원래 집에서는 깊게 못 자.”
―내 옆에서 잘 자더니.
두영은 뭐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맞는 말이라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이 시간에 왜 전화한 건지 궁금했다.
“너는? 넌 왜 안 자고 있어?”
―나는, 네 생각 하느라.
두영은 휴대폰에 댄 뺨이 뜨거워 전기장판 온도를 낮췄다. 몸도 후끈해서 이불을 반만 덮고 앉았다. 무릎에 턱을 괴고 홍승표의 잔잔한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쩐지 전화기 너머 홍승표는 기운이 없어 보였다.
불현듯 얕은 물소리가 귓가에 스쳤다. 두영은 창문을 바라보며 휴대폰을 귀에서 살짝 떼어 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찰팍하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두영은 잽싸게 방에서 나와 알루미늄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위아래 깜장 옷을 입은 홍승표가 맞은편 벽에 등을 기댄 채 새벽의 가랑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두영은 제가 잘못 본 줄 알고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다. 홍승표도 자신이 나올 줄은 몰랐는지 눈이 살짝 크게 뜨인 상태였다. 그러다 부드럽게 눈을 접고 웃었다.
그에게 한 발짝 다가가려던 두영은 현기증이 폭풍처럼 치밀어 몸이 기울어졌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홍승표가 두영을 부축했다. 얼마나 오래 바깥에 서 있었는지 그의 몸에서 찬기가 느껴졌다. 가까스로 현기증을 가라앉힌 두영은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왜… 왜 왔다고 말 안 했어?”
두영은 괜히 미안해서 목소리 끝이 떨렸다. 딱히 서로가 서로에게 잘못한 건 없었지만, 두영은 그의 쓸쓸한 분위기 때문에 마음이 약해졌다.
“아직 바람이 찬데… 비도 오는데…….”
바보처럼 중얼거리는 두영의 모습을 조용히 내려다보던 홍승표가 갑자기 무스탕 안주머니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손에 쥔 것을 두영에게 내밀었다. 의심 없이 건네받은 두영은 제 손에 놓인 것을 보고 흠칫했다. 그건 사람의 이였다.
섬뜩함에 곧바로 손을 털어 내자, 홍승표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웅덩이에 빠진 것을 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두영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정말 궁금하단 듯이 물었다.
“마음에 안 들어? 이게 아니야?”
“왜, 왜 이빨이…….”
“영화관에서 너 괴롭힌 애 거야. 기억 안 나?”
홍승표가 두영의 턱을 잡고 들어 올렸다. 직시하는 까만 눈동자가 오랫동안 깜빡거리지 않았다. 마른침을 삼킨 두영은 피하고 싶고, 숨고 싶은 그의 시선을 꿋꿋하게 마주 보며 참았다. 홍승표는 가 하얗게 질린 두영의 뺨을 가볍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왜 겁먹었어?”
어딘가 어긋난 대화에 두영은 입을 뻐끔조차 할 수 없었다.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자 홍승표가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더니 곧 몸을 돌려 달동네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떠나는 뒷모습을 보자 두영은 마음이 급해졌다.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주먹으로 때리고 간신히 발을 내디뎠다. 얼마 가지 못한 홍승표의 외투를 움켜잡고 처연하게 말했다.
“자고 가.”
습윤한 홍승표의 눈동자가 한순간 이채로 번뜩였다. 두영은 곧바로 말을 정정했다.
“자, 잠만… 잠만 자는 거…….”
두영은 민망해서 홍승표의 옷자락을 얄팍하게 쥐고 집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다행히 홍승표는 얌전히 끌려와 주었다.
방에 들어온 두영은 마른 수건을 꺼내 홍승표에게 건넸다. 분무기 같은 가랑비라 심각하게 젖지 않았지만, 그래도 갈아입을 옷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열심히 옷장을 뒤져도 그가 입을 만한 옷 사이즈가 없었다. 시무룩하게 뒤를 돌아본 두영은 마침 이쪽을 쳐다보는 홍승표와 눈이 마주쳤다.
“옷이 없어서…….”
홍승표는 두영을 지그시 보다가 갑자기 옷을 훌렁훌렁 벗기 시작했다. 두영은 당황해서 벽에 바짝 붙어 섰다. 순식간에 드로즈만 남기고 다 벗은 그가 태연하게 말했다.
“젖은 옷 입고 있는 것보단 낫잖아. 속옷은 안 젖었는데, 벗어?”
두영은 냉큼 도리질 쳤다.
머리를 적당히 말린 홍승표가 사용한 수건을 어디 둬야 하는지 몰라 주변을 두리번댔다. 일부러 딴짓하고 있던 두영은 그런 홍승표를 발견하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주면 돼.”
두영은 어쩐지 고개를 들 수가 없어서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손만 뻗었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손에 수건이 쥐어지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자 홍승표가 묘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왜?“
소심하게 묻자 홍승표는 눈을 깜빡거리기만 할 뿐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러고는 느릿느릿 수건을 건네주고 전기매트 위에 몸을 눕혔다.
제집처럼 자연스러운 동작에 두영은 조금 난처했다. 홍승표와 한두 번 같이 자는 게 아니었지만, 어쩐지 지금은 다른 날보다 몇 배는 창피했다. 이 집에서 자고 가는 홍승표가 꿈처럼 어색했기 때문이다.
“얼른 불 끄고 누워.”
누워서 고개만 비죽 든 홍승표가 자기 옆자리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두영은 세탁기에 수건을 던져 넣고, 방 불을 끄고 그의 옆에 주섬주섬 누웠다. 서로 말을 하지 않다 보니 밖에서 음산하게 부는 바람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두영은 미약한 빛이 남은 전구를 멍하니 보다가 조심스럽게 옆으로 돌아누웠다. 줄곧 저를 보고 있던 홍승표와 바로 시선이 겹쳤다.
“그 사람… 어떻게 됐어?”
“그게 궁금해?”
홍승표가 언뜻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죽진 않았어, 거품은 좀 물었지만. 근데 그게 왜 궁금해?”
두영은 되레 묻고 싶었다. 당연히 궁금하지 않겠냐고.
“크, 큰일 나면 어떡해? 그 사람이 너 신고라도 하면…….”
“아아.”
살인이라도 저지를 것처럼 살벌했던 홍승표의 분위기가 한순간에 나른한 분위기로 돌아왔다.
“약쟁이라 찔리는 게 많아서 신고 못 해.”
그의 대답에 두영은 눈을 끔뻑였다. 약쟁이라니. 많이 아픈 사람이었나 보다.
두영을 빤히 보고 있던 홍승표가 몸을 한 뼘도 안 되게 밀착했다. 가는 허리에 팔을 두르고 두영의 눈 깜빡임과 호흡 박자를 거울처럼 따라 했다.
“내 앞에서 다른 놈 얘기하지 마. 이빨만 뽑고 온 거 후회되니까.”
“…….”
“내가 무서워?”
사람의 이를 뽑아 와 놓고 저런 질문을 하는 건 악질이었다. 일부러 겁을 주고 무섭냐고 물어보는 것과 다름없었다.
나른하게 날숨을 뱉은 홍승표가 덧붙여 말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이게 나니깐.”
얼핏 경고 같은 말은 무엇에 대한 경고인지 알 수 없었다.
두영은 가끔 말이 잘 나오지 않을 때가 있었다. 저도 왜 이러는지 잘 몰랐다. 너무 오래된 습관이라 불편함을 몰랐고 그래서 딱히 고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홍승표를 만난 지금은 자신의 무언이 답답했다. 그와 더 대화하고 싶었고, 그에 대해 더 속속들이 알고 싶었다. 이런 제 모습이 답답할 만한데도 그는 언제부턴가 느긋하게 기다려 주었다. 그렇지만 두영은 끝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홍승표는 두영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 이마를 맞댔다. 나긋하게 시선을 맞춘 채 속삭였다.
“겁내지 마. 내가 잘못했어.”
“겁, 안 났어.”
두영은 들숨과 함께 입이 터졌다. 저자세로 나오는 홍승표 때문에 긴장이 조금 누그러졌다. 홍승표의 시선이 까마득한 곳에 내던져졌다. 오늘따라 생각이 많아 보이는 듯한 모습에 두영은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눈을 깜빡인 홍승표가 다시 시선을 맞춰 왔다. 그리고 고요 속에 정리한 말을 꺼냈다.
“내가 질리게 하면 그냥 날 때려. 주먹으로 쳐도 좋고 발로 차도 돼. 대신 내가 무슨 짓 해도 피하지 마. 나 싫어하지 말고… 계속 좋아해 줘.”
이따금 홍승표는 지독한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처럼 굴었다. 가진 것도 많고 만인의 부러움을 사는 존재인데 무엇이 그를 이렇게 불안정하게 만드는지 두영은 종종 궁금했다. 그리고 은밀히 바랐다. 그가 가진 불안이 자신이 느끼는 불안과 비슷했으면 좋겠다고.
“싫어한 적 없어. 그리고… 안 때려.”
“응, 알아.”
능청스럽게 대꾸한 홍승표가 두영의 몸통을 두 팔로 끌어안고 납작한 가슴에 얼굴을 문질렀다. 두영은 품에 안겨 온 홍승표를 어색하게 안아 주고 동그란 뒤통수를 가만가만 쓸었다. 문득 손끝에 딱딱한 게 만져졌다. 익숙한 질감은 마치 피딱지 같았다.
“어? 다쳤어?”
상처를 확인하기 위해 일어나려 하자 홍승표가 마른 몸을 붙잡았다.
“심하지 않아. 그냥 네가 만져 주면 나아.”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지…….
두영이 무시하고 일어나려 하자 홍승표가 팔에 힘을 주고 두영을 더 꽉 끌어안았다.
“진짜야. 얼른 쓰담쓰담해 줘. 나 어지러워.”
드물게 약한 소리를 하는 홍승표의 모습에 두영은 그가 조금 걱정됐다. 결국 몸에 힘을 풀고 누운 두영은 홍승표의 머리와 등을 토닥였다. 그는 기분이 좋은 모양인지 더운 날숨을 뱉으며 더 깊이 두영을 껴안았다.
그때 바지 안으로 들어온 손이 두영의 엉덩이를 주물렀다. 흠칫 놀란 두영이 그의 팔목을 잡고 밖으로 빼내려고 하자 홍승표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낮게 읊조렸다.
“네 엉덩이 만지면 잠이 잘 올 것 같아. 나 며칠 못 잤어.”
그러니까 수면제 처방처럼 제 엉덩이 사용권을 처방해 달라는 말이었다. 두영은 아랫입술을 꾹꾹 깨물며 홍승표의 팔목을 놔주었다.
두영이 난처한 얼굴로 하나둘씩 허락하자 홍승표가 빠릿하게 고개를 쳐들고 강아지를 닮은 새카만 눈깔로 두영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두영의 젖꼭지를 턱으로 지분대며 순진하게 말했다.
“젖꼭지도 빨면 안 돼? 그러면 더 질 좋은 수면을…….”
“그, 그건 안 돼.”
냉큼 거절하자 홍승표가 실망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고는 두영의 가슴팍에 이마를 문지르다가 나지막하게,
“알겠어…….“
라고 중얼거렸다.
엉덩이를 만지는 손이 자꾸 안쪽으로 들어오는 것 같아 두영은 슬슬 불안해졌다. 다행히 그 주변에 가까워지기 전에 홍승표가 완전히 잠이 들었다.
두영은 항상 팔베개를 받는 입장이라 별생각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해 주는 처지가 되다 보니 생각보다 힘들었다. 팔이 금방 저리고 아무 감각도 안 느껴졌다. 하지만 홍승표가 너무도 편안한 얼굴로 잠이 들어 팔을 뺄 수 없었다.
아직 덜 마른 그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겨 주던 두영은 홍승표의 귓바퀴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는 송곳니뿐만 아니라 귓바퀴도 살짝 뾰족했다. 그래서 가끔 승표가 정말 동물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특히 몸이 뜨끈뜨끈하여 대형견과 같이 자는 느낌이었다. 그런 것치고 피부가 매끈하지만.
두영은 이불을 끌어 올려 홍승표의 목 언저리까지 잘 덮어 주었다. 두툼한 몸을 자장가의 선율처럼 토닥이고 자신도 눈을 감았다.
홍승표가 좋은 꿈을 꾸었으면 했다. 악몽은 영혼을 갉아먹으니까. 그러니 부디 좋은 꿈을 꾸고 개운하게 일어났으면 했다.
***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이 정확히 두영의 얼굴로 떨어져 저절로 눈이 뜨였다. 옆자리를 보니 홍승표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두 팔을 머리 위로 길게 뻗으며 기지개를 켠 두영은 손에 무언가가 치여 비죽 올려다봤다. 머리맡에 샌드위치랑 생딸기 주스 한 병이 놓여 있었다. 달동네를 내려가 큰 도로 쪽으로 10분 걸어가면 나오는 카페의 샌드위치였다.
두영은 곧장 휴대폰을 들어 홍승표에게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나 먼저 갈게 꼭꼭 씹어 먹어.]
두영은 안쪽으로 구부린 검지 마디로 눈두덩을 문질렀다. 눈이 간지러운 건 제 불손한 마음 때문인지, 빠진 속눈썹이 눈에 들어가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괜히 이불 안쪽으로 머리를 집어넣은 두영은 그에게서 온 메시지를 서툴게 따라 읽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입술이 간지러워 손등으로 벅벅 문댔다.
대화 내용을 캡처한 후 두영은 발딱 일어나 이불을 개고 방을 청소했다. 오늘내일 주말이니 할머니와 쉬는 동안 먹을 찬거리를 사 오기로 했다. 그래 봤자 인스턴트 식품이 전부였다.
두영은 요리를 못했다. 김춘녀도 평생 일만 해서 할 줄 아는 음식이 몇 개 안 됐다. 두 사람은 입맛이 비슷하고 성격도 무던해 불만이 없었다. 대부분 주식은 한강으로 끓인 라면이었다.
바닥을 쓸고 걸레질하던 두영은 티셔츠 앞섶을 꼬집고 코앞으로 가져와 냄새를 맡았다. 움직일 때마다 제 몸에서 홍승표의 체취가 은은하게 퍼졌다. 오늘 세탁기에 돌리려고 했는데 하루만 더 입기로 했다.
두영은 일을 끝내고 돌아온 김춘녀와 늦은 아침을 함께 먹고 집을 나섰다. 펜스테몬으로 향하는 길에 홍승표에게서 전화가 왔다.
―밖이야?
“카페 가고 있어. 그리고 샌드위치, 고마워.”
―숙박비야.
담백한 말투에 두영은 부스스 웃음이 샜다. 그 순간 전화기 너머에서 자동차 내비게이션 음성이 들렸다. 두영은 무심코 호기심을 드러냈다.
“어디 가?”
―응.
“…어디?”
―궁금해?
너무 사적인 걸 물어보는 것 같아 두영은 냉큼 아니라고 답했다. 홍승표도 더 이상 말해 주기 싫었는지 다른 주제로 대화를 돌렸다. 그 후부터 두영은 통화하는 내내 집중력이 흩어졌다. 어떻게 통화가 끝났는지 기억도 잘 안 났다.
이른 시간부터 홍승표가 어디를 가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꼬치꼬치 물어보기엔 홍승표와 자신의 사이가 불투명하고 명확하지 않았다.
방금까지 좋았던 기분이 깡그리 침식됐다. 그냥 내일로 미룬 빨래를 마저 하고 나올 걸 후회했다.
통화를 끝낸 홍승표는 마지막 시무룩한 두영의 목소리에 여운이 남아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허두영이 제게 호기심을 드러내는 건 좋았지만, 지금은 무엇을 하는지 정확하게 말해 줄 수 없었다.
그는 핸들에 턱을 얹고 묵직한 한숨을 내뱉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중년의 부부가 주상 복합 아파트 공동 현관문에서 나왔다. 모자를 눌러쓴 홍승표는 목티로 하관을 가리고 손에 가죽 장갑을 꼈다. 차에서 내려 공동 현관문을 스스럼없이 통과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는 심부름꾼에게 받은 이주학의 집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에 들어갔다. 웃돈을 얹어 주니 오늘 새벽에 시킨 일을 발 빠르게 준비해 보냈다.
타인의 집 특유의 냄새가 불쾌하여 홍승표는 목깃을 추어올려 코를 막았다. 거실에 들어선 후 직감적으로 눈에 띄는 방문을 열었더니 이주학 방이 나왔다. 컴퓨터를 켜고 퀵으로 받은 USB를 꽂았다. 대기 중인 직원이 곧바로 원격을 시도했고 데스크탑 드라이브를 해킹하기 시작했다.
길면 20분, 짧으면 5분이란 시간 동안 심장이 지독하게 죄어들었다. 앞으로 보게 될 사실이 방 안의 먼지처럼 머릿속을 지저분하게 떠다녔다.
홍승표는 신경질적으로 답답한 목깃을 내렸다. 책장을 무뚝뚝하게 보던 중, 거슬리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이질적인 것을 손에 쥐었다. 장식품 겸 금고 역할을 하는 책 모형이었다.
모형을 흔들어 내용물을 유추했지만, 떠오르는 게 전혀 없었다. 홍승표는 손아귀에 힘을 주고 입구를 벌렸다. 내용물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무언가가 책장 아래 틈으로 들어갔지만, 우선 눈에 보이는 것만 확인하기로 했다.
무릎을 굽히고 앉은 홍승표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손에 든 걸 보았다. 쏟아진 내용물은 필름 뭉치였다. 테두리가 불에 녹아 앞뒤 장과 달라붙은 상태였다. 심각하게 손상되어 인화는 어려워 보였다.
그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필름을 비췄다. 흐릿한 피사체가 좀 더 또렷해졌다. 다섯 칸식 나눠진 필름은 어린아이를 찍은 사진이었다. 연사로 찍었는지 포즈가 다양하지 않았다. 두 번째 세 번째 필름도 비슷했다.
그러나 네 번째 필름부터 이상함을 감지했다. 부자연스럽게 찍힌 동작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순간 홍승표는 기민하게 뇌가 돌아가며 머리털이 쭈뼛 서는 걸 느꼈다. 구석에 처박힌 퍼즐 조각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나머지 필름을 빠르게 훑은 그는 책장 밑으로 시선을 주었다. 손가락도 집어넣기 힘든 좁은 틈이었다. 그는 책장을 밀어 아래 공간을 만들었다. 살짝 틈이 난 곳에 한쪽 발을 집어넣자 발등이 끊어질 것 같았다.
몸을 낮춘 그는 손으로 아래를 더듬었다. 죽은 머리카락과 먼지만 쓸려 왔다. 그의 이마에 돋은 힘줄이 터지기 직전, 손끝에 무언가가 걸렸다. 그는 그것을 날렵하게 잡아채고 밖으로 빼냈다.
책장을 원위치로 돌려놓고 먼지 묻은 것을 주워 들었다. 이번에는 필름이 아닌 사진이었다. 두 장의 사진 중 한 장은 불에 심하게 그을린 상태였다. 홍승표는 상대적으로 멀쩡한 사진 뒷면에 찍힌 날짜를 보았다. 12년 전 여름이었다.
그는 정신을 붙들고 사진을 뒤집었다. 오래된 사진에는 불안한 얼굴로 카메라를 응시한, 여덟 살의 허두영이 있었다.
홍승표는 목이 메는 기분에 억지로 침을 삼켰다. 이로써 이주학이 허두영의 과거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 알게 됐다.
그러나 연달아 치고 오는 갑갑함은 여전했다. 이 사진을 이주학이 대체 왜 가지고 있는 건지 아무리 그 이유를 생각해 봐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억지로 공백을 메꿔 봐도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인지하지 못한 채 망연히 사진을 보며 서 있었다. 심부름꾼에게 온 전화에 방황하는 정신을 붙잡았다.
―작업이 끝난 지 한참 지났는데 밖으로 나오지 않으셔서 전화했습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지금 나가요.”
목이 메 곧바로 대답하지 못한 홍승표는 불현듯 먼지가 쌓인 책장을 눈에 담았다.
“아니, 좀 더 걸려요. 그리고 하나 더 부탁할 게 있는데.”
그는 책장에 꽂힌 모형 책들을 훑으며 말을 이었다.
갓길에 차를 세운 홍승표는 날 선 시선으로 정면을 바라보며 침묵을 유지했다. 차 안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점차 줄어들더니 순식간에 땅거미가 졌다. 정신을 차렸을 땐 초저녁이 되어 있었다.
그는 모자를 벗어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내내 창문을 열고 있어서 차 안은 냉기로 가득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도 냉각수처럼 차가웠다. 홍승표는 까마득한 곳을 응시하던 시선을 조수석으로 옮겼다. 한 시간 동안 방을 샅샅이 뒤져서 찾은 필름이 보였다.
컴퓨터 해킹을 끝낸 심부름꾼은 원본 데이터를 영구 소멸했다. 홍승표는 그들에게 추가로 다른 일을 부탁하고 사이버 장의사에게 후처리를 맡겼다. 완벽하게 지우지 못할 거란 말이 거슬렸지만, 최대한 힘줘서 해 보라는 응원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는 손에 쥔 사진을 쓸쓸한 시선으로 보았다. 꼬질꼬질한 여덟 살의 허두영은 당장 품에 안아서 달래 주고 싶을 만큼 작고 여렸다. 시간을 뛰어넘을 수만 있다면 카메라 뒤에 숨은 남자를 산 채로 불태우고 싶었다.
홍승표는 사진에 시선을 고정한 채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통화음이 울리기도 전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형 부탁이 있는데.”
―…이거 승표 번호 맞는데.
자립심 강한 동생의 부탁에 홍승언은 당황한 티를 냈다.
―진짜 너냐?
“복구해야 할 필름이 있는데 불에 녹아서 멀쩡하지 않아. 할 수 있지?”
―지 할 말만 하는 거 보니 홍승표 맞네. 상태가 어떤지는 직접 봐야 해.
“와서 보면 되겠네.”
―네가 올 생각은 안 하지?
“그래서 안 올 거야?”
유독 동생에게 약한 홍승언이었다. 오겠다는 확답을 받아 낸 홍승표는 통화를 끝내고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어쩐지 기운이 쭉 빠졌다.
그는 시간을 확인하고 차에 내렸다. 일을 끝낸 허두영이 이곳을 슬슬 지나칠 시간이었다. 그 순간 휴대폰이 진동했다. 심부름꾼에게서 온 전화였다. 홍승표는 보닛에 엉덩이를 걸치고 전화를 받았다.
―부탁하신 사진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사진 기사의 이름은 김석철, 나이 36세. 독신 남성으로 12년 전에 번개탄을 피우고 자살했습니다. 그러다 불이 옮겨붙어 큰 방화로 이어진 모양입니다. 관련 기사에 동네 주민 인터뷰가 있었습니다. 대부분 절대 자살할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더군요.
“사람 마음이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르잖아요. 오늘 잘 웃던 사람이 다음 날 한강으로 뛰어내릴 만큼."
-맞습니다. 다만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남자가 자살하기 하루 전날 과음 상태였다고 합니다. 근데 동네 주민들 말에 따르면 평소 남자는 입에 술을 대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죽기 전 마지막 만찬을 했나 보죠.”
홍승표가 골목 어귀에 시선을 던지며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그때 주황빛 불이 쏟아지는 골목 사이에서 어깨를 늘어뜨린 허두영이 나타났다.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녀석은 묘하게 지쳐 있었다. 어차피 손님도 몇 명 없었을 텐데 말이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연탄을 피워 자살하려는 사람의 방 창문이 모조리 열려 있었습니다.
“그럼 방 따뜻하게 데우고 자다가 사고사 했나 보죠.”
―그렇다고 보기엔 남자가 죽은 시기는 여름이었고 게다가 그 집은 연탄을 피우는 집도 아니었습니다. 남자가 죽기 이틀 전부터 어린아이가 그 집에 연탄을 배달했다고 하더군요. 기사를 더 찾아보려 했으나 하필 큰 스캔들이 연달아 터진 해였고, 또 재개발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라 윗선 압력으로 금방 묻힌 듯합니다.
“재개발?”
―하고동에 있는 달동네 말입니다.
“…….”
홍승표는 시선을 들어 올렸다. 머리맡 도로 표지판에 써진 동네 이름을 무심한 눈길로 보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하고동…….”
허두영은 부친의 심부름을 하다가 몹쓸 일을 당했다. 옷을 빌려준다는 소리에 따라 갔다고 했으니 분명 허두영의 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일 것이다.
그렇기에 딱히 놀랍지 않았다. 굳이 녀석에게 부연 설명을 듣지 않아도 저절로 전개됐으니까. 하지만 심부름꾼의 정보 중 특정한 말이 거슬렸다.
연탄을 배달하는 아이. 남자가 죽은 시기.
홍승표는 턱을 내리고 멀리서 제 쪽으로 걸어오는 두영을 보았다. 녀석은 땅을 보며 걷느라 아직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다.
“남자가 죽은 정확한 날짜가 언제죠?”
―7월 28일입니다.
홍승표는 두영의 사진 뒤편에 찍힌 날짜를 떠올렸다. 남자가 죽기 3일 전이었다.
그 순간 두영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발견했다. 그러고는 제자리에 멈춰 서서 더 다가가지 않았다. 통화를 종료한 홍승표는 여전히 보닛에 앉아 두영을 가만히 보기만 했다. 어서 녀석을 안아 주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럴 때만큼 눈치가 빠른 허두영은 저에게 어떤 이상함을 감지했는지 더 다가오지 못하고 어물쩍거렸다. 홍승표는 입술을 비스듬히 올리며 양팔을 벌렸다. 그제야 눈치 보는 강아지처럼 있던 두영이 천천히 거리를 좁히다가 마지막에는 폭 안겨 왔다.
생각보다 격한 반김에 홍승표는 조금 당황했다가 팔에 힘을 가득 싣고 두영을 끌어안았다.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던 두영은 뒤늦게 그의 낯빛을 살폈다.
“무슨 일 있었어?”
걱정스럽게 물어보던 두영이 시무룩하게 눈을 내리떴다.
“미안…….”
그리고 사과했다. 홍승표는 한쪽 눈썹을 씰룩거렸다.
“뭐가 미안해?”
“귀찮게 하는 것 같아서…….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잠자코 듣고 있던 홍승표가 두영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고 지그시 시선을 맞췄다.
“안 귀찮고, 안 싫어. 허락 없이 사사건건 물어봐도 돼. 그런데 오늘만, 오늘만 그냥 지나가 줘.”
홍승표는 바람에 살랑이는 두영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두영은 저를 만지는 그의 손길이 다른 날보다 더 애틋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서글펐다. 마지막 감정이 왜 든 건지 의아했다.
“오늘 나랑 있어 줘.”
어딘가 초조한 듯한 그의 말에 두영이 눈을 끔뻑거리며 대답을 미뤘다. 인내하지 못한 홍승표는 두영을 품에 욱여넣듯이 껴안고 낮게 중얼거렸다.
“네 할머니 쉬는 날인 거 알아. 그냥 내 말은, 해가 뜨고 달이 질 때까지 너랑 같이 있고 싶단 소리야.”
평소와 다른 목소리 울림. 가라앉은 낯빛. 모두 두영의 눈에만 보이는 것들이었다.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인 두영은,
“응.”
하고 말했다. 그러다 제 목소리가 너무 작았던 것 같아 또박또박 재차 대답했다.
“응 같이 있어.”
떨어진 허락에 홍승표의 눈빛이 너울거렸다. 그 순간 두영이 만사 제치고 앞으로 튀어 나갔다. 덩달아 홍승표는 두영을 빠르게 쫓았지만, 두영의 달음질 이유를 발견하고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김춘녀가 반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할머니! 어디 갔다 오는데 다리를 절어?”
두영을 알아본 김춘녀가 허리를 짚고 어정쩡하게 멈춰 섰다.
“박 씨 일 거둬 주다가 쪼끔 삐끗했네. 하루 자고 인나면 괜찮아지니까 너무 걱정 말고. 승표도 있었네?”
홍승표가 가볍게 묵례하며 다가왔다. 두영은 차마 홍승표를 볼 수 없어서 김춘녀의 가방만 빼앗아 들었다.
“할머니 혼자 걸을 수 있겠어?”
“할미 무시하지 말어.”
뒤로 돌아선 두영은 홍승표를 힐끗 쳐다보다가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미안…….”
울적하게 속삭인 두영은 그대로 홍승표를 지나쳤다. 그런데 홍승표가 두영이 들고 있는 가방을 빼앗아 한쪽 어깨에 걸치고 김춘녀에게 등을 보인 채 몸을 낮췄다.
“업히세요.”
“아이고 됐어, 됐어. 할미 무거워.”
“아이고 됐습니다. 업히세요.”
태연하게 김춘녀를 부축하는 그의 모습에 두영은 죽을죄를 지은 죄인처럼 고개를 들지 못했다.
김춘녀를 등에 업은 홍승표가 달동네를 성큼성큼 올랐다. 내딛는 보폭이 넓고 빨라서 김춘녀는 놀란 얼굴을 했다.
“미안해서 어쩌지?”
“나중에 라면이나 또 끓여 주세요.”
홍승표가 넙죽 받으며 대꾸했다.
평소보다 빠르게 집에 도착했다. 두 발로 땅을 딛고 선 김춘녀는 홍승표의 손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나중에 오면 할미가 맛있는 거 해 줄게.”
“네. 얼른 들어가세요.”
김춘녀가 눈을 접고 웃었다. 자글자글한 주름이 세월의 흔적만큼 고르게 피어났다.
곧바로 왔던 길을 내려가는 홍승표의 뒷모습을 두영은 조급하게 바라봤다. 방으로 올라가는 김춘녀를 부축하고 서둘러 집에서 나왔다.
“할무니, 승표 배웅만 하고 올게요!”
두영은 급한 마음에 아래로 달려가면서 말했다. 금방 나온 것 같은데 홍승표는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두영은 내리막길의 추진력을 얻어 추락하는 운석처럼 떨어졌다. 저 멀리 홍승표의 넓은 등판이 보이기 시작했다.
“승표야! 잠깐 기다―!”
젖은 땅을 밟은 두영이 크게 휘청거렸다. 해가 잘 들지 않는 동네라 전날에 내린 비가 아직도 마르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전봇대를 잡았지만 넘어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데굴데굴 구른 두영은 뼈가 엇나가는 고통에도 곧바로 땅을 짚고 홍승표부터 찾았다.
“승……!”
“멍청아!”
순식간에 달려온 홍승표가 화난 얼굴로 두영을 다그쳤다.
“생각이 없어? 위험하게 뭐 하는 짓이야!”
천둥 같은 목소리에 두영은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미, 미안해.”
두영은 심장의 표면이 깎인 것처럼 가슴이 쓰라렸다. 저를 두고 홍승표가 가 버렸을까 봐 두려웠다.
“미안…….”
“미안하다는 소리 시발 더 하기만 해.”
어금니를 물고 하는 말에 두영은 고개를 푹 숙였다. 짙은 한숨을 내뱉은 홍승표가 두영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하아… 돌아 버리겠네.”
거칠게 머리를 헝클어뜨린 홍승표가 손가락 틈새로 처량하게 앉은 두영을 보았다. 주눅이 든 녀석의 모습은 잘못을 저지르고 눈치 보는 똥강아지 같았다.
“땅굴 어디까지 팠어?”
“…어?”
“지구 반대편에 닿았어?”
두영은 그가 하는 말을 이해도 못 했으면서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홍승표는 얼룩덜룩 오물이 묻은 두영의 얼굴을 살살 매만졌다.
“피나잖아. 얼굴 말고 볼 것도 없으면서 왜 맨날 상처를 만들고 다녀.”
평소와 같은 농담에도 두영은 전혀 웃지 못했다. 처참하게 살갗이 벗겨진 손바닥을 숨기기 위해 주먹을 쥐자 홍승표가 두영의 손목을 잡고 안쪽으로 말린 손가락을 하나하나씩 폈다. 상처를 확인한 그는 본인이 다친 것처럼 한쪽 눈을 아프게 찡그렸다.
날카로운 눈꼬리를 감춘 홍승표가 두영의 팔을 쥐고 일렁일렁 흔들며 말했다.
“뭐라고 말 좀 해 봐, 허두영. 이제 나랑 말도 하기 싫어?”
두영은 목이 메 고개부터 내저었다. 뚝뚝 끊어지는 소리를 힘겹게 내뱉었다.
“약, 속… 못 지켜서 미안해…….”
“…….”
“오늘 못 가서…….”
목소리가 외줄에 매달린 것처럼 흔들렸다. 묵직한 덩어리가 자꾸 목구멍을 틀어막고 나오지 않자 두영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신뢰감이 바닥이네.”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홍승표의 말에 두영은 흠칫 굳었다.
“너 말고 나 말이야. 나에 대한 네 신뢰가 바닥이라고.”
홍승표는 두영을 돌계단에 앉히고 자기도 그 옆에 몸을 붙이고 앉았다. 그리고 허공에 시선을 내던지고 침묵을 유지했다. 두영은 그의 얼굴 어딘가가 씁쓸해 보여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저가 그렇게 만든 것 같아 불안했다.
“무슨… 생각해?”
두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곧바로 대답하지 않은 홍승표가 직각으로 세운 무릎 위에 팔을 얹고 지저분한 땅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떠오른 생각을 간단하게 내뱉었다.
“후회.”
앞으로 쏟아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홍승표가 이번에는 두영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처음 너에게 그렇게 접근한 후회.”
그 뜻을 헤아리는 호박색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 얼굴이 오늘 본 사진 속 아이와 겹쳤다. 홍승표는 침을 억지로 삼키고 제 얼굴을 착잡하게 쓸었다.
“그게 가장 날 사무치게 병신으로 만들어. 근데 넌 그 쓰레기 새끼 하나 잡겠다고 이렇게 다쳤잖아.”
게다가 처절하게 제 이름을 불렀다.
“기어코 예쁨받겠다고 한 짓이 이빨이나 뽑은 건데 한심하게 실패나 했고 말이야.”
이번 일로 홍승표는 하나 배웠다. 앞으로 모든 뒷공작은 허두영에게 들키지도, 알리지도 않겠다고.
말을 마친 홍승표가 담배 연기 같은 입김을 내뱉고 몸을 일으켰다. 가파른 계단 위에 앉은 두영의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작게 움츠린 두영의 어깨 너머로 삐뚤삐뚤 자리 잡은 내리막길이 보였다. 어떤 얼굴로 저 길을 미련하게 뛰어 내려왔을지 상상하자 명치가 조여들었다.
홍승표는 상처 난 두영의 손을 조심스럽게 쥐고 정중히 입을 맞췄다. 부드럽게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이 다섯 손톱에도 번졌다.
언뜻 경건한 의식 같았던 행위가 끝나자 홍승표가 눈을 치떴다. 음영이 진 홍승표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두영은 피가 묻은 그의 입술 위에 살며시 제 입술을 눌렀다.
눈을 가늘게 뜬 홍승표가 두영이 하는 짓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간지럽게 닿은 입술이 아직도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머지 무릎마저 꿇은 그는 두영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고 불안한 여덟 살 아이와 지그시 시선을 겹쳤다.
“나중에, 네가 정말 세상에 혼자 남으면…….”
혼자라는 말에 두영의 표정이 반사적으로 무너졌다. 홍승표는 술렁이는 호박색 눈동자를 조용히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나랑 같이 살래?”
두영은 형태가 불분명한 것들은 덧없다고 여겼다. 기약 없는 약속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잠을 못 자면 죽는데.”
하지만 오만한 홍승표가 더러운 땅에 무릎을 꿇었다. 진중한 눈은 거짓말 한 톨 보이지 않았다.
“네가 없으면 잠이 오지 않아. 이제 네가 없으면 숨도 쉬어지지 않아.”
목이 멜 정도로 따뜻한 눈빛은,
“내 숨이야 넌.”
품기에도 벅찬 반짝거리는 마음이었다.
“앞으로 나 잡겠다고 넘어지지 마. 그냥 이름만 불러. 네가 멈추면 나는 돌아갈게. 먼저 다가갈게. 내가 업고 달릴게.”
그가 두영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러니까 너는 나만 좋아하면 돼. 그거면 돼.”
고백 끝에 기다란 침묵이 내려앉았다. 혀로 입술을 축인 홍승표가 반 바퀴 돌아앉아 너른 등을 두영에게 보였다.
“상처만 치료해 주고 다시 데려다줄게.”
두영이 업힐 때까지 묵묵하게 기다릴 등이었다.
두영은 홍승표의 등에 업혔다. 그가 느린 걸음으로 달동네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평소 다니는 길이 아닌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두영이 허리를 세우고 미어캣처럼 두리번대자 홍승표가 "으쌰"하고 두영을 추어올렸다. 홍승표의 등딱지에 찰싹 붙은 두영은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홍승표가 피식 웃으며 덤덤하게 말했다.
“여기로 내려가면 더 빠른데 넌 왜 항상 그 길로 다녀?”
“그냥 그 길이 익숙해서…….”
두영은 말을 얼버무렸다. 홍승표도 안 믿는 눈치였지만, 더 물어보지 않았다.
가로등 아래를 지나칠 때마다 발밑으로 진한 그림자가 어룽졌다. 그림자의 형태는 원래부터 하나인 것처럼 동글동글했다.
홍승표는 두영도 존재를 몰랐던 24시 무인 약국을 용케 찾아내 밴드와 연고 등 이것저것 구입했다. 계산을 치르고 나온 그는 두영의 입에 무언가를 집어넣었다. 의심 없이 받아먹은 두영은 손에 쥐어진 것을 보고 입에 들어온 게 무엇인지 알아챘다.
우리 아이 쑥쑥 사과 맛 홍삼 캔디였다.
데워 줄게 3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