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16. 괴기한 애정 (16/20)

16. 괴기한 애정

집에서 나온 두영은 문을 잠그고 우편함에 열쇠를 넣었다. 그러다 누군가가 쳐다보는 느낌에 도로 열쇠를 꺼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가슴이 볼록 튀어나올 정도로 숨을 들이마셨다. 바람이 찼지만, 전날 비가 내려 새벽 공기가 상쾌했다. 대신 건조해서 입술이 부르텄다.

다닥다닥 붙은 판자촌은 건조한 날씨를 주의해야 했다. 아직 연탄을 쓰는 집이 있어 한 집만 불이 나도 금방 불씨가 옮겨붙었다.

내리막길을 내려가던 두영은 끈끈이를 밟은 것처럼 갑자기 발이 뻗어지지 않았다. 몸이 갸우뚱 넘어지기 전에 급히 벽을 짚고 멈춰 섰다. 아래를 보니 풀린 신발 끈을 밟고 있었다. 새벽이라 골목을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었지만, 두영은 착실히 벽 쪽에 붙어서 신발 끈을 묶었다.

중간쯤 내려오자 구멍가게 처마 아래 홍승표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두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춤했다. 저절로 말려 올라가는 입술에 힘을 주고 빠르게 그에게 다가갔다. 근처까지 가서 속도를 줄이고 홍승표의 등판에 이마를 콩 박았다.

딱히 놀라는 반응도 없던 홍승표가 외투 주머니에 휴대폰을 집어넣으며 뒤돌아섰다. 그러다 불쑥 몸을 낮추더니 어느새 또 풀려 버린 두영의 신발 끈을 단단히 동여맸다.

두영을 올려다본 홍승표가 무표정하게 물었다.

“왜 내가 준 신발은 안 신어? 아끼면 똥 된다는데.”

“어… 새 신발만 신으면 뒤꿈치가 까져서. 미안…….”

“사과 들으려고 물어본 거 아니야.”

두영은 홍승표가 보고 있는 제 신발이 낡아서 조금 창피했다. 그래서 괜히 안 해도 될 말을 구구절절 늘어놨다.

“할머니가 나 중학생 때 사 주신 거야. 빤 지도 얼마 안 됐어.”

입술을 끌어 올린 홍승표는 큰 손으로 두영의 발등을 가볍게 쥐었다가 놔주었다.

“이 정도면 안 풀리겠다.”

“고마워.”

“그 말 듣기 좋다. 앞으로도 고맙다는 말 해 줘. 내가 잘할게.”

두영은 열이 오른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요즘 홍승표는 자주 배를 발라당 까고 꼬리를 흔들었다. 그럴 때마다 두영은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나란히 달동네를 내려갔다. 두영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하품을 찢어지게 했다. 손등으로 눈을 문지르고 또 한 번 하품했다. 입이 쩍 벌어지는 걸 구경하던 홍승표는 장난스럽게 두영의 몸을 어깨로 밀었다. 대신 종이 인형이 찢어질까 봐 거의 스치는 정도의 힘이었다.

“어차피 평일 저녁에 혼자 있으면 그냥 내 집에서 지내. 카페도 훨씬 가깝고 좋잖아.”

홍승표의 말대로 그의 집에서 지내면 이동 경로가 가까워져 편하긴 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몸이 힘들어질 걸 알기에 두영은 선뜻 그러겠다고 말할 수 없었다. 잠시라도 홍승표와 단둘이 밀폐된 공간에 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쉽게 예견됐다.

“내가 앞으로 자주 갈게.”

“그걸로 부족해.”

단호하게 대답한 홍승표는 응석 아닌 응석을 부렸다. 미운 나이 스물한 살은 들어 본 적 없는데, 잘 찾아보면 어디 있을지도 몰랐다. 바로 제 앞에 말이다.

홍승표가 두영의 손을 잡고 외투에 집어넣었다. 두영은 제게 맞춰진 보폭을 따라 걸으며 간간이 그를 올려다봤다. 오늘 홍승표는 평소와 살짝 다른 느낌이었다. 정확히 꼭 집어서 어디가 다른지 설명 못 하겠지만, 확실한 건 그가 지금 짓궂은 농담도 안 할 만큼 무언가를 골똘하게 생각 중이란 것이다.

두영은 그의 사색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에 입을 꾹 다물고 얌전히 달동네를 내려갔다. 그때 그가 새로운 길로 방향으로 틀었다. 홍승표에게 손이 잡혀 있던 두영은 자연스럽게 그를 따라가게 되었다.

요새 홍승표는 이 길이 마음에 들었는지 예전에 자주 오르내리던 그 골목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가 좋다면 뭐든 뜻대로 따라 주고 싶은 마음뿐이었지만, 솔직히 이 길은 여전히 불편했다.

물론 길이 평평하여 오르내리기도 편하고, 미끄럽지도 않고, 시간도 훨씬 단축됐다. 그런데도 불편한 마음을 쉽게 접을 수 없었다.

“이 동네는 불나면 한 번에 여럿 죽겠다.”

단조롭게 말한 그의 시선이 점점 가까워지는 어느 빌라에 닿았다. 두영이 고개를 숙이고 서둘러 걸었다. 그러나 홍승표는 점점 속도를 늦추더니, 아예 멈춰 서서 이 근방에 목적이 있는 듯 주변을 둘러봤다.

“12년 전 이 동네에 연탄으로 자살하려던 남자가 몸에 불이 옮겨붙어 분신자살로 죽었대. 넌 알아? 여기 오래 살았잖아.”

“몰라…….”

“그래? 아, 찾아보니까 자살이 아니라 보복성 방화래.”

두영은 우뚝 멈춰 섰다. 12년 전에 일어난 방화 사건을 홍승표가 어떻게 알게 된 건지 당황스러웠다. 불에 탄 집은 철거해서 빌라 한 채가 세워졌다. 하필 홍승표가 멈춰 선 곳 바로 앞에 그 빌라가 있었다.

한 발짝 뒤에 서 있던 홍승표는 두영을 마주 보고 섰다. 느슨한 미소를 입에 머금은 그가 엷은 두영의 머리칼을 이마 뒤로 쓸어 넘겨 주었다.

“왜 굳었어?”

“그걸… 왜 찾아봤어?”

“그야, 살아 있으면 찾아가서 죽이려고.”

홍승표가 끔찍하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영은 저 말이 진심인 걸 알았다. 그가 김진호를 어떤 식으로 대했는지, 절 괴롭힌 사람을 혼내 주고 무엇을 전리품으로 가져왔는지 직접 눈으로 보았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두영은 호텔에서 자신이 어디까지 말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나 기억이 중간중간 끊겨서 잘 떠오르지 않았다.

아저씨의 집 위치를 말한 적이 있었나? 아저씨가 죽었다고 말했었나? 아저씨가 어떻게 죽었는지… 말했나?

“숨 쉬어."

홍승표가 두영의 가슴팍에 손을 얹고 나직이 말했다. 그는 가면처럼 띤 미소를 거두고, 걱정이 담긴 눈으로 두영을 내려다봤다. 두영은 홍승표의 손목을 덥석 잡고 주변을 경계했다. 요새 들어 누군가가 저를 쳐다보는 느낌이 들어 조심해야 했다. 아마도 박은식인 것 같았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두영은 날숨을 가득 실어 속삭였다.

“자살이야.”

“…….”

“그 아저씨, 자살이야.”

두영은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자살이야… 자살이야…….”

불안정한 두영의 모습에 홍승표는 미간을 구겼다. 그동안 두영의 불안 증세를 몇 번 봐 왔지만, 그 과정을 눈앞에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두영을 품에 안고 차분하게 위로했다.

“응. 네 말 맞아. 내가 잘못 알았나 봐.”

두영의 정수리와 귓가에 입을 맞추며 그를 정성스럽게 달랬다. 소곤소곤 위안을 주는 목소리에 두영은 차츰 안정을 찾았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두 사람은 달동네를 벗어났다.

배달을 끝내고 자전거를 돌려주기 위해 사무실에 들어섰다. 두영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강순자에게 오랫동안 안겨 등을 맞았다. 쓰다듬는다고 한 행동 같은데 맞았다고밖에 표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등짝이 얼얼했다.

오늘이 마지막 배달이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강순자와 이야기해 놓은 상태라 괜찮았다. 다만 기간이 갑자기 앞당겨질 줄은 몰랐기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미안해하는 강순자의 얼굴에서 다정함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저를 신경 써 준 것만으로 강순자는 최선을 다했다. 그러니 미안해할 필요가 없었고 저도 서운할 게 없었다.

강순자의 오랜 배웅을 받은 두영은 길목을 꺾기 전에 허리를 꾸벅 숙였다. 아직도 강순자는 두영을 지켜보고 서 있었다.

두영은 홍승표의 집으로 가는 길에 작은 돌멩이를 툭툭 차며 걸었다.

“저 여자가 너 좋아해?”

훅 들어온 홍승표의 말에 두영은 묘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필터 없는 그의 모습이 이젠 익숙했다. 그리고 농담이 아니라는 것도 이제는 알았다.

“아들처럼 좋아해 주셨어.”

“아들이랑도 떡은 칠 수 있잖아.”

하지만 이런 대화의 흐름은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다. 홍승표의 관점은 어디로 튈지 몰라 늘 경계해야 했다.

“가, 가족이랑은 안 해.”

“그럴 리가. 만약 네가 내 형제였으면 아래 털이 나기도 전에 진작 나한테 따먹혔어. 매일 밤 네 침대로 숨어 들어갔을걸.”

두영은 정든 돌멩이에게 이별을 고하고 앞으로 씩씩하게 걸어 나갔다. 홍승표는 희롱하는 아저씨처럼 들러붙어 계속 이빨을 털었다.

형제로 시작했던 대화가 중반부쯤에는 누가 형이냐, 아우냐로 흘러갔다. 진지하게 고민하던 홍승표는 돌아가면서 해 보는 게 좋겠다고 합리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게다가 저는 외동아들인데 대체 매형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홍승표는 부도덕한 관계를 떠오르는 대로 내뱉는 것 같았다.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짐승의 영역으로 가자 두영은 더 듣고 싶지 않았다. 경보하듯 앞서 나갔지만, 먼저 나가떨어진 것도 두영이었다. 숨이 차서 무릎을 짚고 개처럼 할딱거렸다. 여유롭게 다가온 홍승표는 두영이 숨 고르는 걸 기다려 주며 물었다.

“서운해?”

앞선 설명 없이 들어온 질문이지만, 두영은 무엇에 관한 서운함인지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사실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제 첫 일이자, 십 대의 반절을 보낸 곳이었으니까.

두영은 모두가 잠든 새벽의 고즈넉함이 좋았다. 멸망한 세상에 홀로 남은 것 같아서 외로움이란 감정이 조금은 희석되는 것 같았다.

외눈박이 세상에 두눈박이가 비정상이듯 지구상에 허두영이란 인간 혼자만 있었더라면 자신은 애초에 외로움이란 감정을 학습하지 않았을 것이다. 외톨이란 단어도 없을 것이다. 태초의 외톨이는 자신을 외톨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런데 오늘은 제 세상을 잃어버린 것처럼 공허했다. 애초에 손에 쥔 것도 없었는데 말이다.

“서운… 한 것 같아.”

두영은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다. 호흡을 되찾았지만, 쉽사리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서운해해도 돼.”

홍승표의 허락이 떨어지자 두영은 순식간에 사무친 쓸쓸함을 느꼈다. 감정을 받아들이면 무너질 줄 알았다. 하지만 제 가슴에는 구멍이 뚫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빠져나가지 않았다. 서운한 기분을 날것으로 인정해도 저는 무너지지 않았다.

서운해도 되는 거구나. 서운해도 되는 거였어.

“승표야.”

“응.”

“승표야, 승표야.”

“응.”

“나… 서운해.”

한숨을 섞어 말한 두영은 인도 한복판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그저 정강이를 끌어안고 서운한 감정을 온전히 느낄 뿐이었다. 홍승표는 두영을 마주 본 상태로 맨땅에 털썩 앉아 발끝으로 두영의 발을 슬쩍슬쩍 건드리며 장난을 쳤다.

버스 첫 차가 운행을 시작했다. 두영은 거친 배기음 소리를 내며 떠나는 버스에 제 서운함을 실어 보냈다. 나중에 또 보게 되면 ‘그땐 그랬지.’라고 무던하게 반응할 수 있기를 바랐다.

두영은 홍승표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홍승표가 형이니 동생이니 장난을 친 건 저를 위로해 주기 위함일지도 몰랐다.

홍승표는 갈 곳이 있다며 두영을 어디론가 데려갔다. 그곳은 이진우의 연구실이었다. 이유는 이진우의 일을 며칠간 보조해 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루아침에 직장 잃은 두영은 곧바로 새 일자리를 얻었다. 어쩐지 누군가의 계획처럼 일정이 순탄했다.

“두영 씨 샌드위치 좋아해요?”

이진우가 초췌하게 웃으며 샌드위치를 건넸다.

“아침에 출근할 때 카페에서 사 온 건데 이거 먹어요.”

“감사합니다.”

허리를 꾸벅 숙인 두영은 두 손으로 샌드위치를 받았다.

“불편하게 있지 말고 편하게 있어요. 홍승표는 어디 갔어요?”

“잠깐 전화한다구…….”

“커피 마실래요?”

“괜찮습니다.”

두영은 민망할 정도로 어색하게 반응했다. 다행히 이진우는 홍승표의 뻔뻔함도 무던히 받는 사람이라 두영의 일방적인 낯가림도 아무렇지 않았다.

이진우가 원두커피를 내리는 동안 두영은 눈동자만 굴려 연구실 내부를 훑었다. 테이블과 소파에는 종이 뭉치가 틈도 없이 쌓여 있었고 구석에 처박힌 책상도 마찬가지였다. 블라인드를 비집고 들어온 햇살조차 비좁게 느껴질 정도로 정리가 되지 않은 곳이었다.

도심 외곽에 있는 연구실은 홍승표의 차로 20분 걸려 도착했다. 듣기로는 간단한 보조 역할이었지만, 실상 두영이 할 수 있는 건 꽤 제한적이었다.

두영은 홍승표가 일을 추천해 줄 거라고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항상 알바 가야 한다고 할 때마다 홍승표가 은근히 눈치를 주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일 하나가 줄어든 저를 보며 홍승표가 좋아할 줄 알았는데 그는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예사로웠다.

이진우가 얼음을 동동 띄운 커피를 들고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그는 안경을 벗고 미간을 꾹꾹 눌렀다. 무겁게 내려앉은 다크 써클이 며칠은 못 잔 사람 같았다.

두영은 부유하는 먼지를 눈으로 헤아리다 이진우와 눈이 마주쳤다.

“방이 지저분하죠?”

“아뇨. 안 지저분해요.”

두영이 두 손까지 휘저어 가며 말했다. 노곤하게 웃은 이진우가 얼음을 입에 물고 뭉개진 발음으로 말했다.

“요즘 논문 쓴다고 정신없어서 그래요. 아직 보고 있는 것들이라 조금만 위치가 바뀌면 기억을 못 하거든요.”

“예…….”

작게 대답한 두영은 문 쪽으로 힐끔 시선을 던졌다. 자리를 비운 홍승표가 오지 않아서 애가 탔다. 이진우는 좋은 사람 같았지만, 한참 어린 제게 존대하는 말투가 불편했다. 두영은 넉살 좋게 말 놓으셔도 됩니다. 형님, 하고 싶은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홍승표 안 불편해요?”

아메리카노를 물처럼 마시던 이진우가 오늘 며칠이냐고 묻는 것처럼 가벼이 물었다.

“걔 또라이잖아요.”

다음 말은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네, 하는 말투였다. 엷은 미소를 띤 이진우가 자기 얼굴을 쓸어내리며 순식간에 정색했다. 그러고는,

“이렇게 무표정하잖아.”

라고 말하며 다시 미소를 지었다.

“두영 씨는 안 소름 끼쳐요?”

두영은 할 말을 고르지 못하고 눈을 깜빡였다. 어째서 홍승표 주변 인물들은 생긴 건 멀쩡한데 행동이 하나같이 이상했다. 그러다 문득 자신도 남들 눈에는 비정상으로 보일지 궁금해졌다.

“말 못 하는 걸 보니 두영 씨 앞에서는 가식 떠나 보네.”

딱히 그 이유로 말 못 한 게 아니었지만, 두영은 다른 의미로 소름이 끼쳤다. 지금껏 저가 본 홍승표의 모습이 전부 가식이라면 대체 본모습은 얼마나 잔혹한 걸까? 그것보다 더 어마어마할 수가 있는 건가?

“누가 가식 떠는데?”

그때 모자를 눌러쓴 홍승표가 연구실 안쪽으로 들어왔다. 그는 두영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아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두영은 뒷담화하다 걸린 기분 같아서 괜히 딴짓했다.

“두영 씨랑 네 욕했어. 너 가식 쩐다고.”

이렇게 뒤통수를 처맞을 줄 몰랐던 두영은 눈을 땡그랗게 뜨고 이진우를 쳐다봤다. 심드렁하게 듣고 있던 홍승표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 욕했어? 궁금해.”

볼캡으로 두영의 정수리를 콕콕 찍은 홍승표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두영은 일부러 먼 곳을 바라보며 딴청을 피웠다.

“진짜 궁금해서 그래.”

“안 했어.”

“화 안 낼게, 응?”

소곤소곤 아옹거리는 모습에 이진우가 썩은 미소를 지었다. 얼음을 아그작, 하고 소리가 나게 씹어 먹자 두영이 정신을 차리고 홍승표를 밀어 냈다. 그런데도 홍승표는 여전히 두영을 집요하게 쳐다보며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짧았던 두영의 머리카락이 어느새 눈썹에 닿을 만치 자랐다. 두영은 끈적한 손길에 당황하여 뒤로 도망쳤다. 그러다 서류 뭉치를 손등으로 쳐서 소파 아래로 떨어뜨렸다.

“앗, 죄송합니다!”

잽싸게 쭈그려 앉은 두영이 바닥에 떨어진 것을 주우며 빨갛게 익은 얼굴을 숨겼다.

“그렇게 소중히 안 다뤄도 돼.”

홍승표가 뻔뻔하게 지껄이며 두영의 손에서 서류를 빼앗았다. 그러고는 종이가 산처럼 쌓인 테이블에 성의 없이 내려놓고 두영을 제 옆에 끌어다 앉혔다.

“응, 거기 있는 건 다 읽어서 괜찮아요.”

반달 모양으로 구부러진 이진우의 눈매에 두영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움찔거렸다.

“허두영.”

“응?”

그의 부름에 고개를 돌린 두영은 홍승표의 표정이 차가워서 당황했다. 그가 어느 부분에서 기분이 상했는지 알 수 없었다. 홍승표는 두영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살짝 기대 왔다. 두영은 엉겨 붙는 덩치가 무거워 그를 살짝 밀어 냈다.

“며칠만 여기서 일하면 돼.”

“아…….”

허무한 탄식을 내뱉은 두영이 시선을 떨궜다.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겨우 며칠이었구나. 하긴 혼자서 출퇴근하기에는 위치가 애매했다.

“나 화장실 좀…….”

두영이 어색하게 눈을 피하며 소파에서 일어나자 홍승표가 두영의 손목을 쥐고 말했다.

“내가 데려다줄게. 어디 있는지 모르잖아.”

고작 화장실 가는 건데 거창하게 데려다준다는 말이 좀 부담스러웠다. 두영은 머뭇거리다 이진우에게 힐끔 시선을 주었다.

“나가서 오른쪽으로 직진 후 좌회전.”

냉큼 화장실 위치를 말한 이진우가 서느렇게 노려보는 홍승표를 향해 어깨를 으쓱였다. 두영은 고개를 까딱 숙이고 냉큼 밖으로 나갔다. 홍승표는 두영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걸 느끼고 낮게 읊조렸다.

“지금 뭐 해?”

“넌 뭐 하냐? 누가 보면 네가 낳은 자식인 줄 알겠다.”

홍승표는 순간적으로 짜증이 나 탁자를 발로 세게 밀쳤다. 이진우는 탁자에 부딪힌 정강이를 감싸 쥐고 조용히 앓았다.

“후우… 이 모습이 가식적이라는 거다, 이 어린놈아.”

지금이라도 따라갈까 고민하던 홍승표는 모자를 벗어 옆자리에 던졌다. 머리를 쥐어뜯듯이 쓸어 넘기고 소파에 늘어졌다. 고개를 뒤로 꺾어 천장만 노려봤다.

“사정이 딱한 애 같은데 너무 쥐어짜지 마라.”

등받이에 팔을 올린 홍승표가 삐딱한 시선으로 이진우를 보았다.

“딱한 사정이란 게 뭔데?”

“네가 알지 내가 아냐?”

“왜 사람들은 쟤를 딱하게만 볼까.”

“딱하게 행동하니깐. 내가 볼 땐 너 무서워하는… 잠깐만, 너 설마 쟤 협박하는 거 아니지?”

“내가 협박하는 거 봤어?”

“…왜 부정을 안 하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려 모르쇠로 일관하던 그가 새롭게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홍승언이 한국에 도착했다는 내용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이진우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범죄에 노출됐으면 경찰서에 가세요. 여기에 숨겨 두지 말고.”

“며칠이면 돼. 일단 말은 보조라고 했지만 일 시키지 마, 체력 약하니까. 아래층에도 내려가게 하지 말고. 오갈 때는 항상 내 차 탈 거야.”

“네 형들도 널 그렇게 과보호하지 않았다.”

홍승표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들은 듯 한쪽 눈을 찌푸렸다.

“나랑 쟤랑은 다르지. 허두영은 조그맣잖아.”

두 손을 모은 그는 두영을 세숫물 받는 손 크기로 비유했다. 불시착한 주접에 이진우가 눈을 희멀겋게 떴다.

“그럼 네 집에 데려다 놔. 그렇게 작고 소중하면 집에 들여다 앉히라고.”

그 손 그대로 얼굴을 세수하듯이 덮은 홍승표가 입술을 비스듬히 끌어 올렸다. 그러다 손을 내렸을 땐 무표정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한 이진우는 얼음만 씹어 삼켰다.

“곧 그럴 거야.”

다리를 꼰 홍승표가 나직하게 답했다. 며칠 전 녀석에게 혼자가 되면 함께 살자고 고백했었다. 하지만 혼자가 될 때까지 기다린다고 하지는 않았다.

며칠 전 심부름꾼에게 이주학의 행방을 추가로 부탁했다. 이주학이 허두영의 어릴 적 사진을 어떻게 얻었는지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주학은 아예 종적을 감추고 사라졌다.

행방이 묘연한 이주학이 신경 쓰였다. 그리고 뜻 모르게 불길했다. 감이 좋은 편이라 이번에도 자신의 감을 신뢰하기로 했다. 불길한 일을 역으로 이용하여 골칫거리를 해결하는 것이다.

이 좋은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 보낼 수 없다. 어차피 사람은 태어난 이상 늙어 죽든, 병에 걸려 죽든, 어떻게든 죽는다. 단지 때를 앞당기는 것뿐, 언젠간 일어날 일이었다.

그는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허두영이 너무 안 오는 것 같았다. 연구실 문을 열자 때마침 안쪽으로 들어오던 두영의 손이 허공에 뜬 상태로 멈칫했다. 홍승표는 젖은 두영의 손을 끌어당겨 자기 옷에 물기를 닦았다.

“퇴근하자.”

“벌써?”

“첫날부터 무슨 일이야. 이 근처에 괜찮은 중화 식당이 있어.”

가만히 지켜보던 이진우가 소파에 늘어지면서 말했다.

“첫날은 견학하러 왔다 생각하고 두영 씨는 홍승표 데리고 어서 퇴근해요.”

어쩐지 짐 덩이를 떠맡기는 말투였다. 두영은 문을 가로막고 선 홍승표를 피해 이진우에게 인사하려고 했다. 그런데 홍승표가 삐뚜름하게 서며 다시 두영의 시야를 몸으로 가렸다. 두영은 가까이 있는 홍승표를 올려다봤다. 그가 나긋하게 웃으며 두영의 턱을 간지럽혔다.

“그냥 가도 돼.”

배려하는 말처럼 다정하게 들렸지만, 지금 홍승표는 심술을 부리는 중이었다. 두영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그가 밖으로 나올 수 있게 공간을 내주었다.

중화 요리점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홍승표가 예약해 둔 모양인지 이름을 확인한 직원이 곧바로 룸으로 안내했다.

자리에 앉은 홍승표는 메뉴판을 주며 먹고 싶은 걸 고르라고 했다. 두영은 뭐가 뭔지 몰라서 그냥 짜장면을 골랐다. 홍승표는 생전 처음 듣는 요리만 세 개를 시킨 후 찻잔에 차를 따라 두영에게 건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생소한 음식이 줄줄이 나왔다. 쉬지도 않고 앞접시에 음식을 덜어 주는 홍승표 때문에 두영은 수저 내려놓을 타이밍을 여러 번 놓쳤다. 마지막까지 어영부영 다 받아먹었더니 음식이 입 밖으로 넘어올 것 같았다.

결국 식사를 마치고 나온 두영은 소화제를 사 먹었다.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두영을 보던 홍승표가,

“역시 같이 운동하자.“

라고 말했다. 아무래도 홍승표는 본인의 우월한 신체 능력을 남성 평균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졸지에 두영은 고자가 되어 버렸다.

겨우 소화를 시킨 두영은 이제 제집처럼 드나드는 맨션 공동 현관문을 직접 열고 들어갔다. 집 현관문 비밀번호도 홍승표가 알려 줬지만, 가방을 가지러 갔을 때만 빼고 먼저 열고 들어간 적이 없었다. 어쩐지 그건 조금 망설여졌다.

대기 중인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후 버튼을 눌렀다. 천천히 닫히는 문 너머로 어느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두영은 저도 모르게 열림 버튼을 눌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람에 머리카락이 헝클어진 여자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엘리베이터 안쪽으로 들어왔다.

“헉, 허억, 감사, 감사합니다. 화장실이 급해서…….”

4층을 누른 여자가 식은땀을 닦으며 초점 없이 서 있었다. 두영은 여자가 민망해할 것 같아서 일부러 부산스럽게 행동했다. 그러다 홍승표와 눈이 마주쳤다. 말도 없이 저를 보는 게 의아해 두영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때 여자가 두 사람을 힐끔힐끔 쳐다보더니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저는 4층 사는데… 처음 보죠?”

예상치도 못한 이웃 간의 소통이었다. 당황한 두영은 아까부터 가만히 있는 홍승표를 올려다봤다. 그는 고집스럽게 두영만 바라보며 이웃 단절을 도모하는 중이었다.

“이쪽 분은 가끔 엘리베이터 탈 때 봐서 안면이 있는데… 그, 처음 뵙네요.”

여자가 손바닥을 위로 보이며 두영을 공손하게 가리켰다. 저를 향한 말에 두영은 냉큼 허리를 꾸벅 숙이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넵, 안녕하세요.”

얼떨결에 주고받은 어색한 인사에 두영은 머쓱히 뒷덜미를 쓸었다. 여자는 시종일관 무심해 보이는 홍승표와 달리 어딘가 어리숙해 보이는 두영에게 말을 걸기로 했다.

“동생이신가 보다.”

누가 봐도 동생인 두영을 향한 말이었다. 내내 조용히 있던 홍승표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조용히 웃었다. 두영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뇨. 제가 동생이에요.”

갑자기 대화에 껴든 홍승표가 두영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짙은 미소를 띤 홍승표는 그대로 두영의 턱을 붙들고 입을 맞췄다. 잠시 굳어 버린 두영은 저보다 더 굳은 여자의 얼굴을 보고 급하게 홍승표를 밀쳤다. 하지만 홍승표는 모퉁이에 두영을 몰아넣고 진하게 키스했다.

“읏, 흐웁…….”

홍승표가 큰 손으로 두영의 얼굴을 잡고 고정했다. 눅눅한 혓바닥으로 입천장을 강하게 훑자 두영이 주저앉으려고 했다. 홍승표는 성기가 수납된 다리를 두영의 허벅지 사이에 집어넣고 자극했다.

파드득대는 두영이 혀로 홍승표의 혀를 밀었다. 미끌미끌한 살덩어리가 서로 비벼지자 홍승표가 뜨거운 콧김을 내쉬며 두영을 더 몰아붙였다.

정신을 차렸을 땐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홍승표가 도어록을 누르고 있었다. 몇 번 헛손질한 그는 문 여는 걸 포기하고 두영을 번쩍 들었다. 현관문에 몸을 기댄 두영이 그의 입맞춤을 버겁게 받아 주었다.

“하으…….”

두영은 머리에 산소가 부족하여 빠르게 정신이 흐려졌다. 홍승표는 두영의 아랫입술을 빨면서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인사했어?”

“…?”

“왜 인사받아 줬냐고.”

“인사를… 하시니까.”

“그 여자가 좋아?”

두영은 방금 홍승표가 한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였다. 왜 그런 결론에 도달했는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홍승표는 파충류처럼 눈을 뜨고 두영을 빤히 쳐다봤다.

“아직도 여자랑 하고 싶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호텔에서 네가 여자랑 자면 어떠냐고 물었잖아. 아직도 궁금해?”

두영은 기억을 되짚었다. 그리고 불쑥 떠오른 기억에 눈이 크게 뜨였다. 홍승표가 두영을 받친 손으로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다정하게 만지는 손길과 달리 그의 눈빛은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 시발 너도 남자니까 앞 한번 써 보고 싶겠지. 근데 앞으로 네 인생에 다른 새끼들은 없으니까 박을 거면 내 입에나 박아. 만약 생각도 못 한 연놈들이 내 앞에 나타나면 그땐…….”

목울대를 묵직하게 들썩인 홍승표가 무슨 상상을 하는지 눈동자에 불순물이 가득했다. 그는 스스로 지껄인 말에 고통스러워했다. 두영은 눈을 느리게 끔벅이다가 살포시 입을 맞췄다. 간지럽게 스친 입술을 좌우로 문지르며 그의 목에 두른 팔에 힘을 주었다.

충동적으로 저지른 짓은 생각보다 효과가 있었다. 폭발할 것 같았던 홍승표의 기세가 서서히 누그러지는 게 느껴졌다. 두영은 한참 동안 홍승표를 달래고 눈을 떴다. 어느새 그는 나른한 시선으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뒤늦게 제 행동이 민망했던 두영은 소심하게 눈을 내리떴다.

“승표야…….”

소곤소곤 이름을 부르자 홍승표가 두영의 얼굴 곳곳에 입술을 스치듯 비볐다. 나긋한 입맞춤에 두영은 입천장이 간지러웠다. 입술을 달싹이며 할 말을 고르자 홍승표는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나는 네가 다 처음이라… 그래서 궁금했어. 원래 이렇게 좋은 건지, 아니면 네가… 경험이 많아서 잘하는 건지…….”

홍승표가 두영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힘주어서 껴안았다. 두영은 숨 쉬는 게 조금 버거웠지만, 그를 밀어 내지 않았다.

“만약에… 네가 전에 만났던 사람들보다 내가 별로면…….”

고개를 쳐든 홍승표가 두영의 말을 끊었다. 그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져 있었다.

“시발 장난해? 너 존나 맛있어.”

노골적인 별 다섯 개 후기에 두영은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난감했다.

“아까 이진우한테 왜 웃어 줬어? 덮치고 싶은 거 간신히 참았잖아. 앞으로 그렇게 웃으면 엉덩이 맞을 줄 알아. 입꼬리 간수 잘해.”

두영은 지금 혼나는 상황 같은데 민망한 기분이 앞서 눈꺼풀을 산만하게 깜빡였다. 그러나 홍승표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뇌까렸다.

“널 모자란 애로 만들어서 집에 가둬 두고 싶어. 나만 볼 수 있게 네 존재를 세상에서 지워 버리고 싶어.”

홍승표가 두영의 입술 산을 혀끝으로 지분대며 습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진짜 그러면, 도망칠 거야?”

섬뜩한 기분이 든 두영은 입을 다물었다. 분명 물어보는 어조였지만, 이미 홍승표는 답을 정한 것처럼 보였다. 두영이 굳어서 아무 말도 못 하자 홍승표가 뒤로 물러나듯 서늘한 분위기를 흩뜨렸다.

“걱정 마. 네가 도망칠까 봐, 날 보면서 웃지도 않을까 봐 아직 그러지 못하고 있어.”

홍승표가 두영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그의 체취를 크게 들이마셨다.

“네가 내 앞에서만 야해 빠졌으면 좋겠어. 그리고 능숙한 건 어쩔 수 없잖아. 난 뭐든 처음부터 잘해.”

표정 변화 없이 뻔뻔하게 말한 홍승표가 두영을 바닥에 내려 주었다. 그러고는 두영의 바지와 팬티를 한 번에 벗겼다.

두영은 무릎을 꿇은 홍승표가 제 성기를 머금으려는 모습에 냉큼 티셔츠를 끌어 내렸다. 주변을 휙휙 둘러보며 식겁한 마음을 진정시켰다. 아무리 5층을 홍승표 혼자 쓴다지만 아닌 건 아니었다. 이곳은 야외이지 않은가.

두영이 가만히 있지 않고 자꾸 꾸물대자 홍승표가 두영의 다리를 두 팔로 끌어안고 아랫배에 얼굴을 파묻었다.

“손 치워 봐. 빨아 줄게.”

홍승표는 두영의 손등을 앞니로 갉작거리며 눈을 치켜떴다.

“지금 빨고 싶어.”

애절해 보이면서 동시에 서늘한 눈빛이었다. 입술을 뜯던 두영은 결국 머뭇거리며 손을 치웠다. 홍승표는 두영을 올려다보며 물컹한 성기를 입에 물었다. 한 번에 뿌리까지 머금고 녹진하게 빨았다. 빠르게 피가 몰리는 성기를 보며 그가 비스듬히 웃었다.

“귀여워.”

“이, 이제 집에 들어가서… 흐읏…….”

그는 두영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다시 성기를 물었다. 입으로 성기를 적당히 조이면서 미끄덩한 혀로 여린 살을 살살 쓸었다. 일부러 침을 삼키지 않고 추잡한 소리를 내며 빨았다.

“읏, 안 돼, 그거 안 돼…….”

두영이 고개를 저으며 뒤로 파고들어 오는 손을 붙잡았다. 성기를 잠시 뱉은 홍승표가 자기 뺨에 두영의 성기를 얹은 채 대꾸했다.

“앞뒤로 만져 주는 거 좋아하잖아.”

그가 다시 두영의 성기를 물고 손가락을 중간 마디까지 집어넣었다.

“네가 허리 흔들어 봐.”

자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듯이 가만히 있었다. 두영은 창피해서 죽을 맛이었다. 이대로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진짜 언제까지고 이렇게 있을 것 같았다.

주변을 불안하게 둘러보던 두영은 다시 어색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초반에 몇 번 박자가 꼬여 그의 얼굴을 치골로 짓눌러 버렸다. 두영이 주춤하자 홍승표는 괜찮다는 듯이 두영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계속 움직여.”

입에 성기를 물고 웅얼웅얼 보채는 그의 모습이 어쩐지 자극적이었다. 침을 꼴깍 삼킨 두영은 다시 허리를 느슨히 흔들었다. 처음에만 어색했지, 뻣뻣하게 움직이던 허리 짓은 점점 유연해졌다. 느낌이 좋아지는 곳을 스스로 찾기도 했다.

안에 들어온 손가락이 어느 지점에 닿도록 엉덩이를 흔들며 유도했다. 그러나 아무리 엉덩이를 씰룩거려도 그의 손이 그 지점에 닿지 않았다. 답답함에 엉덩이를 뒤로 내밀었다. 그러자 홍승표의 손가락도 뒤로 빠졌다.

그제야 그가 장난치는 것을 알아챘지만, 이미 다리에 힘이 풀려 홍승표의 팔에 의지한 상태로 있어야 했다. 그 순간에도 홍승표는 숨이 쉬어지는지 걱정이 될 정도로 두영의 음부에 얼굴을 파묻고, 한계까지 발기한 성기를 강하게 흡입했다.

“그만… 나 쌀 것, 흣…….”

두영이 부르르 떨며 사정했다. 눈앞이 하얗게 타들어 가고 까매졌다가 한참 만에 원상태로 돌아왔다. 홍승표가 제 몸을 받쳐 주지 않았더라면 진작 무너져 내렸으리라.

그때 믿기지 않는 소리가 아래에서 들려왔다. 두영은 냉큼 고개를 숙여 홍승표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 들었다. 그리고 다물린 입을 빤히 쳐다봤다. 씩 웃은 홍승표가 혓바닥을 내밀었다. 그의 입 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빨간 혀만 보였다. 입맛을 다시는 홍승표가 콧잔등을 찌푸렸다.

“맛없어.”

기겁한 두영은 그걸 왜 먹었냐고 말하려는데 홍승표가 두영을 뒤돌아 세웠다. 현관문에 기댄 두영은 아래를 핥아 오는 감촉에 부들부들 떨었다.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면 홍승표가 다리를 속박한 팔에 힘을 주었다.

흥건하게 두영의 구멍을 적신 그는 성기를 꺼내 단번에 뿌리까지 집어넣었다. 두영은 발끝으로 아슬아슬하게 서서 그의 것을 받았다.

“지, 집에 들, 아앗…….”

“응? 집에 들어가지 마?”

“으응, 집, 응, 집에, 흐앗…….”

홍승표는 두영의 턱을 잡고 뒤로 꺾어 입을 맞췄다. 두영은 혓바닥을 뾰족하게 내밀어 홍승표의 혀에 마주 비볐다. 그가 아래를 치고 들어올 때마다 두영의 몸이 덜컹덜컹 흔들렸다. 살이 퍽퍽 부딪치는 소리가 텅 빈 전실에 울렸다.

그는 두영의 골반을 쥐고 몸을 틀었다. 두영은 드디어 집에 들어가는 줄 알고 안심했다. 그런데 홍승표가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닫힌 엘리베이터 문 앞에 멈춘 홍승표가 호흡을 섞어 나직이 속삭였다.

“문 열까?”

“시, 싫어, 흣, 하지 마아…….”

아래를 계속 드나드는 홍승표 때문에 두영은 엘리베이터 문 가장자리를 양손으로 붙잡았다. 상체가 기울어지는데 홍승표는 뒤에서 잡아 주지도 않았다.

헝겊 인형처럼 탈탈 흔들리던 두영은 홍승표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걸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엘리베이터가 일 층에서 서서히 올라오고 있었다.

두영은 제 골반을 쥔 홍승표의 손등 위에 손톱을 세웠다. 올라오는 엘리베이터에 누가 타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 순간에도 굵직한 것이 예민한 내벽을 때리고 찧자 저항 없이 느끼는 제 몸뚱이가 비정상적인 것 같아 울컥 서러워졌다.

“싫다는 거야, 좋다는 거야.”

“이거, 실흐, 아아으, 으앗…….”

5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지만, 그동안 긴장한 두영은 눈물 뚝뚝 흘리며 거칠게 흔들렸다. 앞으로 고꾸라지지 않은 건 홍승표가 뒤에서 제 팔을 말고삐처럼 붙들었기 때문이다.

홍승표가 두영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움찔거린 두영의 구멍이 확 조여졌다.

“힘, 풀어.”

힘을 풀라는 말과 달리 홍승표는 두영의 엉덩이를 몇 번이나 안 아프게 때렸다. 두영은 엉덩이 살이 흔들려 내벽이 더 자극되었다. 제 의지가 아닌 힘으로 엉덩이가 조여져 서러웠다.

“맞는 게 좋아?”

“아냐… 읏, 안 좋아…….”

“거짓말.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조이잖아.”

“아니야, 아니란, 흣, 말이야…….“

홍승표가 두영을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었다. 두영은 못 들어가게 발끝으로 서서 버텼고, 일순 성기가 뱃가죽을 뚫을 것처럼 깊게 처박혔다.

“흐앙……! 으응!”

난폭하게 흔드는 홍승표가 두영의 가슴과 허리를 팔로 감싸 들었다. 두영의 발끝이 공중에 뜨며 그 상태로 굵은 성기가 빠르게 들락날락거렸다. 두영은 참지 못하고 정액을 배출했다. 뒤에서 거칠게 쳐 오는 허리 짓에 두영의 정액이 엘리베이터 안쪽으로 튀었다.

홍승표는 큰 소리가 울릴 정도로 퍽, 쳐올리며 두영의 배 안쪽에 사출했다. 두영은 꿀럭꿀럭 들어차는 그의 정액을 느끼고 부르르 떨었다. 성기를 빼낸 그는 두영을 안아 들고 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정액이 흘러나오지 못하게 틀어막았다.

집에 들어온 그는 두영을 벽에 기대고 서게 만든 뒤 구멍에 쑤셔 넣은 손을 거칠게 털기 시작했다. 회음부에 손바닥 두툼한 부분이 부딪치며 야릇한 살 소리가 울렸다.

두영은 저항 없이 느끼는 제 모습을 현관 거울을 통해 망연히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추잡하게 흔드는 손이 아래를 단단히 받쳐 주어 주저앉지도 못했다. 거의 폭이 좁은 의자에 앉은 거나 다름없었다.

“흐으윽……! 아아……!”

거울에 튄 물이 기다란 줄을 그리며 흘러내렸다.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서면 손도 그대로 따라와 계속 아래를 헤집었다. 다리가 꼬인 두영이 엉덩이를 치들고 엎어졌다. 그런데도 홍승표는 손목을 계속 털며 두영의 몸에 있는 걸 쭉쭉 빼냈다.

“흐응! 흐으윽! 아윽……!”

곧바로 팔뚝만 한 성기가 푹 박혀 왔다. 거울에 비친 홍승표는 개처럼 다리를 벌리고 앉아 배덕감이 느껴지게 추삽질을 했다.

홍승표가 두영을 돌려 눕히고 입술을 빨며 물었다.

“좋아?”

“흐웅, 좋아… 좋아…….”

“혓바닥, 내밀어.”

두영은 할딱이면서 혀를 내밀었다. 홍승표가 쪽쪽 소리를 내며 혀를 물고 빨았다. 침이 늘어지며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두영은 혀가 뽑혀 나갈 것 같아 홍승표의 목에 팔을 두르고 끌어당겼다. 그러자 입술이 부드럽게 포개졌다.

홍승표가 성기를 뿌리까지 집어넣고 짧게 치대다가 반원을 그리며 뭉근하게 움직였다. 끈적해진 살이 진득하게 달라붙고, 이어진 아래에서 나는 눅진한 소리에 야릇한 성감이 더욱 고양됐다.

“점점 야해져, 응?”

홍승표가 두영의 귀에 입술을 붙이고 속삭였다. 간지럽게 스친 입술이 불시에 귓구멍을 파자 두영의 어깨가 비죽 솟았다. 두꺼운 성기가 헤벌어진 내벽을 느리게 쓸고 드나들었다. 뭉툭한 끝으로 예민한 지점을 꾸욱 누르고 떨어지면 얇은 허리가 엉망으로 들썩였다.

조금만 하면 쌀 것 같은데 홍승표가 감질나게 움직였다. 왜 또 심술을 부리는 알 수 없어서 두영은 서럽게 할딱이며 홍승표의 목덜미에 뺨을 비볐다.

“승표야… 빨리…….”

“빨리 뭐.”

“빨리, 움직여 줘…….”

“싫은데.”

단호한 거부와 달리 아래는 서서히 속도를 높이며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생각한 지점을 비껴가며 애먼 곳을 쿡쿡 찔렀다. 이것도 몹시 느껴졌지만 두영은 그와 수많은 경험을 통해 더 좋은 곳을 알고 있었다.

“거기, 흣, 말고…….”

“어디 말이야. 그렇게 말하면 몰라.”

순진하게 모르는 척한 홍승표가 두영의 옷을 전부 벗기고 뒤통수를 감싸 안아 들었다. 위층으로 올라가면서 슬쩍슬쩍 위로 쳐올리자 두영이 몸을 경련하듯 들썩였다. 홍승표가 살짝 몸을 떼고 아래를 보았다. 두영은 아무것도 싸지 않은 채 뒤로만 절정에 도달했다.

“누가 뒤로만 가래. 앞은 나랑 가려고 남겨 둔 거야? 착하네.”

두영을 침대에 눕힌 홍승표는 허리를 약하게 움직이면서 제 옷도 마저 벗었다. 발갛게 익은 몸을 내려다보며 눅눅한 구멍을 어루만졌다. 엄지손톱을 세워 주름 한 줄 없는 곳을 긁자 두영이 저도 모르게 그의 성기를 욕심쟁이처럼 조였다.

“…일부러 조이는 거야?”

음산하게 중얼거린 홍승표가 두영의 다리를 위로 접고 수직으로 철퍽철퍽 박았다. 그러면서 두영의 발바닥을 길게 핥아 올리더니 발가락을 깨물었다. 마치 두영을 어떻게 하지 못해 안달 난 것처럼.

침대가 부서질 것처럼 끼익 끼익 울었다. 두영은 시트를 부여잡고 고개를 뒤로 꺾었다. 내장이 건드려지는 감각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았다. 솟구치는 감각이 너무도 아찔하여 신음도 나오지 않았다. 단전이 아릿해지며 무언가가 팟, 터지는 느낌이 들었고 몸이 제 의지와 상관없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아흑……! 아아으!!”

묽은 정액을 쏘아 올린 두영이 부들부들 경련하며 매섭게 치고 들어오는 홍승표를 받아 주었다. 그는 두영의 턱을 붙잡고 억지로 입을 벌려 게걸스럽게 입 안을 혀로 쑤셨다.

성기를 깊숙이 박은 채 사정한 홍승표가 천천히 구멍을 드나들며 두영의 입술을 입으로 지분거렸다. 두영은 배가 묵직하게 차오르는 느낌에 파르르 떨었다. 성기가 나갈 땐 반사적으로 조이고 들어올 땐 부드럽게 감쌌다. 제 목덜미를 깨무는 홍승표를 마주 껴안고 널찍한 등을 살살 토닥였다.

하찮은 달램에 홍승표는 기분이 나른해졌다. 팔에 힘을 풀고 두영을 완전히 깔고 엎어졌다. 흐느적거리는 두영의 다리를 제 허리에 두르고 틈도 없이 밀착했다.

두영의 눈꺼풀이 느리게 깜빡였다. 홍승표는 두영의 어깨를 나른하게 쓸어 주며 잠드는 모습을 지켜봤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을 만큼 시체처럼 잠이 드는 모습에 홍승표는 두영의 가슴을 베고 소리에 집중했다. 미약한 심장 소리가 들렸다.

가끔 녀석의 죽음을 경험했던 것처럼 피가 식을 때가 있었다. 상상만으로 이러는데, 진짜 눈앞에서 사라지면 미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저만 보도록 세상에서 지우고 싶다고 말했을 때, 허두영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 순간 녀석에게 체념을 가르치고 싶었다. 바뀌는 계절을 이유 없이 맞이하듯, 허두영이 제 집착을 그리 받아 주었으면 했다.

***

홍승표는 덜 마른 머리 위로 후드를 뒤집어썼다. 도착한 스튜디오 앞에 차를 주차하고 내리자 계절의 마지막 발악이 그의 몸을 휘감았다. 건물 내부로 들어가자 홍승언이 짐 가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기척을 느낀 그가 뒤를 돌아보며 해맑게 웃었다.

“어이, 늦어도 한참 늦게 오는 거 아니냐.”

“차가 막혀서.”

홍승표는 대충 둘러대고 손에 든 종이봉투를 넘겼다. 스튜디오는 히터를 강하게 틀어서 숨이 막혔다. 건조해서 손이 바스러질 것 같았다.

“왜 너무 답답해?”

세심한 홍승언이 손에 카메라를 들고 말했다. 홍승표는 저를 겨냥한 셔터를 묵묵히 맞아 주며 후드를 더 깊게 눌러썼다.

“가능하면 당장 인화해 줘.”

연사를 날리던 홍승언이 탁상에 카메라를 내려놓고 종이봉투에서 필름을 꺼냈다. 아무렇게나 잡아도 달라붙은 필름만 나왔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홍승언이 목을 울렸다.

“생각보다 너무 심한데. 중요한 거야? 급한 거?”

“중요하게 급해.”

“으음… 일단 노력은 해 볼게. 뭐라도 마실래?”

홍승표는 고개만 짧게 내젓고 휴대폰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새롭게 온 메시지가 있는지 확인했다. 역시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집을 나설 때 일어나면 연락하라고 메시지를 남겼는데 그것조차 읽지 않았다. 아직 깨어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낯선 곳에 면역이 없는 허두영은 이진우의 연구실에서 긴장한 상태로 있었다. 그래서 평소보다 섹스 시간도 짧았는데 금방 기절해 버렸다.

적당히 수건으로 닦아 주고 옆에 누워 자는 얼굴을 구경하다 나왔다. 지친 얼굴이 안쓰러워 보여 소중히 대해 주고 싶었다. 밖으로 기어나가지 않아도 제 통제 아래에서 먹고 살게 하고 싶을 만큼.

홍승표는 두영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 전화할까 고민했다. 그때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드니 홍승언과 눈이 마주쳤다. 한동안 지루한 침묵이 이어졌다. 홍승언이 갑자기 눈빛을 빛내며 설레발을 쳤다.

“내가 은밀하게 들은 게 있다, 동생아.”

시큰둥하게 웃은 홍승표가 종이봉투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없이 보챘다. 홍승언은 주둥이를 내밀고 설렁설렁 암실로 들어갔다.

홍승표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하늘이 점점 푸르게 변하고 그 아래 분위기는 고즈넉했다. 낮은 건물만 있는 동네는 개를 데리고 나온 주민들이 제법 보였다.

그는 휴대폰으로 며칠 전 심부름꾼이 보내 준 자료를 눈으로 훑었다. 이주학은 생각보다 더 미친놈에, 비정상적인 성도착증 환자였다. 허두영과 박은식을 제외하고도 수백 개의 영상이 있었다. 모두 겁탈 아니면 관음을 유발하는 영상이었다.

또 다른 파일은 자기 패거리들과 중년 남성을 집단 린치하는 영상이었다. 이것도 물론 한두 개가 아니다. 몇 개의 영상을 통해 그들을 어떻게 유인한 건지 알 수 있었다. 겁탈한 이들을 협박하여 원조교제를 유도하고 중년 남성을 꾀어낸 것이었다.

이주학은 중년 남성들의 집 주소와 회사 주소 그리고 개인 휴대폰 번호를 엑셀로 정리해서 철저하게 관리했다. 집착이 느껴질 정도였다.

망가진 필름을 현상하려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주학의 집에서 얻은 사진은 총 두 장이었다. 다른 한 장은 고의로 느껴질 정도로 얼굴 부분만 불에 타 있었다. 확실한 건 그 사진의 주인공이 허두영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아직 개인적인 예측이라 완벽한 퍼즐 조각이 보이지 않았으나, 그거 말고는 이주학의 비정상적인 성도착증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이주학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미친 짓을 하고 있을지 몰랐다. 그때 영원히 소생 못 하게 짓밟았어야 했는데…….

어째 허두영을 만나고 후회하는 일만 늘었다. 녀석을 상대하다 보면 계산된 행동보다 무의식의 행동이 앞섰다. 그래서 허두영 앞에서만큼은 절대 완벽할 수 없었다. 녀석을 위한 복수조차 말이다.

어린 허두영의 사진을 찍은 남자는 이미 과거 사람이었다. 자신이 하지 못한 복수가 아쉬웠지만, 어린 허두영이 남자의 집에 불을 지르는 장면을 상상하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황홀했다.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한 게 미치게 안타까울 만큼.

허두영이 방화범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솔직히 상관없었다. 마땅한 죽음이었기에. 어려도 연탄에 불을 낼 수 있었다. 저는 여덟 살 때 동급생의 손을 연필로 뚫었으니까.

그때 암실에서 나온 홍승언이 약간 화난 얼굴로 홍승표에게 걸어갔다.

“홍승표, 저 필름 뭐야?”

홍승표는 대답하지 않고 암실로 들어갔다. 붉은빛 조명을 따라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뒤따라 들어온 홍승언이 홍승표의 팔뚝을 붙잡았다.

“뭐냐고, 홍승표!”

“내가 찍은 거 아냐.”

“알아! 날짜 나와 있으니까! 너 그새 이런 취미 들렸어? 어? 그런 거야?”

동생이 사람 하나 패 죽여도 잘 죽였다고 하는 홍승언이었다. 처음으로 보는 작은 형의 화난 표정에 홍승표는 뒤집어쓴 후드를 뒤로 넘기고 한숨을 뱉었다.

“나도 어린애들한테 흥미 없어. 누구 좀 찾으려는 것뿐이야.”

“그니깐 그게 뭔데? 이거 홍승민도 알아?”

“글쎄.”

“대체 누구 찾는데.”

“이미 찾았어.”

현상된 사진은 허두영과 배경이 같았지만, 피사체가 달랐다. 아이의 얼굴은 이목구비 하나하나 뜯어봐야 현재 얼굴이 보였다. 얇은 입술과 째진 눈.

이주학이었다.

같은 상처를 지녀도 풀어내는 방식은 한참 달랐다. 누구는 스스로를 갉아먹었고, 누구는 타인을 씹어 먹었다.

홍승표는 사진을 쥐고 암실에서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창밖으로 내다본 하늘은 그새 새카만 밤이었다. 어쩐지 좀 전과 달리 동네가 혼란스러워 보였다.

주차된 차로 향하는 홍승표를 홍승언이 졸졸 따라왔다.

“어디 가?”

“집에.”

“나랑 저녁 안 먹고?”

“응. 이미 같이 먹을 사람이 있어.”

“누군데? 아니 잠깐만, 집에서 같이 먹는다고? 뭐야 진짜, 너 애인 생겼어?”

홍승표는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렸다. 말도 안 하고 웃기만 하자 홍승언이 답답해 죽으려고 했다. 사진의 존재에 대해서 금세 까먹은 모습이었다. 형제의 외관은 서로 닮지 않았지만, 이런 부분에서는 똑같았다. 극히 본인들의 흥미 위주였다.

“어떻게 생겼는지 형한테 살짝쿵 얘기해 줘라.”

“비밀이야.”

“치사하다, 인마. 너 하나 보려고 한국에 들어왔는데 밥도 같이 안 먹어 주고, 애인 얼굴도 안 보여 주고.”

“이미 걔랑 전화해 봤잖아.”

홍승언이 꺼벙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생각하는 모습이 오래 지속되다가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아… 아아! 그, 그으! 네 전화 대신 받은?”

휴대폰을 집에 두고 홍승민을 만난 날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착신 내역을 살펴보니 홍승언에게 전화가 와 있었다. 부재중이 아닌 걸 보니 허두영이 받았겠거니 생각하고 넘어갔다.

눈을 깜빡인 홍승언이 바람에 헝클어지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러고는 맑게 웃었다.

“예쁘겠네.”

허두영의 얼굴을 본 적도 없는 홍승언이 사실을 말하자 홍승표가 한쪽 눈썹을 까딱거렸다. 불손한 동생의 시선을 느낀 홍승언이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섰다.

“너 눈 높잖아.”

깔끔한 대답에 홍승표는 곧바로 납득했다.

“나중에 여기 데려와. 내가 밥 사 줄게.”

“안 돼. 낯가려.”

단번에 거절한 홍승표는 차에 탑승했다. 그러다 창문을 열고 홍승언에게 말했다.

“필름 모조리 태워서 버려.”

홍승언은 잠시 잊고 있었던 필름의 존재를 떠올리고 눈을 부리부리하게 떴다.

“진짜 너랑 연관된 거 아니지?”

“아냐.”

“그럼 됐어.”

금방 표정을 바꾸는 홍승언이 자동차 지붕을 툭툭 쳤다.

“잘 가. 도착하면 전화하고.”

“응.”

전화하지 않을 거지만 홍승표는 일단 대답했다. 홍승언도 그가 하지 않을 걸 알지만,

“그래.”

라고 대답하며 길을 터 주었다.

홍승표는 스튜디오를 나서며 두영에게 전화했다. 가는 길에 녀석이 평소에 잘 먹었던 한식 도시락을 사 가기로 했다. 웨이팅이 있는 곳이라 지금 가도 한 시간 정도는 기다려야 했다.

전이라면 하지도 않았을 비효율적인 짓을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했다. 그런 자신이 적잖이 마음에 들었기에 딱히 귀찮지 않았다. 그만한 값어치로 돌려주는 허두영이 있기에 가능했다.

두영은 잠결에 홍승표가 일어나는 기척을 느꼈지만, 눈이 떠지지 않아 그냥 가만히 있었다. 따뜻한 손길이 제 얼굴을 오랫동안 어루만졌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끙끙대자 그의 손이 미련을 뚝뚝 흘리며 물러났다.

허리 언저리에 있던 이불이 목 아래까지 덮어졌다. 다시 지그시 쳐다보는 시선이 제 얼굴에 닿아 왔다.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아도 느껴질 만큼 따뜻하고 다정한 눈길이었다.

다시 까마득한 잠에 빠진 두영은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얼마나 잤는지 창문으로 보는 하늘이 어두웠다. 일어나야 하는데 자꾸만 몸이 늘어졌다. 만사가 귀찮아서 눈만 깜빡였다.

별안간 시트가 확 들쳐졌다. 해가 져서 추운 탓에 순식간에 닭살이 돋았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라 더 그랬다. 두영은 비척비척 일어나 앉았다. 왜 또 그가 이런 장난을 치는 건지 알다가도 몰랐다.

두영은 눈을 손등으로 비비며 뒤를 돌아봤다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낯선 남자가 우뚝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 끝이 약간 쳐진 남자는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은 인상이었다. 고지식하고 깐깐해 보였다.

“기어코…….”

두영은 남자의 건조한 목소리에 움찔거렸다. 단 몇 글자임에도 불구하고 무척 사무적이라고 느껴졌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눈치를 보게 되는 어조였다.

“넌 누구지?”

“누구…….”

동시에 나온 두 사람의 목소리는 절대 화음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특징이 달랐다. 두영은 입을 합 다물고 가랑이를 오므렸다. 이불이 남자의 손에 있었고 입을 만한 옷도 남자의 뒤에 있었다.

두영이 머뭇거리다가 베개를 안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바닥에 발을 딛자마자 무릎이 꺾여 남자의 품에 안기듯이 넘어졌다. 바로 내팽개쳐질 줄 알고 눈을 질끈 감았는데 남자는 태연하게 두영을 받아 냈다. 굳건히 받쳐 주는 몸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죄, 죄송, 하미잇다……!”

엉망진창으로 발음을 씹고 음 이탈도 났다. 창피해서 당장 땅에 묻히고 싶었다. 남자의 품에서 퍼뜩 벗어난 두영은 또 무릎이 꺾여 이번에는 맨바닥에 죄를 뉘우치는 자세로 앉았다. 좀 전보다 더 민망해서 눈을 질끈 감았다.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두영은 남자의 길쭉한 다리를 힐끔 훔쳐보고 빠르게 내리떴다. 낯선 남자는 초대받은 손님처럼 당당해 보였다. 그래서 더 울적했다.

홍승표가 초대한 손님인 걸까? 그래서 저렇게 당당하게 저를 품평하듯 보고 있는 걸까? 아까부터 너무 대놓고 보고 있어서 정수리가 따가웠다. 모가지가 꺾일 것 같았다.

“너.”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두영은 또다시 움찔 떨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남자를 올려다봤다.

“이름은?”

“허, 허두영 입니…….”

“승표랑 무슨 사이… 인지는 대충 알겠고. 몇 살이지? 승표랑 동갑 맞아?”

두영은 소심하게 끄덕였다.

“동갑이라고?”

“…?”

“아, 방금은 내가 무례했군. 친구가 어려 보여서 그랬어.”

뭐랄까… 어딘가 재수 없으면서도 모든 사람을 내려다볼 것 같은 말투가 낯이 익었다.

“친구는 승표가 어디 갔는지 알고 있을까?”

두영은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목구멍에 주먹이 처박힌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남자의 분위기는 처음 홍승표를 보았을 때랑 비슷했다. 키도 홍승표와 맞먹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극장에서 본 남자도, 이진우도 전부 키가 컸다. 역시 사람은 끼리끼리 사귀나 보다. 저만 바닥에 들러붙은 씹던 껌이었다.

“추워 보이는데 나 때문에 옷도 못 입고 있는 것 같네. 내려가 있을 테니 편히 옷 입어요.”

남자가 선심 쓰듯 말해서 두영은 저도 모르게,

“감사합니다.”

라고 인사했다. 그러자 남자가 묘한 눈으로 두영을 쳐다봤다.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던 남자는 가볍게 툭 던졌다.

“그때 케이크는 맛있게 먹었나?”

무슨 케이크를 말하는 건지 두영은 잠시 고민해야 했다. 홍승표가 디저트를 사서 오는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두영이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자 남자는 대답 듣기를 포기하고 그대로 몸을 돌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두영은 끌어안은 베개 위에 턱을 얹고 남자가 떠나간 자리를 망연히 보았다. 오늘 참 별의별 일이 있었다. 4년 다녔던 일자리를 잃었고, 생각도 못 한 이진우의 밑에서 일을 배웠고, 방금은 홍승표의 집에 들어온 낯선 남자와 대화를 나눴다.

제 세상이 점차 변하는 걸 느꼈다. 자신과 개인적으로 연관된 사람과는 이별하는데, 홍승표와 관련된 만남은 날로 늘어나기만 했다.

문득 아래층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화하는 건 줄 알았는데 곧 계단을 성큼성큼 밟고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두영은 순간 긴장했다. 그러나 난간 위로 빼꼼 보인 건 홍승표였다.

어딘가 못마땅해 보이는 홍승표의 표정에 두영은 반가운 티를 내지 못했다. 자신이 또 뭔가를 잘못한 건가? 두영은 씹던 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생각만 많아졌다.

“왜 찬 바닥에 앉아 있어.”

가까이 다가온 홍승표가 두영을 일으켜 세우고 침대에 앉혔다. 그러고는 입고 있는 후드티를 벗어 두영에게 입혔다. 바닥에 두 무릎을 꿇고 앉은 홍승표가 두영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저 새끼가 뭐 했어?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고개를 도리도리 저은 두영은 계단 쪽을 힐끗 봤다가 다시 홍승표의 얼굴에 시선을 주었다.

“저분… 누구셔?”

“형.”

“헐.”

두영은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눈을 끔뻑였다. 그러다 묘한 눈길을 홍승표에게 보냈다. 지그시 시선을 맞춘 홍승표는 두영의 생각을 읽고 한쪽 눈을 구겼다.

“무슨 생각 하는지 알겠는데, 거기서 멈추는 게 좋을 거야. 토 나올 거 같으니까.”

열정적으로 근친론을 펼치던 오늘 아침과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친형?”

“응.”

생각도 못 한 단어에 두영은 입만 뻐끔거렸다. 친형. 홍승표의 가족을 이런 식으로 마주하게 돼 버렸다. 두영의 심각한 얼굴에 홍승표가 피식 웃었다.

“그 정도로 놀랄 일이야?”

“가, 가족인데… 나랑 이런 모습 추태…….”

“추태 아냐.”

홍승표는 단호하게 두영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기다리라는 말만 남기고 일 층에서 새 옷을 가지고 다시 올라왔다. 그의 집에서는 그의 옷을 입어야 했다. 암묵적으로 정해진 두 사람만의 규칙이었다.

대충 위아래를 가린 두영은 복층에서 쭈뼛쭈뼛 내려왔다.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반바지는 허리를 단단히 동여맸는데도 자꾸 흘러내려서 손으로 움켜잡아야 했다. 소파 가장자리에 앉아 노트북 화면을 보던 홍승민이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메마른 얼굴 위로 미소가 피어났다.

“내가 너무 실례했네.”

두영은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작은 목소리로 “아니에요.”라고 중얼거렸다. 홍승민이 정장 안주머니에서 명함 케이스를 꺼내 두영에게 명함을 건넸다. 두영은 양손으로 공손히 받았다.

“허두영 군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

행동도 생각도 멀티가 되지 않는 두영은 홍승민이 하는 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저 명함만 뚫어지게 내려다보며 생각할 뿐이었다. 홍승표, 홍승민. 철자 조합이 비슷하다고.

그때 소리 없이 다가온 홍승표가 두영의 손에서 명함을 빼앗았다.

“받아서 뭐 하게. 그리고 내려오지 말랬잖아.”

두영은 빈손을 허벅지에 문질렀다. 지금 홍승표를 자극하는 건 끓고 있는 냄비 뚜껑을 덮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럴 땐 찬물을 붓거나 불의 세기를 줄여야 했다.

“이 집에 개가 있나? 두영 군 피부에 이빨 자국이 한두 개가 아니던데.”

홍승민이 냄비 뚜껑을 덮고 화력을 키웠다. 그는 자기 목덜미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거울을 보지 못한 두영은 홍승민이 가리킨 곳을 냉큼 손으로 덮었다.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한 홍승민이 짓궂게 뒷말을 얹었다.

“그쪽 말고.”

“어울리지 마.”

홍승표가 두영의 손을 잡고 끌어 내려 등 뒤로 서게 했다.

“그냥 잠만 자는 사이야? 집에 데려온 건 처음이잖아.”

무신경하게 내뱉은 말이 두영의 심장을 난도질했다. 눈을 내리뜬 두영은 홍승표의 옷 밑단을 조심스럽게 잡아당겼다.

“승표야, 나 이제 알바 가야 해서… 이만 가 볼게.”

“저녁 먹고 데려다줄게.”

“괜찮아. 혀, 형님이랑 대화 나눠.”

괜히 눈치가 보여 더 있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분위기도 뭔가 이상했다. 동생이 남자랑 단순한 친구 사이가 아닌데도 반응이 시큰둥하기만 했다.

“어린 나이에 벌써 일도 하고 부지런하네.”

홍승민의 칭찬에 두영은 머쓱하게 목덜미를 쓸었다.

“좋아하지 마.”

곧바로 홍승표가 두영을 쏘아보며 씁, 소리를 냈다. 이도 저도 못 하는 두영은 당황해서 눈만 깜빡였다. 뭐 하나 자유로운 게 없었다. 그러다 홈바에 올려진 종이 가방을 발견했다. 눈에 힘을 주고 흐릿한 글자를 유추했다. 낯익은 브랜드는 자신이 유독 맛있게 먹었던 한식 전문 도시락이었다.

낭떠러지로 곤두박질치던 기분이 다시 상승 곡선을 달렸다. 입술을 꾹꾹 깨물던 두영은 홍승표의 넓은 등에 이마를 기댔다. 그의 등 근육이 굳는 게 느껴졌다. 홍승표는 큼지막한 손으로 두영의 손을 감싸고 부둣가에 세워진 나룻배처럼 너울너울 흔들었다.

시선을 정면에 내던진 홍승표는 차가운 말투로 쏘았다.

“비밀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네가 뻔하지. 생각하기 귀찮아서 대충 짓잖아.”

“멋대로 들어오지 마.”

“나도 누가 있을지는 몰랐지.”

피곤한 듯 한숨을 내쉰 홍승표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나가. 피곤해.”

단호한 축객령에 두영은 조금 놀랐다. 그래도 피를 나눈 형제인데 너무 매몰찬 게 아닌가? 그러나 형이라는 사람은 애정이 담긴 눈으로 홍승표를 응시할 뿐이었다.

“왜? 못 잤어? 수면제 떨어졌나?”

수면제? 두영은 눈을 끔벅였다. 그러고 보면 종종 홍승표가 잠을 못 잤다고 한 적이 있었다. 항상 제 옆에서는 잘 잤기 때문에 마음에 새기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극장에서 봤던 남자도 약 얘기를 했었다.

“됐어. 안 먹어도 잘 자니까. 괜찮은 거 확인했으면 이제 돌아가.”

“정말 내가 안 도와줘도 돼? 옛날처럼 엉겨 붙는 사람이면 떼어 내 줄 수…….”

“나가라고.”

땅거미 지는 목소리에 두영이 움찔거렸다. 제 손을 움켜쥔 홍승표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 두영은 무심코 앓는 소리를 흘렸다.

홍승민이 노트북을 덮고 일어섰다. 그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홍승표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 모습에서 뒤틀린 애정이 엿보였다.

“뭐, 지금은 네 말대로 발정 난 짐승처럼 보이지는 않네.”

두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동생을 말 안 듣는 종마 다루듯 대하는 그가 조금 거북했다.

“그런데 그건 네가 판단할 문제가 아냐. 미친놈들은 자기가 미쳤는지 모르니깐.”

순간 두영은 제 생각이 홍승민에게 읽힌 건 줄 알고 깜짝 놀랐다. 아무래도 형제들은 관심법까지 닮은 듯했다.

두영은 홍승표에게 잡힌 팔을 살랑이는 바람처럼 흔들었다. 그러고는 자유로운 반대쪽 손을 들어 홍승표의 등에 살포시 얹었다. 그가 홍승민의 말에 상처를 받았을까 봐 걱정이었다.

굳어 있던 홍승표의 등 근육이 조금씩 풀어지는 게 느껴졌다. 냉한 분위기도 한층 정돈되었다. 홍승표의 변화를 관찰자처럼 바라보던 홍승민이 주머니에 꽂은 손을 빼고 노트북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터벅터벅 걸어와 홍승표에게 가려진 두영을 내려다보았다.

“나중에 볼 수 있으면 또 보지. 그땐 형이 맛있는 거 사 줄게.”

두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가 홍승표의 서슬 퍼런 시선에 멈칫했다. 하지만 방금 홍승민의 말에서 가식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마주 보고 선 형제는 홍승표 쪽이 조금 더 컸다. 홍승표가 나른하고 끈적하다면, 홍승민은 그런 홍승표를 바짝 말린 것처럼 건조한 느낌이었다.

홍승민이 간단한 사용 설명서를 읽는 것처럼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그렇게 날뛰면 지키고 싶은 것도 제대로 못 지켜. 적당히 몸 사릴 줄도 알아야지.”

홍승표가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이다민이랑 친구 아니었나? 왜 걔 이를 뽑았지?”

“뽑을 만했으니까 뽑았겠지.”

“지금까지 네가 함부로 몸을 굴려도 우리가 터치를 안 한 건 네 행동이 순전히 널 향했기 때문이야.”

홍승민이 동생의 몸에 가려진 두영에게 시선을 옮겼다. 다정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가을볕처럼 건조해졌다.

“너 하나 케어하는 건 숨 쉬는 거랑 같아. 네가 무슨 짓을 해도 승언이랑 난 그러려니 해. 가족 좋은 게 뭐겠어. 그런데 네가 적을 그렇게 만들고 다니면 여기서 누가 노려질까? 그게 우릴까? 아니지, 감히 누가 우리 세 형제를 건드리겠어.”

“내가 알아서 해. 섣부른 판단 하지 말고 꺼져.”

치기 어린 말에 홍승민은 한숨을 집어삼켰다. 그러다 마지못해 웃으며 홍승표의 어깨를 툭툭 털어 주었다.

“혹여나 너한테 무슨 일이 생겨도 우린 네가 가장 일 순위야. 그것만 기억해. 나중에 가서 발광해도 늦어.”

경고 같은 말을 남긴 홍승민이 현관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두영은 깔끔하게 떠나는 뒷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났다. 쌀쌀한 바람이 개구멍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뒤돌아선 홍승표가 두영의 양 팔뚝을 움켜잡았다.

“진짜 쟤가 아무 짓도 안 했어?”

그의 목소리가 어울리지 않게 불안해 보였다. 두영은 제대로 생각하지 않고 고개부터 끄덕였다.

“응. 정말 아무것도 안 하셨어.”

가라앉은 그의 기분이 원래대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두영은 조급하게 입을 달싹였다. 그의 불안을 희석해 주기 위해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혀, 형도 잘생기셨어.”

“뭐?”

세상에. 이게 아닌가 보다.

“미, 미안.”

곧바로 사과했지만 홍승표의 낯빛은 평소대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두영이 스리슬쩍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몇 걸음 채 가지 못하고 붙잡혔다.

홍승표는 머리카락을 심란하게 쓸어 넘겼다. 통제권을 벗어난 화가 갑자기 밀물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저가 없는 사이에 허두영이 타인과 단둘이 있었다는 사실이 역했다. 친형제라도 역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는 두영을 비뚜름하게 내려다보다가 굳게 다문 입을 열었다.

“마침 잘됐네. 동생 같다는 말도 들었는데, 나도 형이라고 불러 봐. 동생 대접 진저리 나게 해 줄 테니깐.”

홍승표가 불시에 두영의 목덜미를 깨물었다. 처참하게 씹는 입에서 투둑, 하는 소리가 울렸다. 살가죽이 뚫리는 소리였다.

“으윽! 하짓……!”

“참아. 형이 주는 벌이니깐.”

한참 동안 두영의 살갗을 아작 낸 홍승표가 고개를 들었을 땐 입가에 피가 덕지덕지 묻은 상태였다. 눈깔은 평소보다 돌아 있었다. 두영은 홍승표의 손을 뿌리치고 도망쳤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그가 두영을 어깨 위에 짐짝처럼 얹고는 소파 위에 내던졌다.

두영이 온몸으로 버둥댔다. 홍승표는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두영의 몸을 제 덩치로 깔아뭉갰다.

“오십 킬로그램도 겨우 넘는 게 쌀 한 가마니한테 덤비네.”

우연히 홍승표의 몸무게를 알게 된 두영이 속으로만 생각하던 쌀 한 가마니를 실수로 내뱉은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홍승표는 두영을 놀리듯 종종 저런 식으로 말했다.

“겨, 겨우 아니야……!”

두영은 억울했다. 아침 공복에 재면 덜 나오는 게 당연했다. 공평하게 저녁 밥을 먹고 다시 재야 했다.

“형이라고 해 봐.”

“…….”

“어서. 칭찬해 줄게.”

그 칭찬 별로 받고 싶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문 두영이 눈빛으로 기선 제압에 들어갔다. 묘한 표정을 지은 홍승표가 갑자기 두영의 얼굴을 붙들고 입맞춤을 남발했다.

“뭔데 그렇게 귀엽게 쳐다봐?”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분위기에 두영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입술은 왜 오리처럼 내밀어? 키스해 달라고?”

불만스럽게 앞으로 튀어나온 부리가 당황한 듯 버벅거렸다. 홍승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두영의 입술을 벌려 혀를 집어넣었다. 그의 혀가 입 안에서 난동을 피우듯 엉망진창 움직이자 달라붙는 점막이 끈적한 소리를 냈다.

할딱거리던 두영은 홍승표가 몸을 살짝 띄운 틈에 소파 밑으로 몸을 굴려 떨어졌다. 홍승표의 표정이 다시금 험상궂어졌다. 그는 재빠르게 두영의 발목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그러곤 두영의 발바닥으로 제 하체를 꾹꾹 눌렀다.

혈액순환이 빠른 홍승표는 거꾸로 두 번 타는 보일러처럼 발기도 순식간이었다. 왜 상황이 이렇게 됐는지 두영은 어안이 벙벙했다. 어느새 제 바지 끈이 풀리고 아래로 끌어 내려졌다. 허벅지 중간에 걸린 바지를 냉큼 쥐고 고개를 흔들자 홍승표가 나직이 말했다.

“손에 힘 풀어.”

“카, 카페 가야…….”

들은 척도 안 하는 홍승표가 두영의 바지를 마저 벗기고 뒤로 던졌다. 두영은 상의를 당겨 맨다리를 가렸다.

“미안……!”

그리고 냅다 사과했다. 아무래도 제가 잘못한 것 같았다. 뭘 잘못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냥 전부 제 탓 같았다.

홍승표가 정지 화면처럼 두영을 보았다. 그러더니 끈적한 날숨을 뱉었다.

“죄송해요, 라고 해 봐.”

“죄,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두영은 얌전히 시키는 대로 했다. 홍승표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허탈하게 웃었다.

“이걸 어떻게 하지?”

두영의 왼쪽 발목을 부드럽게 감싸 쥔 그는 점점 손에 힘을 싣고 강하게 옥죄었다. 그러다 두영의 겁먹은 표정을 보고 살며시 힘을 풀었다.

“앞으로 존댓말로 안 할 거면 사과하지 마.”

머리를 쓸어 넘긴 홍승표가 한숨을 섞어 말하며 별안간 나른하게 웃었다. 두영은 홀린 듯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침을 꼴깍 삼켰다. 홍승표가 주변의 환심을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건 다 저 미소 때문이었다. 그러나 근사한 미소만큼 뚫린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또 미안하다고 하면 네 아래에 내 것만 물리지 않을 거야.”

두영은 거친 비포장도로에 심장을 박박 문대는 것 같은 쓰라림을 느꼈다. 눈에 물막이 덧씌워지자 홍승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두영의 생각을 알아채고 눈을 찡그렸다.

“너 일부러 내 가슴 미어지라고 그러는 거지?”

무슨 소리인지 이해 못 한 두영이 조용히 훌쩍거렸다. 그런 두영을 홍승표는 빤히 지켜보다가 다시 두영을 안아 들고 홈바로 향했다. 그 위에 두영을 앉힌 그는 포장해 온 종이 상자를 뒤졌다. 그 안에서 나온 건 후식으로 주는 과일이었다.

두영은 그가 과일 뚜껑을 여는 걸 멀거니 보았다. 그러다 순간적으로 떠오른 지난 기억에 홈바에서 냉큼 내려와 화장실로 도망쳤다. 홍승표는 이미 그럴 거라고 예측한 사람처럼 도망치는 두영을 쉽게 제압했다.

바닥에 주저앉은 두영이 홍승표의 손에 들린 길쭉한 포도송이를 올려다보며 더듬더듬 말했다.

“아, 안 넣을 거지?”

“과일 이름이 핑거 포도래. 너 손가락으로 아래 쑤셔 주는 거 좋아하잖아. 근데 이건 맛도 달아.”

홍승표는 진짜 미친놈이었다. 친형도 자기 친동생을 미친놈이라고 인정한 마당에 자신이 뭐라고 부당하게 여겼을까. 두영은 과거의 저를 한탄하며 엉덩이 걸음으로 뒤로 기어갔다.

“형이라고 불러 주면 안 넣을게.”

“왜 자꾸… 자꾸…….”

몇 번의 협박이 안 먹히자 홍승표는 두영을 강제로 뒤집어 팬티를 젖혔다. 두영이 다리를 버둥거리면서 홍승표의 손목을 붙잡고 질질 짰다. 그런데도 홍승표는 두영의 엉덩잇살을 한쪽으로 잡아 벌렸다.

“혀, 형! 혀엉!”

급하게 튀어나온 부름에 홍승표는 멈칫했다. 그러곤 손에 힘을 풀고 부드러운 살결을 쓰다듬었다.

“사과는?”

두영은 억울함에 씨근덕대며 그의 명령을 따랐다.

“미안해, 형…….”

“존댓말로 해야지.”

이상하게 하나씩 늘어나는 느낌이었다.

“형… 죄송해요…….”

“야하게.”

“…….”

“빨리 해 줘, 두영아.“

홍승표는 머리카락에 붙은 껌처럼 끈질겼다. 두영은 미심쩍은 눈길을 홍승표에게 힐끔 던졌다. 그는 누구보다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문득 그의 눈 아래 거뭇한 그림자를 발견했다. 그는 금방이라도 졸음에 몸을 빼앗길 듯이 피곤해 보였다.

자연스럽게 홍승표의 형이 말했던 수면제의 존재가 떠올랐다. 홍승표가 약을 먹을 정도로 잠을 못 자는지 전혀 몰랐다. 이따금 넋을 놓고 허공을 헤아리던 그의 모습이, 젖은 빨래처럼 늘어지던 나른한 모습이 사실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나타난 홍승표의 우울일지도 몰랐다.

두영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승표야, 약이란 게… 뭐야? 지금도 먹고 있는 거야?”

두영은 바닥에 이마를 붙이고 눈을 질끈 감았다. 엉덩이를 홍승표한테 내밀고 하는 소리라 민망했다. 무시하고 본인 일을 진행할 것만 같았던 홍승표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두영은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봤다.

그가 처연하게 웃고 있었다. 어딘가 씁쓸해 보이는 그의 얼굴에 두영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듯했다.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걸 건드린 것 같았다. 허벅다리에 팬티가 걸린 두영은 무릎걸음으로 홍승표에게 엉금엉금 기어갔다.

“잘… 못 자?”

두영은 그의 날카로운 턱선을 손으로 감쌌다. 매끄러운 뺨을 엄지로 쓸며 눈을 지그시 맞췄다.

“아직도?”

힘이 빠진 얼굴을 한 홍승표가 두영의 손에 고양이처럼 뺨을 문댔다.

“응. 잘 못 자.”

“왜?”

입술을 말아 문 홍승표가 갑자기 눈을 내리떴다. 두영은 당황하여 바짝 몸을 붙였다. 홍승표가 자연스럽게 두영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목덜미에 얼굴을 감추듯 파묻었다.

그는 무언가를 억누르는 것처럼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언뜻 떠는 듯한 몸짓에 두영은 그가 우는 줄 알고 깜짝 놀라 굳어 버렸다. 그러다 중간부터 개수작 냄새가 폴폴 풍기기 시작했다.

홍승표가 작위적으로 느껴지는 한숨을 폭폭 내뱉었다. 그 속에 간드러진 웃음을 알아챈 두영이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꼼지락거렸다. 홍승표는 팔에 힘을 주고 두영을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너 없으면 잘 못 잔다는 말, 숨이 안 쉬어진다는 말, 그때 너한테 한 말 중에 진심이 아닌 말은 하나도 없었어.”

홍승표가 긴 공백을 두고 말을 이었다.

“사실 다른 데도 아파.”

“어디?”

“마음이.”

두영은 그가 하는 말이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까지 거짓인지 감이 잘 안 잡혔다. 무슨 말을 해 줘야 할지 몰라서 홍승표의 평야 같은 등판만 살살 쓸어 주었다. 가만히 쓰다듬을 받던 홍승표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너 개소리라고 생각했지?”

“아니, 아니.”

두영은 그게 무슨 개소리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눈을 게슴츠레 뜬 홍승표가 별안간 피식 웃었다.

“근데 맞아. 개소리야.”

두영의 몸이 흔들릴 정도로 웃은 그가 두영을 안은 채 옆으로 쓰러져 낮게 읊조렸다.

“위로해 줘.“

이미 서로가 한 몸인 것처럼 안고 있는데 홍승표는 그것도 부족한 듯 두영의 하찮은 온기를 갈구했다. 두영은 문득 개소리 같은 그의 말이 사실은 개소리가 아니었음을 느꼈다. 저가 수영을 못해 바다를 무서워한다는 개소리처럼 말이다.

두영은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그의 등을 느린 박자로 토닥였다. 그리고 단단한 이마에 입을 맞추고, 뒷덜미의 까칠까칠한 부분을 어루만졌다. 여전히 자신은 위로해 주는 게 어떤 건지 잘 몰랐다. 그러나 그동안 홍승표에게 받은 위로를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눈에 보이는 형태로 피어났다.

홍승표가 두영을 자기 몸에 위에 올리고 똑바로 누웠다. 그의 몸에 엎어진 두영은 고개를 슬쩍 들어 홍승표의 개구쟁이 같은 얼굴을 눈에 담았다. 빤히 시선을 맞추던 홍승표가 갑자기 정색하며 살벌하게 중얼거렸다.

“홍승민한테 관심 갖지 마. 이번엔 이빨 뽑는 걸로 안 끝날 거니까.”

두영은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그저 눈을 끔뻑였다. 그제야 홍승표가 왜 이토록 성질을 부렸는지 알게 됐다. 극단적이고 허무맹랑한 질투였다.

가끔가다 보이는 홍승표의 아슬아슬한 모습은 금이 간 자기 같았다. 원래부터 나 있던 금이었는지, 아니면 저를 만나고 생긴 금인 건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오늘로 몇 번째인지 모를 홍승표의 질투에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괴기한 애정은 서로의 불안에서 안정을 얻었다. 두영은 그의 애정을 두 손 가득 쥐고 굶주린 배 속에 집어넣고 싶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부리는 소유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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