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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육등성의 밤 (17/20)

17. 육등성의 밤

최근 며칠은 완연한 봄이었는데 갑자기 겨울이 다시 찾아온 것처럼 추워졌다. 손톱이 말려들어 가는 건조함은 덤이었다.

몇 번의 재채기를 하고 인중을 쓸었더니 코피가 나왔다. 두영은 당황하지 않고 휴지로 콧구멍을 막았다. 오랜만에 맛본 코피였다. 원래 건조하면 코피가 자주 났지만, 맞아서 흐르는 코피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흐른 지금 코피가 새삼 낯설었다.

“두영, 피곤해?”

부자재를 옮기고 있던 유재민이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건조하면 원래 이래요.”

“건조해? 히터 좀 줄일까?”

“아뇨, 아뇨. 따뜻해서 좋아요.”

두영이 눈을 말갛게 뜨고 냉큼 대꾸했다. 차라리 코피가 철철 나는 게 추운 것보다 나았다.

그 순간 차임벨이 울리고 거대한 장신이 카페 안쪽으로 들어왔다. 두영은 홍승표를 향해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손 인사를 대신했다. 홍승표는 나긋한 웃음을 짓다가 두영의 코피를 발견하고 순식간에 정색했다. 그 얼굴을 지켜보던 유재민이 냅다 끼어들어 두영을 대변했다.

“피곤해서 그렇다더라.”

홍승표는 귓등으로 듣는 척도 안 하고 두영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

“왜 그래?”

“건조해서…….”

두영은 민망해서 홍승표의 손목을 잡고 끌어 내렸다. 그런데도 홍승표는 꿋꿋이 두영의 턱을 잡고 얼굴을 들여다봤다. 문득 두영은 바람에 헝클어진 그의 머리를 발견했다. 무의식중에 손으로 살살 어루만지며 정리해 주었다. 새까만 머리카락에 찬기가 가득 배어 있었다.

두영이 물었다.

“밖에, 많이 춥지?”

홍승표는 두영의 두 손을 제 양쪽 뺨에 갖다 대며 대답했다.

“응, 추워.”

“따뜻한 물 줄까?”

“괜찮아.”

홍승표가 입술 끝을 당기며 산뜻하게 웃었다.

“내숭 떨기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유재민이 가볍게 빈정거렸다. 그제야 그의 존재를 알아챈 홍승표가 곁눈으로 유재민을 슬쩍 보았다.

“걔는 손이 없니?”

유재민의 말이 끝나자마자 홍승표는 정말 손이 없는 것처럼 온몸으로 두영에게 치대기 시작했다. 두영이 시뻘게진 채로 그를 밀어 냈으나, 홍승표는 딸려 오는 물티슈 뒷장처럼 계속해서 달라붙었다.

떫은 표정을 지은 유재민이 쓰레기봉투를 들고 입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홍승표에게서 간신히 벗어난 두영이 유재민의 손에서 쓰레기봉투를 빼앗아 들었다.

“제, 제가 할게요.”

“응? 내가 할게. 별로 없어서 금방 해.”

“제가 하게 해 주세요.”

원래도 분리수거는 두영 담당이었지만, 오늘 유독 눈치가 보여 부자재 쓰레기까지 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홍승표가 두영을 따라 나가려 하자 유재민이 급하게 막아섰다. 둘밖에 남지 않은 카페는 순식간에 적막해졌다. 홍승표는 언짢은 시선으로 유재민을 보았다. 유재민은 턱을 치들더니 홍승표를 불순물 없이 직시했다.

“너 그거 인마 성희롱이야.”

“당신 게이야?”

유재민의 단정한 얼굴이 찌푸려졌다.

“아니?”

“그럼 허두영한테 관심 있어?”

“난 어린애 안 건드려.”

“어린애가 아니라면?”

“직원도 안 건드려. 너 정체가 뭐니?”

테이블에 걸터앉은 홍승표가 한숨을 내쉬며 피식 웃었다.

“허두영이 아니라 나한테 관심이 있으셨다?”

진지하다가 한순간에 장난스러워지는 홍승표의 모습에 유재민은 뒷목을 부여잡았다.

“빈정거리지 말고 들어. 두영이한테 하는 네 행동이 너무 거침없어서 묻는 거야.”

능글맞게 치켜 올라간 홍승표의 입꼬리가 빠르게 곤두박질쳤다.

“직원을 많이 아끼나 봐?”

“두영이 함부로 대하지 마. 섬세한 아이라서 너 같은 도련님 감당 못 해.”

“그쪽도 제법 도련님 같은데.”

“빈정거리지 말랬지.”

“당신이야말로 착각하지 마. 충분히 진지한 상태니까.”

홍승표의 오만한 얼굴이 순식간에 서늘해졌다. 이마를 짚은 유재민이 한숨을 늘어뜨리며 말했다.

“사람이 보는 앞에서 애를 막 만지고 그러는 거 아니다, 이 녀석아. 넌 얼굴에 비브라늄을 처발라서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두영이는 아니야. 내가 어렸을 때부터 너 같은 애들 질리도록 봤어. 네가 멋대로 자랐다고 해서 두영이한테 멋대로 굴어도 되는 건 아니야.”

홍승표는 김빠진 콜라처럼 지루함을 드러냈다. 마치 유재민은 자기 배 아파서 허두영을 낳은 것처럼 굴었다.

“당신 정말 게이 아냐?”

“아니라고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아.”

“아니면 허두영 낳았어?”

“하, 그래 내가 두영이 낳고 미역국 먹었다.”

체념한 듯 인자하게 웃은 유재민이 자웅동체를 인정하자 홍승표는 납득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재민이 눈을 뒤집어 까고 답답해 미쳐 갈 때쯤 두영이 돌아왔다. 테이블에서 몸을 일으킨 홍승표가 두영에게 다가가 어깨에 팔을 둘렀다.

“너희 사장님이 마감은 자기가 한대. 넌 옷 갈아입고 나와.”

두영이 커다란 눈을 끔뻑거리며 유재민에게 시선을 주었다. 유재민은 편의점 빵 포장지를 뜯는 중이었다.

“그래, 두영이 먼저 들어가. 나는 좀 있다 갈 거야.”

“괜찮아요. 더 하다 갈 수…….”

두영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유재민이 빵 봉지에서 나온 스티커를 확인하고 테이블을 맨손으로 내리쳤기 때문이다. 원하는 최애 캐릭터가 이번에도 안 나온 모양이었다. 유재민은 곧바로 새로운 빵 봉지를 뜯으며 말을 이었다.

“별로 정리할 것도 없으니까 저놈 데리고 얼른 들어가. 그게 진짜 날 위한 거야.”

두영은 유재민에게 고정한 시선을 홍승표에게 옮겼다. 홍승표는 삐딱하게 서서 하품이나 하고 있었다. 아마도 자신이 없을 때 둘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고 간 듯했다. 차마 그 내용이 겁나서 물어보진 못했다. 분명 홍승표가 인성질을 했을 게 명백하다.

두영은 유재민의 위장을 지켜 주기 위해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그 짧은 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유재민의 얼굴이 활짝 피어 있었다. 때마침 이쪽을 바라보는 유재민과 시선이 겹쳤다.

“이거 봐, 두영아.”

“아…….”

유재민의 손에 그가 그렇게 고대하던 스티커가 있었다. 족제비를 닮은 캐릭터였다. 어쩐지 용맹하게 서 있는 족제비와 유재민은 서로가 한 쌍인 것처럼 닮은 느낌이었다.

홍승표의 차에 탄 두영은 익숙하게 안전벨트를 매고 시트에 등을 기댔다. 엉덩이가 배겨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손에 쥐었다. 문득 날이 선 시선이 느껴져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주변을 두리번댔다. 얼마 전부터 느껴지기 시작한 꺼림직한 시선이었다.

“왜?”

뒤늦게 차에 오른 홍승표가 차 시동을 걸면서 물었다. 두영은 고개를 내젓고 다시 창문을 닫았다. 큰 도로로 나온 홍승표가 집 방향이 아닌 쪽으로 핸들을 크게 틀었다. 눈길을 보내자 그가 한 손을 뻗어 두영의 턱을 간지럽혔다.

“드라이브 가자.“

“지금?”

“원래 드라이브는 밤에 가는 거야. 늦지 않게 집에 데려다줄게.“

두영은 내비게이션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주말 저녁의 도로는 제법 차가 막혔다. 다들 어디로 가는 건지 괜스레 궁금했다. 두영은 도로 위의 차 내부를 꼼꼼히 살폈다. 저도 모르는 관음증이 제 안에 도사리고 있는 건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재밌어?”

정지 신호에 차를 세운 홍승표가 자연스럽게 두영의 취미에 끼어들며 창밖을 내다봤다. 두영은 자신의 변태 같은 취미가 들통난 것 같아 얼굴을 냉큼 정면에 고정했다.

두영이 더 이상 다른 차를 구경하지 않자 이번에는 홍승표가 핸들에 턱을 괸 채 두영을 빤히 관찰했다. 기다란 침묵에 두영이 메말라 갈 때쯤 홍승표가 입을 열었다.

“너랑 있으면 지루하게 느껴지던 것도 재밌어져.”

가끔 홍승표는 별것도 아닌 일을 칭찬처럼 말해 줄 때가 있었다. 두영은 고래가 아니지만, 왜 칭찬을 받은 고래가 춤추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열선 시트로 인해 두영은 구운 찹쌀떡처럼 노릇노릇 녹았다. 다시금 내다본 창밖은 아직도 사람들이 두꺼운 패딩을 껴입고 길을 활보하고 있었다.

흰색 롱패딩을 입은 사람을 보자 자연스럽게 김진호가 떠올랐다. 그동안 홍승표의 집을 자주 드나들었지만, 근처에 사는 그를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아마도 김진호가 일부러 피하고 다니는 건지 몰랐다. 정확히는 자신이 아닌 홍승표를 말이다.

도착한 곳은 자동차 극장이었다. 홍승표가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자 영상에 맞는 오디오가 흘러나왔다. 영화는 생각 없이 보기 좋은 로맨스 코미디였다. 밑도 끝도 없는 교훈을 주는 영화보다 나았다.

이곳에 오기 전 드라이브 스루가 가능한 타코 음식점에 들러 음식을 포장했다. 두영의 입맛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는 홍승표가 이번에도 완벽한 메뉴를 조합해, 두영이 처음 먹어 보는 음식임에도 불구하고 남김없이 비우게 했다.

쓰레기를 받아서 챙긴 홍승표가 생수 모가지를 비틀어 두영에게 건넸다. 얌전히 생수를 받아 마신 두영은 그가 소스가 묻은 소지와 약지를 불편하게 펴고 있는 걸 발견했다. 아무래도 매점에서 티슈를 챙겨 주지 않은 모양이었다.

두영은 예전에 홍승표가 글로브 박스에서 일회용 티슈를 꺼냈던 것을 떠올리고 제 앞쪽에 손을 뻗었다. 글로브 박스가 반쯤 열린 순간, 홍승표가 날렵하게 손을 뻗어 입구를 도로 닫았다.

속눈썹이 부대끼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 두영은 저를 짓누르는 침묵이 불편해 글로브 박스만 노려보았다. 찰나였지만 분명 보았다.

제 어릴 적 사진을.

홍승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바닥에 떨어진 티슈를 주워 손을 닦았다. 군더더기가 없는 깔끔한 손짓이지만, 유달리 날카롭게 느껴졌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홍승표가 차에 시동을 걸고 자동차 극장을 벗어났다. 정지 신호에 멈춰 선 홍승표가 두영에게 몸을 기울였다. 움찔거린 두영은 저도 모르게 문짝에 등이 닿을 만큼 거리를 두었다.

“…….”

“…….”

기묘한 정적이 독가스를 뿜어내는 것처럼 숨도 못 쉬게 했다.

“안전벨트 매.”

그제야 두영은 아까부터 차 안에서 반복적으로 울리는 안전띠 미착용 알림을 알아챘다. 안전벨트를 끌어당겼지만, 긴장해서 제대로 맞물리지 않았다. 게다가 신호가 초록 불로 바뀌었는데도 홍승표는 출발하지 않고 저를 쳐다보기만 했다.

기어이 뒤에서 경적이 울렸다. 두영이 움찔 놀라며 안전띠를 놓쳤다. 다시금 뻗어 온 홍승표의 손이 안전띠를 대신 채워 주고 멀어졌다. 그는 후련해 보이는 듯한 얼굴로 액셀을 밟았다.

도로 위 불빛이 차 안으로 스며들었다. 산란하는 빛 번짐이 눈부셔 두영은 시선을 떨어뜨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을 때 고개를 들었다. 창 너머로 보이는 건 달동네 초입이었다.

곁눈질로 내비게이션 시계를 보니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대체 몇 시간이나 넋 놓고 있었는지 당황스러웠다. 두영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이만… 갈게.”

“왜 아무것도 안 물어봐?”

찰나의 틈도 없이 쑤셔 오는 질문이었다. 문고리를 잡은 두영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가려 했지만, 뒤에서 뻗어 온 손이 문고리를 잡은 두영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도로 닫히는 문이 묵직한 소리로 울었다. 연이어 문을 잠근 홍승표가 두영의 어깨를 잡고 자기를 보게 했다. 그에 두영은 손에 쥔 휴대폰을 의자 밑으로 떨어뜨렸다.

“왜 아무것도 안 물어보냐고.”

“…….”

“대답해. 돌아 버릴 것 같으니까.”

선이 뚜렷한 눈매가 두영을 직시했다. 불쏘시개처럼 고약한, 고드름처럼 냉혹한 눈빛이었다. 오랜만에 대답을 보채는 홍승표를 보자 두영은 그가 지금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느껴졌다. 숨기고 싶은 사실을 들킨 것처럼 착잡해 보이기도 했다.

두영은 홍승표의 꿈틀거리는 목울대에 눈길을 고정하고 음울하게 말했다.

“사진… 어디서 났어?”

홍승표는 대답하라고 보챘으면서 정작 빠르게 대답해 주지 않았다. 한참을 뜸 들이던 홍승표가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고는 탄식을 내뱉었다.

“말해 줄게. 말해 줄 테니까… 나 두고 가지 마.”

두영은 제 어깨를 절박하게 쥔 홍승표의 손을 보다가 똑바로 앉았다. 누군가가 저를 애절하게 붙잡는 건 이상했다. 어쩐지 우위에 선 기분이었지만, 제가 느껴도 되는 기분인지 조금 망설여졌다.

그의 큰 손이 두영의 팔뚝을 쓸며 아래로 내려가 손을 움켜잡았다. 그러고는 그 손을 코앞으로 가져와 손등에 이마를 기댔다. 언뜻 숭고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두영은 건조한 입술을 혀로 축이고 속에 삼킨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나는… 괜찮아.”

방랑하는 위로는 받는 이가 없이 그대로 허공에 사그라졌다.

“어린애 벗은 몸… 다 거기서 거기니까. 그러니까 난 괜찮아.”

홍승표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두영은 그 옛날의 기억이 흉터를 비집고 나오는 게 느껴졌다. 생살이 돋은 줄 알았는데, 그저 고름만 가득 차 있었나 보다. 아직도 헤어 나오지 못한 과거가 제멋대로 날뛰었다.

아저씨는 허삼혁의 술친구였다. 술을 안 좋아하면서 두영의 집에 자주 놀러 왔고, 허삼혁이 술에 취해 먼저 곯아떨어지면 두영이 그의 술친구가 되어야 했다. 진짜 술을 마시는 건 아니다. 남자의 허벅다리에 마주 보고 앉아 그의 가운데 다리를 만져 주면 되었다.

남자는 아랫도리를 제대로 세우지 못하는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의 비틀린 욕망은 자기를 무시할 수 없는 어린아이에게 향했다. 남자가 두영을 비밀의 방으로 초대한 날, 그는 두영이 만져 준 자기 성기를 움켜쥐고 신이 자기 기도를 들어주었다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날 두영은 지옥에 떨어졌다.

남자가 죽은 이후 허삼혁은 한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때부터 술에 의존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폭력도 심해졌다. 마치 모든 원망을 두영에게 쏟아 내듯이.

종일 집에 틀어박혀 술만 마시던 허삼혁이 가끔 술기운을 빌어 속에 감춰 둔 비밀을 말해 줄 때가 있었다. 그 비밀에는 지독한 술 냄새와 담배 냄새, 코를 후벼 파는 매캐한 화염 냄새가 났다. 그의 손에는 불에 녹은 살가죽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오합지졸로 얽힌 화상 자국이 있었다.

“어른들은… 애들이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해. 그런데 나는 모든 걸 알고 있고… 또 잊지 못하고 있어.”

남자가 죽기 이틀 전부터 허삼혁은 두영과 함께 그의 집에 연탄을 하나씩 가져다 놓았다. 두영은 자신이 어디서부터 아저씨의 죽음에 연관되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허삼혁이 그 일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도 몰랐다.

중요한 건 아비와 그의 아들이 공범이란 것이다. 사실 자신은 제 의지로 허삼혁의 폭력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허울 좋은 변명일 뿐, 그저 자신의 죄책감에서 비롯된 체념과 순응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 짐을 홍승표와 나누고 싶지 않았다. 저를 좀먹는 죄책감은 오로지 자신과 함께 파멸되어야 했다.

“승표야… 나는 네가 어떤 마음으로 나한테 접근했는지 궁금하지 않아. 중요하지도 않고 알아도 신경 쓰지 않아. 그니깐 너도… 너도 신경 쓰지 마.”

두영은 달동네 중턱에서 홍승표가 제게 했던 고백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저로 인해 홍승표가 후회하지 않았으면 했다. 저 따위에게 쏟을 감정이 아니었다.

“너는 용서가 그렇게 쉬워?”

홍승표가 눈을 매섭게 치뜨고 뾰족한 어투로 쏘아붙였다. 눈을 끔뻑인 두영은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고 숨소리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무뎌, 졌으니까…….”

눈썹을 찌푸린 홍승표가 두영의 턱을 잡고 시선을 깊게 맞췄다.

“무뎌졌으니깐 괜찮다고? 웃기지 마. 형태가 온전히 남아 있지도 않은 만큼 짓뭉개졌으면서 뭐가 괜찮아? 그런 말은 최소한 널 그렇게 만든 새끼들이 재기 못할 정도로 망가진 다음에 해도 안 늦어.”

“이미… 늦어 버렸는걸.”

자신은 순수하지 않았다. 애초에 깨끗한 적이 없는 상태에서 홍승표를 만났으니, 그가 이렇게까지 나올 필요가 없었다. 홍승표가 내뱉는 말은 전부 제게 오면 사치스러운 말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상냥함에, 저를 한정적으로 배려해 주는 그의 다정함에 눈물이 났다. 위로받고 싶지 않은 반항적인 마음과 그에게 한없이 기대고 싶은 마음이 양날의 검처럼 저를 위협했다.

그쯤 멈추라고, 그쯤 하라고 이성이 제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말렸지만, 제 마음이 주제도 모르고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어서 잡아 달라고, 어서 자신을 그 지옥 같은 곳에서 구해 달라며.

“세상은 항상… 날 함부로 대해. 태어나선 안 될 존재처럼 무시하고… 마구 힐난해.”

두영은 울컥 목이 멨다. 흔들리는 제 목소리가 듣기 싫어 아슬아슬하게 날숨을 내뱉자 홍승표가 두영의 뺨을 손으로 감싸고 이마를 맞댔다.

“천천히 말해도 돼.”

“…나도 심장이 있는데, 눈물도 있는데…….”

“응.”

“아파할 줄도 알고 슬퍼할 줄도 아는데… 내가 아무것도 못 느끼는 사람처럼 함부로 대해…….”

“내가 죽여 줄게.”

직선으로 뻗어 온 그의 대답에 두영은 일순 호흡을 멈췄다. 조심스럽게 시선을 들어 가까이 있는 까만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네가 당한 만큼 내가 되돌려 줄게.”

잠잠히 있던 두영이 뒤늦게 고개를 저었다.

“이제 아무도… 날 위해 희생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더 이상 희생하지 않았으면…….”

불현듯 차 밖의 공기가 어수선해졌다. 경찰차 몇 대가 달동네 초입에서 멈추었고 더 이상 안쪽으로 진입할 수 없자 차에서 내린 경찰이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두영은 무슨 일인지 확인하기 위해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홍승표가 팔을 수직으로 뻗어 두영을 가로막았다.

“넌 여기 있어.”

홍승표가 상황을 살피러 차에서 내렸다. 무슨 일인지 동네 주민들이 멈춰 서서 구경하기 시작했다.

두영은 불안을 다스리기 위해 심호흡했다. 그러다 글로브 박스가 눈에 들어왔다. 호기심은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 두영은 바깥에 있는 홍승표를 슬쩍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손으로 뻗어 글로브 박스를 열었다.

작은 사각형 속 아이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 채 겁먹은 얼굴로 서 있었다. 이 아이는 나중에 대중교통도 이용 못하고, 사람들을 무서워하고, 친구도 죽인 평생 하자 있는 인간으로 자랐다.

더 이상 보고 있기 힘들어 사진을 다시 글로브 박스에 집어넣었다. 그러다 구석에 있는 또 다른 사진 한 장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무슨 사진일지 몰라 지레 겁이 났으나, 두려움을 잃은 듯 제 손이 사진을 향해 뻗어 나갔다.

끄트머리를 집는 순간 손에 전기가 통한 것처럼 찌릿했다. 형체가 없는 무언가가 보지 말라고 자신을 뜯어말리는 것 같았다. 두영은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고 그을린 사진을 천천히 뒤집었다.

“왜…….”

꿈에도 나타날 만큼 악몽 같은 존재였다. 그런 존재가, 왜 이주학이 저와 같은 곳에서 사진을 찍었는지 알 수 없었다.

목구멍이 타들어 갈 정도로 구역질이 났다. 머리 근육이 터질 것 같았다. 창문을 내다보며 홍승표를 찾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소방차가 줄줄이 들어오며 한순간에 주변이 도떼기시장만큼 어수선해졌다.

그때였다. 아침이라고 착각할 만큼 주변이 환해졌다. 두영은 고개를 기울여 하늘을 올려다봤다. 달동네가 쏟아지는 노을처럼 붉게 물들었다.

세상의 마지막에 도달한 듯한 치솟는 불길이었다.

홍승표는 몰려든 동네 주민 중 아는 얼굴을 발견하고 다가갔다. 가끔 허두영을 기다릴 때 서 있는 구멍가게 주인이었다. 그동안 안면을 좀 익혔더니, 그를 발견한 구멍가게 주인이 물어보지도 않은 현 상황을 자연스럽게 읊었다.

“어떤 정신 나간 놈이 글쎄 기름통을 질질 끄시고 올라가는 거야. 하도 정상처럼 보이지 않아 내가 냉큼 신고했지.”

때마침 방화 예고를 받은 소방차가 달동네 쪽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길을 트기 시작했다.

홍승표는 설명을 들으며 제 차를 힐끔 보았다. 두영이 고개를 숙이고 우울한 낯짝을 하고 있었다. 마지막에 녀석을 너무 몰아붙인 것 같아 저 자신을 죽도록 패고 싶었다. 왜 항상 녀석을 상대하다 보면 감정적으로 나오게 되는지 울컥 짜증이 났다.

구멍가게 주인은 흥분과 불안이 섞인 목소리로 계속해서 떠들었다.

“우리 애 아빠는 지켜보겠다고 집에 있는다는데, 으이구! 철없는 인간. 위험한데 그냥 내려오지 자기가 지켜본다고 뭐가 나아져? 왜 거길 지키고 있어. 여기 있는 사람들은 불안해서 미리 대피하고 있―.”

한순간 폭발이 터지듯 빛이 번쩍이더니 하늘에 닿을 만치 불이 솟았다. 잠시 굳었던 사람들이 좀비 떼처럼 달동네 위로 올라가려 했다. 하나같이 자기 가족들의 이름을 불렀다.

대기 중인 경찰들이 달동네 통행을 진압했다. 어수선함 속에 호루라기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경찰 한 명이 스피커를 통해 주민들은 안정시켰다. 다른 경찰은 무전기에 대고 신속한 지원을 요청했다.

빠르게 번지는 불길의 시작점이 두영의 집과 가까웠다. 무심결에 옆으로 고개를 돌린 홍승표는 멈칫했다. 조수석 문은 열린 채였고, 두영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곧바로 두영에게 전화했다. 그러나 조수석 발판에 녀석의 휴대폰이 덩그러니 있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보닛을 내려쳤다.

홍승표는 방향을 틀어 달동네 길목으로 달려갔다. 그새 지원받고 달려온 경찰들이 그를 가로막았다. 홍승표는 무시하고 진입하려 했지만, 경찰 대여섯 명이 동시에 달려들어 그를 자동차 보닛 위에 제압했다.

“공무집행 방해하시면 5년 이하의 징역, 일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합니다!”

그는 우리를 탈출한 짐승처럼 몸부림쳤다. 하필 그 순간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이 찾아왔다. 눈앞이 아찔하게 흐무러지고 귀가 터질 것 같은 이명이 머릿속에서 사이렌처럼 울렸다.

홍승표의 손목에 수갑을 채운 경찰이 반대쪽 수갑을 경찰차 사이드미러에 연결했다. 그때였다. 땅 전체를 울릴 정도로 폭발음이 터졌다. 가스가 터진 것이었다.

“꺅―!!”

“엄마! 엄마!! 어딨어?!”

“저희 집 애가 아직 안에 있는 것 같아요!!”

“물러나 주세요! 화재 진압 전까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펑―!

또 한 번의 폭발이 일어나고, 홍승표의 심장도 함께 터져 나갔다.

두영은 숨도 쉬지 않고 달동네를 달렸다. 건조한 공기 때문에 피부가 바스러질 것 같았다. 찬 바람이 불어와 불길을 더 크게 키웠다. 빠르게 퍼지는 불기운이 다닥다닥 붙은 판자촌을 집어삼켰다. 모든 걸 불태우는 재앙이었다.

두영은 앞길을 가로막은 불길 앞에서 망설였다. 할머니가 집에 없을 수도 있는데 바보처럼 밑에서 확인도 안 하고 달려왔다. 심지어 홍승표한테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하지만 불길이 터지는 순간 아무것도 뵈는 게 없었다.

문득 불길 사이로 망연히 서 있는 어느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두영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이주학이었다.

그는 상태가 멀쩡하지 않았다. 팔에 깁스를 부착했고, 머리에는 붕대를 감은 상태였다. 그 순간 무표정하던 이주학이 소름 끼치게 활짝 웃었다. 그리고 시력이 좋지 않은 것과 별개로 두영은 이주학의 입 모양을 또렷이 보았다.

‘이것도 다 네 탓이야.’

두영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절뚝절뚝 걸어온 이주학이 단 두 걸음만 남기고 두영의 앞에 멈춰 섰다. 불길이 바람에 휘청거리는 순간 이주학이 히스테릭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랑 나랑 다른 게 뭔데?”

두영은 이주학이 어렸을 때 일을 말하는 걸 알아채고 낯빛을 굳혔다.

“나도 니처럼 아빠 새끼한테 처맞고 자랐는데, 소아성애자 새끼한테 당했는데 넌 왜 나처럼 행동하지 않아? 죽을 것처럼 처맞고 다니면서 왜 항상 학교를 기어 나와? 왜 넌 아무리 건드려도 더럽혀지지 않아? 나는 이렇게 망가졌는데… 어째서 넌 두 발 멀쩡히 걸어 다녀?”

이주학은 고등학교 입학식 날 두영을 보고 단숨에 사진 속 아이임을 눈치챘다. 범인이 사고 현장을 되돌아가듯 잊히지 않는 과거의 그곳을 이주학도 몇 번이나 되찾아 갔다.

잿더미밖에 없는 곳을 무슨 생각으로 뒤졌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저 손에 들어온 필름 뭉치 몇 장과 사진을 발견하고 심장이 떨렸던 것만 기억났다. 그때의 기분은 제 살을 칼로 도려내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주학은 파 버리고 싶은 과거로 첫 몽정을 했고, 동성의 섹스 영상으로 첫 자위를 했다. 동영상을 아버지에게 들킨 이후로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고 매일같이 매를 맞으며 감시당했다.

그럴수록 이주학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엇나갔다. 더 이상 순수한 자신은 없었다. 너무 일찍 순결을 잃어버려 늘 원망만 하는 삶을 살았다.

그런데 왜 허두영은 이토록 순결할까? 아무리 헐뜯고 박은식을 이용해 무너뜨려도 혼자만 햇살을 받은 것처럼 새하얬다.

차라리 기다리지 말고 더 빨리 무너뜨릴걸. 박은식처럼 죽을까 봐 걱정하지 말고 더 빨리 처참히 무너뜨릴걸.

“너도 박은식 따먹히는 영상 보면서 흥분했잖아?”

“안 했어.”

두영이 쏘아붙이듯 대답했다. 이주학이 순간적으로 정색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왜 거짓말해? 흥분했잖아.”

두영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쇠막대기를 발견하고 손에 쥐었다. 그리고 이주학을 향해 겨냥했다.

“말 지어 내지 마.”

“아니야. 너 흥분했어. 흥분했다고. 흥분했잖아! 우리 같은 애들은 어쩔 수 없어. 우리는 그래도 돼. 정상적으로 자라는 게 말도 안 되는걸.”

“우리라고 하지 마. 나는 너랑 달라.”

“…다르다고?”

이주학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두영은 그런 그를 뚜렷이 노려보며 홍승표의 차에서 봤던 사진을 떠올렸다. 저만큼이나 불안하고, 저만큼이나 외로워 보이는 아이를.

“나는 그날의 일로 동지애 느끼고 싶지 않아.”

그러나 이주학의 과거가 어떻든 그게 그의 면죄부가 될 수 없었다. 그가 저지른 짓은 감히 신도 용서할 수 없었다.

이주학의 눈동자가 여러 의미로 흔들렸다. 그 순간 갑자기 공수병에 걸린 짐승처럼 두영에게 달려들었다. 바닥에 나자빠진 두영은 제 몸을 깔고 앉은 이주학을 향해 쇠막대기를 휘둘렀다. 이주학이 무식한 힘을 자랑하며 쇠막대기를 잡아챘다.

“윽! 놔! 놔아!!”

“이기적인 새끼야. 니가 그렇게 말하면 서운해할 사람이 존나 많은 거 알고 그러는 거지?”

“무슨 말을……!”

“박은식이 왜 갑자기 너랑 거리를 뒀는지 알아?”

“그건… 내가 왕따니까.”

“아니? 박은식은 내가 어떤 의미로 널 노리는 줄 알고 진작 선 그은 거야. 불쌍한 박은식은 고작 너 따위 지키려고 자기 울타리에서 널 내쫓은 거고.”

“그게 무슨…”

“근데 너는 은혜도 모르고 홍승표랑 웃고 떠들고, 드라이브나 쳐 가고…….”

“그니까 그게 무슨 말인데?!”

두영이 눈을 부릅뜨고 고함을 내질렀다. 쇠막대기를 등 뒤로 내던진 이주학이 허공을 망연히 보며 낮게 읊조렸다.

“내 욕망은… 12년짜리야.”

눈치 빠른 애들은 빨리 뒤져 버려야 했다. 불손한 마음으로 박은식과 친해진 뒤 허두영과 친하냐고 물었다. 그러나 박은식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아니라고 대답했다. 말만 그렇게 하고 뒤에선 몰래 놀 줄 알았는데 진짜 절교까지 했다.

그러나 박은식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 본인이 그렇게 나오면 자신이 포기할 줄 알았겠지만, 12년짜리 욕망은 그 누구도 감히 말릴 수 없었다.

순백의 허두영은 저처럼 돼야 했다. 매일같이 구렁이가 제 몸을 기어 다니는 느낌을 받으며 토해야 했고, 비정상적인 성관계를 통해 몸이 망가져야 했으며, 서로가 가진 공통된 상처를 핥아 줘야 했다.

절대 그 지옥에서 혼자만 벗어나서는 안 됐다.

불꽃에 물든 이주학의 얼굴이 화상으로 짓물러 있었다. 기괴하게 일그러진 얼굴이 사실은 미소 짓는 것이었다고, 두영은 한참 만에 깨달았다.

“우리 같은 애들은 절대 행복해질 수 없어. 너나 나나 똑같으니까 힘 빼지 말고 인정해. 그럼 최소한 행복해지려는 쓸데없는 노력 안 해도 되니까.”

두 발로 선 이주학이 두영을 내려다보며 말을 덧붙였다.

“니 주변에 있는 연놈들은 다 너 때문에 죽을 거야. 니가 분수를 모르고 나대서. 그리고 너는, 나도 죽인 거야.”

주절주절 저주를 늘어놓은 이주학이 불바다를 향해 스스로 걸어갔다. 두영은 불길에 잡아먹힌 그를 쳐다보다가 문득 그가 한 말이 거슬려 집이 있는 방향으로 뛰었다. 어딜 가도 맹렬히 번지는 불꽃이 살인적이었다. 불로만 이뤄진 행성 같았다.

두영은 익숙한 샷시문을 발견하고 문고리를 잡았다가 아찔한 뜨거움에 곧바로 놓았다. 왼쪽 손바닥에 시뻘건 물집이 생겼다. 두영은 몸통으로 문을 박찼다. 어깨가 빠개질 것 같았다.

겨우 문을 열자 괴물이 트림하듯 불길이 치솟았다. 몸을 웅크린 두영은 불길 아래로 기어들어 가 곧바로 수도꼭지를 돌려 물을 틀고 몸을 적셨다. 개수대와 세탁기에 연결된 물도 최대치로 돌렸다.

세탁기 안에 있는 빨래를 문고리에 덧대고 방문을 열었다. 김춘녀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두영은 김춘녀를 부르다가 기도로 뜨거운 공기를 들이마셨다. 침이 흐를 정도로 거세게 기침하자 정신이 아찔해졌다.

포복하듯 방에 들어간 두영은 김춘녀를 등에 업고 다시 방 밖으로 나왔다. 그 순간 천장이 무너지고 잔재가 쏟아졌다.

“아윽―!”

두영의 왼쪽 발목 위로 두꺼운 기둥이 깔렸다. 더 이상 붙잡을 수 없을 만큼 정신이 몽롱해졌다. 그나마 마지막 기억이 홍승표라서 미련 없이 눈을 감을 수 있었다.

***

두영은 오랫동안 몸에 밴 습관 때문에 알람 없이 새벽녘에 잠이 깼다. 천장을 멀뚱멀뚱 보는데 시계의 초침 소리가 유난히 컸다.

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

소리를 의식하다 보니 어느새 초침 소리에 호흡을 맞추고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평소 눈 깜빡거리는 속도보다 빨라서 몇 번이나 박자가 어긋났다. 속눈썹이 위아래로 엉키는 기분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몸을 뒤척였다. 옆으로 돌아누웠더니 김춘녀의 등이 보였다. 평소와 같은 풍경인데 묘한 감정이 들었다. 두영은 억지로 눈을 감았다. 잠은 이미 완전히 달아나 정신이 말짱했다.

아 맞다. 일 가야지. 왜 또 자려고 그랬지?

두영은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가슴 한편이 서늘했다. 괴물에게 쫓기는 듯한, 혹은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주섬주섬 일어난 두영은 가슴을 부여잡았다. 심장을 밖으로 꺼내 따뜻한 물에 담그고 싶었다.

두영은 삼인칭 시점으로 교실 한가운데 놓인 이부자리와 그곳에 앉아 있는 자신을 보았다. 이질감을 전혀 느끼지 못한 두영은 천장에 닿을 만큼 쌓여 있는 책상 너머로 어떤 소리가 들려오는 걸 느꼈다.

천천히 걸어가 틈새로 그 너머를 내다봤다. 새까만 옷을 입은 파리한 남자가 책상 위에 차려진 밥을 먹고 있었다. 자신이 들은 소리는 수저가 부딪치는 소리였다. 돌연 파리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수저를 내려놓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허두영.”

파리한 남자가 섬뜩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두영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다가 이불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다시 제 몸과 하나가 된 두영은 김춘녀가 사라진 걸 알아채고 허둥대며 주변을 둘러봤다. 어느새 할머니는 벽을 친 책상 너머에서 파리한 남자의 고봉밥을 차리고 있었다.

“허두영.”

파리한 남자가 또다시 두영의 이름을 불렀다. 그때 또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두영도 익히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두영은 자빠진 자세에서 뒤를 돌아봤다. 박은식이 맨바닥에 편하게 앉아 두영을 보고 있었다.

“은식아.”

자연스럽게 떠오른 이름을 두영은 거부감 없이 입 밖으로 꺼냈다. 막상 불러 보니 어딘가 어색했다. 오랫동안 부르지 않은 이름처럼.

박은식과 시선을 맞춘 두영은 점점 기묘한 기분을 인지했다.

“나… 왜 여기 있어?”

“니네 집 불났으니까.”

“어?”

“일어나 허두영.”

“나 지금 일어났는데?”

“일어나.”

갑자기 박은식의 표정이 살얼음처럼 변했다. 머리털이 곤두설 만큼 소름이 끼치는 얼굴이었다. 박은식이 두영의 팔뚝을 덥석 잡았다.

“일어나.”

두영은 눈을 부스스 떴다. 두 번째 기상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새벽인지 초저녁인지 구별이 안 되었다. 눈동자만 굴려 주변을 살폈다. 티브이에서 보던 공간과 달랐지만, 병실인 것 같았다.

갑갑해서 일어나려고 꿈틀댔지만, 혓바닥도 움직이지 않았다. 물먹은 솜이라도 된 것처럼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버거웠다. 끝도 보이지 않는 바다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두영은 등 뒤로 바다 괴물이 지나간 것 같은 무력감을 느꼈다.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이겨 낼 수 없었다. 절망이 저를 향해 아가리를 벌렸다.

그때 병실 불이 켜지고 어떤 이들이 들어와 두영을 진정시켰다. 숨을 꺽꺽 몰아쉬던 두영은 가까스로 호흡을 되찾았다. 제 숨을 돌려준 그들이 뭐라고 말을 하는 것 같은데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잠수한 상태에서 듣는 소리처럼 웅웅거릴 뿐이었다.

저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 속에 박은식이 보였다. 그 옆에 이주학도 있었다. 절대 같이 있을 수 없는 두 사람이 한 공간 있자 두영은 덜컥 두려워졌다.

‘도망가자…….’

두영은 박은식에게 말했다. 소리가 되지 못한 말이 제 안에서 메아리쳤다. 박은식을 데리고 얼른 도망쳐야 하는데 몸이 움직여지지 않아 답답했다. 다시 눈앞이 까마득하게 점멸했다.

세 번째 기상을 했을 땐 창밖이 시꺼멨다. 거울 같은 창문에 홍승표가 비쳤다. 두영은 냉큼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홍승표가 어딘가 이상했다. 원래 그는 자신이 조금만 입을 벌려도 곧바로 귀를 기울이고, 서 있을 때는 몸을 살짝 숙여 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남처럼 두영을 보기만 할 뿐이었다.

두영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일어나려고 움직이는데 온몸이 실시간으로 처맞는 것처럼 아팠다. 그런데도 기어이 일어나 바닥을 맨발로 디뎠다. 그 순간 아찔한 통각이 왼쪽 발목부터 시작해 정수리까지 후려쳤다.

그제야 두영은 엉망인 제 꼴이 발견했다. 왼쪽 발목과 왼손 그리고 목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갑자기 일어나서 울렁거리는 현기증이 잇달았다. 두영은 매트리스를 부여잡고 토악질을 참았다. 이쯤이면 달려와서 부축해 줄 텐데, 그는 끝까지 다가오지 않았다.

두영은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들었다. 초점을 그에게 맞추고 형태를 더듬었다. 문 앞에 서 있는 이는 홍승표가 아닌 홍승민이었다. 두영은 매정한 이가 홍승표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실망과 안도가 동시에 들었다.

문득 쓰러지기 전 마지막 기억을 떠올린 두영은 고개를 쳐들고 홍승민을 애타게 쳐다보았다. 그는 여태 두영이 깨어나길 기다린 사람처럼 곧바로 답해 주었다.

“할머니는 집중치료실에 계셔. 위급한 상황은 넘겼으니 걱정 안 해도 되고. 원한다면 지금 가 봐도 돼. 혼자 갈 수 있다면 말이야.”

최악의 가정까지 했던 두영은 뼈저리게 감사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몇 번이나 세상의 모든 신에게 감사하다고 빌었다.

한참 동안 제 속을 달랜 두영은 크게 심호흡했다. 울컥 넘어오는 걸 참았더니 목이 불타는 것처럼 아팠다. 두영이 손으로 목을 더듬자 홍승민이 활자를 읽는 건조한 말투로 대답했다.

“연기를 많이 들이마셔 목이 손상된 상태라더군. 당분간 억지로라도 말하지 않는 게 좋겠어. 발목은 심하게 다치지 않았지만 여러 후유증 가능성 때문에 집중적인 치료가 필요할 수 있어. 충분히 재활 받으면 무사히 걸을 수 있으니까 미리 겁먹지 않아도 되고. 다만 흉터가 남을 것 같은데, 미관상 신경 쓰이면 피부 이식도 지원해 주지.”

두영은 제 발목을 보다가 힐끗 시선을 들어 올렸다. 어쩐지 홍승민이 의도적으로 상황을 돌리는 느낌이 들었다. 답답함을 느낀 두영은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승표는요?’

둔한 사람도 입 모양만으로 쉽게 유추할 수 있는 이름이었다. 안경을 추어올린 홍승민이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평이하게 말했다.

“승표는 여기 오지 않을 거야.”

두영은 무표정으로 홍승민을 응시했다. 머리를 굴려 봐도 승표가 여기 오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두영은 예의상 웃어 주는 듯한 홍승민의 입꼬리를 빤히 쳐다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번엔 사고를 크게 저지른 거 같아 격리했으니 허두영 군은 승표 기다리지 마. 그리고 여기 병원은 우리 집이 후원하는 곳이라 수납 걱정…….”

“격리, 켁!”

두영은 생각하지도 못한 단어에 홍승민의 말을 따라 하다가 목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맨바닥에 주저앉아서도 기침을 멈추지 않았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피가 섞인 침을 길게 늘어뜨렸다.

가만히 보고만 있던 홍승민이 조용히 다가와 두영을 침대에 앉혔다. 두영은 멀어지는 홍승민을 덥석 붙잡고 승표가 왜 격리됐는지 눈빛으로 물었다. 하지만 홍승민의 입에서 나온 건 다른 이야기였다.

“방화범은 죽었어.”

순간 두영은 박은식과 함께 있던 이주학을 떠올렸다. 마치 박은식이 이주학을 데려간 것 같았다.

“아는 사이였나?”

두영은 흔들리는 눈으로 홍승민을 올려다봤다. 무심한 그의 눈빛에서 언뜻 홍승표가 보였다. 안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분위기가 닮은 듯했다.

“동창이라고 하던데.”

“…….”

“많이 친했나?”

두영은 힘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친했다니. 모르고 하는 소리겠지만, 그런 식으로라도 듣고 싶지 않았다. 다시 시선을 지그시 맞춘 두영이 홍승민을 향해 입술을 달싹였다.

‘승표는요? 왜 격리하셨어요?’

이번에는 못 알아들었는지 홍승민이 한쪽 눈을 가늘게 떴다. 두영은 답답해서 휴대폰을 찾았다. 홍승표에게 전화하려고 했지만, 휴대폰이 보이지 않았다.

“이걸 찾아?”

홍승민이 태연하게 겉옷 안 주머니에서 두영의 휴대폰을 꺼냈다. 두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홍승민은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을 뿐이었다. 지금 뭐 하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된 두영은 멀뚱멀뚱 홍승민을 보았다.

“줄 수 없어. 승표한테 전화할 거잖아. 방화범이 중독자더군. 너도 범인과 연관된 사람이라면 승표랑 떨어뜨려야 해. 물론 지금 네 상태가 심각해서 병원에 있는 거지만 원래라면 너도 격리됐어. 억울해할 거 없어. 병원비, 재활비 모두 이쪽에서 지원해 줄 테니까 당분간은 연락하지 말고 치료에만 집중해.”

두영은 홍승민의 서슬 퍼런 기색에 움츠러들었다. 전부터 느끼는 거지만, 홍승표의 형은 나이 차이를 떠나 사람을 절대 동등하게 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은 이런 취급을 받는 게 익숙했다. 능숙하게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 있었다. 그리고 승표를 향한 홍승민의 애정이 은연중 엿보여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두영은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을 충동적으로 저질렀다. 서슴없이 홍승민의 가슴팍을 더듬거리며 제 휴대폰을 꺼냈다. 곧바로 홍승민에게 손목이 붙잡혀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홍승민이 피곤한 어투로 말했다.

“승표는 널 구하려다 방화범을 죽였어.”

홍승민의 손을 뿌리치려던 두영이 멈칫했다.

“아무리 승표가 망나니처럼 다녔어도 사람을 죽인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이 일에 너의 의지가 없었다고 한들, 널 만나고 이런 일이 생겼으면 아무래도 네 책임도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허두영 군은 어떻게 생각하나?”

“…….”

“별로 놀라지도 않네. 그럴 걸 이미 알고 있었나 보지?”

두영은 허공에 뜬 제 손을 매트리스 위로 떨구었다. 놀라지 않은 이유는 언젠간 일어날 일을 결국 맞이한 것 같아서 그랬다. 이 심정을 평범한 단어로 절대 설명 못 했다. 홍승표가 한 일은 단순히 저를 대신한 복수가 아니었다.

구원이다.

누가 죽었고, 누가 죽였는지는 하등 중요하지 않았다.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냥… 승표가 괜찮은지만 확인하고 싶었다. 승표가 보고 싶었다.

갑자기 홍승민이 허탈하게 웃었다. 두영은 엷은 눈꺼풀을 치떴다.

“아… 미안. 우리 형제 말고 승표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솔직히 좀 어이가 없어서.”

그게 뭐가 그리도 웃긴 건지 홍승민이 계속해서 실없이 웃었다. 그러고는 침대에 걸터앉아 허공에 시선을 내던졌다. 두영은 제법 가까이 있는 홍승민이 부담되어 슬쩍 옆으로 떨어져 앉았다. 기다란 침묵 끝에 홍승민이 입을 열었다.

“승표는, 어렸을 때부터 집착이 심했어. 대부분 단발성으로 끝났고 커서는 집착을 보이는 게 차차 없어졌지.”

두영은 홍승표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 관심을 보였다. 때마침 옆을 돌아본 홍승민이 두영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멋쩍은 분위기에 두영은 제 뺨을 쓸었다.

“네 얼굴을 보니 왜 너인지 이해가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하는군. 하지만 승표를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걔는 꽤 제정신이 아니니깐.”

두영은 홍승민의 행동이 헷갈리기 시작했다. 승표와 자신의 사이를 끊어 내려는 건 줄 알았는데 다른 이유로 경고하는 중이었다. 홍승민이 고해성사 같은 말을 덧붙였다.

“승표는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오…애…….”

“오예라고?”

왜라고 말하려 했던 두영은 끊어 말하느라 미국식 감탄사처럼 내뱉었다. 홍승민이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자 두영이 경직된 얼굴로 좌우 90도 칼각을 지켜 고개를 내저었다. 진심을 증명하는 목 각도에 홍승민이 피식 웃었다.

두영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귀를 기울였다. 승표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을 기회였다. 기억력이 좋지 않아 녹음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다못해 종이에 적어 두고 싶었다. 두영이 부담스럽게 쳐다보자 홍승민은 의도적으로 말을 돌렸다.

“할머니 보고 싶지 않나?”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한 두영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홍승민은 집중치료실에 두영을 데려다주고 병원을 떠났다. 결국 두영은 홍승표가 어디에 격리된 것인지 듣지 못했다.

목발을 짚은 두영은 김춘녀에게 걸어갔다. 의식이 없는 김춘녀는 평생 누리지 못한 휴식을 취하는 듯이 편안해 보였다. 일정한 박자로 울리는 기계음 소리가 시계의 초침 소리 같았다. 잊고 있던 꿈이 불현듯 떠올랐다.

파리한 남자에게 밥을 차려 주던 김춘녀는 어딘가 절박했다. 저를 깨우던 박은식도 조급해 보였다. 두영은 숨을 쉬고 있는 지금이 저 혼자서 이겨 낸 상황 같지 않았다. 두 사람의 목숨값을 받은 것 같았다.

박은식이 전처럼 피눈물을 흘리지 않아서 다행이었으나, 왜 저는 데려가지 않고 이주학만 데려간 건지 알 수 없었다.

아직 죗값이 남아 있어서 그런 건가? 그 죗값에 할머니의 목숨도 포함된 건가? 그전에 박은식이 살아생전 절 원망한 적이 있었나? 이주학이 제게 모질게 퍼부었던 말들이 전부 거짓말이었나?

두영은 멀쩡한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기억이 뒤죽박죽이라 머리가 아팠다. 김춘녀의 손에 제 손을 살짝 얹었다. 쭈글쭈글한 손등에 꽂힌 바늘이 얇은 살가죽을 뚫고 튀어나올 것 같았다.

‘미안해. 할머니 미안해.’

두영은 옅은 숨소리로 말했다.

할머니가 다쳤지만, 박은식의 저주가 아니었다. 모두 한심한 저로 인해 일어난 상황이었다. 그동안 박은식이 보일 때마다 달아났던 현실도 결국 스스로 만든 허상일 뿐이었다.

두영은 현실을 보았지만 앞이 깜깜했다. 아직도 박은식의 원망과 이주학의 세뇌에 갇혀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집중치료실에서 나온 두영은 복도 의자에 앉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의식하지 못할 만큼 멍하니 있었다. 얇은 병원복 안으로 서늘한 바람이 들어왔다. 두영은 정면에 있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4월의 눈이 내렸다.

유독 비가 많이 내렸던 겨울이다. 올해 두 번째 보는 눈은 눈발이 제법 거셌다. 두영은 느린 걸음으로 창가 앞에 섰다. 하염없이 내리는 눈은 구름 조각 같았다. 바람이 불지 않아 직선으로만 낙하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어느새 바닥이 새하얘질 만큼 눈이 쌓인 상태였다.

첫눈을 언제 보았더라. 멍청한 머리는 오래 더듬지 않아도 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동사자가 되려 했던 자신을 홍승표가 찾아온 날이었다.

갑자기 가슴이 저렸다. 공허한 듯하면서 가득 찬 느낌이었다. 두영은 충동적으로 출입문을 향해 절뚝절뚝 걸어갔다. 그러나 입구를 지키고 있는 남자들에게 가로막혔다.

“이사님 명으로 나가실 수 없습니다.”

검정 옷을 갖춰 입은 남자가 깍듯한 예우를 보이며 거침없이 길을 막았다. 몸통이 어찌나 크고 우람한지 산발하는 눈 한 조각까지 가리고 섰다.

두영은 반강제로 병실에 돌아왔다. 뒤를 돌아보자 문 아래 틈 사이로 그림자가 일렁거리는 게 보였다. 생각도 하지 못한 감금이었다.

따뜻한 곳에 들어오자 몸이 순식간에 녹았다. 그토록 좋아하는 온기인데 지금은 갑갑하기만 했다. 창문을 열었다. 냉기가 병실 내부로 혀를 날름거렸다.

창밖으로 상체를 내민 두영은 4층 아래를 내려봤다. 그 옛날 충동적으로 올라갔던 이주학의 아지트 옥상이 떠올랐다. 그때는 당장 고달픈 삶보다 바닥에 떨어져 머리가 깨지는 상상이 더 무서웠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지금은 죽음이 아닌 승표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낭떠러지 같은 높이가 별로 무섭지 않았다.

고민은 짧았다. 손등에 꽂힌 바늘을 빼냈다. 대리석 바닥 위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목발 없이 제힘으로만 서자 왼쪽 발목이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 같았다. 상관없다. 이깟 고통은 언젠간 낫겠지만, 승표를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는 게 훨씬 고통스러웠다.

1층 쓰레기를 실은 화물차를 확인하고 창틀을 넘었다. 오래된 건물인지 층마다 두꺼운 턱이 있었다. 그 턱을 밟으며 최대한 옆으로 걸어가 화물차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벽에 붙은 배수구를 잡고 천천히 내려갔다.

맨발로 밟는 시멘트벽은 얼음덩어리 같았다. 손발이 얼어서 통증이 상쇄되는 느낌이었다. 무식하게 벽을 잡아도 아프지 않았다. 그렇게 스스로 위안하며 계속해서 벽을 탔다.

몇 번의 헛발질에 슬리퍼 두 짝이 처참하게 추락했다. 손가락이 바짝 얼어 자신이 힘을 주고 있는지 분간이 안 됐다. 수시로 찾아오는 현기증에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리고 몸이 뒤로 넘어갔다.

“윽.”

무사히 화물차로 떨어졌지만, 잠시 숨이 안 쉬어졌다. 두영은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화물차에서 기어 나왔다. 그 과정에서 또다시 맨땅으로 하찮게 떨어졌다. 두영은 손등으로 코를 문지르고 덤덤히 일어났다. 이런 걸로 울기에는 저는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떨어뜨렸던 슬리퍼를 주워 신고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아 휴대폰을 구걸했다. 꼴이 엉망이라 거부당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쉽게 휴대폰을 빌려주며 두영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두영은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 주고 홍승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몇 번이나 걸었으나, 그는 받지 않았다. 두영은 휴대폰을 돌려주고 허리를 꾸벅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홍승표의 집이었다.

원래는 홍승표가 잘 있는지 확인만 하고 다시 올라갈 생각이었다. 전화를 안 받아도 그러려니 하려고 했다. 그러나 욕심이 생겨 그의 숨소리라도 듣고 싶었다. 이대로 돌아가기 싫었다.

도중부터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발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몇 시간이 걸려 홍승표의 맨션에 도착했을 땐 두영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발이 새파래질 정도로 얼어붙고 입술 각질이 지저분하게 떴다.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빈집이 소름 끼치게 썰렁했다. 그가 집에 없다는 걸 확인하자 가슴이 먹먹했다. 두영은 옷방에서 외투를 대충 껴입고 미련 없이 집을 나섰다.

그러나 막상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한동안 길 잃은 미아처럼 서 있어야 했다. 두영은 혹시 모르는 마음에 달동네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가 재차 멈칫했다. 이제 그곳엔 자신이 돌아갈 집이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두영의 어깨를 톡톡 쳤다. 화들짝 놀란 두영은 뒷걸음질 치다가 다리가 꼬여 넘어졌다. 고개를 들고 앞에 선 이를 확인했다. 맨션 수위였다.

“승표 도련님 찾아요?”

수위는 도련님이라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말했다. 두영은 그를 의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처한 표정을 지은 수위는 두영의 손발에 눈길을 주었다. 깨끗했던 붕대는 핏물과 먼지가 묻어 지저분했다.

“…승표 도련님은 호텔에 있어요. 홍승민 이사님께 내가 말했다고 하지 말아요.”

수위가 말한 호텔은 두영이 지난날 홍승표와 시간을 보낸 곳이었다. 수위는 두영을 일으켜 세워 주고 손에 십만 원을 쥐여 주었다.

“추우니까 택시 타고 가요.”

두영은 손에 쥔 돈을 묵묵히 내려다봤다. 지폐에서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두영은 그를 향한 낯선 경계심을 지우고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경비원이 푸근하게 웃으며 두영을 배웅했다.

택시에 탄 두영은 멀미 때문에 당장 택시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었다. 홍승표의 차를 탔을 땐 한 번도 멀미한 적이 없었는데 이상했다. 뒷자리에 타서 그런 것이라 생각하며 두영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라디오에서 달동네와 관련된 소식이 나왔다. 기자는 부상자 4명, 사망자 1명이 나온 이번 사건을 마약범이 저지른 분신자살이라고 했다. 덩달아 사회 빈곤층 문제를 지적하는 고발이 이어졌다.

창문에 이마를 기댄 두영은 살며시 눈을 뜨고 한강 위의 네온을 눈에 담았다. 이주학은 마지막까지 세상에 큰 해악을 끼치고 떠났다. 영원히 용서받을 수도, 구원받을 수도 없을 것이다.

목적지에 도착한 택시 기사가 두영을 깨웠다. 눈 때문에 차가 막혀 삼십 분 정도 걸리는 거리를 한 시간이 넘어서 도착했다.

택시에서 내린 두영은 당황했다. 사람이 많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호텔 주변에 경호원으로 보이는 덩치들이 드문드문 보였기 때문이다. 두영은 저도 모르게 호텔 출입문 반대편으로 걸었다. 왠지 몸을 숨겨야 할 것 같았다.

건물 외관과 어울리지 않는 제 꼬라지 때문에 사람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걷는 모습조차 부자연스러운 두영은 고개를 푹 숙이고 땀이 찬 손을 겉옷에 문질렀다. 화려한 도심의 별들이 제 모가지를 짓누르는 듯했다.

겨우 별이 닿지 않는 곳에 몸을 숨긴 두영은 벽에 기댄 채 천천히 주저앉았다. 바닥에 쌓인 눈이 빠드득 소리를 냈다. 사람들과 섞이지 못하는 제 모습이 답답했다. 세상은 저렇게 빛으로 가득한데 자신은 함부로 발을 내디딜 수 없을 만큼 앞이 캄캄했다.

두영은 길을 잃고 떠도는 이름 없는 별이었다. 돌아갈 곳은 불에 타서 사라져 버렸다. 사무치게 외로운 이 순간 단 한 명만이 솟구치게 그리웠다.

이만 일어나야 하는데 기운이 없었다. 깔고 앉은 눈과 체온이 비슷해질 때쯤 두영은 거부할 수 없는 자력에 이끌린 듯이 어딘가에 시선을 던졌다. 저 멀리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홍승표가 유일하게 말이 통한다고 했던 벨보이였다.

***

고층 스위트 룸은 사람 한 명 죽은 분위기였다. 홍승표는 손바닥으로 눈두덩을 짓눌렀다. 한쪽 손목에 채워진 수갑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는 탁상 위에 올려진 수갑 열쇠를 보았다. 홍승민이 챙겨 준 것이지만, 미처 풀 생각을 하지 못했다. 손목 피부는 너덜너덜하게 찢어져 옷 소매가 피로 젖었다.

다시 바닥에 시선을 주고 궁상을 떨 때였다.

“수갑 좀 풀지 그래.”

룸 안으로 들어온 홍승민이 말했다. 홍승표는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무언으로 물었다. 홍승민이 어깨를 으쓱이며 수갑을 대신 풀어 주었다.

“그 아이는 깨어났어.”

짙은 안도의 날숨을 내쉰 홍승표가 얼굴을 쓸었다.

“그 애 할머니도 고비는 넘겼고.”

홍승표의 손끝이 멈칫했다. 홍승민은 한쪽 입술을 비스듬히 끌어 올렸다.

“역시. 할머니는 살릴 생각이 없었구나.”

홍승표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살가죽이 벗겨진 손목을 돌렸다. 경찰차 사이드미러를 부수면서까지 달려간 그는 불타는 집에서 두영만 안고 나왔다. 노모를 보았지만 구하지 않았다. 그대로 죽기를 바랐다.

“어디까지 예상했지?”

“휴대폰 내놔.”

“이진우한테 그 애를 맡길 정도면 무슨 일이 생길 걸 미리 알고 있었잖아.”

“허두영이 전화를 안 받아.”

“전화해 봤자 소용없어. 목이 상해서 말 못하니깐.”

턱에 힘을 준 홍승표가 탁자 위에 놓인 컵을 홍승민을 향해 던졌다. 살짝 비스듬히 날아간 컵이 벽에 부딪혀 산산이 조각났다. 튕겨 나간 파편이 홍승민의 한쪽 뺨에 얇은 생채기를 만들었다. 홍승민은 손끝으로 피를 닦아 내며 읊조렸다.

“나한테 화풀이하지 마.”

“저 새끼들 치워.”

고층에 머무는 객은 홍승표 한 명밖에 없었다. 그의 통행을 감시하기 위해 복도에는 열 명의 경호원이 대기 중이었다. 홍승민이 가볍게 비웃으며 말했다.

“네 힘으로 충분히 나갈 수 있잖아. 당장 그 아이한테 달려갈 것처럼 굴었으면서 생각보다 얌전히 갇혀 있는 걸 보니 너도 이 정도로 일이 커질지 몰랐던 거겠지.”

복잡한 속내를 들킨 홍승표는 진한 탄식을 내뱉었다. 정신이 온전치 않은 이주학을 이용해 허두영의 주변을 정리하려 했다. 그 과정에서 녀석이 다치는 건 계획에 없었다.

혹시 모를 위협으로 녀석을 지키기 위해 새벽 일을 사직시키고 이진우를 이용했지만, 전부 무용지물이 되었다. 이주학이 그렇게 나올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제 불찰이었다.

홍승표는 두영을 구하고 나오는 길에 바닥에 드러누운 이주학을 발견했다. 위로 올라오는 구급대원을 보았지만, 그는 참지 않고 달궈진 샷시문에 이주학을 짓눌렀다.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얼굴을 눈 한 번 깜빡이지도 않고 지켜봤다. 그렇게 이주학은 허무하게 죽었다.

홍승표는 분노했고 그 불씨는 그를 말리는 구급대원에게 옮겨붙었다. 뒤늦게 나타난 홍승민의 부하 직원들이 홍승표에게서 두영을 빼앗으려 했다. 그는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악을 썼지만, 기습처럼 날아온 진정제를 맡고 쓰러졌다. 완전히 우리를 탈출한 짐승 취급이었다.

마지막 기억은 들것으로 실려 나가는 허두영의 모습이었다. 머저리 같은 자신은 정신을 놓는 순간까지 녀석의 이름만 하염없이 불렀다.

“그 아이는 사람이야. 네가 함부로 대할 명분은 없어.”

“걔는 내 거야.”

곧바로 홍승표가 대꾸했다. 미간을 모은 홍승민이 팔짱을 끼었다.

“가족은 내버려 둬야지. 너도 있는 가족 그 아이라고 없을 게 뭐야.”

“어차피 허두영 인생에 하등 도움 안 되는 인간이야.”

“그건 네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야. 친인척도 없는 그 아이가 고아라도 되길 바라는 거야?”

“어. 고아였으면 좋겠어. 걘 나 말고 다른 건 필요 없어. 허두영 인생의 중심은 나야. 죽어도 내 손에 죽어야 해.“

홍승민이 복잡한 표정으로 동생을 응시했다.

“너희들은 남이야. 시답지 않은 이유 하나만으로 영원히 안 보는 관계가 될 수 있어.”

“뭘 걱정하는 거야. 나는 걔 안 버려.”

“착각하지 마, 홍승표. 너희는 아직 사리 분별 안 되는 애송이들이야. 내뱉는 말은 전부 일회용에 불가해. 허두영은 결핍이 넘치는 애야. 나중에 어떻게 변할지 몰라. 네가 안 겪어도 될 일을 경험할 수 있어.”

“홍승민 너야말로 착각하지 마.”

단칼에 친형의 말을 끊은 홍승표가 삭막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내가 허두영한테 매달리는 거야. 싫다는 애 억지로 붙잡고 관계를 시작한 건 나라고. 차라리 마음이라도 편하게 허두영이 뇌가 없는 것처럼 살았으면 좋겠어. 나만 찾고, 나한테만 의지하게. 나는 걔 발바닥 핥을 준비 애초에 끝냈어. 아니, 이미 그러고 있어.”

한숨을 삼킨 홍승민이 씁쓸한 얼굴로 읊조렸다.

“여전히 변함없는 개로군.”

약한 진동이 홍승민의 외투 안주머니에서 울렸다. 전화를 받은 홍승민은 건조한 시선을 창밖으로 던졌다. 그를 따라 홍승표도 자연스럽게 창 너머를 내다보았다. 야경과 뒤섞인 눈발이 금빛을 머금고 흡사 별 무리처럼 쏟아졌다.

“정말…….”

홍승민이 휴대폰 화면을 보며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홍승표는 무심코 시선을 돌려 형제의 휴대폰을 보았다. 곧바로 홍승민이 휴대폰 화면을 껐지만, 홍승표는 또렷이 보았다. 건물 벽을 아슬아슬하게 타고 내려오는 두영의 모습을.

홍승표는 서릿발이 치는 표정으로 음산하게 물었다.

“뭐야?”

“이래서 내가 애들을 안 좋아해. 잃을 게 없는 것처럼 행동하거든.”

말을 마친 홍승민이 문을 향해 걸어갔다. 홍승표는 탁자 위에 있는 꽃병을 던졌다. 이번에도 꽃병은 홍승민을 피해 처참히 깨졌다. 그는 동생이 일부러 목표가 빗나가게끔 던지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동생의 괴팍한 성정을 마냥 미워할 수 없었다.

어깨를 으쓱인 홍승민은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반쯤 열린 문틈 사이로 누군가가 서 있었다.

“루, 룸서비스입니다.”

발음을 씹은 벨보이가 자본의 미소를 활짝 띤 상태로 홍승민을 쳐다보았다. 벨보이는 트레이를 끌고 문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의심쩍은 동태에 홍승민은 벨보이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이봐. 우린 뭘 시킨 게 없어.”

“작은 도련님께서 개인적으로 술과 간단한 안주를 주문하셨습니다. 식사는 채끝 스테이크와 고당도 샤인 머스캣이 준비됐습니다.”

멀찍이 떨어져서 듣고 있던 홍승표가 한쪽 눈썹을 까딱거렸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 먹기에는 꽤 무거운 메뉴였다. 그리고 자신은 벨보이에게 따로 무언가를 부탁한 적이 없었다.

식탁에 세팅되는 음식을 가만히 보고 있던 홍승표는 어쩐지 메뉴 선택에 기시감이 들었다. 자연스럽게 직원이 끌고 온 트레이로 눈길이 향했다. 아래 칸은 흰색 천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트레이를 빤히 지켜보던 홍승표는 흰색 천의 미세한 떨림을 발견했다. 그 직후 자연스럽게 동작을 연결하여 트레이를 가리고 섰다. 그러고는 그새 병원 관계자와 연락을 주고받는 홍승민을 향해 말했다.

“허두영 무사히 찾아내.”

경고 같은 말에 홍승민이 피식 웃으며 안주머니에서 약을 꺼냈다. 트레이 위에 턱, 올려놓은 약은 수면제와 항불안제였다.

“술 마시지 말고 이거 먹어. 어제 새벽부터 아무것도 안 먹더니 이제 식욕이 터졌나 보군.”

“피곤해, 나가.”

“그 아이 찾으면 호텔 전화로 연락하지.”

홍승민은 벨보이에게 깨진 유리를 정리해 달라고 부탁한 뒤 룸을 나섰다.

청각을 곤두세운 홍승표는 복도에서 발소리가 영영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엘리베이터의 진동을 몸으로 느낀 그가 곧바로 트레이 앞에 무릎을 접고 앉았다. 성급하게 그러나 조심스러운 손길로 천을 걷어 올렸다.

그 안에 태아처럼 몸을 웅크린 두영이 있었다.

홍승표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어울릴 수 없는 양극의 감정들이 몰아치다가 그 끝에는 불같은 화가 일어났다.

“너 제정신이야? 위험하게 뭐 하는 짓이야? 거기서 떨어지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서 그래? 실수라도 떨어졌으면……!”

트레이에서 튀어나온 두영이 불안해 보이는 홍승표를 와락 껴안았다. 홍승표는 맨바닥에 철퍼덕 앉아 두영을 받았다. 두영은 홍승표의 목덜미에 뺨을 마구 비볐다.

화가 풀리지 않은 홍승표는 두영을 떼어 내고 다그치려 했지만, 두영이 계속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화를 누그러뜨린 그가 진한 날숨과 함께 차가운 두영의 몸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진짜 뭐 하는 짓이야…….”

홍승표의 목소리가 거센 겨울바람처럼 안타깝게 흔들렸다. 두영은 그를 달래 주기 위해 숨소리를 가득히 싣고 말했다.

“보, 고… 싶었, 어……. 보고 싶…….”

“알았어……. 그만 말해.”

그는 대답과 함께 두영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멀뚱멀뚱 서 있는 벨보이를 발견한 홍승표는 턱짓으로 제 코트를 가리켰다. 알아서 팁을 꺼내 가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벨보이는 난처하게 고개를 내젓고 구급상자를 식탁에 올려 둔 다음 조용히 방을 나갔다.

홍승표는 두영의 등 뒤로 빼꼼 나온 발을 보았다. 붕대가 땟국물과 피로 얼룩져 있었다. 그는 두영을 안아 들고 침실로 향했다. 일인용 소파에 두영을 앉힌 그는 맨바닥에 풀썩 앉아 두영의 신발을 조심스럽게 벗기고 다친 발을 살폈다.

화상이라 쉽게 건들 수 없어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런 몸으로 저를 보고 싶어서 찾아왔다는 허두영의 미련함에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문득 뺨에 차가운 손이 닿아 왔다. 고개를 들자 자신을 걱정스럽게 응시하는 호박색 눈이 보였다.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허두영이 아직도 제게 줄 관심이 있다는 사실에 미칠 것 같았다. 목을 가다듬은 홍승표는 차분히 말했다.

“저렇게 유능한 직원을 어떻게 스카웃… 아니야, 말하지 마.”

홍승표는 두영의 목 상태를 떠올리고 스스로 말을 끊었다. 입술을 달싹거린 두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말 안 해 주려고 했다. 그 옛날 미성년인 홍승표에게 술 반입한 걸 신고하겠다고 협박했으니까. 그런 모습은 홍승표에게 보여 주기 싫었다.

그렇다고 제 협박이 통해서 지금 홍승표와 함께 있는 건 아니었다. 허삼혁과 김춘녀 몰래 저금한 전 재산을 직원에게 주고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61만 원은 충분한 값어치를 해냈다. 어차피 먹고 살자고 돈 쓰는 게 아니겠는가? 두영은 당장 그를 봐야 숨이 쉬어질 것 같았다. 얼굴을 봤으니 이대로 헤어져도 후회 없었다.

혼자 생각하고 고개를 주억거린 두영은 주섬주섬 일어나 문 쪽으로 절뚝거리며 걸어갔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홍승표가 뒤늦게 두영의 손목을 붙잡았다.

“어디 가는데?”

그에게 대답해 주려고 소리를 낸 두영은 몸이 들썩거릴 정도로 기침했다. 홍승표가 두영을 부축하고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한참 만에 진정한 두영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뜻을 전했다.

‘돌아갈게.’

“뭐?”

그가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아 다시 말하려고 하는데, 홍승표가 두영을 보지 않은 채 머리를 쓸어 넘겼다.

“어이가 없네. 이렇게 달궈 놓고 그냥 간다고? 가지 마. 여기 있어도 돼. 아니, 그냥 여기 있어.”

홍승표가 두영의 뺨을 감싸고 얼굴을 들어 올렸다.

“응? 가지 마.”

지그시 쳐다보는 다정한 눈길에 두영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렇지만 두영은 끝내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미안해. 할머니가 아직 집중치료실에 계셔. 아직 못 깨어나셨어.’

힘없이 눈을 내리뜬 두영은 찰나에 울적한 표정을 지웠다. 억지로 배시시 웃자 홍승표의 눈썹이 살짝 구겨졌다.

두영은 다음에 또 오겠다고 말하려다가 통장 잔고를 떠올리고 입을 다물었다. 이제 돈이 한 푼도 없었다. 경비 아저씨가 택시비 하라고 준 돈에서 거스름돈만 남았다.

다음 기회가 없을 것 같아 다시 울적해지는 순간, 홍승표의 다친 손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오른쪽 손목을 한 바퀴 두른 상처는 피부 안쪽의 생살이 드러나 있었다.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쥔 두영이 홍승표의 삭막한 표정을 보고 멈칫했다. 이따금 지독하게 쓸쓸해 보이는 홍승표를 볼 때면 두영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불안했다.

두영은 입을 맞추기 위해 까치발을 들었다가 불편한 다리 때문에 턱에 스치고 떨어졌다. 심지어 비틀거리기까지 해서 홍승표가 부축해 줘야 했다. 두영은 민망해서 잽싸게 고개도 숙이고 입술을 깨물었다.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홍승표가 두영을 가볍게 들어 창틀에 앉혔다. 눈높이가 얼추 맞았다. 두영의 등 뒤로 너저분하게 날리는 눈발이 보였다.

“밖에 눈 많이 오잖아. 어떻게 가려고.”

‘버스.’

“지금 시간이면 버스 다 끊겼어.”

홍승표는 두영이 얼버무리는 말들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이진우 부를 테니까 여기서 치료받아. 너 지금 열도 있어서 이대로 못 보내.”

그러면서 홍승표는 두영의 나머지 신발 한 짝도 마저 벗겼다. 두영은 이진우를 부른다는 말에 미적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홍승표의 손목도 함께 치료받으면 된다는 생각에 한시름 놓였다.

눈이 내려서 그런지 주변을 맴도는 공기가 서늘하고 묵직했다. 홍승표는 노을이 깃든 두영의 눈을 조용히 응시했다. 진중한 표정을 지은 그가 조심스럽게 침묵을 깨고 말했다.

“너는…….”

“…?”

“날 믿어?”

왜 그가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는 건지 두영은 알 수 없었다. 어쩐지 그의 분위기가 위태롭게 흔들리는 것 같아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널 믿어.’

덧붙이는 신뢰에 홍승표의 눈빛이 짱돌에 맞은 호수처럼 너울거렸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두영은 그의 말속에 숨은 의미를 헤아리기 위해 이번에는 곧바로 대답해 주지 못했다. 그러자 홍승표가 초조하게 입술을 맞춰 왔다. 두영은 성급한 듯한 그의 입맞춤을 다정하게 받아 주며 널따란 등을 토닥였다.

“믿는다고 말해.”

홍승표가 자욱한 시선을 겹치며 재촉했다. 원하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기다릴 표정이었다.

느린 박자로 눈을 끔뻑이던 두영은 제 뺨을 감싼 홍승표의 손에 스스로 얼굴을 비볐다. 내리뜬 눈을 불시에 치뜨며 흐무러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거리낌 없는 신뢰의 눈빛에 홍승표는 눈이 멀 것 같았다.

“승, 표야.”

두영은 한 자 한 자 천천히 내뱉었다.

“나, 는 이제… 바다, 가 무섭지 않아. 너, 는 내 바다야.”

밤바다를 닮은 홍승표의 눈동자가 술렁였다. 두영은 그의 거뭇한 눈 밑을 엄지로 살살 쓸었다. 점점 목이 풀리는 것 같았다. 절 가엽게 여기는 신이 눈치껏 기회를 준 걸지도 모른다.

“네가, 파도라면… 나는 가만히 서, 서… 쏟아지는 파, 도를 맞을 거야.”

두영은 홍승표의 얼굴을 끌어와 살포시 입술을 포갠 채 덧붙였다.

“나는… 네가 좋아.”

그러니까 네가 매일 행복했으면 좋겠어. 매일 웃었으면 좋겠어.

마지막 말은 갑자기 입술을 맞춰 오는 홍승표 때문에 꺼낼 수 없었다. 키스는 부드러웠다가 난폭해지고, 다시 녹아내릴 듯이 핥아 주며 깊게 여물었다. 한참 만에 떨어진 입술은 서로의 체액으로 젖어 있었다. 홍승표는 두영의 튀어나온 목뼈를 손끝으로 굴리며 낮게 읊조렸다.

“앞으로 무모한 짓 하지 마.”

두영은 장담할 수 없어서 시선을 피했다. 한숨을 내쉰 홍승표가 두영의 뒤통수를 감싸고 눈을 맞췄다.

“네가 죽으면 나는 널 먹을 거야.”

“…….”

“그리고 따라 죽을 거야.”

장난기 한 톨 보이지 않는 눈빛에 두영은 침을 꼴깍 삼켰다. 홍승표는 한 손에 들어오는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한쪽 입술을 비죽 끌어 올렸다.

“저승으로 데이트 가고 싶으면 그렇게 해.”

입천장이 간지러운 협박에 두영은 다시 그의 입술을 머금었다.

“아니… 두영 씨까지 이런 일로 부르면 나 어떡하지? 이런 것까지 홍승표 닮을 필요 없잖아.”

이진우의 우는소리에 두영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붕대를 풀자 곪아 버린 상처가 드러났다.

치료하는 내내 홍승표의 구겨진 미간은 풀어질 줄 몰랐다. 두영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미간을 살살 펴 주었다. 눈이 마주쳐서 민망했지만, 두영은 착실히 할 일을 끝내고 손을 내렸다. 그러자 홍승표가 두영의 손에 깍지를 껴 왔다.

룸 안은 히터 바람으로 따뜻했지만, 이진우의 손가락은 추운 것처럼 오그라들었다. 두영은 이진우의 시선이 의식되어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풀었다.

담백하게 질문하는 건 이진우의 특기였다. 그래서 두영도 자연스럽게 대답해 주고 곧바로 후회했다.

“그 거리를 걸었다고요? 그것도 맨발에 쓰레빠만 신고?”

귓불을 잡아당긴 두영은 홍승표의 눈치를 살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그는 눈썹만 까딱거리고는 두영을 추궁하지 않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이진우가 전자 체온계로 두영의 열을 쟀다. 37도가 살짝 넘었다.

두영은 아까부터 가만히 있는 홍승표가 불안했다. 이진우가 홍승표의 상처를 보지 못하고 그냥 가 버릴까 봐 결국 직접 나서기로 했다. 그의 팔을 잡고 냅다 이진우에게 내밀자 두 사람이 동시에 피식 웃었다. 두영은 왜 웃는지 몰라서 눈을 깜빡였다.

“무슨 짐짝처럼 신체를 주네.”

이진우의 말에 두영은 멋쩍게 팔을 내려놨다. 홍승표가 두영의 뒤통수에 코를 문질렀다. 간지러운 접촉에 두영은 거북이처럼 목을 집어넣었다.

치료를 끝낸 이진우는 물 한 잔도 못 얻어먹고 쫓겨났다. 두영은 그새 열이 제대로 올라 이진우가 놔준 진통제를 맞고 꾸벅꾸벅 졸았다. 홍승표는 두영을 침대에 눕히고 그 옆에 같이 누웠다.

눈썹에 닿을 정도로 자랐던 두영의 앞머리는 불에 타서 쥐 파먹은 것처럼 되었다. 궁핍하게 귀여워 보여 계속 만지작거리게 됐다. 짧은 머리도 잘 어울리는 녀석은 긴 머리도 필히 잘 어울릴 것이다.

가늘게 눈을 뜬 두영은 손에 옆머리를 괸 홍승표를 올려다봤다. 그는 두영의 빈약한 가슴을 토닥이며 낮게 속삭였다.

“어서 자.”

자라는 재촉에도 두영은 몽롱하게 눈을 뜨고 홍승표를 연신 눈에 담았다. 홍승표는 그런 두영의 눈가를 가만가만 매만지다가 살며시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일어나면, 너네 할머니 보러 가자.”

그의 말에 두영은 이상할 정도로 안도감이 들었다. 눈물 한 방울이 옆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베개에 스며들기 전에 홍승표가 입술로 머금었다. 그리고 두영의 귓가에 입술을 붙인 채 잠이 들 때까지 자장가처럼 속삭였다.

해가 뜨면 같이 밖에 나가자.

따뜻한 코트 챙겨 입고.

털신도 신고.

두영은 홀연히 눈을 감았다. 눈을 떠도 혼자가 아니라는 믿음이 저를 달래 주었다. 멀쩡한 손으로 홍승표의 손을 잡았다. 곧바로 손가락을 얽혀 오는 그의 손이 단단 돛을 매단 끈 같아서 안심됐다.

홍승표는 품 안에 온기가 멀어지자 어슴푸레 눈을 떴다. 침대에서 벗어나는 두영의 뒷모습이 보였다.

“어디 가?”

대답이 없는 두영은 기어코 불편한 다리로 일어나서 허공을 멀뚱히 보았다. 홍승표는 침대에 걸터앉아 두영을 뒤에서 껴안았다. 마른 등에 얼굴을 문지르며 물었다.

“왜 그래? 나쁜 꿈이라도 꿨어?”

“…….”

몇 번이나 말을 걸었지만 두영은 대답이 없었다. 뒤늦게 두영의 목 상태를 떠올린 홍승표는 침대에서 벗어나 그를 마주 보고 섰다. 그리고 오싹한 이질감을 느꼈다.

초점이 없는 두영의 눈동자가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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