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녹아내린 서리
두영은 겨울이 다 지나서 동면에 빠졌다. 종일 잠만 잤고 홍승표가 깨우면 겨우 일어나서 배를 채운 다음 또 잠이 들었다. 활동량이 줄어들어 피부는 하얗다 못해 창백했다. 그나마 침대가 통창 바로 아래 있어서 잘 때나마 햇빛을 맞았다.
눈이 부셨던 두영은 베개에 코를 박고 죽은 척했다. 홍승표는 두영이 숨 쉬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두영의 찹쌀 궁둥이를 톡톡 두드렸다.
막 자다 일어난 두영은 포슬포슬했다. 민들레 홀씨 같은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뻗쳐 있었다. 홍승표는 두영의 머리카락을 야무진 도련님처럼 넘겨 주고 둥근 이마에 입을 가볍게 맞췄다.
“산책하자.”
따뜻한 봄볕이 넓은 거실에 가득 들어찼다. 두영은 눈두덩을 문지르며 꾸물꾸물 일어났다. 요새 들어 자주 의욕이 꺾이고 팔다리가 무거웠다. 별것도 아닌 일에 심한 부담까지 느꼈다. 산책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대체로 집 안에서만 거닐었고, 오늘 같은 날씨에는 밖으로 간을 보듯 나갔다.
홍승표는 요 며칠 전부터 두영을 밖으로 이끌었다. 밖에 나가지 않더라도 딱히 신경 쓰지 않던 그였는데 말이다. 두영은 갑자기 변한 그의 행동에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자세히 알게 되면 듣기 싫은 것까지 듣게 될까 봐 매번 물어보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
며칠 전에는 홍승표와 심야 극장에 간 적이 있었다. 사람이 별로 없어서 괜찮았지만, 혹시 몰라 두영은 모자와 이어폰을 꼭 챙겼다. 불안해지면 노래를 듣고 있으라는 홍승표의 제안이었다.
두 사람은 30분의 짧은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홍승표는 훌륭한 솜씨로 오므라이스를 뚝딱 만들었고, 두영은 그가 만들어 준 식사를 야무지게 비웠다. 후식으로는 케이크와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자느라 끼니가 줄어든 두영은 한 끼에 먹는 양이 늘었다. 아무리 먹어도 속이 허했다.
만족스럽게 배를 채우고 나니 다시 졸음이 쏟아졌다. 두영이 입이 찢어지게 하품하자 홍승표가 두영의 궁둥이를 두드리며 양치하라고 부엌 밖으로 내보냈다.
화장실에 들어간 두영은 문을 잠그고 먹은 것을 토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확인하자 핼쑥한 자신이 보였다. 눈이 살짝 붉었고 습윤했다. 어차피 금방 원래 상태로 돌아올 것을 알기에 태연하게 세수와 양치질을 하고 거실로 나왔다.
두영은 햇빛이 드리운 곳으로 향했다. 일광욕하는 고양이처럼 맨바닥에 배를 발라당 까고 늘어졌다. 먹고 바로 누우면 안 되지만, 토했으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눈을 감고 일광욕을 즐기는데 홍승표가 근처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두영은 일부러 모르는 척하고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이 멀쩡해지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왔지만, 홍승표는 워낙 눈치가 빠르니까 조심해야 했다.
며칠째 홍승표 몰래 토했다. 그리고 웃지 않았다. 이렇게 박은식과의 약속을 지키다 보면 앞으로 홍승표가 다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는 척하다 보니 진짜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서늘한 공기가 흩날리는 막연한 저녁이었다. 홍승표의 집은 외벽이 두꺼운 편이라 외풍이 들어오지 않는데 지금은 몸에 한기가 들 정도로 추웠다.
두영은 일어나서 주변을 둘러봤다. 테라스로 통하는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건조해서 뻑뻑한 눈에 힘을 주자 담배를 태우고 있는 홍승표의 뒷모습이 보였다.
문득 그의 뒷모습에서 쓸쓸함을 엿봤다. 세상에 홀로 남아 찬란한 추억을 곱씹는 것 같았다. 두영은 그를 혼자 있게 하고 싶지 않아 테라스로 허둥지둥 나갔다. 홍승표 옆에 조용히 서서 우연인 척 팔뚝을 슬쩍 맞댔다. 그는 두영이 나오는 걸 진작 알아차리고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아직 해가 지면 입김이 나오는 계절이었다. 홍승표는 자연스럽게 두영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뒤에서 껴안았다.
“추운데 왜 나왔어.”
“안 추워.”
안 춥다고 씩씩하게 말한 두영은 홍승표의 체온이 몸에 닿는 순간 따뜻해서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거짓말이 금세 들통난 것도 모르고 두영은 눈을 말갛게 뜨며 홍승표를 올려다봤다. 피식 소리 내 웃은 홍승표는 두영의 볼을 앞니로 갉작갉작 씹고 놔주었다.
두영은 손등으로 홍승표의 침을 닦고 다시 건물 아래에 시선을 던졌다. 찬 바람을 맞다 보니 정신이 말짱해지는 것 같았다.
“읏!”
갑자기 두영의 겨드랑이 사이로 홍승표의 손이 들어왔다. 두영은 간지러워서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홍승표가 두영을 돌려세우고 마주 봤다. 두영은 빠르게 웃음을 갈무리했다.
그는 흐트러진 두영의 머리카락을 이마 뒤로 넘겨 주고 귓바퀴를 어루만졌다. 짙은 눈빛으로 두영의 속내를 읽으려는 것처럼 뚫어지게 시선을 맞췄다.
두영이 불편한 듯이 그의 시선을 피하는 순간이었다. 홍승표가 두영의 턱을 붙잡고 입을 맞췄다. 홀연히 시작된 야릇한 분위기는 지난 며칠 동안 쉼 없이 일어난 상황이었다. 두영은 익숙하게 그의 키스를 받아 주었다. 점점 난폭해지는 입맞춤에 두영의 몸이 뒤로 밀렸다.
홍승표는 두영의 바지를 벗겼다. 속옷은 그가 허락하지 않았기에 바로 맨 엉덩이가 나왔다. 그는 두영의 엉덩이를 받쳐 들고 제 성기를 꺼냈다. 쿠퍼액이 흐르는 귀두를 두영의 구멍에 문지르고 뿌리까지 단번에 삽입했다.
두영은 간신히 그의 목에 매달려 부르르 떨었다. 뒷구멍은 두영이 자는 동안 홍승표가 몇 번 박았기에 풀어 주지 않아도 충분히 그의 성기를 머금을 수 있었다.
턱턱 쳐올려지던 두영은 갑자기 도진 현기증 때문에 팔에 힘이 풀렸다. 홍승표는 두영의 등을 손으로 받치고 땅에 내려 주었다. 그리고 뒤로 돌려 다시 성기를 삽입했다. 난간을 잡은 두영이 힘없이 흔들렸다. 봐주지 않는 홍승표의 거친 몸짓에 정신이 아찔했다.
“흐아, 하읏!”
이번에는 다리에 힘이 풀려 서서히 아래로 무너졌다. 삽입이 느슨해지자 홍승표가 두영의 골반을 쥐고 끌어 올렸다. 두영은 그의 팔목을 잡고 고개를 내저었다.
“아, 흐으……! 너무, 빨라, 아윽……!”
홍승표가 뭉툭한 귀두로 두영이 가장 느끼는 지점만 무식하게 퍽퍽 찍었다. 고개를 아래로 숙인 두영은 제 성기에서 흘러내리는 뿌연 액을 흐린 눈으로 보았다. 눈물도 뚝뚝 떨구었다.
최근 자주 일어나는 야릇한 분위기와 더불어 홍승표는 예전보다 더 거칠게 두영을 안았다. 그가 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저는 거부할 수 없었다. 애초에 안 하는 선택지가 존재하지도 않았다.
홍승표가 두영의 배 앞으로 손을 둘러 일으키고 한쪽 다리를 들었다. 두영은 그의 어깨에 뒤통수를 문지르며 홍승표의 혀를 까치발을 든 채 애틋하게 빨았다. 입에 고이는 침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목뒤로 넘겼다. 얼마 전 그가 공들여 만든 두영의 새로운 습관이었다.
두영은 한쪽 다리로 버티고 서 있기 힘들어 결국 크게 휘청거렸다. 그러자 홍승표가 두영의 반대쪽 다리마저 들어 공중에 띄웠다.
“내 목 잡아.”
홍승표는 두영을 뒤에서 안아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두영은 배 안쪽이 저릿저릿하여 연신 움찔거렸다. 그가 한 보 한 보 내디딜 때마다 안을 가득 채운 살덩어리가 예민한 곳을 쿡쿡 찔렀다. 너무 좋아서 그리고 너무 무서워서 죽을 것 같았다.
홍승표가 소파에 털썩 앉자 그 반동으로 두영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절정에 도달했다. 입을 벌리고 눈을 희멀겋게 뜨자 홍승표가 두영의 가슴에 팔을 두르고 끌어안았다. 그리고 무섭게 퍽퍽 쳐올리기 시작했다.
“아윽! 아! 제발, 제발…….”
애타게 부탁했지만 홍승표는 들어주지 않았다. 두 다리가 그의 다리에 걸려 활짝 벌어졌다. 투명한 액을 분출한 두영의 성기가 위아래로 정신없이 흔들렸다.
어금니를 악문 홍승표는 뜨거운 콧김을 씩씩 내뱉으며 허리 짓을 멈추지 않았다. 두영은 살고자 하는 심정으로 두 발로 소파를 짚고 엉덩이를 띄웠지만, 홍승표가 곧장 두영의 아랫배를 손으로 덮고 꾹 눌렀다.
두영이 내벽을 조이자 그가 거친 욕을 지껄이며 붙잡을 수 없을 만큼 속도를 더욱 빨리했다. 깊은 곳까지 성기를 퍽! 처박은 순간 그가 안타까운 탄성을 내뱉었다. 배 안쪽에 들어차는 정액을 느낀 두영은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방금 사정한 홍승표는 쉬지도 않고 허리를 느릿느릿 움직였다. 두영은 제 몸을 결박한 그의 팔을 잡아 뜯으려 했다. 그러나 한 손에 잡히지도 않는 그의 전완근은 손톱을 세워서 긁어도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올가미처럼 더욱 조여들 뿐, 아래 박힌 살덩어리도 왜인지 몸집을 부풀렸다.
두영은 콧물 때문에 숨이 잘 안 쉬어졌다. 홍승표가 두영의 턱을 잡고 뒤로 돌려 얼굴 전체를 개처럼 핥았다. 두영은 눈을 질끈 감고 그의 그루밍을 받았다. 사람과 하는 키스 같지 않았다.
홍승표는 몸을 일으켜 두영을 소파에 내려 주고 등받이를 잡게 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허리를 세운 두영은 다시 구멍에 들어찬 성기가 전처럼 날뛰기 시작하자 속절없이 무너졌다.
“아아, 아앗! 으응……!”
두영은 진저리 나는 쾌감에 손을 뒤로 뻗어 홍승표의 허벅지를 밀었다. 곧바로 홍승표가 두영의 두 팔을 말고삐처럼 부여잡고 거칠게 드나들었다.
같은 지점을 짧고 굵게 치고 빠지던 그가 두영의 엉덩이 한 짝을 바깥쪽으로 잡아 벌렸다. 성기가 드나들 때마다 꿈틀거리는 내벽이 살짝살짝 드러났다. 홍승표는 그 틈에 엄지손가락을 집어넣었다.
“하, 하지 마……!”
두영이 울먹임을 넘어선 오열을 하며 그를 말렸다. 홍승표는 반항하는 말고삐를 활시위처럼 뒤로 당겼다. 그리고 조금 전보다 더 난폭하게 움직였다. 탄력 있는 허리 짓에 두영의 몸이 보기 좋게 반동했다. 작은 엉덩이가 조르는 듯이 그의 음모에 비벼졌다.
두영의 시야가 뭉크러지고 부예졌다. 수치를 모를 정도로 이성이 헛돌았다. 새끼 짐승이 어미를 찾듯 울부짖자 홍승표도 마찬가지로 본능만 남은 짐승처럼 신음했다.
순간 홍승표는 좆을 끊어 버릴 것처럼 조여드는 구멍에 다급히 두영을 돌아 눕혔다. 두영은 눈동자를 까뒤집고 허리를 발작하듯 들썩였다. 보는 것만으로 사정할 만큼 아찔한 광경이었다.
더운 날숨을 내뱉은 홍승표가 성기를 뿌리까지 집어넣고 큰 원을 그렸다. 두툼한 좆이 내벽 전체를 쓸어 버리자 두영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부들부들 경련했다.
그는 쉴 틈 없이 움직이며 내벽 곳곳을 떡처럼 빻았다. 잘게 움직이다가 몸이 울릴 정도로 철퍽철퍽 박았고, 다시 반원을 그리며 얕게 드나들었다.
상체를 숙인 홍승표가 걸신들린 사람처럼 두영의 입술을 허겁지겁 빨았다. 입에서 나는 게걸스러운 소리가 아랫구멍에서도 비슷하게 울렸다.
한계까지 내몰린 두영은 홍승표의 어깨를 때리고, 머리카락도 뜯었다. 그런데도 홍승표는 두영의 입술을 물고 떨어지지 않았다. 아래를 파고든 성기도 더 깊고 빠르게 들어올 뿐이었다.
할딱이던 두영은 문득 소름 끼치는 감각을 느꼈다. 같은 배 안쪽인데 미묘하게 다른 느낌이었다. 진짜 배뇨감이었다.
“화장, 실…….”
“여기서 싸.”
“그거… 으읏, 아, 냐…….”
“괜찮아, 여기서, 싸…….”
홍승표의 눈빛이 한참이나 돌아 있었다. 더 이상 말이 안 통할 것 같아 두영은 제 몸을 깔고 엎드린 거구에게서 벗어나려고 꾸물댔다. 그러다 몸에 힘이 들어가 그의 것을 힘껏 조여 버렸다. 홍승표의 성기가 꺼떡거리는 게 느껴졌다. 두영은 뇌에 힘을 주고 가까스로 나올 뻔한 것을 참았다.
홍승표도 무언가를 참는 것처럼 턱에 힘을 주었다. 호흡을 길게 내뱉은 그가 두영을 안아 들고 화장실로 직행했다. 변기 앞에 두영을 내려 준 그는 살짝 힘이 빠진 두영의 성기를 손에 쥐고 내리눌렀다. 의미가 명확한 손짓이었다.
두영이 그의 손을 떼어 내려고 하자 홍승표가 두영의 어깨에 턱을 괴고 “쉬이-.”라고 속삭였다. 분명 예전에도 똑같은 상황이 있었다. 그때는 열감기로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이 정도로 창피하지 않았다.
“흐앗! 잠깐……!“
갑자기 홍승표가 두영의 엉덩잇살을 벌리고 삽입했다. 휘청거린 두영이 변기 뒤에 있는 벽을 짚고 가까스로 버텼다. 홍승표는 느슨하게 좆을 들락날락 움직였다. 그러고는 착실하게 두영의 성기를 잡고 손톱을 세워 요도를 자극했다.
“하짓, 마… 안 돼…….”
소변이 찔끔찔끔 나오기 시작했다. 감질나게 움직이던 그의 허리 짓이 한순간에 빨라졌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자극에 두영은 결국 물줄기를 좔좔 쏟아 보냈다. 홍승표는 무너지려는 두영을 뒤에서 꼭 끌어안고 집요하게 관찰했다.
“박아 줘야 싸는 거였네.”
귀두 밑동까지 빼낸 홍승표가 빠르게 파고들었다. 두영의 볼기짝이 홍승표의 치골에 부딪혀 찰지게 흔들렸다. 아무리 애원해도 홍승표는 멈추지 않았다. 두영은 배 안쪽이 저릿저릿한 걸 넘어 내장이 아래로 쏟아질 것 같았다.
“승표… 승표야… 으읏.”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모두 내보낸 두영은 동시에 절정을 맞았다. 불투명한 정액을 변기에 하염없이 떨구었다. 허리가 자기 멋대로 꺾이고 부들부들 떨었다. 개폐하는 구멍이 그의 것을 반복적으로 조였다가 풀어 주었다.
홍승표는 두영의 어깨에 입술을 꾹꾹 누르며 거울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연스럽게 세면대를 짚은 두영은 어쩌다 거울을 보게 되었고, 원근감을 무시하는 홍승표의 덩치에 새삼 기함했다.
기본적으로 홍승표는 골격이 컸다.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근육이 생길 것 같은 몸인데, 그는 그 몸으로 운동까지 즐겨 했다. 군살이 없는 몸은 근육과 지방이 조화롭게 자리했다. 마치 있어야 할 곳에 딱 들어찬 느낌이었다. 말라비틀어진 제 몸과 감히 비교할 수도 없는 완벽한 신체였다.
홍승표는 두영의 한쪽 다리를 들어 올렸다. 두영은 풀린 눈으로 흉측한 살덩어리가 제 구멍을 엉망진창으로 범하는 걸 보았다. 요거트 같은 것이 욕실 바닥으로 투둑투둑 떨어졌다.
문득 시선을 느낀 두영은 눈을 치뜨고 거울 속 홍승표를 보았다. 그는 넋 놓고 아래를 보고 있던 제 얼굴을 한참 전부터 보고 있었는지 곧바로 시선이 맞물렸다.
깊숙이 쳐올리는 그의 얼굴이 한순간 아득히 풀어졌다. 두영은 배 안쪽이 뜨거운 걸로 가득 차는 느낌에 저도 모르게 배를 감쌌다. 언뜻 다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따뜻한 물줄기에 흠칫 놀라 아래를 내려다봤다. 점성 없는 물이 발밑에 웅덩이를 만들었다. 그건 정액이 아니었다.
잠시 굳어 있던 두영은 다시 거울 속 홍승표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는 극상의 쾌락에 허물어진 상태였다. 그의 살짝 벌어진 입에서 더운 날숨을 흘러나왔다. 두영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아래 잔뜩 고인 그의 흔적을 보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 이제… 그만하자…….”
대수롭지 않게 무시한 홍승표는 여전히 성기를 두영의 몸에 깊이 파묻은 채 샤워부스로 들어갔다. 물 온도를 조절해서 틀자 욕실 공기는 순식간에 훈훈해졌다.
또다시 들락날락 진퇴 운동하는 홍승표의 모습에 두영은 기겁하며 벽 쪽에 납작 붙었다. 그러나 바짝 따라붙은 홍승표 때문에 오히려 두영이 납작 눌러졌다.
인권 없는 추삽질에 두영은 처연하게 울었다. 다리가 풀리면 풀리는 대로, 엎어지면 엎어지는 대로 홍승표는 하체만 있는 짐승처럼 성기를 처박았다. 지난 경험을 떠올리면 홍승표는 불만이 있을 때 섹스로 저를 몰아세웠다. 그는 지금 화를 내는 게 분명했다.
“승표야, 무서워……. 우윽, 무섭…….”
홍승표가 키스로 두영의 입을 막았다. 두영은 개처럼 엎드려 있어서 무릎뼈가 아팠다. 그때 홍승표가 두영을 일으켜 세우고 세면대 위에 앉혔다. 다시 마주 보는 자세로 섹스가 시작됐다.
“무서워… 흐윽… 승표야 제발…….”
“무서워?”
말없이 몰아붙이던 홍승표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것만으로 두영은 안심이 되어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 두영은 손등과 손바닥으로 짓무른 눈을 문질렀다. 홍승표는 두영의 눈두덩 위에 입술을 꾹 누르고 떨어졌다.
“무서워도 참아.”
“아래가… 떨어, 질 것 같아…….”
“떨어질 것 같아?”
“배, 배가… 흑… 아파…….”
앵무새처럼 말을 따라 하던 홍승표는 두영의 아프다는 말에 멈칫했다. 그는 두영의 구멍을 손끝으로 건드렸다. 두영은 쓰라림에 얼굴을 찡그렸다. 손을 뗀 홍승표는 세수하듯 얼굴을 쓸며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나는 네가 아프다고 하면 멈추는 게 가능할 줄 알았어.”
“…….”
“근데 더 꼴려서 못 멈출 것 같아.”
홍승표는 두영이 가장 느끼는 지점을 주먹으로 내리꽂듯 퍽퍽 때렸다. 두영은 아픔과 쾌감이 동시에 밀려와 흐느끼며 사정했다. 고작 몇 방울의 정액이 성기를 타고 흐르는 게 전부였다.
일정한 박자로 움직이던 홍승표가 사정 직전에 성기를 밖으로 빼냈다. 한 손으로는 두영의 뒤통수를 받쳐서 끌어당기고 다른 손으로는 좆을 용두질했다.
“헉……! 크읏……!”
정욕이 넘실거리는 탄성이었다. 두영은 얼굴에 정액이 튀어 두 눈을 감았다. 정액 특유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문득문득 얼굴 위로 미끄러운 것이 비벼졌다. 그의 귀두 같았다.
홍승표는 두영의 얼굴에 묻은 정액을 손으로 닦아 주고 그 손을 두영의 입에 집어넣었다. 두영은 머뭇거리지 않고 그의 손가락을 빨았다. 비릿한 맛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두영이 손에 묻은 걸 다 삼키면, 홍승표는 또다시 손에 정액을 묻혀 두영의 입에 넣었다. 얼굴에 묻은 정액을 모조리 삼킬 때까지 의식 같은 행위는 멈추지 않았다.
그의 성기는 배꼽을 향해 수직으로 곧추선 상태였다. 몇 번을 사정해도 식지 않았다. 까만 음모도 너저분하게 살갗에 들러붙었다. 정사를 끝낼 생각이 없는 홍승표는 두영의 엉덩이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시선은 두영에게 고정한 채였다.
그는 일부러 음식 먹는 소리를 내며 게걸스럽게 빨았다. 반죽 같은 허벅지를 한입 가득 물고 다시 구멍을 핥았다. 침이 마찰하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음란했다.
두영은 구멍이 헤벌어질 때까지 그의 것을 품었다. 그리고 홍승표의 입에 정액 말고 다른 것을 싸 본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갈증을 달래듯이 꿀꺽꿀꺽 넘어가는 그의 목울대는 꿈에서도 떠올리기 싫었다.
점심도 아니건만 세상은 어두웠다. 침대에 누워 올려다본 하늘은 회색 구름이 가득했다. 인공적인 벽으로 푸른 하늘을 가린 것 같았다. 얼마 전에 홍승표와 본 <트루먼 쇼>라는 영화 때문에 무얼 봐도 그런 생각밖에 나지 안 났다.
두영은 괜스레 이 집도 세트장이 아닐까, 라는 합리적 의심을 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곧바로 홍승표가 있는 테라스로 향했다.
전화 통화 중이던 홍승표는 밖으로 나오려는 두영을 발견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두영은 멈칫 서서 고개를 갸웃했다. 홍승표가 손에 들고 있는 담배를 두영에게 보이며 까딱까딱 움직였다. 담배를 피우고 있으니 나오지 말라는 의미 같았다.
두영은 허삼혁 곁에서 간접흡연 경력만 20년이 넘었다. 제 폐는 거의 흡연자의 것과 맞먹었다. 그래도 홍승표가 나오지 말라고 했으니까 얌전히 말을 듣기로 했다.
소파에 앉은 두영은 무릎을 끌어안고 홍승표를 바라보았다. 후드를 뒤집어쓴 그의 머리 위로 봄 내음이 묻은 가랑비가 내렸다. 그가 입은 반바지가 약한 바람에 출렁였다.
담배를 꺼뜨린 홍승표는 통화를 하며 유리창으로 걸어왔다. 맞은편에 선 그는 유리창에 입김을 불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두영이 읽기 쉽게 좌우 반전한 글씨는 ‘물 마셔.’였다.
어느새 창 앞으로 다가간 두영은 홍승표를 따라 좌우 반전한 물음표를 그렸다. 뜬금없는 물 타령에 대한 물음이었다. 한쪽 입술을 비스듬히 끌어 올린 홍승표는 다시 입김으로 유리창을 부예지게 만들고 막힘없이 술술 써 내려갔다.
‘너 어제 물 많이 쌌’
딱 거기까지 읽은 두영은 등을 돌리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원래 화장실에 갈 계획이었다. 도망치듯 피신한 기분이라 조금 별로였다.
간단하게 씻고 밖으로 나오자 문 앞에 홍승표가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커다란 머그잔이 들려 있다. 내용물은 맹물이었다. 두영은 애국가를 제창하는 홍승표를 못마땅하게 쳐다봐 주고 물을 꼴깍꼴깍 받아 마셨다. 그의 말대로 수분 부족이었는지 물이 잘 넘어갔다.
“오늘 밖에 나갈 거야.”
두영은 눈을 느리게 끔뻑였다. 나른하게 웃은 홍승표가 두영의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겨 주었다. 어제 본능만 앞선 인간은 어디 가고 평소 다정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어디 가는데?”
“납골당.”
“아…….”
두영은 제 표정을 읽는 홍승표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가기 싫어?”
“아니… 그냥 갑자기라…….”
이상하게 두영은 김춘녀와 거리감이 느껴졌다. 실제로도 함부로 넘을 수 없는 거리감이 생긴 게 맞았다. 그냥… 납골당은 할머니를 보러 가는 것 같지 않았다. 살아 숨 쉬는 할머니가 아니지 않은가.
순간 두영은 자신이 감정이 결여된 로봇이 아닌 건가 걱정했다. 이것도 얼마 전에 홍승표와 함께 본 <아이 로봇>이란 영화의 영향을 받은 것 같았다.
두영은 홍승표가 입혀 주는 대로 옷을 입고 밖에 나왔다. 차에 올라 안전벨트를 맸다. 홍승표는 가는 길에 괜찮은 한정식집이 있다고 거기서 점심을 먹자고 했다. 두영은 한 가지 대답밖에 못 하는 인형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두영을 홍승표가 빤히 쳐다봤다. 두영은 안전벨트를 조몰락거리다가 홍승표를 힐끗 보았다. 시선이 겹치자 홍승표가 낮은 목소리 물었다.
“다른 말은?”
“어…?”
“나한테 하고 싶은 다른 말은 없어?”
두영은 뭐가 있나 생각하다가 하도 떠오르지 않아 홍승표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핸들에 옆얼굴을 기대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두영은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대놓고 긴장했다.
“그런 거 있잖아, 오글오글한 거. 오늘은 차에서 해도 돼요, 아래 빨아 주세요, 입에 싸 주세요, 같은.”
아무래도 홍승표는 ‘오글오글’이란 단어를 잘못 배운 것 같았다. 외국에서 오래 살았다더니 수위가 미국산이었다. 거기다 왜 전부 존댓말인지 이해가 안 됐다. 아직도 나이 차이가 큰 우애 좋은 형제를 포기 못 한 것 같았다.
두영은 국내산 반응을 보여 주기로 했다. 선비처럼 목을 큼큼 울리고 절제된 동작으로 홍승표의 안전벨트를 대신 채워 주었다. 그리고 그의 뺨에 입술을 가볍게 누르고 냉큼 바로 앉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창문에 은은하게 홍승표가 비쳤다, 그는 부담스럽게 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을 감당하지 못한 두영은 창문을 내렸다. 그러자 홍승표가 곧장 창문을 올렸다.
두영은 그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내비게이션에 납골당 위치를 찍어 주었다. 그제야 홍승표는 자세를 바로 하고 내비게이션을 종료했다.
“내비 안 찍어도 돼. 길 알고 있으니까.”
눈썰미가 좋은 홍승표는 한 번밖에 가지 않은 길도 바로 외웠다. 두영은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그냥 ‘응.’이라고 대답했다. 홍승표는 만족스럽게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도착한 한정식집은 고즈넉한 한옥이었다. 두영은 그가 예약해 둔 안락에 방에 들어가 자수가 그려진 방석에 앉았다. 주변을 어색하게 두리번대다가 그를 따라 메뉴판을 펼쳤다. 그러나 글자만으로 무슨 음식인지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분명 한정식이라고 했는데 한국 사람인 자신이 보기엔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이름만 있었다. 구절판은 뭐고, 탕평채랑 신선로도 뭔지 전혀 감이 안 잡혔다. 게다가 가격이 이게 맞는 건지 몇 번이나 확인해야 했다.
홍승표는 몇 번 와 본 듯이 능숙하게 주문하고 송로버섯 전복죽을 추가했다. 두영은 그의 메뉴 선택이 의아해 눈길을 주었다. 그는 죽 같은 식감을 싫어하는 완전한 육식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시선을 느낀 홍승표가 입술 양쪽을 끌어 올리며 눈썹을 까딱였다. 할 말이 있냐는 표정이었다. 두영은 머리를 저으며 메뉴판을 덮었다. 어차피 뭐가 뭔지 몰랐기에 홍승표가 시켜 주는 대로 먹을 참이었다.
얼마 후 상다리가 휘어지게 반찬이 쌓였다. 그리고 송로버섯 전복죽의 주인은 자신이었다. 평범한 죽이라고 생각했는데 한 입 먹어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두영은 느리지만 확실하게 죽을 해치웠다.
식혜로 입가심하고 밖에 나왔다. 바로 납골당으로 갈 줄 알았는데 홍승표가 근처 약국으로 향했다. 혼자 약국에 들어간 그는 제산제와 어린이용 캐러멜을 사 왔다. 약의 주인은 이번에도 두영이었다.
제산제는 식전에 먹는 것이 효과 좋다는 약사의 말에 홍승표는 낭패가 스민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두영은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다. 지금까지 몰래 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가 아는 모양이었다. 두영은 혈관에 위액이 흐르는 것처럼 심장이 쓰라렸다.
홍승표가 짜 주는 약을 받아먹은 두영은 어린이용 캐러멜로 입가심했다. 딸기 맛이었다. 입에 있는 것까지 다 녹여 먹자 꾸벅꾸벅 모가지가 꺾였다. 홍승표는 겉옷을 벗어 두영에게 덮어 주며 말했다.
“도착하면 깨워 줄게.”
“나 안 자.”
“응.”
홍승표는 두영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그냥저냥 대답했다. 두영이 자든 말든 상관없었다. 제 옆에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두영은 말려 올라간 홍승표의 입꼬리에 시선이 빼앗겼다.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간지러웠다. 당장 눈알을 빼서 찬물에 담그고 싶은 정도로.
속절없이 시간이 흘렀다. 두영은 저를 흔드는 손길에 의식이 돌아왔다. 안 잤다고 하기에는 주변 풍경이 심히 달라져 있었다.
좀 전까지 꾸었던 꿈이 방금 일어난 일처럼 생생했다. 두영은 몽롱한 얼굴로 현실을 직시하게 해 주는 홍승표를 보았다. 그는 두영의 눈머리에서 눈곱을 떼어 주었다. 두영은 머뭇거리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꿈에서… 은식이 나왔어.”
언뜻 홍승표의 눈동자가 흔들렸으나, 한순간에 평소 단단한 눈빛으로 돌아왔다. 두영은 저가 착각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은식이가 웃었어.”
따뜻하게.
“따뜻하게…….”
덤덤히 덧붙인 뒷말이 애틋했다. 생각만 하는 것과 직접 내뱉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박은식이 따뜻한 봄볕처럼 웃었다. 피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노끈이 목에 매여 있지 않았다.
어느 평범한 열일곱의 박은식이었다.
“웃고 있었어. 옛날처럼.”
무심코 시선이 갔던 소년의 미소를 그동안 잊고 있었다. 어쩌면 홍승표의 말이 맞을지 몰랐다. 제 죄책감이 박은식을 놓아주지 못했던 것임을.
두영은 물먹은 듯한 다리에 힘을 주고 차에서 내렸다. 가랑비는 멈추었다. 주변을 둘러보는데 어딘가 의아했다. 납골당은 맞았지만, 김춘녀의 유골을 안치한 곳이 아니었다.
뒤따라 차에서 내린 홍승표가 두영의 외투를 여며 주었다. 그제야 두영은 좀 추운 걸 인지했다. 곳곳에 녹지 않은 눈이 보였다. 주차장 옆길에 안내도가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현재 위치는 홍승표의 집과 한참 떨어진 윗지방이었다.
두영은 이상하게 오한이 들었다. 와서는 안 될 곳에 온 것 같아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손발이 빠르게 굳고 약간의 현기증도 돌았다. 그때 따뜻한 손이 두영의 창백한 얼굴을 감쌌다. 긴장이 순식간에 허물어지고 안심이 되었다.
홍승표의 입에서 하얀 숨이 날아올랐다.
“박은식 납골당이야.”
두영은 그의 말에 수만 가지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꿈의 연장선인 건가? 저 하늘은 진짜일까? 무리 지어 이동하는 철새는 드론일지도 몰랐다.
홍승표는 두영의 연한 눈동자를 지그시 바라보며 작은 얼굴을 가만가만 쓸었다.
“이제 현실로 돌아올 시간이야.”
“…….”
“꿈에서 마중까지 나왔으니 당당하게 들어가.”
두영은 속수무책으로 시야가 부예졌다. 뭉뚱그려지는 그의 형체를 더듬으며 눈에 힘을 주었다. 목이 멘 상태로 억지로 대답하자 뚝뚝 끊긴 소리만 나왔다. 두영은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이며,
“응.“
이라고 다시 대답했다.
이제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었다.
그가 있어서 두렵지 않았다.
납골당은 적막이라는 벽돌로 지은 건물처럼 조용했다. 침을 넘기는 소리마저 의식되는 고요함이었다. 원래 두영은 소리 없이 걸었지만, 더 신경 써서 발소리를 없앴다.
홍승표는 한 번 와 본 사람처럼 거침없이 나아갔다. 두영은 그를 따라가면서 주변을 힐끗 둘러봤다. 드문드문 보이는 사람들의 표정이 비슷했다. 허탈해 보이기도 하고, 무덤덤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 그들의 손에 들린 꽃을 발견했다. 두영은 맨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꽃을 사 와야 했던 건가? 두영은 어렸을 때부터 타인의 죽음을 많이 경험했지만, 그들을 보내는 방법은 몰랐다. 그런 건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다.
두 사람을 태운 엘리베이터가 3층에서 멈추었다. 문이 열리고 마침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중년 남성과 마주쳤다. 허삼혁과 비슷한 나이대 같았다.
시선을 겹친 남자가 두영에게 가벼운 눈인사를 건네며 옆으로 길을 터 주었다. 긴장한 두영은 괜히 과장하며 허리를 꾸벅 숙이고 인사했다. 먼저 내린 홍승표가 엘리베이터 문 앞에 서서 두영을 지켜보았다. 두영은 그를 발견하고 머쓱하게 뽈뽈 내렸다.
3층에는 두영과 홍승표 말고 서너 명이 더 있었다. 두영은 문득 제 옷을 내려다봤다. 저들과 비슷한 먹구름 같은 옷이었다. 하늘이 흐리듯 땅 위에도 먹구름이 가득했다.
두영은 갑자기 멈춰 선 홍승표의 등에 얼굴을 박았다. 손으로 이마를 쓸며 고개를 들자 홍승표가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두영은 자연스럽게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 눈길을 주었다.
무해하게 웃고 있는 박은식이 보였다. 한껏 멋을 부리고 찍은 중학교 졸업 사진이었다.
두영은 느린 걸음으로 박은식에게 다가갔다. 한 발짝 남기고 서서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차가운 유리관이 손끝에 스쳤다. 그것만으로 뼛속까지 소름이 돋았다.
뒷걸음질 치다가 등 뒤에 단단한 벽이 닿았다. 움찔 놀란 두영은 냉큼 뒤로 돌았다. 기둥처럼 서 있는 홍승표가 보였다. 그는 두영의 팔뚝을 큰 손으로 덮고 위아래로 살살 쓸어 주었다.
“여기에 너랑 나밖에 없어.”
두영은 주변을 둘러봤다. 어느새 3층은 그와 저밖에 없었다. 만약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였다면 방금 그가 한 말은 경고등이 울릴 정도로 위험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살아 있는 사람은 우리뿐이라고, 박은식은 그저 사진일 뿐이라고 그가 말하고 있었다.
긴장이 조금 허물어진 두영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응. 너밖에 없어.”
두영의 팔뚝을 쥔 홍승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두영은 다시 박은식의 사진을 보았다. 흐무러진 미소가 눈이 부셨다. 찰나에 멈춘 사진은 행복한 순간만 조명했다. 그가 어떤 고통을 받았는지 보여 주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떠난 소년을 불행으로 낙인찍지 않았다.
소년은 이 세상에 살아간 흔적을 몇 장의 사진으로 고스란히 남겼다. 그를 좋은 기억으로 떠올릴 흔적이 이렇게 수두룩한데, 자신은 한 번도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 답답해 자신을 괴롭힐 명분으로 그를 이용한 것뿐이었다.
두영은 갑자기 가슴이 갑갑했다. 홍승표의 옷 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
“이제… 나가자.”
홍승표는 군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납골당 출입문을 향해 걸어가는데 아까 보았던 중년 남성이 출입구에 서 있었다. 한 손에 장우산을 들고 있는 그 모습에 두영은 언젠가 본 듯한 기시감을 느꼈다.
쏜살같이 떠오른 기억에 두영은 멈칫했다. 비 오는 날 학교 중앙 현관에서 저를 기다리던 박은식이었다.
두영은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남자는 지금까지 저희를 기다린 것처럼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모든 장면이 느린 화면처럼 보였다.
두 발짝 떨어진 거리에서 멈춰 선 남자는 우산을 하늘 높이 쳐들었다. 두영은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저를 향해 몽둥이처럼 휘둘러질 거라고 거리낌 없이 예상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두영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시선 아래, 제게 내민 우산이 보였다. 경량 패딩을 입은 남자가 난처하게 웃었다.
“내가 많이 놀라게 했나 보네. 밖에 비가 많이 와요. 이거 쓰고 가요.”
연륜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두영은 남자의 존댓말이 불편했다. 큰소리치고, 탓하고, 모욕을 주는 말이 익숙했다. 그들이 손에 무언가를 쥐는 건 내던지기 위함이지 저에게 친절을 베풀기 위함이 아니었다.
두영이 우산을 받지 않고 가만히 있자 홍승표가 대신 우산을 받았다. 중년 남자가 두영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홍승표가 두영을 가리고 서자 남자는 자신이 무례했다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정말 은식이 말처럼 눈이 호롱이 닮았네.”
두영은 속으로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호롱이. 박은식이 키우던 고양이 이름이었다. 호롱이는 그가 어릴 때 세상을 떠났다. 박은식은 제 고양이를 닮은 두영을 보고,
‘네 눈, 내가 키웠던 고양이랑 닮았어.’
라고 다짜고짜 첫 만남에 말했다. 두영은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고등학교 신종 괴롭힘인 줄 알았다. 그러나 같은 반이 되고, 짝꿍이 되고, 수업 시간에 간신을 몰래 나눠 먹으면서 오해는 눈 녹듯이 사라졌다.
남자는 뒤늦게 자기를 소개했다.
“나는 은식이 아비예요. 은식이가 종종 호롱이 닮은 친구가 있다고 해서 그냥 듣고 넘겼는데, 보자마자 알았어요. 이름이… 두영 씨 맞죠?”
아랫입술을 깨문 두영은 벽 같은 홍승표 뒤에서 나와 정중하게 인사했다. 박은식의 부친도 두영에게 허리를 깊게 숙였다.
“내가 은식이 아빠인 거 알고 있어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두영은 몇 마디 내뱉었다.
“웃는 게… 닮으셔서…….”
그리고 괜히 말했다고 속으로 자책했다. 남자가 ‘웃는 거…….’라며 힘없이 읊었기 때문이다.
추억을 되짚는 남자의 얼굴이 아득했다. 그는 자기 아들의 웃는 얼굴을 눈감고도 떠올릴 수 있을까? 두영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박은식의 아버지라면 다를지 몰랐다. 왠지 남자의 인상을 보니 그럴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원래 아내랑 같이 오는…….”
남자가 말을 하다 말고 홍승표를 보았다. 홍승표가 길어질 것 같은 대화를 끊었기 때문이다. 아쉬운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남자는 패딩 주머니에서 딱지 모양으로 접은 종이를 꺼내 두영에게 건넸다. 두영은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종이를 받았다.
홍승표의 한쪽 눈이 가늘어졌지만, 두영은 종이에 정신에 팔려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은식이가 따로 남긴 유서인데 받는 사람 이름이 안 쓰여 있어요. 큰아들도 자기는 아닌 것 같다고 하고……. 그래서 매번 여기 올 때 유서를 들고 와요. 혹시 그 유서의 주인이 은식이를 보러 오지 않을까 싶어서.”
그 말을 듣는 순간 두영은 손바닥 위에 놓인 종이가 1톤이 넘는 추처럼 무거워졌다.
“제, 제 거가 아닌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박은식의 부친이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오늘 와 줘서 고마워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또 봅시다.”
납골당을 나가는 그의 뒷모습이 씁쓸해 보였다. 홍승표는 남자에게 받은 우산을 근처 쓰레기통에 버렸다. 두영이 좀 놀란 얼굴로 쳐다보자 홍승표는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비가 상부 지방으로 올라왔는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그냥 맞기에는 빗줄기가 좀 굵었다. 우산을 도로 주어 오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그런 두영의 생각을 읽은 홍승표가 재킷을 벗어 두영의 머리 위에 둘러 주었다.
“한 방울도 안 젖게 해 줄게.”
호언장담한 홍승표가 갑자기 두영의 다리를 끌어안고 번쩍 들었다. 그러고는 차로 달리기 시작했다.
홍승표의 어깨에 명치가 눌린 두영은 땅이 까마득해서 그의 옷을 구원 줄처럼 움켜잡았다. 뒤늦게 시선을 들자 납골당이 빠르게 멀어지는 게 보였다. 비가 섞인 바람이 얼굴에 스쳤다. 찰박거리는 뜀박질이 노랫가락 같았다.
홍승표는 두영을 조수석에 태워 주고 본인도 운전석에 올랐다. 그리고 곧장 두영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는 두영의 이마에 몇 방울 튄 빗물을 보고 혀를 찼다. 두영은 불만이 깃든 그의 눈빛에 비 한 방울도 안 젖게 해 준다는 말이 치기 어린 허언이 아니었음을 알아챘다.
시동을 건 홍승표가 납골당을 빠져나갔다.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근처 휴게소에 들렀다. 넓은 곳에 주차한 홍승표가 두영의 주먹 쥔 손을 보며 말했다.
“그거, 이리 줘.”
두영은 제 앞에 펼쳐진 홍승표의 손바닥을 물끄러미 보았다. 자기 물건을 달라는 듯한 뻔뻔한 요구에 하마터면 자연스럽게 건네줄 뻔했다.
옹골지게 주먹을 말아 쥔 두영은 고개를 내저었다. 일순 홍승표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리 줘.”
두영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박은식의 유서를 머뭇머뭇 건넸다. 홍승표는 받은 딱지를 풀고는 숙제 검사를 하듯이 내용을 무심하게 훑었다. 한 장으로 끝나는 유서는 한 면에 몇 줄 쓰여 있는 게 다였다.
두영이 뭐가 마려운 것처럼 굴며 홍승표를 힐끔힐끔 보았다.
“궁금해?”
무덤덤한 물음에 두영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홍승표는 떠오르는 대로 거리낌 없이 내뱉었다.
“널 원망한대. 저주한대.”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두영이 얼음덩어리처럼 굳었다. 두영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우는 것처럼 보였기에 홍승표는 두영의 턱을 잡고 얼굴을 살폈다. 하지만 두영은 그저 허망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등받이에 늘어져 앉아 얼굴을 쓸었다. 짙은 한숨도 내쉬었다. 당장 허두영이 보는 앞에서 종이 쪼가리를 찢어발기고 싶었다.
곁눈으로 본 허두영은 시무룩한 고양이처럼 혼자 슬픔을 참고 있었다. 그 모습에 제산제는 자신이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유서를 두영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두영이 고개를 내저으며 거부했다.
차 시동을 끈 홍승표가 물었다.
“화장실 안 가도 돼?”
“응…….”
“먹고 싶은 건?”
두영은 영혼이 빠져나간 인형처럼 텅 빈 눈으로 제 신발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홍승표는 두영의 상태를 확인하고 차에서 내렸다. 유서는 운전석에 두었다.
편의점에서 물과 몇 개의 달달한 간식을 결제했다. 차에 돌아오자 유서는 두영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는 일부러 두영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차 시동을 걸고 휴게소를 빠져나갔다.
30여 분을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터널을 지나쳐 밖으로 나오자 옆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힐끗 시선을 던졌다. 언뜻 본 종이는 젖어 있었다.
그는 한참을 달리다 갓길에 차를 세웠다. 옆자리 안전벨트를 풀고 두영을 제 무릎 위에 끌어다 앉혔다. 그리고 눈물 콧물로 젖은 녀석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박은식의 유서에는 원망 한 줄 없었다. 허두영에게 용서를 구하는 내용이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