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 봄물에 취하다. (20/20)

20. 봄물에 취하다.

박은식의 납골당에 다녀온 이후 두 사람은 서로 느낀 점을 공유하지 않았다. 두영은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도록 애썼고 홍승표는 두영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 두었다.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었다. 홈바 위에는 홍승표가 해 준 핫케이크와 딸기 샐러드, 흰 우유가 맛깔나게 차려져 있었다. 목뒤로 물을 넘긴 홍승표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이사 갈 거야.”

샐러드를 입에 가득 머금은 두영은 처음 듣는 소리에 멈칫했다.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두영은 실례를 무릅쓰고 다시 한번 말해 달라고 부탁했다. 친절한 홍승표는 한 글자 안 틀리고 또박또박 말했다.

“이사 갈 거야. 그때 말해 줬는데 기억 안 나?”

“어? 언제?”

“그때.”

홍승표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까만 바둑알 같은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두영은 제 기억력을 자책했다.

“모, 못 들은 것 같아. …그때.”

두영은 언제인지도 모르는 ‘그때’를 언급하며 사과했다. 능숙하게 이빨을 깐 홍승표는 기운이 빠진 척 가식을 떨었다.

“뭐야. 나만 기대했어?”

두영은 포크 끝을 입에 물고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는 다시 작은 목소리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홍승표는 그릇이 넓은 인간처럼 관용을 베풀었다.

“괜찮아. 내 말이 별거 아니었나 보지.”

두영은 제 앞접시에 놓인 핫케이크를 포크로 쿡쿡 찔렀다. 시럽이 잔뜩 스며들어 눅눅해졌다. 두영은 목 언저리에 걸린 한숨을 핫케이크와 함께 집어삼켰다. 이 좋은 집을 두고 이사하는 홍승표를 이해할 수 없었다. 계속 여기서 같이 사는 줄 알았다.

“너도 같이 살 집이야.”

“아…….”

두영은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반응했다. 손바닥에 턱을 괸 홍승표가 산뜻한 미소를 지었다.

이사 갈 집 리모델링 확인을 위해 홍승표는 외출 준비를 했다. 두영은 같이 나가는 건 줄 알고 후딱 씻고 나왔지만, 홍승표가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 자리에 홍승민도 있다는 말에 두영은 빠르게 납득했다.

다시 펑퍼짐한 옷으로 갈아입은 두영은 홍승표를 배웅하기 위해 중문 앞에 섰다. 신발을 신은 홍승표가 두영의 젖은 머리카락을 이마 뒤로 쓸어 넘겨 주었다.

“집 잘 지키고 있어. 금방 올게.”

그의 손길을 얌전히 받던 두영은 입을 달싹였다. 할 말이 있는 듯한 모습에 홍승표는 벽에 어깨를 기대고 두영을 쓰다듬으며 기다렸다. 두영은 두 손으로 저를 만지는 홍승표의 손을 떼어 내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감사하다고… 전해 줘.”

홍승표의 형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 주어를 빠뜨렸다. 진작 감사하다고 해야 했는데 정신이 없다 보니 한참이나 미뤄졌다. 홍승표를 볼 면목이 없었다. 그러나 홍승표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두영의 말을 못 알아들은 척했다.

제법 눈치가 생긴 두영은 그의 가짜 모습에 속지 않았다. 그 순간 홍승표가 신발을 신은 채 성큼성큼 안쪽으로 들어왔다. 벽과 홍승표 사이에 갇힌 두영은 그의 얼굴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눈을 감았다, 그러다 입술이 뜯어지는 고통에 눈을 번쩍 떴다. 선명하게 눈을 뜬 홍승표가 보였다.

그의 분위기가 갈피를 잡을 수 없게 서늘했다. 마주 닿은 가슴 사이에 본드가 칠해진 것처럼 아무리 밀쳐도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피를 보고 나서야 입술을 떨어뜨린 홍승표가 두영의 입술을 다정하게 핥았다.

병 주고 약 주는 모습에 두영은 입술을 뻐끔거렸다. 얼핏 조심스럽고 걱정하는 모습이었지만,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됐다. 그는 항상 갑자기 또라이가 됐고, 갑자기 정상으로 돌아왔으니까.

홍승표가 시선을 나른하게 내리떴다. 단순한 동작도 그가 하면 몇 배는 야했다.

“내 입술에도 상처 만들어 줘. 응? 나는 항상 널 어디서부터 발라 먹을까 안달이 났는데 너는 아니야.”

대화 흐름이 막무가내다. 도저히 어디로 튈지 예상할 수 없었다. 맹렬히 질주하는 폭주 기관차 같은 대화는 늘 홍승표가 주도했다. 두영은 주변을 둘러볼 새도 없이 끌려가는 여행객이었다.

두영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까치발을 들었다. 기대에 찬 홍승표가 넙죽 상체를 숙였다. 선물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두 눈까지 꼬옥 감은 상태였다.

그러나 기대했던 선물이 아닌 간지러운 입맞춤이었다. 눈을 뜬 홍승표는 두영의 가는 목덜미를 보았다. 이마에 닿은 작은 접촉으로 살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똑바로 선 두영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손등으로 벅벅 문질렀다.

“잘 다녀와.”

“…….”

“빨리… 와.”

숨소리만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두영은 맨발을 꼼지락거리며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입고 있는 윗옷이 눈치 없이 자꾸 흘러내려 몇 번이나 어깨를 들썩거리며 옷을 추켜올렸다. 홍승표의 옷이라 저가 입기에는 많이 컸다.

그때 홍승표가 두영의 얼굴에 입맞춤을 남발하기 시작했다. 눈도 못 뜰 정도로 격한 반응이었다. 긴 입맞춤이 끝나고 두영은 옷 소매로 제 얼굴을 닦았다. 그의 침이 너무 많이 묻었다.

두영은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는 그를 향해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속 마음은 홍승표를 붙잡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단순히 제 불안한 마음을 달래고자 그를 이용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금방 올게.’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육중한 현관문이 쿵 닫혔다. 제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 같았다. 두영은 공중에 든 팔을 천천히 내렸다. 중문에 기댄 몸이 주르륵 내려가 찬 바닥에 궁상맞게 앉았다. 사무치는 적막이 숨통을 조이는 것 같았다.

고개를 숙인 두영은 저보다 한참 큰 바지에 가려진 제 발등을 내려다봤다. 그의 집에서 입는 옷은 전부 홍승표의 옷이었다. 밖에 나갈 때는 그가 입혀 주는 대로 입었다. 물론 그 옷도 제 옷이 아니었다. 모두 불에 타서 사라졌기 때문에 제 옷은 팬티 한 장도 없었다.

달동네를 벗어나면 저도 평범해지고 긍정적인 사람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꿈속을 헤맬 뿐이었다. 집과 함께 제 영혼도 소실된 듯했다.

겨우내 일정 온도를 유지하는 집이 그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서늘했다. 이사 갈 집은 평범한 장판이었으면 좋겠다. 대리석은 너무 차가우니까…….

무릎을 짚고 일어난 두영은 현기증에 비틀거렸다. 여전히 학습 능력이 부족해 벌떡벌떡 일어나는 습관을 고치지 못했다. 요새는 충분히 밥을 먹는데도 도통 현기증이 나아지지 않았다. 납골당 이후로 안 토하는데 말이다. 이제는 고질병으로 전락한 모양이었다.

거실로 들어온 두영은 시간을 확인했다. 한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요즘 멍만 때리면 시간이 빛처럼 지나갔다. 이러다 빨리 늙어 죽을 것 같았다.

침대에 걸터앉은 두영은 왼쪽 다리를 통통 두드렸다. 다친 다리는 흉터가 그리 심하지 않았고 말짱하게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다만 한번 쥐가 나면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아프지도 않은데 저도 모르게 절뚝거릴 때가 있었다.

치료는 꾸준히 받았다. 의사는 심리적인 요인으로 다리를 저는 것이라고 말했다. 두영은 의사가 제 정신에 문제가 있다는 말을 빙빙 돌려 표현하는 것처럼 들렸다.

두영은 한숨을 쉬는 것처럼 입을 달싹거렸다. 박은식에게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젠 애먼 사람을 붙잡고 저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다리를 주무르던 두영은 코에 침을 묻혔다. 홍승표가 없을 때만 사용하는 민간요법이었다. 진짜 고양이가 왔다 갔는지 다리 저림이 점점 풀리기 시작했다.

혼자서 오두방정을 떨다가 가만히 있으려니 침묵에 잡아먹히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두영은 침묵이란 괴물에게 대항하지 않았다. 팔다리가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아니, 그냥 잠수 중인 것 같았다.

속이 허했다. 발딱 일어난 두영은 냉동고에서 통으로 된 아이스크림을 꺼내 그 자리에 철퍼덕 앉아 포크로 퍼 먹었다. 그러나 얼마 먹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아이스크림이 반이나 녹은 후였다.

고개를 숙인 두영은 물의 부력에 저항하듯 눈을 둔하게 끔뻑였다. 아이스크림 위로 물 한 방울이 뚝, 하고 떨어지는 게 보였다. 천장에서 물이 새는 건 줄 알고 올려다봤지만 천장은 멀쩡했다.

불현듯 두영의 얼굴이 서서히 무너졌다. 두 손으로 얼굴을 덮은 두영은 제 세상만 음소거 버튼을 누른 것처럼 소리 없이 울기 시작했다. 손가락 사이로 바다 같은 짠 물이 고여 들었다.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이도 저도 못 하다가 결국 급살을 맞았다.

한참을 울다가 멈춘 두영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아이스크림을 정리하고 거실로 나왔다. 강박증 환자처럼 햇빛을 피해 그림자만 밟았다. 그러다 빛으로 둘러싸인 침대를 보고 머뭇거렸다. 휴대폰이 침대에 있었다. 홍승표에게 메시지가 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초조해졌다.

그때 기적처럼 구름이 태양을 가렸다. 두영은 냉큼 휴대폰을 손에 쥐고 옷방으로 들어갔다. 창문이 없는 곳은 욕실과 옷방이 유일했다. 두영은 홍승표의 체취로 가득한 옷장에 몸을 구기고 들어가 메시지를 확인했다. 간단하게 답장을 주고 다리를 까딱까딱 흔들었다.

문득 어디로 이사 가는지 궁금했던 두영은 냉큼 메시지를 보냈다. 곧바로 읽음 표시가 뜨고 홍승표에게서 답장이 날아왔다.

[물 좋고 공기 좋은 데]

화면을 터치하는 두영의 손가락이 잠시 멈칫했다. 두영은 고민하다가 ‘바다?’라고 답장했다.

[땡 기회 두 번 남았어]

저도 모르는 새에 스무고개가 시작되고 있었다. 두영은 입술을 오리처럼 내밀고 머리를 굴렸다. 기회를 세 번밖에 주지 않는 홍승표가 야속했다. 신중하게 나머지 기회를 사용했지만, 전부 틀린 답이라 두영은 좌절감을 맛봤다.

그때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 홍승표의 셀카였다.

[참가상이야]

누굴 위한 상인지 모르겠다. 입술을 꾹꾹 깨문 두영은 일단 사진을 저장했다. 새로운 사진을 수집한 기념으로 사진첩에 들어갔다.

대부분 사진은 홍승표가 찍어 보낸 걸 두영이 저장한 것이었다. 그의 셀카도 있었고, 풍경도 있었고, 그날 먹은 음식 사진도 있었다. 홍승표는 대충 찍는 것 같은데 결과물은 항상 은근한 분위기가 있었다.

계속해서 사진을 넘기던 두영은 한 장의 사진에서 멈칫했다. 홍승표가 제 손바닥을 베고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첩에는 자신이 나온 사진이 단 한 장도 없다. 지금 보는 사진처럼 손만 나왔거나 어깨가 살짝 걸린 게 다였다. 이런 식으로 홍승표의 배려를 마주할 때면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를 맞는 기분이었다.

휘몰아치는 기분을 잠재운 두영은 다시 옆으로 사진을 넘겼다. 그러다 펜스테몬 내부를 찍은 사진을 발견했다. 집보다 더 집 같은 곳이었다. 만약 돌아가야 할 집이 있다면 그건 펜스테몬이었다. 이사 가면 다시는 못 볼 수 있었다.

두영은 홀짝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 후드티 위로 점퍼를 걸치고 홍승표가 해 줬던 대로 청바지 밑단을 두 번 접어 올렸다. 휴대폰과 이어폰을 외투 주머니에 집어넣고 집을 나섰다.

오랜만에 혼자 외출하려니 긴장이 됐다. 두영은 홍승표가 준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꽂고 홍승표와 계정이 연동된 음악 앱을 켰다. 그가 만든 플레이 리스트에 들어가 가장 상단에 있는 노래를 재생시켰다. 언제 한 번 홍승표가 불러 주었던 자장가 같은 노래였다. 두영은 한 곡 반복 재생을 눌렀다.

떨어진 벚꽃 잎은 먼지바람과 함께 휩쓸렸다. 이틀 연속 비가 주룩주룩 내렸기 때문에 가로수는 빈약한 초록만 무성했다. 완연한 봄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한 계절이었다.

밑창이 푹신한 신발을 신은 두영은 저 홀로 분홍 바닥을 밟았다.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고 다시 땅을 내려다보았다. 몇 년간 다닌 길인데 어쩐지 처음 걷는 기분이었다. 오묘한 미시감에 두영은 노래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같은 노래를 다섯 번쯤 듣자 펜스테몬에 도착했다. 오후 두 시 반의 햇살이 벽난로 같은 외벽을 내리쬐었다. 여전히 손님이 없는 카페는 독보적인 한가함을 뿜어냈다. 문을 연 것 같은데 어디에도 유재민이 보이지 않았다.

수없이 드나들었던 곳인데 제가 한 짓 때문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했다. 수상한 사람처럼 기웃거리며 들어갈지 말지 망설이는 순간이었다.

“야, 허두영.”

살벌한 부름이 바로 등 뒤에서 들렸다. 유재민의 목소리였다. 그의 한 손에는 편의점 봉투가 들려 있었다. 두영은 냅다 도망치려고 했지만, 반사적으로 손을 뻗은 유재민이 두영의 후드티를 붙잡았다.

뒤로 주저앉은 두영은 뻣뻣하게 모가지를 꺾었다. 햇빛을 가리고 선 유재민이 두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역광으로 서 있는 그의 표정이 정확히 어땠는지 알 수 없었다.

두영은 손님의 신분으로 있는 자신이 어색했다. 유재민은 두영이 자리 잡은 테이블에 진하게 탄 코코아를 쾅! 내려놓았다. 두영이 어깨를 파드득 떨었다. 서비스 정신이 엉망이었다. 그러나 펜스테몬은 손님이 아닌 사장이 왕이었다.

오만한 족제비 같은 남자가 명령했다.

“마셔.”

두영은 고개를 깊이 조아렸다. 면목 없음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유재민은 입으로 ‘씁―.’ 소리를 내며 얼른 코코아나 마시라고 채찍질했다. 두영은 마지못해 코코아를 조심스럽게 홀짝였다. 우유와 코코아 가루 그리고 꿀만 들어가서 아주 진했다. 온도도 두영의 섬세한 혓바닥과 알맞았다.

“유제품이 남자 정력에 안 좋대.”

“풉!”

“자주 먹으면.”

담백하게 덧붙이는 말은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미 지저분하게 분무했으니까.

두영은 허둥지둥 일어나 바 안쪽으로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마른행주를 챙겨 나와 테이블을 닦았다. 옷에 몇 방울 튀었지만 심각하지 않았다. 대신 제 옷이 아니라는 점이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차라리 바지에 튀지…….

바지는 홍승표가 사 준 두영의 옷이었다. 큰 거 입고 돌아다니다가 벗겨지면 안 된다는 이상한 논리로 사 준 바지였다.

유재민이 두영의 맞은편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골반 삐뚤어진다고 평소 다리를 안 꼬는 유재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테이블에 팔꿈치까지 괴었다. 팔꿈치에도 영양 크림을 바르는 그가 감히 하지 않는 두 번째 행동이었다. 이유는 팔꿈치가 까매지기 때문이었다.

두영을 뚫어지게 보던 유재민이 갑자기 말을 쏟아 냈다.

“너한테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자세히 모르니까 일단 뭐라고 하지는 않을게. 그런데 내가 가족처럼 걱정했다는 건 알아줘. 네가 사는 동네에 큰불이 났다는데 너는 갑자기 연락 없이 안 나오고. 그래서 내가 얼마나…….”

말을 하다가 만 유재민이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혈액순환에 안 좋다고 실온에 저장한 물만…….

쾅!

유재민이 두영의 허튼 생각을 끊어 내듯이 유리잔을 거칠게 내려놨다. 두영은 눈을 끔뻑대며 부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갑자기 안 하던 짓만 골라서 하는 유재민이 불안했다. 진짜 지구가 반동강 나는 게 아닌지 걱정됐다.

“그래서 너희 집은 무사해?”

훅 들어온 질문이지만, 두영은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미소도 지어 보였다. 그러나 유리창에 비친 제 얼굴을 보았을 땐 잠시 멈칫했다. 저는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혼자만 웃고 있다고 느꼈나 보다. 웃는 게 이렇게 힘들었던가? 광대 근육이 기능을 상실한 것 같았다.

몇 마디 주고받다 보니 예전 컨디션으로 유재민을 상대할 수 있었다. 우울한 모습은 감추고 괜찮은 모습만 보여 주었다. 할머니가 죽은 것도, 홍승표와 사는 것도 전부 숨겼다. 사장님은 승표를 안 좋아하니까.

두영은 타이밍을 재다가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유재민은 두영을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너무 쉽게 체결된 사직 처리에 오히려 두영이 당황했다. 유재민은 그런 두영을 보며 입술을 삐죽였다.

“왜? 안 붙잡으니까 서운해?”

“아니요…….”

“걔는? 홍차인가 승모근인가.”

“…승표요?”

“어어 그래 걔. 맨날 달라붙어 있을 것처럼 굴더니.”

두영은 홍승표의 이름을 듣자 무심코 시간을 확인했다. 그가 금방 온다고 했는데 정확히 언제 온다고 알려 주지는 않았다. 지금이라도 메시지로 물어볼까 고민한 두영은 그냥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재민이 벌써 가냐고 서운해했다. 두영은 저를 따라 일어난 유재민을 향해 애틋한 시선을 보냈다.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있는 그대로 믿어 주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제 곁에 또 한 명 있었다. 밤하늘처럼 새까맣고, 은하수처럼 반짝이는 눈을 가진…….

빨리 그에게 돌아가야 했다. 승표가 보고 싶어 죽을 것 같았다.

두영은 오는 길에 정리한 말을 천천히 입 밖으로 꺼냈다.

“지금까지 챙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장님이 정말 제 아빠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아빠가 안 된다면 형이라도요. 여기는 제집이었어요. 그리고… 갑자기 잠수 타서 죄송해요. 그달 월급 안 주셔도 돼요. 항상 저 배려해 주셨는데 이기적으로 굴어서 죄송해요. 사장님이 항상 건강하셨으면 좋겠어요. 죄송해요.”

할 말을 모두 내뱉은 두영은 허리를 꾸벅 숙였다. 침묵 속에 유재민이 튼 재즈 소리만 나부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유재민이 두영의 직각으로 구부린 허리를 펴 주며 물었다.

“왜 마지막으로 보는 사람처럼 말해? 다시 여기 안 오려고?”

“저 이사 가요.”

“어디로?”

“물 좋고… 공기 좋은 데요.”

“바다?”

두영은 저와 똑같은 대답을 늘어놓는 유재민이 웃겨 입술을 비스듬히 꺾었다. 그리자 유재민도 이를 활짝 드러내며 웃었다. 두영은 휴대폰 번호를 유재민에게 알려 주었다. 번호를 받은 유재민이 눈썹을 찌푸렸다.

“번호가 바뀌었으니 내 전화를 안 받았지…….“

두영의 옛날 휴대폰 번호를 가지고 있는 그가 중얼거렸다.

유재민의 반응에 덩달아 두영도 제 폴더폰의 존재를 떠올렸다. 안 그래도 집이 불에 타기 전에 휴대폰을 찾으려 했다. 끝끝내 발견하지 못한 휴대폰은 이제 집이 불에 타서 영영 찾을 수 없게 됐다. 그 휴대폰에는 적게나마 할머니의 사진이 있어서 아쉬웠다.

두영은 유재민의 배웅을 받으며 골목을 빠져나갔다. 다시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역시 같은 노래만 들으며 땅을 보고 걸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달동네 초입에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오는 길에 주변을 몇 번 둘러봤는데도 전혀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 그만큼 자연스럽게 몸이 움직였다. 무언가가 저를 이곳으로 이끈 듯했다.

두영은 고민하지 않았다. 수백 개의 계단을 밟고 가파른 언덕을 올랐다. 올라가는 길에 재개발 확정이란 현수막을 보았다. 10년 전부터 나온 말이 드디어 실행되나 보다.

세상은 저 없이도 잘만 돌아갔다. 그러나 전처럼 소외감이 들지 않았다. 슬프지도 않았다. 제 세상의 중심은 홍승표였다. 그로 인해 살아가면 되었다.

폐허처럼 변한 동네 때문에 잠시 길을 잃고 헤맸다. 그러다 공중전화 박스를 발견하였고 그것을 길잡이 삼아 마저 집을 찾아 올라갔다.

정산에 다다른 두영은 무릎을 짚고 숨을 골랐다. 홍승표랑 매일 쉬지도 않고 몸을 섞는데 그건 운동으로 쳐 주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했다. 살짝 억울할 지경이었다.

입으로 호흡하자 텁텁한 바람 때문에 목이 조금 아팠다. 언뜻 매캐한 담배 냄새가 맡아졌다. 피우는 사람이 별로 없는 브랜드의 담배 냄새였다. 저절로 한 사람이 떠올랐다.

두영은 구부린 허리를 천천히 세웠다. 무너진 샷시문 턱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허삼혁이 보였다. 그 옆에는 재떨이로 사용하는 콜라병이 있었다. 김춘녀는 김빠진 콜라를 좋아했다.

허삼혁은 무뢰배이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술에 취해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 인간과 한순간에 공감대가 형성됐다는 생각에 두영은 분노가 치밀었다.

턱을 잘게 떨며 허삼혁에게 다가갔다. 콜라병을 거친 손길로 주워 들었다. 허삼혁이 느릿느릿 두영을 올려다봤다. 오랜만에 상봉한 부자는 서로를 전혀 반가워하지 않았다.

술에 취하지 않은 허삼혁을 보는 건 12년 전 이후로 처음이었다. 어쩌면 지금 자신은 불행한 과거를 미화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나? 그것도 못 하면 제 인생이 너무 박복하지 않나?

그 일만 아니었더라면 사이좋은 관계로 지냈을지 모른다. 엄마도 집을 나간 게 아니라 애초에 없던 것이다. 술은 사람의 정신을 갉아먹었다. 그러니까 허삼혁도… 제 아버지도…….

“뭘 봐. 창놈 새끼야.”

헛된 희망은 진한 자상을 입혔다. 두영은 한때 술이 사람을 변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똑같이 술에 취한 홍승표는 제게 수건을 빌려주었다. 그때 두영은 세상이 저를 속이는 것만 같은 크나큰 배신감을 느꼈었다.

만약 허삼혁이 자기 친우를 죽여 스스로를 좀먹는 벌을 받은 것이라면, 두영은 이주학을 죽인 홍승표의 벌을 대신 받아 줄 생각이었다. 뭐든 홍승표를 위해 해 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두영은 크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바람에 떠밀려진 소리로 아스라이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된 건… 내 탓이 아니야.”

제 아비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잔뜩 있었지만, 수월하게 목구멍이 벌어지지 않았다. 두영은 답답함에도 꾸역꾸역 말을 이었다.

“당신은 그냥… 그렇게 태어났어. 나는 당신 용서 안 해. 할머니 대신 당신이 죽었어야 해. 당신 같은 사람도 사는데… 왜… 왜 할머니가…….”

곧바로 주먹이 날아올 줄 알았는데 허삼혁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두영은 갑자기 초조해져 허삼혁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나, 나는 하나도 안 고마웠어. 그때 당신도 같이 불에 타… 타 버, 흐윽… 타 버려……."

속에서 응어리진 화병을 단번에 쏟아 내려고 하자 목과 눈이 뜨거워졌다. 왜 이리도 저는 어리석을까? 고작 가족이 뭐라고. 저런 인간도 제 아비라고 이렇게 감정이 동요될 필요가 있는 걸까?

허삼혁에게 고마운 건 딱 하나밖에 없었다. 엄마를 만나 저를 낳고, 승표를 만나게 해 준 것이었다. 딱 그것뿐이었다.

내내 허공을 빈껍데기처럼 응시하던 허삼혁이 새하얗게 각질이 뜬 입술을 벌렸다. 그러자 녹슨 쇳소리가 나왔다.

“늙은이 보험비가 얼마인 줄 아냐? 꼴에 엄마라고 사망 보험금은 들고 죽었더라. 돈도 없는 늙은이… 고작 몇천을 누구 코에 붙이라고 시발…….”

두영은 방금까지 뜨겁게 달아오른 안구가 빠르게 메마르는 걸 느꼈다.

추악한 인간의 본능.

어쩌면 제 아비도 이주학이 원래 그렇게 태어났다는 홍승표의 말처럼 원래 이런 존재로 태어난 게 아니었을까. 그런데 자신은 그것도 모르고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던 거다. 죄책감과 희생의 이름으로 가족의 끈을 미련하게 붙잡으면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저 혼자 발버둥 치고 있었던 거다.

그럼 이제 놓아줄 때다. 이제 가족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야 했다. 한 번 인정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두영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남은 생 동안… 우리 어떻게든 보지 마요.”

허삼혁이 늘어난 눈꺼풀을 치뜨고 두영을 올려다봤다. 순간 세포 깊이 각인된 공포가 도사렸지만, 잠시일 뿐이었다.

두영은 제 태고의 섬에서 스스로 걸어 내려왔다. 떠나는 자신을 쳐다보는 아비의 시선이 두려웠으나 도망치지 않았다. 서두르지도 않았다. 그렇게 내려오다가 멈춰 섰을 때는 구멍가게 앞이었다.

반쯤 녹아내린 자판기를 발견한 두영은 그 옆에 쭈그려 앉았다. 눈이 내리는 그날에도 이렇게 앉아 숨을 골랐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처럼 도망치는 것이 아니었다. 시궁창을 스스로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향한 첫 도약이었다.

불현듯 심장의 떨림과 비슷한 진동이 외투 주머니에서 느껴졌다. 홍승표에게서 온 전화였다.

“…….”

―…….

이상하리만치 서로 말을 하지 않았다. 긴장감 없는 신경전은 홍승표가 먼저 백기를 들면서 끝났다.

―…허락 없이 나가지 마.

허락이 있어야 나갈 수 있는지 이제야 알았다. 두영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데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앞으로 허락 맡고 나갈게.”

―거기 왜 갔어.

어쩐지 홍승표는 지금 자신이 어디 있는지 아는 것처럼 말했다. 두영은 제 옆에 내려 둔 빈 콜라병을 보며 대꾸했다.

“이제… 올 일 없을 거야.”

제대로 집을 둘러보지 않았지만, 언뜻 본 외관으로 얻어 낼 게 없다고 판단했다. 건진 거라고는 이 공병이 유일했다.

―울었어?

“아니?”

―목소리가 오늘 본 주식 그래프처럼 처졌어.

가끔 홍승표는 노트북으로 정신없는 그래프 같은 걸 보고 있을 때가 있었다. 주식에 문외한인 두영은 그에게 커피를 타 주면서 힐끔힐끔 훔쳐봤지만, 뭐가 뭔지 몰랐기에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불쌍하게 있다가 누가 주워 가면 어쩌려고 그래?

홍승표의 목소리가 약간의 차이를 두고 양쪽에서 들렸다. 두영은 휴대폰을 얼굴에서 떼어 내고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홍승표가 골목 한가운데 서서 두영을 보고 있었다.

그는 통화를 끊으며 두영에게 터벅터벅 걸어왔다. 두영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제게 다가오는 그를 망연히 보았다. 그러다 자신이 헛것을 보는 건 줄 알고 눈두덩을 문질렀다.

두영의 앞에 불량하게 쭈그려 앉은 그가 공병을 발견하고 눈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고는 일수꾼처럼 껄렁껄렁하게 말했다.

“이거 이거 한 잔이 아니라 한 병 했네.”

정신을 차린 두영이 고개를 내저었다.

“…콜라병이야. 그리고 내가 마신 거 아냐.”

손바닥으로 턱을 받친 그가 한쪽 입술 끝을 비스듬히 끌어 올렸다. 두영은 그가 장난치는 걸 알아채고 고개를 푹 숙였다. 매번 속아 넘어가서 민망했다.

홍승표가 두영의 눈 밑을 엄지손가락으로 쓸었다.

“오늘은 맨발이 아니네?”

그의 말에 두영은 작은 고갯짓으로 끄덕였다.

“응. 맨발 아냐.”

맨발이 아닌 이유는 자신이 스스로 걸어 나왔기 때문이다. 멀쩡한 몸으로 허삼혁에게 벗어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벼랑을 향해 도망친 것도 아니었다. 그냥 홍승표가 보고 싶다고 생각한 게 전부였다.

두영은 머뭇거리다가 홍승표의 오른뺨을 손으로 감쌌다. 홍승표가 두영의 손등을 자기 손으로 덮고 더 깊게 밀착시켰다.

손에 닿은 그의 온기는 따뜻하게 데운 우유 맛이 났다. 품이 많이 남는 코트였고, 뒤꿈치가 벗겨질 만큼 큰 운동화였다.

미성숙한 두영은 변하는 계절을 속수무책으로 맞았다. 망망대해가 아닌 육지에서 맞는 첫봄이었다.

***

두영은 홍승표와 가구점에 들렀다. 침대는 원래 사용하던 걸 계속 쓰기로 하고 다른 가구를 둘러보기로 했다.

홍승표가 소파를 더 큰 것으로 바꿀 모양인지 신중한 얼굴로 소파를 보고 있었다. 솔직히 두영은 굳이 소파를 바꿀 필요가 있나 싶었다. 지금 소파도 큰데 거기서 더 커진다니, 대체 홍승표는 얼마나 환상적으로 늘어져 있고 싶은 걸까.

현명한 두영은 제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저 홍승표를 졸졸 따라다니며 주변을 둘러볼 뿐이었다.

조명이나 장식장 같은 걸 구경하던 두영은 하나의 방 형태로 인테리어 해 놓은 쇼룸을 발견했다. 무슨 방에 소파도 있고, 널찍한 책상도 있고, 회장님 의자도 있었다. 방이 아니라 사무실인 건가? 두영은 은근슬쩍 목을 빼서 명패도 있나 확인했다.

홍승표는 옆으로 슬금슬금 멀어지는 두영을 발견하고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멈칫한 두영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홍승표는 두영이 방금까지 보고 있던 곳에 시선을 주며 물었다.

“저런 방이 좋아?”

홍승표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향하자 눈치 빠른 직원이 쇼룸에 진열한 상품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두영은 프로페셔널한 직원이 대단하면서도 미안하여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냥 봤어.”

하지만 홍승표는 직원의 설명을 들으며 쇼룸 쪽으로 걸어갔다. 회장님 의자에 몸을 늘어뜨린 그가 두영을 보며 자기 허벅지를 툭툭 두드렸다. 자연스럽게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린 두영은 괜히 쇼룸에 있는 침대를 손으로 꾹꾹 눌러 봤다. 아무 생각 없이 건드려 본 건데 푹신함이 장난 아니었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홍승표가 침대에 걸터앉으며 두영을 올려다봤다.

“이건 너무 작고 낮아. 이러면 내가 서서 박기 힘들…….”

두영은 퍼뜩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홍승표가 눈을 부드럽게 휘며 두영의 손바닥을 할짝댔다. 냉큼 손을 뗀 두영은 겉옷에 손바닥을 박박 문질렀다. 뒤에 서 있는 직원이 어떤 얼굴로 보고 있을지 감히 상상하기도 두려웠다.

홍승표는 허벅지 사이에 두영을 세우고 얄팍한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러곤 두영을 빤히 올려다봤다.

“방 가지고 싶어?”

두영은 한 번도 독립적인 방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작은 단칸방에 세 식구가 붙어 자는 게 익숙했고, 또 자신은 혼자 자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 홍승표는 혼자 자는 게 익숙할 것 같아 때때로 눈치를 보게 됐다.

두영은 이쪽 대화에 관심이 많아 보이는 직원을 힐끗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직원이 친절하게 웃었다. 두영은 조금 망설이다가 몸을 살짝 낮춰 홍승표의 귓구멍에 속삭였다. 허리를 감은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너는?”

두영은 홍승표의 어깨에 양손을 올리고 꼼지락댔다. 그가 제 말을 못 알아들은 것 같아 다시금 몸을 낮춰 작게 말했다. 홍승표는 두영에게 귀를 대 주면서 직원에게 필요하면 부르겠다는 눈짓을 보냈다.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할 거야.”

“내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인 두영은 언제부터인가 사라진 직원을 확인하고 속삭이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러자 홍승표가 약간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자취 오래 했어?”

“응.”

깔끔한 단답형 대답이었다. 대화가 이어지지 않자 두영은 괜한 걸 물어본 것 같아 후회했다. 점점 두영의 표정이 진지해지자 홍승표가 가볍게 목을 울리며 웃었다.

“쫓겨나거나 가출한 거 아니니깐 걱정하지 마. 내가 남들이랑 살 부대끼면서 못 살아서 그래.”

그런 것치고 항상 두영에게 살을 부대껴 오는 홍승표였다. 지금도 자기 허벅지에 두영을 앉히려고 힘으로 끌어당겼다.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던 두영은 갑자기 손에 힘을 푼 홍승표 때문에 뒤로 넘어질 뻔했다. 급하게 홍승표의 옷을 덥석 붙잡고 스스로 그의 한쪽 허벅지에 앉아 버렸다.

자연스럽게 두영의 허리에 팔을 두른 홍승표는 납작한 가슴에 이마를 비볐다. 정전기가 생긴 머리카락이 두영의 옷자락에 들러붙었다.

“내가 어떻든 신경 쓰지 마. 신혼부부가 어떻게 각방을 써. 그건 법으로도 금지야. 벌금이 얼마나 센 줄 알아?”

두영은 황당함에 말을 잇지 못했다. 신혼부부라니. 대체 언제부터? 두영은 신혼부부라는 단어에 정신이 팔려 각방이 범법 행위라는 개소리를 듣지 못했다.

반박하려고 입술을 오물거린 두영은 단단한 무언가가 허벅지 뒤에 비벼져 입을 앙다물었다. 홍승표의 눈빛이 한순간에 습한 늪지대처럼 변했다.

두영은 일어나려고 버둥거릴수록 아래가 문질러져 죽을 맛이었다. 기어코 그의 품에서 벗어난 두영은 홍승표를 등지고 멀리멀리 달아났다. 뒤에서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홍승표가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막다른 길로 빠진 두영은 조명으로 가득한 곳에서 멈추었다. 유리 공예와 작은 알전구가 눈이 부실 정도로 수두룩했다. 해가 기운 쪽에 스테인드글라스가 있어서 바닥이 알록달록 물들었다.

두영은 뒤로 돌았다가 홍승표의 아랫도리를 보고 심히 당황했다. 가운데 다리가 눈에 띄게 불거져 있는데 홍승표는 전혀 아무렇지 않아 했다. 외투를 벗은 두영은 재빨리 홍승표의 허리에 둘러 주었다. 그는 가만히 서서 두영이 하는 짓을 지켜보다가 물었다.

“뭐 해?”

뭐 하긴.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두영은 청재킷 소매를 단단히 동여매고 일단 한시름 놓았다. 그의 두 번째 자아를 알아본 이들이 이쪽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민망과 수치는 오로지 두영의 몫이었다.

“저 침대도 살까? 좁은 데서 하면 더 흥분되는 것 같긴 해. 대신 네 공간은 없어. 앞으로 내 공간이 네 공간이고, 네 공간이 내 공간이야. 네가 먼저 결혼하자고 했으니까 나 책임져.”

“…결혼?”

게슴츠레 눈을 뜬 홍승표가 한 발짝도 되지 않는 거리를 좁히고 두영을 내려다봤다.

“나랑만 잔다며. 그게 프러포즈 아니면 뭔데?”

두영은 문득 호텔에서 술을 먹고 자신이 아무렇게 내뱉은 말을 떠올렸다. 곧바로 제 뺨을 찰싹 때렸다. 술은 진짜 웬수였다. 다시는 한 모금도 먹지 않을 테다.

두영의 자학에 눈을 조금 크게 뜬 홍승표가 붉어진 두영의 뺨을 손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픽 웃었다.

두영은 눈을 치뜨고 그를 올려다봤다. 스테인드글라스에 물든 홍승표의 얼굴은 언뜻 경건해 보였다. 기다란 빛이 그의 약지 뿌리에 걸렸다. 눈이 부신 게 보석 같았다.

가구 구경을 끝내고 어제부로 공사가 끝난 집을 함께 가기로 했다. 두영은 이번 방문이 처음이었다. 가는 동안 홍승표는 집에 관해 간단히 설명했다. 집안 대대로 물려받은 집이 무슨 연유로 홍승표의 소유가 됐다는 내용이었다. 오래된 건축물이라 보수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운전하느라 정면만 보고 있던 홍승표가 손을 뻗어 두영의 턱 아래를 간지럽혔다.

“너도 마음에 들 거야.”

두영은 오후 한중간에 걸린 햇빛을 맞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글라스를 낀 홍승표는 몇 배는 성숙해 보여 괜스레 벽이 느껴졌다. 그런데도 두영은 훔쳐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차로 40분 걸려 도착한 집은 정말 그의 말대로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 있었다. 차 안쪽에서 내다본 집은 현대식 디자인이 적절하게 섞인 한옥이었다.

차고와 연결된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곧바로 집 내부가 나왔다. 넓으면서도 어딘가 아늑한 분위기에 기분이 좋아졌다. 마룻바닥 위에 지는 문살 모양 그림자를 보다가 햇빛이 들어오는 통유리로 다가섰다.

초록 가득한 숲의 우람한 나무 사이로 봄 햇살이 쏟아졌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오로라 같았다. 바위에 초록 이끼가 물들었고 평지 저 끝까지 나무로 가득했다. 어쩐지 사람의 손을 타지 않는 곳 같았다.

두영을 뒤에서 껴안은 홍승표는 두영이 무슨 생각 하는지 알고 있는 듯이 말했다.

“사유지야. 가끔 야생동물 지나가는 것도 볼 수 있어.”

마침 가까운 나무 밑으로 야생 토끼가 지나갔다. 서로 다른 차원에 놓인 공간 같아 가슴이 설렜다. 노을로 물든 숲이 어떨지도 기대됐다. 나이테가 보이는 마룻바닥도 좋았고, 은은하게 맡아지는 나무 냄새도 좋았다.

두영이 창에 이마를 붙이고 그 너머를 뚫어지게 바라보자 홍승표가 두영의 손을 잡고 밖에 나왔다. 마주 잡은 손을 보던 두영은 홍승표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조금만 더 들어가면 캠핑하기 좋은 장소가 나와. 나중에 하자.”

고개를 끄덕인 두영은 뒤늦게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좋아.”

느리게 걷던 홍승표가 뒤를 돌아봤다. 그의 입술에 걸린 미소를 발견한 두영은 어쩐지 손마디가 근질거렸다.

홍승표가 말한 장소에 도착했다. 집에서 10분 정도 걸리는 거리만큼 떨어진 곳이었다. 원형으로 아담하게 트인 들판은 그의 말대로 캠핑하기 좋아 보였다.

홍승표는 옆으로 쓰러진 나무에 두영을 앉히고 본인도 그 옆에 앉았다. 기울어진 부분을 보니,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자연적으로 휜 나무 같았다.

두영은 나뭇결을 손으로 쓸었다. 까칠까칠한 촉감이 지문에 묻었다. 이번에는 고개를 들어 저희를 둘러싼 숲을 올려다봤다. 몇 살쯤 됐을지 전혀 가늠이 안 될 정도로 나무가 전부 컸다.

옅은 바람이 두영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두영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주변에 맴돌았다. 낯선 곳에 왔다는 긴장이 완전히 허물어지는 순간이었다.

얼굴에 따뜻한 손길이 닿자 두영은 눈을 뜨고 옆을 돌아봤다. 홍승표가 자신을 빤히 보고 있었다. 그는 화려한 도심보다 흙과 나무가 어울렸다. 이제야 두영은 홍승표의 세상에 오롯이 속해진 기분이 들었다. 이름 모를 고양감에 없는 꼬리가 바짝 서는 것 같았다.

또다시 손이 간지러워 주머니 속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홍승표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다. 망설임은 길었고, 끝은 포기였다. 다음 기회를 기약하자고 두영은 속으로 생각했다.

서서히 해가 기울었다. 아무리 사유지라도 준비 없이 숲에서 보내는 건 위험했다. 노을이 나무 기둥을 통과했다. 순식간에 푸르스름한 어둠이 찾아왔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차에 탔다. 일교차가 커서 두영은 손발이 시렸다. 내부가 따뜻한 차가 반가웠다.

두영은 홍승표와 집에 가서 무엇을 먹을지 의논하다가 불현듯 새집이 아주 외진 곳에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올 때는 낯선 곳에 간다는 긴장감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이제야 알아챘다. 차로 한참 나온 후에야 가로등이 띄엄띄엄 보이기 시작했다.

두영은 제 계획이 틀어진 것 같아서 조금 우울해졌다. 이사를 하면 그곳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얻으려고 했는데 위치가 문제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심지어 마을버스도 안 다니는 것 같았다.

두영은 고속도로에 진입한 홍승표를 힐끔 보았다. 그는 지금 기분이 좋아 보였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 포근한 에너지가 제게 전해졌지만, 동시에 어떻게 할 수 없는 무기력함이 몰려왔다.

두영은 젖은 빨래처럼 조수석에 늘어졌다. 이따금 속이 공허할 때가 있었다. 사방이 이질적이고 저 혼자만 붕 뜬 기분이었다. 당장 혼자 있고 싶다가도 홍승표와 함께 있고 싶었다. 차에서 뛰어내리고 싶다가도 그의 손을 잡고 싶었다.

집에 도착한 후 두영은 말수가 확연히 줄었다. 홍승표는 이따금 우울해지는 두영을 능숙하게 대했다. 옆에 붙어 수시로 말을 걸거나, 그냥 품에 안고 조용히 달래 주는 것이었다. 후자는 주로 두영이 병에 걸린 사람처럼 잠을 잘 때 쓰는 방법이었다.

또 다른 방법은 두영이 모두가 잠든 새벽에 갑자기 세탁기를 돌리거나 냉장고를 정리할 때, 군말 않고 그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일을 거드는 것이었다.

이제 이 집에 두영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은 없었다. 마른 수건을 개는 방식도, 설거지를 하는 순서도, 해가 드는 날 테라스에서 이불을 말리는 의식도 홍승표는 맹종하는 신자처럼 따랐다.

어느 순간부터 서로가 서로의 종교였고 신이었다. 두영은 홍승표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비록 거룩하지 않더라도 마음에 새겼다. 홍승표는 두영을 신성한 존재처럼 가꾸었다.

이미 그런 행동이 습관이 된 두 사람은 조금도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 이들에게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만약 반기를 든 사람이 나타나면 홍승표는 반기를 든 이의 머리를 돌로 칠 것이다. 그리고 제 신을 저만 보이는 곳에 가둘 것이다.

홍승표는 두영의 우울함이 평생 낫지 않기를 바랐다. 자신이 주는 빛과 물 없이는 살 수 없기를 원했다. 가슴살을 벌려 제 속내가 얼마나 시꺼멓고 음습한지 녀석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그러니 녀석이 그만 박은식의 굴레에서 이만 벗어나 맑게 웃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허두영이 한없이 부족해 섹스하고, 또 섹스했다. 녀석과 하는 섹스는 지난날 배설뿐이었던 섹스와 달랐다. 떨어진 영혼을 하나로 잇는 행위였다.

욕실에서 한 번의 정사를 하고 나온 후 홍승표는 침대에 누워 두영을 제 몸 위에 엎어 놓고 제 성기를 빨게 했다. 눈앞에서 낭창낭창 흔드는 두영의 엉덩잇살을 두 손으로 쥐고 밖으로 벌렸다가 안쪽으로 모으는 짓을 반복했다.

깊숙이 싸 둔 정액이 틈을 비집고 새어 나오는 게 보였다. 홍승표는 두영의 엉덩이를 찰지게 때렸다.

“허리 세우고 구멍 조여.”

두영은 검붉은 살덩어리를 입에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쭙쭙 빠는 소리가 홍승표의 귓가에 닿았다. 그는 오므라지는 구멍을 빤히 쳐다보며 엄지로 그 위를 쓸었다. 손끝을 살짝 머금는 게 귀여웠다.

그런 애틋한 마음과 달리 그는 일말의 자비도 없이 구멍을 세 손가락으로 난잡하게 쑤셨다. 앞으로 포복하는 두영의 등허리를 한 팔로 감싸 안고 아예 얼굴 위에 끌어다 앉혔다. 쩝쩝거리며 아래를 추잡스럽게 핥아 먹자 녀석이 야릇한 숨소리로 흐느꼈다.

홍승표가 혀와 손가락을 같이 사용해서 구멍을 눅눅하게 만들었다. 이미 한 차례 박고 난 후라 이렇게까지 적실 필요는 없었다. 손가락 마디를 구부리며 안쪽을 헤집었다. 손등까지 쑤셔 넣고 손목을 빠르게 털었다.

“아……! 아윽……!!”

홍승표는 사정이 임박한 두영의 성기를 입에 머금었다. 먹기 좋게 부푼 성기 끄트머리를 강하게 빨자 입 안에서 정액이 터졌다. 발작하듯 들썩이는 녀석의 궁둥이를 꾹 눌렀다. 숨쉬기 약간 버거웠지만, 허두영의 체취가 가득해서 이대로 정신을 잃어도 황홀할 것 같았다.

한 손으로는 여전히 녀석의 구멍을 요란하게 헤집었다. 찰팍찰팍 내벽을 뒤집다가 밖으로 손을 빼내자 기다란 타액이 거미줄처럼 손가락에 얽혔다.

절정의 문턱을 넘은 녀석은 저가 지금 어디에 앉았고, 어디에 엉덩이를 비비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허두영이 스스로 허리를 흔들며 제 콧등에 고간을 문지르는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입술 끝을 말아 올린 홍승표는 뽀얀 엉덩이에 이빨 자국을 남기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두영은 저절로 엉덩이를 치켜든 자세로 엎어졌다. 노골적으로 드러난 구멍이 벌름벌름 숨을 쉬었다.

침대에서 내려온 홍승표는 두영의 팔뚝을 잡고 제 아래로 끌고 와 바로 눕혔다. 배꼽 위로 솟은 음경을 용두질하며 두영의 입술을 빤히 보았다. 두영은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몰라 멍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그러다 제 입술을 훑는 손길에 두영은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홍승표는 두영의 가느다란 목을 다정하게 쓸어 주며 말했다.

“어디까지 들어가도 괜찮은지 말해.”

강인한 손아귀가 두영의 입에서 목으로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래턱을 지나 울대뼈를 걸쳐 좀 더 아래로 내려간 순간, 두영이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홍승표의 길쭉한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욕심부리기는.”

비스듬히 입술을 끌어 올린 홍승표가 성기를 아래쪽으로 내리눌렀다가 놓았다. 용수철처럼 튕겨 올라간 성기는 아랫배에 부딪혀 딱! 소리가 났다. 어마어마한 강직도였다.

두영은 문득 제 목구멍이 뚫리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지금까지 뚫리지 않은 아랫배를 떠올리고 걱정을 접기로 했다. 게다가 홍승표는 저를 다치게 두지 않을 것이다.

두영은 어린아이 주먹만 한 귀두를 입에 머금고 오물거렸다. 한쪽 뺨이 욕심쟁이 햄스터처럼 튀어나왔다. 별로 입을 쓰지도 않았는데 벌써 턱이 아렸다.

뭉툭한 성기가 천천히 목구멍을 벌리고 들어왔다. 깊이를 가늠하는 것처럼 홍승표가 느린 허리 짓으로 왔다 갔다 움직였다. 저절로 두영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눈꼬리에 맺힌 눈물이 귓가에 스쳤다.

폭력적인 흥분을 참아 낸 홍승표가 두영의 눈물을 닦아 주고 말했다.

“힘들면 나 때려.”

한쪽 발을 매트리스에 올린 홍승표가 두영의 목 아래를 움켜잡았다. 자세를 잡고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침대 아래로 머리가 젖혀진 두영의 목이 복어처럼 부풀었다가 꺼졌다.

착실하게 두영이 짚어 준 곳까지 들어가던 홍승표는 성기를 깊숙한 곳까지 처박아 놓고 움직이지 않았다. 버둥대는 두영의 몸통을 힘으로 제압하고 정신이 나갈 것처럼 조이는 구멍을 음미했다. 그는 피가 몰려 빨갛게 물든 두영을 얼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조금만 참아.“

그러고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영의 목구멍에서 부컥부컥 소리가 났다. 묵직한 고환이 작은 얼굴에 탁탁 부딪혔다. 두영이 손톱을 세워 홍승표의 허벅지를 살쾡이처럼 긁었다. 그러나 홍승표는 멈춰 주지 않았다.

사정이 임박한 순간 홍승표는 성기를 빼냈다. 목 안쪽에 정액을 반쯤 쏘아 올린 성기가 밖에 나와서도 두영의 얼굴 위에 걸쭉한 흔적을 남겼다.

두영이 몸이 들썩일 정도로 기침했다. 홍승표는 두영을 소중하게 안아 들고 달래 주었다. 두영의 입 가장자리가 살짝 찢어져 분홍 살이 피어났다. 범람하는 소유욕과 애틋함에 아래 열기가 사그라지지 않았다.

두영을 바르게 눕힌 홍승표는 아랫구멍에 제 성기를 물렸다. 느긋하게 드나들며 녀석의 얼굴에 입술 도장을 꾹꾹 남겼다. 눈물 콧물로 젖은 두영이 입을 오물거리며 입맞춤에 응했다. 홍승표는 누군가가 제 심장을 직접적으로 간지럽히는 것 같았다.

“흐으… 콜록…….”

“목 아파?”

그가 일부러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물었다. 눈을 끔뻑인 두영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홍승표의 목을 끌어안았다.

“아, 니…….”

잔뜩 해진 목소리로 울먹이며 대답했다. 서럽지만 곧 죽어도 아프다는 소리를 안 했다.

홍승표는 허공에 달랑거리는 두영의 다리를 제 허리에 둘렀다. 귀두만 간신히 걸친 채 뿌리까지 한 번에 박아 넣었다. 연속으로 퍽퍽 들이박자 두영이 시트를 움켜쥐고 흐느꼈다. 홍승표는 덜덜 떠는 두영의 두 손에 깍지를 끼고 머리 양옆에 잡아 눌렀다.

눈가가 시뻘게진 두영이 홍승표의 입술을 찾았다. 홍승표는 못 본 척 아래만 움직여댔다. 부푼 내벽을 성기로 거칠게 쓸고 지나가자 두영이 소리도 못 내고 입술만 뻐끔거렸다. 예민한 지점을 쾅쾅 찍어 누르자 이번에는 경련하듯 몸을 들썩였다.

빠듯하게 조이는 구멍에 성기가 끊어질 것 같아 홍승표는 미간을 찌푸렸다.

“힘, 풀어……. 못 움직이겠잖아.”

홍승표가 허리 짓을 멈추자, 백치처럼 침을 흘리던 두영이 스스로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움직였다.

“빨리… 승표야 빨리…….”

쇳소리로 보채며 구멍도 움찔움찔 조였다. 어금니를 깨문 홍승표는 두영의 엉덩이 밑에 손을 집어넣고 고정판처럼 붙잡았다. 그리고 퍽! 처박았다.

“아아……! 흐으읏……!”

눅진한 안쪽을 추삽질 하자 맞닿은 살 주변으로 물이 번졌다. 철퍽철퍽 부딪치는 소리가 새삼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움직여 달라고 한 주제에 두영은 까무러치게 저항하며 벗어나려 했다. 홍승표는 두영의 입술을 부드럽게 머금고는 거친 몸짓으로 박아 올렸다. 그럴 때마다 가벼운 몸이 자꾸만 위로 올라갔다.

그는 두영의 두 다리를 어깨에 걸치고 깊게 밀착했다. 그걸로 모자라 두영의 정수리를 손으로 감싸고 위로 더 못 올라가게 했다. 몸이 반으로 접힌 두영은 납작 눌려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으윽! 이거, 싫, 아, 아읏……!”

“응… 알았어…….”

쾌감에 눈이 먼 홍승표는 대충 대답해 주고 두영의 입술을 물고 빨았다. 구멍을 난폭하게 드나드는 성기가 최대치로 부풀었다. 예민한 지점을 거리낌 없이 치고 빠졌다.

두영은 가만히 있어도 갈 것 같은데 홍승표가 내벽을 거칠게 긁고 지나가서 미칠 것 같았다. 눈에 힘이 풀리고 턱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힉, 흐아, 아, 하윽……!”

“하아… 아아……!”

찌푸려진 홍승표의 얼굴이 절정에 도달한 순간 멍해졌다. 부드럽게 아래를 움직이며 남은 정액을 모조리 두영의 몸 안쪽에 사출했다. 근육으로 뭉친 몸 위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굴러떨어진 땀은 짙은 음모를 적셨다.

열이 오른 두영의 몸은 관절이 있는 곳마다 채도가 진해져 먹음직스럽게 익은 과일 같았다. 그는 제 손안에 있는 과일을 쩝쩝대며 먹었다. 가슴 위에 솟은 돌기를 깨물고, 유륜째 흡입하고, 혀끝으로 톡톡 건드렸다. 두영은 끈질긴 후희에 연신 몸을 움찔거렸다.

가슴에 자국을 잔뜩 남긴 그가 기습하듯 두영의 겨드랑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깜짝 놀란 두영은 냉큼 팔을 오므렸다. 그런데도 홍승표는 억지로 파고들어 걸신들린 듯이 겨드랑이를 핥았다. 두영은 간지러워서 눈물을 흘리며 비명을 질렀다. 그 속에 홍승표가 그토록 듣고 싶었던 소리가 섞여 있었다.

맞물린 성기를 뭉근하게 비비자 두영이 울먹였다. 입꼬리가 말랑하게 올라간 상태였다. 홍승표는 갈증에 시달린 사람처럼 두영의 입술을 척척하게 핥았다. 그러다 두영이 조용해지면 다시 겨드랑이에 얼굴을 파묻고 지저분한 소리를 내며 빨았다.

체모가 부족한 몸은 어딜 빨아도 맛있었다. 땀까지 달큼한 맛이 났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중독자의 마음이 이해되었다.

“그만… 간지러, 읏…….”

웃음기가 스민 목소리에 홍승표의 성기가 꺼떡거렸다. 두영은 내벽이 벌어지는 감각을 느끼곤 눈을 크게 떴다.

“왜, 왜 커지는…….”

“왜 안 웃는 척해?”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그의 냉소적인 말투에 두영은 당황했다.

“무슨…….”

“왜 곧 죽을 것처럼 안 웃어?”

“…….”

“묻잖아. 왜 웃다가 마는지.”

두영은 눈물이 가득 고인 눈을 끔뻑였다. 굵은 물줄기가 관자를 타고 흘러내렸다. 살며시 입술을 끌어 올렸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고 매섭게 추락했다. 홍승표는 안타까운 추락을 눈에 담으며 말을 이었다.

“행복해지지 않겠다는 약속… 언제 철회하는 거야?”

홍승표가 저와 박은식이 했던 약속을 거론했다. 사실 그 약속엔 박은식은 없었다. 스스로 함몰되길 바랐던 두영이 저 홀로 다짐한 약속이었기에.

“나는 많이 기다려 준 것 같은데.”

홍승표는 미간을 구겼다. 둘만의 시간에 타인의 존재가 끼어드는 건 상상 이상으로 기분이 더러웠다. 그는 화풀이 비슷한 몸짓으로 성기를 쳐올렸다. 거친 추삽질에 두영의 내벽이 수축하며 움찔거렸다. 성기가 무자비하게 조여들자 홍승표는 턱에 힘을 주고 간신히 사정을 참았다.

그의 어깨에 걸린 두영의 두 다리가 진득한 쾌감에 가만히 있지 못했다. 벗어나려고 몸부림치자 홍승표가 다시 성기를 꿰어 넣고 내벽 깊은 곳을 거세게 두드렸다.

“아흣……! 제발… 젭, 흐아, 그만……!”

두영의 얼굴을 뚫어지게 내려다보던 홍승표가 가라앉은 시선으로 말했다.

“왜 안 웃어? 아직도 내 앞에서 행복하면 안 돼?”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두영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스스로 잘 안 웃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유가 홍승표에게 상처가 될 줄은 몰랐다. 지금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이 조금 지쳐 보여 심장이 후벼 파이는 것 같았다.

두영은 기운이 빠진 팔을 힘겹게 뻗어 홍승표의 얼굴을 가슴에 품었다. 그의 정수리에 입술을 맞추고 땀으로 젖은 등을 가만가만 쓸었다.

“미안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눈을 가늘게 뜬 홍승표가 팔다리에 힘을 풀고 두영의 몸 위에 온전히 엎어졌다. 뿌리까지 깊숙이 박아 넣은 성기를 뭉근하게 비볐다. 축축하게 젖은 두영의 엉덩이에 그의 고환이 찐득하게 달라붙었다. 그것마저 하나의 자극이었다.

잠에서 깬 두영은 당황하여 눈을 질끈 감았다. 뒤에서 껴안듯이 잠든 홍승표의 그것이 아직도 삽입된 상태였다. 의식하자마자 배 안쪽이 저릿저릿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홍승표가 깰 것 같았다. 두영은 눈곱도 떼지 못하고 허리에 올려진 홍승표의 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앞으로 꼼질꼼질 기어가 무사히 매트리스 밖으로 빠져나왔다. 홍승표를 힐끗 살폈다. 다행히 그는 천사 같은 얼굴로 자고 있었다.

그때 뜨끈한 무언가가 다리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두영은 급한 대로 엉덩이 사이를 손으로 틀어막았다. 반대 손으로는 그새 오금까지 흘러내린 정액을 쓸어 올렸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마땅히 닦을 만한 것이 보이지 않아 대충 배랑 엉덩이에 문질렀다. 무의식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그 순간 꺼림칙한 눈빛이 느껴졌다. 두영은 부자연스럽게 뒤를 돌아봤다. 홍승표가 별이 박힌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는 밤하늘의 배경과 완벽히 동화한 상태였다. 두꺼운 구름이 달을 가려 달빛 한 조각 없었다.

흑표범이 기지개를 켜듯이 일어난 홍승표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두 팔을 두영에게 길게 뻗으며 손을 까딱였다.

“이리 와. 추워.”

저도 모르게 다가간 두영은 몸에 묻은 것을 떠올리고 멈칫했다.

“더러워서…….”

“안 더러워. 내가 더러워?”

그의 말은 자기가 싼 정액이 더럽냐는 의미였다. 얼떨결에 고개를 내저은 두영은 아차 했다. 뒤늦게 그의 수에 말려들었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그의 한쪽 허벅지에 앉은 후였다.

“그니까 왜 뺐어. 못 나오게 막고 있었는데.”

홍승표가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두영의 어깨에 입술을 비비며 개소리를 시전했다. 두영은 하마터면 시선을 내려 코르크 마개 역할을 한 그것을 눈에 담을 뻔했다. 뇌에 힘을 줘서 참은 자신이 대견했다.

춥다고 한 홍승표의 말이 거짓이 아닌지, 두영은 서늘한 공기에 부르르 떨었다. 홍승표는 등 뒤에 있는 이불을 끌고 와 두영과 함께 덮었다. 그는 씻을 생각이 전혀 없어 뵀다. 시답잖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흘러가는 시간을 손 놓고 보냈다. 전혀 아깝지 않은 시간이었다.

두영은 홍승표의 눈썹 산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그가 손을 탄 짐승처럼 지그시 눈을 감았다. 까치집 진 머리는 홍승표의 나른한 분위기를 부각할 뿐, 그의 외모를 망치지 못했다. 설령 뺨에 눌린 자국이 있더라도 말이다.

두영은 숲에서 느낀 감각을 또다시 느꼈다. 그의 귀여운 모습을 사진으로 기록해 두고 싶어 손이 간질거렸다. 그러나 설레는 기분을 재빨리 삭였다. 아직 찍히는 것도, 찍는 것도 두려웠다. 하지만 언젠간 홍승표는 예외로 두고 싶었다. 타인과 부대끼기 싫은 홍승표가 저를 예외라고 말했듯이.

아직 버리지 못한 미련이 제 안에 잔재했다. 그런 자신을 홍승표는 진작부터 꿰뚫어 보고 있었다. 제 것이 아닌 죄책감을 모조리 끌어안는 버릇도 그는 알고 있었다.

어쩐지 두영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호흡을 들이켜고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은식이는… 나를 원망한 적이 없대.”

홍승표는 눈을 감은 상태로 두영의 목덜미에 머리를 기댔다. 계속 말하라는 의미로 두영의 허벅지를 토닥였다. 두영은 홍승표의 머리카락에 뺨을 비비며 유서 내용을 떠올렸다.

“내가 끓인 라면이 맛없대. 근데 은식이는 항상 맛있게 먹어 줬어. 맛없었는지 정말 몰랐어.”

생각해 보면 홍승표도 제가 끓인 라면을 한 번 맛보더니 그 이후로 밥은 항상 그가 차렸다. 두영은 괜히 홍승표의 눈치를 보았다. 시선을 느낀 홍승표가 두영을 비죽 올려다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한강이긴 해.”

입만 열면 구라쟁이인 홍승표가 웬일로 솔직했다. 비스듬히 웃은 홍승표가 사과의 의미로 두영의 입에 입술을 꾸욱 누르고 떨어졌다. 그리고 각진 두영의 어깨에 턱을 괸 채 말했다.

“앞으로 밥은 내가 할게.”

그가 내놓은 해결책에 두영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찝찝했다.

홍승표가 몸을 떨며 웃자, 그의 다리에 걸터앉은 두영은 허리가 울렸다. 그 순간 배 안쪽에 들어찬 그의 정액이 바깥쪽으로 흘러나오는 게 느껴졌다. 한번 터지자 힘을 준 게 무색하게 줄줄 새어 나왔다.

두영은 민망해서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친절인지 봉사인지 홍승표는 자꾸 손으로 막아 주겠다며 두영의 엉덩이 사이를 더듬었다. 여기서 더 하면 진짜 기절할 것 같았기에 두영은 강고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홍승표는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이 두영의 손에 제 성기를 내주었다. 그리고 하는 소리가 수류탄 안전핀처럼 잡고 있으라는 헛소리를 남발했다. 의식의 흐름대로 그것을 잡고 있던 두영은 제 손에서 부푸는 살덩이를 발견하고 냉큼 손을 떼어 냈다.

하지만 실랑이를 벌인 끝에 두영은 그의 살 몽둥이를 잡고 있기로 합의 봤다. 제 배 속을 헤집는 것보다 나았으니까.

홍승표가 이어서 말하라며 두영의 어깨를 이로 갉작거렸다. 두영은 저가 무슨 말을 했었는지 바로 떠오르지 않아 한참 만에 대화를 이을 수 있었다. 어쩐지 마음이 가벼워져 하고 싶었던 말이 술술 나왔다.

“나는 은식이한테 미안해서 행복해지지 않겠다고 나 혼자 약속했었어. 그래서 괴로워도… 외로워도 참았어. 그게 내가 스스로 내린 벌이었으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은식이의 저주라고 곡해하고 있었어. 나는… 은식이를 두 번 죽인 거야. 은식이는 나를 원망하지 않았어. 응… 원망하지 않아…….”

만약 현실을 부정하지 않고 죽은 박은식을 빨리 찾아갔더라면, 자신은 이주학의 세뇌에 속지 않았을지도, 자신을 덜 혐오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나약했어.”

“너는 잘 버텼어.”

홍승표가 두영의 외로운 자책을 끊어 냈다.

“살아서 날 만났잖아.”

두영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아예 다물었다. 지금 무슨 말을 했다가는 우스꽝스러운 목소리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눈에 힘을 주어도 뜨거운 기운이 차올랐다. 두영은 못난 얼굴을 보여 주기 싫어 홍승표의 목을 끌어안았다.

“맞아…….”

두영의 목소리가 곧 터질 듯이 울먹였다.

“널 만났어.”

제 삶은 그를 만나서 저주가 풀렸다. 그렇다면 이제 정말로 행복해도 되지 않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홍승표가 들려주었다.

“너는 날 위해 행복하면 돼. 난 너보다 안 행복해질 테니까, 넌 무조건 나보다 행복해야 해.”

두영에게 내려진 새로운 저주였다. 두영은 기꺼이 저주에 응했다. 그가 행복해지려면 자신이 그만큼 행복해야 했다.

이제 그를 위해서 행복해질 차례였다.

구름 뒤에 숨은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달빛이 머리 위로 찬란하게 쏟아졌다.

***

이사 당일 비가 내리더니, 다행히 얼마 안 내리고 금방 그쳤다. 새로운 집에 정리할 이삿짐은 별로 없었다. 애초에 두영은 옷 한 벌 없는 빈털터리였고, 홍승표는 옷 말고 딱히 짐이 없었다. 서로 없는 것을 가지고 있으니 천생연분이라고 홍승표가 아무렇게나 지껄였다.

청소 업체가 일을 끝내고 나서야 두 사람은 자질구레한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홍승표의 차에 실어 가지고 올 만큼 개인적인 짐이었다. 그가 짐을 정리하는 동안 두영은 걸레에 물을 적셔 왔다. 업체를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먼지가 많이 떠다니는 것 같아 다시 한번 바닥을 닦기로 했다.

마룻바닥을 닦던 두영은 공간을 나눈 책장을 향해 눈길을 주었다. 책장은 서적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두영은 아무 책이나 한 권 빼서 팔랑팔랑 넘겼다. 영문으로 적힌 책은 사람의 손길을 탄 듯 군데군데 해져 있었다.

책장 반대편에 있는 홍승표가 책 틈 사이로 두영을 보았다. 시선을 느낀 두영은 책 표지를 홍승표에게 보여 주었다. 책 제목을 읽은 홍승표가 반대편에서 어떤 책을 두영에게 밀어 주었다. 두영은 삐죽 나온 책을 꺼내서 펴 봤다. 한글로 적힌 책이었다.

이 책들은 홍승표가 해외에서 살던 집에서 보내온 책들이었다. 책 한 권도 안 읽을 것 같은 홍승표가 사실은 책벌레였다는 사실에 두영은 크나큰 배신감을 느꼈다. 왠지 그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술이나 퍼마시고 다녔을 것 같은 편견이 마음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영은 제 편견이 부끄러워 회개 기도를 올리기로 했다. 어디 본 건 있어서 겉치레는 그럴듯한 회개 기도였다. 물론 그래 봤자 눈이나 꾹 감고 ‘승표야 미안해.’라며 중얼거리는 게 다였다.

책은 청소를 끝낸 후 읽기로 하고 도로 책장에 집어넣었다. 책장 반대편으로 가자 홍승표가 숲이 보이는 통유리 앞에 앉아 개인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두영은 홍승표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상자를 열었다. 라이터랑 시계가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상상도 못 할 만큼 비싼 시계를 편의점 라이터와 함께 두는 게 홍승표다웠다.

이건 마지막에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상자 뚜껑을 덮는데 문득 낯익은 물건이 눈에 띄었다. 두영의 폴더폰과 동전 지갑이었다.

두영은 홍승표를 힐끗 보았다가 조심스럽게 휴대폰 전원을 켰다. 배터리가 중간 정도 차 있었다. 10대 시절을 함께 보낸 휴대폰이었다. 그새 스마트폰에 익숙해졌다고 낯선 휴대폰을 다루는 것처럼 어색했다.

몇 번 버벅댄 끝에 사진첩을 찾았다. 두영은 김춘녀의 사진을 발견하고 확대했다. 애틋한 손길로 화면을 쓸었다.

다행이다. 몇 장이라도 있어서.

사진을 찍는 것도 싫어하는 자신이 무슨 생각으로 할머니를 찍었는지 알 수 없었다.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는 말이 왜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두영은 홍승표에게 눈길을 주었다. 여전히 그는 등을 보인 상태로 짐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땀이 찬 손바닥을 옷에 문질렀다. 침을 꼴깍 삼키고 다시 홍승표의 등짝에 시선을 두었다.

잠시 망설인 끝에 카메라 기능을 켰다. 피사체에 초점을 맞췄다. 서향이라 그의 모습이 역광으로 화면에 담겼다. 두영은 우람한 숲을 떠도는 맹수를 찍듯, 손끝에 서서히 힘을 실었다.

찰칵―.

투박한 소리가 아직 덜 채워진 공간에 울렸다. 홍승표가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두영은 화면에서 시선을 떼고 그와 눈을 맞췄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 위로 잔잔한 미소가 퍼졌다.

“나 지금 엉망일 텐데.”

홍승표가 콧잔등을 구기며 말했다. 말의 내용과 달리 표정은 자신만만이었다. 본인의 외모가 어떤지 잘 알고 있는 말투였다.

두영은 새로운 형태의 마음은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잘 몰랐다. 그저 홍승표가 알려 준 것들을 따라 하는 게 전부였다.

그가 주는 애정은 김춘녀의 애정과 달랐다. 박은식과 나눈 우정도 아니었다. 가공되지 않은 그의 마음은 오롯이 두영의 몫이었다. 너무 날것이라 가끔 소화가 안 됐지만, 어떻게든 같은 크기의 마음으로 그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홍승표는 제게 거울이었다. 그가 행복하면 저도 행복했다. 만약 그가 슬퍼하는 일이 생긴다면 저는 그의 슬픔을 나눠 가질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모조리 뺏어 올 것이다.

두영은 휴대폰을 덮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홍승표를 응시했다. 지는 해 때문인지, 홍승표가 눈부신 이유 탓인지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건 저를 비추는 노을이 따뜻했다는 것이다.

살이 에이는 추운 계절이 아니어도 온기는 필요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현실을 깨우는 이정표가 될 수 있으니까.

두영의 입매가 느슨하게 말려 올라갔다. 홍승표의 얼굴이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굳었다. 그는 천천히 걸어와 가까운 곳에 무릎을 접고 앉았다. 신기한 생물을 다루는 듯이 두영의 입매를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두영은 무릎으로 서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따뜻한 온기를 가진 손이 등을 쓸어 주었다. 그 안에 있는 심장도 데워 주었다. 품에 있는 체온은 자신이 살아 있는 증거다.

귓가에 닿은 입술이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호흡이 잔뜩 섞인 목소리가 무어라 말했다. 두영은 그가 진짜 말한 것인지 헷갈렸지만,

“응.”

하고 대답했다.

숲을 가로지르는 노을이 젖은 땅에 스며들었다. 세상이 어두워져도 자신은 외롭지 않았다. 새벽을 함께 기다려 줄 이가 있었기에.

그가 속삭인 말을 다시 곱씹었다.

‘행복해?’

두영은 씩씩하게 대답했다.

“응. 너무나.”

<데워 줄게>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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