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89년 8월. 문위(文偉)
게이에게 몸을 파는 것이 여자들에게 몸을 파는 것보다 좀 더 뒤끝이 깨끗하리라는 판단이 든 것이 시작이었다.
2층 홀이 있는 장방형의 카페는 평일 오후라 그런지 별로 손님이 없었다. 30여 평 크기의 넓은 공간에 안락한 소파와 테이블이 느슨하게 배치돼 있어 홍대 쪽에 위치한 카페치곤 조금 구닥다리로 보였다. 편안한 브라운 톤이 카페의 주 분위기인 모양으로, 한쪽 벽면을 몽땅 다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창 밖에는 녹음 짙은 나무들이 우거져 있어, 어릴 때 집 테라스에서 정원을 내다보던 듯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지하철에서 나오자마자 사납게 달려드는 폭염에 쫓기듯 카페 안으로 들어선 위(偉)는 약속된 상대를 찾기 위해 카페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얼마 없는 손님 탓에 목적한 상대는 금방 눈에 띄었다. 위가 알아보기 전에 먼저 위를 알아본 상대가, 피우고 있던 담배를 비벼 끄더니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서며 위를 향해 희미한 미소를 보내왔다.
벌써 오래전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듯, 상대가 앉아 있던 테이블 위에는 다 마신 아이스티 컵이 얌전히 놓여 있었다. 문득, 늦은 건가 하고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지만 약속한 3시에서 2분이나 이른 시각이었다.
“……밖이 꽤 덥지……?”
위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상대의 미소는 이를 드러내 보일 정도의 노골적인 함박웃음으로 변질돼갔다. 쾌활한 인사말과 함께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한다.
남자와의 경험이 전무한 상태에서, 이럴 때 악수를 하는 것이 관례인가 하고 잠깐 어리둥절해졌지만 위는 곧 오른손을 내밀고 상대의 손을 마주 쥐었다. 자신의 것보다는 작았지만 딱딱한 손마디며 힘 있는 골격이며, 분명한 남자의 손이다. 타인의 육체에 그럭저럭 이골이 나 있다곤 해도, 부드럽고 매끈한 피부의 여자들만 상대해왔던 만큼 아무래도 생경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미간을 좁히며 위가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자, 상대는 필요 이상 오래 붙들고 있는 자신의 손을 불쾌해한다고 여기는지 서둘러 거두어들이곤 다시금 배시시 웃음을 터트린다.
키는 173에서 5 사이. 약간 마른 체형이라 그런지 실제보다 조금 더 커 보인다. 걸치고 있는 살구색 티셔츠와 새하얀 데님 바지가 아무리 화사해 보여도 분명한 남자…….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아 눈에 띄게 한쪽 다리를 저는데도, 이렇게 그냥 서 있는 것만으로는 장애인이라는 점이 별로 실감이 나지 않는다. 최신 유행의, 그것도 유명 외국 브랜드의 하이 캐주얼로 치장을 한데다, 선탠을 했는지 가무잡잡한 피부가 귀염성 있는 섬세한 이목구비에 어울려서 언뜻 보기엔 위와 또래로도 보일 만큼 앳된 인상을 주었다. 위보다도 일곱 살이나 연상이라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다. 고통을 모르고 자란 부잣집 도련님의 처지를 온몸으로 역설하고 있어서 위는 처음 봤을 때부터 남자가 눈에 거슬렸었다. 딱히 남자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라기보단 남자를 대변하는 ‘기득권’, 위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바윗돌마냥 꿈쩍 않을 ‘체제’에 대한 적대감이라는 게 옳은 표현일 테지만.
“오래 기다리시게 한 거 아닙니까? 서두른다고는 했는데…….”
“아냐, 나도 도착한 지 얼마 안 되는걸! 아이스티는 목이 말라서 바로 시킨 거고.”
자존심 문제거나 자신을 위한 배려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사소한 일에 거짓말을 하는 조잡함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선명하지 못한 인간은 질색이다. 여자처럼 부드러운 인상의 게이라도 동정의 여지는 없다.
“뭐 마실래? 시원한 게 좋겠지?”
“오렌지 주스요.”
“여기, 오렌지 주스 한 잔하고 아이스티 리필 부탁합니다!”
엉거주춤 의자에 주저앉으며 남자가 웨이터를 불러 주문을 했다.
다시금 배시시 퍼지는 실없는 미소. 남자는 줄곧 위의 시선을 피한 채로 텅 비어버린 물 컵을 두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어딘가 낯익은 몸짓. 대개의 여자들도 처음 자신과 거래를 틀 때만큼은 눈앞의 남자처럼 안절부절못하기 일쑤였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실은 제법 긴장하고 있을 남자의 속내가 손에 잡힐 듯 전해져온다.
당장 본론부터 꺼내 답답한 분위기를 일소해버릴까도 싶었지만 위는 남자의 반응이 궁금해졌다. 별다른 문제가 없는 한 당분간은 몸을 섞고 지낼 상대다. 대강의 성격이라도 파악해두는 것이 좀 더 수월할 터였다.
마주한 테이블 위로 꽤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위가 재촉하듯 남자를 빤히 응시하자 남자는 점점 더 당황을 드러내며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기 시작했다. 무언가 할 말을 고르기 위해 필사적인 모양이었다. 마침 주문한 음료가 나왔고, 위가 주스 잔을 입가로 가져가자 남자는 안도한 듯 나지막한 한숨을 토해냈다.
“……믿어지지가 않는걸……?”
단숨에 잔을 비운 아이스티로 용기를 얻은 모양인지 줄곧 도망만 다니고 있던 남자의 눈길이 똑바로 위의 얼굴에 떨어졌다. 추위가 느껴질 정도로 에어컨을 펑펑 틀어대는 공간 속이건만 남자의 콧등엔 송골송골 구슬땀이 맺혀 있었다.
“……정말로 나와줄 줄은 몰랐어. 그땐 그런 대화를 나눌 만한 상황도 아니었고…… 내가 생각하기에도 염치없는 제의였고…….”
“나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빈말은 하지 않는 성격입니다.”
“아, 그래. 알지. 아는데도…….”
남자가 곤란한 웃음을 떠올리더니 다시금 말끝을 흐렸다.
오주희는 남자의 대학 3년 선배이자, 얼마 전까지 위의 고객 중 하나였던 여자였다. 일주일 전, 점점 더 집착을 드러내는 여자에게 계약의 결렬을 통보하고 여자의 오피스텔을 빠져나오다가 위는 남자를 처음 만났었다. 정확히는 이별 장면을 훔쳐보고 있던 남자가 위를 뒤쫓아 온 것이지만. 남자는 귀까지 새빨개진 얼굴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남자와도 거래해보지 않겠냐’고 물어왔다.
지난 4월, 위가 다니는 학교에 교생으로 왔을 때부터 눈여겨보고 있었노라고 했다. 오주희를 통해 위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고, 일단 오주희가 관련돼 있는 동안은 의리상 차마 말을 못 붙이다가, 마침 이별 장면을 보고 용기를 얻었노라고 했다.
대담하기도 하고 다소는 뻔뻔스럽게도 여겨지는 게이의 요구에 불쾌감은 순간이었고, 위는 곧 ‘뭐가 어때서? 뭐가 다르지?’ 하고 스스로에게 자문을 하기 시작했던 거다.
“……아무튼 나는 남자니까 말이다. 아무리 돈 때문이라고 해도 너는 보통 남자고…… 이반을 상대한다는 게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겠지. 결심하기까지 무척 망설였을 텐데…….”
남자가 혀로 입술을 축이며 변명투로 덧붙였다.
“아뇨. 여자든 남자든 저로선 별 차이를 못 느낍니다.”
말 그대로 ‘아니올시다’다. 남자의 제의를 받고, 대답을 하기까지의 몇 분, 고려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단점보다는 장점이 훨씬 많을 가능성. 사실 남자의 제의가 있기까지 단 한 번도 그쪽으로는 생각을 못 했던 자신의 단순함이 우스울 지경이었다.
돈으로 시작된 거래였음에도 여자들은 얼마 안 가 감정적인 요구를 하기 십상이었다. 정말로 위가 그녀들의 진짜 애인이기라도 하듯, 진심으로 걱정을 해주고, 애정을 기울이고, 나아가 그에 보답하지 않는 위의 냉담한 반응에 울었다. 울고, 호소하고, 그래도 안 되면 계약 조건인 금전 관계를 재고하겠다는 협박으로 위를 독점하려 들었다.
그쯤 되면 위 역시 애초의 계약 조건을 상기시키며 관계를 끊겠다는 말로 대응을 하지만 여자들은 좀처럼 물러서지 않았다. ‘미성년자와의 원조 교제’라는 관계의 성질상 드러내놓고 까탈을 부리진 않았지만, 문제를 일으킨 여자들과의 관계가 완전히 정리될 때까지 위의 유용한 아르바이트는 당연히 지장을 받았다. ‘진짜 애인은 나니 너는 물러서라’는 종류의 협박들이 여자들 사이에서 오고 갔다. 심할 경우, 불만을 품은 여자 둘이 서로 작당을 해서 제 3의 우호적인 관계에까지 재를 뿌렸다.
게이라면 조금은 다르지 않을까? 좀 더 사회적으로 꺼려지는 집단인 만큼 뒤끝이 말끔하지 않을까? 물론 편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험해볼 가치는 충분히 있는 편견 같았다.
“다만 좀 더 신경 쓸 문제가 몇 가지 있긴 하죠.”
신중하게 덧붙이자 남자의 얼굴이 조금 긴장했다.
“……문제라는 건…… 그, 오늘 얘기해주겠다던 조건들을…… 말하는 건가?”
“예. 말이 나온 김에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위는 바지 주머니를 뒤져 준비해 온 각서를 꺼내 남자에게 내밀었다. 말이 각서지, 실제로는 지리멸렬한 포르노그라피쯤 되는 그것은 주머니 속에서 만 하루를 잠자는 사이 그 쓰임새만큼이나 초라하게 구겨져 있었다.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일단 만남의 횟수는 일주일에 한 번으로 정했습니다. 각 만남에 소요되는 시간은 세 시간 이내로 한정했고요. 그 이상은 제 공부에 지장이 있으니까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대금은 회당 20만 원이고 특별한 서비스를 원하신다면 별도의 추가 요금이 들어갑니다. 추가 요금은 그때그때 서비스의 질에 따라 서로 합의하에 결정되지요.”
“…….”
“그리고 모든 행위 시 안전을 위해 콘돔은 필수로 사용해야 합니다. 성병이나 다른 치명적인 질병에 노출될 확률이 아무래도 많은 쪽이 우리 같은 사람들이니까요. 지금까진 별로 난잡하게 몸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는 선생님께서도 그리 떳떳하시지는 않으리라고 봅니다. 에이즈는 동성애자들에게 훨씬 더 감염률이 높다고 하더군요.”
탁자 위에 펼쳐진 종이쪼가리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남자의 얼굴은 점점 더 붉게 익어가고 있었다. 가끔씩 올라가는 남자의 고개는, 위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서가 아닌 주변의 눈치를 살피기 위한 용도로만 쓰였다. 몇 안 되는 다른 손님들은 꽤 멀리 떨어져 앉은데다, 잔잔한 클래식 음악까지 흐르고 있어 대화의 내용이 노출될 턱이 없음에도 남자의 어깨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처음의 대담한 제의에서 느꼈던 것과 달리 남자가 의외로 숙맥인 것은 아닌가 하고 위는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절대로 그럴 리는 없다. 자유분방한 사고를 가진 미대 졸업반(3수를 해서 더더욱 노털이란다!)에 유복한 가정 형편을 등에 업고 제법 화려하게 노는 오렌지족이라고 들었다. 아마도 위가 미성년자라는 자격지심이 남자를 조금쯤은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저도 남자와는 처음이라 나름대로 알아보았습니다만 무엇보다도 이 부분에 있어서는 꺼려지는 것이 어쩔 수가 없더군요.”
메모의 중간쯤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가장 걸리던 부분을 풀기 시작했다.
“……무슨……?”
“항문을 사용하는 것 말입니다.”
“……!”
“솔직히 남자를 상대로 삽입하고 싶은 기분이 들지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건 한 번 해보고 정 무리다 싶으면 관계를 그만두면 되니까 상관은 없는데요.”
“…….”
“문제는 선생님의 섹스 취향입니다. 알고 보니 동성애자들은 대개 두 가지 취향으로 나뉜다고 하더군요. 삽입하는 쪽과 받아들이는 쪽이 그것이지요. 물론 그 양쪽 다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고요. 아무튼 선생님께서 받아들이는 쪽을 즐기신다면 노력 여하에 따라 관계를 유지할 수 있지만 만약 그 반대시라면 문제가 있습니다.”
“…….”
“제 쪽에다 하는 삽입 섹스는 곤란하거든요.”
“…….”
토마토처럼 새빨개진 남자의 얼굴이 비로소 위의 시선을 붙들었다. 쌍꺼풀이 없는 반달형 눈매에 둘러싸인 새까만 눈동자는, 그러나 얼굴빛과는 달리 제법 단단한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여자에게 하듯 선생님의 그곳에 들어갈 용의는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여자 취급을 당하는 것은 아무래도 좀 거부감이 느껴지는군요. 그래서 만약 선생님께서 이 부분에 동의해주시지 않는다면 이 거래는 없었던 것으로 하고 싶습니다.”
“상관없어!”
단단한 눈동자가 좀 더 단단해졌다. 즉각 떨어진 대꾸엔 초조감이 서려 있었다.
“헤테로에게 그것까지 바란다면 염치없는 노릇이겠지. 괜찮아. 네 식대로 가자구.”
탐색하듯 몇 초간 계속된 위의 주시에도 남자는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분명한 욕망의 빛이 남자의 눈동자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다급하고, 초조하고, 간절한…… 다이렉트로 발기한 수컷의 눈길. 부드럽고 화사한 용모에 가려졌던 음습한 변태성이 비로소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부지불식간에 달려든 생리적인 거부감에 위는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명치끝이 묵직한 돌덩이로 짓눌리는 것만 같은 기분. 처음으로 여자에게 몸을 팔았을 때처럼 똥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기분. 이런 기분이 들 때마다, 위는 자신 역시 세간의 위선적인 도덕률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다는 것을 새삼 자각하게 되곤 한다. 그저 고객이 여자에서 게이로 바뀌는 것뿐인데도 마치 고이고이 아껴둔 순결을 잃을 위기에 처한 숫처녀라도 된 양 심통을 부리고 있으니 말이다.
위의 희미한 혐오감을 읽은 모양으로, 남자가 당혹해서 바닥으로 시선을 내린다.
―뭘 하자는 건가, 나는.
―고객에게 제대로 감정을 숨기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고객이 만족할 만한 서비스를 할 수 있겠다고.
늘어진 신경 줄을 다시금 팽팽히 당기며 위는 부드럽게 표정을 풀기 위해 애썼다. 위는 위대로 기분 전환이 필요했고, 남자는 남자대로 침착성을 찾을 필요가 있었는지 다시금 어색한 침묵 속에 몇 분이 더 흘러갔다.
“……여기…… 계약 기간은 1년을 넘기지 않는다란 건…… 왜지?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이윽고, 남자가 손가락으로 마지막 조항을 가리키며 조심스레 물어왔다.
“아무래도 육체적으로 친밀해지는 만큼 기간이 경과할수록 감정이 개입될 우려가 있지요. 그럴 경우 복잡한 문제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에 기한을 둔 것입니다. 물론 그 이전이라도 어느 쪽이든 해지 의사가 있을 땐 상대방은 무조건 계약을 해지해야 하고요.”
“……네 쪽에서 끈끈해질 리는 없고…… 아무래도 이건 나 같은 사람들에 대한 네 견제 차원이겠지?”
남자의 입술 끝이 살며시 올라가며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아뇨. 인간의 감정을 신용하지 않습니다. 그건 제 감정이라 해도 마찬가지죠.”
“…….”
“아무튼 제 조건은 이게 다입니다. 이런 점들만 동의해주신다면 오늘 당장이라도 서비스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좋아.”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이 떨어졌다. 산뜻하기조차 한 명쾌한 대꾸에 위가 시선을 모으자 어느 정도 제 색을 찾아가던 남자의 얼굴이 또다시 빨개졌다.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잖아? 이쪽은 정말로 네게 반했다구…….”
농담처럼 가벼운 어조였지만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좋습니다. 그럼 각서에 서명을 해주시겠습니까? 도장을 찍어주시면 더 좋고요.”
성매매 조건을 명시한 각서라는 게 법적인 효력을 가질 까닭은 없다. 하물며 자신과 같은 미성년자와의 그것일 경우라면 더더욱. 그렇다고는 해도, 어떤 형태로든 문서상의 흔적은 어느 정도 심리적인 구속력을 갖는 것이 사실이어서, 계약서를 교환하는 쪽과 그렇지 않은 쪽과는 문제 발생 빈도에 있어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그동안 위를 거쳐 갔던 스무 명 남짓한 여자들과의 경험으로 미루어, 그 효과는 꽤나 확실한 편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남자가 의자 등받이에 걸쳐두었던 베이지색 크로스백 안에서 만년필을 꺼내 서명을 하곤 애초에 접혀 있던 그대로 두 번 접어 위에게 내밀었다.
“그럼, 이제 자리를 옮길까요?”
각서를 주머니에 집어넣은 후 위가 의자에서 일어서자 남자의 눈이 당황을 드러내며 휘둥그레졌다.
“……지금 당장……?”
“예. 약속이 있으십니까?”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럼 가시죠. 따로 날을 잡는 것도 시간 낭비겠죠.”
우물쭈물하는 남자가 지겹다. 칼끝처럼 긴장하고 있는 남자의 신경도 귀찮았다. 하긴 뭐, 몇 번 육체를 섞고 나면 다른 여자들처럼 곧 편안해질 것이다.
단호하게 남자의 망설임을 잘라낸 뒤 먼저 카페를 빠져나왔다. 출입문을 나서기 직전 힐끗 보니, 남자는 계산서와 크로스백을 집어 든 채 허둥지둥 통로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서두른 탓인지 남자의 절름거리는 다리가 한층 더 불안정해 보였다.
남자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20분을 달려 도착한 곳은 남자의 아틀리에였다.
광화문을 지나 경복궁을 거쳤다는 것 이외에는 좀처럼 사람을 구경하기 힘든 조용한 골목 풍경이며, 길 양옆으로 연이어 늘어선 호화로운 고급 빌라들의 모양새며, 위에겐 낯선 동네였다.
남자는 예의 호화 빌라들 중 하나인 5층짜리 건물의 1층 절반을 아틀리에 겸 숙소로 쓰고 있었다.
남자와 함께 빌라 안으로 들어가자 프런트를 지키고 있던 제복 차림의 수위(관리인?)가 인사를 했다. 고개를 꾸벅 숙이며 깍듯이 답례를 마친 남자는, 마음껏 틀어놓은 에어컨으로 서늘하게 식힌 복도를 가로질러 현관 앞에 도착한 후, 마치 서서 기도를 드리는 것처럼 앞으로 몸을 약간 웅크린 자세로 자물쇠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남자의 뒷모습에서는 여전한 긴장과 그에 따른 피로감이 느껴졌다.
찰칵 하며 문이 열리자, 상상 이상으로 넓고 호사스러운 실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60평은 족히 될 크기. 위로선 난생처음 보는 화려하고 세련된 가구들이 그 크기에 걸맞게 실내 곳곳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었다.
코끝으로 아련히 다가드는 물감 냄새와 아교 냄새, 거실 가득 널린 이젤, 갖가지 석고상들이며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알록달록 화려한 캔버스들을 감안하더라도 평범한 대학생의 아틀리에라고 칭하기엔 무리가 있는 공간. 남자의 말대로 정리가 덜 되어 어수선해 보이긴 했지만, 그 무질서조차도 남자의 지나친 풍요와 여유를 역으로 증거하고 있었다.
남자가 몰고 다니는 은색 BMW며 화려한 옷차림들을 통해, 머잖아 어느 빵빵한 집안의 대를 이을 오렌지족이라는 것쯤이야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무슨 일류 호텔 스위트룸을 연상시키는 듯한 집 안 풍경에 위는 새삼 남자의 신분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은 정말로 큰 봉을 잡은 모양이라고, 남창 생활 2년에 비로소 한 건 크게 터트린 모양이라고, 축배라도 들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자신의 쇳덩이처럼 둔탁하게 굳어버린 감정을 비웃었다.
“……조금 정신이 없지? 이럴 줄 알았음 아줌마 불러서 청소라도 시켜놓는 건데…….”
“…….”
“……거기 소파에 앉아. 차 마실래? 커피 타줄까?”
“아뇨.”
손님 취급이라니 우습다.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좋을 텐데…….
“먼저 씻을까요? 아니면 선생님 먼저……?”
집을 나서기 직전 샤워를 한데다 에어컨 기운에 몸은 서늘했지만, 카페에 도착할 때까지 흠뻑 쏟아냈던 땀의 끈끈한 여운이 아직 남아 있었다. 행위를 하고 나서 샤워를 할까도 싶었지만 남자가 자신처럼 청결에 과민한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위의 물음에, 여전히 침착하지 못한 몸짓으로 주방 쪽으로 걸어가던 남자의 어깨가 움찔 긴장하며 걸음을 멈췄다.
“……머…… 먼저…… 먼저 하렴…….”
등을 보인 자세 그대로 대꾸하는 남자의 목소리는 꺼져 들어갈 것처럼 작았다.
“욕실은 어디로 가면 됩니까?”
“……저기…… 왼쪽 복도 끝에 문…….”
자신의 방 두 칸짜리 반지하에 비하면 거의 운동장 수준인 거실을 가로질러 남자가 손으로 가리킨 욕실로 들어갔다. 역시 빌라에 걸맞게 호사스러운 대리석으로 장식된 드넓은 욕실이 눈을 현란하게 어지럽히며 다가들었다.
축축해진 청바지와 티셔츠를 벗어 타월걸이에 걸고 재빨리 몸을 씻어내렸다. 머리는 물만으로 대충 다시 감고 타월로 물기를 털어냈다. 어차피 또 벗을 것, 다시 옷을 입는 것도 귀찮아서 찬찬히 주변을 살피니 다행히 크림색 바스 가운이 눈에 띄었다. 가운을 대강 걸치고, 청바지에서 콘돔을 꺼내 가운 주머니에 집어넣은 후 욕실을 나왔다.
“가운 좀 빌렸습니다. 괜찮죠?”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어 위를 보더니 쇼크라도 받은 듯 또다시 눈이 휘둥그레졌다.
흰자위가 보일 정도로 크게 뜨여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눈동자. 창백해진 낯빛. 허락 없이 가운을 빌린 것에 놀랐는지, 아니면 자신의 반라에 놀랐는지, 원인은 알 수 없었지만 남자는 대꾸를 던질 만큼도 정신을 추스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마치 섹스 상대의 나체를 처음 보기라도 하는 듯한 숫처녀의 태도가 아닌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홀린 듯 자신의 전신을 응시하는 남자를 굽어보며, 위는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혹시…… 처음이신 겁니까?”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긴장된 침묵을 깨고 위가 취조하듯 운을 떼자 남자의 몸이 회초리를 맞은 것처럼 움츠러들었다. 순식간에 새빨개지는 얼굴.
“무…… 무슨! 그럴 리가 있나……!”
“…….”
“……멋진 몸이야…… 진짜 황홀하군…… 꾸…… 꿈만 같아…….”
“…….”
“……이렇게 완벽한 몸은 본 적이 없어…… 상상한 것 이상이야…….”
“…….”
“……가슴 근육…… 허리…… 아랫배…… 마른 편인데 어떻게 이런 근육이 만들어져 있는 거지…… 종아리…… 허벅지…… 골반 뼈…… 성기도…… 빛깔도, 크기도 다 맘에 들어…… 발기하면 얼마만큼 커지게 될까…… 틀림없이 대포처럼 우뚝 솟아서 힘차게 흔들리겠지…… 아아, 엉덩이도 보고 싶어…… 하느님…… 너무 아름다워…….”
“…….”
“……가운…… 버…… 벗어줄 수 있어……?”
“…….”
“미안……! 미안하구나…… 기분 나쁘지? 하지만…….”
썰물처럼 붉은 기가 빠져나가고 남자의 얼굴은 다시금 백짓장처럼 창백해졌다. 엉거주춤 소파에서 일어나더니 남자는 말과는 달리 미안한 기색이란 전혀 없어 보이는 핥는 듯한 눈초리로 위의 몸을 탐욕스레 응시하고 있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연신 입가로 가져가며 뻐끔 담배를 피운다.
남자가 바로 코앞까지 다가오자 안 그래도 매캐한 담배 연기가 기도에 파고들며 깔깔한 자극을 주었다. 자연스레 미간을 찌푸리자 남자의 거침없던 눈길이 다시금 움찔해서 바닥을 향한다.
“……미…… 미안……! 담배 끄도록 하마…….”
부랴부랴 탁자 앞으로 가더니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끈다.
이거야 너무 예민하다. 비위를 맞추기 위해 일일이 표정 연기까지 해야 할 판이니, 정말 성가신 남자가 아닐 수 없다.
남자가 머뭇거리며 돌아서기 전에 요구대로 가운을 벗어내렸다. 물기를 머금은 몸은 에어컨 바람을 즐기기엔 좀 싸늘했지만 참을 만했다.
돌아선 남자의 눈이 다시금 휘둥그레지더니 얼음덩어리처럼 굳었다. 남자가 엉덩이를 감상할 수 있도록 천천히 뒤로 돈 다음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다시 몸을 틀었다. 역시 똑같은 포즈로 창백하게 굳어 있는 남자의 시선은 위의 하반신(정확히는 사타구니 사이)에 고정이 된 채 떠날 줄을 몰랐다.
정말로 반한 모양이다.
위를 탐했던 그 어떤 여자들도 저렇게 노골적이면서도 허기진 시선으로 자신의 몸을 쏘아보지는 않았었다. 게이라서 그만큼 절실했던 것인지, 아니면 남자라는 생물 자체가 여자보다는 좀 더 육체에 대해 적나라한 감수성을 가진 때문인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남자의 시선엔 마치 신에게 바치는 숭배에 가까운 절실함이 잔뜩 깃들어 있었다. 동정심조차 느낄 만큼 애잔한 몸짓이었지만, 그러나, 연민을 가지기엔 위의 가슴은 이미 사막처럼 메말라 있었다.
“샤워 안 하십니까? 그냥 갈까요?”
“…….”
언제까지고 바라만 본 채 움직일 줄 모르는 남자가 답답해 퉁명스레 물었지만 넋을 잃은 남자는 여전히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멍하니 위의 눈을 들여다볼 뿐이었다. 게이는 처음이니 조금 신중하자고 작정했었지만, 이렇게 되면 위가 능동적으로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5미터쯤 앞에 있는 남자의 곁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조금씩 위아래로 흔들리는 자신의 생식기에 달라붙는 남자의 격렬한 시선이 한편으론 우습고 또 한편으론 불쾌했다.
위가 다가갈수록 어쩔 줄 모르고 혼란을 드러내던 남자는 위가 바로 코앞에 다가서자 어깨는 물론 입술까지 떨었다. 억제된 한숨이 흐느낌 소리와도 비슷한 비음과 함께 남자의 입술을 타고 흘렀다.
남자의 관자놀이 사이에 손을 넣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어루만지자 순간 전류를 맞은 것처럼 남자의 몸이 찌르르 전율했다. 토끼처럼 휘둥그레진 눈이 못 볼 걸 보기라도 한 듯 질끈 감긴다. 얼굴을 비스듬히 기울여 남자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부드러운 감촉과 함께 담배 냄새와 샤워코롱 냄새가 뒤섞인 남자의 체취가 강렬하게 느껴졌다.
“흑……!”
우는 것 같은 목소리에 아랑곳 않고 조심스레 혀를 집어넣은 뒤 입 안쪽을 살살 간질이자 남자의 몸이 힘을 잃고 비틀거렸다. 반사적으로 허리를 끌어안으니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대며 위의 어깨에 팔을 휘감는다.
불안정한 자세에도 불구하고 위는 키스를 멈추지는 않았다. 여자들과 흡사한 반응이었다. 별반 다르지 않다면 더 이상 질질 끌 필요는 없다.
허리께와 등을 힘 있게 쓰다듬고, 이리저리 각도를 바꿔가며 오랫동안 키스했다. 확실히 여자들보다 뻣뻣하고 딱딱한 뼈들이 만져졌지만, 위보다 15cm는 작을 키에 마른 몸집은 안기에 그리 거북하지 않았다.
가쁜 호흡 소리에, 숨을 쉬라고 말하며 입술을 뗀 후 남자의 입술 언저리와 턱 끝으로 흘러내린 타액을 부드럽게 핥아주자, 덫에 걸린 짐승처럼 들뜬 신음 소리를 내며 남자가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위의 어깨를 생명줄처럼 붙잡고 있던 남자의 손가락에 힘이 더해졌다. 흥분으로 새빨개진 얼굴, 거친 호흡, 그리고 코끝에 맺힌 땀들이 극으로 몰린 남자의 흥분을 말해주고 있었다.
키스 한 번에 가려고 하다니 조루인 모양이라고 멍하니 생각하며 남자의 몸을 소파로 밀어붙였다.
다시 남자의 입술에 키스를 하고 온몸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티셔츠를 가슴까지 끌어올려 도드라진 갈색의 돌기를 쓰다듬고, 바지 벨트를 푼 다음 손을 밀어 넣어 남자의 생식기를 움켜쥐었다. 이미 커질 대로 커진 그것은 위의 손아귀 속에서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찔끔찔끔 액을 흘리고 있는 탓에 더더욱 생생한 감촉이 느껴진다. 자위를 해본 지가 도대체 언제인지 까마득하기까지 해서 손바닥을 치는 남자의 음경이란 그저 생경하고 이상야릇한 기분만을 주었다.
“흐으윽……! 윽……!”
“…….”
“아아……! 그…… 그만…… 흐윽……!”
“…….”
그래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신음 소리며 띄엄띄엄 내뱉어지는 불분명한 호소는 여자들의 오르가슴 때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입술을 미끄러트려 목덜미 옆, 맥박 치는 동맥을 물어뜯자 남자의 몸이 자지러지며 활처럼 허리를 휘었다. 엉덩이가 잔뜩 조여들더니 앞뒤로 크게 꿈틀거렸다.
“아흥……! 큭……! 아악……!”
극점에 다다른 교성은 비명 같았다. 운동장처럼 휑한 집 안을 쩌렁쩌렁 뒤흔들어대며 남자는 위의 손바닥 안에 봇물처럼 욕망을 토해냈다.
정말 조루다.
“흐윽…… 윽…… 으으…….”
멍이 들 지경으로 위의 팔과 어깨를 움켜쥐었던 남자의 손에서 힘이 풀어지더니 소파 위로 툭 떨어졌다. 거친 호흡을 토해내며 사정의 여운에 전율하는 남자의 입술에 자신을 겹치고 부드러운 마무리 키스를 해준 다음 몸을 일으켰다. 손바닥을 가득 적신 것도 모자라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남자의 정액이 난감했다.
마침 눈에 띈 걸레 비슷한 것(탁자 옆에 놓여 있던 그것이 물감용 걸레라는 걸 위는 나중에야 알았다)을 집어 들어 꼼꼼히 닦아낸 후 다시 남자의 옆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남자는 상기된 얼굴로 위의 시선을 피한 채 조금씩 몸을 떨고 있었다. 남자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스타트가 마음에 든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풀이 죽긴 했지만 여전히 반쯤은 고개를 들고 있는 남자의 음경에 다시금 조심스레 손을 대자 남자가 펄쩍 뛰며 위의 손길을 가로막았다.
“……그만하시겠습니까?”
미심쩍은 듯 묻자 남자는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어 위를 바라보았다.
“……그만하긴…… 얼마나 기대했는데…….”
호색한처럼 싱긋 웃는 얼굴은 어쩐지 신용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너는 기분이 나지 않는 거지? 불쾌한 거지……?”
남자의 눈길은 얌전히 잠자고 있는 위의 생식기를 향하고 있었다. 비로소 남자의 거부가 이해되었지만 서비스를 해주는 상대의 기분까지 신경을 쓰는 남자라니 우스운 노릇이다.
“처음이니까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습관이 들면 차차 나아지겠죠.”
남자가 안심하도록 최대한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하고 남자의 반쯤 벗겨진 아랫도리로 손을 뻗었다.
“시…… 싫어!!!”
바지를 벗기려 하자 비명처럼 외치며 위의 손길을 막무가내로 밀어낸다! 좀 전의 거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거칠고 완강한 몸짓이었다.
“옷을 벗는 건 싫어! 그냥 이대로…… 이대로 해!!!”
사나운 음성.
아연해서 남자의 눈을 살폈다. 붉은 기운이 스멀스멀 퍼지더니 목덜미를 거쳐 귓불까지 새빨개졌다.
남자를 굽어보자 물기를 머금은 눈시울이 호소하듯 위의 눈을 사로잡았다. 얼굴은 여전히 삶은 고구마처럼 붉었지만 시선에 담긴 표정은 절실한 무엇을 담고 있었다.
결벽증인가……?
게이들의 메커니즘이란 알다가도 모를 일. 무언가 괴이쩍긴 했지만 남자의 취향에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솔직히 아까부터 도무지 요지부동인 자신의 물건에 곤혹스러워진 건 사실이었다. 발기조차 되지 않는데 어떻게 남자의 엉덩이를 쑤시고 들어갈 수 있겠는가. 바지를 입힌 채 한다면 후배위 자세밖엔 못 만들고, 그렇다면 남자의 모습을 보지 않고서 할 수 있다는 뜻도 된다. 그럭저럭 흥분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
잠자코 팔을 뻗어 남자의 허리를 안아 들었다.
부르르 떠는 입술에 스치는 듯한 가벼운 키스를 하고 허리춤을 쓰다듬어 자극을 주기 시작하자, 남자는 자동인형처럼 몸서리를 치며 허리를 뒤틀었다. 단숨에 고개를 세운 남자의 음경이 위의 벌거벗은 아랫배에 닿아 사납게 꿈틀댄다. 축축하고 뜨거운 무기는 못 참겠다는 듯 비음을 흘리며 위의 피부를 태워버릴 기세로 비벼대고 있었다. 흥분이 고조되자 머뭇머뭇 위의 목덜미와 어깨를 헤매던 남자의 팔이 정신없이 매달려왔다.
“흐으으…… 아앙…… 흑……!”
결국 2분이 채 못 되어, 남자는 위의 배 위에 두 번째 사정을 했다. 엄청나게 민감한 건지, 조루인 건지 정말 기가 찰 노릇이다.
남자와는 반대로 달리 흥분의 기미조차 안 보이는 자신에 초조해져서, 위는 기운을 잃고 늘어진 남자를 거듭거듭 희롱하며 절정으로 끌어올렸다.
밋밋한 젖꼭지를 빨아줄 때 또 한 번, 통통하게 살집이 오른 엉덩이를 주물러줄 때 또 한 번, 도합 네 번의 사정을 끝낸 남자는 서로의 아랫도리를 정액 범벅으로 만들어버렸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위가 무거운 어조로 말을 꺼내자 자신이 흘린 땀과 눈물로 온 얼굴이 질펀하게 젖은 남자가 헐떡이며 시선을 맞춰왔다.
“잘 서질 않네요. 혹시 포르노테이프 가지고 계십니까?”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 한동안 멍하니 있던 남자가 이윽고 희미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시선을 내린다.
“죄송합니다. 테이프를 보면 혹시 나아질지도 몰라서요.”
남자의 귓가에 숨을 불어넣으며(남자가 좋아하는 부위는 이미 싫을 정도로 자각하게 된 위였다) 달래듯 속삭여주자 목덜미를 감고 있던 남자의 팔에 힘이 들어가며 위의 품 안에 세차게 얼굴을 파묻는다. 발작처럼 위의 가슴팍에 몇 번이고 얼굴을 비벼대더니, 남자는 이윽고 곤혹스러운 듯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포르노는 있지만 전부 게이 필름들뿐이라서…….”
“…….”
“괜찮아. 오늘은 이걸로도 정말 만족해. 다음엔 꼭 일반 포르노테이프 구해놓을 테니까…….”
“죄송합니다.”
“아냐…… 미안한 건 되레 이쪽이지. 정말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는 셈이니까…….”
“그렇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지요. 선생님의 제의를 받아들인 이상 완벽한 서비스를 해드리는 것은 제 의무입니다.”
죄를 지은 듯한 표정으로 고통스레 변명하는 남자를 가로막으며 위는 무뚝뚝하게 정정했다. 깊이 생각해보지 않고 너무 가볍게 남자의 제의를 받아들인 것은 아닐까 하는 회의가 들었다.
하긴 정 맞지 않는다면 계약을 파기하면 된다. 초조해할 필요는 없다. 다행히 오늘의 페팅 서비스만으로도 남자는 정말로 만족한 눈치여서, 당분간 제값을 받는 데 무리는 없을 것 같았다.
벽에 걸린 시계로 눈을 가져가 시각을 확인했다. 아쉽게도 남자의 아틀리에에 든 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았기에, 위는 자신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떨어질 생각을 않는 남자의 몸을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애무를 계속했다. 땀범벅인 남자의 몸은 뜨거웠다. 그나마 티셔츠와 바지를 걸친 상태였기에 불쾌감은 없었고, 남자의 몸에서 풍기는 체취도 그럭저럭 참을 만했다.
아랫배에 닿아 있는 남자의 것은 여전히 반쯤은 발기한 상태였지만 네 번이나 사정한 것이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는지 더 이상 크기를 늘리지는 않고 있었다. 가슴 돌기를 입술로 물어뜯으며 힐끗 시선을 내리니 새까만 치모에 둘러싸여 있는 남자의 축축한 중심이 눈에 들어온다.
포경 수술을 하지 않았는지 귀두 부분이 반쯤은 주름에 덮여 있다. 자신의 것 이외에 남성의 물건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은 처음이어서 비교 기준이란 오직 자신의 것뿐이었지만, 덜 자란 소년의 그것처럼 볼품없이 작아 보이는 건 절대로 과장이 아니다. 손바닥 안에 들어온 감촉으로 미루어 볼 때, 발기를 하면 그나마 기대 이상으로 크기를 늘리는 것이 대견할 정도였다.
“……저기…….”
“…….”
“……내…… 내가 한번 해보면 안 될까……?”
홀린 듯이 소파에 누워 얌전히 위의 애무를 받아들이고 있던 남자가 문득 더듬거리며 물어왔다.
“……?”
“……빠…… 빨아보고 싶었거든…… 전부터……. 아…… 안 될까……?”
오럴은 여자들과도 웬만해선 하지 않는 위였다. 정말로 그런 취향의 여자가 두서너 배의 값을 치러야만, 위는 마지못해 여자의 사타구니 사이를 애무해주었었다. 물론 그러한 서비스를 좋아하는 여자라도 반대로 위의 것을 빨아주겠다는 제의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닳고 닳은 남창인 자신조차도 싫어하는데 남자가 되레 빨아주겠다니!
“……그건…… 더럽지 않습니까? 그런 실례를 끼치다니 정말 죄송할 노릇이지요.”
새삼 남자의 음란함에 기가 차서 쌀쌀맞게 내쏘았지만 남자는 결연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더럽지 않아! 더럽다니…… 너만 기분 나쁘지 않다면 하고 싶어…… 나는…… 나는 정말로 하고 싶구나!”
기분이 나쁘단 말이다, 이 내가!
“무…… 물론 무리하게 결합하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니야! 나는 다만 네가 너무 아름다워서…… 전부터 정말로 그렇게 하고 싶었기 때문에…….”
이쯤 되면 미안하다는 핑계로 거절할 수도 없다.
위는 체념하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다리를 벌린 자세로 남자의 앞에 서자 위를 따라 상반신을 일으킨 남자가 머뭇머뭇 양팔을 뻗어 왔다.
뻔뻔스러운 요구가 수치스럽긴 한 모양으로, 차마 위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남자는 벌벌 떨며 탐색하듯 위의 하반신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역시 경배라도 드리는 것처럼 홀린 듯한 눈길이 위의 치부를 응시한다.
골반 뼈를 매만지고, 단단한 엉덩이의 굴곡을 쓸고, 아마도 남자의 두 배에 육박할 허벅지 근육을 주물렀다. 별로 기술적인 애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확실히 직접적으로 부딪쳐오는 자극에는 간지러운 감각이 느껴졌다. 남자의 오른쪽 손가락이 회음부를 거쳐 두 개의 음낭을 살며시 움켜쥐자, 아랫배로 뿌듯한 기운이 몰리며 그때까지 꿈쩍 않던 음경이 마침내 조금씩 일어서기 시작했다.
“하아…….”
남자의 호흡이 가빠지며 한숨 같은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근사해…… 멋있어…… 저…… 정말…… 꿈만 같구나…….”
들릴 듯 말 듯한 쉰 목소리로 남자가 탄성을 내지른다.
자신과 똑같은 사내새끼 물건이 그렇게나 좋을까. 남자의 얼굴은 정말로 꿈꾸는 듯 몽롱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기가 막힌 나머지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위는 고조되는 기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되도록 머릿속을 텅 비우려고 노력했다.
엉덩이를 훑던 남자의 나머지 한 손이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조금 굳어진 기둥 끝을 움켜쥐었다. 다행히 꺼림칙한 기분과는 별개로, 몸은 만져지는 만큼 정직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모양 좋은 분홍빛 입술이 벌어지며 벌게진 귀두 부분이 빨려 들어가는 것을 마지막으로, 위는 남자의 얼굴을 외면한 뒤 맞은편 벽에 걸린 알록달록한 캔버스 위로 시선을 옮겼다. 몸통과 사지가 분해된 형태의 남자 토르소가 자주색과 노란색이 주조를 이루고 있는 용암 덩어리 속에서 꿈틀거리는 듯한 그림이었다.
남자의 관능이 읽힌다.
“……쪽쪽…… 춥…… 춥…… 쭈읍…… 쭉…….”
“…….”
“……쭈읍…… 쭙…… 쪼오옥…… 쪽…….”
“…….”
점막과 점막이 스치는 음탕하고도 천박한 소음이 고요한 실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알주머니가 남자의 손바닥 안에서 끊임없이 굴려지고, 음경 끝은 탐욕스러울 정도로 조여대는 남자의 입안에서 점점 더 굵고 단단해졌다. 위가 조금씩 허리를 흔들며 자연스럽게 펌프질을 하기 시작하자, 귀두 끝이 남자의 목구멍을 찌르는지 남자는 가끔씩 입술을 떼며 잔기침을 해댔다. 구역질이 날 법한데도, 한순간 숨을 가다듬은 후엔 남자는 다시금 성급하게 달려들어 위의 것을 물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뿌듯한 사정 욕구가 치부를 조이며 좀 더 강렬한 결합을 원하기 시작했다.
―됐어……!
얼떨떨해하는 남자의 머리를 밀어내고 거실 한가운데에 벗어둔 바스 가운 주머니에서 콘돔을 꺼내 들었다. 거대하게 발기한 채 요동치는 몸에 콘돔을 씌우기란 쉽지가 않아서, 시간을 들여 제대로 씌우고 나니 다시금 흥분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스스로에게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바로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반쯤은 넋이 나간 듯한 얼굴의 남자는, 조금 거칠어진 위의 몸짓도 아랑곳 않은 채 얌전히 몸을 맡겨왔다. 남자를 뒤로 돌려 세운 다음 소파 위에 엎드리게 하고 바로 결합을 시도했다. 그러나 당연한 것처럼 꽉 맞물려 있던 남자의 입구는 쉽사리 위의 진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초조해진 나머지 조심스레 가운뎃손가락을 집어넣어봐도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떨 뿐 남자는 요지부동이었다. 역시 여자의 그곳과는 많이 다른 모양이었다.
“젤은 있습니까?”
“……치…… 침실…… 침실에…….”
허벅지까지 흘러 내려간 바지 탓에 걷기는커녕 제대로 중심을 잡지도 못하는 남자의 몸을 안아 들고 남자가 가리키는 침실로 걸어 들어갔다.
아틀리에로 쓰이고 있는 거실보다는 그럭저럭 정리가 잘되어 있는 밝고 화사한 모양새의 아늑한 침실이었다. 새파란 색의 침대보가 씌워진 퀸사이즈의 침대와 붙박이장, 화장대로 쓰이는 것 같은 호사스러운 모양새의 콘솔, 창가에 놓인 1인용 소파 하나가 가구의 전부여서 열 평 남짓한 공간이 좀 더 넓어 보였다. 거실 벽을 산만하게 뒤덮고 있던 캔버스들 대신 침대 맞은편 벽을 납작하게 장식하고 있는 것은 대형 TV 스크린이었다.
남자를 침대 위에 내려놓고 주변을 살피니 침대 머리장 위에 찾는 물건이 보였다. 듬뿍 짜서 양손에 비빈 다음 콘돔이 씌워진 음경 위에 발랐다. 침대 위에 주저앉아 멍하니 자신의 행동을 눈으로 좇고 있던 남자의 몸을 다시 돌려 세우고 조심스레 손가락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다행히 저항은 거짓말처럼 사라져, 끈기 있게 풀어주자 남자의 입구는 마디가 발달한 위의 기다란 손가락 세 개를 무리 없이 받아들였다.
손가락을 빼고 남자의 양쪽 골반 뼈를 움켜쥔 다음 단숨에 진입했다.
“으앗……!”
수월한 진입과는 달리 남자의 입에서 터진 비명에선 고통이 느껴졌다. 순식간에 꽉 조여드는 남자의 입구도 아찔한 쾌감을 불러일으키며 자신의 아픔을 호소하고 있었다.
곤란한 기분이 들었지만 여기서 그만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분명 내벽 어딘가에 여자와 마찬가지로 쾌감을 주는 부분이 있다고 들었다. 탐색하듯 조심스럽게 허리를 움직이자 남자는 한쪽 손등으로 입을 막으며 터져 나오는 비명을 삼켰다.
“……곧 찾을 겁니다. 조금만 참아보세요…….”
처음이 아닐 남자가 처음처럼 느껴지는 것은 다분히 자신의 미숙함 때문이리라.
소름이 돋을 정도로 인정사정없이 조여드는 남자를 견디며 최대한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이리저리 각도를 바꿔가며 포인트를 찾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치켜드는 본능적인 쾌락에 서비스 정신은 자꾸만 실종될 판이었지만, 포인트를 찾기까지 여자들에게 하듯 이성을 잃고 몰두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마구 내달리고 싶은 기분을 억누르는 고통과 강렬하게 조여지는 기쁨 사이에서, 극도로 날카로워진 감각이 이리저리 시소처럼 춤을 추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땀은 비 오듯 흘러내렸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문득 한 지점을 건드리자 남자의 몸이 찌르르 전율하며 기쁨에 찬 신호를 보내왔다. 확인하듯 같은 지점을 되풀이해서 찌르자 남자의 몸이 자지러지며 날카로운 교성을 흘려댄다. 손을 내려 사타구니 사이를 더듬으니, 활처럼 휘어진 남자의 것이 잔뜩 발기한 채 찔끔찔끔 액을 흘리고 있었다. 더 이상의 확인은 필요 없었다. 눈을 질끈 감고서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속도를 높였다.
“흐윽……! 하아…… 앙…… 아아…….”
“……읍…… 흡…… 윽…….”
“하아…… 아…… 아악…… 아아…….”
“……윽……! 하아…… 하…….”
“흐응……! 응…… 응응…… 으앗……! 악!!!”
“……으…… 흐읍…… 욱……!”
“읏! 웃…… 윽……! 엄마……! 악……! 흐앗!!!”
“……후우…… 읍……!”
“아…… 아아아…… 아악!!!”
“……!!!”
먼저 절정을 맞은 남자가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단말마의 비명을 내질렀다. 잔뜩 수축하는 남자의 내벽을 자각하며 몇 번 힘든 왕복을 거듭한 후 위 역시 강렬한 절정을 맞았다.
오르가슴의 순간, 기절을 한 듯 힘없이 앞으로 고꾸라지는 남자의 허리를 본능적으로 끌어안았다. 겹쳐진 그대로 함께 쓰러지며 위는 남자의 귓불과 뒷목덜미 쪽으로 입술을 밀어붙인 채 정신없이 물어뜯었다.
의외로 오르가슴의 여파는 꽤 길었다. 몸서리를 치는 하반신이 잦아들 때까지, 위는 남자의 등에 몸을 꼭 붙인 채 입술에 닿는 남자의 피부마다 스치는 듯한 키스를 퍼부었다. 물론 제정신이 들고 나니 자신의 얼빠진 행동에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지만, 흥분한 나머지 남자가 정말로 ‘남자’라는 의식조차 솔직히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게 사실이었다.
호흡 속도가 제자리로 돌아오고, 달아오른 체온도 차츰 식어들었다.
위는 남자의 몸을 옥죄고 있던 팔을 비로소 풀어 내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크기를 줄인 음경은 부드럽게 남자의 몸에서 빠져나왔지만, 문득 아래로 향한 위의 시선에 밟혀든 서비스의 흔적은 참혹했다. 남자의 허벅지며 사타구니 사이는 물론, 콘돔을 입은 자신의 것에까지 유혈이 낭자했다.
맙소사, 역시 미숙하기 짝이 없는 대시였나 보았다. 남자가 기절을 한 것도 오르가슴 때문이라기보다 고통이 극에 달한 때문은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마지막에 엎어진 자세 그대로, 여전히 눈을 뜰 생각을 않는 남자도 의심을 부추겼다.
난감한 노릇이었지만 이제 와서 후회한들 그것도 우습다.
쓴웃음을 지으며 콘돔을 빼 휴지통에 던진 후, 곰곰이 생각을 기울였다. 무엇보다도 남자의 의식을 깨우는 게 순서일 듯싶어, 욕실로 들어가 찬물에 적신 타월을 가지고 나왔다.
차가운 감촉이 얼굴에 닿자 다행히 남자는 곧 의식을 회복했다. 가늘게 뜬 반달형의 눈매가 멍하니 위의 눈을 응시한다.
“……괜찮으십니까……?”
땀에 전 머리카락이 가닥가닥 붙어 있는 남자의 이마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을 건넸다.
“…….”
대답 대신 남자는 희미하게 얼굴을 붉혔지만 의외로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너무 거칠게 해드린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처음이다 보니 실수가 있었습니다. 계속 하실 의향이 계시다면…….”
“좋았는걸! 다…… 당연히 계속해야지!”
위가 채 끝맺기도 전에 남자가 다급하게 말을 잘랐다.
살피듯이 남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자 제법 고집스러운 빛이 서린 눈길이 맞받아쳐온다.
“……정말이야. 정말로 좋았다. 고맙게 생각해…….”
진심인 것 같았다. 설령 진심이 아니라고 해도 당분간 계약을 파기할 의사가 없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다음부턴 좀 더 부드럽게 하도록 해보겠습니다.”
변함없는 남자의 결심이 자신에게도 바람직한 것인지 잘 판단이 서질 않았다. 복잡해진 심사 때문인지 예의 바른 다짐의 말은 자신이 듣기에도 꽤나 퉁명스럽게 느껴졌다.
대답 대신, 남자는 체중을 지지하기 위해 침대 바닥을 누르고 있던 위의 손등으로 팔을 뻗어왔다. 망설이듯 조심스레 어루만져지는 간지러운 감촉은 맨 정신으로 참아내기엔 좀 버거웠다. 할 수 없이 남자의 기분을 거스르는 것을 무릅쓰고 위는 슬쩍 뒤로 손을 거둬들였다. 약속된 세 시간은 이미 넘었다. 더 이상 봉사를 해줄 의무도 없었다.
“……어서 씻고 가봐. 시간 다 됐지?”
위의 완곡한 거절을 민감하게 알아차린 남자는, 쑥스러운 듯 웃으며 조용히 덧붙였다. 힐끗 벽시계로 가져간 위의 시선 역시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먼저 씻겨드리겠습니다. 상처가 꽤 심해요.”
서비스 시간은 지났지만 그렇다고 유혈이 낭자한 남자를 혼자 버려두고 갈 만큼 상식이 없지는 않다. 무뚝뚝하게 대꾸하며 거의 무릎 아래까지 흘러내린 남자의 바지춤에 손을 가져가자 남자가 기겁을 하며 몸을 움츠렸다.
“그만둬!!! 우윽……!”
히스테릭한 외침보다, 뒤이은 남자의 잔뜩 일그러진 표정이 위를 더 아연하게 만들었다. 바지춤을 틀어쥔 채 남자는 상반신을 일으켰고, 그 갑작스러운 동작이 남자의 찢긴 하반신에 무리를 준 모양이었다.
“옷을 벗는 건 싫다고 했잖아! 저리 비켜……!”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눈시울로 사납게 위를 노려본다. 붉게 상기된 그것엔 눈물까지 흥건하게 맺혀 있었다.
“……호들갑 떨지 마…… 괜찮다구…… 재밌게 즐기려면 이 정도쯤은 감수해야지…… 우리 같은 인종들 사이에선 흔히 있는 일이니까 걱정할 필요 없다구…….”
“…….”
“……빨리 가. 오랜만에 질펀하게 했더니 꽤 피곤해. 쉬고 싶어…….”
“…….”
“……미…… 미안…… 가줘…… 피곤하구나…….”
“…….”
남자의 얼굴에서 고통이 사라져갈수록 히스테릭해졌던 남자의 말투도 점차로 부드러움을 되찾고 있었다. 매섭게 치켜 올라갔던 반달의 눈꼬리가 차츰차츰 아래로 휘더니, 이윽고 곤혹스레 위의 시선을 피하며 애매하기 짝이 없는 사과를 던졌다.
극구 옷을 벗지 않으려는 태도도 괴이쩍기 짝이 없었지만, 내성적이고 섬세한 게이에서 갑자기 표독스러운 암고양이로, 혹은 수줍어하는 숫처녀 흉내를 내나 싶더니만 종내는 닳고 닳은 바람둥이 게이로 안착해버리는, 시시각각 돌변하곤 하는 남자의 카멜레온 같은 분위기도 괴이쩍긴 매한가지였다.
고개 숙인 남자의 말간 정수리를 한참 동안 굽어보던 위는 갑자기 모든 게 귀찮아졌다.
남자가 사이코든 아니든 뭐가 어떻단 말인가? 괴상한 섹스 취향을 가지고 있다 한들 뭐가? ‘흔히 있는 일’이라니 걱정도 팔자다. 그래, 처음치곤 꽤나 성공적이었다. 끝내 발기가 되지 않을까 봐 걱정할 필요도 없다. 괜찮은 고객이 될 것 같다. 그 이상 더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말이다…….
남자의 부탁대로 욕실로 들어가 재빨리 샤워를 마쳤다. 물기를 닦고 옷을 주워 입기까지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입금하실 은행 계좌 번호는 거실 탁자 위에 적어두겠습니다. 가급적 빨리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침대 시트로 몸을 둘둘 만 채 위의 일거수일투족을 홀린 듯 좇고 있던 남자를 향해 담담하게 부탁했다.
“……그래…….”
“다음 주도 오늘과 같은 시간대로 할까요?”
“……?”
“오늘처럼 3시에 뵈어도 괜찮으실지요?”
“어…… 아아, 그래! 좋아…….”
기쁜 듯 배시시 퍼지는 웃음.
“장소는……?”
“그냥 여기로 와. 아참, 내 차로 와서 길은 잘 모르겠네?”
“출발하기 전에 미리 전화 드리겠습니다. 대중교통으로 찾아오는 방법만 알려주시면 됩니다.”
“데리러 갈게!”
위가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리자 어딘가 흥겨운 어조로 거침없이 대답을 흘리던 남자는 아차 싶은지 허둥지둥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 미안. 깜빡했다…… 사적인 공간에 파고드는 건 싫다고 그랬지……?”
“…….”
“……알았어. 전화 기다리마…….”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저기!”
꾸벅 목례를 하고 돌아서는 위를 남자가 다급하게 불러 세웠다.
“…….”
“……내…… 내 이름 알아……?”
“…….”
“……모르지?”
“…….”
“……모르지?”
“……압니다. 사인해주셨지 않습니까?”
“사인……?”
“…….”
“아, 그래…… 그렇지, 참…… 사인…….”
“…….”
촉촉하게 젖은 눈시울이 가만히 시선을 맞춰오고 있었다. 해가 지려는지 길게 드리운 주홍빛 음영이 남자의 밝게 탈색한 머리 위로 아낌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불가사의한 열기…… 별로 인식하고 싶지 않은 저 절실한 감정이 다시금 남자의 눈동자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도무지 정체를 알 길 없는 기묘한 아지랑이였다.
호기심에 차서 물끄러미 남자를 바라본 것도 잠시, 불쑥 덮쳐든 아찔한 권태감에 위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눈을 감았다.
한심하고, 한심하고, 그리고도 또 한심한 인생!
이 여름이 가면 머지않아 곧 추운 겨울이 온다. 연탄가스가 무서워 마음 놓고 온기를 취할 수도 없는, 헐벗은 겨울의 한가운데. 막다른 골목.
기를 쓰고 달려도 출구는 그 어디에도 없을지 모른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남자에게 예의 바른 인사를 했다.
남자가 안타까운 듯 뭐라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침실 문을 밀고 거실로 나간 다음, 위가 가진 유일한 통장의 계좌 번호를 적었다. 꼼꼼하게 적고, 혹 번호가 틀렸을지 몰라 두 번 세 번 확인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것처럼 생경한 위화감을 주는 남자의 아틀리에를 죽 훑어보았다. 물감과 아교와 남자의 코롱 냄새가 야릇하게 뒤섞여 있는 이 낯설고 배타적인 공간이, 위에게도 친숙하게 손을 내밀어주는 시간은 어쩌면 영영 찾아오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설령 그렇다 해도 걸음을 멈출 수는 없다는 것을 안다.
현관문을 밀치고, 몇 시간 전에 안면을 튼 제복의 수위와 눈인사를 교환하고, 위는 사나운 폭염이 내리쬐고 있는 막막한 세상을 향해 다시금 힘차게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위는, 열여덟 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