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1989년 8월. 장인환(張仁歡) (2/129)

2. 1989년 8월. 장인환(張仁歡)

그에게 가까운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 나가는 길을 가르쳐주지 않은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오래된 주택가라서 자가용이 없이는 꽤 고생을 하게 되는 동네였다. 초행길에, 더군다나 밖은 아무리 해질 무렵이라고 해도 30도를 웃도는 불볕더위인데. 그렇다고 서두르는 그를 붙잡기 위해 지끈거리는 고통을 호소해오는 하반신을 무릅쓰고 침대를 벗어날 만한 용기는 없었다. 절름거리는 것도 짜증이 나 미치는데, 생전 처음 남자와 섹스를 한 나머지 아래가 찢긴 얼간이라는, 자신의 꾀죄죄한 정체를 그에게 들키는 건 죽기보다도 싫었다.

결국 그가 대충 택시나 버스를 잡아탔을 만한 시간까지, 인환은 몸을 웅크린 채 속죄하듯 조용히 가슴을 졸였다.

커튼 틈을 비집고 들어선 일몰의 붉은 기운이 긴 그림자들을 만들어내며 침실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하루 종일 굶은 위장에선 비로소 아우성을 쳐대며 음식을 부르고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찌르르한 고통이 척추를 뚫고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어차피 샤워도 해야 했고 찢어진 똥구멍도 고쳐야 할 일이었다.

무릎께에 간신히 걸쳐진 채, 피얼룩투성이로 구겨진 바지를 조심조심 벗어냈다. 조심하는데도 불구하고 똥구멍은 눈물이 찔끔 쏟아질 지경으로 아팠다.

가까스로 바지를 벗어 내던지자 비교적 정상적으로 보이는 오른쪽 다리에 비해 현저하게 가늘고 짧은 왼쪽 다리가 불길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씨팔, 이것도 다. 이딴 병신 새끼 몸뚱이를 그에게 보이느니 차라리 혀를 깨물고 만다, 씨팔.

끙끙대는 신음을 흘리며 거실까지 기어가 간신히 담배를 찾아 꼬나물었다. 얼얼한 하반신의 통증도 뇌수 깊이 파고드는 감미로운 니코틴 맛까지 떨어트리지는 못한다.

깊이 빨아들인 후 그만큼 길게 내뿜었다. 노곤한 만족감에 흐물흐물해지는 몸을 소파 위에 파묻으며, 혹시라도 남아 있을지 모를 그의 체취를 더듬어본다.

“……위…….”

격렬한 감정이 드러날까 차마 입 밖에 꺼내지 못했던 아름다운 울림을 비로소 가만히 불러들인다.

“……위위…….”

“……위위…….”

“……위위…….”

“니미 씨팔, 이름도 퍽큐로 멋지잖아!”

순간 그에 대한 사랑이 파도처럼 밀어닥친 나머지, 인환은 몸서리를 치며 소파 곳곳에 미친 듯이 키스를 퍼부어댔다. ‘섬유 유연제’에 뒤섞여 있는 자신의 희미한 정액 냄새 외엔, 그의 체취란 단 한 모금도 맡아지지 않는 소파가 야속해서 눈물이 찔끔 난다.

“뉘신지 모르지만 장인어른, 내 사랑에게 그렇게나 새끈한 이름을 붙여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렇게나 새끈하게 낳아주셔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이 븅신 새끼, 장인어른 은혜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좌우지간 암튼, 죽으나 사나 오매불망 절대로 잊지 않겠나이다!!!”

꿈만 같았다. 절대로 실감이 나지 않는다. 쪼다처럼 실없는 웃음이 쉴 새 없이 비어져 나온다. 마구마구 비어져 나온다. 그의 체취가 사라져서 울고, 그가 남긴 통증이 기뻐서 웃는다.

븅신. 울려면 울고 웃으려면 웃지. 울다가 웃고, 웃다가 울고, 똥구멍에 털 나도 내 알 바 아니다.

씹팔, 그와 키스를 하다니!

섹스를 하다니이잇!!!

온몸 구석구석에 남아 있는 붉은 키스마크가 꿈이 아니라고 말해준다. 찌릿찌릿한 똥구멍의 울림이 사기가 아니라고 말해준다.

실제는, 무수히 꿈꾸어왔던 온갖 종류의 현란한 성적 판타지를 단숨에 빛바랜 휴지조각으로 만들어버렸다. 침실 벽장 깊숙이 숨겨둔 ‘세계 명작 게이 포르노’들을 몽땅 다 싸잡아다 불을 싸지른대도 이젠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 잘빠진 근육질에, 시커멓게 발기한 말자지나 흑자지들을 아무리 눈앞에 한 다스로 대령해도 이젠 가소롭다고 담담하게 비웃어줄 수 있다. 온갖 SM에 변태, 강간, 집단 난교도 그와의 섹스만큼은 자극적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이제 안다. 빼어나게 수려한 그 어떤 AV 스타의 자지도 그의 것만큼 황홀하지 않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안다! 안다, 씹!!!

얼굴도, 몸도, 거기도, 어떻게 그런 완벽한 아름다움이 존재할 수 있는지, 곰곰 생각해보면 소름이 끼칠 노릇이다. 아니, 솔직히 객관적으로 그닥 아름다운 육체는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있다. 아름답다고 하는 지극히 세속적인 월계관을 그의 머리 위에 얹어주기엔 그는 지나치게 차갑고, 또 지나치게 황량하다. 세상의 더러움에서 미묘한 각도로 살짝 방향을 틀어버린, 더러움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듯 보이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실은 그것과는 180도 다른 공간, 시간도 장소도 그 단위를 측정할 수 없는 어딘가 이상야릇한 세상에서 그는 고고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절대로, 살아가는 동안 그러한 존재를 실제로 만나게 되리라고는 인환은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야, 막연한 그리움과 고독에 가슴이 사무치는 적은 있었어도, 정말로 자신이 목숨을 걸고 찾아내야만 할, 만약에 찾아내지 못한다면 일생 알 수 없는 그리움에 가슴만 치다가 허무하게 죽어 넘어질, 그러한 자신의 반쪽이 정말로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인생과 세상을 아직 모르는 팔푼이들뿐이라고, 인환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왔었다. 그리고 그런 존재를 만나지 못할 바에야, 시시껄렁한 연애질이나 하기 위해 바보들에게 자신을 통째로 드러내는 어리석은 짓거리를 한다는 것은 도저히 자존심이 용납지 않았다.

인환은 게이였다.

그것도 절름발이 게이.

뿐이냐, 씹팔.

하루라도 사랑과 섹스에 관한 알딸딸하고 노곤한 공상을 하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 만약 남에게 알려진다면 창피해서 혀라도 깨물고 죽어버릴, 한마디로, 사랑 중독증(섹스 중독증) 변태 게이다.

아무리 아무렇지 않은 척 스스로를 다독여봐도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핸디캡이요, 콤플렉스였다. 물론 그러한 악조건이 다른 바보들과 마찬가지로 인환의 타고난 존엄한 본질을 조금도 훼손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타락한 세속의 시선으로부터 한결같은 평정을 유지할 만큼 자신이 강하지 못하다는 것도 인환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몇 겹의 갑옷을 뒤집어쓴 채 스스로를 보호해야만 하는 것은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어차피 자신의 영혼과 공명해줄 진짜 반쪽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필요가 있을까? 오, 노! 절대로 사절이다! 밑지는 장사를 할 만큼 인환은 바보가 아니었다. 븅신이 아니었다. 비록 다리는 븅신일지언정.

―보호하기.

―견디기.

―그럼에도 신나게 인생을 즐기기.

세 가지 인생 지침은 이미 철이 들 무렵부터 확고한 굳히기 한판으로 승부가 정해져 있었다. 그랬다. 정해져 있었다. 정해져 있다고 생각해왔었다. 그랬는데…….

4월이었다.

해마다 교직 이수 과목을 신청해 꾸준히 들어두었던 것도, 모교인 우신고등학교에 얼씨구나 좋아라, 교생 실습을 신청한 것도, 그저 파릇파릇하게 귀여운 한창때의 아가들을 마음껏 눈요기하고 싶다는 컴컴한 욕망 외에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화가로 성공할 수 있을지 그닥 자신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생전에 단 한 번도 감히 아버지라고 부를 수도 없었던 그 좆같은 노인네가 남겨준 유산은 평생 놀고먹어도 남아돌 정도였으니까.

놀이 반, 인생 수업 반의 가벼운 기분으로, 인환은 그렇게 다홍빛 철쭉꽃이 한창 망울을 터트리고 있던 대(大) 우신고등학교의 캠퍼스로 겁대가리 없이 발을 들여놓았다.

물론 눈요기의 즐거움만큼 대가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어서, 인환은 실습 2주째를 맞으며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원인은 지나치게 예민한 자신의 성격에 있었다.

막 물이 오른 사내아이들의 단단한 육체를 만끽하는 흥분과 스릴은 잠깐이었을 뿐, 도무지 판에 박힌 속물덩어리 교사들과, 무엇보다도 수업을 통해 직접적으로 부딪쳐오는 아이들이 만만치 않은 스트레스를 주고 있었다.

세상의 쓴맛을 어느 정도 터득한 만큼, 세속에 어느 정도 찌든 어른들은 그나마 인환의 과도한 자의식에 그다지 큰 자극을 주지는 않았다. 인간의 미숙함이나 약함에 대해 적당한 동정과 무관심으로 반응을 하니까. 그러나 아이들은 다르다. 순수한 만큼 집요하고, 실패를 모르니 만큼 격정적이며, 또한 가혹하다.

단 한두 번의 수업으로 아이들은 인환의 날라리성을 완전히 파악해버렸고, 그다음은 모멸과 좌절의 연속이었다. 정식 미술 교사조차도 제대로 된 가치 평가를 받기 힘든 저 입시 위주의 교육 풍토 속에서, 슬렁슬렁 시간이나 때우고 가려는 날라리 미술 교생을 곱게 보아 넘길 아이들이 아니었다. 수업은커녕 야유하고 장난치며,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산만하게 떠돌아다니는 덩치(말 그대로 인환의 키를 껑충 웃도는 덩치들이었다)들을 제자리에 끌어 앉히는 것만 해도 버거웠다. 어차피 날라리 교사이니 수업이나 아이들에 대한 책임감 따위 남아 있을 턱은 없었지만, 그 당연한 보답일 아이들의 비웃음은 그대로 인환에게 상처가 되었다. 심지어는 다리가 불편한 육체적인 핸디캡조차도 저들의 놀림감이 되고 있었다.

어린아이들이니까, 아직 진짜 고통이라는 걸 모르니까, 그토록 타인에게 잔인할 수 있는 거라고…… 아무리 스스로를 위로하며 마음을 돌리려고 해도,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벌어지는 상처에서는 처절한 피고름이 흘러내렸다. 게다가 한 주만 더 지나면 대망(!)의 연구 수업! 보기만 해도 고통일 저 잔인한 얼굴들을 마주하고, 그 이상으로 무심할 속물들을 줄줄이 앉혀놓고 일생일대의 전쟁을 벌여야만 한다!

영웅이 필요했다. 조금 덜 상처받고, 조금 덜 고통스러운 나머지 2주를 보낼 수 있게끔, 가상의 시뮬레이션을 작동시켜줄 멋들어진 구원의 영웅이.

생각하면 기적 같았다. 정말 기적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그랬다. 영웅은 거짓말처럼 홀연 나타나주었다.

기적처럼 모습을 드러낸 새 영웅은, 그러나 조금은 기묘했다. 그럴 것이, 인생의 험악한 고비마다 심심찮게 등장해선, 뼛속까지 글러먹은 븅신 니힐리스트임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신나는 장인환식 낙천성에 화톳불을 당겨주곤 하던 기존의 영웅들과는, 그는 사뭇 달라도 너무 달랐다. 아니, 단지 다른 정도가 아니었다. 아예 존재 자체가 급수를 달리했다. 태생부터가, 여타 잔챙이 영웅들과는 같은 세상에 적을 두지 않았다.

가상의 시뮬레이션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만들어버리는 강력하고도 확고한 실감. 그 하나만으로 다른 모든 존재가 신기루처럼 빛을 상실해버리는 절대 존재. 절대 의미.

그랬다. 결코, 네버, 인환은 살아가는 동안 그러한 존재를 실제로 만나게 되리라고는 차마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정말로 자신이 목숨을 걸고 찾아내야만 할, 만약에 찾아내지 못한다면 일생 알 수 없는 그리움에 가슴만 치다가 허무하게 죽어 넘어질, 정말로 그러한 존재가 나와 같은 시간대에,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숨 쉬며 살아가주다니! 존재해주다니!

그랬다, 그랬다. 그렇게 존재해준 이가 그였다. 나타나준 이가 그였다.

이름도 존나게 근사한 문위(文偉)!

내 사랑, 내 생명, 내 자지…….

하느님, 눈물 나도록 멋있는 내 어린 연인, 그 이름도 찬란한 위위였다!!!

“조심하세요!”

……붙잡힌 오른팔이 끊어질 것만 같은 힘이었다.

부지불식간에 휘어 잡혀, 놀라고 자시고 할 여유조차도 없었다. 찰나 전에 무심히 본 신호등의 녹색 불빛이 채 뇌리에 각인되기도 전이었다. 인환은 엄청난 완력으로 뒤로 끌어당겨졌고, 땅바닥으로 무너지기 직전 귀청을 찢을 듯이 파고드는 클랙션을 울려대며 바로 코앞을 스쳐 지나가는 초대형 트럭을 설핏 보았다.

몸이 위로 붕 떠오르는 듯한 느낌 직후, 엉덩이로 심한 충격이 느껴졌다. 눈물이 찔끔 솟을 지경으로 아팠지만, 인환은 아픔보다도 먼저 바로 코앞을 스쳐갔던 화물차의 클랙션 소리에 더욱 놀라고 말았다.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얼굴로 화끈하게 열기가 치솟는 것도 느껴졌다. 하느님, 차에 치일 뻔했다!

“쯧쯧, 저렇게 난폭하게 차를 몰아서야……!”

“총각, 괜찮수?”

“트럭 모는 새끼들이 다 저렇다니까요. 오죽하면 거리의 무법자라고 그러겠어요!”

“천만 다행이네. 학생 아니면 큰일 날 뻔했구먼, 쯧쯧…….”

“…….”

인환 때문인지 횡단보도를 건너려던 다른 몇몇 행인들이 걸음을 멈춘 채 혀를 차는 소리들이 들렸다.

―씨팔, 파란불이잖아!

울컥 하고 짜증이 치밀었다. 졸지에 뺨이라도 맞은 기분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저도 모르게 험악한 욕설을 퍼부으려는 찰나, 단아하고 정중한 톤의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토해졌다.

그제야, 인환은 자신의 오른팔과 허리춤을 틀어쥐고 있던 우악스러운 완력을 비로소 자각했다. 엉덩이만큼이나 붙잡힌 곳이 아팠지만 뒤에서 인환을 감싸 안은 자세로 빠른 호흡을 토해내고 있는 남자에의 호기심이 표피적인 통각을 이기고 있었다. 앉은 자세 그대로 몸을 틀어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먼저 보였다.

새까만, 아기의 그것처럼 맑은 눈동자였다.

쌍꺼풀이 없는 대신 크기는 상당히 커서 쌍꺼풀이 있다면 되레 그 완전무결한 균형이 깨질, 몹시도 아름다운 눈매가 아기 같은 눈동자를 감싸고 있었다.

그다음은 늠름한 근육질의 다부진 몸매.

“……괜찮으십니까? 어디 다치신 건 아니죠?”

되풀이 내뱉어지는 나지막한 음성은 여전히 단아하고 정중했다. 순간, 등줄기로 서늘한 기운이 달려 나가며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이 느껴졌다.

―곤란해…….

무심코 뇌까렸다.

어째서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는지, 어째서 멍하니 넋을 잃고 남자의 눈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안 되는지, 인환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단정한 얼굴이었다.

길거리에서 흔히 마주치기 힘들 정도로 드물게 아름다운 얼굴.

그러나 그 정도로 잘생긴 얼굴은 TV나 영화를 통해 흔히 볼 수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더구나 그 수많은 핸섬한 영화배우들에 비해 눈앞의 남자는 이목구비가 지나치게 뚜렷하고 강인했다.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눈꼬리며, 역시 끝이 위로 빠진 숱 많은 눈썹, 앞으로 유난히 도드라져 얼굴 전체에 깊은 음영을 드리우고 있는 이마, 크고 뭉툭한 코, 도톰하게 살집이 있는 커다란 입술이며 강인한 턱선에 이르기까지…… 흡사 라틴계 백인 혼혈이 연상될 만큼 한결같이 너무나 큼직큼직하고 강렬하다.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전에 억센 인상이 먼저 눈에 들어와서, 마치 조폭이나 양아치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물론 그건 거의 스포츠형에 가까울 정도로 짧게 자른 학생 커트 탓도 있을 테지만). 가장 치명적인 것은 저 서늘한 무표정! 일생 단 한 번도 웃어본 적이 없을 것만 같은 무시무시한 인형의 무표정이다!

결론적으로, 그렇게까지 심장이 철렁 내려앉을 만큼 쇼크를 받을 미모는 아니란 얘기. 그런데 어째서……?

“괜찮으시면 좀 비켜주시겠습니까? 좀 바빠서요.”

멍하니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던 인환을 향해 남자가 좀 더 단호해진 어조로 명령했다.

조폭의 명령에 누가 이의를 달겠는가. 인환은 멍청해진 와중에도 허둥지둥,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해 비틀거리는 추태를 연출하며 남자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인환이 절름거리며 자세를 가다듬는 사이, 조폭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구겨진 책 배낭이며 먼지투성이가 된 바지를 탈탈 털었다. 미처 고맙다는 인사를 할 여유도, 정신도 없었다. 마침 신호등이 다시 파란불로 바뀌었고, 조폭은 그 늠름한 장신의 체구를 이끌고 유유히 사라져버렸다.

하굣길이었다.

장소는 학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전철 역 앞, 횡단보도.

토요일 오후, 보충 수업이 없기 때문인지 인환과 같은 날라리 교생들과 마찬가지로, 인환의 저 철천지원수들(우신고등학교 학생들)도 삼삼오오 군집을 이루며 우르르 교정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조폭은 원수들과 똑같은 모양새의 교복 차림이었다.

흰 바탕에 연초록 줄무늬가 들어간 포플린 셔츠에 암녹색 싱글 재킷, 그리고 같은 색의 팬츠.

도무지 미적 감각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는, 흉악한데다 촌스럽기 짝이 없는 디자인의 그것.

한동안 멍하니 조폭이 사라져버린 전철역 쪽을 응시하다가 문득 그 사실을 깨달아버린 인환은, 다시 한 번 등줄기로 서늘한 기운이 달려 나가며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껴야 했다.

그날 밤, 평소 좋아하는 시추에이션의 게이 필름을 틀어놓고 자위를 하는 와중에 문득 새까만, 아이의 그것처럼 맑은 눈동자가 인환의 뇌리를 스쳤다.

물론 단숨에 눈동자의 주인을 자각해버렸고, 인환은 별로 오래 손목 운동을 할 필요도 없이 그 즉시로 싸버렸다.

두근두근 세차게 뛰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새로운 영웅의 도래를 알리고 있었다.

그가 철천지원수들 가운데 하나이며, 따라서 적어도 여섯 살 이상은 연하이리라는 자괴감은 묘하게 생생한 욕구를 달래는 데 아무런 지장을 주지 못했다. TV 스크린에서는 변태적인 체위의 서양 남자 둘이 뒤엉킨 채 서로의 자지를 빨고 있었다. 위에서 빨고 있는 쪽은 인환 자신으로, 밑에서 빨고 있는 거구의 근육질은 신(新) 영웅으로 대체시키자 전신으로 찌릿찌릿한 전율이 흐르며 쾌감이 극에 달했다.

그 밤, 도무지 몇 번이나 싸버렸는지는 전혀 기억에 없다.

자지 끝으로는 쓰라린 아픔이 달렸고, 눈앞이 노래진 나머지 더 이상 TV 스크린을 쳐다볼 엄두도 못 내게 됐을 때, 인환은 질펀하게 젖은 침대 시트에 마지못해 몸을 무너뜨리며 히스테릭한 웃음을 터트렸다.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기쁨에 겨운 나머지 포식한 악어 새끼마냥 닭똥 같은 눈물을 줄줄 흘려대고 있었다.

그 새로운 영웅이 인환의 인생 편력에 심심찮게 등장하곤 하던 기존의 영웅들과는 몹시 다르다는 판단을 하기까지는, 당연한 것처럼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학교에 배치되자마자 그렇게 눈에 불을 켜고 풋풋한 영계들의 아름다움을 쫓았음에도, 어째서 2주가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야 그 ‘왕 칼있쑤마’를 발견하게 된 건지 의아할 지경이었다. 아무리 인환이 담당하고 있지 않은 2학년생이라고 해도 여태까지 그를 몰랐다는 자체는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았다. 시선을 확 잡아끄는 수려한 용모 이외에도, 저 영웅의 독창적인 면모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독보적이고 탁월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정교사들 사이에서도 영웅의 입소문은 자자한 편이었다. 그럴 것이 교사가 가장 좋아하는 타입, 입학하고 단 한 번도 전교 수석을 놓친 적이 없는 수재에 모범생이었던 거다(모습은 조폭이건만!). 따라서 학교 재단이 주는 전액 장학금 혜택을 받고 있었는데, 더더욱 매력적인 건 그가 부모가 없는 고아에 어린 두 동생을 돌보는 소년 가장이라는 점이었다.

그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여교사들은 물론 일부 남자 교사들까지 묘한 흥분에 차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그를 칭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정말 대견한 아이’ ‘요즘엔 거의 찾아보기 힘든 가르치는 보람이 있는 아이’ ‘예의도 바르고 성실한데다 통솔력이 있고(반장에 학생회 임원이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높은 신망을 받는(솔직히 이 부분은 사실이 아니다. 신뢰라기보다는 두려움에 기반을 둔 지배력이 그 높은 신뢰의 원인이었다. 감히 그 누구도, 저 과묵하고 무표정한 조폭의 말을 거역하지 못했다) 아이’ ‘지독하게 불우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떳떳하고 당당한 어른스러움’ ‘정말 도와주고 싶지만 자존심이 강해서 제대로 말도 붙이기 힘든 아이’ 등등…… 전설은 끝이 없었다!

영웅은 늘 혼자였다. 정말이지 ‘영웅’답게도.

반장이라서 형식적으로 어울리는 몇몇 아이들은 있었지만 그건 그야말로 형식적일 뿐이고, 그는 대부분 홀로 있기 일쑤였다. 대개의 아이들은 동경과 두려움과 경외에 기초한 약간의 거리를 유지하며 그에게 접근했다. 물론 그 용기 있는 접근은 대체로 쌀쌀맞기조차 한 담담한 거절로 고배를 마시기 일쑤였지만.

‘범생’에 ‘거만과(科)’라면 당연히 따라오는 집단 따돌림도 영웅에겐 통하지 않았다. 따돌림을 당하기엔 영웅의 파워란 실로 막강해서, 저 학교의 어둠을 지배하는 양아치들조차도 그에게 함부로 하지 못했다(입학하고 얼마 안 돼 그를 집적거리기 시작한 3학년 짱과 장장 사흘에 걸친 일생일대의 혈투를 벌인 끝에 결국 짱이 무릎을 꿇고 말았다는 유명한 전설도 있었다!).

하교 시간이면, 넘치는 혈기를 주체 못 해 끼리끼리 모여 농구며 축구며 소란스러운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는 덩치들 사이에서 홀로 운동장을 뛰고 있는 영웅을 볼 수 있었다.

삼삼오오 모임을 만들어 즐기는 패거리들 사이에 끼어 혼자 운동장을 도는, 저 지독할 정도로 배타적인 모습은 경이를 넘어 그로테스크 그 자체였다. 물론 기괴하기 짝이 없는 그 모습을 당연한 듯이 받아들이고 있는 아이들이며 교사들을 보아하니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야말로 경이, 경이, 경이였다!

영웅의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사이, 당연한 것처럼 기존의 쓰라린 고뇌들은 어느 순간부터 지극히 사소한 문제로 간과되기 시작했다. 물론 저 철천지원수들의 방자하고 악의적인 행태는 변함이 없었지만, 인환은 더 이상 아이들이 무슨 짓을 하건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그토록 두려워했던 연구 수업조차도 대강대강 형식적으로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모든 감정적인 호기심과 흥분과 열정은 온통 자신의 근사한 영웅에게로만 쏠려, 다른 조악한 인간 떼들(!)에게 나눠줄 여분이 없었다.

점심시간이며, 방과 후며, 특별활동 시간까지, 조금이라도 자유 시간이 나는 때면 인환은 늘 2학년 교사 쪽으로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마치 스토커가 된 기분이었다. 아니, 진짜 스토커였다. 그것도 집요하고 끈끈하고 변태적인 최악의 스토커!

두더지처럼 킁킁대며 여기저기 기웃거려도 옷자락 한 조각조차 발견할 수 없는 날은 마치 세상의 종말이라도 닥친 것처럼 우울했다.

복도를 서로 스쳐가며 단 한순간이라도 영웅의 모습을 본 날은 마치 천국에라도 오른 것처럼 행복해졌다. 그런 날 밤은 침대 시트가 땀과 정액으로 질펀해지는 것은 물론이었다.

영웅은 인환을 기억하지 못했다. 당연하다. 지나다가 우연히 구해주었을 뿐, 그에게 있어 자신은 관심권 안에도 미치지 못하는 여타 평범한 인간버러지들과 다르지 않을 터였다.

그 생각을 하면 우울해졌다. 기존의 영웅들처럼 그저 상상의 나래 속에서 범하거나 안기는 것만으로는 어쩐지 만족하지 못하는 자신이 있었다. 뭐 그렇다고는 해도, 덕분에 고통스러웠던 실습 기간을 무사히 버티게 해주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인환은 영웅의 재림에 만족해했다. 아니, 만족하려고 애썼다. 또한 만족할 것을 의심치 않았다.

진심으로 그에게 빠져들게 된 그날, 새 영웅이야말로 자신이 무의식 속에서 그토록 찾아 헤매고 그리워했던 영혼의 반쪽, 바로 자신의 소울메이트라는 사실을 비로소 자각하게 된 그 순간까지는.

아침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봄비였지만, 봄비인 만큼 한동안 초여름 날씨를 방불케 할 정도로 후덥지근했던 기온은 단숨에 급강하해, 옷깃으로 파고드는 바람은 소름이 돋을 만큼 쌀쌀했다.

어제 알아낸 그의 등교 시각(놀랍게도 그의 별명 중 하나가 ‘자명종’일 정도로 그는 시간관념이 철저했다)에 맞춰서 지하철 역 근처를 어슬렁거리던 인환이었다. 색색의 우산들로 홍수를 이루는 대로변 한가운데서 초조하게 서성이며 면 팔리는 짓을 한 지 30분 남짓, 마침내 주워들은 정보에서 앞뒤 30초도 어긋나지 않은 8시 10분에 그가 지하철역 출구를 빠져나오고 있었다(정말로 ‘자명종’이 아닐 수 없다!).

두근…….

똑바로 앞만을 주시하는 뚜렷하고 강인한 이목구비에 홀린다.

두근…… 두근…… 두근…….

189cm의 큰 키에 꽉 짜인 근육질의 다부진 체격이 긴장감을 일으키며 느릿느릿 유연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마냥 그림이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그의 주위로 마치 무지개가 뜬 것처럼 찬란한 후광이 비치는 것만 같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가슴이 뛴다.

불이라도 삼킨 것처럼 얼굴이 뜨겁다.

씨팔, 촌스러운 교복도, 살이 하나 부러진 초라한 모양새의 검정 우산도 그 찬란한 아름다움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못하고 있다!

입에 물고 있던 담배가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인환은 허기진 시선으로 정신없이 영웅의 모습을 좇았다. 적당한 간격을 두고, 학교로 향하는 그를 부랴부랴 따라갔다.

인환을 알아보고 형식적이나마 인사를 건네는 웬수떼기들이 지긋지긋했다. 답례를 하느라 자꾸만 그를 시야에서 놓치기 때문이었다.

학교 정문을 200미터쯤 앞에 둔 골목 어귀에서 느닷없이 그가 걸음을 멈췄다.

거침없던 발걸음이었기에, 순간 인환은 자신의 스토커 짓이 발각된 건 아닌가 싶어 한순간 숨을 삼켰다. 물론 다행스럽게도 원인은 인환이 아니라 상자 안에 버려진 새끼 고양이 두 마리였다. 갓 한 달이 지났을까 말까 한 그 조그만 생물들은 전신주 밑, 갑자기 쏟아진 비에 흠뻑 젖은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마치 잡아먹기라도 할 기세로 그 가련한 생물들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한순간, 인환은 그가 고양이들을 상자째 발로 차버리는 것은 아닌가 싶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숨 막히는 몇 분이 흘러갔다. 인환 말고도 앞을 다투어 교문을 향하던 웬수떼기들이 그의 사나워진 표정을 보고 있었다. 연민을 느끼면서도, 조폭의 무시무시한 표정에 겁을 집어먹은 나머지 그들은 감히 조폭을 제치고 고양이 상자 앞으로 다가서지 못하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지그시 입술을 깨무는가 싶더니 그는 여전히 험악해진 얼굴로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처음처럼 여전히 거침없는 걸음걸이였다.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리며 인환이 막 그를 따라가려던 찰나, 그가 다시금 우뚝 걸음을 멈췄다.

철렁.

20미터쯤 앞서갔던 그가 상자 앞으로 되돌아오는 데는 단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또다시 숨 막히는 주시.

표정 또한 여전히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자신과의 싸움은 몇 분 동안 계속되고 있었다. 단 몇 분일 뿐이었지만, 지켜보는 인환에겐 마치 영원처럼 길고 긴 악몽으로 느껴졌다.

저주와 증오와 욕설이 그 단아한 얼굴을 흉악하게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연민과 슬픔과 허무가 그 다부진 어깨를 인정사정없이 후려갈기고 있었다.

일찍이…….

인환은 그토록 처절한 내면의 사투를 목격해본 적이 없다…….

평화는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추적추적 내리던 빗줄기가 점점 더 굵어지고 있었다. 힐끗힐끗 그의 사투를 훔쳐보며 지나치던 아이들의 발걸음도 점차로 조급해지고 있었다.

그가 허리를 굽혀 고양이를 주워들었다.

상자째 들어 올리기엔, 이미 물을 흠뻑 먹어버린 그것은 아무런 보호대가 되지 못했다. 조그만 생물 두 마리는 그의 손에 안긴 채 안전한 여행길을 떠나기 시작했다. 조폭의 표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거짓말처럼 평화를 되찾아, 종래의 인형 같은 무표정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전리품을 양손에 거머쥔 채, 그는 학교와는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인환이 미처 알지 못했던 뒷골목으로 빠지더니 몇 개인가의 건널목과 횡단보도를 거쳐 어느 아침 재래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곧 학교 정문이 닫힐 시각이었지만 느릿느릿 유연하게 움직이는 그의 발걸음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잠깐 실례 좀 할 수 있을까요?”

마침내, 야채와 과일을 판매하는 어느 좌판 앞에 멈춰 선 그가 주인 아낙에게 꾸벅 인사를 하며 양해를 구했다. 예의 바른 인사 때문이라기보다는, 아름다운 외모거나 조폭 같은 인상 때문에 무심코 자그마한 공간을 터준 아낙은, 감히 뭐라 타박도 못 하고서 고양이 두 마리가 새 주인을 찾아갈 때까지, 가뜩이나 드문 아침 손님을 오는 족족 내쫓고 있는(물론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조폭의 존재를 울며 겨자 먹기로 감수해야만 했다.

고양이가 새 주인을 찾는 데는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지만 ‘자명종’일 그도, 날라리 미술 교생인 인환도 당당히 지각을 하게 된 것은 물론이었다.

마침내 전리품들을 모두 정리하고 홀가분한 무(!)표정으로 시장을 벗어나는 그를 지켜보며, 인환은 살아오는 동안 그토록 기를 쓰고 쌓아올린 방어벽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져가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무너진 방벽 틈으로 노도처럼 밀려들며 자아를 송두리째 집어삼키고 있는 격렬한 사랑을 확실하게 자각해가고 있었다.

기쁨도 아니고 슬픔도 아닌, 기묘한 설움이 가슴을 꽉 채운 나머지 숨도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굵어진 빗줄기가 굉음을 울리며 노점상의 천막 지붕들을 아프게 때리고 있었다.

바람은 차고 주위는 온통 잿빛이었다.

언제 잃어버렸는지 알 길이 없는 우산도 아랑곳 않고서, 인환은 억수같이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에 전신을 내맡긴 채, 다시금 정신없이 영웅의 뒤를 쫓았다.

눈시울을 아프게 자극하며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는 뜨거운 눈물이, 부디 이 무심한 빗줄기에 온전히 씻겨나가길 기도하며.

……그랬다.

처음 자각하게 된 사랑의 정체는 유희가 아니었다.

침대 속 오르가슴도 아니었다.

그것은 고통이었다.

폭군처럼 지독하게 파괴적인 그것은, 절대로 보답받지 못하리라는 신탁을 되풀이하며 인환의 넋을 끊임없이 담금질해대고 있었다.

이 지독한 사랑이 자신을 파멸시키리란 걸, 언젠가 반드시 그렇게 되고 말리라는 걸, 인환은 알았다.

그럼에도 자신은 도저히 되돌아설 수 없다는 것도, 아니, 되돌아설 의지조차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날부터 인환은 스토커 짓을 그만두게 되었다.

실습이 끝나는 마지막 나흘 동안, 인환은 참혹한 고통 속에서 그를 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견디는 훈련을 했다.

물론 스토커 짓을 그만둔다고 해서 사랑까지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설령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 있을 자신이 아니었기에.

밤마다 그를 뇌리에 떠올리며 지쳐 떨어질 때까지 자위를 했다.

더 이상 포르노 필름은 필요치 않았다.

일상의 의무에서 놓여나는 틈틈이 온갖 종류의 시뮬레이션으로 위치를 바꿔가며 그와 가상의 사랑을 나눴다. 마치 열병에라도 걸린 것만 같았다. 실습 마지막 날에는, 이러다가 정신이 돌아버리는 게 아닐까 싶은 걱정까지 들었다. 정말로 정신이 헤까닥 돌아서, 그가 있는 2학년 교실로 단숨에 내달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사랑을 호소하지 않을까 더럭 겁이 날 지경이었다.

물론 오랜 동안의 극기와 가상 연애 체험이 극단으로 치닫는 것을 막아주었다.

다시 학교로 되돌아와 졸업 작품에 매달리는 두 달 동안, 미칠 듯한 열병 또한 조금씩 치유의 기미를 보이는 것만 같았다.

물론 매일 밤의 자위도, 가상의 연애 시뮬레이션도 절대로 그만두지는 않았지만, 이제 더 이상 실제의 그를 볼 수 없을 것이라는 끔찍한 현실이 가져다주는 고통도 그나마 견딜 만해지고 있었다.

지칠 때까지 그림을 그렸다. 술자리가 있는 친구들과의 모임엔 하나도 빠지지 않고 참석해 필름이 끊길 정도로 마셔댔고, 다음 날이면 숙취로 깨질 듯이 아픈 머리를 움켜쥐고 끙끙대는 매일이 계속되었다.

일주일이 가고, 한 달이 가고, 그리고 또 한 달이 흐른 후의 어느 날.

초인적인 의지로 간신히 스스로를 지탱하고 있던 인환을 마침내 인정사정없이 무너뜨리는 사건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계기는 오주희였다.

인환의 대학 3년 선배.

인환처럼 서양화를 전공한 오주희는 같은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공부하고 있었고, 가을에 있을 그룹전에 인환의 작품도 함께 전시해줄 것을 제안했다.

달리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오주희와는 입학 직후 서클 활동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기질 면으로나(인환처럼 그럭저럭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거침없는 오렌지족이었다) 에너지 면으로나 잘 맞아, 4년 내내 교분을 다지는 동안 3년 선배임에도 친구처럼 허물이 없게 된 여자였다.

대학로에서 그룹전 참가자들과의 모임이 예정된 어느 날 오후, 제법 일찍 모임 장소에 도착해 나머지 일행을 기다리고 있던 인환은 출입구에 서서 막 연인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던 오주희를 발견했다.

여자는 중학생처럼 나풀거리는 상큼한 단발머리를 뒤로 한껏 젖히고, 늠름한 장신의 남자와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역시 거침이 없는 화통한 여자라고 감탄해 마지않으며, 인환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한쪽 벽면이 유리로 된 카페 안에선 인환뿐만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이 때 아닌 진한 러브신을 연출하고 있는 닭살 커플을 눈이 휘둥그레져서 지켜보고 있었다.

오주희가 남자의 품에서 떨어지며 잘 보이지 않던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뚜렷하고 강인한 이목구비였다.

189cm의 큰 키에, 꽉 짜인 근육질의 다부진 체격이었다.

내 사랑이었다!

니미, 씨부럴! 바로 눈앞에 벼락이 떨어졌다 해도 그렇게까지 충격을 받지는 못했으리라!

남자는 갔고, 오주희는 안으로 들어섰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오주희와 어떻게 인사를 하고, 그 외 다른 서클 친구들과도 어떻게 얘기를 나누고, 어떻게 밥을 처먹고, 또 이어지는 술판까지 갔는지, 인환의 머릿속은 그저 먹통처럼 새까맣기만 했다. 고주망태가 될 때까지 술을 푸고, 다들 도무지 운전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대학로 가까이에 아틀리에를 가지고 있는 일행 중 하나의 집으로 몰려가 이젤과 캔버스들이 널려 있는 틈바구니에서 휴지처럼 구겨져 잠을 잤다.

망치로 머리를 깨부수는 고통에 몸부림을 치며 일어나 물을 한 사발 들이켜고, 화장실에 가서 오줌을 누고, 마지막으로 샤워까지 마치고 나서야 인환은 설핏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직 새벽이었다.

쓰라린 위의 통증과 마음의 아픔에 전율하며, 인환은 브래지어와 팬티 바람으로 맨바닥에 널브러진 채, 다른 서클 친구들과 뒤엉켜 코를 골며 자고 있는 오주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태어나서 그렇게까지 사람을 미워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인환은 당시의 그녀를 저주하고 또 저주했다. 마음속으로 따귀를 갈기고, 화냥년이라고 욕을 퍼붓고,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다고 씨근덕거리며 맹세를 찔렀다.

그랬단 말이지. 이년의 입술에 키스했단 말이지. 이년의 젖을 빨고, 이년의 보지 속으로 들어갔더라는 말이지!

눈물이 흘러나왔다. 더 이상 지켜보았다간 정말로 그녀를 발로 차버릴 것만 같아, 인환은 쫓기듯 아틀리에를 빠져나왔다.

악마와 같은 교활함으로 치밀한 계획을 세운 뒤, 오주희와 그의 관계를 알아내는 데는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찍이 그래본 적이 없을 만큼, 더할 나위 없이 자주 여자의 오피스텔과 아틀리에를 번갈아 들락거렸다. 초밥과 전복죽 같은, 여자가 좋아하는 뇌물을 그때마다 들고 간 것은 물론이었다. 같이 밥도 먹고, 가벼운 술자리도 함께했다. 세 번째인가의 술자리 끝에, 인환은 마침내 벼르고 별렀던 화제를 끄집어냈다.

먼저, 그녀가 걱정된다는 입에 발린 소리를 하며 현재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애인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폭탄 선언을 했다. 사색이 되는 여자의 표정에 아랑곳 않고, 그가 자신이 교생 실습을 나간 학교의 학생이라는 점을 들어, 어떻게 미성년자를 데리고 놀아날 수가 있느냐며 독침을 쏘았다.

속물들과 다름없는 편협하고 단선적인 비판의 잣대에, 물론 그토록 당찬 여자가 순순히 항복할 까닭은 없었다. 길길이 날뛰며 인환을 향해 개새끼, 소새끼, 씨발 잡놈, 온갖 화려 찬란한 욕설의 퍼레이드를 쏟아붓던 여자는, 마침내 오피스텔이 떠나갈 만큼 커다란 소리로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여자는 오랜 시간, 너무나 서럽게 꺼이꺼이 울었다.

관계의 정체가 ‘애인 사이’가 아닌 ‘원조 교제’일 뿐이라는 걸 알았을 때, 그리고 그 ‘원조 교제’가 어떠한 성질의 것인가를 여자를 통해 알았을 때, 인환은 여자에 대해 품고 있던 독기와 증오심을 순식간에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독기와 증오심은커녕 여자에 대한 동병상련의 아픔으로 인환은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물론 여자는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왜 아니겠는가. 도대체 그를 알고 나서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게 되레 더 이상할 노릇이 아닌가 말이다.

사랑하는 만큼 그녀가 받는 고통은 상상을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녀의 고통 또한 인환의 고통과 결코 다르지 않기에. 절대로 보답받지 못할 사랑. 보답을 기대할 수도 없는 사랑. 그게 괴로워 관계를 끊고 싶어도 도저히 감정으로는 해결이 안 나는 지독한 사랑.

그는 얼음이었던 거다.

절대로, 그 어떤 이도 녹일 수 없는, 끔찍할 정도로 견고하고 단단한 얼음성.

그러나 인환은 그런 형태로나마 일시적으로 그를 소유할 수 있는 오주희가 부러웠던 것도 사실이었다. 적어도 그녀는 당당하게 돈을 들이대며 그를 부릴 수 있는 자격은 얻었으니까. 적어도, 얼마를 줄 테니 나에게 키스를 해, 나에게 박아줘 하고 어리광을 부릴 수는 있을 테니까.

그러나 자신은 어떤가?

사랑 고백은커녕 하룻밤의 위로를 사기도 불가능한 변태 게이의 처지가 아닌가?

다시 두 달의 시간이 더 흘러갔다.

조금 나아가는 듯 보이던 열병은 오주희의 고백과 더불어 급반전을 치더니, 점점 더 악화일로에 접어들고 있었다.

마치 마약 중독자라도 된 것처럼, 인환은 끊임없이 오주희의 곁을 맴돌았다. 물론 실연의 위기에 처한 친구를 그냥 내버려둘 수 없다는 핑계로.

인환의 비열하고 음습한 속내를 꿈에도 모를 여자는, 인환의 난데없는 우정의 발작에 고마워하며 거의 파국의 위기에 처한 자신의 연애사를 줄줄이 늘어놓기 일쑤였다. 비통한 흐느낌과 함께 내뱉어지는 여자의 얘기를 듣는 것은 한편으론 기쁨이자 또 한편으론 고통이었다. 여자의 눈과 귀를 통해 연인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이 기쁨이라면, 여자는 물론이고 그 외 두세 명쯤 더 될 고객들을 안을 연인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지옥이었다. 여자를 만난 날은 당연한 것처럼 미친 듯이 술을 푸고 미친 듯이 자위를 하는 날이 돼버렸다. 물론 그만둬야 한다는 걸 알고는 있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절대로 희망이 없는 관계라는 것을.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더 이상 여자를 만나는 것은 그만둬야 함을.

그럼에도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인환의 발걸음은 어느새 여자의 오피스텔로 향하고 있었다. 여자의 아틀리에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여자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차라리, 이럴 바엔 죽을 때 죽더라도 연인을 한 번 만나서 고백을 하고 결판을 내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끔찍한 연옥의 시간은 앞으로도 뒤로도 전혀 움직일 조짐을 보이지 않은 채, 인환의 심장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그렇게 두 달여의 시간을 흘려보내고 난 후, 8월의 두 번째 주 금요일.

기적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방법으로 불거졌다.

현관문은 3분의 1쯤 열려 있었다.

칠칠치 못한 여자였다. 금요일 오전, 여자 혼자 사는 오피스텔 현관문을 거리낌 없이 열어놓고 있는 여자의 무신경함에 혀를 차며 인환은 집 안으로 들어섰다.

집 안은 조용했다.

무언가 어둡고 탁한 기척에 인환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키며 느슨해졌던 주의력을 일깨우지 않을 수 없었다. 여자가 부탁했던 물건을 현관 바닥에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현관 바닥에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여자의 분홍 슬리퍼며 크림색 스니커, 조깅화들에 끼어 꽤 낡은 검정색 로퍼가 보였다. 사이즈가 족히 280mm은 껑충 넘어 보일 정도로 큼지막한 그것은 어딘가 낯이 익은 데가 있었다.

젊은 남자의 신발.

오전 11시.

야행성인 여자의 습관을 고려해볼 때 손님을 맞기에는 조금 이른 시각이었다.

여자는 인환이 서 있던 현관으로부터 4∼5미터쯤 떨어진 거실 한쪽 구석에 무릎을 꿇은 채 태아처럼 몸을 말고 있었다.

여자가 오피스텔에서 뭉갤 때 대개 그렇듯이, 무릎이 튀어나온 낡은 트레이닝복 차림이 아니라 레몬빛 시폰 원피스로 몸을 감싸고 있는 것도 기묘했다. 중학생처럼 상큼하게 자른 단발머리가 얼굴을 거의 덮을 정도로 흘러내려 있어 표정을 볼 수는 없었다.

남자는 여자의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인환 쪽으로 등을 돌리고 있어 남자의 얼굴 역시 잘 보이지 않았다.

꽤 큰 키(아마도 189센티일 것이다).

다부진 근육질의 몸매(아마도 언뜻 보면 조폭같이 위압감을 줄 것이다).

남자의 옷차림은 도무지 미적 감각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는, 흉악한데다 촌스럽기 짝이 없는 디자인의 그것(흰 바탕에 연초록 줄무늬가 쳐진 반팔 포플린 셔츠에, 암녹색의 팬츠였다).

거미줄에라도 걸린 듯 온몸을 꼼짝할 수가 없었다.

나가야 한다고, 어서 빨리 나가라고 이성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물론 인환은 그 잔혹하기 짝이 없는 명령에 자신이 조금도 귀를 기울이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주희 씨…….”

단아하고 정중한 톤의 목소리가 여자를 부른다.

침착하고 낮은 톤은 분명한 성인 남성의 울림이었지만 어딘가 청량한 느낌이 들었다. 바닷가, 새벽녘의 잔잔한 파도 소리처럼.

그런 느낌이 든 것은 아마도 남자의 목소리 자체가 주는 것이라기보다 남자의 낯익은 옷차림이며 남자가 사용한 호칭 탓이 클 터였다.

“……주희 씨.”

시간 간격을 두고 덧붙이는 채근에도 여전히 대꾸가 없는 여자의 어깨를 남자가 살며시 쥐자 여자의 머리카락이 아주 약간 흔들렸다.

“……신경 쓰지 말고 가. 괜찮아.”

여자의 젖은 목소리는 인환이 익히 알고 있는 여자의 그것이 아니었다.

웬만한 일에는 대충 건성이고, 거침이 없으며, 그런 성격상 심각한 연애보다 대다수 남자들과의 일회성 섹스를 즐기는 오주희가 아니었다. 미성년자 애인과 사랑에 빠졌다고 해도 여전히 기승스럽고 드세게 애인의 냉정을 성토하곤 하던 저 오주희가 아니었다.

여자이기 이전에, 뚝심 있고 정열적인 젊은 화가라는 사회적 직함이 더 잘 어울리던 오주희는 그 순간, 순수하게 한 여자가 되어 있었다. 남자에게 버림받고 있는 가련한 여자의 외피를 쓰고 있었다. 아니, 외피가 아니라 골수까지, 그 순간 그녀는 철저하게 여자였다.

“……커피 타드릴까요?”

배려라기엔 별로 성의 없는 어조로 남자가 물었다.

“…….”

“……뭐라도 마셔두는 게 좋아요.”

“그만 가. 간신히 참고 있으니까 폭발하면 서로 험한 꼴 보게 될 거야. 끝내는 마당인데 자존심 정도는 지키고 싶어.”

울음을 삼키느라 잔뜩 굳어 있는 여자의 목소리에 인환은 가까스로 정신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뭐라고 해도 자신은 지금 여기 있을 자격이 없는 존재였다. 분명 상황이 좋지 않을 때 들이닥친 불청객이었다.

사흘 전, 액자 가게에 맡긴 그림을 찾아다달라고 부탁한 쪽은 그녀였다. 먼저 방문을 청한 것은 그녀였다. 그러므로 저 이별은 준비되었다기보다는 돌발 사태 쪽에 더 가까우리라.

나가야 한다. 나가야 해. 얼굴을 보고 나면, 그 눈을 보고 나면, 그러면…… 그래…… 더 이상 참지 못해…… 견디지 못해…… 못해. 못해. 못해…….

“……죄송합니다…….”

“…….”

“……죄송합니다…….”

되풀이해 내뱉는 그의 나지막한 음성은 언젠가 들었던 그대로 여전히 단아하고 정중했다.

곧 쓰러질 것만 같은 다리를 끌고 현관 밖으로 나왔다.

초인적인 의지로 엘리베이터 앞까지 걸어가긴 했지만 도저히 하향 버튼을 누를 수 없었다. 무얼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 같은 건 아예 없었다. 의지 또한 없었다. 그저 다만, 다만, 더 이상 상상의 나래만으로는 안 된다는 거였다. 더 이상 공상 속에서 나누는 섹스만으로는 안 된다는 거였다. 더 이상 자신을 억누른다면, 마음을 죽인다면, 자신의 정신은 그대로 박살이 나버릴 거라는 걸 인환은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마침내 여자의 오피스텔을 나서는 그가 보였다.

똑바로 앞만을 주시하는 뚜렷하고 강인한 인상의 이목구비가 엘리베이터 옆에 주저앉아 넋을 놓고 있는 인환을 힐끗 바라본다. 잠시 갸웃하는 듯하다가 이내 외면하곤 하향 버튼을 누른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피부를 뚫고 튀어나올 것처럼 뛰고 있어 차마 그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하고 정신없이 계단을 뛰어 내달린다. 7층이라니 너무하다. 가버릴지도 모르는데. 건물 앞에서 바로 택시라도 탄다면. 만약 그러기라도 한다면. 정말로 이제 다신 그를 볼 수 없는데. 그런데. 그런 건데…….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니, 아예 생각을 하는 기능이 정지해버렸다. 그저 본능이 시키는 대로, 목숨이 명하는 대로 자신의 몸을 그에게로 떠밀고 갔다. 서두르는 만큼 절름거리는 다리가 저릿저릿했지만 절대로 자각조차 하지 못했다.

뛰면서 층수를 세고, 마침내 1층에 도착해서 반대편 현관으로 뛰었다. 그러리라고 예상을 했음에도, 보이지 않는 그의 모습에 가슴이 철렁했다. 숨이 턱에 닿아 현관문을 밀치고 아스팔트가 깔린 길 위에 섰다. 점점 더 기세를 높여가는 정오의 태양볕 아래, 아지랑이처럼 가물가물, 막 건물 모퉁이를 돌아서려는 그가 보였다.

“문위!!!”

자신의 목소리일 리가 없는 비명 같은 외침이 인적이 드문 조용한 골목길을 화들짝 일깨웠다.

긴장감을 일으키며 느릿느릿 유연하게 움직이던 근육질의 몸이 우뚝 걸음을 멈춘다.

천천히 돌아서는 그가 보였다.

얼음처럼 표정이 없는 단정한 얼굴이 보였다.

골목길엔 그와 단둘뿐이었으므로 어린아이처럼 맑은 눈이 다이렉트로 인환에게 떨어졌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귓속에선 윙윙거리는 이명이 들렸다.

웃음을 지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가볍고 가벼운 우리네 인생처럼. 재즈처럼.

“……너, 남자와도 거래해보지 않을래……?”

인환은 그렇게 난생처음으로 커밍아웃을 했다.

세상을 향해…… 처음으로 손을 내밀었다.

잔뜩 겁에 질린 넋이 숨죽인 채 벌벌 떨고 있었다.

해사한 미소 속에 숨은 그것을, 물론 그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꾸르륵거리는 배 속 소리가 우렛소리처럼 요란했다.

노곤한 행복감에 취해 언제까지고 늘어지고 싶었지만, 담배까지 피워서 그런지 하루 종일 굶은(실은 오늘에 대한 긴장과 기대 때문에 어제도 거의 먹지를 못했었다) 위장은 거의 광란 상태에 도달해 있었다. 할 수 없이 찌르르한 하반신의 아픔을 견디며 일식집에 전화를 걸어 도시락을 주문했다. 거의 기듯이 하며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마친 후, 똥구멍에 꼼꼼하게 연고를 바르자 그나마 조금 견딜 만했다. 바지를 입을 기력도 없어서 파자마를 걸치고 있는데 도시락이 도착했다.

거의 허리를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인환을 도시락 배달맨은 이상하다는 듯 힐끔거렸다. 평소라면 다리병신인 자신을 보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며 과도한 자의식으로 불쾌해졌겠지만 배달맨에게 돈을 건네는 인환의 얼굴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도시락도 꿀맛이었다. 원래부터도 입맛에 맞는 편이었지만 유달리 맛있게 느껴지는 것은 필경 기분 탓이겠지?

계속 이어지는 유쾌한 기분에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지만 자신의 몸 상태로 보면 그건 무리일 것이다. 아마도 2∼3일은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 지내는 게 상책일 듯. 이 정도 상처면 그를 다시 만나는 다음 주까지도 완전히 낫지 않을지 모른다.

완전히 나을 때까지는 손으로만 만져달라고 부탁할 요량이다. 그야, 똥구멍이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진다고 해도 그토록 멋진 그의 자지를 품는 황홀함을 포기할 생각은 절대로 없다. 지독하게 아픈 것은 사실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직접 자지가 만져지는 것 이상으로 짜릿짜릿한 쾌락이 느껴졌었다. 문제는 다시 시작해도 더 이상 찢어지지 않게 만드는 것인데…… 입구를 넓히는 방법이 뭐 없을까?

결국 인환은 끙끙거리며 건넌방으로 기어가 컴퓨터를 켰다. 단골이랄 수 있는 사설 BBS(물론 외국의 각종 포르노 자료들을 불법으로 보급하는 비밀 호스트 업체였다)에 접속한 다음, 인조 자지 두 개와 러브젤, 그리고 콘돔들을 주문했다. 그동안 수많은 포르노 테이프들과 잡지들을 주문하기는 했어도, 별로 인조 자지라거나 다른 자위 도구까지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었다. 그럴 것이 인환의 성적 판타지는 대개가 탑 성향이라서 자신이 박히는 쪽보다는 박는 상상을 주로 했다. 그를 사랑하게 되고 상상 속에서 그와 무수히 섹스를 나누었지만, 자신은 줄곧 그의 똥구멍이거나 입안으로 파고들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젠 다르다. 실제의 전율스러운 체험은 자신이 박히든지, 박든지 쾌락을 얻는 데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저 그와 몸을 붙이고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아니, 굳이 서로 결합될 필요까지도 없었다. 그냥 그를 만지는 것만으로도, 그가 그 커다랗고 마디가 있는 아름다운 손가락으로 주물러주는 것만으로도 인환의 허리는 녹아내렸다. 그의 도톰하고 촉촉한 입술이 닿고, 혀가 밀려들어오고, 혀뿌리와 입천장이 쓸리고, 그의 안으로 자신의 혀가 힘차게 빨려 들어가기만 해도 그냥 천국이었다. 그의 단아한 얼굴과 단단한 목덜미, 가슴 근육, 탄력 있는 근사한 엉덩이를 만지는 것만으로도 흥분이 극에 달했다. 무엇보다 그의 자지! 불알! 오, 하느님 맙소사! 그토록 아름다운 물건을 입안에 빨아들일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서 앞으로도 종종 그에게 부탁을 해볼 생각이다(사실 불쾌해하는 것 같았다! 왜 아니겠는가? 생전 꿈도 못 꿨을 변태 게이 새끼를 상대하는 것만도 기분이 드러울 텐데, 그 소중한 것을 빨게까지 해야 한다니 말이다! 암튼, 많이 미안하지만 정말 좋으니까 한 세 번에 한 번꼴로 빨게 해달라고 부탁해봐야지!).

오늘 주문했으니까 인조 자지가 배달되려면 적어도 2주는 지나야 한다. 거기다 조금이라도 길을 닦아두려면 다시 2주는 필수! 흠, 한 달 동안은 그저 그의 손으로만 만족해야 할 듯. 뭐, 그렇다고 해도 불만은 없지만. 흐흐…….

밥을 먹고, 담배도 한 대 더 피우고 나니 식곤증이 밀려들었다. 다시 엉거주춤 거실을 기어 침실로 들어갔다.

자신의 정액과 혈흔으로 더럽혀진 침대 시트가 꺼림칙하긴 했지만, 혹시라도 남아 있을 그의 체취에 대한 미련 때문에 차마 시트를 갈지 못한다. 침대에 엎드려 코를 킁킁거리며 그의 흔적을 더듬고 있을 때, 문득 그가 사용한 콘돔 생각이 뇌리를 때렸다.

아차 싶어 부랴부랴 침대에서 내려왔다. 징징 울리는 엉덩이에 으악! 하고 한 번 비명을 때려준 다음, 욕실로 가 휴지통을 뒤졌다. 없다! 우, 쒸…… 그렇다면…… 다행히 원하던 것은 침실 휴지통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다. 조금쯤은 밖으로 새어 나왔을 테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체액이 얇은 비닐 막 안에 갇힌 채 싸늘히 식어 있다.

그가 싸버린 좆물에까지 미련을 두고 가슴을 두근거리다니, 얼굴을 붉히다니, 정말이지 변태도 이런 변태가 따로 없을 거다. 그러나 자괴감과 수치감은 잠시뿐, 인환은 그의 몸(의 일부!)에 코를 들이밀고 실컷 냄새를 맡았다. 아릿하고 풋풋한 그의 사랑스러움을 취하고 있자니 그렇게 싸버렸음에도 아래로 뿌듯한 기운이 몰리며 자지가 곤두선다.

물론 절대로 참을 신사가 아니다. 그의 좆물을 들고 있는 한 손에 콧구멍을 처박은 채, 인환은 부지런히 뻣뻣해진 몸을 주물러댔다. 쾌감이 가중될수록 하반신이 긴장하며 찢겨진 엉덩이로 고통이 달려 나갔다. 그 이상의 쾌감이 척추를 타고 흐르는 것은 물론이었다. 뿌듯하게 발기할 때의 그의 붉어진 얼굴을 뇌리에 떠올리며 한계까지 밀어붙였다.

“후아아악!!!”

소금 맞은 지렁이처럼 꿈틀대며 절정을 즐겼다. 저릿저릿한 기쁨만큼 지칠 대로 지쳐버린 몸을 침대에 묻고 흥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최대치다. 더 이상 쌌다가는 병이라도 날 거다, 씨팔.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의 좆물에 살며시 입을 맞춘 다음, 콘솔 서랍을 뒤져 보석함을 꺼냈다.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스와치 시계며 구찌 팔찌, 티파니 반지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는 함을 비우고 콘돔을 소중하게 담았다. 처음이니까 기념으로 간직할 요량이다. 장차 갖게 될 그 어떤 귀중품도 이것만큼 소중하지는 않으리라는 걸 알겠다, 클클.

띠리리리리!

전신으로 노곤하게 파고드는 졸음기에 골골거리며, 불을 끄고 자리에 누우려는데 느닷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다. 젠장. 흥겨웠던 기분이 무서리라도 맞은 것처럼 일거에 싸늘해진다.

“여보세요?”

[우리 아들?]

나긋나긋한 엄마의 목소리가 다정하고도 다정하게 귓속을 파고 들어왔다. 시끄러운 잡음이 섞여드는 것을 보니 밖인가 보다.

“왜 그래?”

기분을 반영하듯 어쩔 수 없이 퉁명스러운 어조가 된다.

[흐응, 말본새가 왜 이리 고약해? 엄마 섭섭하게? 저녁은 먹었나, 아들?]

삐진 것처럼 툴툴거리지만 상냥한 목소리엔 근심이 묻어 있다. 아름다운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 채 시선을 모으고 있을 엄마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가슴이 찌릿찌릿 아파온다.

“지금이 몇 신데 아직도 안 먹어? 그리고 바쁜데 전화하니까 그렇지. 막 집중해서 그림 그리고 있었단 말야.”

애교를 듬뿍 담고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덧붙이자, 엄마는 안심한 듯 나지막하게 웃음을 터트린다. 혹시라도 무슨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나, 어디서 또 아빠 없는 자식에 병신이라고 놀림이라도 받았나, 엄마의 인환을 바라보는 눈높이는 국민학교 1학년에서 고스란히 멈춰 있다. 인환 이상으로 일생을 상처 입고 고통스러워한 여자는 딱 그 시점에서 그대로 인환을 성장시키지 않은 채, 자신의 전 존재의 이유를 인환에게로 돌리고 있었다.

더 이상 세상의 놀림감이 될 정도로 어린애가 아니라고, 또 그런 일로 상처받을 만큼 약하지 않다고, 아무리 무언으로 증명을 해봐도 엄마의 근심엔 끝이 없다. 엄마의 나약하고 가슴 시린 과보호는 멈추지 않는다. 엄마가 죽는 날까지 절대로 멈출 줄 모를 헌신적이고도 절대적인 사랑이다.

[에구, 미안해서 어째, 우리 아들. 자꾸만 까먹지 뭐야. 우리 천재 화가 선생이 예술을 한다는데 그만 방해를 했네? 어때? 최고로 멋진 대작이 나올 거 같어? 엄만 지난번에 그려준 50호짜리 추상화도 좋던데. 엄마 사무실에 걸어놓으니까 사람들이 다들 누가 그렸냐고 난리던걸? 누군지 알면 지네들도 사고 싶다고 말야.]

“그러지 말랬잖아! 아직 사람들 앞에 내놓을 만한 건 아니란 말예요. 엄만 쪽 팔리게…….”

[아유, 우리 천재 아들은 겸손하기도 하지! 으하하…….]

뿌듯한 긍지와 자랑스러움이 엄마의 목소리를 한껏 들뜨게 하고 있다. 단연코 천재 화가라고, 단연코 성공을 거두리라고, 그래서 언젠가 한국 화단에, 아니, 세계 화단에 그 찬연한 족적을 남기리라고, 엄마는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솔직히 화가로 성공을 하든 안 하든 인환은 그닥 관심이 없다. 성공을 하면 물론 기쁘겠지만, 설령 아니라고 해도 살아가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으며 또 그것이 그림을 그리는 기쁨에도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으리라는 걸 안다. 그럼에도 인환은 엄마 생각만 하면 심장을 꽉 틀어잡히기라도 한 것처럼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반드시 성공을 해서 자신은 물론 엄마로 하여금 그 존재의 위대성을 증명해야만 할 것 같다. 정말로 성공하기 위해 더 부지런히 뛰어야 할 것 같고, 포르노나 즐기며 인생을 허송하는 쓸모없는 게이는 절대로 되지 말아야만 할 것 같다. 번듯한 화가도 되고, 번듯한 남자가 돼서 결혼도 해야 하고, 자식도 낳아야만 한다. 만약 그렇게 되지 못한다면 자신은 엄마에게 지금까지 엄마가 겪은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격심한 실망과 상처를 안기는 꼴이 될 테니까.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엄마의 꿈과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단 말인가? 설령 죽어라 기를 써서 그럭저럭 화가로서 자리매김을 할 수는 있다 치자. 그러나 자신의 성 정체성은? 남자에게만 반응하는 이 저주받은 육체는 도대체 어떻게 극복을 하느냔 말이다!

결국…… 인환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을 엄마의 욕망들에 가슴 아파하고, 죄의식을 느끼고, 초조해하다가는, 마침내 허탈한 체념 상태에 빠져 스스로를 혐오하게 된다.

씨팔, 사랑은 절대로 자유가 아니다.

사랑이야말로 그 어떤 폭력적인 억압보다도 더 지독하게 영혼을 옥죄는 단단한 사슬이다.

그리고 바로 오늘, 인환은 드디어 그 간절한 희망의 사슬을 송두리째 박살 내버리는 짓을 하고 말았다. 불쌍하고 불쌍한 울 엄마의 가슴을 종내는 난도질하고 말 지독한 짓을 마침내 저지르고 만 것이다.

오늘이 아니었다면, 어쩜 인환은 그럭저럭 엄마의 기대치에 부응하는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자와 결혼까지는 못 하더라도, 이렇게 모두의 눈을 속인 채로 그럭저럭 정상적인 환쟁이로서 살아가는 인생을 말이다. 육체의 욕구 불만이야 포르노나 훔쳐보며 자위를 하는 것으로 때우고, 정신의 허기는 예술에 몰두하는 것으로 보상을 받으면 그만이라고.

그러나 이젠 그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속임수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게 되었다. 가상의 섹스야 인환에게든 엄마에게든 아무런 상처를 입히지 못한다. 아니, 못했을 것이다. 자신만 일생 입을 다물고 살아간다면.

그러나 실제의 관계 맺음은 다르다. 사랑하는 남자와의 섹스는 그 엄청난 기쁨만큼 인환의 내면에 강렬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 어떤 것도 연인과의 결합만큼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았다는 것을 인환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자신은 그 어떤 소중한 것도 희생할 용의가 있다고, 아니, 있을 거라고, 거의 광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격렬한 탐욕을 확실히 깨달았다. 무엇이든 버린다. 무엇이든 희생한다.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오른팔을 잘라낸다고 해도, 아름다운 색채의 운용을 인식할 수 없게끔 두 눈을 도려낸다고 해도 참을 수 있다. 그를 내 것으로 할 수만 있다면. 그에의 사랑을 지킬 수 있다면.

설령…… 그래, 설령 그것이 엄마의 꿈을 박살 내는 한이 있더라도…….

“……감이 확실히 올 때 마무리할래요. 끊어.”

문득 치미는 설움에 인환은 쥐어짜듯 간신히 대꾸했다.

[아유, 위세는! 그래, 예술 하는 거 방해 말고 속물 엄마는 빨리 꺼져라 이거지?]

정말로 작업이 막바지에 이를 때 줄곧 취하는 퉁명스러운 대꾸에 엄마는 툴툴거리면서도 기분이 좋은지 목소리가 탁구공처럼 통통 튀고 있다.

“끊어.”

[그래, 우리 천재 아들. 마무리 잘하고 잘 자, 응?]

“당근이지. 엄마도 속 시커먼 놈들이랑 밤새우지 말구 빨랑빨랑 집에 들어가요.”

[말하는 꼬락서니 하곤. 거래처 사람들이라니까.]

“그게 다 속 시커먼 놈들이라구. 돈 많은 과부 한번 낚아볼라구 혈안이 돼 있겠지. 정신 바짝 차려, 아줌마.”

[요 녀석이……?!!]

“주무세요.”

[자, 자, 자, 자, 잠깐, 우리 아들! 내일 토요일이니까 집에…….]

“바빠서 당분간 못 들른댔잖아. 진짜 끊는다……?”

[아줌마더러 아들 좋아하는 칼국수 맛있게 끓이라고 할 건데?]

“끊어.”

[인…….]

뚜…….

뺨을 타고 흐르기 시작한 더운 액체 탓에 더 이상 감정을 숨길 기력이 없었다. 안타까운 듯한 엄마의 부름을 채 다 듣기도 전에 인환은 단호하게 전화를 끊었다.

모처럼 밤 9시에 잠을 자는 새나라의 어린이가 돼보려 했더니만 다 틀렸다, 씨팔.

불을 끈데다 커튼까지 쳐서 방 안은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내리는 설움에 어린애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미안해, 엄마…… 미안해…… 정말, 정말 미안해…… 미안…….

잠은 이미 말끔히 달아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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