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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989년 9월. 장인환(張仁歡) (4/129)

4. 1989년 9월. 장인환(張仁歡)

“피곤해 보입니다. 어디 앉아서 좀 쉴까요?” 

코끝에 맺힌 식은땀이며 다소 창백해진 인환의 안색을 살피던 그가 정중하게 물어왔다.

“……아아, 그럴까? 너도 피곤하지?”

마디가 있는 아름다운 손이 부축하듯 조심스레 인환의 오른팔을 쥔다. 예기치 못한 접촉에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는 바람에 인환은 차마 그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지 못했다. 마음만은 라퓨타(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천공의 성 라퓨타」) 위를 떠돌았지만, 그가 살핀 그대로 당장 맨바닥에라도 주저앉고 싶을 만큼 인환은 지쳐 있었다.

“……밖에 카페테리아가 있으니까 거기 가서 뭐라도 마시자.”

“예.”

보폭에 차이가 있는 나머지, 채 2층 전시실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성큼 앞서가버리는 그를 쫓기 위해 인환은 뻐근한 통증을 호소하고 있는 다리에 박차를 가했다. 니미랄, 이노무 븅신 다리몽댕이가 정말루 싫다!

세 시간 내내 줄곧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전시장을 누볐다. 오후 2시쯤, 자신의 아틀리에에 도착한 그를 차에 태우고 청담동 화랑 거리로 나와 갤러리 서너 개를 연달아 순시한 인환이었다. 아무리 연인과 함께하는, 가슴 떨리는 최초의 데이트라고 해도 불편한 다리로는 기껏해야 두 시간을 견디는 것이 한계인 인환에게는 확실히 무리가 있는 강행군이 아닐 수 없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고 밀어붙이는 사이 어느새 세 시간이 훌쩍 지났다.

이 기회를 빌려 어떡하든 자신의 장점들을 부각하고 싶은 나머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또 자신 있어 하는 세계로 연인을 초대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인환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냉정한 연인은 그 어떤 멋들어진 작품 앞에서도 마냥 심드렁하기만 했다.

별로 무르익지 못한 신인들의 어설픈 미니멀리즘 따라 하기는 그렇다 쳐도, 그야말로 거장이라 칭할 수 있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장렬한 피비린내에도 그는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눈치였다. 뉴욕이나 파리에서 처음 컬렉션을 접했을 때의 충격을 고스란히 리플레이 시켜가며 가슴을 두근거리는 인환을 그 특유의 단아한 무표정으로 힐끔거리거나 지루한 기색을 숨기며 예의 바른 기사처럼 인환의 옆을 따를 뿐, 그는 갤러리에 도착하기 전 지나쳤던 레스토랑들이며 옷가게들의 화려 찬란한 쇼윈도들을 굽어볼 때와 마찬가지의 쌀쌀맞기조차 한 무관심으로, 저 위대한 예술가에게 거침없이 오줌을 갈기고 있었다.

솔직히 베이컨은 인환의 비장의 카드였었다.

그로 하여금 조금이나마 자신의 세계에 호기심을 느낄 수 있게끔 해줄, 좀처럼 국내에선 접하기 힘든 작품들이었으니, 베이컨 정도의 파워라면 아무리 감수성이 둔한 속물이라도 어떤 형태로든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다고 자만했던 거다. 그렇게 풍선처럼 부풀었던 기대는 시간이 갈수록 바람이 빠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인환은 그저 그와 함께 데이트를 한다는 꿈같은 현실에만 만족하기로 마음을 돌려야만 했다.

물론 그가 무감동한(아니, 솔직히 무식한) 마초맨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인환에게 조금이라도 실망을 안겨주었느냐 하면 그건 또 천만의 말씀! 미(美)에 둔감한 속물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전문가 앞에서 어떤 형태로든 주눅이 든 모양새로 그가 감동을 과장하기라도 했다면 그야말로 인환은 실망을 하거나 더더욱 풀이 죽었을 터였다. 그러나 그는 역시 그답게 언제나처럼 당당했다. 메마른 그대로, 황량한 그대로, 그는 호불호(好不好)의 그 어떠한 가치 판단도 없이 그가 갖지 못한 풍요의 세계를 조용히 관조했다. 따분함을 넘어 어쩌면 고통이 될 수도 있을 권태를 지그시 참아냈다. 과연, 영웅이란 달리 영웅이 아니었던 거다.

아마도 궁극에는 자화자찬이 돼버릴 컴컴한 야망이 실패로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연인의 또 다른 매력에 홀린 나머지, 인환의 첫 데이트는 그 이상 달콤할 수 없을 최상의 데이트가 돼가고 있었다. 까짓 녹초가 된들 어떠랴. 한동안 밤마다 다리에 쥐가 나는 후유증에 시달린들 대수냐. 저렇게 멋들어진 남자를 니들이 알아?! 내 영웅을 아냐구!!!

“주문은 제가 하겠습니다. 뭐 드시겠습니까?”

고급스럽고 우아한 모양새의 야외 카페테리아는 주말이라서 그런지 손님들로 꽤 붐비고 있었다. 갤러리의 관람객이라기보단 근처의 상점가 쇼핑객들이 대부분일 테지만.

자리에 앉았던 그가 셀프 주문을 위해 다시 일어서며 물음을 던지자, 근처에 앉은 젊은 여자들의 시선이 온통 그에게로 집중되는 것이 느껴진다. 낡은 블루진에 잿빛 티셔츠를 대강 걸쳤을 뿐인데도 움직일 때마다 매혹적인 섹시 페로몬을 발산하는 그를 여자들의 예민한 감각이 놓칠 리 없다. 젠장. 목구멍이 울컥하는 자랑스러움이 반(아마도 여자들을 향한 질투심이 복합돼 있을), 손끝이 바르르 떨리는 불안감이 반, 복잡한 심정으로 인환은 매혹적인 연인에게 얼그레이를 주문했다.

계산대 앞에 서서 그가 주문한 음료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제법 외모에 자신이 있는 듯한 여대생으로 보이는 여자 서넛이 아예 노골적으로 그를 향해 눈짓만의 추파를 던지는 것이 보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미 시선만의 추파에는 면역이라도 돼 있는 듯, 그의 표정 없는 서늘한 얼굴에 변화는 없었다. 그 냉랭한 반응에, 추파를 던지던 여자들도 마지못해 암거미 같은 탐욕의 시선을 거둬들였지만, 분명 쉽사리 단념을 할 것 같진 않았다. 기회를 봐서 자신들의 테이블로 합석을 요구하리란 걸 인환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문득 초조감이 엄습했다. 논스톱으로 갤러리를 도느라 오줌이 마려운데다 오랫동안 참은 담배 생각도 간절해서 화장실을 갈까 생각했지만, 니미, 씨부랄, 이 굶주린 암거미들의 소굴에 연인만 혼자 남겨두고 1분 1초인들 자리를 비울 수 있을까 보냐!

‘미메시스’로 가자…… 고 생각이 미친 것은 그때였다. 적어도 거기라면 그에게 손을 뻗칠 여자들은 없을 테니까. 마침 날도 저물어가고 있었고, 밥도 먹어야만 한다. 자주 가는 근처의 프랑스풍 퓨전 레스토랑에 이미 저녁 식사 예약을 해두었지만, 거기라고 암거미들이 진을 치지 말란 보장이 없다. 압구정 오렌지들은 물론, 난다 긴다 하는 연예인들까지 수시로 몰려드는 곳이 아니던가. 킹카 중의 킹카인 그를 연예인들이라고 그냥 내버려둘 리가 없었다, 쓰벌. 아아, 킹카 애인을 둔다는 것이 또 이런 만만찮은 고뇌를 때려줄지는 예전엔 미처 몰랐더란 말이지.

“게이 바요?”

“……어. ……그 게이 바라고 해도 점잖은 곳이니까…… 그냥 밥 먹고 술 마실 수 있는 보통 레스토랑이나 마찬가지거든…… 그, 저…… 너만 기분 나쁘지 않다면 말이지…….”

그가 가져온 홍차를 냉수 마시듯 순식간에 벌컥벌컥 들이켠 후, 인환은 묵묵히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있던 그를 향해 조심스레 의향을 물었다. 혹시나 그가 기분 나빠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한데다, 홍차를 들이켜서인지 점점 더 참기 힘들어지는 요의(尿意)가 초조함을 가중시켰다.

“선생님은 그렇더라도 전 미성년자인데 들어갈 수나 있을까요?”

담담하게 의문을 제기하는 그의 표정엔 별다른 혐오감은 보이지 않았다. 휴우∼∼. 마른침이 꼴깍 넘어가며 자신도 모르게 커다란 한숨이 내뱉어진다.

“이쪽에서 일부러 불지 않는 한 아무도 미성년자로 보지는 않을걸? 몇 번 너 같은 애들을 데리고 들어간 적 있지만 한 번도 들통이 나진 않았지.”

‘몇 번 애들을 데리고 들어간 적 있다’고?

쩝……. 파트너를 데리고 들어가기는커녕, 현지 조달조차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주제에 노련미 넘치는 능글 게이인 척 허풍을 치는 꼬락서니가 처량 맞지만 별수 없다.

“그리고 거기 오너와는 안면이 좀 있으니까 들키더라도 한 번쯤은 봐줄 거다.”

요건 사실이다. 미메시스의 저 괴짜 사장 마해영은 인환에겐 유달리 호의적이었다. 한때는 그 정체불명의 우정을 연애 감정이라 착각한 나머지, 마해영이 인환의 또 다른 상상 속 영웅으로 변신한 적도 있었다. 물론 인환보다 나이가 꽤 많았던데다(그 아름다운 용모가 믿어지지 않을, 무려 서른다섯의 중년 아저씨였다!) 섬세하고 호리호리하기만 한 몸매가 인환의 취향이 아닌 것은 물론, 감히 넘봤다간 뼈도 못 추릴 조폭 애인까지 달라붙어 있었던 탓에 인환의 달콤한 백일몽은 채 두 달도 가지 못하고 언제나처럼 흐지부지 종말을 고해야 했지만.

그가 오렌지 주스를 다 마시는 것을 확인하는 즉시 인환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인환의 여전히 지친 듯 창백한 안색을 미심쩍은 듯이 힐끔 굽어보았을 뿐으로, 그는 말없이 인환을 따라나섰다. 거리로 면한 다섯 개쯤인가의 계단을 내려가며 그가 카페테리아를 나설 때, 아깝다는 듯이 그를 훔쳐보는 암거미들의 시선이 또 느껴졌다. 그녀들을 향해 야비한 고소를 한 방 때려준 다음, 인환은 비로소 참고 참았던 오줌을 싸기 위해 갤러리 건물에 면한 화장실로 들어갔다. 막 바지 지퍼를 내리려는데, 주차장에서 기다리겠다던 그가 느닷없이 들어서는 바람에 인환은 기겁을 했다.

“생각해보니 저도 소변이 마려워서요.”

펄쩍 뛰듯 얼굴을 붉히는 인환을 이상스럽다는 표정으로 일별한 그가 태연자약한 걸음걸이로 인환이 자리를 잡고 있던 소변기 쪽으로 다가오더니 바로 옆에서 청바지 벨트를 푼다.

가슴은 방망이질을 치고, 얼굴은 더 이상 붉어질 수 없을 지경으로 새빨개졌다. 오래 참았던 만큼 소변기를 때리는 자신의 오줌발 소리가 폭포수 소리마냥 요란했던 까닭이었다. 아아, 씹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픈 심정이다. 몇 번이나 섹스를 나누고, 몇 번이나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오르가슴을 겪은 상대임에도 그 앞에서 배설을 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참을 수 없으리만치 부끄럽고 민망스러운 해프닝일 뿐이다.

―영웅은 똥도 안 싸고 오줌도 싸지 않아!

참으로 한심스럽고 유치한 망상이 분명함에도 인환은 연인을 향한 이 스토익한 우상화 작업을 도무지 그만둘 방법이 없었다. 바로 지금처럼 그가 자신의 옆에서 자신과 다름없이 자지를 까고 오줌을 누고 있는 소리를 선명하게 듣고 있음에도 말이다!

아무렴. 똥을 싸는 드런 새낀 인환 자신이나 다른 떨거지 속물들뿐이다! 지린내와 땀내를 풍기는 오염된 인간 버러지들은 오로지 자기들뿐인 것이다!

인환의 마음속 태풍을 알 길이 없을 무심한 연인이 먼저 볼일을 끝내고는 손을 씻는 것이 보였다. 간신히 배설을 끝마친 아랫도리를 여밀 생각도 못한 채 인환은 입구 쪽으로 돌아서는 그의 허리춤을 정신없이 붙잡았다.

―키스하고 싶어, 위위…….

말은 단 한마디도 필요치 않았다. 새빨개진 얼굴과 열렬한 눈빛만으로 그는 단숨에 인환의 욕망을 알아차렸다(실은 욕망이 아닌 불안의 다른 얼굴이었지만―지독하게 밝히는 변태 게이인 것도 모자라 오줌까지 많이 싸는 드런 놈이라고 질색하면 어쩐단 말이냐, 씹팔―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잠시 난감한 듯한 표정이 그 뚜렷하고 단정한 이목구비를 설핏 스쳐가는 게 보였다. 그다지 불쾌한 표정은 아니어서 내심 안도하는 사이, 그가 안쪽의 화장실 문을 열고 인환을 이끌었다.

남자 둘이 들어가기엔 양변기 하나와 휴지통 하나가 덩그마니 놓여 있는 화장실 안은 너무나 비좁다. 문의 자물쇠가 채워지는 동시에, 마치 그 비좁은 공간을 보완이라도 하려는 듯 그의 양쪽 팔이 인환을 품 안에 끌어당겼다. 비누 냄새에 뒤섞인 익숙한 그의 체취가 폐부 깊숙이 밀려들었다. 그 역시 인환처럼 땀을 조금 흘린 모양으로, 비에 젖은 흙냄새와도 비슷한 섹시한 향취는 인환의 욕구를 더더욱 참기 힘든 것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서로의 다리가 얽혀들고 가슴과 가슴이 빈틈없이 밀착됐다. 황홀한 결합 상태에 전신이 기대감으로 요동을 칠 무렵, 그의 부드러운 입술이 내려왔다.

댕…… 댕…… 댕…….

귓속에서 종이 울린다. 에스메랄다의 키스를 받는 노트르담의 종지기 콰지모도가 된 것 같다. 하느님……. 그는 어쩜 이다지도 키스를 잘하는 걸까……?

귀를 때리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너무나 요란스러워서 두렵다. 혀 안쪽이 쓸리고, 아랫입술이 오밀조밀 깨물린다. 애를 태우듯 부드럽게 빨아 당겨지던 혀끝이 갑자기 뿌리 끝까지 삼켜졌다. 아찔한 쾌감과 함께 아무리 참으려 해도 어쩔 수 없이 본능이 깨어나고 만다. 캔디처럼 달콤했던 로맨틱한 기분은 순식간에 농염한 관능으로 흘러 하반신을 태풍 전야로 만들었다. 젠장…… 데이트 때만큼은 나도 신사이고 싶단 말이다……. 그러나 그의 탄탄한 허벅지에 눌린 자지는 이미 더 이상 숨기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참을 수 없을 만치 부끄럽고, 또 그 이상으로 결합의 욕구 또한 거센 나머지, 인환은 잔뜩 울상이 되었다.

“……흐윽…… 웃……. 아…… 안 돼…… 싫어…….”

“……괜찮아요…… 하세요…….”

흐느끼듯 교성을 흘리며 그의 가슴을 밀어내자 여전히 옴짝달싹할 수 없게끔 인환의 상반신을 죄어오던 그가 달래듯 중얼거렸다. 아아, 로맨틱한 데이트의 와중에도 여지없이 발정해버리다니 색마가 따로 없다. 내색은 않지만 연인은 또 얼마나 한심스러워하고 기막혀할 것인가. 젠장, 젠장……. 애틋한 연심과 끈끈한 색욕 사이에서 넋이 혼란스레 시소를 탄다. 그나마 쥐꼬리만큼 남아 있던 자존감과 수치감은 그의 따스한 손바닥이 팬티 속으로 밀려들어와 불룩 치솟은 인환을 감싸 쥐는 순간 깡그리 달아나고 만다.

움켜쥔 손아귀는 용서가 없었다. 귀두를 꼬집고, 손톱을 세워 기둥을 할퀴다가는, 점차로 정신을 차랄 수 없을 지경으로 속도를 높여가며 용두질을 쳐댔다.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앞으로 꺾이는 몸을 그가 태연하게 받쳐 들었다.

밖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교묘하게 계산된 그의 가혹한 손놀림이 불청객을 의식한 듯 조금 부드러워졌다.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던 숨 가쁜 교성 또한 그의 격렬한 입맞춤으로 순식간에 침묵을 맞았다. 들킬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아슬아슬한 스릴을 더해 아찔할 지경으로 쾌락을 증폭시켰다. 남자의 콧노래 소리며 쪼르륵 하는 배설 소리, 연이어 들리는 물 내리는 소리가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두려움과 기쁨에 숨도 쉴 수 없었다.

다시 문소리가 들리더니 남자의 흥얼거림이 천천히 멀어졌다. 흡반처럼 인환의 입안을 빨아들이던 그의 입술이 비로소 떨어졌다.

“……하아악……! 흐앗……!”

참았던 한숨이 비명처럼 토해진다. 기쁨인지 고통인지 알 수 없는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붉어진 인환의 얼굴을 물끄러미 굽어보는 연인의 단아한 얼굴에선 그 어떤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기다렸다는 듯 제 리듬을 찾은 공격만이 가차 없이 이어졌다.

시간이 사라졌다. 플로럴 계열의 방향제 냄새가 희미하게 떠도는 공중 화장실 안이라는 폐쇄적인 감각도 흐려졌다. 막 배출을 하려는 찰나 그가 마주 안은 인환의 몸을 돌려 세웠다. 서로의 옷가지를 더럽히지 않으려는 그의 조심성 때문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지만 당장의 황홀한 결합 상태가 아쉬웠던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애절한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대답처럼 그가 인환의 턱을 옆으로 돌리더니 다시 깊은 키스를 했다. 그의 축축하고 뜨거운 혀를 목구멍 안쪽에 느끼며 인환은 절정에 올랐다.

그의 손가락 사이를 뚫고 터진 좆물이 변기 뒤쪽 벽에 튀어 새하얀 포말을 그렸다.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는 경련 탓에 몸이 자꾸만 바닥으로 곤두박질을 치려고 한다. 도무지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의 단단한 팔뚝에 힘이 들어가며, 양쪽 겨드랑이를 휘어 잡힌 채 품에 안겼다.

“……흐…… 하아…… 아…… 나…… 위…… 위위…….”

“……괜찮아요. 제게 기대십시오.”

“……학…… 하아…… 하…… 미…… 미안…….”

“닦아드리겠습니다. 제 어깨를 잡으세요.”

“……아…… 그…….”

벽가에 걸려 있던 화장지를 몇 번 둘둘 말아 뜯어낸 그가 축축하게 더럽혀진 인환의 치부며 자신의 손가락 사이를 꼼꼼히 닦아냈다. 힘을 잃은 자지는 그의 냉정하고 섬세한 손놀림 아래서 초라하게 축 늘어져 있었다. 자지를 들고 불알 사이 주름진 부분까지 꼼꼼하게 닦아낸 그가 팬티를 입힌 뒤 바지 지퍼를 채우고 벨트까지 제대로 매주었다.

“……괜찮으십니까? 걸을 수 있겠어요?”

흥분이 가라앉고도 여전히 비틀거리는 인환의 몸을 다시금 부드럽게 안아주며 그가 물어왔다. 물론 절대로 괜찮지는 않다. 과로 끝의 성행위가 이토록이나 몸을 그로기 상태로 만들어버린다는 것도 처음 알았지만, 무엇보다도 이성이 돌아오는 것과 함께 달아났던 수치감이 서서히 고개를 쳐드는 것이 괴로웠다.

망할. 곧 죽어도 오늘만은 플라토닉하고 싶었었다. 시도 때도 없이 발정하는 색마 게이만이 아니라 재능 넘치는 화가 지망생이기도 하단 걸 알려주고 싶었었다. 자신에게도 조금쯤은 품위 있는 부분이 있단 걸 말이다.

“……괜찮으니까…… 너 먼저 나가. ……차 있는 데서 기다릴래?”

“괜찮지 않아 보입니다. 부축해드릴게요.”

“……괘…… 괜찮대두…….”

시무룩해진 얼굴로 더듬거리는 인환의 얼굴을 흘낏 살폈을 뿐, 그는 압도적인 완력이 느껴지는 팔로 거의 안아 올리듯이 해서 인환을 문밖으로 이끌었다. 달리 화장실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없는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화장실에서 섹스를 했다는 사실을 남들이 알아챌 리도 없건만, 자격지심 때문인지 인환의 얼굴은 더 이상 붉어질 수가 없을 지경으로 새빨개져 있었다. 그와 함께 밖으로 나갈 용기가 있을 까닭이 없다.

“……고…… 곤란하다구…….”

“……?”

“……남자 둘이 달라붙어 화장실을 나가봐라…… 분명 야릇하게 생각한다구…….”

상반신을 비틀며 애써 그의 팔을 밀어내는 인환을 의아한 시선으로 굽어보던 그가 비로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은 둘 중 누군가 몸이 불편하다고 생각할 겁니다만…… 선생님께서 정 신경이 쓰이신다면 먼저 나가 기다리겠습니다.”

부축을 해주던 팔을 거두어들이며 그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일단 결정하면 가차 없는 성격답게, 여전히 다리에 힘을 못 주고 비틀거리는 인환을 힐끗 곁눈으로 지켜봤을 뿐으로, 그는 세면대 수도를 틀고 손을 씻은 다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화장실을 나갔다.

먼저 나가라고 한 건 자기인데도 냉혹하게까지 느껴지는 연인의 태도에 문득 서운한 기분이 들고 만다. 일거에 사라진 단단한 근육질의 팔이며 상큼한 비누향이 감도는 연인의 체취가 아쉬워 눈물이 핑 돌 정도다. 씹팔, 기집애같이…….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고, 감히 그의 눈길과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하늘에 오르는 기분이었던 주제에, 요만한 일로 기집애처럼 토라지는 자신의 심보도 가소롭다. 그렇지. 데이트 중이다. 사랑하는 이와…… 자신은 난생처음 데이트를 하고 있었다!

다시금 실실 비어져 나오는 행복 지수 100%의 팔푼이 미소를 거둘 생각도 않은 채, 인환은 세면대로 다가가 얼굴에 찬물을 몇 번 끼얹은 정도인 고양이 세수를 했다. 뺨과 눈가의 홍조도 가라앉고, 그럭저럭 걸음을 옮길 기력도 모여서 천천히 밖으로 나가니, 10여 미터쯤 전방의 지하 주차장 입구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그가 보였다.

추석이 바로 코앞이라 해도 가을이라고 하기엔 날씨는 아직 조금 더웠다. 그래선지, 그의 낡은 잿빛 티셔츠 소매는 거의 어깨 근처까지 걷어붙여진 채, 근육이 발달한 티 하나 없이 깨끗하고 매끄러운 황금빛 피부를 고스란히 드러내주고 있다. 검정과 회색이 섞인, 군함처럼 커다란 농구화는 메이커가 아닌 시장표 싸구려. 그나마 밑창이 반쯤은 닳았을 정도로 몹시 낡았다. 아마도 수십 번을 빨아 거의 흰색에 가까울, 색이 바랜 일자형의 청바지 역시 군데군데 올이 풀려 있을 만큼 낡은 구제품. 낡았다곤 해도, 저 길고 늘씬한 근육질의 다리엔 또 그것만큼 어울리는 아이템은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바라보고 있노라면 온몸이 흐물흐물 녹아버릴 정도로 초강력 섹시 빔을 쏘아대니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아니나 다를까, 갤러리며 카페를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은 남녀를 불문하고 한 번쯤은 눈을 크게 뜨고서 그를 되돌아보곤 한단 말이지.

“……인…… 환이……? 인환이니……?”

문득 귀에 익은 부름이 연인의 매혹에 넋이 나가 있던 인환의 의식을 일깨웠다.

두근…….

에너지가 넘치는 하이 톤의 허스키한 울림.

두근…… 두근…… 두근…….

돌아보지 않고도 목소리의 주인공은 알 수 있었다. 두려움과 죄의식에 순식간에 오그라드는 심장이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음을 증거하고 있다. 돌아보고 확인을 하는 즉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어질지도 모른다. 침착해! 침작해, 장인환! 그녀는 갤러리 현관 쪽에 서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가 기다리고 있는 지하 주차장 입구는 그녀로선 사각 지대에 가까울 것이다.

“인환이지? 인환아! 장인환?!”

못 들은 체 잰걸음으로 냅다 걸어갔다. 씹팔, 베이컨에 있어서만큼은 인환은 명함도 못 내밀 지경으로 왕 팬인 오주희다. 현지가 아니고는 좀처럼 접하기 힘든 컬렉션을 그녀가 놓칠 리가 없다. 도시락까지 싸들고 전시실을 죽 때릴 그녀다. 맙소사! 그런 그녀와 마주칠 줄은 꿈에도 상상 못 한 자신의 어리석음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다! 하느님! 하느님, 제발!!!

잰걸음으로 부랴부랴 다가오는 인환을 의아한 듯이 지켜보던 그를 모르는 척 지나치며 차 있는 쪽으로 따라오라 눈짓했다. 더 이상 부름은 들리지 않았다. 물론 자신의 절름거리는 걸음을 못 알아볼 리가 없는 그녀다. 아마도 못 들었나 보다 체념하고 그냥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버렸길 인환은 간절하게 빌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고 방금 세수한 것이 무색할 지경으로 콧등에 식은땀이 맺혔다. BMW 앞에 간신히 도착해 차 키를 꽂는 인환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안색이 안 좋으세요.”

“……빠…… 빨리 타!”

“……?”

“……빠…… 빨리! 빨리 차에 타라구!!!”

숨 가쁜 채근에 미심쩍은 얼굴의 그가 느릿느릿 조수석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는 것도, 그에게 매라는 지시를 하는 것도 잊은 채 무조건 차를 출발시켰다. 물론 동요가 심해 운전을 계속할 상태는 아니었다. 인환은 갤러리를 출발한 지 채 5분이 못 돼 가까이 보이는 백화점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 차를 세웠다.

“……선생님?”

미세하게 온몸을 떠는 인환을 여전히 의혹이 가득한 시선으로 굽어보던 그가 조심스럽게 물음을 던졌다.

“……그…… 녀야…….”

“……?”

“……주…… 주희 선배……. 그…… 그…… 녀랑 마주칠 뻔했어…….”

“…….”

“……모…… 못 알아봤어야 하는데…….”

핸들에 양팔을 얹은 채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인환은 힘없이 대꾸했다. 심장 박동은 차츰 가라앉고 있었지만 떨림은 여전했다.

“……그게 어때서요? 주희 씨와 마주치면 안 될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그…… 그걸 말이라고……?!!!”

울상이 돼서 항변하려던 인환은 그의 변화 없는 무표정에 문득 입을 다물었다. 너무나 태연자약해서 그토록 패닉에 빠진 자신이 되레 이상한 게 아닌가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주희 씨와 저는 이미 계약이 만료된 상태입니다. 설령 계약 중이라 해도 제 다른 계약 관계에 대해 그녀가 왈가왈부할 권리는 없어요.”

“……그건…….”

“……주희 씨와의 관계는 연인이 아니었습니다. 선생님과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죠. 그걸 잊지 마십시오.”

날카로운 면도날이 설핏 심장을 스친 것 같다. 의식의 표면까지 고통이 자각되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문득 목이 메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 알지…… 그야 알지만…… 어떻든 난 선배한테서 널 빼앗은 셈이니까…… 그게 연인이든 아니든…… 기회를 보다 훔쳐낸 셈이니까…….”

가까스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농담처럼 응수했다. 억지로 쥐어짜 내는 웃음 탓에 턱 끝이 경련이라도 일으킨 것처럼 떨렸다. 아우, 씨발……. 그를 사랑한다고 비통하게 울부짖던 오주희의 얼굴이 선명하게 뇌리를 때리며 인환의 상처에 소금을 뿌려댄다. 안 되는데……. 절대로 그 앞에서 사랑을 드러내선 안 되는데…….

―나쁜 놈이야……. 아∼주, 독종 새끼야, 아∼주…….

“훔치다니…… 전 물건이 아닙니다. 비록 몸은 팔지만 제 의사대로 고객을 선별할뿐더러…….”

혼란과 고통이 여실히 드러나는 인환의 눈동자를 비로소 발견한 그가 말끝을 흐렸다.

―사랑하지 말래……. 사랑해도 내색하지 말래…… 안 그럼 끝이니까…… 그걸로 당장 끝이니까…….

그는 절대로 사랑을 주지 않을 거라고 비통하게 절규하던 오주희의 얼굴이 기억의 틈바구니 너머로 잔혹하게 상처를 후벼 판다.

―다정하게 굴어도 착각하면 안 돼요…… 최선을 다한 서비스일 뿐입니다…… 손님이라면 누구한테나 이러니까……. 개새끼……. 정말 눈 하나 깜짝 안 하고는……. 그렇게 죽여주는 키스 끝에 말이지……. 정말 개새끼야……. 개새끼, 개새끼, 개새끼…….

왜 이렇게 아픈지 모르겠다. 꿈만 같은데, 정말로 로맨틱하고 행복한 첫 데이트인데 왜 이렇게 불안하고 두려운 기분이 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러지 마세요…….”

“…….”

“……떨지 마요. 이상한 분이군요…….”

“…….”

“……주희 씨에게 그렇게까지 죄책감을 느끼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 선택입니다. 제가 선생님을 선택한 거예요.”

“…….”

아아, 바보……. 연인은 바보다. 그녀가 자길 얼마나 사랑했었는지도, 내가 자길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바보 둔탱이…….

좀처럼 떨림을 멈추지 못하는 인환을 곤란한 듯 한동안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가 팔을 뻗어 부드럽게 어깨를 끌어안았다. 곧이어 다가온 육감적인 입술에 심장이 파도처럼 출렁거리며 생각할 의지를 앗아갔다. 끔찍할 정도로 세련되고 화려한 테크닉을 구사하는 키스가 그의 냉정한 직업 정신의 발로라는 걸 어렴풋이 짐작하면서도, 인환의 다소는 유치하고 애절한 짝사랑은 금세 현실에서 부상해버리고 만다.

―사랑해줄지도 몰라……. 언젠가는…… 언젠가는 마음이 전해질지도 몰라…….

―이렇게 달콤하고 상냥한 키스를 해주는데, 이렇게 다정한 키스를 해주는데…….

―겉보기처럼 그렇게 차갑고 무심하지만은 않을는지도 몰라…….

가슴 떨리는 기대가, 살포시 벌어져 피를 흘리고 있던 상처를 부드럽게 어루만져간다. 왜, 무서워졌는지, 왜 불안해졌는지 이유도 까먹을 정도로 길고 격렬한 키스가 이어졌다.

더 이상 숨을 참지 못해 헐떡이며 연인을 밀어냈다. 새까만, 어린아이처럼 맑은 눈동자가 살피듯 인환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이었지만 깊은 시선 속에 깃든 그것은 다정한 염려처럼 보였다. 촉촉하게 젖은 입술 위로 연인의 엄지손가락이 부드러운 포물선을 그릴 무렵, 심장을 할퀴고 지나간 상처는 이미 말끔히 아물어 있었다.

“……깨물어봐도 돼요?”

테이블을 돌며 몇몇 단골들에게 아는 체를 하고 있던 마해영이 마침내 인환의 테이블로 다가와 익숙한 인사를 던졌다.

나른하고 상냥한 말투엔 은근한 품위가 느껴져서 흔히 보는 바텀들의 천박한 끼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다. 블루 계열의 페이즐리 무늬가 아로새겨진 실크의 베스트 이외엔 새하얀 드레스셔츠며 암청색 팬츠까지 평범하고 단정하기만 한 차림새라(영락없는 공무원 분위기다!) 도저히 물장사를 하는 남자라고는 생각되지가 않는다. 물론 유난히 부드럽고 새까만 머리카락이며 투명해 보일 정도로 깨끗한 안색, 그리고 무엇보다도 호리호리하고 섬세한 라인을 그리는 180센티의 날씬한 몸매는 묘하게 중성적이어서 절대 평범한 남자로도 보이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다.

괴이쩍은 인사법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 허락을 내리자 마해영은 샐러드 포크를 들고 있던 인환의 오른손을 들어 올리더니 손목과 팔꿈치의 중간쯤 되는 부분에 살며시 이를 박아 넣었다. 아프다고 하기에도, 간지럽다고 하기에도 그런, 그야말로 적당할 만큼 힘이 들어간 자극이 팔등에 가해지며 선명한 잇자국이 생겼다. 맞은편의 그가 신경이 쓰였지만 잠시 의아한 듯 눈을 들어 인환을 응시했을 뿐으로, 연인은 다시금 식사 중이던 음식 접시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오랫동안 보이지가 않아서 드디어 소원대로 투명인간이 됐나 싶었는데, 연애하느라 바쁘셨나 봐요? 나, 안 보고 싶었어요?”

곤란한 표정을 짓는 인환을 재미있다는 듯 응시하며 남자가 덧붙인다. 한때의 영웅이었던데다, 연배로 보나 기이한 성격으로 보나 인환으로선 대하기 벅차기만 한 타입이라 평소처럼 거만하게 인상을 굳히는 것으로 남자의 은근한 참견을 차단하려고 애썼다.

“보고 싶을 이유가 없잖아요. 누가 아저씨 따윌 보고 싶대?”

“또 마음에 없는 말 한다…….”

실처럼 가늘어진 눈으로 남자가 부드럽게 흘긴다. 늘 졸고 있는 것처럼 나른해 보이는 눈매도 저렇게 웃을 때만큼은 되레 날카로운 인상으로 변한다.

“……인테리어 바꾼 거 어때요? 좋아 보여요?”

“뭐, 그럭저럭 봐줄 만은 하네요.”

그린 계열의 색조들이 어우러져 강렬한 인상을 주고 있는 70여 평 남짓한 공간으로 시선을 보내며 무성의하게 대꾸하자, 남자는 다시금 졸린 눈이 되었다. 바(bar)라기보다는 유럽풍의 고급 레스토랑이라는 게 미메시스의 정확한 용도다. 물론 밤 시간대엔 주류를 팔고, 요일마다 종류를 달리하는 라이브 공연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홀 가운데엔 춤을 출 수 있는 자그마한 무대까지 갖춰져 있어 손색없는 게이 바의 구실도 겸하고 있다. 주인의 분위기를 닮아 손님들 또한 전문직에 종사하는 점잖은 30∼40대 게이들이 주류를 이룬다(물론 그들이 파트너로 달고 오는 이들이 거의 대부분 20대인 걸 보면 연령대는 대체적으로 고른 분포를 보인다고 해야 옳다).

“되게 짜다……. 돈 엄청 들였는데요……. 풋내기 예비 화가 주제에 눈만 높은 꼬마 로트렉 님이라 이거죠?”

은근히 약을 올리는 어른의 여유가 마해영의 나른한 말투에서 묻어난다. 아아, 역시 예감이 안 좋다. 하기야, 생전 처음으로 파트너를 대동하고 나타났으니 남자가 쉽사리 자신들을 놔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 정도면 남자로서는 그야말로 노골적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닌 접근이다.

인환을 향해 실없는 도발을 던지는 내내, 남자의 날카로운 시선은 마치 평가를 내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맞은편의 연인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꽤 배가 고팠던지, 주문한 갈비구이 정식을 부지런히 입안으로 밀어 넣고 있는 연인은 남자의 탐색하는 시선을 느꼈을 법한데도 도무지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

“누가 꼬마야, 꼬마가?! 아저씨가 늙은 거라구! 그리고 그 기분 나쁜 별명으로 부르지 말랬지?”

삐딱하고 버르장머리 없는 응수로 발톱을 세웠다.

‘참견 말고 제발 사라져줘’의 아우라를 팍팍 풍기며 남자를 노려보기도 하지만 게슴츠레 졸린 눈에 감춰진 저의엔 흔들림이 없다.

“안성맞춤인데 기분이 왜 나빠요? 매번 와서 밥만 먹고 손님들만 스케치하잖아. 음, 우리 꼬마 로트렉 님이 올 때마다 나는 여기가 마치 「물랭루즈」가 된 듯한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구요. 안 그래요, 젊은 오빠? 손님들이 유혹해도 절대 안 넘어가고 종일 촌스럽게 그림만 그려대는 꼬마를 대체 뭐라고 불러야 돼?”

노골적인 부름에 비로소 연인의 시선이 마해영의 얼굴로 향했다. 입술 끝은 올라가 있었지만 눈은 조금도 웃지 않고 있는 남자의 서슬에 질 연인이 아닌지라, 한동안 빤히 시선을 마주했을 뿐으로 막연히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음식 접시로 고개를 숙인다. 명백한 거절의 사인. 아름다운 주인장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가는 게 보였다.

분명, 손님들에게 일정한 거리를 두는 평소의 남자로 볼 때 연인에 대한 관심은 이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원인이야 인환에게 주어지는 과분한 우정에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처음 보는 손님에겐 눈인사조차 하지 않던 마해영이었다. 모처럼의 호의적인 어택에 냉랭한 거절로 보답하는 연인이 은근히 자랑스럽기도 했거니와, 한편 미안하고 민망한 기분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마해영이야말로 어쩌면 세상에서 인환이 진정한 친구라 여기고 있는 단 한 사람일지도 몰랐으니까(확신은 하지 못한다. 늘 숨기고, 연기하고, 혹은 닫아버리기만 하는 인환의 표피적인 인간관계 속에서, 분명 애정은 남다르되, 그렇다고 남자에게 속속들이 속내를 털어놓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기에).

그랬다. 세상을 향해 철저하게 게이임을 숨긴 채 지내고 있는 인환이었지만 본능적인 끌림은 어쩔 수가 없었다.

재수 시절, 그 인간의 죽음과 더불어 시작된 본가 사람들과의 지루하고 더티한 유산싸움에 휩쓸리게 된 나머지, 고통과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잔뜩 가슴을 졸이고 찾아 들어간 최초의 게이 바 미메시스는 자신의 황량한 인간관계에 내려진 한 줄기 치유의 단비였었다.

중학교 2학년 무렵, 공부도 못 하는데다 센스도 나쁜(뿐인가, 얼굴마저도 우락부락 험하기 그지없는!) 짝꿍 남상훈을 짝사랑하게 되면서부터(그야말로 인환의 첫사랑이자 최초의 영웅이었다!) 시작된 고뇌와 고통은 인환으로 하여금 그 어떤 친구들에게도 진심으로 마음을 열 수 없게끔 만들었다. 신체적인 콤플렉스를 지닌 만큼 누구보다도 많이 웃고, 많이 베풀고, 많이 허세를 부린 탓에 인환의 주위는 늘 갖가지 유형의 친구들로 바글거렸지만, 그 어느 누구에게도 진심으로 마음을 여는 일은 없었다. 아니, 열지 못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리라. 어린 마음에도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즉시 날아들게 될 경멸과 배신을 익히 짐작한 때문이었다.

친구는 많았다. 정말이지 많았다. 하지만 진심으로 자신의 고통을 나누고 고민을 의논할 진정한 친구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마도 타고난 낙천성이거나 그림이 아니었다면, 인환은 저 혼란에 가득 찬 사춘기 시절을 깜깜한 절망 가운데 음울하게만 보내고 말았을 터였다. 그나마 밝은 성격과 그림에의 몰입이 공허한 인간관계에서 오는 고독감을 어느 정도는 상쇄시켜주었다.

위기는 재수 시절에 왔다.

살아생전, 단 한 번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었던 지긋지긋한 노인네였지만, 그렇게나 일찍 가버릴 줄은 상상도 못 한 인환이었다. 1년에 두서너 번이 채 될까 말까 한 노인네의 방문이 있는 날이면, 인환은 애증이 뒤섞인 복잡한 심정으로 엄마의 간곡한 부탁을 뿌리치고 외박을 했었다.

자신이 사생아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재벌 기업의 명예 회장이 자신의 생부이며, 또 그 노인네에겐 인환과 같은 처지의 숨겨진 자식만 해도 열댓 명이 넘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엄마는 인환이 그럭저럭 말귀를 알아들을 만큼 자란 중학교 2학년 무렵 그 모든 비밀을 고백해주었었다), 인환은 더 이상 아버지를 그리워하지 않기로 맹세했다. 아버지라고 부르기엔 이미 백발이 성성한 초로의 노인이었지만, 가물에 콩 나듯 평창동 집을 방문해서는 슬픈 듯한 눈길로 인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곤 하던 말없는 노신사를 인환은 나름대로 깊이 사랑했던 것이다. 사랑했던 만큼 배반감과 미움은 쉽사리 삭혀지지 않았다. 아버지의 정체가, 품위 있고 점잖은 신사가 아니라 그저 욕망을 자제하지 못하는 재수 없는 늙은이에 불과하며, 그것도 돈과 권력을 이용해 힘없는 여자를 강제로 취하는 파렴치한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자신의 육체적인 핸디캡 이상으로 인환의 모멸감을 가중시켰다.

절대로 두 번 다신 보지 않겠다…… 는 철부지 맹세를 5년째 지켜왔던 인환으로서 갑작스러운 노인네의 죽음은 충격 그 자체가 아닐 수 없었다. 미움과 혐오를 넘어, 저 마음 밑바닥에 숨겨진 사랑의 뿌리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아련한 기억을 비집고 들어오는 슬픈 눈과 새하얀 머리카락은 이제 보고 싶어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남은 것은 오로지 돈잔치. 오욕의 씨앗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피붙이들 간의 치열한 이권다툼뿐이었다.

친구가 그리웠다.

누구라도 좋으니, 저 뿌리 깊은 상실감과 환멸을 하소연하면 들어줄 상냥한 친절이 참을 수 없으리만치 그리웠다.

혹시라도 누군가 알아보면 어떡하나,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어쩌지? 게이 바엔 이상한 변태들로 우글거린다는데 잘못 걸려 몸이라도 망가지면……? 그토록 호기심에 차고 또 그리워했음에도 같은 뿌리에 대한 거부감과 공포 또한 쉽사리 떨치지 못했던 인환이었다.

환경이 뒷받침해준 탓에, 보통 아이들보다 비교적 빨리 친숙해질 수 있었던 컴퓨터를 통해 이미 알 거 모를 거 송두리째 꿰고 있었지만, 차마 현실의 세계로까지 자신의 정체성을 끌고 나갈 용기는 없었다. 또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엄마를 위해, 또 자기 자신을 위해, 자신의 부끄러운 성벽은 죽을 때까지 가상의 공간 속에서만 누리자고 맹세를 했으니까.

그러나 느닷없이 닥친 심리적 공황 상태는 그 어떤 비장한 맹세도, 위험성도 순간의 코미디로 보이게끔 만들었다. 본가 사람들(인환의 배 이상 나이가 많을 배다른 형제들)이 평창동에 들이닥쳐 엄마의 멱살을 다잡고 악다구니를 벌이다 돌아간 어느 날 저녁, 인환은 너무나 울어서 벌겋게 퉁퉁 부은 눈을 하고 미메시스의 현관 안으로 과감히 발을 들여놓았다.

막상 발을 들여놓긴 했지만 고슴도치처럼 털을 세우고 경계를 늦추지 않는 인환을 마해영은 조용히 눈여겨보고 있었다.

방문은 일주일에 한두 번이거나 한 달에 두서너 번꼴이었고, 매번 혼자 와서 식사나 칵테일을 주문하곤 바로 스케치북을 펼쳐 드는 인환이 아마도 유별나게 보이긴 했을 터이다. 물론 다리를 저는 빙신인 것도 눈에 띄는 특징이었을 터. 대번에 임자 없는 상대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손님들 사이에서 심심찮은 어택들이 이어졌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은 인환이 초대에 응할 리는 없었다.

명백히 나 외로워요, 아파요의 아우라를 팍팍 풍기면서도 단단한 방어벽 속에 틀어박혀 나올 생각을 않는 절름발이 화가 지망생은 점차로 미메시스의 명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연필과 펜과 색연필을 이용한 분방하고도 따스한 드로잉은 모델이 되었던 손님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사적인 어택을 하지 않는 한 그럭저럭 묻는 말에 대답 정도는 해주었는데, 그 목소리가 또한 감미롭고도 정감이 넘친다고 호들갑을 떨어댔다. 거만하고 고집스러운 성깔이 장난 아니라는 둥, 아마도 숫총각일 거라는 둥, 크게 실연을 당한 상처가 있어서라는 둥, 갖가지 억측과 소문 또한 끊이지 않았다. 인환은 잘 알지 못했지만, 잔뜩 멋을 부린 옷차림이며 섬세하고 귀여운 외모도 인기에 한몫을 하고 있다고 했다.

―……깨물어봐도 돼요……?

그렇게, 미메시스 주인장의 저 유명한 인사가 청해진 것은 인환이 미메시스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지 거의 6개월 만의 일이었다. 아주 나중에 들어 안 일이었지만, 깨물어보길 청하는 상대야말로 주인장이 친구로 인정한다는 뜻인데, 그야말로 미메시스의 단골들 가운데에도 몇 안 되는 드문 케이스라고 했다. 바로 5년 전, 인환이 스무 살이 되던 해의 일이었다.

“……어때? 번잡스럽지 않고 음식도 꽤 맛있는 편이지?”

“예.”

“찾아오는 사람들도 대부분 점잖아. 문제를 일으키는 놈들은 당장 쫓겨나거든.”

“예에…….”

“봐, 너 고등학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아무도 없지? 아까 인사한 형이 여기 주인인데 눈썰미가 예리한 편이지. 그 형이 못 알아채면 아무도 못 알아챈다고 봐도 무방해.”

“예.”

“뭐 더 먹고 싶은 거 없어? 오렌지 주스 더 시켜줄까?”

“아뇨, 됐습니다.”

“재미없다…….”

섭섭한 듯이 애교를 담아 말끝을 흐리자 마침 무대에 올라 연주를 시작한 재즈 피아니스트에게 시선을 주고 있던 그가 다시 인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참견쟁이 괴짜 사장을 간신히 쫓아 보낸 후, 연인과 둘만의 로맨틱한 디너를 즐겼다. 술을 마시지 않는 그는 여전히 오렌지 주스, 인환 역시 운전을 해야 했기에 커피를 후식으로 마시며, 말이 없는 그에게 억지로 수다를 떨게 하는 중이었다.

드물게 멋들어진 킹카인 만큼, 연인은 휴양지의 바닷가처럼 온화하고 잔잔했던 미메시스에 일대 파란을 일으키고 있었지만(친구들끼리 온 일행은 물론, 노골적인 짝짓기를 위해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놈들, 하다못해 파트너를 대동한 놈들까지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연인을 훔쳐보긴 마찬가지였다!) 손톱만큼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아무리 추파를 던져보라지! 헤테로인 그의 마음을 끌 남자가 어디 있을까 보냐!

“너, 아주 블랙홀이야. 그거 알지?”

“……?”

“대화가 안 이어져도 이렇게 안 이어질 수가 없어. 너무한다고 생각 안 해?”

말뜻과는 달리 인환의 얼굴은 그 이상 환할 수 없을 만큼 행복의 미소로 충만해 있어서 그 역시 그닥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투다.

“……죄송합니다만 무슨 얘길 해드려야 할지…….”

“……영화 같은 건 좋아해? 그림엔 영 관심이 없다는 건 알겠구……. 다른 취미 없어?”

“……시간이 없어서 영화는 못 봅니다. 잘 모르지만 아마 별로 즐기지는 않을 겁니다. 책은 좋아합니다. 공부하는 틈틈이 좀 읽는 편입니다.”

“야아, 어떤 책들?”

눈을 빛내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듯 다가드는 인환을 멍하니 굽어보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무뚝뚝하다. 생각을 더듬을 때면 약간 미간을 좁히는 것은 버릇인가 보다. 눈썹산 아래, 움푹 들어간 눈시울에 음영이 짙어지며 좀 더 사내다운 표정이 되는데, 그게 또 소름이 끼칠 만큼 매혹적이다.

“……쇼펜하우어나…… 니체…… 정도……. 루카치나 파펜하임들…… 마르쿠제류도 읽을 만은 합니다.”

처음 둘은 그렇겠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가 다음 셋을 듣고는 좀 불안해졌다. 그의 불행한 가족사에 관해서라면 오주희를 통해 이미 신물이 날 정도로 들었고, 그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온 이들은 분명 금서 목록에 포함된 텍스트들의 저자라는 것을 인환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너…… 운동권이냐……? 고등학생이 벌써……?”

“설마…….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순수한 동기로 타인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있다고 해도 세상을 움직이는 룰을 바꿀 만큼은 턱없이 부족하지요.”

가혹할 정도로 비관적이다.

아니, 저 눈에 비친 무기질의 단호함은 이미 체질화된 혐오거나 증오.

“……그저 구조를 바라보는 관점이랄까, 현실적인 시선들이 마음에 듭니다. 액면 그대로 다 믿고 화염병을 들 만큼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형에 대한 경멸과 냉소가 선명하게 감지된다. 그의 가족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아듣겠지. 물론 인환이 그의 개인적인 신상에 대해 훤히 꿰고 있다는 걸 그는 꿈에도 모를 터였다.

“……금서들일 텐데 어떻게 구해? 위험하잖아?”

그의 미간이 좀 더 좁혀진다.

“……친구가 하나 있습니다. 저와는 달리 출신 성분이 귀족인 녀석이라 어떤 책이라도 구해다주죠. 뭐, 지금은 별로 안 읽습니다. 확실히 위험하긴 해서요. 제 형도 그런 쪽에 연루돼서 죽었고, 아직도 가끔씩 경찰들이 기웃거리거든요.”

“……혀…… 형이? 어…… 어떻게……?”

모르는 체 반문하는 인환의 가슴이 설렌다. 그가 인환에게 가족 이야기를 털어놓은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군대에 징집되어 살해당했습니다. 대학 다닐 때 좀 과격하게 뛴 때문이죠.”

“아아…….”

고통스러울 사건임에도 마치 TV 멜로드라마의 줄거리라도 얘기하는 것처럼 태연하다. 가슴이 조이는 것처럼 먹먹한 아픔에 인환은 가늘게 떨리는 한숨을 토해냈다.

“……그…… 경찰은 왜 드나들어?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무슨……?”

“한번 찍힌 일당에게 세상은 별로 관대하지 않으니까요. 뭐, 다른 문제도 좀 있긴 하지만…… 아무튼 별로 기분 좋은 얘긴 아니니 관두죠.”

문득 조개처럼 입을 다물어버리는 그를 향해 더, 더라고 채근할 수는 없었다. 그 스스로 이만큼이라도 사적인 얘기를 해준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일 테니까.

“……나 담배 좀 피우고 올게…….”

담배 생각보다도 조여든 심장을 쉬게 해줄 필요가 있었다. 아아, 정말 이래저래 심장에 나쁜 연인이 아닐 수 없다.

화장실에 가서 오줌을 눈 다음, 홀 안쪽에 마련된 흡연석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눈에 익은 공무원 팬츠가 보였다.

“……이젠 손님들 그림은 안 그려요?”

별로 유쾌한 표정이 아닌 마해영이, 철 지난 버찌가 소복하게 담긴 접시를 인환이 앉아 있던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운을 뗀다.

“애인 그리기에도 바빠요.”

노골적인 닭살 멘트. 자랑스럽게 내뱉었지만 역시 좀 창피하긴 하다, 쓰벌.

“……오…….”

“버찌 맛있네. 애인이랑 같이 먹어도 돼요?”

그래도 초지일관, 닭살 연타.

창피해하는 줄 알면, 인환의 절절한 순정을 내내 놀림감으로 삼을 남자다.

“……진짜 상대 아니죠?”

두근…….

“……이반 같지 않아. 위험해 보여요.”

씹팔, 눈치 한번 되게 빠르네, 아저씨가!

“……그게 아니라도 너무 박정한 남자야. 인환 씨에게 안 어울려.”

“…….”

눈치 빠른 남자가 또 무슨 말로 자신을 당혹시킬지 몰라 인환은 연신 뻐끔 담배를 피우며 거만스레 남자의 말을 생깐다.

“……정말 걱정돼. 저런 남자에게 빠지면 안 돼, 인환 씨…….”

“좋은 사람입니다. 잘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마해영의 근심에 어느 정도는 수긍을 하는 터라 반박의 말엔 자연스레 짜증이 섞인다.

“짝사랑이야?”

“핫핫! 깨를 한 가마니는 볶고 있다오, 이 양반아!”

싱글싱글 허풍을 까는 인환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남자의 눈매는 여전히 나른하고 졸리다. 웃고 있지 않다는 증거.

“……그럼 저건 어떻게 해석해야 돼……?”

남자가 유리로 된 칸막이 너머, 그가 앉아 있는 자리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내가 이쪽으로 올 때까지만 해도 벌써 세 사람의 명함을 받아 주머니에 챙겼어. 그야, 눈이 번쩍 뜨일 미남이니까 손님들도 이성을 잃었다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저건 아니잖아? 파트너랑 들어왔으면 적어도 파트너에 대한 예의는 지켜야지. 아, 또다…… 손님 하나가 또 자리로 가네?”

마해영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린 것 같다. 제대로 입력이 되고 나서는 머리를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멍한 충격이 이어졌고, 마해영의 손끝을 따라가는 인환의 시선에선 살얼음이 피듯 천천히 웃음이 사라졌다.

고급스러운 양복을 걸친 중년 남자 하나가(대충 40대로 보이는) 그와 뭐라고 말을 주고받더니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그의 손에 쥐여주고 있었다. 여전히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무표정이었고 대화도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지만, 정중한 자세로 명함을 받아 든 그는 자연스럽게 청바지 뒤주머니에 명함을 쑤셔 넣고 있었다.

순간, 은은한 베이지색 조명이 감도는 미메시스의 실내가 마치 먹물이 끼얹어지듯 새까맣게 변하는 것 같은 착각에, 인환은 몇 번이나 눈을 깜빡여야 했다. 잊고 있던 상처가 갑자기 왈칵 벌어지며 새빨간 선혈이 콸콸 치솟았다. 목울대를 치받으며 노도처럼 끓어오르는 응어리에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뜨거워…… 무심코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뜨겁지……? 몸도 뜨겁고, 얼굴도 뜨거웠다. 아니, 실은 눈시울이 가장 많이 뜨거웠다.

“……인…… 환…… 인환…… 씨…… 인환 씨, 진정해요…….”

“…….”

“앉아요. 자리에 앉아요, 우선……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니까…….”

“…….”

마해영의 손이 인환의 팔을 잡아 다시 의자에 주저앉혔다. 애초부터 힘은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았던 탓에 인환의 몸은 휴지조각처럼 가볍게 소파 위로 무너졌다. 인환의 팔을 감아쥔 그대로 옆자리에 따라 앉은 마해영의 손을 물끄러미 지켜보는 사이 인환은 비로소 자신이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환의 팔을 감고 있는 마해영의 손이 흡사 폭풍 속의 뗏목처럼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쁜 놈이야……. 아∼주, 독종 새끼야, 아∼주…….

―사랑하지 말래……. 사랑해도 내색하지 말래…… 안 그럼 끝이니까…… 그걸로 당장 끝이니까…….

―다정하게 굴어도 착각하면 안 돼요……. 최선을 다한 서비스일 뿐입니다…… 손님이라면 누구한테나 이러니까…… 개새끼……. 정말 눈 하나 깜짝 안 하고는……. 그렇게 죽여주는 키스 끝에 말이지……. 정말 개새끼야……. 개새끼, 개새끼, 개새끼…….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무슨 행동을 취해야 할지 하나도 알 수가 없다. 귓속을 뱅뱅 돌며 줄기차게 때려대는 오주희의 절규만이 있다.

“아아, 이런…… 최악이다……. 하필이면……. 음, 신경이 곤두서는군. 다시 무를 수는 없나……?”

인환의 옆에 앉아 두 손으로 턱을 괴곤 마해영이 의미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 말을 거듭한다. 테이블 위의 버찌 접시로 졸린 시선을 두고 있지만, 남자가 정말로 보는 것은 멀리, 부지런히 명함을 주머니에 넣고 있는 박정한 남창이다.

“……진심인가……? 정말로 자네……?”

아마도 너무 욕심을 부리고 있었나 보다.

“정말……? 그렇게 좋아……? 정말로 돌아설 수 없을 것 같은가……?”

알게 모르게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던 거다. 연인이라고. 남창을 산 게 아니라 연인과 사귀고 있는 중이라고. 데이트 중이라고.

“……울지 마…….”

그래.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상처를 입을 까닭이 없다.

“……그쳐…… 제발 그쳐요. 지금 그 사람이 보고 있어요. ……인환 씨…… 이러면 더 좋을 게 없어요…….”

연인이 아니니까…… 자신 역시 그저 고객일 뿐이니까……. 그가 인환과 같은 남자들 중에서 새로 고객을 물색 중이라고 한들 별로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다. 왈가왈부하기는커녕, 여자에서 남자로 주 고객을 바꾸려는 걸 보면 최초인 자신이 마음에 들었다는 뜻도 되니, 되레 축하해야 할 일 아니겠어?

“……안 어울린다니까, 그러게……. 아무튼 울음이나 그쳐요. 그가 봐도 상관없어요, 정말?”

상관없을 까닭이 있나. 우는 건 토라졌다는 뜻이고, 토라졌다는 건 질투한다는 뜻. 질투한다는 건 사랑한다는 증거고, 사랑한다면 용서받지 못한다. 절대로 용서받지 못한다.

마해영처럼 두 손으로 턱을 받쳐 든 채 얼굴을 감싸 쥐었다. 손가락 끝에서 심장이 천둥 소리를 내며 걷잡을 수 없이 뛰고 있다. 심장의 고동은 뜨거운 눈시울에까지 이어져 규칙적인 리듬으로 홍수처럼 피눈물을 흘려보내고 있다.

“……아…… 안…… 올 거야……. ……여기…… 다시는 안 와요, 형…….”

흐느낌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기를 쓰고 이를 악문다. 씹팔, 힘이 들어간 목구멍이 너무 아프다.

“……절…… 대로…… 그와 함께는 다시 오지 않을래…….”

아무리 침통한 표정을 만들어도 그저 졸린 얼굴이 돼버리는 아름다운 남자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취기는 그리 심하지 않았다.

기분 좋을 정도로 알딸딸하고, 달궈진 얼굴에 와 닿는 밤공기가 제법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의 가벼운 알코올기. 칵테일 두 잔에 와인 석 잔.

운전을 해야 하는데 괜찮겠냐며 신중하게 물어오는 그에게 여봐란 듯이 잔을 들이켰다.

폭주를 할 생각은 없었다. 비참하긴 했지만 생애 최초의 데이트를 볼썽사나운 주사로 망치고 싶진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도저히 술 생각을 참을 수는 없었다.

연거푸 시켜 마시고, 빨개진 얼굴이 돼서 춤을 추는 것처럼 흔들거리며 미메시스를 나왔다. 많이 취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당장 운전을 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차는 일단 미메시스의 주차장에 남겨두고서 몸만 움직여보기로 했다.

들어올 때와 달리 불야성이 된 이태원 밤거리를 한 번 휙 훑어보고 시계를 확인한다. 오, 아직 10시도 안 됐다. 추가 요금을 지불하고 훔친 시간은 무려 여섯 시간. 11시까지는, 그는 완벽하게 내 거다.

“……이제 어디로 갈까요, 선생님?”

조심스레 물어오는 연인의 표정은 조금 굳어 있다. 머리가 좋은 남자이니 인환의 달라진 기분을 눈치 못 챌 리가 없다. 아마도 익숙하겠지. 사랑한 나머지 욕구 불만이 생겨버린 골치 아픈 고객 따위 이미 익숙하겠지.

“……글쎄…… 어디로 갈까……? 나이트 갈까?”

마음은 아픈데도, 생각에 잠긴 듯한 연인의 아름다운 얼굴엔 여전히 가슴이 설렌다. 여기저기 늘어선 입간판들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받아선지 유난히 몽롱하고 아련해 보이는 얼굴. 꼭 신기루 같다. 신기루처럼 예쁘고, 신기루처럼 안타깝다.

“……아아, 아니, 그건 아니다, 참……. 나, 다리가 이래서 춤추는 꼴이 영 우습거든……. 네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 정말 쪽팔리니까……. 노래방이나 갈까? 너 노래 좋아해?”

“…….”

“노래 싫어?”

“…….”

“하긴, 노래는 잘 안 부를 거 같아, 너……. 상상이 안 가……. 노래도 안 부르고…… 웃지도 않지…… 한 번도……. 네가 웃는 걸 본 적이 없어……. 웃지 않는 건 습관일까? ……아니면 그냥 슬프니까? ……항상 슬프니까……?”

“…….”

“어이, 또 블랙홀.”

말없이 인환의 눈을 들여다보며 전봇대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그의 가슴팍을 툭툭 때려본다. 바윗돌마냥 단단해서 차라리 때리는 주먹이 아플 정도다. 간신히 잠재운 울음이 또 터질 것 같다. 술기운 탓에 기분은 점점 들뜨고 있는데도 웬일인가 몰라…….

“블랙홀, 블랙홀. 왜 이렇게 얘기 듣기가 힘든 거야……. 성격이야? 아니면 내가 그저 ‘고객’일 뿐이라서?”

“…….”

“……친구들하곤 잘 어울리나? 고민 같은 것도 얘기해? ……아, 맞다! 금서까지 구해다주는 의리파 친구가 있다고 했지? 그 친구랑은 얘기 많이 해? 그래?”

“……취하신 것 같습니다. 오늘은 이만 여기서 헤어지는 게 어떨까요?”

단정하고 정중한 물음이 조용히 떨어졌다.

놀라서 올려다본 눈동자엔 얄미울 정도로 움직임이 없다. 순간, 뜨거운 불덩어리가 왈칵 치솟았다.

“한 시간 반 남았어!!!”

분노가 고스란히 담긴 앙칼진 일갈에, 뱉은 즉시 후회했지만 그다지 잘 보이고픈 마음도 들지 않는다. 서운하다. 얄밉다. 밉다. 밉다, 밉다, 정말로 미워서 견딜 수가 없어……!

분명 핏속을 떠도는 알코올기가 자제력의 실을 완전히 끊어놓고 있었다. 억눌려 있던 온갖 감정들이 맹렬하게 소용돌이를 치며 분출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는 것을 인환은 어렴풋이 자각하고 있었다.

“추가 수당 지급한다고 했잖아! 여섯 시간! 오늘, 여섯 시간 더 내게 봉사하기로 했어, 너! 아직 한 시간 반이 더 남았단 말이다!”

“…….”

“그리고, 미메에서 받은 명함 다 내놔!”

“?!”

“반칙이잖아, 그거! 내 시간에 다른 고객이랑 예약하는 게 어딨어?! 그런 무경우가 어딨어?! 넌 직업윤리도 모르냐?!!!”

“…….”

“호객을 하려면 나 없는 데서 해! 내 시간에 딴 데 정신 팔지 말란 얘기야, 열받으니까!”

“…….”

온갖 감정이 다 드러난 벌거벗은 눈으로 그의 표정 없는 눈을 노려보았다. 조금이라도 화를 내주기를, 모욕하지 말라고, 너 따위가 뭐냐고, 돈 좀 있다고 패악 떨지 말라고 따귀라도 갈기기를 간절히 빌었다. 적어도 저렇게 마치 물건을 보는 것처럼 무감정한 시선으로 자신을 보지만 않는다면, 대꾸할 가치조차도 못 느낀다는 듯, 언제든 갈 테면 가라 식의 냉담한 태도만 아니라면, 인환은 그의 그 어떤 반응도 견딜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꽤 오랫동안 서로의 시선이 맞물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한창 시간대의 이태원이라, 차도며 인도며 할 것 없이 온갖 소음들로 붕붕거리고 있었다. 주점이나 나이트를 찾아 길거리를 배회하는 취객들, 그리고 그들을 호객하는 삐끼들이며, 구역 관리를 나온 어깨들로 초만원. 가만히 서서 눈싸움을 벌이고 있는 인환이네 쪽은 아무래도 기이하게 보였을 것이다. 힐끔거리는 시선들이 왔다가는 사라지고, 다시 왔다가는 저쪽 길모퉁이로 다시 사라져간다.

문득 그가 시선을 내리고 바지 뒷주머니로 손을 가져가는 게 보였다. 손에 딸려 나온 것은 명함 대여섯 장.

“기분을 상하게 해드릴 생각은 없었습니다. 선생님의 지적, 모두 합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비스 중, 고객의 기분 역시 배려를 해드려야 하는 것이 의무인데, 본의 아니게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죄송합니다.”

인환의 손에 명함을 쥐여주곤 상체를 깊이 숙여 정중한 인사를 한다. 씨팔, 이건 아니다.

―나쁜 놈이야……. 아∼주, 독종 새끼야, 아∼주…….

절대로 아니다. 이따위 사과를 듣고 싶었던 건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사랑하지 말래…… 사랑해도 내색하지 말래……. 안 그럼 끝이니까…… 그걸로 당장 끝이니까…….

코끝이 맵다. 눈시울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뜨겁다. 아아, 안 돼…… 안 돼…….

그를 찢어발기는 심정으로 손에 들린 빳빳한 명함들을 갈기갈기 찢었다. 순식간에 잘게 쪼개진 종이 쪼가리는 뿌옇게 변한 시야 속에서 눈가루처럼 사뿐사뿐 땅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눈물을 참기 위해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팔짱 껴도 돼?”

“…….”

“남자라서 창피해? 게이로 보일까 봐?”

“…….”

“그렇다면 두 배로 쳐주지.”

“…….”

“추가 수당까지 합쳐 60만 원에, 거기다 두 배면 120만 원이지? 아홉 시간 같이 놀아주고 120만 원이면 꽤 짭짤한 소득이겠군. 안 그래?”

“…….”

“이리 와, 위위. 술 깰 때까지 그냥 걷자구. 기집애들이든 사내놈들이든 가리지 않고 네게 껄떡대니 어디 무서워서 안으로 들어가겠나 말야. 더 이상 기분 잡치고 싶지 않다구.”

그에게 상처를 주자는 심보인지, 자신에게 상처를 주자는 심보인지 알 수가 없다. 다만 폭주하고 있는 감정을 어떻게든 가라앉혀야만 한다는 생각을 했다. 다혈질적이고 광기 어린 자신의 숨겨진 본성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런 기분을, 갈기갈기 찢어발기고 싶은 자기 파괴적인 감정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는 알 수 없었다.

처음이었다. 막연히, 그의 다른 ‘고객’들을 질투해본 적은 있어도 이렇게까지 생생하게 저들의 존재를 실감해본 적은 없다. 용광로처럼 훨훨 타는 질투의 뱀이 배 속에 똬리를 튼 채, 인환의 전신에 맹독을 퍼트리고 있었다.

알코올의 도움마저 받아 재빨리 흘러넘친 독은, 혀와 입술을 거쳐 언어로 화한 뒤 연인에게도 동일한 효력의 독침을 쏘았다. 희미하게 남아 있던 자제력이 더 이상 안 된다고, 그만하라고 애달픈 비명을 질러댔지만, 인환은 귀 기울이지 않았다. 아니, 귀 기울일 수가 없었다.

“고마워. 야아, 진짜 가을인 거 같네. 바람이 시원해……!”

“…….”

신경질적인 기세로 그의 팔을 틀어쥐곤 무턱대고 걷기 시작했다.

아무런 저항 없이 왼팔을 빌려준 채, 그는 인환의 느린 보폭에 자신을 맞추고 있었다. 따듯한 체온이 느껴지는 맨살이 손바닥을 통해 감지될 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린 그는 인환의 그 어떤 심통스러운 너스레에도 전혀 반응이 없었다. 그것이 더더욱 인환의 좌절감을 부채질했다. 미메시스에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한계치를 초과해버린 다리의 피로감은 극에 달해서, 그와 팔짱을 끼지 않았다면 정말로 다리를 질질 끌고 다닐 형편으로 컨디션은 바닥이었다. 찬바람을 쐬니 점차로 알코올기는 가라앉는 것 같았지만, 비참한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가 않았다. 마지못해 아마도 의무적으로 자신을 상대해주고 있을, 어쩌면 심통을 부린 탓에 이젠 자신을 몹시 미워하고 있을지도 모를 그에 대한 생각만으로 가슴은 난도질을 당하는 것마냥 아팠다.

눈을 들어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지만, 반쯤은 넋이 나가 있는 탓에 좀처럼 방향 감각을 찾을 수가 없다. 정수기능대학에서 한남동 쪽으로, 꼬불거리는 골목길을 한참 동안 걸은 것만 막연히 짐작할 뿐이다. 싸구려 여관과 작은 음식점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좁은 뒷골목이라선지, 해밀턴 호텔이 있는 대로변에 비해 몹시 인적이 드물었다.

툭!

문득 왼쪽 어깨로 뻐근한 아픔이 느껴지며 상반신이 심하게 흔들렸다. 본능적으로 팔짱을 낀 그의 팔을 두 손으로 꼭 움켜쥔 채, 인환은 틀어진 중심을 잡기 위해 애썼다. 앞서 걸어오던 건장한 체구의 남자들 몇 중 하나의 어깨와 스치듯 부딪친 때문이라는 것을 인환은 잠시 후에 깨달았다.

상대가 워낙 거구여선지 충격은 인환 쪽이 훨씬 더 커서, 간신히 중심을 잡고 뒤를 돌아보니 가해자는 일행과 함께 시시덕거리기까지 하며 태연히 앞서가고 있었다.

아마도 계기가 필요했겠지.

폭주하고 있는 그에 대한 감정을 일거에 가라앉힐 희생양이 말이다. 그렇지가 않다면, 도무지 겁보에 몸 사리기가 제 1 신조인 자신이 그렇게까지 오버를 했을 까닭이 없다.

“……야, 이 새꺄! 너 뭐야?!!!”

히스테릭한 쌍욕이 인환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오자 틀어쥔 팔을 통해 그가 움찔 동요하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 찌르르한 통쾌감이 단전을 지나 척추를 거쳐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야비한 미소가 저절로 입 끝에 머물렀다.

“썅, 사람을 쳤으면 미안하다고 해야 할 거 아냐?! 입 뒀다 뭐해? 미안하단 말이 그렇게 아까워?!”

짜릿했던 카타르시스는, 그러나, 불운한 가해자 일행이 천천히 돌아선 것과 함께 단숨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을 쳐야 했다.

“뭐야? 뭐가 어쩌고 어쨌다고?”

걸걸한 쇳소리엔 갑빠가 들어가 앉은 것 같다.

한눈에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은 얼굴과 등발이었다. 평범한 직장인들이라고 보기엔 고지식해 보이는 반듯한 양복들은 이태원에서라면 종종 볼 수 있는 ‘조직’의 냄새를 풍겼다. 일행은 모두 셋. 한결같이 험악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 인환과 그를 번갈아 주시하고 있었다.

“이런 씨발, 니미 좆같은 경우를 봤나. 재수가 없으려니까 콩만 한 호모 새끼들까지 깝쭉거리누만. 야, 씹질 하려면 니 집 안방에 가서나 해. 거치적거리지 말구.”

일행 중 하나가 그와 팔짱을 낀 인환의 두 손과 얼굴을 흘낏거리며 으름장을 놓았다. 분명 기분이 상하긴 했지만 별로 일을 크게 벌이고픈 눈치는 아니었다. 달리 급한 일이 있는 듯도 보였다.

아마도 인환이 이쯤에서 머리를 숙이고 비굴하지만 현명한 처신을 했더라면, 사내들은 몇 마디 쌍욕을 싸지르는 것을 끝으로 다시 제 갈 길을 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사내들의 눈에 떠오른 노골적인 비아냥과 경멸의 눈빛을 보는 순간, 그들의 험악한 인상에 압도되어 잠시 수그러들었던 절망이 다시금 전신의 피를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심장이 쾅쾅 북을 쳐대고, 흥분한 숨길은 증기기관차처럼 폭주했다.

“뭐, 이 개새끼야?! 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 뭐라고 그랬어?!!”

“선생님!”

당혹스러운 그의 외침도 폭주기관차에 힘을 더했다. 단전에 전기가 오른 것만 같았다. 한계에 이른 피로감도, 빙신 다리의 고통도 모두 잊혔다. 흥분제를 맞은 수퇘지처럼 길길이 날뛰며 사내 앞으로 달려가 멱살을 부여잡았다. 그러나 기분과는 달리 미친 듯이 쥐고 흔들려 해도 인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거구의 상반신은 꿈쩍조차 하지 않았다. 벽이다. 아아, 그의 넋처럼 거대하고 거대한 얼음벽이다!

“그래, 나 호모다! 그게 어때서?! 나 호모라고 니들이 뭐 보태준 거 있어?! 내가 니들한테 뭐 피해 준 거 있어?! 씨팔, 더러운 새끼들이, 기집애 보지에다 쪼기만 하면 다야?! 그럼 사람 치고도 미안하단 말 안 해도 돼?! 그렇게 대단해?! 그렇게 잘난 좆대가리야?!!”

“……이…… 이 쌍년이……?”

“선생님!”

빠악!

갑자기 왼쪽 뺨이 부서지는 듯한 극심한 아픔이 달려 나갔다. 별이 보이는 순간적인 착각 후에, 인환의 몸은 사내의 손아귀에 의해 공중으로 붕 떴다가 2∼3미터쯤 떨어진 땅바닥으로 패대기쳐졌다.

쿠당탕탕∼∼∼∼!

마침 바로 근처에 있던 파란 플라스틱 휴지통이 인환의 팔에 밀려 요란스러운 소리를 냈다. 얻어맞은 뺨보다 땅바닥에 부딪친 충격이 더 컸던 모양이었다. 허리며 엉덩이 쪽으로 달려 나가는 극심한 고통에 인환은 의식이 가물가물해지는 듯한 쇼크를 받으며 심하게 몸을 꿈틀거렸다.

윙윙거리는 이명이 우는 귓속으로, 전기톱 소리처럼 내장을 할퀴는 사내들의 악다구니가 설핏 들려왔다. 제대로 사리 판단을 하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무의식중에도 또 다른 극심한 고통을 예상한 몸이 누에처럼 웅크러들며 방어의 자세를 취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더 이상의 고통은 떨어지지 않았다. 분명 신음이 있었다. 뼈가 부서지는 소리, 복부를 강타당해 퍽 하고 바람이 빠지는 소리, 끔찍스러운 저주가 담긴 욕설과 함께 맥주병이 깨지는 소리, 각목인지 널빤지인지가 맞부딪쳐 바스러지는 소리들이 지저분하고 비좁은 이태원 뒷골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크, 싸움이다!”

“으엑, 어떡해!!! 저거…….”

“야, 야, 돌아가자! 삼거리 쪽으로 가도 돼…….”

“……야…… 양아치들 같어. 어이구, 1대3이잖어……?”

“시…… 신고해야자너, 저거?!!”

“야, 파출소가 바로 코앞인데……. 상관 말고 튀자, 빨리……!”

“그래도 저러다 뭔 일 나면…… 아이구, 인정사정없이 두들겨 맞네…….”

“쉿……! 빨리…….”

“어머……!”

“……저…… 저, 저, 저……!!!”

“가요, 지섭 씨, 가요……!”

나타났다가는 사라지고, 다시 나타났다가는 부랴부랴 사라져버리는 소시민들의 겁먹은 속삭임들이, 상상하기에도 끔찍한 현실을 증거해주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혈투를 증거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현실이라고 해도 반드시 현실일 리 없는 것도 있지는 않을까?

망연히 넋이 나간 채로, 마치 액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처참하게 피가 튀는 저것이 어떻게 현실일 수가 있는가? 망가져보자고 이를 갈아붙인 것은 자기였다. 절대로 연인을 끌어들일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절대로. 광란에 사로잡혀서 터질 것 같던 불길을 한번 뿜어내고, 그래서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은 자신일 뿐이라고, 폭주기관차의 운전자는 자신이니까, 그러니까 저것이 현실은 아닐 거라고, 인환은 몽롱하고 얼떨떨한 눈길로 대단히 현실감 있는 영화 한 편을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었다.

주연은 연인이었다.

천국에 오른 듯한 몇 시간을 선사해주다가, 태연하게 호객 행위를 하는 것으로 단숨에 지옥으로 곤두박질치게끔 한 남자.

처음, 주연은 일방적으로 얻어맞고만 있는 듯이 보였다. 주연에 못지않게 덩치가 큰 조연 둘이 번갈아 주연의 옆구리와 복부와 얼굴을 가격했다. 볼 때마다 가슴을 설레게 하는 아름다운 얼굴은, 인환이 제정신을 차렸을 무렵엔 이미 피투성이로 변해 있었다. 패닉을 일으킨 가슴은 그걸 봐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막연하게, 사람을 불러 도움을 청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만약 그렇게 하면 저것은 현실이 돼버리고 만다. 만약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개입을 해버린다면, 저 무시무시한 장면은 단지 영화가 아니라 단숨에 끔찍스러운 고통으로 화해 인환의 넋을 갈기갈기 찢어발길 터였다.

주연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숫자적으로도 열세인데다, 애초부터 싸움이 직업일 남자들이라 함부로 다가들었다가는 낭패를 볼 공산이 크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물론 주연의 판단은 옳았다.

초반의 수동적인 태도에 어느 정도 방심을 해버린 덩치 둘의 집중력이 떨어지는 순간, 아마도 국민학교의 어느 한 시점까지는 꽤 열심히 배우고 익혔을 법한 기술적인 발차기가 덩치 하나의 턱에 작렬했다. 목구멍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과 함께 덩치는 침몰하는 군함처럼 그대로 바닥에 곤두박질 쳤다. 카운트였다. 기절한 모양으로 다시는 움직임이 없다.

믿을 수 없는 사태에 눈이 휘둥그레진 또 다른 덩치 하나가 전열을 가다듬을 틈도 없었다. 덩치의 얼굴 정중앙으로 떨어진 주연의 주먹에 피를 뿜으며 비틀거리는 사이, 주연의 돌려차기가 사타구니 사이를 강타했다. 짐승의 비명을 내지르며 덩치가 앞으로 몸을 숙여 사타구니 사이를 감싸 쥐자, 부러진 각목 하나가 인정사정없이 덩치의 뒷목을 내리찍었다. 이미 카운터를 맞은 터라 덩치는 별 반항도 못 하고 쉽게 무너졌다. 쓰러진 덩치의 이마를 마치 확인 사살이라도 하듯 각목의 끄트머리로 쾅쾅 찍어 누르는 주연의 무표정한 얼굴은 마치 피를 뒤집어쓴 야수 같았다. 채 2분이 못 되는 찰나의 순간에 벌어진 의외의 사태에, 멀찍이 떨어져 관망을 하던 나머지 덩치 하나가 마침내 괴성을 내지르며 주연에게 달려들었다. 덩치의 오른손에 들린 반짝이는 그것이 날이 시퍼렇게 선 사시미 칼이라는 것을 인환은 나중에야 깨달았다.

마치 슬로비디오를 보는 것처럼 주연의 몸놀림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둥그런 플라스틱 쓰레기통 뚜껑을 재빠르게 집어든 주연이 덩치의 공격보다 한발 빨리 쓰레기통 뚜껑으로 덩치의 얼굴을 후려쳤다. 덩치의 손에서 반짝이는 물건이 떨어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한순간 주춤했던 덩치가 바로 날아든 주연의 오른발을 잡아챘다. 주연은 중심을 잃고 바닥에 고꾸라졌다. 몇 번, 덩치의 발길질이 쓰러진 주연의 옆구리에 작렬했다. 하지만 마지막 발길질은 몸을 한 바퀴 빙 돌려 역으로 덩치의 발을 걸어 넘어뜨린 주연에 의해 제대로 성공하지 못했다. 이번엔 주연의 무지막지한 발길질이 덩치에게 떨어졌다. 물론 덩치 역시 오래지 않아 같은 방법으로 주연의 발길질에서 빠져나왔다.

아마도 셋 중에 가장 강한 편이었던 듯, 주연은 앞서 쓰러트린 둘에 비해 꽤 고전하고 있었다. 목숨을 건 난타전이 이어졌다. 쓰레기통과 빈 맥주병과 부러진 각목들이 번갈아가며 서로의 몸을 가격하거나 방어하는 무기로 쓰였다.

싸움에 있어 서로가 박빙의 실력일 때, 승부는 의지력에 의해 판가름이 난다는 말을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영원처럼 긴 시간 같기도 하고 찰나처럼 짧은 순간 같기도 했던 혼돈의 시간이 지나, 마침내 덩치가 그 산만큼 육중한 몸을 땅바닥에 누이며 항복을 선언한 것은.

물론, 몇 번이나 거듭해서 쓰러진 덩치의 얼굴에 발길질을 하며 짓이기고 있던 주연 탓에, 말로는 선언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덩치는 끽소리조차 못 하고 앞서의 둘처럼 대자로 뻗어 있었다.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빵빵거리는 자동차의 클랙슨 소리, 쿵쿵대는 나이트클럽 스피커의 베이스 소리도 아련히 들려왔다. 환한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골목 끝 편도 2차선 도로 어귀에서 번쩍 하고 나타났다가는 촛불이 꺼지듯 훌쩍 사라졌다.

보는 즉시 꽁무니를 빼던 선량한 시민들의 그림자가 다시금 한둘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냥에서 승리를 거두곤 한동안 몸을 굳힌 채 짐승의 카타르시스를 즐기고 있던 주연의 몸이 비로소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쿵쿵쿵쿵, 땅이 울린다. 다급한 걸음으로 주연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조금씩 부어오르기 시작한데다 핏물과 땀이 범벅인 통에 본래의 모습을 찾을 길이 없는 주연의 얼굴이 인환의 앞으로 쑥 내밀어졌다.

“갑시다. 서두르면 조용히 끝낼 수 있어요.”

뜨거운 입김과 더불어 땀내에 섞인 피비린내가 확 끼쳐들었다.

대답도 못 하고 멍하니 넋을 놓고 있자, 주연의 팔이 단숨에 인환의 양쪽 겨드랑이 사이로 파고들었다. 번쩍 들어 올려지고, 그다음엔 끌려갔다.

“걸어요! 걸으실 수 있죠? 삼거리까지만 가서 택시를 잡읍시다.”

자꾸만 축축 늘어지는 인환의 몸이 거추장스러운지 인환의 한 팔을 자신의 어깨에 두르곤 단호한 어조로 명령했다. 어깨에 둘러진 팔을 쥐고 있지 않은 나머지 손은 인환의 허리춤을 단단히 휘어잡고 있었다.

“서둘러야 합니다. 누군가 벌써 신고를 했을지도 몰라요. 조금만 더 힘을 내보세요.”

거의 질질 끌려가다시피 하는 인환에게 냉랭하기만 한 명령이 다시 한 번 떨어진다. 어떻게든 주연의 명령에 따르고 싶지만, 그러나 다리는 물먹은 솜처럼 무겁기만 했다.

여기가 어딜까? 분명 대학 시절 내내 동기들과 죽 때린 탓에 훤하게 꿰고 있는 이태원이건만, 분홍과 빨강과 형광빛의 현란한 간판들이 붙어 있는 건물들은 각기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들인 것만 같이 낯설고 공포스럽기 짝이 없다.

얼마를 걸었을까, 마침내 구불구불한 골목들이 끝나고 2차선 도로가 보였다. 빈차 표시등이 켜진 택시 하나가 저 앞에서 오고 있었다.

피투성이 몰골을 의식한 듯, 인환을 부축하고 있던 그가 인환의 뒤로 비스듬히 몸을 숨기며 손을 들어 택시를 세웠다. 기사가 눈치채고 승차 거부를 하기도 전에, 재빨리 뒷좌석 문을 열고 인환을 차에 밀어 넣은 것은 물론이었다.

“……마…… 많이 다치셨네요, 손님. 어…… 어디로 모실까요?”

인환의 옆에 그 역시 자리를 잡고 앉자, 무시무시한 그 형상을 백미러로 훔쳐보며 기사가 행선지를 물었다. 더듬거리는 말투로 보아 막 싸움판을 거치고 온 조폭쯤으로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신촌으로 가주십시오.”

가까운 병원으로 가자고 하려던 인환보다 먼저 그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그의 집도 아니고 인환의 아틀리에도 아닌 의외의 행선지에 멍하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대했다.

“……병원에 가봐야지……. 아저씨, 먼저 병원으로 가주세요.”

“별로, 전 괜찮습니다. 집에 가서 약 바르고 한숨 자면 괜찮아질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안 돼…… 내가 안 괜찮아……. 병원에 가서 치료부터 하지 않으면…….”

그의 얼굴이 문득 가까이 다가왔다. 한쪽 손이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감싸 쥐며 입술을 가까이 했기에 인환은 순간 그가 키스를 하려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며 가슴을 두근거렸다. 물론 그건 어처구니없는 착각.

“……그 친구들이 신고라도 한다면 병원부터 뒤집니다. 물론 양아치들인 것 같으니까 신고 따위 할 리는 없지만, 그래도 만약의 경우란 게 있으니까요. 정당방위라고 하면 참작은 되겠지만 솔직히 말썽은 피하고 싶습니다.”

기사가 듣지 못하도록, 인환의 귓가에 나지막하게 내뱉어지는 어조는 비정하기 그지없었다.

“택시 기사도 믿을 수 없어요. 선생님 댁이든 제 집이든 바로 가는 것은 위험합니다. 일단 신촌까지 갔다가 헤어져서 따로따로 이동하는 게 현명해요.”

나이답지 않은 치밀하고 영리한 처신에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부르르 몸을 떠는 인환의 눈을 굽어보는 그의 무심한 시선은, 잔뜩 찢어지고 부어터진 피투성이 얼굴만큼 잔혹해 보였다.

“아저씨, 신촌으로 가주세요.”

그가 건조한 어조로 되풀이했다.

시원스럽게 빠지는 도로 탓에 신촌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0분이 채 될까 말까.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로 인환은 그 자그마한 틈새를 빌어 꾸벅꾸벅 졸았다. 너무나 지쳐 있었다. 육체도, 감정도 살아온 생애 내내 오늘만큼 극단으로 몰아붙여진 적은 없었다. 마치 배터리가 떨어지듯, 생각의 기능이 사라지자마자 참을 수 없는 수마가 대신 달려들었다.

“……선생님. ……선생님 도착했습니다, 내리세요…….”

얼떨떨한 채로 그의 팔에 떠밀려 택시에서 빠져나왔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보니 홍대 앞이었다. 2호선 전철역이 정면으로 보였다. 11시가 가까워오는 시각인데도, 주말답게 전철역에서 홍대 정문까지 이어지는 4차선 도로 주변은 인파로 넘치고 있었다.

“그럼 여기서 이만 헤어지죠, 선생님. 전 건너가서 버스를 타겠습니다.”

“……어…… 아…….”

택시 안에서 대강 핏자국을 처리했는지 조금은 덜 끔찍한 형상의 그가 자르듯 말했다.

“오늘 대금은 보내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제 실수도 있었고, 서로 맞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으니 관계를 정리하는 의미에서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무…… 뭐……?”

두근…….

“1년을 채우지도 않고 계약을 파기하겠다는 말씀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러는 게 현명하겠단 판단이 듭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친절하게 대해주셨고 마음 또한 많이 써주신 것을 압니다. 좋은 기억으로 간직하겠습니다. 그럼 들어가십시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아, 너무나 피곤하니까 더 이상 생각 따윈 하고 싶지 않은데……. 아, 그런데 왜 이렇게 심장이 뛰는 거지? 눈앞이 잘 안 보여. 계약을 파기한다고? 그건……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얘기? 설마…… 오, 인사를 하네? 90도 각도쯤 상체를 깊이 숙였어. 위…… 위위……. 야, 너…… 설마, 농담이지……? 그렇지……?

정중한 인사를 마치고 막 몸을 돌리려는 그의 옷자락을 쥐었다. 땀과 피로 축축하게 젖은 그의 잿빛 티셔츠였다.

“……선생님?”

뿌옇게 변한 시야 때문에 흉하게 일그러진 그의 상처투성이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후둑후둑 떨어져 내리는 액체 덕에 간신히 시선을 맞출 수 있었다.

표정이 없던 그의 눈에 희미한 당혹이 스쳐가는 게 보인다.

“…….”

말을 해야 하는데……. 이상하네……. 목에 돌덩이라도 매달린 것 같아……. 어떤 말도 꺼낼 수가 없어 초조해졌고, 초조감 때문인지 온몸이 와들와들 떨리기 시작했다.

“선생님…….”

“…….”

“……진정하세요, 진정하시고…….”

“…….”

곧 쓰러지려는 몸을 간발의 시간차로 먼저 뻗어온 그의 팔이 받쳐 들었다. 축 늘어지는 상반신이 그의 품 안에 끌려 들어가며 중심을 잡기 위해 그가 약간 비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단단한 가슴 근육을 뺨에 느끼는 순간, 땀내와 피 냄새에 섞인 그의 그리운 체취가 코 안 가득 밀려들었다.

“……택시 잡아드릴게요. 내일 전화 드리겠습니다. 할 말이 있으시면 그때 해주세요. 오늘은 그만…….”

“……으…… 어어…… 우아…….”

“!”

“……으…… 으으…… 윽…… 흐어어…… 으아…….”

“…….”

“……웃…… 윽윽…… 우아…… 아…… 아…….”

“…….”

“윽윽…… 흑…… 흐아아…… 앗…… 아아…….”

“…….”

“……아…… 우…… 으…… 우앗…… 아…….”

“…….”

울부짖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추한 모습으로 그에게 기억되고픈 마음도. 그럼에도 파도처럼 전신을 덮치는 통곡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의 가슴을 와락 끌어안은 채, 도무지 자신의 소리 같지 않은 짐승의 울음소리를 거침없이 토해내고 있었다. 미쳤나 보다. 아아, 정말 미치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없다. 하고 싶은 말은 안 나오고 하고 싶지 않은 히스테리만 온몸으로 발산하고 있으니 말이다.

곤란해하고 있는 그도, 자신들을 흘낏거리며 지나쳐가는 인파들도 모두 보였다. 그렇게나 쪽팔린 짓을 저지르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멈출 수가 없다. 도저히 멈출 수가 없다…….

갑자기, 몸이 번쩍 안아 올려졌다.

잰걸음으로 어디론가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는 그가 느껴졌다. 행여 떨어질세라 그의 목에 두 팔을 감은 채 결사적으로 매달렸다. 도무지 진정이 안 되는 설움에, 헐떡이듯 숨을 토하며 그의 품에 얼굴을 문질렀다.

그 후로 얼마 동안을 더 울부짖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기절하듯 잠이 든 건지, 잠이 들듯 기절한 건지 알 수 없는 의식의 단절이 언제 일어났는지도. 아프게 눈을 파고드는 형광등 불빛에 마지못해 눈을 떴을 때에는 이미 낯설기 짝이 없는 공간 안이었다.

싸구려 여관방이었다.

한 평이 가까스로 넘을 듯한 좁은 공간엔 인환이 누워 있던 이부자리 한 채와 베개, 그리고 머리맡의 물주전자와 두루마리 휴지 하나가 가구의 전부였다.

그는 문 옆의 벽에 기대앉은 자세로 눈을 감고 있었다. 잠이 든 것은 아닌 모양인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인환이 일어나자, 곧 눈을 뜨고 시선을 보내왔다.

한쪽 다리는 뻗고 다른 한쪽 다리는 반쯤 접은 채, 무릎 위에 왼쪽 팔꿈치를 받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피멍이 번져 더더욱 흉측한 몰골로 변하는 그의 얼굴에 새삼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또다시 눈물이 흘러나왔지만 다행히도 이번엔 히스테리를 동반하지 않았다. 어린아이 같은 맑은 눈동자만은 그대로인 아름다운 눈매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다소는 멍한 표정으로 인환을 빤히 바라볼 뿐, 그 역시 한동안 말이 없었다. 황량한 눈이었다. 몹시도 지친 한 마리 야수의 그것 같기도, 곧 닥칠 임종을 앞두고 죽을 자리를 찾아 들어가는 늙은 코끼리의 그것 같기도 했다.

“……관계 끝낼까요?”

거의 들릴 듯 말 듯한 속삭임에, 마침 눈시울 가득 들어찬 눈물을 힘껏 떨궈냈다. 눈꺼풀에 힘을 주니 아픔이 느껴진다. 연인 못지않게 퉁퉁 부어 있을 눈이었다.

“……대답해요. 여기서 그만 끝내고 싶어요?”

“…….”

말없이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사랑하지 마세요. 아니, 사랑하더라도 절대로 제가 모르게 하세요.”

“…….”

“선생님이 아주 편해요. 좋은 고객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고객은 쉽게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저도 이대로 선생님과 끊어지는 건 바라지 않아요.”

“…….”

“다만 오늘처럼 감정을 드러내신다면 더 이상은 무리입니다. 선생님이 원하시는 것을 저는 드릴 수가 없어요.”

“…….”

“……몰라요.”

“……?”

“모릅니다, 타인을 사랑한다는 게 어떤 건지. 그래서 당신들을 이해할 수가 없고 또 동정도 할 수 없어요.”

“…….”

“증오는 압니다. 당신들을 증오하니까.”

죽어가고 있던 짐승의 눈에 문득 냉혹한 살기가 깃드는 것이 보였다. 찢어지고 피딱지가 앉은 그대로 살며시 올라가는 입술 끝에 걸린 그것이 미소라는 걸 인환은 비로소 깨달았다.

히죽…… 하고 그가 웃고 있었다.

처음으로 웃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인환이 기대하고 꿈꿔왔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마치 연쇄 살인자가 희생자의 목을 면도칼로 그으면서나 지을 수 있는 웃음.

며칠째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마지막 사냥감에 화살을 박아 넣는 포식자나 지을 수 있는 웃음.

단순하고 즉물적이며 본능적인 악의의 웃음.

그랬다.

그런 거였다.

차라리 무표정인 그가 더 나았다고,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인환은 쓰라리게 생각했다.

“복수요? 아뇨, 그런 바보짓은 안 해요. 적으로 움직이면 견제를 당하다가 결국 힘을 갖기도 전에 먹혀버리죠. 바로 우리 형처럼.”

“…….”

“……그저 이용할 겁니다. 이용하고, 이용하고, 또 이용하고……. 그렇게 밟고 올라설 거예요. 다시는 밟히지 않게.”

“…….”

“……약속하시겠습니까?”

섬뜩한 악귀의 미소가 홀연 사라지고, 다시금 고요한 무표정으로 되돌아온 그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제게 어떤 감정을 요구하지도, 또 제 경제 활동에 개입하지도 않겠다고 약속해주신다면 좀 전의 얘기는 철회하도록 하겠습니다.”

“…….”

흐느낌 소리가 배어 나오지 않게 주의하면서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금 천국의 햇살이 비쳐들고 있었다. 약속을 하고 자시고도 없다. 절대로, 다시는 오늘처럼 미친 짓을 할 자신이 아니다. 천성을 억누르다 못해 언젠가 정말로 미쳐버린다고 해도, 절대로 그 앞에서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을 거다. 사랑을 드러내지는 않을 거다.

좋은 고객이 될 것이다.

그가 바라마지 않는, 이용하기 쉽고, 언제든 마음 편히 버릴 수 있으며, 인심까지 후한 색정광이 되어줄 것이다. 그가 어떤 호객 행위를 하건, 설령 바로 눈앞에서 다른 고객들과 섹스를 하는 걸 보게 되더라도 절대로 질투의 발톱을 드러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를 다시는 볼 수 없을 지옥만 아니라면…… 그래, 그 어떤 고통도 달게 받을 것이다.

맹세합니다…….

네, 하느님. 진짜로 맹세합니다……. 맹세합니다, 하느님, 맹세합니다…….

그가 무릎걸음으로 인환의 곁으로 다가왔다.

상처투성이 팔이 느릿하고 부드럽게 인환의 몸을 포옹했다. 떨림이 멈추지 않으면서도 필사적으로 그의 목에 매달렸다.

“……하…… 하…… 하…… 한 번…… 만……. ……따…… 딱…… 한 번만…… 말하게 해줄래……?”

“……?”

“……아…… 앞으로 다시는 말하지 않을 테니까…… 따…… 딱 한 번만…….”

“…….”

인환의 머리카락 속으로 파고 들어온 그의 커다란 손바닥이 대답처럼 상냥한 애무를 해주고 있었다.

“……사랑해…….”

“…….”

“……사랑해, 위위, 사랑해…….”

“…….”

“……네 얼굴을 사랑해…… 네 몸도 사랑해…… 네 자지도 사랑해…… 네 생각도…… 증오도, 다정함도, 영리함도 전부 사랑해, 전부…….”

“…….”

“……정말로 좋아……. 좋아해……. 사랑할 거야……. 죽을 때까지 너만 사랑할 거야, 너만…….”

“…….”

―하느님, 제가 가난해지면 이 사람이 절 사랑해줄까요?

―이 사람이 증오하는 계급을 버리면 조금쯤은 절 바라봐줄까요……?

허리춤과 머리카락 속을 떠돌며 부드러운 포옹을 거듭하고 있던 그의 두 손이 인환의 양쪽 뺨을 쥐며 시선을 맞춰왔다. 흐릿해진 시야 때문에 그의 눈빛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다정하고 부드러운 손놀림은 여전해서 그가 별로 불쾌해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당신은 고양이 같아요. ……비를 맞고, 털을 바짝 세운 채 웅크리고 있는 주인 잃은 고양이…….”

“……위야…….”

“……귀여워요……. 달리 언젠가 당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이 나타날 겁니다.”

그의 입술이 내려왔다.

키스는 그저 다정하고 상냥할 뿐, 언제나처럼 몸서리가 쳐질 만큼 숨 가쁜 욕망을 일깨우는 테크닉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마도 진심을 숨기지 않고 그의 뜻을 존중해준 인환에 대한 그 나름대로의 예의였을 것이다. 비즈니스적인 대상이 아니라, 잠시나마 그가 자신을 인간 취급해주었다는 것, 물론 그것도 지금 이 순간 단 한 번뿐이라는 것을 인환은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 기쁨을 안겨주고 있다는 것도.

부드럽게 입안을 어루만지는 그의 단단하면서도 매끄러운 혀의 감촉을 주린 듯이 빨아들였다. 가슴 뻐근한 행복감과 슬픔이, 멈추지 않는 눈물을 타고서 사방으로 흘러넘치고 있었다. 인환이 탐하는 대로 거듭 거듭 키스의 비를 내리던 그의 혀가 인환의 짭짤한 연옥의 증거들을 천천히 핥아 올리고 있었다. 눈꺼풀과 뺨, 턱 언저리는 젖어드는 즉시 그의 따뜻한 입술 속으로 삼켜졌다.

그저 그의 맨살에 닿고 싶다는 충동에 이끌려 그의 바지춤에서 티셔츠를 꺼내고 가슴과 등을 쓰다듬었다. 다친 상처가 아픈지 움찔거리며 가는 신음을 흘려댔지만, 그는 인환의 몸짓을 막지 않았다.

만세를 부르듯 양팔을 들어 올려, 티셔츠를 벗기는 것을 도와주었다. 엉덩이를 조금 들어 청바지를 벗기는 것도 도왔다. 내내 상냥한 키스를 거듭 하며 인환의 옷가지 역시 벗겨주었다.

마침내는 서로 알몸이 돼서 빈틈없이 깊이 끌어안은 채, 퀴퀴한 냄새가 나는 이부자리 위에 함께 몸을 묻었다. 키스하고 어루만지기만 했다. 인환은 발기하고 그는 역시 잠잠했지만 섹스를 할 기력은 둘 다 없었다. 조금이라도 떨어지는 게 싫어서 다리를 그의 단단한 허벅지 사이에 집어넣고 힘주어 끌어안았다. 까칠한 그의 다리털을 허벅지 안쪽 예민한 곳에 느끼고 무심코 허리를 흔들기도 했다.

얼마 안 가 금세 잠이 들어버리는 바람에 더 이상 그와 키스를 할 수 없게 되자, 얼굴을 내려 그의 온몸에 쉴 새 없이 입을 맞췄다. 몸에 하는 키스가 물리면 다시 그의 얼굴로 되돌아와 상처마다 빠짐없이 혀를 눌러댔다. 아픔이 느껴지는지, 그가 인상을 찡그리며 희미한 신음을 흘리면 깜짝 놀라 입술을 떼었다.

마침내 더 이상 키스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에는, 눈을 아프게 찌르고 있던 형광등조차 끌 기력이 없을 만큼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침몰하듯 감기는 눈꺼풀을 간신히 깜빡거리며 마지막으로 그의 입술에 키스한 다음, 그의 가슴팍을 기를 쓰고 부둥켜안은 채 마지못해 잠이 들었다.

1미터 폭도 안 되는 좁은 들창 너머 희뿌연 여명이 비쳐들고 있었다.

인환은 퀴퀴한 냄새와 더불어 낯선 방 안 풍경에 한순간 고개를 갸웃했다가, 이내 품 안에 있던 뜨겁고 단단한 덩어리를 기억해냈다. 모로 누워, 다리를 인환의 아랫배 위에 감은 채, 연인은 깊이 잠이 들어 있었다.

밤 내내 열이 오르고 신음을 거듭하는 그를 걱정하느라 숙면을 취할 수는 없었지만, 그럭저럭 움직일 수 있을 만큼은 잔 것 같았다. 은은한 행복감을 느낄 정도로 기분 또한 상쾌했다. 분명, 새벽이 되자 열도 점차로 떨어지고 깊은 잠이 든 연인 때문이리라.

그의 잠자는 얼굴을 한동안 홀린 듯이 들여다보았다.

언제 다시 그의 잠자는 얼굴을 볼 수 있을지는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실컷 감상을 해둘 요량이다. 음, 상처 없는 아름다운 얼굴일 때 봤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만약 그 일이 없었더라면 이렇게 그를 볼 수도 없었겠지.

까칠한 스포츠머리며 붉은 피멍과 찢긴 상처가 가득한 얼굴, 단단한 목줄기를 거쳐 늠름한 어깨와 가슴으로 천천히 시선을 내리는 사이, 아랫배가 뿌듯해지며 자지로 필이 온다.

조급한 마음에 손목시계를 한 번 봤다가 바로 손을 내려 기둥을 움켜쥐었다. 느긋하게 공을 들일 틈은 없다. 빠르게 피스톤질을 하며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숨을 깊게 들이쉬어서 그리운 그의 체취를 폐부 가득 끌어들였다. 그를 집에 데려가 치료하고(엄마의 주치의인 오 박사라도 부를 생각이다) 그의 집까지 데려다주려면 서둘러야 한다. 적어도 그가 깨기 전에 미메시스로 가서 차라도 빼 와야만 그의 고집을 꺾고 치료를 받게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차곡차곡 계획을 세우고 있는 의식의 한 틈으로 저릿한 오르가슴의 폭풍이 인다. 터져 나오는 교성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그의 배 위에 힘차게 뿌려댔다.

탈진해서 한동안 숨을 몰아쉬다가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니 그는 여전히 한밤중이다. 됐다.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간신히 거두어들이고 옷을 주워 입었다. 꾸깃꾸깃 구겨진 오렌지색 실크 셔츠며 크림색 팬츠는 여기저기 묻은 흙먼지와 핏자국으로 가득했다. 보통 때라면 찝찝하고 쪽팔려서 기겁을 했을 모양새의 것이지만, 군말 없이 입는 자신이 있다. 신기할 노릇. 장인환 드뎌 인간, 아니, 서민 되다인가? 큭큭.

여관(이라고 하기엔 쪽방에 가깝다)의 공중 세면실에서 세수를 하며 보니 자신의 얼굴 역시 훈장이 매달려 있다. 덩치에게 맞은 왼쪽 뺨에 선명하게 붉은 피멍이 들어 있었다. 역시 평소의 자신이라면 기겁을 했겠지만 어쩐지 흥겨워하는 자신이 있다. 그만 상처 입은 것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하긴, 상처라고 하기엔 좀 민망하지만. 쩝.

택시를 잡아타고 화장 벗긴 여배우처럼 밤과는 판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새벽녘의 이태원을 달려 BMW를 찾아 가져왔다. 아직 잠에 빠져 있는 그를 확인하고, 쪽방의 카운터를 보고 있던 할머니에게 가서 방 값을 계산한 후, 24시간 도시락 집을 찾아 도시락을 사 왔다. 영리한 그가 사람들 눈에 띄는 얼굴을 하고서 아침 식당을 찾을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날은 이미 훤히 밝아 있었다. 부지런히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약간 상기된 얼굴로 쪽방 문을 밀고 들어가니, 마침 그가 깨어나고 있었다. 몇 번 눈을 깜박이며 힘껏 목을 돌려 기지개를 켜는 그의 유연한 몸동작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괜찮니? 어제 열이 많이 나던데?”

“……그랬습니까? 잘 모르겠군요. 여기저기 좀 뻐근하긴 하지만 별로 힘이 들지는 않습니다.”

약간 잠긴 허스키한 목소리도 끔찍할 만큼 섹시하다.

“……어제는 경황이 없어서 미처 생각 못 했는데, 집에는 연락했어? 가족들이 걱정할 텐데?”

“아, 예. 어젯밤에 여기 들어오자마자 전화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 다행이네…….”

구겨지고 찢어지고 피와 먼지투성이인 옷가지들을 천천히 주워 입는 그의 얼굴은 조금 창백했다. 아무래도 움직일 때마다 꽤 아픔이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세수를 할 상태는 아니라서 조심조심 그의 상처를 살핀 다음, 쪽방 주인 할머니에게 빌린 연고를 발라주었다.

구석에 밀어둔 도시락을 내밀자 그의 부은 눈이 조금 커진다.

“……그러잖아도 배가 고팠습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불고기 반찬이나 김치는 핥듯이 비우면서도 돈가스나 햄버그스테이크는 고스란히 남기는 그를 훔쳐보며 킥킥 웃음을 흘렸다. 진수성찬도, 그를 받쳐줄 화려한 식탁이나 제복의 웨이터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인환이 그때까지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행복한 아침 식사였다.

식사가 끝나자마자 그만 집에 가보겠다는 그를 앉혀놓고 치료받을 것을 설득하는 데는 별로 힘이 들지 않았다. 집안의 주치의라 비밀이 새어나갈 염려도 없고, 당장 부러진 곳은 없다 해도 일단 얼굴은 전문적인 치료를 받지 않으면 흉터가 생길 수도 있다고 엄포를 놓았다. 잠시 생각하는 눈치였지만 인환이 생각해봐도 그가 반대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럼에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고맙다는 말을 하기까지, 인환은 가슴을 졸이며 숨을 삼켜야 했다.

쪽방을 나서기 직전, 오 박사에게 전화를 해서 출근 전에 잠시 성북동 아틀리에에 들러줄 것을 부탁했다. 엄마에게 절대 비밀의 맹세를 시킨 것은 물론이었다.

작은 왕진 케이스를 들고 나타난 땅딸막한 키의 오 박사는 뺨에 멍이 든 인환의 얼굴이며, 그보다는 더 심각한 연인의 얼굴을 번갈아 들여다보더니 뒤늦게 사춘기가 온 거냐며 농을 던졌다. 아마도 친구들끼리 술김에 싸움판이라도 벌인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물론 다행스러운 오해가 아닐 수 없다.

뺨과 눈썹 사이, 찢어진 피부를 네 바늘 꿰매고, 갈비뼈며 등 쪽의 타박상엔 시큼한 냄새의 찜질 약을 바르는 것으로 치료는 금방 끝이 났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소염제와 파상풍 예방 주사를 놔준 오 박사는, 일주일 후에 실밥을 뽑으러 병원에 오라는 당부와 함께 아틀리에를 떠났다.

옷장을 뒤지고 뒤져 그에게 겨우 맞을 듯한 면티 하나를 꺼내 갈아입도록 하고, 피투성이 잿빛 티셔츠는 세탁기에 넣었다. 인환 자신도 편한 면바지와 폴로티로 갈아입은 뒤, 세탁소에 전화를 해서 더러워진 옷을 가져가라고 했다. 열이 오르는 때문인지, 수시로 갈증을 느끼는 그에게 오렌지 주스까지 짜주고 나니 더 이상은 붙잡아둘 명분이 없었다.

시각은 오전 10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담담해진 인환의 태도 때문인지, 아니면 역시 다친 얼굴로 대중교통을 이용하기가 조금 신경이 쓰였는지, 그는 집까지 바래다주겠다는 인환의 배려를 선선히 허락해주었다. 무심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인 후 자동차 키를 꺼내 드는 인환의 마음속에 가슴 설레는 기대와 흥분이 자라고 있는 줄은 물론 그는 꿈에도 모를 터였다. 먼발치로나마 그의 집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요일이니까…… 어쩜 그의 어린 동생들도……. 어떻게 생겼을까? 중학교 2학년이라는 남동생도 그를 닮았을까? 여동생은? 킥. 여자애도 그를 닮으면 좀 그럴 텐데…….

차가 출발하고, 고척동이라는 낮선 지명을 말한 뒤, 조수석에 앉은 그는 금세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아마도 약 기운 탓일 것이다. 왼쪽으로 비스듬히 고개를 떨군 채, 도톰하고 섹시한 입술을 조금 벌리고서 색색거리는 숨을 토해낸다. 자신이 가진 것 중 가장 큰 사이즈임에도 그가 입으니 완전 쫄티가 되어버리는 선홍색 면티가 아름다운 몸의 굴곡을 고스란히 드러내주고 있다. 가슴 근육의 한가운데에 봉긋 솟은 젖꼭지를 만지고 싶다. 단단한 아랫배 근육도…… 청바지 가운데, 불룩 솟은 그의 상징도…….

그를 계속 훔쳐보고 싶은 욕망을 간신히 억누르며 운전에만 집중했다. 대충 지도를 보고 그가 말해준 이정표들을 더듬어 40여 분 만에 고척동에 도착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말해준 이정표인 오류중학교 앞에 차를 세우고 조심스럽게 그를 깨웠다.

“……여기서 이제 어디로 가야 돼?”

잠이 덜 깬 얼떨떨한 눈이 인환을 본다. 의식을 집중하기 위해 몇 번 눈을 깜빡이며 입술을 축이는 어린아이 같은 몸짓이 너무나 사랑스럽다.

“……어…… 다 왔네요. 여기서 내리면 됩니다.”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린 그가 어눌하게 덧붙이며 안전벨트를 풀었다.

“집 앞까지 데려다줄게. 어디로 가?”

“아뇨. 정말 됐습니다. 10분 정도만 걸으면 되는걸요. 여기서 내리겠습니다.”

서운함에 목이 멜 정도지만 내색은 할 수 없다. 따라가는 것도 절대 조를 수 없겠지.

“어, 그래. 잘 가라. 다음 주 금요일에 보자.”

“예. 전화 드리겠습니다. 그럼…….”

여전히 졸음기가 가득한 얼굴로 차에서 내린 그가 꾸벅 인사를 한다. 손을 흔들어주자 다시 한 번 짧은 목례를 하곤 방금 지나온 구로소방서 방면으로 몸을 돌렸다.

바로 쫓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절대로 눈에 띄지 않아야 하니까. 그나마 그가 별로 주변에 대한 경계 의식이 없는 것이 천만 다행일 노릇. 인환은 오랜만의 스토커 짓을 할 생각에 가슴을 두근거리고 있는 스스로에게 한편 한심하고 한편 애절한 기분을 느꼈다. 천천히 담배를 피워 물면서 멀리 점이 된 채로 모퉁이를 도는 그를 응시했다. 아주 보이지 않게 되자 허겁지겁 차에서 내렸다.

예상했던 대로 걸어서 10분은 절대 아니었다.

인환이 정차한 대로변을 지나는 것도 모자라 버스 정류장 두 개를 더 지나치고, 꼬불꼬불 미로 같은 골목길도 한참을 걸어, 가파른 언덕길에 면한 문제의 동네에 도착한 것은 거의 20여 분 만의 일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낡고 허름한 다세대 주택들이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빼곡히 들어찬 달동네(물론 진짜 달동네라고 하기엔 그리 고지대는 아니었다). 숨을 헐떡이느라 피우던 담배도 버리고 아슬아슬한 거리를 두고 그를 따라갔다. 점점 좁아지는 골목길을 보아하니 목적지에 거의 도착한 듯싶었다.

“위……?!”

어딘가에서 튀어나온 날카로운 부름에 인환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만큼 기겁을 했다.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추고 막 벗어난 모퉁이 사각 지대로 몸을 숨겼다.

“얼굴이 왜 그래?! 다쳤냐?! 누구랑 싸웠어?!!!”

날카로우면서도 사내다운 기백이 느껴지는 목소리엔 당혹과 근심이 절절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어, 성준이냐……? 언제 왔어……?”

“치료는 받았어?! 어디 부러진 건 아니고?! 봐봐, 얼굴 이리 내놔봐, 빨리……!”

“아야, 만지지 마…….”

“씨방새가, 당당히 외박이나 하고…… 게다가 인젠 싸움질까지 하냐?! 도대체 이 시간까지 뭘 하고 자빠졌다 이제 들어오는 거야?!!”

더할 나위 없이 친근하고 정감이 넘치는 어조며 목소리였다. 어쩔 수 없는 호기심에 끌려 조심조심 고개를 내밀었다.

지나쳐온 다른 다세대 주택과 마찬가지로, 낡고 허름하기 짝이 없는 한 2층 건물의 뒷문 앞에서 거대한 등발을 자랑하는 남자 둘이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한쪽은 선홍색 쫄티의 연인, 다른 한쪽은 힙합 스타일의 암청색 블루진에 하늘색 티셔츠를 받쳐 입은 낯선 남자. 새하얀 야구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있어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하얗고 갸름한 턱선이 꽤 단정한 얼굴임을 짐작케 했다. 키 또한 그와 거의 막상막하의 장신에 균형 잡힌 몸집이라서 그와 나란히 서니 그림이 따로 없었다.

“아야야∼∼. 만지지 말라니까! ……언제 왔냐? 많이 기다렸어?”

“잘 꿰매긴 했네. 다행히 흉터는 안 생기겠군……. 휴우∼∼ 십년감수다……. 네가 먼저 시비를 걸었을 리는 없겠지만, 넌 그 눈탱이만으로도 씹새들을 열받게 하는 구석이 있단 말이다, 새꺄. 씹새들이 눈 깔어 하기 전에 먼저 눈 깔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냐, 엉?! 제발 속 좀 썩이지 마라, 이 씨방새야…….”

“……시끄러, 졸려…… 나 잘 거니까 오늘은 그냥 가.”

“가긴 어딜 가?! 불청객 떴는데?! 너 달고 가지 않음 우리 아파트서 언제까지 죽칠지 모르는데?!”

막 대문을 들어서려던 그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나른하고 다감하기만 했던 허름한 주택가 골목의 공기가 갑자기 싸늘해졌다. 인환은 문득 온몸이 차가워지며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윤열이 형이 올라왔어……?”

섬뜩하기조차 한 냉랭한 물음이 그의 입술을 타고 천천히 흘러나왔다.

추석을 바로 코앞에 둔 초가을, 해는 이미 중천이었다.

하늘은 믿어지지가 않을 만큼 높고 푸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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