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1989년 9월. 김성준(金星俊) (5/129)

5. 1989년 9월. 김성준(金星俊)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코를 찌르는 듯한 매캐한 악취에 성준은 잔뜩 얼굴을 찌푸렸다. 

서른 평도 채 안 될 비좁은 아파트 거실 바닥에 한 가마니에 가까운 붉은 고추를 죽 널어놓았으니 그 냄새가 오죽하겠는가. 어느 틈에 가위로 두 동강까지 내놨는지, 불그죽죽 벌어진 틈새로 쏟아지는 노란 고추씨라니, 무슨 시골 농산물 공판장이 따로 없다. 이. 윤. 열! 정말이지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민폐의 달인이 아닐 수 없었다!

어젯밤, 숙박비랍시고 마른 고추 한 가마니를 짊어진 채 느닷없이 아파트로 들이닥쳤을 땐 성준 자신도, 형인 현준(賢俊)도 할 말을 잃었었다. 잊을 만하면 나타나서는 제 마음 내킬 때까지 죽 때리며 남의 애간장을 태우는 초 뺀질이 주제에, 억만 금을 갖다 바친들 환영해줄까 보냐.

숙박비가 문제가 아니다. 수배자면 수배자답게 어디 외딴 섬이나 산골 마을에 짱 박혀서 죽어지내면 누가 뭐라 하겠는가. 투사가 일신의 안위를 도모해서야 시국이 제대로 돌아갈 리 없다나 어쩐다나, 얼마나 민폐인 줄도 모르고 수시로 출몰해서는 재야인사들과 위험천만한 접촉을 가지는 통에, 저 인간이 지내는 며칠 동안, 성준의 속은 그야말로 숯검댕처럼 시꺼멓게 타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야, 저 인간과 같은 신념이나 투지를 가진 것도 아니고, 그저 친구로서 지켜볼 뿐인 현준이 형이나 자신은 뒷배경이 탄탄하니까 별 상관이 없다 치자. 문제는 위였다. 저 인간이 움직일 때마다 위는 기관원들에게 줄곧 시달려야만 했고, 또 그게 얼마나 녀석에게 상처가 되는가를 성준은 싫을 정도로 자각하고 있었다. 차라리 저 인간과 아주 관계를 끊어주었으면 하련만, 죽은 강이 형이 둘 사이를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인연의 실로 단단히 묶어주고 있었다. 저 인간이 위나 그 동생들을 친동생과 다름없이 끔찍이 여기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위에게 있어 저 철없고 무책임한 인간 또한 죽은 강이 형과 매한가지였다.

“……위……?!!!”

심각한 얼굴을 하고서 전화기에다 대고 열변을 토하던 중인 뺀질이가, 자신의 뒤를 따라 막 현관 안으로 들어선 위를 발견하곤 좁쌀만 한 눈이 금세 휘둥그레진다(좁쌀이 휘둥그레져봤자 완두콩 될까마는). 안 보이던 몇 달 동안, 아는 신부님(그 밥에 그 나물이라고, 신부님 역시 운동권이겠지만)의 먼 친척뻘 되는 나주의 한 농가에 은둔하며 농사일을 돕느라고, 뺀질이의 얼굴이며 몸은 온통 새까맣게 그을린 채 부랑자와 다름없는 몰골을 하고 있었다. 170이 겨우 넘을 키에 빼빼 마른 깜둥이 꼴이니, 아프리카 침팬지 원숭이가 따로 없다. 땟국에 전 회색 면바지에 어울리지도 않는 노란색 면티도 패션이라기엔 거의 호러 수준. 아무리 운동권이라지만 꼭 저렇게 티를 내야 하는 건지 성준은 그저 가소로울 따름이다. 꽤 오랜 수배 생활에 지칠 법도 하련만, 타고난 뺀질이 근성 탓인지(현준 형은 천사처럼 사심 없는 낙천성이라고 하지만 자신이 보기엔 그저 뺀질이 근성일 뿐이다) 표정만은 여전히 활력에 넘쳤다.

“아니, 상호가 워찌 그려?!!! 쌈이라도 했능가?!!!”

서둘러 전화를 끊더니 부랴부랴 현관 앞으로 달려와 위의 어깨를 감싸 쥔다. 호들갑스러운 어조로 나무라는 기색이지만 휘둥그레진 좁쌀눈엔 금세 눈물이 가득 들어찬다. 어이구, 계집애처럼 꼴값이 따로 없다.

“많이 여위셨네요. 건강은 괜찮으세요?”

아파트로 오는 내내 도살장에라도 끌려오는 것마냥 상을 구기던 녀석이건만 막상 내뱉는 언사는 살갑기 그지없다. 굳어진 표정과 달리 어린아이처럼 맑은 눈길에 설핏 떠오른 것은 애잔한 그리움과 연민이었다.

순간, 울컥 하고 치받는 뜨거운 감정의 응어리에 성준은 잔뜩 인상을 구기며 입술을 깨물었다. 감정이 거의 메말라버린 것 같은 녀석의 드문 인간다운 표정을, 꼭 저 인간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아무리 해도 용납하기가 힘들다. 그야, 딱히 저 인간에 대한 것이라기보단 죽은 강이 형에 대한 그리움이 저 인간에게 묘하게 투사돼 있다는 걸 모르지는 않는다. 강이 형에 대한 감정이 그러하듯이, 저 인간을 바라보는 녀석의 애잔한 연민의 시선에도 역시 희미한 냉소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스스로가 한심스럽다고 여기면서도, 성준은 치밀어 오르는 기묘한 질투심을 어쩌지 못했다.

애초부터 자신이 원하는 종류의 보답을 받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솔직히 자신이 녀석에게 뭘 원하는지조차도 아직 잘 모르고 있긴 하다). 그렇다고 저 뺀질이에게 주어지는 것처럼 진한 형제애를 바라는 것 또한 결코 아니지만, 그 정도나마의 애정도 자신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성준으로서 마음이 편할 까닭이 없다. 어차피 뺀질이도 피가 섞이지 않은 남임엔 다르지 않다. 어째서 자신은 그저 친구일 뿐이고 저 일생에 도움이 안 될 뺀질이는 녀석의 가족이 될 수 있단 말이냐, 젠장!

“살 빠져서 그렇지 몸은 좋아야. 잡생각 없이 노동 허니까 밥맛도 좋고……. 너무 편한 게 아닌가 싶어 한번 올라와봤다. 동지들 소식도 궁금허고 니도 걱정되고 해서……. 휘랑 혜윤이도 건강허고?”

“예. 저흰 괜찮습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어떻게 걱정을 안 허겄냐? 니덜이 어떤 동생덜인디……. 와, 어여 들어와. 상호 좀 자세히 보자…….”

채 신발도 덜 벗은 녀석을 끌다시피 거실 한가운데로 데려간다. 어쭈구리, 눈시울 가득 들어찬 눈물이 뺨으로 뚝뚝 떨어지자 새까만 팔뚝으로 쓱쓱 닦아내는 꼴이라니, 신파가 따로 없다. 감정이 폭주하면 고향인 목포 사투리가 튀어나오는 것도 영 밥맛이다. 특별히 전라도포비아는 아니지만, 저 인간 때문에라도 전라도 출신들이 싫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치료는? 이쁜 상호 흉가라도 지면 안 되는디.”

“예. 그저 좀 몇 바늘 꿰맸습니다.”

“그래, 금방 낫긴 하겠다마는……. 근디 아직도 학교서 니 찝쩍대는 놈덜이 있어야? 초장에 버팅겨야지 위험스로 피 보지 않을 것인디…….”

“……그런 거 아닙니다. 시내 나갔다가 양아치들과 잠깐 시비가 붙었던 것뿐입니다. 별일 아니니 신경 쓰지 마세요.”

“염병……. 해도 너무 줘 패지는 마라. 다 불쌍한 간나구 겉은 아새끼덜인 걸 알아야 쓸 것이여…….”

“……예.”

“짜식, 워쩌크름 그리 강이를 닮아가냐, 점점……. 소도당짝맹키로 듬직한 기골에, 눈탱이가 밤탱이인 것까정 똑겉어야…….”

“드러운 손으로 그만 만져요! 그러다가 상처 덧나겠네! 그리고 닮았네 어쩌네 하면서 괜히 세뇌시키지 마요, 속보이니깐. 하긴 세뇌시킨다고 넘어갈 녀석도 아니지만.”

두꺼비 같은 손으로 녀석의 얼굴을 떡 주무르듯 거침없이 만져대는 꼬락서니가 얄미워 날카롭게 쐐기를 박는다. 성추행범이라 해도 저렇게 음흉한 꼬락서니로 주물럭거리진 않을 거다, 씹탱. 게다가 닮긴 뭐가 닮았다는 거야. 그야 외모가 좀 닮은 건 사실이지만 녀석은 강이 형처럼 순진해 빠지지 않았다구.

지도 양심은 있어서 녀석에게까지 의식화 학습을 시키지는 않지만, 사람 홀리는 재주 하난 엄마 배 속에서부터 꿰어 차고 나온 인간이니 감시의 눈길을 게을리 할 수는 없다. 어젯밤에도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하는 현준이 형 친구들 몇을 불러 앉혀놓고 술판을 벌이다 광주 항쟁 얘기를 꺼내 온통 울음바다로 만든 위인이다.

계엄군이 들이닥쳤을 당시, 그저 철모르는 중학생으로 마루 밑에 숨어 벌벌 떨고나 있었을 위인이, 흡사 봉기의 선봉장이라도 된 양 당시의 급박하고 처절했던 상황을 실감나게 중계했던 거다. 이미 귀에 못이 박힐 지경으로 들었던 뺀질이의 허풍과 오버에 성준은 낯이 다 뜨거울 지경이었지만, 순진한 음악도들이야 뭘 알겠는가. 정치성하고는 체질적으로 담을 쌓은 종류들을 단 두어 시간 만에 초유의 혁명 투사로 만들었으니, 가히 그 방면 귀신의 내공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다.

“아따, 저 호로새끼 쪼까 봐바라이. 세뇌는 무신 세뇌여? 지나 울 동생 홀리지 말어야. 나가 두 눈 부릅뜨고 지키고 있응게.”

느릿하게 내뱉어지는 뻔뻔스러운 일갈에, 순간 가슴이 철렁한 나머지 성준은 뺀질이로부터 부랴부랴 시선을 거두고야 만다. 질질 짜는 신파를 연출하면서도 어떻게 저런 느물거리는 협박을 한단 말이냐, 씨댕이가! 씨발, 사기다, 사기!

혹시라도 눈치챘을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슬쩍 녀석을 살피지만, 무심하게 방바닥으로 시선을 내리고 있는 녀석의 얼굴엔 여전히 표정이 없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숨을 내쉬자, 특유의 교활한 좁쌀눈이 만족스러운 듯 실실 미소를 보내온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아이 같은 눈시울에, 씨익 하고 음흉하게 웃는 입술 틈으로 보이는 새하얀 이란 완전 호러다. 아우, 씨발, 저 인간을 그냥 콱!!!

그렇다.

성준이 저 뺀질이를 증오하고 또 증오하는 가장 큰 이유는, 뺀질이가 자신의 속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다는 저 찜찜한 현실 때문이다. 꽤 오래전부터 자각해온 성준의 진심. 바로 녀석을 향한 애틋한 진심을 말이다.

자신이 게이인지 아닌지, 성준은 아직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확신을 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다만 스스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건, 현재 자신이 유일하게 가슴을 두근거리고, 만지고 싶고, 또 키스를 해보고 싶은 대상이란 녀석뿐이라는 사실이었다. 물론, 특별히 녀석과 섹스를 하고 싶다거나 하는 더러운 상상을 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세상에, 여자의 거기에 집어넣듯이 사내새끼들끼리 섹스라니.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나는 짓거리가 아닌가.

자신은 그저 녀석의 잘생긴 얼굴이라거나, 근사한 몸이라거나, 의연하고 사내다운 말투를 떠올릴 때마다 줄곧 가슴이 두근거리고,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또 보기만 하면 손을 잡는다거나 얼굴을 만지작거린다거나 껴안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뿐이었다. 그에 더해 로맨틱한 키스를 추가한 것도 고작 요 근래의 일일 뿐이었다. 그러니 어디까지나 플라토닉! 애절하고 로맨틱한 우수를 품은 이 감정이 정말로 동성애인지는 도무지 스스로도 정의를 내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녀석을 그리워하면서도 자신은 여전히 여자들의 포르노 사진들이라거나 성인 영화를 보면 발기를 했다. 일주일에 한두 번꼴로 도색 잡지를 보며 수음을 하는 것도 여느 또래 친구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 자신이 게이일 턱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자신의 이 제일 소중한 친구에게 품는 애틋한 감정 역시 무시하고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감정을 자각한 지도 꽤 오래된 만큼 마음을 정리하는 데는 생각보다 그리 힘이 들지는 않았다. 아마도 시간이 해결을 해줄 거라고, 골치 아픈 고민을 오래 싸안기 싫어하는 기질대로 성준은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판단을 내리지 않아도 언젠가는 모든 게 자연스레 분명해질 거라고, 지금은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친구를 그리워하는 걸로 만족하자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현재 자신에게 닥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입시였다. 아버지의 기대대로 무난히 연대 의대를 가려면 집중력을 흐리는 소모적인 잡념에 빠져서는 안 될 일이다. 다행히 녀석을 향한 감정은 불처럼 격하다기보다 물처럼 유하고 부드러워, 충분히 절제가 가능한 영역이었다. 결론은 입시가 끝나고 대학생이 된 후에 내려도 늦지는 않을 터였다.

다만 문제는, 그러한 성준의 내밀한 사정을 손에 잡힐 듯 꿰고 있는 유일한 인간이 바로 저 뺀질이 이윤열이라는 사실이었다.

언젠가 현준 형까지 껴서 넷이서 함께 농구를 하던 중에, 온통 땀에 젖어서는 생수 병을 통째로 머리에 들이붓고 있던 녀석의 몸을 홀린 듯 정신없이 바라만 보다가 그만 뺀질이에게 들키고 말았던 것이다!

“뭐야, 레인지에 뭐 올려놨어요?!”

지난 몇 달간의 도피 생활을 특유의 허풍을 섞어가며 녀석에게 털어놓기 시작하는 뺀질이에게 잔뜩 적의를 담아 내뱉는다.

아마도 라면을 끓이려던 모양이었지만 냄비의 물은 바닥이 보일 정도로 거의 졸아들어 있었다. 제 집도 아니고, 라면을 끓일 때 이외엔 잘 쓰지 않는 낡은 양은 냄비며 라면은 또 어떻게 찾아냈는지, 눈치 빠른 뺀질이에 기가 막힐 노릇이다. 하기야, 남의 눈칫밥만 2년(수배 생활 2년!)이니 그 방면에 있어서도 귀신의 학위를 내주어야 할 판일 거다.

“어, 라면 쫌 뽀사 너라. 물 쪼까 더 느코 대여섯 개 뽀사라. 아직덜 밥은 안 묵었제?”

“흥, 물 다 졸았네∼∼! 먹고 싶음 지가 끓여 먹든지 말든지! 식객 주제에 하인 부릴 일 있어?”

“저, 저 호로쌔끼, 개깡다구마이! 성님허고 한분 뛰것다 고것이여?!”

“제가 끓여드릴게요, 형. 기다리세요.”

체, 한입거리도 안 될 위인이 인상 쓰면 누가 겁난대?

제법 열받은 척 게거품을 무는 뺀질이를 제지하며 주방 쪽으로 가는 녀석을 힐끗 훔쳐보곤 성준은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피로감이 역력한 녀석이 뺀질이의 시중을 들 걸 생각하면 안쓰럽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대신 해주기엔 더 속이 터질 일이다. 어차피 오늘 하루는 뺀질이의 상대를 하느라 곤욕을 치를 녀석이다. 지리멸렬할 정도로 인정(人情)을 타는 인간인지라 몇 달간의 회포를 풀려면 하룻밤 가지고도 어림이 없을 테지만, 그 인간도 양심은 있어서 하루 이상 녀석을 물고 늘어지지는 않았다. 이런저런 과중한 아르바이트로 늘 허덕이는 녀석의 사정 정도는 성준만큼 그 인간도 잘 알고 있었다.

1년 전쯤부터, 과중한 노동에 허덕이다 못해 불법 고액 과외로 일감을 바꾼 이래로 녀석은 그나마 조금 여유를 찾은 듯했지만, 그 일이라고 해서 그리 만만한 것 같지는 않았다. 육체는 조금 편해졌을지언정, 성준은 녀석의 표정이나 분위기가 그 이상으로 무겁고 어두워진 것을 선명하게 감지하고 있었다. 하긴, 또래의 머리 빈 애새끼들에게 온갖 아부를 해가며 공부를 가르친다는 게 쉬울 턱이 없었다. 녀석처럼 지독한 참을성이나 끈기를 지니지 않고서는, 벌써 1년이 넘도록 별 탈 없이 비밀 아르바이트를 계속 해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유치원 이전부터 한 동네 친구로 거의 형제나 다름없이 함께 자라온 사이였다.

국민학교 4학년 때, 부친의 사업 실패로 녀석이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면서 잠시 소원해졌던 관계는 몇 년 후, 같은 중학교에 나란히 입학하면서부터 다시금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깊은 우정은 둘이 서로 다른 고등학교로 배정을 받고 난 이후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사막처럼 메마른 녀석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극진한 애정과 관심을 쏟아붓거나 늘 바쁜 녀석을 자신이 주로 쫓아다니는, 극히 일방적인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는 우정이었지만, 성준은 그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불만을 품어본 적이 없었다. 늘 시간에 쫓겨야 하고 곤궁한 경제적 여건에 힘들어하는 친구가 그저 안쓰럽고 가슴이 저릴 뿐이었다. 연이은 집안의 불행으로 점점 싸늘하게 마음이 식어가는 친구를, 그저 조마조마해하면서 지켜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여건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서 빨리 대학도 가고, 졸업을 하고, 유능한 의사가 돼서 자신의 힘으로 돈을 벌고 싶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소중한 친구의 어깨에 지워진 무거운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싶었다.

아버지와 거의 의절하다시피 집을 나와 좋아하는 음악을 하는 현준 형을 보면 조금 부러운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성준은 그렇게까지 비현실적인 몽상가는 아니었다. 문과를 가서, 좋아하는 문학이나 철학 공부를 좀 더 깊게 하고 싶다는 꿈을 꾸어본 적도 물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인생의 성공을 보장해줄 현실과는 매우 동떨어진 발상이라는 것을 성준은 잘 알고 있었다. 현준 형을 놓친 아버지는 그만큼 더 성준에게 집착을 했고, 언젠가 자신의 뒤를 이어 병원을 맡을 수 있게 되길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성준 또한, 고속도로처럼 뻗은 성취의 삶과 소박한 학자로서의 삶 사이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을 해야 한다면 전자를 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선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존재가 바로 녀석이었다.

자신의 소중하고도 소중한 친구는 현실을 냉정히 들여다보는 눈이 있었다. 현실에 자유를 저당 잡힌 수인의 처지로서 그건 어쩜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지만, 바로 코앞에서 벌어지는 가혹하고도 처절한 삶의 투쟁을 지켜보며, 성준은 낭만이나 순수만 가지고는 쉽게 덜미를 잡히게 되는 인생의 쓰디쓴 공식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소중한 친구가 함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를 쓰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 역시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나아가 함정에 빠진 친구를 꺼내는 데 힘을 보탤 수 있으려면 단지 현상 유지만 가지고도 안 된다. 현재의 아버지 위치 이상으로 더, 녀석을 수시로 위협하는 보이지 않는 힘들을 제압할 수 있을 만큼 더, 더…… 더욱더 강해져야만 한다.

똑똑.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에 성준은 오랫동안 집중하고 있던 수학 문제집에서 고개를 들고 문가를 바라보았다.

“……공부하냐?”

눈에 졸음기가 가득한 녀석이 들어오며 나른하게 물어왔다. 지루하고 따분하지만 나름대로 성취감을 주는 작업에 집중돼 있던 의식이 일거에 풀리며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시끄럽지? 방해되지 않아?”

두 시간 전쯤에 돌아온 현준 형과 무슨 시국 사건에 연루돼 제적된 대학 선배 둘까지 가세해 거실은 저들이 토해내는 수다스러운 열변들로 꽤 소란스러웠다.

거의 3주 만에 녀석을 보는 터라 성준도 웬만하면 모임에 어울리고 싶었지만, 아무리 해도 친해지기엔 거부감이 드는 인종들이었다. 뺀질이 이하 뺀질이 선배인 제적생 둘도 그렇지만, 뺀질이에 대해서라면 무조건 영웅 취급하는 현준 형도 마땅치는 않았다. 냉장고에 넣어둔 매운탕거리로 찌개를 끓여 함께 저녁을 먹은 후, 제적생들이 사 온 통닭을 안주 삼아 술판이 벌어지는 것을 확인하곤 성준은 다시금 혼자 방으로 들어와 공부에 집중했었다.

“……면역되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내려가주길 바라야지, 뭐.”

심드렁하게 대꾸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얼굴 가득 웃음이 번진다. 술판이 끝나려면 적어도 새벽 1∼2시는 지나야 하리라고 여기고 있던 참이라(그때까진 꼼짝없이 뺀질이에게 묶여 있어야겠다 체념하고 있던 참이라) 느닷없는 녀석의 등장은 손끝까지 떨리는 기쁨이었다.

“졸리지? 소염제까지 먹어서 더할 거야. 거기 누워 자라. 아침에 깨워줄게. 벌써 많이 취한 것 같으니까 저 인간들도 금방 널브러질 거야.”

“……아, 5시에 알람 맞춰줄래? 집에 들렀다가 학교 가야 하니까.”

“왜? 책가방이랑 교복 가지고 왔잖아?”

“……응, 좀……. 아깐 생각 못 했는데 아르바이트 때문에 좀 들를 일이 있어.”

침대 위에 무겁게 몸을 누이며 녀석은 곤란한 기색으로 얼버무린다. 언제나처럼, 부드럽지만 완강한 벽이 느껴지는 대꾸다.

섭섭한 마음은 한구석으로 밀어두고서, 성준은 녀석의 비밀주의를 기꺼이 용서해준다. 자신에게 벽을 치면서도 조금쯤은 가책을 느끼는 듯 곤란해하는 녀석의 핸섬한 얼굴만으로도 그저 기뻤다.

“파자마 빌려줄까? 청바지는 불편하잖아?”

생전 처음 보는 야한 색깔의 쫄티에 낡은 청바지 차림이 멋있어서 새삼 가슴이 두근거리지만 자다가 불편해할 것 같아(실은 파자마를 입은 모습도 근사한 녀석이니까!) 운을 떼어본다.

“괜찮아, 됐어.”

“…….”

침대에 누운 채로 귀찮은 듯 천천히 벨트를 푸는 섹시한 몸짓에 가슴이 철렁해서는 부랴부랴 몸을 돌려 문제집에 시선을 집중했다. 아, 정말 위험하다……. 자신이 정한 한계 수치를 넘어 욕구가 팽창하는 것은 절대 사양이다. 아무리 멋있어도 이럴 땐 녀석을 안 보는 게 최선!

“……그쪽 사람들한테서 밀항이라도 하라고 권유받고 있나 봐. 형이 검거되면 그동안 도피 생활을 도왔던 사람들의 신변 안전도 그렇고, 단체에 돌아갈 타격도 만만치 않아서 그쪽 사람들이나 형이나 많이 지쳐하는 거 같아.”

몇 분이 지났을까, 피로와 근심이 잔뜩 묻어 있는 어조로 녀석이 불쑥 내뱉는다. 금방 곯아떨어질 줄 알았는데 역시 뺀질이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은 모양이었다.

“……지치긴…… 여전히 뺀질뺀질 기운이 넘치던데……?”

“……그렇게 연기할 뿐이지. 우리 걱정시키는 거 싫으니까.”

기를 쓰고 집중하려던 문제집에서 고개를 들고 다시금 그리운 얼굴을 바라본다. 젠장, 반듯하게 누운 채로 한쪽 팔을 들어 눈가를 가리는 권태로운 동작은 그대로 그림이다.

“하이고, 항상 주머니에 청산가리 넣고 다닌다며 유세나 부리는 인간이? 두 번 걱정해줬다간 분신자살 하겠다고 지랄 육갑을 떨겠네.”

“……유세가 아니라 정말 겁을 내고 있긴 해. 강이 형처럼 죽고 싶진 않은 거겠지.”

심상찮은 리듬으로 세동을 거듭하던 심장이 이번엔 다른 이유로 철렁한다. 씨팔, 도대체가 저 인간의 민폐엔 두 손 두 발 다 들겠다니까!

“흥, 맞아 죽을 각오도 없이 영웅 노릇은 왜 한대?!”

씹어뱉듯 쏟아내는 성준의 대꾸는 자연 험악해질 수밖에 없었다.

애써 저 밑바닥에 눌러두고 있던 이런저런 불안과 근심들이 늪처럼 진득하게 마음을 짓눌러오고 있었다.

6월 항쟁 이후, 그럭저럭 민주화가 이루어졌다고 해도 공안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시퍼런 서슬이 여전했다. 인권과 민주주의와 자주통일이 무조건 빨갱이들의 불온한 선동으로 호도되는 것도 여전했으며, 박통 시절 이래 이젠 거의 체질화되다시피 한 군사 정권의 폭압도, 수구 기득권 세력의 지배력도 여전히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산이었다. 강이 형은 그 잘난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듬해에 죽었다. 변화된 모습은 그저 표면일 뿐이고, 곪아터진 속내는 여전히 세상에다 대고 추악한 악취를 내뿜고 있었다.

미운 건 사실이지만 솔직히 정말 뺀질이가 죽거나 잡히는 것은 성준도 절대 바라지 않았다. 소문에 듣던 그대로 무시무시한 고문을 당한다거가, 아니면 강이 형처럼 쥐도 새도 모르게 정수리에 총알이 박혀 죽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잃고 싶지 않아…….”

“!”

“……더 이상 아무도 잃고 싶지가 않아…….”

“…….”

“……아아, 그렇다고 일어날 일들이 일어나지 않고 피해서 가주진 않겠지. 그러니까 언제든 최악을 각오해두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위…… 위야……!”

“……나도 윤열이 형이 밉거든…… 정말 밉거든, 성준아…….”

“…….”

“…….”

“…….”

고통스러운 침묵 너머로 떠들썩한 거실의 소음이 폭군처럼 달려들고 있었다.

불안과 공포를 잠재우려는 듯, 웃음소리는 마치 비명 소리처럼 길고 날카롭게 울렸고, 심수봉과 조용필을 번갈아 열창하는 뺀질이의 신파 메들리도 귀를 후벼 파는 위악을 연출하고 있었다. 끔찍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이라, 방음 상태가 부실한 민영 아파트를 생각하면 저 인간들의 방종을 그대로 둬선 안 될 일이지만, 어쩐지 자포자기한 조소가 성준을 사로잡고 있었다.

시시한 TV 개그 프로처럼 불쑥 다가든 고성방가에 하루쯤 선잠이 깬들 무슨 대수란 말인가?!

한쪽에선, 무모하지만 그래도 순진한 균형 감각들이 순식간에 빨갱이로 매도돼 줄줄이 윤간을 당하기도 하는데! 언제 붙잡혀 개죽음이라도 당할까 오줌을 지리면서도, 기를 쓰고 순진한 생각 하나만 붙들고 늘어질 줄밖에 모르는 벽창호 뺀질이도 있는데! 핏줄 셋을 억울하게 제물로 바치고 나머지 핏줄 하나마저 또 그렇게 맥없이 놓칠까 봐 절망에 차서 독하게 마음 준비를 거듭하고 있는 불쌍한 녀석도 있는데! 싸구려 민영 아파트에 둥지를 틀고 앉은 어느 소시민은, 단 하루, 그만 철부지 젊은것들의 객기를 못 참고 세상 말세라며 이를 갈아붙이고 있었다! 맙소사…… 네 편, 내 편 할 것 없이 몽땅 다 생에 덜미를 부여잡힌 비참하고 가련한 떨거지들이 아닌가……!

새벽 1시가 넘어가자 떠들썩했던 소음도 차츰 가라앉고 있었다. 아래층에서 한 번 항의가 들어온 후로 조금씩 자제를 하는 것 같긴 했지만, 여전히 목청을 높인 채 불러대던 뽕짝과 노동가요 메들리도 어느덧 웅얼거리는 듯한 흐느낌 소리로 변한 지 오래였다. 마침내 희미하게 들리는 코고는 소리 외엔 고요한 평화 속에 잠긴 거실로 나가보니, 네 명의 술고래들은 거실 이 구석 저 구석에 대자로 뻗은 채 얌전히 잠이 들어 있었다.

빈 맥주병들과 소주병들이 먹다 남은 안주 접시와 함께 난장판을 이루고 있던 교자상을 대강 치우고, 이불과 베개를 술고래들에게 던져준 뒤 성준도 비로소 잘 준비를 했다.

물론 제대로 잠이 올 까닭은 없었다. 술판이 계속되는 동안, 수학 문제집을 푸는 일은 그저 건성이었고, 고통스러운 소음에도 불구하고 시체처럼 잠이 들어버린 녀석을 내내 지켜보며 성준은 꿈처럼 낭만적인 공상만을 했었다.

수염 한 올, 미세한 크기의 점 하나까지 모르는 부분이 없을 정도로 너무나 익숙한 얼굴이건만, 봐도 봐도 질리지가 않았다. 멍들고 찢어진 흉한 상처들조차 시원시원하고 핸섬한 이목구비를 차마 다 손상시키진 못하고 있었다. 자신과 키는 어느 정도 비슷하지만 실루엣은 좀 더 크고 단단한 근육질인 아름다운 몸도 그렇게 설렐 수 없었다. 하염없이 바라보아 눈을 즐겁게 하는 쪽과, 어루만지고 껴안아 감각을 즐겁게 하는 둘 중 어느 걸 더 하고 싶은 지 알 수가 없어 한동안 갈팡질팡하기도 했었다. 대충 술판이 끝날 때까지만 눈에 양보를 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고는, 가끔씩 뒤척이며 잠꼬대를 하는 녀석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바라보았었다.

이를 닦고 파자마로 갈아입은 뒤 불을 껐다.

더 이상 밝은 빛 아래서 녀석을 볼 수 없는 것을 아쉬워하며 냉큼 녀석의 옆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단단한 가슴팍에 한동안 얼굴을 묻은 채 녀석의 그리운 냄새를 실컷 들이마셨다.

“……위야…….”

허락을 구하듯, 녀석의 뭉툭한 코를 살짝 꼬집으며 다정하게 불러본다.

“……야, 씨방새, 자냐……?”

이미 시체인 녀석이라 그만한 자극엔 꿈쩍도 않는다.

“……으…… 무거…… 그만하고 자…… 새꺄…….”

낄낄대고 웃으며 콧구멍 사이에 검지와 중지 손가락을 밀어 넣고 숨길을 틀어막자, 그제야 인상을 찌푸리곤 가슴팍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성준의 상반신을 밀어낸다. 띄엄띄엄 겨우 뱉어지는 허스키한 목소리에도, 마지못해 허우적대는 몸짓에도 무자비한 잠의 폭격에 완패당한 녀석의 노곤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안 자……?”

“……무…… 겁다니까…… 으…… 간지러…… 이 자식…….”

“……안 자네, 뭘…….”

“……그…… 만…… 두라구…… 으, 씨…….”

마치 하프를 뜯듯 갈비뼈를 따라 장난스레 쓰다듬기를 거듭하는 성준의 손가락을 이리저리 피해보다가는, 결국 체념했는지 우물우물 불만의 신음을 토해내고는, 녀석은 다시금 정신없이 곯아떨어졌다.

됐다. 이제 성준의 세상이다.

낄낄거리는 행복의 신음을 흘리며 성준은 녀석의 단단하고 늠름한 허리를 망설임 없이 힘껏 끌어안았다.

어릴 때부터 자신의 과도한 스킨십엔 이골이 나 있는 녀석이라, 언젠가부터의 엉큼한 접촉에도 녀석은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는다. 고맙게도, 자신이 엄마 없이 자란 탓에 유난히 스킨십에 굶주려 있으리라고 착각을 해주었다. 정말이지 사랑스러운 녀석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자신처럼 녀석 역시 아직 동정일 거다, 클클클…….

너무나 행복해서 수시로 터져 나오는 얼간이 웃음을 가까스로 깨물며 성준은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녀석이 똑바로 누운 자세일 땐 모로 누워 다리로 녀석의 허벅지와 허리를 휘감은 채 녀석의 가슴과 배를 줄기차게 쓰다듬었다. 녀석이 뒤로 자세를 틀면 녀석의 등에 전신을 찰싹 붙인 채 허리를 꼭 끌어안고 녀석의 머리카락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다시 앞으로 돌아온 녀석은 온몸으로 마주 끌어안았다. 정말이지 단 한 군데 빈틈도 없을 정도로 꼭 끌어안았다. 그 자세로 몇 분이 흐르면 마침내 답답한지 온몸을 뒤틀며 자신을 밀어내곤 웅얼웅얼 잠꼬대를 흘리는 녀석이었다. 그게 또 너무나 귀여워서 낄낄 웃음을 흘리다가 다시 슬금슬금 다가가 녀석의 가슴을 덥석 끌어안았다. 한번 잠들면 말 그대로 시체가 되는 통에 별로 주의를 하진 않지만, 그래도 몰라 몇 번이나 망설이다 녀석의 뺨과 입술에 살며시 입을 맞추는 것도 바로 이때였다.

곤란한 건, 이때쯤이면 무의식중에라도 녀석이 자신의 애무에 반응을 해버리기도 한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늘 피곤에 지쳐 있는 녀석인지라 그런 일은 극히 드물게 일어나곤 했지만, 가끔씩 새벽에 녀석을 만지다 보면 종종 성준은 난처한 상황에 빠지고는 했다.

들을 때마다 숨이 턱 막히는 섹시한 교성이 희미하게 녀석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오는 순간, 녀석의 그곳은 어김없이 거대하게 부풀어 있었다. 염치 좋게 추행을 일삼던 몸짓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일제 스톱이 되는 것은 물론이었다. 가슴은 두방망이질을 치고, 치미는 수치감에 얼굴은 확확 달라 올랐다. 온몸이 타는 듯이 부끄러운 와중에도 자신의 그곳 역시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걸 자각하는 순간은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었다.

―절대로, 절대로 그렇게 더럽힐 순 없다!

무얼 더럽힌다는 건지 스스로도 잘 깨닫지 못한 채, 성준은 미친놈처럼 욕실로 뛰어 들어가 온몸에 찬물을 뒤집어쓰곤 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토록 아슬아슬한 줄타기의 와중에도 성준은 단 한 번도 녀석을 안주 삼아 수음을 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납득할 만한 이유를 끌어다댈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것은 성준이 정한 최후의 마지노선이었는지도 몰랐다. 자신을 위해, 아니, 실은 녀석과의 우정을 위해 그것은 절대로 넘지 말아야 할 강력한 금기이자 성역이었다.

다행히 오늘 밤은 아무리 주무르고, 쓰다듬고, 어루만져도 녀석은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약 기운이 평소보다 더 녀석을 깊은 숙면으로 유도한 듯싶었다.

녀석의 상태를 확인하고 나니 성준의 갈망도 좀 더 대담해졌다. 아무리 잠들면 시체라고 해도, 평소라면 창피하고 무서워서 감히 만져볼 생각도 못했던 녀석의 엉덩이며 성기를 실컷 만지작거렸다. 티셔츠 틈으로 손을 밀어 넣어 따스한 맨살을 어루만지기도 하고, 고작 베이비키스일 뿐이지만 녀석의 도톰하고 섹시한 입술에 수도 없이 입을 맞추기도 했다. 좀 더 용기를 내서 혀를 살짝 내민 다음 장미 꽃잎처럼 부드러운 녀석의 입술 표면을 살금살금 핥아보기도 했다.

가슴은 떨리고, 걷잡을 수 없는 기쁨과 행복감에 목이 멜 지경이었다. 정말 좋았다. 정말이지 녀석이 이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별로 오래 산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든 사물이든 지금까지 이 정도로 열중하고 좋아해본 것이라곤 단 하나도 없을 만큼 성준은 녀석이 좋았다. 녀석이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어떤 힘든 일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녀석을 위해서라면! 아, 제기랄…… 냄새도, 감촉도, 체온도 이렇게까지 친근하고 그리울 수가 없다. 마치 몸의 어느 한 일부분이 달라붙은 샴쌍둥이라도 된 것만 같다. 오오, 정말로 그럼 좋을 텐데……. 정말로 샴쌍둥이처럼 둘이 붙어 있다면 단 한순간도 녀석과 떨어지는 일 없이 뭐든 함께 할 수 있을 텐데……. 가슴이 터질 정도로 강렬한 염을 담아 소원을 빌어도 본다. 상상만으로도 몽롱하게 들뜬 달콤한 기분이 된다. 아아, 그래……. 그렇다……. 이건 사랑인 거다……. 너무나 순수하고 완벽한 첫사랑이라서 앞으로 이 이상 더 사랑하는 상대를 만나게 될 것 같지는 않다……. 아니, 만나고 싶지도 않다, 않을 거다……. 그저 이 녀석이면 돼……. 이 녀석만 있으면 다른 아무것도 필요가 없어……. 필요하지 않아…….

찰칵, 끼이이이∼∼.

갑작스레 귓전으로 파고든 문소리에, 구름 위를 떠돌던 성준의 의식은 단숨에 현실로 급강하했다. 맙소사, 누군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다리로 녀석의 하반신을 휘감고 녀석의 등에 몸을 꼭 붙인 채, 티셔츠 속으로 손을 밀어 넣어 가슴을 어루만지던 중이었다. 뿐이냐, 녀석의 뒷목덜미에 입술을 꼭 붙이고서 짭짤한 소금기가 느껴지는 녀석의 피부를 살며시 핥고 있기도 했다. 커튼을 치긴 했지만 아파트 복도로부터 퍼져 드는 희미한 빛의 잔상까지 완전히 차단된 것은 아니라,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라면 누구라도 자신들의 기묘한 포즈를 알아챌 터였다.

충격과 부끄러움으로 거의 패닉 상태가 돼버린 성준이었지만 그래도 몸을 움직임으로 해서 죄를 자백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누가 뭐라 하든 자신은 잠이 들어 있었다! 설령 수상쩍게 생각하더라도 잠결에 한 짓이라고 잡아떼면 그만이었다! 수치감에 목이라도 매고 싶지만 참아야 한다! 참지 않으면 안 돼……!

얼음땡이 돼서 숨을 죽인 채 기다리는 동안, 다행히 불청객의 신원도 자연스레 밝혀졌다. 풀 냄새 같기도 하고 흙냄새 같기도 한 뺀질이의 낯익은 체취가 코를 찌르는 알코올 냄새에 뒤섞여 방 안 전체로 천천히 퍼지고 있었다. 정체를 알게 되자마자 온몸의 긴장이 순식간에 풀리며 자신도 모르게 억눌린 한숨이 비어져 나왔다.

성준이 잠들지 않았다는 사실도, 또 불청객의 정체를 알아챘다는 사실도 전해졌을 테지만 상관은 없었다. 뺀질이에게라면 더 이상 감추거나 거리낄 사정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쩐 일인지, 뺀질이는 단 한 마디도 없이 침대 쪽을(정확히는 녀석을) 굽어보며 미동도 않고 있었다.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성준이었지만 따끔따끔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뺀질이의 강렬한 시선을 온몸으로 자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독한 술 냄새며, 조금씩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긴 그림자며, 술이 완전히 깬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성준은 뺀질이가 맨 정신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드물게 보이는 진지함과 정직성으로 이 순간, 스스로를 조금도 포장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도.

천천히 느리게 토해내고 있는 숨길에서도, 줄곧 고수하고 있는 묵직한 침묵에서도, 어쩐지 성준의 온 신경을 바싹 긴장시키는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비어져 나오고 있었다.

불안하게 두근거리는 심장의 울림이 귀를 먹먹하게 했다. 어쩐지 숨을 쉬는 것도 몹시 버거운 느낌이 들었다.

―뭐야, 씨뎅이가……. 사람 간 쪼그라들게……!

“……지쳤어야…….”

더 이상 긴장을 견딜 수 없다고 생각이 들 즈음, 잔뜩 쉬어 터진 이상야릇한 목소리가 불쑥 내뱉어졌다. 혀가 풀린 주정뱅이의 기색은 분명했지만 뺀질이의 그것 같지가 않았다. 너무나 생소한 어조와 억양이라 정말로 뺀질이인지 눈을 떠서 확인하고 싶을 정도였다.

“……강이야, 나 지쳤다…….”

“?!”

“……진짜여…… 무자게 힘들어버리네…….”

“…….”

“……보고 싶어…….”

“…….”

“……보고 싶다, 강이야…….”

“…….”

“……보고 싶어 환장을 허겄어야…….”

“…….”

“……징헌 놈, 듣고 있냐? 니 보고잡다 말이여…….”

“…….”

“……징헌 놈…… 징헌 놈, 징헌 놈…… 무작시러 징헌 놈…….”

“…….”

분명 뺀질이가 아니다. 뺀질이라면 저렇게 누가 알아들을세라 숨을 꾹꾹 눌러 삼키며 울 리가 없다. 숨을 삼키기는커녕 온갖 엄살 다 부리며 산지사방에 자기 아프다고 광고를 때리는 인간이다. 통곡을 하는 인간이다. 그러니 저건 뺀질이가 아니다. 아닐 거다.

“…… 죽었다고……? 참말로 니 죽었다고……? 징헌 새끼, 니가…… 니가 워쩌크름 그럴 수 있어야……?”

“…….”

“……나 혼자 워쩌라고…… 혼자 워쩌크름 견디라고 니가…… 니가…….”

“…….”

그래, 아니야. 아닐 거야. 겁낼 필요 없어. 가슴 아파할 필요도 없어. 그저 술 처먹고 잠시 환장한 것뿐이니까…… 날만 밝으면…… 제정신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그래, 언제 그랬냐 싶게 해장국 끓여 와라 뭐 해 와라 하며 사람 속이나 뒤집을 위인이라구…….

숨죽인 오열은 꽤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것 같다.

겁에 질린 나머지, 전신을 빳빳하게 굳힌 채로 환장한 뺀질이의 눈치를 살피느라 시간의 흐름조차 잊었었다. 마침내 비틀비틀 흔들리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한 채 뺀질이가 방을 나갔을 무렵엔, 성준의 온몸은 식은땀으로 범벅이 돼 있었다. 심장은 미친 듯 두방망이질을 치고, 습관처럼 멍하니 녀석의 피부를 만지작거리는 손끝도 얼음장처럼 싸늘했다.

―정말 잃게 될지도 몰라…… 녀석은 정말로 뺀질이를 잃게 될지도 몰라…….

구체적인 언어로 자문하듯 되뇌고 나니 공포와 불안을 더더욱 참기가 힘들었다.

뺀질이의 사정은 생각보다 꽤 심각한 것인지도 몰랐다. 아니, 심각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저 심심해서 올라온 게 아니라, 나주의 은신처 역시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아진 때문인지도 알 수 없었다.

녀석이 희미하게 몸부림을 칠 정도로 녀석의 상반신을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얼굴을 녀석의 목덜미에 대고 마구 비벼대자 턱 끝에 조금씩 돋아난 자신의 수염이 따가운지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모로 고개를 튼다.

사랑스러움에 목이 멘다.

안타까움에 눈물이 난다.

보고 싶지 않다. 녀석이 상처받는 건 정말 더 이상 보고 싶지가 않다.

분명, 자신 역시 뺀질이에게 애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정말로 걱정이 되고 겁도 난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녀석을 또다시 상처 입힐지도 모를 위험천만한 독약인 만큼 절대로 더 이상 뺀질이를 좋아할 수가 없다. 좋아하기는커녕 다리몽댕이를 분질러 죽이고 싶을 정도로 뺀질이가 밉다. 미워서 견딜 수가 없다……!

노르스름한 야광이 칠해진 시곗바늘이 새벽 4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밤은 이상할 정도로 길게 느껴지고 잠은 영영 오지 않았다. 녀석을 아무리 어루만지고 키스해도, 한번 곤두박질친 현실로부턴 좀처럼 벗어날 수가 없었다. 성준은 아직 너무 어렸고, 현실은 숨을 쉬기 버거울 만큼 너무나 질서정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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