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1989년 10월. 장인환(張仁歡)
아틀리에로 가는 동안 두 번이나 접촉 사고를 일으킬 뻔했다.
두 번째, 아슬아슬한 시간차로 급정차를 한 덕분에 겨우 추돌을 면하자, 그는 묵묵히 안전벨트를 매는 것으로 인환을 비난했다. 두려움과 혼란으로 거의 패닉 상태에 빠진 나머지 미안하다는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에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그저 운전에만 집중하기 위해 기를 썼다.
분명 찾아가지 말았어야 했다.
무슨 사고라도 생긴 건 아닐까? 혹시 자신과의 관계를 끊으려고 하는 것은? 그게 아니라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면 어떡하지……? 등등, 온갖 종류의 불길한 망상들로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하더라도, 얌전히 그의 연락만을 기다려야만 했던 거다.
뜬눈으로 간밤을 홀딱 새우고, 오전에 있던 지도 교수와의 면담 약속조차 까맣게 잊었을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적인 영역으로의 침범을 극도로 경계하고 싫어하는 그를 알기에, 직접 그의 집을 찾을 결심이 서기까지도 꽤 오랜 번민이 필요했었다. 별일이 아니라면 공연히 그의 미움만을 사게 될 터였으니까.
이태원에서 그토록 흉포한 패악을 떨고 간신히 그의 용서를 받아낸 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았는데 또다시 미움받을지도 모를 짓을 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잠도 못 자고 음식도 못 넘기는 지독한 사랑의 열병에 전율하면서도, 그저 연락이나 기다리자고 거듭거듭 스스로를 채찍질했던 인환이었다.
물론 애초부터 참을성과는 별 인연이 없었으니, 단 하루도 버텨내지 못할 것은 자명했다. 우리 속에 갇힌 짐승처럼 내내 방 안을 맴돌며 폐가 시꺼멓게 그슬릴 지경으로 줄담배만 연거푸 피워대다 결국 머리가 돌았던 거다. 죽을 때 죽더라도 그가 무사한지나 확인하고 죽자고, 자못 비장하게 뇌까리며 차를 몰고 왔지만, 결과는 역시 최악이었다.
아팠기 때문이라는 것은 저 지독하게 초췌해져버린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새하얗게 핏기를 잃은 낯빛이며 퀭하니 해골처럼 음영이 진 눈가, 광대뼈가 두드러져 보일 정도로 훌쭉해진 얼굴 윤곽들에 목구멍이 뒤틀리는 것만 같았다. 단 며칠 사이에 저 지경이 되려면 도대체 얼마나 심하게 앓아야만 하는 걸까?
정말로 그저 감기 때문인지 까닭도 묻고 싶고, 당장 병원에라도 끌고 가고 싶은 욕구로 미칠 지경이었지만 물론 인환에게 그럴 자격은 없었다.
절대로, 편리한 고객 이상의 관심을 드러내지는 않으리라고 그와 약속을 했었다. 이유를 알았으니 얌전히 꺼져준 다음 그의 연락을 기다리는 것이 자신이 해야 할 유일한 일이었다. 그나마 온전히 걸어 다니는 그를 본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지덕지할 일인가.
그렇게 애써 마음의 아픔을 진정시키고 발길을 돌리려던 인환이었다. 설마 그가 이렇게까지 화를 낼 줄은 차마 예상을 못 했다.
아니, 단순히 화를 내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시퍼렇게 날이 서 있는 냉랭한 시선 속엔 그가 그렇게나 싫어하는 짓인 사생활 침범에 대한 비난 이상의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그를 만난 지 거의 6개월째로 접어들고 있었지만, 인환은 이렇게까지 무시무시한 기운을 뿜어내는 그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언젠가 그 싸구려 쪽방 안에서, 인환들(기득권자)을 증오한다며 설핏 내비치던 짐승의 미소도 이 정도로까지 섬뜩한 느낌을 주지는 않았었다.
마치 인격이 뒤바뀐 것만 같았다.
과묵하고, 예의 바르며, 감정이라고는 절대로 드러내는 법이 없는 그가 아니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심해처럼 고요하게 얼어붙어 있던 자신의 영웅이 아니었다.
출렁거리고 있었다. 억눌리고 억눌린 나머지 더 이상 억눌릴 공간이라곤 한 치도 남아 있지 않을 비등점, 언제 폭발할지 모를 만큼 아슬아슬하게 견디고 있는 불안정한 진동이었다. 살짝 얼어 있는 방화벽 아래, 뜨겁게 달구어진 쇠몽둥이 같은 그의 시선이 겁에 질린 인환을 향해 가차 없이 날아들고 있었다. 끔찍했다.
물론 폭발은 두렵지 않았다. 차마 생각을 떠올리기조차 싫을 지경으로 두려운 것은 그 격렬한 파국 이후였다.
사소한 계기 하나만으로도 인환은 언제든 그로부터 내쳐질 수 있었다. 언제든 잘라내질 수 있었다!
익숙한 성북동 주택가가 바로 코앞에 보이는 십자로에 진입했을 때, 병원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잔뜩 겁에 질린 와중에도, 옆에서 간간이 기침을 심하게 해대는 그가 걱정이 됐다.
“……병…… 원…… 벼…… 병원은 가봤니? ……약은 먹었어……?”
“…….”
“……병…… 원부터 들를까……?”
“…….”
자신도 모르게 차의 속도를 떨어트리며 되풀이 물음을 던지자 그는 입술 끝을 비트는 싸늘한 냉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애인 행세하지 마.
소리 없는 비난은, 물론 신기할 지경으로 정확히 전달이 되었다. 욱신 하고 심장이 틀어잡히는 듯한 통증을 가슴에 느끼며 인환은 다시금 차의 속도를 높였고, 그에게 치료를 받게 하려던 간절한 용기는 그나마 깡그리 사라져버렸다.
어떻게 아틀리에까지 도착하고,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또 어떻게 안으로 들어온 건지 아득하기만 했다. 그저 갈팡질팡 머뭇거리는 자신을 떠밀다시피 끌고 들어온 그만을 아프게 자각했을 뿐이었다. 떨림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손목과 팔뚝 위로 그가 움켜쥐었던 악력이 아릿하게 남아 있었다.
항상 폭탄을 맞은 것처럼 어수선하기만 한 아틀리에는 마치 결벽증 환자의 집처럼 깔끔했다. 그가 찾아오는 금요일이면 부랴부랴 파출부 아줌마를 불러 먼지 한 톨 안 남기고 청소를 해두기 때문이다.
“……바…… 밥은 먹었어……?”
“…….”
“……아…… 안 먹었으면 뭐 맛있는 거 시켜 먹을까? ……나도…… 아…… 아직 점심 안 먹었거든…….”
“…….”
거의 24시간을 굶은 위장은 허기조차 못 느낄 정도로 쪼그라들어 있었다. 그나마 꺼져가는 목소리로 쥐어짜듯 물음을 던진 것은, 집 안에 들어서고 나서도 여전히 살벌한 한기를 내뿜고 있는 그의 태도를 어떻게든 누그러뜨려 보려는 기원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연한 것처럼 대꾸는 없고 사나운 비웃음만 되돌아왔다.
“감기 때문에 샤워는 않겠습니다. 냄새가 불쾌하시더라도 양해해주십시오.”
먹잇감을 코앞에 둔 포식자의 시선으로 한동안 인환을 내려다보던 그가 무성의하게 내뱉었다. 잦은 기침 탓인지 쇳소리를 방불케 할 만큼 탁한 허스키로 변한 그의 목소리도 그의 무자비한 태도만큼이나 공포스러웠다. 무기질의 시선을 가까스로 마주 응시하며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하고 싶지 않아…….
―위야, 제발 지금은 하고 싶지 않아…….
간절한 눈빛의 애원을 그대로 씹어버리더니, 마침 터진 기침의 발작 때문인지 늠름한 상반신을 앞으로 숙이며 그는 꽤 오랫동안 심한 기침을 해댔다.
강인해 보이는 어깨가 긴장을 드러내며 잔뜩 굳어 있고, 이미 백짓장 같은 얼굴은 더더욱 새하얘졌다. 이마와 콧등 위로 흥건히 맺힌 식은땀은 거실 가득 밀려들어온 한낮의 햇살을 받아 시리게 반짝이고 있었다. 몹시 고통스러운 모양이었다. 셔츠며 두꺼운 울 스웨터며 거의 초겨울을 방불케 할 정도로 겹겹이 껴입은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게 몸을 떨어대는 그였다.
가슴이 아팠다.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저만치 물러가는 대신 그의 몸 상태에 대한 걱정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를 만지려는 순간, 가까스로 기침을 잠재운 그가 인환의 팔뚝을 휘어잡더니 거칠게 침실로 이끌었다.
“……위…… 위야…….”
“…….”
“……위위…… 위야……!”
“…….”
절박한 부름은 공허한 메아리처럼 완강하게 무시당했다. 처치 곤란한 짐짝처럼 침대에 내동댕이쳐진 후 옷이 벗겨졌다.
부드러운 감촉의 실크 재킷이 아무렇게나 내던져지고, 한두 개쯤 단추를 푸는가 싶더니 투둑거리는 비명을 지르며 나머지 단추가 떨어져나간 셔츠가 재킷과 마찬가지로 걸레처럼 내던져졌다.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의 난폭하기 짝이 없는 몸짓에 인환은 그야말로 겁을 집어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농담이 아니었다. 절대로 이건(그가 자신의 행위를 지칭할 때 늘 쓰던 표현대로) 서비스가 아니었다. 그의 새빨갛게 이글거리는 눈빛이며, 숨소리 하나조차 잘 들리지 않는 위압적인 태도며, 금방이라도 주먹이 날아올 것만 같은 난폭한 몸짓들은, 그간 인환이 숱하게 보아왔던 SM 포르노 필름들에서 자주 묘사되던 강간자들의 모습과 한 치도 다름이 없었다.
자극을 배가시킬 목적으로 연출되는 가상의 시추에이션과 현실이 그렇게나 다를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인환은 비로소 뼈저리게 깨달아가고 있었다. 포르노의 SM이야 그저 코웃음을 치며 보아 넘기던 자신이었건만, 막상 실제로 당한다 생각하니 몸서리가 쳐질 지경으로 공포감이 엄습했다.
무엇보다도 끔찍하게 두려운 것은, 잔혹한 행위 너머 그의 진짜 의도였다.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도대체 자신을 어쩌자는 걸까? 그 스스로 정한 엄격한 남창의 룰을 깨버리면서까지 자신을 가혹하게 유린하고 나서, 그는 도대체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심산일까? 진심으로 끝내려는 걸까? 이번에야말로 정말 자신을 잘라내버리려는 걸까……?
거의 움직이지 않을 확실한 예감에 온몸에서 일거에 힘이 빠져나갔다.
거대한 응어리가 목울대를 찌르며 솟구쳐 올라왔다. 전신이 와들와들 떨리며 숨도 제대로 쉬기가 힘들었다. 그를 막고 싶은데, 어떻게든 그의 용서를 받고 싶은데, 마치 가위에라도 눌린 것처럼 꼼짝할 수가 없었다. 목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위…… 그…… 그…… 위…… 위위…… 나…….”
“……왜 그러세요? 너무 밝아서 기분이 안 나십니까? 가끔은 대낮에 하는 것도 자극적이지 않은가요?”
허스키하게 가라앉은 싸늘한 냉소가 귓가에 토해지며 가차 없이 바지가 벗겨졌다.
“……위!!!”
“아아, 이렇게 생겼었군요, 당신의 다리는?”
죽어도 그에게만은 보이기 싫었던 병신 다리를 그의 무신경한 시선이 위아래로 오르내리며 샅샅이 훑고 있었다.
“……왜요? 부끄러우십니까?”
“…….”
“별로 티도 안 나는데요, 뭘. 여자처럼 가늘고 부드러워서 오히려 보기 좋습니다. 털도 별로 없고…… 귀여워요.”
입에 발린 멘트를 날리고 있을 뿐이라는 속내는 물론, 노골적인 혐오의 눈빛을 숨기려고도 않은 채 그는 입술을 비틀며 웃음을 흘렸다.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것만 같은 지독한 수치심과 절망감이 채찍처럼 넋을 후려치고 있었다. 참고 참았던 눈물이 마침내 눈꼬리를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다.
병신 다리가 콤플렉스라는 것도, 또 그걸 숨기기 위해 두 달 가까이 섹스를 하면서도 죽어라 바지를 벗으려 하지 않은 것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암시함으로써 그는 더더욱 잔혹하게 인환의 가슴을 할퀴고 있었다.
마비가 있는 다리 안쪽을 천천히 쓸어 올리는 그의 손길이 너무나 아팠다. 수십 개의 뾰족한 침들이 촘촘히 박힌 침봉으로 피부를 죽죽 긁어대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까지 비열하고 잔인해질 수가 있는 그가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분명 화를 내야 마땅할 비겁하고 야비한 행동이었지만, 인환은 마치 호랑이 앞의 토끼 새끼처럼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그의 분노가 한계치에 이르러 마침내 그가 자신과의 결별을 선언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끔찍한 공포요, 절망이요, 고통이었다. 그와의 이별만 아니라면, 다시금 그의 입에서 관계를 끝내자는 소리만 안 들을 수 있다면, 인환은 그 어떤 것도 참을 수 있었다. 아니, 기꺼이 달게 받을 수 있었다.
까짓 병신을 병신이라고 하는 데 뭐가 어떻단 말인가.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계속 그와 사랑을 나눌 텐데 언제까지고 감출 수만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랬다. 별게 아니었다. 불현듯 설움이 복받치는 것쯤이야, 욱신욱신 울려대는 심장의 아픔쯤이야 금방 잊힌다. 까짓 이런 종류의 상처야 어릴 때부터도 심심찮게 극복해온 자신이 아닌가.
우격다짐을 하듯 기를 쓰고 스스로를 달래며 흐느낌을 억눌렀다. 짐승의 표정을 하고 있는 그를 쳐다볼 엄두가 나지 않아 베개 속에 머리를 처박은 채 그의 무자비한 능욕을 견뎠다.
마비된 다리를 청진기처럼 쓸던 그의 손길이 마침내 팬티 속으로 파고들었다.
“……하…… 하지……! 위…… 나…… 하…… 하고 싶지 않…… 흑!!!”
가까스로 내뱉은 거부의 사인은, 기둥을 움켜쥐며 그가 리드미컬하게 마찰을 시작하자 저도 모르게 내지른 교성에 의해 아득히 묻혔다.
“……항상 궁금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거듭 사정을 할 수 있는 걸까 하고요. 세 시간이나 되는 제 서비스에도 마냥 부족하다는 눈빛이셨죠.”
“……읏……! 하지…….”
“이것 봐…… 벌써 이렇게 축축하게 젖었어요. 처녀처럼 내숭 떨지 마요. 얼마나 밝히는 색골인지 다 알고 있으니까.”
“……위…… 제…… 발…….”
“……남자가 그렇게 좋아요? 그래요, 선생님?”
거칠기 짝이 없는 손길에도 불구하고, 잔뜩 겁에 질린 넋에도 불구하고 몸은 민감하게 반응을 일으키고 있었다. 저항의 몸짓과 달리 점점 빳빳하게 일어서는 자지를 희롱하며 그는 잔인하다 싶을 정도로 인환의 욕망을 비웃고 있었다.
전속으로 벽을 향해 머리를 들이박고 싶었다. 이미 수치심 따위엔 초연해져 있을 법하건만, 그가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에 여전히 지독하게 상처를 입는 자신이 있었다.
“……하지…… 마…… 제발…… 위야……! 위…… 위야…… 제발……! 이…… 러지…… 마……!”
“……음란해……. 당신은 정말 음란해요…….”
“……윽……! 흑…… 하지…… 안……!”
“고개 돌리지 마요. 제 얼굴을 보면서 해야 기분이 더 좋으시잖아요? 저만 보면 발기하시죠?”
“흑…… 안…… 하지 마…… 제…… 그…… 흐윽……!”
“……저 말고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여길 만진 거죠……? 처음은 누구였죠? 누가 여길 이토록 음란하게 길들였나요?”
“……흑…… 웃……!”
“……봐요, 정말 음탕해……. 흥분할 때 선생님 얼굴이 어떤지 알아요? 아주 천박하고 야해서 저 같은 일반 남자도 몹시 흥분하게끔 만들죠.”
“……위…… 윽……! 흑…… 아아……! 그…….”
“……진심입니다. 조만간 포르노 테이프를 안 봐도 될지 몰라요.”
“……욱! 큭……! 으으읍……! 흐으…… 우앗!!!”
비참한 모멸감에 온 넋이 전율하면서도 욕망은 한계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오로지 인환을 모욕하려는 의도 외에는 없을 그는 그저 한 손으로 인환의 기둥을 마찰할 뿐, 평상시처럼 정중하고 다정한 애무라곤 일절 하지 않고 있었다.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자세 그대로, 빤히 인환의 흥분을 굽어보는 냉랭한 눈길은 경멸의 빛으로 가득했다. 능욕을 당하면서도 색에 주린 더러운 창부처럼 몸을 꿈틀거리는 인환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그에게 닿기만 하면 5분도 채 넘기지 못하고 사정을 해버리곤 하는 자신의 짐승 같은 욕망이 그저 저주스럽기만 했다.
“……참아보세요…… 그래…… 그렇게, 옳지…….”
막 터져 나오려던 출구를 엄지손가락으로 틀어막은 그의 쇳소리가 비정하게 뇌까리고 있었다. 정수리 위로 열기가 솟구치는 것만 같은 착각과 함께 인환은 지렁이처럼 꿈틀대며 그의 손을 밀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노…… 제…… 발……! 나…… 나와…… 나!! ……! 흑……! 아아…….”
“……참아보시라니까요…….”
“그…… 못 참…… 큭……!”
“……참아요. 참았다 배출하면 더 기분 좋으니까…… 조금만 더……. 그래, 그렇지…… 선생님은 지나치게 빠르거든요…….”
“……위…… 위…… 위…… 위잇!! ……! 흐윽!!!”
의도적인 고문이었다.
몸서리를 치며 그의 손아귀를 떼어내기 위해 기를 써보지만 바윗돌 같은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힘으로는 절대로 당해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눈앞이 샛노랗게 변하며 전신으로 경련이 치달았다.
머리로 온몸의 피가 잔뜩 몰리는 것처럼 찌르는 듯한 두통이 느껴졌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은 치명상을 입은 짐승처럼 흉하게 일그러졌다. 전신의 뚫린 구멍이란 구멍들이 어떡하든 출구를 찾아 배출하려는 욕구로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으…… 흐악……! 악……! 위……! 제…… 제발……! 으극……! 우아아아…… 아아아……!”
더 이상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없었다.
어린애처럼 엉엉 흐느껴 울며 애걸했다. 기를 쓰고 상반신을 일으켜 세운 다음 그의 가슴팍에 매달렸다. 그가 경멸하는 대로의 비굴하고 음란한 호모가 돼서 빌고 또 빌었다. 시큼한 땀 냄새가 진동하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문지르고, 목덜미에 키스를 하고, 입술을 벌린 채 혀를 날름거리며 천박한 교태를 부렸다.
오로지 관심은 싸버리는 것 외엔 없다는 듯, 떨며, 꿈틀거리며, 그를 향해 미친 듯이 용두질을 쳐댔다.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리는 눈물 너머, 차갑게 움직임이 없는 폭군의 시선이 보였다.
붉게 충혈이 돼 있는 그곳엔 인환의 마지막 남은 존엄성마저 무참하게 짓밟아버린 데 대한 짐승스러운 만족감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마침내, 그의 움켜쥔 손아귀에서 천천히 힘이 빠져나갔다.
“……흐…… 으…… 우…… 윽!! ……! 아악!!!”
아랫도리가 바스러지는 것만 같은 아찔한 쾌감과 함께 시야가 하얗게 변하며 오르가슴이 왔다. 그가 슬쩍 몸을 빼는 바람에 지지할 대상을 잃어버린 인환의 상반신은 몇 번 의미 없이 흔들리다가 침대 바닥으로 힘없이 고꾸라졌다.
여운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길었다.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전율에 맞춰 부끄러운 체액이 느릿느릿 뿜어지고 있었다. 찌릿찌릿 전류가 흐르는 몸은 부서진 자존심 따위 아랑곳 않고 제가 취할 쾌락이란 쾌락은 남김없이 빨아들이고 있었다.
엿 같았다.
병신 호모 새끼에 딱 맞을, 지랄 발광의 게걸스러운 욕망이었다.
좆대가리에 달라붙은 똥이었다.
구더기였다!
“……비디오 틀겠습니다.”
여전히 발톱을 세운 야수의 탁한 목소리가 불쑥 귓전을 파고들었다. 축 늘어진 몸을 가까스로 가누며 시선을 가져가니, 그가 비디오 덱에 테이프를 넣고 있었다.
언제 옷을 벗었는지 금빛으로 빛나는 그의 늠름한 나신이 시야 가득 밟혀들었다. 보고 또 봐도 질리기는커녕 여전히 설레고 그리운 몸이건만, 지금은 그저 공포 그 자체일 뿐이었다. 조각처럼 균형이 잡혀 있는 아름다운 근육들이 그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미묘하게 꿈틀거리며 또 다른 능욕을 예고하고 있었다.
여자의 성기가 화면 가득 클로즈업되더니 피부와 피부가 맞비벼지는 음란한 소음들이 침실을 가득 채웠다.
그가 원하는 장면을 찾아낼 때까지, 화면은 잠시 끊어졌다가 되풀이되고, 다시금 끊어졌다 되풀이되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화면의 움직임에 따라 음탕하고 천박한 소음들도 자지러지는 명멸을 되풀이했다. 침실 가득 뽀얗게 내려앉은 한낮의 햇빛은 나른했고, 연인이 발기를 위해 테이프를 검색하는 코미디 같은 현실은 비참했다.
무릎을 꿇고 앉은 자세로 부지런히 리모컨을 조작하면서도 그는 쉴 새 없이 기침을 해대고 있었다. 그가 기침을 할 때마다 움찔거리는 어깨 근육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마침내 원하는 것을 찾아낸 듯 화면이 안정을 찾으며 물처럼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금발의 날씬하고 예쁘장한 백인 소녀 하나가 잘생긴 백인 청년의 거대한 성기를 품은 채 애처로운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금욕적이면서도 보수적인 그의 취미에 걸맞게, 그가 선호하는 비디오테이프들은 늘 예쁘장한 소녀와 백인 남자 단둘이 등장하는 평범하고 소박한 것들이었다. 포르노라고 하기에도 무리가 있을 만큼 시추에이션도, 캐릭터도 단순하기 그지없었지만, 그를 흥분시키는 데는 그 어떤 과격한 테이프들 이상으로 효과가 있었다.
뽀얀 크림색 필터가 끼워진 듯한 화면 속 소녀를 멍하니 굽어보며 인환은 새삼 목이 메었다. 대가리가 썩은 변태인 자신과는 또 얼마나 다른 고상함이란 말인가.
적당한 볼륨으로 스피커를 조절하기까지 마친 그가 비디오 덱 앞을 떠나 침대로 다가왔다. 침대 머리장 위에 놓인 콘돔을 주워 발기의 기미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는 몸에 씌우더니 TV 모니터를 굽어보며 자위를 하기 시작했다.
인환이 몸을 늘어뜨리고 있는 바로 옆 침대 가에 똑바로 서 있는데다가 시선을 정면의 모니터로 두고 있어, 그의 움직임은 싫을 정도로 세세하게 눈에 밟혀들었다.
발기를 위해 비디오의 힘을 빌리는 그를 보는 것은 언제나 상처였지만, 지금 그가 자신에게 보여주고 있는 무신경하고 노골적인 행동은 그 이상의 끔찍한 고문이었다.
저급한 포르노 테이프의 주인공들보다도 못한 인환의 처지를 그는 여봐라 하는 태도로 증명해주고 있었다. 오로지 돈을 위해 어렵사리 흥분을 이끌어내고, 마지못해 자신을 안을 뿐이라며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짐승처럼 번들거리는 눈길은 화면을 뚫을 것처럼 달라붙어 소녀의 보지를 핥고, 격렬하게 자지를 주물러대는 손아귀에는 터질 것처럼 핏줄이 도드라졌다. 꿈틀거리는 탄탄한 엉덩이 근육은 탱크처럼 돌진하며 모질고도 야비한 의지를 세웠다.
그가 피스톤질을 하는 리듬에 따라 쾅쾅 하는 소리를 내며 굵은 나무 대못이 심장으로 들어와 박히는 것만 같았다. 아팠다. 너무나 아파서 제대로 숨도 쉴 수가 없었다.
“……그…… 만…… 해…….”
“…….”
“……네…… 네 뜻은…… 아…… 알아들었으니까 그만…….”
“…….”
“……제발…… 이제 그만해, 위야…….”
“…….”
눈물은 비 오듯 흐르고, 격한 응어리가 자꾸만 목을 눌러 말은 단속적으로 끊어졌다. 말을 계속하는 것보다 차라리 그의 폭력을 견디는 편이 낫다고 여겨질 정도로 힘이 들었다. 그러나 정말로 더 이상은 못 견딜 것 같았다. 폭주하는 야수를 막을 수야 없겠지만 적어도 공격의 강도를 낮추기만 한대도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더…… 더 이상 네가 무슨 짓을 한대도 나 화 안내…….”
“…….”
“……진짜야…… 화내지 않아…… 절대로…….”
“…….”
“……절대…… 내 쪽에서 먼저 네 손을 놓지는 않을 거니까…….”
“…….”
“……나 화나게 하려는 거면 이제 그만해도 알아들었으니까…….”
잔뜩 충혈된 붉은 눈이 TV 화면을 떠나 인환의 얼굴로 떨어졌다. 차갑게 일렁이는 격분이 단정하고 핸섬한 얼굴을 흉하게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거대하게 일어서서 흔들리는 자지를 여전히 꽉 움켜쥔 그대로 그가 천천히 침대 위로 올라왔다. 인환의 시선을 사로잡은 채 움직일 줄 모르는 그의 새빨간 눈에 서린 의도는 명백했다.
웅크리고 있던 인환의 알몸을 우악스러운 손길로 바로 하더니 곧바로 몸을 겹쳐왔다. 며칠 동안 시큼하게 전 땀 냄새로 코를 찌르는 그의 체취가 파도처럼 엄습했다. 벌거벗은 피부 위에 직접 닿아오는 그의 몸은 마치 불덩어리처럼 뜨거웠다. 굉장한 열이었다.
“……하지 마……! 제발 하지 마, 위야! 이러지 마……!”
가슴 위로 육중하게 내려앉는 그의 상반신을 밀어내며 애원했다.
“그만하고 병원 가…… 알아들었으니까, 제발……. 위야……! 위야……! 흑…… 윽……!”
간절한 기도를 담아 두 손으로 그의 뺨을 어루만지며 필사적으로 울부짖었다. 금방이라도 깨져버릴 것만 같은 유리그릇을 어루만지듯 부드럽고 상냥한 애정을 담아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말과 몸짓으로써 채 전달이 되지 않는 기도는 눈으로 대신했다. 잡아먹을 듯이 자신의 눈을 노려볼 뿐인 시퍼런 서슬에 기가 질린 나머지, 자꾸만 외면하고픈 욕구를 간신히 억누르며 기를 쓰고 시선을 맞췄다. 빌고, 애원하고, 부탁하고, 그의 잔혹한 위악 너머 저 깊은 곳에 잠자고 있을 부드러움을 일깨우기 위해 몸부림쳤다.
물론 그 어떤 시도도 더 이상은 소용이 없었다. 파국을 향해 달리기로 이미 작정을 해버린 그였다. 그와 깊은 관계를 맺은 지 두 달 남짓, 한번 고집을 세우면 절대로 방향을 틀지 않는 그의 지독함을 인환은 어렴풋이나마 깨닫고 있었다. 그의 앞에서 당장이라도 목숨을 끊지 않는 한 그를 제지시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할 터였다.
“……늦었어…….”
한동안 인환이 하는 대로 몸을 내맡긴 채 싸늘한 시선을 던지고 있던 그가 조용히 뇌까렸다.
판결을 내리듯 씩씩대는 쇳소리가 소름이 끼쳤다. 뺨을 어루만지고 있던 인환의 두 팔을 사나운 기세로 밀쳐내더니 목덜미 쪽으로 손을 뻗어왔다. 조용히 인환을 내려다보는 야수의 눈에 비친 그것은 분명한 살의였다.
간신히 호흡이 가능할 만큼의 숨길만을 열어두고 지그시 힘을 가해오는 폭군의 악력이 느껴졌다. 약간의 힘 조절만으로도 인환의 숨길은 단숨에 틀어막힐 수 있었다. 정말로 죽일지도 모를 일이라고 인환은 멍하니 생각했다. 터무니없긴 했지만, 말없는 응시 속에서 인환과 그는 서로의 생각을 읽고 있었다.
―아주 쉬운 일이야…….
그가 속삭였다.
―잠깐 눈만 감으면 단숨에 끝낼 수 있어.
속삭이는 것 같았다.
―쉬운 일이란 걸 알겠지?
홀린 듯이 긍정의 사인을 떠올리자 피식 하고 그의 입술 끝이 올라가며 메마른 미소가 퍼졌다.
“……범할 겁니다, 선생님.”
한쪽 다리가 들리며 그의 어깨 위에 걸쳐졌다. 겁에 질린 나머지 잔뜩 굳어 있는 입구로 그의 단단한 몸이 도둑처럼 다가들었다.
“……서비스가 아니라는 것은…… 물론 이미 알고 계시죠?”
“…….”
“……이번엔 선생님께서 제게 서비스를 해주셔야 하겠습니다.”
느릿느릿 내뱉어지는 쇳소리는 의기양양한 기대감으로 충만해 있었다.
“……대금은 적정선에서 몸으로 갚겠습니다.”
스치듯 회음 주변을 더듬으며 틈을 노리던 귀두가 불쑥 찌르고 들어왔다.
“우앗!!!”
윤활제도 바르지 않은 난폭한 침입에 몸이 기겁을 하며 움츠러들었다. 귀두 부분만 조금 파묻었을 뿐인데도 온몸이 반으로 갈라지는 것만 같은 격통이 느껴졌다.
그의 자지를 뒤에 품기 시작한 건 고작해야 2주 전의 일이었다. 인조 자지로 한 달 동안 열심히 길을 들인 탓에 그럭저럭 피를 흘리지 않고도 섹스가 가능해지긴 했지만 그의 거대한 크기에 익숙해지기엔 아직 무리가 있었다. 윤활제를 듬뿍 바르고도 가까스로 결합할 수 있었던 좁은 구멍이 난폭하기 짝이 없는 침입을 쉽게 허락할 리가 없었다. 파고들려 하면 할수록 입구는 물먹은 가죽처럼 잔뜩 움츠러들었다.
몇 번 허리를 움직여도 쉽게 전진하지 못하자 그가 엉덩이 사이를 찢어발기기라도 할 듯이 양쪽 허벅지를 벌렸다.
“아악!!!”
대퇴 근육이 끊어지는 것만 같은 통증에 자신도 모르게 자지러지는 비명이 터졌다. 몸서리를 치며 막무가내로 팔을 휘저었다. 그를 밀어낸다거나 그를 막아낼 자신도 무엇도 없었지만, 그저 어떻게든 그에게서 떨어지고 싶다는 무의식적인 의사 표시였을 것이다.
짜악!
갑자기 얼굴에서 불꽃이 일었다. 정면을 향해 있던 얼굴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홱 돌아갔다.
짜악! 짝!!! 짜악!!!
무슨 일을 당한 건지 제대로 인식하기도 전에 또다시 그의 손바닥이 얼굴을 갈랐다. 손바닥으로는 왼쪽 뺨을, 손등으로는 오른쪽 뺨을 수없이 난타했다. 아픔보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머리에 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뺨을 때리지 않는 그의 나머지 한 손에 의해 옴짝달싹할 수 없을 지경으로 가슴이 짓눌리고 있어 저항은 엄두도 못 냈다. 아니, 저항을 하고자 하는 의지조차 품을 여유가 없었다. 영원 같은 시간이 흐른 후 팽이처럼 흔들리던 머리가 비로소 제자리를 찾았다.
훅훅거리는 그의 새된 호흡이 바로 위에서 뿜어 내리고 있었다. 눈을 뜨긴 했지만 한동안은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마치 눈앞에 먹통처럼 새까만 장막이 쳐진 것만 같았다. 눈에 상처를 입었다기보단 아마도 정신적인 충격이 일시적으로 시력을 잃게 했을 터였다.
물리적인 폭력은 효과가 있었나 보았다. 온몸이 마치 가위에 눌린 것만 같았다. 손가락도, 발가락도, 하다못해 눈꺼풀 하나조차 깜빡일 수가 없었다. 무서웠다. 무서워서 숨도 쉴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면 또다시 그의 손찌검이 시작될 것만 같았다.
머리채가 휘어잡히더니 거칠게 뒤집어엎어졌다.
침대 시트에 짓눌리듯 머리가 파묻혔다.
코와 입이 짓눌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틀어 잡힌 머리채가 활처럼 뒤로 꺾이며 막혔던 호흡이 돌아왔다.
허벅지가 강제로 벌어졌다.
엉덩이 사이로 파고 들어온 그의 두 손가락이 찢어발길 것처럼 양옆으로 똥구멍을 잡아당겼다.
입구에서 꿈틀거리던 귀두가 똑바로 힘을 세우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고는…….
“아아아아아악!!!!!!”
생전 들어본 적도 없는 누군가의 이상야릇한 괴성이 귀청을 찢었다. 꽤 오랫동안 계속된 괴성은, 그러나 알고 보니 자신이 내지르는 비명 소리였다.
소리는 저항이었다.
소리만이, 시체처럼 굳어버린 몸뚱이가 토해낼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의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해일처럼 밀려드는 격랑에 휩쓸려가며 어느 순간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몸을 반으로 가르는 끔찍한 통증만이 있었다.
통증만이 남았다!
……영원처럼 긴 시간이 흘러갔다. 아니, 찰나처럼 짧은 순간이었을지도 몰랐다. 크게 꿈틀거리는 야수의 부르짖음이 귓전에 토해지며 비로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형태가 분별되기 시작했다.
감각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짓눌린 어깨로 가해지는 힘을 통해 절정을 맞는 그의 포효가 느껴졌다. 크게 한 번, 짧게 두 번, 그리고 자잘하게 열댓 번, 강력한 전류가 그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분출의 순간, 짓눌린 가슴이 짜부라지다 못해 터져버리는 것만 같았다. 아니, 터졌다. 터져버렸을 것이다, 이미.
바윗돌처럼 거대하고 흉포한 야수가 마침내 나가떨어졌다.
퉁 하고 스프링이 출렁대며 전신을 짓밟던 통증도 사라졌다.
밝았다. 너무나 밝은 빛이 눈을 찌를 듯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사방에 꽉 들어찬 빛은 너덜너덜 찢긴 인환의 의식을 점점 더 하얗게 비워갔다.
“……이런 기분이군요…….”
“…….”
“……약자를 짓밟는 기분이란 이렇게 더럽고 근사한 거였어…….”
“…….”
아득해져만 가는 의식의 틈을 비집고, 그의 서늘하고 나지막한 음성이 비수처럼 다가들고 있었다.
“……굉장해…… 아랫도리가 녹아내리는 것만 같아!”
“…….”
“……하지만 아무리 쾌락이 좋아도 아내는 순결한 사람을 택할 겁니다.”
“…….”
“……선생님이나 저처럼 더럽혀진 종류가 아니라…….”
“…….”
“……내 아이를 낳아줄 아내야말로…… 그래요…… 몸도 마음도 눈처럼 희고 오만한 사람을 찾을 거야…….”
“…….”
눈물 같은 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있는 전신을 난장판인 침대 위에 대자로 방기한 채, 그는 증기기관차처럼 사납게 호흡을 토해내고 있었다. 격렬한 오르가슴의 여운을 반영하듯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채 시체처럼 창백했지만, 그의 거듭되는 잔혹한 폭행을 그만두게 할 만큼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천장의 어느 한 지점을 노려보고 있는 눈자위는 여전히 붉었다. 한껏 비틀린 입술 끝엔 포식한 야수의 미소가 은근하게 떠돌고 있었다.
실로 멋들어진 결정타가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이 그를 얼마나 사랑하고 그리워하는가를 뻔히 알고서 내뱉은 언어의 칼부림이었다.
사랑을 모르는 무심한 어린아이는 눈 하나 깜짝 않고서 제 손에 떨어진 잠자리의 날개를 하나하나 쥐어뜯고 있었다.
사방으로 사지가 찢겨나가는 것만 같은 끔찍한 고통과 더불어, 인환은 끝없이 계속되던 담금질이 비로소 끝이 났다는 것을 어렴풋이 자각했다.
그를 언제까지고 가질 수는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그를 가지는 지금 이 순간조차도 그저 몸뿐이고, 몸보다도 더 간절하게 갖고 싶은 그의 마음은 까마득히 멀리 있었다. 자신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슬픔과 절망은 잡아 뜯긴 사지로부터 피처럼 뚝뚝 떨어졌다.
눈물은 더 이상 흐르지 않았다. 더 이상 온전한 의식을 붙들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죽음 같은 잠이 아득하게 밀려들고 있었다.
꿈속에까지 따라올 채비를 갖춘 슬픔은 까마득한 절망과 함께 저 앞 어딘가에서 숨죽인 채 흐느끼고 있었다.
검고 어두운 설움이 목구멍을 압도하는 감각을 마지막으로, 인환은 낭떠러지 같은 잠 속에 깊이 떠밀려갔다…….
“……흐…… 아…… 안…….”
“…….”
“……그…… 안 돼……! 으…… 엄…….”
“…….”
“……엄마…… 흑……! 으…… 으윽……! 안…… 안 돼……!”
흐느낌 소리 같기도 하고 신음 소리 같기도 한 끙끙거림이 가위처럼 귓전을 자극하고 있었다.
무시하고 눈을 뜨지 않으면 언젠가는 사라질 악몽이란 걸 알기에, 인환은 거듭 되풀이되는 절박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줄기차게 잠에 매달리고 있었다.
“……안……! 죽여……! 안 돼……! 엄마……!”
―그만…….
“……죽…… 여…… 으…… 으으…… 나쁜……! 죽……!”
―아, 괴로워, 제발 그만해! 듣기 싫단 말이다……!
“……우…… 윽…… 흑…… 우…… 윽…… 안 돼…… 엄…… 형…… 형…….”
악에 받친 저주는 어느새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으로 돌변한 모양이었다. 가슴을 난도질하는 것처럼 서러운 울음이 어린아이의 떨리는 목구멍을 타고 흘러나오고 있었다.
곧 그치려니 했지만 눈물은 비가 되고, 냇물이 되고, 강물이 되어서는, 이윽고 아득히 먼 바다를 향해 노도처럼 떠내려가고 있었다.
가슴을 쥐어짜 내는 것만 같아서 도무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졌을 때, 인환은 문득 자신이 아이를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찔한 자각과 함께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며 심하게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깨어나야만 했다. 빨리 깨어나지 않으면 아이가 위험했다!
“……위…… 위……?”
쇠사슬에 꽁꽁 묶이기라도 한 것마냥 꼼짝 않던 몸이 비로소 움직이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맨 처음 느껴진 것은 으슬으슬 떨리는 몸이었다. 본능적으로 시트를 끌어다 머리끝까지 덮으며 인환은 크게 진저리를 쳤다.
“……아…… 하아…… 혀…… 엉…… 형…….”
신음 같은 흐느낌은 바로 옆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현실과 꿈을 오락가락 넘나들던 의식이 비로소 찬물을 뒤집어쓴 것마냥 소스라쳤다. 눈이 번쩍 뜨였다.
사방이 어둑어둑했다. 해가 떨어진 지 꽤 된 모양으로, 희미한 빛의 잔상이 익숙한 침실 풍경에 깊은 여운을 드리우고 있었다.
으슬으슬 떨리는 상반신에 시트를 둘둘 만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움직일 때마다 온몸의 뼈마다가 뒤틀린 것처럼 삐걱거리고, 똥구멍에선 하반신을 제대로 움직이기 힘들 만큼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자신의 고통 따윈 문제가 아니었다. 심하게 두근거리고 있는 심장은 무언가 불길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예고해주고 있었다.
그가 보였다.
벌거벗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등을 돌리고 있어 표정을 살필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빛이 너무 부족했다.
정사가 끝나고도 그가 돌아가지 않았다는 데 대한 놀라움은 처음 한순간뿐이었고, 인환은 또다시 귀를 파고든 심상찮은 신음 소리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안…… 아냐…… 엄마……! 흐윽…… 우…… 우…… 아…… 안 돼……! 안!!”
가라앉다 못해 거의 알아듣기조차 힘든 쇳소리가 그가 느끼고 있을 단말마의 고통을 어렴풋이나마 호소하고 있었다.
“……위……?”
희미한 윤곽으로밖에 알아보기 힘든 몸은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위야……? 위위……!”
대답을 할 리가 없었다. 떨리는 손을 가까스로 가누며 그를 만져보니 사람의 몸이 아닌 불덩어리였다.
심장 박동이 제어가 불가능할 지경으로 격렬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잠에서 깬 지 얼마 안 되는 터라 가뜩이나 단내를 풍기는 입안은 더더욱 바짝 말라들어갔다.
침대 머리맡의 스탠드를 켰다.
안구를 찌르는 듯한 빛을 견디기 위해 몇 번 눈을 깜빡이고 나서 다시 한 번 그를 살폈다.
가까이 고개를 숙이자 무언가 시큼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악취의 흔적을 쫓아가보니, 그가 머리를 파묻고 있는 베개 위에 샛노란 토사물의 흔적이 보였다.
내용물은 이미 다 소화가 된 건지 오줌 자국처럼 노란 얼룩만이 둥그렇게 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땀범벅인 머리카락은 몇 가닥씩 덩어리를 이루며 뭉쳐 있고, 거기서 풍기는 악취 또한 토사물과 다르지 않았다. 밀랍처럼 파리한 피부는 지금처럼 경련을 하듯 심하게 떨지만 않는다면 이미 시체라고 해도 믿어질 정도였다. 웅크린 채 얼마를 떨었던 건지, 어깨 근육이며 허벅지며 만지는 부위마다 돌덩이처럼 딱딱했다.
불길한 예감은 잔인할 정도로 적중하고 있었다.
아찔한 현기증과 함께 쇼크를 받은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혼수상태에 빠진 것 같은 그와 거의 다르지 않을 터였다.
“……위…… 위야…… 저…… 정신 차려봐…… 응……? 이…… 일어나봐…….”
실낱같은 기대를 담아 그의 어깨를 쥐고 흔들어보았다. 힘이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은 목소리는 전혀 자신의 것 같지가 않았다.
좀 더 소리를 높여 몇 번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저 무의미한 신음 소리만이 하얗게 갈라져 터진 입술 틈으로 새어나왔을 뿐이었다. 더 이상 꾸물거릴 계제가 아니었다!
옷을 먼저 주워 입어야 할지, 아니면 구급차부터 불러야 할지 도무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침대에 내려서서 미친놈처럼 방 안을 이리저리 맴돌다가 마침 눈에 들어온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수화기 너머, 구급 요원으로 추측되는 젊은 남자는 다소 횡설수설하는 인환을 진정시키며 환자의 상태를 물었다. 따발총처럼 쉬지도 않고 그의 위독을 전해보았지만 남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초조감에 입안이 바작바작 타들어갔다.
패닉에 빠진 인환의 심정을 익히 알고 있다는 듯, 남자의 태도는 단호하고 거침이 없었다. 5분 안에 차가 도착하니 염려 말고 기다리라고 엄격하게 타일렀다. 헛소리를 할 정도면 그다지 심각한 상황은 아니라고 했다. 히스테리를 일으킨 것처럼 몇 번이고 되물어 다짐을 구하는 인환의 태도에 짜증이 날 법한데도 남자는 친절한 태도를 고수하며 거듭거듭 인환을 안심시켰다.
침착하면서도 이성적인 남자의 대응은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간신히 전화를 끊을 용기를 끌어낸 후 인환은 비로소 상처 입은 똥구멍에 연고를 바르고 옷을 주워 입을 수 있었다. 너무나 떨고 있어서 그저 속옷과 바지, 그리고 스웨터 하나를 걸치는 데 몇 분이 소요되었다(하반신의 통증 탓에 제대로 몸을 가누기도 힘들었을 뿐 아니라, 뒤집어 입거나 거꾸로 입어 몇 번을 다시 고쳐 입어야 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걸친 버버리 코트 안주머니에 막 지갑을 챙겨 넣고 있을 때 구급차가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두 명의 구급 요원은 열과 혈압 등 간단히 그의 상태를 체크한 후, 거대한 짐짝이나 다름없는 알몸의 그를 곧바로 구급차에 실었다.
구급차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도 차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볼 엄두도 못 낸 채, 인환은 끊임없이 그의 상태만을 캐물으며 구급 요원들을 괴롭혔다.
질문이 한결같듯 대답도 앵무새처럼 똑같았다. 40도까지 치솟은 열이 문제이긴 해도 그리 위험한 상황은 아니라고 했다. 감기가 폐렴으로 번진 것 같지만 건강해 보이는 젊은이이니 곧 회복될 거라고도 했다.
국민학생처럼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다가는 단 1분도 못 참고 다시 “괜찮을까요?” 하며 히스테릭하게 물음을 던지기를 되풀이했다. 구급 요원들의 말을 생명줄처럼 붙들고 늘어지는 긍정의 마음과, 그래도 혹시 하는 불길한 예감 사이에서 신경이 갈가리 찢겨나가는 것만 같았다.
차는 십여 분만에 제법 큰 어느 종합 병원 앞에 도착했다. 곧바로 응급실로 옮겨진 그는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포위되어 두 시간여에 걸친 각종 검사와 응급 처치를 받았다.
알몸에 푸르스름한 환자복이 입혀지고, 노랗고 하얀 IV액 바늘 두 개가 손등과 팔목에 나란히 꽂혔다. 수시로 주사액이 주입되었다. 피를 뽑고 엑스레이 사진도 찍었다.
병상 옆에 우두커니 서서 넋을 놓고 있는 인환을 향해 담당 의사인 듯한 30대 남자가 입원이 필요하니 당장 수속을 밟으라고 했다. 남자는 막 찍혀 나온 엑스레이 필름을 병상 옆에 설치된 라이트박스에 비춰 보고 있었다.
사진 속의 오른쪽 폐 전부와 왼쪽 폐의 3분의 2 정도가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구급 요원의 말대로 폐렴이었다.
“……어떤가요? ……심각한 상태인가요?”
“……좀 더 빨리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책망하는 어조로 의사가 짧게 대꾸했다.
“아니, 그런 뜻은 아닙니다. 다만 하루라도 일찍 오셨더라면 이렇게까지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됐을 것 같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금세 사색이 되는 인환을 보더니 의사는 정정하듯 재빨리 덧붙였다.
“증상이 있은 지 며칠 됐을 텐데 치료도 않고 방치했어요. 건강을 너무 과신한 것 같습니다. 보아하니 자신을 불사조로 여길 만도 합니다만.”
“…….”
“건강체이길 망정이지 조금만 늦었더라도 큰일 날 뻔했습니다. 이 정도 열이면 호흡 곤란을 일으킬 수도 있어요.”
“…….”
“일단 열을 떨어트리는 게 급선무니 하루나 이틀 정도는 긴장을 늦추지 말고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
“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다행히 체력도 튼튼하고 약도 잘 듣는 것 같으니까 어렵지 않게 회복할 수 있을 겁니다.”
권위적인 태도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의사는 믿음직한 구석이 있었다. 의사의 차분한 설명이 진행되는 동안 마치 얼음이 녹듯 전신을 지배하고 있던 긴장이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
비로소 그의 얼굴을 들여다볼 용기가 모여서 고개를 돌리고 천천히 시선을 가져갔다.
여전히 사기(死氣)가 떠돌았지만 그나마 희미하게 혈색을 되찾은 뺨이며, 평온해 보이는 표정이며 조금씩 치료의 효과가 드러나고 있었다. 하느님…….
다리에 힘이 풀리며 제대로 서 있기가 힘이 들 지경으로 현기증이 느껴졌다. 의사와 간호사들의 의아해하는 눈길에도 아랑곳 않고, 병상 옆 의자에 쓰러지듯 몸을 묻었다. 지독한 허기며 찌를 듯 통증을 호소하고 있는 똥구멍이 비로소 자각되는 걸 보면 적잖이 안심이 된 모양이었다.
“……보호자분도 안색이 창백하신데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십니까?”
의사가 다른 병상으로 옮겨 가고 그의 체온을 재고 있던 간호사 하나가 물음을 던졌다. 간호사의 어조는 친절했지만 대답을 할 기력은 없었다. 그저 고개를 살짝 흔드는 것으로 괜찮다는 뜻을 알렸다.
그의 손을 꼭 쥔 채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이 그럭저럭 움직일 기운이 모였다.
간호사에게 거듭거듭 그를 부탁한 후 수납계로 가서 입원 수속을 했다. 두세 가지 검사를 더 마친 그는 바로 입원실로 옮겨졌다.
수간호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젊은 여자가 한 무더기의 약과 소변기와 입원 수칙들이 적힌 종이를 인환에게 넘겨주며 몇 가지 주의 사항을 말해주었다. 회진 시간이라거나 실시간 검사를 위한 혈액과 배설물 채취에 관한 것들이었다. 병실을 나가기 전에 여자는 조금씩이나마 그의 열이 떨어지고 있다는 얘기로 인환을 기쁘게 했다.
여자가 나가고 비로소 그와 단둘만이 남겨지자, 인환은 코트를 옷걸이에 거는 것 외엔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내내 병상 옆에 붙어 그만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조금은 겁을 먹은 상태라 키스를 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저 IV 바늘이 꽂히지 않은 그의 오른손만을 꼭 쥐고 있었다.
복도에서 가끔씩 들리는 발소리와 두런거리는 말소리 이외엔 병실은 고요한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입구의 백열등 하나만 켜놓아서 실내는 다소 어두웠지만 그가 또렷이 보이니 그걸로 조명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마침 응접실이 딸린 특실 하나가 빈 것이 다행이었다. 자신 역시 별로 몸 상태가 좋다고는 할 수 없었기에 낯선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일반 병동에서 그를 보살필 자신은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은 더디게 흘러가는 것도 같고 몹시 빠르게 흘러가는 것도 같았다.
주사를 놓거나 혈액을 채취하기 위해 두 시간 간격으로 간호사들이 들락거렸다. IV액도 두 번 정도 새로 투입되었다.
자정이 넘어가면서 그의 상태는 눈에 띄게 호전이 되고 있었다. 가끔씩 내뱉던 신음 소리도 거의 없고 간헐적인 기침을 해댈 뿐, 편안한 잠에 빠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잰 체온이 37도 5부로, 40도를 오르내리던 몇 시간 전의 위급 상황이 마치 거짓말 같았다.
그의 상태가 좋아지자 인환의 마음 상태 역시 급반전을 치며 좋아지기 시작했다. 허기가 참을 수 없게 느껴지고, 졸음도 쏟아졌다. 마침 IV액을 갈아주기 위해 들어온 간호사에게 그를 잠깐 부탁하고 병원 옆에 새로 생긴 편의점에 가서 간식거리와 음료수를 사 가지고 왔다.
배 속에 음식이 들어가니 졸음은 더 참기가 힘들어졌다. 복도 자판기에서 서너 잔 커피를 뽑아 마셨지만 여전히 졸음이 쏟아졌다. 할 수 없이 그의 침상 위에 팔을 괴어 머리를 묻고 잠깐 눈을 붙였다. 번듯한 보호자용 침대가 옆에 있었지만 편히 누워 잠을 청할 정도로 낙천적이진 못했다.
“……어머, 깨어나셨네요……?!”
기쁜 듯한 간호사의 탄성이 끈적한 잠의 늪으로부터 인환을 단숨에 끌어올렸다. 소스라치듯 상반신을 일으켜 세우자 눈 부분에 짙은 음영이 드리운 그의 시선이 똑바로 다가들었다.
미미하게 남아 있던 졸음기가 쏜살같이 달아나버리는 것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잠자고 있던 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리며 다시금 고된 일과를 시작하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이미 새벽 4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엎드린 자세 그대로 두 시간 이상을 자버리다니, 역시 꽤 지쳐 있었던 모양이었다.
“누워 계세요. 아직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주사 맞으시고 좀 더 주무세요. 아침 8시에 담당 선생님의 회진이 있을 겁니다.”
한쪽 팔로 침대를 짚은 채 힘겹게 앉아 있던 그의 상반신을 애교가 듬뿍 담긴 태도로 다시 침대에 눕히며 간호사가 말했다. 그의 시선을 받자 설핏 얼굴을 붉히는 걸 보니 그에게 마음이 동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시종 생글거리며 곰살가운 태도로 그의 손등에 주사를 놓곤 다시 방을 나갔다.
오랫동안 침묵이 계속되었다. 심장이 방망이질을 치고 만감이 교차하는 터라 도무지 그 어떤 말도 끄집어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또한 생각을 더듬고 있는 모양으로, 간호사가 눕혀준 자세 그대로 병실의 흰 회벽 한 모서리에 조용히 시선을 주고 있었다. 공허한 눈이었다.
“……몇 시…… 나 됐습니까……?”
몇 분인지 몇 십 분인지 가늠할 수조차 없는 시간이 흐른 후에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너무나 낮은데다 탁하디탁한 쇳소리라 귀를 바짝 기울이지 않으면 알아듣기 힘들 정도였지만, 그러나 인환에게 있어선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뚜렷하고 선명하게 의미가 전달되었다.
심장이 뛰기를 정지하고, 호흡은 그대로 틀어막힌 것만 같은 어마어마한 기쁨이 파도처럼 엄습했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아 인환은 손바닥에 피가 배어나올 정도로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끝났다! 하느님, 이제 더 이상 아프지 않아도 된다!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침착하고 예의 바르며 사려 깊은 내 영웅의 어조 그대로였다!!
사납게 포효하던 야수는 이미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