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1989년 10월. 문위(文偉)
“……어…… 어…… 아, 4시 조금 넘었네? 새벽이야. 아픈 건 견딜 만하니……?”
남자가 대답을 하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종잡을 수 없는 표정으로 한동안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몇 번이나 기다란 한숨을 내뱉기도 해봤다가, 마침내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를 하는 얼굴은 목 언저리까지 빨개져 있었다.
“……정말 놀랬어. 폐렴이 돼서 위험할 뻔했다더군. 도대체 몸 관리는 제대로 하고 있는 거냐?”
덧붙이는 어조는 쾌활했다. 아니, 쾌활한 정도가 아니라 기뻐서 못 견디겠다는 투였다. 움찔움찔, 입술 끝이 올라가며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트릴 것 같지만 애써서 참고 있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참담했다.
그토록 담금질을 해대던 육체의 고통이 견딜 만한 것으로 가라앉은 지금, 정신은 그 대가를 치르기라도 하듯 처참한 기억들로 맹위를 떨쳤다.
차라리 꿈을 꾼 것뿐이라고 스스로를 기만하고 싶다. 미친놈이라서 잠깐 발광을 했을 뿐이라고.
그러나 물론 꿈도 아니고 광기도 아니다.
생글거리는 남자의 얼굴은 이미 벌어진 짐승의 폭력을 선명하게 증거 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따귀를 때렸는데도 뺨이 조금 붓고 입술 끝이 터진 외엔 별로 티가 안 나는 것이 오히려 기가 막힐 정도다.
새록새록 떠올라오는 기억의 편린 속에서 부침을 당하는 남자의 애원과 절규가 끔찍했다. 자신이 짐승이었던 건 말할 것도 없고, 남자마저도 짐승 수준으로 떠밀어버린 것은 어떻게 해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물론 후회는 안 한다.
다시 한 번 어제의 순간으로 되돌아간다고 해도 자신은 남자에게 똑같은 행동을 취할 터이다. 자신 역시 성인군자가 아니었다. 이번 일로 위는 자신 속에 깃든 짐승의 면모를 여실히 자각하게 되었다.
눈 돌리고 싶은 끔찍함이요, 인정하기 싫은 추악함이지만 행위를 부정함으로써 자신을 부정하진 않을 것이다. 만약 부정한다면 지독한 죄의식과 회한에 치인 나머지 머리가 돌아버릴 테니까.
윤리보다는 살아남는 게 우선이다. 살기 위해선 닥치는 대로 밟고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게 안기부의 원수든, 눈앞의 게이든 다를 건 없다.
그래. 후회하진 않아.
잘못했다고 빌지도 않을 거다.
……운이 나빴던 것뿐이야. 당신 운이 나빴기 때문에 불똥이 튄 거라구. 그러니까 별로 억울해할 건 없어. 불똥이야 누군들 피할 재간이 있나? 나 역시도 늘 두들겨 맞고 사는데 말야…….
계속 해죽해죽 웃음을 흘리고 있는 남자에게서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분명 가슴은 지독한 회한으로 무너지고 있었지만, 위는 그래도 굳건하게 밀고 나갈 자신을 알고 있었다.
인간이 극복하지 못할 상처는 존재하지 않는다. 당장은 하늘이 무너진 거 같고, 비참한 나머지 고층 빌딩에서라도 뛰어내리고 싶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거짓말처럼 실실 웃게 된다.
그렇다. 생명이란 그런 것이다. 질기고, 독하고, 모질기 짝이 없는 이기(利己)인 것이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짓을 저지른 것을 압니다.”
마지못해 툭 내뱉자 남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진다. 자연스럽게 움직임을 보이던 동작이 일제히 스톱모션을 취하며 잔뜩 긴장을 하는 게 보였다.
“……선생님께서 제게 품고 있는 호의를 악용했지요. 계약을 파기하셔도 좋고, 달리 원하시는 대로 보상해드릴 방법을 말씀해주셔도 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게 어떤 것이 됐든 최선을 다해 보상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저도 처음 알았습니다. 비교적 절제력에 있어선 자신이 있었는데 그렇게 망나니가 될 수도 있다는 걸요.”
“…….”
“남창으로선 실격입니다. 아무래도 이런 저와 계속 관계를 맺고 싶지는…….”
“그만!”
줄곧 얌전하게 듣고만 있던 남자가 다급하게 말을 막았다. 홍조를 띠고 있던 얼굴은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무슨 소리를 하고 있어! 정말 짜릿했는걸?!”
“……?”
“……진짜야! 강간 시추에이션은 나도 꽤 좋아하는 버전이라구! 너 그거 아직 몰랐니?”
움찔움찔 떨리는 입술을 몇 번 혀로 축이며 남자는 웃음기가 가득한 어조로 노래하듯 말했다.
“…….”
“그야, 조금 과격하긴 했지만 그래선지 되레 더 흥분이 되더구나. 암튼 즐겼으니 됐지 뭘. 잊어버려.”
“…….”
“근데 뭐 언짢은 일 있었니? 화 많이 났던 거 같은데? 진짜 무섭더라?”
“…….”
“다행히 나 때문은 아닌 거 같아서 정말 십년감수했다고.”
“…….”
“……하지만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아픈 것까지 참으면 어떡해? 너 마조냐?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몸을 방치하다니……. 의사가 조금만 늦었더라도 큰일 날 뻔했다고 하더라.”
“…….”
“다음부턴 열받는 일 있더라도 몸 상태 봐가면서 화를 내라구. 어떤 신경질이든 다 받아줄 테니까, 응?”
“…….”
“……뭐, 덕분에 색다르고 짜릿하게 즐길 수 있을 테니 일거양득이겠지? 하하…….”
“……저는 바보가 아닙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냉랭하게 남자의 말을 잘랐다.
기가 막혔다. 뭘 하자는 건가, 이 남자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는 건가? 그렇게 비참하게 유린당하고도 자신을 용서하겠다는 건가? 이 남자의 마음이란 그렇게 넉넉하고 선하다는 건가? 아니면 추악한 행위마저 감싸 안을 정도로 정말 자신을 깊이 사랑한다는 건가?
맙소사, 구역질이 난다!
화낼 줄 모르는 위선이든, 뭐든 포용하는 비굴한 애정이든 소름이 끼칠 지경으로 혐오스럽다!
“제가 선생님께 저지른 폭행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셔도 얼마나 상처 입혀드렸는지 압니다. 알고 한 짓입니다.”
화사하게 웃고 있던 얼굴이 다시금 굳어들고 있었다.
또다시 남자의 뺨을 때린 것만 같은 더러운 기분이 들었다.
촉촉한 물기를 머금고 있는 남자의 섬세한 눈동자가 아프게 위의 심장을 들쑤시고 있었다. 위가 남자를 상처 입혔다면 이 순간 남자 역시 자신을 깊이 상처 입히고 있었다.
“즐기셨다는 말로 제 행동을 희석시키지 마세요. 분명 파렴치하고 비난받아 마땅한 짓이었습니다. 대가는 꼭 치르겠습니다. 천천히 생각해보시고 결과를 말씀해주십시오.”
더 이상 남자를 지켜보고 싶지도 않아서 침대에 깊숙이 몸을 묻으며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마침 기침의 발작이 와서 위는 찌르는 듯한 폐의 통증을 느끼며 연거푸 기침을 해야 했다.
그저 조금 화를 낸 것뿐인데도 온몸이 지끈거리며 쑤셔온다. 호흡을 하는데도 확연히 답답함이 느껴져 초조했다. 꽉 잠겨버려 제대로 나오지 않는 목소리도 짜증이 난다.
폐렴이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잔병치레와는 인연이 멀었던 터라, 육체의 부자유함에도, 고통에도 쉽사리 적응이 되지 않았다. 면역이 돼 있지 않은 만큼 신경이 좀 더 민감하게 반응을 하는 모양이었다.
“……미안…….”
노래하는 목소리 대신 차분하게 가라앉은 남자의 낮은 음색이 조심스럽게 토해졌다.
“……그래, 나 방금 너 바보 취급했어. 용서해, 위야…….”
조금 떨고 있지만 나름대로 위엄을 되찾은 어조였다.
“……솔직히 너 잃고 싶지가 않아서 아무렇지 않은 척해봤던 건데 괜히 네 기분만 상하게 한 거 같네? ……아아, 하지만 그래도 내 감정에 대해서는 너도 잘 아는 거 같으니까…… 음, 이해되지?”
아니, 모른다. 위는 그런 사랑은 모른다. 이해도 안 되고, 앞으로도 이해할 생각은 없다.
“……솔직히 상처받았어. 생각날 때마다 많이 아파, 위야. ……물론 앞으로도 계속 아프겠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상처일 테니까…….”
“…….”
“……정말 잔인했어, 너. 어쩜 그렇게 내가 아픈 데만 콕콕 쑤실 수가 있어?”
책망하는 말이라 하기엔 너무나 상냥하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에는 포플러 나무가 무척 많았어, 위야. 그래선지 포플러 잎을 파먹는 송충이들도 꽤 많았지…….”
한동안은 자신이 상처받은 구구절절한 사연을 늘어놓으며 위를 성토하리라 여겼던 남자가 느닷없이 포플러 나무 얘기를 꺼내자 위는 자신도 모르게 귀가 솔깃해졌다.
“……난 중학교 들어갈 무렵부터 그림에 특히 호기심을 갖고 있었는데, 학교 미술반 활동을 하면서 좀 더 관심이 깊어졌지. 공부엔 별로 취미가 없었어. 그냥 반에서 중간쯤 했는데 우리 엄마도 별로 닦달하는 타입이 아니라 학교생활은 편했어.”
“…….”
“틈만 나면 아무 데서나 이젤을 펴놓고 그림을 그렸지. 운동장에서 노는 애들이나, 교정의 이곳저곳, 옥상에서 멀리 내다보이는 거리 풍경 등등 닥치는 대로 그려댔어. 특히 운동장에서 노는 친구들 그리는 걸 좋아했는데……. 아, 맞아. 내가 게이란 걸 자각하기 시작한 게 중학교 2학년 무렵이었거든. 친구들의 아름다운 몸이나 움직임들을 그리는 게 너무 행복했지. 수업이 끝나면 어김없이 운동장 한구석에서 이젤을 폈어.”
“…….”
“그럴 때마다 방해가 된 게 그놈의 송충이들이었어. 나, 벌레라면 정말 학을 뗄 만큼 싫어하거든. 아니, 싫어한다기보다 무서워할 정도였지. 그림 그리다가 머리 위로 툭툭 떨어지는 그놈들은 정말 고문이 따로 없더구나. 그렇다고 좋아하는 그림 그리기를 포기할 수도 없고……. 아무튼 그래서 송충이라면 닥치는 대로 잡아 죽이게 됐어. 그림 그리기 전 20분은 무조건 송충이 잡는 데 투자를 했지.”
“…….”
“……2학년 때였는지 3학년 때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아. 기분이 내내 바닥이었던 걸 보면 아마도 3학년 때였던 거 같아. 사춘기였거든. 내가 사생아라는 걸 엄마가 얘기해줘서 그것 땜에 몹시 흔들리던 시기였어.”
남자가 사생아라는 것은 처음 듣는 얘기였다.
몇 년 전 타계한 모 재벌 기업의 총수가 남자의 부친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저 사생아일 뿐이라니, 남자가 저 유명한 형제간의 이권싸움에 휩쓸리지 않고 평범하게 그림이나 그리는 지금의 생활도 비로소 이해가 된다.
정실 자식이 아니라면 집안에서도 별로 발언권은 없을 터였다. 하긴 별로 이렇다 할 욕심이라곤 없어 뵈는 게으른 천성이라, 남자가 야망을 세우며 집안싸움에 끼어들 일은 아마도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가끔씩 찾아오는 아버지도 절대 만나지 않았고 엄마 속도 꽤 썩이고 있던 무렵이었지. 아무튼 그때 그날도 난 운동장 한쪽 구석 포플러 나무 아래에다 이젤을 펴고 있었어.”
“…….”
“지금도 기억해. 아버지가 오는 날이라 나는 그날 밤은 아예 집에 안 들어갈 작정을 하고 있었지. 해가 질 때까지 그림이나 그리다가 아무 호텔에나 가서 잠이나 자자고. 물론 기분은 엉망이었어. 실은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죽을 지경이었으니까.”
남자의 목소리는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던 처음처럼 여전히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괴로운 추억일 게 분명했는데도 별로 감정의 동요는 보이지 않았다.
위는 문득 남자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몇 번 몸을 뒤척이다 슬그머니 상반신을 일으키고 남자를 굽어보았다.
남자는 창가에 우두커니 기대선 채 밖에다 시선을 주고 있었다. 위를 향해 반쯤 튼 프로필밖에 보이지 않아 표정을 읽기는 어려웠다.
“……평소처럼 송충이를 으깨고 있었어. 기분이 기분인 만큼 좀 더 대량 학살을 자행하던 중이었지. 대충 끝내고 의자에 앉으려는 찰나 그놈이 눈에 들어왔어.”
“…….”
“대량 학살의 와중에 살아남은 놈이었지. 몸통의 반이 으깨진 채로 놈은 기를 쓰고 포플러나무 밑동을 오르려 하고 있었어…….”
“…….”
“……일단은 징그럽다는 생각이 먼저 들더구나. 떨어질 듯 말 듯 하는 망가진 몸을 끌고 꿈틀거리는 꼴이 영 끔찍했거든. 그다음엔 신기한 생각이 들더라. 어떻게 저러고도 몸을 움직일 수 있나 싶은 게 놀랍기만 했지. 마냥 지켜보았어. 그래, 네가 어디까지 가나 한번 보자 하고…….”
“…….”
“몇 시간이었는지, 단 몇 분에 불과했는지는 나도 잘 몰라. 다만 놈은 나무 밑동을 거쳐 위로, 또 위로 자꾸만 올라갔지. 보고 있는 사이 어느새 난 그놈에게 감정 이입을 해버린 모양이었어. ‘두고 보자’의 심정 대신 ‘부디 제발’ 하는 기분으로 침을 꼴깍대고 있었지. 그럴 것이, 허리 아래가 으깨진 그놈의 몸부림이 절름발이인 내 신세와 묘하게 겹쳐졌으니까.”
“…….”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어. 어느새 놈은 내 키를 훌쩍 넘어 잔가지들이 뻗치기 시작하고 있는 줄기 끝까지 올라갔지. 그리고 마침내 목적한 듯한 잔가지 깊숙이, 내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완전히 사라져버리더구나.”
“…….”
“아찔했어.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끝없이 추락하는 것 같기도 하고, 반대로 로켓을 타고 하늘 높이 쏘아 올려지는 것 같기도 했지. 꿈인지 생시인지 도통 몽롱하기만 했어. 애들이 떠드는 소리도 사라지고, 뜨거운 햇빛도 사라지고, 또 송충이에 대한 치 떨리는 혐오감도 사라졌지. 아버지에 대한 미움도, 사랑도 사라졌어. 시간도 사라지고, 공간도 사라지고 없더군. 그냥 나와 그 다리가 부러진 송충이뿐이었지. 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어.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만 만물을 움직이는 진리를 돌연 깨달아버린 거였지. 송충이와 내가 하나라는. 아버지와 내가 하나라는. 뜨겁게 내리쬐는 햇빛과, 운동장과, 친구들의 아름다운 몸과 내가 하나라는. 그래, 세상과 내가 하나라는…….”
문득 소름이 끼쳤다. 뭐가 뭔지 어리둥절해졌다. 남자는 언젠가 자신을 앞에 앉혀놓고 강이 형이 해준 얘기를 고스란히 리플레이 하고 있었다.
“……더 이상 송충이들이 두렵거나 징그럽지 않았어.”
―더 이상 전경들이 두렵거나 혐오스럽지 않았어…….
“……왜냐면 내가 바로 그 송충이들이니까. 그리고 송충이는 또 나니까.”
―그들이 나고 내가 바로 그들이더라, 알고 보니…….
“……마치 눈앞을 가리고 있던 새까만 가리개가 걷힌 느낌이었지.”
―안개가 걷히듯 미망이 물러가고 부서질 것 같은 자각이 들어왔지.
“……자아가 사라지고 우주가 내 안에 들어왔던 거야. 그리고 난 이 불확실하고, 속임수투성이며, 폭력적인 세상에서 그것만이 나를 지탱해줄 유일한 진실이란 걸 깨달았지.”
―그것밖에 없어…… 우리가 기댈 건 결국 그것밖에 없었던 거야…….
“……물론 어릴 때라 지금처럼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당시의 느낌을 정리할 순 없었어. 다만 그래도 난 내가 ‘깨달았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알았지. 그리고 그걸 안 이상 이전의 나와 앞으로의 나는 그야말로 180도 달라지리라는 것도.”
―이젠 다르게 뛸 거다, 위야…….
“……단지 취미가 아니라 평생의 사명으로 그림을 그리리라고 결심했지. 언젠가 정말 능숙한 기술을 지니게 됐을 때, 바로 이 유일한 진실을 화폭에 옮기자고.”
―정의나 복수가 아니라, 우리들의 유일한 본성인 사랑과 협력을 가져오기 위해서…….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은 바이러스 때문만은 아니리라.
지난 며칠간 위의 목구멍을 틀어쥔 채, 내내 새빨간 증오의 불길을 뿜어대던 딱딱한 응어리가 문득 환하게 부서지는 것은, 병으로 마음이 약해진 때문만은 결코 아니리라.
봇물이 터지듯 왈칵 눈물이 쏟아지는 것도…… 강이 형의 바보 같은 체험을 우연찮게 공유한 어느 나약한 게이 때문만은 결코, 결코 아닐 것이다.
어디로 간 걸까?
도대체 강이 형은 어디로 사라져버린 걸까? 엄마는? 아빠는? 허리 아래가 잘린 송충이처럼 어느 가지 사이로 숨어버린 것일까……?
“……그야, 늘 진실을 품고 살 수만은 없다는 걸 알아. 진실은 너무나 귀하고 소중해서 아주 찰나의 순간밖에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법이니까.”
“…….”
“……때문에 나는 여전히 날 상처 주는 놈들이 밉고, 바퀴벌레나 지렁이를 보면 섬뜩하고, 시비를 걸어오는 놈들에겐 할 수 있는 한 복수를 해주지.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야. 분명 네가 내게 했던 방식 그대로 널 짓밟은 자들이 있었을 테지. 네가 그렇게 당했다고 생각하면 정말 치가 떨릴 지경으로 화가 나지만…… 만약 어떤 쌍놈의 새끼들인지 알게 되면 그 몇 배는 복수를 해줄 테지만…… 그렇지만…… 너는 다르잖아……. 네가 내게 한 짓은 용서를 안 할 수가 없잖아…… 나는 너고 너는 난데…… 좋아하지도 않을뿐더러 미워하기까지 하는 다른 존재들의 경우처럼 정말 억지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정말 너무나 자연스럽게 네가 될 수 있는데…… 이렇게 너를 가까이 느끼는데 어떻게 널 용서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
“……이리…… 와…….”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목소리는 너무나 작아서 그에게 제대로 전달이 안 됐을 것 같다.
“……이리 오세요, 선생님…… 이…… 리…… 와요…….”
두 번째 부름엔 억눌린 흐느낌 소리가 끼어드는 바람에 역시 패스.
“……와요. 안고 싶습니다.”
듣기 싫은 쇳소리가 위압적으로 명령하자 그가 비로소 몸을 돌리고 위를 바라보았다. 점점 휘둥그렇게 뜨이는 눈시울이 보였다. 아마도 폭포수처럼 눈물을 쏟아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몹시 놀란 모양이었다. 조금 핏기를 잃는 듯이 보이다가는 이내 새빨개진 얼굴이 갈팡질팡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위……? 왜…… 왜 그래? 아…… 아프니……?”
가까이 올 생각은 않고 자신의 몸만을 걱정하는 그가 답답하기 그지없다.
“……예, 여기가…….”
마침 따끔거리던 IV 바늘을 가리키자 비로소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
“……가…… 간호사 부를까? 아직 부어오르지는……?”
손등에 꽂힌 바늘을 살피기 위해 허리를 구부리는 그를 무턱대고 끌어안았다.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고 버둥거리는 그의 상반신을 단단히 품에 고정한 채 포옹을 깊게 했다.
“……위……?!”
“…….”
“……위위……? 위…….”
“…….”
보통 남자보다는 조금 가냘픈 그의 마른 몸집이 맞닿은 피부마다 선명하게 느껴졌다.
역시 강이 형과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기질도, 의지력도, 몸집도, 강이 형은 품 안의 남자처럼 나약하지 않았다. 섬세하지도, 게으르지도 않았다.
아무렴. 강이 형이 돌아올 리가 없지 않은가.
턱 밑을 지나 정수리 뒤쪽으로 관통한 총상 자국을 자신은 손가락까지 밀어 넣어 자세히 살펴보았었다. 틀림없이 죽었다. 죽어 있었다. 새하얗게 변한 채 군데군데 붉은 시반(屍班)을 드러내고 있는 몸엔 더 이상 따스한 온기라곤 남아 있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눈물을 멈출 수가 없다……. 그리움도……. 슬픔도…….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다……. 참을 수가 없다…….
“……위……? 위위……. 위야…….”
“……미…… 안…… 합니다…….”
“!!!”
“……미안합니다…….”
“…….”
“……미안합니다, 선생님…… 용서해주세요…….”
“…….”
“……할 짓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으로 할 짓이…… 용…… 서를…….”
“……위…… 위위…….”
“……용서를 빕니다…… 용서해주세요…….”
“……위야……!”
그의 몸은 몹시 떨리고 있었다. 아직 두려움이 남아 있는지 자신을 마주 안지도 못하고서 그저 사시나무 떨듯 떨고만 있었다.
자신이 얼굴을 파묻고 있는 그의 목덜미에서 희미한 담배 냄새와 코롱 냄새가 뒤섞인 그의 체취가 맡아졌다. 복받치는 설움 속에서도 위는 문득 달콤한 향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뼈마디가 느껴지는 그의 등뼈도, 부드러운 허리의 곡선도, 봉긋하게 굴곡이 진 엉덩이도 모두 기분 좋은 감촉을 주고 있다고.
가슴이 아팠다.
도대체 자신은 무슨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이렇게 좋은데, 좋은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줄 수 있었단 말인가!
강이 형은 삼겹살을 좋아했다, 자신처럼.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운동하는 것을 좋아하고, 친구들과 장난치는 것을 좋아했다, 자신처럼.
좋은 일에도 별로 들뜨지 않고, 싫은 일은 내색 않고 혼자 삭혔다, 자신처럼.
이 사람처럼 관대했고, 이 사람처럼 착했다.
세상과 자신은 하나라고, 사랑하는 이들과, 미워하는 이들과, 부모와, 원수와, 자식이 모두 하나라고 얘기했다, 이 사람처럼.
강이 형은 그랬다.
그렇게 살다가 갔다.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그리운 추억들에 회한이 겹쳐지며 가슴은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언제까지고 멈출 생각이 없다는 듯, 눈물은 펑펑 쏟아져 이 세상 곳곳을 슬픔으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고양이처럼 연약하고 사랑스러운 품 안의 그는 따스해서 좋았다.
강이 형처럼 차갑지 않아서 좋았다.
눈물이 멈추지 않는 것은…….
그가 따스한 체온을 건네주며 살아 숨 쉬고 있는 데도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다…….
축축하고 뜨거운 것이 발가락 사이를 간질이고 있었다.
잠을 깨우지 않게끔 몹시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키스였지만, 아마도 그래서 더더욱 위의 의식 속으로 파고 들어왔나 보다. 성준이 녀석의 과격한 스킨십에 단련이 되어 있는 터라, 부드럽거나 다정한 접촉엔 도리어 온 신경이 곤두섰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가 발치에 달라붙어 위의 발가락을 핥고 있었다. 아니, 엄밀히는 물수건으로 닦아주고 있는 중이었고, 그 사이사이 키스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침이었다.
빼꼼히 열린 커튼 틈으로 한 줄기 눈 부신 빛이 흘러들고 있었다. 사방으로 하얗게 부서지는 빛은 그가 입고 있는 크림색 니트 스웨터에 뽀얀 후광을 만들고 있었다.
오른쪽 엄지발가락과 검지발가락 사이에 파인 골로 조심조심 내밀어지는 그의 도톰한 입술은 선홍색이었다. 단발에 가까울 만큼 길게 자라 있는 머리카락은, 잠을 설친 사실을 반영하듯 조금 부스스했지만 비교적 매끈하고 부드러웠다. 한껏 치장을 한 모습으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때면 늘 찰랑찰랑 흔들리는 새까만 가닥들이 아주 세련되고 멋스러워 보였다는 게 생각났다. 숱이 많고 긴 섬세한 속눈썹이, 거의 감은 듯 내리덮여 있는 눈꺼풀을 아치처럼 싸고 있었다. 입술도, 속눈썹도 모두 꽤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묘한 일이었다.
만난 지 두 달이 지나가고 있고, 서로 모르는 부분이 없을 정도로 벌거벗고 섹스를 나눈 사이임에도, 마치 처음 만나는 사람인 것처럼 그가 신선하고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남자라도 저만큼 섹시하다면 원하는 애인을 구하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을 터였다.
1년 후, 그와의 계약 관계를 해지하더라도 자신은 그를 쉽게 잊지는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객이 아니라 친구로 만났더라면 절친한 우정으로 맺어질 수도 있었을 텐데 하며 아쉽게 혀를 차는 자신이 있었다.
“……더러워요. 일주일이나 씻지를 못했습니다.”
설사 여자 고객이라 할지라도 서비스 시간 이외의 접촉에 대해선 불쾌감을 드러내곤 하는 위였지만 그의 애무는 그리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조용히 내뱉는 자신의 목소리엔 어쩔 수 없는 부드러움이 배어 있었다.
움찔하고 어깨를 들썩이며 기겁을 하는 그가 문득 귀엽다고 생각한다.
반짝 치켜든 갸름한 얼굴도, 커다랗게 뜬 검은 눈도, 벙하니 벌어진 붉은 입술도 한결같이 섹시하다고 생각한다.
부드럽게 얽히는 시선 속에서 점점 화사하게 퍼지는 행복의 미소가 몹시 사랑스럽다고 생각한다.
“……더럽지 않아. 네 것은 무어라도 더럽다고 느끼지 못해…….”
고백이 아닌 고백조차 거부감은커녕 그저 딱하다는 생각만 든다.
그간 집요한 독점욕을 드러내며 자신에게 감정을 강요하던 여자들의 그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을 낯간지러운 애정 표현이건만 위기감 따윈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보답을 해줄 수 없다는 현실이 그저 애처로울 뿐이다.
“……펜이랑 종이 있으십니까, 선생님?”
“……아…… 응? 지금 없는데……. 아, 저기 있다. 응접실 탁자 위에 메모장이 있어!”
절름거리는 다리로 부랴부랴 달려가 부탁한 것을 가져온다. 남자의 동선을 무심코 좇다가 위는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병실 풍경을 비로소 자각했다. 입원비가 장난이 아닐 텐데……. 당장은 여유가 없으니 역시 그의 신세를 져야만 할 것 같다.
자각된 현실에 조금 우울해졌지만 이상스러울 정도로 기분은 평온했다. 마치 전신을 덮고 있던 덥고 무거운 갑옷을 한꺼번에 벗어 던진 기분이었다. 상쾌했다.
아마도 강이 형이 가고 난 이래 묵힐 대로 묵혀두었던 슬픔의 응어리를 깨끗이 발산해버린 데 대한 카타르시스 때문일 것이다.
강이 형의 죽음 앞에서도, 엄마의 유골을 산에 뿌리면서도 울지 않았던 자신이었다. 아니, 울지 못했던 자신이었다.
어쩌면 자신은 울 계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렇게 계기를 가져다준 그가 고마웠다. 지독한 짓을 당하고도 너그럽게 용서를 돌려줌으로써 오랫동안 맺힌 응어리를 풀어준 그가 너무나 고마웠다.
“……이…… 이게 무슨……?”
집 전화번호를 적어 그의 손에 쥐여주자 그의 눈이 다시 휘둥그레진다.
“……우리 집 전화번호입니다. 친구 녀석의 전화번호도 같이 적었습니다. 혹시 또 제가 이번처럼 연락이 없이 약속을 펑크 낸다면 전화를 주세요. 동생들이나 친구가 원인을 말해줄 겁니다.”
종이 쪼가리가 마치 보물단지라도 되는 양 떠받들고 있던 그의 손이 전율한다. 전화번호를 봤다가 위의 얼굴을 보고, 다시 전화번호를 봤다가 위의 얼굴을 쳐다보길 몇 번 반복하더니 입술을 깨문 채 바닥으로 고개를 떨군다. 가냘픈 실루엣을 그리는 그의 어깨 역시 메모지를 움켜쥔 두 손마냥 바들바들 떨리고 있다. 아, 그래……. 눈물이 많은 남자다, 참…….
“그러고 보니 집에 전화도 못 했군요. 동생들이 걱정할 겁니다. 좀 부축해주시겠습니까?”
자신에게 눈물을 보이고 싶어하지 않을 그를 배려하고도 싶었고, 정말로 전화도 해야 했기에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물론 부축을 받을 정도로 몸 상태가 나쁜 것은 전혀 아니다. 아직 열기가 좀 느껴지고 기침의 발작 또한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지난 며칠간의 고통에 비한다면 코웃음을 칠 일이다.
부랴부랴 바지 주머니에 메모지를 집어넣은 그가 손을 뻗어온다. 한쪽 어깨를 기울여 기대게 하곤, 다른 손으로 링거 팩을 집어 들더니 조심조심 전화기가 있는 응접실로 자신을 인도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희미하게 끼쳐드는 그의 체취가 여전히 기분 좋았다.
집에 전화를 거니 예상대로 아무도 받지 않았다.
다음, 현준 형 집으로 다이얼을 누르자 귀를 찢는 듯한 성준의 고함 소리.
화가 단단히 났다. 2∼3분쯤 자신을 성토하는 녀석의 잔소리를 들어주는 것으로 녀석의 기분을 누그러뜨린 후, 동생들을 바꿔달라고 했다. 2∼3일 더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하니 동생들은 몹시 낙담을 했다. 정말로 괜찮은 거냐고, 2∼3일 후엔 반드시 돌아오냐고 몇 번이고 확인을 했다.
목소리가 맛이 갔으니 감기에 걸린 것까지 숨길 수야 없었지만 설마 폐렴으로 입원했으리라곤 차마 예상하지 못할 것이다. 알게 되면 또 죽어라 걱정들을 하겠지. 혜윤이도, 휘도, 그리고 성준이 녀석도…….
밀린 아르바이트 때문에 과외를 가르치는 애네 집에서 머물고 있다고 대충 둘러댄 후 전화를 끊었다.
그의 부축을 받으며 침대에 몸을 묻으니 마침 담당 의사가 한 무더기나 되는 수련의들을 이끌고 병실로 들어왔다. 이런저런 검사 결과들이 적힌 차트와 위의 대답을 토대로 기대 이상으로 빨리 회복되고 있는 것 같다며 의기양양해했다.
의사의 말이 아니라도 몸에서 느껴지는 모든 감각들이 빠른 호전을 증거하고 있었다.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정말로 밀린 아르바이트며(그 이외에 나머지 두 여자들과의 약속도 펑크를 내게 되었다) 일주일 이상을 빠지게 된 학교며, 할 일이 태산이었다. 입원 기간이 길어진다면 그만큼 공부에 지장을 받게 될 터였다.
의사들이 나가고 이어 들어온 간호사가 또 주사를 놓곤 받아놓은 객담과 소변들을 가져갔다. 잠시 후엔 음식이 들어왔다. 자신을 위해선 멀건 흰죽에 간장 한 종지, 그를 위해선 제법 호사스러운 진수성찬이었다. 죽을 먹을 정도는 아닌데 하며 불만을 말하자 그가 화사하게 웃음을 지었다. 예쁘다.
“……열이 높아서 소화 기능도 많이 떨어져 있대. 어젯밤에 토한 거 기억 안 나지?”
“…….”
“……다 나으면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 오늘은 그냥 참고 먹어라.”
“…….”
침대 머리맡의 상을 펴고 죽 그릇을 내려놓곤, 응접실에 놓여 있던 테이블을 침상 옆으로 끌어오더니 자신을 위한 밥상을 차린다.
“……헤헤, 너랑 가까이서 먹고 싶어서…….”
조금 어이없어하는 자신의 시선을 피하며 멋쩍은 듯이 웃는다. 귀엽다. 스물다섯 살 먹은 어른이 아니라 휘와 또래인 아이들이나 내보일 수 있는 솔직함과 순수다.
그와 함께 밥을 먹는 것은 아마 세 번째쯤 되는 것 같다. 이태원 게이 바에서 한 번, 그다음 날 아침 싸구려 쪽방에서 한 번, 그리고 오늘이다.
그와는 물론이고 다른 고객들과 밥을 먹는 일이 간혹 있을 때에도 위는 상대를 바라보지 않았다.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밥을 먹는 건 가족이나 친구에게만 해당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유달리 까다로워서가 아니라, 지극히 원초적이고 친밀한 행위이기에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건 섹스도 마찬가지였다.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고, 기분을 살피고 하는 상냥한 배려는 연인 이외엔 필요하지 않은 법이다. 사랑이 배제된 동물의 욕구 충족 따위에 상대의 감정을 살필 필요가 있겠는가 말이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저 타인일 뿐인 고객들의 얼굴을 기를 쓰고 보지 않으려 한 것은. 밥을 먹을 때나…… 그리고 섹스를 나눌 때에도…….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일까.
맛이라곤 일절 없는 흰죽을 떠먹는 틈틈이 그를 훔쳐보는 자신이 있다. 아, 저 반찬을 좋아하는구나. 저건 싫어하는군. 잘 씹지 않는 습관은 좋지 않은데. 아, 입술 끝에 밥풀이 붙었어. 어린애 같아. 그래, 국도 좀 먹어야 목이 메지 않지. 귀엽네……. 그렇게 멍하니 감정을 쫓아간다.
물론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또 망설임 없이 보고 싶다는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는 지금, 감정을 부인하진 않는다.
아마도 이제 그는 자신에게 있어 더 이상 ‘고객’에 불과한 상대는 아닐 것이다. 혜윤이나 휘, 윤열이 형을 생각할 때처럼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아리고, 성준이를 생각할 때처럼 푸근한 정도 느껴진다. 물론 가족이라 하기엔 너무 이질적이고 친구라 하기에도 현재의 일그러진 관계가 걸린다. 당연히 연인의 자리도 아니다.
아마도 제 3의 다른 어떤 종류일 것이다. 가족이 아니면서, 친구도 아니면서, 또한 연인도 아니면서 가슴 한구석에 슬그머니 자리를 잡아버린 어떤 내밀한 감정.
아, 친구로 만났더라면 정말 좋았을 텐데……. 다시 한 번 아쉬움에 혀를 차며 식사를 마쳤다.
“……마저 닦아줄게. 샤워만큼 시원스럽지야 않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견딜 만할 거야.”
음식 쟁반을 내보내고 약까지 먹여준 후, 그가 화장실에서 더운 물수건을 가져왔다. 허락을 구하듯 슬금슬금 환자복 상의의 매듭을 푸는 그를 말리지 않았다.
사실 찝찝하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자신을 돌보는 일이 기뻐 죽겠다는 듯 신이 난 그의 기분을 배려해주고 싶었다. 그가 행복해하기만 한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가능한 것은 다 해주고 싶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자신이 준 상처가 쉽사리 잊힐 리는 없겠지만, 빚을 갚는다는 께름칙함 너머 그저 순수하게 그의 행복을 바라는 인간적인 호의였다.
뜨거운 물수건의 감촉은 시원하고 기분 좋았다.
부드럽고 정성스러운 손길이었다. 물수건으로 한 번 닦고 체온이 떨어지지 않도록 바로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말린다.
자신이 잠이 들었을 땐 그렇게 키스를 해대더니만 맨 정신으로 보고 있으니 차마 딴생각은 못 하는가 보다. 얼굴은 물론 목에서부터 아랫배까지 상반신을 말끔히 닦아내곤 머뭇거리며 위의 눈치를 살핀다.
곤혹스러워하는 그를 다독이듯 주삿바늘이 꽂히지 않은 손으로 파자마 허리춤을 조금 내려주자, 망설이던 그의 두 손이 다가와 파자마를 벗겨 내렸다. 무릎 위치까지 벗기곤 조심스럽게 닦기 시작했다.
부드럽기 짝이 없는 기분 좋은 감촉에 조금씩 졸음이 몰려들었다. 식곤증에 약 기운까지 겹치니 아무래도 하루 종일 잠이나 자야 할 듯싶다.
“……좀 자야겠습니다, 선생님. 이제 됐으니까…….”
상반신을 침대에 눕히려다 말고 위는 문득 모든 동작을 멈췄다.
펄쩍 뛰듯 놀라며 그가 고개를 치켜들었기 때문이다. 눈은 휘둥그레져 있고 온 얼굴이 새빨간 홍조로 가득했다.
붙잡힌 시선 속에서 그는 위에게 낱낱이 생각을 들키고 말았다. 확인하듯 그의 하반신으로 슬쩍 시선을 가져가니 이미 봉긋하게 부풀어 있다. 쩔쩔매며 위의 시선을 피하다가는 황망히 수건을 챙겨 든다. 목덜미까지 빨개진 얼굴이 애처로울 정도다. 막 화장실로 달려가려는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문 잠그세요.”
“?!”
“……문…… 잠그고 오세요.”
“…….”
얼빠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를 채근하듯, 잡혀 있던 그의 손을 딱 소리가 나게 때렸다. 수시로 들락거리는 간호사들에게 보여줄 수야 없지 않은가.
부드러운 시선 속에서 비로소 위의 의도를 읽은 그가 후들거리는 걸음으로 문가로 간다. 병실 문을 잠그고 돌아오면서도 위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있다.
부끄러워하는 몸짓이며 빨개진 얼굴이며 너무나 귀엽다. 남자를 상대로 계속 귀엽다는 느낌을 품는 게 이상하다고는 생각하지만 솔직히 그 이외엔 달리 그를 표현할 말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그의 상반신을 끌어당겨 안았다.
“……올라오세요…….”
기분 좋은 체취를 풍기는 그의 목덜미에 대고 조용히 속삭이자 그가 바르르 몸서리를 친다.
주삿바늘이 꽂히지 않은 한 팔에 힘을 주며 그를 좀 더 끌어당기자, 그가 허겁지겁 침대 위로 올라왔다. 올라오자마자 어린애처럼 팔을 둘러 위의 허리를 끌어안곤 품 안에 힘껏 얼굴을 파묻었다. 기억을 더듬어 그가 좋아하는 부위를 주로 쓰다듬으며 포옹을 깊게 했다.
그를 안은 채로 침대에 드러눕자 위에서 누르는 그의 체중이 기분 좋게 느껴진다. 기를 쓰고 달라붙는 게 묵직한 고양이 같다. 그가 입고 있는 면바지 너머, 발기한 생식기가 위의 하반신에 막무가내로 비벼지고 있었다.
“……위…… 위…… 흣…… 위위…….”
환자복 상의를 밀어 올리더니 가슴 부위마다 닥치는 대로 핥아댄다. 도드라진 젖꼭지 하나를 택해 강아지처럼 빨아대는 자극에 아랫배가 뿌듯해지며 미세한 욕망이 느껴졌다. 별로 섹스를 할 기분은 아니어서 서둘러 그의 머리를 밀어냈다. 물론 그가 서운해할 틈도 없이 바로 끌어당겨 키스해주었다.
역시 기억을 더듬어 그가 좋아하는 애무를 거듭했다.
입천장을 핥는 것보다는 혀 안쪽을 쓸어주는 걸 그는 더 좋아한다. 자신의 안으로 혀를 빨아들이는 것보다 자신이 끌려가 쓸어주는 걸 더 즐긴다. 목젖 깊이 꽂아주면 거의 자지러진다. 그래, 바로 지금처럼. 정직한 반응이 너무 귀엽다.
“……응…… 응…… 우응…… 후…… 윽…… 나…….”
가장 원하는 걸 조여주지 않고 그저 그 근처만 배회하니 안달이 나나 보다. 헐떡이는 신음이 점점 더 노골적이 되어간다. 그래도 좀 더 애를 태우는 것이 나중에 더 그를 기쁘게 한다는 걸 알고 있기에 바지를 조금 벗기고 엉덩이와 허벅지 안쪽만을 끈질기게 주물러준다. 결국 위의 생식기 근처에 딱딱해진 몸을 비벼대며 미친 듯이 허리를 흔든다.
키스하던 입술을 떼고 절정을 향해 가는 그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홍조를 띠고 있는 눈가도, 자신과 그의 타액이 축축하게 번져든 입가도, 파르르하니 전율하는 부드러운 눈꺼풀도 자세히 들여다본다.
사랑스럽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하다.
고객들이 갈 때의 얼굴에선 그저 비릿한 색향만을 느낄 뿐인데 그는 뭐라 딱히 집어 말할 수 없는 기묘한 감정들을 불러일으킨다. 하긴, 이렇게 아무런 목적 없이(고객들의 취향을 알아내려는 목적 외엔 잘 보려고도 안 했으므로) 상대를 자세히 들여다본 것은 처음이니 비교할 만한 기준이라곤 없는 셈이기도 하다.
절박한 애원을 담아 흐느끼는 그의 부푼 몸을 비로소 감싸 쥐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강도로 강약을 조절하며 훑어주자 허리가 활처럼 휘며 소리소리 교성을 질러댄다.
“……좋아요……?”
“……흐…… 윽……! 아……! 아아아……! 위……! 위…… 흐잇!!!”
“……좋죠……? 선생님…….”
귓불을 깨물며 속삭여주니 더 이상 못 견디겠나 보다. 교성조차도 못 내고 아예 뒤로 넘어간다. 섹스 도중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도 무엇보다도 좋아했었다, 참…….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머금은 채 위는 마지막 피치를 올려주었다.
숨넘어갈 만큼 섹시한 비명과 함께 뜨거운 체액이 뭉클뭉클 뿜어 나왔다. 별로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움켜쥔 위의 손과 아랫배를 적시고도 침대 바닥으로 축축하게 흘러내릴 만큼은 되었다. 전기를 맞은 것처럼 그의 몸이 요동치며 위의 품 안으로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축축하고 뜨겁고 격렬했다.
귀엽고 애틋하고 향기로웠다.
문득 다른 남자도 갈 때 이런 모양일까 하고 궁금했다. 곧 아닐 거라는 판단이 들었다. 별로 상상하고 싶지도 않을 만큼 지리멸렬했다. 여자들의 오르가슴도 그리 보기 좋지 않은데 하물며 남자의 그것이라니 오죽할까. 거칠고 짐승스럽고 뻣뻣할 뿐이겠지. 자신이 그러하듯이.
새삼 품 안에서 꿈틀거리는 몸이 매우 특별하게 느껴졌다.
몸을 뒤집어 그를 아래에 깐 다음 팔을 둘러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여전히 조금씩 전율하고 있는 몸 구석구석을 부드럽게 쓸고 더듬었다. 함께 나쁜 짓을 저지른 공범자의 그것처럼 그의 몸이 몹시 정겹고 친근했다. 눈을 꼭 감은 채 가쁜 숨을 헐떡이고 있는 얼굴을 끌어당겨 한참을 굽어보았다. 역시 정체 모를 내밀한 감정 하나가 가슴 한편을 따스하게 비집고 들어온다. 가족이 아니면서, 친구도 아니면서, 또한 연인도 아니면서 슬그머니 자리를 잡아버린 미량의 온기.
무방비하게 벌어진 붉은 입술이 문득 눈을 사로잡았다. 마음이 내키는 대로 자연스럽게 입을 맞췄다. 촉촉하고 따스한 안쪽을 핥고, 말랑말랑 기분 좋은 혀를 빨았다.
문득 움찔하며 몸을 긴장시키는 그를 느끼고 입술을 떼었다. 애무의 손길이 엉덩이 사이 깊게 파인 주름 근처로 파고든 때문이었다. 짚이는 게 있어 조금 괴로워졌다.
“……많이 다치게 했습니까, 제가?”
“……벼…… 별로…… 그냥 조금…….”
오르가슴의 여운 탓에 여전히 헐떡이는 목소리가 열심히 부정한다. 물론 거짓말일 게다. 일부러 윤활제도 안 썼고 다분히 상처 입힐 의도를 가지고 안았었다. 원래부터 다리를 절기에 별로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걸을 때마다 고통을 느끼는 듯했다.
“……치료는요?”
“……그…… 괜찮대두……. 별로 많이 찢어지지도 않았고…… 아, 물론…… 연고도 발랐으니까…….”
“…….”
진심이다.
진심으로 용서를 했기에, 더 이상 자신에게 마음을 쓰게 하고 싶지 않은 그의 세심한 배려가 손에 잡힐 듯 전해져온다. 가슴으로 짠한 전율이 인다.
“……이름…….”
“…….”
“……이름이 뭐였죠……?”
“……?”
“……선생님 이름……. ……뭐라고 부릅니까……?”
땀에 젖은 이마에 가닥가닥 달라붙어 있는 그의 까만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거듭 물었다. 조금 당황했는지 빤히 응시하는 위의 눈길을 피하듯 고개를 돌린다.
“……그…… 계약서에…… 적었잖아…….”
“……기억 안 납니다.”
문제가 생기지 않는 한 계약서 따위 다시 볼 일은 없다. 하물며, 이름이 고객을 부르는 호칭이 아닌 한, 계약이 끝날 때까지 이름을 기억하는 일 또한 전혀 없다.
“……뭐라고 부르죠? 가르쳐주세요.”
“……나중에…… 나…… 나중에 계약서 보면…….”
무언가 격렬한 감흥에 사로잡힌 듯 그의 어깨가 출렁거린다. 살짝 입술을 깨물고 있는 거며 바들거리는 턱이며 또 울음을 참는 기색이 역력하다.
어쩐지 그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호감을 가진 사람한테서 처음으로 보답을 받는 셈일 테니 동요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게다가 자신은 그동안 그에게 좀 못되게 굴었던가.
“……말해주세요. 지금 알고 싶습니다.”
“…….”
“……선생님.”
“……이…… 인…… 환…….”
“……이인환?”
“……아…… 아니…… 장…… 장…… 인환…….”
“장인환?”
“…….”
“인환…….”
“…….”
“……인환……. 장인환…… 인환…….”
“…….”
“……울지 마요…….”
“…….”
“……울지 마세요.”
“…….”
“……선생님.”
“…….”
“……인환…….”
“…….”
쉽사리 그칠 것 같지 않아 달래기를 포기하고 그냥 포옹해버렸다.
부드럽게 등줄기를 쓸고, 엉덩이를 쓰다듬고, 허리를 지나 사타구니 사이 회음부를 애무했다. 보통 때라면 곧바로 발기해버릴 그이건만 격한 감정적 동요 때문인지 그저 위의 목을 끌어안은 채 홍수처럼 눈물을 쏟을 뿐이었다.
안쓰러운 나머지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에 끊임없이 입을 맞춘다. 모양 좋은 귓바퀴와 귓불을 씹고, 부드러운 감촉의 목덜미에도 혀끝을 내밀어 상냥하게 애무한다. 키스는 그가 좋아하는 행위인 만큼 물릴 때까지 해준다. 붉게 달아올라 있는 입술은 빨아들일 때마다 짭짭한 눈물 맛이 났다.
손으로는 상반신을, 발바닥으로는 애처로운 하반신을 다정하게 쓰다듬는다. 특별히 마비가 있는 다리를 택해 좀 더 오랫동안 쓸어준다. 더 이상 달리 만져줄 곳이라곤 없을 만큼, 그의 숨어 있는 부분 모두를 샅샅이 찾아내 꼼꼼하게 쓰다듬어준다. 서로의 피부가 닳아 없어질 때까지라도 마냥 애무를 해주리라고 멍하니 어린애 같은 생각도 해본다. 울음을 그치게 할 수만 있다면…… 다시는 울지 않게 할 수만 있다면 정말로 그렇게라도 하고 싶다고.
젠장, 친구로 만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내가 아니라 다른 사내 녀석에게 마음을 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만약 그랬다면 그의 사랑을 이룰 수 있게끔 최선을 다해 도와줬을 텐데…….
벌써 몇 번째일지 모를 탄식을 거듭 뇌까리며 위는 서서히 잠에 빠져들어갔다.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고, 절대로 다시는 들어오고 싶지 않을 종합 병원 입원실 안이었다.
일요일이었다.
위는 나흘 동안 병원에 있었다.
이틀이 지났을 때, 조금 기운은 없어도 그럭저럭 움직일 정도는 됐기에 바로 퇴원을 하려 했었지만 의사는 허락하지 않았다. 여전히 폐는 희끄무레한 염증의 자취를 보이고 있는데다, 낮에는 거의 정상치를 보이던 체온도 밤만 되면 꽤 높아졌기 때문이다. 기침의 빈도도 점차로 줄어들고 있었지만 폐는 여전히 꽤 아팠다.
역시 좀 더 치료를 받아야만 후환이 없을 것 같아 위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고 의사의 조언을 따랐다.
입원 기간, 그는 내내 병원에 머물면서 극진한 정성으로 위를 돌봐주었다. 부담스럽다고, 혼자서도 충분히 지낼 수 있다고, 몇 번이나 그의 배려를 거절했지만 막무가내였다. 늘 온순하기만 한 사람이 고집이 상당하다고, 마침내 설득을 포기한 날 위는 씁쓸하게 뇌까렸었다.
어차피 입원비 문제도 그렇고, 그에겐 이런저런 빚이 있다. 앞으로 천천히 갚아나가면 될 일이라고 위는 낙천적으로 고쳐 생각했다.
낮이나 밤이나 함께 붙어 지내는 사흘 동안 그와 그다지 많은 얘기를 나눈 것은 아니었다. 그 일요일 새벽에 비하면 거의 침묵으로 일관했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에게 호감을 갖게 된 것은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그에게만 계속 집중하기엔 위는 해결해야 할 현실의 문젯거리가 너무나 많았다(가장 절실한 것은 역시 가족의 경제 문제였지만). 그 또한 기존의 조심스러운 입장에서 별로 벗어날 생각은 없었던 모양으로, 가계부 정리나 공과금 계산, 그리고 나머지 시간엔 몸이 허락하는 한 공부에 열중하는 위를 절대로 방해하지 않았다(부탁을 받은 그가 집에까지 가서 교과서와 참고서들을 챙겨다준 덕분에 위는 밀린 공부도 할 수 있었다).
솔직히 그를 마음에 받아들이고 나서 내심 걱정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마음에 받아들인 적도 없는 여자들의 그토록 지긋지긋한 독점욕이나 사생활 침해를 고려했을 때, 마음에 담은 그야 오죽할까 싶었다. 물론 자신이 정한 선을 그가 주제넘게 넘어온다면 가차 없이 제동을 걸 각오까지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짐작한 대로 그는 섬세하면서도 영리했다.
그는 위가 그어둔 한계선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고객으로서의 입장과 친구로서의 호의를 절대로 혼동하지 않았다. 그리고 혼동하지 않은 만큼 그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로 위를 자유롭게 내버려두었다.
일요일 오전 중의 섹스를 의식해서인지 일정한 거리를 두며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았다. 환자인 위에게 약속된 금요일 이외의 시간에 고객으로서의 서비스를 요구하지는 않겠다는 명확한 선긋기였다.
그저 환자의 보호자로서 극진하게 시중을 들어주고, 위가 부탁한 물건들을 날라다주고(물론 부탁하지 않은 물건들도 속속 날라다주었는데, 만화책들이며 잡지, 부드러운 감촉의 실내용 슬리퍼, CDP와 클래식 CD 여러 장, 그리고 위가 퇴원할 때 입을 유명 메이커의 옷가지들이었다. 만화책이나 잡지는 취미가 아니고, 슬리퍼는 병원 슬리퍼로 충분하고, 한가하게 음악을 들을 틈은 없고, 아무리 자신의 사이즈에 딱 맞는 옷이라곤 하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수십만 원대의 고가품을 덥석 받아 입을 수는 없었다. 아틀리에에 남겨져 있을 위의 옷을 가져다달라고 했지만 그는 이미 세탁소에 맡겨버려 당분간은 찾을 수 없노라 잡아뗐다. 일단 도로 무르기도 그러니 그냥 입어달라며 간절히 부탁을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다. 단 한 번뿐이라는 다짐을 단단히 하고서) 함께 밥을 먹어주고, 또 함께 잠을 자주기만 했을 뿐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경계는커녕 마치 오래 입은 옷처럼 익숙해지는 그였다.
물론 그의 영리한 처신에 더욱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고마워하는 마음과 대견하다는 생각, 무엇보다도 그에 대한 깊은 신뢰가 생겨났다. 퇴원 수속을 마치고, 한 무더기의 약 봉지와 짐들과 행복감을 부지런히 BMW로 옮기고 있는 그의 화사한 미소를 굽어보며, 위는 이제쯤은 그를 친구라고 여겨도 상관이 없겠다고 멍하니 생각하고 있었다.
“……많이 누추합니다, 보시다시피.”
둘러볼 필요도 없이 한눈에 들어올 좁은 공간이다.
그의 아틀리에에 비하면 그저 헛간 수준일 실내를,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까지 구석구석 보고 또 보는 그다.
일주일 이상을 비워둬서인지 반지하방 특유의 곰팡내까지 진동을 해서, 그에겐 더더욱 형편없는 인상으로 비칠 터였다. 물론 섬세한 기질의 그답게, 적어도 겉으론 놀라거나 충격을 받은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네. 조금 비좁기는 하겠어. 습기도 좀 그렇고.”
“……예. 좁은 건 살림을 늘리지 않으니까 그럭저럭 괜찮은데 습기는 역시 걸립니다. 부지런히 환기를 하지 않으면 여동생이 감기에 걸리곤 하죠.”
괜찮아 보인다거나, 대충 얼버무리며 입에 발린 소리를 하지 않는 것도 마음에 든다.
“……저런…….”
미간이 좁아지며 괴로운 표정을 만든다.
“그래서 가능한 한 집부터 옮길 수 있도록 열심히 저축을 했습니다. 곧 적금을 하나 타게 됩니다. 내년 봄에는 지상에 있는 방을 구할 수가 있을 것 같아요.”
정말로 괴로운 얼굴이어서 서둘러 덧붙이자 다시금 환한 미소를 터트린다. 역시 귀엽다.
“……정말 잘됐네……!”
차에서 옮겨온 짐을 방 한구석에 얌전히 늘어놓으며 그는 몇 번씩이나 ‘잘됐네’를 연발했다. 짐을 부리면서도 시선은 연신 방 안 구석구석을 맴돌고 있다. 기분이 좋은지 시종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근데 상상한 것과 많이 다르지 않아, 네 방…….”
“그렇습니까?”
“응. 굉장히 깨끗하고 질서정연하고……. 너무 잘 정리돼 있어서 무슨 사무실이나 도서관 같아.”
“그렇군요…….”
특별히 들뜨지도, 특별히 놀라거나 괴로워하지도 않는 그의 자연스러운 반응에 덩달아 기분이 부드러워져서 맞장구를 치며 조금 웃어주었다. 웃어주니 애초부터 미소를 머금고 있던 갸름한 얼굴이 아예 보름달처럼 덩실 피어난다. 그렇게나 좋을까 싶다.
과연 그를 집 안에까지 들이는 게 잘하는 짓일까 잠깐 의심이 들기는 했었다.
관계의 성질상 동생들에게나 성준이에게나 절대로 드러내선 안 되는 사람인데다, 무엇보다도 금전적으로 묶여 있으니 자신의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게 그리 현명할 것 같진 않았다. 그에게 마음을 쓰게 한다거나, 또 필요 이상으로 동정을 받는 것도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하긴, 이미 어느 부분 친구로 인정하기로 했으니 그 정도까지는 믿어주는 것이 그를 존중하는 일이 될 터였다. 어렵사리 얻게 된 그에의 신뢰를 새삼 상기해본 후 위는 결국 집 안에까지 짐을 옮겨주겠다는 그의 제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도무지 그와는 어울리지 않을 낡고 허름한 자신의 둥지에, 자연스레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그를 지켜보고 있자니 그나마 미심쩍어했던 자신이 우스울 지경이었다.
“……저기…… 그럼 짐들도 다 옮긴 거 같으니까…….”
위가 병원에서 가져온 짐들을 모두 수납하고 나자 그가 아쉬운 듯 말을 꺼낸다. 계속 있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역시 조심스러운 선긋기를 상기한 모양이었다.
“……이만 가볼게. 잠 많이 자고 약 꼬박꼬박 챙겨 먹는 것도 잊지 말고…….”
“차 드시고 가세요. 물 끓이겠습니다.”
자연스럽게 그의 말허리를 자른 자신에 스스로도 조금 놀랐다. 성준이나, 가끔씩 들르는 현준 형 외엔 손님다운 손님이라곤(엄밀히 그 둘도 가족과 다름없으니 손님이라 하기에도 그렇다) 접대를 해본 기억이 없다. 더더구나 차라니. 건강에 해롭기도 하고 자신들의 처지엔 사치에 해당할 기호품이라 인스턴트커피조차 씨가 마른 부엌이었다.
―흠, 없으면 사 오지, 뭘…….
다소 얼이 빠진 표정으로 자신을 굽어볼 뿐인 그를 남겨두고 주방으로 가서 가스레인지에 물을 올렸다.
서둘러 내쫓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자신은. 그저 싸구려 차 한 잔을 대접하는 것뿐인데도 저렇게 넋을 잃을 지경으로 기뻐하는 그다. 기뻐하는 그를 보는 것은 자신에게도 기분 좋은 일이니까…… 하고 느닷없는 자신의 변덕에 대해 애매하게 정리를 했다.
싱크대 안을 살펴보니 다행히 커피믹스 몇 개가 눈에 띄었다.
커피를 좋아하는 성준이 녀석 소행이다. 피식. 올 때마다 자기가 먹을 기호품은 살뜰히 챙기는 녀석의 쪼잔함이 오늘만은 괘씸하지 않다.
물이 끓을 동안 보일러실로 가서 연탄불을 지폈다. 불을 피울 정도로 기온이 떨어진 것은 아니지만 아직 완쾌된 것이 아닌 몸엔 주의가 필요했다.
펑 하는 폭발음을 내며 잽싸게 타들어가는 번개탄을 아궁이에 넣고 있는데 등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연기 냄새 맡으면 괴로울 텐데……. 나한테 부탁하지 그랬어……?”
걱정이 담긴 목소리다.
잠깐 고장 좀 났다고 번개탄 냄새에 치일 폐는 아니다. 그래도 걱정을 던지는 그가 싫지는 않다. 졸졸졸졸…… 콧구멍만 한 집구석에서 자신이 가는 곳마다 따라오는 그도 그저 귀엽다는 생각을 한다.
느닷없는 다도회는 회원들 간에 공통된 화제가 없어 좀 부자연스러웠지만 그럭저럭 유쾌하게 마친 셈이었다. 이사 계획에 대해 몇 마디가 오갔을 뿐으로, 줄곧 침묵으로 일관하며 애꿎은 커피만 홀짝거렸지만 평화로웠다. 지상 위로 50센티미터쯤 올라가 붙어 있는 창문을 통해 따사로이 비쳐드는 가을 햇살도 좋았고, 아주 오랜만에 마셔보는 커피의 쌉싸름한 향기도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조용히 앉아 행복한 듯 시선을 맞춰오는 그의 편안함이 좋았다(그의 편안함이라기보단 위 스스로가 느낀 편안함이겠지만).
주로 명품의 하이캐주얼 차림인 그가 오늘은 어쩐지 소박한 디자인의 코듀로이 재킷과 면바지를 걸치고 있다. 소박하다고 해도, 안에 받쳐 입은 폴로 티를 포함해서 갈색 계열의 모노톤으로 통일한 옷차림은 그의 단아하고 섬세한 이목구비를 꽤나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굳이 그렇게 멋을 부리지 않아도 될 텐데. 오늘처럼 소박하게 입고 다녀도 충분히 아름다울 텐데. 그토록 외모에 신경을 쓰는 그가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 주된 원인이 신체적 콤플렉스 때문이라는 걸 아는 만큼 더더욱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그 생각의 끝자락, 자신의 야수가 건드린 상처 가운데 하나도 바로 그 점이라는 것을 갑자기 깨닫곤 스스로를 향해 사나운 욕설을 퍼부었다. 위의 괴로운 회한 따위 알 리 없는 착한 남자는 여전히 보름달처럼 둥글둥글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다도회가 끝나자 더 이상 그를 붙잡아둘 명분도 없었고, 또 동생들을 데리러 곧바로 현준 형의 집에도 가야 했기에, 마지못해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그를 말리지 않았다.
극구 배웅을 거절하는 그를 따라 대문 밖까지 걸어 나왔다. 그의 BMW가 역시 같은 자리(공안 요원의 주차 지점)에 주차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물론 동요는커녕 더 이상 어떤 감정도 일어나지 않았다.
조금 앞서가던 그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의아한 시선으로 그의 얼굴을 살피니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단 몇 초도 안 되는 사이 안색이 백짓장처럼 창백해지더니 전신을 와들와들 떨기 시작했다. 무언가 기분 나쁜 전조와 함께 위는 그의 시선이 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틀지 않을 수 없었다.
가족들의 얼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낯이 익은 얼굴이지만 그저 타인일 뿐인 한 여자의 모습도 이어서 발견했다.
성준과 휘는 골목 끝 50∼60미터쯤 떨어진 언덕 아래서 잔뜩 등짐을 진 채 천천히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거리가 있는 탓인지 아직 위를 발견하진 못한 모양이었다. 여자는 그보다는 훨씬 앞, 5미터도 채 안 되는 전봇대 옆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가 두 달 전쯤이니까 조금 모습이 바뀔 수는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몇 킬로쯤 빠진 듯 홀쭉하게 마른데다 혈색도 창백한 여자는 위가 서비스를 해주었던 여자와 동일인이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로 많이 달라져 있었다. 늘 드레시한 원피스 종류로 멋을 내던 옷차림은 점퍼에 청바지로 변해 있었고, 귀밑까지 찰랑거리던 단발은 삭발에 가까울 정도로 짧게 커트가 되어 있었다. 언뜻 보면 소년으로 착각을 할 정도였다.
여자의 눈은 놀라지 않고 있었다.
마치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을 그저 리플레이 할 뿐이라는 듯, 표정은 태연했고 태도에도 뻔뻔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여자가 피우고 있던 담배를 땅바닥에 던지는 동작이 슬로비디오처럼 느리게 비쳤다. 여자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 설마 하는 의심이 섣부른 움직임을 자제시키고 있었다.
“……서…… 서…… 선배…….”
옆에서 쥐어짜듯 간신히 내뱉어지는 부름에 비로소 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자신도 모르게 그의 앞으로 나서며 그를 보호하는 몸짓을 취하자 문득 여자의 눈이 고양이의 그것처럼 치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물론 위가 움직이지 않았더라도 여자는 이미 작정을 하고 왔을 터였다. 그를 물어뜯고 또한 위에게도 실컷 히스테리를 부릴 심산을 하고. 위의 움직임은 그저 도화선에 불과했을 것이다.
“……이…… 이 씨발 개잡놈의 호모 새끼들이?!!!”
“……선…….”
“선배라고 부르지도 마, 이 썅 씨발 호모 잡새끼야!!! 너 같은 후배 둔 적 없써, 이 새꺄!!!
여자가 괴성에 가까운 상소리를 내지르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주희 씨!!!”
막 그의 머리채를 휘어잡으려던 여자의 팔을 움켜쥘 때에야 겨우 여자의 이름이 생각이 났다.
“장인환!!! 너!!! 이 육시랄 개잡놈아!!! 이 쥐새끼 같은 놈아!!! 너, 니가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서…… 서…… 선배…… 선…….”
“주희 씨!!!”
“너 이러려고 나한테 꼬리쳤지?!!! 응?!!! 그렇지, 이 왕재수 싸가지야!!! 이 썩은 대갈통을 콱 깨서 죽일 호모 새꺄?!!!”
“주희 씨, 그만둬요!!!”
“……혀…… 형……?!”
“니가 어떻게…… 다 알면서 어떻게……!! 작정하고 덤볐지?!!! 위야 뺏으려고 작정하고 꼬리 흔든 거지, 엉?!!! 이 드러운 암캐야?!!!”
여자에게 이런 완력이 있었나 싶을 만큼 광란을 연출하는 여자를 진정시키기는 쉽지가 않았다. 팔을 꺾고 허리를 끌어안아 그로부터 몇 걸음 떼어놓는 건 가능했지만 여자의 광기는 도무지 속수무책이었다. 황당하고, 기막히고, 머리가 아찔한 현기증이 일었다.
보고 있었다! 기겁한 휘의 얼굴이며 성준이의 얼빠진 얼굴이, 가까이 다가올 엄두도 못 내고서 위의 당혹과 여자의 악다구니를 지켜보고 있었다!!! 가족에겐 죽어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비참한 현실을 그야말로 실오라기 하나 남김없이 드러내주고 있었다!!!
언젠가, 고객 중 누군가가 이 비슷한 사고를 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아주 안 한 것은 아니었다. 최악의 경우 집에까지 찾아와서 끈질기게 매달리는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단념하도록 설득하는 데 꽤 애를 먹을 수도 있다고. 그러나 그것이 이 정도로까지 지저분하고 끈적한 수라장을 일으키리라고는, 위는 결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했던가 보았다. 고객의 기질을 좀 더 확실히 파악하고 난 다음, 말썽의 소지가 있는 종류들은 아예 미리부터 싹을 잘라내야만 했던 건지도 몰랐다. 특히 이 여자처럼 강하고 기승스러운 성격은 처음부터 고객으로 선택하지 말았어야 했던 거다!
“진정하세요, 주희 씨! 이러지 마요! 당신 이런 사람이었습니까?!!!”
“……이리 와!!! 이리 와, 장인환!!! 이 거짓말쟁이 지랄 빤스 자식아!!! 당장 이리 오지 못해?!!!”
“주희 씨!!!”
“놔!!! 놔, 이 새꺄!!! 이 드런 새꺄!!! 너도 똑같아!!! 형편없는 남창 주제에!!! 돈 몇 푼에 이년 저년한테 닥치는 대로 박아대는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목소리 까니?!!! 누가 겁낼까 봐?!!! 씹질 하는 거밖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는 허접한 남창 주제에 이 내가 그렇게 만만해?!!!”
“그만해요!!!”
“이년 저년 박다 보니 이제 싫증이 나디?!!! 그래, 이제 호모에까지 손을 대냐?!!! 그래, 호모 맛은 어떻디?!!! 나보다 나아?!!! 나보다 맛있어?!!! 보지보다 똥구멍이 더 좋디?!!! 엉?!!! 그렇게 좋아?!!! 나 버리고 호모랑 짝짜꿍 돼서 실컷 박아대니 그렇게 깨가 쏟아져?!!! 하꼬방 같은 집구석에 죽어도 못 들어가게 하더니 호모는 들어가도 되나 보지?!!! 드런 새끼!!! 니가 그랬어!!! 알고 보니 니 새끼도 호모라서 그랬어!!! 아, 씨팔!!! 이렇게 드럽고 재수 짱나는 꼬락서니가 어딨겠어?!!! 보지는 차버리고 그노무 금칠한 집구석에 똥구멍은 들여놓고 아주 신이 났구나, 이 드런 새꺄!!!”
“그만하랬지?!!!”
“그만 안 하면?!!! 그만 안 하면 어쩔 건데?!!! 니가 어쩔 건데, 이 좆대가리밖에 세울 줄 모르는 씨발 남창 놈아?!!! 하나도 안 무서워!!! 이제 나 하나도 안 무섭다구!!! 니가 없는데!!! 이제 내 게 아닌데 뭐가 무서워?!!! 더 이상 뭐가 무섭냐구?!!!”
“오주희!!!”
도무지 방법이 없었다. 조만간 실신이라도 할, 광기에 가까울 히스테리였다.
지독하게 말라서 거의 뼈마디밖에 안 느껴지는 여자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지렁이처럼 꿈틀대는 몸이 느껴졌다. 기운을 쓰기엔 거의 숨이라도 넘어갈 만큼 지쳐 있었던 모양인지, 위의 팔을 뿌리치려는 시도는 그저 허우적거리는 무의미한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새하얗게 거품이 묻어 나와 있는 여자의 입술을 틀어막았다. 경련이라도 일으킨 것처럼 꿈틀거리던 여자는, 위의 혀가 입안으로 파고들자 순식간에 온몸의 힘을 잃고 물먹은 솜처럼 늘어지기 시작했다. 그저 여자의 끔찍한 괴성을 어떻게든 틀어막으려는 의도 외엔 별 기대를 안 했건만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일거에 사라진 여자의 저항이 거짓말 같았다. 늘어진 몸에선 산 사람의 기력이라곤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넋이 나간 사람마냥 무방비하게 몸을 내맡긴 채, 여자는 위의 키스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키스를 돌려줄 정신도 없는지, 여자의 입술이며 입안이며 마치 마네킹에다 하는 것처럼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그러나 물론 그렇다고 여자가 아주 반응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여자가 몹시 좋아했던 다정하고 정열적인 키스를 거듭할수록, 끌어안은 팔에 힘을 줄수록, 여자는 제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키스를 되돌리진 않았지만 축 늘어져 있던 두 팔이 위의 가슴 쪽으로 천천히 들려 올라가며 마주 포옹을 해왔다. 히스테리에 모든 기력을 쏟아부어선지 여자의 팔에선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위의 피부에 가만히 팔을 대고 있는 형국이었다. 격하게 헐떡이던 숨길이 조금씩 가라앉으며 벌레처럼 꿈틀거리던 몸이 점차로 조용해졌다. 흥흥거리는 콧바람도 느껴졌다. 여자는 울고 있었다. 소리가 없는, 절망의 흐느낌이었다.
마침내 입술을 떼고 여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은 온통 눈물과 땀으로 가득했다. 타액 범벅인 여자의 입술이 파랗게 변색이 된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총명해 보이는 눈동자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여자의 상태를 보여주었다.
“……돌아가세요.”
“…….”
“……당신과는 이미 거래가 끝났습니다. 절대 다시 볼 일 없어요.”
“…….”
“……저를 아시죠? 어떤 짓을 하셔도 달라지진 않아요.”
“…….”
단호함이 동정보다 낫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동정해줄 마음이 생길 정도로 넉넉한 기분도 아니다. 경악한 휘나 성준이는 물론, 근처 집들의 창문 틈이나 대문 너머로, 수라장에 고정된 이웃들의 시선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소중한 가족들에게까지 씻기 힘든 수치와 상처를 입힌 여자다. 곱게 보아줄 까닭이 없지 않은가. 뭐가 사랑이란 말이냐. 결국 소유하기에 급급한 추악한 이기주의에 불과하지 않은가.
냉랭하고 무자비한 선언에 여자의 눈에 희미하게 떠돌고 있던 애잔한 빛이 서서히 빠져나갔다.
“차 가져오셨습니까?”
“…….”
“운전하실 수 있겠어요?”
“…….”
“예, 그럼 배웅은 하지 않겠습니다. 가세요. 당장.”
“…….”
미적거리는 여자의 팔을 밀어낸 후 천천히 돌려세웠다. 여전히 조금씩 떨고 있었지만 그리 비틀거리진 않았다. 재촉하듯 가볍게 등을 두드리자 여자는 비로소 천천히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기계적인 걸음걸이였다. 가끔씩 술 취한 사람처럼 다리를 휘청거렸지만 분명한 의지와 목적을 가지고서 걷고 있었다.
몇 미터쯤 떨어져 있던 휘와 성준이를 지나치고, 골목 끝,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지점까지 갔을 때 여자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수 초간 가만히 서 있었을 뿐 돌아보지는 않았다. 마침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모퉁이를 돌아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위…… 위야…….”
꺼져가는 듯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돌아보니 땀에 젖은 창백한 얼굴의 그가 시선을 맞춰오고 있었다. 두려움과 수치심과 죄책감으로 실컷 두들겨 맞은 표정.
그도 바로 돌려보내긴 해야겠는데 얼굴을 보니 조금 걱정이 되었다. 피가 한 방울도 남김없이 빠져나간 시체의 형상이었다.
“……괜찮으십니까?”
“…….”
평온한 목소리로 묻자 조금 정신을 추스르는 것 같다. 절박하게 위의 것을 붙들고 있던 시선이 슬그머니 땅바닥으로 향하더니 긴 한숨을 토해낸다.
“……미…… 미안……. 미안해, 위야……. 미안…….”
미안한 건 이쪽이다. 확실하게 정리를 하지 못하는 바람에 남은 고객에게까지 피해를 입혔다. 달리 사과를 해야 했지만 그보다는 휘와 성준이 우선이었다. 녀석들이 오죽이나 놀라고 상처를 받았을까 생각하면 그저 아득하기만 하다.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녀석들에게 이해를 구한단 말인가. 차마 녀석들 쪽에 시선을 가져갈 엄두도 나지 않는다.
“……선생님께서 왜요? 선생님 잘못이 아닙니다.”
자신 이상으로 더 황망해할 그의 팔꿈치를 조심스럽게 쥐고 BMW 쪽으로 이끌었다.
“나중에 연락 드리겠습니다. 일단은 집에 돌아가주세요.”
무언가 더 말을 보태고 싶어하는 그를 완곡한 눈길로 굽어보았다. 그저 몇 초 동안 시선을 준 것만으로 그는 위의 뜻을 단숨에 이해했다. 아아, 이렇게 온순하고 눈치 빠른 ‘친구’가 좋다. 일방적으로 자신의 감정만을 밀어붙이는 ‘애인’이 아니라.
“……운전하실 수 있죠?”
같은 질문을 다른 상냥함으로 던진다.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채근해 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전화 꼭 드리겠습니다.”
안심시키듯 덧붙이는 것으로 떠나는 그를 배웅했다. 여자의 허리처럼 미끈한 곡선을 그리는 은색의 차체가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받아 하얗게 부서지며 골목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한순간, 차를 멈춘 다음 그의 곁에 올라타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느낀다. 사랑이기도 하고 굴레이기도 한, 가족들의 상처받은 얼굴을 피해 어디로든 달아날 수만 있다면. 그저 찰나의 순간일지언정, 온갖 무거운 짐들을 훌훌 털고 쭉 뻗은 아우토반을 질주할 수 있다면……!
“……혜윤이는?”
자신처럼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있던 둘에게 마지못해 말을 건넨다.
차라리 홀가분하다고 여기자.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다 벌거벗고 자신의 어둠을 보여주자고. 더 이상 흠 없는 포장지로 틈새가 보이는 균열을 포장하지 말자고. 골치 아픈 짐짝 하나쯤은…… 그래, 기를 쓰고 움켜쥐기를 이제 그만두자고.
“혜윤이는 같이 안 왔어?”
“……장본다고 시장에 들렀다가 온대.”
담담한 어조로 채근하자 성준이 기계적으로 대꾸했다. 녀석의 목소리가 낯설다. 졸지에 뺨을 맞은 황당함을 넘어 녀석이 느끼고 있을 배신감이 메마른 어조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감기가 낫지 않아서 안에 들어가 좀 누워야겠다. 안 그래도 애들 데리러 갈 참이었는데 고맙다, 성준아.”
더 이상 이웃의 구경거리가 되고 싶지 않아 집 안으로 발길을 돌리자 다행히 녀석들도 꾸물꾸물 따라 들어온다. 넋이 빠진 듯한 그 모습에 새삼 기가 막히고 억장이 무너지는 것만 같다.
“……그…… 그 여자가 한 말이 무슨 뜻이야, 형?”
바닥에 이불을 펴는 위를 향해 휘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감정을 삭인 듯 떨리는 어조에서 분명한 의지가 읽힌다. 더 이상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을 장면을 지켜보고도, 자신이 부인만 한다면 억지로라도 믿어보고자 하는 혈육 특유의 맹목적인 의지였다.
“……무슨 뜻은. 듣고 본 그대로지.”
그러나 더 이상은 아니다. 스스로를 속인다고 해서 상처 입지 않는 것은 아니다.
“과외로 돈 번다는 건 거짓말이야. 몸을 팔고 있다. 제일 편하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는 일이니까.”
“…….”
새하얗게 질려가는 동생의 얼굴을 피하지 않고 들여다본다. 동생과 마찬가지로 고통을 견디고 있는 친구의 시선도 피하지 않는다.
“떳떳하지 못한 일이지만 할 수 없다고 생각해. 대학 들어가고 나서 다른 돈 될 만한 일이 생기면 즉시 그만둘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너무 속상해하지는 마라.”
“…….”
“되도록 모르게 하고 싶었는데 여러 가지로 미안하구나.”
“…….”
“아무튼 그렇게 알고 있어. 혜윤이한텐 무슨 일 있어도 비밀 지키도록 하고.”
“그 남자는?!”
“……?”
“그 남자한테도 그…… 그런 일들을 해주는 거야?!”
날이 선 목소리는 심하게 떨고 있었다.
“……그래.”
“호모야?!!!”
“…….”
“형 호모야?!!!”
쌍꺼풀이 없는 큼직한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새빨개진 채 분을 감추지 못하고 부들부들 떠는 얼굴은 마냥 어린 동생 그대로다. 자신의 뒤만을 졸졸 따라다니며 딱지치기나 다방구 놀이에 끼워달라고 조를 때의 코흘리개 얼굴 그대로다.
“……남자나 여자나 그저 손님일 뿐이야. 돈을 지불해주는 면에서 다르지 않다고 생각…….”
짜악!
제법 매운 손바닥이 왼쪽 뺨으로 날아들었다. 피하지 않았다.
“휘야!!!”
붙잡으려는 성준의 팔을 냅다 후려치고 동생은 방에서 뛰쳐나갔다. 역시 말리지 않았다.
얼마나 아플지 안다. 자신 역시 그 아픔을 알고 있다. 늦은 밤, 다른 남자의 코롱 냄새를 가득 묻히고 들어오는 엄마를 마중할 때마다, 위는 가슴 한구석이 휑하니 비는 듯한 막막함을 곱씹어야만 했었다.
“……따라가 봐. 부탁한다, 성준아.”
자신보다는 성준이 더 위로가 될 것이다.
“손대지 마, 이 씹새꺄!!!”
무심코 녀석의 팔을 쥐었다가 뒤로 힘껏 떠밀렸다. 간신히 비틀거리는 몸의 중심을 잡고 보니, 녀석 역시 잰걸음으로 방을 나가고 있었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고 있는 녀석의 창백한 프로필이 설핏 보였다. 막 문턱을 넘어가는 녀석의 눈가는 불그스름한 격정의 자취로 가득했다.
쾅 하고 닫히는 문소리가 안면을 강타하는 철퇴처럼 느껴졌다. 빠르게 멀어지는 녀석의 발소리는 이미 쓰러진 몸뚱이에 확인 사살을 하듯 무수히 떨어지는 발길질 같았다.
가족이 떠난 텅 빈 방 안엔 피로와 허탈감만이 남았다.
위는 옷을 벗지도 않은 채 그대로 바닥에 무너져 죽음 같은 잠에 빠졌다.
잠만이, 자신에게 허락된 유일한 자유였다.
휘는 울어서 퉁퉁 부은 눈을 하고 한밤중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돌아오긴 했지만, 위는 동생과의 사이에 확실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신뢰가 깊었던 만큼 반작용은 그 배로 타격을 입혔을 것이다. 묵비권을 행사하기로 작정을 한 건지, 입을 조개처럼 다문 채 기를 쓰고 위를 피했다(하긴 제가 피해봐야 열 평도 채 안 될 공간에서 어디로 피하겠는가마는). 울컥한 심사로 가출이라도 하지 않을까 내심 조마조마했지만 다행히 녀석은 그 정도로까지 과격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당분간은 내버려두기로 했다. 어차피 충격을 삭일 시간이 필요하리라.
영문도 모르는 혜윤이는 집 안에 감도는 살벌한 기운에 어쩔 줄 몰라 하며 하루 종일 오빠들 눈치만 살폈다. 불안해하는 혜윤이도 다독여야 했지만 특별히 뾰족한 변명거리가 생각나지 않았다. 역시 시간이 해결해주기만을 빌어야 할 터였다.
퇴원한 다음 날부터 등교를 하기 시작했다.
위의 사정을 알고 있는 담임은 경찰에 불려갔었다는 한마디에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을 뿐 무단결석에 대한 어떤 추궁도 하지 않았다.
폐에 남은 염증기를 박멸하고 빼먹은 수업을 따라가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는 사이, 시간은 어느새 한 주가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비로소 여유를 되찾아 2주 동안 연락을 못 했던 여자 고객 둘에게 전화를 넣은 것도 퇴원한 지 일주일째가 되던 목요일 저녁의 일이었다.
짐작했던 이상으로 여자들은 몹시 화를 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고 아무리 변명을 해도 그저 ‘무책임하고 버르장머리 없는 남창’에 대한 성토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10분 넘게 수화기를 붙들고 여자들의 쨍알거리는 하이톤을 견디고 있는 사이, 말할 수 없이 짜증이 일었다.
다른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속 좁고 이기적일 뿐인 고객이 아니라, 온순하고 배려심 깊은 ‘친구’의 목소리가.
그제야 전화를 주겠다고 했던 자신의 약속이 생각났다. 그 역시 오주희에게서 닦달을 당하고 마음 편한 상태는 아닐 거라는 데에도 생각이 미쳤다. 잊고 있던 걱정이 불쑥 전신을 사로잡았다. 당장이라도 만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애초에 그와 약속이 되어 있는 금요일은 바로 내일이었지만 이번 주까지는 일을 쉴 작정이었다. 하지만 원래대로 그를 안는다고 해도 그리 피곤할 것 같지는 않았다. 폐렴은 이미 완전히 나은 뒤였다.
뭐라고 계속 쫑알대는 여자의 전화를 대충 씹고 끊어버렸다. 나중에 걸었을 때도 같은 패턴이면 계약을 파기하리라고 앙심을 품었다.
아틀리에의 전화번호를 누르는 손이 조용한 기대로 떨린다.
어느새, 남자의 아틀리에는 자신에게 있어 ‘솔직한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돼버린 듯하다. 아무것도 포장하지 않고, 아무것도 근심하지 않고, 그저 자연스럽게 숨 쉴 수 있는 편안한 공간. 어깨에 지워진 온갖 무거운 짐들을 잠시 내려놓고 한숨 돌릴 수 있는 자유의 공간.
[……위……? 위위……?!]
수화기를 통해 넘어오는 꽉 잠긴 쇳소리에 위는 문득 미간을 좁혔다.
“……감기 걸리신 겁니까?”
[……어, 아아, 그냥 조금……. 하하, 위 맞구나…… 꿈이 아니네……?]
“……괜찮으세요? 목소리가 아주 안 좋습니다. 치료는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 톤이 올라간다.
[하하, 괜찮아. 벌써 걸린 지 꽤 됐어. 병원도 갔다 오고 약도 먹고 있으니까 금방 낫겠지 뭐……. 너한테 옮았나 봐. 헤헤, 나한테 옮겨줬으니까 넌 다 나았겠구나. 목소리도 말짱한걸, 이제……?]
“……지금 가 뵙겠습니다.”
제집이라도 되는 것처럼 당연하게 말이 나온다. 정말로 괜찮은지 확인해봐야만 한다. 자신처럼 폐렴이 될지도 모르니까.
[어? 온다구? 여…… 여기? 지금?!]
“예. 어차피 내일 찾아뵐 예정이었으니까 하루를 당겨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마침 수업이 일찍 끝났습니다. 학교에서 바로 갈 거니까 3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습니다.”
[어…… 하…… 하지만……. 오…… 오늘은…….]
당황을 드러내며 말끝을 흐리는 그의 태도에 문득 다른 약속이 있는 건가 싶어, 강압적으로 밀어붙였던 어조를 후회했다.
“다른 약속이 있으시면 할 수 없고요.”
[어?! 아…… 아냐, 그런 거……! 그…… 그냥…… 집이 엉망이라서……. 며칠 동안 청소도 못 해서 돼지우리가 따로 없는데…….]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부끄러운 기색이 역력하면서도 술술 부는 그가 몹시 귀엽다.
“곧 출발하겠습니다.”
통화를 계속 했다간 오지 말라고 내도록 고집을 부릴 것 같아 단호한 어조로 덧붙이고 전화를 끊었다. 누가 뭐라 하든 가고 싶다, 지금 당장. 당장…….
전화박스 옆에 놓아두었던 책 배낭을 등에 지고 위는 버스 정류장 쪽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자신도 모르게 뜀박질을 하게 된 통에 막 도착한 버스에 올라탔을 때에는 숨이 턱까지 차 있었다. 가쁜 호흡도, 하교 시간이라 발 디딜 틈 없이 만원인 버스도 마냥 상쾌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