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1990년 3월. 문위(文偉)
[……저런! 이사하는 줄 알았으면 가서 도와주는 건데! 왜 미리 얘기 안 했어?]
“짐도 별로 없는걸요. 그냥 리어카에다 몇 번 실어 나르면 됩니다. 한 동네니까 그리 멀지도 않고요.”
[리어카라고?! 이삿짐센터 안 불렀니?!]
“골목 몇 개만 지나면 되는데 용달차 부르기도 뭐해서요. 걱정 마세요, 형. 한두 시간 움직이면 충분할 겁니다.”
[그래도…… 약속만 아니라면 나라도 가보는 건데 말이다. 참, 나…… 이건 성준이 녀석까지 영화 본다고 나가버렸으니…… 그놈한테도 연락 안 한 거냐?]
걱정과 더불어 어딘가 의혹이 서린 듯한 현준 형의 다감한 어조에 위는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나마 전화상이라 자연스레 어두워진 표정을 들키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성준과의 관계가 삐걱거리고 있는 것을 현준 형은 아직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벌써 몇 달째 자신의 반지하 셋방엔 발길을 끊고 있는 성준이었다. 방문은커녕 전화조차도 일절 하지 않고 있었다. 이유도 알고 있고, 또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위는 섭섭하게 여기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자신만큼 녀석도 상처를 입었을 터였다. 그저 고통스러운 시간이 재빨리 지나가, 녀석이 충격을 소화한 후 다시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주길 비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영영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다면 그건 그것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휘와는 달리 성준은 액면 그대로 피의 연결은 아니었다. 서로간의 신뢰와 애정이 사라진다면 그 즉시로 가족의 유대는 끊기는 셈이었다. 안타깝긴 해도 자신의 일방적인 움직임만으로 관계 회복을 도모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네. 정말 별일 아닌걸요. 아무튼 휘 들어오면 주소 알려주세요, 형. 같은 동네니까 쉽게 찾아올 수 있을 거예요. 일단 짐 정리 끝내고 나서 다시 전화 드릴게요.”
[……그래…… 알려주긴 하겠다만…… 이사한다는데도 혼자 놀러 나가버리다니 원……. 정말 녀석을 계속 그렇게 놔둬도 되는 거냐? 아무리 사춘기라지만…… 내 말도 도통 들으려고 하질 않아. 그나마 요즘엔 눈치가 보여서 잔소리도 못 하겠다니까. 일단 우리 집에나마 붙어 있어주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싶으니 말이다.]
기가 막힌 듯 혀를 차며 말문을 닫는 현준 형에게 위 또한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묵직한 바윗돌이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이 전신을 사로잡은 까닭이었다.
한 달 전쯤, 내내 현준 형네서 지내다가 잠깐 얼굴을 비친 휘에게 위는 조심스레 이사 소식을 전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이사 가는 것은 하나도 기쁘지 않다는 사나운 대꾸가 돌아온 것은 물론이었다. 맞상대를 하면 그저 녀석을 패거나 서로를 상처 내는 언쟁으로 이어질 것이 뻔했으므로 위는 그길로 대화를 중단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랬다. 사실 성준보다도 더한 문제는 휘였다. 성준이야 상처는 받았을지언정 자기 통제를 잃을 만큼 약한 녀석이 아니었다. 그러나 역시 휘는 아직 어려서인지 성준의 반만큼도 충격을 소화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위의 비밀을 처음 알게 된 이래 다섯 달 남짓, 휘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엇나가기 시작했다. 성적은 나날이 곤두박질을 치고, 차츰차츰 귀가 시각이 늦어지더니, 최근 들어서는 아예 현준의 집이나 제 친구들 집을 번갈아 전전하며 외박을 일삼고 있었다.
간곡히 타일러도 보고, 뼈가 부러지지 않는 범위 내에서 녀석을 흠씬 두들겨 패보기도 했지만, 그 어떤 것도 먹혀들지가 않았다. 신음 소리 한번 내지 않고 고스란히 자신의 잔소리와 매질을 견딜 뿐, 녀석은 심하게 닦달을 당한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가출 아닌 가출로 위의 통제력에 반기를 들곤 했다. 그나마 현준의 집이나 자신이 알고 있는, 녀석의 몇몇 친구들 집을 전전하는 것은 양반이었고, 새로 사귀기 시작한 양아치 놈들의 아지트에서 며칠씩 지내다 들어오는 것도 다반사가 되었다. 자신의 매질이 심해질수록 녀석의 무단결석과 외박 일수도 여봐란 듯이 늘어가기만 했다. 모르는 체 입을 다물면 그나마 며칠은 꾸준히 모범생 흉내를 내주었으니 결국 자신이 손을 드는 수밖엔 달리 도리가 없었다.
이미 형이자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상실한 자신이었다. 물리적인 힘만으로 녀석을 통제할 수 있는 시점은 지나버렸다는 것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만 했다. 결국 성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녀석이 상처를 극복하고 좀 더 현실을 직시할 수 있게끔 철이 들길 기다리는 외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아직도 내게 이유를 말해줄 수 없니, 위야?]
“…….”
[……녀석이 그렇게나 갑작스레 변해버린 게 그냥 단순한 반항만은 아닌 거 같아서 그래. 무슨 심각한 고민이 있는 것도 같고…… 많이 아파 보이거든. 일단 원인이라도 알아야 녀석을 제대로 타이를 수 있을 것 아니냐.]
“…….”
[이제 중 3이고…… 고등학교 들어가면 더 걷잡을 수 없어질 텐데 이렇게 계속 질이 안 좋은 친구들과 어울리게 하는 건…….]
“너무 걱정 마세요, 형. 그렇게까지 어리석은 녀석은 아니거든요. 머잖아 곧 정신을 차릴 겁니다.”
현준 형의 근심 어린 말꼬리를 자르며 짐짓 호기 있게 대꾸하는 위의 얼굴은, 그러나 어두웠다. 말 그대로 확신을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심지가 굳은 강이 형에게조차 엄마의 매춘 사실은 견디기 힘든 상처가 됐었다. 그나마 강이 형이나 됐으니 혼돈의 시기를 금방 빠져나올 수 있었겠지만, 휘는 강이 형의 반만큼도 강하지 못했다. 현명하지도 않았다. 녀석의 저 고통스러운 방황이 언제 끝이 날지는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글쎄, 그렇게 된다면 다행이지만…….]
“……그때까지만 녀석 좀 부탁드릴게요, 형. 염치없다는 거 알지만 형밖에 부탁드릴 사람이 없어서요. 그래도 형이랑 성준이가 있으니까 녀석이 그나마도 견디고 있는 거거든요.”
[염치없다니, 그런 말 마, 위야. 나도 내 코가 석자라 너희들한테 별 힘이 못 되는 게 한인걸. 아무튼 이사 끝내고는 한번 진지하게 얘기 좀 해보자꾸나.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는 나도 알아야 하지 않겠니?]
“……예. 짐 옮겨야 하니 일단 끊을게요, 형. 전화번호는 그대로니까 무슨 일 있으면 전화 주시구요. 오늘 중으로 개통시켜준다고 했거든요.”
[그래. 그럼 나중에 다시 통화하자. 짬 내서 며칠 안으로 한번 들러보마.]
“예, 현준 형.”
뭔가 더 말을 하고 싶어하는 기색의 현준 형을 모르는 체, 위는 서둘러 통화를 끝냈다. 휘나 성준이 고자질을 하지 않는 한, 현준 형에게 비밀을 털어놓을 생각 따윈 눈곱만큼도 없는 자신이었다.
목장갑을 다시 낀 후, 위는 마지막 짐인 전화기를 벽에서 분리해 다른 잡동사니들로 가득 들어찬 종이 박스에 마저 담았다.
시계를 살피니 아침 9시가 막 넘어가고 있었다. 슬슬 움직여야만 할 시각이었다. 주말인 어제 저녁부터 부지런히 움직인 터라 더 이상 꾸릴 이삿짐은 남아 있지 않았다. 아침 일찍 공공 요금을 계산해 주인에게 넘겼고 전세금도 돌려받았으니 그야말로 새집으로 짐만 옮기면 되는 일이었다. 물론 현준 형에게 호언한 대로 한두 시간 움직이는 것으로 충분할 만큼 만만한 일거리는 아니었다. 혜윤이는 거의 힘을 못 쓰고 그나마 약간 기대를 가졌던 휘가 보기 좋게 외박을 해버려, 짐을 꾸리는 것도, 옮기는 것도 고스란히 자신만의 책임으로 떨어졌다. 초라해 보일 정도로 소박하다지만 명색이 세 식구의 살림살이인지라 혼자서 해치우기엔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다. 오후까지 리어카를 끌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준 오빠네 전화해봤어? 작은오빠 정말 안 온데?”
제 방의 짐을 꾸리느라 땀과 먼지투성이가 된 혜윤이가 안방으로 들어왔다. 발갛게 상기된 얼굴은 위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걱정으로 금세 어두워졌다.
“……정말 너무해! 작은오빠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미워 죽겠어, 씨…… 둘이서 이거 언제 다 옮기라구…….”
짐짓 신경질적으로 성토를 해보지만 위의 눈치를 살피는 혜윤이의 얼굴은 화가 났다기보단 그저 근심만이 내비칠 뿐이었다. 몇 달에 걸친 두 오빠의 신경전으로 착하고 겁 많은 여동생은 이미 많이 지쳐 있는 상태였다. 누구 편을 드는 것보다는 그저 방관을 하는 편이 훨씬 스스로의 정신 건강에 유익하다는 것을 혜윤이는 본능으로 깨닫고 있었다. 점점 양아치가 되어가는 휘의 위악적인 행동들에 화를 내거나 걱정은 할지언정, 그것이 혈육으로서의 깊은 애정에까지 타격을 입히지는 않고 있었다. 물론 위로서도 차라리 다행이라 여기고 있었다. 자신은 그렇다 쳐도 혜윤이와의 사이까지 틀어진다면 휘는 더더욱 힘들어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조금씩 천천히 옮기면 돼. 장롱하고 냉장고만 빼면 그렇게 힘들 것도 없으니까. 짐은 빠짐없이 잘 쌌어?”
“응.”
“그래, 그럼 네 짐이랑 부엌살림부터 옮기자. 책상 같은 무거운 건 내가 옮길 테니까 나머지는 다 리어카에 갖다 실어.”
“응, 오빠.”
자신의 담담한 명령에 금세 밝은 표정이 된 혜윤이가 춤을 추는 듯한 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새집으로, 그것도 반지하가 아닌 지상으로 이사를 간다는 기쁨과 흥분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몸짓이었다. 휘의 부재도, 단둘이 이삿짐을 옮겨야 한다는 부담감도 이사가 주는 기쁨을 채 다 빼앗진 못한 모양이었다.
물론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2년 동안 악착같이 모아 마련한 전세금이었다. 이제 더 이상 감기에 걸려 고생하는 혜윤이를 보지 않아도 된다. 새로 이사 갈 집도 이곳과 마찬가지로 평수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햇빛이 잘 드는 남향에 수세식 화장실이 딸린 1층 단독 주택이었다. 가난한 삼남매의 처지로선 가히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궁궐인 셈이었다. 하루 종일 중노동을 하는 것 따위 이사의 기쁨에 비하면 하찮기 짝이 없는 수고였다.
“오빠! 오빠, 나와 봐!!! 선생님 오셨다?!!!”
서랍을 고정하기 위해 장롱 모서리마다 테이프를 붙이고 있는데 밖에서 혜윤이의 환호성이 들렸다.
“장 선생님 오셨다니까!!! 나와봐, 오빠!!!”
“……밖에 짐 실은 리어카가 있던데, 혜윤아…… 이삿짐센터 안 부른 거니?”
부드러우면서도 조심스러운 그의 목소리가 귓전으로 파고드는 순간, 묘한 설렘과 함께 따스한 기운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이렇게 찾아올 것을 염려해 부러 알리지 않았었건만, 마음이 맞는 온순한 친구와의 조우는 역시 기쁨일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혜윤이를 통해 이사 소식을 전해들은 모양이었다.
“네, 선생님. 오빠가 이사비 넘 비싸다고 그냥 우리끼리 하재요. 아, 신발 그냥 신고 들어오세요. 지금 옮기고 있는 중이거든요.”
“어? 아, 그렇구나…… 포장이사 아닌 줄 알았으면 내 친구들이라도 몇 부르는 건데…… 다리가 이래서 난 별로 도움이 안 될 텐데…….”
“헤헤, 짐이라도 지켜주세요. 리어카로 여러 번 왕복해야 하는데 그때마다 열쇠로 문 잠그는 것도 귀찮거든요.”
“아냐, 짐은 혜윤이가 지키는 게 좋겠다. 그래도 너보다는 내가 더 나을걸? 이리 줘봐. 그거 내가 옮기마.”
“어어∼∼이거 많이 무거운데요…….”
“……괜찮아, 줘봐…….”
“그럼 같이 들어요, 선생님.”
“별로 안 무겁네, 뭘. 거봐라, 그래도 내가 더 힘이 세지? 혼자 들 수 있으니까 이리 줘.”
“에이, 지금 같이 들어서 가볍게 느껴지는 거라니까요!”
방문 앞에 서서 건너다보니 그와 혜윤이가 제법 커다란 박스 하나를 놓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평소와 다른 소박한 블루진에 티셔츠와 점퍼를 간단히 걸친 차림새를 보니 제법 힘을 쓸 각오를 단단히 하고 온 모양이었다. 혜윤이의 팔에서 짐 상자를 빼앗고 있는 두 손에는 손바닥 부분이 붉게 코팅된 그럴싸한 목장갑까지 끼워져 있었다. 다리도 다리지만, 마르고 가냘픈 몸집이며 소녀처럼 화사한 얼굴 어디에서도 일꾼다운 박력이라곤 느껴지지가 않아서 위는 속으로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분명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곱게 자란 부잣집 도련님이었다. 방해나 안 되면 고작이겠지만, 그러나 이렇게 유쾌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위는 다정한 친구의 느닷없는 기습이 반갑기 그지없었다. 성준과 휘가 없는 쓸쓸한 빈자리가 따스한 기운으로 조용히 채워지고 있었다.
“……오셨어요?”
마음과는 달리 무뚝뚝하게 뱉어지는 인사말에, 현관 쪽을 향해 있던 그의 시선이 단숨에 위의 얼굴로 떨어졌다. 혜윤이를 의식해 한껏 억제돼 있긴 하지만, 시선이 부딪치자마자 화사하게 피어나는 미소엔 채 숨기지 못한 애정과 기쁨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가무잡잡한 안색은 생기가 넘치고, 웃음을 참지 못해 움찔거리는 표정은 몹시도 귀여웠다. 고작 이틀 만에 보는 얼굴인데도 무척 오랜만에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신선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남창으로서 만족스러운 섹스를 서비스 해야만 한다는 부담감 없이 순수하게 친구로 있을 수 있는 소중한 틈새(의 만남)이기 때문일 터였다.
“……그래…… 고생하는구나. 리어카로 옮기는 줄 알았으면 친구들 한 다스는 끌고 오는 건데 말이지…….”
어눌한 어조로 대꾸를 흘리더니 혜윤이로부터 빼앗은 박스를 안아 들곤 허둥지둥 현관 밖으로 빠져나가는 그다.
보일 듯 말 듯 붉어진 낯빛에도 불구하고 금세 표정을 굳히며 노인처럼 점잔을 빼는 그에게, 위는 웃음을 삼키지 않을 수 없었다. 혜윤이에게 관계를 눈치채일까 겁내는 쪽은 위 자신보다도 오히려 그가 더한 형편이었다. 어수룩한 연기력에 꽤나 힘들어하면서도, 그는 혜윤이까지 낀 이런 틈새 만남을 결코 그만두려고 하지 않았다.
석 달 전쯤, 자신을 집으로 바래다주는 길에 우연찮게 혜윤이와 마주친 이후, 그는 절친한 학교 선배이자 옛 교생의 자격으로 틈틈이 자신의 집을 드나들고 있었다. 휘의 반항과 또 그 이유도 알고 있는 만큼, 휘가 집에 붙어 있는 날이나 시간대는 철저하게 피하면서 혜윤이에게 정을 쏟고 있었다.
처음엔 혜윤이가 혹시라도 눈치를 챌까 싶어 그의 허물없는 접근에 난색을 표했던 위였지만, 방문이 거듭될수록 걱정은 기우에 불과하다는 사실만 입증해주었다. 혜윤이는 아름다운 용모에다 온화하고 상냥한 성품인 그를 좋아했고, 그 역시 비슷한 성품의 혜윤이를 무척이나 귀여워하고 있었다. 형제간의 정이 없이 자란 환경도(이복형제들이 있다 해도 남보다 못한 멸시를 받는 것이 고작이었으니), 의외로 서로 닮은꼴인 온순한 기질도 그로 하여금 혜윤이에게 점점 더 애정을 쏟게끔 했을 것이다.
어느새 친오누이 이상으로 허물이 없어진 그와 혜윤이를 지켜보며, 위는 자신 또한 이런 틈새 만남을 은근히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고객과 남창으로서가 아닌 친구로서 그를 부담 없이 대할 수 있는데다, 침대 밖에서의 색다른 면모를 발견하는 즐거움이 꽤 쏠쏠했다. 침대 밖에서의 그를 알아가면 갈수록 위는 점점 더 그가 좋아졌고, 또 우정도 나날이 깊어져만 갔다. 가끔씩, 저 우정이라는 이름의 플라토닉한 감정이 섹스에 지장을 주기도 했지만(솔직히, 깊은 우정을 느끼는 남자를 범해야만 한다는 현실을 자각할 때마다 씁쓸한 비애감을 떨칠 수 없었다) 그리 신경이 쓰일 정도는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그와의 만남은 현재의 자신에게 있어 유일한 위안이자 휴식처가 돼주었다.
“밥부터 시켜 먹자, 오빠! 응?! 배고파서 돌아가시겠다∼∼∼!”
마당에 부려놓았던 짐들을 겨우 다 집 안으로 끌어들이고 나자 혜윤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칭얼거렸다. 과연 시계를 보니 오후 2시 반, 어느새 점심때가 훨씬 지나 있었다. 제법 버거운 육체노동에 온 힘을 쏟고 있던 터라 미처 허기를 자각할 틈도 없었다.
“그래, 뭐 먹을까? 짜장면 먹을래?”
“애걔, 겨우 짜장면이야? 새집으로 이사한 첫날인데…… 선생님도 계시구…….”
아귀가 맞지 않는 장롱에 받침대를 끼워 넣던 일에서 여전히 손을 떼지 않은 채 건성으로 대꾸하자, 혜윤이가 애교 섞인 불만을 토했다. 그제야 비로소 방 안 한구석에 엉거주춤 선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던 그에게 신경이 가 닿았다.
땀과 먼지투성이가 된 채 숨을 고르고 있던 그의 얼굴은 자신이 시선을 주자 또 조금 빨개졌다. 관계를 맺은 지 8개월이 가까워오건만 여전히 자신의 시선을 받을 때마다 긴장을 하는 그가 어이가 없기도 하고 또 어쩔 수 없이 귀엽다는 생각을 한다. 지나치리만큼 섬세한데다 순진하기 짝이 없는 남자가 아닐 수 없다. 처음 그를 봤을 때, 닳고 닳은 날라리로 단정했던 자신의 둔감함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였다.
시종 화사한 웃음기가 얼굴에서 떠나지 않고 있는 그는 몹시 지친 기색이었다. 대여섯 번에 걸친 리어카 왕복에 종종걸음으로 따라붙으며 제 딴에는 열심히 밀어준데다(실은 힘을 보태주기보단 되레 걸리적거릴 뿐이었지만) 자잘한 잡동사니들도 부지런히 날라다주었으니 게으른 그로선 한계까지 체력을 쓴 셈이었다. 가슴 뭉클한 정감이 따스하게 배 속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위는 부드러운 미소를 답례로 보내주었다.
“그럼 탕수육도 하나 더 시키든지. 선생님도 짜장면 괜찮으세요?”
“아, 난 아무거라도 좋아.”
기운찬 대꾸와는 달리 자신의 미소에 동요를 감추지 못하고 시선을 피하는 그다. 뺨 주변을 흐릿하게 물들이고 있던 홍조가 목덜미와 귓불까지 새빨갛게 번져갔다. 늘 그렇긴 하지만 오늘의 그는 유달리 더 긴장을 하고 있는 눈치였다. 힐끔거리며 부지런히 혜윤이의 눈치를 살피는 모양이 꼭 예민해진 도둑고양이와 한가지였다.
“아까 본 슈퍼마켓에 공중전화 있던데 가서 주문하고 와라, 혜윤아. 난 짬뽕 곱빼기다.”
아직 개통이 안 된 전화기를 힐끗 바라보다가 기억을 더듬으며 위도 주문을 했다. 짬뽕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고 나니 잊고 있던 허기가 밀물처럼 다가들었다.
“응, 그럼 짜장면 두 개랑 짬뽕 곱빼기 하나, 그리고 탕수육 하나지?”
“그래.”
“알았어! 갔다 올게, 오빠!”
총알처럼 튀어나가는 혜윤이에게 잠깐 시선을 주었다가 여전히 얼굴을 붉힌 채 초조한 듯 손부채질을 하고 있던 그에게로 다시 시선을 보냈다.
“이렇게 힘쓰는 일은 처음 해보시죠? 얼굴이 빨개요, 선생님.”
“……어, 아…… 별로…….”
일 때문에 빨개진 것이 아니란 것을 모르지 않는다. 다만 그를 조금 놀려주고픈 짓궂은 기분이 든 것뿐이었다.
“더우세요?”
몇 발짝을 걸어 그의 코앞으로 다가가자 아니나 다를까, 움찔 몸을 떨며 눈을 휘둥그렇게 뜨는 그다. 콧마루에 땀이 조금 배어 있지만 노동으로 인한 열기는 거의 가라앉았다.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부드러운 머릿결 틈으로 손을 밀어 넣어 빗질을 하듯 쓰다듬었다. 쑥스러운지 기다란 속눈썹이 촘촘하게 박힌 눈꺼풀이 내리깔리며 눈 주위로 섬세한 음영이 진다. 자신과는 달리 수염 자국도 거의 없어서 선이 고운 갸름한 얼굴은 막 성장을 시작한 소년처럼 앳돼 보였다. 무방비하게 벌어진 입술에 문득 짧은 키스를 하고 싶어져서 가까이 얼굴을 기울이자, 어린아이처럼 새까만 눈동자가 보름달처럼 휘둥그레진다.
“……아…… 안 돼…….”
울상이 돼서는 다급하게 두 손으로 입가를 가리는 몸짓도 귀엽기 짝이 없다.
“……혜…… 혜윤이 들어올 텐데…….”
“아직 그만한 시간 아닙니다.”
“……그…… 그래도 안 돼…… 지…… 지금 키스하게 되면…….”
“……?”
“……너…… 땀 냄새도…… 너무 섹시하고…… 일하는 모습이 너무너무 멋있어서…… 안 그래도 자꾸 흥분되는데…….”
“…….”
“……오늘은 정말 그냥 도와주러 온 거니까 발정하고 싶지 않아, 절대로…….”
촉촉한 물기마저 감도는 붉어진 눈시울은 그의 솔직하면서도 사랑스러운 고백이 가감 없는 진실임을 웅변해주고 있었다. 귀여운 나머지 어떡해도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가벼운 욕구에 불과했던 키스가 단숨에 진심의 그것이 돼버리는 순간이었다. 물론 그의 절박한 애원을 무시하고 밀어붙이기엔 자신은 그를 너무 좋아하고 있었다.
“……귀여워요.”
“?!!!”
결사적으로 입가를 틀어막고 있는 그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위는 숨찬 느낌으로 진심을 흘렸다. 휘둥그레진 그의 맑은 눈동자 속에 비치고 있는 자신의 웃는 얼굴은 많이 낯설게 보였다.
“……선생님은 정말 귀여워요.”
“!!!!!!!!!”
무뚝뚝한 말투는 천성이라, 아마도 놀리는 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전신은 더 이상 빨개질 수 없을 만큼 새빨갛게 물들었고, 얼굴 또한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이상야릇하게 일그러졌다.
실수를 하고 말았다는 자각은 그 직후에 왔다. 이래서야 키스보다 더한 자극이 아닌가. 기쁨과 쑥스러움과 흥분으로 거의 패닉 상태에 빠진 듯한 그에게 애처로움을 느끼며 위는 경솔했던 자신의 언급을 후회했다. 사소한 칭찬(남자에게 귀엽다는 발언이 칭찬이 될지는 의문이지만)일지언정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이면 무조건 기뻐 어쩔 줄 모르는 그이다. 그의 마음을 받아줄 게 아니라면 설령 진심이라 할지라도 오해를 살 만한 발언은 삼가는 것이 마땅했다.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큰 만큼 더더욱 신중하게 처신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었다.
“……형광등을 달아야 하는데 공구 상자 좀 가져다주시겠어요? 싱크대 위에 있을 겁니다.”
재빨리 웃음을 거두고 덤덤하게 부탁하자 그가 홀린 듯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시선을 주었다간 그의 동요가 더 심해질 것이 뻔했으므로 위는 장롱의 아귀를 맞추는 일에 다시 달라붙었다.
조금 비틀거리며 안방을 나간 그는, 그러나 한참이 지난 후에야 부탁한 물건을 들고 되돌아왔다. 흥분은 그럭저럭 가라앉힌 듯했지만 얼굴엔 여전히 붉은 기운이 떠돌았다. 촉촉하게 젖은 눈시울도, 부드러운 굴곡을 이루는 아름다운 입술도 여전히 키스를 하고 싶은 기분을 느끼게 해서, 위는 되도록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다행히 곧 혜윤이가 들이닥쳤고 음식마저 배달이 되자, 그와의 사이에 감돌던 희미한 성적 긴장감은 깨끗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별로 중국요리를 좋아하진 않지만 중노동으로 주린 배에 그 어떤 음식인들 진수성찬이 아니겠는가. 10여 분 만에 게 눈 감추듯 음식 접시를 비운 후 다시 짐 정리에 달라붙은 지 두어 시간 남짓, 집 안은 당일 이사한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말끔히 제 모습을 찾았다. 부지런히 움직인 탓도 있지만 짐을 꾸릴 때부터 체계적으로 계획을 세워두었던 것이 빠른 정리의 원인이었다.
짐을 부리느라 더러워진 구석구석에 걸레질까지 마치고, 한 무더기쯤 마당에 모인 쓰레기를 봉지에 담아 대문 밖에 내놓고 나니 시계는 5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온몸이 망치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노곤했지만 기분은 아침과 다름없이 상쾌했다. 별 사고 없이 이사를 마친 것도, 정리를 일찍 끝낼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뿌듯한 만족감을 주었다.
마당 청소를 마치고 안으로 들어오니, 녹초가 된 혜윤이와 그가 방 안에 널브러지듯 누워 있었다. 피로의 기색이 역력했지만 킬킬거리며 수다를 떨고 있는 걸로 보아 그리 걱정할 정도는 아닌 모양이었다. 새집이 좋은 나머지 약간 흥분 상태인 혜윤이도, 내내 화사한 웃음기가 떠나지 않는 그도 가슴이 뭉클할 지경으로 애틋하게 생각되었다.
꽤 오랫동안 기쁨다운 기쁨을 느껴보지 못한 자신이었다. 여전히 갈 길은 멀고, 어깨에 둘러메어진 짐도 무겁기 짝이 없었지만, 그래도 오늘만큼은 기념할 만한 이정표가 될 날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어렴풋하게나마 출구가 보이고 있었다.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분명 언젠가는 연희동의 옛집을 되찾을 날이 올 터였다. 분명 더 이상 세상을 두려워하는 일 없이, 더 이상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이별을 겁내는 일 없이, 자유롭게 인생이라는 바다를 헤엄치게 되는 날이 올 터였다.
방 안으로 들어서는 자신을 발견하자마자 수줍은 표정으로 미적미적 몸을 일으켜 세우는 그를 못 본 체 TV 앞으로 다가가 안테나선을 연결했다. 이사도 끝낸 마당에 피곤에 전 그를 더 이상 붙들어둘 명분은 없었지만, 그가 별로 돌아가고 싶은 눈치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 역시 서둘러 그를 보내고 싶지가 않았다. 가능하다면 저녁 식사까지는 함께 하고 싶었다. 솔직히 그가 불편해하지만 않는다면 하룻밤쯤은 재워 보내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성준과 한가지였다. 아니, 실은 성준보다 더 아끼고 있는지도 몰랐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그가 생판 모르는 남이었다는 사실이 마냥 새삼스럽기만 했다.
“오빠, 파티 하자!”
만족스럽게 포식한 고양이처럼 방 안을 이리저리 뒹굴고 있던 혜윤이가 느닷없이 외쳤다.
“파티?”
“어, 파티! 이사했잖아! 이사 기념 파티!”
“파티가 아니고 집들이지, 혜윤아.”
환한 웃음을 매달고 그가 거든다. 살짝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있지만 이미 혜윤이와 완벽하게 동조를 하고 있는 그의 천진스러운 심사가 손에 잡힐 듯했다.
“헤헤, 그런가? 암튼 하자, 오빠, 응? 응? 가서 케이크랑 샴페인 사 올게, 응?”
“피곤하지도 않냐?”
“않어! 않어! 않어! 오빠 하자, 응? 응, 응, 응?!!!”
정말 새집이 좋긴 좋은 모양이었다. 그렇게나 어른스럽고 온순한 성품의 누이가 철부지 어린애처럼 강짜를 부리며 파티를 조르고 있었다. 번쩍번쩍 빛나는 눈에는 무슨 보석이라도 들어앉은 것만 같았다. 허락해주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이렇게 뛸 듯이 기뻐하는 동생의 모습을 보는 것도 그 얼마 만이란 말인가.
“난 단거 싫으니까 너무 큰 건 사 오지 마라.”
“야호!!!!!!”
지갑에서 만 원짜리 두 장을 꺼내 쥐여주자 괴성을 지르며 토끼처럼 깡충깡충 방 안을 뛰어다닌다. 기가 막혔지만 핀잔은 주지 않았다.
“……혜윤아, 같이 가자. 나도 뭐 좀 살 게 있어서…….”
다시 총알처럼 튀어나가려던 혜윤이의 소매를 붙들고는 그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사이좋은 오누이마냥 나란히 현관문 밖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며, 위는 역시 그를 보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했다.
TV선을 연결하거나 몇 가지 남은 자질구레한 일들을 마저 해치운 다음, 위는 현준 형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집이 비었는지 한참 동안 신호가 가도 받는 이가 없었다. 밤에 다시 걸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휘와 통화가 된다고 해서 녀석이 집에 들를지는 미지수였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코빼기도 안 비칠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될 터였다.
어쩔 수 없이 울적해지는 심사를 억누르며 수화기를 내려놓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채 한 평도 안 될 비좁은 공간이지만 세면기와 변기, 그리고 샤워 꼭지가 달린 완벽한 욕실 겸 화장실이었다. 벽엔 자주색 타일이 덮여 있고 난방까지 되고 있어 더 이상 부러울 게 없었다. 샤워를 하고 싶었지만 근육 마디마디가 결리며 피로를 호소하고 있었기에 그저 세수로 만족하기로 했다. 하룻밤쯤은 푹 자고 나야 피로가 풀릴 것이다.
얼굴의 물기를 닦으며 막 화장실을 나오니 마침 현관문 밖에서 그와 혜윤이의 기척이 들렸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까르륵거리는 둘의 웃음소리가 요란했다.
“그게 다 뭐냐?”
그저 케이크 하나와 샴페인 한 병이 다일 줄 알았던 위는 두 사람의 양손에 가득 들린 꾸러미들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어, 오빠! 선생님이 수퍼타이랑 휴지 사주셨어! 집들이 선물이래! 헤헤, 선생님 차 타고 구청 있는 데까지 가서 맛있는 도시락도 사 왔다!”
“……그래도 첫 손님인데 비누를 생략할 순 없지. 그리고 저녁 먹어야잖아. 피곤해서 식사 준비하기도 그럴 테니까…….”
혜윤이를 따라 여전히 웃고 있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눈은 조심스러웠다. 정해진 액수 이외의 금전이나 선물 공세를(대개는 고가의 옷이나 가방, 시계 같은 액세서리들이었다) 싫어하는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리라.
한 달 전쯤, 밸런타인데이 때 그가 초콜릿과 더불어 어마어마한 고가의 커플 손목시계를 선물한 것을 계기로 위는 그동안 참아왔던 쓴소리를 냉랭하게 퍼부은 적이 있었다.
연인이 아니니 더 이상 선물은 받을 수 없다며, 받을 때마다 몹시 불쾌하다며, 보기에도 닭살스러운 포장 상자를 도로 내밀자 그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몇 번이나 거듭 사과의 말을 했었다. 바들바들 떠는 입술이며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시울이 안쓰럽고 가슴이 아팠지만 언제까지고 마냥 덮어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우정과 애정은 별개였다. 앞으로 다섯 달만 지나면 깨끗이 끝낼 관계였다. 그가 원하는 것이 자신의 애정인 한, 자신이 그에 대해 품고 있는 우정조차도 단호히 접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그가 특별히 어떤 기대를 갖고 자신에게 선물을 하는 것은 아님을 알고는 있었다. 그저 그의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감정의 발로일 뿐이라는 것도. 그러나 그처럼 순수한 동기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를 위해서라도 확실히 못 박아둘 필요가 있었다.
결국 온순한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위의 뜻을 받아들였고, 한 달에 한두 번꼴로 되풀이되던 화려한 선물 공세도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고맙습니다. 잘 쓰겠습니다, 선생님.”
비누도, 또 도시락도 별로 선물 느낌이 나지 않는 소박한 것들이었기에, 위는 담담하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조심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그의 얼굴이 안심한 듯 화사한 미소로 활짝 피어나는 것이 보였다. 솔직한 마음을 드러내는 일조차 상대의 눈치를 살펴야만 하는 그의 처지가 새삼 가슴 아팠다. 게이만 아니었더라면 참으로 수월한 인생을 살, 무엇 하나 부족할 것 없는 사람인 것을. 연민의 감정은 아닐 것이다. 그를 동정하기엔…… 그랬다. 자신은 그를 너무나 좋아하고 있었다.
“……이리 주세요, 선생님.”
그를 품에 안고 싶은 발작적인 욕구가 느껴져서 위는 그의 얼굴에서 서둘러 시선을 내렸다. 그의 손에 들렸던 대여섯 개나 되는 커다란 꾸러미들을 받아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비누와 휴지 봉투들은 한쪽으로 치우고, 입맛을 돋우는 냄새가 은은히 풍겨오는 도시락 봉지를 골라내 포장을 풀기 시작하자 혜윤이가 볼멘소리로 핀잔을 준다.
“케이크에 불부터 켜구, 오빠! 파티 하자니깐! 밥은 나중에 먹어도 되잖아!”
생일도 아니건만 혜윤이는 케이크 가득 촛불을 켜고 샴페인과 폭죽까지 터트리며 집들이 기분을 내기 시작했다. 자신을 향해 샴페인 병을 들이민 탓에 티셔츠 가득 샴페인 방울이 튀었다. 기가 막힌 나머지 쓴웃음을 짓자 이번엔 케이크의 촛불을 끄라고 성화였다. 여간해선 흥분이 가라앉을 기미가 안 보였기에 위는 한동안 녀석의 유치한 장단에 맞춰줘야만 했다.
케이크의 촛불을 끄라는 명령에 이어 달짝지근한 샴페인도 한 잔 가득 억지로 마시게 했다. 거의 고물이 다 되어가는 컴포넌트에 테이프를 끼우고 자기가 좋아한다는 발라드 가요 몇 곡을 연달아 감상하게끔 하더니 소감을 묻기도 했다. 시끄러워 질색인 댄스 뮤직을 연달아 억지로 들려주고, 달아서 질색인 케이크 한 조각도 억지로 다 먹게 하더니, 이번엔 언제 사 왔는지 연둣빛 야광별 스티커를 한 무더기나 내놓으며 제 방에 붙여줄 것을 요구했다. 연신 화사한 미소를 얼굴 가득 매단 채 혜윤이의 어리광을 모두 받아주고 있던 그와 반씩 나누어 천장 가득 별을 붙여주고 나서야 겨우 도시락을 먹을 수 있게끔 허락이 떨어졌다.
맛이 일품인데다, 점심때 먹은 중국요리가 소화된 지도 한참이었기에 세 사람은 너나할 것 없이 순식간에 도시락을 비워냈다.
심한 육체노동의 뒤끝에 포식을 했으니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식곤증이 밀려든 것도 당연했다. 큰일을 해치운 데 대한 느긋한 만족감까지 더해져 심신의 긴장은 완전히 풀린 상태였다. 언제 틀었는지 시끄러운 일본 애니메이션이 연달아 방송되고 있는 TV 화면을 멍하니 굽어보던 사이, 위는 자신도 모르게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와 혜윤이의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도란거리는 말소리도 훌륭한 자장가 구실을 하고 있었다. 가족 앨범을 보여주겠다며 혜윤이가 그를 끌고 제 방으로 가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노곤한 포만감에 잠긴 배 속이며 뻐근하게 결리는 근육들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수면 욕구를 가중시켰다.
벽에 기대앉아 있던 상반신이 언제 바닥으로 널브러졌는지는 도무지 기억에 없었다. 꽤 오랫동안 끈질기게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에 마지못해 눈을 뜨니, 모로 누워 고치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던 자신의 몸이 비로소 자각되었다. 설핏하게 다가드는 한기도 불쾌했고, 여전히 두들겨 맞은 것처럼 쑤셔대는 관절과 근육들도 불쾌했다. 참기 힘들 만큼의 수면 욕구도 여전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잠이나 자고 싶었지만 거듭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가 신경이 쓰였다.
자꾸 묵직하게 가라앉으려는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리고 주변을 살폈다. 낯선 방 안 구조에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이내 기억을 일깨웠다.
잠들기 전과 다름없이 시끄러운 소음으로 붕붕거리는 TV에선 9시 뉴스를 방송하고 있었다. 두 시간쯤은 잔 것 같았다. 창 밖은 이미 새까만 어둠이었다. 자꾸만 바닥에 늘어지려는 몸을 겨우 일으킨 뒤 위는 전화를 받았다. 현준 형이었다.
잠에 취한 목소리라는 걸 알아들은 모양으로, 형은 그리 오래 통화를 끌지는 않았다. 무사히 이사를 한 것인지 안부를 물었고, 역시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휘가 현준 형의 아파트로 돌아왔음을 알렸다. 짐작대로 녀석은 오늘 이사한 집에 들르지 않을 모양이었다. 갈아입을 옷이 없거나 뭔가 필요한 물건이라도 생겨야 마지못해 얼굴을 비치겠지.
얼굴이 하도 어두워서 잔소리도 별로 못 했다고 괴로운 듯 덧붙인 현준 형은 푹 쉬라는 인사와 함께 전화를 끊었다. 휘의 여봐란 듯한 무시는 역시 가슴 아팠지만 녀석과 통화를 해서 또 신경전을 펼치기엔 너무나 피곤했다. 현준 형의 집으로 무사히 들어간 걸 확인했으니 오늘은 그것으로 만족하자고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TV를 끈 다음 혜윤이 방으로 건너갔다. 아니나 다를까, 세 평이 채 안 될 좁은 방 안에선 혜윤이와 그가 한껏 몸을 웅크린 채 잠이 들어 있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정신없이 곯아떨어진 모양이었다.
방바닥엔 가족 앨범과 가족사진 수십 장이 갖가지 만화 주인공들로 낙서가 돼 있는 혜윤이의 연습장들과 함께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사진들을 대강 치우고 장롱에서 이불과 베개를 꺼내 혜윤이를 덮어주었다. 곤히 자는 그를 차마 깨울 수 없어 조심스레 안아 들고 방을 나왔다. 조그맣게 잠투정을 할 뿐, 안긴 것도 모르는 채 그는 자신의 팔 안에서 축 늘어졌다.
큰방에 데려다 눕히고 부지런히 이부자리를 마련했다. 양말과 점퍼를 벗겨도, 푹신하게 요를 깐 이부자리에 옮겨 눕혀도 그는 깨어날 기미조차 안 보였다. 역시 한계까지 체력을 쓴 탓이리라. 그를 눕히고 나니 거듭거듭 하품이 나오며 잠이 쏟아졌다. 파자마로 갈아입기도 귀찮아 청바지만 벗은 팬티와 티셔츠 차림으로 그의 곁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방 안의 불을 끄자 아늑한 어둠이 다가들었다. 질서정연하게 정리가 되어 있는 가구들이 창문으로부터 흘러드는 흐릿한 가로등 불빛을 받아 고요한 음영을 만들고 있었다. 10년 가까이 고락을 함께해온 낡은 가구들임에도 새집에 배치되고 보니 마냥 낯설게만 보였다.
물밀듯이 밀려드는 잠의 폭격 속에서도 팔을 뻗어 그를 품에 안았다. 따스한 그의 체온도, 자신의 것과 다름없이 익숙해져버린 그의 체취도 몹시 기분이 좋았다. 그와 함께 잠을 자는 것은 꽤 오랜만이었다. 아마도 두서너 달쯤은 된 것 같다. 그와 섹스를 하는 것은 월요일과 금요일 저녁이었고, 정해진 시간을 채우고 나면 혼자 잠들 혜윤이를 생각해 대부분 부지런히 집으로 돌아오곤 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를 품고 자는 게 드문 일임에도 전혀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의 몸 어느 부분도 모르는 곳이 없었다. 만져지는 감촉도, 맡아지는 체취도 그 어느 것 하나 친근하지 않은 부위가 없었다.
정체 모를 포만감에 절로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끌어안은 팔에 좀 더 힘을 기울였다. 티셔츠 틈으로 손을 밀어 넣어 그의 따스하고 부드러운 피부를 쓰다듬는 사이 점점 의식이 흐려졌다. 충만한 잠이 먹물처럼 다가들었다.
자꾸만 얼굴에 닿아오는 간지러운 감촉에 몇 번 얼굴을 찌푸렸다. 손을 뻗어 간지러운 그것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가위에라도 눌린 것처럼 한동안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되풀이되는 간지러움에 짜증을 느끼며 위는 서서히 의식을 일깨웠다. 의식이 명확해질수록 얼굴의 간지러움보다 쑤셔대는 온몸의 근육들에 신경이 더 쓰였다. 왜 이렇게 팔이며 어깨 근육이 결리는지, 눈꺼풀은 또 왜 이렇게 접착제를 붙여놓기라도 한 것마냥 안 떨어지는지 의아했다.
한동안 가위와도 같은 잠과 사투를 벌인 끝에 위는 간신히 눈을 떴다. 뻑뻑한 눈꺼풀을 몇 번 깜빡인 끝에 바로 코앞에 붙어 있던 누군가의 인영을 자각할 수 있었다. 잠결에 그토록 얼굴을 간질이던 것은 바로 그 누군가의 손가락이었다. 막 눈을 떴을 때, 아랫입술을 더듬고 있던 손가락은 이젠 턱 끝과 인중을 오가며 밤새 자란 자신의 까칠한 수염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창문으로 비쳐드는 가로등 불빛은 매우 흐릿해서 얼굴 윤곽은 거의 알아볼 수가 없었다. 제대로 보이는 것은 푸르스름한 안광을 발하고 있는 흰자위뿐. 물론 그렇다고 누군지 못 알아볼 자신은 아니다.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날씬한 팔이며 코끝으로 다가드는 익숙한 체취, 내쉴 때마다 얼굴을 간질이는 달콤한 숨결들이 모두 기분 좋은 자극이 되어주고 있었다.
“……미안…… 너무 만져보고 싶어서…….”
자주 깜빡거리는 그의 눈꺼풀이 흐릿하게 감지됐다. 곤란하거나 당황하면 보이는 그의 사랑스러운 버릇. 미안하다고 하면서도 이리저리 장난꾸러기처럼 만지작거리고 있는 손놀림은 여전했다.
“……깨울 생각은 없었는데…….”
상냥한 어조에서 해바라기처럼 활짝 미소를 머금고 있을 얼굴이 손에 잡힐 듯 전해졌다.
“……몇 시죠?”
자연스럽게 팔을 둘러 그의 등을 감싸 안으며 물었다.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는 허스키는 자신이 듣기에도 꽤나 몽롱하고 나른했다.
“……4시 조금 넘었어.”
다정하게 포옹을 해준 탓인지 그의 조심스러웠던 애무는 좀 더 대담해졌다. 코끝과 뺨을 자신의 뺨에 갖다대곤 고양이처럼 부벼대기도 하고, 입술 표면만을 살짝 터치하는 깃털 같은 키스를 되풀이하기도 했다. 마주 키스를 보내진 않았지만 어리광을 부리는 듯한 그의 몸짓이 귀여워서 가만히 지켜보며 웃음을 지었다.
“……언제 일어나셨어요?”
“……글쎄…… 한 20분쯤 됐나?”
“……아직 이른 시간인데 좀 더 주무시죠. 몸은 괜찮으세요?”
“다 잤는걸, 뭐. 혜윤이 깨기 전에 가야지. ……후후, 실은 온몸이 욱신거려서 죽을 지경이야. 근육통이 장난 아니네? 넌 괜찮아?”
괜찮을 턱이 없다.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리며 사방에서 엄살을 떨어대는 근육들 탓에 무의식적으로 동작을 자제하고 있었다. 뭉친 근육이 풀리려면 2∼3일은 고생을 해야 할 것이다.
“견딜 만합니다.”
“견딜 만하긴. 그 많은 짐을 혼자 다 옮기구서. ……더 자지그래? 이제 4시잖아.”
“아홉 시간 가까이 잤는걸요. 충분합니다.”
“……좋아라…….”
도톰하게 부푼 위의 아랫입술을 살짝살짝 깨물며 그가 수줍은 어조로 속삭였다. 기분이 좋은 듯, 만족스러운 한숨과 함께 자신의 품 안으로 더더욱 파고 들어오는 그다. 영락없는 고양이의 어리광. 목에서 골골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온대도 하등 이상할 것 같지 않다.
“뭐가요?”
“이렇게 너랑 함께 자고 일어나는 거. 76일 만이네?”
“76일?”
“응. 나 식중독 걸렸을 때 같이 자고는 처음이잖니. 솔직히 그담부터 어디 아프게 되길 은근히 바랐었는데…… 넌 내가 아파야 겨우 함께 자주니까…….”
서운하다거나 쓸쓸한 어조는 아니었다. 철저하게 고객의 입장을 지키는 그가 서비스 시간 이외에 주제넘은 요구를 하는 것으로 자신을 난처하게 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언제나처럼 그저 귀여운 어리광에 불과했지만 가슴이 아픈 것은 한가지였다.
약속된 1년째가 되는 올 8월에도 그가 자신에 대한 마음을 접지 못한다면 어떡하나. 분명 깨끗이 거래를 끝내더라도 그가 적잖이 상처를 입을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에게만은 상처를 입히고 싶지 않다고 늘 되뇌곤 하지만, 이토록 열렬한 애정이 자연스레 플라토닉한 우정으로 변해갈 수 있을지는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날짜를 일일이 세고 계셨습니까?”
그의 상반신을 감고 있던 팔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같이 잠들고 깨는 게 뭐 대수라고, 매일매일 달력을 헤아리며 기대하곤 했을 어린아이 같은 순정이 애처로우면서도 사랑스러웠다. 정말로 상처 입히고 싶지 않은 친구라고, 소중하고 소중한 친구라고 다시 한 번 아픈 생각을 곱씹었다.
“응. 머릿속에 전부 다 저장해두거든. 너에 관한 거라면 토씨 하나도 빠트리지 않으려고 기를 쓰지.”
“…….”
“……이제 다섯 달밖에 안 남았잖아. 다섯 달만 지나면…… 그래, 아마 너처럼 멋있는 남자랑 자는 일은 다신 없을 테지. 달리 연애를 하게 되더라도…… 넌 정말 최고로 근사한 남자니까…… 정말로…… 소중한 추억이 될 테니까…….”
“…….”
노골적인 숭배의 말에 얼굴로 화끈한 열기가 끼쳐들었다. 찢어지게 가난하고 무력한 어린 남창 따위에게 ‘최고로 근사한 남자’라니, 그야말로 코웃음을 칠 일이었다. 절대로 객관적일 리가 없는 평가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나 위는 그의 칭찬이 기쁘게 생각되었다.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는 진실이었다. 남녀를 불문하고 이렇게까지 전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숭배에 가까운 애정을 바치는 존재를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위 역시, 어쩌면 남은 평생 다시는 만나지 못할 상대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휘가 집에 들어오게 되면 가끔이라도 선생님 댁에서 머물게요. 월요일 같은 땐 저도 그대로 자고 싶다고 생각할 때가 많거든요.”
“야아, 정말?!”
“예. 아주 가끔씩이긴 할 테지만…….”
“헤헤, 신난다!”
나지막한 환호성과 함께 응석쟁이 고양이의 뺨이 마구 얼굴을 부벼댔다. 코롱 냄새와 담배 냄새가 뒤섞인 그만의 독특한 체취가 좋아서 위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폐부 깊숙이 그를 빨아들였다. 웃음기를 머금은 그의 입안에서는 달콤한 단내가 났다. 그것 역시 너무 좋아, 잠시 망설이다 입술을 겹치고 키스했다. 모로 마주 안고 있던 그의 몸을 눕히고 자연스럽게 올라타는 자세가 되었다. 계속 어린아이 같은 스킨십만을 즐기던 그는 자신의 느닷없는 공격에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킥킥거리던 웃음소리가 사라지고 품 안에 끌어안은 몸이 잔뜩 굳었다. 부드럽게 자신의 허리춤을 애무하고 있던 손도 동작을 멈춘 채 얌전히 키스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섹스를 할 형편도 아니었고(옆방에선 혜윤이가 자고 있다!) 또 그럴 의사 또한 조금도 없었기에, 관능이 배제된 다정한 접촉만을 되풀이했다. 입안을 천천히 핥고, 부드럽게 그의 혀를 빨아들였다. 느리게 흔들리며 서로의 타액을 섞고, 목마른 기갈이 풀릴 때까지 실컷 받아 마셨다. 양손은 자연스럽게 그의 관자놀이 속으로 들어가, 찰랑거리는 부드러운 머리카락 틈을 헤엄쳤다. 두피를 정신없이 쓰다듬기도 하고, 누군가 훔쳐갈세라 결사적으로 머리카락을 움켜쥐기도 했다. 마치 마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온몸이 노곤하게 늘어지며 달콤한 감각이 엄습했다.
“……아…… 안 돼…….”
입술을 깨무느라 잠시 틈이 벌어지자 흐느끼는 듯한 애원의 속삭임이 토해졌다. 좀 더 달콤함을 음미해보려던 위는 그가 힘주어 가슴을 떠미는 바람에 20센티쯤 떨어진 위치에서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역시 흐릿한 윤곽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발갛게 상기된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을 그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거부의 이유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극히 부드러운 키스였음에도 아랫배에 닿아오는 그의 하반신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들고 있었다.
분명 여기서 멈춰야만 했다. 지나치게 민감한 그를 배려하지 못한 자신의 경솔함을 한편 탓하면서도, 위는 절대로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품에 안고 있는 따스한 몸뚱이를 놓아주고 싶지도, 또 키스를 멈추고 싶지도 않았다. 그만둔다는 생각만으로도 안타깝고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혜윤이는 잠들면 시체입니다.”
“?!”
“……아침잠이 많아서 제가 여러 번 깨워야만 간신히 일어나죠.”
다분히 유혹의 의미가 내포돼 있는 변명을 서둘렀다. 솔직히 혜윤이가 눈치채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의 집에서, 그것도 혜윤이가 함께 자고 있는 집에서 고객과 섹스를 하겠다는 자체가 감히 예전의 자신이라면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파렴치한 짓거리였다. 그러나 품 안의 따스한 몸은 그나마 남아 있던 자신의 얄팍한 윤리관과 균형 감각을 자연스럽게 마비시키고 있었다. 그만둬야 한다는 이성의 경고가 떨어지고 보니 욕구는 한층 더 간절해졌다.
분명 섹스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소중한 친구를 범하고 싶을 미친놈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다만 그저 키스를 계속 하고 싶을 뿐이었다. 이토록 달콤하고 노곤하고 따스한 접촉을 착한 친구와 나누고 싶은 것뿐이었다. 친구에게 키스는 용납이 되느냐 하고 되묻는다면, 그야 그는 특수한 경우가 아니냐며 변명했다. 친구는 친구지만 어쩔 수 없이 오랫동안 섹스를 하게 된 사이니까. 되풀이해 몸을 섞는 동안 자신의 것만큼 익숙해져버린 육체이니까.
“……하…… 하지만…… 아…… 안 돼…… 위야…….”
다시 얼굴을 기울이자 민감한 주제에 겁만 많은 그는 미약한 저항을 되풀이했다. 얼굴을 살짝 옆으로 돌려 키스를 피하고는 가슴 사이에 양팔을 접어 올린 채 자신의 접근을 막았다. 초조한 나머지 자신의 움직임도 조금 거칠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단숨에 함락되고 말 취약하기 짝이 없는 마지노선이라는 걸 모를 리는 없다. 울타리가 돼 있던 그의 양팔을 위로 치켜들어 팔목을 고정한 뒤 바로 입술을 겹쳤다. 날개가 꺾인 파랑새처럼 몇 번 파드득거리며 저항을 거듭하던 그의 몸은 의도적으로 도발적인 키스를 시작하자 금세 흐물흐물 늘어졌다. 저항을 봉쇄하는 것만이 목적이었던 터라 관능을 불러일으키는 키스를 멈추고 곧 자신이 원하는 상냥한 접촉으로 되돌아왔다.
저항은 멈추었지만 최대한 흥분을 자제하려는 듯, 돌처럼 몸을 굳힌 채 그는 마지못해 자신의 입술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겁 많은 새가슴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이 입술이 좋다…… 촉촉하고 따스한 이 감촉이 좋고, 수줍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이 미세한 떨림도 좋다…… 자신에 대한 전폭적인 애정과 수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그의 몸짓 하나하나가…… 가랑비에 옷을 적시듯 천천히 가슴으로 스며드는 이 감각이 좋다…… 더 이상 필요한 게 없는 것처럼 온 넋을 떨리게끔 하는 이 포만감이 좋다…… 아아, 이 온순한 사람이 너무나 좋다…….
꽤 오랫동안 그의 입술을 탐한 듯싶어. 흐느끼는 듯한 신음을 흘리며 가까스로 견디고 있던 그의 허리가 마침내 들썩이기 시작했다. 자신의 아랫배에 문질러지는 그의 분신은 바지와 속옷을 사이에 두고서도 뚜렷하게 그 생명력을 주장하고 있었다. 더 이상 그를 괴롭힐 수 없어 손을 아래로 뻗었다. 벨트를 풀고 지퍼를 내린 뒤 팬티 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자신의 것보다도 익숙해진 크기와 형태가 손바닥 안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움켜쥐자 품 안의 몸이 찌릿찌릿 전율을 흘리는 것이 느껴졌다. 막 터져 나오기 시작한 그의 교성을 키스로 틀어막았다. 훑어 올리기 시작한 지 채 2∼3분이 되었을까 말까, 그는 어이없을 정도로 빠르게 정점에 도달했다. 따스한 체액이 손안 가득 뿜어 나왔다.
배출이 이루어진 후에도 페니스를 감싸고 있던 손가락은 풀지 않았다. 그것이 더 그를 기쁘게 할 테니까. 순식간에 풀이 죽어버린 물건을 음낭과 함께 통째로 손바닥 안에 감싸고 어루만졌다. 작은데다 끝이 조금 휘기까지 한 참으로 볼품없는 물건이다. 뿐이냐, 지구력 또한 바닥이라 조루도 이만저만 심각한 조루가 아닐 수 없다. 게이이기 망정이지 이래서야 어떻게 여자를 만족시키겠나 싶어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잔뜩 굳어 요동치는 몸을 품에 꼭 끌어안은 채 그가 진정되기만을 기다렸다. 가쁜 호흡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 키스도 가급적 신음 소리를 틀어막는 선에서만 되풀이했다. 어느새 땀투성이가 된 얼굴을 골고루 핥아주었다. 더럽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약간의 결벽증이 있는 자신으로선 놀라운 일이라고 무심코 생각했다.
“……하지 말랬더니…… 고약해…… 혜윤이 깨면 어쩌려구…….”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로 헐떡이듯 토해내는 비난도 귀엽기 짝이 없다.
“……그…… 그만 놔줘…….”
무슨 소린가 하다가 끊임없이 그의 성기를 주무르고 있던 자신의 오른손을 자각했다. 키스도 원 없이 했고, 그의 난처함도 해소시켰기에 순순히 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TV 위에 놓여 있던 두루마리 휴지를 더듬어 찾아 손을 닦고, 그의 더럽혀진 사타구니 사이도 꼼꼼히 닦아주었다. 다시 한 번 자신의 손길이 가 닿자 펄쩍 뛰며 치부를 가리는 그를 향해 그냥 닦아주려는 것뿐이라고 달랬다. 마지못해 접촉을 허락하긴 했지만, 휴지며 자신의 손가락이 스칠 때마다 그의 생식기는 움찔움찔 반응을 보였다. 그가 그렇게까지 긴장을 하고 있지 않거나 자신의 손놀림이 조금만 더 짓궂었어도 그는 틀림없이 또 한 번 발기했을 것이다. 그의 반응이 귀여운 나머지 몇 번이고 그를 만져주고 싶은 유혹을 느꼈지만 자신도 그만 이성을 찾아야만 했다.
뒤처리를 끝내고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바로 해준 뒤 그를 놓아주자, 바짝 긴장해 있던 그의 입술에서 나지막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가…… 갈게…….”
속삭이듯 선언하곤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조금 있으면 날 밝을 텐데 아침 들고 가시죠?”
“아니, 그냥 가는 게 좋겠어. 기운도 없구…… 여기저기 쑤시구……. 혜윤이도 있는데 또 발정하면 어떡해.”
자조적인 그의 웃음소리가 음악처럼 상쾌하게 들렸다. 희미한 가로등 빛에 의지해 두리번거리는 걸 보니 벗겨둔 점퍼와 양말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그를 스쳐 방문 옆에 붙은 전등 스위치를 켰다. 눈이 시릴 정도로 밝은 빛이 방 안 가득 퍼졌다. 방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양말을 신고 있던 그도 눈이 부신지 손가락으로 몇 번 눈을 비볐다. 정사의 여운 탓에 그의 얼굴은 희미한 홍조를 띠고 있었다. 자신이 오랫동안 괴롭힌 귀여운 입술도 살짝 부풀어 올라 여전히 은밀하게 키스를 유혹했다.
“불 안 켜도 되는데…….”
내내 시선을 피하다가 옷걸이에 걸어두었던 점퍼를 걸치고 크로스백까지 어깨에 둘러메고 나서야 그가 겨우 시선을 맞춰온다.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오늘은 피곤할 테니까 아틀리에에 들를 필요 없어. 새로 이사해서 이것저것 신고할 일도 있을 테고…… 아무튼 금요일에 보자꾸나. 전화할게.”
“……잠깐 기다리세요, 선생님. 바래다드릴게요.”
물음을 담고 휘둥그레지는 눈을 못 본 체 위는 서둘러 바지와 코트를 챙겨 입었다.
“바래다주긴 뭘! 차 갖고 왔는데…… 너도 학교 가야 하잖아.”
“이제 4시인걸요. 잠도 다 깼으니 운동 삼아 걸어볼 생각입니다.”
그와 좀 더 함께 있고 싶기 때문이라는 본심은 밝히지 않았다. 물론 오늘 수업 이후의 예정된 만남 역시 거를 생각 따윈 눈곱만큼도 없는 자신이었다.
새까만 어둠에 둘러싸인 새벽녘 주택가엔 우유나 신문을 돌리는 배달부 한두 명만이 눈에 띌 뿐 인적이 거의 없었다. 아직 이른 봄이라 공기는 제법 싸늘했지만 그 이상으로 상쾌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사방 눈치를 살피며 곤란해하는 그와 어깨를 맞대고 그의 보폭에 맞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서로 말은 없었지만 자신이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도 몹시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그가 차를 주차해두었던 곳이 이사를 나온 집 앞이었기 때문에, 유쾌한 산책은 채 10분도 못 돼 아쉬운 끝을 맞았다. 리어카를 끌고 어제 하루 종일 왕복을 하던 거리라 유달리 짧게 느껴진 것일지도 몰랐다. 그만 집에 들어가라는 그의 재촉을 받고 보니 더더욱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잠깐 드라이브 해주실 수 있습니까?”
작별 인사 대신 흘러나온 부탁의 말에 위는 내심 스스로도 놀라고 말았다.
“드라이브?!”
“……선생님께 보여드리고 싶은 곳이 있어서요. 많이 피곤하지 않으신 거면 함께 가주셨으면 합니다.”
“……어디……? 난 상관없지만…… 곧 학교 가야 할 텐데 괜찮겠어?”
자신만큼 헤어지기가 아쉬웠는지 그의 눈동자는 기대감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10미터쯤 전방의 가로등 불빛을 받아 한결 부드러운 윤곽을 그리고 있는 그의 섬세한 이목구비를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역시 단아하고 아름다운 얼굴이라는 생각이 얼핏 뇌리를 스쳐갔다. 검고 맑은 눈동자엔 특별히 더 오랫동안 시선을 주었다.
“연희동이니까 시간은 충분합니다.”
차로 20∼30분밖에 안 되는 거리이므로 거짓은 아니지만, 설령 그 때문에 오늘 지각을 하게 된다 해도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보여주고 싶었다. 그가 알아주었으면 싶었다. 자신의 꿈을, 미래를, 그리고 가치를. 현재는 그저 가난하고 초라한 어린 남창에 불과하지만, 언젠가 먼 미래엔 당당하고 힘 있는 한 사람의 남자로 날아오르리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세상을 손에 쥔 그럴듯한 남자로 성장하리라는 걸 증명해주고 싶었다.
“……그래…… 별로 멀진 않구나…….”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곤 먼저 차에 오른 그가 조수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환하게 웃음을 만들고 있는 그의 입술에 키스하고 싶은 욕망을 또 한 번 강하게 느꼈다.
지난여름에 한 번 들러보고 처음이었으니 나름대로 오랜만인 ‘우리 집’이었다.
자신의 꼼꼼한 방향 지시에 따라 그는 차로 20여 분 만에 자신을 연희동 ‘우리 집’에 데려다주었다. 집 앞에서 50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는 근린공원 앞에 차를 세우게 하고, 그와 함께 천천히 집 앞까지 걸었다. 그의 맑은 눈엔 호기심이 가득 들어앉아 있었지만 자신이 침묵을 지키자 먼저 말을 걸지는 않았다.
공원에서부터 집에 이르는 골목 풍경은 지난 여름에 보았을 때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그 당시 개축에 들어갔던 골목 입구의 한옥 한 채는 공사가 마무리되었는지 세련된 고급 빌라의 형태로 우뚝하니 시선을 끌고 있었다. 오래된 고급 주택가여서 대부분의 집들이 2∼3층 단독 주택의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개축된 빌라는 그만큼 생경한 위화감을 주고 있었다.
언젠가 ‘우리 집’도 말끔히 헐리고 흔적조차 찾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고 내심 각오하고 있는 자신이었다. 물론 지난 7년 이래 개축된 집은 그 집 단 한 채뿐이었으니, 아직은 그리 걱정할 만한 사정은 아닐 터였다. 최악의 경우, 설령 완전히 사라진다고 해도 다시 지으면 그만이었다. 얼마를 들이든 반드시 그만큼의 돈을 벌어 땅을 되사고, 기억 속에 각인된 그대로 다시 지으면 그만이었다.
10분쯤을 걸어 마지막 골목 모퉁이를 돌자, 마침내 그리운 ‘우리 집’이 나타났다. 짙은 암청색 페인트가 칠해진 육중한 철제 대문이며, 대문을 따라 양옆으로 길게 이어진 잿빛 화강암 담장이 세월의 무게를 버티며 조용히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높은 담장 너머, 보일 듯 말 듯 삐죽 솟아 있는 회색의 박공지붕이 담장을 따라 죽 뻗어 올라온 전나무며 소나무, 그리고 갖가지 유실수들의 풍성한 나뭇가지들과 어우러져 아릿한 감회에 젖게 했다. 여름에 보았을 때완 다르게 앙상한 가지만 남은 유실수들도 다시 여름이 되면 시퍼런 녹음을 이룰 것이다.
다른 날과 달리 대문 바로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위는 비로소 걸음을 멈췄다. 이른 새벽이라 재수가 없지 않는 한 집주인과 마주칠 염려는 없다. 2년 전쯤 대문 앞에 한참을 앉아 있다 집주인에게 들킨 이래로(옛 주인이 자기 집 주변을 얼쩡거리는 행동을 좋아할 집주인은 없을 터였다) 위는 되도록 집주인과 부딪치지 않게 조심하고 있었다.
“……이 집에서 자랐습니다.”
궁금해 죽을 것 같은 표정의 그에게 비로소 대답을 들려주었다. 움찔 긴장하며 눈을 크게 떴을 뿐, 사려 깊은 그답게 섣부른 대꾸는 없었다. 살피는 듯한 시선에 담담한 미소로 안심을 주었다. 분명 회한의 장소이긴 하지만 별로 슬프다거나 억울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곳은 아닌 까닭이었다. 온갖 즐거운 추억이 가득한, 세상은 행복한 놀이터일 뿐이리라는 어리석은 착각을 공유했던 장소답게 ‘우리 집’은 그저 희망을 상징하는 장소일 뿐이었다. 지칠 때마다 살아갈 기운을 북돋워주고 나태해질 때마다 새삼 목표를 일깨워주는, 일종의 성지인 셈이었다.
“……엄마와 아버지가 직접 디자인하고 설계에도 참여해서 지으신 집이죠. 당시만 해도 꽤 많은 돈을 들여서 지은 집이라고 해요. 아버지 사업이 한창 잘 돌아갈 때였으니까요. 제가 세 살 때 이사 와서 국민학교 4학년 무렵까지 살았습니다. 저쪽 모퉁이를 돌면 성준이네 집도 나오죠.”
“…….”
“아버지는 정력적인 분이셨습니다. 에너지도 넘치고 감정도 풍부하셨죠. 체격도 큰 편이셨구요. 저나 휘가 덩치가 큰 것은 아버지를 닮아서지요. 죽은 강이 형도 거의 복사판이었구요. 우리 형제들을 무척 사랑해주셨습니다. 물론 엄마를 닮은 혜윤이는 좀 더 편애를 하셨죠.”
“…….”
“어릴 땐 아주 강한 분이라고 여겼었는데 실은 그렇지 못했나 봅니다. 실패를 견뎌내시지 못했어요. 사업이 부도를 맞게 됐는데 사채업자들의 횡포를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을 매셨지요.”
“…….”
묵묵히 자신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만 있던 그가 손을 뻗어왔다. 살며시 자신의 오른손을 감싸 쥐는 그의 손은 따뜻했다. 손등과 손가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가 이내 강하게 깍지를 껴왔다. 망설임 없이 마주 쥐여주었다. 맞붙은 손바닥을 통해 그의 온기가 천천히 가슴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약한 분이셨지만 그래도 당신의 그늘 아래 있는 동안은 무척 행복했습니다. 정말 행복하게 해주셨지요. 저나…… 가족 모두에게…….”
“…….”
“……그 시절의 행복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부러울 게 없는 완벽한 사랑을 베풀어주셨기 때문에…… 당신의 자살이나 그 후에 벌어졌던 다른 모든 괴로운 일들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살아낼 수 있었던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신께선 약하게 가셨지만 당신의 아들딸만큼은 강하게 키워주신 셈이죠.”
“…….”
“그래서 가끔씩 여길 옵니다. 괴로운 일이 있거나 마음이 약해질 때…… 몰래 와서 저기 파란 강철 대문을 가만히 쳐다보곤 하죠. 그러다 보면 다시 용기가 생기거든요. 언젠가 반드시 이 집을 다시 찾을 거라고 거듭 다짐을 하곤 해요. 이 집을 다시 찾게 되면 어린 시절 아버지가 우리들에게 선사하셨던 완전한 행복도 다시금 찾아질 것만 같은 생각이 드니까요.”
“……찾을 수 있을 거야.”
약간 잠긴 듯한 그의 목소리가 조용히 토해졌다. 시선을 돌려 굽어보았지만 땅바닥으로 고개를 내리고 있어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그러나 힘 있게 잡힌 따스한 손아귀만으로도 그의 열렬한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너라면 반드시 찾을 수 있을 거야. 이 집뿐만이 아니라 더 대단한 것도 가지게 될 거야, 반드시. 난 알 수 있어.”
“…….”
“그냥 하는 말이 아냐. 넌 틀림없이 그렇게 될 거야. 왜냐면…… 왜냐면 넌 진짜 근사한 남자니까…… 강하고 의지가 굳은데다 성실하고 머리도 좋아…… 언뜻 보면 얼음장처럼 차게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용암보다도 더 뜨거운 격정을 안에 숨기고 있지…… 너같이 굉장한 남자를 본 적이 없어. 진짜야. 네가 그냥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렇고 그런 시시한 남자였다면 난 네게 고백도 하지 않았을 거야. 게이라는 걸 평생 숨기고 살 각오였으니까.”
“……정말 달콤한 과찬이로군요.”
“과찬 아냐. 믿어. 화가의 눈을 무시하면 안 돼. 화가는 늘 완벽한 것들만 본능으로 찾아 헤매는 족속이거든. 정수(精秀)를 알아보는 눈높이를 키우는 데만 혈안이 돼 있지. 너는 그런 눈에 찍힌 정수야. 그러니 믿어도 돼.”
“……기뻐요.”
“……?”
줄곧 바닥을 향해 있던 그의 시선이 비로소 자신을 바라보았다. 흐릿한 가로등 빛 아래 드러난 그의 얼굴은 조금 상기돼 있었다. 쌍꺼풀 없는 맑은 눈동자가 유난히 더 반짝거리는 것만 같았다.
“선생님께서 그렇게 믿어주시는 것이 기쁩니다. 다른 사람이 절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관심 없습니다. 그들은 어차피 제 울타리 안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선생님은 달라요.”
“…….”
“……제겐 친구가 별로 없습니다. 아시죠?”
“…….”
“……아버지께서 그렇게 가신 이래 친구를 사귈 엄두가 안 났어요.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는 경험은 정말 끔찍했으니까요. 타인을 내 영역 안에 들이고, 우정을 나누고, 그리고 그들의 안전을 근심하는 일…… 더 이상 하고 싶지가 않았어요. 기존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것만도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
“성준이와도 거의 끊어질 뻔했는데 녀석이 워낙 극진했던 덕분에 계속 우정을 이어올 수 있었죠. 친구라기보단 거의 가족 같은 녀석입니다. 성준이 친형인 현준 형도 그렇고요. 또 윤열이 형에 대해서는…… 전에 잠깐 말씀드린 적 있죠?”
“……응…… 수배 중이라는 그 대학생 형…….”
“예. 제겐 죽은 강이 형과 다름없는 사람이지요. 이상할 정도로 남이라고 생각되지가 않아요. 정말로 사랑하는 형이랍니다.”
“…….”
“아무튼 그래서 성준이를 빼면 선생님이 제 유일한 친구인 셈이죠.”
“…….”
“……8월에 계약이 끝나게 되면…… 정상적인 친구 관계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
“……아시죠……?선생님을 잃고 싶지가 않아요…….”
“…….”
영롱하게 반짝이던 그의 눈동자가 서서히 안개가 서리는 것마냥 흐릿해졌다. 시선을 피하려는 듯 옆으로 고개가 돌아가기에 놀고 있던 나머지 손으로 그의 턱을 끌어다 다시 시선을 맞췄다. 강하게 틀어쥔 손가락 아래서 그의 턱 끝이 조금씩 떨고 있었다.
“……아직 다섯 달이나 남았으니까…… 가능하다면 노력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제게 대한 마음…… 정리해주시면 계속 친구로 지낼 수 있지만…….”
“…….”
“……만약 다섯 달이 지나도 그대로면…… 어쩔 수 없이 선생님과 헤어져야만 하니까요.”
“…….”
“……울지 마세요. 울리려던 게 아닌데…….”
“…….”
어느새 그의 눈시울을 가득 채운 눈물이 조용히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바늘로 가슴이 찔리는 것처럼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자신도 모르게 그의 몸을 끌어당겨 안았다. 딱딱한 뼈가 만져지는 마른 몸은 아무런 저항 없이 품 안에 파묻혔다. 자신의 어깨 근처에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을 뿐, 그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미세하게 떨리는 상반신을 통해서만 여전히 울고 있는 그가 느껴졌다.
“……선생님을 울리는 게 싫어요. 정말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아요.”
“…….”
“……쉬운 일이 아니란 걸 알지만…… 그래도 노력은 해보겠다고 약속해주시겠습니까?”
“…….”
“……네, 선생님? 저도 선생님 참 좋아해요. 알고 계시죠?”
“…….”
“……자주 생각해요. 선생님이 게이가 아니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그럼 평생 사이좋은 친구로 지낼 수 있을 텐데 하고…….”
“…….”
“……선생님…….”
“…….”
“……선생님…….”
“…….”
“……선생님…….”
“……그…… 그…… 래 볼게…….”
채 흐느낌을 삭히지 못한 애처로운 대꾸가 간신히 흘러나왔다. 가슴이 아렸다. 목구멍에 돌덩이가 걸린 것 같은 묵직한 통증도 여전했다.
“……노력…… 해볼게…… 자신은 없지만…….”
“……고맙습니다.”
“……이제부턴 미운 점만 찾아봐야겠네. 하지만 너무 완벽한 왕자님이라서 잘 찾아질까 몰라…….”
억지로 토해지는 장난기 어린 말투엔 물기만이 가득했다.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고 그의 정수리 근처에 입술을 눌렀다. 땀내와 샴푸 냄새가 뒤섞인 체취는 달콤하기만 해서 목구멍의 통증은 더 심해졌다.
“……한 다섯 가지쯤 찾아내면 널 단념할 수 있을까?”
“…….”
“……아냐, 다섯 가지 갖곤 안 될지도…… 열 가지쯤 찾아내면 되나……? 스무 가지는……? 서른 가지 미운 점을 찾아내도 널 못 잊게 되면 그땐 어떡하지……? 어쩌지……?”
“…….”
가슴 시린 소리를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무턱대고 그의 입술을 틀어막았다. 여간해선 울음을 그칠 것 같지 않았기에 최대한 관능적인 입맞춤을 오랫동안 되풀이했다. 한동안은 설움에 겨워 둔한 반응을 보이던 그도 차츰 자신의 목에 양팔을 두르곤 정열적으로 키스를 되돌렸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이성을 되찾기엔 충분한 방해 거리였다. 왜 키스를 시작했는지 이유도 까먹은 채 열중했던 터라, 위는 마지못해 그의 입술을 놓아주었다. 기운을 잃고 축 늘어지는 몸을 힘 있게 끌어안은 다음 혀로 부드럽게 눈물을 핥아주었다. 그의 뺨은 불에 덴 듯 뜨거웠고 코끝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찝찔한 눈물 맛도, 혓바닥을 스치는 매끄러운 피부 감촉도 그저 달콤하게만 느껴졌다. 성준의 집 방향에서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언제까지고 그를 품은 채 강아지처럼 핥아먹었을 것이다.
운 뒤끝이라 다소 방기된 표정을 하고 있는 그의 손을 잡고 공원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사방은 여전히 검푸른 어둠으로 가득했다. 시계를 차고 오지 않아서 정확한 시각을 알 수는 없었지만 5시 반을 조금 넘긴 것 같았다. 집엔 7시까지만 돌아가면 되니, 아직 그와 좀 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셈이었다. 주차해둔 곳에 도착했지만 여전히 그의 손을 꼭 쥔 채로 공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기운을 잃고 의기소침해진 그를 생각하면 바로 돌려보내야 함에도 함께 있고 싶다는 이기심이 양심을 이기고 있었다.
어린이 놀이터 하나와 농구대 하나, 그리고 파고라 두 개가 설치돼 있는 공원은 500평이 채 될까 말까 한 자그마한 공간이었다. 그럭저럭 구색을 갖춘 수십 그루의 나무와 아직 새싹이 돋기엔 요원한 누런 잔디밭이 전형적인 소나무 벤치와 더불어 공원 구석구석을 소박하게 메우고 있었다. 한구석에 놓인 농구대를 제외하면 운동 시설이라곤 전무하기도 해서 보통의 동네 근린공원과는 달리 새벽 운동을 하러 나온 사람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개를 산책시키러 나온 사람들이 가끔씩 들를 뿐, 뿌연 새벽안개에 싸인 공원은 고즈넉하기만 했다. 적당한 밝기로 드문드문 공원 안을 비추고 있는 가로등 불빛도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차츰차츰 늘어가는 거리의 사람들을 신경 안 쓰고 그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장소로 이만큼 맞춤인 곳은 근처에 달리 없을 터였다. 자신에겐 꽤 그리운 장소이기도 했다. 유치원은 물론 국민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도 성준과 거의 붙어살다시피 한 아지트 중 하나였으니까.
공원 가장 안쪽의 어린이 놀이터 앞까지 들어가 벤치 하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잠시 자신의 얼굴을 살폈을 뿐, 그도 얌전히 옆에 자리를 잡았다.
“……저, 담배 한 대 피워도 될까, 위야……?”
빈속에 담배가 좋지 않다는 걸 알지만 꽤 오래전부터 참고 있었을 그였다. 애연가이면서도 흡연을 하지 않는 자신을 배려해 자신과 만날 때면 거의 한두 대 이외엔 피우지 않았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점퍼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알싸한 담배 향이 서늘한 공기 속으로 천천히 퍼져갔다. 역시 자신 때문인지, 3분의 2쯤을 부지런히 태우고는 바로 비벼 끄는 그다.
“……빈속에 괜찮으세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기본 한 대씩은 피우는걸 뭐…….”
“좋은 습관 아니세요. 끊으시면 좋을 텐데…….”
“……응…… 나도 너 때문에 많이 노력 중인데 그게 쉽지가 않네…….”
“배고프시죠?”
자신 역시 약간 허기가 느껴져서 물어보았다. 자신보다 먼저 일어난 그는 더할 것이다.
“……좀 고프지만 너랑 이렇게 있는 게 더 좋으니까…… 이따 집에 가서 먹지, 뭘…….”
싱그러운 미소가 도톰하고 섹시한 입술 끝에 걸린다. 아름다워서 한동안 멍하니 들여다보다가 담배를 피우느라 잠깐 떨어졌던 그의 손을 다시 잡고 자신의 코트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엉덩이를 조금 움직여 그의 몸에 최대한 바싹 붙어 앉았다. 두꺼운 겨울 코트 덕분에 추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의 온기는 그리웠다. 그의 입가에서도, 자신의 입에서도 숨을 내쉴 때마다 보일 듯 말 듯한 입김이 새어나왔다. 역시 아직은 꽤 쌀쌀한 날씨인 모양이었다.
“……안 추우세요?”
“……응…… 공기가 상쾌해서 기분 좋아…….”
“저도요.”
상쾌한 공기가 좋은 건지, 그와의 데이트가 좋은 건지 실은 잘 모르겠다. 그저 마냥 좋다는 느낌만이 강하게 전신의 감각을 사로잡고 있었다. 차갑고 상쾌한 공기도 좋고, 푸르스름한 안개에 싸인 새벽 풍경도 좋고, 움직일 때마다 둔중한 아픔을 일으키는 전신의 근육통마저도 좋았다. 곁에 앉은 소중한 친구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의 고개가 점점 옆으로 기울더니 위의 겨드랑이 틈으로 얼굴이 폭 파묻혔다.
“……하지만 네 냄새가 훨씬 더 좋아…….”
“……어제 땀을 많이 흘린데다 샤워도 안 해서 꽤 지독할 텐데요.”
강아지처럼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는 몸짓이 귀여워 절로 빙그레 웃음이 터졌다.
“……아냐, 더 좋아. 너무너무 좋아, 네 냄새…….”
새삼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이해에 대해서 생각을 한다. 그를 알게 되고 또 호감을 갖기 전이었다면, 게이가 자신의 체취를 들이마시며 좋다는 고백을 되풀이하는 것에 어떻게 반응했을까? 틀림없이 극도의 혐오감을 표출하며 상대를 배척했을 것이다. 처음 그를 만나고 한동안은 자신 또한 그를 불쾌해하고 가혹한 판단을 내리길 거듭하지 않았던가.
타인을 이해하고, 벽을 허물고, 그리고 내면 깊숙이 받아들인다. 내면을 비집고 들어온 타인은 저도 모르는 사이 자신과 뒤섞여 서로의 이질성을 마모시켜간다. 어느새 타인이 아니게 되어버린다. 그가 게이이든 아니든, 나약하든 강인하든, 결함이 많든 적든,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모든 측면을 납득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 안의 그도 그 모든 이질적인 면모를 뛰어넘어 그대로 납득하고 수용하게 된다.
“……제 자랑 하나 해도 돼요?”
겨드랑이 틈으로 파고 들어온 그의 정수리 위에 코와 입술을 파묻은 채 위는 상냥한 어조로 물음을 던졌다. 딱히 그의 대답을 듣기 위한 질문이라기보단 거의 독백에 가까운 흐릿한 속삭임에 불과했지만.
“……자랑?”
“예. 저 성적 좋거든요. 늘 전교 1등을 안 놓치죠. 별 이변이 없는 한 서울대에 가게 될 거 같아요.”
“…….”
한번 말문이 터지고 보니 어쩐지 잘 제동이 걸리지 않는다. 자신의 성역인 ‘우리 집’을 보여주고, 어두운 가족사를 고백하고, 또 그에 대한 호의를 숨기지 않는 것까진 좋았지만 이 이상 계속하는 것은 쓸데없는 수다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위의 입술은 마치 미용실에 모여 앉은 아줌마들처럼 되풀이 지껄이고 싶은 욕구로 근질근질했다. 아마 장소가 가져다주는 릴랙스한 분위기도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자치기며 구슬치기, 땅 따먹기 놀이에서 딱지치기와 다방구 놀이에 이르기까지 여기서 안 해본 놀이가 없었다. 해적놀이를 하다 휘의 다리를 접질리게도 하고, 불꽃놀이를 하다 놀이터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불을 질러 엄마한테 볼기를 맞기도 했었다. 유치원 솜씨자랑이 벌어진 곳도 여기였다. 피아노 레슨이 싫어 가출했다가 현준 형의 밀고로 엄마한테 도로 붙잡힌 장소도 바로 이곳이었다. 그랬다. 시선이 닿는 구석구석마다 행복한 유년 시절의 추억들이 고스란히 리플레이 되고 있었다.
“……의대를 갈 생각이에요. 공부 기간이 길긴 해도 가장 성공의 가능성이 보이는 길이니까요.”
“……그거라면 알고 있어. 교생일 때 내가 너 스토커처럼 쫓아다녔었다고 했잖아. 너 학교에서 유명 인사라구. 너에 관해 모르는 선생들이 없더군. 귀가 따가울 정도로 칭찬이 자자했지…….”
“후, 그랬나요?”
“……응. 진짜 굉장한 남자라서 고백은커녕 말조차 걸 엄두도 못 냈었다구…….”
“그래도 결국엔 엄청난 제의를 하셨잖아요. 흠, 남창이라는 걸 알고 좀 만만하게 보신 거죠?”
“……그…… 그건…….”
움찔 긴장하는 몸에 또 한 번 빙그레 웃음이 터졌다. 아아, 정말 새가슴인 남자다. 행여나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릴까 봐 그 부분에 있어서는 늘 신경을 세우는 그다. 코트 호주머니 안에서 마주 쥐고 있던 손에 와락 힘을 가해보았다. 약간 아픔을 느끼는지 손가락이 게 발처럼 버르적거리는 게 느껴졌다. 느슨하게 힘을 풀고 부드럽게 손가락 마디를 쓰다듬자 그의 손가락 역시 같은 애무를 보내온다. 정수리 근처를 떠돌던 입술을 좀 더 아래로 내려 싸늘하게 식은 귓불을 애무했다.
“……곤란해하시지 않아도 돼요. 솔직히 떳떳한 일은 아니죠. 저도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고 싶으니까요. 하지만 제 지금 형편상 이 이상으로 효율이 좋은 일은 없어요. 육체적으로도 가장 덜 힘들고 보수도 최고죠. 물론 정신적으로 많이 괴롭긴 해요. 어떤 땐 정말 제가 더러운 놈이라는 생각에 치가 떨리기도 하고…….”
“위야…….”
“……하지만 조금만 참으면 되는 일이니까요. 대학에 들어가게 되면 고액 과외 같은 것도 가능하니까 더 이상 몸은 팔지 않아도 될 겁니다. 일단 그러기 위해서라도 서울대는 꼭 갈 생각이지요.”
“…….”
“……그러니 선생님께서도 절 조금만 더 지켜봐주세요. 1∼2년만 지나면 더 이상 매춘은 하지 않을 겁니다.”
“……내가 뭘…….”
“……?”
“……내가 무슨 자격으로 널 비난할 수 있겠니. 나도 네 몸을 돈 주고 사는 형편인걸…….”
“아뇨, 선생님. 시작은 그랬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이젠 친구잖아요. 선생님은 제 소중한 친구이기도 하니까 충분히 절 꾸짖을 자격 있으세요. 그래서 지켜봐달라는 부탁을 드리는 것이기도 하구요.”
“…….”
“……선생님께 잘 보이고 싶습니다. 선생님께서 평가해주시는 것처럼 그렇게 근사한 친구로 남고 싶어요. 여자들에게 쉽사리 몸이나 파는 더러운 남창이 아니라…….”
“……위야…….”
“어어, 또 우세요?!”
“…….”
“……선생님……?”
“…….”
“……선생님…….”
자신의 코트 깃 아래 얼굴이 거의 파묻혀 있어 표정을 확인할 순 없었지만 조금씩 떨리는 어깨는 그의 격앙된 기분을 드러내주었다. 한동안 망설이다 그의 등으로 양팔을 뻗어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코트 날개 안으로 차게 식은 그의 얼굴을 덮어씌우듯이 그를 품었다. 자신의 가슴 근육 아래 뺨을 대곤 또 고양이처럼 부벼댄다. 자신의 허리에 감긴 그의 양팔에도 와락 힘이 들어가 있었다. 자신 역시 그의 상반신을 힘주어 안은 채 다정하게 등줄기를 쓰다듬어주었다. 어느새 푸르스름한 여명이 하늘을 서서히 밝히고 있었던데다 드문드문 눈에 띄기 시작한 행인들도 신경이 쓰였지만, 그와 떨어지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저 소중하고 애틋하다는 생각뿐이었다. 마음 가는 대로 껴안고 쓰다듬는 게 뭐가 어떻단 말인가. 소중한 친구와 정신적인 교감을 나누고 서로의 따스한 온기를 나누는 게 뭐 불순한 행동이라고.
생각해보면 신기한 만남이었다. 그를 마음속에 받아들이게 되기까지 거듭된 사건과 사람들…… 오주희, 윤열이 형, 공안 요원들, 그리고 강이 형…… 신비로운 우연과 인연의 연속이었다. 어느새 이렇게 자신의 온 마음을 사로잡아버린 매력적인 친구의 존재가 마냥 기적처럼 느껴졌다.
“……선생님은 눈물이 너무 많아요. 남자는 울음을 아껴야 한다는 편견도 웃기지만 그래도 자꾸 눈물을 보이면 멍청한 놈들은 대개 얕잡아 보게 마련입니다.”
따뜻하게 품고 있는 사이, 겨우 눈물을 그친 그에게 놀리듯 말을 꺼냈다.
“……멍청한 놈들 앞에선 나도 안 운다…….”
“후, 그런가요?”
억울한 듯 항변하는 목소리에선 짐짓 점잖은 권위가 묻어 나왔다. 새삼 권위를 세워봐야 먹힐까 보냐. 일곱 살 연상이라지만 응석받이 고양이 주제에 조금도 실감이 날 까닭이 없다.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귀여워서 그의 머리카락 한 줌을 왈칵 움켜쥐었다간 슬며시 놓아주었다. 나지막한 신음을 흘리더니 고개를 반짝 쳐들고 시선을 맞춰온다.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흘겨보지만 눈은 웃고 있었다. 제법 발갛게 부어오른 눈시울이 애처로우면서도 사랑스러웠다.
“……자랑…… 더 해줘봐…… 지금도 충분히 근사하지만…… 그렇지만…….”
애정이 듬뿍 담긴 어조로 노래하듯 속삭이는 입술을 살짝 빨아 당겨 키스했다. 입술을 붙인 채로 얘기를 계속하기가 부끄러운 듯, 자신의 눈을 들여다보던 시선이 조금 옆으로 비껴간다.
“……이제 다섯 달만 지나면 내 소중한 ‘친구’가 될 남자니까…… 헤어지게 되면 얼마나 손해일지 확실히 알아둬야지…….”
수줍어하는 게 재미있어서 입술 근처를 헤매 다니며 집요하게 짧은 입맞춤을 되풀이했다. 막 공원 입구로 들어선 누런 진돗개 주인만 아니었다면 위는 난처해하는 그를 무시하고 계속 장난을 쳤을 것이다. 섭섭한 심사를 애써 누르며 꽤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있던 그의 상반신을 비로소 놓아주었다. 처음 벤치에 앉았을 때처럼 나란히 놀이터를 굽어보며 몰래 그의 손을 훔쳤다. 진돗개 주인은 젊은 남자 둘이 이른 아침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는 것에도 별 이상은 못 느낀 모양이었다. 힐끗 시선을 주었을 뿐, 운동복 차림의 사내는 목줄에 묶인 진돗개에 끌려 금세 공원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제 결점들을 찾아내셔야 한다면서요.”
훔친 손을 다시 코트 주머니에 넣고 놀리듯 말을 이었다.
“서른 가지 이상을 찾으시려면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노력하셔야죠?”
“치, 그건 좀 더 나중에 시작해야 돼. 벌써부터 미운 점을 찾아내다 반대로 몰랐던 멋진 걸 덜컥 발견하게 되면 어떡해. 그동안 모아둔 미운 점이 말짱 꽝 될지도 모르잖아.”
“하하, 말도 안 돼…… 지금이야 당치 않은 콩깍지가 씌어서 그러시는 거죠…….”
“……콩깍지 아니라니까. 내 맘 잘 알지도 못하면서…… 빨리 얘기해봐. 공부 말고 또 잘하는 거 있어?”
“……음, 운동을 좀 했어요. 집안이 망하기 전까진 합기도랑 태권도를 익혔었지요. 지금이야 기술은 거의 다 까먹었지만 양쪽 모두 2단까지 땄던 실력이라 양아치들한테 맞고 다닐 정도는 아니죠. 한쪽 다리가 불편한 친구를 지킬 정도로는 손색없을 겁니다.”
“후후, 그리고 또……?”
“피아노도 꽤 쳤었지요. 네 살 때부터 열한 살 때까지 레슨을 받았으니까 무려 8년을 친 셈이죠. 주니어 콩쿠르를 휩쓸기도 하고 천재 소리도 들어봤습니다. 하긴 주니어 콩쿠르에서 상 못 타본 초보 피아니스트는 아마 단 한 명도 없을걸요? 요는 그 나이 땐 너나할 것 없이 다 천재라는 얘기죠. 엄마들 치맛바람과 피아노 학원 강사들의 장삿속이 함께 어우러져 북 치고 장구 치는 한심한 해프닝이란 겁니다.”
“아하하하하…….”
“아무튼 저도 피아노보다는 합기도나 태권도 쪽이 훨씬 좋았습니다만 엄마 등쌀에 억지로 계속할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그래봤자 전문 음악인은 될 수 없었을 겁니다. 가세가 기울지 않았더라도 말이죠. 기술적으론 괜찮았을지 모르지만 감수성은 영 제로였거든요. 엄마는 돌아가실 때까지도 제 천재성을 안타까워하셨지만 전 그 방면으로는 집안이 망한 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 여기고 있지요. 제가 그 우스꽝스러운 검정 제비 옷을 입고 무대에 오르는 게 상상이 되십니까?”
“하하, 왜? 나름대로 어울릴 거 같은데…….”
“천만에요. 레슨 시간은 정말 지겹기만 했는걸요. 음악 자체도 별로 안 좋아하고요. 하긴 피아노가 지긋지긋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음악을 싫어하게 된 건지도 모르겠지만……. 음치라서 노래 부르는 일도 딱 질색입니다. 학교 오락 시간이 제일 괴롭죠. 못 부른다고 매번 튕길 수도 없고…… 합창 대회도…… 도대체가 남학교에서 매년 봄마다 꼬박꼬박 합창 대회 같은 걸 연다는 게 이해가 가십니까? 전 도무지 이해가 안 가요. 여학생들이라면 아마추어라도 목소리가 고와서 그럭저럭 들어줄 만하지만, 저만한 떡대들이 왕왕 울리는 바리톤으로 높은 음을 잡기 위해 매일 하이한 괴성을 질러댄다고 상상해보세요. 그것도 한 달 내내요. 끔찍한 일이죠. 합창 대회 연습이 있는 한 달 동안은 정말 참기가 힘들어요.”
불만의 기색이 역력한 길고 퉁명스러운 성토로 말문을 닫자 그의 얼굴에 개구쟁이 같은 미소가 번졌다. 줄곧 맞은편 놀이터 그네를 향해 있던 그의 시선이 마침내 자신의 얼굴로 떨어졌다. 환하게 웃음을 머금고 있는 아름답고 섬세한 이목구비를 한동안 넋을 잃고 들여다보았다.
“……하긴 우리 때도 좀 괴로웠지. 한 달 내내 똑같은 곡만 듣는 것도 지겨운데 그 실력들이란 게 또 하나같이 죽여줬으니까…….”
“…….”
“……그런데 정말이니? 정말 너 음치야?”
잦은 키스 탓에 도톰하고 붉게 부어오른 그의 입술이 벙긋 벌어지며 놀리는 듯한 물음이 던져지고 나서야, 위는 퍼뜩 달콤한 백일몽에서 빠져나왔다. 벤치에 앉은 이래 줄곧, 이 예쁜 얼굴을 자세히 지켜보고 싶어했다는 걸 비로소 깨달은 순간이었다. 어쩐지 조금 빨라진 심장 박동을 느끼며 천천히 대꾸했다.
“……그것도 아주 지독한 쪽이죠. 못 믿으시겠다면 지금 불러드릴 수도 있어요. 한 소절이 끝나기도 전에 비명을 지르실걸요? 당장 때려치우라고.”
“아하하하하…….”
“……동해∼물과 백두우산이∼ 마르고 달토록∼∼∼∼.”
제대로 가사를 외우는 거의 유일한 곡일 애국가를 나지막하게 부르기 시작했다. 막상 노래를 시작하고 나서야 자신의 낯 뜨거운 돌발 행동을 자각했지만 별로 후회를 하진 않았다. 공원 구석구석까지 상쾌하게 퍼지는 그의 웃음소리가 아니었다면, 아마 자신도 그렇게까지 오버를 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에∼∼∼∼ 무궁화 사암천리 화려가앙산∼∼∼∼.”
“와하하하하하!!!!!! 아하하하하!!!!! 하하…… 핫!!!!”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와하하하!!!!! 앗…… 핫핫!!! 하하!! 아하하하하하!!!!!!”
노래가 계속될수록 그의 웃음소리도 걷잡을 수 없으리만큼 자지러졌다. 얼굴은 새빨갛게 상기되고, 눈가엔 눈물까지 맺히고 있었다. 허리를 앞으로 꺾은 채 온몸에 경련을 일으킨 듯 웃어젖히다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붕어처럼 입을 벙긋거리며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기도 했다. 더한 폭소가 그 뒤를 이은 것은 물론이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최악의 애국가를 노래하는 음치가 신기하긴 했나 보다. 자신의 귀엔 별로 이상하게 들리지 않지만 성준이나 휘나 혜윤이가 그렇게까지 치를 떠는 걸 보면 확실히 흉악하긴 한 모양이었다. 그의 반응 역시 다른 이들과 한가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새삼 상처받을 자신은 아니다. 그야말로 웃음의 폭풍에 휘말려버린 듯한 그에게 아랑곳 않고, 느긋하게 3절을 마친 다음 마지막 4절까지 논스톱으로 선물해주었다.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무궁화 사암천리 화려가앙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마지막 소절에 가서는 그는 아예 웃음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몹시 고통스러운지 허리를 90도 가까이 앞으로 꺾은 자세로 배를 움켜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코트 주머니 속에서 움켜쥐고 있던 손이 아니었다면 자지러지다 못해 벤치 아래로 고꾸라졌을 것이다.
놀고 있던 나머지 손을 그의 겨드랑이 틈에 집어넣고 구겨진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온몸의 힘이 풀린 그는 헐떡거리며 자신의 품 안으로 무너져 내렸다. 숨조차 쉬기 힘들어하는 그가 조금 걱정이 되었다.
“……웃다가 죽는 사람은 없겠죠?”
“……흐…… 흑…… 프…… 푸풋…… 푸하하하하…… 윽…….”
“……지독한 음치. 결점 한 가지는 찾아낸 셈이죠, 선생님?”
“아하하하하하…… 핫…… 하하…… 앗…… 히끅…….”
“……그만 진정하세요. 힘드시잖아요.”
“……윽…… 큭…… 그…… 하…… 하지만…… 크…… 크크크…… 큭…… 으…….”
“10초 셀 동안 안 그치시면 키스해버릴 겁니다?”
“……아…… 안…… 크크…… 배 아파…… 훗…… 푸훗…… 윽…… 큭…… 아하하하하…….”
“1초…… 2초…… 3초…… 4초…… 진짜 야한 키스 합니다?”
“……하…… 하하…… 핫…… 사…… 살려…… 줘…… 핫…… 앗…….”
“7초…… 9초…… 땡…….”
“안…… 하…… 아하하…… 핫…… 웁!!!”
“…….”
입술을 겹치고 그가 못 견뎌하는 관능을 망설임 없이 풀어헤쳤다.
물론 그의 발작과도 다름없는 웃음을 멈추기 위해 시작한 키스였지만, 자신까지 흥분을 해버리게 된 것은 계산 착오임에 분명했다.
처음 1분쯤은 기진맥진한 시체처럼 간신히 공격을 견뎌낼 뿐이던 그는 이윽고 걷잡을 수 없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아래로 축 늘어져 있던 양손이 어느새 자신의 목줄기를 부서져라 휘어 감아왔다. 뱀처럼 꿈틀거리며 얽혀든 혀가 쫓고 쫓기는 공방전을 거듭했다. 짐승처럼 깨물고 흡혈귀처럼 빨아 마셨다.
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둥둥거리는 고동이 시끄러울 정도로 고막을 울려댔다. 분명 리드하는 쪽은 자신이었다. 목구멍 안쪽 깊숙이를 혀끝으로 찔러주면 그는 몸부림을 치며 허리를 흔들어댔다. 그러나 그의 격렬한 반응에 자신 역시 심지까지 오싹오싹 흥분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뭔가 위험하단 생각이 들었다. 계약된 시간도 아니었고, 더더구나 그의 즐거움을 위해 서비스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욕구일 뿐이었다. 명백히 이기적인 욕구를 따라 움직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무슨 욕구……?
위험한 질문이 설핏 뇌리를 스쳐갔다. 답은 금방 흘러나왔다. ……박고 싶어……. 미친 듯이 쓸어대고 있는 손바닥 아래, 그의 도드라진 등뼈의 감촉이 느껴졌다. 아찔할 정도로 기분 좋은 감촉. ……뜨겁고 축축한 점막 안쪽, 부서뜨릴 것처럼 조여대는 그의 심연 깊숙이 파고들어가고 싶어……. 접착제처럼 막무가내로 달라붙어오는 그의 혓바닥에 소름이 끼쳤다. 씹어 삼키고 싶었다. 발정 난 짐승처럼 느닷없이 휘몰아쳐오는 성욕에 두려움마저 느껴졌다. ……박고 싶어…… 박고 싶어…… 박고 싶어…… 박고 싶어……. 천박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 사방에서 메아리쳤다.
……진정해, 문위…… 머리를 식혀……. 격렬한 관능의 쇠망치로 두들겨 맞아 빈사 상태에 빠진 이성이 저 멀리서 흐릿하게 외치고 있었다. ……친구야…… 친구잖아…… 친구를 범하자는 거냐……?
그러나 바짝 치켜 올라간 페니스는 당장이라도 그를 쑤시고 들기 위해 기를 쓰고 있었다. 아, 그래…… 이것 봐…… 그도 원하잖아……? 날 원하고 있어…… 그저 서비스야…… 서비스일 뿐이야…… 아아, 하지만…… 하지만…….
한계까지 발기한 하반신이 괴로울 정도로 요동을 치고 있었다. 더 이상 시끄러운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위는 단숨에 사고를 절단했다.
고삐가 풀린 욕망은 미친 듯한 정열로 품 안에 떨어진 육체를 탐하기 시작했다. 집어삼킬 기세로 그의 입안을 빨아들이던 입술을 목덜미 아래쪽으로 옮겨가자, 흐느끼는 듯한 불만의 신음이 그의 목울대를 울리며 토해졌다. 평소의 자신이라면 철저하게 그가 원하는 방식대로 따라주었겠지만, 이성적 사고란 이미 깡그리 날아가버린 터였다. 그의 처절한 욕망 못지않게 자신도 이미 미쳐 있었다.
강아지처럼 낑낑대며 자신의 입술을 찾는 그를 모르는 체, 먹고 싶었던 만큼 실컷 그의 목울대를 빨았다. 점퍼를 열고 티셔츠를 밀어 올린 뒤 아랫배와 가슴 근육 사이를 번갈아 오가며 얼굴을 통째로 문질러댔다. 수염이 따가운지 자신의 뺨이 스칠 때마다 그가 움찔거리며 괴로운 한숨을 흘렸다. 자꾸만 뒤로 도망치려는 허리를 틀어쥐고 정신없이 달라붙었다. 바짝 일어선 검붉은 젖꼭지를 허겁지겁 빨아먹었다. 알 수 없는 기갈에 개처럼 잘근잘근 물어뜯기도 했다. 여자와는 다르게 납작한 근육에 불과하고, 그저 그 위에 마지못해 삐죽 솟아 있을 뿐인 헐벗은 모양새임에도 별로 불만스럽지 않았다. 좋아하는 체취에 좋아하는 피부 감촉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아랫도리가 나사처럼 죄어왔다. 당장 달라붙고 싶었다. 달라붙겠다. 그럴 것이다.
“……흑……! 위…… 위위…….”
“…….”
“……흣……! 흐읏!! ……! 아……! 하앗!!!”
너무나 좋아하는 목소리가 먹먹해진 귀청을 두드리며 흐릿하게 전해졌다.
“……좋…… 아…… 흑……! 좋아해……! 위…… 야…….”
주린 듯이 마음껏 탐욕을 채우고 있던 짐승의 머리 위로 따스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의 양팔이었다. 힘이 거의 들어가 있지 않은 가냘프기 짝이 없는 포옹이었다. 무언가 불안한 기분이 엄습했다.
“……좋아…… 흑……! 그만!! ……! 저…… 정말 좋아…… 해…… 네가 정말…… 너무 좋아…….”
순간 찬물을 뒤집어쓴 것마냥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활처럼 허리를 휜 채 자신의 머리를 감싸 안고 있던 그의 몸을 사나운 기세로 밀어냈다.
참을 수 없는 욕망으로 흐릿해진 시야 너머, 휘청거리는 그의 상반신이 보였다. 시체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이 괴로운 듯이 일그러져 있었다. 입가와 턱은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으로 범벅이 돼 있고, 자신의 양손에 붙잡힌 어깨는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도로 달라붙어 한 몸이 되기 위해 기를 쓰고 있지만, 억세게 움켜쥔 채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자신의 손아귀를 뿌리치진 못하고 있었다. 핥아먹을 것처럼 시선만의 애무를 거듭했다. 필사적으로 애원을 보내는 그의 물기 어린 시선에 극심한 죄책감을 느꼈다.
……개새끼, 제정신이 아니야……!
펌프질을 하듯 거칠게 토해지는 숨을 가까스로 가누며 위는 스스로를 향해 사나운 욕설을 퍼부었다. 친구를 범하려 들다니 개새끼도 이런 개새끼가 없었다!!!
“……차로 갈까요, 선생님……?”
발정 난 개의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자신의 목소리라곤 차마 생각하기 싫을 만큼 끔찍하게 혐오스러웠다. 그의 양쪽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밀어 넣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최대한 소중하게 다루고 싶었지만 한껏 발기한 자신의 몸은 좀처럼 수그러들 기세가 아니었다. 한쪽 손을 잡고, 휘청거리는 그의 몸을 질질 끌다시피 공원을 빠져나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까지 지독한 성욕을 느껴본 것은 처음이었다.
……성욕이라니…….
정확히 그 실체를 자각하기도 전에 먼저 여자들을 안은 자신이었다. 자신의 욕구 충족은 늘 뒷전이었고, 여자들을 만족시켜야만 한다는 의무가 최우선 과제였었다. 물론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즐기게 되었다. 오르가슴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자발적인 욕구 따위 자신의 사전엔 없는 단어였다. 성욕을 참을 수 없어 자위를 한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딴 세상 얘기였다. 섹스는 즐거움이라기보단 생존의 문제였고, 오르가슴이란 대박을 맞은 도박꾼이 어쩌다가 동정하듯 던져준 초라한 개평 같은 것에 불과했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 자신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느닷없이 성욕이라니……!
흥분으로 전신이 후들후들 떨렸다.
다리에도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몸이 아닌 것만 같았다. 주변이 잘 보이지 않았다. 행인이 있는지 없는지, 날이 얼마나 밝은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몇 미터 전방의 BMW만 시야를 가득 메웠다. 꿈속을 걷는 것처럼 몽롱했다.
벌벌 떨며 자꾸 헛손질만 거듭하는 그에게서 키를 뺏어들고 직접 열쇠구멍에 꽂아 넣었다. 좀 더 공간의 여유가 있는 뒷좌석으로 그를 밀어 넣고 자신도 따라 들어가 문을 잠갔다.
채 자리를 잡고 앉을 틈도 없이 그의 양손이 머리를 잡아당겼다. 입술이 겹쳐졌다. 문어발처럼 착 감겨오는 부드러운 몸뚱이를 부서트릴 기세로 마주 안았지만 절대로 그가 원하는 행위를 해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마지못해 혀를 얽으며 그의 바지를 벗겨냈다. 팬티와 함께 허벅지 중간까지 바지를 내리고 그의 치부를 감싸 쥐었다. 자신만큼 제정신이 아닐 그였기에 망설이지 않고 박차를 가했다. 역시 채 3분도 걸리지 않았다. 뿌리 끝까지 맹렬하게 훑다가 마지막에 엄지손톱 끝으로 요도를 찔러주자, 기다렸다는 듯 뜨거운 체액이 쏜살같이 뿜어 나왔다. 집을 나서기 전에 한 번 배출을 한 터라 양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온몸을 뒤틀며 교성을 토해내는 그의 입술을 틀어막고 몇 번 더 훑어 올렸을 뿐, 더 이상의 후희를 계속해줄 수는 없었다. 격렬한 오르가슴에 몸서리를 치는 그가 안쓰럽기도 했지만 자신의 욕구 또한 절박했기 때문이다.
죄책감과 수치감 탓에 어느 정도 수그러들었던 페니스는 그의 자지러지는 교성을 듣는 순간 다시금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올랐다. 그를 범하고 싶은 나머지 저절로 허리가 흔들렸다. 욕구가 절박하면 할수록 죄책감과 미안한 마음도 더해갔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며 절망적인 기분이 들었다. ……당장 어떻게든 해야 해…….
초인적인 의지를 기울여 품 안의 그를 맞은편 구석으로 밀쳐냈다. 아무래도 거친 몸짓에 그는 조금 놀란 듯했다. 어리둥절한 눈이 잠시 자신의 시선을 붙들었지만 다행히 다시 포옹을 하려 들지는 않았다. 물론 그럴 기력도 없을 것이다. 시트 바닥에 반쯤 기대 누운 자세로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는 그를 확인한 후 마침내 고통스러운 자신의 치부로 손을 가져갔다.
손가락은 떨리고, 페니스는 잔뜩 부풀어 있어 지퍼를 내리는 것이 몹시 힘겨웠다. 뻣뻣한 질감의 청바지가 그렇게 거추장스러울 수가 없었다. 지루한 탐색전 끝에 간신히 목표에 도달한 손가락이 음낭까지 한꺼번에 틀어쥐고 거칠게 힘을 가했다. 허기진 대로 몇 번 급하게 훑어 올리고 나니, 사납게 전신으로 몰아치던 초조감이 사라지고 비로소 부서질 것 같은 쾌락이 왔다. 전기가 오를 듯한 아찔한 쾌감에 눈앞이 흐릿해졌다.
“……위야…….”
욱신…….
여전히 가쁜 숨결이 느껴지는 흐릿한 부름이었다. 속삭이는 듯한 부름은 처절한 양심의 사투에도 불구하고 지독하게 달콤한 상상력을 선사했다. 애써 외면하고 있던 시선은 자동인형처럼 옆 좌석의 아름다운 얼굴에 가 닿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검고 맑은 눈동자가, 자신이 너무나 좋아하는 섬세한 눈동자가 블랙홀처럼 자신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자신의 손안이 아니라 그의 몸 안에 뿌리 끝까지 박아 넣은 듯한 생생한 착각에 전율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이상했다. 자신의 어딘가가 몹시 이상해진 것이 틀림없었다.
손목이 부러질까 두려울 정도로 격렬하게 움직여댄다. 뇌수까지 빨아 당기는 듯한 뜨겁고 강렬한 조임에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만 같았다. 너무 좋은 나머지 정신이 나가는 게 아닐까 더럭 겁이 났다. 처음이었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지독한 쾌락이었다. ……아아, 이렇게 좋다니, 이렇게 좋을 수가 있다니!!!!!!
“……위야…….”
“후읍!!!”
개새끼같이……. 이래서야 억지로 참은 보람이 없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그로부터 가까스로 시선을 비꼈다. 까무러칠 것 같은 쾌락의 폭풍에 휩쓸려 들어가면서도 역시 일말의 양심은 살아 있었다. 천만 다행이었다. 필사적으로 기억의 갈피를 뒤져 누군가의 나신을 떠올렸다. 둥글고 풍만한 가슴을, 커다랗게 클로즈업된 바기나를, 피처럼 붉은 립스틱이 발린 도톰한 입술을 떠올렸다. 누구의 몸인지는 알 필요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고객들 중 하나일 수도, 아니면 그가 틀어주곤 하는 포르노 영화의 헤로인일 수도, 아니면 그 둘 다일 수도 있었다. 상관없었다. 소중한 친구의 몸만 아니라면 그 누구라도 좋았다.
얼마나 오래 허리를 흔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얼마나 여러 번 체위를 바꿨는지도 기억에 없었다. 오르가슴의 여파는 너무나 강력해서 정사의 기억을 거의 백지로 만들어버렸다. 자위가 아니라 실제 섹스였다고 해도 이렇게 온몸이 갈가리 부서지는 듯한, 천 길 낭떠러지로 단숨에 곤두박질치는 듯한 극도의 오르가슴은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한동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뿌연 안개가 낀 듯하던 시야가 점점 밝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증기기관차처럼 요란스레 헐떡이고 있는 자신의 숨소리도 어렴풋이 느껴졌다. 코끝으로 파고드는 익숙한 냄새는 자동차의 가죽 시트 냄새였다. 시트에 푹 파묻히다시피 등을 기댄 채 자신은 전방의 조수석 의자 등받이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틀림없이 바보 같은 꼬락서니를 하고 있을 것이다. 아랫배를 거쳐 사타구니에 이르기까지 저릿한 쾌락의 여운이 감돌았다. 손안에 쥐인 자신의 페니스는 축축하게 젖은 채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얼굴은 물론 전신이 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두꺼운 모직 코트까지 걸치고 그 짓을 해댔으니 말해 무엇 하랴.
제정신이 돌아온 것을 겨우 자각했지만 한동안은 꼼짝도 하기 싫었다. 노곤하면서도 달콤한 여운을 언제까지나 붙들고 싶었다. 날은 완전히 밝아 있었다.
“……아깝게…… 혜윤이도 없는데…….”
섭섭한 기색이 역력한 나지막한 탄식이 옆에서 들렸다. 멍하니 그 의미를 좇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아아, 귀여운 사람…….
“……휴지가 없어서 어떡하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는 어조에서 살짝 걱정이 비친다. 세심한 성미도, 배려심도 귀엽기 짝이 없다.
“……괜찮습니다. 집에 가서 샤워하면 되는데요, 뭐.”
젖은 오른손을 바지춤에 대충 문질러 닦고 지퍼를 채웠다. 사타구니며 손이며 청바지까지 축축하고 끈끈하게 남은 방사의 자취가 신경 쓰였지만 기분은 산뜻했다. 아마도 난생처음일 치명적인 유혹에도 불구하고, 끝내는 친구를 안주 삼지 않은 자신이 대견하게 생각되었다. 물론 무언가 깊이 반성을 해야만 할 일이라고 여전히 양심이 아프기는 했다. 그러나 당장은 그럴 만한 의지가 생기지 않았다. 뜻밖의 체험이 가져다준 쇼크를 소화하는 것만도 압도적인 기분이 들었다.
“……몇 시죠, 선생님?”
아직 그를 바라볼 용기는 없는 것일까? 여전히 의자 등받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물음을 던졌다. 얼굴로 슬쩍 더운 열기가 몰리는 걸 보니 수치감 또한 별로 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아차! 7시 다 돼가네? 학교 지각하지 않으려면 서둘러야겠다…….”
“……예…….”
오늘 1교시 수업이 무엇인가를 재빨리 더듬었다. 국사……. 제껴도 별 대미지가 없는 과목이었다. ……좀 더 그와 함께 있을 수 있어……. 만족스럽게 되뇌었다가 곧바로 후회했다. 양아치가 된 기분이었다. ……고 3의 자각이 없구나…….
쓴웃음이 나왔다. 역시 오늘의 자신은 어딘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느닷없이 성욕을 느끼질 않나, 태연하게 땡땡이를 작정하질 않나…….
“……앞으로 옮겨 타게 내려, 위야. 집에 데려다줄게…….”
“…….”
“……출발해야 한다니까…….”
“…….”
“……위야……?”
“…….”
“위야…….”
“……조금만 더 있다 가요.”
부러 피곤한 기색으로 대꾸했다. 눈을 감은 채 긴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연기에 실감을 더했다. 예상대로 상냥한 채근은 쏙 들어가고 달콤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드물게 환한 햇빛이 사방에 가득했다. 검게 선팅이 돼 있는 차창이 아니라면 몹시 눈이 부셨을 것이다. 공원이 큰길에 면해 있는 게 아닌데도 곳곳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들이 요란했다. 활기찬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만물이 깨어나 움직이게 될 역동적인 봄을 예고하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랬다. 다시 힘차게 뛰어야만 할 시간이었다.
이 행복한 순간을 아무리 연장하고 싶어도, 정말로 시간이 그대로 멈춰버렸으면 하고 어린애처럼 은밀한 소원을 빌어도, 아직 갈 길은 너무나 멀었다. 목표는 아직 너무 멀리 있었다.
문득 깃털처럼 부드러운 터치를 손가락에 느꼈다. 좌석 시트 위에 무심히 늘어져 있던 자신의 왼손 위로 그의 손이 포개지고 있었다.
“……주니어 천재 피아니스트라선가? 이렇게 손이 예쁜 건…….”
“…….”
“……굉장히 크고 날씬해. 손가락 마디도 너무 예쁘고…… 아주 오랫동안 엄격한 레슨을 받은 것 같은 손이야…… 어머님께서 정말 속상해하셨겠다…….”
잠깐 긴장했지만 다행히 더 이상의 성욕은 일지 않았다. 겨우 그를 쳐다볼 용기가 생겼다.
마주 쥔 손을 향해 떨어져 있던 그의 고개가 자신의 얼굴로 이동하는 것이 보였다. 시선이 마주쳤다. 맑고 까만 눈이 쌍꺼풀 없는 섬세한 눈시울 안쪽에서 가만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대로 풍덩 빠지고 싶은 기분이 들 만큼 호수처럼 깊고 아름다운 눈매였다. 섹스의 자취가 선연한 상기된 얼굴도, 연한 카키색 점퍼와 티셔츠가 소박하게 감싸고 있는 늘씬한 몸도 모두 자신의 눈을 기쁘게 했다. 결점 하나조차 찾기 힘들 만큼 예쁘고 정갈한 용모라고 생각되었다.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괜찮아……? 많이 피곤하니……?”
“…….”
“……아무래도 괜히 나왔나 보다. 어제 그렇게 중노동을 했는데…… 그냥 더 자게 뒀으면 좋았을걸…….”
“…….”
말짱 교활한 연기에 고스란히 속은 채, 미안한 듯 속삭이는 그다. 피곤해하는 그를 이리저리 끌고 다닌데다 흥분을 유도해 섹스까지 하게 만든 인간은 되레 자신이건만.
한동안 홀린 듯이 그의 얼굴만 들여다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그를 안아버렸다. 잠시 망설이는 듯했지만 순순히 품 안으로 끌려 들어오는 그의 상반신을 얼싸안고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어깨와 허리를 양팔로 꼭 감은 채 목덜미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너무 좋아하는 감촉에다 너무 좋아하는 냄새였다. 더 이상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완벽했다. 그저 이 순간 이대로 모든 게 완벽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완벽한 충만감을 음미했다. 행복을 만끽했다. 딱 1분만 더…… 하고 뇌까린 게 어느새 2분이 되고, 곧 5분이 되더니만 결국 10분이 넘어가고 말았다.
“……바보야…….”
숨이라도 죽인 것마냥 꼼짝 않고 자신의 코트 깃 틈에 얼굴을 묻고 있던 그가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
“……이렇게 다정하게 대해주면 어떻게 미운 점을 찾아…….”
“…….”
“……친구라는 게 어쩐지 더 잔인하다는 생각이 드네…….”
“…….”
“……차라리 막 대해주면 더 단념하기 쉬울 텐데…….”
“…….”
“……후후, 아냐…… 실은 정말 좋다, 위야…… 정말 요즘은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만 같아…… 너무 행복해서 이러다 벌 받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라니까…….”
“…….”
“……애인이 아니면 어때…… 이렇게 친구로라도 좋아해주는데…… 이렇게 다정하고 상냥한데…….”
“…….”
바늘로 가슴을 찌르는 것처럼 욱신거리는 통증이 홀연 현실을 자각시켰다.
목구멍에 돌덩이가 걸린 것만 같은 묵직한 아픔이 취한 듯 완벽했던 행복감을 천천히 부서트리고 있었다. 무언가 날카롭고도 시린 전조 같은 것에 문득 진저리를 치며, 위는 그의 몸을 끌어안고 있던 팔에 와락 힘을 주었다. 저항이라기보단 어딘가 분노에 가까운 몸짓이었다.
아픔을 느끼는지 그가 약간 허리를 뒤틀며 가느다란 한숨을 흘렸다. 한동안 부서트릴 기세로 힘찬 포옹을 거듭하다가 천천히 팔의 힘을 풀었다. 품 안에 파묻혀 있던 그의 고개를 들어 올리고 입술을 기울여 키스했다. 알 수 없는 불안과 안타까운 감정이 함께 실린 절박하면서도 부드러운 결합이었다. 서로의 타액을 나누듯이 서로의 온기를 나누었다. 아마도 희망과 용기라 이름 붙이는 것이 가장 적절할, 어떤 내밀한 감정도 나누었다. 시린 가슴속을 서서히 따스하게 채워가는 교감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목이 메었다.
……이 사람이 좋았다. 혜윤이만큼, 휘만큼, 강이 형만큼…… 성준이나 윤열이 형만큼 좋았다. 엄마와 아버지만큼 소중했다. 소중하고 소중해서 가슴이 아렸다. 언젠가는 잃게 될지도 모를 소중함이었다. 아니, 잃는 것이 당연했다. 그것이 삶의 본질이었다. 영원한 것은 없었다. 소중하면 소중할수록,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그것은 덧없는 신기루처럼 홀연 사라지게 마련이었다…….
“……집에 데려다주시겠어요, 선생님?”
꽤 오랫동안 그의 입술을 빨았던 것 같았다. 축 늘어진 채 숨이 턱에 닿아 할딱거리는 그를 다시금 품에 안고 그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 마침내 고른 호흡을 흘리기 시작한 그를 마지못해 놓아주고 차 밖으로 걸어 나왔다. 서늘한 아침 공기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섬뜩하게 다가들었다. 조금 비틀거리며 차 문을 빠져나오는 그를 부축해 운전석까지 데려다주었다. 보닛을 돌아 조수석에 타자 그가 곧 차를 출발시켰다.
이미 조금씩 막히기 시작한 성산대교를 빠져나오느라, 차는 올 때보다도 5분쯤이 더 걸린 25분 만에 고척동 집에 도착했다. 운전하는 내내 조용히 가라앉은 표정을 짓고 있던 그가 자신의 안전벨트를 풀어주며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보내왔다.
“……빨리 들어가봐. 서두르면 지각은 안 할 거야.”
“……예. 데려다주셔서 고맙습니다.”
“고맙긴 무슨…… 오늘 정말 즐거웠어, 위야. 알지……?”
흡사 꽃이 피어나듯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입가가 활짝 벌어지며 빛처럼 새하얀 웃음이 퍼졌다. 너무나 행복해 보여서 도리어 깊은 심금을 할퀴는, 처연하기 짝이 없는 웃음이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오늘 예정은 캔슬 하는 거다? 피곤할 테니 푹 쉬어. 금요일에 보자.”
막 차 문을 열려다가 그대로 동작을 멈췄다.
“……수업 끝나고 바로 가겠습니다. 따로 전화는 안 드릴게요.”
필요 이상으로 감정이 드러날까 봐 시선은 정면을 향했다. 최대한 무뚝뚝한 어조를 고수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말 괜찮은데…….”
“……제 개인 사정에 일일이 맞출 수는 없습니다. 선생님을 친구라고 생각하지만 그것과 일은 별개라고 생각합니다. 계약이 끝날 때까지 성실하게 서비스를 해드리는 것이 제 의무입니다. 그래야 저도 떳떳하게 선생님께 돈을 받을 수 있구요.”
“……그…… 그런가…….”
차가운 어조를 하니 역시 금세 주눅이 드는 그다. 꼭 안아주고 싶을 만큼 애처로워도 확실히 해야만 할 일이라고 마음을 다잡는다. 원칙이나 자존심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 역시 그를 만나는 일이 즐겁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건 그에게 알릴 필요가 없을 것이다.
“……6시 반쯤엔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기다려주세요.”
우물쭈물 망설이면서도 차마 뭐라 대꾸를 못 하는 그를 못 본 체 차에서 빠져나왔다.
“들어가세요.”
선팅이 돼 있어서 차 안의 그를 살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마주 선 자신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꾸벅 인사를 하고도 여간해선 움직일 생각을 않는 차를 향해 거의 쫓을 기세로 손을 흔들었다.
겨우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부신 아침 햇살을 받아 거의 은색으로 보이는 늘씬한 차체는 순식간에 골목 모퉁이를 돌아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차가 완전히 사라지고도 위는 한동안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알 수 없는 슬픔이 저 아랫배 깊숙한 곳으로부터 올라오고 있었다. 뼈가 시릴 정도의 고독감이 올라오고 있었다. 몇 시간만 있으면 다시 보게 될 친구인데도, 다시 만나 웃고 떠들고, 또 만지고 키스까지 할 친구인데도, 영영 사라져버린 그 누군가들처럼 안타까운 나머지 목이 메었다. 사내자식이 웬 감상인가 싶어, 아무리 마음을 다잡으려고 해도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한 허무한 적막감은 쉽사리 사라지지가 않았다.
봄인 모양이었다. 아, 그래. 봄이라서 슬픈 것이다. 봄은 그런 계절이다. 저만 잘났다고, 저만 행복하다고, 홀로 남겨진 겨울 따윈 아랑곳 않고 신이 나서 꽃을 피워대고, 세상을 노래하고, 아지랑이로 춤을 춰대는 그런 계절이다. 그런 계절이 오고 있었다.
3월 둘째 주 월요일.
눈부신 햇살이 가득 내리쬐고 있는 화창한 아침이었다.
며칠만 있으면 골목 어귀 담장마다 노란 개나리꽃이 만발할 것이다.
봄이 저만치 만개하고 있었다. 춤을 추며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겨울만은 여전히 홀로 남아, 세상을 차게 얼리고 있다는 것을 위는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