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 1990년 4월. 장인환(張仁歡) (11/129)

11. 1990년 4월. 장인환(張仁歡)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는지 기억에 없었다. 

몇 분 간격으로 걸었는지도 물론 기억이 나질 않는다.

심장이 요란스레 뛰고 있었다. 입안에 침이 마르는 듯한 느낌에 수시로 주방을 들락거리며 물을 마셔야만 했다. 아무 생각도,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전화기 옆에 붙어 앉아 그와 연락이 닿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릴 뿐이었다.

처음, 약속 시간에서 한 시간이 지났을 때는 그저 무언가 급한 일이 생긴 건가 보다 하고 애써 기분을 가라앉혔었다. 그러나 한 시간이 두 시간이 되고, 마침내 참다못해 그의 집에 전화를 걸었을 때, 아무도 받지 않는 전화는 인환의 초조감과 불안감을 극으로 치닫게 했다. 시계는 이미 밤 11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약속된 시각에서 네 시간이 넘은 시간이었다. 평소대로라면 그와 함께 한두 차례 섹스를 마치고 느긋하게 저녁을 먹은 다음 다시 침대에서 노닥거리고 있을 시간이었다. 혹시 몰라 김성준의 집으로도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아무도 받지 않는 것은 한가지였다. 분명 무슨 일인가가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이 시간에 혜윤이까지 집에 없다니!

무슨 일인지를 추측하는 것만도 겁이 나서 눈물이 핑 돌았다. 당장이라도 그의 집으로 달려가고 싶지만 몇 달 전의 괴로운 기억이 발목을 붙들었다. 만약 그때처럼 그가 단지 아픈 것뿐이라면 무턱대고 찾아간 것에 화를 낼 것이 틀림없었다. 아무리 그의 깊은 신뢰와 우정을 얻고 있는 요즘이라지만, 그래서 더더욱 고객으로서의 입장을 지키기 위해 조심하고 있었다. 너무나 어렵사리 얻어낸 신뢰였다. 감히 꿈도 못 꿔본 지극한 우정이었다. 걱정으로 머리가 돌아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가 싫어할 만한 짓은 할 수 없었다.

띠리리리리∼∼∼∼.

반쯤 넋을 놓고 있던 터라 갑자기 울린 전화벨 소리에 인환은 기절할 것처럼 놀라고 말았다. 수화기를 집어 드는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려 몇 번이나 커다랗게 심호흡을 해야 했다.

“……여…… 여보세요?!”

[저예요, 선생님.]

평소와 다름없이 침착하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가 귓전으로 파고들었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며 왈칵 목이 메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격렬한 기쁨으로 신경 마디마디가 진동하는 것만 같았다. 손가락의 떨림도 더 심해졌다. 무사해! 그는 무사해, 무사해……!!

“……위…… 위야……?”

[죄송해요. 급한 일이 생겨서 갈 수가 없었어요. 미리 연락을 드릴 여유도 없었습니다. 걱정하셨지요?]

평소와 다름이 없다고? 아니다. 무언가가 좀 이상했다. 분명 차분한 어조지만 어딘가 불안한 기운이 느껴져서 인환은 수화기를 잡은 손에 좀 더 힘을 주었다.

“……무 무슨 일이야? 안 좋은 일이니?”

[…….]

꽤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자신에게 얘기를 할까 말까 몹시 망설이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위야…….”

[…….]

“……위야……?”

간절한 마음을 담아 부르자 잔뜩 억제된 한숨이 수화기를 타고 흘러들어온다.

[……윤열이 형이 연행됐어요, 선생님…….]

마침내 터져 나온 대꾸는 역시 최악에 속할 소식이었다. 소식 자체도 충격적인 것이었지만 동요로 가득한 그의 목소리에 인환은 더 충격을 받고 말았다.

[……서울에 올라와 있었다는데…… 어제 은신하고 있던 곳이 발각 나서 숨겨준 사람들이랑 같이 끌려갔다는군요. ……4월인데…… 한창 그놈들도 예민해 있을 땐데…… 총학생회장단 회의에 참석했었나 봐요…… 정말 어리석죠……? 어리석은 형이에요…… 당장은 면회도 안 된다고 하고…… 확인하고 싶은데…… 만나게 해주질 않네요…….]

탁하게 쉰 목소리는 너무나 나지막해서 수화기를 귓가에 바짝 들이대야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다. 몹시 흔들리면서도 넋이 빠져나간 듯 방기된 어조를 통해 여과 없이 흘러나오고 있는 감정은 그가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절실히 드러내주고 있었다. 흡사 덫에 걸린 짐승처럼 혼란스럽고도 겁에 질린 어조였다. 늘 싸늘하다 싶을 정도로 냉정하고 고요한 이성을 잃지 않는 그가 아니었다. 도무지 그의 목소리라고는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번엔 다른 이유로 세동을 거듭하는 심장에, 인환은 수도 없이 마른침을 삼키며 마음을 가라앉혀야 했다.

“……위야…….”

침착해야 함에도, 그를 위로하고 안정시켜야만 함에도, 당장은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머리가 백짓장처럼 하얗게 비어버린 것만 같았다. 처음 듣는 그의 겁에 질린 목소리에 인환 또한 완전히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어…… 어떡하죠……? 어떡하면 좋을까요, 선생님…….]

“위, 위야…… 침착하게…… 그…… 그러니까 경찰로 끌려갔다는…….”

[……경찰이면 차라리 낫게요…… 하느님…… 그놈들이 형을 가만 안 둘 거예요…… 전 알아요…… 안다구요…….]

흐느낌 같은 탄식에선 절망적인 체념과 더불어 격렬한 증오가 느껴졌다. 나지막하긴 했지만 그의 목구멍을 꽉 틀어막고 있는 격한 응어리가 생생하게 전해졌다.

전신의 맥이 탁 풀리는 것만 같았다. 손에서 시작한 떨림은 온몸으로 번지고 있었다. 서늘한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정수리 끝까지 스멀스멀 퍼져갔다.

[……견딜 수 없어…… 못 참아…… 아시죠, 선생님……? 아시죠……? 더 이상 양보 못 해요…… 못 참아요…… 참을 수 없어…… 윤열이 형마저 잘못되면 나는…… 나는…….]

“위…… 위야, 거기 어디니? 집이야? 집이니? 내…… 내가 지금 집으로 갈까……?”

[오지 마세요!!!!!!!]

비명 같은 외침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위야……!”

[아뇨, 오지 마세요……! 오지 마세요……! 오셔봤자…… ]

“…….”

[…….]

“…….”

[…….]

“…….”

[……죄…… 송해요…… 죄송합니다, 선생님…… ]

“위야……!”

[……죄송해요…….]

“…….”

[…….]

“……벼…… 변호사는……? 변호사는 있어? 그 형 변호사…….”

가까스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는 듯한 그의 목소리에 인환도 필사적으로 마음을 다잡기 시작했다. 침착해……! 침착해, 장인환……! 침착해야만 해!!!

[……네. 오늘 시골에서 형 부모님들이 올라오셔서…… 현준 형이랑 같이 변호사 선임하고 왔어요…….]

“그래, 잘됐네. 변호사는 뭐래? 면회는? 면회는 왜 안 된대?”

[……일단 조사가 끝나봐야 알 수 있대요…… 시국 사범이라 당분간은 기대하지 말라고…… 변호사도 별로 좋은 소릴 안 해요…….]

“……그…… 그래도 뭐 별일이야 있겠니? 말 그대로 조사만 끝나고 나면…….”

[……몰라요…… 선생님은 모르세요…… 아무것도 모르세요, 아무것도…….]

절망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체념과 공포와 분노와 절망…… 그럼에도 가까스로 의연함을 잃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누구도 몰라요…… 몰라…… 사람이 얼마나 쉽게 죽을 수 있는지…… 얼마나 약하고 한심한지…… 선생님이 어떻게 알아요……? 알 수 없어요…… 나 말고는 누구도 알 수 없어요…….]

사실이다. 자신이 뭘 알 수 있겠는가. 시국 사범이라니…… 운동권이라니…… 자신과는 너무나 먼 세계의 일이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에 졸지에 친형을 잃은 아픔이 얼마나 큰지, 그 상처가 어느 정도로 영혼에 깊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지, 그래서 지금 또 같은 상처를 입을까 봐 그가 얼마나 겁에 질려 있는지, 인환으로선 감히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내…… 내가…… 나라도 힘써볼게, 위야. 응? 별로 아는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한두 군데 연락해볼 만한 데는 있거든. 너무 걱정하지 마라, 응? 위야…….”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으며 도움을 청할 수 있을 만한 사람들을 하나하나 꺼내보기 시작했다. 시국 사범이라면 웬만한 연줄 가지고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자신의 빈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관계에서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라곤 고작해야 엄마의 고문 변호사인 서 변호사와 미메시스의 주인장 마해영뿐이었지만, 둘 다 고위층과 연줄이 닿아 있고 발도 꽤 넓은 편이었다. 저들의 그물망 어딘가에 길 하나쯤은 반드시 있을 터였다. 사시나무처럼 후들거리던 온몸의 떨림이 비로소 조금씩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정말이야…… 알아볼게. 반드시 꼭 알아볼 테니까…….”

[……아뇨, 그러실 필요 없어요.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말씀 드렸나 봐요.]

“위야……!”

[……변호사 선임했으니까 괜찮을 겁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선생님께 폐 끼치고 싶지 않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순식간에 평소의 차갑고 딱딱한 목소리로 되돌아온 그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처음 만났을 무렵처럼 단숨에 벽을 치는 듯한 그의 태도에 다시 한 번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벽을 친 만큼 침착을 가장하고 있지만, 그래봤자 지독하게 불안정할 그의 내면 상태만을 증명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위야…….”

[……일단 도움을 줄 만한 사람들을 만나봐야 해서 이번 주 금요일이나 다음 주에도 찾아뵙지 못할 것 같습니다. 오늘 예정도 그렇고, 나중에 따로 시간을 내서 보충하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언제 비명 같은 절망을 토해냈나 싶게 바윗돌마냥 흔들림이 없는 어조였다. 가슴은 아프지만 그렇게나마 마음을 추스르려는 그를 존중해줘야만 할 터였다. 섣불리 동정을 보여 그의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 짓은 그에게도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래…… 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알아봐. 기다릴게, 위야.”

자신도 알아보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도움이 가능해졌을 때 해도 늦지 않다.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들어가세요.]

“그래. 너무 걱정하지 말고, 응? 일찍 자라? 아 참, 저녁은 먹었어?”

[…….]

먹었을 리가 없지……. 울컥 치받는 감정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목이 메었다. 저녁뿐만이 아니라 하루 종일 굶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굶지 말고 꼭 밥 먹고 자. 기운이 있어야 형을 돕지…….”

[……예, 그럴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선생님.]

“그래, 잘 자…….”

잘 자, 위야…… 잘 자…… 사랑해…… 너무너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전화가 끊어졌다.

한동안 멍하니 수화기를 든 채 시끄러운 전자음을 듣고 있다가 홀연 정신을 차렸다.

흐릿해진 시야를 손등으로 쓱 문질러 닦고 부랴부랴 수첩을 챙기기 시작했다. 힐끗 벽시계로 시선을 가져갔다. 시곗바늘은 밤 11시 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분명 전화를 걸기엔 너무 늦은 시각이었지만 예의를 챙길 여유 따윈 없었다. 하루 한시, 1분 1초가 급했다. 설마하니 싶지만, 정말로 무슨 일이 생길 걸 상상하기만 해도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어드는 기분이었다. 심장이 쥐어짜이는 것만 같았다. 그가 또다시 상처 입는 걸 어떻게 가만히 지켜본단 말인가.

물론 그에게 실제로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권력통이라니, 평생 자신과는 인연이 없을 세계였다. 아버지가 살아 있다면 혹시 모르지만, 고작해야 평생 놀고먹을 만큼의 유산 몇 푼을 물려받은 것이 다인 사생아 주제에 무슨 힘이 있겠는가.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뛰어는 봐야 한다. 도움을 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게 누가 됐든 땅에 머리를 박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의 힘을 빌릴 터였다. 혼이라도 팔라면 팔 수 있었다.

이리저리 수첩을 뒤진 끝에 원하던 번호를 가까스로 찾을 수 있었다. 수화기를 집어 들고 부지런히 번호를 눌렀다. 오랫동안 신호음이 되풀이됐건만 상대는 좀처럼 받는 기미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끊고 다른 번호를 눌렀다. 미메시스는 아직 영업이 한창일 시간이었다.

배 속이 꾸르륵거리며 쓰린 느낌이 들었다. 저녁 식사를 거른 데 비로소 생각이 미쳤다. 전화를 마치고는 반드시 먹어두자고 되뇌었다. 기운이 필요할 것이다. 당분간은 감기조차 걸릴 수 없다고 굳게 마음을 먹었다.

2주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인환의 스물여섯 인생에서 지난 2주만큼 많은 사람들을(그것도 대한민국의 정재계를 손안에 주무른다는 거물들과 그 식솔들을!) 만나고 다닌 시기도 달리 없었을 것이다. 아마 앞으로도 없겠지.

서 변호사와 마해영의 애인인 손 사장(표면적으로는 강남과 이태원 일대의 몇몇 클럽과 레스토랑을 관리하고 있는 ‘사장’이지만 실은 정치권과 결탁이 돼 있는 꽤 커다란 거물 조직의 간부였다!)을 통해 먼저 대여섯 명인가의 다리를 거쳤다. 서 변호사 쪽 연줄은 실세에 가 닿기도 전에 유야무야 끊기고 말았고(역시 시국 사범이라는 얘기에 난색을 표한 법조계 인사들이었다), 차츰 손 사장 쪽에서 긍정적인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2주의 끝 무렵,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이리저리 부지런히 쫓아다닌 끝에 인환은 마침내 그물망의 정점에 서 있는 여권의 어느 고위층 인사와 면담을 가지는 데 성공했다. 물론 인환 혼자만으론 어림도 없는 일이었고, 옆에 같이 서 있는 것만으로도 섬뜩한 위압감이 드는 손 사장과, 또 직접적으로 다리를 놓아준 인물인 어느 중진급 국회의원과도 함께한 자리였다.

고위층이라 해도 예사 고위층이 아니었다. 정치엔 문외한인 인환조차도 TV 뉴스 화면을 통해 얼굴을 익힌 그런 사내였으니, 과연 대단한 거물임에는 틀림이 없었을 것이다. 50대 후반에 꽤 후덕한 인상을 하고 있었지만, 과연 권력의 상층부에 있는 자답게 기가 질리게끔 하는 구석이 있었다. 면담 시간 내내 조리 있게 부탁의 말을 꺼내기는커녕 인환은 사내와 시선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손 사장이 곁에 없었다면 그 2주간의 필사적인 수고도 무위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인환이 해야 할 부탁의 말은 손 사장이 고스란히 대신 해주었다. 그것도 훨씬 조리가 있고 분명한 어조로).

30분이 채 안 될 면담의 끝에, 사내는 사정을 참작해 선처하도록 조처를 해주겠다는 막연한 대답을 해주었다. 워낙 긴장을 한데다, 대부분은 사내와 국회의원, 또 손 사장 간의 정체 모를 한담이 주류를 이뤘기에 처음엔 그 ‘선처’의 정확한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면담 직후, 손 사장의 차에 실려 미메시스로 돌아오며 손 사장의 친절한 부연 설명을 듣지 못했더라면 아마도 영영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손 사장의 얘기는 그간의 노력과 수고에 값할 만큼의 희소식은 되지 못했다. 이윤열과 가족 간의 면회를 허락해주고, 또 혹 있을지 모를 가혹 수사를 자제하라는 지시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쉬이 풀려나지는 못할 것이고, 설령 가혹 수사를 자제시킨다고 해도 그것이 현장에서 어느 정도로 지켜질지는 장담할 수 없는 일이라는 부정적인 얘기도 함께 전해주어서 인환을 몹시 낙담하게 만들었다. 이윤열의 죄질이 만만치가 않아 실형을 선고받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고도 했다. 커다란 덩치에 사나운 인상을 한 중년의 조폭으로부터 실형이니 죄질이니 가혹 수사니 하는 얘길 듣고 있자니 더더욱 암담하고 우울한 생각만 들었다.

더 이상 자신이 해줄 일은 없는 것 같았다. 분명 여기까지가 한계다. 2주간의 필사적인 노력이 고작 면회 한 번이라니 하고 생각하면 맥이 빠질 노릇이었지만, 그러나 가혹한 고문이 그나마 줄어들 것이라는 얘기는 기대를 품어봄직한 일이었다. 손 사장은 적어도 쥐도 새도 모르게 비명횡사하는 일만은 막은 셈이라고, 그것만도 대단한 일을 한 거라고 특유의 느물거리는 말투로 풀죽은 인환을 위로했다. 맞는 얘기였다. 적어도 그의 형처럼 이윤열이 졸지에 총을 맞고 어이없이 죽어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곰곰 생각해본 끝에 그나마라도 다행일지 모른다고 인환은 결론을 내렸다. 물론 자신의 결론이라기보다는, 자신만만해하는 손 사장과, 마해영의 냉정하면서도 우정 어린 충고를 거듭 듣는 와중에 어영부영 내린 결론이라는 게 옳았다.

다음 주말쯤엔 면회 일정이 잡힐 것이라는 손 사장의 전언을 마지막으로, 인환은 비로소 손 사장에게 진심 어린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이번 일로 인해 처음 안면을 트게 된 사이인데다, 사내의 정체나 외모에서 풍기는 위압감 탓에 그동안은 쉽사리 말을 붙일 수 없었다. 사내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인 것으로 대수롭지 않게 인환의 인사를 받아넘기더니 대신 옆에 앉은 애인에게 달콤한 대가를 구걸했다.

괴짜인 마해영의 애인답다고 해야 할까, 생김새나 분위기는 무시무시한 조폭 그 자체건만 애인을 대하는 태도는 느끼하다고까지 생각될 정도로 애교가 넘쳤다. 흡사 왕을 모시는 광대의 그것처럼 극진하면서도 능청스러운 애정 표현에 인환은 그만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첫인상에 잔뜩 겁을 집어먹은 거며, 사내의 위압감에 쫄아 말도 제대로 못 붙인 채 사내를 쫓아다니기만 했던 지난 며칠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한때의 영웅이었던데다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남자의 에로틱한 키스 신 역시 충격적인 일임엔 틀림없었다. 그것도 저 쿨하디쿨한 남자 마해영이다. 남의 이목도 아랑곳 않고 굶주린 들개처럼 허겁지겁 달라붙는 조폭 애인을 마해영은 그 특유의 우아하면서도 나른한 태도로 능숙하게 요리하고 있었다. 온통 시뻘게진 채 인환은 뜨겁게 불이 붙은 연인들로부터 허둥지둥 시선을 피해야 했다. ‘볼일 끝났으니 방해 말고 그만 가주는 게 좋지 않겠는가’의 아우라를 팍팍 풍기는 느끼 조폭에게 떠밀려 허둥지둥 미메시스를 빠져나온 것도 당연지사, 실질적인 은인인 마해영에게 감사의 인사를 할 겨를도 없었음은 물론이었다.

바로 어제인 4월 셋째 주 토요일, 사방이 휘날리는 벚꽃 잎으로 가득한 어느 무르익은 봄밤의 일이었다.

이젤에 캔버스를 걸고 자리를 잡은 지 30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물론 작업은 전혀 진전을 보일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10월에 있을 개인전을 그나마 욕을 먹지 않을 수준으로 치르려면 이렇게 마냥 넋을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좀처럼 마음을 잡을 수가 없었다. 몸도 지난 2주간의 피로가 쌓인 건지 열 시간 가까이 잤음에도 마냥 나른하기만 했다. 지금이야 그에 대한 걱정 때문이라고 변명이라도 할 수 있지만, 솔직히 지난 몇 달 역시 요 2주와 별반 다르지 않았었다. 연애가 창작 욕구를 빼앗아갈 수도 있다는 가정은 여성 작가에만 국한된 얘기는 아닌 모양이었다.

몇 번 헛손질에 가까울 의미 없는 터치를 거듭하다가 인환은 결국 붓을 팽개치곤 오디오로 다가가 레코드를 걸었다. 좋아하는 쇼팽의 감미로운 선율이 우울했던 거실 안을 안개 빛깔로 곱게 채색하기 시작했다. 거실 소파에 길게 몸을 눕혔다.

창 밖은 완연한 봄이었다. 반쯤 열어둔 거실 창문으로부턴 빌라 앞마당에 심어진 라일락 향기가 유혹처럼 흘러들고 있었다. 한낮의 따사로운 봄볕이 갖가지 화구들로 너저분하게 들어차 있는 아틀리에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서럽도록 아름다운 날씨였다. 서럽도록 그립고, 서럽도록 보고 싶은 사람을 1분 1초도 떨치지 못하게끔 하는 그런 서러움이었다.

전화라도 걸어 목소리라도 듣고 싶건만 그럴 입장도, 처지도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지난 2주 동안, 예상했던 대로 그는 아틀리에에 단 한 번도 들르지 않았다. 가라앉은 어조로 올 수 없다는 간단한 통고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던 세 번의 연락 이외엔 그와 전화 통화를 나눈 적도 없었다.

그에 대한 걱정으로 아무리 초조해도, 그가 그리운 나머지 아무리 가슴이 터져도 찾아갈 수조차 없었다. 그의 집에 보성에서 올라온 이윤열의 양친이 머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았더라도 그는 자신의 방문을 거절했을 것이다.

한 번 방문 의사를 비쳤다가 인환은 그의 냉랭하다 못해 사나운 비난을 들어야만 했다. 섹스를 할 형편이 아니다, 고작 2주를 못 참느냐며 매서운 어조로 면박을 주는 바람에 인환은 전화를 끊고 나서 엉엉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섹스 때문이 아니라고, 진심으로 그를 걱정해서라고, 밥이라도 제대로 먹고 지내는지, 잠이라도 좀 자는지, 근심으로 피가 마르는 것 같아서일 뿐이라는 항변조차 변변히 하지 못한 게 억울했다. 친구라고 하면서 그렇게나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나 싶어 서운해 견딜 수 없었다. 한참을 설리 울다가 이것 역시 고객으로선 주제넘은 반응이라는 데 생각이 미쳐 겨우 울음을 그쳤다.

그도 평소라면 그렇게까지 냉혹한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워낙 절망적이었던 거다. 친형처럼 사랑하는 이윤열이 어떻게 될까 봐 그는 지금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평상시라면 모를까, 가뜩이나 정신이 반쯤 나가 있을 그에게 자신의 존재는 부담 이외에 아무것도 아닐 터였다.

상냥하게 대해주는 그에게 기고만장한 나머지 주제넘은 행동을 하고 말았다고, 인환은 새삼 뼛속 깊이 반성했다. 서운하게 생각한 것도, 똥인지 된장인지 가리지 못하고 자기 기분만 앞세워 그의 집엘 찾아가겠다고 강짜를 부린 것도 미안하다고, 속으로 간절히 용서를 빌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하고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어차피 다음 주말이면 그를 어떤 형태로든 볼 수 있을 터였다. 최고의 희소식은 아닐지언정 그가 그토록 바라는 면회도 할 수 있고, 또 어느 정도 이윤열의 목숨도 보장이 되는 긍정적인 뉴스였다. 정확한 면회 일정이 잡히면 얘기하자 생각하고 그에게 연락은 미루었지만 소식을 듣게 되면 그도 꽤 기뻐해줄 것이 틀림없었다.

멜랑콜리한 녹턴의 선율을 벗 삼아 30분쯤을 꾸벅꾸벅 졸고 있자니 전화벨이 요란스레 울렸다.

혹시 그일지도 몰라 기절할 듯이 놀라서는 바로 받았다가 군대 간 대학 동기 놈인 걸 알고는 실망했다. 휴가 나온 김에 동기들과 술자리를 마련했으니 나오라는 얘기였다. 거의 7개월 만에 보는 녀석이라 잠깐 얼굴이라도 비치고 싶었지만 어디 지금 그럴 형편인가 말이다. 내일이 그와 만남이 예정된 월요일이기도 하니 언제 그의 전화가 걸려올지 모른다. 한가하게 술이나 풀 기분도 아니었다. 사정이 있다고 변명하고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잠이 달아나자 이번엔 배가 꾸르륵거리며 꽤 심한 허기가 느껴졌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2시다. 씨팔. 식욕이라곤 단 한 톨도 느껴지지 않건만 끼니때만 되면 어김없이 달려드는 허기에 질리는 기분이 든다. 그래도 기운을 내 그를 지키려면 절대로 밥을 굶어선 안 된다.

한바탕 스스로를 향해 욕을 퍼부어주곤 주방으로 가서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가 오는 월요일이면 김천댁(평창동 엄마 집 가정부다)이 와서 진수성찬은 물론 일주일치 먹을 밑반찬들을 잔뜩 해놓고 가지만, 지난 2주 동안은 발길을 끊게 한 상태였다.

신 김치와 계란 이외엔 변변히 먹을 만한 게 없었다. 아침에 이어 또 시켜 먹어야 하나 고민하다가 냉동실에 보관해두었던 식빵을 꺼내 들었다. 토스터기에 식빵 네 쪽을 굽고, 계란 프라이를 하고, 베이컨까지 구우니 그럴듯한 식탁이 마련되었다.

커피를 내리는 것이 귀찮아 맥주로 음료를 대신하고 부지런히 배를 채웠다. 막상 입안에 들어가니 그런대로 먹힌다. 변변히 식사도 못 챙기고 있을 내 영웅 생각에 잼 바른 빵조차 쓰디쓰기만 하다. 늠름하고 아름다운 자태가 눈에 밟힌 나머지 먹는 내내 코끝이 찡했다. 결국 빵 네 쪽을 반밖에 해치우지 못하고서 식탁을 치우고 말았다.

빵만의 식사는 설거지 거리가 안 나와서 편하다는 게으른 생각을 굴리며 다 돌아간 레코드판을 다시 돌려 쇼팽을 다시 틀었다. 한 번만 더 듣고 작업에 들어갈 각오를 굳혀본다. 아무 일도 않고 마냥 어린 연인만 그리워한대서야 스스로가 비참할 뿐이다. 물론, 그 어떤 이들보다도 치열하게 살아가는 내 영웅에게도 심히 부끄러울 노릇.

마시다 만 맥주 캔을 들고 거실 발코니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갑자기 현관 벨이 울렸다. ……택배가 왔나……? 잠시 기억을 검색해보지만 물건을 주문한 기록은 없다. 무심코 인터폰을 확인했다가 인환은 들고 있던 맥주 캔을 떨어트릴 뻔할 정도로 기절초풍을 했다.

심장이 따발총을 쏘는 것처럼 투다다닥 뛰기 시작했다. 숨이 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 화끈한 열기가 얼굴로 치솟았다. 예상치 못한 방문이 이렇게까지 충격을 주리라곤 자신도 차마 짐작하지 못한 사실이었다.

……그였다! 뿌연 인터폰 화면 너머에서 그가 조용히 이쪽을 건너다보고 있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개폐 버튼을 눌렀다. 맥주 캔을 거의 내던질 기세로 탁자에 팽개치고 허둥지둥 현관 앞으로 달려갔다.

비스듬히 현관문을 밀고 들어선 얼굴은, 그러나 인터폰으로 봤을 때완 사뭇 달라 인환은 또 한 번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해골처럼 움푹 파인 눈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어 이상야릇한 기운으로 번들거리는 검은 눈동자가, 초췌해질 대로 초췌해진 나머지 거의 시체처럼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그다음에 보였다.

너무나 놀라고 가슴이 아파서 선뜻 어떤 말도 흘러나오지가 않았다. 조용히 현관문을 닫은 다음, 지독하게 낡은 검정색 로퍼를 천천히 벗고 있는 그를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 있었을 뿐이다.

신발을 벗은 그는 무슨 확인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아틀리에 안을 한 번 휘 둘러보았다. 확인을 마친 눈이 당연한 것처럼 인환의 시선을 붙들었다. 일요일임에도, 그는 평상시 방문할 때의 차림 그대로 교복을 입고 있었다. 촌스럽기 그지없는 암녹색 싱글 재킷이, 흰 바탕에 연초록 줄무늬가 들어간 포플린 셔츠를 넉넉하게 덮고 있었다. 재킷과 같은 색의 모직 바지는 무릎 부분이 몹시 해진 채 앞으로 툭 튀어나와 있었다. 발목 부위의 고무줄이 늘어졌는지 신고 있는 흰색 면양말은 발가락 쪽으로 조금 벗겨진 상태였다. 깔끔한 그의 성품을 반영하듯 얼룩 한 점 없는 데 반해, 형편없이 낡아빠진 모양새는 그로테스크한 느낌마저 줄 정도로 애잔했다. 날카로운 통증이 목구멍 저 안쪽에서부터 아랫배 언저리까지 채찍처럼 후려치고 지나갔다.

“……잠깐 있다가 갈게요, 선생님.”

“…….”

“……집에선 통 잠을 못 자겠어서…… 자야 하는데…… 내일부터 중간고산데…… 잠이 안 와요…….”

“…….”

“……여기선 좀 잘 수 있을까 해서 왔어요. ……조금만 있다가 가겠습니다.”

“…….”

울면 안 된다고, 절대로 그에게 동정하는 꼴을 보여선 안 된다고 미친 듯이 되뇌어보지만 순식간에 흐려지는 눈시울을 도무지 막을 수가 없었다.

“……왜 우세요……? 울지 마세요…… 전 괜찮아요…….”

기계적으로 내뱉는 목소리엔 하나도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다른 건 다 죽고 눈동자만이 살아 있는 듯, 기묘할 정도로 형형하게 빛나는 검은 눈이 가만히 인환을 굽어보고 있었다. 이 눈동자를 알고 있었다. 아니, 이 눈동자와 비슷한 다른 눈동자를 알고 있었다.

전신이 알코올 중독자처럼 후들후들 떨려왔다. 얼마나 잠을 못 잔 건지, 얼마나 굶은 건지, 감히 상상하기조차 겁이 났다. 어떤 말도, 몸짓도 취할 수 없었다. 자신이 토해내는 단 한 번의 숨소리만으로도 그는 유리 조각처럼 산산이 부서져버릴 것만 같았다.

한참 동안 홀린 듯이 시선을 맞춰오던 그가 이윽고 손을 뻗어왔다. 피아노 신동의 손. 아름답고 크고 날씬한 손가락이 살며시 인환의 손가락을 걸더니 천천히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커튼을 열어둔 상태라 남향인 침실도 거실과 마찬가지로 눈부신 봄볕이 가득 들어와 있었다. 커튼을 닫으려 했지만 그는 인환이 손을 빼려 하자 도리어 완강하게 힘을 주며 손을 안쪽으로 잡아당겼다. 그가 원하는 대로 저항 않고 침대로 끌려갔다. 재킷은커녕 양말조차 벗을 생각도 않고 바로 침대에 몸을 눕히고는 머뭇거리는 인환의 몸을 끌어당겼다. 모로 누워 마주 보게 하더니 알을 품듯 인환의 손을 꼭 쥔 채 눈을 감는 것이 보였다. 포옹을 깊게 할 기력은 없는 것 같았다. 인환의 두 손만을 품에 꼭 끌어안곤 조용히 잠을 청하고 있었다. 무릎을 구부린 채 상체를 깊이 웅크리고 있어 마치 태아 같은 포즈였다.

눈물이 비 오듯 흘러내리는 통에 그가 언제 잠이 들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방문 너머, 자장가마냥 아련히 들려오던 쇼팽도 언제 멈추었는지 잘 모르겠다. 점차 고른 숨소리를 낸 지 한 시간 남짓, 수도꼭지처럼 터진 자신의 눈물도 간신히 잦아들 무렵, 인환은 다시금 커튼을 치기 위한 시도를 했다. 눈을 찌를 듯한 빛도 가려주고 웅크린 몸에 이불도 덮어주고 싶었지만, 간절한 기도는 불발로 그치고 말았다. 그의 품 안에 끌어안긴 손을 살며시 잡아당기자 그가 소스라치듯 깨어난 때문이었다. 그가 움찔 몸을 떨며 눈을 번쩍 떴을 때 인환 또한 벼락을 맞은 것처럼 깜짝 놀라 움직임을 멈췄다.

잠들기 전과 다름없이 번쩍번쩍 이상야릇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눈동자가 휘둥그레져선 자신을 굽어본다. 반사적으로 틀어 잡힌 손가락엔 아픔이 느껴질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왜요……? 어디 가시는데요…….”

탁한 쇳소리는 겨우 들릴까 말까 한 신음 소리 같았다.

“……커…… 커튼 좀 치려고 그래…… 눈이 너무 부실 테니까…….”

“…….”

미심쩍어하는 눈이 한동안 살피는 듯이 노려보다가 마지못해 손을 놓아주었다. 비틀비틀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치자 방 안은 부드러운 채도로 가라앉았다. 이불을 꺼내려 벽장으로 다가가던 몸이 휘청하며 흔들렸다. 그가 손목을 쥐고 다시 침대로 끌어당긴 때문이었다.

“……위야, 이불…….”

“……졸려요…….”

“……이불만 꺼내고…….”

“……졸려요…….”

꺼질 듯한 목소리에 비해 손목을 휘어잡은 악력은 어마어마했다. 어떠한 반대도 용납 않는다는 듯한 몸짓에 맥없이 끌려가 다시 침대에 눕혀졌다. 좀 전과 방향만 달라졌을 뿐 똑같은 자세로 웅크리고 누운 그는 역시 좀 전과 마찬가지로 인환의 손을 품에 꼭 움켜쥔 채 눈을 감았다. 그가 다시 잠이 드는 데는 채 5분이 걸리지 않았다.

근심과 연민으로 수런거리는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하염없이 그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이리 굽어보고 저리 살펴봐도 형용할 수 없이 상해버린 영웅의 얼굴에 또 한 번 목이 메었다. 폐렴을 앓고 있었을 무렵보다도 더 괴로운 모습이었다.

제기랄. 씨팔. 빌어먹을. 우라질. 개지랄. 개 좆같이…….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는가. 이제 겨우 열아홉 살이었다. 열아홉에 도대체 무얼 얼마만큼 배우게 하겠다고 이따위 단도리질이란 말인가. 기가 막히고 억울하고 분해서 생각나는 욕이란 욕은 죄다 퍼부어주었다. 하느님이 이 세상에 만약 존재한다고 하면 정말로 땅 그지 새끼라고, 개 씹탱구리로 잔인하다고, 고작 열아홉 살밖에 안 된 그에게 너무나 가혹한 시련만을 주는 게 아니냐고 이를 갈았다. 그런 하느님 따위, 존재한다고 해도 절대로 안 믿어줄 거라고, 인환은 피를 토하듯 울음을 삼키며 하늘을 향해 맹렬히 뻑큐를 날려주었다.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길고 날씬한 피아니스트의 손이었다. 눈물이 날 만큼 그리워하던 손가락이었다. 점점 의식이 또렷해지며 묵직한 두통이 느껴졌다. 살며시 눈을 뜨고 정면을 응시했다.

표정이 거의 없는 검고 맑은 눈동자가 10센티도 안 될 거리에서 이쪽을 빤히 굽어보고 있었다. 약간 부어오른 눈꺼풀이 나른하게 깜빡이고 있지만 잠은 거의 달아난 표정이었다. 해가 막 지고 있는지 옅은 주홍빛 음영이 모로 누운 그의 핸섬한 얼굴에 긴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여전히 해골처럼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이 아팠다. 초췌한 얼굴임에도 여전히 한숨이 나올 만큼 아름다운 이목구비가 애틋했다.

“……좀 잤어……?”

“…….”

“……밥 먹고 더 자. 너 좋아하는 불고기 도시락 시켜줄게.”

“…….”

대꾸가 없다. 그저 멍한 시선으로 자신의 얼굴을 굽어보며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쓰다듬기를 반복하고 있을 뿐. 고양이거나 강아지를 쓰다듬고 있는 듯한, 기계적이면서도 무심한 시선이요, 손길이었다.

몇 번이나 잠들고 깨어나기를 반복했는지 몰랐다.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일라치면 그가 본능적으로 손을 끌어당기는 바람에 인환은 그가 잠든 내내 죽부인이 되어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불안하고 아픈 각성 상태와 가위처럼 비몽사몽한 오수 속을 왔다갔다 헤매야 했다. 물론 상관없었다. 그가 조금이라도 편히 잠들 수만 있다면 쇠사슬에라도 꽁꽁 묶여줄 요량이었다.

시계를 보니 7시가 가까워온다. 다행히 다섯 시간 정도는 재운 성싶다. 단잠 덕분인지 눈에서 이상야릇하게 번들거리던 광기도 조금 사라지고 없었다. 여전히 상태는 좋아 보이지 않지만 밥을 먹이고 다시 몇 시간을 더 재우면 좀 더 호전을 보일 것이다.

회화과 동기 중에 이런 증상을 보이던 여자애가 하나 있었다. 어릴 때 동네 오빠한테 강간을 당했다고 하는데, 사건이 있었던 5월만 되면 이렇게 늘 신경 쇠약 증세를 보이곤 했었다. 한 달 내내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먹지도 못해 툭하면 픽픽 쓰러지면서도 눈동자만은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이상야릇한 광기가 떠도는 부리부리한 눈동자였다. 마치 불길이 일렁이는 듯한 무시무시한 그 눈동자를 동기 중 어느 누구도 감히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었다.

“……밥 먹자. 응? 위야…… 부탁이야…….”

끊임없이 자신의 머리카락 속을 헤매고 있던 그의 손을 끌어당겨 안았다. 그가 잠들기 전에 하던 몸짓 그대로. 표정 없는 눈동자에 시선을 고정한 채 간절한 사랑을 담아 소원했다.

“……밥 먹어야 기운 내지…….”

“…….”

“……위야…….”

“……배고파요. 먹어요, 선생님…….”

몇 번 눈을 깜빡이더니 간신히 고요한 대꾸가 돌아왔다. 참았던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또 목이 메어왔다. 눈시울이 따끔거리며 아팠다. 계속 울다가 잠이 들어 눈꺼풀은 이미 개구리처럼 퉁퉁 부어 있는 상태였다. 더 이상 울지 않기 위해 입술을 힘껏 즈려물었다.

먼저 일어나 그의 손을 약간 잡아끌자 그도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잠시도 놓아줄 생각을 않는 그의 손을 마주 쥔 채 함께 거실로 나갔다. 그를 소파에 앉히고 식사를 주문했다. 전화하는 동안도 내내 한 손을 틀어 잡힌 채여서 조금 애를 먹었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고위층을 만나 부탁을 넣은 사실을 얘기해줄까 잠시 망설였다. 생각 끝에, 식사 후에 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어떤 형태로든 그에게 자극이 갈 얘기였으니 그 때문에 또 식사를 못 하게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판단은 역시 옳았다.

식탁에 앉아, 배달된 음식을 기계적인 몸짓으로 거의 다 비운 그를 다시 거실 소파로 데려갔다. 여전히 자신의 손을 놓아줄 생각을 않는다. 인환이 소파에 먼저 자리를 잡고 앉자 로봇처럼 그대로 옆에 붙어 앉는 그다. 코끝과 이마에 맺힌 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재킷을 벗을 생각도 못 하는 그를 보니 또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다. 상태가 너무나 안 좋아 보여, 과연 자신의 얘기가 긍정적인 효과를 미칠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그에게 잡혀 있지 않은 오른손을 들어 천천히 그의 재킷을 벗겨주었다. 멍한 눈으로 자신을 볼 뿐, 그는 얌전히 자신의 손길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재킷을 소파 팔걸이에 걸고, 얼굴의 땀을 손바닥으로 닦아주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나도 알아본다고 했잖아, 위야……? 그 윤열이 형 일…….”

“…….”

자신의 시선을 붙들고 있는 그의 눈길에 여전히 표정은 없었다.

“……조금 성과가 있었어. 내 친구 중에…… 너도 한 번 만난 적 있지? 그 이태원 게이 바 미메시스 주인 말야. 그 형 애인이 정부 고위층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었나 봐. 도와달라고 했더니 청와대 쪽과 연결을 해주더구나.”

“…….”

“……어제 만나서 선처해보겠다는 대답을 들었어.”

“…….”

“……실형을 언도받는 건 피할 수 없을 거래. 그래도 면회는 가능하게 해준다고 했어.”

“…….”

표정이 없던 눈이 점점 휘둥그레져가는 게 보였다. 가슴이 뛰었다. 코끝과 이마에 맺힌 땀을 다 닦고도 그의 얼굴에서 손을 거두지 않았다. 부드럽게 뺨을 어루만지며 그가 부디 다시 희망을 세워주길 간절히 빌었다. 평상시의 강하고 용맹한 내 영웅으로 되돌아와주길 간절히, 간절히 빌었다.

“……다음 주말쯤…… 아니, 오늘이 일요일이니까 이젠 이번 주네? 아무튼 이번 주말쯤 면회가 가능할 거야. 더 좋은 소식은…….”

커다란 숨소리가 그의 입술을 타고 길게 터져 나왔다. 그에게 틀어 잡힌 손에 어마어마한 악력이 실렸다. 손가락이 끊어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픔이 느껴졌다.

“……아파…… 내 손가락을 부러트릴 셈이니?”

“…….”

“……그래, 더 좋은 소식은…… 가혹 행위를 자제하게 해주겠다는 거야. 손 사장 말로는…… 아, 그 손 사장이 바로 그 사람이야. 미메시스 사장의 애인. 청와대 쪽과 만나게 해준 사람이지. 아무튼 그 손 사장 말로는 가혹한 고문은 없을 거래. 적어도 쥐도 새도 모르게 비명횡사하는 일만은 막은 셈이라는 거지. 그러니까 이제 안심해도 돼, 위야.”

“…….”

“……내 말 알아듣지? 그 사람들…… 서로 끼리끼리 뒤를 봐주는 ‘패밀리’들이라 한번 약속하면 반드시 지킨대. 그러니까 네 형 일은 어쨌든 이제 걱정 안 해도 돼, 위야…….”

“…….”

“……위야……?”

“…….”

“위야……!”

“…….”

전기에라도 감전된 것마냥 한동안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인환의 입술만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의 눈자위가 점차 붉게 변해갔다. 아랫입술이 살짝 깨물리며 턱 끝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동상처럼 굳어든 몸은 한참 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동안은 신음 소리도, 흐느낌 소리도 없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다만 눈물만이, 국수 가락처럼 굵은 눈물 줄기만이 그의 커다란 눈시울로부터 후둑후둑 쉼 없이 흘러넘치고 있을 뿐이었다.

“……으…… 윽……!”

잔뜩 억눌렸던 비통한 울음이 마침내 둑이 터지듯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흐…… 윽…… 큭…… 흐아아아아…… 아…… 윽흑…… 우앗…….”

“……위야……!”

“흐어어어…… 어헝…… 허어어어…… 어억…….”

“……위…….”

“……흐엉…… 흐어엉…… 흐아아아…… 악…… 아아아…….”

“…….”

“허어어어…… 억…… 아아흑…… 윽…… 아…… 아버지…….”

“…….”

“윽…… 웃…… 우앗…… 아버지…… 아버지…… 아버…… 윽…… 큭…… 흐아아아…… 우앗…… 앗…….”

“…….”

“……우아…… 흐아아…… 악…… 흐아…… 흐허어어엉…… 엉…… 헉…… 으흑…… 윽…….”

“…….”

비참한 통곡이었다.

치명상을 입고 죽어가는 호랑이의 그것처럼, 처절하게 구슬프면서도 무시무시한 공포 그 자체일 심연의 울림이었다. 뼈를 부서트릴 기세로 인환의 양손을 움켜쥔 채로 그는 괴성에 가까울 비명을 내지르며 통곡하고 있었다. 얼굴은 인환의 양쪽 허벅지 사이에 파묻힌 채였고, 어느새 거실 바닥으로 무너진 몸은 경련이라도 일으킨 것마냥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눈시울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목구멍이 눌리다 못해 터져버리는 게 아닐까 겁이 났다. 자신만이라도 냉정해야 한다고, 수도 없이 되뇌고 있음에도 도무지 자제할 수가 없을 것 같아 무서웠다.

온몸을 바늘로 쑤셔대는 것만 같았다. 머리를 망치로 두드려 깨기라도 하는 것처럼 두통이 심했다. 연인의 처절한 통곡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아프게 하리라고는 인환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그…… 그만해……!”

“……큭…… 흐아아아…… 흐아아…… 악…… 어어어…… 허헝…….”

“……제발 그만해……!”

“……허헝…… 억…… 흐어어어…… 어어어엉…… 헉…… 허어어…….”

“……제…… 젠장…… 가슴이 찢어지네…….”

“흑…… 윽…… 흐어어…… 아버…… 아버지…… 엉…… 엉…… 우아…….”

“……우, 씨…… 그만하라니깐…… 손 아파 죽겠다…….”

“……흐아아…… 우…… 흑…… 윽…… 흡……!”

손가락을 틀어 잡힌 그대로 그의 셔츠 깃을 움켜쥐었다. 의외로 무릎 위에 파묻혔던 그의 상반신은 쉽게 딸려 올라왔다. 집 안이 떠나가라 처절한 통곡을 거듭하고 있던 입술에 정신없이 자신의 것을 포개 붙였다. 귀를 쟁쟁하게 하던 비명 소리가 마침내 그쳤다. 대신 입술과 입술이 격렬하게 부딪치며 흘러나오는 숨 가쁜 교성이 섬뜩하게 귓전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필사적인 기분으로 시작한 키스였지만 막상 그의 난폭하기까지 한 반응이 돌아오자 인환은 적잖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몰아치듯 얽혀든 혀뿌리가 그의 입안으로 세차게 빨려 들어갔다. 어느새 소파 위로 올라앉은 그의 팔에 의해 허리가 부서질 것처럼 껴안긴 것과 거의 동시였다. 뒤로 떠밀린 상반신이 그대로 소파 바닥에 눕혀지자 그의 육중한 몸이 단숨에 겹쳐졌다. 단 한순간의 틈도 없이 입술이 달라붙었다. 미친 듯한 키스였다. 몇 번이나 각도를 달리하며 그는 숨 막히는 흡입을 되풀이했다. 가슴과 어깨와 엉덩이가 그의 미친 듯한 손길 아래서 이리저리 쓸려갔다. 광기로 번들거리는 새빨간 눈시울에선 여전히 굵은 눈물방울이 후둑후둑 떨어지고 있었다. 빨리고 깨물리는 입술 틈으론 그의 눈물처럼 굵직한 서로의 타액이 쉼 없이 줄줄 흘러내렸다. 눈을 감았다. 뭐가 뭔지 제대로 자각을 하기도 전에 폭풍에 휩쓸려든 느낌이었다. 그의 급작스러운 반응이 무섭고, 또 괴롭기도 해서 차마 눈을 뜨고 그를 살필 수가 없었다.

맞붙은 하반신 사이 딱딱하게 일어선 그를 마침내 자각하고 인환은 숨을 삼켰다. 난폭한 기세로 바지가 벗겨졌다. 팬티도 잡아채여 어느새 발목 아래까지 흘러 내려갔다. 접착제처럼 맞물려 단 한순간도 떨어질 생각을 않던 그의 입술이 아주 잠깐 떨어져나갔다. 벨트를 풀고 바지 지퍼만을 내린 그가 인환의 한쪽 다리를 들어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겨우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여전한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이 한껏 열린 자신의 치부를 노려보고 있었다. 비 오듯 쏟아지는 눈물과 입 언저리의 타액 탓에 그의 얼굴은 빈틈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온통 젖어 있었다. 자신의 자지에 내리꽂히는 그의 불길 같은 시선만으로도 갈 것만 같았다. 천박한 기대감에 허리가 요란스레 들썩거렸다. 2주 동안 잊고 있었던 그의 몸이 새삼 미쳐버릴 것처럼 그리웠다.

그의 손가락 두 개가 스치듯 괄약근 주변을 어루만졌다. 기대감을 동반한 두려움에 서늘한 한기가 심장을 가로지르며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눈을 한 번 질끈 감아 눈시울 가득 찬 눈물을 후드득 떨궈내더니 그가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윤활제를 찾는 걸 알았지만, 침실에 있었다. 한계까지 부풀어 아랫배에 닿을 듯이 곧추선 그의 거대한 자지는, 그러나 침실까지 옮겨갈 여유 따윈 조금도 없어 보였다.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역시 손바닥에 침을 뱉어 윤활제를 대신한다. 늘 여유 만만하고, 늘 정중하다 싶을 만큼 인환의 페이스대로 서비스를 해주는 그로선 이례적인 흥분 상태였다. 그토록 이성을 잃게끔 한 그의 고통에 새삼 가슴이 미어졌다.

그의 타액으로 흠뻑 젖은 자지가 불쑥 입구를 쑤셨다. 아프다. 아무리 자주 해도 역시 처음 들어올 땐 많이 아프다. 물론 아픈 이상으로 좋다는 것도 안다. 몇 배, 몇 십 배, 아니, 몇 천 배 더 좋다는 것을 안다. 욱신. 반쯤 더 들어왔다. 정말 급한지 평소처럼 많이 배려하지 않는다. 눈물범벅인 얼굴이 내려왔다. 입술이 겹쳐지며 그의 허리가 크게 들썩이는 게 느껴진다. 눈을 질끈 감고 몸을 활짝 열었다.

“흐아앗!!!”

뿌리 끝까지 들어와 박혔다. 바로 전립선을 찔려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상반신이 들어 올려지며 그의 품에 끌어 안겼다. 깨끗하게 세탁된 교복 셔츠에선 그의 달콤한 체취와 더불어 섬유 유연제 냄새가 났다. 그의 양팔이 등줄기와 어깨 부근을 가로질러 깊이 끌어당겼기 때문에 그를 마주 보고 그의 허벅지 위에 올라탄 자세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불안정한 자세 때문에 그의 목에 팔을 감고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스스로 허리를 흔들 여유 따윈 없었다. 너무나 빠르고, 눈부시고, 숨이 찼다. 결코 평소의 그가 아니었다. 세련된 기교 따윈 전혀 부리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빠르기로 미친 듯이 전립선만을 찔러 올렸다. 애무도 없었다. 그저 꼭 끌어안고 키스하고 박기만 했다.

그가 마침내 사정을 하기까지의 긴 시간 동안 세 번 정도 절정에 올라 까무러쳤다. 정신을 잃고 뒤로 넘어가면, 그는 연결된 상태에서 그대로 다시 휘몰아쳐왔다. 공격은 절대로 다정하지도, 상냥하지도 않았다. 난폭하고, 슬프고, 델 듯이 뜨겁기만 했다. 독수리가 날아오르듯이 단숨에 솟구치다가는 숨 돌릴 틈도 없이 급강하했다. 서비스를 받는다는 기분 따윈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 수만 배는 더 기쁠 선물이 왔다. 존중이 왔다. 지극한 배려와 극진한 애정이 왔다. 어쩐지 진짜 사랑을 나누는 것만 같은 착각에 기뻐 흐느꼈다. 손가락 끝까지 떨며 전율했다. 섹스가 아니라 사랑 같았다. 사랑을 나누는 것만 같았다. 아니, 사랑이었다. 사랑이 틀림없었다. 물론 ‘우정’이라는 이름의 사랑일 것이었다…….

정신이 들고 가장 먼저 든 자각은 허벅지를 타고 축축하게 흘러내리고 있는 그의 체액이었다. 슬픔을 동반한 감미로운 기쁨에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몸 안에 배출을 했다. 그렇게까지 이성을 잃고 아파한 그가 슬펐고, 그렇게까지 이성을 잃고 자신을 탐해준 그가 기뻤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상체를 품에 꼭 끌어안은 채로 소파에 길게 누워 있었다. 자신의 얼굴이 파묻혀 있던 단단한 가슴팍이 크게 오르내리는 걸 보니 사정한 지 얼마 안 되는 것 같았다. 셔츠 아래 땀으로 흠뻑 젖은 그의 몸이 몹시 뜨겁게 느껴졌다. 자신의 생식기가 닿아 있는 그의 아랫배 근처도 자신이 내뿜은 정액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주린 시선을 들고 그의 얼굴을 찾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아픈 웃음을 입에 문다. 여전히 수도꼭지처럼 줄줄 흐르는 눈물에 자신의 가슴에도 새록새록 피눈물이 솟는다. 뺨이 마르게 되면 행여 눈물이 멈출까, 손으로 부지런히 닦고 또 닦아주었다. 새로 한 방울 굴러 떨어지기 전에 말끔히 흔적을 지우면 아예 울지 않은 것으로 무를 수 있을까, 혀로 핥고 또 핥아주었다. 자신은 괜찮다. 자신이야 어차피 눈물 많은 게이다. 얼마든지 울어도 새삼 부끄러울 일 없는 엄마의 응석받이 주제다. 가슴 아플 상처도 없다. 그닥 뼈아픈 눈물도 아니다. 그러니 괜찮다. 그 대신 울어주면 된다. 그 대신 얼마든지 울어줄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안 된다. 더 이상은 안 된다. 그가 우는 건 도저히 더 이상 용납해선 안 된다…….

“……왜 자꾸 우세요……? 울지 마세요…… 전 괜찮아요…….”

“……안 울어…….”

“……뭐가요…… 울고 계시잖아요…….”

“……내가 우는 거 아냐…….”

“…….”

“……네가 우는 거야…… 네 눈물이야, 이건. 그러니까 이제 그만해…….”

“…….”

“……넌 그만해…… 내가 대신 실컷 울어줄 테니까…….”

“……선생님 우는 거 싫어요…… 저도 보고 싶지 않아요…….”

“……그럼 네가 먼저 그치면 돼.”

“…….”

“…….”

“……고맙다는 말 안 할래요.”

“?!”

“친구한텐 그런 말 안 하니까 선생님께도 안 할 겁니다.”

“…….”

여전히 부리부리한 시선 속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진다. 너무나 뜨거워서 온몸이 타는 것만 같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그의 품에 다시 얼굴을 파묻고 말았다. 그 어떤 공치사보다 더 가슴 떨리는 답례였다. 그의 늠름한 허리를 꼭 끌어안은 채 몇 번이고 가슴팍에 얼굴을 비벼댔다.

“……자…… 좀 더 자야 돼, 너.”

셔츠 아래 볼록하니 솟은 그의 유두를 빨며 자장가처럼 속삭인다. 정말로 그를 편안히 잠재울 자장가였으면 싶다.

“……집에 가봐야 해요.”

한결 가라앉은 목소리가 대꾸한다. 창백한 해골이 아니라 비로소 온전한 사람으로 되살아난 목소리다. 겨우 울음을 삭힌 그가 기뻐 가슴이 뛴다. 당장은 그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얻은 것마냥 배가 부르다.

“윤열이 형 부모님 와 계시다며? 혜윤이 혼자 자는 것도 아닌데 뭘.”

“……외박하면 걱정들 하세요.”

“외박한 적 있어?!”

“…….”

“……언제? 어디서 잤어?”

“……며칠 전에…… 연희동 집에 갔었어요.”

“밖에서 밤을 새웠단 말야?!!!”

“……어차피 잠도 안 와서…….”

울컥한 아픔에 잠시 잦아들었던 눈물이 또 핑 돈다. 긴 밤 내내, 요지부동 닫힌 강철 대문을 바라보며 그는 어떤 쓰라린 생각을 곱씹었을까.

“……전화해줄게. 여기서 잔다고 하면 걱정 안 하실 거야. 새벽에 데려다줄 테니까 푹 자. 깨워줄게.”

“…….”

계속 가겠다고 고집을 부릴까 봐 긴장했지만 의외로 그는 대꾸가 없었다. 한동안 그렇게 서로를 품고 있는 사이, 그가 잠이 쏟아지는지 거듭 크게 하품을 해댔다. 불편한 소파 위에서 그를 재울 수 없어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하자, 그의 손이 반사적으로 허리를 끌어당겼다. 중심을 잃은 몸은 그의 품 안으로 도로 무너지고 말았다.

“……어딜 가세요…….”

팔 힘이 너무 강한 나머지 인환은 저절로 신음 소리를 흘렸다. 허리를 감고 있던 팔 하나가 아래로 떨어지더니 벌거벗은 사타구니 사이를 더듬었다.

“……부…… 불편해서 여기선 못 자…… 침실로 가야지…….”

손바닥 안에 넣고 부드럽게 음낭을 굴리는 통에 목소리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렇군요…… 선생님 여기도 차가워졌어요…….”

귓가에 토해지는 담담한 목소리에 오소소 소름이 인다. 뿌듯하게 아랫배가 당기며 각도를 틀기 시작하는 자지가 난감했다. 안 그래도 설핏 한기가 느껴지던 참에 그렇게 뜨겁게 주무르면 어떡하라고! 좀 전이야 서로 제정신이 아니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고 쳐도, 고통 속에 있는 연인을 거푸 탐할 정도로 염치가 좋은 게 아니다. 등 쪽으로 안겨 있어 빨개진 얼굴을 안 들킨 것만도 천만 다행이었다. 인환은 완강하게 몸을 비틀어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과격하게 몸을 움직였더니, 내벽 안쪽에 가득 들어차 있던 그의 정액이 또다시 허벅지를 적시며 조금씩 흘러내렸다.

“……가서 자자. 얼굴이 시체 같아, 너…….”

허리를 빼앗긴 손이 이내 손목을 대신 틀어쥐어온다.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키곤 천천히 자신을 따라오는 그다.

“……선생님 다리 사이로 제 그게 흘러내리니까 기분이 묘해요. 여자였다면 임신이 됐을지도 몰라요…….”

화아악!!!!!!

손목을 붙잡힌 채 두 걸음쯤을 앞서 걷다가 그대로 몸이 굳었다. 온몸이 새빨개진 것은 물론이었다. 벌거벗은 엉덩이와 허벅지 안쪽으로 들어와 박힌 시선이 생생했다.

“……선생님이 제 아이를 임신하면 어떻게 생긴 애가 나올까요……? 별로 밉상일 것 같진 않죠?”

“…….”

“……전 형제가 많은 게 좋아요. 가능하다면 열 명이라도 낳아줬으면 좋겠어요. 그럼 저처럼 중간에 한둘쯤 사라진다고 해도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슬프진 않을 테니까요.”

“…….”

여전히 허벅지 안쪽을 핥는 듯한 그의 시선에 숨도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내뱉어지고 있을 횡설수설엔 더더욱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요즘 세상에 그렇게 많이 낳아줄 여자는 없겠죠? 다들 선생님 같지는 않으니까…….”

“…….”

“……선생님처럼 온순하고 상냥하진 않으니까…….”

“…….”

“……그렇죠? 선생님이라면 다르겠죠? 선생님이라면 무조건 제가 원하는 대로 많이 낳아주시겠죠?”

“…….”

허벅지 안쪽에 느껴지던 열기가 비로소 사라졌다. 먼저 걸음을 시작한 그가 아까와는 반대로 두 걸음쯤을 앞서가더니 인환을 돌아보았다.

“……졸려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린다. 엄청난 발언을 쏟아낸 주제에 졸음을 잔뜩 매단 얼굴이 무심하게 인환의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아아, 젠장. 그가 어서 빨리 제정신을 차려야만 할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은 애저녁에 심장마비로 죽을지도.

서로의 남은 옷을 몽땅 벗기고 알몸이 된 채 시트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태아처럼 몸을 말지는 않았지만 그는 여전히 약간 몸을 앞으로 굽힌 자세로 팔다리를 쭉 뻗어 인환의 몸을 친친 동여 감았다. 역시 온 밤 내내 눈을 말똥말똥 뜬 채 죽부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될 모양이었다. 땀과 체액의 흔적으로 낭자한 서로의 몸이었지만 둘 중 어느 누구도 그것에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신경을 쓰기는커녕 더더욱 애틋해하며 서로의 따스함에 달라붙었다.

“……집에 전화 꼭 해주세요…….”

이마 가운데에 맞닿아 있던 그의 입술 끝이 움직이며 다짐을 주었다. 금방이라도 잠에 떨어질 것 같은 나른한 목소리였다.

“응. 안심하고 자, 위야.”

“……새벽에도 꼭 깨워주시구요. 시험 잘 봐야 하는데…….”

“응, 꼭 깨워줄게. 시험도 잘 칠 거야. 넌 늘 전교 1등만 하잖아.”

“……이번 주말에 면회할 수 있는 거죠……?”

흠칫.

“……우리 윤열이 형 정말 만나게 해주는 거죠……?”

“……응.”

“……정말 안 죽일 거죠……?”

“?!”

“……왜 대답 안 해요? 안 죽일 거죠?”

“……어…… 아니, 그건…….”

“안 죽이는 거죠?”

“……어…… 어, 응…… 절대로 안 죽여.”

“정말이죠? 진짜 안 죽이는 거죠?”

“……응.”

“몰래 쏴버리는 거 아니죠? 쏴 죽이고 사고라고, 자살이라고 거짓말 치는 거 아니죠?”

“……응. 그런 일 절대 없어.”

“……그래요…… 그래야죠…… 그렇고말고요…… 안 그럼 저 미쳐요…….”

“…….”

“……미칠 거야…… 미치는 줄 알았어요…… 다 가버리면 어떻게 살아요…… 나 혼자 어떻게 살아요, 아버지…….”

“…….”

“……아시죠? 이제 그만 데려가라고 하세요…… 안 줄 거예요…… 이제 단 한 사람도 내줄 수 없어요…… 아시죠? 대답해봐요…….”

“……응…… 그래…….”

“……그래요…… 그렇고말고요…… 내 거예요…… 다 내 거예요…… 다 내가 지킬 거예요…….”

“…….”

그는 도대체 누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자신은 도대체 누굴 대신해서 대답을 들려주고 있는가. 알 수 없었다. 비몽사몽, 횡설수설 끊임없이 토해지는 다짐은 어린아이의 옹알이처럼 무기력하면서도 결전을 앞둔 전사의 포효처럼 힘이 넘쳤다. 그 연약함이, 그 비장함이 아파 또 한참을 몰래 울었다.

“……자, 위야…… 그만 자…… 응……?”

“……예…… 졸려요…….”

흐려진 목소리가 겨우 대꾸했다. 고개를 조금 들어 올려 따스한 숨결이 내뿜어지고 있는 그의 입술을 한동안 빨았다. 채 5분이 안 될 무렵, 등줄기와 엉덩이 사이를 부지런히 오르내리던 애무의 손길이 차츰 느려지더니 아예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어깨에 감겨 있던 왼팔도, 허벅지를 휘감고 있던 다리에서도 완전히 힘이 빠져나간 채 겨우 걸쳐져 있었다. 죽음 같은 단잠이 그를 무자비하게 침몰시키고 있었다. 그가 완전히 잠에 들고 나서도, 인환은 두어 시간 남짓 꼼짝 않고 누워 그의 불안한 꿈속을 지켜주었다.

네다섯 시간에 가까울 낮잠을 강제로 자버렸으니 제대로 잠이 올 까닭은 없었다. 그저 멍하니, 아름다운 연인의 얼굴만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기만 했다. 몇 번 뒤척이며 몸부림을 치듯 자세를 바꾸면서도 연인은 여전히 인환의 몸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잠시 떨어졌나 싶으면 어느 순간 소스라치듯 다가와 도로 끌어안고 뜨거운 피부를 맞비볐다.

밤 11시가 가까울 무렵 간신히 기회를 틈타 그의 집에 전화를 넣었다. 혜윤이 대신 어느 나이 지긋할 할머니가 전화를 받았다.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심한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것을 보니 이윤열의 모친 같았다. 수심이 가득하면서도, 시골 농사꾼 아낙네다운 투박하면서도 소탈한 언변에 애잔함을 느끼며 인환은 차분히 그의 사정을 전했다. 그러잖아도 걱정을 하던 참이라며 아낙은 몇 번이나 고맙다는 인사를 거듭했다. 거의 손자뻘일 젊은 청년에게 극존칭에 가까울 경어를 써가며 머리를 조아리는 아낙은 연민을 넘어 씁쓸한 회한마저 느끼게 했다.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이 땅의 모든 힘없는 필부들의 현주소를 보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아낙의 아들에게 그나마 도움을 줄 수 있었던 스스로를 새삼 대견해하며 예의 바르게 전화를 끊었다.

조금이라도 잠을 자두는 게 좋겠다 싶어 수면제 대용으로 위스키를 한 잔 마셨다. 과연 속이 따스해지며 전신의 긴장이 풀려갔다. 고팠던 담배도 거푸 두 대를 태운 다음 부지런히 침실로 되돌아왔다. 다행히 침실을 나가기 전 그 자세 그대로 그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걸쳤던 나이트가운을 벗고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여전히 잠결에도 반사적으로 품 안에 감아 들이는 그다. 단단한 근육으로 뒤덮인 그리운 몸을 끊임없이 어루만지고,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아름다운 얼굴을 실컷 들여다보았다. 어서 빨리 이윤열의 안전이 보장되어 그가 마음을 놓을 수 있길 간절히 빌었다. 그가 더 이상 상처받지 않고 더 이상 울지 않기를, 그토록 처절한 통곡 소리를 다시는 듣게 되지 않기를 간절히, 또 간절히 빌었다.

“……나갔어? 어딜? 언제 나갔는데? 혜윤아, 자세히 얘기해봐…….”

수화기를 틀어쥔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설마 하고 막연히 예상했던 일이 그대로 현실로 벌어지고 있었다.

[아르바이트 간다고요. 오늘 아르바이트 있는 날이거든요.]

알고 있다. 그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이 바로 여기, 자신의 아틀리에란 말이다. 하지만 그는 아직 오지 않고 있었다. 이미 9시다. 도착하고도 남을 뿐만 아니라 침대에서 한 몸으로 뜨겁게 뒹굴고 있을 시간이었다.

[5시쯤에요. 윤열이 오빠 면회 가느라 오늘 12시쯤 조퇴했거든요. 면회 일찍 끝나서 할아버지 할머니 모시고 집에 왔다가 5시쯤 다시 나갔어요. 아르바이트 간다고요.]

그것도 알고 있다. 점심때 조퇴하는 길이라며 전화가 걸려왔었다. 늘 침착하고 조용한 말투가 조금은 들떠 있었다. 역시 고맙다는 인사는 안 할 거라며 애써 감정을 억누르는 그가 사랑스러워 가슴이 뛰었었다. 중간고사도 별 실수 없이 잘 쳤다고 했다. 문제가 평소보다 쉬워서 또 1등은 문제없을 것 같다고도 했다. 면회 끝나고 이윤열의 양친을 집에 모셔다드린 후엔 바로 오겠다고 제법 기쁜 듯이 연달아 보고를 했다!

“……면회는? 면회는 어땠대? 그 형은 괜찮으시대?”

사고는 아닐 거다. 원인이라면 면회와 관련된 일 외에는 달리 없을 것이다.

[네. 오빠만 만나봐서 잘은 모르겠지만 오빠 말이 건강해 보였대요. 윤열이 오빠가 조사는 거의 끝나가니까 너무 염려하지 말라고 했대요. 재판을 받게 되면 좀 더 편해진다나 봐요.]

침이 마르는 기분이다.

“……오…… 오빠만 만나보다니? 그 형 부모님들은 못 만나신 거래?”

[저도 그게 이상해요. 윤열이 오빠가 할아버지랑 할머니는 뵙고 싶지 않다고 했대요. 재판 시작되면 그때 뵙자고 했다고…… 안 그래도 할아버지랑 할머니께서 굉장히 속상해하고 계세요. 게다가 할아버진 농사일 때문에 계속 서울에 머무르실 수도 없어서 이번엔 윤열이 오빠 못 보고 그냥 내려가셔야 한다나 봐요.]

“……위…… 위만 만나고 온 거니, 그럼?”

[네, 선생님.]

“……위…… 큰오빠 얼굴은 어땠어? 속상해 보이지 않았어?”

손의 떨림이 더 심해졌다. 어쩐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파도 동생들 앞에선 내색조차 않을 그였다.

[별로 그런 건…… 윤열이 오빠 잡히고부턴 계속 걱정을 많이 해서요. 살이 무지 빠져서 아마 보시면 많이 놀라실 거예요. 그래도 요번 주엔 면회가 가능해졌다고 정말 즐거워했거든요. 오늘도 별로 걱정하는 것 같지는 않았고요.]

“……그래…… 알았다, 혜윤아. 이만 끊자…….”

[오빠 들어오면 전화 드리라고 할까요?]

“아, 아냐, 됐어. 급한 일 아닌걸 뭐. 그래, 그럼 잘 자라.”

[네, 선생님도 안녕히 주무세요.]

온순하면서도 명랑한 소녀의 목소리가 예의 바르게 인사를 챙기곤 전화를 끊었다.

확실히 아직 어려서인지 혜윤이에게선 별로 그늘이 보이지 않는다. 걱정은 해도 그처럼 중압감을 느끼며 괴로워하진 않았다. 하긴 얼마나 든든한 보호자이자 가장의 역할을 자청했기에 저리 그늘 없이 동생을 키워올 수 있었겠는가.

그와 만날 약속이 돼 있었기에 따로 옷을 갈아입을 필요는 없었다.

잔뜩 멋을 부린 짙은 감색 데님 팬츠와 청보라색 니트 셔츠 위에 산 지 얼마 안 돼 아직 채 길이 들지 않은 핑크색 양가죽 재킷을 걸쳐 입었다. 온화한 봄 날씨가 연일 계속되고 있었지만 밤엔 아직 좀 쌀쌀하다. 지갑만을 재킷 안주머니에 챙기고 바로 아틀리에를 빠져나왔다.

직감이 틀렸을 수도 있지만, 이렇게 마냥 넋을 놓고 전화만 기다릴 순 없었다. 전화를 해줄지도 의문이었거니와 무엇보다도 그의 상태가 어느 정도 심각한지 걱정이 돼서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면회를 기다리는 일주일 남짓 동안은 그도 많이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사흘 전인 지난 금요일만 해도 그는 오늘로 정확히 날짜를 통보받았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었다. 본래의 예의 바르고 냉정한 남창으로 돌아와 변함없이 능수능란하고 절륜한 섹스 테크닉을 선물해주었던 것도, 근 3주 만인 바로 사흘 전의 일이었었다.

물론 기대와 현실은 다를지도 몰랐다. 아니, 아마 현저히 달랐겠지. 그랬기에 이렇게 또 정처 없이 옛 집 근처를 헤매 다니며 고통을 견디고 있을 것이다.

저녁 정체가 아직 풀리지 않아, 보통은 차로 15분 거리인 연희동에 도착하기까지 30분이나 걸리고 말았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차 안에서 차라리 그를 기다리는 게 나았을까 하고 내내 괴로운 고민을 했다. 전화가 걸려왔을지도, 혹은 이미 아틀리에에 도착해 벨을 누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아니면 연희동이 아닌 다른 모르는 곳에서 홀로 견디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내내 근심했다.

절대 잊지 못할 행복한 추억으로 각인돼 있는 놀이터 앞에 차를 세우고, 기억을 더듬어 부지런히 그의 옛집 앞까지 걸었다. 그날 새벽에 왔을 때와는 달리 간간이 행인들이 눈에 띄었다. 시계를 보니 10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낮보다는 서늘했지만 공기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누군가의 집 정원에 심어진 라일락 향기가 은은하게 골목길을 채우고 있었다. 보름이 가까운지 달이 무척 밝았다. 군데군데 보이는 가로등이 아니더라도 몇 미터 앞에서 마주 걸어오는 행인들의 얼굴을 자세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집 앞에 가까워갈수록 손 떨림이 점점 심해졌다. 가슴도 몹시 두근거렸다. 제발 그곳에라도 있어주기를 바라는 마음과, 자신의 걱정이 그저 기우에 불과하고, 그가 달리 급한 약속에 불려나간 것뿐이기를 비는 양갈래 마음 사이에서 신경이 어지러이 춤을 추었다.

모퉁이를 돌았다.

짙은 암청색 페인트가 칠해진 육중한 철문이 보였다. 점점 세동을 거듭하던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두 주먹을 꼭 쥐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철문을 따라 양쪽으로 길게 늘어서 있는 잿빛 화강암 담장을 끝에서 끝까지 더듬었다. 그는 보이지 않았다!

실망인지 안심인지 모를 허탈감에 잠시 비틀거리며 다시 시선을 모았다. 오른쪽으로 20여 미터쯤 이어진 담장의 끝, 골목 어귀에 커다란 전신주 하나가 보이고 그 바로 뒤에서 무언가 어른거리는 게 보였다.

두근…….

그저 사람의 형체 일부가 보일 뿐, 당장 누군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심장이 대답을 대신 해주었다. 한번 저 아래로 툭 떨어졌던 심장이 이어 불규칙하고 격렬하게 세동을 거듭하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두근…….

절뚝거리는 자신의 발자국 소리가 조용한 주택가 골목을 유달리 시끄럽게 울렸다. 구두 대신 차라리 운동화를 신고 올 걸 하고 잠깐 자책을 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전신주 너머,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사람의 발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눈에 익은 젊은 남자의 구두가 보였다. 창백한 달빛 아래, 심하게 낡은 검정색 로퍼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막다른 골목 입구, 쭈그리고 앉은 남자의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추자 남자의 고개가 천천히 올라갔다.

남자는 놀라지 않았다. 표정이 없는 황량한 눈이 조용히 인환의 눈동자를 굽어보고 있었다. 사흘 전에 봤을 때 그대로, 여전히 해골처럼 마른 얼굴에 퀭한 다크 서클이 드리운 아픈 눈시울이었다. 자신이 치를 떠는 흉측한 모양새의 교복도 여전히 그의 아름다운 몸을 휘감고 있었다. 촌스럽기 그지없는 암녹색 싱글 재킷이, 흰 바탕에 연초록 줄무늬가 쳐진 포플린 셔츠가 그의 날개를 묶고 있다. 재킷과 같은 색의, 무릎 부분이 몹시 해진 채 앞으로 툭 튀어나와 있는 모직 바지가 그의 다리를 친친 동여매고 있다. 왕자처럼 고귀하고 아름다운 내 영웅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학대요 모욕이었다. 개구리로 변한 왕자 같았다. 까마귀로 변한 백조 같았다.

“……가자…… 집에 데려다줄게, 위야…….”

가까스로 태연함을 가장하며 말문을 열었다. 손바닥에 땀이 흥건하게 배어나올 정도로 긴장했지만 강하게 처신해야 한다고 이를 악물었다. 동정도 보이지 말고 눈물도 보이지 말자고 기를 썼다.

“……가…… 여기서 또 밤 새울 작정이니……?”

“…….”

“…….”

“……멍 자국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어요…….”

흠칫.

고요하게 인환의 것을 붙들고 있던 시선이 골목 끝 어딘가로 이동했다. 그 어딘가를 하염없이 굽어보는 시선엔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

“……그놈들이 열심히 땜질을 해보려고 한 모양이지만…… 어디 그리 쉽게 분칠이 되겠어요……? 아직도 시퍼렇게 퉁퉁 부어갖고…… 15킬로쯤은 빠졌나 보더군요. 고작 3주 만에요. 어디서 꼽추 난쟁이가 나타났나 했어요…….”

“…….”

“……보성 부모님들께서 보셨다면 졸도하셨을지도 몰라요. 억장이 무너지셨겠죠…… 그래서 안 보겠다고 했을 거예요…….”

“…….”

“……자업자득이에요. ……바보 같은 짓을 했으니까…… 하고 있으니까…… 당연한 거예요…… 강이 형처럼 죽지 않은 것만 해도 감지덕지할 일이죠…….”

“……가자…….”

“……너무 밉더라구요…….”

“…….”

“형이 미워서 정말 견딜 수 없더라구요…… 정말 어디 때릴 곳이 남아 있었다면 한 방 치고 싶더라니까요…….”

“…….”

“……폭력이란 그런 거죠…… 일단 태어나면 무섭도록 전파력이 강해요…… 바이러스보다도 더 쉽게 감염이 되죠…….”

“……아…… 앞으론 더 이상 고문 같은 건 없을 거야, 위야. 그 사람들 약속해줬으니까…… 그…… 그리고 조사도 거의 끝나간다며…… 재판 열리게 되면 그 사람들도 남들 눈이 무서워서 더 이상은 그런 짓 못 해…….”

장담할 수 없는 얘기를 장담한다. 그가 증오하는 기득권의 입으로 동료 기득권의 행실을 변호한다. 물론 할 수만 있다면 더러워진 옷가지처럼 벗어버리고 싶을 동료들이다. 세탁기에 몽땅 처넣고 들들들들 돌려 죽이고 싶을 동료들이다.

“……가자…… 집에 가자, 위야…….”

“……미워…….”

“?!”

“……미워서 견딜 수가 없어…… 개자식들…… 개돼지만도 못한 새끼들…… 쓰레기들…… 쓰레기 같은 해충 새끼들…….”

먼 곳을 응시하던 표정 없던 눈에 홀연 불꽃같은 일렁임이 인다.

“……되찾을 겁니다, 반드시…….”

“…….”

“……언젠가 이 집을 되찾게 되는 날엔 더 이상 쓰레기들에게 밟히는 일도 없겠죠…….”

“…….”

“……아무도 내 가족들을 건드리지 못하게 할 거야…… 받은 만큼 돌려줄 거니까…… 그 이상으로 돌려줄 거니까…… 죽일 거야…… 강이 형처럼 해줄 거야…… 윤열이 형처럼 박살을 내줘야지…… 막지 못해…… 아무도 막지 못해요…… 못 하게 할 겁니다, 누구도…….”

피를 토하듯 절절하게 되풀이되는 계약의 맹세가 아프도록 귓전을 때리고 있었다. 넋을 잡아 찢는 것만 같은 강하고 날카로운 발톱이 사정없이 세상을 후려치고 있었다. 꽁꽁 감춰졌던 깊은 상처를 마침내 온몸으로 드러내며, 지나치게 조숙한 사내아이는 이를 갈고 있었다. 세상에 대한 맹렬한 복수심을 차마 다 가누지 못해, 눈시울은 불처럼 이글거리고, 얼굴은 밀랍처럼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한없이 쪼그라들었던 늠름한 몸은 웅크렸던 그만큼 억제된 분노로 파도처럼 일렁였다. 폭발 직전의 짜부라지고 짜부라진 우주의 한 특이점 같았다. 태풍의 눈 같았다. 그것처럼 새까맸다. 그것처럼 고요했다.

“……이 집을 되찾게만 되면 더 이상…… 더 이상 아무도 날 짓밟게 두지 않아…….”

피가 뚝뚝 떨어지는 맹세는, 마치 악마와 계약을 맺는 사제의 그것처럼 비정하고 처절하기 그지없었다…….

발끝부터 머리카락 끝까지 온통 떨림이 멈추질 않는다. 그가 두려울 까닭은 없다. 아니, 두렵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거다. 저 모습 또한 내 영웅의 다른 얼굴이다. 괴롭다고, 소름이 끼칠 만큼 이질적이라고, 너무나 어둡고 어두워서 까무러칠 것 같다고 해서 내 영웅이길 멈추지는 않는다.

“……가…… 가자, 위야. 일어나…….”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후들거리는 두 손을 뻗어 살며시 그의 손을 마주 쥐었다.

얻어맞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고 각오하고 있었다. 사정없이 떠밀리며 거부당해도 기꺼이 다시 손을 뻗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숨처럼 헐떡이며 잡아본 연인의 손끝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손가락 끝을 살짝 얽자 꿈처럼 상냥하게 깍지를 껴온다. 크고 섬세하고 마디가 아름다운 피아니스트 신동의 손이다. 연인의 손이다.

불길처럼 증오를 내뿜고 있는 눈이 자신을 본다. 번들거리는 어둠의 광기가 다시금 찰랑찰랑 가득 들어차 있는 게 보인다. 내 연인의 눈이다. 내 연인의 고통이다. 해골같이 창백한 얼굴이 어쩐지 까마귀처럼 검게 느껴졌다.

“……집에 가자…… 데려다줄게…….”

“…….”

“……데려다줄게…….”

“…….”

“……데려다줄게…….”

“…….”

주문처럼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 속삭인다. 깍지가 껴진 양손을 천천히 잡아당겼다. 조금 힘을 주어 일으키자, 그의 몸은 예상외로 너무 쉽게 따라 올라왔다. 자신보다 20킬로쯤은 더 나갈 늠름한 덩치가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휘청, 흔들리던 몸이 무너지듯 인환의 어깨 위에 체중을 실었다. 깍지 낀 손을 기도하듯 앞으로 모은 채, 그는 그렇게 한동안 조용히 인환의 가슴과 어깨에 몸을 기대고만 있었다. 어깨 위에 눌린 그의 얼굴이 타는 것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가자…….”

“……발이 저려요…….”

그의 손을 끌고 걸음을 떼려 하자 그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과연, 얼마나 오랫동안 쭈그리고 앉아 있었는지 나무토막처럼 뻣뻣해진 그의 몸이 비로소 자각이 됐다. 자신에게 기대지 않았더라면 중심을 잃고 그대로 주저앉아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래…… 걸을 수 있게 되면 말해…….”

참고 참았던 눈물이 또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아 숨을 깊게 쉬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꽃이 핀 것 같아요…….”

“……?”

“……분홍 진달래 같아요…….”

“……진…… 달래……?”

“……선생님 재킷…… 진달래처럼 예뻐요…….”

“…….”

“……안 됩니다…….”

“…….”

“……이렇게 예쁜 옷 입고 다니지 마세요…… 여잔 줄 알고 이상한 놈들이 달라붙어서 행패부리면 어떻게 해요…….”

“……또 횡설수설이구나…….”

“……제가 항상 쫓아다니면서 지켜드릴 수 없잖아요…… 이제 예쁜 옷은 입지 마세요…….”

“……횡설수설하지 마라, 심장 떨리니까…….”

“……진짜야…… 다 예쁘니깐…… 선생님은 뭘 입어도 다 예쁘니까…… 멋 부리지 마세요…….”

“제정신 돌아오면 나중에 너 실컷 놀려줄 거다, 위위…….”

“……아까 갑자기 꽃이 나타난 줄 알았어요…… 너무 예뻐서…….”

“실없는 소리들 한 거 다 놀려줄 거야…… 다…….”

“……우울했는데…… 진짜 몹시 우울했는데…… 갑자기…….”

“집에 가자…… 걸을 수 있겠니?”

그를 부축하듯 한쪽 팔을 어깨에 걸고 시선을 맞췄다. 광기로 번들거리는 아름다운 눈동자가 홀린 듯 자신을 핥고 있었다.

“……걸을 수 있지?”

“……예…….”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행히 경직이 풀렸는지 그는 수월하게 자신의 보조에 맞춰왔다. 더 이상 부축을 할 필요가 없었음에도 어깨에 걸쳐진 단단하고 묵직한 팔을 풀지는 않았다. 아픈 연인이었다. 자신의 부축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연인이었다. 무사히 집에 데려다주어야만 했다. 보호해줘야만 했다. 아프지 않게, 더 이상 상처 입지 않게, 자신이 돌봐줘야 한다.

집 앞 모퉁이를 지나 놀이터 쪽으로 나 있는 큰길로 접어들기 직전, 마주 걸어오던 중인 행인 하나가 눈에 밟혔다.

달이 밝았다. 행인의 바로 앞 전신주에 걸린 가로등 빛도 꽤 환하게 길을 비추고 있었다. 행인의 미세한 표정 하나하나까지 샅샅이 살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인환이 발걸음을 멈추면서까지 행인을 자세히 들여다본 것은 행인을 잘 알고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것은 행인이 먼저 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유령이라도 본 것마냥 휘둥그레진 눈동자가 이쪽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는 그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걸음을 멈추자 줄곧 바닥을 향해 있던 그의 고개가 들어 올려졌다. 자연스럽게 전방을 향한 그의 시선이 행인을 발견하곤 움찔 몸을 긴장시키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의 어깨에 둘러졌던 그의 팔이 슬며시 아래로 떨어졌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리던 걸음걸이로 자신에게 기대오던 그의 체중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단정하고 아름다운 얼굴은 어디선가 본 듯했지만 정확히 누구인지는 그저 흐릿하기만 했다. 그와 거의 비슷할 커다란 키도, 모델처럼 늘씬하면서도 단단한 근육이 느껴지는 균형 잡힌 몸매도 어딘가 눈에 익었다. 행인의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은 암청색 블레이저와 잿빛 팬츠로,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딩의 교복 차림이었다. 워낙 핸섬한 얼굴에다 늠름한 자태를 자랑하는 몸매 탓에, 그 흔한 교복조차도 무슨 유명 메이커의 멋들어진 슈트처럼 보인다는 점만 빼면, 그저 평범한 고등학생임엔 틀림이 없을 터였다. 등에 진 커다란 책 배낭도 늦은 밤 보충 수업이나 학원 과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피로한 고등어의 품새를 그대로 반영해주고 있었다.

소리 없는 눈싸움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너무나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탓에 인환 또한 단 한 마디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먼저 눈싸움을 끝낸 것은 그였다. 여전히 조금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그가 핸섬한 고등학생을 스쳐 앞으로 걸어간다. 멍하니 연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홀연 정신을 차리고 부랴부랴 연인의 뒤를 쫓았다. 막 행인의 곁을 스치고 나서야, 인환은 비로소 아스라한 기억의 갈피를 뒤져 행인의 이름을 떠올릴 수가 있었다.

김성준이었다!

“……얼굴이 왜 그러냐, 새꺄!!!”

난폭하다고까지 여겨질 정도로 신경질적인 힐난이 골목 가득 퍼졌다. 갑작스러운 고함에 소스라쳐서 인환은 걸음을 멈추고 김성준을 돌아보았다. 앞서 걷던 그도 우뚝 걸음을 멈췄다. 방향을 틀지 않은 자세 그대로 김성준은 얼굴을 사납게 구기고 있었다.

“씹쌔가…… 윤열이 형보다 네가 먼저 초상 치르겠다, 이 새꺄!!!”

“…….”

“죽을래?!!!”

“…….”

“죽을래?!!!”

“…….”

“휘랑 혜윤인 어떡할라고 그 지랄이냐, 새꺄!!! 드럽게 몸까지 팔아 먹여 살리는 주제에 여기서 주저앉을 거냐, 이 씹새꺄?!!!”

“……시끄러…….”

“뭐야?!!!!!”

“……시끄러…… 악 쓰지 마라, 동네 창피하게…….”

“창피해?!!! 창피하다구?!!! 씨팔, 니가 지금 창피할 군번이냐, 이 새꺄?!!! 이 씨팔 개새꺄!!!”

“……목청 터지겠다…… 나중에 목 아프다고 징징대지나 마라…….”

“아가리 닥쳐, 이 새꺄!!! 씨팔, 좆같이!! ……! 거기서 한 마디만 더 개기면 너 아작나는 줄 알어!!!!!!”

“…….”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는 통에 지나가던 다른 행인 둘이 힐끔거리며 종종걸음을 친다. 서로 등을 마주한 채 잘생긴 고등어 하나는 길길이 날뛰고, 해골처럼 창백한 다른 고등어 하나는 피식피식 꺼져버릴 것 같은 웃음을 흘린다.

“……보고 싶었다, 김성준…….”

“닥치랬지?!!!”

“……집에 좀 와라…… 힘들어 죽겠다…….”

“개새끼……!”

“……힘들어, 성준아…….”

“……씨팔…… 좆만 한 새끼…… 개 씨방새가…….”

“…….”

“……씨팔, 지가 오면 안 돼?……! 보구 싶으면 지가 오지……! 뭘 잘했다고 뻐팅기고…… 보구 싶었다구……? 누가 믿어, 드러운 새끼가…… 잘못했으면 지가 와서 빌어야지…….”

“…….”

점점 잦아든 고함 소리 대신 숨죽인 오열이 잘생긴 소년의 온몸을 사로잡고 있었다. 차려 자세로 온몸을 굳힌 채, 소년은 울음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희미하게 떨리는 턱 끝과 불끈 틀어쥔 두 주먹이 아니라면 울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긴 좀처럼 힘들 터였다. 그간 소년과 그와의 사이에 불거진 깊은 골을 알고는 있었지만, 지금 소년의 마음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투를 읽기란 인환으로서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줄곧 등을 돌린 채로 친구의 애정을 간절히 구하고 있던 그가 마침내 몸을 돌려 친구를 굽어보았다. 여전히 완강하게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모습임에도 그는 이미 알아본 모양이었다. 승패는 벌써 판가름이 났다는 것을. 아니, 설령 알아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는 달리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친구일 터였다. 그것이 가족일 터였다. 무조건적인 이해만 있는 영역이었다. 무조건적인 사랑만 자리하는 공간이었다. 자존심은, 상처는, 그 막강한 원초적인 힘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부서지기 마련이었다.

김성준의 팔을 잠시 잡았다가 이내 결사적으로 상반신을 끌어안는 그가 보였다. 소리 없는 눈물은 김성준의 얼굴만 적시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도 어느새 온통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수도꼭지가 터진 것처럼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이 김성준의 목덜미 속으로 파묻혀 들어갔다. 차려 자세로 기를 쓰고 움켜쥐어져 있던 김성준의 주먹이 대답처럼 그의 등줄기로 옮아가는 것이 보였다.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은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사납게 그의 등을 후려치고 있었다. 그 어떤 강력한 포옹보다도 더 절실한 애정과 이해가 느껴지는 힘찬 포옹이었다. 서로의 다친 생채기를 부지런히 핥아주는 치유의 다른 이름이었다.

소리 없는 통곡은 꽤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접착제처럼 달라붙은 아름다운 소년들의 몸도 도무지 떨어질 줄을 몰랐다.

긴 시간이었을 것이다.

소년들 너머, 소년들이 공유해왔을 긴 시간들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아름다운 2층집이 보였다. 짙은 암청색 페인트가 칠해진 육중한 철문이, 철문을 따라 양쪽으로 길게 죽 늘어서 있는 잿빛 화강암 담장이 보였다. 신기루처럼 보일 듯 말 듯 삐죽 솟아 있는 회색의 박공지붕도 보였다. 지붕 너머엔 하늘이 있었다.

……하늘이 지붕 위에 있구나…… 아주 푸르게, 아주 조용하게…….

베를렌의 쓸쓸한 시구가 홀연 가슴으로 내려앉았다.

인환은 저 지붕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저 지붕 위 하늘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긴 시간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은 영영 갖지 못하게 될지도 모를 연인과의 긴 긴 공유의 시간들을…… 이 순간, 사무치게 그리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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