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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990년 7월. 장인환(張仁歡) (12/129)

12. 1990년 7월. 장인환(張仁歡)

안기부 조사가 모두 끝이 나고 이윤열이 서울구치소로 이감된 것은 5월 초순 무렵이었다. 

소요죄 및 집시법과 국가보안법 등의 위반 혐의로 이윤열이 구속되어 재판을 받게 되기까지, 그의 신경 쇠약 증세 또한 산발적으로 계속 나타나곤 했다. 처음 면회가 있던 날이나 그전 2주만큼 심한 것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살얼음판을 딛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며 그는 가까스로 견디고 있었다. 그 몇 주 동안, 인환 역시 칼 끝 위에 올라선 것처럼 긴장한 채 그를 지켜봐야만 했다.

잠을 제대로 못 자는 그가, 정해진 날은 물론 다른 날에도 불쑥불쑥 아틀리에로 찾아와 죽은 듯이 자고 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새벽녘이나 깊은 한밤중, 자다 말고 말도 없이 사라진 그를 찾아 잔뜩 가슴을 졸인 채 연희동으로 차를 몬 것만 해도 부지기수였다.

섹스는, 어떤 날은 절륜한 남창의 화신이 돼서 최고의 서비스를 해주는가 하면, 또 어떤 날은 제멋대로의 불안정한 소년이 돼서 막무가내로 인환의 몸을 탐하기도 했다. 최악의 상태일 때는, 그럴 마음이 도저히 안 생긴다며 싸늘하고 오만한 태도로 보이콧 선언을 하기도 했다. 물론 다음에 꼭 보충하겠다는 밉살스러운 말을 보태는 걸 잊지 않았다.

영원처럼 되풀이될 것만 같던 고통의 시간은, 그러나 의외로 이윤열의 재판이 시작되면서 기적처럼 막을 내리게 되었다.

재판이 시작되던 날, 법정에서 처음으로 대면할 수 있었던 키 작은 혁명 투사는 에티오피아 난민을 연상시킬 정도로 뼈만 앙상했지만 법정 안의 그 누구보다도 생생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한 달 만에 무려 20킬로그램 가까이 살이 빠질 정도로 혹독한 담금질을 당했음에도 타고난 빛과 기상은 별로 훼손당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절대로 범인(凡人)의 그것이 아닐 새까만 얼굴엔 담담하기까지 한 마음의 평온과 가족들에 대한 연민이 가득 차 있었다. 검사의 서릿발 같은 추궁에도 불구하고 주눅이 들긴커녕 도리어 차분하고 조리 있게 자신의 굽힘 없는 신념을 펼치기까지 했다. 이윤열의 흔들림 없는 권위와 기개는 그동안 그렇게까지 휘청대던 그의 정신력을 단숨에 제 위치로 돌려놓는 기적의 명약이 되어주었다.

두 달 가까이 계속된 1심 재판에서 이윤열은 징역 3년 6개월의 중형을 선고받고 안양교도소에 구속 수감되었다. 무료 변호를 맡겠다고 나선 어느 인권 변호사가 항소를 권하기도 했지만 손 사장의 얘기로는 정권이 바뀌지 않는 한 현재로선 별로 승산이 없다고 했다. 이윤열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가난한 집안 형편에 재판 비용만 더할 뿐인 소모전을 벌이고 싶지 않다며, 강한 남자는 결국 깨끗이 항소를 포기했다. 3주일 전인 7월 둘째 주 금요일의 일이었다.

안양교도소로 이감되기 직전, 마지막으로 이윤열을 면회하고 돌아온 그의 표정은 언제나처럼 침착하고 고요했다. 인환에게 별다른 말은 없었지만 이제 그 표정만으로도 인환은 그의 상태를 훤히 점칠 수가 있었다.

재판이 시작되면서부터 급속히 안정을 찾아가던 그는 이제 더 이상 흔들리는 일이라곤 없었다. 당연했다. 감옥에서 몇 년을 썩든 이윤열이 그의 곁을 완전히 떠날 위험은 이제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벌벌 떨며 사랑하는 형의 안전을 겁내지 않았다. 솔직히 감옥이라는 폐쇄 공간이 가져다주는 위험성을 모르지 않으련만, 그는 이상할 정도로 맹목적인 어떤 확신을 갖고 있었다.

이윤열은 다른 모양이었다. 자신의 친형과는 다를 것이라고, 부모님이나 형처럼 자신의 곁을 떠나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고, 어떤 종교적 맹신과도 흡사한 믿음을 갖게 된 듯싶었다. 물론 그를 그렇게 만든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이윤열일 터였다. 가시처럼 마르고 까마귀처럼 새까만 얼굴을 한 이상야릇한 남자. 한 달여에 가까운 시간 동안 끔찍하게 되풀이된 구타와 고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굴의 생명력을 자랑하며 그의 근심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린 그런 남자. 그의 말을 빌리면, 그 작고 마른 몸에 친형인 문강의 혼이 함께 깃들어 있다는 그런 남자 때문일 터였다.

여름방학을 해서 그런지 종로 2가에 위치한 맥도날드 매장 안은 빈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로 어린 학생들로 붐볐다.

드문드문 인환 같은 일반인이나 대학생들로 보이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지만 대부분은 사복 차림의 중고생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한창 성수기를 맞은 영화를 보기 위해 친구들끼리, 혹은 연인끼리 삼삼오오 모여 앉아(방학을 빌미 삼아 단체 미팅을 하러 나온 애들도 꽤 많은 것 같았다) 시끌시끌한 소음을 만들고 있는 어린 학생들을 굽어보며 인환은 꽤 자격지심을 느끼고 있었다.

‘이 나이에 맥도날드냐’까지는 아니더라도, 확실히 파릇파릇한 10대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틈바구니에 끼어 앉아 콜라를 홀짝이는 기분이란 좀 복잡했다. 하긴 10대 연인과의 데이트에 심하게 가슴을 두근거리며 앉아 있는 꼬락서니니 말해 무엇하랴. 정확히는, 김성준이 생일 턱을 쏜다며 모처럼 그를 불렀고, 그가 친구(!)라 여기는 자신을 끼워 넣어 셋이 함께 놀자고 제안한 것에 불과하긴 했지만 말이다. 생일도 생일이지만, 다음 주부터 시작되는 험난한 고 3 보충 수업 여정에 맞춰 파이팅의 의미도 들어 있다고 했다. 한창 막바지 피치를 올려야 할 수험생들은 그렇다 쳐도, 그 자리에 왜 늙은 자신까지 끼어야 하냐고 차마 물어볼 수는 없었다. 물론 대답은 한결같을 터였다. ‘선생님도 제 소중한 친구니까요.’

저 움직일 수 없는 규정이 슬픈지, 혹은 기쁜지, 이제 그를 판단할 사고력 따윈 남아 있지 않은 인환이었다. 그저 1분 1초라도 그와 함께 보낼 기회가 생기기만 하면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허겁지겁 달려 나가는 자신이 있었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계약 기간이 끝나는 8월은 어느새 코앞으로 훌쩍 다가와 있었다. 이윤열의 구속과 재판으로 제정신이 아닌 그에게 전전긍긍하고, 다시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가며 서비스의 극치를 선사하는 그에게 새삼 홀딱 반하느라 지난 넉 달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마냥 혼미하기만 했다. 정신이 들고 보니 어느새 7월이었다. 상상조차 하기 두려워 미뤄왔던 이별이 바로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시계를 살펴보지만 약속 시간인 정오가 되려면 아직 15분이 더 지나야 했다.

맥도날드에 도착한 시간이 11시 20분이니 오늘은 제법 꽤 오래 기다리는 셈이 된다. 별로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은 안 한다. 드물게 가졌던 그와의 야외 데이트에서도 자신은 늘 기본 30분은 기다리곤 했으니까. 시간 관념이 철저한 그는 대개 약속 시간 5분 전후로 약속 장소에 나타나곤 했지만, 인환은 그의 그런 정확한 습관을 알면서도 매번 미리 서두르곤 했다. 혹시라도 그가 좀 더 일찍 나오는 날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혹시라도 그가 자신보다 일찍 나오게 되면 자신은 그가 기다리는 단 몇 분을 낭비하게 되는 셈이니까. 물론,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인환보다 먼저 나와 기다린 적은 없었다. 다행한 일이라고 인환은 늘 생각하고 있었다.

11시 50분을 가리키고 있는 손목시계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무심히 1층으로 면한 계단 입구 쪽을 살피는데, 막 1층에서 올라온 듯한 장신의 남자가 눈에 확 뛰어들어왔다.

저절로 얼굴에 피가 몰리며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심장은 드럼 소리처럼 격하게 세동을 거듭하기 시작했다. 아아, 그래. 그렇다. 함께 몸을 섞은 지 1년이 다 돼가건만 자신은 여전히 이렇게 연인에게 홀딱 반해서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어떻게 헤어진단 말인가. 어떻게 마음을 접는단 말인가. 모르겠다. 정말로 모르겠다. 정말로 어떻게 해야 그 모든 게 가능할 수 있는지 자신으로선 도저히 상상조차 되질 않는다!

거의 하얗게 물이 빠진 낡은 청바지에 군청색 반팔 면티, 그리고 낡은 흰색 농구화 차림인 연인이 2층 매장 안을 부지런히 둘러본다. 사흘 전인 월요일에 봤을 때만 해도 덥수룩하게 자라 있던 머리는 어느새 스포츠머리에 가까울 정도로 짧게 잘려나가 있다. 그새 이발을 했나 보다. 아까워라. 부드럽고 숱 많은 암갈색의 머리카락은 수사자 같은 스타일로 길게 길러도 굉장히 멋질 거란 생각을 한다. 선이 굵고 뚜렷한 이목구비에 어울려 몹시 야성적으로 보이겠지. 겨드랑이 사이와 양쪽 견갑골 사이 등줄기가 땀으로 젖어 있는 걸 보니 지하철에서 내려 뛰어온 모양이다. 더위도 심하게 타면서 뛰긴 왜 뛰어. 속으로 애틋한 투정을 해본다.

연인보다도 먼저 연인의 존재를 알아챈 매장 안의 청소년들 사이에서 가벼운 동요가 일어나는 게 느껴진다. 사복 차림이라 절대 고등학생으로는 안 보이는 늠름한 외모도 애들의 동경에 찬 시선에 일조를 하고 있을 터였다. 여자애들은 물론 몇몇 남자애들조차 눈이 확 뜨여서는 한동안 넋을 잃고 그를 훔쳐보고 있다. 배우인지, 모델인지, 아니면 그 둘 다인지, 내기를 하는 애들도 있을 거다. 킹카 중의 킹카라고, 오늘 눈보신 했다고 한숨을 쉬는 내성적인 여학생도 있을 거고, 한번 대시해볼까 속셈을 튕길 공주과 여학생도 있을 거다. 괜한 자격지심에 질투 어린 칼비난을 던질 남학생도 있을 거고, 혹은 어쩌면, 남몰래 선망의 신음을 흘릴 게이 소년도 있을지 모른다. 아아, 역시 자신만 반하는 게 아니다.

매장 가장 안쪽부터 세심하게 테이블을 훑어 오던 그의 시선이 마침내 자신을 발견했다.

보일 듯 말 듯 은근한 미소가 그의 도톰한 입술 끝에 살짝 걸린다. 거의 표정이 없는 단아한 이목구비에 그것은 메가톤급에 해당할 섹스어필이다. 슬금슬금 훔쳐보고 있는 저 앞의 여학생 둘, 침 흘리지 마라. 당장은 나만의 연인이다.

얼굴이 너무 티 나게 빨개지지 않길 기도하며 가볍게 손을 흔든다. 환하게 미소를 날려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똑바로 시선을 얽어오며 테이블 가까이 다가온 연인이 늠름하고 날씬한 몸을 딱딱한 맥(맥도날드) 의자에 묻는다. 청바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와 코끝에 맺힌 땀을 부지런히 훔치는 모습이 섹시하기 그지없다. 손을 움직일 때마다 단단하고 아름다운 팔 근육도 따라서 근사한 율동을 거듭하고 있다.

“……밖에 무지 덥지……?”

그저 가슴 벅찬 기쁨을 삭히는 데만도 여념이 없어 당장은 머릿속이 백짓장처럼 하얗기만 하다. 푼수처럼 떨리는 목소리에도, 뻔하고 재미없는 인사말밖에 선물하지 못하는 자신의 말주변에도 속이 상한다.

“……예, 30도가 넘는다니 좀 괴롭네요. 성준인 아직 안 왔나 봐요?”

담담한 물음. 그가 내내 자신의 시선을 물고 있어 좀 버겁다. 요즘은 늘 이렇다. 만나면 단 한시도 시선을 떼지 않고 자신을 관찰하는 것 같아서 좀 무섭기도 하고 또 설레기도 한다. 아마도 자신이 마음을 정리할지 못할지 집중 관찰에 들어간 것일 게다. 생각해보면 가슴 아픈 현상이기도 하다.

“응…… 아직 제 시간 안 됐잖아.”

“많이 기다리셨어요?”

“아니, 나도 도착한 지 얼마 안 돼.”

늘 하던 거짓말을 입에 올린다. 양심의 가책 따윈 당근 없는 거짓말.

“……아래 내려가서 뭐 사 올까? 목마르지 않니?”

“이거 마실게요.”

자신이 마시던 콜라 컵을 집어 들더니 반쯤 남은 콜라를 단숨에 들이켜버린다. 물론 자신이 사용하던 빨대를 그대로 사용해서. 기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또 좀 얼굴이 빨개졌다. 아아, 역시 뭐라 해도 그는 아직 자신의 연인이다. 같은 빨대를 써도 전혀 아무렇지 않은, 서로의 키스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달콤한 연인.

“……선생님과 성준이가 좀 친해졌으면 해서요…….”

콜라 컵 옆에 놓인 물 한 컵까지 몽땅 비운 그가 조용히 말을 꺼낸다. 자신의 눈을 붙들고 있는 시선엔 역시 별로 표정이 없지만 마냥 부드럽고 상냥하게만 느껴진다.

“……불편해하실 거 알면서도 고집을 부렸습니다. 죄송해요.”

“불편하긴 뭘. 덕분에 모처럼 너랑 밖에서 만나니까 좋기만 한걸?”

방실방실 웃으며 기쁜 듯이 대꾸. 밖에서 만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오늘은 정해진 요일도 아니었다. 즉 돈을 주고 그를 사지 않고서도 그를 하루 종일 볼 수 있게 된 셈(돈이 문제가 아니라, 애초 정해진 주당 아홉 시간 이외에 추가 시간을 내는 것을 그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이라 복권에라도 당첨된 기분인데 어찌 기쁘지 않을쏘냐.

살피는 듯한 시선이 여전히 자신의 눈동자에서 떠나질 않는다. 아, 정말 심장 떨려 죽겠다, 젠장.

“……괜찮은 녀석이거든요. 선생님과 제 관계를 알기 때문에 좀 삐딱하게 나오고 있지만 8월 지나고 나면 녀석도 좀 달라지겠죠. 선생님께서 좋은 분이란 걸 알게 되면 녀석도 차차 마음을 열게 될 겁니다. 분명히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알아, 위야. 난 별로 신경 쓰지 않지만 네 생각이 그렇다면 나도 노력해볼게. 일단 네 친구라는 것만으로도 난 성준이가 좋은걸…….”

그의 입술 끝이 좀 더 올라가며 미소가 짙어지자, 핸섬한 얼굴이 환한 후광이라도 받은 것마냥 매혹적이 된다.

석 달 전 극적인 화해를 이룩한 이래, 그와 김성준의 우정은 더더욱 돈독해진 듯싶었다. 하긴 가장 숨기고 싶었던 치부를 드러내고도 암묵적인 이해와 용서를 받아냈다. 그가 얼마나 각별하게 느낄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자신만 해도, 엄마나 학교 친구들한테는 차마 커밍아웃을 못 하고 있지 않은가. 가까울수록, 사랑할수록 치부는 더 두렵고 고통스러운 비밀이 되었다. 김성준이 그의 매춘 사실을 인정하고 이해했듯이, 자신 또한 사랑하는 그들로부터 동성애자임을 인정받을 수만 있다면 그들의 발가락이라도 핥을 터였다.

“……후, 성준이가 그 말 들으면 기분 나빠할지도 몰라요, 선생님. 억지로 좋아해주실 필요는 없어요. 그냥 지켜보시다가 괜찮은 녀석이다 싶으면 그때 마음에 담아주셔도 됩니다.”

“……응, 그래…… 그럴게, 위야.”

보일 듯 말 듯 섹시 웃음을 머금는 입술을 멍하니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억지로라도 좋아할 결심을 굳힌 것은 물론이었다. 젠장, 그렇게 웃어주는데 나보고 어쩌라구…….

“보충 수업은 언제 시작해? 다음 주 월요일?”

“예.”

“고생하는구나…… 여름방학이 고작 일주일밖에 안 되는 셈이네?”

“……별로요. 생각보다 별로 힘들지는 않아요. 성준이 녀석은 죽을 맛이라고 하는데, 전 세상에서 제일 편하고 쉬운 게 공부라고 생각하는걸요.”

“하하, 너니까 그렇지. 다른 친구들한테 그런 말 하면 너 따 당한다? 내가 듣기에도 넘 재수다, 야.”

“이미 학교에선 왕따입니다. 모르셨어요?”

빙그레 환한 웃음이 번지며 그의 새하얀 이가 드러나서, 인환은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정말로 아주 드물게만 보이는 그의 눈부신 웃음이었다. 정말로 즐거울 때만 짓는 웃음. 그가 지금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 순간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하니 새삼 가슴이 벅찬 나머지 숨을 쉬기도 버거웠다. 이윤열 때문에 그가 지독한 맘고생을 하며 해골처럼 말라가던 것이 까마득한 옛일처럼 느껴졌다.

“진짜 따들은 그렇게 자랑스럽게 얘기 못 할걸? 넌 네가 반 애들 따 시키는 거잖아. 아주 거만하고 못돼 먹었지.”

“하하…….”

“……8월엔 바다에 한번 갈까?”

“바다요?”

“……응, 일주일치 약속 모두 몰아서 어때? 일요일 하루만 당일 코스로…… 괜찮지?”

“예, 좋습니다. 당일 코스라면 별로 부담도 없고요.”

예상대로 선선한 대꾸가 돌아온다. 언제부턴가 자신만큼 밖에서의 데이트를 즐기게 된 그다. 그와 섹스를 하는 것도 너무 좋지만 데이트는 그 몇 배는 더 좋다. 섹스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만 않는다면 매일매일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다. 단 하루 바다 나들이를 위해 일주일 동안 그를 못 보는 것을 각오해야 하듯이 많은 희생이 따르는 일이었다.

“서해 바다라도 안면도는 물이 참 맑대. 나도 한 번도 안 가본 곳이긴 하지만 괜찮을 것 같아.”

“안면도 가시게요?”

“응. 다들 당일 코스로는 꽤 괜찮다고 하더라구. 가본 적 있니?”

“아뇨, 어릴 때 동해안으로 바캉스 갔던 기억은 몇 번 있지만…… 집안이 기울고 나선 여행다운 여행이라고는 단 한 번도 하질 못했죠.”

“……그…… 그랬겠구나…….”

“바다라니 정말 그립군요. 어릴 땐 수영하는 것도 꽤 좋아했었죠.”

추억을 더듬는 듯, 잔잔한 미소가 담긴 그의 눈매가 약간 가늘어졌다. 담담한 어조엔 그저 가벼운 향수밖엔 담겨 있지 않아서 잠시 긴장했던 인환도 다시금 마주 미소를 보내주었다.

“네가 바쁘지만 않으면 제주도엘 가면 좋을 텐데…… 나 제주도 정말 좋아하거든. 아버지 소유의 호텔이 하나 있어서 어릴 땐 아주 살다시피 했지. 요즘도 그림 그리러 자주 가는 편이야. 어릴 땐 엄마 따라서 주로 하와이나 괌으로 피서를 가곤 했는데 난 거기보다 제주도가 훨씬 더 좋더라구.”

“그런가요?”

“응. 이중섭 흉내 내며 두 달 동안 서귀포에서 그림만 그려댄 적도 있지. 언젠가 꼭 너랑 함께 가봤으면 좋겠다…….”

“……예…… 저도요…….”

조금 사이를 두고 떨어지는 그의 대꾸에서 망설임이 느껴진다. 알고 있다. 실은 8월이면 끝나버릴 관계일지도 모른다. 생각하기조차 두려워 자꾸 미루고는 있지만, 절대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에 대한 감정을 어떻게든 접지 않으면 그는 망설임 없이 이별을 고할 터였다.

“……많이 기다렸냐?!”

머리 위에서 느닷없이 토해진 씩씩한 바리톤에, 잠시 우울한 상념을 좇고 있던 인환은 소스라치듯 몸을 움츠렸다.

“어, 아니. 앉아라.”

“앉긴 뭘! 배고프지? 빨랑 밥 먹으러 가자. ……안녕하셨어요, 선생님?”

알록달록하면서도 세련된 모양새의 세미 힙합 패션으로 무장한 김성준이 시원스레 인사를 보내왔다. 자주색의 민소매 티에 나이키 컬러 러닝 셔츠를 레이어드 했고, 암청색의 블루진은 섹시한 골반 뼈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었다. 커다란 은색의 스포츠 시계에 탄환 모양의 로켓이 달린 펜던트까지 장식으로 매단, 그야말로 멘즈 논노 잡지에서 그대로 빠져나온 것 같은 화려한 모습이었다. 그의 청바지 차림도 그렇고, 자신 역시 캐주얼한 카고 팬츠에 빈티지 티셔츠 차림을 하고 나오길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평소처럼 세미정장 스타일로 갔으면 혼자만 튀었을 거다(혼자 튄다는 말은…… 그야 솔직히 혼자 늙어 보인다는 뜻이다. 젠장).

김성준과는 이윤열의 재판이 진행 중이던 어느 날 잠깐 부딪친 이래 두 달 만의 만남이었다.

예의 바르면서도 명확히 거리를 두는 듯한 깍듯한 인사에 어쩔 수 없이 주눅이 드는 걸 느낀다. 친구 때문에 억지로 참아주는 것뿐이라는 티는 조금도 보이지 않지만, 자신이 누군가. 눈치코치 하면 달인의 경지에 오른 장인환이다. 그에게 노력하겠다고 약속했으니 괴롭더라도 잘 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다, 젠장.

“……그래, 성준아. 밖이 꽤 덥지?”

주눅 든 건 조금도 눈치 못 채도록 쾌활하게 답을 건네주었다.

“예. 차가 좀 막혀서 늦었습니다. ……빨리 나가자니까?!”

“숨이나 좀 돌려라. 어디 갈 건데? 나 양식은 싫다?”

“씨방새가, 모처럼 엉아가 맛난 거 사주신다는데 꼭 토를 달아요, 토를……!”

“더운데 삼계탕이나 먹자.”

“삼계타앙?!!!”

“왜, 싫으냐?”

“새꺄, 시내까지 나와서 삼계탕 쪼게 생겼냐?”

“……삼겹살도 좋고…….”

“얼씨구. 하여간 골 때리는 시골 입맛은 알아줘야 한다니깐. 랍스타 쏠 거다, 새꺄. 황송하지?”

“돈 아깝게 그런 걸 왜 먹어. 차라리 꽃게찜으로 가.”

“좆까, 그게 뭔 연결고리냐?”

“껍질 부숴 먹는 건 똑같잖아.”

“하, 꽃게가 랍스타 대체재인 줄은 미처 몰랐다?”

“꽃게가 가격에 비해 훨씬 더 맛있어.”

“내 돈 쓰지 니 돈 쓰냐?”

“네 돈이 내 돈이야. 그리고 그게 어디 네 돈이냐? 아버님 돈이지.”

“졸라 김새네. 오늘이 내 귀빠진 날이냐, 아님 니 귀빠진 날이냐?”

“……그래, 위야. 오늘은 성준이가 주인공이니까 성준이 먹고 싶은 걸로 해. 게다가 나도 랍스타 좋아하는걸…….”

안 그래도 눈을 확 잡아끄는 미남 둘이 하나는 앉고 하나는 서서 옥신각신해대니 매장 안의 시선이란 시선은 죄다 모여드는 것 같다. 남의 시선이라곤 전혀 개의치 않는 둘을 대신해 얼굴이 빨개져서는 인환은 소심하게 김성준 편을 들어주었다.

“거봐. 선생님도 좋다시잖아. 빨랑 나와, 인마.”

곁눈질로 인환을 보며 까딱 고개를 숙이고는 김성준은 바로 몸을 돌려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찰나에 마주쳤던 시선엔 표정이 없었다. 역시 힘든 하루가 될 것 같아 한숨이 절로 났다.

휘적휘적 앞서가는 김성준을 따라 부랴부랴 걸음을 옮겼다. 잠깐 난감한 표정으로 친구의 뒷모습을 좇던 그도 마침내 천천히 인환을 따라왔다. 보폭이 빠른 김성준에게 초조감을 느끼는 자신을 배려하기 위해서인지 그는 줄곧 자신 곁에 붙어 보폭을 맞추고 있었다. 맥도날드를 벗어나 을지로입구 쪽으로 10여 분을 걷는 동안, 상대적으로 더딘 자신들을 몇 번 돌아다보던 김성준도 마침내 그 사실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와는 배꼽친구이니, 본래는 김성준과 마찬가지로 걸음이 빠른 그를 모를 리 없었다. 역시 아주 찰나의 순간 인환의 눈을 흘낏 굽어보던 김성준이 천천히 보폭을 줄이기 시작했다. 10여 미터쯤 앞서가던 김성준은 잠시 후 인환과 거의 나란히 서게 되었다.

“……꽤 덥네요, 선생님.”

예의 바른 어조.

“……응, 그렇지? 장마도 끝났겠다, 한창 휴가철이잖아.”

“레스토랑이 명동 쪽에 있어서 좀 많이 걸어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역시 예의 바른 어조.

배려는, 그러나 절대로 순수하게 들리지가 않았다. 인환이 빠졌다면 그와 함께 거침없이 활보했으리라는 숨은 의미를 인환은 어렴풋이나마 깨닫고 있었다. 얼굴로 더운 열기가 몰리는 것은 한낮의 불볕더위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괜찮고말고. 걷는 덴 이래 봬도 꽤 자신 있는걸. 미술관 관람이 얼마나 체력을 요하는 일인지 넌 모르지?”

모르는 체 명랑한 대꾸를 주었다. 머리가 좋은 아이란 생각이 들었다. 철저하게 예의를 지키면서, 철저하게 그의 의사를 존중해가면서, 동시에 인환만 알 수 있도록 소년은 의미심장하면서도 미묘한 도발을 계속 하고 있었다. 여간해선 허물어뜨리기 힘든 단단한 벽이 느껴졌다.

“……더위는 위가 더 타는걸. 저봐, 벌써 땀을 한 바가지나 흘리고 있잖니.”

한두 걸음 뒤처져서 느릿느릿 걸어오는 중인 그를 가리켰다. 소년의 시선이 이동한다. 자신을 향했을 때와는 180도 다른 따스한 빛이 소년의 시원스러우면서도 핸섬한 눈매를 부드럽게 채우고 있었다. 아아, 그래. 역시 그래도 미워할 수 없는 아이다. 저렇게 그를 사랑해주고 있는 것을, 그의 소중한 가족인 것을, 어떻게 자신을 배척한다는 이유만으로 미워할 수 있으랴. 생각해보면 소년의 반응은 당연했다. 돈을 내세워 소중한 친구의 몸을 능욕하는 게이이니 오죽 더럽고 추하게 비칠 것인가.

“……그거 뭡니까?”

느릿느릿 가까이 다가온 그가 인환이 들고 있던 쇼핑백을 힐끗 넘겨다보며 물음을 던진다. 어깨에 메고 있는 크로스백 외에도 꽤 크고 묵직한 부피를 자랑하는 쇼핑백 두 개가 거추장스럽게 보인 모양이었다.

“……어, 아까 인사동에 들렀다가 물감들이랑 이것저것 샀어.”

김성준에게 줄 생일 선물을 사러 오전 일찍부터 나와 인사동 바닥을 누빈 것을 그는 모를 것이다. 덕분에 부족했던 그림 재료들도 꽤 산 것까진 좋았는데, 문제는 차를 두고 나온 것을 생각 못 한 자신이었다. 김성준의 페이스에 철저하게 맞추기로 작정했기에 행여 위화감을 줄지도 모를 자동차는 두고 나왔는데, 확실히 꽤 불편하긴 했다.

“이리 주세요. 제가 들어드릴게요.”

“어…… 어?!!!”

뭐라고 사양의 말을 뱉을 틈도 없이 그에게 쇼핑백을 빼앗겼다.

자신이 들고 있을 때와는 사뭇 다른 가벼운 느낌으로 쇼핑백을 집어 든 그는, 여전히 느릿하게 두세 걸음쯤 뒤처지며 인환과 보조를 맞추고 있었다. 잠시 당혹해서 그를 굽어보다가 자연스럽게 김성준의 얼굴로 시선을 가져갔다. 보일 듯 말 듯한 골을 양미간 사이에 만든 채, 소년은 우울하게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정확히는 그와 쇼핑백들을 번갈아). 해석은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의 표정. 가슴이 떨렸다. 얼굴을 달구는 열기가 더더욱 심하게 느껴졌다. 죄책감과 수치감이 동시에 가슴을 짓눌러왔다. 순수한 심판자의 눈을 통해 자신을 객관화시키고 보니, 자신은 꽤 파렴치한 어른이 아닐 수 없었다.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7월 마지막 주 목요일, 정오 무렵의 을지로였다. 더위 때문인지 행인들의 모습은 그리 눈에 띄지 않았다.

명동성당 뒤쪽의 랍스타 전문 레스토랑 ‘휘핑’은 제법 알아주는 일급 레스토랑인 모양인지 점심시간인데도 사람들로 꽤 붐볐다. 입맛이 까다로운 편인 인환의 혀끝에도 착 달라붙는 그런 곳이었다. 생선보다는 고기를 더 좋아하고 양식류는 거의 입에도 안 대는 그도 모차렐라 치즈와 야채가 듬뿍 얹힌 랍스타 속살은 물론, 소스 국물이 뚝뚝 듣는 볶음밥까지 한 접시를 깨끗이 비워냈다(물론 돈이 아까워서 절대로 남길 수 없었다는 밉살스러운 말을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아, 김성준을 김새게 했다).

후식으로 나온 와인 셔벗을 떠먹고 있던 김성준에게 그가 생일 선물이라며 만년필을 내밀었다. 좀 큰 걸로 쏘지 겨우 만년필이냐며 툴툴거리는 김성준의 얼굴은, 그러나 숨길 수 없는 기쁨으로 환해졌다. 기회를 놓칠세라 인환도 쇼핑백에서 준비한 선물을 꺼내 볼이 약간 빨개진 소년에게 내밀었다.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선물까지 내치지는 않으리라.

“위가 너 클래식 음악 좋아한다고 해서 음반 한 장 샀어. 마음에 들려나 모르겠네?”

생일 선물로 고심 끝에 마련한 레코드 한 장(명반에 속하는 브루노 발터의 말러 곡이었다)을 내밀며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난 CD보다는 LP 음질을 더 좋아해서 샀는데…… 역시 CD가 음질이 깨끗하긴 하지?”

“……이런 거 주지 않으셔도 되는데요…… 고맙습니다, 선생님.”

예의 바르게 받아들곤 레코드 재킷을 살피는 김성준의 얼굴은 담담했다.

“……명반이로군요. 구하기 쉽지 않으셨을 텐데…….

“단골인 음반 가게가 꽤 있거든. 별로 어렵지 않았단다.”

“아아…….”

“대지의 노래, 성준이가 좋아하는 곡입니다. 잘 고르셨네요, 선생님.”

이리저리 앨범 재킷을 살펴보며 말끝을 흐리는 김성준 대신, 그가 덤덤한 어조로 거들었다. 입이 무거운 그가 하는 칭찬은 역시 꿀맛이 따로 없다. 당사자의 시큰둥함에도 불구하고 인환은 얼굴이 조금 빨개졌다.

“……여기 화장실 어디냐?”

먼저 화장실을 다녀온 김성준을 향해 물음을 던지며 그가 자리를 턴다.

“저쪽 모퉁이 돌면 바로 보여.”

통로를 빠져나가는 것만으로도 레스토랑 안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끌어 모으고 있는 그를 자연스럽게 눈이 쫓아간다. 커다란 덩치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우아하고 유유자적한 걸음걸이며, 근육질의 섹시한 몸매가 유감없이 드러나 있는 청바지 차림을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근 한 달 가까이 촌스러운 교복 차림만 보아왔던 터라 오랜만에 보는 그의 사복 차림은 손가락 끝까지 짜릿할 만큼의 자극을 주고 있었다. 벌어진 어깨와 탄탄한 팔 근육, 피부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티셔츠 위로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섹시한 견갑골이며, 탄력 있게 솟아 걸음을 옮길 때마다 움찔거리는 딱딱한 엉덩이 근육까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한 유혹이었다. 모퉁이를 돌아 그의 뒷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고 나서도 인환은 한참 동안 넋을 잃고 백일몽에 빠져 있었다.

빠각.

테이블 맞은편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소음에 문득 소스라쳤다. 옮겨간 시선의 끝에 반으로 구겨진 레코드 재킷이 단숨에 다가들었다. 너무나 놀라서 한동안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을 정도였다. 재킷이 구겨졌으니 안의 내용물은 이미 박살이 났을 터였다. 겨우 사태 파악이 됐는지 그제야 심장이 아래로 툭 떨어지는 듯한 충격이 왔다. 너무나 손이 떨리고 있어서 들고 있던 커피 잔을 테이블 바닥에 내려놓기까지의 몇 초가 마치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김성준의 얼굴을 바라볼 용기 따윈 없었다. 아마도 하얗게 핏기를 잃었을 자신의 얼굴을 테이블 바닥으로 향한 채, 그저 구겨진 레코드를 쥐고 있는 아름답고 커다란 손만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더러운 눈길로 녀석을 보지 마세요. 구역질나니까.”

퍽 하고 턱을 얻어맞은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나지막하고도 담담한 어조였다. 그러나 그 어떤 야비한 비웃음 소리보다도 더 신랄한 느낌이 들었다.

“……친구? 친구 좋아하시네.”

“…….”

“……다음 달이면 녀석과 계약 끝나신다고요? 그럼 친구 관계로 돌아갈 거라고 하던데 그런 눈길을 해서야 가당키나 하겠어요?”

“…….”

“……하긴 이제 한 달만 참아주면 되니까 오히려 다행이다 싶긴 하네요. 여전히 녀석의 몸을 탐내면 그대로 바이바이라죠?”

“…….”

“……잘됐어요. 칼 같은 녀석이니까 전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군요.”

“…….”

“당신과 친구 될 마음 없어. 친구라고? 웃기지 마. 힘든 상황 이용해서 미성년자랑 원조 교제나 일삼는 호모 따윌 친구로 둘 만큼 굶주린 놈 아냐.”

“…….”

“녀석을 꼬드기는 건 무척 쉬웠겠지. 메마르고 쿨해 보여도 사실 정 많은 녀석이니까. 하지만 난 녀석처럼 그렇게 말랑말랑하질 않거든?”

“…….”

“얼굴 펴세요. 녀석이 보면 제가 때린 줄 알겠습니다.”

“…….”

“녀석이 속상해하는 건 싫으니까 남은 한 달간 서로 잘 참아봅시다. 전 그럭저럭 연기할 자신 있는데 선생님은 어떠세요?”

“…….”

“하긴 오늘 말고는 다시 만날 일도 없을 것 같네요. 내기해도 좋습니다. 한 달 후에 녀석이 그쪽을 깨끗이 차버리는 데 제 전부를 걸죠.”

“…….”

“……명반이 아깝게 됐군요. 녀석 오기 전에 빨리 집어넣으시죠?”

반이 접힌 레코드가 테이블 위로 넘어왔다. 허둥지둥 받아 든 다음 화구들로 가득 들어차 있는 쇼핑백 안쪽에 깊숙이 파묻었다.

손이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눈꺼풀 주위로 열이 오르며 쑤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묵직하게 얹힌 돌덩이가 가슴 언저리에서 느껴졌다. 한동안 테이블 바닥만 주시하다가 그가 사라진 화장실 쪽으로 흘깃 시선을 주었다. 다행히 아직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시간이 있었다. 그와 김성준을 웃으면서 바라볼 수 있을 만큼의 여유를 되찾을 시간이. 다행히 김성준의 독설도 더 이상은 날아오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싸움이나 신경전은 인환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스타일이 아니었기에, 그럴 기미를 풍기는 버거운 상대는 문제가 불거지기 전에 미리 피해버리는 것이 또한 인환의 오랜 처세술이었다. 김성준은, 그러나 이미 피해버릴 시기를 놓친 상대였다. 피하고 싶어도 절대 피할 수 없는 그런 상대였다. 노력하겠다고 그에게 약속을 했다. 물론 노력해도 안 될 상대라는 건 오늘 정확히 알았다. 그저 ‘견디는 노력’ 이외에 다른 노력의 길은 존재하지 않으리라. 그리고 그 길은 각오했던 것 이상으로 꽤 큰 고통이 돼가고 있었다.

레스토랑을 나와, 두 명의 수험생과 한 명의 화가 지망생이 차례로 찾아 들어간 곳은 홍대 앞의 볼링장과 록 카페였다.

친구들과 만나면 으레 술집에서 죽때리며 몸을 망가뜨릴 기세로 술이나 푸는 환쟁이들의 풍속도에 6년을 절었던 터라, 상대적으로 활기 넘치는 고딩의 또래 문화는 낯설었다. 그것은 정지해 있기보다는 움직이며, 수용적이기보다는 호전적이길 지향했다. 10대뿐만이 아니라 어쩌면 그것은 인환을 포함한 모든 젊은이들의 개성일지도 몰랐지만, 적어도 인환 자신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개성이었다.

확연히 저는 다리에, 볼링공을 들고 뒤뚱거리는 모습이 얼마나 꼴불견일 것인가. 절뚝거리는 자체가 어찌 보면 우스꽝스러운 춤사위와 다름없을진대, 거기에 보태 어떻게 몸을 흔들어야 더 이상 우스꽝스럽지 않을 것인가. 주제 파악이란 철들 무렵부터 신물 날 정도로 하고 있었기에, 생전 발걸음조차 하지 않던 곳이었다. 당연히 실력이고 나발이고 논할 계제도 아니었으니 그저 남 보기에 제발 튀지만 마라 하며 인환은 필사적으로 분위기를 탔다.

모처럼 친구와 기분을 내는 그는 꽤 즐거워 보였다. 물론 인환도 그 몇 배는 즐거운 척을 했다. 친구와 친해지길 바라는 그를 배려해서만은 아니었다. 그가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기만 하면 차디찬 냉소로 일관하며 모멸감을 안겨주는 김성준에 대한 오기 같은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욕망이었다.

정말로 그의 친구가 되고픈 욕망.

볼링장에 가서 볼링을 치고, 록 카페에 가서 빙빙 도는 사이키 조명에 맞춰 몸을 흔들면 그의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김성준처럼 노련한 포즈로 스트라이크를 날리고, 김성준처럼 여대생들에게서까지 줄줄이 부킹을 받으면 정말로 그와 친구가 될 수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그러면 ‘더러운 눈길’로 그를 보지 않아도 되고, 그러면 다음 달에 그와 이별을 하지 않아도 된다. 김성준처럼 플라토닉하면서도 극진한 애정이 담긴 눈으로 그를 바라볼 수 있게도 되고, 김성준처럼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모두 그와 함께할 수 있게 된다. 그와 영원한 시간을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어이, 저쪽 테이블 누님들은 어때?! 진짜 쌈빡하지?!”

귀청을 찢는 테크노 비트 탓에 테이블로 다가온 웨이터가 거의 악을 쓰다시피 물음을 던졌다.

몇 번을 왔다가 도도하게 고개를 흔드는 김성준에게 거듭 물을 먹고 돌아서던 바로 그 친구였다. 제법 곱상한 외모의 젊은 웨이터는 ‘이번엔 틀림없어’ 하는 비장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록 카페에 들어온 지 한 시간 남짓, 몇 번의 부킹 제의에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만 하던 김성준의 눈에 비로소 흥미로운 표정이 서렸다. 과연, 웨이터가 가리키는 손끝에 걸린 여자들은 이 바닥 최상급이라 쳐도 무방했다. 일행은 모두 셋으로, 한눈에도 먹물깨나 먹은 여대생 티가 나는데다 적당히 노는 물도 든, 발랄함과 세련미를 두루 갖춘 미인들이었다. 미니스커트와 민소매 티 차림의 여자가 하나, 시원한 민소매 원피스 차림이 하나, 그리고 쫄티에 블루진을 받쳐 입은 쪽이 나머지 하나였다.

“전부 이대생들이라구. 여기 가끔 오는 애들인데 졸라 인기 짱이야. 쟤네들이 먼저 찔러보는 감도 니들이 첨일걸?”

“우리 고 3이라는 거 얘기 하셨어요?”

“당근이징! 고삐리래도 상관 안 한대. 니들 진짜 떴다니까! 어디들 숨었다가 이제서 왕림하셨누?”

“글쎄…… 개중 낫긴 한데요…….”

“쫌 봐주라, 응? 다들 니네만 찍어대는데 아주 돌아가시겠다, 야! 니네가 빨리 정하지 않음 여자애들이 모두 날 죽이려 들 거야!”

“흠…… 어때, 괜찮을 거 같냐?”

쌍꺼풀이 깊게 진 크고 아름다운 눈매가 여자들 대신 그의 얼굴을 담는다. 게슴츠레해진 표정이며, 혀끝을 날름거리며 메마른 입술을 축이는 무구한 몸짓에선 수컷다운 위험한 냄새가 물씬 풍겼다. 새삼 김성준도 남자구나 하는 생각이 멍하니 들었다. 잠깐잠깐 목을 축이러 테이블에 앉았을 뿐, 한 시간 내내 강렬한 테크노 비트에 몸을 맡기던 김성준이었다. 얼굴은 비 오듯 흐르는 땀으로 번들거리고, 입고 있던 자주색 민소매 티는 흠뻑 젖은 채 단단한 근육질의 상반신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자신만만하게 고삐리라는 걸 선언하고 있지만, 록 카페 안에 모인 대부분의 여자들이 그 도도한 선언을 뻥이라 치부할 만큼 완벽한 수컷의 용모이자 자태였다.

“너 좋을 대로 해. 난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희미한 미소를 입술 끝에 매달고 그가 대꾸했다. 잔뜩 흥분한 기색의 친구를 굽어보는 눈길엔 변함없는 애정과 신뢰가 가득했다.

인환과 마찬가지로 록 카페엔 처음 와본다면서도 김성준 못지않은 현란한 춤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그였다. 눈이 휘둥그레져서 바라보는 인환에게, 그는 여자 고객들을 헌팅하기 위해 미성년자 출입 금지 구역인 나이트에 꽤 많이 가봤다는 충격적인 고백을 했다. 물론 현란한 춤사위도 그때를 위해 배워뒀던 것들이란다. 스테이지 위에서 화려한 스텝을 밟고 있는 김성준을 굽어보며 씁쓸하게 내뱉는 그의 얼굴은, 인환에겐 또 다른 아픔이 아닐 수 없었다.

김성준만큼 자주 스테이지에 오르진 않았지만, 친구의 기분을 맞춰주는 선에서 줄곧 리듬을 타는 그를 보는 것도 의외의 기쁨이자 슬픔이었다. 그의 아름다운 춤사위를 구경하는 게 기쁨이라면, 김성준에 대한 지나칠 정도의 배려를 읽는 것은 슬픔이었다.

분명 그는 춤을 즐기지는 않고 있었다. 인환이 마지못해 스테이지에 올라 시늉만을 하듯, 정확히 리듬을 타며 몸을 움직이면서도 그는 줄곧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몰입을 해서 춤을 춘다기보다는 마치 의무적으로 숙제를 해치우는 듯한 그런 기색이었다. 물론 지금 그에게 떨어진 숙제는 김성준이었다. 과거, 여자 고객들을 위해 마지못해 춤을 추었듯, 그는 지금 이 순간 김성준만을 위해서 열심히 내키지 않는 춤을 추고 있었다. 김성준만을 위해서 여대생들의 부킹에 응하고 있었다. 부럽고, 질투 나고, 그래서 더욱 가슴 아프기까지 한 우정이었다.

“정말 고등학생이세요?”

“예.”

“정말?”

“……우신고등학교 3학년 6반 49번입니다.”

“큭큭, 짜샤. 번호까지 주워섬길 건 뭐냐, 쪽 팔리게.”

“어머, 정말인가 봐∼∼. 우린 설마 했었는데! 여자애들 달라붙는 거 귀찮아서 일부러 그러는 줄 알았지∼∼∼.”

“후, 그래서 무르시게요, 누님들?”

“무슨! 한 칼쌈 하시잖아요, 세 분 모두. 사회 나가면 두세 살 차는 차이도 아니라는데요 뭘. 어떠세요? 우리 말 놓고 편하게 가지 않을래요?”

“음, 조오치! 좋은 생각, 누나.”

“어머, 어머! 너 한 건방 한다? 짱 내 타입인데, 성준이?”

“누나도 대충 나쁘지 않아.”

“어머, 어머, 아하하하∼∼∼.”

“어쭈, 건방이 하늘을 찌르시는데? 정미 너 임자 만났다?”

“오호호, 탁 트이는 이 기분!”

“너두 고 3이니? 얘네들보다는 좀 어려 보이는데…….”

“실례야, 누님. 선생님은 스물여섯이셔.”

“에엑?!!!!!!”

“뭐어?!!!!!!”

“……선…… 생님이라니?!!!”

“아, 교생 선생님이셨던 때가 있어서 그렇게 불러. 지금은 우리들 친구시지만.”

“뭐야, 그게? 궁금하다. 사연 있나 봐…….”

“……죄송해요, 선생님. 정말 동안이시네요.”

“아니야, 신경 쓰지 마요. 후배들 노는데 괜히 내가 분위기 망칠까 봐 걱정되네?”

“아유, 분위길 망치긴요! 솔직히 전 갑보다 두세 살 많은 선배들이 더 좋더라. 상냥하고 이해심 많고.”

“오, 정말?!”

“그럼요. 연하나 갑들은 정말 너무 유치하고 계산적이거든요. 위나 성준이는 좀 예외인 거 같지만. 것도 사귀어봐야 알죠. 전공이 뭐세요?”

“서양화.”

“그림? 미대요?”

“응.”

“우아, 그림 그리시는구나! 어쩐지 분위기 있다 했어요. 전시회 같은 것도 하고 그러시겠네요?”

“응. 이번 10월에 개인전 있어.”

“개인전이요? 와, 굉장하다!”

“별거 아냐. 졸업하고 처음 하는 거라 몹시 떨리고 그래. 소영이도 와줄 테야?”

“어머, 초대해주시는 거예요?! 당근이죠! 초대해주심 당근 가고말고요!”

“꼭 초대장 보낼게. 근데 소영이는 전공이 뭐야?”

“교육학과요. 정미는 법학과고 윤정이는 영어교육학과예요.”

“그렇구나. 전부 이대 다닌다며?”

“네.”

“멋지다. 이대생들은 나 학교 다닐 때 선망의 대상이었는데.”

“애걔, 거짓말.”

“진짜야. 너희 학교 축제 시즌이면 우리 학교 남학생들 사이에선 난리가 난다구.”

“얘들아, 우리 자리 옮길까? 술이 없으니까 영 맹숭맹숭한 게 그렇다?”

“누나, 우린 아직 미성년자라구.”

“범생이 티 내고 있네, 김성준. 말술 할 거같이 생겨가지군…….”

“진짜예요, 정미 씨. 성준이 술 안 합니다. 저도 그렇구요.”

“그래애?!!!!!”

“에에, 진짜? 고 3이? 우린 고 1 때부터 마셨는데?”

“내숭이구나? 내숭이지?”

“뭐, 하루쯤 어떠냐, 짜샤. 담주부턴 끔찍한 보충 수업 들어가는데. 한번 코 삐뚤어지게 마셔보자구.”

“그럼 그렇지! 역시 성준이야! 짱 멋져!!!”

“나가자. 여긴 너무 시끄러워서 얘기도 못 하겠다…….”

“그러세, 윤정 사마.”

“잠깐, 나 장실 좀 갔다가…….”

여자들과 합석을 하고 채 10분도 되지 않아 자연스럽게 파트너가 정해졌다. 아마도 합석하기 전에 여자들 쪽에서 미리 얘기가 오간 모양이었다. 김성준이 여자들 주도의 짝짓기에 오케이 사인을 내리는 것으로 파트너 정하기는 단숨에 끝이 났다. 그는 김성준에게 모든 안테나를 맞추고 있는 형편이었고, 자신이야 애초부터 여자들에게 관심이라곤 없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뛰어난 미모에 미리 각오를 한 것과는 달리 세 명의 여대생들은 성격도 꽤 괜찮은 편이었다. 김성준의 파트너가 된 이정미라는 여학생은 탁구공처럼 튀는 싱싱한 쪽이었고, 그의 파트너가 된 지윤정이란 여학생은 새침하면서도 상냥했다. 인환을 상대해주고 있는 방소영이라는 여학생은 사근사근한 붙임성과 배려심이 있었다. 자신을 남자친구로 찍었을 턱은 절대 없고(적당히 유쾌하고 기분 좋은 인상을 여자들에게 준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불편한 다리의 핸디캡을 무릅쓸 만큼의 매력이 자신에게 있다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그건 객관적인 진실이기도 했다) 나머지 두 친구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떠맡은 것만 봐도 방소영이라는 여학생의 배려심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록 카페를 나온 일행 여섯 명이 찾아 들어간 곳은 동동주를 파는 전통 주점이었다. 마침 해가 지고 있는 저녁 무렵이라, 식사 겸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으로 가자는 여자들의 제안에 따른 것이었다. 미성년자인 그와 김성준도 추호의 의심도 받지 않고 주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었다.

파전과 두부김치, 훈제 치킨을 안주로 동동주 두 동이가 한 시간 반 정도에 걸쳐 천천히 비워졌다. 물론 그는 끝까지 단 한 잔도 입에 대지 않았고, 인환을 포함한 나머지 다섯 명만이 술 파티에 참가한 셈이었다. 꽤 큰 두 동이의 동동주가 깨끗이 비워졌지만 다들 취할 정도는 아니었고, 그저 약간 기분만 업 되는 선에서 주점을 나왔다. 술을 마시는 내내 분위기는 썩 좋은 편이었다. 예의 바르게 맞춰주고 있는 듯한 태도의 그나 줄곧 오만한 카리스마를 내뿜고 있는 김성준에도 불구하고, 그나 김성준이 여자들의 일방적이면서도 열렬한 호의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다들 좀 벌게진 얼굴을 하고 다음에 찾아 들어간 곳은 당구장. 편을 갈라 두 게임인가를 치고 나자 어느새 시계는 밤 10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여자들은 각자 파트너별로 찢어지고 싶어한 지 오래건만, 이 기묘하면서도 화기애애한 모임을 주도하고 있는 김성준은 좀처럼 헤쳐 모여 명령을 내릴 생각을 않고 있었다. 그는 물론이거니와 자신과도 별로 헤어질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물론 답은 오래지 않아 풀리게 되었다.

여자들과의 부킹도, 혹은 데이트도 당장은 김성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설령 파트너와 섹스를 하고픈 욕구가 있었다고 치더라도 그건 그네의 1차적인 욕구를 마음껏 채우고 난 후의 일이 될 터였다. 그것은 시위였다. 오로지 인환만을 겨냥한 공격적인 시위가 김성준의 제 1 목표였다. 그와의 지독할 정도로 단단한 유대를 보여주고, 원조 교제나 일삼는 더러운 호모 따윈 그 틈에 낄 자격도, 능력도 안 된다는 여봐란 듯한 선언.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치졸하기까지 하다고 절로 욕이 나왔다. 정말로 애다운 독점욕이요, 애다운 복수심이라고.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과는 어마어마했다.

생생했다. 순간순간이 뼈가 뒤틀리는 고통이요 가슴이 찢기는 아픔이었다. 김성준은 인환이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것의 현란함을 눈앞에 들이대며 비웃고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맛있고 배부른 것인지 모른다고, 더러운 넌 죽을 때까지 모르리라고, 어디 맛있게 먹는 모양 한번 훔쳐나 보라고, 김성준은 개에게 뼈다귀를 던져주듯 그렇게 으스대고 있었다.

“한 잔씩만 더 하고 각자 찢어질까?”

“조오치, 누나!”

마침내 이정미가 참다못해 제안했고, 김성준이 모르는 체 맞장구를 쳤다. 당구장에서 나와 잠시 진로를 정하지 못한 틈을 타 허를 찌른 이정미였다. 김성준의 오만불손하면서도 아름다운 얼굴을 지그시 들여다보는 여대생의 눈에는 솔직한 욕망이 드러나 있었다. 섹스에 대한 욕구라기보다는 김성준이라는 남자 자체에 대한 생생한 소유욕이었다. 인환은 다시는 볼 일이 없을 어느 퀸카 여대생의 욕망에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고통스러운 담금질도 이제 거의 그 끝을 보이고 있었다.

동동주에 양주나 칵테일은 궁합이 안 맞는다고 의견 일치를 보고 찾아 들어간 곳은 소주방이었다.

처음부터 취했던 것도 아닌데다, 마신 지 이미 두어 시간 가까이 지나 있어 이정미의 ‘한 잔씩’ 제안은 거의 무색해지고 말았다. 레몬 소주 서너 병이 순식간에 동이 났고, 역시 그를 제외하고 다섯 명의 청춘이 얼큰하게 취하는 데는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취기가 오르고 보니 친밀한 분위기는 점점 더 농후해졌다. 여학생 둘은 거의 노골적이다시피 그와 김성준에게 달라붙었고, 나머지 배려심 깊은 여학생조차 그에게 순간순간 뜨거운 눈길을 쏟고 있었다.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았다. 가슴은 뛰고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타는 듯했지만, 취기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소주를 통으로 들이붓는다고 해도 오늘 같은 날 취할 수는 없을 터였다.

11시 조금 넘어 소주방을 나왔다.

한풀 꺾인 더위가 느릿하게 대기를 떠돌고 있었다.

여학생들은 꽤 취해 있는 듯했지만 각자 파트너를 찾아가는 분별심까지 잃은 것 같진 않았다. 소주방에서 그에게 그토록 뜨거운 눈길을 보냈던 방소영도 마지못해 인환의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쓰디쓴 소태를 삼킨 기분이었다.

여학생 중 하나가 홍대 앞 전철역 부근까지 나가 각자 택시를 잡자고 했다. 대로로 접어들기 직전, 그의 곁에 달라붙어 있던 여학생이 갑자기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오바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파트너인 지윤정이었다. 그가 민첩하게 움직여 한적한 골목으로 여학생을 데려가 토하게 했다. 나머지 여학생 둘이 우르르 토끼 무리처럼 따라갔다.

“……꽤 재미있는 밤이죠, 선생님?”

둘만의 기회를 놓치지 않는 김성준의 냉소엔 이미 이골이 났다. 못 들은 체 묵묵히 견뎠다.

5분쯤 후, 그가 여학생 무리를 이끌고 수사자처럼 늠름하게 돌아왔다. 지윤정은 아예 그의 팔에 안기다시피 매달려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잊혔던 질투의 발톱이 단숨에 심장을 할퀴고 지나갔다. 물론 아주 순간의 일일 뿐이었다. 오늘 밤 그가 지윤정과 여관에 갈지도 모르지만, 그가 지윤정을 그리 마음에 들어 하는 게 아니라는 눈치쯤은 이제 깔 수 있다. 보통의 여대생 신분이니 그의 고객으로서도 자격 미달이다. 만약 그녀가 그를 살 수 있을 만큼의 부자였다면 아마 인환의 가슴은 더 이상 어떻게 견뎌볼 수 없을 지경으로 난도질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간신히 견디고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를 얼마나 오랫동안 되풀이해 뇌고 있었는지 이미 기억조차 희미할 지경이다. 하지만 하룻밤 상대쯤은 괜찮다. 아무렇지 않다. 노말인 그니까 때론 기분 전환도 필요하겠지.

대로변으로 나와 택시를 기다린 지 10여 분 만에 빈 택시가 하나 잡혔다. 상태가 안 좋은 지윤정을 배려해 그와 지윤정이 먼저 차에 타게 되었다.

“……선생님, 이거 받으세요.”

“……?”

지윤정을 뒷좌석에 먼저 밀어 넣은 그가 인환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자신의 쇼핑백이었다. 놀라기도 하고, 또 감동하기도 했다. 거의 넋이 나간 하루였기에, 이미 까맣게 잊고 있던 물건이었다. 그런 걸 자신이 갖고 있었나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을지로에서 레스토랑 ‘휘핑’에 갈 때 들어준 이래, 오늘 하루 종일 그가 자신 대신 백을 챙겼다.

아마도 마음이 많이 약해져 있는 모양이다. 그의 크고 따스한 손에서 쇼핑백을 받아 들며 목이 메는 것을 참느라 혼이 났다. 덕분에 택시에 올라타 사라지는 그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와 지윤정이 탄 택시가 떠나고 30초도 안 돼 또 다른 빈 택시가 잡혔다. 사양하는 척하는 김성준과 이정미를 먼저 태워 보냈다.

“……저…….”

김성준 커플을 먼저 보내고 나자 방소영이 미적미적 자신의 눈치를 본다.

“알아, 소영아. 먼저 보내줄게.”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자 배려심 깊은 여학생은 나지막한 한숨을 토하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 취기가 남아 얼굴은 아직도 좀 빨갰지만, 정신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말짱해 보였다.

“위 멋있지?”

“…….”

“……친구들 위해서 오늘 내 상대 해주느라고 고생했구나. 위한테 반했으면서 내색도 안 하고…… 정말 착하다…….”

“……반해봤자…… 사귀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요…….”

“후후, 그런가?”

“……제 친구들도 원래 저런 애들 아니에요. 저렇게 가볍지 않은데…… 위나 성준이가 워낙 괜찮은 애들이라서…….”

“그래, 알아.”

빈 택시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손을 들자 천천히 속도를 줄이더니 바로 코앞에서 멈춰 섰다. 미적거리는 여학생을 차 뒷좌석 안으로 부드럽게 밀었다.

“……잘 가라. 기사 아저씨, 집 앞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주세요.”

“예에∼∼. 손님.”

“……전시회 하시면 꼭 연락 주세요, 선생님! 꼭이요!!!”

“그래, 전화해줄게!”

차창 안에서 손을 흔들며 크게 외치는 여학생의 예쁜 얼굴이 보였다. 정말 내일을 기약하며 아쉬운 이별을 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다시 볼 일은 거의 없다는 것을 서로가 알고 있다. 예의상 교환하는 멘트일 뿐이라는 게 진실이다. 물론 지금 아쉽다는 마음을 품는 것 또한 진실이겠지만. 그건 인생의 한 찰나를 공유하고 스쳐간 인연에 대한 아쉬움일지도 모르고, 사라져간 시간 자체에 대한 아쉬움일지도 몰랐다. 모든 사라져가는 것들은 한결같이 아쉽고, 그립고, 또 아름다운 법이었다.

여학생을 태운 택시가 양화대교 쪽으로 빠져나가 아주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인환은 그렇게 한동안 멍하니 지나간 시간들을 좇고 있었다.

자정이 가까운 모양이었다.

심야 할증을 피해 택시를 잡으려는 부지런한 취객들이 꽤 눈에 띄었다. 취객들을 빼면 거리는 비교적 한산한 편이었다. 더위도 여전히 느껴졌지만 아직 열대야라고까지는 할 수 없었다.

머리는 맑은데도 약간 다리가 풀릴 정도로 취기가 느껴지는 몸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차라리 완벽하게 취해버리면 이 지독한 마음의 고통이 사라질까 싶지만 그저 몸만 부대낄 터였다. 미메시스라도 가볼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다. 괴짜 친구 마해영을 만난다면 특유의 쿨한 너스레로 어느 정도 외로움을 달래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자정 무렵이 되면 종업원들에게만 가게를 맡기고 어김없이 칼퇴근을 해버리는 남자였다. 가더라도 헛걸음이 될 게 분명했다.

전철역 방향과, 각종 유흥업소들이 죽 늘어선 홍대 정문 방향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인환은 마침내 마음을 정하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취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어떻든 조금이라도 더 마시고 싶었다. 도저히 맨 정신으로 아틀리에로 돌아갈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홍대 정문에서 놀이터 쪽으로 10여 미터쯤을 더 걸어 눈에 띈 자그마한 주점 안으로 들어갔다. 테이블 수가 대여섯 개에도 못 미치는 그야말로 자그마한 곳이었다. 실내 장식이라곤 차마 할 수도 없을 하꼬방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는데, 어딘가 술맛을 아는 고수가 차린 집이라는 느낌이 늘었다. 아니나 다를까, 열 평도 채 안 될 비좁은 공간엔 이미 거나하게 술이 오른 취객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다행히 인환이 들어가자마자 막 일어난 팀 덕분에 자리를 잡고 앉을 수 있었다.

잭 다니엘 반병을 시켰다. 마른안주도 시키긴 했지만 그저 취하는 것이 목적이라 천천히 원샷만 거듭했다. 간간이 담배를 안주 삼기도 했다. 역시 싸구려 술을 섞어 마신 여파 때문인지 채 반을 비우기도 전에 몸이 맛이 가기 시작했다. 온몸의 힘이 풀리고 몹시 어지러웠다. 심한 토기도 느껴졌다. 취하는 건 역시 포기해야 할 듯싶었다.

주점 화장실로 들어가 한참을 토했다. 토하고 나니 어지럼증은 좀 가셨지만 더 이상 마실 수 있는 몸 상태는 아니었다. 술값을 계산하고 비틀거리는 몸을 간신히 가누며 주점을 나왔다.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 생각이 나니 눈물도 좀 났다. 차라리 평창동 엄마한테나 가볼까 하다가 알량한 효심이 동했다. 이런 몰골로 들어간다면 한 달 내내 잔소리를 듣는 것은 물론, 무엇보다도 엄마를 엄청 속상하게 만들 터였다.

끙끙거리며, 훌쩍거리며, 비틀거리며. 휘청휘청 큰길로 나와 택시를 잡으려다가 무언가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곰곰 생각해보니 쇼핑백이 없었다. 순간 찬물을 뒤집어쓴 것마냥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부랴부랴 주점으로 되돌아갔다. 다행히 카운터를 지키고 있던 매니저인지 주인인지가 보관하고 있던 백을 돌려주었다.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림 재료야 언제든 다시 사도 되지만 그가 하루 종일 지켜준 쇼핑백이다. 그의 소중한 손때와 배려가 묻어 있는 물건이다. 죽어도 잃어버려선 안 되는 물건이다.

담배 한 대를 피우며 택시가 오기를 기다렸다. 시계를 보니 12시 45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반대쯤 태우고 있는데 택시가 잡혔다. 금연이라는 기사의 명령에 태우던 담배를 비벼 끄고 택시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그런 더러운 눈길로 녀석을 보지 마세요. 구역질나니까.

욱신…….

차창 밖으로 스쳐 가는 야경이 아름답다.

―친구라고? 웃기지 마. 힘든 상황 이용해서 미성년자랑 원조 교제나 일삼는 호모 따윌 친구로 둘 만큼 굶주린 놈 아냐.

욱신…… 욱신…… 욱신…….

모든 스쳐 지나가는 인연들은 아름답다.

―녀석을 꼬드기는 건 무척 쉬웠겠지. 메마르고 쿨해 보여도 사실 정 많은 녀석이니까.

욱신…… 욱신…… 욱신…… 욱신…… 욱신……. 욱신…….

천천히 스쳐 지나가는 이 시간이, 이렇게 작은 한 시절이 아름답다…….

―한 달 후에 녀석이 그쪽을 깨끗이 차버리는 데 제 전부를 걸죠.

욱신…… 욱신…… 욱신…… 욱신…… 욱신…… 욱신…… 욱신…… 욱신…… 욱신…….

……어떻게 해도 떨리는 손을 숨길 수 없어 속상했다.

겁에 질려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서 속상했다. 그래도 명색이 어른인데, 태연하게 여유를 보이며 받아넘기지 못했던 자신의 궁색함이 속상했다. 숨김없이 속내를 밝혀준 소년이 차라리 고마운 거라고, 차라리 그것이 그나마 자신에 대한 존중일지 모른다고, 대범하게 생각 못 했던 자신이 속상했다.

차라리 소년을 미워할 수 있다면 하고 쓰라리게 생각했다. 이렇게 야단이라도 맞은 어린애마냥 잔뜩 주눅이 들 것이 아니라. ……씨팔, 깨끗이 차인다고? 그래, 두고 보자…… 마음 정리, 마음 청소, 시원스레 조지고 네놈처럼 반드시 친구로 남고 말 테다…… 씨팔, 그럴 테다…… 하고 자신만만하게 호기라도 부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사랑이 억울했다. 그를 향한 사랑이 너무나 독해 언감생심 호기조차 부려볼 수 없는 자신의 비겁함이 억울했다. 원조 교제가 아니라 사랑이라고, 그의 몸만 밝히는 색골이 아니라 그의 모든 것에 매혹돼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랑이라고, 감히 떳떳하게 항변조차 해볼 수 없는 변태 게이의 처지가 못내 억울하고 또 억울했다…….

“……손님, 말씀하신 사거리인데요, 여기서 어느 쪽으로 방향을 잡을까요?”

기사의 느닷없는 재촉 소리가 홍수처럼 밀려들고 있던 쓰디쓴 상념들을 겨우 막아주었다. 차창 밖을 보니 익숙한 모양새의 교차로가 어느새 떡하니 펼쳐져 있었다.

“우회전하셔서 20미터쯤 올라가시면 편의점이 있거든요. 그 앞에서 세워주십시오.”

택시는 잠시 후 인환이 지정한 장소 앞에서 정확히 멈춰 섰다. 서둘러 계산을 하고, 생명줄처럼 끌어안고 있던 쇼핑백을 들고 택시에서 내려섰다. 여전히 꽤 흔들리는 몸을 가누기 위해 한참을 상가 건물 벽에 기대서 있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땅바닥이 느린 템포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이렇게 비틀거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빌라 바로 앞에서 세워달라고 할걸…….

멍하니 후회를 곱씹으며 한참 동안 걷는 데만 열중했다. 골목 끝으로 낯익은 5층짜리 빌라가 겨우 보였다.

형식적으로 쳐진 나무 울타리를 건너 빌라 앞마당으로 들어서는데, 현관 옆으로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설핏 보였다. 커다란 덩치의 사람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현관 불빛도 어둑어둑했고 취기로 흐려진 눈이라 자세히는 보이지 않았다. 인환이 가까이 다가가자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그림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낯익은 기척 같다는 생각이 얼핏 스쳐갔다. 그림자가 세 계단을 내려와 인환의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다. 꿈속에서도 그리울 체취가 코끝으로 확 끼쳐들었다.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한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두근…….

“……술 더 드신 겁니까?”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사고라도 난 건가 몹시 걱정했습니다. 그 여대생 집이 생각보다 가까워서 전 데려다주고 10분 만에 여기 도착했거든요.”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얼굴빛이 무척 안 좋으세요. 토하신 거죠? 술 그렇게까지 드시는 건……?!!!”

제대로 균형이 잡히지 않는 다리가 원망스러웠다. 제대로 힘을 줄 수 없는 두 팔도 안타까웠다. 그래도 필사적인 기세로 그의 목에 매달렸다. 그의 몸을 껴안기 위해 기를 썼다. 당혹해서 몸을 굳힌 그의 얼굴에 막무가내로 입술을 눌러댔다.

반칙이다. 이건 정말 반칙이야.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면 어떡해. 준비하고, 마음을 가다듬고, 어른다운 품위를 지켜가며 그를 대할 수가 없잖아. 참을 수가 없잖아. 참을 수 없어. 키스를 참을 수가 없어. 껴안는 것도 못 참아. 눈물은 더욱 그래. 우, 씨. 오늘은 정말 울면 안 되는데. 울고 싶지 않은데. 젠장, 참을 수가 없다구.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는데 어떻게 참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어. 반칙이야. 네 잘못이야. 네가 자초한 거야, 위위…….

“……선생님…… 선생님, 그만…… 경비원이 봅니다…… 그…… 웁…….”

취기로 달아오른 몸에 닿는 그의 몸은 상대적으로 차게 느껴졌다. 오늘 하루 종일 흘린 땀으로 촉촉하게 젖어 있는 그리운 몸은 여전히 단단하고, 압도적이고, 그리고 사랑스러웠다. 낙지처럼 버르적거리며 미친 듯이 달라붙는 자신을 그가 억지로 떼어놓으려 한다. 몸에서 떼어내고 입술에서 밀어낸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은 절망감에 필사적으로 울며 애원했다. 입 밖으론 절대 토해낼 수 없는 비굴한 애원을 속으로 미친 듯이 되뇌고, 또 되뇌었다. 안 돼. 안 돼. 안 돼. 자르지 마. 제발 잘라내지 마. 날 네게서 떼어내지 마. 버리지 마. 버리지 마, 위야. 버리지 마. 나 버리지 마…….

한동안 밀어내기를 계속 하던 그가 체념한 듯 마주 안아왔다. 무턱대고 달라붙던 자신의 입술에도 농후한 입맞춤을 거듭 퍼붓기 시작했다. 허리가 부서질 것처럼 아프게 끌어당기는 그의 팔 힘을 어렴풋이 느꼈다. 목구멍 안쪽으로 깊숙이 찔러 들어오는 혀끝에 그만 온몸의 힘이 빠지며 축 늘어졌다. 구명줄처럼 들고 있던 쇼핑백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결사적으로 붙들고 있던 그의 목줄기는 그러나 여전히 놓지 않았다. 휘청하며 시야가 180도로 회전했다. 그가 바닥에 떨어진 쇼핑백과 함께 자신을 안아 드는 것이 느껴졌다. 더 이상 그의 입술에 키스를 할 기력은 없어 그저 그의 목에 팔을 감은 채로 빌라 안으로 안겨 들어갔다.

“어이쿠, 늦으셨네요……?!”

꾸벅꾸벅 졸고 있던 경비 아저씨가 회전문 열리는 소리에 소스라쳐선 얼떨떨한 인사말을 던진다. 답례를 할 정신이라곤 없다. 흔들흔들 빌라 천장이 돈다.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 때문에 시야가 그저 뿌연 안개 속만 같다.

“……현관 열쇠 비밀번호 불러주세요.”

탁하게 가라앉은 연인의 목소리가 명령했다.

“……칠…… 이…… 공일…… 일구.”

“…….”

번호를 누르는 삑삑음이 들리더니 바로 현관문이 열렸다.

“누군가의 생일을 비밀번호로 하는 건 위험해요. 조만간 바꾸시는 게 좋겠어요, 선생님.”

네 생일인걸. 죽을 때까지 안 바꿀 거야…….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켜진 전등 빛에 몹시 눈이 부셨다. 신발을 벗기고 쇼핑백을 현관 옆에 내려놓은 그가 침실로 자신을 데려간다. 침대 위에 자신의 몸을 떨구곤 바로 일어나려는 그의 목을 필사적으로 끌어당겼다. 중심을 잃은 그가 비스듬히 자신의 몸 위로 쓰러졌다. 묵직한 체중에 짓눌린 자신의 몸이 환희에 찬 비명을 지르는 것을 느낀다.

“……샤워…… 웁…… 움…… 선생…… 샤워하고 올게요…….”

“……싫…… 어…….”

“……더러워요…… 오늘, 땀 많이 흘려서…….”

“……싫…… 흑…… 웃…… 안 돼…… 가지 마…… 가지 마…….”

“……선생님…….”

턱 끝에, 뺨에 콧날에, 입술에, 닥치는 대로 입술을 눌렀다. 거부의 말을 못 하도록, 입술을 움직이면 자신의 입술로 바로 틀어막아버렸다. 그의 목을 휘어감은 양팔로도 불안해서 양다리를 들어 올려 그의 허리를 문어처럼 휘감았다. 자꾸만 힘이 빠지는 몸이 불안했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힘을 빼면 그가 가버릴 것 같았다. 그대로 버려두고 도망쳐버릴 것만 같았다. 샤워하고 온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 분명했다. 틀림없었다. 설움이 복받쳤다.

“선생님……?”

“……안…… 아…… 안…… 잘 거야…….”

“……?”

“……이…… 이제 안 잘 거야…… 너랑…… 안 잘 거야…… 연…… 연습…… 할…… 거야…….”

“……?”

“……치…… 친구 되게…… 준…… 성…… 성준…… 성준이처럼…… 되…… 될 수 있게…….”

목이 메어서 제대로 말을 이을 수가 없다. 키스를 해야 하는데 말도 해야만 하는 이 순간이 너무나 답답하고 초조하다. 그의 입술에 최대한 입을 꼭 붙이고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아니, 쏟아내기 위해 기를 썼다.

“……안…… 안 자고 연습하면…… 그러면 친구 될 수 있을지 모르니까…… 나…… 남은 한 달은…… 연…… 연습해야지…… 열심히 연습해서…… 그래서…….”

“…….”

“……성…… 성준이처럼 네 옆에 있을 수만 있으면…… 윽…… 해봐야지…… 꼭 해내야지…… 윽…… 흑…… 웃…….”

“…….”

“……그…… 그러니까…… 지금…… 지금…… 오늘만…… 오늘만 안아줘…… 부서질 만큼…… 안아줘…… 부서…… 윽…… 흑…… 우앗…….”

“…….”

“……좋아…… 부서져도…… 좋아…… 그러니까…… 안아…… 줘…… 부서질 만큼…… 그…… 런…… 그러…… 흡……!”

갑작스러운 흡입 탓에 더 이상 얘기를 계속할 수가 없었다. 후려치는 듯한 키스였다. 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통증이 왔다. 그의 팔이 어마어마한 힘으로 허리를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숨을 쉬기 힘들 만큼 격하게 빨아 당기는 그의 입술에 뇌수까지 빨리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 부서트릴 모양이었다. 다행이었다. 부서지고 부서져서 다시는 회복하지 못하길 바랐다. 부서져서, 폭삭 무너져서,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하게 되길 간절히, 간절히 바랐다. 그럼 이렇게 힘든 사랑 더 이상 안 해도 되겠지. 더 이상 아프지 않아도 되겠지.

용암처럼 몰아치는 그의 혀끝을 맞아들이기 위해 둥그렇게 입술을 벌렸다. 혓바닥을 마주 쓸고, 끌어당기고, 포개듯이 얽었다. 깨물고 깨물리고 빨려 들어갔다. 아랫도리가 뿌듯해지며 점점 더 힘이 빠졌다. 티셔츠가 말려 올라갔다. 피아니스트 신동의 손가락이 잡아 뒤틀 것처럼 아랫배를 더듬더니 곧이어 가슴을 움켜쥔다. 가죽을 벗겨 올리듯 쓰다듬고, 바짝 일어선 검붉은 살점을 잡아 뜯는다. 흐읏. 자신도 모르게 허리가 뒤로 휘었다.

사나운 기세로 티셔츠가 벗겨졌다.

바지가, 팬티가, 양말이, 시계가, 피부 위에 걸쳐졌던 모든 것이 허물처럼 벗겨져 나갔다. 순식간에 자신을 알몸으로 만든 그가 입술을 빨며 스스로의 옷도 벗어젖혔다. 여전히 울고 있는 자신이 마음에 안 드는지, 미간 사이에 잔뜩 주름을 세운 사나운 얼굴이 먹어치울 기세로 얼굴에 키스를 거듭 퍼부었다. 얼굴 전체를 쓸고 가는 혓바닥의 얼얼한 감촉에 흐물흐물 온몸이 늘어졌다. 너무나 난폭한 키스에, 몸짓에 심지까지 떨려왔다. 두려움에, 흥분에 오싹오싹 섹스가 죄었다.

양쪽 허리를 틀어 잡혀 거칠게 뒤집어졌다.

뒤집혀 엎드린 몸 위로 윤활제를 듬뿍 바른 그의 손가락이 쑤시고 들어왔다. 차가운 감촉에 진저리를 치며 버둥거리자 나머지 한 손이 어마어마한 힘으로 어깨를 짓눌렀다. 손바닥에 눌린 견갑골 부근이 바스러지는 것만 같았다. 어느 순간 세 개로 늘어난 손가락이 내벽 안쪽 전립선을 깊숙이 훑어 올리곤 거짓말처럼 홀연 빠져나갔다. 경직이 채 풀리기도 전에 허리가 들어 올려졌다. 개처럼 엎드린 자세를 만든 그의 몸이 단숨에 뚫고 들어왔다. 목을 죄는 듯한 극심한 동통에 저절로 신음이 토해졌다. 끈적한 땀과, 콧속이 아릴 것처럼 짙은 체취가 진동하는 그의 나신이 트럭처럼 부딪쳐왔다. 귀두 부분이 활처럼 휘며 내벽을 스칠 때마다 나무껍질에 할퀴어지는 것만 같은 충격을 느꼈다. 두껍고 거친 나무 막대로 무자비하게 쑤셔지는 기분이었다.

취기 때문인지 뻣뻣하게 발기한 몸은 좀처럼 꼭대기에 오르지 못했다. 난폭하게 주무르는 그의 손길에, 쾌락보단 통증을 더 느꼈다. 사정없이 쳐 올려지는 내벽과 한가지였다. 그를 조이거나 허리를 흔드는 따위, 그 어떠한 기교도 부릴 수 없었다. 팔꿈치를 세워 자세를 유지하는 것만도 힘에 부쳤다. 부서지는 것 같았다. 아니, 부서지고 있었다. 그는 철저하게 자신의 부탁을 따르고 있는 것 같았다.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은 쫓김의 끝에 겨우 배출이 이루어졌다. 탈진한 것마냥 전신의 힘이 빠져나갔다. 몸이 허공으로 붕 뜨는 느낌과 함께 의식이 흐려졌다. 더 이상 자세를 유지할 수가 없어 그를 문 채 그대로 침대 바닥에 나뒹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머리카락이 쥐어뜯기는 듯한 아픔에 어렴풋이 의식이 들었다. 그가 한 손으론 침대 바닥을 누른 채 그의 체중을 지지하고, 나머지 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움켜쥘 듯 쓰다듬고 있었다. 난폭한 손놀림에 목이 자주 뒤로 꺾이며 숨을 쉬기가 불편해졌다. 힘을 기울여 빠져나올 엄두도 나지 않았다. 손을 뻗어 몇 번 그의 손길을 제지하려 했다가 난폭한 저항에 부딪쳐 그대로 밀려났다. 기운을 잃은 손은 그대로 침대 바닥에 늘어졌다. 엎드려 누운 자신의 위에 몸을 겹친 채, 그는 여전히 트럭처럼 빠르고 격렬하게 부딪쳐오고 있었다. 등에 불길처럼 내뿜어지는 그의 숨결을 느꼈다. 울퉁불퉁 세찬 율동을 거듭하고 있는 그의 가슴팍에서 땀이 비 오듯 흘러 떨어졌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찔리는 전립선에 아랫도리가 짓이겨지는 감각을 느끼면서도 벌겋게 부어오른 자지는 더 이상 오르가슴을 일으키려 하지 않았다. 숙취가 그토록 부끄럽던 조루 증세를 한 방에 날려주었나 싶어 기가 막혔다. 이렇게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늘어지지만 않는다면 섹스 때마다 술을 마시는 것도 좋을 텐데 하고 바보 같은 생각도 잠깐 했다.

등 뒤의 연인이 온몸으로 전율을 흘리며 절정을 맞고 있었다. 연인이 갈 때의 얼굴을 보는 것은 정말 드물어서, 당장이라도 몸을 돌려 바라보고 싶지만 연인은 좀처럼 체위를 바꾸지 않는다. 자신의 안에 단단히 결합돼 있는 연인을 실감하고 싶어 가슴이 저릿하지만 연인은 좀처럼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안타까움에 또다시 소리 없이 눈물이 흐른다. 자꾸만 까라지려는 몸에 필사적으로 힘을 기울인다. 뒤로 조금씩 손을 뻗어 흔들리고 있는 연인의 허리 근육을 어루만졌다. 순간 바짝 긴장하며 전율을 흘리는 연인의 몸이 느껴졌다. 움푹 파인 등뼈 부근을 더듬다가 더 아래로 내려가 꿈틀거리고 있는 엉덩이 근육을 스치듯 애무했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그의 손가락에 힘이 가해졌다. 파르르륵 경련을 일으키는 엉덩이에 좀 더 짙은 애무를 하고 손을 좀 더 내려 회음부 틈을 더듬자, 그의 입술에서 울부짖는 듯한 날카로운 교성이 터졌다.

“……그만……! 아아…… 흡……!”

갑자기 사나운 기세로 그의 몸이 빠져나갔다. 숨이 턱 막히는 동통과 함께 반동으로 허리가 뒤로 바짝 휘었다. 침대 위로 무너지듯 몸을 누이며 그가 자신의 상반신을 으스러져라 끌어안았다. 등 뒤로 껴안긴 몸은 그에게 단단히 밀착된 채 침대 위를 두 바퀴 구르더니 방바닥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그에게 온몸을 덮치듯 안겨 있어 그리 충격은 느껴지지 않았다.

문어발처럼 죄어 들어온 그의 양팔에 숨이 막힌 나머지 힘겹게 몸을 뒤틀었다. 풀어주기는커녕 더한 악력이 상반신을 조여왔다. 반쯤 바닥으로 흘러내린 침대 시트와 더불어 그가 자신을 품은 채로 두 바퀴쯤인가 더 바닥을 굴렀다. 모로 누운 자세로 구르기가 멈췄을 때 그가 자신의 한쪽 허벅지를 들어 올리더니 단숨에 안으로 뚫고 들어왔다. 삽입된 채로 몸이 돌려세워져 그와 마주 안은 자세가 되었다. 광기 어린 욕망으로 흐릿해진 그의 눈이 보였다. 붉게 달아오른 아름다운 이목구비가 보였다. 물에 빠진 사람처럼 온통 젖어 번들거리는 그의 몸도 보였다. 뒤로 물러났던 허리가 느리면서도 강하게 찔러왔다. 배 속까지 뚫고 들어온 듯한 깊은 삽입에 회초리를 맞은 것처럼 온몸이 쫙 펴지며 전율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매번 기록을 갱신하며 더더욱 안으로 깊이 파고 들어오는 그의 흉기에 온몸이 바스러지는 충격이 왔다. 입이 딱 벌어지며 눈앞이 아득해졌다.

상황을 살피는 듯한 느린 대시는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다시금 숨 돌릴 틈 없는 맹렬한 공격이 안쪽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새빨간 그의 눈시울이 자신의 것을 틀어쥔 채 알 수 없는 어딘가로 몰아가고 있었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쾌락인지 고통인지 분별조차 되지 않았다. 무조건 떠밀려갔다. 떠밀리다, 떠밀리다 못해 갈가리 찢겨나갔다. 그의 아랫배에 쓸려 움찔거리는 분신이 마침내 견디지 못하고 괴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몸부림을 치며, 흐느끼며, 그만해달라고 애원했다. 물론 그는 애초의 부탁대로 조금도 멈추지 않았다.

얼마만큼 흔들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얼마만큼 떠밀려 갔는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극점에 도달해 사정할 것 같으면 흉기를 빼내 사정을 지연시키고, 다시 가라앉힌 다음엔 그 이상의 힘으로 쑤셔들어 인환을 자지러뜨렸다. 부서뜨렸다.

몰리고 몰린 어느 한 끝 지점, 마침내 나락으로 떨어지며 가루가 됐다.

용솟음치며 뿜어 나온 정액이 그의 아랫도리를 흥건하게 적시는 것을 마지막으로 인환은 또 한 번 혼절했다.

위장을 할퀴는 것만 같은 아픔에 끙끙거리며 신음을 토했다. 머리가 쪼개지는 것처럼 욱신거렸다. 웅크리듯 다리를 구부리자 전기가 오른 것처럼 찌릿찌릿한 아픔이 온몸의 근육이란 근육을 들쑤시며 지나갔다.

“……속 쓰리시죠? 주방에 꿀이 있어서 좀 타 왔어요. 드세요…….”

따스한 손이 다가와 상반신을 일으키더니 따뜻한 물 컵이 입가에 와 닿았다. 입안이 마르는 듯한 심한 갈증에 허겁지겁 들이켰다. 꿀물 한 컵을 깨끗이 비우고 나자 속이 조금 편해지며 정신이 한데 모였다. 욱신거리는 두통은 여전했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다 마신 컵을 침대 탁자 위에 내려놓은 손이, 부드럽게 몸을 부축해 인환을 침대에 다시 눕혔다. 깨끗하게 세탁돼 섬유 유연제 냄새가 풍기는 시트가 어깨까지 덮였다. 빡빡하게 부어오른 눈을 몇 번 깜빡여 뜨고 사랑하는 이의 모습을 찾았다.

순식간에 다가드는 밝은 빛에 눈이 몹시 시렸다. 날이 완전히 밝은 모양이었다. 바스 가운 차림의 그가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치자, 시린 눈이 조금 진정이 되었다. 커튼을 치고 다시 침대로 다가온 그가 고요한 눈길로 인환을 굽어보았다. 아직 젖어 있는 머리카락을 보니 샤워를 한 지 얼마 안 되는 것 같았다. 커튼 너머로 비쳐든 부드러운 아침 햇살을 통째로 받고 있는 연인의 모습은 서럽도록 아름다웠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단정한 얼굴이 한 점의 흐트러짐조차 보이지 않은 채 인환의 시선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속은 좀 어떠세요? 견딜 만하세요?”

“……응…….”

“……좀 더 주무세요. 얼굴빛이 아직 많이 안 좋으세요.”

“……됐어…… 많이 잤는걸…… 날도 밝았고…….”

“……이제 6시인걸요. 머리는 안 아프세요?”

다정다감한 친구의 얼굴을 하고서 연인이 상냥하게 묻고 있다. 김성준을 바라볼 때와 똑같은 애틋함과 애정이 그 눈에 가득해서 인환은 또 목이 메었다.

빨갛게 된 자신의 눈시울을 발견했는지 그의 표정이 많이 어두워진다.

“……울지 마세요…… 제발…… 눈 아프시잖아요…….”

“……갈…… 거야?”

“……?”

“……지금 집에 바로 갈 거지?”

자신이 우는 걸 싫어하는 그이기에 입술을 깨물며 열심히 눈물을 참아낸다.

“……아뇨. 혜윤이, 현준 형네 놀러 가 있어서 오늘은 집에 안 가도 돼요. 현준 형 공연이 내일부터 시작하나 봐요. 오늘은 하루 종일 선생님과 함께 지낼 겁니다.”

“저…… 정말?!! 으, 윽!!!”

너무나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가 저릿하게 울리는 하반신의 아픔에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비로소 어젯밤의 충격적인 정사가 기억에 떠올라왔다. 부끄러움과 기쁨만큼의 아픔이 심장 근처를 할퀴고 지나갔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사랑을 나눴는데.

“……아래…… 다치셨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상처는 없어요. 아까 수건으로 닦아드리면서 연고 조금 발라드렸습니다. 움직이시는 데는 당분간 좀 불편하실지도 모르겠어요.”

그러고 보니 온몸이 보송보송한 느낌이 들 정도로 개운하다. 잠든 틈에 그가 젖은 수건으로 말끔히 뒤처리까지 마친 모양이었다. 시트까지 새것으로 갈았는지 알몸에 닿아오는 감촉은 마냥 상쾌하기만 했다. 친구에게 하는 그의 극진한 배려란 고객과는 역시 또 얼마나 다른가 새삼 생각하고 다시금 눈물이 핑 돌았다.

분명히 가치가 있을 것이다. 노력해봐도 안 된다면 할 수 없는 노릇이겠지만, 아마도 피를 토하는 노력이 될 테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마음을 바꾸는 것은 지금의 자신으로선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것이 단 1프로의 가능성에 불과할지라도 자신은 매달릴 것이다. 필사적으로 달라붙을 것이다.

“……왜 오늘 하루 종일 나랑 함께 있겠다는 거니…… 어젯밤 일만으로 오늘치 세 시간은 다 써버린 셈인데…….”

예의, 단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는 그의 살피는 듯한 시선이 버거워 바닥으로 고개를 내린 채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하루 종일 그와 지낼 수 있다니 당장은 뛸 듯이 기쁘지만, 남은 8월의 어느 한 주 약속을 고스란히 희생해야 할지도 모른다.

“……고마워서요…….”

너무나 나지막해서 거의 들릴 듯 말 듯한 대꾸가 흘러나왔다. 정수리 위를 부드럽게 쓰다듬기 시작한 그의 커다란 손가락이 느껴졌다.

“……연습해보시겠다고 한 거…… 정말 고마워서요…….”

“…….”

“……선생님 잃고 싶지 않아요. 정말 저 그래요, 선생님…….”

“…….”

“……성준이를 잃고 싶지 않듯이 선생님도 같아요…… 제겐 똑같이 소중해요…….”

“…….”

좀 더 오래 상냥한 애무가 계속되었더라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어버렸을지 모른다. 기를 쓰고 입술을 깨물며 버티고 있자니,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어루만지고 있던 손길이 마침내 떨어져나갔다. 커다랗고 날씬한 피아니스트 신동의 손은 이번엔 어깨로 이동해 인환의 상반신을 조심스레 침대에 도로 눕혔다. 시트를 어깨까지 덮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환기하느라 창문 다 열었어요. 덮고 계세요. 아침이라 조금 서늘할 거예요.”

“…….”

“가게 가서 콩나물이랑 좀 사 올게요. 속 안 좋으실 텐데 시켜 먹는 음식보다는 낫겠죠.”

침실 문 쪽으로 걸어가는 그의 기척이 느껴졌다.

“더 주무세요. 식사 준비되면 깨워드릴게요.”

문이 닫혔다. 옷을 갈아입는 기척이 들리고, 이어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기회를 틈타 후둑후둑 떨어지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고, 인환은 백설공주라도 된 듯한 황송한 호사를 만끽했다. 가슴은 마냥 미어지기만 하고 앞날은 그저 캄캄하기만 한데, 당장의 ‘우정’이 주는 달콤한 위로가 황홀한 나머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무뇌아가 아니고서야 어찌 이럴 수가 있을까, 얄팍하기 짝이 없는 자신에 그저 신물이 난다.

여전히 지끈거리는 머리를 베개 속에 푹 박은 채, 인환은 마지막이다, 마지막이다 하는 주문과 같은 맹세를 거듭 되풀이 뇌까렸다. 그렇게 마.지.막. 울.음.을 울었다.

……할 수 있어…… 김성준처럼 할 수 있어…… 나도 반드시 할 수 있어…… 하고 말 테다, 씨팔…… 한다면 한다, 젠장…… ‘더러운 눈길’로 다신 그를 보지 않을 테니까…… 할 수 있어…… 할 수 있고말고…… 그래, 두고 보자…… 두고 보자, 김성준…… 마음 정리, 마음 청소, 시원스레 조지고 네놈처럼 반드시 친구로 남을 테다…… 남고 말 테다…… 씨팔, 그럴 테다…… 그러고 말 테다…… 원한에 차서 맹세를 하고 있었지만…… 물론, 오기 같은 것으로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을 가슴 아픈 맹세였다.

“……선생님…… 선생님……?”

부드러운 손길이 어깨와 팔꿈치 사이를 쓸고 있다. 비몽사몽 흐려졌던 의식이 연인의 상냥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단숨에 안개를 걷어냈다. 눈을 번쩍 뜨고 연인의 얼굴을 찾았다.

“……식사하세요. 기억을 더듬어서 대충 만들어봤는데 먹을 만은 할 겁니다.”

어제의 낡은 청바지와 군청색 면티를 그대로 걸친 연인이 바로 코앞에서 인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짙은 땀내가 밴 티셔츠며 청바지는 땀에 푹 젖은 채로 침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팽개쳐졌던 터라 한눈에 보기에도 잔뜩 구김이 가 있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 슬쩍 준비해둔 멋들어진 티셔츠를 자기 것인 양 말하고 그에게 입혀야지…… 눈꺼풀을 몇 번 깜빡여 몽롱한 잠을 털어내며 멍하니 결심을 굳힌다. 그에게 떠밀리다시피 몸을 일으키고, 그가 입고 있던 바스 가운을 어리바리 물려받아 입고, 마지막으로 그의 손에 끌려가다시피 주방으로 갔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찌릿한 통증이 하반신을 달렸지만 걸음을 못 옮길 정도로 아픈 것은 아니었다. 온몸을 부서트릴 듯이 몰아붙였음에도 그의 배려가 아주 없었다면 이 정도로 무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생각하니 또 부끄럽고 황홀할 일이라 얼굴이 뜨거워진다.

고소한 콩나물국 냄새가 진동을 하는 주방엔 황송하다 못해 감격의 눈물까지 뽑을 정도의 놀라운 식탁이 마련돼 있었다.

가스레인지에 직접 올려 익힌 밥은 조금 타긴 했지만 보기에도 고소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고, 콩나물국은 간이 딱 맞아 시원한 맛이 일품이고, 돼지고기가 들어간 김치찌개는 별로 취향이 아닌 인환의 입에도 착 달라붙는 감칠맛이 있었다. 구운 돌김에 잘 익힌 계란 프라이까지 더한,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놀라운 진수성찬이었다.

“엄마가 직장에 다니시는 동안에 삼형제가 돌아가며 식사를 준비했었습니다. 지금은 혜윤이가 주로 당번이라 더 이상 하진 않지만, 저도 웬만큼 먹을 수 있을 정도로는 만들 줄 압니다.”

휘둥그레져서 묻자, 특유의 무표정으로 담담한 대꾸를 던지는 그다. 정말이지, 파도 파도 언제나 놀라움을 주는 남자가 아닐 수 없다. 평소라면 숙취에 죽 한 모금도 넘기길 꺼렸을 자신이건만, 그가 퍼준 밥 한 공기를 말끔히 비워낸 건 순식간이었다. 놀랍고, 맛있고, 황송하기 그지없는 아침 식사였다. 다시 맞기 힘들 행복의 아침 식사였다.

설거지라도 하려는 인환을 낯빛이 아직도 좋지 않다는 엄포로 밀어내며 연인은 설거지까지 차지해버렸다. 늠름한 덩치를 해갖고 나지막한 싱크대 앞에 허리를 굽히고 있는 모습조차 멋있어서 벙하니 입이 벌어졌다. 황송함에 어찌할 바를 모른 채 한동안 그의 설거지 솜씨를 지켜보다가 미적미적 욕실로 들어갔다.

거울에 비추어 본 자신의 얼굴은 그가 엄포를 놓을 정도로 그렇게 상태가 나빠 보이진 않았지만, 보기 흉하다는 면에 있어서는 상태가 아주 고약했다. 숙취의 기색이 선연한, 창백한데다 퉁퉁 부은 얼굴이 거울 너머에서 멍하니 이쪽을 보고 있었다. 온몸은 어젯밤의 과격한 정사의 자취가 낭자했다. 곳곳이 붉은 키스마크요, 푸릇푸릇하게 멍이 든 곳도 꽤 있었다. 아아, 젠장. 그에겐 정말 잘생기고 멋진 모습만 보이고 싶건만……! 다행히 청결성의 면모에선 그가 수건으로 워낙 유리알처럼 닦아놓은 터라 샤워를 하는 것도 무색할 정도였다. 행여 부기가 빠질까 싶어 찬물에 적신 수건으로 한참 동안 눈두덩을 두드리다 포기하고, 이만 닦고는 욕실을 나왔다.

옷이라도 멋진 걸로 갈아입어야지 하며 제법 비장한 작정을 한다. 그김에 그도 준비해둔 멋들어진 티셔츠로 갈아입혀야지 하고 다른 작정도 한다. 하루 종일 그가 같이 있어준다고 했으니까, 잔뜩 멋 내고 놀이공원에라도 가면 좋겠다. 영화를 보는 것도, 도시락을 싸 갖고 피크닉을 가는 것도, 남대문시장에 가서 아이쇼핑을 해보는 것도 좋을 거다. 1년 동안 내내 방에 짱박혀 섹스만 하고(물론 섹스도 죽을 만큼 좋았지만, 그래도), 변변한 데이트 한번 제대로 못 해보고 사랑을 끝내야 한다니, 진짜 한심하고 비참해서 니미 씨부랄이다. 뭐, 그래도 절대 후회는 안 한다. 정말 근사하고 근사한 내 최고의 영웅이었다.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거다. 앞으로 또 어떤 그럴싸한 영웅을 좋아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지금의 내 영웅을 능가할 멋들어진 영웅은 절대로 나타나지 않을 거다. 그러니 후회 없다. 진짜 후회 안 할 거다. 씨팔, 울지 마. 그의 진짜 친구가 되기까진 죽어도 안 울기로 맹세했잖아, 장인환.

벽장에서 옷을 몇 벌 꺼내 침대 위에 죽 늘어놓고 있는데 그가 마침 침실로 들어왔다.

“……골라봐, 위야. 어느 게 제일 멋있어? 난 이 헐렁한 해병대 바지가 제일 괜찮은 것 같은데…… 시원해 보이고…….”

“……옷은 왜요? 어디 나가시게요?”

어딘가 생각에 잠긴 듯한 목소리가 조용히 대꾸했다.

바로 곁으로 다가온 기척을 느꼈지만 눈은 되도록 마주치지 말자고 작심했다. ‘더러운 눈길’로 그를 보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좋은 작심이다.

“……응. 오늘 횡재했으니 밖에서 데이트 하려구. 너도 괜찮지?”

“……은데요, 전…….”

해병대 바지에 어울릴 만한 티셔츠 색깔을 고민하느라 그가 중얼거리듯 흘린 말을 미처 듣지 못했다.

“응? 뭐라구? 뭐가 좋다구?”

“…….”

“……아무래도 이게 제일 낫겠다! 어때, 위야? 해병대무늬 바지엔 역시 카리스마 짱인 검정색 티가 제일 낫지?”

“…….”

“……넌 이 비둘기색 쫄티 어때? 이거 나한텐 좀 커서 잘 안 입는 거거든? 너 갈아입어라. 그 티는 어제 땀으로 목욕을 해서 냄새도 나고 찝찝하잖아…….”

“…….”

문득 정수리 틈으로 파고 들어온 그의 손길에 인환은 모든 동작을 멈췄다.

자신은 침대 가장자리에 쪼그리고 앉은 상태고 그는 그 바로 뒤에 서 있어서, 돌아보지 않는 한 그의 얼굴은 볼 수가 없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느닷없는 접촉이어서 잠시 동안은 그저 어리둥절한 느낌만 들었다. 정수리 위에 뭐가 붙은 건가 하고 상당히 타당성 있는 의심도 설핏 스쳐갔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충격은 바로 직후에 왔다. 머리카락 틈을 부드럽게 헤엄치며 그의 손가락이 두피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두근…….

관자놀이 부근과 뒤통수와 다시 그 반대편 관자놀이 부근으로 손가락이 차례로 옮겨간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머리카락을 쓸던 손이 이윽고 차츰 아래로 내려오며 어깨를 어루만졌다. 좀 더 아래로 내려와 겨드랑이 안쪽을 더듬는 짙은 애무의 손길에 인환은 흠칫 몸을 굳히며 부르르 전율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명백히 성적인 의도가 느껴지는 유혹의 손길이었다.

곤혹스럽기도 하고, 가슴이 떨리기도 해서 잠시 동안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갈팡질팡하기만 했다. ……연습하기로 했는데…… 이…… 이제 안 자기로 했는데…… 그와 다신 안 잘 건데…… 그래야 하는데……. 바스 가운 깃이 어느새 어깨 아래까지 흘러내려 팔꿈치까지만 겨우 걸친 발가벗은 꼴이 되었다. 그의 입술이 어깨와 뒷목덜미 사이 예민한 부분을 살며시 눌러왔다. 자기도 모르게 고개가 뒤로 젖혀지며 흐릿한 교성이 터졌다.

“……아…… 안 돼…… 왜…… 이…… 이젠…….”

연약한 이성이 형식적인 저항을 되풀이한다. 겨드랑이 사이로 파고 들어온 그의 두 손이 부드러운 근육으로 뭉쳐 있는 가슴을 덥석 움켜쥐자 혼란은 더 심해졌다. 점점 열기를 더해가는 몸의 욕망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갈팡질팡 절망적인 기분이 들었다. ……아…… 안 돼!!!

“……오늘까지만이라고 하셨잖아요…… 오늘은 아직 다 가지 않았어요, 선생님…….”

귓가에서 허스키하게 토해지는 그의 대꾸에 비로소 납득이 갔다. 그의 의도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오늘 새벽에 한 소리라곤 해도 이건 억지가 분명하다. 억지라는 걸 그도 알고 있다. 하지만 어째서……?

―……고마워서요…….

……아…… 그런가……?

―……연습해보시겠다고 한 거…… 정말 고마워서요…….

……그래서 하루를 유예시켜준다는 건가……? 노력하겠다고 해서……? 내가 고마워서……? 불쌍해서……?

“……멍이 많이 들었어요…… 여기저기…… 어제는 저도 좀…….”

어깨 근처를 헤매던 입술이 견갑골 아래로 내려갔다. 옆의 침대가 푹 꺼지며 그의 체중이 통째로 실려왔다. 뜨거운 혓바닥이 등줄기를 핥으며 돌아다닐 동안, 두 손은 마치 여자의 유방을 주무르듯 인환의 양쪽 가슴 산을 음란하고도 집요하게 희롱하고 있었다.

“……흑……! 흐읏……! 위…….”

“……마지막이니까…… 오늘…… 마음껏 해요, 선생님…….”

“……하윽!!!”

“……최고로 즐겁게 해드릴게요…… 실컷 해요…… 서로…….”

“……흐…… 흐윽!! ……! 흐앗!!!”

“……어젯밤엔 선생님이 취하셔서 별로 많이 하지는 못했거든요…….”

“……위…… 흡……! 그…… 거기……! 흐윽……!”

“……오늘…… 하루 종일…… 침대에서 나오지 마요…… 좋죠, 선생님……?”

“……아…… 안…… 거기…… 웃……!”

눈앞이 핑글핑글 돌 정도로 연이어 되풀이되는 지독한 자극들에, 태아처럼 몸을 말고 그의 손길을 피했다. 이상하다. 그가 이상하다. 서비스…… 서비스는 서비스지만…… 분명 서비스이긴 하지만 이건 좀 너무…… 너무…… 아아,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집요한 손가락과 입술은, 그러나 용서가 없었다. 무릎 안쪽 예민한 부분에 이를 박아 넣고 그가 힘껏 깨무는 것만으로 방어벽은 어이없을 정도로 시시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신음 소리를 틀어막는 열렬한 키스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기억에 없었다. 뒤로 밀린 몸이 언제부터 침대 위로 쓰러졌는지도 도무지 기억에 없었다. 그의 난폭한 손아귀에 틀어 잡힌 두 다리가 활짝 열렸다. 열린 문틈 사이로 그의 거대한 몸이 도둑처럼 스며들고 있었다. 아득하게 이성을 상실해가는 시선을 들어 필사적으로 연인의 자취를 주워 모았다. 몸짓 하나하나, 표정 하나하나, 그 어느 것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흐릿한 홍조가 연인의 뺨과 눈가를 아릿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큼직하고 맑은 눈동자가 빨아들일 것처럼 뜨겁게 자신의 눈을 굽어보고 있었다. 키스를 유혹하듯 무방비하게 벌어진 입술은 도톰하고 붉고 섹시했다. 어느새 땀으로 흠뻑 젖어든 뚜렷한 이목구비는 어딘가 이국적이면서도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극상의 아름다움이었다. 잔뜩 구겨진 채 연인의 짙은 체취를 뿌리고 있는 군청색 반팔 면티가 보였다. 낡을 대로 낡아서 거의 보풀이 일어날 듯한 개구리 왕자의 허물이었다. 연인의 버겁고 아픈 현실이었다.

어쩐지 괴로워져서 시선을 내려 자신을 본다. 연인의 늠름한 어깨와 팔뚝에 걸쳐진 채 활짝 열려 흔들리고 있는, 자신의 볼썽사나운 짝짝이 다리.

맞붙은 하반신이 격렬하게 쳐 올려질 때마다, 허벅지 아래로 늘어진 자신의 새하얀 바스 가운 깃이 하늘하늘 흔들렸다. 마치 푸드득거리는 날갯짓처럼 보였다.

이대로 날아올라 다신 아래로 내려오지 않았으면…… 인환은 애절하고 절망적인 소원을 아주 오랫동안 빌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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