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부|the winter 2 - 13. 1990년 8월. 문위(文偉) (13/129)

13. 1990년 8월. 문위(文偉)

“반찬 상뽀 들추면 다 있응깨 꼭 챙겨 묵드라고잉? 찌개도 따땃허게 쪼까 뎁혀 묵고?” 

“예, 어머님. 염려 마시고 다녀오세요.”

“새참에 선상님 깡냉이도 쪄드리고잉?”

“하하, 예. 제가 달라고 할게요, 어머님.”

“할머니, 빨리요∼∼. 버스 놓쳐요∼∼∼.”

“아, 알었어야∼∼∼. 쩌그 혜윤이 땀세 오늘은 장이 장맹키로 서야 쓰간디.”

“빨리요, 할머니! 빨리!”

“워메, 말만 헌 가시나가 저 뛰는 꼬라지 보소…… 허허…….”

“어서 다녀오세요, 어머님. 저흰 염려 마시구요.”

“……그려. 싸게싸게 댕겨올탱께…….”

“할머니이∼∼∼!”

“아, 금메 시방 걸어야∼∼∼.”

5일장에 가시며 모처럼 화장까지 하신 것은 분명 혜윤이를 위한 배려이시리라. 혜윤이가 당신 때문에 행여 보기에 창피하지 않을까 근심하시는 것일 게다.

과연 윤열이 형을 키워내신 어머님답다고 해야 하나. 무지한 촌부라고 해도 그 성품은 세심하시면서도 지혜롭고 또 인자하시기 이를 데 없다. 윤열이 형의 타인에 대한 저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하는 이타적인 사랑법도 틀림없이 당신의 맹목적인 사랑법에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벌써 모습이 보이지 않는 혜윤이를 쫓아, 보성 어머님은 부지런히 사립문을 빠져나가고 계셨다. 5일장에 가시는 거야 당신의 일상이시겠지만, 신이 나서 구경을 하겠다고 따라 나선 혜윤이가 당신을 더 힘들게 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온순하고 제법 어른스러운 성품이긴 하지만, 확실히 철들고 처음일 바캉스 여행에 누이는 조금 들떠 있었다.

퇴행성 관절염 탓에 느릿하면서도 약간 저는 듯한 다리가 안쓰러워, 위는 큰길가로 꺾어들어 그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한참 동안 늙으신 어머님을 굽어보았다.

오전 10시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도 이미 불볕더위를 느끼게 하는 쨍쨍한 햇살이 사방에 가득했다. 사립문 안쪽 외양간에 묶인 암소 한 마리와 송아지 한 마리, 그리고 그 맞은편 개집에 묶인 잡종 백구 한 마리도 아침부터의 찌는 듯한 폭염에 지친 듯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개집도, 외양간도, 그 흔한 기름보일러로 구들을 개조하지도 않은 전형적인 방 네 칸짜리 시골 농가와 어우러지면, 삶 이전에 낭만이 되어버린다. 자신과 같은 삭막한 도시의 아이들이 보기엔 그렇다는 얘기다.

농가를 둘러싸고 있는 나지막한 담장도, 담장 한 귀퉁이 대문 구실을 하고 있는 사립문도, 앞마당에 설치된 수돗가며 평상들도, 모두 가난에 찌든 처절한 삶의 사투보다는 느긋한 관조와 여유를 먼저 느끼게끔 했다. 물론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모를 자신은 아니다. 이곳 보성의 늙으신 부모님들 또한 여느 빈농들 못지않게 제법 큰 농가 부채로 허덕이시는 것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같은 가난이라도 도시의 가난은 이렇게까지 풍요로운 정서를 전해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르다면 다르다고 할까. 사립문 밖, 탁 트인 평원을 이루고 있는 수천 평에 달할 논밭이며, 녹음이 무성한 마을 뒷산도 도시는 줄 수 없는 천혜의 재산일 것이다. 들이마시는 자체만으로도 생기가 스미는 맑은 공기는 물론, 뒷산으로부터 종종 불어오는 산바람도 도시의 에어컨 바람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신선한 사치였다.

보충 수업이 끝나고 개학을 하기까지의 나흘 남짓. 모처럼의 여유 시간을 윤열이 형의 시골집에서 보내기로 한 것은 지금도 잘한 결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윤열이 형 면회차 올라오신 보성 어머님께서 혜윤이에게 방학이니 보성 집에 놀러 올 생각이 없느냐고 운을 떼셨던 것이 계기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 혜윤이가 여섯 살이 겨우 되던 무렵의 일이었으니, 그저 지독한 가난의 기억밖에 없는 불쌍한 누이였다. 유치원 시절, 부모님과 함께 했던 여행의 기억이란 거의 남아 있지 않을 터였다. 녀석이 뛸 듯이 기뻐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엔 혜윤이만 내려 보내려다가 혜윤이의 신이 난 자랑을 전해들은 그가 함께 놀러가고 싶다는 애원을 해 결국 자신까지 따라나서게 됐다.

“……아버님께선 그럼 오늘 밤 안 돌아오시는 건가?”

역시 더위로 좀 나른해진 듯한 그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돌아보니 그가 그늘이 든 건넌방 툇마루에 앉아 자신을 굽어보고 있었다. 모기에 사정없이 뜯긴 왼쪽 종아리를 벅벅 긁고 있는 몸짓이 느릿하고 나른하기만 했다.

가무잡잡한 피부색은 안면도 바닷가에서 하루를 놀며 좀 더 까매진 것 같다. 무릎 바로 아래까지 내려오는 베이지색 건빵반바지에 황토색 반팔 면 티를 걸친 소탈한 모습이 유난히 앳돼 보인다. 드러난 종아리며 그 아래 검정 스포츠샌들이 신겨 있는 발도 꽤 마르고 왜소해서 성장기의 소년을 보는 것 같다. 보성 어머님께서 보자마자 자신의 후배냐고 물어보신 것도 이해가 간다. 드러난 팔과 다리는 물론 얼굴까지 곳곳이 모기의 집중 공격을 받아 온통 울긋불긋하다. 자신도 좀 물리긴 했지만 저건 혜윤이보다도 더 심각한 상황이다. 모기향 가지고는 어림도 없었던 모양이다. 볼 때마다 다리든 팔이든 얼굴이든 어느 한곳은 반드시 긁고 있는 그가 안쓰럽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그렇다.

“……예. 상가에 가셨으니 내일 저녁쯤에나 오시겠지요. 못 뵙고 올라가겠군요.”

“그렇구나. 좀 더 시간 여유가 있었으면 좋았을걸. 밭에 김도 더 매드리고 파도 더 다듬어드릴 수 있었을 텐데…….”

“아버님 부담돼서 별로 좋아 안 하세요. 그저 저희끼리 실컷 놀다 가는 걸 더 좋아하시죠. 게다가 선생님을 윤열이 형 은인이라고 생각하시기 때문에 더 그러실 거예요. 말수가 적으셔서 별로 표현은 안 하시지만요.”

“은인은 무슨……. 당신께서 신경 쓰신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너무 힘들어 보이시니까 좀 그래, 위야. 농사일이 힘들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가까이서 보니 정말 어마어마하더구나. 나 반성 많이 했다. 밥 함부로 남기고 그런 거.”

“후, 그러세요……?”

“그렇게 힘들게 일하시는데 옆에서 철없이 못 놀겠더라구…….”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농활도 아니고 휴가차 오신 건데요. 요즘 열심히 그림 그리시잖아요. 선생님께서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시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야…….”

“……덥지 않으세요? 냇가 가서 붕어나 잡아 올까요?”

“우앗!!! 저…… 정말?!!!”

계속 찜찜한 안색의 그를 생각해 미끼를 던지니 아니나 다를까, 단번에 덥석 물고 만다. 나른했던 표정이 갑자기 싱싱한 활기로 넘친다.

힘든 농사일을 가까이에서 보고 쇼크도 받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 4박5일에 걸친 시골 여행의 즐거움에 푹 빠진 그였다. 보성 도착 첫날, 아버님께서 냇가로 나가 그물로 붕어 잡는 법을 가르쳐주시자 그는 단번에 붕어 사냥 마니아로 변신했다. 펄펄 뛰는 붕어를 잡아 망에 넣는 것도, 얼음장처럼 찬 냇물에 몸의 열기를 식히는 것도, 어머님께서 고춧가루와 마늘을 듬뿍 넣고 조려주신 붕어찜을 실컷 먹는 것도 모두 그의 생생한 즐거움이 되었다. 지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텃밭의 잡초를 뽑거나 옥수수를 따서 쪄 먹는 일, 아버님께서 뒷산에 설치해두신 벌통에서 꿀을 따 맛을 보는 등등의 놀이에도 흠뻑 빠진 것은 물론이었다. 역시 함께 놀러 오길 잘했다고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예. 광에 가서 그물과 망태기 찾아볼게요. 선생님께선 돗자리 좀 챙겨주시겠습니까? 멱 감으실 거면 수건과 갈아입을 옷도 챙기시구요.”

“오케이!!!”

콩 튀듯 일어나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품새가 중학교 2학년인 혜윤이와 한 치도 다르지 않아서 웃음이 났다.

7월 말부터 지금까지 근 3주간을 ‘친구’로서의 위치에 머물며 자신을 대하고 있는 그였다. 그동안 ‘친구 연습’이라는 명목의 플라토닉한 데이트를 다섯 차례쯤 가졌었다. 만남 시간으로 쳐도 매춘 계약을 맺은 시간과 거의 비등할 주당 아홉 시간 정도였고 지정한 계좌로도 꼬박꼬박 대금이 입금되고 있는 걸로 치면, 아직은 명백히 ‘친구’로서의 만남은 아닌 셈이었다. 그러나 분명 예전과 동일한 ‘고객과 남창의 관계’가 아닌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영화를 보러 가고, 놀이동산에 가 놀이기구란 기구는 다 섭렵하고, 교외로 피크닉을 가고, 오락실에 가서 오락도 하고, 유일하게 그의 아틀리에에서 가진 ‘친구 연습’에서는 만화책을 산더미처럼 빌려다 함께 보고 라면을 끓여 먹은 다음 헤어졌다. 당일 코스로 안면도 꽃지 해수욕장에 가서 함께 수영도 하고, 멋진 일몰 구경을 한 뒤 돌아오기도 했다.

물론 그 모든 만남에서 섹스는 당연히 배제가 되었다. 키스는커녕 손을 잡거나 어깨동무를 하는 단순한 신체 접촉조차 거의 드물었는데, 그 드문 몇 번의 케이스도 위 자신 쪽에서 반강제를 하다시피 일방적인 접촉을 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저 일주일에 한두 번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는, 지극히 건전한 ‘친구’로서의 만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의 자신에 대한 사랑을 알고 있고, 또 그의 성욕에 대해서도 손바닥처럼 훤한 자신으로서, 그의 그러한 일련의 변화들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에서도 그 어떤 성적인 욕망을 읽는 일은 거의 드물었다. 아주 가끔, 자신의 얼굴을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볼 때가 있는데, 그때조차도 육체적인 욕망보다는 어떤 애절한 감정선만을 선연하게 느꼈을 뿐이었다.

정말로 자신에 대한 마음을 접은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완벽한 ‘친구’의 모습에, 위는 묘하게 착잡하면서도 애틋한 고마움을 품고 있었다.

외적으로 보이는 그대로, 그렇게 쉽게 그의 감정이 정리가 됐을 거라고는 생각되질 않았다. 비록 에로스적인 사랑의 감정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잘 알지는 못하지만, 자신도 그 정도쯤은 짐작을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로서는 아직 ‘노력’ 내지는 ‘연습’을 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노력’으로, 혹은 ‘연습’으로 그렇게까지 완벽히 정리된 모습을 보여주려면 그는 도대체 지금 얼마만큼의 피나는 의지를 세우고 있다는 말인가.

생각해보면 씁쓸한 일이었다. 몹시 안쓰럽고 가슴이 아픈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정도로 힘들게 노력을 기울이는 그가 가슴이 떨릴 정도로 고마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야, 그 모든 시도가 자신과의 완전한 이별을 피하기 위한 이기적인 동기에서 나온 것임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자신 역시 그와 이별을 하고 싶지 않은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에 대한 깊은 우정은 윤열이 형의 구속과 재판을 거치면서 더 이상은 끊어내기 힘들 정도의 애정과 유대감을 선사해주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그토록 힘들었던 암흑의 시기를 제대로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를 절대로 잃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2주 후에 그와 끊어질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은 깊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그랬다. 그의 노력이 성공을 하느냐 혹은 실패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희비 또한 엇갈리게 된다. 어떻게 안쓰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어떻게 고마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이별까지의 시한은 고작해야 이제 2주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 2주 안에 그의 마음이 완전히 정리될 리는 물론 없을 터였다. 그러나 이렇게 필사적으로 노력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가능해질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시간이 알아서 자연스럽게 해결을 해줄지도.

물론 어떻게 해도 불가능하고, 시간으로도 해결이 날 사정이 아니라면, 그 모든 게 단지 자신의 희망 사항에 불과할 뿐이라면, 그야 어쩔 수 없이 아픔을 감수해야만 할 것이다. 그를 위해서라도 관계를 끊지 않으면 안 될 터이다. 그와는 다른 의미로 자신 역시 가슴이 찢어지긴 할 테지만 말이다.

“아예 점심거리 싸 갖고 가는 게 어때, 위야? 어차피 어머님이랑 혜윤이도 늦으실 거 같은데…….”

의기양양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돌아보니 그가 돗자리 가방과 옷가지가 든 쇼핑백을 들고 서 있었다.

가무잡잡하게 탄 피부에 아버님의 챙 넓은 밀짚모자까지 쓰고 있으니 영락없는 시골 소년이다. 완전히 피크닉 분위기까지 내고 있는 그의 눈은 별이 들어앉은 것마냥 번쩍번쩍 빛을 내고 있다. 아아, 정말 귀엽다, 이럴 때의 그는. 이래가지고 어떻게 스물여섯 살일 수가 있는지,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럴까요? 하긴 오늘 꽤 더울 것 같습니다. 여간해선 물에서 나오고 싶을 것 같지 않네요.”

“그렇지, 그렇지?!”

“후후, 여기 계세요. 부엌에 들어가서 대강 도시락을 싸보겠습니다.”

“응! 오케바리!!!”

결국 도시락까지 싸서 마을 어귀에 있는 냇가로 피크닉을 가게 되었다. 즐거운 외출이 될 게 뻔했으므로 자신의 기분도 어느덧 조금씩 들뜨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장소에서 좋아하는 친구와 좋아하는 놀이를 한다. 지난 한 달간의 데이트도 모두 그랬지만 보성에서의 4박5일은 그 어떤 데이트보다도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 같았다.

보성 아버님께서 빠진 붕어 사냥은 역시 그리 신통치가 못했다.

한 시간 넘게 허벅지까지 오는 거센 물살을 가르며 용맹정진을 해보았지만, 어설픈 도시 촌놈 둘에게 쉬이 잡혀줄 호락호락한 붕어들은 별로 없었다. 결국 오후를 기약하며 거의 피라미에 가까울 새끼 붕어 대여섯 마리가 든 망태기를 끌고 물 밖으로 나와 점심을 먹었다.

밥과 김치와 풋고추와 된장이 전부인 소박한 도시락은 맑은 공기와 오염되지 않은 자연 아래서 먹는 것만으로도 꿀맛이 따로 없었다. 평소 양보다 배는 족히 넘을 밥을 몽땅 비우고 다시 붕어 사냥에 달라붙었다.

식사 전보다는 좀 더 성과가 있는 편이었지만 역시 만선(滿船)과는 거리가 멀었다. 결국 망태기의 반도 채우지 못하고, 지친 도시 촌놈들은 두어 시간 만에 사냥을 포기했다. 하긴 성과가 무슨 의미가 있으랴. 붕어 따위야 잡히든 말든, 그저 그렇게 동심으로 돌아가 노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수확인 것을.

사냥을 포기하고는 팬티만 걸친 채로 본격적인 멱을 감았다. 반경 50여 미터 이내에서 수심이 가장 깊은 곳이라봤자 허벅지 중간까지밖에 안 오고, 수심이 깊은 하류는 물살이 꽤 세서 수영을 하기엔 위험했기 때문이다.

운동엔 영 소질이 없을 것 같은 그도 수영은 꽤 잘하는 편이다. 그건 안면도에 가서도 확인한 사실인데, 잘하는 것이다 보니 좀 만용이 지나친 감이 있었다. 멱을 감다가도 자신이 잠깐 한눈을 팔면 어느새 물살이 센 하류까지 헤엄쳐 가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부랴부랴 쫓아가 잡아 오기를 몇 번, 마침내 네 번째로 그를 쫓아가 겨우 붙잡았을 때는 정말 철렁해서(거의 급류에 휩쓸리려는 것을 간신히 붙잡았다!) 진심으로 화를 내고 말았다. 표정을 굳히고 냉랭하게 나무라자 겨우 진지한 얼굴로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잠깐 동안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가 싶더니 얼굴에 물을 끼얹으며 이내 장난을 걸어오긴 했지만 말이다.

싱그러운 웃음소리를 사방에 날리며 어린애 같은 장난을 치는 그에게 언제까지고 화를 낼 수도 없어서 그냥 웃고 말았다. 좀 울컥한 기분이 들기도 해서 자신도 그의 얼굴에 마구 물을 뿌려주었다. 헤드록을 걸어 물속에 얼굴을 빠트리기도 했다. 힘에 있어서는 자신을 당해낼 수가 없으니 피눈물(!)을 흘리며 항복을 한 것은 물론이었다. 비명을 지르고, 웃고, 위협을 하고, 마침내 육탄전에 돌입해 서로를 향해 물대포를 발사했다. 서로의 몸에 부딪친 물폭탄들이 가루로 부서지며 사방으로 영롱한 빛을 반사했다. 머리카락 한 올까지 온통 젖은 그는 자지러지고, 그 뒤로 도도하게 흐르는 냇물은 반경 20미터 폭을 이루는 곳에서 오색찬란한 무지개를 만들고 있었다. 무지개 너머엔 녹음 짙은 산등성이들이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 안고 있었다. 그와 냇물과 산자락들이 함께 어우러져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물대포를 쏘는 척하면서 한동안 넋을 잃고 완벽한 아름다움을 만끽했다. ……아, 행복하다…… 행복하구나…… 하고 무심코 뇌까리는 스스로에게 소스라치기도 했다.

“……지…… 지쳤다…… 휘유∼∼∼ 나, 항복…….”

정말 지쳤는지 해죽거리는 웃음을 매달고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파랗게 질린 입술을 보니 체온도 어지간히 식은 모양이었다. 한 시간 이상을 물속에 있었다는 걸 비로소 깨닫고 부랴부랴 기슭 쪽으로 물살을 헤치고 나왔다. 좀 더 헤엄을 치고 싶었지만 자신이 움직여야만 따라서 움직이는 그라 어쩔 수 없다. 여름 감기는 더 조심을 해야 한다. 그는 잔병치레도 좀 하는 것 같으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산기슭 아래 넓게 펼쳐져 있는 소나무 숲 베이스캠프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맨발에 닿아오는 조약돌의 뜨거운 감촉에 놀라 손에 들고 있던 스포츠샌들을 마지못해 신었다. 흰색 면 팬티 바람에 샌들만 신은 몰골이 우스운지 뒤쫓아 오는 그가 연신 킥킥대며 웃는다. 돌아보지만 그의 몰골 또한 자신과 한가지다. 파란색 줄무늬 트렁크라 좀 더 화려하고 컬러풀하다는 게 다를 뿐, 그래봤자 팬티지 뭘.

붕어가 든 망태기와 그물을 전리품처럼 들고 있는 그를 보고 비로소 사냥 사실을 기억에 떠올렸다. 후후. 붕어 사냥 따위엔 이미 관심도, 흥미도 사라진 자신에 비해 그는 역시 붕어에 대한 집착이 꽤 큰 모양이다.

베이스캠프에 설치한 돗자리에 도착해 몸을 닦고 옷을 주워 입었다. 미처 갈아입을 팬티를 가져오지 않아 속옷 없이 맨몸에 반바지와 티셔츠를 걸치니 좀 기분이 묘하다. 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털고 있는데, 곧이어 도착한 그도 돗자리 위에 펼쳐진 쇼핑백에서 수건과 속옷을 꺼낸다.

무심코 그를 향해 시선을 가져갔다가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등을 돌린 채로 트렁크를 벗어젖히는 그의 몸짓에, 아랫배로 저릿한 감각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물방울이 뚝뚝 듣는 젖은 나신이 보였다. 전체적으로 꽤 마른 몸매가 새삼 자각된다. 어깨와 등줄기와 도드라진 등뼈, 그리고 몹시 유연해 보이는 엉덩이 근육이 돌진하는 것처럼 시야에 밟혔다. 홀린 듯이 그의 엉덩이를 핥고 있는 자신의 시선이 느껴졌다. 속수무책인 기분이 들면서 사타구니 사이가 뿌듯해지고 있었다. 맙소사, 무슨……! 허리를 약간 아래로 굽히더니 한쪽 다리를 들어 팬티를 입는다. 실룩…… 하며 둥글게 굴곡이 진 한쪽 엉덩이도 따라서 위로 조금 올라갔다. 두근…… 사타구니 틈으로 그의 거무스름하게 핏기를 잃은 생식기 끝이 살짝 비쳤다. 그가 동작을 취함에 따라 그것은 마치 살아 있기라도 한 것마냥 작게 출렁거리길 반복했다. 두근…… 두근…… 두근…… 뭔가 위험하다는 자각을 할 경황 따윈 없었다. 영원처럼 긴 것만 같던 찰나의 순간이 지나 위태롭게 심장을 죄던 그의 엉덩이는 베이지색 트렁크 속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바로 몸을 돌려 소나무 숲 안쪽으로 뛸 듯이 걸음을 옮겼다.

“……어? 어디 가니?”

“……볼일 좀…….”

잠시 후에 날아든 부름에 무턱대고 대꾸를 흘렸다. 심장이 북소리처럼 요란스레 뛰고 있었다.

“후후, 거기서 오른쪽으로 돌면 커다란 바위 하나 있더라. 나두 그 뒤에 가서 실례했으니까, 참고해라, 위야.”

무심한 말투에 사타구니는 더더욱 부풀어 걷잡을 수가 없을 지경이 되었다. 맙소사, 젠장. 그러고 보니 한 달 가까이 섹스를 하지 않았다. 여자들에게 몸을 판 3년 남짓, 이렇게 긴 휴식 기간은 없었다. 욕구 불만이 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손 쳐도…….

겨우 바위 뒤에 도착해, 정신없이 바지를 내리고 움켜쥐었다. 신음 소리가 흘러나올까 봐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문 채 빠르게 마사지했다.

짧고, 강렬하고, 거친 분출이었다. 오르가슴 또한 괴로울 지경으로 격렬하게 왔다. 서서 훑어 올리다가 분출과 동시에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간신히 무릎을 꿇은 자세로 여파를 견뎠다. 경련하는 것처럼 온몸이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짐승……. 심한 자괴감과 수치심이 밀어닥쳤다. 아무리 좀 쌓였기로서니……. 짐승, 짐승, 짐승……. 스스로를 향해 거듭 사나운 욕설을 뱉으며 가까스로 몸을 추슬렀다. 냇가로 다시 나가 더러워진 손을 씻었다. 그나마 뽑아냈으니 더 이상 곤혹스러울 일은 없을 것이다. 젠장, 짐승 같으니……. 그에게 면목이 없어 한동안 얼굴을 벌겋게 익힌 채 수면 위를 굽어보았다. 수면에 반사되어 부서지는 햇빛이 물고기 비늘처럼 투명했다.

돗자리로 돌아와보니, 그는 대자로 뻗어 잠이 들어 있었다. 다행이었다. 여전히 그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어 주변 산등성이를 한참 동안 어슬렁어슬렁 산책했다. 겨우 진정이 된 ‘짐승’을 끌고 돌아와 그의 곁에 눕혔다. 새근새근 단잠을 자는 그의 숨소리가 정겹다. 팔베개를 하고 유유자적 행복감을 만끽했다.

하늘은 파랗고, 뭉게구름은 하얗고, 햇빛은 눈이 부실 지경으로 영롱하고, 굽이굽이 펼쳐져 있는 마을 뒷산의 능선들은 암녹색 녹음으로 무성했다. 대기는 세상을 태워버릴 기세로 뜨겁지만, 뒷산 계곡을 타고 내려와 마을 어귀를 휘돌아 나가는 맑은 물줄기는 소리마저도 시원스러웠다. 무성하게 우거진 소나무 숲 그늘 아래 펼쳐진 돗자리는 하늘을 나는 신드바드의 양탄자도 부럽지 않았다. 낙원 같았다. 낙원에 온 것만 같았다. 정말 무릉도원이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마을이라고 해야 60대 이상인 늙은 촌부 열댓 명만이 인구의 전부인 곳이었다. 사람의 흔적이라곤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풍경도 비현실적인 낙원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더욱 강하게 했다.

설핏 느껴지는 한기에 품 안의 따스한 것을 팔을 감아 끌어당겼다. 자신도 모르게 힘을 주자 품 안의 것이 더더욱 안으로 파고들며 온기를 더해주었다. 입술 언저리를 간질이는 것에 비몽사몽 흐려졌던 의식이 돌아왔다. 자신도 어느새 깊이 잠이 들었었던가 보았다.

눈을 뜨고 주변을 살폈다. 입술 언저리를 간질이는 것은 그의 머리카락이었다. 품 안의 따스한 것은 물론 그의 몸이었다. 등 쪽으로 여전히 느껴지는 설핏한 한기는 해가 많이 기울어 기온이 약간 떨어진 탓이리라. 시계를 차고 오지 않아 정확한 시각은 알 수 없지만 5시쯤은 된 것 같았다.

그도 한기를 느꼈는지 자신의 몸에 찰싹 달라붙은 채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를 깨워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무심코 그의 등줄기를 쓸고 있던 자신의 오른손을 자각하곤 소스라쳤다. 심장이 또 철렁 내려앉았다.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잠이 달아난 것은 물론이었다. 어느새 바짝 일어선 물건이 끌어안은 그의 허벅지 부근을 쿡쿡 쑤셔대고 있었다. 놔줘야 한다고, 그를 깨워야 한다고 이성이 외치고 있었다. 쓰다듬는 짐승의 손길을 당장 거두라고, 잔뜩 화가 나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떤 명령도 도무지 따를 기력이 없었다. 부지불식간에 생긴 일이었다. 교통사고였다. 몽롱한 잠에 취해 뭐가 뭔지 이해하기도 전에 몸이 반응을 해버린 것이다. 이성을 챙기기엔 그의 몸은 이미 너무 가까이 밀착해 있었다.

가슴이 뛰었다. 후끈한 열기가 단숨에 한기를 몰아내며 전신을 달궜다. 손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어깨를 쓰다듬고 뺨을 어루만졌다. 가무잡잡하게 탄 갸름한 이목구비를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섬세하면서도 귀여운 선을 그리는 입술은 그것보다 더 오래 바라보았다. 가슴이 떨렸다. 당장이라도 어떻게 하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마침내 입술을 포갰다. 혀끝으로 살짝 더듬었다가 이윽고 힘을 주어 벌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촉촉하고 뜨거운 감촉에 짜릿한 전율이 척추를 스치고 정수리 위까지 뻗쳤다. 아아, 정말로 그리운 감촉이었다. 그간 이것에 얼마나 굶주렸던가, 새삼 부서질 것 같은 자각이 왔다. 정신없이 몰입했다. 흐느끼는 듯한 그의 신음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바닥에 힘없이 늘어져 있던 그의 손이 자신의 허리를 감아 들이는 것을 느꼈다. 말랑하게 늘어져 있던 그의 혀도 농후하게 얽히며 자신의 것을 애무했다. 그 기분 좋은 감촉에 몸서리가 쳐질 지경이었다. 저절로 허리가 흔들리더니 그의 허벅지 사이에 막무가내로 문질렀다. 뜨뜻한 애액이 귀두 끝을 아프게 자극하며 줄줄 흘러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흐…… 웃……! 안…… 위……?!”

착 감겨오던 기분 좋은 몸뚱이가 문득 뻣뻣해졌다. 갑자기 뒤로 사납게 몸이 떠밀리는 바람에 위는 바로 돗자리 근처에 있던 소나무 밑동에 뒷덜미를 세차게 부딪치고 말았다. 얼얼한 아픔보다도 느닷없이 단절된 욕망으로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자신을 내치느라 앞으로 뻗어온 양손을 거칠게 움켜쥔 뒤 바닥에 밀어붙였다. 버둥거리는 몸을 바닥에 깔고 자신의 체중을 이용해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한 것은 물론이었다.

“……위?!! 위위!! ……! 하지……! 하…… 흡!!!”

재빨리 입술을 겹친 뒤 뚫고 들어갔다. 다급하고 초조했다. 용서할 수 없었다. 이 몸에 달라붙는 걸 방해하다니……! 이 몸……! 따스하고 기분 좋은 이 몸……! 촉촉하고 사정없이 조이는…… 조이는…… 조이는…….

어깨가 떠밀려서 짜증이 난다. 머리카락이 사납게 쥐어뜯기는 아픔에 난폭한 기분은 더해만 간다. 한계까지 발기한 페니스가 저린 나머지 견딜 수가 없다. 어디든 박고 싶어서 미칠 것 같다. 왜. 왜. 어째서. 어째서 박으면 안 되지? 왜? 왜? 왜? 왜? 왜?!!!!!!!!

“……그만…… 윽……! 그만해……! 읍……! 훕……! 위…… 그…… 위야, 그마안!!!!!!!!”

비참한 울부짖음이 귀청을 찢을 듯이 달려들었다.

짜악!!!!!!

눈앞에 번쩍 불꽃이 일며 뺨이 옆으로 돌아갔다.

눈을 번쩍 떴다.

새하얀 빛이 가루처럼 부서지며 시야 가득 달려들고 있었다.

심장이 탱크처럼 요란한 진동을 흘리며 격하게 뛰고 있었다. 헉헉대는 호흡은 턱 끝까지 차올라 있었다. ……무슨……? 번개를 맞은 것처럼 쇼크가 왔다. 저절로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이 느껴졌다.

“……왜…… 왜 그래…… 너…… 너…… 나는…….”

감정이 복받치는 듯 울먹이는 그의 목소리에 비로소 제정신이 들었다. 단숨에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젠장!!!!!!

“……죄…… 죄송해요…… 죄송해요, 선생님. 죄송해요…….”

“…….”

“……자다가……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죄송합니다…… 오랫동안 안 해서…….”

“…….”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정말 죄송…….”

“…….”

선 채로 등을 돌리고 있어 그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간신히 울음을 참고 있는 듯한 기색은 손끝까지 선명하게 전해졌다. 괴로움에 가슴이 찢기는 것만 같았다.

여전히 가쁜 호흡을 가까스로 가누며 위는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흐르는지 찝찔한 쇠 맛이 느껴졌다. 다리도 손도 여전히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지만 그토록 광포하게 몰아쳤던 욕구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페니스는 단숨에 풀이 죽어 있었다.

바람이 불어왔다. 산바람이었다. 붉게 달궈졌던 얼굴이 섬뜩할 정도로 서늘하게 느껴졌다. 채찍질 같았다. 자신을 때리는 질책의 소리 같았다. ……개자식…….

확연히 서쪽으로 기운 해가 소나무 숲 사이로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환장했던 열기의 허망함과 부끄러움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것만 같았다. ……개자식……. ……개자식…….

이런 기막힌 짐승이 있을 수가 없다. 자신을 증오한다는 것조차도 가증스럽기만 했다.

“……담배…… 한 대 피울게…….”

한결 평온해진 목소리가 살며시 전해진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고, 라이터 켜는 소리가 나고, 이윽고 싸한 담배 향이 천천히 코끝으로 다가들었다.

담배를 다 피우는 5분 남짓할 동안 부스럭거리는 소리조차 없다. 미동도 하지 않는 모양이다. 얼음땡이 된 건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보가. 자위라도 좀 하지.”

흠칫.

툭하니 던져진 농담조에 심장도 뚝하니 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사람 곤란하게…… 다신 그러지 마. 또 한 번 그랬다간 따귀 한 대로 안 끝나는 줄 알아…….”

온화한 목소리에 서린 장난기에 마치 머리를 쓰다듬는 듯한 상냥한 배려를 느꼈다.

“……하긴 나도 좀 미안하네……. 네 성욕 처리도 그동안엔 고객들 안는 걸로 대신했을 텐데…… 괜히 나 때문에 욕구 불만이로구나, 요즘…….”

“…….”

“……서로 미안한 거 쌤쌤이니까 오늘 일은 잊자. 오키?”

“…….”

“잊는 거지?”

“…….”

“……야, 얼굴 좀 보자, 문위. 때렸다구 삐졌냐?”

“…….”

“위야…….”

“…….”

간절한 애원에 마지못해 몸을 돌렸다. 차마 얼굴까진 볼 수 없어 약간 시선을 비낀 채 그의 시선을 견뎠다. 어린애처럼 무릎을 괴어 앉은 자세로 그는 고개를 약간 기울여 자신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부드럽게 웃는 표정이 느껴진다. 보지 않아도 느낌만으로 알 수가 있다. 그렇다. 느낌만으로 서로의 표정을 읽을 수 있을 만치 이렇게 가까운 친구다. 소중한 ‘친구’인 것이다. ……개자식…….

“……아아, 그렇게 불퉁한 얼굴 하면 무섭잖아…… 꼭 처음 만났을 때 같네…….”

“…….”

“……찬바람 씽씽, 독설 난무. 지는 헤테로고 난 게이라고 짱 무시하고…… 꼭 그때처럼 무섭다, 야…….”

“…….”

“……무섭다니까아안∼∼∼?”

“…….”

“위야아아앙∼∼∼.”

“…….”

“위위이이잉∼∼∼?”

고개를 갸우뚱 갸우뚱, 필살 애교를 날리는 귀여운 얼굴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웃고 말았다. 씁쓸하고 허탈했다.

이 사람은 지나치게 관대하다. 이래서는 싸움이 되지 않는다. 싸움 안 하는 ‘친구’란 없다. 싸움을 해야 진짜 ‘친구’다. 그러니 그에겐 아직 자신이 ‘친구’가 아니란 얘기다. 아직 ‘연인’이라는 얘기다.

자신에겐 그가 소중한 ‘친구’인데, 그에겐 자신이 여전히 ‘친구 연습’ 중인 ‘연인’이다. 그런 그에게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려고 한 거다. ‘친구’의 몸을 이용해 순간의 욕구를 해소하려고 한 거다. 처절하게 ‘친구 연습’ 중인 ‘친구’에게 제 쪽에서 먼저 더러운 흙발을 디밀려 했다.

“……집에 가자, 위야. 혜윤이랑 어머님 돌아오셨을지도 모르겠다.”

미소를 보여주자 비로소 안심한 듯 애교를 거두며 조용하게 웃는다. 어린애처럼 무릎을 괴고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주섬주섬 돗자리를 걷고 도시락통과 쇼핑백을 집어 든다.

“붕어랑 그물은 니가 들어? 응∼?”

애교 섞인 목소리로 붕어를 챙기길 다짐시킨다. 뭐든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까 보냐. 더한 걸 시켜줬으면 좋으련만 고작 붕어 십여 마리가 든 망태기와 비린내가 풀풀 풍기는 낡은 그물망 챙기기다.

소중한 보물단지라도 되는 양, 두 손에 망태기들을 끼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터덜터덜 앞서가는 그의 뒷모습을 그제야 조심조심 눈에 담는다. 소박한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이 보인다. 처음 만났을 무렵의 빈틈없는 멋쟁이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그만큼 서로 친밀해진 관계를 의미하는 것도 같아 마음이 따스해진다. 샌들을 신은 앙상한 종아리 한쪽이 살짝 절뚝이는 모습이 애처롭다. 전체적으로 소년처럼 마른 몸도 애틋하다. 새까만 머리는 단발에 가까울 정도로 길게 자라 부드럽게 찰랑거린다. 가무잡잡하게 햇볕에 탄 피부 곳곳이 모기 물린 자국으로 가득하다. 마치 키스마크 같다고 생각한다. 두근…… 다시금 슬며시 다가든 위험한 기분에, 위는 입술을 깨물곤 세차게 도리질을 했다.

정말 제정신이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험한 욕설을 한다. 빨리 서울로 올라가 누구든 안아야겠다고 필사적으로 생각도 깨문다. 내일로 예정된 귀향 일정을 비로소 다행이라 여긴다. 단 몇 시간 전만 해도 죽을 때까지 여기서 살고 싶다고 소원을 빈 자신이 가소롭기까지 하다. 역시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자 변덕의 화신이 아닐 수 없다.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개자식…… 미쳤어…… 정말 제정신이 아니야…….

해가 지고 있었다. 산이 가까운 마을은 해가 일찍 지는 것 같다. 계절도 빠른 느낌이 드는 것은 물론이다. 여름의 절정이었지만, 위는 곧 닥치게 될 가을을 막연히 예감하고 있었다. 어쩌면 추위도 이미 감지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산허리로 길게 늘어진 불그스름한 그림자가 그의 뒷모습을 영롱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짐이 많은데 혼자 가실 수 있겠어요?”

“많아봤자 택시 타면 그만인데, 뭘. 오히려 니들이 걱정이다, 난. 어머님께서 그렇게 이것저것 많이 싸주셨으니…… 하하, 혜윤이 힘들어서 죽으려고 그러네?”

“헤헤, 그래도 좋아요, 선생님. 고춧가루도, 참기름도, 찹쌀도 다 무지 비싼 것들인걸요. 게다가 여기서 사 먹는 거랑은 비교도 안 되게 맛있잖아요.”

“야아, 역시 만만치 않은 살림꾼이야, 울 혜윤이! 아무튼 오늘만은 택시 타고 들어가라, 응? 하루 종일 고속버스에 시달리고 와서 엄청 피곤할 거야.”

“에이, 오빠 같은 구두쇠가 택시 타면 해가 서쪽에서 뜨게요?!”

“그냥 타고 가, 위야. 혜윤이 정말 힘든 거 같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내 차로 내려갔다 오는 건데…….”

“예, 선생님. 그럴게요.”

“에에? 진짜야? 진짜 택시 탈 거야, 오빠?”

“그래. 오늘은 많이 힘들었으니까 타고 가자. 짐도 많고.”

“얏호!!!”

“시끄러워…….”

“하하…… 잘됐다, 혜윤아. 나도 안심하고 들어갈 수 있겠네?”

“……그럼 들어가세요, 선생님. 전화 드리겠습니다.”

“응, 그래. 조심해 들어가고…….”

“선생님, 빈차 왔어요. 빨리요!”

“어어! 그래, 그럼 먼저 간다?!”

코앞으로 다가든 택시 뒷좌석에 그가 올라타자마자 곧 택시가 출발했다. 순식간이라 그의 얼굴을 살피고 눈인사를 나눌 틈도 없었다. 하긴 지금 자신의 상태로선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연이어 택시 정류장으로 밀려드는 빈 택시를 잡아타고 자신도 혜윤이와 함께 집으로 직행했다. 하필 일요일에 귀경 버스에 올랐으니 고속도로에서 시간을 버린 것도 당연했다. 어느 정도 각오는 했지만 맙소사, 새벽 일찍 출발했는데도 불구하고 터미널에 도착하니 오후 5시가 넘어 있었다. 바캉스를 끝내고 귀성하는 인파들과 겹쳐 무려 열 시간 가까이를 시달린 셈이다. 다행히 서울은 소통이 원활해서 터미널에서 집까지 가는 데 채 30분이 걸리지 않았다.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뻗어버리는 혜윤이를 대신해 짐들을 풀고, 샤워를 하고, 방바닥에만 착 달라붙으려는 혜윤이를 깨워 저녁을 먹였다. 책 배낭에 교과서와 공책들과 체육복을 집어넣고 무언가 빠진 것이 없나 곰곰이 생각했다. 개학은 내일이었다. 학력고사까지 얼마 남지 않았지만 성적에 대한 불안감은 전혀 없었다.

깨끗이 세탁돼 있는 교복도 아침에 바로 입고 나갈 수 있게끔 챙기고, 현준 형 집에 전화를 걸어 휘의 안부까지 살피고 나니 벌써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시곗바늘은 7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장롱에서 가장 그럴듯한 모양새의 외출복을 꺼내 갈아입고 바로 집을 나섰다. 잔뜩 졸린 눈으로 어딜 가냐고 묻는 혜윤이에게 늦게 들어올 테니 문단속 잘하고 먼저 자라는 다짐을 주었다. 버스와 전철을 번갈아 갈아타고 한 시간여 만에 압구정역에 도착했다.

지하 보도에 한참 동안 서서 기억을 더듬었다. 가장 옛날에 들렀던 나이트가 있는 출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렌지족들이나 돈 많은 연예인들이 많이 오는 나이트로 기억된다. 연봉이 높은 전문직 종사자들도 물론 많이 오는 곳이다. 연령대는 대개 20∼30대 초중반. 연령대가 좀 더 높은 층을 선택할 수도 있지만, 자신 쪽에서도 어느 정도 호감을 느끼지 않으면 잘 발기가 되지 않는 것을 안다. 딱히 너무 큰 부자일 필요도 없다. 그저 회당 20만 원의 액수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이면 충분하다.

현란한 입간판이 붙은 깨끗하고 호사스러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나이트는 건물의 최상층인 11층에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잠시 후에 나이트에 도착했다. 입구의 웨이터가 품평하는 눈길로 단숨에 자신을 살핀다. 호쾌한 인사말과 함께 바지 주머니에 웨이터의 명함이 꽂히는 데는 단 1분도 걸리지 않는다. 제법 괜찮은 용모를 가지고 태어나길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 어떤 물에서도 푸대접을 받아본 기억은 없기 때문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150여 평에 달할 꽤 넓은 홀이 시원스럽게 눈앞에 펼쳐진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사람들은 그리 많이 눈에 띄지 않는다. 현란한 사이키 조명과 귀를 찢는 록 비트로 실내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다. 통로를 걸을 때부터 벌써 끈끈한 몇몇 시선들이 느껴진다. 웨이터가 안내하는 대로 테이블을 찾아가 앉았다. 술 따윈 질색이지만 고객을 헌팅 할 때에는 어쩔 수 없다. 가장 무난한 맥주를 일단 주문했다.

한동안은 도도하게 자리를 지켰다. 맥주 한 병쯤을 비우고, 시선들이 초조감을 느낄 때쯤 스테이지에 오른다. 그 이전에 들어오는 부킹 신청은 무조건 거절해야 한다. 비싸 보이고 갖기 힘들다고 판단이 들어야만 인간은 더더욱 달아오르게 마련이다. 수많은 고객들을 거치면서 터득한 노하우였다.

육감적이면서 천박하지 않게, 철저하게 계산된 동작을 취한다. 몸을 훑는 시선들이 더 많아졌다. 그를 안게 되고부터 사내들의 시선도 심심찮게 자각되곤 한다. 경험은 그만큼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는 법이다. 물론 더 이상 남자를 고객으로 두고픈 생각 따윈 없다. 역시 그리 건전한 게 아니라는 판단이 들기 때문이다. 만약 또 그처럼 깊은 우정을 느끼게 될 경우, 1년 후가 골치 아플 것이다. 바로 요즘의 자신처럼. ‘친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그 한 사람만으로 족하다.

20분쯤 뛰고 스테이지에서 내려와 다시 맥주를 마셨다. 웨이터가 부지런히 오가며 부킹을 주선했다. 역시 30분쯤은 더 무조건 튕겨낸다. 그사이 스테이지에도 한두 번 더 오르내리며 강도를 높인 스텝을 밟는다. 시선들의 욕망이 피크에 올랐다는 것을 느낀다. 10시가 넘어 실내도 초만원이다.

진지하게 부킹 상대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얼굴도 몸매도 그럭저럭 괜찮고, 돈에 구애받는 것 같지도 않고, 되도록 쿨해 보이는 상대를 물색해야 한다. 세 번을 튕겨낸 끝에 조건에 걸맞은 괜찮은 여자를 하나 발견했다. 친구와 둘이 온 것 같았지만 여자가 욕망에 빠지면 의리 따윈 물거품이라는 것도 안다. 오케이 사인을 웨이터에게 던지자 잠시 후, 여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여자의 눈동자를 똑바로 주시한다. 꽤 긴장한 듯한 기색이 느껴진다. 여자는 웃고 있었다. 20대 후반. 탱크톱에 민소매 레이어드. 블루진. 167센티. 48킬로그램. 오렌지가 아닌 전문직. 나쁘지 않다. 좀 더 골라볼까 하다가 그냥 낙착을 내린다.

“……앉아도 되죠?”

목소리도 그럭저럭.

“예.”

여자의 눈을 휘어잡고 놓지 않는다.

“……통할 줄 몰랐는데…….”

“…….”

“……매번 거절하시길래 누구 따로 상대가 있나 했어요…….”

“…….”

“……아, 이런. 정말 떨리네…… 하하…….”

“…….”

“……통성명부터 할까요? 전 이가은이에요. 그쪽은?”

“……문위…….”

“……네……?”

“……문위. 외자 이름입니다. 성이 문 씨고 이름이 위입니다.”

“우아, 멋지다……!”

“나갈까요?”

“에…… 예?”

“나가시죠. 시끄러워서 얘기를 할 수가 없군요.”

“!!!”

여자의 눈에 놀라움이 비친다. 하긴 아직 10시다. 노는 건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할 여자이니 좀 놀랐을지도 모른다. 나이트에서 눈이 맞아 바로 짝짓기에 들어가는 부류들도 자정 이전엔 잘 움직이지 않는다. 시간에 쫓기는 입장상 자신에겐 해당 없는 늑장에 불과하다. 더구나 지금처럼 괴로운 욕구 불만에 시달리는 경우는 자신으로서도 처음이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한 번 섹스 해보고, 바로 정체를 얘기하고, 상대가 거래에 응하면 오케이, 아니면 바이바이다. 물론 아주 까다로운 여자가 아닌 한 거의 대부분 거래가 성립되기 마련이었다.

“……굳이 안 나가시겠다면…….”

여자와 눈을 얽은 채로 조용히 부정을 흘리자 여자가 소스라친다.

“아뇨, 나가요! 나가죠, 뭐! 까짓…….”

쑥스러운 듯 웃으며 여자가 백을 집어 들고 일어섰다.

여자를 상냥한 몸짓으로 에스코트하며 통로를 빠져나갔다. 최대한 담담한 표정을 만들고 있지만 자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초조해져 있다.

어젯밤, 그를 옆에 두고 자면서 내내 발기가 가라앉지 않아 몹시 고통스러웠었다. 오늘 서울로 올라오는 고속버스 안에서도 거의 마찬가지였다. 그와 혜윤이를 곁에 두고, 시도 때도 없이 몸에 열이 오르는 통에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설령 지금의 선택이 잘못돼, 눈앞의 여자가 거래를 거절한다고 해도 당장 섹스를 할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을 터였다.

박고 싶었다. 눈앞이 노래질 지경으로 미친 듯이 박고 싶었다. 어디든 상관없었다. 누구라도 좋았다. 물론 고객이 될 여자라면 금상첨화일 터였다. 그러면 이 환장할 것만 같은 성욕도 좀 가라앉을 터였다.

로데오 거리는 오색찬란한 네온 불빛들로 가득했다.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다. 익숙지 않은 술이 속을 할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수동적으로 따라오는 여자의 손을 상냥하게 잡고, 자주 갔던 호텔 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와의 계약 해지까지는 아직도 2주가 더 남아 있었다.

죄책감은, 그러나 조금도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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