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 1990년 9월. 장인환(張仁歡) (14/129)

14. 1990년 9월. 장인환(張仁歡)

“……친구라고 생각할 거라구요? 이제 와서 그게 가당키나 해요?” 

“가능하지 않아도 해볼 거니깐…… 요즘은 진짜 많이 편해졌구…… 위를 안주로 딸도 안 치구…… 아, 요새 새로 구한 괜찮은 비디오 있어요, 형. 갈색 머리에 멋진 백인 근육질인데 딱 내 취향이야. 쌓이면 그 친구를 보고 딸 쳐요. 얼마나 짜릿한지 몰라…… 빌려줄 테니 형도 한번 볼래요? 아, 하긴 조폭 아저씨랑 실컷 하는 형은 포르노 따위 필요 없겠구나…….”

허풍을 치는 데만 여념이 없어 수치감은 우선순위를 내주었다. 얼굴로 치닫는 더운 열기가 느껴졌지만 호기에 찬 너스레를 멈추지는 않았다. 진지할수록 더 나른하고 졸린 눈이 되는 마해영의 눈동자는 여전히 인환의 얼굴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었다. 농담 같은 응수도, 지나치게 밝은 어조도 그저 의도된 허풍에 불과하다는 걸 모를 남자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확신은 못 할 것이다. 과장되긴 했어도 편해진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성욕을 참을 수 없으면 그를 만나기 전처럼 포르노를 보며 자위를 하는 것 또한 거짓말은 아니다.

“……진짜예요. 이렇게 자연스럽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정말 편해지는 때가 올 거라고 생각해. 뭐, 그러다가 다른 괜찮은 남자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고…….”

며칠 전부터 오른쪽 어금니 틈을 비집고 나오기 시작한 사랑니 한 개가 꽤 아프다. 못 견딜 정도는 아니지만 은근히 신경이 쓰일 만큼은 쑤셔서 마해영의 우정 어린 취조가 더더욱 힘들게 느껴진다. 한 시간 가까이 그와 함께 한 즐거운 저녁 식사 뒤끝에 이 웬 횡포냐 싶기도 하다. 가뜩이나 불안한데 자꾸 비관적인 예언만 하는 친구의 잔소리가 솔직히 기분 좋을 리는 없다.

이윤열의 일로 마해영에게서 도움을 받은 때문인지, 그는 요즘 밖에서 식사를 할 땐 항상 미메시스에서 보자고 주문을 하곤 했다. 미메만큼 편하고 맛있는 레스토랑도 달리 없으므로 쌍수를 들고 환영을 할 일이지만, 요즘은 좀 불편한 것이 사실이다. 마해영의 잔소리가 유달리 심해졌기 때문이다. 오늘도 막 계산을 하고 나가려는데, 자신만 따로 부르더니 이렇게 일장 연설인 남자다. 뭐, 듣지 않아도 빤한 레퍼토리지만 나이 든 친구란 그에 합당한 공경을 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평생 갚을 길 없는 은혜까지 입었으니 말해 무엇 하랴.

“……어차피 알고 시작한 관계야. 위는 이반도 아닌데다…… 또 너무 어리죠. 위가 그런 일로 돈을 벌지 않았더라면 시작도 못 했을 관계라구요. 1년 정도야 어떻게든 참을 수 있었겠지만…… 이반도 아닌데 계속 남자인 날 안는다는 건 괴로운 일이겠죠. 위에겐 못할 짓이란 걸 알아요.”

치통으로 욱신거리는 뺨을 손바닥으로 살짝 누른 채 인환은 어조를 좀 더 가볍게 바꿨다. 어정쩡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행복을 느끼고 있는 요즘이라는 걸 남자가 알아주었으면 싶다. 걱정을 해주기보다 자신처럼 낙천적으로 생각하고 응원해주었으면 싶었다.

“……알겠어요? 다 각오하고 시작했던 거니까…… 그래서 더 체념하기 쉬운지도 몰라. 정리할 수 있어요. 할 수 있고말고요.”

“체념하고 정리한다는 게 고작 ‘친구 사이로 남는다’는 얘기야? 그거야말로 더한 집착이라는 거 몰라요?”

묵묵히 듣고만 있던 마해영이 이윽고 그 특유의 느릿한 어조로 반문했다.

“위 군이야 물론 상관없겠지. 그저 지금처럼 마냥 편한 친구로 대해주겠지만…… 인환 씨는 안 돼. 시간이 해결해줄 일이 따로 있지.”

“…….”

“……나, 이 장사 하면서 인환 씨 같은 사람 여럿 봤어요. 친구나 직장 동료 같은 헤테로를 짝사랑하게 돼서 대부분 쉽게 끊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용기 있게 대시도 못 하지. 어떻게 됐냐구? 그야,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다 안 좋게 끝났지. 심하게 상처 입은 건 말할 것도 없고. 강제로 아웃팅 당해서 자살한 친구도 하나 봤어. 모양새 좋게 끝낸 경우는 더 깊어지기 전에 미리 발을 뺀 친구들뿐이었다구.”

“…….”

근심이 깊어진 듯 마해영의 눈은 더더욱 졸린 눈이 되었다. 뭐라고 더 이상 호기를 부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백 번 옳은 말이고, 또 자신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란 걸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더 이상 듣고 싶지 않고 충고를 따르고픈 생각도 전혀 없다. 아니, 따를 생각이 없다기보단 따르기 불가능하다는 게 바른 표현일 것이다. 매번 옳은 결정만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옳은 결정을 하는 게 그리 쉽다면 세상에 고민을 하는 인간이 그 몇이나 되겠는가 말이다.

“……이혼하는 부부 중에도 좋은 친구 관계로 남는 케이스가 있다잖아요. 노력도 안 해보고 어떻게 알아요? 다른 사람들이 다 실패했다고 나도 실패하란 법이 어딨어……?”

“인환 씨…….”

“진짜야, 형. 나 많이 편해졌어요. 처음엔 어떻게 참을까 싶었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그럭저럭 견뎌지더라구.”

“…….”

“그야, 가끔은 좀 괴롭지만…… 부정은 안 해. 가끔씩은 정말 그와 하고 싶어서 괴로울 때가 있긴 해요. 하지만 뭐…… 어차피 성욕은 생리적인 욕구 아니야? 정기적으로 물을 빼주면 그리 못 견딜 정도는 아니라구요.”

“…….”

“이제 겨우 두 달예요. 두 달밖에 안 됐는데 이렇게 편한 거면, 앞으로 6개월 후면 어떻게 되겠어? 혹은 1년 후라면? 정말 그땐 그를 진짜 친구처럼 여기게 되는 것도 가능해지지 않겠어요?”

“…….”

“……형 걱정해주는 거 알아요. 하지만 아직은 그와 헤어질 맘 절대 없어요. 그가 날 차지 않는 한 내 쪽에선 절대로 못 해…….”

희미하게 고개를 흔드는 마해영의 부정적인 제스처를 모르는 체, 인환은 옆 의자 등받이에 걸쳐두었던 재킷을 집어 들었다.

“그만 가볼게요, 형. 위 기다려요.”

아름답고 섬세한 얼굴이 살짝 찌푸려지는 걸 무시하고 부지런히 가게 입구로 내뺐다. 구구절절 옳기만 한 마해영의 잔소리를 참는 것도 한계였고, 무엇보다도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그가 신경이 쓰였다. 5년 지기 친구보다 두 달 지기 예비 친구에 더 저울이 기울었다(솔직히 ‘두 달 지기 예비 친구’라기보다는, 아직은 ‘1년 지기 연인’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 되겠지만).

계산을 하는 인환을 카운터까지 따라 나와 물끄러미 바라보는 마해영의 눈매는 여전히 가늘고 졸리다. 남의 연애사라면 손님이든 친구든 거의 개입을 하지 않는 남자로선 이례적이다 싶을 만큼의 참견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남자가 자신에게 정을 주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남자가 원하는 답변은 지금의 인환으로선 도저히 들려줄 수 없었다.

계약한 1년은 이미 3주 전 금요일로 끝이 났다.

그 3주 전 마지막 날, 그는 이제 그를 ‘친구’로 생각해줄 수 있느냐는 두려운 질문을 던졌었다. 당연히 거짓은 말할 수 없었다. 거짓을 말한다고 통할 그도 아니었다.

벌벌 떨며 아직은 아니라고 솔직히 불었었다. 하지만 아주 상태가 양호하고, 조금만 더 시간을 주면 틀림없이 ‘그때’가 도래할 것 같다고 호언했었다. 애원은 하지 않았다. 애원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 집착한다는 의미였으므로. 최대한 담담하게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조금만 더 ‘연습’을 하면 가능해질 것 같다고. 그는 한참 동안 자신의 눈을 들여다보았었다. 허락이 떨어지기까지의 그 몇 분은, 아마도 인환의 인생에서 가장 긴 몇 분이 되었을 터였다.

그렇게 다시 3주가 흘러갔다. 그 3주의 시간 동안, 인환은 마지막 한 달과 마찬가지로 그와 필사적인 ‘친구 연습’을 했다. 친구처럼 만나 놀고, 얘기하고, 우정을 나눴다. 물론 여전히 진짜 ‘친구’가 아닌 ‘친구 연습’에 불과했기에, 그의 시간을 사는 대가로 꼬박꼬박 그의 은행 계좌로 대금을 입금했다.

유예의 시간이었다. 그가 허락해준 천금 같은 유예였다. 유예가 언제 끝이 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그저 고요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을 뿐, 더 이상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잔뜩 긴장하고 겁에 질린 인환도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그저 감지덕지 그가 던져준 유예를 덥석 주워 먹었을 뿐이었다. 3일 굶은 땅거지처럼 허겁지겁. 그런데 헤어지라니…… 거지 주제에 그 맛난 음식을 팽개치라니, 감히 자신 쪽에서 말인가?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할 수 있지도 하고 싶지도 않았다. 마해영은 도저히 불가능한 주문을 자신에게 하고 있는 셈이었다.

“……우리 위, 그래도 많이 변했죠, 형? 정말 내게 상냥해요. 친구로선 나무랄 데가 없어.”

여전히 가는 눈을 하고 있는 마해영을 향해 변명처럼 자랑이 나온다. 팔불출마냥 저절로 얼굴에 미소가 걸리는 것도 어쩔 수 없다.

“……하긴, 적어도 요즘은 다른 손님들 명함은 챙기지 않더군요.”

우아하고 느릿한 어조로 뱉어내는 마해영의 신랄함에 단숨에 기가 죽어야 했지만.

“……심술꾸러기야…….”

“…….”

“……위 미성년자인 거 모르는 체해줘 고마워요, 형. 또 들를게요.”

“요새 짭새들 눈치가 심상찮더라. 수시로 단속이 뜨네? 현관에다 민증 검사 확실히 하라고 시켜야겠어요.”

“칫, 누가 갱년기 아니랄까 봐. 심술도 버릇 되면 얼굴에 드러난다네, 아저씨.”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봐, 인환 씨. 친구는 개뿔이 친구야. 안 봐야 깨끗이 잊을 수 있어.”

“……갈게요.”

도망치듯 미메의 현관문을 밀치고 나왔다. 죄인처럼 나이 든 친구의 시선을 피한 것은 물론이었다. 모진 풍파를 겪은 대가로 얻었을 법한 연장자의 현명함은 지금의 인환이 바라는 조언이 아니었다. 어리석을지언정 다디단 격려가 더 고팠다. 쓴소리만 하는 친구란 다단계 세일즈맨처럼 두려운 존재와 다름이 없었다.

“……내일은 꼭 치과에 가세요, 선생님.”

조용하고 담담한 명령이 뒤에서 들려왔다.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퍼지고, 뺨을 감싸 쥐고 있던 오른손이 슬며시 내려간다. 우울했던 심사가 마치 구름이 걷히듯 달콤한 행복감으로 변해간다. 그야말로 전자동 시스템 행복 제조기가 아닐 수 없는 그다.

“……아직 참을 만한데 뭐…….”

치과를 무서워하는 걸 그에게 들키다니 창피해 죽겠다. 가능한 한 태연한 척하는 게 그나마 체면을 유지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씩씩하게 대꾸하며 돌아보니 그가 이태원의 현란한 입간판 조명들을 등진 채 우두커니 서 있다. 선 굵은 뚜렷한 이목구비가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예쁘다. 작열하는 여름 땡볕에 타 한동안 거무스름했던 피부는 어느새 본래의 매끄러운 황금빛으로 되돌아와 있다. 훤칠한 키며 늠름한 몸집에다, 바지 앞주머니에 자연스럽게 두 손을 찌르고 있기까지 해서 위압적인 카리스마가 장난 아니다. 아아, 꿈엔들 누가 그를 고 3 애송이에 불과하다고 여길 것이냐. 지나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반드시 한두 번쯤은 그를 되돌아보곤 한다. 브이넥의 그린계열 자카드 스웨터를 청바지 위에 받쳐 입은 자태는 꿈처럼 아름답고, 자신을 굽어보는 눈길에도 고요하니 표정이 없다. 하지만 저게 ‘상냥 무표정’이란 걸 안다.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무표정 일색이지만 그 무표정에도 흐릿하게나마 표정이 숨어 있다는 것을 어느 순간부터 깨닫게 되었다. 종류도 꽤 다양하다. 이를테면 지금처럼 자신에 대한 배려와 걱정이 들어 있는 ‘상냥 무표정’에서부터 약간 삐졌을 때 짓곤 하는 ‘쪼잔 무표정’, 옛 상처가 건드려졌을 때의 ‘글루미 무표정’은 물론, 분노를 억누르고 있을 때의 ‘사자후 무표정’에 이르기까지, 저 미묘하게 다채로운 무표정들을 모두 알아보곤 일일이 가슴을 설렐 수 있게 되었다.

“염증이 생기면 뺄 때 더 고생하세요. 혜윤이도 이가 약해서 종종 치과 신세를 지곤 하는데 선생님처럼 치료를 몹시 겁내죠. 매번 막판까지 숨기다가 자지러져서 제 속을 썩인답니다. 내일은 꼭 치과에 가도록 하세요.”

빤히 얼굴을 들여다보며 상냥한 잔소리를 되풀이하는 그다. 무지 쪽 팔리기도 하고, 가슴도 뛰고, 이래저래 얼굴만 더 빨개진다.

“……응…… 가긴 가야지…….”

애매하게 대답을 흘리곤 몸을 돌려 주차장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언젠가 가긴 가겠지만 반드시 내일이라고 장담할 순 없다. 어린 혜윤이와 동격으로 취급당하는 쪽 팔림보다 치과 치료에 대한 공포가 더 아찔하기 때문이다. 그가 걱정해주는 걸 생각하면 당장 병원에 달려가고픈 기분도 들지만, 자신이 누구냐. 천하의 엄살쟁이에 겁쟁이인 장인환이다. 견딜 수 없어질 때까지 버티고 또 버티자고 비겁한 궁리를 거듭 했다. 어차피 키스도 못 하는 바에야 자신이 이를 뽑았는지 안 뽑았는지 그가 알 게 뭐냐고, 슬쩍 옹색한 자조도 해본 건 물론이었다.

“……안전벨트 매, 위야.”

자신을 따라 조수석에 앉는 그에게 주의를 잊지 않는다. 카오디오를 켜고 조지 윈스턴의 피아노 선율에 맞춰 차를 출발시켰다.

맛있는 식사로 배도 부르고, 음악도 달콤하고, 앞으로 보게 될 대학로에서의 연극 한 편도 기대가 된다. 이제 저녁 7시이니, 아직 두서너 시간은 더 그와 함께 지낼 수 있다(솔직히 연극 자체보단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사실이 더 좋다고는 차마 부끄러워 말 못 하지). 치통이 좀 거슬리긴 하지만 행복해서 죽을 것 같다. 키스 따위 못 해도 좋다. 섹스 따위 못 해도 행복엔 아무 지장이 없다는 걸 알겠다. 조만간 진심으로 그를 친구라 인정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까지 생기니 금상첨화가 따로 없다.

“……추석 연휴엔 뭐 할 거야? 그냥 집에서 공부만 할 거야?”

차가 막 광화문 쪽으로 접어들었을 때 문득 생각이 나 물어보았다. 추석은 다음 주 화요일. 주말까지 낀 무려 4일간의 연휴라 하루쯤은 그와 보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가 된다. 물론 욕심은 부리지 말자고 속으로 다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뭐니 뭐니 해도 그는 수험생인 것이다.

부드러운 표정으로 전방을 응시한 채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던 그가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느껴졌다.

“……예. 연휴 끝나면 바로 중간고사도 있고…… 슬슬 마무리 단계라서요. 좀 더 집중하고 싶네요.”

역시…….

“……그렇구나. 그래도 너무 무리하진 마라. 무엇보다도 건강이 우선인 거 알지? 그저 컨디션 조절만 잘해도 합격은 문제없을 테니까.”

“예.”

어쩔 수 없는 실망감을 내색하지 않기 위해 얼굴 가득 긁어모았던 미소를 부러 거두지 않았다.

“10월부터는 만나는 횟수도 좀 줄여야겠지? 지금처럼 한 달에 대여섯 번은 아무래도…….”

“아뇨, 선생님. 이 정도는 별로 공부에 방해되지 않습니다. 괜찮아요.”

“그…… 그래? 정말?”

“예. 오히려 기분 전환도 되고 좋은걸요.”

제 발 저린 나머지 떠보듯 물어본 건데 역시 기대했던 대꾸가 돌아온다. 가슴 뻐근한 기쁨이 전신을 사로잡는 것이 느껴진다. 물론 찔리는 것도 사실이다. 진정으로 그를 배려한다면 좀 더 자유롭도록 그의 시간을 빼앗지 말아야 할 일이다. 그럼에도 만남의 횟수를 줄이자는 제안은 차마 더 이상 나오지가 않는다. 만남을 줄이게 된다면 그로서도 새 고객을 물색해야만 할 것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자신과의 만남을 지속하는 쪽이 그로서도 훨씬 더 편하지 않을까?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자문자답을 슬며시 되풀이했다.

“……그럼 정말 다행이고…….”

“요즘엔 선생님이 더 바쁘시잖아요. 전시회 보름 정도밖에 안 남았죠?”

“응. 하지만 이제 별로 바쁠 일은 없어. 한두 점 그리던 거 마무리하고, 사람들한테 초대장이랑 카탈로그만 돌리면 되는걸.”

그의 관심이 기쁜 나머지 얼굴에 팔불출 같은 웃음이 번진다. 솔직히 요 두서너 달 동안 용맹정진에 가까운 무리를 한 덕분에 그럭저럭 괜찮은 작품들을 선보일 수 있게 되었다. 처음이니까 많은 욕심을 부리지는 말자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고 있지만 역시 긴장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돈 많은 부르주아지의 심심풀이 정도로 평단의 질시를 받을까 두렵다. 평론가들에게서 재능을 인정받고 싶다. 사람들의 칭찬을 듣고 싶다. 막연한 희망 사항에 불과했던 소원이 점점 더 구체적인 욕망의 형태로 바뀌어가는 것을 느낀다. 성공 자체에 대한 갈망이라기보다는 무엇보다도 그에게서 이름 있는 화가로 인정받고 싶은 까닭이다. 성공을 하고, 유명해지고, 그래서 최고로 멋있어지고 싶다. 완벽한 그에게 어울릴 수 있을 만큼 진짜 근사한 남자가 되고 싶었다.

“……벌써 초대장 인쇄 나왔어요?”

“응.”

“……언제요?”

“……그끄저껜가…… 그저껜가……. 왜?”

어딘가 취조하는 듯 되풀이되는 물음에 살짝 그의 얼굴을 훔쳐봤다. 검고 맑은 눈이 고요하게 자신을 굽어보고 있었다.

“그런데 왜 제겐 안 주세요?”

꽤 놀라서 하마터면 좌회전 신호를 놓칠 뻔했다.

“……오…… 올 거야?!”

간신히 전방에 시선을 고정한 채 더듬거리며 되물었다. 의외의 기쁨으로 얼굴이 빨개지는 것이 느껴졌다.

“당연하죠.”

“……하…… 하지만…… 너 그림 재미없어하잖니…….”

“……친구의 그림은 다릅니다.”

가장 먼저 초대장을 주고픈 그였지만 그림에 통 관심이 없는 그라서 차마 와달라는 말을 못 꺼냈었다. 의외의 선언에 황송하기도 하고 가슴도 벅차서 인환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아시다시피 전 그림에 대해선 잘 모릅니다. 하지만 틈틈이 조금씩이라도 배워두고 싶어요. 입시 끝나고 시간이 좀 나게 되면 미술 계통 책들도 많이 읽어볼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선생님께서 사랑하시는 일이잖아요. 언젠가 선생님께 도움을 드려야만 할 일이 생길 때 제가 너무 모르고 있으면 그것도 곤란하니까요.”

“…….”

“……초대장 주세요, 선생님.”

“…….”

“……선생님?”

“……지…… 지금은 갖고 나온 게 없으니까…… 담에 만날 때 한 장 줄게, 위야…….”

간신히 감정을 추스르고 대꾸했다.

“전시 장소도 정해졌겠네요?”

“……어……? 어…… 응…….”

“어디죠?”

“……‘선(線) 화랑’이라고…… 관훈동에 있는 개인 화랑이지. 친한 대학 선배가 주인으로 있어서 거의 강짜로 얻다시피 했어. 아주 코딱지만 해. ‘갤러리 현대’라고 알아?”

“아뇨.”

“……몇 년 전에 생긴 무지 삐까뻔쩍 근사한 미술관이지. 선 화랑에서 200미터쯤 떨어져 있는데…… 거기에 비하면 선 화랑은 아주 구멍가게 수준이야. 하지만 언젠가는 나도 반드시 유명해져서 갤러리 현대 같은 근사한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하고 말 테니까…….”

큰소리를 치고 있지만 절대로 자신이 있어선 아니다. 아직 미숙하기만 한 실력에 그럴듯한 화랑을 빌려 소문난 잔치를 벌일 용기는 없었다. 부담이 없다는 이유로 동기들의 아지트가 되다시피 한 선배의 갤러리를 대여했지만, 막상 갤러리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작고 초라한 공간은 부끄러웠다. 와서 본 그가 실망을 하기 전에 미리 자진 납세를 해두려는 얄팍한 속내일 뿐이었다.

“……지금 가볼 수 있을까요?”

“……어…… 응? 뭐라구……?”

“갤러리요. 선생님 그림 전시하게 될 곳.”

“……선 화랑에?! 가…… 가자구?!! 지금?!!!”

“예. 연극 티켓 예매하신 건 아니죠?”

“……어…… 어, 응…… 별로 인기 있는 연극 아니니까…….”

“그럼 됐어요. 연극은 다른 날에 보고 거기부터 가봐요, 선생님.”

“……글쎄…… 가봐도 별 재미도 없을 건데…… 시간도 늦었고…….”

“벌써 문 닫을 시간인가요?”

“아니…… 9시까진 여니까 아주 늦은 건 아니지만…….”

“잘됐네요. 어서 가봐요, 선생님.”

거의가 무명의 환쟁이들인 과 선배나 동기들의 사랑방 구실도 겸하는 곳이 ‘선 화랑’이었다. 문을 닫는 9시 이후에 가도 늘 이런저런 아는 얼굴들을 볼 수 있는 곳이어서, 동기들과 술자리가 있는 날이면 간혹 선 화랑으로 몰려가 뒤풀이를 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십중팔구 그쪽 동기들에게 발목을 잡힐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연거푸 진지하게 전해지는 그의 깊은 관심에 정신이 멍할 지경으로 들뜬 것도 사실이었다. 애초 계획대로 연극을 보는 것이 나을지, 아니면 그의 요구대로 선 화랑으로 가는 것이 나을지, 미처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인환은 어느새 선 화랑이 있는 관훈동 쪽으로 핸들을 꺾고 있었다.

첫 개인전을 하게 될 장소가 궁금하단다. 입시 끝나면 그림 공부도 하겠단다. 오로지 언젠가 필요할 때 자신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

점점 더 휘황찬란한 야경을 만들어가고 있는 서울 거리가 꿈처럼 몽롱하게 느껴졌다.

“어? 벌써 문 닫으시는 거예요, 형?”

근처의 공터를 찾아 간신히 차를 주차한 다음, 선 화랑이 있는 한성 호텔의 아케이드로 가니, 무슨 로커처럼 긴 장발을 늘어뜨린 장신의 사내가 현관 셔터를 내리고 있었다. 인환의 회화과 6년 선배이자 선 화랑의 주인인 기하 선배였다.

“기하 형!”

“인환이 왔냐?”

소리쳐 부르니, 셔터 자물쇠를 채운 뒤 막 몸을 일으킨 기하 선배가 환한 미소를 터트리며 인환을 맞아들였다.

“아직 8시도 안 됐잖아요?”

“손님도 없는데 문만 열어놔서 뭐하냐. 잘 왔다. 안에 세혁이랑 은표 와 있다.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하자꾸나.”

모양 좋게 잡힌 눈가의 웃음주름이 언제 봐도 기분을 따스하게 한다. 서른 중반의 나이임에도 어깨 아래까지 흘러내린 긴 장발에 예술계 인사들 특유의 순수한 분위기가 겹쳐 거의 20대 중반으로도 보인다. 베이지색의 코듀로이 재킷에 적갈색 면바지를 받쳐 입은 캐주얼 차림은 제법 단정한 얼굴과 차밍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미대 재학 중엔 못 말리는 지저분스로 악명을 떨쳤다는데, 명색이 미술상이다 보니 요즘은 나름대로 외모에 신경을 쓰고 있는 모양이다.

재능의 한계를 인정하고 일찌감치 미술 딜러로서의 삶을 살기로 작정을 한 환쟁이들이 대개 그렇듯이, 어딘가 초연하고 낙천적인 분위기가 선배의 인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림을 끔찍이도 좋아하지만, 일생을 예술에 헌신하겠다는 일견 순수하면서도 맹목적인 치기는 기하 선배에겐 없다. 공대를 졸업하고 일명 공돌이 생활을 2∼3년 하다 늦깎이로 미대에 진학해 몇 년을 미친 듯이 그림만 그리던 중, 다시 화가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화랑을 차린 제법 특이한 이력들은 선배가 지닌 소쇄한 달관의 숨은 바탕이 돼주고 있을 것이다. 한 번도 틀기 힘든 인생 진로를 두 번이나 급회전시켰으니 그 숨겨진 의지와 피눈물의 역사가 오죽할까. 인환으로선 감히 상상도 못 할 실패의 쓴잔이 아니고선 저 일견 허무한 달관의 경지엔 절대로 도달치 못하리라.

“……어랍쇼? 네 옆의 꽃미남은 뭐냐? 친구냐?”

셔터를 내리느라 먼지범벅이 된 양손을 탈탈 털던 선배의 시선이 비로소 인환의 몇 걸음 뒤에 서 있던 그에게 가 닿았다.

“……후배요. 개인전 할 장소가 보고 싶다고 해서 같이 왔어요. 잠깐 전시실 구경해도 되죠?”

전시실은 관심 있을지 모르지만, 그가 인환의 친구들이나 동료들에게까지 흥미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50평 남짓한 화랑만 휘 둘러보고 나올 생각을 했던 터라 인환은 솔직히 이 상황이 달갑지 않았다.

기하 선배나 은표는 워낙 모나지 않은 성격이라 그렇다 쳐도, 회화과 3년 선배 한세혁은 전형적인 환쟁이랄 수 있을 만큼 괴팍스럽고 공격적인 기질을 갖고 있었다. 서클이 같아 자주 어울렸고 한두 번 그룹전을 같이 한 전력도 있어서 서로 흉허물은 없었지만, 그에게까지 소개를 시키기엔 솔직히 껄끄러운 상대였다. 지독한 마이 페이스 타입이라 상대가 기분이 나쁘건 말건 제멋대로 밀어붙이는 경향이 있었다. 그 역시 마이 페이스 하면 서러운 타입이었으니, 붙여줘봤자 물과 기름으로 겉돌 터였다. 무엇보다, 예민하고 날카로운 직감을 갖고 있어서 그에 대한 인환의 짝사랑을 눈치챌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건 철저하게 숨겼기 때문에 감히 연결을 시키진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단 한 번도 연인과 함께 미대 동기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는 인환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무언의 게이 사인들을 줄줄이 흘리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말이다.

“후배? 대학 후배? 내가 모르는 네 후배도 있었냐?”

여전히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의 얼굴이며 몸을 훑어보면서 기하 선배가 반문했다. 서슴없는 시선엔 그의 드물게 빼어난 외모에 대한 경탄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선배 역시 심미안에 있어선 누가 뭐래도 일가견이 있는 환쟁이 출신이었다.

“……고등학교 후배요. 문위라고 해요. 위야, 인사드려. 여기 사장이신 기하 형이야.”

올가미에 걸린 듯한 기분을 느끼며 인환은 마지못해 그를 기하 선배에게 소개시켰다.

“……처음 뵙겠습니다. 문위라고 합니다.”

“……아, 그래. 어디서 배우가 나타났나 했네. 깜짝 놀랐어. 인환이 후배라니 말 놔도 되겠지? 한참 후배인 거 같으니까.”

“예, 사장님.”

“사장은 무슨, 그냥 기하 형이라고 불러. 안으로 들어가자. 저녁은 먹었지들?”

“예. 좀 전에요.”

30분을 넘기지는 말자고 막연한 결심을 굳히며 기하 선배 뒤를 따라 아케이드 안으로 들어갔다.

술을 마시자더니, 과연 열 평 남짓한 전시실 안쪽 사무실엔 즉석 술판이 마련되어 있었다. 한세혁은 맥주 상자에서 맥주를 꺼내 응접 탁자 위에 진열하고 있었고, 은표는 통닭과 순대와 마른안주가 가득 담긴 일회용 접시들로도 모자랐는지 간이 싱크대 옆에 서서 부탄가스 버너에다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물감 냄새와 기름 냄새에 뒤섞인 라면 국물 냄새가 사방에 진동했다. 배가 부른 때문인지 희미한 토기마저 느껴졌다.

“……웬 라면이야? 저녁 안 먹고 왔나 보네?”

“인환이 왔구나? 막바지 작업 하느라 바쁘다더니 여긴 웬일이냐?”

“어, 근처에 나온 길에 잠깐 들렀어. 오셨어요, 세혁 선배?”

은표와 한세혁이 동시에 고개를 들고 시선을 보내왔지만 싹싹한 인사말을 건넨 건 동기인 은표뿐이었다. 허리를 반으로 접어 깍듯이 인사하자 한세혁은 예의 싸가지 없는 고갯짓으로 마지못해 아는 체를 했다. 180이 넘는 장신에다 다소 마른 근육질의 몸이라 더더욱 키가 커 보이는 한세혁에 비해 은표는 인환과 비슷한 키로 통통한 몸집을 하고 있다. 제멋대로 자란 사자 갈기 같은 머리카락에 온통 시커멓게 도배하다시피 걸친 검은색 세미정장 스타일이 한세혁, 노랗게 탈색한 수세미 같은 더벅머리에 청바지와 미색 점퍼를 걸친 소박한 차림이 은표다. 한세혁의 시니컬하면서도 날카로운 인상의 얼굴과 은표의 둥글둥글 판다곰 같은 얼굴처럼 극도로 대조적인 옷차림이 아닐 수 없다. 한쪽이 밤이라면 한쪽은 낮이라고 불러야만 할 것 같은 두 사람이었다.

다시 하던 일로 돌아가려던 두 사람의 시선이 인환의 뒤를 따라 들어오던 그를 발견했다. 기하 선배와 마찬가지로 휘둥그레진 눈길이 한동안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진짜 잘생긴 친구지? 인환이 고등학교 후배랜다. 이름이…… 뭐랬더라……?”

기하 선배가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그를 소개시켰다. 몇 분 전의 기하 선배도 한가지였으면서 두 사람의 벙찐 표정이 기가 막힌지 입술 끝에 잔뜩 웃음을 매달고 있다.

“……문위입니다, 사장님.”

“아, 맞다, 문위. 외자 이름인가 보네. 얼굴처럼 한 폼 하는걸? 하하. 이쪽에 인상 드러운 놈이 세혁이고, 앞치마 두른 쪽이 은표다. 인환이처럼 모두 그림을 그리지.”

“처음 뵙겠습니다. 문위라고 합니다.”

“…….”

“……우은표다. 덴장, 같이 소개팅 나갔다간 졸지에 폭탄 취급받겠네. 너 배우 하냐?”

세혁 선배는 역시 마지못해 고개를 까딱일 뿐이고, 은표만 얼굴이 벌게져선 말문을 튼다. 눈이 부신 듯 그의 시선을 피하는 걸 보면 드물게 수려한 그의 용모에 꽤나 압도된 모양이다. 성별을 초월한 절대미는 여자를 무지 밝히는 골수 헤테로인 은표에게도 과도한 자극이 되는가 보았다.

“……학생입니다만…….”

“아직 고 3이야. 헤헤, 우리 위 진짜 멋있게 생겼지?”

“……저만치 떨어져라. 5미터 이내 접근 금지다. 아직 고삐리라고? 덴장, 10년 묵은 여친도 빼앗길 얼굴이구만.”

“하하…… 뺏길 여자친구도 없으면서 웬 엄살이냐, 우은표.”

“없긴 왜 없어요! 제가 눈이 높아서 그렇지 지금도 전화 한 통이면 당장 달려 나올 기집애들이 쌔고 쌨구만.”

“허이구, 어련하시겠어.”

“좌우당간 오늘 주희 선배랑 경자가 안 따라오길 천만 다행이네요. 그 여자들 봤으면 환장을 했을 거야. 고삐리고 뭐고 당장 먹어치우려 들었을걸요?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는 격이지. 후배 보호하고프면 다신 여기 데려오지 마라, 장인환.”

헤실헤실 웃으며 은표의 얘기를 따라가다가 인환은 저도 모르게 몸이 굳었다.

“내 화랑에 누가 오라 마라 간섭이야?”

한세혁과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기하 선배가 순대 서너 개를 연달아 집어 먹으며 일갈했다.

“고삐리래잖아요. 꽃미남에 걸신들린 여류들이 어디 가만 놔두겠어요? 저건 정말 살인적인 얼굴이라구요. 덴장, 어찌나 번쩍거리는지 눈꼴이 다 시리네.”

“솔직히 말해. 너, 경자가 신경 쓰이는 거지?”

“내가요? 경자를요? 그 마귀할멈을요?!”

“내숭 떨지 마, 인마.”

“이거 왜 이래요, 기하 형?! 저도 정신 멀쩡하다구요. 이쁘면 뭐합니까? 서클 안의 드센 여류들이라면 이젠 신물이 다 난다는 거 아닙니까.”

“……주희 선배…… 오늘 만났어……?”

평정을 가장하며 질문을 던지자 서로 티격태격하던 기하 선배와 은표가 금세 진지한 얼굴이 된다. 1년 가까이 죽어라 서로를 피하는 인환과 오주희를 서클 내에서 모르는 이는 없었다. 같이 하기로 한 그룹전까지 취소를 해버린 오주희가 인환을 죽일 놈 살릴 놈 할 정도로 원한에 차 있다는 소문 역시. 술만 들어갔다 하면 이를 갈아붙이고 인환을 씹어대면서도 끝내 그 이유는 밝히지 않는 탓에, 한동안 둘이 사귀다 찢어졌다는 황당한 소문까지 돈 적이 있었다. 물론 인환 쪽에서 오주희를 일방적으로 차버렸고, 오주희는 그 때문에 앙심을 품었다나 뭐라나.

그와의 관계를 들키고 처음 한두 달은 마치 바늘방석에라도 앉은 것처럼 불안과 두려움에 떨던 인환이었다. 자신이 한 짓의 비열함으로 볼 때, 그녀가 사방팔방 게이임을 소문내고 다닌대도 할 말이 없다고 각오했었다. 서클 동료들은 물론 미대 동기들 전부에게 소문이 나서 사회적으로 매장이 된다 해도 달게 받을 수밖에 없다고. 물론, 그 두려운 마음조차 부끄러운 기분이 들 만큼 그녀는 철저하게 침묵을 지켜주었다.

올해 초, 대학을 졸업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녀와 멀어질 수 있게 된 것이 그나마 천만다행이었다.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수치스럽고 미안하고 고통스러웠지만, 기를 쓰고 자신을 피하는 그녀를 만나 정식으로 잘못을 빌 용기는 차마 생기지 않았다. 잘못을 빌고 용서를 구하는 행위조차 가증스럽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어. 양평에 화실 꾸렸잖냐. 세혁 선배랑 경자랑 같이 거기 들렀다 오는 길이다.”

은표가 조심스러운 눈길로 인환을 굽어보며 대꾸했다.

“……그렇구나……. 화실은 괜찮아?”

“당근. 전망도 죽여주시고…… 화실이 아니라 완전 별장이더만. 역시 돈 많은 부르주아는 달라. 그런 데서 그림 그리면 슬럼프고 뭐고 없겠더라구.”

“……그럼…… 계속 거기서 그림만 그릴 건가 봐?”

“음. 서울엔 당분간 안 올라올 거래. 내년 봄에 개인전 할 거라고 의욕이 펄펄 끓더라.”

“……잘됐네…… 건강은 괜찮아 보여?”

“건강……? 글쎄…… 지난해 그렇게 위태위태했던 거에 비하면 뭐…… 살도 다시 붙고 혈색도 그럭저럭…….”

“야, 그렇게 궁금하면 네가 직접 가보면 될 거 아냐! 짜증 나게…….”

느닷없는 한세혁의 사나운 일갈에 가슴이 철렁할 만큼 놀라고 말았다. 옆에서 조용히 경청하던 그도 움찔 몸을 긴장시키며 한세혁을 주시했을 정도였다. 한세혁의 변덕이나 성깔을 익히 알고 있는 기하 선배와 은표조차도 눈을 크게 뜨고 한세혁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니들 숨바꼭질이나 중계하는 사랑의 리포터냐? 헤드라인 뉴스 앵커야? 보자보자 하니까 이것들이 점점 뭐하자는 수작이야?”

“……세…… 세혁 선배…….”

“……변비냐, 세혁이? 너야말로 웬 히스테리야?”

기하 선배가 부드러운 어조로 사이에 끼어들었다. 책망하는 어조완 달리, 사자 갈기마냥 야성적으로 뻗친 머리카락을 우악스럽게 쥐어뜯자, 도끼눈으로 인환을 야리던 한세혁이 양미간을 찌푸리며 기하 선배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아야, 하지 마세요, 선배.”

“아야? 아야? 밉살스러운 네놈 심술이 더 아파, 인마.”

“……무섭네, 선배…… 뭐 기분 나쁜 일 있는 거죠?”

어느 정도 놀람이 가라앉고 나자 울컥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쩌겠는가. 성질이 똥같이 더러워도 하늘같은 선배다. 평소처럼 생글생글 웃으며 필살 애교 작전을 펴는 수밖에.

“……접수했어요. 주희 선배랑 저 땜에 화나신 거 알아요. 지난번 그룹전도 틀어졌고…… 아무튼 죄송해요, 선배.”

“…….”

“죄송하긴 뭐가 죄송해. 서로 안 맞으면 틀어질 수도 있는 거지. 언제든 헤쳐 모여가 자유로워야 하는 게 미술 동인이야. 세혁이가 그걸 모르겠냐? 이 녀석 이거 변비야. 며칠 똥 못 눠서 심술이 난 게지. 착한 인환이가 이해해라.”

“……헤헤, 그래도 죄송한 일이긴 하죠, 기하 형. 주희 선배랑 저 땜에 서클 분위기 껄끄러운 거 저도 아는데요, 뭘. 후배들 보기도 그렇고…….”

“……라면 다 불어터지겠네. 불 안 끄냐, 우은표?”

“어……? 아, 예. 선배…….”

인환 대신 은표에게 바통이 넘어간 짜증에, 은표가 부랴부랴 버너 불을 끄곤 탁자로 라면 냄비를 가져왔다.

“……니들도 와 앉아. 이럴 줄 알았음 넉넉하게 끓일 걸 그랬네?”

어색한 분위기를 만회하려는 듯 은표가 실실 웃으며 손짓을 했다.

“우린 됐어. 방금 저녁 먹고 오는 길이라…….”

“맥주라도 마시지? 그러고 보니 인환이랑은 꽤 오랜만에 마셔보네?”

“안 돼요, 형. 차 끌고 와서 술 마시긴 그래요. 위도 술 못 하고…… 곧 집에 데려다줘야 하는걸요.”

“그런 게 어딨어. 차야 대리 운전 시키면 되고, 문 군도 이참에 술 배워두면 좋지. 고 3이면 다 큰 거야. 어서 와 앉아.”

부드러운 어조였지만 그래도 무시 못 할 까마득한 대선배로서의 권위를 가진 기하 선배였다. 그를 생각하면 거절해야 마땅한 술자리임에도, 막상 마땅한 거절의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변명거리를 떠올리며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옆에서 얌전히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그가 성큼성큼 탁자 앞으로 다가가더니 은표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놀라서 보니, 고요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인환을 부르고 있었다.

―전 괜찮아요, 선생님.

마주친 시선 속에서 그의 상냥한 배려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인환의 입장도, 또 자기 때문에 더더욱 곤혹스러워하고 있다는 것도 훤히 꿰고 있는 사려 깊은 눈길이었다. 희미하게 얼굴을 붉힌 채 어기적거리며 그의 옆에 가 앉았다. 가슴 뭉클할 정도로 감동한 나머지 막 한쪽 볼을 들쑤시며 시작된 치통의 발작조차 좀처럼 의식되지가 않았다.

낯설고 괴팍스러운 어른들의 모임에, 더더구나 그가 싫어하는 술자리에 기꺼이 동참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곁눈으로 빨아들일 듯이 그를 훔쳐보았다. 어색한 자세로 기하 선배가 내미는 술잔을 받아 드는 그와, 록 카페에서 내키지 않는 춤을 추며 여대생들과 부킹을 하던 그의 모습이 고스란히 오버랩 되며 가슴을 죄어왔다. 오로지 김성준만을 위해 그렇게 했듯, 지금 이 순간, 그는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내키지 않는 사교를 감수하고 있었다.

목이 메는 느낌이 들었다. 목구멍 안쪽을 톡 쏘고 넘어가는 맥주 맛이 유달리 아프게 느껴졌다. 하느님. 역시 자신이 들이는 노력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모양이었다. ‘친구 연습’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럽다 한들, 그가 자신에게 선사하고 있는 이토록 극진한 ‘우정’에 값할까 보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제물로 바치는 고통이 크면 클수록 그가 건네주는 ‘우정’의 가치는 천정부지로 치솟을 터였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지금으로선 도저히 판단이 불가능했다.

“……괜찮으세요, 선생님?”

물론 괜찮지 않았다. 가슴은 터질 것처럼 두근거리고 싸늘하게 식은 온몸은 사시나무 떨 듯 후들후들 떨렸다. 무서워서 어디다 눈을 둬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못과 헝겊을 이용한 한세혁의 설치 작품으로 도배가 되어 있는 전시실의 내부도 섬뜩한 공포감을 가중시켰다. 인간 내면의 고통과 폭력성을 형상화한 작품이라는데, 인간 내면이 아니라 귀신들의 한 맺힌 저주처럼 느껴졌다.

두 시간 가까이, 어째 별다른 주사 없이 얌전히 술만 푼다 했었다. 늘 하던 패턴대로, 푸념에 가까울 그림 얘기만 신이 나서 주절대던 세 주정뱅이는 어느새 관심을 인환에게로 돌리고 있었다. 물론 계기는 보름 후에 있을 개인전이었다. 그는 알 턱이 없는 재학 시절의 쪽 팔리는 실수담들을 그에게 고자질하며 내내 곤혹스럽게 만들더니, 세 사람은 때 아닌 분신사마 놀이를 시작해 인환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뿐이냐, 그것도 모자라 각자가 체험한 귀신 얘기를 셋이 번갈아가며 줄줄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견디다 못해 그에게 전시실 구경을 시켜준다는 핑계를 대고 도망쳤지만, 한번 치솟은 공포감은 좀처럼 가라앉지가 않았다.

“……어…… 괜찮아, 위야…… 괜찮아…….”

“……얼굴이 창백하세요. 잠깐 여기 앉아 쉬시겠어요?”

부축하듯 팔을 잡아끄는 그에게 이끌려 두 번째 전시실 입구에 놓여 있던 안내 데스크로 가 앉았다. 의자에 앉혀준 뒤 막 손을 떼려는 그의 팔을 결사적으로 움켜쥐곤 놓아주지 않았다. 움켜쥔 손아귀도, 턱 끝도 참을 수 없을 만큼 덜덜 떨렸다. 어린애처럼 겁을 집어먹은 모습을 그에게 보여준 것이 못내 부끄러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귀신이니 호러니, 인환에겐 쥐약과 다름없는 화제였다. ……망할 인간들! 자신이 귀신 얘기를 지독하게 무서워한다는 걸 알면서도 저 인간들이 부러 그쪽 얘기를 꺼낸 이유야 빤했다. 평소와 달리 ‘후배’인 그 앞에서 어색하게 점잔을 빼고 있는 자신을 놀리고 싶었던 것이리라.

코앞으로 다가온 인환의 개인전이 성공할지를 점쳐본다며 은표 놈이 분신사마라도 해보자고 제안했고, 두 시간가량 천천히 마셔댄 덕분에 기분 좋을 정도로 얼큰하게 취한 기하 선배가 맞장구를, 어쩐지 오늘은 유달리 더 인환을 못 잡아먹어 안달인 한세혁까지 심술궂은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상황 종료. 은표가 영매가 돼서 기하 선배와 함께 볼펜을 쥐고 ‘분신사마, 분신사마, 오이데 구다사이’를 읊조릴 때만 해도 반신반의하며 지켜보던 인환은, 귀신과 은표 사이에 심오한 질답이 오가던 중 마침내 ‘그것’을 느끼고 만 것이다.

‘그것’은, 처음 은표 놈의 오른쪽 어깨 부근에서 감지가 되었다. 직접적인 형태가 보였다 하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저 온몸을 얼릴 정도로 싸늘하고 악의적인 어떤 분위기였을 따름이다. 하지만 저 ‘분위기’는 분신사마놀이가 계속될수록 점점 더 영역을 확장시키며 커지더니 종내는 사무실 전체를 시꺼먼 악의 기운으로 가득 채우고 말았다. 그러나 갈수록 겁에 질려가는 인환의 모습을 시종 재미있다는 듯 지켜볼 뿐, 환쟁이 셋의 유치하고도 짓궂은 작태는 좀처럼 끝날 줄을 몰랐다. 30분 남짓, 은표 놈의 여자친구가 어떤 여자가 될까에서부터 언제 결혼하게 되느냐에 이르기까지(솔직히 인환의 개인전 성공 여부는 핑계고, 은표 놈의 진짜 목적은 바로 이 궁금증의 해소가 아니었을까 의심이 들었다) 제가 묻고 싶은 모든 것을 귀신으로 하여금 모조리 토해내게 하고 나서야 은표 놈은 심히 뒤끝이 불길한 놀이를 겨우 끝내주었다. 물론 사무실 안에 가득 들어찬 음산한 기운이 서서히 사라질 때까지(정확히는 놀이가 끝날 때까지) 인환은 몸을 얼음장처럼 굳힌 채 벌벌 떠는 외엔 다른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후후, 귀신이 그렇게 무서우세요?”

으스러져라 한쪽 팔을 움켜쥐고 있던 인환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고 있던 그가 속삭이듯 말을 건네왔다.

고개를 드니, 보일 듯 말 듯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있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억지로 마신 맥주 탓인지 뺨과 눈언저리에 희미한 홍조를 띠고 있었지만 자신과 마찬가지로 조금도 취한 것 같지는 않았다. 한숨이 나올 만큼 아름다운 이목구비를 홀린 듯 들여다보고 있자니, 뼛속까지 스민 공포감이 조금씩 진정되는 기분이 들었다.

“……장난일 뿐인데 그렇게 겁을 내시면 어떡해요. 그분들, 선생님이 겁내는 거 알고 더 그러신 것 같던데요.”

사무실의 철부지 3인조만큼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도 자신을 재밌어하는 건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아, 씨발. 공포감이 진정되니깐 대신 슬슬 열이 뻗치기 시작한다.

“……그…… 그게 어디 장난이냐! 우이씨…… 사무실 안이 온통 귀신 천지가 됐는데…… 너도 그거 못 느낀 거야?”

“하하, 글쎄 별로 모르겠던데요.”

“……하긴 그걸 느낀다면 다들 감히 귀신 장난은 못 치겠지. 둔탱이에 사디스트들 같으니라구. 내가 다신 그따구 장난에 놀아나나 봐라. 우이씨…….”

“느껴진다고 해도…… 아니, 설령 귀신이 있다고 해도 해꼬지를 하지 않는 한 뭐가 두렵겠습니까. 진짜 두려운 건 인간들이지요.”

여전히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가 인환을 달래듯 감미롭게 울렸다.

“해꼬지를 하는지 안 하는지 어떻게 알어. 귀신이 있는 거면 귀신의 저주도 있는 거겠지. 아, 씨. 젠장. 오늘 밤 귀신한테 쫓기는 꿈이나 잔뜩 꾸라지들.”

“그런 꿈은 선생님이나 꾸시게 될 것 같은데요.”

움찔 하고 반사적으로 몸을 긴장시키자 그가 어깨까지 떨며 웃음을 흘렸다. 고개를 약간 아래로 숙인 자세로 눈을 맞추고 있어 부드럽게 풀어진 그의 얼굴 표정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어둑어둑하게 밝혀진 전시실 불빛을 받아, 일렁이듯 눈가에 그늘을 만들고 있는 그의 기다란 속눈썹이 환영처럼 아름답게 느껴진다. 흐릿한 홍조를 띠고 있는 뺨도, 웃음을 머금고 있는 도톰하고 섹시한 입술도 아름다운 나머지 마냥 몽롱하게만 느껴진다. 가슴이 몹시 두근거리는 까닭이 알코올 때문인지, 혹은 공포감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그를 바래다줄 생각으로, 기하 선배가 권하는 대로 처음 한두 잔을 제외하곤 그저 마시는 흉내만을 냈을 뿐이었다. 그러니 원인은 아무래도 후자 쪽일 게다. 겁에 질려 확실히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는 건 사실이니까. 시각이든 청각이든, 모든 감각이 유달리 예민하게 느껴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아, 이것도다. 손안에 쥐인 그의 단단한 팔 근육이 스웨터 소매 너머로 고스란히 느껴진다. 공포감이 조금씩 잦아들면서 부서져라 움켜쥐는 대신 무의식적으로 어루만지고 있던 자신을 문득 깨닫고, 인환은 소스라치듯 손을 거둬들였다.

어느새 진지해진 그의 깊은 시선이 자신의 허둥대는 몸짓을 고스란히 따라간다. 심장의 고동이 좀 더 빨라졌다. ……안 돼…….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무엇이 안 된다는 건지 스스로도 잘 알 수가 없으면서 거듭 ‘안 돼’라는 부정의 명령만을 속으로 거듭 뇌까렸다.

“……아…… 안 꿀 거야, 그런 꿈…….”

……그를 만지는 건 안 돼. 반해서 홀린 듯이 바라보는 것도 안 돼……. 아, 그래. 그렇지. 무엇이 안 되는 것들인지 이제 알겠다. ……정신 차려…….

본능적인 위기감에 허둥지둥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가해보지만 증폭된 감각은 여간해서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는다. 우이씨. 망할 인간들. 생각할수록 화딱지가 난다.

“후후, 꿈도 조절하세요, 선생님은?”

“……안 꾼다면 안 꿔…….”

“……거짓말…… 아직도 떨고 계세요…… 겁낼수록 공포는 더 달라붙는 법이죠…… 귀신이…… 아직도 느껴지시는 거죠? 그러고 보니 선생님 주위가 좀 어두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요.”

“……제…… 제…… 젠장, 그만해, 너……!”

“쿡쿡…….”

“문위!!!”

“……귀여워요.”

“!”

“……너무 귀여워…….”

“…….”

얼굴에 뜨거운 열기가 느껴진다. 가슴이 너무 뛰어서 그를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다. 지금 바라본다면 그동안 필사적으로 죽여왔던 감정이 폭발하듯 일거에 튀어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지…… 집에 갈 거야…….”

“벌써요? 저분들 쉽사리 보내주실 것 같지 않던데요?”

입술 끝을 말아 올린 채 보일 듯 말 듯 웃고 있을 그의 얼굴이 선하다.

“젠장, 몰래 내빼는 거지 뭘. 쫌 있으면 곤드레만드레가 돼서 옆에서 불이 나도 모를걸?”

“그럴 리가요. 다들 선생님 많이 좋아하시던걸요. 그 키 크고 마른 분은 특히 더…….”

“에? 세혁 선배가?”

어떻게 하면 그런 오해가 가능한가 싶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살폈다. 놀리는 듯한 웃음은 사라지고 특유의 ‘상냥 무표정’으로 되돌아와 있던 그가 빨아들일 것처럼 자신의 시선을 깨문다. 변함없이 홀릴 듯 아름다운 얼굴이지만 ‘안 돼’ 하고 익숙한 마음의 빗장을 채운다. ……반하면 안 돼. 욕망을 품어서도 안 돼. 내 친구야. 내 사랑하는 친구일 뿐이야……. 고요하게 가라앉은 그의 표정을 보니 자신의 팽팽했던 신경조차 덩달아 차분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사사건건 가시 돋친 말만 하는 거 보고도 모르냐? 하긴 뭐 악의가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니지만…… 그저 너무 솔직해서 탈이지.”

“부정적인 쪽으로만 솔직성이 발휘되시던데요.”

“후후, 그건 그래. 세혁 선배 기분 좋은 모습을 볼 수 있는 날은 1년에 채 보름도 안 될 정도니까. 별명이 독사야, 독사. 후배들이 얼마나 무서워한다구.”

“듣고 있다 보면 정말 화가 치밀 때가 있지만 선생님을 많이 아끼시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참았습니다.”

“에? 너…… 화났었어?”

“예. 그분, 선생님께 너무 함부로 구니까요.”

양미간이 희미하게 접힌 걸 보니 ‘쪼잔 무표정’. 정말로 꽤나 불쾌했던가 보다. 괴팍스러운 선배한테 설설 기는 자신의 비굴한 행실이 그에겐 어떻게 비쳤을까 부끄러운 기분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그가 자신 때문에 속으로 화를 내주었다는 사실이 기뻐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 아무튼 성격은 그래도 작품은 진짜 멋지거든. 배울 점도 많고. 하늘같은 선배니까 알아서 기는 거지, 뭘. 저기 봐. 저것들 다 세혁 선배 작품이다? 날카롭고 어째 좀 섬뜩한 게 그 선배 분위기랑 똑같지 않니?”

자신의 시선을 따라 그도 전시실 안을 휘 둘러본다.

“……글쎄요…… 그림에 대해선 역시 잘 몰라서요…….”

예의상 한번 휘 둘러보긴 했어도 금세 재미없는 얼굴이 돼선 곧바로 자신의 얼굴로 시선을 돌리는 그다. 웃음이 나왔다. 자신을 위해 그림 공부까지 하겠다고 작정을 한 것은 무척 황송한 일이지만 역시 큰 기대는 안 해야 할 것 같다. 예술이란 확실히 가슴의 문제다. 연구하고, 해부하고, 또 공부해서 파악될 가슴이라면 세상의 공부벌레들은 다 천재 예술가가 되었을 터. 그가 공부해보겠다고까지 한 배경에는 그런 그의 예술에 대한 몰이해가 바탕이 되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의 그런 몰이해조차도 실은 좋아서 미칠 지경이지만.

“……사무실에 뭐 두고 온 거 없지, 위야?”

시계를 살피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어느새 10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주책 맞은 동료들에게 또다시 붙들리기 전에 서둘러 자리를 털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정말 인사 안 드리고 가시게요?”

“당근이지. 또 붙들리면 새벽까지 안 놔줄 인간들인걸.”

“아, 잠시만요, 선생님…….”

출입문 쪽으로 몇 걸음 앞서가던 자신의 팔을 그가 부드럽게 잡더니 걸음을 멈추게 했다.

“이쪽 운동화 끈이 풀렸어요. 매드릴게요.”

뭐라고 대답할 틈도 없이 자신의 병신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그의 정수리가 보였다. 프러포즈를 하기 위해 연인 앞에 무릎을 꿇은 기사 같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쳤다. 물론 터무니없을 망상이었다. 뜨거운 기운이 발치부터 확 솟구치는 기분이 들었다. 비비화 끈을 바짝 조여 묶는 그의 섬세한 손길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두근…… 크게 율동하는 심장 소리를 행여 들킬까 겁이 나 전시실 한구석으로 시선을 피했다. 주책 맞은 망상에 한순간 하늘에라도 오른 것마냥 행복해졌다가 다음 순간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현실로 곤두박질쳤다. 젠장.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혼란스러워야 하는 걸까. 애써 눈 돌리려 하는 감정이…… 필사적으로 죽여왔던 감정이 폭발하듯 일거에 튀어나올까 봐 두렵다. 너무나 두렵다…….

“……사이 꽤 좋네……?”

약간 혀가 꼬인 시니컬한 일갈이 출입구 쪽에서 들려왔다. 그러잖아도 잔뜩 가슴을 졸이고 있던 터라 인환은 그야말로 기절할 것처럼 놀라고 말았다. 한세혁이었다.

술이 들어가면 거의 시체처럼 하얘지는 피부 탓에, 전시실보다 상대적으로 밝은 복도 불빛을 등지고 서 있는 한세혁의 몰골은 마치 흡혈귀처럼 으스스해 보였다. 분신사마의 영향력은 실로 대단하다고, 인환은 잔뜩 쫄아서 생각했다. 막 몸을 일으켜 뒤돌아선 그의 팔소매를 무심코 꼭 움켜쥐었다. 어떤 심술 맞은 귀신이라도 물리칠 막강한 부적만 같았다.

“……너, 주희 좋아한 거 아니었어?”

“에…… 예?”

“……주희 얘기만 나오면 울상을 짓더니…….”

“……헤헤, 마…… 많이 취하셨나 봐요, 선배…… 고뇌하는 천재 같아 보여요. 분위기 멋지다…….”

생글거리며 애교를 날렸다. 얌생이처럼 쪼개지 말라고 치를 떨기 일쑤지만 한세혁의 독설엔 그만한 방패도 없다는 것을 안다. 인정사정없이 약점을 할퀴다가도 자신의 닭살 돋는 애교 한 방에 단숨에 머쓱해지곤 하는 독사였다.

낯빛도 그렇고, 비틀거리듯 조금씩 흔들리는 몸도 그렇고, 한세혁은 이미 한계까지 취한 것 같았다. 또 뭔 꼬투리를 잡아 이빨을 드러낼지 몰라 속으로 각오를 단단히 했다. 기회 봐서 재빨리 도망쳐야지 하고 얍실하게 계획도 세웠다. 물론, 들을 때는 뼈아프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구구절절 옳은 비판이라는 건 안다. 재능 있는 선배 화가로서 배울 점도 많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함께 있을 땐 그저 지루하고 쪽 팔리는 잔소리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와 그림 중 우선순위를 따진다면 당연히 그일 수밖에!

“……전시회 성공한다고 방방 뜰 거 없어, 새꺄.”

“……에…… 예에…… 당근이죠, 선배. 그깟 분신사마 점괘 따위 진짜로 믿는다면 바보게요.”

“……니 그림은 틀려먹었어.”

“……에…… 헤헤, 예…… 아직 많이 부족하죠, 뭐…….”

“부서지는 고통이 없어. 부서져보지도 않은 놈이 당최 무슨 그림이야, 그림이. 차라리 만화나 그려라, 씨발.”

“…….”

“……손재주야 그만이지. 데생도 좋고 포름도 봐줄 만은 해. 당분간은 그 손재주만으로도 싸구려 관객들을 후릴 수 있겠지…… 군대나 가, 새꺄. 넌 군대라도 가야 돼.”

흐느적거리며 서서 주정뱅이처럼 내뱉고 있지만 진지한 비평이란 걸 알고 있다. 누가 독사 아니랄까 봐 역시 비수처럼 속을 헤집는 독설이 아닐 수 없다. 흥, 버뜨, 그러나. 온갖 사이코 환쟁이들의 다종다양한 골질, 어디 한두 해 받아먹은 짬밥이더냐. 이만 일로 의기소침해질 장인환이 아니다.

“……병신 다리로 어떻게 군대를 가요. 저도 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다구요…… 선배도 참…… 위 듣는데…… 후배 앞에서 체면 좀 세워주시면 안 돼요?”

“누가 후배냐?!!!”

사나운 일갈과 함께 한세혁의 시선이 비로소 그에게 가 닿았다. 잡고 있던 팔소매를 통해 그의 몸이 바짝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어딘가 독기가 서린 듯한 한세혁의 눈길을 마주하고 있는 그의 얼굴엔 가면을 뒤집어쓴 것마냥 표정이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가. 1년 넘게 해바라기마냥 그만을 바라보았었다. 저 예의 바른 무표정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이 극도의 적대감이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는 자신이었다.

“후배냐?!”

“…….”

“이 응석받이 도련님의 잘난 ‘후배’일 뿐이냐?!”

“…….”

“……얼굴은 상당히 잘나긴 했군. 멀끔하니 꽃제비과야. 머리도 꽤 돌아가는 것 같고…… 하지만 그림을 모르는 둔한 놈은 나 인정 못 한다.”

“…….”

잡아먹을 듯이 서로를 응시할 뿐 한세혁도, 그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초조했다. 자신에겐 그저 자장가로 여겨질 만큼 익숙해진 선배의 독설이지만, 확실히 그에겐 대단히 불쾌하고 무례한 언사로 들릴 터였다. 두 시간이 넘게 괴팍스러운 어른들과 원치 않는 사교를 하게 하고 싫어하는 술까지 마시게 한 자신이었다. 더 이상 그에게 폐를 끼치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서…… 선배…… 너무 늦어서 위 바래다줘야 하거든요……? 그러니까 얘긴 나중에…….”

필살 애교를 휘날리며 부랴부랴 작별 인사를 꺼냈다. 힐끗 내리 꽂히는 왕 싸가지 시선을 한세혁의 허락이라 무리한 해석을 내린 것은 물론이었다. 그의 팔을 움켜쥐고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그러나 어째 그의 몸은 바윗돌마냥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안달이 나서 얼굴을 살피니, 여전히 적대감이 풀풀 날리는 서늘한 무표정으로 한세혁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가…… 가자, 위야…….”

“……그림을 모르는 둔한 놈일지 모르지만…….”

나지막한 일갈이 그의 모양 좋은 입술을 타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림 때문에 부서지라고 강요할 만큼 돼먹지 못한 후배는 아닙니다.”

“!!!”

두근…….

“그림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는 모르지만 살아가는 일 자체보다 우선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정말로 아끼기 때문에 선생님이 부서지는 일 따위 전 절대로 용납 못 합니다.”

“…….”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부서트리려는 놈들도 물론 가만 안 놔둘 생각입니다. 그 누가 됐든. 무례를 범했다면 양해 바랍니다.”

허리를 굽힌 정중한 인사를 마친 그가 인환을 향해 손을 뻗어왔다. 순간 손목이 부서지는 것이 아닐까 착각이 들 만큼 어마어마한 통증이 신경줄을 타고 올라왔다.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릴 틈은 없었다. 뒤통수를 세게 맞은 듯한 한세혁의 벙찐 얼굴을 살필 틈도, 물론 없었다.

커다란 보폭으로 휘적휘적 앞서가는 그에게 끌리다시피 전시실을 빠져나왔다. 빼꼼히 열린 사무실 문을 통해 두런거리는 기하 선배와 은표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애초에 인사를 할 생각도 없었지만 설령 인사를 하려 했다고 해도 그의 난폭한 몸짓 때문에 무위로 그쳤을 것이다.

어디까지 끌려간 것인지 모르겠다. 몇 분이나 달린 건지도 모르겠다. 그는 그저 빠르게 걷고 있을 뿐이었지만 그와 보조를 맞춰야 했던 인환에겐 100미터 달리기와 한가지였다. 가뜩이나 술기운으로 오른 혈압에 전력 질주라니 독한 고문이 따로 없었다. 그에게 사로잡힌 오른쪽 손목은 아프다 못해 거의 감각조차 못 느낄 지경이었다.

“……위…… 하아…… 핫…… 위야…… 자…… 잠깐…….”

“…….”

“……위야…… 히…… 힘들어, 위야…… 위야…….”

“…….”

“하아…… 학…… 위…… 위야!!!”

절박한 부르짖음이 겨우 그의 귓가에 도달한 모양이었다. 느닷없이 걸음을 멈춘 그 때문에 인환은 거의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다행히 곧바로 뻗어온 그의 팔이 휘청거리는 허리를 끌어당겨 중심을 잡아주었다.

숨이 턱까지 닿아 한동안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폐도 아프고, 손목도 아프고, 마비가 있는 다리 관절도 끊어지는 것만 같았다. 비틀거리는 몸은 뒤에서 허리와 가슴 부근에서 팔을 교차시켜 끌어안고 있는 그에 의해 단단히 고정되고 있었지만, 쇠사슬처럼 죄어대는 그의 단단한 팔 근육조차도 아프게만 느껴졌다. 그저 온몸이 아프다는 자각뿐이었다.

“……아파…….”

“…….”

“……위…… 위야, 아파…… 그만…….”

“…….”

헐떡이듯 호소해보지만 상반신을 단단히 옥죄고 있는 팔은 좀처럼 풀어지지 않았다. 살을 파고들 정도로 움켜쥐고 있는 그의 손아귀도 관절이 하얗게 드러난 채 부들부들 떨리고만 있다. 정수리 근처에서 뿜어 나오는 그의 숨결은 화염처럼 뜨겁고 거칠었다. 함께 토해지는 맥주 냄새가 몹시 낯설었다.

“……선생님 선배만 아니었으면 한 대 갈겼을 겁니다.”

나지막하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엔 채 다 삭히지 못한 분노가 넘실거렸다. 가뜩이나 휘청거리는 다리가 그대로 바닥에 무너져 내릴 것처럼 힘이 빠졌다.

“부서지라구요? 그런 저주가 어딨어요? 그러고도 선배입니까? 친구예요?”

“……위…….”

“군대나 가라니, 선생님 다리를 보고도 그런 막말을 해요? 설령 가실 수 있다고 쳐요. 군대가 어떤 곳이란 걸 알면서도 그따위 개소리를 지껄여요? 전 안 가요. 절대로 안 가요. 휘도 무슨 수를 쓰든 군대엔 절대 안 보낼 거예요. 전 그럴 거예요.”

군대에 대한 병적일 정도의 격렬한 증오감은 틀림없이 형의 죽음에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가 이렇게까지 격분한 이유도 얼핏 이해가 되었다.

“……위야…… 그건…… 선배가 내 실력을 걱정해서…….”

“그따위가 필요한 게 실력이라면 차라리 삼류로 지내세요. 실력이 아니라 기생충이에요. 바퀴벌레예요. 선생님을 갉아먹는 송충이일 뿐이라구요.”

“……위야…….”

“부서질 필요 없어요. 부서지지 않아도 돼요. 변할 필요도 없어요. 변하지 마세요.”

“…….”

“괜찮아요. 지금 이대로도 선생님은 완벽해요. 최고예요. 내 최고의 친구예요.”

“…….”

“아셨죠? 명심하세요. 그 선배 같지도 않은 개자식 얘긴 귓등으로도 들어먹지 마세요.”

“…….”

“대답해요. 아셨죠?”

“……위야…….”

“대답해요!”

“……아…… 어…… 응…….”

“그래요. 앞으로 그런 개소리 하는 작자 있으면 친구 목록에서 삭제하세요. 선생님껜 하등 도움도 못 되는 얼간이 새끼들이니까요.”

“……바보…… 그랬다간 남아나는 친구 하나도 없겠다…….”

“상관없습니다. 저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게 해드릴 자신 있으니까.”

“……그…… 그만해…… 다…… 닭살 돋아…….”

“왜요.”

“……쪼…… 쪽 팔리잖아…… 너 이제 보니 무지 쪽 팔려…….”

“제가 왜요.”

“……모…… 몰라, 하여간…….”

밤이길 천만다행이었다. 정확히 위치를 파악할 수 없을 만큼 후미진 골목길에 자신들이 서 있다는 것도 고마웠다. 안 그랬다면 전신이 온통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그에게 안겨 있는 자신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날지도 모르니까. 이 전율이 흥분인지, 감격인지, 혹은 사랑인지…… 도무지 판단이 불가능한 감정적 동요로 제정신이 아닌 자신의 상태가 만천하에 발가벗겨질지도 모르니까.

등에 밀착해 있는 그의 몸이 몇 겹의 옷감을 사이에 두고서도 고스란히 느껴진다. 단단한 어깨, 힘을 줄 때마다 불끈거리는 가슴팍, 아랫배, 그리고 그의 성징……. 비누 냄새와 땀 냄새가 뒤섞인 그의 달콤한 체취에 넋이 나가는 것만 같았다. 어질어질 현기증마저 느껴졌다. 하느님. 너무나 오랜만인 강렬한 자극이 독사처럼 치명적인 춤사위로 섹스를 유혹하고 있었다. ……안 돼……. 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안 돼. 안 돼. 안 돼. 절대로 안 돼…….

“……처음…… 봤어…….”

이를 악물고 떠올린 누군가의 코믹한 표정에 매달렸다. 누군가의 표정을 바로 눈앞에서 보듯이 필사적으로 뇌리에 각인시켰다. 발작과도 같은 생각의 꼬리를 악착같이 물고 늘어졌다. 찰리 채플린의 무성 영화처럼 자꾸자꾸 리플레이 시켰다.

“……세혁 선배의 그런 얼굴…… 진짜 벙쪄서…… 꼭 영구 같았어…….”

“……?”

“……하긴…… 너 내내 순둥이 고삐리처럼 얌전했으니까…… 사실은 니가 얼마나 오만한 물건인지 선배가 알 턱이 없었을 테니까.”

“…….”

“……나 때문에 그 자리 참아주고 있단 거 감히 상상도 못 했겠지…… 푸…….”

“……?”

“……후…… 후흣…… 푸하하하하하…….”

“선생님?”

“푸풋…… 푸하하하하…… 윽…… 아하…… 핫…… 하하…….”

“……선생님…….”

“크크…… 우…… 웃겨…… 여…… 영구 같앴어…… 지…… 진짜 영구야…… 푸…… 푸풋…… 큭…… 푸아하하하…….”

“…….”

항상 시니컬한 자신감에 차 있던 한세혁이 느닷없는 따귀를 맞고 얼이 빠진 모습은 생각할수록 코미디였다. 못 말리는 독설가 한세혁도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구나……. 영구였다. 진짜 영구가 따로 없었다. 영구다, 영구다, 영구다, 통렬한 웃음이 아랫배를 들쑤시며 끊임없이 비어져 나왔다. 옳은 말만 한다고 애써 상처를 무시했지만 확실히 그간 원한이 쌓이긴 했나 보았다. 이렇게까지 통쾌한 걸 보면…….

온몸을 아프게 죄어오던 힘이 어느 순간 떨어져나갔다. 델 듯이 뜨거운 체온도, 마약에 취한 듯 혼미한 유혹도 따라서 사라졌다. ……다행이다…… 아아, 다행이다……. 아랫배가 끊어지는 것처럼 발작적인 웃음의 폭풍 끝에서 인환은 가까스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어쩐지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웃지 마세요.”

서늘하게 가라앉은 바리톤이 나지막하게 일갈한다. 여전히 어깨를 흔들며 소리 없는 웃음을 흘리고 있던 인환은 겨우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딱딱하게 굳은 ‘사자후 무표정’이 단숨에 인환의 시선을 잡아챈다. 서늘하면서도 격렬한 눈동자였다. 아직도 가라앉지 않은 분노가 생생했다. 숨통을 물어뜯기는 것 같은 알 수 없는 열기에 또다시 다리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달릴 때보다도 더 숨이 찼다.

“그 사람 때문에 웃지 마세요. 선생님이 웃어주시는 거 화가 나요.”

“…….”

“……쉽게 웃어주고 쉽게 용서해주지 마세요.”

“…….”

“제가 나이가 어린 것도 화가 나요. 선생님과 동갑만 돼도 그런 돼먹지 못한 인간들이 선배랍시고 선생님 함부로 대하는 거 막을 수 있을 텐데.”

“……그렇게 나쁜 사람 아냐, 위야. 그런 선배였음 나도 상대 안 했을 거야.”

“나쁜 사람 아니면요? 지가 뭔데 부서져라 마라, 군대 가라 마라 명령해요? 지가 그림을 알면 얼마나 안다는 거예요? 저도 공부할 겁니다. 공부할 거라구요. 지금은 시간이 없지만…… 학력고사 끝나면 정말 열심히 책 찾아봐서 반드시 그 사람 코를 납작하게 해줄 겁니다.”

“…….”

채 스러지지 않은 분노를 대변하듯, 하얗게 관절이 드러날 정도로 움켜쥐어져 있던 그의 손으로 자신의 것을 가져갔다. 피아니스트 신동의 손. 달래듯 손등과 손바닥을 어루만지며 엉겨 붙은 손가락을 풀어갔다. 한동안 완강하게 버티던 손가락이 끈질긴 접촉에 무너지듯 백기를 들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살며시 깍지를 끼자, 비로소 자각한 듯 그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한동안 물어뜯을 것처럼 인환의 시선을 잡고 있던 격렬한 눈동자는 이제 마주 쥔 서로의 손에 고정돼 있었다.

버거웠던 호흡이 비로소 제 속도를 잡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맥이 탁 풀려 후들거리던 다리에도 조금씩 힘이 돌아오고 있었다.

정말로 위험한 ‘친구’가 아닐 수 없었다. 울고 싶은 기분이 점점 더 강해졌지만 참을 것이다. 하느님. 자신이 들이는 노력은 역시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있을 것이다. ‘친구 연습’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럽다 한들 그가 자신에게 선사하고 있는 이토록 극진한 ‘우정’에 값할 턱은 없었다. 자신이 제물로 바치는 고통이 크면 클수록 그가 건네주는 ‘우정’의 가치는 천정부지로 치솟을 터였다. 물론. 그것이 자신에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인환은 그 언제까지고 도무지 판단할 수 없을 터였다.

“……집에 가자, 위야. 바래다줄게…….”

고조된 감정에도 불구하고 흘러나온 자신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짓고 마주 쥔 손가락을 향해 있던 ‘친구’의 고개가 다시금 자신의 시선을 붙들었다. 감정이 읽힐까 두려워 잠시 마주 보았을 뿐 서둘러 외면했다. 처음 보는 낯선 골목 풍경이 그의 얼굴을 대신해 시야 가득 밟혀들었다.

한동안 고개를 빼고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좀 더 간판이 화려한 쪽으로 방향을 정했다. 다행히 얼마 헤매지 않아 눈에 익은 도로변이 나왔다. 차를 주차해둔 곳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깍지가 껴진 서로의 손바닥에서 땀이 배어나올 때까지도 내내 마주 쥐고 있던 그의 손을 비로소 풀고, 차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얼마 만인가 하고 문득 생각했다. 그의 손을 잡은 지 도대체 얼마나 됐지……? 축축하게 젖은 한쪽 손바닥을 무언가 소중한 것이라도 움켜쥔 양 꼭 쥐고 있는 것을, 그러나 인환은 미처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운전하실 수 있겠습니까?”

자신을 따라 조수석에 앉으면서도 무뚝뚝하게 물어오는 그다. 격렬한 분노의 감정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지만 별로 기분이 풀린 것 같지는 않았다. 약간 홍조를 띠고 있을 자신의 얼굴을 살피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별로 안 마셨잖아. 괜찮아, 위야.”

조금이라도 취했다면 그의 안전을 염려해서라도 운전은 절대로 안 할 자신이란 걸 그가 모를 리 없다. 납득한 듯 순순히 안전벨트를 매는 그를 확인하고 차를 출발시켰다. 11시 전에는 반드시 데려다주고 싶어서 가능한 한 속도를 냈다. 운전하는 내내, 말 한 마디 없이 토라진 티를 팍팍 내는 그가 한편으론 우습고 또 한편으론 목이 멜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다음 주에도 금요일쯤에 한 번 볼까? 추석 연휴엔 공부만 한댔으니까.”

이제는 자신의 동네처럼 익숙해져버린 고척동 입구까지 왔을 때, 슬슬 눈치를 살피며 말을 붙여보았다.

“예.”

짧은 대꾸. 여전히 삐져 있다.

“……그래. 그럼 전날 내가 전화할게. 영화나 뭐 재밌는 거 있는지 알아보고, 응?”

“예.”

“……오늘 못 본 연극을 보는 것도 괜찮겠지?”

“예.”

“밤에 한강 유람선 타는 것도 재밌다는데…….”

“예.”

말하기 싫은 티가 역력하면서도 지독하게 성실한 성격답게 대답은 한 번도 건너뛰지 않는다. 슬쩍 곁눈질로 보니 양미간에 확실한 팔자 주름이 새겨져 있다. 저 정도면 가히 데프콘 스리급 삐짐이다. 한세혁에 대한 분노도 여전한 것 같았지만, 어린애처럼 감정을 폭발시킨 스스로가 무척 못마땅한 듯싶었다. 비죽비죽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인환은 입술을 깨물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주차 공간이 남아 있어 집 바로 앞 골목길까지 비집고 들어가 차를 세웠다. 시계를 보니 10시 57분. 속도를 낸 덕분에 다행히 11시는 넘지 않았다.

“……어서 들어가봐.”

차를 세우고도 한동안 움직일 생각을 않는 그에게 채근했다. 밤이 늦지만 않았다면, 아니, 실은 그가 수험생만 아니라면 좀 더 그와 시간을 보내며 토라진 기분을 풀어줄 수 있을 텐데……. 이렇듯 달콤한 그의 지극한 ‘우정’을 실컷 만끽할 수도 있을 텐데……. 마냥 아쉬운 마음만 든다. 하긴 언제라고 안 아쉬울까…….

“……주무시고 가세요.”

불쑥 내뱉어진 퉁명스러운 명령조에 눈이 절로 크게 뜨였다. 오는 내내 앞 유리창만 뚫어져라 응시하던 그의 시선이 어느새 인환의 얼굴로 향해 있었다. 미간의 팔자주름은 사라졌지만 여전한 ‘쪼잔 무표정’.

“……에……?”

“늦었으니까 주무시고 가세요. 휘 없어요.”

“?!!!”

“선생님 친구분들 집에서도 가끔 주무시죠?”

“……어…… 에……?”

“외박 같은 거 하시죠?”

“……그야…… 술 푸고 얘기하다 보면…… 밤 새울 때도 많으니까…….”

곤란하다는 생각만 곱씹고 있어서 말투는 자연 어눌해졌다. 다른 때라면 모르지만, 오늘은 유난히 감정적인 동요가 심한 날이었다. 치통도 괴롭고, 많이 가라앉았다고 생각했던 그에의 로맨틱한 감정도 잔뜩 들쑤셔진 상태였다. 온몸이 저릴 듯 달콤한 유혹이지만 오늘만은 안 된다는 위험 신호가 사방에서 깜빡이고 있다.

“그 사람 집에서도 주무신 적 있어요?”

“……그…… 사람……?”

“재수 없는 선배요.”

“……재수……? 아, 세혁 선배?”

“예.”

“……그야…….”

“많아요?”

“……글쎄…… 많은가……? 잘 기억이…… 서너 번쯤 되나? 기하 선배 아틀리에에선 많이 자봤지만…….”

“그럼 주무시고 가세요.”

“……별로 늦지 않았는걸, 뭐…… 난 늦게 자는 편이니까…… 혜윤이도 걸리고…….”

“혜윤이가 왜요? 성준이도 와서 가끔 자고 가는데요.”

“……그건…… 그야…….”

“……귀신 안 무서우세요, 오늘 밤?”

거듭 부정적인 대답을 흘리는 자신이 못마땅했는지, 잠시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던 그의 얼굴이 문득 서늘해졌다.

“……?”

“귀신 꿈 꾸시면 어떡하시게요? 지금도 어쩐지 선생님 주변이 어둑어둑한 거 같은데…….”

“으악!!!!! 저…… 정말?!!!!!!”

등줄기로 서늘한 한기가 달려 나가며 소름이 쫙 돋았다. 자신도 모르게 그의 팔소매를 움켜쥐며 뒤를 힐끔거리자 쿡쿡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다시 시선을 돌리니 노골적으로 어깨까지 떨며 웃음을 흘리고 있는 그가 보였다. 젠장.

“……우이씨…… 모…… 못됐어, 너……!”

섬뜩하게 다가든 공포감에 심장을 벌렁거리면서도, 비로소 기분이 풀린 듯 흥겨운 웃음을 웃는 그에게 안도하는 인환이었다.

“……그러니까 주무시고 가세요. 아침에 맛있는 해장국도 끓여드릴게요.”

하도 가슴이 뛰는 통에 대답도 제대로 못 하고서, 빙그레 웃는 그의 핸섬한 얼굴만을 바라보았다.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어느새 안전벨트를 풀고 차 밖으로 빠져나간 그는 보닛을 돌아 운전석의 문을 열고 있었다.

“차 안이 어째 으스스한 느낌이 듭니다. 선 화랑 사장님이 군대 가서 봤다는 빨치산 귀신이 생각나네요.”

“문위!!!!!!”

“하하, 빨리 나오세요.”

머리털이 주뼛 서는 연상 작용에 부랴부랴 차에서 빠져나왔다. 떨리는 손으로 가까스로 차 문을 잠그곤 막 몸을 돌리던 중인 그의 팔소매를 와락 움켜쥐었다. 쿡쿡거리는 웃음소리가 또다시 그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젠장.

“……또…… 또 한 번 귀신 얘기 꺼내면 가만 안 둘 거야, 너?!!!”

“큭큭큭…….”

“……우…… 웃지 마!!!”

“……예…….”

“웃지 말라니까!!!”

“…….”

소리 없는 웃음은, 그러나 그가 집 현관 앞으로 가 열쇠를 밀어 넣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놀리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지독한 귀신 공포증이 정말 한스러웠다. 선배나 동기들이 그렇듯이, 그도 툭하면 자신의 이 공포증을 놀려먹을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젠장. 하여간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인종들이다.

자고 있을 혜윤이를 생각해 잔뜩 발소리를 죽인 채 집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꽤 오랜만에 들어와보는 그의 집은 역시 깔끔 그 자체. 사방에 먼지 한 톨 없고, 정리정돈은 무슨 대기업 오너의 오피스를 연상시킨다.

“갈아입을 옷 드릴 테니까 먼저 샤워하세요. 욕실장 열면 새 칫솔이 있을 거예요. 하나 꺼내 쓰시구요.”

거실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서 그의 꽁무니만 좇고 있던 인환을 그가 욕실로 밀어 넣었다. 피곤할 그를 기다리게 할 수도 없어 서둘러 옷을 벗고 샤워를 했다.

귀신에게 쫓겨 얼떨결에 따라 들어오긴 했지만 역시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온다. 한 달 전 보성으로 놀러 갔을 때에야 어쩔 수 없었다고 쳐도, 또다시 그와 한 방에서 밤을 보내야만 한다니 솔직히 난처했다. 아직은 스스로를 믿을 수가 없었다. 마치 살얼음판을 딛고 있는 것처럼 만사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의 상태를 모를 리 없을 텐데 이렇게 무신경할 정도로 동침을 강요하는 그도 원망스러웠다. 그야, 어떻게든 빨리 결론을 내리고 싶어하는 그를 모르지는 않는다. 친구도 아니고, 그렇다고 고객도 아닌 자신을 자연스레 대해야만 하는 이 어정쩡한 유예 기간이 그라고 편할 리는 없다.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어딘가 서둘러 결정을 내리길 은근히 강요하는 듯한 그의 태도는 역시 좀 서운하다. 감정이란 게 말처럼 쉽게 변할 리가 있겠는가 말이다. 하긴 한 번도 사랑을 해본 적이 없는 그이니 오죽하겠는가마는.

“좀 크긴 하겠지만 갈아입으세요, 선생님.”

갑자기 욕실 문이 열리며 그가 들어서는 바람에 인환은 기절초풍을 했다. 좁은 욕조 안에 선 채 샤워를 하던 중이라 부랴부랴 뒤돌아서서 치부를 가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노…… 노크 좀 하면 안 되냐……? 노…… 놀랐잖아, 씨…….”

전신이 시뻘게진 것이 따스한 물줄기 때문이라 여겨주길 바랬다. 생각해보니 이렇게까지 당황하는 자신도 우습다. 어차피 자신의 몸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것이 없을 그인데.

“……전보다 더 마르신 거 같아요. 보약이라도 드셔야겠어요.”

어딘가 고요해진 목소리가 대꾸했다. 등을 돌린 채라 그의 표정을 알 수는 없었지만 전신으로 떨어지는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마르긴 뭘…….”

빨리 나가. 나가라구, 젠장……. 태연을 가장하며 몸 여기저기로 샤워 꼭지를 옮겨갔다. 잔뜩 숨을 죽인 거며, 살짝 떨고 있는 손을 부디 그가 못 알아채기를……. 문 닫히는 소리에 돌아보니 수건걸이에 그의 것으로 보이는 파자마가 걸려 있다. 자신이 벗어두었던 옷들은 그와 함께 사라지고 없었다. 숨죽인 한숨이 그제야 길게 뿜어 나왔다.

비눗물을 닦아내고 그가 두고 간 파자마를 주워 입었다. 그의 체취라도 맡아질까 싶어 코를 킁킁거려보지만 청결한 섬유 유연제 냄새만 가득해서 실망하고 말았다. 그래도 그의 몸에서 늘 맡아지던 것과 똑같은 비누 냄새가 나는 몸에 그의 파자마까지 걸쳐 입는 기분은 황홀했다.

그와 동생인 휘가 함께 쓰는 안방엔 이미 이부자리가 깔려 있었다. 50센티미터쯤의 간격을 두고 요도 따로, 이불도 따로인 침상이 달라진 서로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의 옷은 TV 옆 낡은 책상 위에 얌전히 개켜져 있었다.

“……정말 크네요.”

방 안에 들어선 자신의 파자마 차림을 훑어보며 그가 싱긋 웃는다. 키와 체격 차이가 꽤 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그의 옷을 입어보니 생각했던 이상인 것을 실감한다. 부대자루를 뒤집어쓴 것처럼 품은 돌아가고, 소매는 너무 길어 손도 보이질 않는다. 바짓단은 질질 바닥을 쓸고 있다.

“……니가 거구인 거야. 난 대한민국 표준 사이즈라구…….”

“하하, 예.”

기분 좋은 웃음이 매달린 시선이 여전히 볼품없는 몸을 향해 있어 조금 긴장이 되었다. 잔뜩 멋을 부린 모습으로도 그의 시선 아래 노출이 될 땐 늘 자신이 없다. 하물며 그의 낡고 커다란 파자마를 거적처럼 뒤집어쓴 지금은 오죽하랴.

“……샤워 안 해? 빨리 하고 자야지?”

또 다른 파자마 한 벌을 집어 든 채로 자신을 굽어볼 뿐, 좀처럼 움직일 생각을 않는 그를 채근했다.

“……예. 졸리면 먼저 주무세요.”

그가 느릿느릿 대꾸하며 돌아서자 겨우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 방문을 나서는 그의 얼굴이 어쩐지 희미하게 상기되어 보였다.

달리 할 일도 없고, 난처하고 어색한 기분도 여전해서 미적미적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잠이 오긴커녕 미약하게 남아 있던 알코올 기운마저 완전히 가신 터라 정신은 말똥말똥 일어서기만 했다.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안다. ‘친구’로서 거리낌 없이 한 방에서 잠도 잘 줄 알아야 하고, 함께 발가벗고 목욕을 해도 ‘친구’의 나체에 절대로 발정 따위 해선 안 된다는 것도.

새삼 까마득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언제쯤이나 돼야 진심으로 편해졌다고 선언할 수 있을 것인가?

그가 언제 자신의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온 것인지는 기억에 없었다. 어렴풋이 의식이 돌아오며 처음 든 자각은, 누군가의 익숙한 체취와 따스한 체온이 몹시 기분 좋다는 사실이었다. 기분 좋은 것을 향해 좀 더 바짝 몸을 붙인 채 끌어안자 상대도 팔에 힘을 주며 자신의 허리를 감아 들였다. 단단한 악력이 허리와 상반신에 가해지자 노곤하고 행복한 충만감이 더해졌다. 한동안 나른하게 기쁨을 만끽하다가 무언가 불안한 자각이 끼어들며 충만감을 방해했다. ……정신 차려……. ……어서 일어나, 장인환……. 불길하면서도 위협적인 명령이 창처럼 뇌리에 들어와 박혔다.

번쩍 눈이 뜨였다. 푸르스름한 여명 아래, 조각 같은 윤곽을 그리고 있는 그의 얼굴이 시야 가득 파고들었다. 찬물을 뒤집어쓴 것마냥 놀라서 한동안은 옴짝달싹 할 수도 없었다. 차츰 기억 회로가 돌아가며 잠자고 있던 기억들이 하나둘 떠올라왔다.

무정할 정도로 금세 곯아떨어져버린 그의 곁에서 꽤 오랫동안 뒤척이며 잠을 못 이루던 일, 거의 새벽 3시가 가까워서야 선잠이 든 일, 그의 심술궂은 예언대로 귀신에 내리 쫓기는 꿈을 꾼 일, 고통스러운 자신의 잠꼬대에 그가 비몽사몽하면서도 다가와 안아준 일, 그의 늠름하고 따스한 품 안에서 안심하며 잠이 든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갑자기 심장 고동이 빨라지며 얼굴로 뜨거운 열기가 솟구쳤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그의 뜨거운 체온도, 숨 막히는 체취도 낭패감을 가중시켰다. 나무토막처럼 빳빳하게 긴장한 몸은 한동안 아무런 움직임도 취할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자신의 허벅지 안쪽에 닿아오는 것은 그의 딱딱해진 페니스였다. 깊이 잠든 걸 보면 그저 생리 현상임에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그 치명적인 위험성마저 거세된 것은 아니었다. 전립선 안쪽이 찌르르하게 전율하며 당장 자지 끝으로 피가 몰렸다. 전신으로 치닫는 화끈한 열기에 아찔한 현기증마저 느껴졌다. 목이 바짝 마르고, 눈 속은 불이 붙은 것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서로의 피부를 가로막고 있는 파자마를 찢어발겨 당장이라도 맨살의 그에게 닿고 싶은 욕망에 몸서리쳤다. 지금 당장, 내장 안쪽 깊숙이 그의 우람한 분신을 품을 수만 있다면 살인이라도 저지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필사적으로 숫자를 세며 도망쳐버린 이성을 끌어오기 위해 애썼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움직일 기력(이라기보단 이성)이 모였다. 나무뿌리처럼 뒤엉킨 다리를 천천히 빼내었다. 긴장한 것과는 달리 싱거울 정도로 쉽게 결합이 풀어졌다. 허리에 둘러져 있던 그의 팔을 들어 상반신을 빼내는 데도 그리 힘은 들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자신의 몸을 끌어안긴 했지만 끌어안은 즉시 다시금 깊은 잠에 곯아떨어진 때문일 것이다.

사시나무 떨듯 후들거리는 온몸을 가까스로 가누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빳빳하게 일어선 자지가 하늘거리는 파자마 천을 뚫고 나올 것만 같았다. 겁에 질린 나머지 그의 얼굴을 쳐다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가 깨기 전에, 그가 깨어나 자신의 이 한심한 사태를 눈치채기 전에 어서 빨리 그의 집을 벗어나야 한다는 궁리만 절박했다.

날은 거의 밝아 있었다. 완연한 가을을 예고하듯 얇은 파자마 자락을 비집고 선연한 한기가 느껴졌다. 최대한 소음에 신경을 쓰며 옷을 갈아입었다. 방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 그의 얼굴을 보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지만 그 이상으로 두려움이 거셌다. 결국 그를 외면한 채 살그머니 방문을 열고 집을 빠져나왔다. 흡사 도둑고양이 같았다.

달음박질을 치듯 주차해둔 BMW로 다가가 막 열쇠를 끼우려는데 뒤에서 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뒷덜미가 당기는 듯한 불길한 육감을 존중한다면 뒤를 돌아다봐선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이대로 모른 체 차를 몰고 도망치면 되는 일이라고. 물론 몸은 의지의 명령보다 감정의 명령에 복종을 하기로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천천히 고개가 돌아갔다.

파자마 차림에 슬리퍼를 걸친 그가 방금 잠에서 깬 부스스한 몰골로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짐작을 했으면서도, 그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마치 심장이 저 아래로 뚝 떨어지는 듯한 아득한 충격이 왔다.

어딘가 생각에 잠긴 듯한 익숙한 무표정이 고요히 인환의 시선을 잡고 있었다. 인환의 일거수일투족은 물론, 그 저의까지 송두리째 꿰고 있는 눈길이었다. 밧줄에라도 꽁꽁 묶인 듯, 한동안 온몸을 꼼짝할 수가 없었다. 얼어붙은 입으로부터도 단 한 마디의 말도 흘릴 수 없었다.

영원처럼 긴 시간이 흐른 후, 마침내 흐릿한 미소가 그의 입술 끝에 살짝 달라붙는 게 보였다. 쓸쓸함이 깃든 서글픈 미소였다. 자신 역시 따라서 미소를 지은 것 같다. 물론 확실하지는 않다. 반쯤은 넋이 나간 상태로 그의 눈치만 살피기에 급급했으니까.

“……오늘 치과에 꼭 가세요…….”

탁한 쇳소리 같은 그의 목소리가 조금 굳어진 입술 틈으로 조용히 흘러나왔다.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손을 흔들었던 것도 같다. 몸을 돌려 차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킬 때까지도, 골목을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도 그는 대문 앞에 우두커니 선 채 인환을 배웅하고 있었다.

……석 달로는 무리잖아……. 무리라는 거 알고 있잖아, 위야……. 차마 입 밖에 꺼내지 못했던 변명을 강박처럼 되뇌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줘…… 기다려줘, 위야…… 조만간 곧…… 곧 정리할 테니까…… 정리하고 말 테니까…… 기다려줄 거지……? 응……? 그럴 거지, 위야……?

골목을 완전히 벗어나 더 이상 그의 모습을 훔쳐볼 수 없는 큰길에 도달하고 나서야 비로소 가슴의 두근거림이 가라앉았다. 질겁했던 오금도 차츰 제자리를 찾아갔다. 불룩하게 돛대를 쳤던 하반신은 어느새 완전히 풀이 죽어 있었다.

이른 아침, 가을색이 완연한 도시의 거리는 고요했다. 상점들의 셔터는 대부분 굳게 닫힌 채였고 행인도, 승용차들도 드문 편이었다.

스스로를 한심스럽게 생각한다거나 비참하게 여기고 싶지 않았다. 고작 석 달이 지났을 뿐이라고 내내 용기를 북돋웠다. 그랬다. ‘벌써’가 아니었다. ‘고작’ 석 달일 뿐이었다.

막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도심을 향해 인환은 힘껏 액셀을 밟기 시작했다. 그랬다. 아직은 파이팅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