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1990년 9월. 문위(文偉)
“……벌써 가는 거야? 저녁 먹고 가지……?”
침대 쪽에서 여자의 나른한 음성이 들렸다. 샤워를 하기 전이었다면 여자의 유혹에 졌을지도 모른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장장 다섯 시간을 풀타임으로 섹스만 해댔으니 지칠 법도 했다. 별로 절제할 생각도 없어서 네다섯 번인가 사정을 하기까지 했다. 기진맥진해질 정도로 하드한 플레이를 펼친 셈이다.
“……내일이 추석인데 가은 씨도 집에 가보셔야죠…….”
완곡하게 거절을 말하고 여자의 화장대 위에 벗어두었던 옷을 차례로 주워 입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고객과 잠을 자고픈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아무리 몸이 피곤해도 내 집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자는 것만이 완벽한 휴식이 된다.
“후후, 명절은 가족과 함께라는 거니? 의외로 고리타분하네?”
“……동생들이 어리니까요. 외로움을 많이 타기도 해서…….”
“그래, 그렇겠지…….”
금방 동정적인 말투가 되는 여자를 모른 체하며 생각해두었던 제안을 하기 위해 돌아섰다. 시트를 둘둘 말고 모로 누운 자세로 여자는 미소를 보내오고 있었다. 서쪽으로 막 넘어가기 시작한 햇살이 여자의 모양 좋은 실루엣을 불그스름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땀에 젖은 채 이리저리 엉킨 머리카락이며, 여전히 흐릿한 홍조를 머금고 있는 얼굴이며, 여자에겐 바로 몇 분 전까지 나눈 천박한 정사의 흔적이 역력했다.
그런대로 상성은 맞는 편이어서, 자신의 욕구대로 밀어붙여도 여자는 매번 자지러지곤 했다. 서비스인지, 그저 자신의 욕구 충족인지 의심이 들 만큼 자신을 방기하고 있는 요즘이었다. 여자에게서 대금을 받는 것이 미안하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섹스광 같은 자신의 탐닉을 여자가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여자 역시 꽤 많이 놀아본 솜씨였고, 고객과 남창으로선 이상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궁합이었다. 서로의 섹스 플레이에 만족하고 있는 만큼 여자도, 위 자신도 일말의 주저함이 없었다.
계약은 자신이 정해둔 규칙 그대로 일주일에 단 한 번. 일주일에 한 번 여자를 만나 함께 세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지만, 번번이 시간은 오버되기 일쑤였다.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감히 생각도 못 했을 일대 사건이었다. 고객 쪽에서 그 어떤 값비싼 대가를 제시한다 해도 자신이 정해둔 시간을 초과하는 일은 없었을 터이다.
그러나 요즘의 자신은 달랐다. 조금 문제가 생긴 것이다. 마치 섹스 중독증에라도 걸린 것처럼 수시로 솟구치는 성욕을 주체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일주일에 세 시간 가지고는 어림도 없었다. 게걸스럽게 서로의 육체를 탐하다 보면 어느새 세 시간이 훌쩍 넘어가기 일쑤였다. 지난주엔 저녁 7시에 만나 새벽 3시까지 쉬지 않고 놀아난 덕분에 코피가 터진 일도 있었다. 잠들기 직전이나 새벽에 자위를 하는 것도 거의 일과가 되다시피 했다. 그나마 여자가 그럭저럭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다면 무리를 해서라도 또 다른 고객을 물색했을 것이다.
스스로도 좀 어이가 없었지만, 별로 고민이 된다거나 수치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학교에서 급우들이 하는 음담패설을 들어보면 그게 자신만의 문제는 아닌 모양이었다. 요는 한창때라는 점이었다. 하루에도 서너 번씩 자위를 한다는 병적인 친구도 있을 정도고 보면.
한 가지 난처한 건 소중한 그에게도 여전히 욕망을 느낀다는 사실이었다. 여자에게 가능한 한 마음껏 욕구를 발산하는 덕분에 그리 심각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뿌리가 뽑힌 것은 아니었다. 평소에는 별 자각을 못 하다가도 그의 누드를 우연찮게 목격하는 날이면 자신의 수치스러운 짐승은 어김없이 그 존재를 증명하곤 했다.
지난주 금요일만 해도, 샤워 중인 그의 나신에 자동 기계처럼 발기해버린 자신이었다. 도망치다시피 방으로 되돌아와 오른손 신세를 지게된 것은 물론이었다. 헤어지는 게 너무나 아쉬운 나머지 자고 가라며 반강제로 집 안에 들이다시피 했던 행동을 그 얼마나 후회했던가. 역시 1년 동안 몸을 섞은 습관은 쉽사리 잊힐 수 있는 문제는 아닌 모양이었다. 자신이 이럴진대 하물며 자신에게 애정을 품고 있을 그는 오죽할까 싶기도 했다. 다음 날 새벽, 살인이라도 저지른 사람마냥 혼비백산해서 몰래 자신의 집을 빠져나가던 그의 모습은 여전한 아픔이었다. 자신에게 욕망을 품은 것을 들키지 않으려 기를 쓰는 그가 애처롭다 못해 원망스럽기까지 했었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쓰라리게 생각했었다.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은 그에게 상처이자 고통인 모양이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다시는 서로 안 보는 편이 더 나은 게 아닐까, 고통스러운 생각을 자신은 내내 곱씹고 또 곱씹었었다.
“……왜? 무슨 얘기 할 거 있어?”
잠깐 생각을 더듬고 있던 자신이 의아했는지 여자가 물어왔다.
“아, 예. 괜찮으시면 약속 요일을 목요일로 옮겼으면 하는데요. 괜찮을까요?”
“목요일? 목요일 저녁에?”
“예.”
“나야 오히려 좋지. 월요일보다야 주말이 더 가까우니 부담도 적고.”
여자의 만족스러운 대꾸에 자신도 상냥한 미소로 보답해주었다. 그와 정해진 만남은 대개 금요일이었다. 하루 전날 여자와 실컷 뒹굴다 보면 그를 향해 발정을 하게 되는 난처한 상황도 대부분 줄어들 터였다.
“……그만 가보겠습니다, 가은 씨. 추석 잘 보내세요.”
“응, 너도……. 오기 전에 전화해…….”
“예.”
하품을 입에 문 채 애교 섞인 답례를 건네는 여자를 뒤로하고 빌라를 빠져나왔다. 전철과 버스를 번갈아 갈아타고 한 시간 이상 가야 할 걸 생각하니 조금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 잠깐이나마 눈을 붙이고 나오는 것이 좋았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명절에 혜윤이 혼자 저녁을 먹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군다나 그 이유가 과도한 섹스로 기운이 딸려서라고 한다면 자신은 스스로를 절대로 용서 못 할 것이다.
추석 연휴라선지 거리는 선물 상자와 쇼핑백을 산더미처럼 짊어진 사람들로 가득 붐비고 있었다. 귀성 인파가 서울을 많이 빠져나간 모양으로, 도로엔 한결 자동차 수가 줄어든 편이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한낮의 기온은 여전히 비교적 높았지만 가을색은 완연했다. 추석이 지나고 한바탕 비라도 뿌리고 나면 기온도 단숨에 하강 곡선을 그릴 것이다.
학력고사를 치르고 다시 한겨울을 보내고 나면 또 머잖아 봄이 오겠지. 그땐 자신도 교복을 벗고 대학생이 돼 있을 것이다. 비로소 어른이 된다. 정해둔 목표에도 한 발짝 더 다가가게 되는 것이다.
전철에서 버스로 갈아탔을 땐 확실히 명절을 실감했다. 평소라면 몸이 비빔밥처럼 짓이겨질 만원버스가 빈자리가 서너 개 보일 정도로 텅텅 비어 있었다. 횡재한 기분으로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집에 도착할 때까지 꾸벅꾸벅 졸았다. 새우잠이라고 해도 노곤한 피로감을 회복하기엔 그만일 꿀 같은 단잠이었다. 내려야 할 정류장을 막 지나치려는 기사에게 미안하다는 사과를 되풀이하며 차에서 내렸을 땐, 그럭저럭 평소의 기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시장에 들러 삼겹살 두 근과 잡채 재료를 샀다. 송편도 한 봉지 사고, 큰맘 먹고 혜윤이가 좋아하는 녹두 빈대떡 서너 장과 동태전도 좀 샀다. 찬거리는 한 손에 들고, 아직 따스한 온기를 품고 있는 부침개 봉지는 품 안에 넣은 채 집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어둑어둑한 땅거미가 내려앉은 익숙한 골목길이 정겨웠다. 자신처럼 종종걸음을 치는 이웃들도 정겨웠다. 집에 도착하면 현준 형네 집에 전화부터 하리라고 결심했다. 어떡하든 휘를 설득해서 집에 보내달라고 부탁할 요량이다. 정 안 되면 내일 아침 혜윤이와 함께 현준 형네로 가볼 생각도 한다. 현준 형도 보고 싶고, 성준이도 보고 싶다. 휘는 말할 것도 없다. 추석이다. 맛있는 음식들을 푸짐하게 차려놓고 모두 함께 모여 앉아 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추석이다. 차가운 감옥에서 고생하고 있을 윤열이 형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추석이다. 소중하고 소중한 그도 함께 모여 앉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추석이다. 추석이다. 추석이다. ……언젠가는…… 사랑하는 가족이 모두 함께 모여 송편을 먹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집 앞에 세워진 BMW의 익숙한 차체를 보았을 때, 위는 한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당장은 이루어질 리가 없을 소원을 너무나 간절히 바라는 바람에 헛것이 보이는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틀림없이 그가 와 있다는 의미였다. 사랑하는 친구가 와 있다는 의미였다. 여러 가지 꺼림칙한 이유들 때문에 명절 동안의 만남을 거절한 친구였다. 예상대로라면 절대로 만남이 불가능한 친구였다. 불가능한 친구인데 이렇게 와 있다. 역시 만남이 불가능한 윤열이 형도 와 있을지 모른다. 혹시 휘까지 와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윤열이 형과 휘까지 와 있는 거면 성준이와 현준 형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물론 터무니없는 연상 작용에 터무니없는 소원이었다. 한심스러운 과대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다면 자신은 틀림없이 미친놈일 것이다. 그럼에도 대문 안으로 뛰어드는 자신의 발걸음은 흡사 경주마의 그것과 한가지였다.
“혜윤아?! 혜윤아, 문 열어!!!”
열쇠를 꺼내는 시간도 아까워 무턱대고 현관문을 두드렸다. 양손에 가득 든 짐 탓에 발길질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오빠?……! 왜 그래? 알았으니까 그만 두드려. 시끄럽잖아…….”
구시렁거리는 혜윤이의 대꾸와 함께 현관문이 활짝 열렸다. 환한 거실 불빛이 시야 가득 밟혀 들어왔다. 허기진 시선이 사랑하는 누이와 친구의 얼굴을 주워 담는 데는 단 1초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와, 그게 뭐야, 오빠?!!! 장 봐 온 거야?!!!”
양손에 주렁주렁 매달린 검정 비닐봉지를 발견한 혜윤이에게선 기대했던 대로 환호성이 터졌다.
“뭐야?!!! 맛있는 거 많이 사 왔어?!!!”
“……그래. ……선생님 오셨어요……?”
“뭐야?! 뭐 사 왔어?! 선생님께서도 갈비 무지 많이 가져오셨다?! 선생님 어머님께서 양념까지 다 해주신 거래! 그냥 불에다 올려놓고 익히기만 하면 된대!”
“……삼겹살이랑…… 이것저것…… 너 좋아하는 녹두전도 사 왔으니까…….”
“우앗, 정말?!!!!!!”
“삼겹살이랑 전은 그냥 두고 잡채는 내일 해 먹게 재료들 냉장고에 넣어둬라.”
“어, 오빠!”
냉큼 봉지들을 빼앗더니 부엌으로 달려가는 혜윤이다.
스카이콩콩처럼 방방 뛰는 혜윤이와는 달리 그는 조금 이상했다. 여느 때처럼 잔뜩 멋을 부린 갈색 톤의 캐주얼 차림이 눈부셨다. 난처한 듯 수줍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얼굴도 여전히 몹시 귀여웠다. 분명 평소와 별다르지 않은 그였지만 무언가 위화감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언제 오셨어요?”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서며 형식적인 물음을 던졌다. 미리 연락도 않고 찾아온 그에게 조금이나마 불쾌감을 표시하기엔 자신은 너무나 들떠 있었다. 정작 공부로 바쁘다고 핑계를 댄 것은 자신이면서도 뜻밖에 그리운 얼굴을 마주 대하고 보니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추석이 아닌가. 명절이란 말이다. 사랑하는 가족끼리 모두 모이는 날이다.
“……방금 왔어. 10분쯤 됐나? 금방 가려던 참인데…….”
“벌써요? 이왕 오셨는데 저녁 드시고 가시죠?”
“아냐. 곧 집에 들어간다고 엄마한테 약속했는걸. 집에 갈비 선물 세트가 많이 들어와서 잠깐 들른 거야. 너랑 혜윤이 고기 무지 좋아하잖아. 남겨서 버리느니…… 진짜야. 엄마 거래처 사람들 많거든…… 선물도 많이 겹치고…… 냉장고가 미어터질 지경이라서…….”
변명하듯 자꾸만 많다는 말을 거듭한다. 자신에게 선물을 주는 것에 무척 주의를 기울이곤 하는 그를 모를 리 없다. 그를 그렇게 만든 것도 자신이면서 거듭 변명만 되풀이하는 그를 보니 속이 상한다. 이렇게까지 눈치를 볼 필요는 없는데…….
“예. 잘 먹을게요, 선생님. 고맙습니다.”
그가 더 이상 근심하지 않도록 서둘러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아니나 다를까, 휴우 하며 안도의 한숨임에 분명한 과장된 호흡을 장난처럼 토해내는 그다.
“……고맙긴. 남아서 버리게 될까 봐 주는 건데…….”
“그래도요.”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그의 시선을 마주하기 위해 애를 써보지만 줄곧 혜윤이에게 가 있는 사랑스러운 그것을 잡기란 좀처럼 쉽지가 않다. ……시선을 피하고 있는 건가?
“……그럼 이만 가볼게, 위야. 피곤할 테니 씻고 쉬어.”
“정말 가시게요?”
“……엄마 땜에…… 저녁 안 먹고 기다린댔거든…….”
“그렇군요…….”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어머님은 그저 핑계고, 어쩐지 필사적으로 도망치려는 듯한 그의 기색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되도록 자신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하는 저의도 분명하게 전해졌다.
“오빠, 배고프지? 점심은 언제 먹었어? 지금까지 계속 아르바이트만 한 거야?”
싱크대와 냉장고 사이를 부지런히 왔다 갔다 하며 혜윤이가 노래하듯 물어왔다. 내내 혜윤이의 동선을 따라 움직이던 그의 시선이 찰나의 순간 자신에게로 떨어졌다. 움찔 하고 떨리는 어깨며 순간적으로 휘둥그레졌던 그의 눈시울을 통해 위는 벼락처럼 상황을 자각했다. 제기랄!!!!!!
“지금 상 차릴까? 삼겹살은 내일 먹고 갈비부터 먹자, 오빠. 무지 맛있을 거 같애. 선생님도 함께 드시면 정말 좋을 텐데…….”
“…….”
“응? 오빠, 갈비부터 먹지? 지금 굽는다?”
“…….”
“오빠……?”
“……그래. 선생님 배웅해드리고 올 테니까 상 차리고 있어.”
혜윤이가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위태로운 자각이 얼음장처럼 굳어들었던 온몸의 신경줄을 간신히 일깨웠다. 그와 시선을 마주한 채 영원처럼 멈춰 있을 것 같던 시간도 비로소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너무나 태연자약한 자신의 목소리가 구역질이 날 만큼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어, 오빠. ……안녕히 가세요, 선생님! 진짜 잘 먹을게요!!!”
“……그…… 그래, 혜윤아…… 명절 잘 지내고…….”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린 그의 얼굴을 혜윤이가 눈치 못 챈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우물쭈물 간신히 인사를 건넨 그가 현관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리는 그의 몸을 부축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지만 안 될 일이었다. 혜윤이가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혜윤이가 눈치를 채게끔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아, 그렇다. 역시 친구보다는 가족이 우선인 모양이었다. 가족만큼, 아니, 가족과 똑같이 애정을 주고 있는 친구라도 그건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친구가 가족이 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선생님…….”
“…….”
“선생님.”
“……드…… 들어가, 위야. 피곤할 텐데…….”
“…….”
“……갈게…… 추석 잘 보내고…….”
완전하게 어둠이 내린 골목길은 인적이 드물었다. 그렇다고 완전하게 프라이버시가 보장돼 있는 곳은 물론 아니었다. 그러니 그를 부축한다거나 안아 든다거나 하는 짓은 역시 할 수가 없었다.
후들후들 떨리고 있는 손이 황토색의 아름다운 블루종 호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고 있었다. 조용히 다가가 그의 손에서 키를 빼앗았다. 힘이라곤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은 손이라 강탈 행위는 너무나 쉽고 간단했다. 휘둥그레진 눈이 자신을 쳐다본다. 겁에 질린 것인지, 아파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 둘 다인지 잘 판단이 안 된다. 하긴 그 어느 쪽이든 무슨 상관이랴. 자신의 심장을 할퀴는 것임엔 다르지 않은데. 스스로가 등신 같다는 생각을 한다. 여자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다시 여자에게 몸을 팔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공부 핑계까지 대지 않았나. 추석날 데이트를 기대하는 그를 거짓말까지 해가며 냉정하게 거절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래놓고 그의 느닷없는 방문에 가슴까지 두근거려가며 기뻐하다니. 등신이 아니고 뭔가. 자신만 한 바보 천치가 세상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얼굴이 창백하세요. 지금은 운전하실 수 없어요, 선생님.”
“…….”
“……얘기 좀 해요. 차 안에라도 들어가죠.”
“…….”
힘없이 고개를 가로젓는 그의 새하얀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아뇨. 지금 얘기하는 게 나아요. 어차피 내내 괴로워만 하실 테니까요.”
자동인형처럼 여전히 고개만 가로젓는 것으로 미약한 저항을 되풀이하는 그를 떠밀다시피 차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막상 차 안으로 밀어붙여지고 보니 그는 저항을 할 의지조차 사라진 듯 보였다. 핸들에 두 손을 얹은 채 약간 상체를 앞으로 숙인 불안정한 자세로 멍하니 앞유리창 너머를 보고 있었다.
괴로워하는 그를 바라봐야만 하는 자신 역시 너무나 괴로워서 한동안은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외면하면 조금이라도 편해질까 싶지만 그건 비열한 짓이었다. 적어도 봐줘야만 했다. 자신이 아무리 괴롭다고 해도, 그의 고통에는 비교도 할 수 없을 터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외면하지 않고 그의 고통을 들여다볼 것이다. 이해하려 애쓸 것이다. 그리고 그 고통을 주는 자야말로 자신이라는 것을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다.
“……한 달 조금 넘었습니다…….”
“…….”
“……아직은 한 명뿐이지만 차츰 셋으로 늘릴 생각입니다. 대충 학력고사 끝나고 나면 그렇게 할 수 있겠지요.”
“…….”
“……말씀드릴 수가 없었어요. 지금처럼 괴로워하실 게 뻔해서요.”
“…….”
“가능한 한 모르시게 해드리고 싶었었는데…….”
“…….”
핸들을 쥔 구부정한 자세로, 여전히 미동도 않고 앞유리창만을 뚫어져라 굽어볼 뿐 소중한 이는 말이 없다. 온몸의 떨림은 거의 가라앉은 듯했지만 낯빛은 여전히 백짓장 같았다. 그의 극심한 동요에 반해, 자신이 내뱉는 담담한 어조는 얄미울 정도로 흔들림이 없다. 정말로 자신이 이 순간을 힘겨워하고 있는지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안 될 것 같죠, 역시?”
“……?”
“……저 이러는 거 힘드시잖아요.”
“…….”
“상처 입혀드리고 싶지 않은데 어쩔 수가 없어요.”
“…….”
“……쉽게 정리가 될 감정이 아니라는 거 알면서도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
“하지만 역시 안 되는군요. 이렇게 어정쩡한 만남을 계속하는 것은 선생님의 감정 정리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전방을 향해 있던 그의 고개가 천천히 자신 쪽으로 돌아왔다. 멍한 눈동자는 조금 휘둥그레져 있었다. 선연하게 서린 공포의 표정에 위는 자신도 모르게 양미간을 찌푸리며 나지막한 욕설을 퍼부었다.
“……일단 헤어져 감정부터 정리하게 해드리는 편이 더 현명하겠단 생각이 들어요.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
“……아주 이별하잔 얘기가 아니에요. 아시죠? 조금이라도 선생님 마음이 편해지셨을 때 다시 만나면 되는 거니까요. 그렇죠? 그게 좋겠죠, 선생님?”
“…….”
서로의 시선만을 필사적으로 붙든 채라, 그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가로로 흔들고 있는 것은 잠시 후에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벙하니 무방비하게 벌어진 입술 끝을 달싹거리며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이내 입을 다물고 만 것도.
새하얀 얼굴에 남은 것이라곤 그저 공포와 절망,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쓰디쓴 심정으로 그의 관자놀이께로 두 손을 가져갔다. 움켜쥐듯 머리카락을 살며시 쓰다듬자 파르륵 떨리던 눈꺼풀이 이내 시선을 차단하고 만다.
“……아파…….”
눈을 감은 채로 한동안 자신의 부드러운 접촉을 견디던 그가 문득 중얼거렸다.
“……이가 아파…….”
“……치과 아직 안 가셨어요?”
“……응.”
“나중에 더 고생하신다니까요. 연휴 끝나면 바로 가서 뽑으세요.”
“……응…… 그래야지…….”
느닷없는 치통 얘기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던 마음의 아픔이 몹시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가 눈을 감고 있어 더 이상 마음을 읽는 것이 힘들어진 이유도 있을 것이다. 헤어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거나, 울고불고 히스테리를 부리는 것까지 각오한 것에 비하면 너무나 조용한 반응이었다. 하긴 표면이 조용하다고 해서 그의 내면까지 평온할 리는 없었다. 시선을 읽을 수 없다고 해서 그의 생생한 고통까지 읽히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헤어지자고 하면…… 한강에 빠져 죽어버릴 거라고 너 협박하면 어떻게 할 거야?”
관자놀이 근처를 떠돌던 자신의 한쪽 손위로 그의 손바닥이 겹쳐졌다. 너무나 부드러운 애무와 함께 농담 같은 물음을 던지는 그다. 힘없는 목소리엔 웃음기가 잔뜩 묻어나 있었다. 그렇다고 조금의 진심도 담기지 않은 질문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아뇨. 선생님은 그렇게 못 하세요. 제게 해가 될 일은 절대 안 하실 분이니까요.”
“……바보…… 나 그렇게 착하지 않아. 스토커처럼 널 따라다닌 적도 있는걸. 스토커가 얼마나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너?”
“…….”
“……조금만 더 기다려주지…….”
“…….”
“……두 달만 더…… 아니, 한 달만이라도 더 참았다가 여자들 만나지…… 나쁜 자식…… 그럼 진짜 괜찮은 얼굴 했을지도 모르는데…… 아무렇지 않게 고개 끄덕이고…… 아무렇지 않은 척…… 아르바이트 잘 갔다 왔냐고 걱정해주고…… 힘들지…… 하고 등도 두드려주고……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 너 속일 수도 있었을 텐데…….”
“…….”
“……그림 공부 해준대놓구…….”
“…….”
“……학력고사 끝나면 그림 공부 많이 해서 세혁 선배 코도 납작하게 해줄 거래놓구…….”
“……할 겁니다.”
“……친구도 저 하나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게 해준대놓구…….”
“그럴 겁니다.”
“……어떻게 그래. 헤어지는데…….”
“선생님만 정리해주시면 됩니다. 정리 되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그동안 미술책이란 책은 몽땅 다 읽어놓을게요. 선생님께 드릴 우정이라면 말씀 안 하셔도 산더미처럼 비축해놓을 겁니다.”
“……못됐어…….”
“…….”
“……정말 못됐어, 너. 이럼 협박도 못 하잖아…… 한강에 빠져 죽을 거라고 히스테리도 못 부리잖아…….”
“…….”
“…….”
“……참지 마세요. 울고 싶으면 우세요, 선생님.”
아니, 울고 싶은 쪽은 자신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애무를 얌전히 받아들이며 자신의 손등을 어루만지고 있을 뿐 그는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로 고요했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미세하게 전율하던 손가락이며 입술, 그리고 턱 끝도 그럭저럭 평정을 찾고 있었다. 조금 핏기가 돌아온 낯빛도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는 그의 상태를 대변해주고 있었다.
양쪽 뺨에 긴 그늘을 드리우고 있던 그의 눈꺼풀이 비로소 뜨이며 그가 시선을 맞춰왔다. 공포감과 절망 대신 눈동자를 가득 사로잡고 있는 것은 체념이었다. 그는 납득하고 있었다.
“……아니, 안 울래. 울게 되면 정말 히스테리 부리게 될 테니까…….”
입술 끝이 조금 올라가며 부드러운 미소가 퍼졌다. 언제나처럼 온순하고 어눌한 인상의, 사랑스럽기 짝이 없는 미소였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차라리 히스테리라도 부려주었으면 하고 위는 누군가에게 쓰라린 기원을 하고 있었다. 웃음을 머금은 채 반달을 그리고 있는 그의 눈시울 속에는 잔뜩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이 고스란히 내비치고 있었다. 누가 상처를 주는 쪽이고 누가 상처를 받는 쪽인지, 주객이 전도된 형국이었다.
끊임없이 그의 머리카락 속을 헤집던 두 손이 떨어졌다. 그가 손을 뻗어 살며시 자신의 것을 밀어낸 때문이었다.
“……집에 가야겠다. 울 엄마, 간다고 해놓고 식사 약속 안 지키면 진짜 성질내거든.”
“…….”
“……내려, 위야. 갈게.”
“…….”
“……간다니깐…….”
“……노력해주실 거죠?”
“…….”
“하실 수 있죠?”
“대답해주세요, 선생님. 노력하실 거죠?”
“……응…….”
힘겹게 대답을 끌어낸 그가 시선을 바닥으로 내린다. 그에게 떠밀렸던 한 손을 다시 뻗어 그의 턱을 들어 올렸다. 마주 보기 위해 애를 써보지만 고개만 들어 올려졌을 뿐 그의 시선은 다시 바닥으로 향하고 있었다.
“……달라지는 건 없어요. 그냥 잠깐 못 보는 것뿐이니까…… 선생님 마음만 정리되면 언제든 다시 만날 수 있는 거니까요. 아시죠?”
“……응, 당근이지.”
“기다릴게요. 꼭 기다리겠습니다, 선생님.”
“……응…….”
“…….”
“…….”
자꾸만 시선을 피하려는 그를 악착같이 물고 늘어졌다. 당분간, 아니, 어쩌면 꽤 오랫동안 보지 못할 눈동자였다. 얼굴이었다. 사진이라도 많이 찍어둘 걸 하고 안타깝고 초조한 나머지 목이 메었다.
그는 어째서 이렇게 고요한가. 어째서 이렇게까지 얌전하게 자신의 일방적인 선고를 전폭적으로 수용하는 것인가. 어째서, 왜, 무엇 때문에, 이렇게 빨리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려고 기를 쓰는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짜증도 솟구쳤다. 마치 자신의 이별 선언을 기다렸다는 식의 반응이 아닌가.
무언의 요구대로 한동안 자신의 시선에 붙들린 채 흔들리던 그의 눈동자가 불쑥 앞으로 다가들었다. 그의 상반신이 자신의 코앞까지 쏠린 때문이었다. ……키스를 하려는 건가……? 저도 모르게 움찔 몸이 긴장을 한다. 그립고도 사랑스러운 그의 체취가 코끝으로 왈칵 끼쳐들었다.
찰칵.
차 문이 열렸다. 자신의 몸에 달라붙을 듯이 쏠렸던 그의 상반신이 다시 제자리로 되돌아갔다. 포옹을 하기 위해서도, 키스를 하기 위해서도 아닌, 단지 자신을 내쫓기 위한 제스처였을 뿐이었다.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내려…….”
“…….”
“……제발…… 힘들어, 위야…….”
온순하고 부드러운 미소는 어느새 보일 듯 말 듯 굳어 있었다. 흔들리는 눈동자엔 다시금 비참한 절망이 가득 들어앉아 있었다. 제기랄!!!!!! 심장이 누군가의 손에 의해 왈칵 잡아 뜯기는 듯한 착각에 위는 무의식중에 가슴 근처로 손을 가져갔다. 눈동자의 절박한 애원에 쫓기듯 허둥지둥 차 안을 빠져 나온 것은 물론이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여봐란 듯이 시동 걸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몇 걸음 떨어져 눈을 부릅뜨고 운전석의 그를 살폈지만, 밤인데다 선팅까지 돼 있어 차 안의 시계는 거의 제로였다.
“……조심해서 가세요!!!”
알 수 없는 초조감과 안타까움에 작별 인사는 거의 고함 소리처럼 터져 나왔다. 새까만 시계 속에서 그의 온화한 미소를 설핏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착각일 것이다.
몇 미터쯤 후진을 했다가 방향을 튼 은회색의 미끈한 차체는 순식간에 골목을 빠져나갔다. 평소와 다름없이 망설임 없는 직진에, 위는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자신의 흔들리는 마음처럼, 혹은 쓰라린 고통처럼, 멀어져가는 그의 차도 몹시 흔들리거나 아프다는 신음을 내질러야만 할 것 같았다. 물론 졸렬하게 이기적인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단숨에 골목을 벗어난 차는, 큰길 끝에서 부드럽게 턴을 하더니 이윽고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어디선가 전을 부치는 기름 냄새가 비릿하게 풍겨왔다. 너도나도 각자의 둥지로 부지런히 찾아 들어간 모양인지 골목 안이며 저 앞에 보이는 큰길가며 인적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추석은 내일이었다. 너무나 간단명료하고 평범한 이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