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 1990년 12월. 문위(文偉) (17/129)

17. 1990년 12월. 문위(文偉)

마지못해 떠올려진 의식 틈으로 맨 처음 비집고 든 감각은 빗소리였다. 

요란스러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제법 내리고 있는 듯 지붕과 창문을 때리는 규칙적인 울림이 몽롱한 잠에 취한 의식을 더더욱 까라지게끔 했다. 사방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가뜩이나 잘 뜨이지 않던 눈꺼풀은, 몇 번 깜빡이다간 이내 파도처럼 몰아닥치는 수마에 떠밀려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어째서 잠이 깨었던가 하고 설핏 의문이 스쳐간 것도 잠시, 위는 온몸이 푹 꺼지는 듯한 죽음 같은 잠 속으로 다시금 빠져들었다.

……쿵, 쿵……. 쿵, 쿵, 쿵…….

짜증이 났다. 거듭 되풀이되는 시끄러운 울림에 비로소 왜 잠에서 깼던 것인지 설핏 자각이 왔다. ……쿵, 쿵, 쿵…….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규칙적인 빗소리에 자연스레 섞여들 만큼 그리 큰 소음은 아니었지만, 숙면을 방해할 정도로는 충분한 불쾌감이었다. 마지못해 몸을 일으킨 뒤 방 안의 불을 켰다. 반사적으로 시계를 살피니 새벽 1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이토록 늦은 시각에 찾아올 사람이란 도무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가뭄에 콩 나듯 들르는 휘만 해도 학교가 파하는 오후 무렵에나 잠깐 얼굴을 비칠 뿐이었다. 요즘은 아예 현준 형네를 자기 집으로 여기고 있어서 그나마도 잘 들르지 않는 형편이었다.

……쿵, 쿵, 쿵…….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금 시작된 울림에 위는 나지막한 욕설을 퍼부으며 좁은 거실 겸 부엌으로 걸어 나왔다. 혜윤이가 깨기 전에 빨리 쫓아 보내야겠다고 이를 갈았다. 영세한 세입자들만 모여 사는 다가구 주택인지라 대문을 항상 열어두는 것이 문제였다. 만취한 취객이 집을 잘못 찾아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는 소리를 얼핏 들은 기억이 있었다.

“누구십니까?”

현관 밖의 보안등을 켜자, 방범 창살이 붙은 뿌연 유리문 너머로 거무스름한 인영(人影)이 설핏 내비쳤다. 보안등이 켜지는 것과 동시에 문을 두드리는 간헐적인 소음도 비로소 멈췄다.

“……누구십니까?!!!”

대답을 않는 불청객에 단잠을 깬 불쾌감을 잔뜩 담아 다시 한 번 일갈했다. 순간, 거무스름한 인영이 잠시 비틀거리는 듯하더니 문에 박치기라도 하는 것처럼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위야…….”

두근…….

“……위야, 미안…….”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미…… 미안…… 미안…….”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자신이 잘 아는, 사무치게 그리운 목소리였다.

그나마 남아 있던 몽롱한 수면욕이 단숨에 박살이 났다. 머릿속이 아득해지며 가슴이 방망이질을 치기 시작했다. 옆으로 축 늘어져 있던 양손과 발이 주체할 수 없는 동요와 흥분으로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어눌하면서도 꺼져 들어가는 듯한 그의 목소리엔 분명 취기가 역력했다. 보지 않아도 모든 사정을 일목요연하게 읽을 수 있었다. 새벽 1시. 빗소리가 요란했다. 소리만 들어봐도 꽤 쏟아져 내리고 있는 빗줄기였다. 그는 취해 있었다. 안 된다. 이런 건 곤란하다. 이런 식의 재회가 되어선 절대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자신도 그리워하고 있었다. 가슴이 후벼 파이는 것처럼 아프게 그리워하고 있었다. 너무나 보고 싶고,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 몇 번이나 전화 수화기를 들었다 놨는지 모를 소중하고도 소중한 친구였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거듭거듭 기원하고 또 기원했던 소중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만나져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소중한 친구에게나, 자신에게나, 지난 몇 달간의 가슴 저미는 노력을 무로 돌리는 배은망덕한 짓거리였다.

“……돌아가세요.”

“…….”

“……당장 돌아가세요.”

“…….”

“…….”

가슴을 짓누르는 무거운 침묵 속에서 빗소리만 요란했다. 다시 한 번 그의 어눌한 부름이 들린다면, 다시 한 번 미안하다는 사과를 듣는다면 자신은 어찌했을까? 아마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문을 열어젖혔을 것이다. 지금 숨을 죽인 채 기다리고 있는 것이 그의 애원인지, 아니면 돌아서는 그의 발소리인지 스스로도 잘 판단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입고 있던 얇은 파자마 틈으로 선뜩한 한기가 회초리처럼 달라붙었다. 점점 더 떨림이 심해지는 온몸은, 그러나 한기 때문은 아닐 터였다.

현관문에 달라붙을 듯이 기대서 있던 인영은 자신처럼 한동안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애원의 부름은커녕 숨소리조차 전해지지 않았다. 몇 분이 흘렀을까, 이윽고 인영이 비틀비틀 문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 보였다.

두근…….

찰박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보일 듯 말 듯 애처로이 다리를 저는, 귀에 익숙한 발자국 소리였다. 가끔 꿈속에서까지 들리곤 하던, 사무치도록 그리운 소리였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그리운 소리는 점점 멀어져 단 1분도 안 돼 빗소리에 완전히 파묻히고 말았다.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 것 같다. 아주 짧은 한순간은. 그리고 그보다는 몇 십 배쯤 더 길 시간 동안 안타까움과 초조감에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을 것이다. 귀청을 찢을 것만 같은 요란스러운 심장의 울림을 애써 무시하며 안 돼, 안 돼만을 연발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것이 몇 분이었는지 몇 초였는지는 기억에 없다. 메트로놈처럼 번갈아 극과 극을 오가는 생각의 추를 좇아, 이를 악물며 번민했던 것만이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 있다.

서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팽팽한 줄다리기를 거듭했기에, 추는 모기 눈물만큼의 무게만으로도 단숨에 한쪽으로 기울었을 것이다. 그리고 패배는 생각보다 아주 빨리 찾아왔다.

대문 경첩이 삐걱대는 아련한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밧줄로 친친 동여매인 것만 같던 온몸의 경직이 비로소 풀렸다.

정신없이 안방으로 달려 들어갔다. 장롱 문을 열고 자신의 유일한 겨울 코트인 검정색 더플코트를 주워 입었다. 바지나 양말들까지 온전히 챙겨 입을 여유 따윈 없었다. 초조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가 집 앞에 차를 세워두었다면 바로 타고 떠나버릴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상당히 취해 있는 걸 보면 택시를 타고 온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취중 운전을 했을 수도, 또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초조감은 극에 달했다.

책 배낭을 뒤져 간신히 지갑 하나만을 달랑 챙겨 들고 방을 나왔다. 운동화를 신고, 현관문을 열고, 생각 이상으로 사납게 들이치는 빗줄기에 놀라 우산까지 챙겨 든 뒤 부랴부랴 현관문을 잠갔다. 단숨에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 밖으로 나왔다. 우산을 펼쳐들 여유도 없어 온 얼굴과 몸 위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그대로 맞았다. 얼음물이라도 뒤집어쓴 것마냥 시리도록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열흘 정도만 지나면 크리스마스였다. 이 비가 그치면 기온은 영하로 뚝 떨어질 것이다. 제기랄, 눈을 짐승처럼 번뜩이며 찾아보지만 골목 안 어디서도 그의 모습은 잡히지 않았다. 그의 은회색 BMW도 눈에 띄지 않았다.

간신히 우산을 펼쳐들고 큰길로 무조건 뛰었다. 운동화며 파자마 자락은 금세 빗물로 흠뻑 젖어들었다. 바람마저 조금 불고 있어 시꺼먼 대형 우산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안으로 비가 들이쳤다. 전속력으로 뛰고 있어 더 그럴 것이다. 막 골목 모퉁이를 돌자, 빗소리 외엔 죽음처럼 잠들어 있는 거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인적이라곤 단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새벽 1시인데다 비까지 오는 때문인지 비디오가게 같은 심야 영업을 하는 상점들마저 문을 닫은 상태였다. 필사적인 시선은, 거리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 이 잡듯이 흔적을 뒤져나갔다.

버스 정류장 방향으로 30여 미터쯤 떨어져 있던 약국 앞 주차장에, 조그맣게 움직이고 있는 그림자 하나가 겨우 보였다. 멀리 떨어져 있긴 했지만, 맞은편 상점의 입간판 불빛을 받아 뿌옇게 빛나고 있는 것은 그의 은회색 BMW였다. 틀림없었다. 그림자는 막 차 문에 열쇠를 꽂고 있는 것 같았다.

“선생님!!!!!!!!”

꽤 시끄러운 외침이 빗소리를 뚫고 다이렉트로 그림자에 가 닿았다.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펄쩍 뛰는 어깨가 보였다. 소금 기둥이 된 것마냥 그대로 움직임을 멈춘 그림자를 향해 정신없이 달려갔다. 차츰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리운 존재의 모습이 가감 없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선생님!!!”

흠뻑 젖어버린 몸이 천천히 돌아서는 것이 보였다. 흐릿한 입간판 불빛 아래, 비에 젖어 칙칙하게 죽은 색조로 보이는 기다란 롱코트는 원래는 아름다운 살구색이었다. 지난겨울에도 그가 입고 있는 모습을 보며 예쁘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코트 속에 보이는 것은 하얀 스웨터에 새파란 트레이닝팬츠. 실내복 차림인 걸 보니, 집에서 술을 마시다 무턱대고 뛰쳐나온 것이 틀림없었다. 더 기가 막힌 건 그가 신고 있는 신발이었는데, 앞코에 강아지 인형 로고가 붙은 실내용 슬리퍼였다. 슬리퍼도, 그 안의 맨발도 이미 빗물에 흠뻑 젖은 채 신발로서의 구실은 완전히 상실한 뒤였다.

1미터 정도의 거리를 남기고 그에게 접근하니, 물비린내에 섞인 술 냄새가 강하게 풍겨왔다. 들고 있던 우산을 씌워주기 위해 두세 걸음 더 다가가자, 그리웠던 체취 또한 겨우 맡아졌다. 처음엔 그저 황당한 차림새에 눈을 빼앗기느라 그의 형편없는 몰골을 미처 자각하지 못했었던 것 같다. 그가 또 음주 운전을 하기 전에 붙잡을 수 있었던 것에 안도한 나머지, 맥이 탁 풀릴 정도로 신경이 느슨해 있었던 것도 한 원인일 것이다. 그러나 우산을 기울이며 바로 그의 코앞까지 다가섰을 때, 위는 명치끝을 얻어맞은 것처럼 숨이 틀어막히는 고통을 삼켜야 했다.

단발에 가까울 정도로 자라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이 보였다. 온통 비에 젖은 채 몇 개의 가닥을 이루고 있는 머리카락은 이마와 어깨 아래로 눈물 같은 물방울들을 후드득 떨구고 있었다. 머리카락과 똑같이 비에 흠뻑 젖은 새까만 얼굴도 보였다. 이 계절에 어디서 저렇게 탄 걸까 하고 의구심이 들 정도로 까맣게 태닝이 된 피부였다. 아마도 그래서 더 말라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피부가 거무스름해졌다고 해도 저 정도면 적어도 10킬로그램 이상은 빠졌다고 해야 옳다.

갸름한 얼굴 윤곽은 뺨이 훌쭉하게 들어간 채 거의 해골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딱 알맞은 크기로 귀여웠던 쌍꺼풀 없는 눈도 움푹 팬 채 화등잔만 해져 있었다. 가뜩이나 마른 체형의 사람이었건만 이젠 아예 뼈와 가죽뿐인 것처럼 보였다. 차 키를 들고 있는 오른손이며 드러난 손목이 너무나 가느다래서 힘껏 쥐면 부러져버리는 게 아닐까 겁이 났다.

하느님. 고작 두 달이 갓 넘었을 뿐이었다. 고작 두 달 만에 이렇게 몸을 망가뜨릴 정도면 나머지 긴 시간은 도대체 어떻게 견디려고 이러는 걸까, 이 사람은. 이 한심하고 한심한 사람은. 명치끝을 찌르는 고통은 순식간에 타는 듯한 분노로 변해 온몸의 신경줄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갔다.

“제기랄!!!!!”

으르렁거리는 듯한 난폭한 욕설을 씹어뱉었다. 얼빠진 표정으로 자신을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던 그가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마치 뺨을 때린 것만 같은 착각이 들게 하는 몸짓이었다.

“제기랄!!! 젠장, 젠장, 젠장!!!!!! 뭐하자는 겁니까, 지금?!!!!!!!”

타는 듯한 울분은 고통과 더불어 신경을 갈가리 쥐어뜯고 있었다. 비명 같은 욕설을 퍼부을 때마다 새하얀 자신의 입김이 그의 젖은 이마 근처에서 어지러이 춤을 추었다.

“이렇게 취해서는 또 운전을 하시겠다는 겁니까?!!!!!!”

“…….”

“제정신이십니까?!!! 바보예요?!!! 이렇게 바보짓이나 하라고 헤어진 줄 아십니까?!!!”

“…….”

“이게 뭡니까?!!! 몸이 이게 뭐냐구요?!!! 시위하는 겁니까?!!! 그래요?!!!”

“…….”

빗소리를 무색하게 만드는 사나운 고함 소리가 텅 빈 거리를 쩌렁쩌렁 울렸다. 외칠 때마다 회초리를 맞는 것처럼 몸을 움찔거리며 눈을 깜빡이는 그가 너무나 미워서 가슴이 터져버리는 것만 같았다.

“……선…… 배가…….”

새처럼 눈을 깜빡이며 그가 겨우 대답을 끌어내고 있었다. 쏘아보는 자신의 시선이 버거운지 왕방울처럼 휘둥그레진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핏기를 잃은 입술이 까만 피부와 대조적으로 희뿌옇게 도드라져 보였다. 잔득 부르트고 갈라진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것이 추위 때문인지 흥분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기…… 기하 선배가…… 하잖아…… 오늘…… 네 얘길 하잖아…… 전시회…… 왔었다고…… 와서 열심히 보고 가줬다고…… 나 화랑에 잘 안 나가던 주에…… 네가 왔었다고…….”

“…….”

“……왜…… 왜 이제 얘길 하는 거야, 선배는…… 전시회 끝난 지가 언젠데…… 잘 참고 있었는데…… 여행도 갔다 왔는데…… 하와이 가서…… 실컷 햇빛 쬐고…… 해수욕 하고…… 잘 놀다 왔는데…… 참을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왜…… 왜 이제야…….”

“…….”

“……그런 거야…… 그래서 잠깐 정신이 나갔었나 봐…… 그냥 잠깐…… 비도 오고…… 춥고…… 하와이는 참 따뜻했는데…… 다시 추워져서…… 그래서…… 그저 잠깐만…….”

“…….”

“……겁이 나잖아…… 한 달이 지나도 계속 이렇게 추우면 어떡하나…… 두 달이 지나도 또 추우면…… 1년이 지나도…… 5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거면 어떡하나…… 10년이 지나도 널 정리하지 못하면…… 그럼 계속 못 보는 건가…… 무섭잖아…… 갑자기 무서워지잖아…….”

“…….”

“……그렇지……? 못 보는 거잖아…… 10년이 지나도 널 볼 수 없는가 싶은 게…… 너무 무서워져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저 그를 품 안에 끌어안고 싶은 미친 듯한 갈망 외엔 다른 어떤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직도 여전히 남아 있는 이성이 팔을 뻗는 것을 방해했지만 그다지 힘을 발휘하지는 못한 것 같다. 뻗어나간 손이 천천히 그의 어깨를 쥐었다간 이내 정신없이 상반신을 끌어당겨 안았다. 차갑고 축축한 감촉이 피부 곳곳으로 선뜩하게 다가들었다. 개의치 않고 등줄기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에게 우산을 씌워줘야 한다는 생각보다 안고 싶은 기분이 더 강하게 북받친 나머지, 들고 있던 우산마저 팽개치고 나머지 한 팔로 그의 허리를 마저 죄어 안았다. 기억에 남아 있는 것보다 훨씬 마른 몸이 품 안에 착 감겨들었다. 차마 마주 안을 생각은 못하는 듯, 그는 자신이 힘을 기울이는 대로 허리를 활처럼 휘며 포옹을 받아들였다.

차가운 빗방울이 마치 바늘 끝마냥 날카롭게 전신을 때리고 있었다. 개의치 않았다. 목이 꽉 메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한번 울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어질 것만 같아서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어떡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이 사람을 덜 고통스럽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자신을 쉽게 단념시킬 수 있을까. 도무지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미안…… 미안해, 위야…… 미안…….”

“…….”

“……정말 미안해…… 나……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너 귀찮게 할 생각은 진짜…… 귀찮은 고객 따윈 정말 안 되고 싶은데…… 정말 그런데…….”

“…….”

“……갈게…… 미안…… 놓아…… 놔줘, 위야…… 집에 갈게…… 미안…… 해…… 정말 미안…….”

“…….”

“……다신…… 이런 일 없을 거야…… 진짜야…… 약속할게…… 미안…… 미안…….”

“…….”

취기가 역력한 혀가 꼬이는 말투로 그가 신음 같은 사과의 말을 되풀이해 쏟아낸다. 달리 대꾸할 말이 없어 그저 부서져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아픔을 느끼는지 그가 미약하게나마 상체를 비튼다. 자신의 품에서 빠져나가려는 듯한 몸짓에 초조해져 더한 악력으로 그를 죄었다. 놓아줄 마음 따위 손톱만큼도 없는 자신이었다. 이렇게 흔들리고 있는데, 이렇게 고통 받고 있는데 어떻게 놓아주냔 말이다. 기가 막혔다. 가슴은 여전히 찢어지는 것만 같고, 목구멍을 태울 듯한 뜨거운 응어리도 여전히 눈물샘을 폭발시키려 기를 쓰고 있었다. 그저 괴롭고 비참한 기분만 들뿐, 그를 온전하게 되돌릴 복안이라곤 여전히 단 한 가지도 떠오르질 않고 있었다. ……어떡하나…… 어떻게 해야만 하나…… 도대체 이 소중한 사람을 어떻게 해야만 하나…….

자동차 하나가 눈부신 헤드라이트 빛을 뿌리며 스쳐 지나갔다.

찰나의 강렬한 빛은 마치 자동 카메라의 셔터처럼 자신의 상태를 객관화해 보여주었다. 비로소 조금씩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좀처럼 그칠 줄 모르는 빗줄기 속에서 언제까지고 그를 품고 있을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술이 깨기 전엔 운전하실 수 없습니다. 주무시고 가세요.”

마지못해 내뱉는 자신의 목소리는 그의 것보다도 더 기운이 없게 들렸다. 밧줄처럼 죄고 있던 팔을 풀어주자 그가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다시 겨드랑이로 두 손을 집어넣어 자신의 상반신에 기대게 했다. 바닥에 떨어졌던 우산을 집어 들어 이미 흠뻑 젖어버린 두 몸뚱이 위에 씌웠다. 한 팔로 그의 허리를 꼭 감은 채 질질 끌다시피 집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그 역시 온전한 정신은 아닌 모양인지 일체의 저항도 보이지 않았다.

대문이 보이는 골목까지 걸어왔을 때 문득 혜윤이에게 생각이 미쳤다. 잠귀가 어두운 아이니 밤이야 그럭저럭 넘어간다고 해도, 아침에 일어나서까지 그를 숨기기는 힘들 것이다. 정신도, 육체도, 하다못해 옷차림까지 도무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그를 본다면 누이는 분명 놀랄 것이다. 할 수 없이 방향을 틀어 번화가가 있는 사거리 쪽으로 걸어갔다.

버스를 타고 지나다가 설핏 본 기억이 있는 여관을 찾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오류중학교 쪽으로 한 정류장쯤을 걸어가니, 목욕탕 표시와 함께 붉은색 네온등으로 장식된 입간판이 금세 눈에 띄었다. 지은 지 20년은 족히 넘었을 성싶은 C급 여관이었다. 허름한 외관과 마찬가지로 낡고 지저분한 내부가 그야말로 한심스러운 수준이었다. 환기도 잘 안 되는 듯, 안에선 눅눅한 곰팡이 냄새와 담배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흠뻑 젖은 생쥐 꼴을 하고 현관문 안으로 들어서니 카운터를 지키고 있던 아르바이트생이 비디오를 보다 말고 눈을 휘둥그렇게 뜬다.

“빈방 있습니까?”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아르바이트생에게 방 값을 지불하고 객실 키와 휴지 한 두루마리를 건네받았다. 채 스무 살도 안 돼 보이는 아르바이트생은 어이가 없다는 듯 그의 푹 젖은 강아지 로고가 박힌 슬리퍼며 코트 아래 파자마 차림을 내내 힐끔거렸다. 자신은 그렇다 쳐도 그를 바라보는 거침없는 시선이 불쾌해 잔뜩 인상을 쓰고 노려봐주자 금세 겁을 집어먹곤 눈을 내리깔았다. 사정이 급하지만 않았다면 이런 허술한 곳 따위에 그를 데려오진 않았을 것이다.

파랗게 질린 채 확연하게 온몸을 떠는 그를 두 팔로 껴안다시피 하고 객실로 데려갔다. 서너 평도 채 안 될 방 하나에, 화장실 겸 욕실 하나가 전부인 초라한 객실에서도 희미한 곰팡내가 났다. 그나마 방은 좀 깨끗해 보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그의 젖은 코트부터 벗겼다. 코트 안에 받쳐 입은 스웨터는 그리 젖지 않았지만 코트와 아래의 트레이닝팬츠는 흡사 물에 빠진 형국이었다. 트레이닝팬츠와 코트만을 벗기고, 역시 만만치 않게 젖어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자신의 코트도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벽장에서 요를 꺼내 바닥에 펼친 후 마냥 떨고만 있는 그를 주저앉혔다. 화장실에서 수건을 가져와 젖은 머리와 얼굴, 손발을 마사지하듯 부지런히 닦아주었다. 반쯤 넋이 나간 홀린 듯한 눈으로 자신의 얼굴만 들여다볼 뿐, 그는 고스란히 자신에게 온몸을 내맡긴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무언가 움직이려 해도 그럴 기운조차 없는 것처럼 보였다. 대충 물기가 제거된 몸에 벽장에서 꺼낸 이불 두 채를 친친 싸매듯 덮어주었지만, 사시나무 떨듯 하는 떨림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뜨거운 욕조에라도 담가 체온을 올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었지만 술이 들어간 몸에는 별로 이로울 것 같지 않았다. 방바닥이라도 따뜻하면 좋으련만 아마도 좀 전에야 보일러를 틀었을 것이다. 자신의 체온이라도 보태는 외엔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비교적 온전한 상의는 그대로 두고, 무릎 아래로는 푹 젖어버린 파자마 바지만 벗은 후 이불을 들치고 들어갔다. 자신 역시 꽤 한기를 느끼고 있던 터라 그의 몸을 꼭 끌어안은 다음 다시 이불을 둘둘 감았다. 최대한 서로의 체온을 높일 수 있게끔 그의 뒤에 앉은 자세로 양팔과 다리를 교차시켜 그를 품었다. 숨만 간신히 쉴 수 있도록 코끝만 삐죽 내놓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누에고치처럼 이불을 뒤집어쓴 것은 물론이었다.

시간은 더디 흘렀다.

그의 떨림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글루 같은 이불 속에 갇힌 지 10분이 채 못 돼 몸에선 땀이 솟기 시작했다. 더위를 느끼는 자신과는 달리 그는 여전히 간헐적으로 진저리를 치곤 했다. 그럴수록 그의 몸을 조여 안은 뒤 다리며 어깨를 부지런히 마사지했다.

30분쯤 지나니 자신과 그의 온몸은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보일러가 제 기능을 해준 덕분인지 방 안의 기온도 꽤 따뜻해졌다. 다행히 완전히 떨림을 멈춘 그는 자신의 품 안에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기가 막힌 나머지 피식피식 헛웃음만 비어져 나왔다. 이토록 자신의 가슴을 아프게 헤집고는 천연덕스럽게 잠이 들 수 있는가 싶어 얄미운 마음조차 들었다. 하긴 만만치 않게 취해 있던 그였다. 건강 상태든 체력이든 바닥을 치고 있을 것이 분명한 몸이기도 했다. 별 탈 없이 잠이 들어준 것만도 오히려 감지덕지해야 할 일인 것이다.

깊이 잠든 그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눕혔다. 땀범벅인 몸을 닦아주기 위해 이불을 들쳤다가 해골처럼 마른 허벅지며 종아리를 보곤 새삼 가슴이 찢어졌다. 복받치는 응어리를 간신히 눌러 삼키며 수건으로 정성스레 닦아주었다. 베개를 받쳐주고, 혹시라도 한기가 들까 창문 쪽에 펴놓았던 침상을 방 한가운데로 끌어 온 뒤 목 끝까지 이불을 덮어주었다.

홀쭉해진 뺨이며 움푹 꺼진 눈이며, 해골 같은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은 마냥 고통일 뿐이라, 벽에 기대앉은 채 애꿎은 방 한구석만 멍하니 노려보았다. 어쩔 수 없이 다가드는 괴로운 상념에 잠은 조금도 오지 않았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보지만 그나마 그의 중심을 잡아줄 뾰족한 묘수란 여전히 떠오르질 않는다. 고작해야 친구로서도 만나주지 않을 거라며 협박을 던지는 외에는. 그의 말대로 그가 끝끝내 자신을 못 잊는다면 그건 또 어떡하나. 생각하면 너무나 두렵다. 만일 그렇다면 그와 깨끗이 헤어지는 외엔 다른 방법이 없다. 상상만으로도 괴로워져서 태아처럼 몸을 말고 얼굴을 무릎에 파묻었다. ……이 사람이 좋았다. 너무나 좋았다. 혜윤이만큼, 휘만큼, 형만큼…… 성준이나 윤열이 형만큼 좋았다. 엄마와 아버지만큼 소중했다. 소중하고 소중해서 가슴이 아렸다. 헤어진다니…… 이대로 깨끗이 헤어져버릴지도 모른다니…… 그건 안 된다…… 참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미 친구였다. 이미 가족이었다. 도저히 떼어내버릴 수 없는 자신의 또 다른 분신이었다. 그런데 헤어진다니…… 헤어져야만 할지도 모른다니!!!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가 요란했다. 비가 그치면 기온은 영하로 뚝 떨어질 것이다. 겨울은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계절이었다. 올겨울은 유난히 추울 것만 같아서 더더욱 치가 떨렸다. 최대한 빨리 시간이 지나가 봄이 오기를, 위는 맹렬한 기세로 빌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낡아 빠진 여관이라 방음 따윈 기대하지 말았어야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바로 코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듯한 요란뻑적지근한 교성과 헐떡대는 숨소리들은 좀 심하지 않은가 싶었다.

자신을 깨운 것은 짐승의 괴성이었다. 어느새 잠이 들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거듭 되풀이되는 시끄러운 소음에 비몽사몽 짜증을 흘리며 눈을 뜨지 않을 수 없었다. 눈을 찌를 듯한 형광등 불빛도 짜증스럽긴 한가지였다. 선잠인 모양이었는지 머리도 몽롱하고, 전신으로 치달리는 것은 뻐근한 근육통이었다. 마지못해 상반신을 일으켜 세우곤 뻑뻑해진 눈꺼풀을 비비며 잠을 깨운 소음의 정체를 찾았다.

그가 보였다. 해골처럼 홀쭉하게 마른 얼굴이 이쪽을 건너다보고 있었다. 가느다랗게 뜬 눈은 똑바로 위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초점이 명확하진 않았다. ……두근…… 심장이 아래로 뚝 떨어지는 것처럼 힘찬 고동을 울렸다. 순조롭게 토해지던 숨결이 갑자기 답답해졌다. 아마도 머리가 채 인식하기 전에 몸이 먼저 사태를 파악한 것 같았다. 나사처럼 죄어드는 듯한 성적 긴장감이 단숨에 전신을 사로잡았다.

일체의 자제력을 상실한 나머지 짐승스럽기까지 한 남녀의 적나라한 교성은 분명 옆방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여자가 낑낑대고 훌쩍거리고 비명을 지르는 틈틈이 사내의 걸걸한 신음성도 양념처럼 끼어들었다. 맙소사, 어찌나 잘 들리던지 사내가 허리를 쳐대며 자궁이 비벼지는 소리까지 생생할 지경이었다. 처음엔 말이 필요 없을 한심한 수준의 여관이라고 생각했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오히려 전략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따로 에로비디오를 비치해놓느니 이곳처럼 벽을 얇게 만드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여관집 주인의 소박한 전략은 어쨌건 그대로 들어맞은 모양이었다. 언제 깨어났는지 알 길이 없는 그가 온몸으로 직격탄을 맞고 있었다.

그는 위가 누워 있던(그전에 그 역시도 누워 잠을 자던) 이부자리로부터 두 걸음쯤 떨어진 곳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었다. 잠이 들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하얀 스웨터에 팬티만을 걸친 반 벌거숭이 차림이었다. 왼손은 부챗살처럼 활짝 펴진 채 방바닥을 짚고 있고, 오른손은 팬티 틈으로 들어가 부지런히 치부를 훑고 있었다. 꽤 오랫동안 반복한 행위인 듯, 옅은 푸른색 줄무늬의 트렁크 팬티는 그의 땀에 젖은 얼굴처럼 이미 흠뻑 젖어 있었다.

구석에 몰릴 대로 몰린 고통 때문이었을까, 자신의 시선을 받고도 그는 별로 수치스러운 기색이 아니었다. 수치스러워하긴커녕 어딘가 초점을 잃은 멍한 시선으로 굶주린 듯 자신의 얼굴과 눈만을 빨아들이고 있을 뿐이었다. 이 순간, 자신은 그저 그의 기분 좋은 안주거리 이외엔 아무런 쓰임이 되지 못하고 있는 듯싶었다.

다시금 가슴이 난도질을 당하는 것만 같은 고통에 한동안 입술을 깨문 채 가만히 통증을 견뎠다. 서로 상대의 눈을 껴안고 있는 상태라, 서로가 품고 있는 감정은 단 한 치도 숨김이 없이 서로에게 고스란히 전달이 되었다. 자신은 그의 쾌락과 절망을, 그리고 그는 자신의 고통과 연민을 그대로 감싸 안았다.

비는 완전히 그쳐 있었다. 창 밖은 여전히 새까만 어둠이었다. 시계가 없어 정확한 시각을 알 수는 없었지만 자동차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걸 보면 아침은 아직 요원한 모양이었다. 쥐 죽은 듯한 고요 속에서 옆방의 이름 모를 남녀가 교합하면서 몸부림치는 소리만이 을씨년스러운 정적을 깨고 있었다.

한동안 표정 없는 멍한 얼굴로 자위 행위에만 몰두하던 그가 동작을 멈추더니 바닥을 두 손으로 짚곤 몹시 숨을 헐떡거렸다. 내내 자신의 얼굴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던 시선도 바닥으로 떨어져 있었다. 이마와 콧등엔 땀이 흥건했다. 가무잡잡한 피부가 상기되니 거의 흙빛으로 보였다. 피로감을 넘어 현기증마저 느끼는 것이 틀림없었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그에게 팔을 뻗었다. 품 안으로 끌어들이자 종잇장처럼 가벼운 무게감이 저항 없이 안겨왔다. 뜨겁고 축축한 몸뚱이였다. 안으면 늘 이렇게 아늑하고 따스한 기분이 되는 몸뚱이였다. 꼭 껴안고 정신없이 등줄기를 쓰다듬었다. 입술에 닿는 정수리 근처를 이리저리 헤매며 입을 맞췄다. 술 냄새가 여전히 강해 그의 그립고 달콤한 체취가 별로 느껴지지 않는 것이 안타까웠다. 가슴은 찢길 대로 찢겨 벌어진 상처에선 끊임없이 피가 흘러나왔다. 눈시울이 뜨겁고 욱신대는 걸 보면 자신은 조금 울었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많이 울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한동안 자신의 품 안에서 축 늘어진 채 가쁘게 할딱거리며 호흡을 고르던 그가 다시금 한 손을 사타구니 사이로 밀어 넣고 있었다. 피스톤질을 할 기력은 없는지 그저 손안에만 넣고 주물럭거릴 뿐이다. 끝이 조금 휜, 참으로 볼품없지만 자신에겐 너무나 귀엽게 보이는 물건을. 현명한 짓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손을 뻗었다. 가느다랗게 떨고 있는 그의 손가락들을 치우고 음낭과 페니스를 한꺼번에 손바닥 안에 품었다. 그가 좋아하는 방식의 애무라면 대낮처럼 훤하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잊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친구의 몸을, 섹스를 속속들이 아는 놈은 아마 세상에 자신밖엔 없을 것이다. 쓰디쓴 생각을 흘리며 손목을 흔들었다. 가운뎃손가락으로 회음을 찌르고, 음경과 음낭 사이 주름을 꼬집고, 부드럽게 알을 굴리고, 마지막으로 뿌리 끝에서 귀두까지 힘주어 훑어 내렸다. 그 어느 때보다도 소중하게 다뤘다. 부드럽고 상냥하게, 그러면서도 힘차게 사랑해주었다.

자신의 어깨에 이를 박은 채 그는 내내 신음 같은 교성을 흘렸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엔 자신의 파자마 깃이 힘껏 움켜쥐어져 있었다. 조루인 그답게 그리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도달했을 땐 너무나 경련이 심한 나머지 심장마비라도 일으키는 게 아닐까 더럭 겁이 났다. 손바닥 안을 가득 적신 뜨거운 체액을 파자마 자락에 대충 훔치곤 후들거리는 가는 몸을 품에 꼭 껴안았다.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 환영만 같아서 내내 제발, 제발 하고 무언의 기원을 했다. 다행히 차츰 안정을 찾아가는 몸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은 물론이었다.

옆방의 요란한 정사도 어느덧 막을 내린 모양이었다. 여자가 나가는지(아마도 술집 접대부인 듯싶었다)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잠깐 들리더니 곧이어 사내의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대단한 소음이었다. 설령 잠이 온다고 해도 더 이상의 수면은 불가능할 터였다.

품에 안은 그가 한기를 느끼는지 간간이 몸을 떨었다. 기진맥진한 상태라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가는 호흡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이불을 들추고 조심조심 요 위에 눕혔다. 처음부터 떨어질 생각도 없었지만, 자신의 파자마 자락을 꼭 움켜쥔 채 싫다며 힘없이 애원하는 그의 곁에 몸을 눕혔다. 모로 누워 그를 다시 품에 꼭 껴안는 것도 당연하게 생각되었다. 서로의 벌거벗은 아랫도리도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나무뿌리처럼 깊게 서로의 다리를 얽고, 서로의 등과 허리를 감고 있는 팔에도 최대한 힘을 주었다. 체취가 섞이고, 체온이 합쳐졌다. 남창으로 그에게 서비스 할 때와 마찬가지로 진한 접촉임엔 틀림이 없었지만 그따위를 구별하는 것도 그저 부질없게만 생각되었다.

옆방 남자의 코고는 소리를 음악 삼아 꽤 오랫동안 서로의 따스함을 만끽했다. 애정을 교환하고 신뢰를 주고받았다. 오랜 이별을 견딜 기운을 서로 앞 다투어 전해주었다. 자신이 그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면 그의 손가락이 자신의 등줄기를 부드럽게 쓸었다. 그가 자신의 가슴에 키스하면 자신은 그의 땀에 젖은 얼굴을 골고루 핥아주었다. 그는 달라붙고 자신은 끌어당겼다. 날이 밝고 있었다.

“……건강 관리하세요.”

울고 난 때문인지 자신의 목소리는 꽤 쉬어 있다. 피로한 것처럼도 들려서 좀 더 기합을 넣어야겠다고 생각한다. 협박에 힘이 실리지 않는다면 그것도 꼴사나운 노릇이겠지.

“……밥도 드시고 잠도 제대로 주무세요. 술은 체중이 회복될 때까지 당분간 금지입니다.”

“…….”

“몸 관리 안 하시고 계속 이렇게 흔들리시면 선생님 다신 안 볼 겁니다.”

“…….”

“진심입니다. 이 이상 몸을 학대하시면 친구로서도 안 볼 겁니다.”

“…….”

“……저 이기적인 놈인 거 아시죠? 아무리 아끼는 친구라도 제게 계속 고통과 불편만 준다면 잘라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

한동안 숨을 죽인 채 자신의 협박을 경청하던 그는 비로소 진담임을 납득한 모양이었다. 자신의 가슴팍에 푹 파묻혀 있던 얼굴이 조금 떨리는가 싶더니 이내 축축한 습기가 느껴졌다. 긴 밤 내내 눈물이라곤 일절 보이지 않던 그도 한편 무정하게 들릴 단호한 협박은 한계였던가 보았다. 꽤 오랫동안, 그는 그렇게 자신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숨소리조차 억제된 눈물이었다. 가슴은 여전히 찢어졌지만, 독한 비수를 치울 수는 없었다. 섣불리 달래봤자 그에겐 하등의 도움도 안 된다. 그의 몸을 여전히 품 안에 꼭 끌어안은 채 그가 스스로 의지를 세우기만을 빌었다.

“……잔인하네…….”

한참 만에 간신히 잦아든 가느다란 목소리가 힘겹게 토해진다.

“……잔인하구나, 너. 그건 나더러 아파하지도 말라는 소리야…….”

“예.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그만 아파하세요. 이 이상 아파하시는 건 절대 허락 안 할 겁니다.”

“……나쁜 놈…….”

“…….”

“……나쁜 놈…… 이기적인 놈…… 너 진짜 나쁜 놈이야…….”

“압니다.”

“…….”

그는 다시 한참을 울었다. 처음과 달리 간간이 자신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때리기도 했다. 기꺼이 맞아주었다. 너무나 힘이 없어 그저 간지러움만 줄 뿐인 조그만 주먹이 안쓰럽다는 생각만 들었다.

창 밖을 보니 날은 완전히 밝아 있었다. 밝기로 미루어 7시가 훨씬 넘었을 것이다. 학교 갈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지만 지각을 한대도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내신에 반영이 되는 기말 시험이 아직 남아 있었지만 학력고사도 끝난 터라 학교 분위기는 거의 붕 뜬 상태였다. 시험에 성공한 케이스도, 실패한 케이스도 긴장은 완전히 풀려 있었다. 게임 오버인 셈이었다.

“……미술 책들 많이 읽고 있어요.”

울다 지쳐 떨어진 그의 얼굴을 혀끝으로 핥아주며 상냥하게 말을 붙였다. 이번엔 당근인 셈이다. 교활한 나…….

“……읽다 보니 재미있더군요. 특히 화가들 전기가 재미있어요.”

“……정말?”

“예. 다들 고생만 바가지로 하는 거 같던데, 그래도 피카소 같은 생전에 성공을 이룬 갑부도 있더군요.”

“……킥킥, 너 무슨 석세스 스토리쯤으로 전기들 읽는 거지?”

정말 우스운지 내내 어깨가 떨리고 있다. 다행이다.

“물론입니다. 전문적인 얘기들은 아직도 좀 아리송하기만 하고,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 얘기도 별로 흥미 없으니까요.”

“……속물 같으니라구…… 예술엔 성공도, 실패도 없는 거야. 그냥 그릴 뿐인 거지. 그게 기본이야.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구.”

“동의할 수 없어요. 성공은 ‘필요’입니다. 정말 세상에 ‘필요’한 것이라면 성공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효용과도 같지요. 효용이 없는 것은 무의미한 놀이에 불과합니다. 무의미한 놀이에 가치를 부여하는 짓거리야말로 아전인수 아닙니까?”

“아씨, 진짜 속물이네? 너 진짜 나랑 싸워볼래?”

불만스럽게 툴툴거리는 목소리에도 조금씩 기운이 들어간다. 아아, 정말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언제든 환영입니다만 아직은 좀 더 읽어봐야 하니까 논쟁은 다음에 하기로 하죠.”

“그래. 두고 보지, 속물. 공부 단단히 하고 있어. 이래 봬도 전문가니깐 인정사정없이 두들겨 패주마.”

“하하, 바라는 바입니다. 기대하죠.”

확연하게 제정신을 찾아가는 그다. 폭풍처럼 여러 생각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을 속내를 모두 읽을 수는 없어도, 적어도 자신의 채찍과 당근이 모두 그에게 긍정적인 효과를 주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한동안 킥킥거리며 웃음을 흘리기도 하고, 어린애처럼 발작적으로 자신의 가슴팍에 얼굴을 마구 비벼대기도 하더니, 이내 조용히 안겨온다. 망설이지 않고 마주 안아주었다. 한 팔로 등줄기를 죄고, 나머지 한 팔로는 어깨와 허리와 엉덩이를 오가며 정신없이 쓰다듬어주었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따스하고 부드러운 피부 감촉이 너무나 기분 좋았다.

“……학력고사는 잘 쳤지?”

“예.”

“입학 원서도 썼겠네?”

“예.”

“합격할 자신 있지?”

“예, 걱정하지 않습니다. 잘하면 6년 전액 장학금도 받을 것 같아요.”

“굉장하구나. 역시 내 근사한 영웅이야…….”

“…….”

“……졸업식에 가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못 가겠지?”

“…….”

“……졸업도 축하해주고…… 혜윤이랑 네게 맛있는 점심 사주고도 싶었었는데…….”

“…….”

“……대학 입학식도…… 못 보게 됐구나…….”

“……그전에 정리하시면 되잖아요.”

“후후, 그럼 좋겠지만…….”

“선생님께 달렸어요. 많이 기다려요, 저.”

“……응…….”

“졸업식 때도 뵙고 싶고, 대학 입학식 때도 뵙고 싶어요. 수석 합격은 문제없으니까 신입생 대표도 할지 몰라요. 보고 싶지 않으세요?”

“보고 싶어…… 너무너무 보고 싶어…….”

“그러니까 빨리 정리하세요. 이제 더 이상 이렇게 아파하지 마세요.”

“…….”

“예? 그렇게 해주실 수 있죠?”

“……노력할게…… 그렇게 할게, 위야…… 그럴게…….”

“…….”

원하는 다짐을 들려주는 소중한 사람을, 복받치는 애정에 겨워 더욱 깊게 끌어안았다. 고통의 흔적일 술 냄새가 진하게 남아 있는, 단내 나는 체취를 힘껏 들이마셨다. ……하느님, 이 사람이 좋았다. 너무나 좋았다. 혜윤이만큼, 휘만큼, 형만큼…… 성준이나 윤열이 형만큼 좋았다. 엄마와 아버지만큼 소중했다. 소중하고 소중해서 가슴이 아렸다. 이미 친구였다. 이미 가족이었다. 도저히 떼어내버릴 수 없는 자신의 또 다른 분신이었다. 그랬다. 노력해주어야만 했다. 이 사람은 노력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렇게 해줘야만 한다. 끝끝내 자신을 못 잊는다니…… 상상만으로도 너무나 두렵다. 만일 그렇다면 그와 깨끗이 헤어지는 외엔 다른 방법이 없다. 물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랑을 해보진 않았지만, 영원한 사랑이 존재한다는 허황한 얘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사랑이라니. 그저 섹스에 낭만적인 포장을 덧입힌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고상한 섹스든, 화려한 섹스든, 천박한 섹스든, 섹스는 그래봤자 섹스. 언젠가는 질리고 만다. 상대에 따라 누가 먼저고 누가 나중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 실컷 취하고 나면 언젠가 종말은 다가오기 마련이었다.

그런 면에서 섹스는 음식에 대한 기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매일 같은 것만 먹게 되면 질린다. 누구라도 질리지 않곤 못 배긴다. 그렇지. 그런 얘기다. 겁낼 필요는 없다. 생각보다 오래 걸릴지는 모르지만, 이 사람이라고 언제까지 질리지 않을 리는 없다. 믿고 기다려야만 한다. 불안해하지도 말고. 너무 가슴 아파하지도 말고. 끈기 있게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이 사람이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주는 날이 올 것이다. 활짝 웃음을 터트리며 이제 됐노라고. 비로소 이제 친구가, 가족이 돼줄 수 있노라고. 소중한 자신의 가족이라고…….

완전히 밝아버린 창문이 원망스러웠다. 아직 새까만 어둠이라면 이렇게 그를 꼭 안고 좀 더 시간을 보낼 수 있을 텐데. 이제 헤어지면 정말로 언제 다시 체온을 맞댈지 알 수 없는데. 이 예쁘고 사랑스러운 얼굴을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데. 안타까운 생각만 끝없이 흘러나왔다. 잠에서 깬 혜윤이가 자신을 찾을 것이다. 지각은 확실한 것 같았다. 결석을 하게 될지도 몰랐다. 물론 모두 흔하고 사소한 일상들이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 중하고 귀한 것은 없었다.

문 밖으로 겨울이 도착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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