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 1991년 2월. 장인환(張仁歡) (18/129)

18. 1991년 2월. 장인환(張仁歡)

뚫어놓은 얼음 구멍구멍마다 채비에 걸린 빙어가 줄줄이 딸려 올라오자 환쟁이들의 환호성은 극에 달했다. 

소양호에 도착한 첫날인 어젠 마침 일요일이라 한꺼번에 밀어닥친 인파로 꽤나 북적거렸었다. 목 좋은 자리조차 다른 관광객이 다 차지해버렸으니 수확이 좋을 턱이 없었다. 조용한 새벽에 잘 잡힌다는 기하 선배의 조언에, 잡아둔 호텔에서 늦게까지 놀다 새우잠을 잔 일행은, 새벽 일찍 잠을 설친 부스스한 얼굴로 너도나도 얼음판으로 몰려 나왔었다. 대부분 새벽잠이 많은 게으름뱅이족 출신인 것치곤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긴, 노는 일에 있어서만은 절대로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 인종들이 또 환쟁이들이다. 죽어 넘어지더라도 어디서 술 파티가 벌어진다 하면 벌떡 일어나 한달음에 달려갈 술고래들이다.

확실히 어제 저녁에 비해 인적도 드물고, 또 새벽이라선지 빙어는 낚시란 이름이 무색할 지경으로 무더기로 잡혀 올라오고 있었다. 기하 선배를 빼면 대부분 초보 낚시꾼들인 걸 감안할 때 더더욱 신기한 일이었다. 막 해가 뜨기 시작할 무렵엔 준비해 간 양동이를 다 채우고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의기양양해진 낚시꾼들은 너무 잘 잡혀서 오히려 재미가 떨어진다며 밥이나 먹고 다시 시작하자고 의기투합했다. 어제 저녁의 풀 죽은 태도를 생각하면 심히 고소를 금치 못할 작태가 아닐 수 없었다.

초보 낚시 부대는 호숫가 한편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 버너에 밥을 짓기 시작했다. 한쪽은 밥 담당, 또 한쪽은 반찬 담당, 남은 한쪽은 추위를 떨치기 위한 모닥불 담당이 되었다. 일행은 인환을 포함해 모두 아홉 명이었다. 기하 선배와 상욱 선배, 한세혁과 오주희, 그리고 은표, 석주, 상희, 경자들로, 기하 선배를 빼면 모두 인환의 미술 동인들이었다.

어제 점심 무렵, 오주희의 집들이(라기보단 그를 빌미로 한 술 파티)에 초대돼 양평 아틀리에에 갔다가 사전에 의기투합해 있던 일행들에 의해 끌리다시피 내려온 자신이다. 미리 작정을 하고 내려온 치들이야 마치 에스키모들처럼 오리털 점퍼며 스키복들로 온몸을 도배하고 있었지만, 가벼운 캐시미어 코트 차림이었던 인환으로선 그리 달가울 리가 없는 여정이었다. 2월 중순이라곤 해도 강원도의 깊디깊은 산 계곡은 여전히 북풍한설 한겨울이었다. 다섯 달 가까이 못 먹고 못 잔 몸 컨디션은 거의 바닥을 치고 있는 상태였다. 그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체중은 더 줄어서 무슨 말기 암 환자의 행색이 되었다. 조금만 많이 걷거나 책을 읽는 일 같은 간단한 작업에도 어지럼증을 느꼈고, 날밤을 까며 술을 마시는 건 거의 자살 행위와 다름이 없어졌다. 여행은커녕 시내 극장에 나가 영화 한 편을 보는 데만도 기력이 딸렸다. 기분 전환이고 파이팅이고, 지들끼리 하든지 말든지 왜 기운 딸리는 나까지 끌어들인담…… 하는 꼬인 심사만 여전했다.

그야, 시름시름 죽어가고 있는 듯한 자신을 걱정해서 동료들이 음모를 꾸민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얼핏 들긴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고마운 생각이 드느냐 하면 전혀 아니올시다다. 그저 만사가 귀찮기만 했다. 오주희한테야 지은 죄가 있으니 그녀의 관심과 염려를 황송하게 받들고 있지만, 나머지 부대야 그저 시절 좋을 때나 한철인 친구지 싶었다.

자신과 경자, 은표가 담당인 모닥불이 활짝 피어오르자 으슬으슬 스민 추위가 조금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

보이는 산 굽이굽이는 물론 꽁꽁 얼어붙은 소양호 얼음벌마다 무릎 높이 이상 쌓인 눈들 천지라, 장작에 불이 붙는다는 것 자체가 그저 신기하게만 생각되었다. 하긴 뭐, 이미 자신들보다 먼저 불을 피우고 즐기다 돌아간 다른 낚시꾼들이 미리 길을 들여놓은 덕분이겠지만.

“야, 이것들도 구우래. 밥 먹고 먹는다고.”

밥 짓는 담당 중 하나인 석주가 다가와 고구마와 감자가 섞인 비닐봉지를 내민다. 누가 가져왔는지 대단한 준비성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밥을 안치면 더 이상 할 일은 없다며 그대로 모닥불 가에 눌러앉은 석주를 필두로, 주로 얍삽한 쪽들이 일감을 나머지 한 놈에게만 미룬 채 하나둘 불가로 모여들었다.

“코트 벗어.”

마지막에 합류한 한세혁이 특유의 독사눈으로 인환을 굽어보며 일갈했다.

“……에…… 예?”

멍하니 날름대는 화염만을 응시하다가 얼빠진 반문을 던진 것은 물론이었다. 코트를 벗으라니……? 이 추위에……?

“벌벌 떠는 거 보기 싫어. 주희가 신경 쓰인대. 바꿔 입잔 얘기다, 장인환.”

보기만 해도 따스할 것 같은 검정색 오리털 코트를 벗어서 건네는 한세혁을 보고서 비로소 의미를 이해했다.

“……어…… 하지만…… 이거 얇은데…… 선배한텐 많이 작을 거예요…….”

“두말하게 하지 마. 네가 다들 신경 쓰이게 하고 있잖아. 빨리 못 벗어?”

“맞어, 감기 걸릴까 봐 걱정된다, 야. 몸도 부실한 게. 얼른 바꿔 입어.”

하나도 안 고맙게 싸가지 대꾸를 던지는 독사에 이어 경자가 사근사근 맞장구를 쳤다. 떠밀리듯 코트를 벗어 독사에게 내밀고, 대신 오리털 코트를 받아 걸쳤다. 아아, 설핏했던 한기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슈퍼울트라 방한복이 아닐 수 없었다. 독사, 미안.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되었다. 가만, 아니지. 누가 걱정해달랬나들? 날 억지로 끌고 온 오지랖 넓은 인종들이 어디의 누구들이시더라?!!!

“속 쓰리지? 일찍 일어나서? 이거 입안에 넣고 녹여봐. 맛 괜찮아.”

경자가 사탕 봉지를 내밀며 웃는다. 주근깨 자국이 희미한 귀여운 얼굴엔 근심과 연민이 담겨 있다. 부지불식간에 왈칵 목이 메는 것을 느낀다. 잠자코 봉지에서 사탕 몇 개를 꺼냈다. 확실히 자신은 요즘 정상이 아닌 모양이다. 대충 이기적이고, 대충 그림과 술 이외엔 관심이 없는 동료들조차 자신을 신경 쓸 정도였다. 동정할 정도인 것이다. 언제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까마득한 생각만 든다. 아니, 실은 거의 정상으로 돌아갈 기대조차 하고 있지 않은 요즈음이다. 낮에는 무기력하고, 저녁엔 그리워 울고, 밤엔 사진을 보며 자위를 한다. 기진맥진, 지칠 때까지 그의 얼굴만 들여다보며 자위를 한다. 친구라고? 노력이라고? 체, 개나 줘버리라지. 어차피 넌 상관없잖아. 내가 아프든 말든, 널 못 잊어 죽어가든 말든, 잘 먹고 잘 살고 있잖아. 이렇게 아파하는 나도 꼴 보기 싫어버릴 거잖아. 나 버리고도 여자들이랑 잘 붙어먹을 거잖아. 붙어먹고 있잖아. 붙어먹었잖아.

“……눈이 빨개. 꼭 우는 거 같다, 장인환?”

불쏘시개를 뒤지며 화르륵 일어나는 불꽃을 자랑스럽게 들여다보던 은표가 눈을 둥그렇게 뜬다.

“……조금 맵네…….”

시큰해진 눈시울을 애꿎은 모닥불 탓으로 돌리며 인환은 어설프게 웃었다.

빙어회와 빙어 튀김, 그리고 얼큰한 김치찌개가 주 메뉴인 밥상이 마련되었다. 한 식도락 하는 인간들이니 둘러앉아 게 눈 감추듯 밥공기를 비워댄 것은 물론이었다. 빙어회엔 쐬주가 제격이라며 한바탕 소주잔도 돌고, 모닥불 속에서 파낸 감자와 고구마도 입가에 검댕까지 묻혀가며 게걸스럽게 먹어댔다. 물론 위 기능이 현저하게 떨어진 인환으로선 그저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분위기를 깨지 않기 위해 시늉만인 맨밥을 조금 떠먹고, 고구마도 조금 먹는 것으로 식사를 끝내야 했다. 다행히 경자가 준 사탕은 위에 부담도 안 되고 새콤한 맛도 좋아서 식사가 끝나고도 내내 빨아 먹었다.

든든하게 배를 채운 초보 낚시꾼 부대는 다시금 호수 한가운데로 나가 얼음구멍에 채비를 드리우기 시작했다. 소양호 빙어의 씨를 말릴 작정이라도 한 건지, 아니면 만선을 이룬 어부가 돼서 한몫 단단히 볼 요량이라도 한 건지, 인간들의 그칠 줄 모르는 정열이 아리송하기만 했다. 역시 분위기를 깰 수 없어, 구경하는 척하며 근처를 어슬렁거리다가 커피를 끓인다며 호수 바깥으로 나가는 석주를 허둥지둥 따라 나섰다.

동료들의 어린애 같은 정열을 지켜봐야만 하는 것은 새삼 견디기 버거운 고통이었다. 동료들의 모습에 새록새록 지난여름의 추억이 함께 오버랩 되었기 때문이다. 얼음벌 위의 동료들처럼 붕어잡이에 열을 올리던 자신을 기막혀하면서도 열심히 도와주던 반라 차림의 그가 계속 눈에 밟혔다. 무언가 계기가 생겨 그를 뇌리에 떠올리고 나면 도무지 강박처럼 달라붙어 좀처럼 떨칠 수가 없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개처럼 달려드는 추억에 눈시울이 시큰거려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버너에 커피 물을 올리고, 아홉 개나 되는 종이컵에 커피를 타기 시작하는 석주를 거드는 척하다가, 화장실을 간다며 골짜기 바깥 신남리 쪽으로 슬쩍 빠졌다. 마음이야 당장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참는 것도 노력이라면 노력이었다. 친구들과 어울리고, 그림을 그리고, 먹고 자고 노는 사소한 일상들을 정상적으로 유지하는 자체가 그가 자신에게 부과한 움직일 수 없는 지상 명령이다. 아프지 않을 수 없다면 아프지 않은 척이라도 해야만 한다.

주차장이 있는 마을 방향이라곤 해도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라곤 굽이굽이 능선을 이루는 산굽이와 그 아래를 휘몰아치듯 휘어지며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얼음 벌판이다. 평상시라면 필경 그림이라도 그리고 싶다며 감탄을 연발했을 아름다운 풍광이건만, 황량한 심상으로 보니 그저 독처럼 우울함을 가중시키는 따분함이요 의미 없음에 불과했다. 눈 쌓인 산등성이는 보기만 해도 을씨년스러웠고, 꽁꽁 얼어붙은 얼음벌은 온몸으로 부딪쳐도 꿈쩍 않을 완강하고 빈틈없고 독한 누군가의 의지를 연상시켰다. 발작처럼 부르르 진저리가 쳐졌다. 더 이상 괴로워하기 싫어, 제발 날 좀 내버려둬 하는 필사적이고도 본능적인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날은 조금 흐렸다. 저녁이나 밤쯤엔 눈발을 뿌릴 칙칙함이 산허리를 길게 휘감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호수 쪽으로 밀려드는 낚시꾼들의 숫자도 조금씩 늘어갔다. 그러나 주말이 지나선지 어제와 같은 북적대는 인파는 상상이 안 될 정도로 드문드문 삼삼오오 몰려가는 수준이었다.

매서운 칼바람이 얼굴을 때리는 것도 아랑곳 않고 발길 닿는 대로 계속 걸음을 옮겼다. 주차장을 지나 10분쯤을 더 걸었을까, 가파른 능선이 한편으로 들어오고 그 맞은편으로는 막다른 골짜기가 길게 이어진 야트막하고 아늑한 오솔길이 하나 나타났다. 주차장 쪽 자갈이 깔린 2차선 도로와 마찬가지로 눈이 말끔히 치워져 있는 걸 보니, 어느 작은 마을로 통하는 입구 같았다. 되돌아가야 하나 망설이며 시계를 보았다. 아직 동료들에게 걱정을 끼칠 만큼의 부재는 아니어서 좀 더 산책을 즐기기로 했다.

양지 바른 곳이라 그런지 오솔길은 그토록 매서운 칼바람 한 점 드나들지 않았다. 새삼 제대로 숨이 쉬어지는 느낌이었다. 눈꽃이 잔뜩 내려앉은 헐벗은 나뭇가지들도 가까이에서 보니 그리 을씨년스럽게 느껴지진 않았다.

잔가지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채 덜 치운 눈 더미가 밟히는 부드러운 울림이 뒤에서 들렸다. 처음엔 흐릿한 기척일 뿐이어서 자신이 낸 것이라 착각을 했지만 제법 규칙적인 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또렷해졌다. 분명한 타인의 발자국 소리였다. 보통 사람보다 확연히 보폭이 느린 자신에 비해 뒤따라오는 객(客)은 상대적으로 빠르고 날렵했다. 점점 서로의 거리가 줄어들어 거의 추월할 정도가 되자 인환은 자연스럽게 길 가장자리로 몸을 피해주었다. 편하게 자신을 추월하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다. 인적이 드문 오솔길이고 보면 아마도 유일무이한 동행이었다.

바로 옆을 스쳐 갈 듯하던 객은, 그러나 앞서가는 대신 인환과 보폭을 맞춘 채 시선을 보내왔다. 멍하니 괴로운 생각만을 좇고 있다가 인환은 그제야 화들짝 놀라 옆에 달라붙은 불청객을 굽어보았다.

한세혁의 날카로운 눈매와 정통으로 부딪쳤다.

“히엑!!!!! 서…… 선배?!!!!!”

예상치 못한 상대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마주친 덕분에 필요 이상으로 놀라고 말았다. 타이어에서 바람이 빠지는 듯한 우스꽝스러운 탄성과 함께 움찔 몸을 떨기까지 했다. 당장 걸음을 멈춘 것은 물론이었다.

“내가 귀신이냐? 기분 나쁘게스리…….”

후려치듯 내뱉는 싸가지 말투까지 들리는 걸 보니 영락없는 독사다. 자신이 걸음을 멈추자 따라서 멈춰 선 독사는 그 특유의 인상 더러운 시선으로 자신을 찬찬히 살피고 있었다. 칼바람을 맞아 코끝과 뺨이 조금 붉어져 있지만 언제나처럼 병적으로 새하얀 낯빛이 서늘하다. 제멋대로 자란 사자 갈기 같은 새까만 머리카락은 바람에 이리저리 엉켜 어딘가 더 위협적으로 보인다. 자신에겐 헐렁할 정도로 품이 큰 캐멀색 캐시미어 코트도 독사가 입으니 앞섶을 채운 뿔 단추가 곧 터져 나갈 것처럼 갑갑하다. 꽤 말라 보였던 것은 커다란 키와 거의 검정 일색인 옷차림으로 인한 착시 현상이었나 보다. 종아리 중간까지 충분하게 피트 된 길이감도 독사의 큰 키엔 그저 깡뚱하니 무릎을 간신히 덮을 정도다. 나름대로 소탈하면서도 세련된 스타일을 자랑하는 독사 체면이 무색할 옷매무새에 새삼 웃음이 나왔다. 새삼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독사가 스타일을 구긴 덕분에 자신은 이렇게 따뜻할 수 있으니까.

“……코트 다시 바꿔드릴까요? 역시 좀 춥죠, 선배?”

빌빌 기는 후배 모드로 자동 변신을 해선 아마도 독사의 유일한 용건일 질문을 선수 쳤다. 최대한 생글거리는 웃음까지 양념으로 던지자, 희다 못해 흡혈귀처럼 창백한 한세혁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젠장. 번지수가 틀렸나?

또 무슨 독설로 사람 심사를 들쑤실지 피로한 예감만 든다. 만사가 귀찮다. 너무나 피로해서 마냥 자고만 싶다. 제발 좀 날 내버려둬줬으면. 제발 부디. 다시 기력을 회복할 수 있을 때까지만이라도.

“해골바가지 꼬락서니를 해갖고 웃지 마, 새꺄. 섬뜩하니까.”

역시, 또 시작이다.

“……그래서 고작 사랑 때문에 이 호들갑이냐?”

“……?”

“부서지랬더니 기특하게도 부서지는 건 좋은데, 그 원인이란 게 고작 사랑 때문이란 말이지?”

두근…….

“……선…… 배……?”

“새끼, 넌 역시 그래서 안 돼. 뛰어봤자 도련님 주제밖에 안 된다는 얘기야. 괜히 용쓸 생각 말고 분수나 지켜라. 넌 그저 도련님이 딱이야. ……안 그래? 그 꽃제비지? 널 이렇게 만든 놈?”

두근…… 두근…… 두근…….

“처음엔 주희인 줄 알았지. 그전엔 계집애들도 꽤 몰고 다녔었고…… 다 연막이었더란 말이지. 여우 같은 새끼. 하여간 사리기는 죽어라 하고 사려요, 귀엽게.”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필사적으로 숨겨왔겠지만, 봐라. 부서진 틈으로 비밀들이 술술 흘러나오고 있다구. 일단 균열이 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어지거든. 자, 봐. 내 앞에서도 대책 없이 술술 흘리고 있으니 기회 봐서 덮칠지도 몰라. 너 먹고 싶었거든, 전부터.”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몰라? 잡아먹겠다는 얘기야, 널.”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거대한 거미줄에 걸리기라도 한 것마냥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마도 자신의 낯빛은 한세혁의 하얀 얼굴보다도 더 창백해졌을 것이다. 가뜩이나 기력이 딸리는 몸에 또 어지럼증이 일기라도 할까 봐 필사적으로 호흡을 골랐다. 어떻게든 정신만은 온전히 붙들어야 했다.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뒤로 물러나는 몸짓을 하자 한세혁의 냉랭한 입가에 피식 웃음이 퍼졌다. 폭력이라도 쓸까 보냐 하는, 사내로서의 자존심이 서린 일갈이었다.

당장은 충격을 소화하는 데만도 바빠 한세혁이 말하고 있는 의미 전부를 파악할 수는 없었다. 다만, 숨기고 싶었던 자신의 모든 것이 낱낱이 발가벗겨졌다는 것만은 확실히 깨달았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어렵고 난폭하고 부담스러운 3년 선배 한세혁 역시 자신 앞에서 망설임 없이 발가벗으려 한다는 사실이었다.

“……너무 허술해.”

“…….”

“부서지기 시작할 땐 누구나 그렇지. 그러니 조심하는 게 좋아, 도련님. 그야…….”

“…….”

“……그야 물론 내겐 행운이지만…….”

한세혁 쪽에서 몇 걸음을 다가서자 서로의 거리는 상대의 숨결이 맡아질 정도로 다시 좁혀졌다. 마치 슬로우션을 보는 것처럼 한세혁의 몸짓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온다. 뚫어지게 자신의 눈을 붙들고 있는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눈매,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얗게 퍼지는 입김, 이마로 흘러내려 이리저리 뒤엉킨 머리카락을 귀찮은 듯 쓸어 올리는 손가락…… 을 덮고 있는 것은 까만 가죽 장갑이었다. 까만 손가락은 다시 아래로 내려가 다른 까만 손가락과 합쳐졌다. 천천히 까만 장갑이 벗겨진다. 드러난 것은 얼굴빛과 똑같이 새하얗고 긴 손가락. 허물을 벗은 손가락은 허물을 치우기 위해 코트 주머니로 잠깐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움직임을 거듭하던 손가락이 마지막으로 와 닿은 곳은 인환의 뺨이었다. 발갛게 얼어 있던 피부는 느닷없이 접촉한 따스한 온기에 펄쩍 뛰었다. 나머지 손이 허리춤으로 파고들더니 어마어마한 힘으로 상반신이 끌려갔다. 뺨을 쓸던 손가락이 뒤통수로 돌아가 머리카락을 움켜쥐는 것이 느껴졌다. 아픔이 느껴질 무렵 머리통 역시 앞으로 끌려갔다. 철벽같은 수컷의 의지가 느껴지는 단호한 움직임이었다.

키스는, 너무나 낯선 것이어서 당장은 실감이 되질 않았다. 입술의 감촉도, 담배 냄새가 섞인 체취도, 타액의 맛도, 혀끝의 움직임이라든가 빨리는 힘도 모두 너무나 달랐다. 이런 게 키스였나? 하고 무심코 생각했을 정도였다. 저항을 하지 않자, 불청객의 움직임은 좀 더 완만하고 좀 더 농후해졌다. 깨물린 혀끝이 아팠다. 숨이 가빠 떨어지려는 몸짓을 취하자 단번에 제동이 걸렸다. 허리에 감긴 팔이 난폭하게 끌어당기는 바람에 허리가 뒤로 활처럼 휘어졌다. 각도를 바꾼 입술이 트럭처럼 부딪쳐왔다. 아랫입술이 깨물려 신음을 흘리자 기다렸다는 듯 축축하고 뜨거운 혀가 요동을 치며 파고 들어왔다.

현기증이 일었다. 아주 익숙해져버린 현기증이었다. 눈앞이 캄캄해지며 다리에 힘이 풀렸다. 오리털 코트의 지퍼가 열리고 있었다. 지퍼를 연 손가락이 허리춤으로 단숨에 파고들며 스웨터와 셔츠를 들추고 있었다. 아랫배 근처에 닿아오는 손길은 섬뜩했다. 낯설고 낯설어서 섬뜩했다. 이 손이 아니다. 이 손길이 아니다. 캄캄해진 시야 가득 반딧불이 같은 노란빛 수천 개가 떠다녔다. 몸서리를 치며 독사의 손길을 피하기 위해 기를 썼다. 손으로 밀어내도 꿈쩍하지 않아 양팔을 껴안다시피 웅크려 거리를 만들었다. 소용이 없었다. 아랫배와 허리를 오가며 어루만지던 손길이 사타구니 틈으로 내려와 치부를 움켜쥐었다. 바지와 속옷이 가로막고 있긴 했지만 섬세한 애무의 손길은 싫을 정도로 민감하게 느껴졌다. 남자를 아는 손길이었다. 아니, 남자의 몸을 안아본 손길이었다. 곧 기절할 것처럼 몸에선 위험 신호를 보내는데 독사를 떨쳐낼 방법이란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절망감에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버둥거리는 허리를 고정하려는 듯 뒤통수를 움켜쥐고 있던 손가락이 마저 아래로 떨어졌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고개를 뒤틀어 그의 입술을 벗어났다. 막혔던 숨길을 가까스로 소통시키는 동시에 있는 힘껏 주먹을 날렸다.

빠악!!!!!!

휘청 하며 독사의 고개가 옆으로 크게 돌아갔다. 하반신 근처를 떠돌던 손길도 조금 느슨해졌다. 틀어쥔 주먹에 있는 대로 힘을 실었다. 명치끝이라고 생각되는 지점에 그대로 내질렀다.

퍽!!!!!!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진득하게 달라붙던 몸이 겨우 떨어져 나갔다. 충격이 상당한 듯, 허리를 반으로 접은 독사가 배를 움켜쥐고 신음하는 것이 얼핏 보였다. 어지럼증이 극에 달했다. 엉덩방아를 찧듯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식은땀이 솟았다. 눈을 감고 필사적으로 호흡을 골랐다. 기절하지 않을 거다. 절대로 기절 같은 걸 하지는 않을 거다. 씨팔. 씨팔, 개새끼. 독사 같은 새끼.

“……새끼, 너 몸 괜찮았으면 벌써 나한테 죽었어. 어디 감히 하늘같은 선배를…….”

몇 걸음쯤 떨어진 위치에서 독사가 으르렁거렸다. 열받는 건, 싸가지 없는 말투에 여지없이 섞여든 유쾌한 웃음기였다. 치미는 울화통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평소의 한세혁답게 적반하장의 격노를 던졌다면 이렇게까지 화가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화를 내니 현기증이 더 심해지는 느낌이어서 이를 악물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감았던 눈을 뜨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평형 감각을 되찾기 위해 기를 썼다. 화조차도 마음대로 낼 수 없다니 한심하고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온다, 씨팔. 씨팔, 개새끼. 독사 새끼. 넌 이제 선배도 아냐, 새꺄. 먹고 싶다구? 잡아먹겠다구? 오냐, 어디 그래봐라, 씨발. 그땐 명치가 아니라 자지를 까주고 말 테니.

“……괜찮냐, 도련님?”

불쑥 눈앞으로 뻗어온 걸 보니 독사 손이다. 갸름하고 하얀 게 환쟁이 손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멀끔하니 아름다운 손. 딱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쳐내버리고 비틀비틀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핥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혐오감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더 이상 화를 낼 기력 따위 없어 악착같이 시선을 피했다. 다행히 독사로부터도 더 이상의 도발은 없었다.

방향을 돌려 주차장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여전히 좀 어지러웠지만 독사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최대한 태연을 가장했다. 마음만 먹으면 금방이라도 따라잡힐 절뚝걸음이기에 솔직히 쫄아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옴짝달싹할 수도 없을 만큼 완벽하게 독사에게 지배당했던 순간을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떨렸다. 정말로 독사가 작심하고 덤볐다면 강간이라도 당했을 것이다.

30여 미터쯤은 떨어졌을 것이다. 숨을 죽인 채 긴장하고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따라오는 기척은 없었다.

“……자두 맛 캔디.”

흠칫.

간신히 안도할 무렵, 느닷없이 던져진 싸가지 목소리에 기절초풍을 했다. 아, 씨발. 씨발. 또 울화통이 터질 것 같다. 한심할 노릇이지만 자신은 역시 꽤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경자가 줬냐?”

“…….”

“……맛있었다, 장인환.”

“…….”

“……종로나 이태원 가면 널린 게 이쪽 남자야, 새꺄. 눈 딱 감고 한 달만 다른 놈들과 뒹굴어봐. 꽃제비 생각은 금세 날아갈 테니.”

“…….”

“……사랑이라고? 니가 무슨 순정 소녀냐? 고작 사랑 따위에 말라 죽는다는 게 말이 돼? 병신. 그래서 넌 아직도 멀었다는 거야, 새꺄.”

“…….”

더 이상 참아줄 수가 없어서 여봐란 듯이 귀를 틀어막았다. 뭐라고 더 씨부렁거리는 것 같았지만 알 게 무어냐.

오솔길을 벗어나자 기다렸다는 듯 칼바람이 몰아쳤다. 주차장으로 직행했다. 어서 빨리 따뜻하고 안전한 집에 돌아가고 싶어 안달이 났다. 두들겨 패 끌고 간다고 해도 더 이상은 동료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 다른 어느 누구와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피곤했다. 피곤하기만 했다. 그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내내 잠만 자고 싶었다. 하루 종일 잠만 자면 더는 괴롭지 않겠지. 머리가 돌아버릴 것처럼 그만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그가 내린 지상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이렇게 피곤한 일상을 계속하지 않아도 되겠지. ‘친구 되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아니, 불가능했다. 그를 그리워하는 뇌를 들어내 통째로 바꾸지 않는 한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다. 불가능을 생각하면 무서워졌다. 숨도 쉴 수 없을 것처럼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친구로서도 안 볼 겁니다…….

욱신…….

―안 볼 겁니다.

욱신…… 욱신…… 욱신…… 욱신…….

―……제게 계속 고통과 불편만 준다면 잘라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욱신…… 욱신…… 욱신…… 욱신…… 욱신…… 욱신…… 욱신…… 욱신…….

―친구로서도 안 볼 겁니다.

―친구로서도 안 볼 겁니다.

―……안 볼 겁니다…….

발갛게 언 뺨에 흐르는 눈물은 지나치게 뜨거운 느낌이 들었다. 도무지 어디 주차를 시킨 건지 주르륵 늘어선 차들 중에 자신의 BMW는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독사가 운전을 했고 독사가 주차를 시킨 때문이다.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와 시야를 가리는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끝까지 천하의 원수 놈이 아닐 수 없었다.

…… 위야, 미안…… 미안…… 노력하고 있는데…… 정말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데 잘 안 돼…… 진짜야…… 나 정말 열심히 노력하고 있거든…… 근데 잘 안 돼서 무서워…… 이렇게 안 될 줄 몰랐는데…… 근데…… 근데 진짜 안 되는걸…… 너무 무서워…… 너무 무서워, 위야…… 너무…… 너무…….

―눈 딱 감고 한 달만 다른 놈들과 뒹굴어봐.

천하의 원수 놈이지만 주로 옳은 말만 한다는 걸 안다. 그래 봬도 명색이 실력 좋은 하늘같은 선배였다.

―눈 딱 감고 한 달만 다른 놈들과 뒹굴어봐. 꽃제비 생각은 금세 날아갈 테니.

정말 그럴까?

사람의 흔적이 잡히지 않는 걸 틈타 흐엉흐엉 통곡을 했다.

통곡을 하면서도 골똘히 생각했다.

―눈 딱 감고 한 달만 다른 놈들과 뒹굴어봐.

정말 그런 걸까?

―뒹굴어봐. 꽃제비 생각은 금세 날아갈 테니.

노벨상 감일 세기적 정리(定理)를 궁리하듯 골똘히 생각했다.

―뒹굴어봐. 꽃제비 생각은 금세 날아갈 테니.

몸서리가 쳐지는 독사의 키스와 포옹을 떠올리고 곧 절망했다.

대가는 지독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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