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 1991년 3월. 장인환(張仁歡) (19/129)

19. 1991년 3월. 장인환(張仁歡)

‘결의’를 실천할 기회는, 그러나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소양호에서 돌아와 바로 독감에 걸렸고, 일주일을 혼자 끙끙 앓다가 결국 쓰러져 입원을 하게 된 때문이었다. 짐작은 했지만 영양실조에 폐렴까지 겹쳤다는 의사의 선고에 망연자실했다. 당장 든 생각은 그가 혹시라도 알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더럭 겁을 집어먹은 것은 물론이었다.

하긴 일체 연락이 끊긴 상태니 그가 탐정이라도 고용하지 않는 한 자신의 상태를 알 까닭은 없었다. 또 그럴 정도로 그가 자신을 마음에 새기고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지 않은가? 친구란 그런 것이다. 가끔 생각나면 기분 좋고, 또 가끔 만나면 즐겁고, 가끔 아파하면 같이 아파해주고, 또 가끔 기쁜 일이 생기면 같이 기뻐해주는, 그런 편안하고 다정한 관계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친구의 상태를 살핀다면 그건 이미 스토커지 더 이상 친구는 아니다. 자신이 마해영이나 오주희를 감시하지 않듯, 또 줄곧 뇌리에 담아두지도 않듯, 그 또한 그럴 것이다.

질겁해 1센티쯤 내려앉았을 심장을 원위치시키고, 철저하게 의사의 지시에 따르며 몸보신을 했다. 물론 아무리 철저하게 몸보신을 한다고 한들 다섯 달에 걸친 부대낌이 쉬이 나아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열흘이나 입원을 하는 바람에 엄마에게까지 입원 사실이 알려지고 말았다. 퇴원하자마자 곧바로 평창동으로 끌려가 2주 가까이 죄수처럼 갇혀 지낸 것은 물론이었다. 전시회 때보다도 더 다종다양한 보양식들이 줄줄이 코앞에 바쳐진 것도 또한 당연한 수순이었다.

몹시 걱정하는 엄마를 볼 면목도 없고 답답한 감시의 눈길이 괴롭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몸에는 좋은 약이 되었다. 규칙적인 식사도, 잠도, 또 엄마의 각종 보양식들도 최상의 치료제였다. 무엇보다, 자신 또한 엄마 눈치를 살피느라 그를 생각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살도 3킬로가 늘어(그래봤자 실연 후 잃은 10킬로를 모두 회복하자면 아직 요원하기만 했다) 그럭저럭 암 환자 같지는 않아졌다. 좀 더 집에 붙잡아두려는 엄마를 간신히 설득해(매일매일 안부 전화를 때리고 사흘에 한 번씩 집에 들르겠다는 약속을 한 후) 입원한 지 25일 만에 겨우 아틀리에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그것이 3월 중순, 세상은 어느새 봄을 성큼 품고 있었다.

김천댁 아줌마가 와서 대청소를 하고 간 멀끔한 화실에 앉아 음악도 듣고 비디오도 봤다. 걱정하는 친구들과 동료들의 전화를 줄줄이 받기도 했다. 만나자는 초대는 전부 거절했다. 몸 상태가 안 좋은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단 평범한 일상성의 유지라는 노력들에 무의미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몸이 좀 더 좋아지면 미메시스로 가서 남자 사냥을 할 생각이다. 정말 눈 딱 감고 한 달 동안 아무 남자들하고나 뒹굴어보려고 한다. 세이프 섹스를 하는, 평판 좋은 게이이기만 하면 상대는 가리지 않을 생각이다. 세 명쯤도 좋고 일곱 명쯤도 좋을 거다. 열 명쯤 된대도 신경 안 쓴다. 외모도 취미도 학력도 성격도 절대 고려하지 않을 거다.

일단 결심을 굳히고 나니 체념과도 비슷한 평화가 왔다. 여전히 하루 중 대부분을 그를 생각하며 보내고, 밤이면 그의 사진을 보며 자위를 해도 전처럼 그리 괴롭거나 두려운 기분은 들지 않았다.

이 상태를 희망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정말 누가 알겠는가. 한 달쯤 마음대로 몸을 굴리고 나면 그에 대한 이 지독한 그리움이 말끔히 사라지고 없을지. 정말 그렇지 않을까? 자신이 아는 몸이라곤 그밖에 없었던 거다. 처음이자 유일한 상대였다. 이토록 그에게 집착을 하는 까닭이 그저 오리들의 어미 인식 같은 것에 불과하다면 굳이 몸을 사릴 필요가 있을까? 그야 처음엔 괴로울 것이다. 비참한 기분도 들겠지. 하지만 그도 잠깐일지 모른다. 어차피 그를 잊을 수만 있으면 더 이상의 괴로움은 없다.

그렇게 며칠을 조용한 기대 속에서 보내고 나니 그림을 그리고 싶은 기분도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오주희는 당분간 그림도 그리기 힘들 거라고 했는데 과연 그랬다. 실연한 뒤로는 스케치북에 하찮은 낙서조차 좀처럼 할 수가 없었다.

따스한 봄볕이 아틀리에 가득 비쳐들고 있었다. 광선 상태는 거의 최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처음부터 그를 그려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너무나 오랜만이니 손을 풀어줘야겠다 싶었었다. 스케치북을 펼쳐들고 목탄으로 이런저런 사물들을 그려나가기 시작했었다. 손은 넋을 따르게 마련이었다. 의미 없는 사물들은 자연스레 보지 않아도 눈에 선한 특정 선들과 형태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완성된 스케치북을 보고 가슴이 심하게 뛰었다. 화면 안에는 너무나 그리운 얼굴이 멋들어지게 들어앉아 있었다.

스스로의 손이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맙소사. 그간 그를 그려볼 생각을 하지 않았던 자신이 희한하게까지 생각될 정도였다. 너무나 흥분을 한 나머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것은 새롭게 발견된 금광과도 같은 환희에 찬 자각이었다. 그저 머릿속에 떠올릴 때와 달리, 손으로 그려 형태를 드러내니 그만큼 더 생생하게 실체로 다가왔던 것이다.

정신없이 스케치북을 채워나갔다. 눈, 코, 입술, 얼굴 형태, 짙은 흑갈색 머리카락, 굵고 힘 있는 목줄기, 가슴, 배, 피아니스트의 손가락, 손톱, 허벅지, 자지와 불알, 종아리, 발등, 군함처럼 커다란 발등, 발등, 발톱, 엉덩이, 등줄기, 견갑골…… 하느님…… 견갑골, 뒷덜미, 귓바퀴, 귓불, 아아, 너무 좋아…… 좋아…… 하느님…… 다시 얼굴, 얼굴, 미소…… 눈…… 눈…… 눈동자…… 고요한…… 고요하게 이쪽을 굽어보는…… 내 그리운 눈동자…….

얼마나 시간이 흘러갔는지 알 수 없었다. 점심을 먹고 얼마 안 돼 시작했던 걸 보면 족히 서너 시간은 넘은 것 같다. 집 안의 빈 스케치북이란 스케치북은 거의 다 채운 것 같았다. 그저 정적인 포름을 모사하는 것을 넘어 다양한 동작과 자세와 이미지들을 샅샅이 되짚어나갔다. 해가 지고 있었다. 어느덧 주홍빛으로 변한 햇빛이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서쪽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서너 권쯤인가의 스케치북을 채우고 나니 마침내 흑백의 목탄만으로는 더 이상 만족이 되지 않는 상황이 닥쳤다.

창 밖을 흘낏 보고 빈약한 광선의 상태를 살핀 다음, 아예 커튼을 치고 백열등을 켰다. 본격적으로 유화 작업을 해보고 싶었다. 허둥지둥 이젤을 세우고 캔버스를 걸고 물감들을 풀고 있는데 갑자기 현관 벨이 울렸다. 썅. 저절로 욕이 나왔다. 조급한 마음에, 고작해야 택배 배달원 정도일 방문객을 향해 속으로 실컷 저주를 퍼부었다. 작업용 앞치마를 허리에 매달며 현관 쪽으로 달음질쳤다.

“누구세요?”

“…….”

몇 초를 기다려도 대꾸가 없다.

“누구세요?!!!”

정말로 신경질적인 닦달이 나가고 말았다. 할 수 없었다. 그만큼 초조했으니까. 뉘신지 모르지만 댁이 먼저 실수한 거라구, 지금.

“……접니다, 선생님.”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숨이 그대로 멎었다.

“……잠시만 뵐 수 있을까요?”

환청이 아닌 것 같다. 순식간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콰당!

무릎이 푹 꺾이며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안 계시면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미리 전화라도 드렸어야 했는데…… 마음이 급하다 보니 이렇게 됐습니다……. 잠시만 뵙게 해주십시오. 죄송합니다.”

꿈도 아닌가 보다. 새까맣게 변했던 시야가 가까스로 제 기능을 찾기 시작했다. 멈췄던 호흡이 띄엄띄엄 토해졌다. 그러나 떨림은 더 심해지고 있었다. 힘이 풀린 다리도 여전해서 현관문 쪽으로 다가가긴커녕 일어설 수조차 없었다.

“……선생님?”

“…….”

목구멍도 얼어붙은 게 틀림없다. 대답을 해야 하는데…… 가기 전에…… 그냥 돌아가버리기 전에…… 어떡하든 대답을 해서 그를 못 가게 해야 하는데…… 목소리가 안 나와…… 하느님, 안 나와…….

“……제가 열고 들어가겠습니다.”

잠시 망설이는 듯하던 그가 조용히 선언했다. 비밀번호를 누르는 삑삑 소리가 흐릿하게 들렸다.

찰칵.

비스듬히 문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낯선 밤색 랜드로버가 보였다. 군함처럼 커다란 크기는 익숙한데 신발은 전혀 낯설다. 새 신발인 모양이다. 옅은 베이지색의 서지 팬츠가 보인다. 저것도 낯설다. 좀 더 시선을 올리니 짙은 감색의 싱글 브레스티드 재킷이 보인다. 그 안에 받쳐 입은 옅은 하늘색의 플란넬 셔츠도 보였다. 역시 새 옷이다. 몽땅 다 낯설다.

“……선생님?!”

당혹한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서둘러 신발을 벗는다. 큰 걸음으로 세 걸음을 딛자 바로 코앞에 그리운 얼굴이다. 머리카락이 자랐다. 역시 머리 스타일도 좀 변했다. 스포츠머리에 가까울 정도로 짧은 길이 대신, 좀 더 여유 있게 부드러운 물결을 이루는 암갈색 머리카락이 관자놀이와 목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단정하게 잘려 있었다. 머리 스타일이 변하니 위험스러운 수컷의 냄새가 더더욱 물씬 풍기는 것만 같다. 정말 이제 청년이구나 하는 생각이 멍하니 들었다. 그래도, 티 하나 없이 깨끗하고 매끄러운 황금색 피부는 그대로다. 지나치게 무표정해서 독선적으로까지 보이는 깊은 시선도, 고요하게 자신의 눈을 굽어보는 맑고 검은 눈동자도 그대로다. 189센티의 큰 키에, 육식 동물처럼 단단하고 꽉 짜인 근육으로 뒤덮여 있는 다부진 체격도, 표범처럼 우아하고 유려한 걸음걸이도 그대로다. 하느님, 이제 좀 안심이다.

“……괜찮으세요? 일어나실 수 있어요?”

아름다운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이 자신의 양쪽 어깨를 힘 있게 쥐고 흔든다. 아마 창백해진 자신의 얼굴빛에 좀 놀란 모양이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의 탐색하는 듯한 시선이 샅샅이 훑어간다. 탐색 결과가 별로 마음에 안 드는지, 양미간이 괴로운 듯 심하게 일그러진다.

“……별로 나아지지 않았군요…….”

“……어…… 아…… 아니…….”

휴우. 겨우 목소리가 나왔다. 정말 다행이다.

“……살 쪘는데 좀…… 계…… 계속 또 찌고 있으니깐…….”

병신, 떨지 마. 더듬지 마, 쪼다같이.

“……바…… 바…… 바…… 밥맛도 다시 좋아지는데……?”

아, 씨팔. 더듬지 말라니까!!!!!!

“……일어나보세요. 부축해드릴게요.”

여전히 괴로운 얼굴로 일갈하더니 양쪽 겨드랑이 틈으로 그의 손이 들어온다. 상체가 위로 확 들어 올려지며 그의 몸에 거의 달라붙을 듯이 되었다. 그리운 체취가 봇물처럼 왈칵 파고들었다. 폐를 활짝 열고 힘껏 들이마셨다. 아직도 좀 아픈 폐가 뻐근한 기지개를 켜며 살아나고 있다. 아아, 이제 좀 살겠다. 바로 이 냄새를 맡고 싶었던 거라구…… 하고 폐가 씨익 웃고 있는 것만 같다.

그에게 거의 안기다시피 소파로 가 앉혀졌다. 자신을 앉힌 즉시 떨어져 나가려는 그의 옷자락을 필사적으로 움켜쥐었다. 무심코 막 일어서려던 그의 몸은 별로 힘도 못 써보고 자신의 옆에 주저앉게 되었다. 중심을 잡지 못해 잠시 휘청대는 상반신을 무턱대고 끌어안았다. 움찔 긴장하며 떨어지려던 몸은 자신의 양팔이 문어처럼 등줄기를 휘감자 마치 석상처럼 빳빳하게 굳어졌다. 개의치 않고 얼굴을 가슴팍에 파묻었다. 재킷 틈, 좀 더 그의 살 냄새를 느낄 수 있는 셔츠 위에 코를 박고 맹렬하게 비벼댔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걸로 족했다. 이 상태가 영원이었다. 이 순간이 죽음이었다. 죽어야지. 죽어야지. 이대로 죽어버려야지. 그래, 죽을 테야. 죽어버릴 거야. 죽어버리고 말 테야…….

한동안 광란에 가까운 자신의 발작을 미동도 않고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있던 그가 이윽고 조용히 팔을 감아왔다. 부드러운 포옹이었다. 자신을 달래려 할 뿐인 속내가 여실해서 가슴이 찢어졌다. ……나쁜 놈. 나쁜 놈, 나쁜 놈, 나쁜 놈, 나쁜 놈. 진짜 나쁜 놈…….

“……이러지 마세요, 선생님…….”

울적한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전해진다. 상냥하고 상냥한 친구의 어조.

“……이건 좋지 않아요. 그동안 서로 잘 견디고 있었으니까…… 앞으로도 잘 견뎌주실 줄 믿어요. 믿고 있어요, 선생님…….”

죽일 놈.

“하루라도 빨리 그날이 오길 기다립니다. 저도 무척 힘들지만 선생님 생각하면서 잘 참고 있어요.”

진짜 죽일 놈. 너 진짜 죽이고 싶어…….

“……쉬…… 울지 마요…… 울지 마세요…… 조금만 더 견뎌봐요…… 그렇게 해봐요, 선생님…… 예……? 울지 마세요…… 그만…… 가슴이 너무 아파요…….”

죽일 놈 주제에 정말 괴로운 목소리를 한다. 자신처럼 견디기 힘든 듯 아픈 신음을 흘린다. 아프고 아프게 몸을 떨기만 한다. 죽일 놈이지만 아파하는 건 죽어도 보기가 싫은 것이 또한 자신이다. 죽일 때 죽이더라도 아프게 할 수는 없다. 그가 아픈 건 정말 못 참는다. 더더구나 자신 때문에라면 털끝만큼도 아프게 할 수가 없다…….

울음을 터트리니 힘이 또 빠져버렸다. 문어처럼 달라붙었던 괴력은 그저 한때의 아드레날린 효과였나 보다. 그저 그의 품에 얼굴만 파묻은 채 숨만 몰아쉬었다. 기운 좀 다시 내보려고 눈물도 그치고 싶었지만 이건 또 버그가 났나 보다. 마냥 줄줄줄, 속수무책으로 쏟아지기만 한다.

나쁜 놈이자 죽일 놈인 자신의 영웅은 무척 오랫동안 그런 자신을 안아주었다. 다정하게 껴안고, 부드럽게 등줄기를 쓸고, 음악처럼 아름답고 꿀처럼 달콤할 위로의 말을 귓가에 끊임없이 쏟아부어주었다. 진짜 나쁜 놈이다. 이래서야 당장 죽일 수도 없다. 죽을 수도 없다. 죽고 싶은데 죽지도 못하게 한다. 그냥 이렇게 꼭 껴안고 콱 죽어버리고만 싶은데, 나쁜 놈이. 나쁜 놈, 나쁜 놈, 나쁜 놈, 나쁜 놈. 진짜진짜 나쁜 놈…….

“……왜 왔어……?”

“…….”

“……나 보려곤 안 왔을 거 아냐…… 내가 전화할 때까진 하늘이 쪼개져도 안 왔을 놈이잖아, 너…….”

“……돈이 필요합니다.”

“……?”

“아주 많은 돈이 필요해요. 선생님께밖에 부탁할 수가 없어서 왔어요.”

“…….”

“언제가 됐든 반드시 갚을 거라는 건 아시죠? 그러니 빌려주셨으면 해요. 아니, 빌려주셔야 해요.”

마치 밥 한 끼 사달라는 것처럼 담담한 어조였다. 자신이 거절을 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 일체의 비굴함도, 일체의 주저도 없는 당당함이었다. 물론 그것은 철저한 신뢰를 의미했다. 친구로서의 자신을 완벽하게 믿고 의지하는, 열렬한 애정을 바닥에 깔고 있는 그런 것이었다.

악마와 같은 속삭임이 저 밑바닥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가슴이 뛰었다. 심연에 곤두박질쳐진 절망이 야릇한 색조로 희망을 변주하며 무의식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었다.

“……어…… 얼만데?”

“…….”

“얼마냐니까?”

“……8천.”

“……파…… 8천만 원?”

“예.”

그리 큰돈은 아니다. 아버지가 물려준 자신 소유의 주식을 조금 팔면 되니까. 하지만 그에겐 다를 것이다.

얼굴을 파묻고 있는 셔츠 아래, 두근두근 맥박 치는 그의 건강한 심장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온다. 자신의 가슴 떨림과는 명백히 다른, 올곧은 순수함일 것이다. 교활하게 돌아가고 있는 두뇌 회로를 그가 알아차릴까 차마 두렵다. 자칫하면 다 잃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실낱처럼 가느다란 연결 고리조차 완전히 잘라내버리는 일이 될지도. 하지만 도대체 그것이 진짜 희망이 될 수 있을까? 과연 진짜 희망이기나 한 걸까? 친구라고? 씨팔, 개나 줘버리라지.

“……조…… 조금 많긴 많구나.”

등신. 조금이면 조금이고 많으면 많은 거지, ‘조금 많은’이란 형용사가 가당키나 한가 말이다. 하지만 개의치 않고 태연하게 엄살을 떨어본다. 정말로 ‘조금’은 부담이 된다는 듯이. ‘조금’은 곤란하다는 듯이.

“예. 그렇죠? 현준 형 사정도 별로 좋은 건 아니라서 도저히 부탁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쪽 아버님과는 의절을 한 상태거든요. 데뷔한 지 얼마 되지도 않고, 언더그라운드 음악이라 당장 성공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그래……?”

머리야, 굴러라! 굴러라, 제발! 굴러! 제발, 어서! 어서 굴러! 굴러. 굴러, 굴러!!!

잦아들었던 온몸의 떨림이 다시 시작되자 그가 포옹을 더 깊게 한다. 자신의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치는 생각을 차마 예상치 못하겠지. 면전에서 그의 신뢰를 깨고 따귀를 날릴 자신을 꿈에도 모르겠지. 그렇겠지. 그렇겠지, 성실한 내 ‘연인’아!

“……그…… 근데…… 그…… 그렇게 많은 돈이 갑자기 왜 필요한 건데? 무…… 무슨 일 생긴 거니?”

“…….”

“……무슨…… 혹 윤열이 형한테…….”

“……휘가…….”

부드럽게 등줄기를 쓸고 있던 팔에 와락 힘이 들어가며 상반신이 조여든다. 갈비뼈가 부러지는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너무나 기분 좋은 조임에 온몸이 찌르르한 기쁨의 전율을 흘렸다. 그로선 생각하기 괴로운 일임에 틀림없었다.

“……휘…… 가……?”

“……휘가 사고를 쳐서…… 한 애는 각막을 다치고…… 실명을 하게 될 거라고 하더군요. 다른 한 애는 전치 11주가 나와서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부모와 합의하기까지 꽤 애를 먹었습니다. 다행히 합의를 해주더군요.”

온몸의 떨림이 갈수록 심해졌다. 긴장으로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혹시 자신은 휘의 곤경을 좋아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의 속앓이에 쾌재를 부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럴지도 몰랐다. 가슴을 후벼 파는 죄책감이 설핏 고개를 들었지만 무시했다. 무시하기로 했다. 이미 악마와 거래를 했다. 다시는 그의 친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대가는 그게 무엇이든 달게 받겠다. ‘아무 남자든’과 뒹굴 생각까지 했다. 뭇 아무개들한테 기꺼이 다리를 벌릴 생각이었다. 그게 어떤 대가가 됐든 그보다 더 끔찍스러운 대가는 아닐 것이다. 그러니 끝까지 밀어붙여야만 한다.

“……닷새쨉니다. 벌써 닷새째 녀석이 유치장에 있어요. 녀석을 전과자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절대로 그럴 수 없어요, 선생님.”

“…….”

“……가뜩이나 위태로운 녀석이라 소년원에라도 가게 된다면 정말 더 이상 걷잡을 수 없어질지 몰라요.”

“…….”

“……도와주실 거죠? 공부 마치고 취직하면…… 돈을 벌게 되면…… 물론 아직 먼 얘기지만…… 하지만…….”

“…….”

“……아시죠? 반드시 선생님 돈부터 갚을 겁니다. 절 믿으시죠, 선생님?”

“…….”

“…….”

깊은 호흡을 했다. 스스로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그의 허리를 감고 있던 팔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폐부 가득, 그리운 연인의 체취를 깊숙이 들이마셨다.

“……믿어. 빌려줄게, 위야.”

대꾸는 생각보다 조용히 흘러나왔다. 더 이상 말을 더듬지도, 떨리지도 않았다. 잠시 숨을 멈춘 듯하던 그는 이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고맙습니다…….”

그의 양손이 양쪽 어깨를 부드럽게 움켜쥐더니 천천히 자신의 상반신을 떼어낸다. 얼굴을 마주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저항하지 않았다. 부드러운 미소가 번진 핸섬한 얼굴이 보였다. 자신의 얼굴 곳곳을 천천히 핥는 것처럼 움직이던 시선이 마침내 자신의 눈동자로 향했다. 깊고 깊은 검은 눈동자였다. 빨아들일 것처럼 자신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는 그것에 자신 또한 홀린 듯 시선을 주었다. 그것에 담긴 것은 완벽한 우정. 그리고 순수한 헌신과 신뢰.

“……실은 빌려주실 줄 확신했어요. 너무 큰돈이라 선생님께도 무리가 가는 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만…… 합의하길 정말 잘했네요…….”

빙그레 웃음이 번지며 그의 새하얀 이가 드러났다. 극히 드물게만 짓는 저 눈부신 미소였다. 너무나 아름다운 나머지 순간 심장이 쿠쿵 하고 한 번 불안정하게 뛰었다.

“……하지만 조건이 있어…….”

추해 보일 것이다.

“……다시 네 몸을 내게 팔아.”

해골처럼 마른데다, 태닝이라고 보기 과할 정도로 새까만 깜둥이처럼 피부가 타버렸다. 울고불고하기까지 했으니 눈시울은 퉁퉁 붓고 온 얼굴은 눈물콧물 지저분한 얼룩투성이겠지.

“……기간은 네가 결혼을 하게 될 때까지.”

정말 추하고 더러워 보일 것이다.

“……결혼 상대를 사귀는 건 상관없지만 나 이외의 여자들한테 몸을 파는 건 곤란해. 대신 8천만 원 외에도 다달이 필요한 생활비는 줄게. 섹스가 정 괴롭다면 그렇게 많이 요구할 생각은 없어. 최소한 일주일에 한 번만 네 몸을 내가 쓰게 해주면 돼.”

저 아름답고 깊고 맑은 눈동자에 비치고 있는 것은 추하고 더러운 섹스광일 것이다.

“……한 달에 네 번만 네 몸을 갖는 대신 200만 원이야. 어때? 꽤 괜찮은 조건이지?”

힘든 상황을 이용해서 미성년자와 원조 교제나 일삼는, 야비하고 비열하고 지저분한 호모일 것이다.

“……아니면 너무 과분한가? 과분한 액수라고 생각해? 괜찮아. 넌 최고의 남창이니까 그거라도 충분해. 자신을 가져.”

순수한 우정과 신뢰를 순식간에 더러운 흙발로 짓밟아버린, 그런 구역질나는 구더기다. 바퀴벌레다.

“……네 친구 안 해. 안 하기로 했어. 너무 피곤해.”

부드럽게 어깨를 어루만지고 있던 손길이 슬며시 떨어져 나간다.

“……해봤는데 도저히 안 되겠더라구. 말라 죽겠더라구. 그래서 그냥 포기하기로 했어. 포기할래.”

깊고 맑은 눈동자가 조용히 아래로 떨어진다. 마주 보고 있던 상반신도 천천히 정면을 향하는 바람에 그의 얼굴은 이제 프로필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가 자세를 바꾸자 잠시 전까지 문어발처럼 붙어 있던 서로의 몸도 10센티쯤 떨어지게 되었다. 어마어마한 공동이 돼버린 10센티였다. 텅 빈 공동에선 시퍼런 칼바람이 휘몰아쳤다. 온몸을 때리는 아픔에 잠깐 숨을 쉬기 힘들어졌지만 참을 수 있다.

“……앞으로도 안 할 거야. 친구 따위 개나 줘버리라지. 그냥 네 몸을 즐기는 호모나 할래. 그럴래. 그게 나한테는 딱 맞아.”

“……하지 마세요…….”

너무나 나지막해서 거의 들릴 듯 말 듯한 웅얼거림이 들렸다.

“……그러지 마세요…… 잘 참아오셨잖아요…….”

한껏 귀를 열고 그에게 좀 더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자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다. 고개를 잔뜩 아래로 숙인데다 프로필만 보여 표정을 읽을 수 없다. 안달이 났지만, 그렇지만 참아야 한다. 계속 밀어붙여야 한다.

“잘난 척하지 마. 내 돈이 가지고 싶으면 다시 계약해. 네 몸을 내게 줘. 그럼 나도 내 돈을 네게 줄게. 아주 아주 풍족하게 해줄게.”

“……그만하세요.”

“200만 원이라니까. 8천만 원이야. 휘 전과자 만들고 싶지 않다며?”

“……그만해요.”

“내 얼굴 봐. 보고 말해. 더러운 호모라 보기 싫어졌니? 그래? 친구라며? 소중한 친구라며? 솔직하게 말해봐. 너 솔직히 호모는 싫지? 더러운 호모는 친구 하기도 창피하지? 너도 못 해먹겠지?”

“닥쳐!!!!!!!!”

짜악!!!!!!

눈앞에서 불이 번쩍 일었다. 휘청 하고 상반신이 반대편으로 날아가 소파 한구석에 처박히듯 몸이 튕겨졌다. 뺨이 떨어져 나가는 것만 같은 충격에 한동안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입술 끝에서 찝찔한 피 맛이 느껴졌다. 이가 부러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질어질한 머리를 간신히 가누며 자세를 가다듬고 그를 찾았다. 허둥지둥 찾았다. 어미를 찾는 오리 새끼처럼 필사적이었다.

소파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장승처럼 버티고 선 어미 오리가 보였다.

옅은 베이지색의 서지 팬츠가 보였다. 좀 더 시선을 올리니 짙은 감색의 싱글 브레스티드 재킷이 보였다. 그 안에 받쳐 입은 옅은 하늘색의 플란넬 셔츠도 보였다. 역시 새 옷이었다. 몽땅 다 낯선 새 옷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대학생이었다. 그토록 보고프던 어미 오리의 졸업식도, 신입생 대표를 했을지도 모를 입학식도 다 놓치고 말았다. 3월이었다. 3월의 새내기였다. 신입생 OT에 갔다 왔겠지. 인기 만발 화제의 중심이 됐을 거고. 의대 최고의 왕자님이 됐을 것이다. 어쩜 과대가 됐을지도 모른다. 미팅도 했을지 모른다. 자신도 죽도록 함께하고 싶었던 순간들이었다. 그 모든 함께하고 싶었던 순간들에, 그러나 자신은 존재하지 않았다. 얼어 죽을 친구 연습을 한답시고 다 놓치고 말았다.

시선을 좀 더 올렸다.

부드러운 물결을 이루는 암갈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위험스러운 수컷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아름다운 몸도 보였다. 정말 이제 청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티 하나 없이 깨끗하고 매끄러운 황금색 피부도 보였다. 입술도 보였다. 눈도 보였다. 극심하게 상처 입은 짐승의 눈이었다. 새빨갛게 충혈된 눈시울에선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리고 있었다.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진심이야. 공짜로는 안 빌려줘.”

떨리지도, 더듬지도 않고 밉살스러운 말은 술술 잘도 흘러나왔다. 역시 한 번이 힘들지 그다음은 일사천리인 모양이었다. 완고하고 조신했던 처녀가 그만 강간을 당한 나머지 절망 끝에 자신을 팽개치듯, 그건 수직으로 뚫린 고속 철도처럼 그렇게 막다르고 재빨랐다.

“……좋은 조건이라고 생각해. 친구니 뭐니 더 이상 헛소린 안 들을 거니까 잘 생각해보고 전화해.”

쾅!!!!!!!

거실 탁자가 걷어차이는 소리가 요란했다. 힘껏 뒤틀리며 요동을 치던 탁자는 그 위의 내용물들을 눈물처럼 줄줄이 바닥에 내리꽂았다. 몸을 돌려 뛰쳐나가는 그가 보였다. 189센티의 큰 키에, 육식 동물처럼 단단하고 꽉 짜인 근육으로 뒤덮여 있는 다부진 체격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을 친다. 다신 안 볼 것처럼, 그렇게 치를 떨며 자신을 떠난다. 성급하고 사나운 발걸음에도, 표범처럼 우아하고 유려한 자태는 여전해서 눈물이 났다.

쾅!!!!!!!

내 영웅을 훌쩍 삼킨 현관문이 부서져나가는 것처럼 괴성을 지르며 닫혔다. 그랬다. 아마도 자신은 생애 최고의 친구를 영영 잃게 된 모양이었다.

……아아, 네가 나빠, 위위…… 네가…… 아무렴 네가 나쁜 거지…… 내 영웅…… 내 연인…… 나빠…… 나빠…… 나쁜 놈이야…… 나 해보려구 했거든……? 이제부터…… 아무나 막 잡아서…… 막…… 막…… 정말 눈 딱 감고 뒹굴어보려구 했거든……? 진짜…… 한 달 동안 아무 남자들에게나 다…… 다 다리 벌려주고…… 세 명쯤도 좋고 일곱 명쯤도 좋고 열 명쯤 된대도 신경 안 쓸려고 했거든……? 그런 거였거든……? 정말야…… 외모도 취미도 학력도 성격도 절대 고려하지 않기로 했었다구…… 그런데 마침 타이밍 좋게 나타났잖아…… 나타나줬잖아…… 그런 네가 나쁜 거야…… 나빠…… 네가 나쁘다구…… 넌 지지리 운도 없는 남창인 거라구…….

체념과도 같은 고요한 평화 속에서 그를 그렸다.

가장 좋은 붓으로, 가장 좋아하는 사이즈의 캔버스에, 가장 좋아하는 색깔들로만 골라서 그를 그렸다. 하루 중 대부분을 그를 그리면서 보내고, 밤이면 그렇게 그려둔 그를 보며 자위를 했다. 자위를 해도 전처럼 그리 괴롭거나 두려운 기분은 들지 않았다. 평화로웠다. 모든 게 너무나 평화스러웠다. 밥도 너무 잘 먹히고 잠도 너무 잘 쏟아졌다. 더 이상 죽고 싶은 기분도 들지 않았다. 온 누리에 평화였다. 할렐루야.

그렇게 닷새를 보내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물론 그였다. 2∼3일쯤은 더 버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에 비해 대단히 빠른 굴복이었다. 역시 혈육 문제가 걸리면 그는 도무지 맥을 못 추게 되는 것이다.

[……생각에 변화가 없으십니까?]

낯선…… 대단히 낯설고 정중한 목소리요, 어조였다.

“……진심이라고 했잖니.”

[…….]

“…….”

[……입금해주실 계좌 번호 불러드리겠습니다.]

“……전에 그 계좌 번호 바뀌었니?”

[아뇨, 아직 그대로입니다.]

“그럼 됐어. 나도 아직 수첩에 그대로니까.”

[그런가요?]

“……그래.”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내일 당장 부쳐줄게.”

[고맙습니다.]

“……언제 와줄 수 있어?”

[언제가 좋으십니까?]

“나야 빠를수록 좋지 뭘.”

[평일은 수업 때문에 바빠서 주말이 좋을 것 같습니다. 괜찮을까요?]

“괜찮아.”

[예, 그럼 이번 주 토요일에 뵙겠습니다. 전화 드리고 가겠습니다.]

“그래. 아 참, 다른 여자들 다 정리하는 거지?”

[…….]

“당장 정리해. 아무리 남창이라지만 그래도 될 수 있으면 깨끗한 몸이 좋지 않겠어? 그것부터 서둘러. 넌 내 전용이야.”

[……알겠습니다. 당장 정리하도록 하죠.]

“그래, 그럼 토요일 날 보자.”

[예. 안녕히 주무세요.]

전화가 끊어졌다.

떨지도, 더듬지도 않았다.

그런 자신이 몹시 대견하게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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