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 1991년 5월. 장인환(張仁歡) (23/129)

23. 1991년 5월. 장인환(張仁歡)

거울 속의 얼굴을 들여다보니 그새 살이 좀 더 붙은 것 같았다. 

빠지기 전의 본래 체중을 완전히 되찾은 것은 아니지만, 해골같이 퀭한 인상이 사라진 걸 보면 3∼4킬로는 더 찐 것 같았다. 엄마가 보내주는 보약과 밥을 꼬박꼬박 챙겨 먹은 덕분이리라. 물론, 연인을 두고 새삼 상처를 입거나 고민을 거듭하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이유겠지만. 앞으로도 이 정도로만 마음의 평정을 유지한다면 2∼3킬로는 너끈히 더 찌울 수 있을 것이다.

머리카락에 무스를 발라 정수리 부근을 세우자, 실력 좋은 단골 헤어디자이너가 커팅한 원래의 세련된 헤어스타일이 자연스럽게 살아났다. 멋스러우면서도 집에서 직접 손질하기가 편한 스타일이라고 자화자찬을 하더니 그 말이 맞는가 보았다. 목덜미 중간까지 오는 적당한 길이에, 이마를 덮는 앞머리는 송곳처럼 삐죽삐죽하게 자르고, 옆머리도 들쭉날쭉 히피 스타일로 커팅한, 유난히 마음에 드는 스타일이었다. 약간 날티가 나서 양아치처럼 보이긴 하지만 자신의 갸름한 범생이 같은 얼굴형엔 멋진 보완이 되었다. 입고 있는 크림 베이지색 더블 브레스티드 슈트의 캐주얼한 분위기와도 아주 잘 어울려서, 다리만 온전하다면 무슨 광고 모델처럼 근사해 보일 것이다. 연인처럼 특별히 어마어마한 미남은 아니지만 보통 사람들에 비해 그리 처지는 외모 또한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리만 온전했다면 연인도 어쩌면 자신을 아름답다고 생각해줬을지도 모른다. 아니, 아니지. 연인의 감탄을 받기 위해서는 거기다 여자라는 단서가 하나 더 붙어야 할 것이다. 물론, 그것은 온전한 다리보다도 더 중요한 단서가 될 터였다.

어느새 슬픈 표정이 되는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손목시계를 살폈다. 오전 11시였다. 연인의 수업이 끝나는 시각은 1시. 아직 충분한 여유가 있지만, 연인과의 약속이 잡혀 있는 날이면 늘 그렇듯, 벌써부터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얼굴과 옷차림을 다시 한 번 꼼꼼히 살핀 다음 마무리로 향수 한 방울을 양쪽 귀 뒤에 뿌렸다.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페로몬이 가미된 여성용 향수였다. 광고와는 달리 별 효과도 없다고 과 동기들이 하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지푸라기라도 붙들고픈 얼간이들의 심정을. 일반 남자를 상대로 독한 짝사랑에 우는 비참한 게이들의 심정을. 며칠 전 백화점에 들렀다가 덜컥 사버린 후론 매일 빠트리지 않고 뿌리고 있다. 매일 뿌리는 만큼 자연스레 자신의 체취와 섞여들 것이다. 혹시라도 효과가 있다면 냉정한 연인이나마 조금쯤은 부드러워질지도 모른다. 조금쯤은 자신을 돌아봐주게 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점점 더 울적해지는 심사를 애써 떨쳐내며 화장대 앞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오늘은 연인과의 데이트였다. 일주일 가운데 단 하루, 온전히 연인을 소유하는 날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특별히 밖에서의 데이트였다.

연인의 용서(혹은 신뢰)가 떨어질 때까지 연인의 몸에 손을 대지 않기로 했기에 달리 집 안에서 할 일이란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빤했다. 만화책과 TV를 보거나, 트럼프놀이를 하거나, 연인을 모델로 그림을 그리거나, 그저 동네를 한 바퀴 돌뿐인 가벼운 산책을 하거나 하는 게 요 근래 한 달 남짓 동안 연인과 함께 한 특별한 일들의 전부였다. 그 이외엔 그저 아틀리에로 찾아오는 연인을 맞아들이고, 저녁이면 밥을 차려 먹고, 씻고, 잠자리에 드는 무미건조한 일상의 대부분이었다.

스킨십은 물론 섹스까지 배제된데다 서로 속내를 털어놓는 허심탄회한 대화마저 사라지고 보니 한편 생각하면 지루하기 짝이 없을 데이트임에 틀림이 없었다. 독하게 말수를 아끼는 연인에게 일방통행일 수다를 끝도 없이 늘어놓곤 하지만, 먹구름처럼 내리깔린 적막엔 그야말로 역부족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연인과 함께 있는 기쁨과 행복을 조금도 누리지 않느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니었다. 껍데기뿐일 연인일지언정 같은 공간에 거주하며 보고 싶을 때 언제든지 바라볼 수 있다는 현실은 또 다른 기적인 셈이었다. 욕심을 버리면 사소한 일에서도 기쁨을 끌어낼 수 있다는 걸 인환은 요즘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연인과 함께 라는 것만도 감사하자 하고 마음을 잡고 나니 그 무엇에도 담담해질 수 있었다. 연인의 무거운 침묵도 견딜 만했고, 재계약 첫날 연인이 선언한 그대로, 자신을 마음속에서 완전히 몰아내버린 듯한 연인의 무심함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연인이 무심해지니 부러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냉혹한 언행들도 사라졌는데, 그 또한 마음 아파할 문제만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마치 결혼한 지 10년이 넘은 중년 부부들의 그것처럼, 격렬한 희로애락이 빠진 대신 고요한 평화가 찾아왔다.

평화 속에서라면 혼자 마음껏 연인을 사랑할 수 있었다. 마음껏 연인에게 사랑을 표현해도 전처럼 비난이나 상처를 받지 않았다. 연인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을 때면 사랑한다고 노골적인 고백을 하고, 가끔씩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면 애절한 욕망의 시선으로 연인의 몸을 탐욕스레 바라볼 수도 있었다. 예전의 ‘친구’ 관계였다면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뻔뻔스러운 행태들에도 전혀 수치심이나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마음껏 사랑을 표현할 수 있다니, 그러고도 연인의 눈치를 살피지 않아도 된다니, 그 얼마나 놀라운 기적이란 말인가. 상대적으로 연인의 애정이나 호감을 끌어내고픈 허황된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만사 오케이였다. 욕심으로 안달복달하지 않으니 자신도 스트레스가 없고, 연인 또한 굳건한 성벽 안에 들어앉아 자신의 모든 혐오스러울 면들을 묵묵히 참아주고 있었다. 그랬다. 아예 바닥까지 떨어지고 보니 그 나름대로 소박한 행복들을 줍게 된다는 걸 실감하는 요즘이었다. 수중에 아무 가진 것 없이 박탈된 삶을 살아가는 거리의 노숙자들이 어째서 그렇게 평화로운 표정을 지을 수 있는가를, 인환은 진심으로 이해할 수가 있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크리스천들의 저 유명한 경구를 다시금 주문처럼 뇌까리며 서둘러 아틀리에를 빠져나왔다. 벌써 몇 달째 평창동 집에 가끔 들를 때 외엔 거의 쓸모가 없던 BMW에 올라 신림동 방면으로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길이 막히지 않는다면 연인의 수업이 끝날 때까지 한 시간 이상을 기다리게 된다. 물론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30분 이상 미리 나가 연인을 기다리는 일은 자신에겐 이미 정해진 또 하나의 습관이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오늘은 연인이 다니는 학교 캠퍼스 안에서 연인과 만나기로 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연인의 학교생활 모습을 조금이나마 훔쳐볼 수 있다. 그 이상으로 흥미진진한 데이트 장소가 따로 있을까 싶었다.

서울대 관악 캠퍼스는 언젠가 과 지도 교수의 특별전이 문화관에서 열린 일이 있어 한 번 가본 것 외엔 자신과는 전혀 접점이 없던 곳이었다. 미술 분야에 있어 인환이 졸업한 대학과는 미묘한 경쟁 관계에 있는 대학인데다 대한민국에서라면 최고의 특권을 갖고 있는 엘리트들이 우글거리는 곳이니, 아마도 연인 때문이 아니었다면 인환으로선 일생 발걸음을 할 기회조차 없었을 배타적인 동네다. 평소에 특별히 위화감을 느끼지도, 또 특별히 동경을 품지도 않았건만, 현재 연인이 적을 두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서울대는 당장 인환의 특별한 관심과 애정의 대상이 되었다. 매일매일 연인의 발이 밟고 지나다니는 곳이자, 연인이 형형한 눈빛으로 야망을 태우며 수업에 몰두하는 곳이었다. 연인의 집이든, 학교든, 더 나아가 먼 미래에 갖게 될 직장이든, 연인과 관련된 장소라면 그 어디든 자신에겐 호기심과 기대와 기쁨의 장소가 될 것이다.

물론 스토커와 다름없을 병적인 집착이란 것을 안다. 우습지도 않은 사소한 것들에 일일이 의미를 부여하고, 기뻐하고, 흥분하는 전형적인 스토커. 그러나 누군들 알까. 절대 보답 없을 짝사랑에 완전히 절망해버린 게이의 심정을. 누군들 이해할 수 있을까. 그저 동일한 장소와 시간대에 공존하는 것만으로도 최고의 희열을 끌어낼 수 있을 만큼 욕망이 박탈돼버린 초라한 스토커의 심정을…….

주말이라선지 역시 곳곳이 정체를 이루는 시내를 가로질러 서울대 정문에 도착하니 12시 15분이었다.

주차권을 끊고 정문 근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크로스백을 메고 차에서 내리자 5월의 눈부신 햇빛과 신록이 눈을 찌를 듯이 다가들었다. 5월 중순 무렵인데도 날은 벌써 여름을 연상시킬 만큼 덥게 느껴졌다. 수은주가 30도는 족히 넘을 듯싶었다. 그나마 관악산 자락에서 불어오는 시원하고 건조한 산바람이 뜨겁게 달구어진 대기와 아스팔트를 식혀주고 있었다.

크로스백 안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쓰고 재킷은 벗어 팔에 걸쳤다. 주변을 스쳐 지나가는 대학생들도 대개는 반팔 티셔츠거나 소매를 팔목까지 걷어붙인 차림을 하고 있었다.

주차권을 끊으며 물어두었던 중앙 도서관 방면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날도 더운데다 중앙 도서관까지는 생각보다 꽤 거리가 있어, 좀 더 안쪽에 주차를 해야 했나 하는 후회가 잠시 들었지만 그리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고쳐 생각했다.

연인이 걸었을, 또한 앞으로도 걸을 길들이었다. 눈 안에 담을 풍경들이었다. 만약 연인과 동년배로 태어났다면, 그리고 또한 사랑하게 되었다면, 공부에 취미가 없는 자신이었더라도 기를 쓰고 공부해 함께 누볐을지도 모를 캠퍼스였다. 풍경 하나하나 천천히 기억 속에 각인시키고도 싶고, 그 속에 함께 자리를 잡고 있을 연인의 모습을 마음껏 상상하고도 싶었다.

시선에 미치는 어느 하나 새삼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순환도로 안쪽의 크고 작은 건물들도, 눈부신 5월의 신록과 잔디밭들도, 하다못해 요란스러운 엔진 음을 울리며 스쳐 지나가는 순환 버스들조차도 정겨웠다. 인환과 거의 또래로 보이지만(때로는 오히려 더 늙어 보이기까지 했다) 실제로는 한참 후배일 남녀 대학생들의 모습도 싱그럽기 그지없었다.

느긋하게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발품을 팔다 보니 정작 연인과의 약속 장소인 중앙 도서관을 지나쳐 공과대 건물들이 죽 늘어서 있는 곳까지 오게 되었다(물론 그게 공과 대학 건물들이라는 것은, 2주쯤 후 학교지리를 자세히 익히는 계기가 되었던 축제 기간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돌담을 오밀조밀 쌓아놓은 벽에 자그마한 인공 폭포까지 조성돼 있는 연못 앞을 지나다가, 아무래도 이상해 걸음을 멈췄다. 30분 가까이 걸었는데도 도서관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침 근처의 연못 앞 나무 벤치에 앉아 얘기에 열중하고 있던 여대생 둘에게 도서관의 위치를 다시 물었다. 털털한 청바지 차림의 친절한 여대생들은 인환이 되돌아가야 한다는 사실과, 비교적 알기 쉽게 도정의 각 이정표들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한번 지나쳐 온 길이라선지, 여학생의 설명은 주차권을 끊어주던 사내의 설명보다는 훨씬 이해하기가 쉬웠다.

반대로 방향을 튼 지 5분 만에 인환은 약간 낡은 듯한 외관의 장방형 5층 건물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연인이 기다리라던 중앙 도서관 앞이었다. 혹시나 해서 도서관 정문을 비롯해 바로 앞 잔디밭까지 눈으로 샅샅이 훑으며 연인의 자취를 좇았다. 비교적 한산한 정문 앞에서도, 도서관 맞은편 잔디밭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수다의 꽃을 피우고 있는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연인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이마와 콧등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손목시계를 살폈다. 12시 40분이었다. 수업은 1시에 끝난다고 했다. 연인이 없는 것이 당연했건만, 마치 바람이라도 맞을 것처럼 불안하고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기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담배를 한 대 빼 물었다. 완전 금연은 힘들지언정 적어도 연인과 함께 있을 때만은 금연을 하기로 작정해두었다. 하지만 아직 20분의 여유가 있으니 한두 대 피울 시간은 충분하리라. 라이터에 불을 붙이는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요즘 연인을 만나기 직전엔 늘 그렇듯, 흥분과 기대를 동반한 두려움 때문이지만 그저 금단 증상일 뿐이라고 애써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자신이 있다. 핏속으로 퍼지는 니코틴이 부디 불안정한 기분에 평화를 가져다주길 바라면서 폐부 깊숙이 연기를 빨아들였다. 맛은 여전히 형편없었다. 요즘 내내 담배 맛이 쓴 까닭도, 빨아들일 때마다 가슴에 뻐근한 동통을 느끼는 것도 독하게 앓은 폐렴의 후유증 탓이리라. 그래도 온몸으로 퍼지는 들큰한 니코틴 맛은 역시 그 모든 불쾌감을 상쇄하고도 남는다는 생각을 한다. 연인을 생각하면 언젠가 반드시 끊어야 하건만, 의지박약인 자신으로선 이 핑계 저 핑계 자꾸만 미루게 되곤 하는 저 ‘언젠가’였다.

두 대째를 피워 무니 확실히 떨리는 손끝이 조금 잠잠해졌다. 반강제이긴 해도 연인 역시 동의한 데이트니까 이렇게까지 겁낼 일은 아니지 않은가 하며 내심 대담한 배짱도 생겨났다.

생각해보면 억지와 다름없는 요구가 시작이었다.

대학 입학 기념으로 옷을 사서 선물해주겠다는 선언도, 쇼핑을 위해 만나는 장소를 연인의 캠퍼스로 하고 싶다는 선언도 예전의 자신이라면 어림도 없었을 대담한 요구였다. 연인 또한 잔뜩 얼굴을 구기며 냉랭하게 화를 낼 일이었음에도, 선선하게 허락이 떨어진 것은 그야말로 의외의 ‘사건’이라 할 수밖에 없다. 물론 자신의 요구를 듣는 순간 얼굴이 단숨에 굳어드는 것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나름대로 철저하게 남창으로서 고객에게 복종한다는, 연인 나름대로의 단호한 의지의 산물이었겠지만, 속으로 얼마나 불쾌감을 느낄지 그가 드러내지 않는다 해서 모를 인환이 아니었다. 그러나 연인에 대한 열렬한 애정을 표현하는 데 있어 더 이상 움츠러들 생각이 없는 것 또한 인환 나름대로의 단호한 의지였다. 연인이 치를 떨며 거절한다면 억지로 강요까지는 못하겠지만, 당장 하고픈 말이나 행동을 연인의 눈치를 보기 위해 억제하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오늘의 데이트는 인환의 만용에 가까운 용기와 연인의 철벽같은 자존심이 결합해 탄생한 합작품인 셈이었다. 연인이 내켜하지 않을 게 뻔할, 솔직히 강요와 다름없는 데이트였다. 그건 명령이냐고 되묻던 연인의 서늘한 어조가 아직도 귀에 쟁쟁했다. 아마도 두 번은 질러볼 수 없을 어마어마한 용기였기에, 자신은 ‘명령’이라고 웅얼거리듯 간신히 대꾸를 던져주었었다. 그랬다. 연인의 마음이 언제 돌변해 자신을 바람맞힌다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억지 데이트였다. 또한 연인의 그런 매정한 처사에도 불구하고, 일언반구 항의는커녕 그저 연인의 태도가 다시금 독기를 품고 냉랭하게 돌변하지 않는 데만도 감지덕지할 자신이었다.

연인과의 사이에는 철통같은 성벽이 가로놓여 있었다. 서로 소통은 거의 불가능한 듯 보였다. 연인은 소통할 의사가 눈곱만큼도 없었고, 자신은 소통하고픈 희망을 상실해버렸다. 남은 길은 그저 각자의 벽 안에 틀어박히는 일뿐이었다. 벽 안에 틀어박혀 웅크린 채, 벽 밖의 그리운 이를 훔쳐보고 맴돌고 그리워하는 외엔 달리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었다.

인환이 서성이고 있던 잔디밭 안쪽에서 왁자한 소음들이 들려왔다. 어느새 슬픈 상념에 빠져 있었던 터라 필요 이상으로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소음의 진원지를 살펴보니, 점심 식사의 뒤풀이인지 대여섯 명의 남녀 학생이 모여 앉아 곰발바닥 놀이를 하고 있었다. 도서관 앞 잔디에서 뭉개고 있는 걸 보면 다들 공부파거나 고시파들임에 분명했지만 유달리 자지러지는 웃음소리며 밝은 표정들에서 공부 스트레스는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비교적 한산한 도서관 앞 풍경으로 미루어, 아마도 중간고사가 끝난 시점이라 더 그럴 것이다. 고뇌의 그늘이라곤 한 점도 느껴지지 않는 밝은 얼굴들을 물끄러미 건너다보고 있자니 자신도 모르게 빙그레 미소가 지어졌다. 저들처럼 캠퍼스 잔디밭 나무 그늘 아래 동기들과 모여 앉아 놀던 자신의 대학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자신 역시, 수위 아저씨 몰래 삼겹살을 구워 먹거나 짜장면을 시켜 먹는 친구들과 어울려, 저들처럼 곰발바닥 놀이들로 자지러지던 순수의 시절이 있었다.

고작 2∼3년 전의 일이건만 마치 10년쯤은 세월이 지난 것 같은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그 2∼3년 사이에 연인을 만나 자신은 그 얼마나 많은 내적 변화를 겪어왔던가. 그간 겪은 기쁨과 슬픔과 고뇌와 절망들이 저 싱그러운 시절의 순수로부터 자신을 점점 더 멀리 격리시켜가고 있었다. 그 격리의 끝이 과연 어떤 지점일지, 현재의 인환으로선 감히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문득 왁자하던 잔디밭의 소음들이 일거에 조용해지며 학생들의 시선이 한 방향으로 모이는 게 느껴졌다. 시장 바닥처럼 쾌활한 웃음과 활기로 넘치던 곰발바닥 부대도 그러했고, 그 너머 산발적으로 흩어져 앉은 채 자판기 커피를 홀짝거리던 솔로들도, 두서너 명씩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던 나머지 크고 작은 무리들도 그러했다. 그들 모두의 시선은 한결같이 인환의 등 뒤, 어느 한 지점을 향해 부지런히 달리고 있었다.

본능처럼 전신의 근육이 뻣뻣해지며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디를 가던, 어디에 서 있건, 이토록 단숨에 옴짝달싹 못 할 만큼 뭇 이목들을 집중시키는 이는, 자신이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는 그 ‘누군가’가 유일했다.

아직 3분의 1쯤 남은 담배를 허둥지둥 비벼 끄곤 뻣뻣하게 굳은 몸을 천천히 뒤로 돌려 그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그 누군가는 10여 미터쯤 떨어진 건물 모퉁이 아스팔트 위에서 인환이 서 있는 도서관 정문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근육으로 꽉 짜인 커다란 체격이 믿기지 않을 만큼 표범처럼 유연하고 우아한 걸음걸이가 눈을 매혹했다. 어느 누구든지 눈이 휘둥그레져서 뒤돌아보지 않곤 못 배길, 드문 장신에 드물게 늠름한 체격을 가진 아름다운 남학생이었다.

갈색과 노란색이 섞인 렌즈가 정확한 시야를 가로막는 것 같아 부지런히 선글라스를 벗고 남학생에게 시선을 모았다. 순식간에 망막으로 달려드는 강렬한 햇빛에 어쩔 수 없이 눈을 가늘게 떠야 했지만 남학생의 모습은 정확한 색조와 형태로 온전히 뇌에 전달이 되고 있었다.

남학생이 걸치고 있는 네이비 계열의 낡은 체크무늬 셔츠는 벌써 2년째 눈에 익숙한 것이었다. 더위를 많이 타는 체질답게 소매가 팔꿈치 위까지 걷혀 올라간 채 그림 같은 팔 근육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그 아래 받쳐 입은 약간 헐렁한 베이지색 면바지 역시 2년째 보아온, 곳곳에 보풀이 일 정도로 몹시 낡은 것. 등에 진 배낭이며 군함처럼 육중한 발을 감싸고 있는 새하얀 농구화 또한 고딩 시절의 유물로, 눈물이 날 만큼 애잔한 것이었다. 근처의 남학생들 중 어느 누구도 그네만큼 초라한 차림새가 없건만, 그 압도적인 아름다움이란 설사 누더기를 걸쳤더라도 여전히 독보적인 빛을 발할 터였다.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바로 코앞까지 다가선 그 누군가가 예의 바르게 물어왔다. 땀 냄새 때문인지 지난주에 만났을 때보다 좀 더 짙어진 사내다운 체취가 인환의 숨을 가쁘게 했다.

선이 굵은 뚜렷한 이목구비 곳곳에 촉촉하고 섹시하게 밴 땀방울들이 보인다. 인중과 턱 언저리의 파르스름한 수염 자국이 한껏 무르익은 수컷의 매혹적이면서도 위험한 분위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준다. 주위로부터 쏟아지는 맹렬한 시선들의 공격엔 이미 익숙한 듯, 고요하게 가라앉은 연인의 눈길은 오로지 자신만을 향하고 있었다. 흑요석처럼 새까만 눈동자 속에 담긴 자신의 모습을 멍하니 응시하며 인환은 홀린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아, 하느님. 눈앞의 이 ‘누군가’야말로 바로 자신의 ‘영웅’이었다. 아름다운 내 사랑, 내 생명, 내 연인…… 자신의 모든 것일 영원한 영웅이었다!

“……아니, 좀 전에 도착했어. 벌써 그렇게 땀을 흘리네? 손수건 줄까?”

“아뇨, 괜찮습니다.”

손수건을 꺼내기 위해 재킷 호주머니에 손을 대기도 전에 연인이 팔을 크게 들어 올리더니 접어올린 소매 단으로 얼굴을 훔쳐냈다. 예의 바르면서도 칼처럼 이성적인 선긋기의 여전함에 찔끔 가슴이 시렸다.

눈에 담겨 있을 안타까운 슬픔을 연인이 알아채기 전에 잔디밭 쪽으로 슬며시 시선을 돌렸다. 온통 연인에게로 향한 뭇 시선들은 이번엔 인환에게까지 호기심의 칼을 갈고 있는 눈치였다. 저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이토록 근사한 연인을 소유한 자신이 한편 자랑스럽고, 그 소유가 그저 순간적인 모래성에 불과하다는, 한편 씁쓸한 자백이 복잡하게 뇌리를 스쳐갔다.

“꽤 덥긴 하지? 벌써 한여름 날씨네?”

“예.”

“배고프지? 우선 밥부터 먹을까?”

“예.”

“구내식당 어느 쪽이야? 이쪽?”

“…….”

도서관 정문에서 우측 방향으로 보이는 건물 하나를 가리키며 묻자 연인의 고요한 시선이 자신을 지그시 응시했다. 옆구리에 닿아 있는 크로스백을 만지작거리는 손가락이 또다시 긴장으로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걱정했던 것처럼 그다지 불쾌한 얼굴은 아니어서 내심 안도하고 있지만, 이젠 자신에게 진짜 속내를 드러낼 연인이 아니다. 신성한 캠퍼스에까지 흙발을 들이미는 집요한 ‘고객’을 연인이 어떻게 여기고 있을지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

“……정말 학교 식당에서 드시게요? 선생님 입맛엔 안 맞을 텐데요?”

여전히 탐색하는 듯한 타인의 시선으로 연인이 마지못해 물어온다.

“……네가 늘 먹는 거잖아. 많이 형편없음 일주일에 한두 번쯤 와서 네게 점심 사줄 생각이니까…….”

노골적인 애정 표현에, 연인의 미간이 희미하게 구겨지는 것이 보였다.

“……후후, 알아. 토요일 이외의 시간까지 달라붙는 건 계약 위반이란 거. 짜증 낼 필요 없어. 그냥 한번 해본 소리니까. 토요일만이라도 밖에서 만나 외식 시켜주려고 그래. 그건 상관없는 거지?”

그에게 있어선 애정 표현이 아니라 스토커 짓에 불과하단 걸 모르지 않기에 서둘러 덧붙였다. 숨이 또 가빠졌다. 저도 모르게 꽉 움켜쥔 주먹에서 땀이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무리하게 입 근육을 움직여 짓는 미소도 어정쩡하게 굳어들고 있었다. 떨지 말자고, 어차피 연인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해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럴 바엔 자신이 하고픈 대로 마음껏 연인을 사랑하자고, 이젠 거의 주기도문이 되다시피 한 자기최면을 속으로 되풀이했다.

“……이쪽입니다.”

미간의 주름이 풀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연인이 오른쪽 길로 방향을 틀었다. 눈 안 가득 들어와 박히는 연인의 늠름한 상반신과 정수리와 목덜미에 끈처럼 시선을 매달고 부지런히 연인을 따라갔다.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쉰 거며, 축축해진 손바닥을 바지춤에 닦는 불안정한 몸짓들을 앞서가는 연인이 돌아보지 않아 다행이라 여겼다. 선글라스를 도로 끼는 손가락이 몹시 후들거리고 있었다. 연인에 대한 가슴 아픈 애정과, 그 거절에의 공포로 떨고 있다는 걸 연인은 모르겠지. 정말 돌아보지 않아 다행이었다.

느려터진 자신과 맞추기 위해 가끔 속도를 줄일 뿐, 기다란 다리로 성큼성큼 앞서가던 연인이 발길을 멈춘 곳은 정사각형 모양의 어느 2층 건물 앞이었다. 야트막한 언덕배기 위에 위치해 있어, 고작 몇 분을 걸었을 뿐인데도 건물 현관 앞에 도착했을 무렵엔 조금 숨이 찼다. 건물이 보이는 길모퉁이까지 왔을 때부터 희미하게 풍기던 음식 냄새로 미루어 보아 목적한 식당인 모양이었다. 1층 현관문을 밀고 들어갈 땐 잠시 발을 멈추고 인환을 먼저 들여보내주는 남창의 예의를 지켜준 연인이 다시금 성큼성큼 앞서가 도착한 곳은 2층의 대형 식당 안이었다.

대학가 구내식당이 의례 그렇듯 5백여 명 이상은 너끈히 수용할 듯한 드넓은 공간이 시야를 압도하듯 밟혀들었다. 얼핏 빈자리를 찾기 힘들 만큼 식당 안은 인파로 붐비고 있었다. 주말이면 거의 파리를 날리던 기억 속의 모교 식당과는 사뭇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코 안 가득 밀려드는 갖가지 음식 냄새에 비릿한 욕지기가 느껴졌다.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한데다, 무엇보다도 잔뜩 긴장을 한 때문이리라. 그럴 것이, 연인 하나만으로도 신경줄이 끊어져나갈 것만 같은데,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달라붙는 시선들에 심장이 짜부라드는 것만 같았던 것이다.

도서관 앞에서부터 식당까지 오는 내내, 홍해처럼 갈라지며 모세의 기적을 연출하던 연인으로 미루어 어느 정도 각오를 하긴 했지만, 이건 각오니 상상이니를 훨씬 웃도는 센세이셔널함 그 자체가 아닐 수 없었다. 서울대엔 여자애들만 많은 건가 싶게, 얼핏 보기에도 유달리 여학생들의 비율이 높아 보이는 성비도 그랬고, 연인이 들어서자마자 웅성거리던 시끄러운 소음들이 한순간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진 것도, 동시에 들개처럼 달라붙는 수많은 시선들의 무리 또한 아무리 강심장인 인간이라도 좀처럼 초연하기 힘들 그런 것이었다(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대여섯 개쯤 되는 캠퍼스 곳곳의 식당들에도 불구하고, 연인을 구경하기 위해 점심시간이면 서울대의 여학생이란 여학생은 죄다 이쪽 식당으로 모인다고 했다). 도서관에서부터 이곳까지의 여정이 그러했듯, 한동안 연인을 탐욕스레 빨아들이던 시선은 자연스레 인환에게로 이동하기 마련이었다. 연인의 옆에 껌처럼 달라붙은 자신의 존재 역시 그들에겐 열렬한 호기심의 대상이었으리라.

어쩔 수 없이 얼굴이 달아오르고 가뜩이나 뒤뚱거리는 걸음은 더더욱 불안정하게만 느껴졌다. 입안의 침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어쩌자고 학교서 만나자고 한 걸까, 아니, 적어도 밥은 밖에서 먹자고 할 걸 하고 때늦은 후회를 하게 된 것은 물론이었다. 그나마 제법 렌즈가 큰 반투명 선글라스를 쓰고 있길 천만다행이었다. 안 그랬다면 나잇값도 못 하고 시뻘게진 쪼다 같은 얼굴이 몽땅 다 들통이 났겠지. 연인은 이미 익숙한 듯, 동요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얼굴로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빈자리를 찾고 있었다. 마침내 창가 쪽에 면한 빈 테이블이 하나 눈에 띄었고, 연인의 팔이 뻗어와 인환의 왼쪽 팔꿈치를 가볍게 쥐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화살처럼 날아드는 시선에 휘청거리듯 연인을 따라 테이블 옆으로 갔다. 크로스백과 재킷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뒤 천근같은 다리를 접어 자리에 앉은 다음에야 인환은 비로소 제대로 된 숨을 쉴 수 있었다. 뭇 시선들은 여전히 찰거머리처럼 달라붙고 있었지만 그나마 다시금 웅성거리는 소음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쭈꾸미야채볶음이랑 쇠고기당면찌개가 오늘 특별 메뉴군요. 당면찌개가 괜찮은데 선생님은 고기 싫어하시니까 순두부찌개나 된장찌개가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럭저럭 먹을 만하죠. 무얼 드시겠습니까?”

어깨에 멘 책 배낭을 테이블 위에 벗어놓으며 연인이 물어왔다. 그저 주변을 의식하기에 바빠 한동안 멍한 얼굴로 가만히 있자, 연인은 알아서 괜찮은 걸로 가져오겠다는 말을 덧붙이더니 그 큰 걸음으로 입구에 면한 배식대 쪽으로 되돌아갔다. 식권을 사느라 바지 뒷주머니 지갑을 뒤지는 모습이며, 식판을 들고 배식대를 도는 모습이며,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가는 어느 남학생(과 선배인 모양이었다)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형식적인 인사를 건네는 연인의 모습들을, 내내 홀린 듯 바라보았다. 그저 일주일 만에 보는 것뿐이건만, 늘 몇 년 만에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허기를 느껴야 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시선 또한 연인과 아무런 사적인 연관이 없는 주변의 뭇 시선들과 별다를 바 없이 일방통행이라는 사실이 눈물겨웠다. 자신이 내내 연인의 뒤꽁무니를 좇듯, 거의 모든 여대생들의 시선이 연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좇고 있었다. 적잖은 남학생 무리 역시 그리 다르지 않았다.

……쟤가 걔래. 정말 보면 볼수록 괜찮지 않니? 바로 옆인데 우리 한번 말 걸어볼까? 엑, 미쳤니?! 그 도도한 바이올린과 양신애가 매번 찬바람 맞고 있다는 거 몰라? 딴 애들도 괜히 말 걸었다가 완죤 개쪽 됐다더라. 밥 먹는 거 방해하면 뒤지게 싫어한대. 에휴, 진짜 죽인다! 어쩜 저렇게 잘생겼대니? 정말 조각이다, 야! 조각! 키두 봐! 여기서 쟤만 삐죽 튀어나와 있잖아! 분위기도 진짜 캡이지 않니? 얼굴도 좋지만 난 저 왕 차가운 분위기가 진짜 미치겠더라……!

나지막하지만 확연히 의미를 걷어낼 수 있는 주변 여학생들의 감미로운 탄성들이 붕붕거리는 소음을 뚫고서 인환의 귀에까지 꽂히고 있었다. 짐작한 대로 연인은 확실히 캠퍼스의 왕자님 자리를 굳힌 모양이다.

“먼저 들고 계세요. 제 것도 받아오겠습니다.”

입이 짧은 자신의 식성을 훤히 꿰고 있는 연인답게 반찬을 조금씩 퍼 담은 아담한 식판이 코앞에 디밀어졌다. 배식대 쪽으로 되돌아가는 연인의 뒷모습을 멍하니 좇고 있는데, 가까이 붙어 있던 몇 개의 테이블로부터 더더욱 맹렬해진 시선들이 느껴졌다. 연인을 웨이터처럼 부리고 있는 자신에 대한 새삼스러운 호기심이었으리라. 개중 가장 근지러운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네 명의 여학생 무리가 시선에 밟혀들었다. 전부 식사는 끝낸 듯, 빈 식판을 앞에 두고 커피 잔을 들고 있거나 입가에 가져가고 있었다. 인환의 느닷없는 주시에 찔끔했는지 한결같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인환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표정들이 귀엽기도 하고, 또 여자들에게선 비교적 쉽게 호감을 이끌어내는 자신답게 환한 미소를 보내주었다. 자신의 미소에 긴장을 풀었는지 쑥스러운 듯한 미소가 답으로 되돌아왔다.

“……친구세요?”

주어와 목적어가 몽땅 다 생략된 붙임성 좋은 물음이 여학생 하나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묻는 자나 물음을 받은 자나 의미는 정확히 전달될 터였다. ……친구라…….

“……아뇨, 위 고등학교 7년 선배입니다.”

틀리지 않은 말이리라. 엄밀히 말해 연인은 자신의 모교인 우신고등학교 후배이기도 하니까.

“어머!”

“아아…….”

“……친구인 줄 알았어요. 무척 어려 보이시네요.”

“쳐다봐서 죄송해요. 쟤가 누군가랑 함께 들어온 일이 한 번도 없어서 좀 신기해서요.”

“아, 네. 괜찮습니다.”

“……고등학교면 우신고등학교죠?”

“네.”

출신 고등학교까지 꿰고 있나 싶어서 속으로 고소를 금치 못했다.

“……많이 친하세요?”

“……예, 뭐…….”

“쟤, 여자친구 있어요?”

“…….”

“미팅도 절대 안 한다고 해서요. 따로 굉장한 여자친구가 있을 거라고 소문이 자자하거든요.”

“…….”

잠깐 대답을 고르고 있는데 따발총처럼 연달아 질문을 쏟아내던 여학생들이 움찔 어깨를 떨며 일제히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연인이 식판을 들고 테이블 가까이 접근하고 있었다. 막상 연인이 나타나니 차마 노골적으로는 쳐다보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나쁜 놈……. 다 보답도 못 해줄 거면서 왜 사람 마음만 후리게 태어났냐고요……. 씁쓸한 미소를 머금곤 속으로 악의 없는 욕설을 하나 던져주었다.

“먼저 드시라니까요?”

수저를 들지도 않고 있던 인환을 담담하게 일별하고는, 자리에 앉자마자 밥과 반찬이 수북하게 쌓인 식판에 코를 박는 연인이다. 몹시 배가 고팠던 모양이었다. 밥을 듬뿍 퍼 담은 수저를 부지런히 입으로 가져가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배가 불렀다. 하기야 별 이변이 없는 한 식욕에 있어선 덩치에 맞먹는 연인이었다. 토종 한식이라면 가리지 않고 먹는 편이라, 검소한 단체 급식 밥도 양만 많다면 연인에겐 진수성찬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안 드십니까?”

입안 가득 들어찬 밥을 씹느라 약간 우물거리는 어조로 연인이 채근했다. 시선은 식판에 닿아 있지만 멍하니 연인을 주시하는 인환을 모를 리 없었다. 새삼 퍼뜩 정신을 차리고 인환 역시 식사를 시작했다.

빼어난 요리사인 평창댁 아줌마나 특급 호텔 요리에 길들어 있는 자신의 입맛엔 확실히 지나치게 소박한 음식들이었다. 대체로 균형 잡힌 식단으로 보이지만, 한창때의 청년에겐 영양적으로 좀 부족할 듯싶었다. 더구나 연인으로선 집에서 먹을 두 끼 밥도 영양 상태가 그리 좋을 리 없었다. 부지런하고 똑똑한 살림꾼이라지만, 혜윤인 역시 아직 많이 어렸다. 아무리 잘 해도 엄마만 할까. 혜윤이가 엄마 역할로 두 오빠들을 돌본다기보다는 아직은 두 오빠가 혜윤이를 딸로서 돌본다는 게 더 옳았다. 생각하면 가슴 아린 일이었다.

정말로 가능하기만 하다면 다 함께 살고 싶었다. 공기 좋은 곳에 아담한 전원주택을 하나 지어서 한 가족 네 식구로 오순도순 살고 싶었다. 솜씨 좋은 파출부를 하나 고용해, 연인은 물론 휘나 혜윤이에게도 맛있고 영양가 높은 식사를 매일매일 차려주고 싶었다. 물론 하늘이 두 조각 나더라도 도저히 이루어질 리 없을 불가능한 소원이리라.

“어이, 문위! 너 잘 만났다! 그러잖아도 한번 연락하려고 했는데…….”

테이블 위에 설핏 그림자가 드리운다 싶더니 웬 남학생의 우렁찬 목소리가 귓전을 파고들었다. 느닷없는 등장도 그렇지만 목소리가 워낙 커서 막 순두부찌개를 입에 가져갔다가 입술을 델 뻔할 만큼 움찔 놀라고 말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170센티가 채 안 될 땅딸막한 체구의 남학생이었다. 허리에 두른 작업용 앞치마며, 티셔츠 앞섶이 물감 얼룩으로 도배가 돼 있는 걸 보니 미대생이거나 미술 동아리 회원인 모양이었다. 같은 환쟁이 출신으로서 캐치되는 감으로 미루어, 전문가라기보다는 심심풀이족 쪽에 더 가까워 보였다. 전문가라기엔 분위기가 지나치게 밝았다.

“요새 연건(서울대 연건캠퍼스. 즉 의과대학) 동아리실엔 왜 안 나타나냐? 3월엔 그래도 꼬박꼬박 들렀었잖아? 여자 선배들이 너 죽었냐고 물어보고 난리다?”

수저를 들다말고 상대 남학생에게 시선을 보내던 연인은 잠시 기억을 더듬는 눈치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좀처럼 남학생을 기억해내지 못한다는 기색이 여실해서, 남학생의 얼굴은 쑥스러운 듯 조금 붉어졌다.

“한 달 넘게 코빼기도 안 비치더니 그새 잊어먹었나 보네? 나 모르냐? 본과 1학년 심정수다. 의대 미술부.”

“아아…….”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를 하는 연인이다.

“됐어. 밥이나 마저 먹어라. 나도 얘기만 전해주고 가면 되니까.”

20센티 이상 차이 나는 키를 목을 빼고 쳐다보려니 남학생은 좀 버거운 모양이었다. 물론 연인 탓에 식당 안 여학생 전원의 주목을 받게 됐으니 꽤나 쪽 팔림을 느꼈을 것이다. 연인의 등을 두드리며 도로 주저앉히더니 그네도 따라서 옆자리에 엉덩이를 묻었다. 맞은편에 앉은 인환에게 눈인사까지 건네는 싹싹함을 보이고 나서야 남학생은 비로소 연인과 시선을 맞췄다.

“관악엔 웬일이세요? 요새 수업 때문에 본과 선배님들 정신없으실 거라고 들었습니다만.”

“음, 수의대 연극반 무대 장치하는 거 도와주러 왔어. 곧 축제잖냐. 중간고사도 끝났는데 우리도 축제만큼은 즐겨야지.”

“아아…….”

“근데 넌 어떻게 된 거냐? 널럴한 예과 신입 주제에 매번 그렇게 땡땡이쳐도 되는 거야? MT야 빠질 수 있다 치고,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정기 모임엔 얼굴이라도 비쳐야지. 그림 못 그린다고 선배들이 놀려서 정나미 떨어졌니?”

“죄송합니다. 미리 찾아뵙고 말씀을 드렸어야 하는데 요새 좀 신경 쓰이는 일이 생겨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습니다.”

“……말씀을 드리다니?”

“아무래도 동아리가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아서요. 노력 가지고 되는 게 아니란 걸 깨달았습니다. 탈퇴할 생각을 갖고 있는데, 일단 선배님들께 말씀드리고 결정을 보려고 합니다.”

“음…….”

남학생의 얼굴에선 별로 동요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대충 짐작을 하고 있던 일인 모양이었다.

“일단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니 섭섭해도 할 수 없는 노릇이겠지. 그림이야말로 좋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니까.”

“죄송합니다.”

“뭐, 내게 죄송할 게 있나. 여자들이야 땅을 치겠지만, 하하…….”

“다음 주 내로 찾아뵙고 정식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선배님들께 그렇게 전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지도 교수님께도요.”

“그래. 전해줄게. 아무튼 신고는 되도록 빨리 해라. 다들 짐작은 하고 있을 테지만 그래도 너무 감감무소식이면 미움받을 거야, 너. 특히 여자애들한테.”

“예.”

“솔직히 너처럼 무딘 녀석이 미술부라니 좀 황당하긴 했다. 그림은커녕 만화도 그려본 적이 없을 놈이 그림 배우겠다고 나타났으니, 원. 여자 선배들 아니었음 너 기냥 엉덩이 두들겨 맞고 재까닥 쫓겨났을걸?”

“…….”

“푸하, 네가 처음 그린 말(馬) 그림은 진짜 걸작이었지. 설마 추상화도 아니고, 하이퍼리얼리즘에 준해서 그렸다는 네 말에 다들 뒤집어진 건 아냐? 난 또 피카소가 이상한 모습으로 환생한 줄 알았지, 푸하하하.”

“…….”

“크크크, 짜식. 쪽 팔리긴 했나 보네? 암튼 그래도 몹시 서운한걸? 네 덕분에 애들 동아리 출석률이 상당히 높아졌었는데 말야. 신입 부원도 많이 늘고.”

“죄송합니다.”

“됐다니까. 그럼 난 가볼 테니 밥이나 마저 먹어라. 선배들한텐 그렇게 전해줄게.”

“예, 안녕히 가십시오.”

“에구, 일어나지 말라니까. 어찌나 키가 큰지 네 얼굴 쳐다보려면 고개가 다 뻐근하단 말이다.”

“예, 그럼…….”

“또 보자!”

땅딸막한 남학생은 처음 등장할 때처럼 우렁찬 작별 인사를 남기고 기존의 무리로 되돌아갔다. 인환이 앉아 있는 곳에서 배식대 방향으로 10여 미터쯤 떨어져 있는 곳에 테이블 세 개를 붙인 채, 머리를 맞대고 무언가 진지한 토론을 벌이고 있던 일단의 화려한 무리였다. 무대 의상인 듯 옷차림도 과장돼 있고, 뭔가 튀는 분위기로 보아 남학생의 대꾸에서 언급되던 연극반 학생들인 듯싶었다.

남학생이 자리를 뜨자마자 연인은 다시금 묵묵히 식사에 열중하고 있었다. 자신 또한 반 이상 남은 밥을 해치워야 했지만 목이 꽉 막히는 것만 같아 도무지 수저를 입안으로 가져갈 수가 없었다. 손가락은 떨리고, 가슴은 죄어드는 것마냥 아팠다. 저절로 핑 도는 눈물을 참기 위해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어야만 했다. 정말 선글라스를 끼고 오길 천만다행이었다. 연인 앞이라면 발가벗고 춤을 춘대도 새삼 더 이상 바닥에 떨어질 것도 없지만, 문제는 주변의 시선들이었다. 밥 먹다 말고 느닷없이 눈물을 쏟는 ‘괴상한 절름발이’의 모양새로 연인을 난처하게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미술부 들었었니?”

한동안 열심히 호흡을 고르고, 물 한 컵까지 다 마시고 나니, 겨우 동요가 가라앉았다. 담담한 어조로 물음을 던질 용기까지 끌어낼 수 있었다.

“예.”

여전히 식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부지런히 밥을 떠 넣는 무정한 연인은 태연했다. 바로 떨어지는 대꾸에서도, 왕성한 식욕에서도 일말의 흔들림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왜?”

“…….”

“……너 그림 싫어하잖니. 왜 미술부 들었어?”

무얼 확인받고 싶어하는가, 자신은. 아니, 무얼 기대하고 싶은 것인가, 배신자 주제에.

“친구 때문에요.”

“…….”

“……‘친구’가 미술부 들랬니?”

“제가 배우고 싶었으니까요. 친구를 좀 더 정확히 이해하고 싶었죠.”

“…….”

“…….”

“……근데 왜 탈퇴해? 역시 적성에 안 맞아서 지루해진 거니?”

“아뇨. 더 이상 배울 필요가 없어졌지요. 친구가 배신하고 떠났거든요. 이제 그 친구완 더 이상 친구가 아니죠. 친구가 아닌 사람을 이해할 필요성은 못 느끼니까요.”

“…….”

얄미울 정도로 차분하게 대꾸를 마친 연인은 볼 안 가득 들어찬 음식을 먹음직스럽게 씹기 시작했다. 차라리 자신에 대한 원망의 감정이 조금이라도 느껴졌다면 이렇게까지 가슴이 아프진 않을 것이다. 원망 또한 감정이었다. 감정이 죽지 않았다면 희망 또한 살아 있을 터였다. 희망은, 물론 눈곱만큼도 읽히지 않았다.

한동안 멍하니 연인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기계적으로 수저를 놀리기 시작했다. ……새삼 아프지 말자. 아프지 말자. 다시 시작하는 거야. 그저 처음처럼 열심히 사랑하는 거야……. 주기도문 하나를 되풀이, 되풀이해 곱씹었다.

“다 드셨습니까?”

뼈아픈 상념에 더해, 쏟아지는 시선의 빗줄기 속에서 어떻게 식사를 마칠 수 있었는지 마냥 아리송했다. 연인의 의외라는 듯한 조용한 물음에 자신의 식판을 내려다보니 제법 말끔히 비어 있었다. 아마도, 살을 찌우는 데 신경을 쓰느라 의무적으로 끼니를 거르지 않는 요즘의 건강한 습관이 그렇게 만들었나 보다.

“……응. 그럭저럭 먹을 만하네?”

“그럼 일단 나갈까요?”

자신보다 먼저 식판을 말끔히 비운 연인이 주변을 휘 둘러보며 반문했다. 여전한 시선들의 폭격이 불만스러운지 표정은 좀 더 싸늘해져 있었다.

“……응, 그럴까?”

부드럽게 대꾸하며 옆자리에 놓아둔 재킷과 크로스백을 주섬주섬 챙겼다. 간절한 담배 대신 커피라도 마시고 싶었지만 자판기 커피밖에 없을 것도 같고, 무엇보다도 사정없이 몰아치는 시선들의 공격이 견디기 버거웠다. 연인과 함께일 때의 시선 집중에 아무리 익숙하다곤 해도 확실히 규모가 커지니(400명은 족히 넘어 보이는 인파였다) 적응이 쉽지 않았다. 일단 식당이라도 벗어나면 좀 편해질 터였다.

“오, 문위구나! 여기 있었네?! 거봐, 내가 이 녀석은 칼이랬잖아?! 이 시간엔 늘 여기서 밥을 먹으니까…… 밥은 다 먹었니?!”

막 식판을 반납하고 돌아서려는데 누군가가 연인의 어깨를 툭 치며 불러 세웠다. 마르고 키가 큰, 인상 좋은 얼굴의 남학생이었다. 그 뒤, 무척이나 핸섬한 얼굴의 다른 남학생 하나와 그에 뒤지지 않을 만큼 빼어난 용모의 여학생 하나도 눈에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찬영 선배님? 선배님들도 안녕하세요?”

그가 세 사람을 향해 번갈아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인환에게도 익숙한, 예의 바르면서도 냉랭한 거리가 느껴지는 인사였다.

“아, 잘 지냈니?”

“후후, 커피 언제 사줄 거야, 너?”

“식당 입구에서 창일이가 너 찾던데? 창일이 못 봤니?”

“아뇨.”

“준석이가 팀에서 빠졌다고 지금 사색이 다 됐어. 아까 자전거 타다가 다리 접질렸대. 오늘 시합으로 8강 진출이 거의 확실했는데 말야. 지금 대타 구하느라 눈이 벌게.”

“…….”

“푸후, 총장배 농구 대회 말이다. 넌 관심 없겠지만, 선배들이 뛰는 의학과도 아니고 예과 B팀이 8강에 드는 건 전무후무한 일이거든. 내친김에 결승까지 간다고 지금 우리 2학년 과대 녀석과 같이 반쯤은 눈이 뒤집혔지.”

“…….”

“하하, 못 알아듣네? 너, 녀석에게 잡히면 꼼짝없이 체육관행이란 얘기다. 생각 없으면 빨리 뒷문으로라도 내빼란 말이지.”

“이미 늦었는걸? 저기 아까 걔네들 들어오네?”

핸섬한 남학생이 턱 끝으로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니 아담한 키에 우량아처럼 통통한 몸집을 한 남학생이, 운동복 차림에 농구공을 옆에 낀 건장한 남학생들 서넛과 함께 이쪽으로 우르르 몰려들고 있었다. 아마도 쭉 찾고 있었을 연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한결같이 득의만만했다.

“우하하하, 딱 걸렸다, 문위!!! 에구구, 하느님!!! 부처님!!! 캄사하무니다!!!”

“푸하, 늦었네? 지금 위더러 도망치라고 꼰지르고 있는 중인데…….”

“아니, 이거 왜 이러십니까, 찬영 선배님?! 이 창일이가 느무느무 러브하는 선배님께서 고로코롬 배신을 때리면 아니 되시죠?!!!”

예의 우량아 같은 몸집에, 도수 높은 뿔테 안경을 쓴 익살맞은 얼굴의 남학생이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가까이 다가온 모습을 보니 입고 있는 티셔츠가 흠뻑 젖었을 정도로 땀투성이였다. 그건 안경(나중에 알고 보니 의예과 1학년 과대를 맡고 있는 전창일이라는 남학생이었다) 옆에 진을 치고 있던 운동복 차림의 장신의 남학생들도 마찬가지였는데, 한창 운동 중이었던 듯 다들 땀 냄새가 지독했다.

“문위, 너 이따 5시에 한 게임 뛸 수 있지?”

“……미안하지만…….”

“으아악!!! 안 돼!!! 아직 대답하지 마!!! 너, 뛰어야 해!!! 반드시 뛰어줘야 해!!!”

“난 약속이…….”

“펑크 내!!! 너라도 뛰지 않음 나 성관 선배한테 왕창 깨져!!! 지금 우리 예과 B팀이 8강에 드느냐 마느냐 하는 역사적인 기로에 서 있는데 그 육시랄 준석이 새끼가 아까 발목을 삐끗했대잖냐!!! 빙신같이 오전 시합 잘해놓고 이게 웬 날벼락이냐고?!!! 이 중요한 시점에 자전거를 타고 곡예는 왜 하냐고, 왜?!!!”

“미안하지만…….”

“우악!!! 대답하지 말라니까?!!! 노라는 대답은 정녕 싫어요, 폐하!!!”

“일단 오늘 한 게임만 뛰어줘라. 준석이 대신할 놈은 너밖에 없잖냐. 뭐, 오늘만 어떻게 넘기면 달리 대타를 찾아보겠지만 워낙 갑작스럽게 터진 일이라…….”

운동복 차림의 키 큰 남학생 중 한 명이 제법 신중한 어조로 부탁의 말을 했다. 안경잡이 우량아보다는 훨씬 진지해서 연인 역시 좀 더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잠시 망설이는 듯했지만 저 섹시한 입술 끝에서 새어나올 대답을 인환은 확연히 점치고 있었다.

이런 일에 있어 칼처럼 냉정한 연인을 모르지 않는다. 스스로에게 필요한 일이 아니면 그 어떠한 인간적인 호소도 연인에겐 먹히지 않는다는 걸. 만약 인환 자신으로 해서 연인이 동기들로부터 미움을 받는다면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연인 스스로야 미움을 받든 말든 콧방귀도 안 뀔 것이지만.

“……나는 괜찮아, 위야. 덕분에 재밌는 게임도 구경하고, 오히려 잘됐는데 뭘.”

부드럽게 끼어들자 둥그렇게 원을 만들고 있던 무리의 시선들이 일제히 인환에게 쏟아졌다. 잠깐 자신에 대한 호기심이 비쳤다가, 이내 희망의 눈빛으로 변하는 열혈 청년들을 보고 속으로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약속이 이 친구 때문인가 보지? 잘됐네!!! 친구도 좋다잖냐, 새꺄?!!!”

안경이 득의만만하게 소리쳤다.

“빼지 말고 한 번만 봐주라, 응? 흑흑, 성관 선배 손이 월매나 매운지 너 모르지? 실력도 받쳐주고 있는데 8강을 목전에 두고 기권패를 해야 쓰겄냐? 응?”

기도하는 폼으로 두 손을 모아 쥐곤 애절한 눈빛으로 안경이 연인을 올려다봤지만, 연인의 미간은 희미하게 구겨져 있었다. 상황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 데 대한 심한 불쾌감이 고스란히 느껴져 가슴이 떨렸다. 물론 연인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모여 있는 군중들은 그저 연인이 곤란해하는 정도의 표정으로 여길 것이다. 연인과의 2년에 가까운 시간은 확실히 그냥 허투루 보낸 세월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타인은 볼 수 없는 미묘하고 섬세한 버릇을 쉬이 캐치해낼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고리가 여전히 연인과의 사이에 이어져 있는 것이다. 연인이 화를 낼까 싶어 가슴이 조여드는 와중에도 그렇게 뿌듯한 자각이 인환을 설레게 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생각에 잠긴 눈동자가 인환에게로 떨어졌다. 무리의 시선도 줄줄이 딸려 왔다. 동년배인 줄 알았다가 연인의 느닷없는 존댓말에 새삼 정체를 미심쩍어하는 듯, 무리의 태도에서 조심성이 느껴졌다.

“……괜찮지 않음? 어차피 놀러 나온 건데 농구하고 노는 것도 좋지 않아? 나도 경기 보는 거 좋아해, 위야.”

물론 거짓말이다. 스포츠엔 별 취미도 관심도 없는 자신이지만, 그러나 거기에 연인이 관련돼 있다면 또 다를 것이라 생각을 한다.

“5시면 시내 나갔다 올 시간도 충분하고…… 한다고 해. 그 시간까지 데려다줄게.”

“으하하하, 고맙습니다, 형님!!! 덕분에 살았습니다요!!!”

쾌활한 우량아의 손이 졸지에 ‘형님’이 돼버린 인환의 손을 덥석 움켜쥐더니 열렬하게 흔들어댔다. 열기로 발그레해진 뺨이며 질펀한 땀 냄새가 안 그래도 에너지 넘치는 분위기를 한껏 더해주고 있었다. 잠시 정신이 없었지만 우량아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인환 역시 따라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로 그늘이라곤 없는 소탈한 성격인 것 같았다.

“고맙다, 문위!!! 나중에 한턱 단단히 쏘마!!! 뭐, 평소대로 하면 돼, 평소대로!!! 교양 수업 때처럼만 해주면 예과 B팀 8강 진출은 문제없을 거다!!! 으하하하하!!!”

인환의 손을 부채처럼 흔들던 안경은 이번엔 연인의 손을 붙잡고 풍차처럼 움직여댔다. 자신이라면 심장이 오그라들었을 연인의 냉랭한 표정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뻔뻔스러운 넉살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몸 좀 풀고 시작하려면 4시 반까지는 체육관에 와야 할 거다. 좀 더 일찍 오면 더 좋고. 조금이라도 호흡을 맞춰보는 게 유리하겠지, 아무래도.”

운동복 차림의 신중한 남학생이 진지하게 다짐을 주었다. 결국 연인의 오케이가 떨어지기도 전에 연인의 참가는 기정사실인 것처럼 돼버렸다. 물론 연인이 끝까지 제 하고픈 대로 의지를 세웠다면 세상없어도 그 고집을 꺾지는 못했으리라. 슬금슬금 눈치를 보아 하니 다행히 반쯤은 체념한 듯한 얼굴이었다.

“결국 걸려들었네? 하하, 그러게 빨리 피하랬더니…….”

“응원 갈게, 위야. 파이팅!”

무리로부터 조금 떨어져서 사태를 주시하는 듯하던 남학생과 여학생이 생글생글 웃으며 끼어들자, 수컷 냄새를 물씬 풍기며 서로 기 싸움을 벌이던 무리의 분위기가 일제히 얼어붙었다. 인상 좋은 얼굴을 한 앞서의 키 큰 선배와 그 일행이던 아름다운 여자애였다. 특히 여학생 쪽은 멀끔한 크림색 투피스 정장 차림에 까만 바이올린 케이스까지 갖춰 든 모습으로, 마치 도자기처럼 공들여 빚어놓은 듯한 우아함과 섬세함으로 넘쳤다. 과연 땀 냄새 풀풀 풍기는 떡대들이 일순 얼어붙고도 남을 놀라운 퀸카가 아닐 수 없었다.

“에에엑?!!! 양 선배님, 정말요?!!!”

백설공주를 눈앞에 둔 일곱 난쟁이처럼, 숫기 없는 표정이 돼서는 눈만 붕어처럼 껌뻑거리던 농구팀을 대변한 것은 역시 변죽 좋은 우량아였다. 응원단을 이끌고 있는 이가 자기라며, 여자애가 끼면 진짜로 굉장한 응원전이 될 거라는 둥, 여자애를 쳐다보느라 상대팀 선수들이 실수 연발일 거라는 둥, 아마도 진실일 넉살을 속사포처럼 쏘아대기 시작했다. 연인을 둘러쌌던 떡대들은 이번엔 삽시간에 여자애를 포위한 채 각자 나름대로의 작업 모드로 변태하고 있었다.

“가시죠, 선생님.”

오른쪽 팔꿈치를 쥐는 단단한 악력에 홀연 정신을 차리고 무리에서 떨어져 나왔다. 역시 별로 밝은 표정은 아닌 연인이 인환을 떠미는 듯한 기세로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어, 아…… 인사 안 하고 가도 돼?”

“가요.”

“4시 반이다, 문위?!!! 4시 반!!! 잊지 마!!! 체육관으로 와라!!!”

퉁명스러울 정도로 싸늘한 어조에 찔끔해서 식당 입구까지 끌려가고 있는데 멀리서 우량아의 우렁찬 다짐이 뒤쫓아왔다. 못 들은 척 그대로 문을 밀고 앞장서는 연인을 대신해, 돌아보고 고개를 끄덕여주자 우량아의 얼굴엔 바보스러울 정도로 환한 미소가 번졌다. 아름다운 퀸카를 포위하고 있던 떡대 무리들도 그제야 연인의 부재를 인식한 듯, 황당한 표정으로 돌아보고 있었다. 바이올린을 든 도자기 같은 여자애도, 인상 좋은 선배 남자애도, 그 이상의 무수한 식당 안 시선들도 너나할 것 없이 연인의 꽁무니를 쫓아오고 있었던 것은 물론이었다.

심장이 뜨끔해선 괜히 돌아봤다고 후회했다. ‘캠퍼스의 왕자님에게 질질 끌려가는 웬 절름발이의 흉한 꼬락서니’라는, 울적한 자의식만 덤으로 달고 나오게 되었던 셈이다.

“……내가 괜히 끼어들었나? 그렇게 싫었어?”

“…….”

“……그냥 한 시간 뛰는 것뿐이잖아. 너무 너 하고 싶은 대로만 하면 진짜 왕따 당한다구. 이제 대학생이니까 친구들도 만들고 괜찮은 선배들하고도 어울려야지. 성공하려면 인맥도 중요한 거 아니겠니? 안 그래?”

“…….”

“……저기…… 위야, 좀…… 팔 좀 놔줄래? 힘들어서 그래.”

식당을 벗어나고도 한참을 연인의 손에 끌려 온 것 같았다. 낯익은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는 걸 보니 정문도 머지않은 듯싶었다. 숨도 차고, 무엇보다도 다리가 불편했기에 애원하듯 연인을 제지시킬 수밖에 없었다. 연인이 자신을 배려하지 않을 때의 보폭이란 따라가자면 거의 달음박질을 해야 하는 수준이었다. 다리만 버텨준다면야 언제까지라도 달릴 자신이지만, 어디 형편이 그리 호락호락할 리가 있는가. 숨이 거의 턱에 닿아 헉헉거리는 소리를 내자 둔감한 연인은 그제야 겨우 손가락의 힘을 풀어주었다.

“……후, 살 거 같다. 하여간 심술 나면 내 사정 따윈 눈곱만큼도 생각 안 한다니까? 에휴, 불쌍한 내 다리…….”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채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연인을 살짝 흘겨주었다. 연인의 눈치를 살피느라 잔뜩 긴장하고 있는 속내는 기를 쓰고 감춘 채, 거의 가면으로 굳어지려고 하는 얼빠진 미소를 날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너 똑똑한 녀석이잖아. 너무 뻣뻣하게 자존심만 세우는 것도 미련한 짓거리라는 건 알지?”

“…….”

“……다들 성격 좋아 보이더라. 인기 많네? 후후, 짐작은 했지만…….”

“…….”

“……어깨에 힘 빼고 어울려봐. 또 아니? 성준이 같은 평생 친구를 사귀게 될지?”

“선생님께 그런 충고 듣고 싶지 않습니다.”

“…….”

침착하고 고요한 연인의 일갈에 순간 가슴이 철렁하고 만다. 여전한, 따귀를 맞는 것처럼 쓰라린 연인의 냉담한 선긋기였다. 웃음을 머금고 있는 입술이 굳어들지 않기 위해 억지로 힘을 주니 부들부들 경련이 이는 것만 같았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는 척, 소맷부리로 얼굴을 가린 채 연인의 시선을 피했다. 방향을 살피는 것처럼 고개를 이리저리 빼며 태연을 가장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신들이 서 있는 순환 도로 오른편 끝으로 타원형의 대운동장이 보이는 걸 보니 차를 주차해둔 곳에 거의 도착한 것 같았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햇빛도, 더위도 지나치게 강렬했다. 연인의 서늘한 눈빛도 지나치게 아팠다. 일단 캠퍼스를 벗어나면 연인의 화도 좀 누그러질지 모른다.

“……빨리 가자. 청담동까지 갔다 되돌아오려면 좀 빠듯하겠다.”

장승처럼 버티고 선 연인을 재촉하듯 일별하곤 주차장 쪽으로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다시 예의 바른 남창이 되기로 작정을 한 건지,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연인이 자신과 속도를 맞추고 있었다.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니 표정 역시 많이 누그러져 보인다.

하긴 그렇게 화를 낼 일은 아니었으리라. 친목 게임과 다름없는 교내 농구 대회의 대타로 한 게임 뛰어주는 거야 보통이라면 그저 유쾌한 해프닝으로 끝날 일이었을 터, 연인의 불만은 정확히 따지고 보면 인환 자신에게 그 뿌리가 있었다. 자신이 연인의 결정에 참견을 했다는 사실뿐만이 아니라, 이곳에 있다는 자체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이다. 주제넘게 친구니 뭐니 떠벌리면서 그에게 충고를 해대는 집요한 ‘고객’인 자신이 말이다.

“……안전벨트 매고……. 덥지? 에어컨 켤 거니까 금방 시원해질 거야.”

“…….”

후끈한 찜질방이 돼 있는 BMW에 올라 서둘러 시동을 걸고 에어컨을 켰다. 물론 시원해지려면 적어도 10분은 지나야 하기에 창문부터 열어 환기를 했다. 속도를 높이면 창문으로부터 들어오는 바람만으로도 열기는 좀 가시겠지.

이마며 콧등이 어느새 땀투성이가 돼 있는 연인에게 손수건을 건네자 다행히 손을 쳐내지는 않는다. 얌전히 받아서 땀을 닦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자신이 있다. 손가락 끝이 떨릴 만큼 기쁘기도 하다. 정말이지, 연인의 격의 없는 사소한 몸짓 하나로도 무한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자신이 마냥 신기하고 대견하기만 하다. 기쁨을 느끼는 동안은 고통은 저만치 달아나곤 한다. 기쁨이 계속되는 동안은 용기도 조금씩 모이곤 한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용기가 모이게 되면, 어쩜 그땐 희망도 되살아나게 될지 모른다. 연인이 다시금 자신에게 마음을 열어줄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근데 농구도 잘해, 너? 그건 금시초문이네? 전엔 그런 소리 안 했었잖아.”

차가 남부순환도로로 접어들었을 무렵, 차 안이 좀 서늘해진 틈을 타 연인에게 말을 붙였다. 눈치를 보니 기분도 많이 누그러진 것 같고, 청담동까지의 아까운 30분을 내내 무거운 침묵으로 버리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뒤통수치지 말고 미리 가르쳐달랬더니…… 몰랐던 멋진 걸 새로 발견하면 안 되는데…….”

“…….”

“……지금도 충분히 멋지니까 더 멋있어지면 안 돼, 위야. 여기서 더 너를 좋아하면 심장이 과부하로 작살날지도 모른다구.”

“…….”

“……헤헤, 무지 기대된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게임 규칙 같은 거 미리 배워두는 건데…….”

“그저 길거리 농구 수준일 뿐입니다.”

담담한 남창의 대꾸가 마지못해 토해졌다.

“기술도 뭣도 없죠. 뛸 수 있는 체력만 되면 누구나 다 벌 떼처럼 뛰는 운동회 따위에 진지해지는 동기들이 한심합니다. 날도 더운데.”

“하하, 운동회라구?”

“아니면요. 교양 체육 수업 두 달 거친 왕초보에 목을 매는 거 보세요.”

“하하, 그래? 고작 교양 수업 두 달 받은 실력이란 말이지?”

“예.”

“그래도 운동 신경이 좋은 너니까 다르긴 하겠지. 난 기대되는걸?”

“…….”

“요샌 시간 여유도 좀 있으니까, 따로 흥미 있는 운동 있으면 시작해보지그러니? 체력 보강에도 좋잖아. 앞으로 본과 올라가면 공부 엄청 해야 된다는데.”

“…….”

“……진짜로 하고 싶은 운동 없니? 합기도나 태권도라도 다시 시작하든지?”

“운동은 달리기만으로 충분합니다. 규칙적으로 뛰어주면 그 이상 좋은 체력 관리가 없죠. 비싼 돈 들여 배울 필요도 없고요.”

“……그래도…… 골프든지…… 테니스 같은 것도 너라면 멋지게 해낼 텐데…… 엄마가 자주 이용하는 골프 클럽이 있거든. 가족이라 할인되는 회원권이 나한테도 있는데 배워볼 생각 있으면…….”

“그건 명령이십니까?”

고요하게 들어와 박힌 연인의 물음에 심장이 움찔 경련을 일으켰다. 보이지 않는 불신의 칼날이 사방에서 형형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명령’은 단 한 번으로 족했다. 더 이상 진화를 거듭할 만용이라곤 없건만, 연인은 그렇게 여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연인의 싹싹한 응대에 들뜬 나머지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흘려버린 스스로의 아둔함에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었다.

“……며…… 명령은 무슨…… 하하, 그냥 썩히는 게 아까우니까 한번 해본 말이야…… 정 싫으면 할 수 없지 뭘.”

“…….”

얼굴로 화끈한 열기가 차오를 만큼 심장이 빠르게 뛰어대는 통에 다시금 말을 붙일 용기는 생기지 않았다. 따끔따끔 눈이 쑤시는 바람에 몇 번이나 눈을 깜빡여 시야를 확보해야 했다.

순간이 천국이면 그다음 순간 재빨리 지옥이 다가오곤 한다. 물론 지옥의 순간도 마땅히 기뻐하리라 다짐을 한다. 지옥이 있기에 천국도 생생히 체험할 수가 있으니까. 사소한 천국도 어마어마한 열락으로 자각할 수가 있으니까. 그저 지옥이 아니라는 자각 하나만으로도 현실은 충분히 천국이었다.

다가온 지옥의 순간을 지그시 견디며 운전에 몰입했다. 침묵을 금쪽같이 여기는 연인 또한 제 좋을 대로 빠져들었기에, 결국 사소한 기쁨조차 낚지 못한 채 인환은 청담동으로 가는 30분을 맥없이 흘려보내야만 했다.

쇼핑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평소 보아둔, 연인에게 어울릴 것 같은 최고급 브랜드의 점포들이 밀집해 있는 청담동 쇼핑가를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을 볶아 먹듯이 재빠르게 순례했다.

두어 번쯤 인환이 골라준 슈트를 얌전히 입어주는 남창의 의무를 이행한 연인은 그다음은 요지부동이었다. 어떤 옷을 골라줘도 입어보긴커녕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무조건 괜찮다는 담담한 대꾸만 되돌아왔다. 사주고 싶은 것은 인환이지, 연인에게 있어선 그저 성가신 모욕에 지나지 않는다는 태도가 역력해서 인환 또한 주눅이 든 나머지 차마 입어보라는 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점원의 권유대로 가장 무난할 것 같은 디자인의 옷을 골라 연인의 몸에 대보는 선에서 만족을 해야 했다. 그나마 무엇을 입어도 마냥 그림이 되는 연인의 수려한 용모가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너무 많이 사주는 것 또한 달가워할 연인이 아닌지라, 캐주얼 슈트 두 벌과 바지 두 벌, 그리고 셔츠와 티 서너 벌을 사는 선에서 그쳐야만 했다. 물론 연인은 그조차도 못마땅한 듯 마지못해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옷가게를 나와 잡화를 파는 상점으로 데려가는 것도 거의 사정하다시피 하지 않으면 안 됐는데, 옷에 어울리는 구두를 사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며 연인을 설득하기까지 길거리에서 10여 분이나 옥신각신을 해야만 했다. 시계나 다른 액세서리들엔 그저 군침만 흘린 채, 구두 한 켤레와 책가방으로 쓸 멋진 크로스백 하나를 사는 것으로 피로한 쇼핑은 겨우 끝이 나게 되었다. 한 시간도 채 안 걸린 놀라운 쇼핑 기록이었다. 마음에 드는 슈트 한 벌을 사기 위해 거의 하루를 투자해야만 하는 자신의 까다로운 쇼핑 습관에 비춰 볼 때, 이건 그저 아무거나 대충 주워 온 수준과 다름없었다. 물론 그럼에도 기쁘지 않았냐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대충 주워 온 옷들이건만 연인에겐 어쩜 그리도 잘 어울리는지! 새 옷으로 갈아입어달라는 자신의 간절한 부탁에 마지못해 탈의실로 들어갔다 나온 연인을 눈에 담곤, 인환은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른 가슴을 가라앉히기 위해 기를 써야만 했다. 시원한 바다색의 반팔 풀오버와 느슨하게 골반에 걸쳐지는 새하얀 스트링 팬츠를 걸친 연인의 모습은 웬만한 모델이나 배우는 감히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황홀했다.

양손 가득 짊어진 쇼핑백들을 차에 싣고, 잠시 쉬기 위해 카페를 찾아 들어가는 동안에도 인환은 좀처럼 연인으로부터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늘 달라붙게 마련인 거리의 뭇 시선들 또한 열기가 대단해서 잠깐 동안은 질투 섞인 불안감에 떨지 않으면 안 됐다. 핥아 먹을 듯이 탐욕스럽게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에 희미한 불쾌감이 비치기도 했지만, 다시금 담담하고 초연한 남창의 자세로 되돌아간 연인은 고분고분 자신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3시가 넘었건만 이글거리는 태양빛의 기세는 여전했다. 거리를 달군 열기가 목구멍의 갈증을 잔뜩 부추기고 있었다. 바로 손을 뻗으면 닿을 한 뼘 거리에 연인이 있었다. 꿈처럼 아름다운 내 연인이었다.

손이라도 잡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만지고, 키스하고 싶은 욕망 또한 간절했다. 섹스는, 물론 차마 떠올리기조차 두려웠지만 그 또한 완전히 숨통을 꺾을 수는 없었다. 갈증이 더더욱 위험한 것으로 변태하기 전에 시선을 피하는 수밖엔 도리가 없었다. 적당히 보조를 맞춰 걷는 연인을 추월해 5∼6미터쯤 앞서 나갔다. 남자란 시각적 자극에 약한 허리하학적인 짐승임에 분명하다고 서글픈 결론을 곱씹었다.

“장인환?!!! 인환이구나?!!! 이게 웬일이래니?!!!”

귀에 익은 목소리가 몽롱하게 들뜬 넋을 뒤흔들며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찬물을 뒤집어쓴 것마냥, 낙원 같은 백일몽이 떨어져나간 것도 순식간이었다.

소리가 난 10여 미터쯤 전방으로 시선을 보내자 잘 아는 얼굴 둘이 토끼처럼 폴짝폴짝 뛰며 가까이 다가왔다. 연인과 함께일 때라면 절대로 마주치고 싶지 않을 얼굴들. 자신의 미술 동인이자 동기인 상희와 경자였다.

“정말이네?! 아까부터 긴가민가했었는데……. 여긴 웬일이니?! 전시회 구경 나온 거야?!”

“폐렴으로 입원했다고 해서 걱정했었어, 야!! 몸은 괜찮아진 거니?!!”

“얼굴 보니까 상태 좋네? 살도 좀 찌고.”

“장인환, 이 인정머리 없는 자식아!! 괜찮아진 거면 나와서 신고라도 해야 할 거 아냐?!! 요새 우리가 너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 줄 알아?!! 모임에 안 나올 거면 전화라도 때려야지!! 어쩜 그렇게 코빼기도 안 비칠 수가 있니?!!”

“……아…… 어쩌다 보니까…….”

더위로 발갛게 익은 얼굴의 여류들은 양손 가득 쇼핑백을 짊어진 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비죽 튀어나온 아크릴 케이스며 둘둘 만 캔버스 천들로 미루어 보아 재료 사냥을 나온 모양이었다. 때 이른 더위를 차마 예상 못 한 듯, 낡은 블루진에 부대자루처럼 헐렁한 티셔츠 차림인 그녀들은 보기만 해도 더워 보였다.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풍성한 웨이브의 기다란 머리카락을 뒤로 질끈 동여맨 상희나 짧은 커트 머리의 경자나, 국민학생처럼 순진하고 소탈한 모양새는 한결같았다. 보나 마나 동이 난 재료를 사러 작업 중에 무턱대고 시내로 달려 나왔으리라.

“……오랜만이네? 다들 별일은 없고? 작업도 순조롭지?”

“어쭈? 진짜 궁금하긴 한 거야? 입에 발린 안부는 사양이다?”

“하하, 너무 그러지 마라, 한상희. 좀 정신없었어. 다음 모임엔 꼭 나갈게. 조만간 기하 선배 화랑에도 얼굴 비칠 거니까.”

“진짜지? 다음 주엔 주희 언니만 빼고 모두 석주 설치전 하는 데 가서 도와줄 건데 너도 올래?”

“석주가? 어디서? 언제?”

“하, 진짜 무심하다, 장인환? 금시초문이로소이다냐?”

“1년 전부터 별렀었잖니, 걔. 포천에 딸기밭까지 사서 뭔가 크게 터트릴 건가 봐. 혼자는 힘든지 우리한테까지 SOS를 쳤어.”

“……짜식, 열심이네…….”

“그럼, 열심이지. 쫌 있음 주희 언니도 개인전 할 거구…… 너만 삐딱선 타고 있다구. 반성해, 장인환.”

“……후후, 그래…… 진짜 반성해야겠다. 너무 게으름 부린 거 같어…….”

“그래도 얼굴은 좋아 보여서 안심…… 어……??!!!”

주근깨투성이 경자의 얼굴이 인환의 어깨 너머 한 지점을 향하더니 눈을 휘둥그렇게 뜬다. 옆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던 상희까지 정말로 옆에 뻥 하고 만화 말풍선이 보이는 착각이 들 정도로 놀란 얼굴을 만들고 있었다. 물론 인환은 즉시로 사태를 이해했다. 여자들이라면 누구나 한결같을 저 반응의 근원을 향해 상반신을 살짝 돌려 시선을 주었다.

두 걸음쯤 뒤처진 곳에 멈춰 선 채, 인환과 여류 동기들을 번갈아 굽어보고 있는 연인의 고요한 눈동자가 있었다. 조각처럼 부러 깎아놓은 듯한 수려한 이목구비가 있었다. 몸의 아름다움이 있었다.

“……어, 위야. 잠깐 친구들을 만나서……. 저기, 지금은 좀 바빠서 그렇고, 나중에 보자, 경자야. 상희도 고생하고. 조만간 같이 술 한번 마시든지……?!”

“오, 노노노노노노!!! 어딜 내빼려구, 장인환!!!”

“언제 요런 초미남을 꿍쳐놓구!!! 감히 기냥 도망칠 생각을 해?!!! 못 가!!! 고로코롬은 절대 못 가지, 장인환!!!”

슬쩍 꽁무니를 빼려던 인환을 드센 여류들이 가만둘 리 없었다. 채 말을 맺기도 전에, 탐욕스러운 눈을 번뜩이더니 인환의 팔을 양쪽에서 잡아챘다. 붙잡힌 양팔로 전달되는 단단한 악력에 인환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여자들이지만 보통 여자들이 아니었다. 어마어마한 열정과 에너지로 대작들을 쑥쑥 뽑아내는 열혈 동기들이었다. 어쩜 실제 힘에 있어서도 인환을 능가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위…… 문위라고…… 내 고등학교 후배야…… 이번에 대학 들어갔거든. 위야, 내 친구들이야. 인사드릴래?”

올가미에 걸린 느낌으로 마지못해 서로를 소개시켰다. 여류들의 억센 팔은 간신히 떨어져 나갔지만, 연인이 대신 포위당하는 위태로운 장면을 지켜봐야 했다. 안 그래도 꽃미남에 환장한 친구들이었다. 나이까지 어리다니, 연인을 한참이나 얕보고 공격의 이빨을 가는 작태가 눈에 훤했지만, 역시 연인의 파워까지는 당해낼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예의 바르게 한 번 허리를 굽혀준 것으로, 그야말로 ‘예의’는 끝장이 나버렸다. 노골적으로 달라붙는 여류들에 노골적인 냉랭함이 맞부딪쳐 번쩍번쩍 전류가 흘렀다. 웬만한 마초 근성엔 코웃음을 치는 여장부들답게 한동안 몇 번의 짓궂은 농짓거리가 오가긴 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예리할뿐더러 끝장 섬세한 여심은 막강 파워를 자랑하는 연인의 철통같은 성벽(性癖)을 곧이곧대로 감지해냈던 것이다.

“……앞으론 모임에 쟤도 데리고 나와! 알지? 혼자만 나왔다간 너 그날로 제삿날일 테니깐…….”

아마도 장기전으로 가자 작심을 굳힌 모양이었다. 멋쩍은 듯 꼬리 여덟 개를 살랑살랑 흔들며 불여우 웃음을 흘리던 경자가 인환의 귓바퀴를 잡아당기더니 입술을 바짝 붙인 채 은밀한 협박을 던졌다. 아프다고 신음을 흘리자, 부리부리하게 빛나는 눈초리로 찌르며 농담이 아님을 재차 주지시켰다. 희미하게 저항의 모션을 취하자 당장 등줄기로 주먹 세례가 떨어졌다. 50호, 100호짜리 캔버스는 물론 초대형 오브제들까지 번쩍번쩍 들어 올리곤 하는 억센 뼈마디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아픔이었다. 거짓말 안 보태고 눈물이 찔끔 쏟아질 지경이어서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동기를 노려봐야 했다.

“새끼가 어디서 반항이야, 반항이. 얌전히 누나 말 들어.”

다시금 휘어잡힌 귓바퀴 틈으로 소곤소곤 위협이 파고들었다. 울상이 돼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경자의 얼굴은 간신히 평소의 다정하고 서글서글한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물론 그렇다고 새삼 속을 인환이 아니다. 겉으론 복종하는 척했지만, 어떡하면 여류들의 저 갈퀴 같은 호기심과 열정으로부터 연인을 감쪽같이 따돌릴까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을 따름이었다.

“……우리도 지금은 형편이 안 좋으니까 다음을 기약해야겠는걸? 나오기 전에 꼭 연락해야 한다? 후후, 한턱 크게 쏠게, 인환아.”

“어쩐지 오늘 화장하고 싶더라. 아이, 참. 옷도 이게 뭐야…… 위라고 했지? 나중에 누나 이쁜 모습 보여줄 테니까 꼭 다시 보자, 응?”

“글세 마랴∼∼∼. 화장하고 나올걸. 흑흑……. 잘 가, 꽃미남 군∼∼∼. 꼭 또 보자아아∼∼∼?!”

“인환이도 빠이∼∼∼♡♡♡”

“……전화할게. 더운데 조심해서 들어가.”

언제부터 저렇게 여성스러워진 건지, 그저 가증스럽기만 한 상냥 애교 버전의 여류들이 나긋나긋 작별을 고했다. 섭섭함보다는 안도감을 더 많이 느끼며 자신 역시 부지런히 작별 인사를 날려주었다. 뭐가 그렇게 신이 나는지, 동기들은 연신 키득거리며 도시의 뒷골목 속으로 재빠르게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녀들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도 인환은 한동안 발길을 멈춘 채 땡볕 가득한 거리를 응시했다. 땀이 뻘뻘 흐르는 상기된 얼굴이며, 고물 장사처럼 양손 가득 짐을 짊어진 그녀들의 건강한 몸짓들이 잔상처럼 머리에 남았다. 동기라기보다는 누이와 비슷할 친밀감을 느끼는 친구들인지라, 한편 씁쓸하면서도 그 귀엽고 사랑스러운 작태들에 자꾸만 웃음이 비어져 나오는 것도 참을 수 없었다. 친구들을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을 느끼기보다, 어떡하면 그 친구들로부터 연인을 따돌릴 수 있을까 수십 가지 전략들을 머릿속으로 팽글팽글 굴리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하고 슬펐다.

대놓고 자신의 연인이라 당당하게 소개를 못 하는 건 오로지 연인의 입장을 배려한 때문이리라.

이성으로서 연인에게 노골적인 호감을 드러내는 친구들을 지켜봐야만 하는 심정은, 또한 몇 달 전과는 사뭇 다른 몹시 고통스럽고도 두려운 것이었다. 이제부터 경계해야 할 상대는 단지 일시적으로 연인을 스쳐 지나가는 ‘고객’이 아니었다. 언젠가 불쑥 나타날지도 모를 연인의 결혼 상대였다. 물론 아직은 먼 일일 것이다. 이제 대학생인 연인을 두고 적어도 4∼5년은 때 이를 방정일지 모른다. 그러나 늦긴 해도 언제고 닥칠 미래인 것은 또한 분명한 사실이었다. 어쩌면 생각보다 더 빨리 닥칠지도 몰랐다. 미래를 누가 알겠는가. 정말로 연인이 사랑에 빠지게 되는 날, 어딘가 존재하고 있을지 모를, 정말로 티 없이 순결하고 아름다운 여자를 연인이 마침내 발견하게 되는 날, 인환의 생은 온통 암흑천지로 변해버릴 터였다.

그랬다. 더 이상 그 어떤 무자비한 아웃팅도 두렵지 않았다. 그보다 수천수만 배는 더할 두려움에 비하면 그따윈 손톱 끝의 가시보다도 더 미미한 자극에 불과했다. 그 어떤 아픔이 있어 연인을 완전히 잃는 아픔에 비할 것이냐.

욕심대로라면 적어도 친구들에게만큼은 자신의 사랑을 밝히고 싶었다. 더 이상 이성 친구들의 노골적인 추파에 전전긍긍 불안과 질투를 느끼며 연인을 지켜보고 싶지 않았다. 내 사람이라고, 내 연인이라고, 함부로 손대지 말라고 당차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 보답으로 절교나 왕따를 선물로 받는다 해도 그건 그것대로 연인을 갖는 정당한 대가가 될 것이다. 자신으로선 또 하나의 희생 제물인 셈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멋대로 커밍아웃을 할 수는 더더욱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의 커밍아웃은 연인의 반강제적인 아웃팅과 직결돼 있는 문제였다. 혼자 떳떳하자고, 혼자 편한 욕심 부리자고, 동성애자도 아닌 연인의 처지까지 난처하게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사랑해.”

인환이 하염없는 상념에 빠져들 동안에도 그저 묵묵히 옆에 선 채 남창의 의무를 지키고 있던 연인에게 불쑥 고백을 던졌다. 차 안에서 자신이 건네주었던 손수건으로 막 콧등에 맺힌 땀을 훔치고 있던 연인의 손놀림이 멈추는 게 보였다. 살피는 듯한 시선이 인환의 얼굴로 떨어졌다.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마주 끌어당겼다. 만지고 싶은, 키스하고 싶은 얼굴이 보였다. 몸이 보였다. 하지만 만질 수 없었다. 키스할 수 없었다. 사랑을 나눌 수는…… 물론 더더욱 없었다.

“……정말 사랑해, 위야. 너무너무 사랑해. 나, 진짜 너 많이 사랑해.”

“…….”

대답 대신 미간에 내 천(川)자가 생기며 연인의 얼굴이 사납게 구겨지는 것이 보였다. 자신의 무엇이 마음에 안 드는지 헤아릴 지혜 따윈 이제 없다. 유치하고 직접적인 고백인지, 아니면 절박해 보일 자신의 눈빛인지, 아니면 그 둘 다인지 절대로 알지 못한다. 그저 미움받고 있다는 것만 안다. 계속 미워하기 위해 부지런히 벽을 쌓고 있다는 것만 안다. 하도 열심히 쌓아 올려서 어떤 막강한 화력의 불도저로도 도저히 부서뜨릴 수 없을 벽을. 그래도 고백을 멈출 수는 없다. 언젠가…… 그 언젠가는 이조차도 못하게 되겠지. 그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목숨보다 소중할 연인을 코앞에서 뺏겨도, 마냥 꼼짝 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게 될 것이다. 사랑한다고, 너무너무 사랑한다고, 나 자신보다도 더 사랑한다고, 진심의 고백을 바쳐도 마냥 더럽고 집요한 호모의 푸념 정도로밖에 취급되지 않을 것이다.

“목마르지 않으십니까? 갈증이 느껴집니다.”

서늘한 동문서답과 함께, 붕붕거리며 지나가는 차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는 강남대로 쪽으로 연인의 시선이 옮겨간다. 불쾌한 자신의 얼굴보다는, 무미건조한 잿빛 도시 풍경이 연인을 더 편하게 만드는가 보았다. 연인의 새까만 동공 속을 수십 대의 자동차들이 스쳐 지나갔다. 점차 고요한 남창의 무표정으로 되돌아가는 연인의 얼굴에 가슴은 더더욱 찢어졌다.

“……정말 목마르다, 그지? 헤매지 말고 아무데나 들어갈까?”

힐끗, 적선하듯 옹색한 곁눈질을 던지는 연인에게 활짝 핀 미소로 답해주었다. 분위기도 좋고 차 맛도 일품인 단골 카페를 찾아가는 일이 갑자기 부질없게 느껴졌다. 아니, 다른 모든 것들도 그랬다. 다, 다, 모든 것이 마냥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분위기 있는 카페 따위가 뭐란 말인가. 주제에 무슨 닭살 소꿉놀이란 말인가. 무서리를 맞은 풀처럼 온몸의 맥이 풀리는 것 같았다. 숨 한번 쉬는 게 이렇게 힘들었나 싶게 가슴이 답답해졌다. 수시로 목구멍을 죄는 단단한 응어리가 이번엔 가슴으로 내려간 모양이었다. ……이러면 안 돼……. 이러지 마, 장인환……. 곧 또 천국이 닥칠 거야…… 그럴 거야…….

고개를 이리저리 빼고 가장 가까이 있을 법한 카페 간판을 찾았다. 5∼6미터쯤 전방에 목적한 간판 하나가 보였다. CAFE DE CINEMA. 주인장이 영화광인가 보다고 멍한 생각을 흘렸다.

“……저기 들어가자. 얼른 목 축이고 움직이지 않음 늦겠다.”

걸음을 떼기 시작하며 무심코 연인의 팔을 잡았다가, 불에라도 덴 것처럼 황망히 손을 떼어내야 했다. 단 2∼3초도 못 됐을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손바닥엔 연인의 뜨거운 체온이며 단단한 근육의 감촉이 고스란히 남고 말았다. 가슴을 막고 있던 응어리가 출렁 흔들리며 목구멍까지 치솟았다가 다시금 가슴 언저리로 내리꽂혔다. 후끈한 땅바닥의 열기까지 얼굴로 순간 이동을 했다.

연인을 쳐다보진 않았다. 지금 쳐다본다면 만지고 싶은 기분을 도저히 억누를 수 없을 것 같았다. 만지고, 키스하고, 껴안고…….

그리고 울음을 멈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총장배 농구 대회가 운동회 수준이라는 연인의 혹평은, 확실히 정곡을 찌른 평가였던 모양이었다.

스포츠 게임에 문외한인 자신의 눈을 100퍼센트 신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게임에 임하는 선수들의 진지함이나 투지는 어떨지 몰라도 시합이라기보단 무슨 축제의 퍼레이드를 연상시키는 체육관 내의 느슨한 분위기가 그런 혐의를 더 짙게 만들었다. 하다못해, 체육관 2층 펜스 바깥쪽에 얌전히 앉아 있기보다 코트 주변으로 벌떼처럼 모여선 각 과 응원단(이라기보다는 그 과 소속의 대학생들)의 응원전 역시 치열함보다는 놀자판 분위기가 더 강했다. 알음알음 소식을 전해듣고 연인을 보러 구름 떼처럼 몰려든 여학생들의 무리까지 더해지니 그 소란스러운 북새통이 오죽하랴. 경기를 관리 감독하는 지도 교수들 역시 온갖 고함 소리와 육두문자를 남발하며 자기 팀을 향한 응원에만 열을 올렸다. 웃음과 고함과 야유와 상스러운 응원가들이 판을 쳤다. 한술 더 떠 그런 너절한 분위기를 제지하려는 권위적인 자세의 운영진 또한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물론 그런 분위기 자체가 젊은이다운 열정과 끼를 마음껏 발산시키기 위해 암묵의 동의하에 이루어지고 있는 모종의 교육적 술책에 따른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게임 자체는, 그러나 반대로 무서우리만큼 진지했다.

한두 명의 선수들(이들은 서울대 농구부 팀에 소속된 선수들로 키도 2미터에 육박하는 전문가들이라 불러 마땅했다!)을 빼곤 모두 아마추어라고 해도, 농구에 대한 애정은 다들 상당한 듯싶었다. 애정이 있는 만큼 승부에 대한 집착도 집요했는데, 그것이 게임의 모양새를 매우 진지하면서도 드라마틱한 볼거리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진지한 집착이야말로 은연중 연인에게로 전염돼 최상의 결과를 이끌어낸 효자라 불러 마땅했다. 운동회 수준이라 폄하하며 마지못해 코트로 나간 연인이, 심드렁했던 애초의 태도에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집요하고 공격적인 승부사로 돌변하는 데는 단 몇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물론 단지 전염됐을 뿐이라고 보긴 힘들지 모른다. 연인 역시 굴복하거나 지는 것은 죽기보다도 싫어하는 타입이 아닌가. 내면의 호전성을 드러낼 기회만 있다면, 이를 드러낸 채 죽기 살기로 싸울 타입이 또한 연인이라는 것을 자신은 뼈저리게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연인과 함께 캠퍼스 정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종합 체육관 건물에 도착한 시각은 4시 40분이었다.

최대한 서두른다곤 했지만 연인의 우량아 동기가 정한 시한에선 10분을 초과하고 말았다. 느긋하고 심드렁한 태도로 따라오는 연인을 끌다시피 재촉해 체육관 1층 주경기장 안으로 들어가자 입구에서 연인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일단의 남학생들이 늦었다는 성토와 야유로 연인을 맞아들였다. 몇 시간 전에 본 안경 낀 우량아는 화려한 고적대 복장을 한 채 얼굴에 알록달록 페인팅을 하고 있었고, 나머지 학생들은 거의 푸른색 농구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와글와글 벌 떼처럼 떠드는 남학생들에게 이끌려 로커 룸 쪽으로 가고 있자니 이번엔 웬 박수 소리와 하이톤의 괴성들이 연인을 맞아들였다. 로커 룸 주변에 구름처럼 몰려든(200∼300명은 족히 돼 보였다!) 여학생들이었다. 한결같이 연인의 이름을 부르거나, 박수를 치거나, 꺅꺅거리는 괴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잘하라는 둥, 기대한다는 둥, 옷이 너무 멋지다는 둥, 사랑한다는 둥, 애교 넘치는 싱싱한 연호들이 탁구공처럼 통통 튀고 있는 것은 물론이었다. 무슨 아이돌 스타를 대하는 듯한 그녀들의 반응에, 당사자인 연인은 희미하게 양미간을 구겼고 일행인 남학생들의 얼굴만 벌겋게 달아올랐다.

“으하하, 사흘 동안 파리만 날리던 체육관에 이 어인 꽃밭이란 말이냐! 다 네 덕분이다, 문위!!!”

“도대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쟤네들? 귀신이네?”

“식당에서 들었나 보지. 하여간 정말 못 말려, 여자애들.”

“왜, 좋지 않냐? 덕분에 우리도 기운 나고. 어쨌건 우리 팀 응원하는 거 맞잖아?”

“쥐뿔! 빛 좋은 개살구지! 정신 사납기만 하네!”

“새끼, 속으론 좋으면서 튕기기는. 덩크 하나 멋지게 터트려봐라. 그럼 너도 문위처럼 오빠 부대 열은 끌고 다닐 수 있어.”

“앗싸! 목표는 그럼 덩크다!”

“새꺄, 넌 또 뭐가 덩크냐!!! 승리가 우선이지!!! 여자애들 앞에서 괜히 멋 부린다고 시합만 망쳐봐?!!!”

연인이 우량아 전창일이 내민 유니폼으로 갈아입는 내내 로커 룸 또한 문밖의 꺅꺅거리는 소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우렁찬 사내들의 수다로 시끌시끌했다.

희미하게 땀내가 밴 로커 룸 특유의 퀴퀴한 냄새며, 옷을 갈아입는 연인의 몸에 줄곧 달라붙는 시선을 곤혹스러워하던 인환도 곧 자연스레 무리와 어울리게 되었다. 붙임성 좋은 전창일이 제 소개를 하며 너스레를 떨었기 때문이다.

예과 1학년 과대이기도 하고 연인과는 함께 스터디 모임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야말로 옷을 갈아입는 단 몇 분간의 대화였지만, 그 몇 분으로도 전창일의 구김살 없고 개구진 성격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어디서나 사랑받고 인기를 끌 것 같은 청년이었다. 왕따를 자처했던 고교 시절의 연인을 생각하면 참으로 황송한 클래스메이트라고, 인환은 속으로 안도의 웃음을 지었다.

의외로 연인은 붙임성 있게 학교생활을 꾸려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 총명한 두뇌로 스스로의 장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테니, 고교 시절처럼 독불장군식의 태도가 그리 유리하지는 않다는 결론을 내리는 데도 별로 시간은 걸리지 않았겠지. 또래의 그 누구보다도 성공에 대한 야심으로 똘똘 뭉쳐 있을 연인이 아닌가.

연인이 옷을 다 갈아입자, 투지에 불타는 예과 B팀 농구 부대는 곧바로 체육관 1층 경기장 안으로 뛰어들었다. 로커 룸 앞에서부터 진을 치고 있던 연인의 오빠 부대까지 달고 들어가니 경기장 안에서 미리 움직이고 있던 상대 팀(공과대 A팀)과 그 응원단, 의예과 응원단인 예과 1∼2학년 학생들, 연건에서부터 응원을 하러 와준 본과 농구광 남학생들 몇, 그리고 지도 교수들을 비롯한 운영진들의 짓궂은 야유가 비처럼 쏟아졌다. 오빠 부대는 반칙이라나 뭐라나. 말은 그렇게 해도 상대 팀 남학생들조차 의외의 꽃밭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싱글벙글이었다. 말이 교내 농구 대회지,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그야말로 관중석은 텅텅 빈 채 파리만 날리는 자족적인 공놀이에 불과했던 모양이었다. 500여 평에 달할 경기장 마룻바닥과 5000석에 가까울 관람석마저 갖춘 제법 커다란 실내 경기장의 규모로 볼 때 더더욱 그렇게 느껴졌을 터였다.

응원단복을 제대로 갖춰 입은 우량아 전창일이(황금빛 술이 견장처럼 어깨에 듬뿍 달린 하늘색 제복 차림을 하고, 얼굴엔 인디언처럼 붉은색과 푸른색의 막대 페인팅을 한데다 이마엔 붉은 넥타이까지 질끈 동여맨 모습은 보기만 해도 절로 웃음이 나왔다) 오빠 부대마저 낀 대규모 응원단을 리드하며 본격적인 응원전에 돌입하자, 그에 질세라 상대 팀 응원석도 요란스러운 구호로 맞받아쳤다.

코트 한구석에서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던 연인이 코트 한가운데로 나가 미리 뛰고 있던 선수들과 합류하니, 오빠 부대로부터 여지없이 격렬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반대편에서 야유의 괴성이 터져 나온 것은 물론이었다. 목소리만으로 판단하면 무슨 성 대결 게임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한쪽은 걸걸하고 낮은 바리톤의 왕왕대는 괴성이었고, 한쪽은 귀를 찢을 듯한 하이톤의 소프라노들이었으니까. 바야흐로 분위기는 띄워질 대로 띄워진 듯싶었지만 역시 진지하다기보단 왁자한 놀이판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저기, 위 고등학교 선배님이시라고요?”

게임이 시작된 지 5분 남짓, 막 격렬한 몸짓으로 코트를 누비기 시작한 연인의 몸놀림에 홀랑 넋을 뺀 채 몰입하고 있는데 뒤에서 문득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끄러운 고함과 야유와 잔뜩 오버된 응원가들로 범벅이 돼 있는 소음 속에서, 목소리는 유달리 낮고 부드러워 도리어 귀에 확 꽂혀들었다.

어쩐지 오소소 온몸에 소름이 일었다. 단 몇 마디뿐이건만, 그 몇 마디만으로도 상대의 성품이며 분위기, 그리고 가정환경조차도 적나라하게 읽혔기 때문이다. 몸을 돌려 상대를 눈으로 확인하기까지의 몇 초 동안, 인환의 뇌리를 스쳐간 생각은 ‘보통이 아니다’라는 자각이었다. 그랬다. 보통 어디서나 흔히 접하게 되는 그런 목소리가 아니었다. 조물주가, 혹은 부모가 대단히 공들여 제작한 자취가 역력한 그런 억양이요, 분위기요, 버릇이었다.

식당에서 본 여학생이었다.

여학생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미리 그 정체를 예상하기라도 한 듯, 인환은 막연히 당연하다는 생각을 흘리고 있었다. 당연했다. 그런 목소리라면 이런 얼굴이 아니면 그 어떤 얼굴도 어울리지 않을 터였다.

“……네…… 실례지만……?”

정식으로 소개를 받고 인사를 나누진 않았어도 충분히 여학생을 인지한 인환이었다. 양 선배라고 불렸었다. ……응원 갈게, 위야. 파이팅……! 연인을 향한 감미로운 응원의 구호까지 여전히 귀에 남아 있었다. 아까와 같은 크림색 투피스 정장 차림이었지만 손에 바이올린 케이스는 들려 있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양신애라고 합니다. 음대 바이올린과 3학년이에요.”

공손히 머리를 숙인 깍듯한 인사에서도 범상치 않은 품격이 느껴졌다. 다시금 전신으로 오소소 소름이 달려 나갔다. 어쩐지 심장의 고동이 빨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예, 장인환입니다.”

여학생의 분위기에 압도된 인환 역시 깍듯한 인사로 답례를 했다. 굵은 쌍꺼풀이 진 사슴처럼 커다란 눈동자가 먼저 시선을 끌었다. 그다음은 투명한 우윳빛 피부가. 염색기라곤 전혀 없는 흑단처럼 새까만 머리카락도 인상적이었다. 어깨에서 약간 내려오는 숱 많고 긴 생머리는 자연스러움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층이 진 채 커팅이 되어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머리카락이 하늘거리는 커튼처럼 부드럽게 흔들렸다. 키는 167 정도. 전체적으로 마른 듯한 체형이지만 가슴의 볼륨이 적당하게 부풀어 있어 우아하면서도 섹시한 여성스러움을 느끼게 해준다.

눈을 확 끌어당기는 빼어난 미모도 미모지만, 무엇보다도 그녀를 돋보이게끔 하는 것은 그 분위기였다. 지성미까지 느껴지는 안정된 표정은 아직 철이 덜 든 그 또래의 여대생들에게선 좀처럼 보기 힘든 것이었다. 부드러운 관용과 함께 만만치 않은 고집과 결벽증도 내비치는, 냉정하고 도도한 인상이 교묘하게 결합돼 있었다. 정말로 공들여 빚어진 도자기가 아닐 수 없었다. 최상류층 가정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엄격한 조련을 받으며 자라온 공주님이 아니라면 결코 품을 수 없는 오만한 자의식과 배타성이 풀풀 풍겼다. 인환 또한 상류층 출신으로서, 저 배타성에 대해서라면 신물이 날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본가 쪽 의붓형들이나 친척들, 혹은 그들과 어울리는 무리가 딱 그녀 같은 분위기를 풍겼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은 이 공주님의 반만큼도 아름답거나 우아하지 못했다는 것.

“……위와는 많이 친하신 편인가 봐요. 언제나 혼자 다니는 모습만 봤거든요. 스터디 때 빼곤 동기들과도 별로 안 어울리더라고요. 학교에 친구를 데려온 적도 없는 것 같고…….”

그녀가 연인에 대해 보통의 감정이 아니라는 것은 그 몇 마디 말만으로 충분했다. 좋아한다, 관심 간다 등등 직접적인 표현을 하지는 않았지만, 저렇게 자존심 강한 타입으로선 누군가에게 호기심을 드러낸다는 것 자체가 강렬한 호감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별로 놀랄 일은 아니었다. 웬만한 여자치고 연인을 보고 마음이 동하지 않을 이는 별로 없으리라. 물론 고객이 아니고선 조금도 틈을 내주지 않는 연인이기에, 그 무수한 짝사랑들은 대부분 동경으로 그치기 마련이었다. 아마도 눈앞의 이 빼어난 공주님 또한 그러하리라. 몇 시간 전, 식당에서의 짧은 조우에서도 연인은 냉혹하게까지 느껴질 만큼의 거리를 여학생에게 두지 않았던가. 연인에게 특별한 감정을 갖고 있을 여학생 입장에서 본다면 지독히도 잔인하게 비칠 행동거지였다. ……응원 갈게, 위야. 파이팅……! 그저 지나가듯 던진 상투적인 인사였지만 그녀로선 어마어마한 자존심을 버리고 택한 애절한 어택이었으리라.

“……네. 우연한 기회로 좀 친해졌지요. 워낙 붙임성이 모자란 녀석이라 친구가 별로 없는 거 같아 걱정이네요.”

“……하지만 쉽게 쉽게 사람 사귀는 타입, 전 싫더라구요. 쉽게 마음 줬다가 별것 아닌 오해로 또 쉽게 떨어져 나가고…… 위는 그런 애 아닌 거 같아서 마음에 들어요.”

“후후, 그런가요?”

“……선배시면……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아, 실례되는 질문인가요?”

“아뇨, 괜찮습니다. 스물일곱입니다. 좀 삭았죠?”

“어머! 그렇게 안 보이세요!”

여학생의 얼굴에 약간 당황한 빛이 어렸다. 그녀 같은 모범생 타입이야말로 연장자에겐 또 약한 법이었다.

“……정말 처음엔 위 후배거나 동기인 줄 알았어요. 말씀 낮추세요, 선배님.”

“네, 천천히요.”

물론 ‘천천히’ 볼 일도 없을 그녀지만 예의상 상냥한 대답을 던져주었다. 연인이 아니었다면 언감생심 이런 공주님과 말문이라도 터볼 수 있었겠는가.

마침 연인이 또 한 골을 성공시키는 바람에 그녀의 시선은 화들짝 코트로 되돌아갔다. 의예과 응원석에선 비명 소리가 난무하고, 상대팀 벤치에선 욕설과 야유가 쏟아졌다. 나갈나갈 친친 쵸쵸쵸. 익숙한 응원 구호가 귀청을 찢을 것처럼 쑤셔들었다.

머리카락이며 얼굴, 게다가 푸른색 민소매 유니폼이고 할 것 없이 어느새 온몸이 땀범벅이 돼서 위험스러운 수컷의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는 연인은 다른 선수들과 함께 종횡무진 코트를 누비고 있었다. 포지션도 파워 포워드라 유달리 움직임이 많고 눈에 띄었다(물론 제 눈에 안경이겠지만). 경기가 시작된 지 십여 분 남짓, 스코어는 39-24로 예과 B팀이 약간 앞서 나가고 있었다. 초반엔 아직 몸이 덜 풀린 연인과 다른 팀원들과의 호흡이 잘 맞지 않아 상대 팀에 약간 밀리는 듯하더니, 이내 제 페이스를 찾아 물 흐르듯 경기의 흐름을 타고 있었다. 문외한인 인환의 눈에도 확실히 실력은 예과 B팀이 약간 더 앞서는 듯 보였다. 특히 스피드 면에서 더 두드러졌는데, 초반엔 조직력과 노련미를 앞세운 상대 팀이 그런대로 선전했지만 빠른 스피드를 이용한 맹공에 갈수록 밀리는 느낌이 들었다. 연인의 리바운드와 인터셉트에서 센터인 7번 꺽다리 선수(키가 무려 2미터 5센티였다!)의 슈팅으로 이어지는 재빠른 속공에 밀려, 상대 팀은 반칙과 실수가 속출하며 페이스를 잃고 있었다.

몇 분쯤, 인환의 곁에 선 채 홀린 듯 연인의 모습을 좇고 있던 공주님이 다시금 인환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답답하고 짜증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녀와 다름없이 연인에게 홀딱 빠져 있는 자신이었으니, 솔직히 그녀의 존재란 여간 껄끄러운 게 아니었다. 넋을 잃은 채 실컷 연인을 바라보기는커녕 혹시라도 자신의 감정을 그녀가 눈치챌까 태연을 가장하기 바빴으니 말이다.

연인의 농구 시합이라니, 인환으로서도 드문 구경거리였다. 1분 1초가 금쪽이었다. 오늘이 아니면 언제 다시 연인의 저 아름다운 몸짓을 지켜볼 수 있겠는가 말이다!

“……위 여자친구 있죠?”

식당에서의 어떤 여자애와 같은 물음이었다. 주의 깊은 눈으로 공주님을 굽어보니 흥분했는지 흐릿하게 뺨이 상기돼 있었다. 역시 엄청 자존심을 죽이고 묻는 것이겠지만, 인환으로선 곱게 대답해주고픈 기분이 아니었다. 짝사랑에 우는 것은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평소라면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그녀에게 동정심을 품었을 테지만 지금은 어림없었다. 게다가, 섣부른 동정을 바치기엔 그녀는 그 얼마나 완전무결한 모습을 하고 있는가. 정말로 여자로 태어났더라면 인환 또한 그녀와 같은 모습으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올렸을 법한 그런 아름다움이요, 그런 자태였다.

“……네. 있어요.”

상냥하게 대꾸해주자 그녀의 도자기처럼 뽀얀 우윳빛 피부가 설핏 창백해지는 게 보였다. 자연스레 앞으로 모아 쥐고 있던 그녀의 양손이 살짝 떨리는 것도. 몇 번 입술 끝을 핥는 귀여운 혀끝의 움직임에서 그녀가 느끼고 있을 심각한 낙담을 읽을 수 있었다.

양심의 가책 따윈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양심의 가책은커녕 통쾌하기까지 했다. ……내 거야. 아직은 내 거야. 전부 내 거야. 내 연인이야. 넘보지 마. 절대 안 내줘. 안 내줄 거야……. 소리 없는 야유를 창백하고 여린 그녀의 도자기 얼굴에 따귀처럼 갈겨주었다.

“……그…… 그럴 것 같더라…….”

“…….”

“……미팅도 안 하고…… 여자애들 거들떠도 안 보고…… 이쁘게 생긴 앤가요?”

“……네. 꽤 예뻐요.”

“……그렇구나…….”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사귀고 있는 사이죠. 서로 진짜 좋아해요. 없으면 못 살 것처럼 굴죠, 둘 다. 닭살도 그런 닭살 커플이 없어요. 보다보면 정말 밸 꼴린다니까요.”

“…….”

“녀석, 전혀 안 그럴 거 같죠? 워낙 냉정해 보이니까 잘 모르시겠지만, 알고 보면 꽤 상냥하고 속정 깊은 녀석이거든요. 진짜 마음을 주고 있는 사람한텐 간이고 쓸개고 빼줄 정도로 몹시 잘하죠. 잘 챙겨주고, 아껴주고. 글쎄, 마당쇠가 따로 없다니까요?”

“…….”

공주님의 얼굴은 더더욱 창백해져서 곧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너무 심했던가 하고 속으로 뜨끔하긴 했지만 역시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흥분으로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손가락 끝으로 찌릿찌릿 전율이 흘렀다. 자신의 화려 찬란한 거짓말 실력에 오스카상이라도 하사해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꺄아아아아아!!!!!!

응원석에서 다시금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터졌다. 아마추어 게임은커녕 프로 리그에서도 좀처럼 보기 드문 화려한 덩크슛을 연인이 작렬시킨 때문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코트로 시선이 옮아갔다. 상대 팀으로 넘어간 공을 뒤쫓아 부지런히 수비 태세로 들어가는 연인의 모습이 보였다.

옆에선 공주님도 잊은 채, 멍하니 넋을 잃고 연인만 주시했다. 얼굴이며, 가슴팍이며, 등줄기며, 온통 비 오는 듯 땀투성이였다. 짙은 밤색 머리카락은 마치 무스라도 바른 것처럼 가닥가닥 붙은 채, 뛰어가는 동작에 따라 사방팔방 찰랑거렸다. 발갛게 상기된 낯빛은 섹스 때의 그것과 같아, 숨이 막히는 듯한 격렬한 흥분을 느끼게 했다.

아랫배로 뿌듯한 열기가 모여들며 심장이 탱크처럼 요란스레 뛰었다. 단전을 친 화끈한 열기는 이어 얼굴까지 확 끼쳐들었다. 타는 듯한 갈증이 느껴졌다. 수분이 고픈 건지, 연인의 몸이 고픈 건지 판단이 불가능할 만큼 정신이 혼미했다. 아찔한 위기감에 저도 모르게 목을 감싸 쥐며 마른기침을 했다. 가까스로 의식을 추스르고 주변 눈치를 살피니, 다행히 공주님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거의 광란에 가깝게 응원전을 펼치고 있는 방만한 대학생들뿐이었다.

아주 잠깐, 온통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며 죄의식이 느껴졌다. 물론 단 몇 초도 안 될 아주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 즉시로, 자신에게 있어선 어쩌면 지극히 위험한 상대가 됐을지도 모를 강력한 라이벌을 일거에 퇴치해버린 데 대한 만족감이 서둘러 뒤쫓아왔다. 환희에 찬 괴성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미친놈처럼 고래고래 지르고 싶었다. 응원석의 오빠 부대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빨라진 심장의 고동이 좀처럼 제 속도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연인에게로 시선을 가져갔다. 상대 팀 슈팅가드가 오른편 외곽에서 레이업슛을 날렸으나 공은 골대에 맞고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연인과 함께 다른 두 명의 선수가 리바운드를 잡기 위해 튀어 오르는 게 보였다. 아슬아슬한 간발의 차이로, 크고 날씬한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이 도둑처럼 은밀하고 우아한 자태로 볼을 낚아챘다. 선명한 동작 하나하나가 마치 슬라이드 화면처럼 느리면서도 강렬하게 시야로 밟혀들었다. 쿵 하고 마룻바닥을 구르는 발소리가 요란했다. 군함처럼 커다랗고 하얀 연인의 운동화였다. 낡고 낡아 보풀이 몹시 일어난, 저 고딩 시절부터의 애절한 유물이었다. 상대 팀 골대 한 지점만을 쏘아보는 연인의 새빨간 눈시울이 보였다. 집요하고, 단호하고, 강렬한 승리에의 집착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짐승의 눈길이었다. 움찔 몸서리를 치며 저도 모르게 양손으로 가슴을 감싸 쥐었다. 타는 듯한 갈증이 여전히 전신을 사로잡은 채 불길을 뿜어내고 있었다.

텅, 텅, 텅…… 드리블을 하며 연인이 막 하프라인을 넘어 공격 코트로 들어서려는 찰나 요란스러운 벨소리가 체육관 안에 진동했다. 전반전의 끝을 알리는 신호였다. 스코어는 51-34. 후반전을 보지 않아도 팀의 승리는 거의 확실해 보였다. 승리의 주역은, 환호성을 지르며 날뛰는 열혈 응원단원들에 둘러싸여 벤치로 귀환하고 있었다. 패자는 기진맥진한 표정으로 경기장 마룻바닥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그랬다.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상대는 연인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자신 또한 그러할 것이다. 연인과 한 마음 한 몸이 되어 코트를 누볐지만, 그러나 자신은 엄밀히 연인이 아니었다. 언젠가 자신 역시 연인에게 패해 저렇게 기진맥진 마룻바닥에 나뒹굴 것이다.

달리 희망이 있을 까닭이 없었다.

이렇게 순간순간 아무리 천국을 긁어모아도, 희망은 되살아나지 않는다. 그럴 것이다. 연인이 다시금 자신에게 마음을 열어줄 날은 절대로 영영 오지 않는다.

공주님 하나 퇴치했다고 의기양양해 마라, 장인환. 네 적은 공주님이 아니다. 저기 저 집요하고, 완강하고, 단호한 남자. 철벽처럼 고집스러운 네 짐승. 네 연인이자 네 영웅인 저 남자가 바로 적이다. 적이다. 끔찍스러울 만큼 강한 네 적이다!

불편한 다리를 생각하면 무리의 한가운데로 뛰어드는 실수는 하지 말았어야 했는지 모른다. 자신이 가진 장애에 대해서 콤플렉스를 느낄 필요는 없다 해도, 그것이 자신의 핸디캡을 완전히 망각하란 의미는 아닐 것이다.

물론 평소 격렬한 열정과 움직임을 동반하는 스포츠 동아리엔 얼씬도 하지 않았기에, 사태를 미처 예측하지 못한 측면이 없지 않아 있긴 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그 모든 수치스러운 해프닝의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었다.

내 연인이, 내 소유의 남자가, 내가 아닌 뭇 사람들의 마음과 몸에 접촉하고 있었다. 나조차도 손가락 하나 댈 수 없는데, 말 한번 나눠본 적 없는 낯선 이들이 연인의 몸을 떡 주무르듯 주무르고 있었다. 껴안고 있었다. 뽀뽀하고 있었다. 나도 함부로 애정을 표현하지 못하는데, 사랑한다고 말하려면 몇 번이나 고민하고 또 한 끝에 간신히 입 밖으로 토해내는데, 그네들은 너무나 쉽게 연인에게 애정을 쏟아냈다. 감히 예쁘다고 말하고, 멋지다고 말하고,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가슴에 왈칵 응어리가 치밀며 질투의 불길이 타올랐다. 그랬다. 질투심 때문이었다. 자신의 장애에까지 신경이 가 닿기엔, 자신의 가슴은 너무나 유치하고 천박한 질투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을 제치고 연인에게로 가고 싶었다. 한시라도 빨리 다가가, 비록 만지지는 못해도, 다른 이들 또한 함부로 만지지 못하게 밖으로 데리고 나가고 싶었다. 내 것이었다. 아직은 내 것이었다. 전부 내 것이었다. 내 연인이었다. ……넘보지 마. 다신 넘보지 마. 내 거야. 절대 안 내줘. 안 내줄 거야…….

후반전까지 모두 끝나고 경기는 예상대로 예과 B팀의 승리로 끝났다. 스코어는 87-56. 낙승이었다. 꺽다리 센터와 그에 못지않을 또 다른 꺽다리 에이스 가드가 응원단과 선수들과 지도 교수들에 의해 연달아 헹가래 세례를 받았다. 다음은 당연한 수순으로 연인이 격렬한 감정 표현들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헹가래가 쳐지고, 껴안기고, 키스의 비가 쏟아졌다. 기회를 만난 오빠 부대 여학생들의 기세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대단했다. 어쩌면 평상시엔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을 연인의 몸을 그네들의 장난감이라도 된 양 이리저리 굴려대고 있었다. 갑작스레 너무 많은 수의 인파에 포위된 때문인지, 잔뜩 상을 구길 정도로 불쾌해하면서도 연인 또한 사슬처럼 얽혀든 인(人)의 장벽을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초조한 나머지 속이 새까맣게 타는 것 같았다. 어서 빨리 다가가 연인을 끌어내고 싶었다.

팔을 앞으로 뻗어 앞사람의 등을 밀치며 한 걸음 크게 내딛었다. 바닥의 단단한 무언가가 발목에 걸리며 진로를 방해했다. 전깃줄 같기도 하고 현수막 끈 같기도 했지만, 앞뒤를 꽉 매운 인파 탓에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확인할 수가 없었다. 거치적거리는 것을 발부리로 치우기 위해 마비가 있는 다리로 지면을 힘껏 지지했다. 마침 뒤에서 누군가가 자신만큼 재빨리 앞으로 나서기 위해 상체를 강하게 밀어붙였고, 힘이 부친 다리는 그대로 무릎이 꺾이며 몸의 무게 중심을 잃었다. 설상가상으로 인환의 앞에 서 있던 서너 명의 떡대들이 순간적으로 1미터쯤 앞서나갔고, 지지대를 잃은 인환의 몸은 그 즉시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우앗!!!”

“꺄악!!!!!!”

“엄마야!!! 으앗!!!”

“밀지 마! 밀지 마!!! 우와앗∼∼∼∼∼!!!”

“꺄아아∼∼∼∼∼∼!!!”

잠시 동안은 아픔도 느낄 수가 없었다. 엄청난 무게감이 등에 느껴졌다. 자신이 넘어지면서 뒤따라오던 몇몇 오빠 부대와 응원단 남학생들 몇이 도미노처럼 자신의 몸 위로 한꺼번에 쓰러진 때문이었다.

엎드린 채 온몸을 옴짝달싹할 수조차 없었다. 마룻바닥에 짓이겨진 얼굴 위로 누군가의 버둥거리는 상반신이 내려앉아 사정은 몸통과 한가지였다. 호들갑스러운 비명, 웃음소리, 고함 소리, 당혹한 욕설들이 불분명한 의식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박혔다. 그제야 짓눌린 얼굴과 어깨 근처로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어쩐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뜨뜻한 액체가 눈두덩과 뺨을 간질이며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픔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쓰고 있던 선글라스가 깨진 채 얼굴 피부를 짓누르고 있다는 것이 비로소 자각되었다.

조금씩 떠보려던 눈을 도로 감아버렸다. 한쪽 눈꺼풀 위로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각과 함께 가슴이 철렁하며 낭패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흉터가 지면 안 되는데 하고 얼핏 쪼잔한 근심도 뇌리를 스쳐갔다. 욱신거리는 아픔은 시시각각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소리라도 쳐서 도움을 요청해야 하나 하고 겨우 이성적인 사고를 챙기고 있는데 다행히 얼굴과 상반신을 누르고 있던 거대한 짐짝 하나가 느슨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다음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온몸을 내리누르고 있던 무게감이 동시에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고함 소리와 당혹한 외침 소리들은 대신 강도가 세지고 있었다. 아프다며 훌쩍이는 어리광 섞인 여학생의 소리들이 들려왔다.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염려 섞인 푸념들도 꼬리를 물었다. 큰일 났네 하는 탄식, 이럴 줄 알았다 하는 야유, 어디가 어떻게 아프냐는 염려, 멍이 심하게 들 거라는 엄살, 다리가 삐끗한 거 같다는 푸념, 누구누구를 부축해주라는 다급한 외침, 보건실에 가봐야 하지 않느냐는 참견 등등, 너무나 많은 의미의 외침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통에 그 하나하나를 제대로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다만 인환 말고도 다친 학생들이 꽤 있다는 사실만은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소용돌이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는 혼란스러운 의식 가운데 무엇보다도 먼저 걸러진 생각의 갈래는 죄책감이었다. 엄청난 쪽 팔림에 얼굴로 피가 확 몰려들었다. 자신이 넘어짐으로 해서 곤혹스러운 도미노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아아, 젠장. 추태도 이런 추태가 없었다. 다 큰 어른이 남의 잔치에 와서 분위기나 깨고. 연인이 어떻게 생각할까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다들 그리 심한 부상을 입지는 않은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당혹의 와중에도 여전히 하하거리는 철부지들의 쾌활한 웃음소리가 간간이 끼어드는 걸 보면 확실했다. 작은 불상사 하나만으로 승리의 기쁨을 완전히 죽일 순 없었던 모양이었다. 하긴 불상사조차도 저들에겐 즐거움을 배가시키는 드라마틱한 해프닝에 불과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옆에서 웬 여학생이 호들갑스러운 비명을 올렸다. 여학생의 비명을 시발로 다른 몇몇 학생들의 걱정스러운 외침 소리도 들려왔다. 그제야 인환의 상태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얼굴에 끼친 더운 열기가 더더욱 심해졌다. 아아, 제발 아는 체 좀 말아줘! 쪽 팔린 나머지 땅에 머리라도 박고 싶었다.

멀리서 연인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였다. 어딘가 절박한 듯한 외침에 그만 일어나야겠다고 의지를 세웠다. 얼굴로 손을 뻗어 박살이 난 선글라스의 테를 벗어 던졌다. 아끼던 아르마니 선글라스였는데 하고 섭섭한 생각이 스쳐갔다. 마룻바닥에 손바닥을 대고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입이 딱 벌어지는 통증에 모든 동작을 멈춰야만 했다. 너무나 아파 눈물이 찔끔 솟았다. 쓰라린 얼굴의 상처는 댈 것도 아니었다. 통증은 어깨로부터 오고 있었다. 양팔에 힘을 줘야 바닥을 짚고 일어날 텐데 힘을 주기는커녕 상체를 트는 간단한 동작조차 할 수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왼쪽 어깨뼈를 삔 것 같았다.

연인의 외침이 더더욱 가까이서 들려오고 있었다. 눈을 뜨고 싶었지만, 한쪽 눈꺼풀 위로 줄줄 흘러내리는 피 때문에 시도해보기가 겁이 났다.

위에서 누군가의 팔이 양쪽 겨드랑이 틈으로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다. 상반신이 일으켜 세워지고 있었다. 파워풀한 에너지가 느껴지는 손길이었다. 살이 빠졌다곤 하지만 그래도 덩치가 만만치 않은 성인 남자를 볏 짚단처럼 가볍게 드는 이란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뻣뻣하게 굳은 채 여전히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흐느적거리는 몸을 조심스럽게 돌려세운 상대는 이어 인환의 양쪽 허리를 틀어쥔 채 단단한 악력으로 지탱하고 있었다. 누구지……? 막연하게 걸린 호기심이 풀리는 데는 단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신음 섞인 나지막한 욕설이 상대의 입술에서 곧바로 토해진 때문이었다. 강렬하게 맡아지는 그리운 체취에 반사적으로 미소를 떠올리려는 찰나, 다시금 어마어마한 통증이 왼쪽 어깨를 관통했다. 연인의 손가락이 양쪽 겨드랑이를 거쳐 어깨로 이동했기 때문이었다.

“아아아악!!!!!”

“선생님?!!!”

“아파! 아야야!!! 악! 노…… 놔……! 으…….”

“선생님!!!”

“탈구된 거 같은데?!!! 비켜봐, 문위!!! 내가 해볼게!!!”

“손대지 마!!!”

“으앗! 새꺄, 웬 고함이야?!!! 간 떨어질 뻔했잖아!!!”

“내버려둬, 이윤성! 위도 제대로 맞출 수 있어!”

“피 좀 봐! 상처가 많이 난 거 같은데?! 눈은 괜찮은 건가?! 눈은 괜찮은 거지?!”

“피가 많이 나네!!! 심하게 찢어진 거 같어……!”

“일단 보건실로 옮겨라, 문위. 진찰부터 받아야…….”

“보건실 벌써 문 닫았을 텐데요, 교수님?”

“저런! 그럼 빨리 병원으로…… 한데 이 학생은 누구지? 무슨 과야?”

“학생 아니구요…… 문위 고등학교 선배시라는데…….”

“선생님?!!! 눈 좀 떠보세요!!! 눈은 괜찮습니까?!!! 괜찮아요?!!!”

“……일단 병원부터……!”

“탈구된 건 바로 맞추는 게 나아요, 교수님!”

“그렇다고 아무나 함부로 손대는 게 아니야! 일단 부목부터 대고 바로 병원으로 옮겨라.”

“근데요, 교수님. 위 탈구 맞출 줄 알아요. 저번에 수업 때도 한 애가 다쳐서 위가 응급 처치해준 적 있었거든요. 고등학교 때 정확히 배웠대요.”

“……그래? 그러냐, 문위? 배운 적 있어?”

“예. 몇 번 해본 적 있습니다. 괜찮을 테니 맡겨주십시오.”

“……그래…… 그렇다면 뭐…… 허, 참. 그래도 난 좀 걱정인걸…….”

“눈 떠보시라니까요?!!! 선생님?!!!”

중년의 공학부 교수는 여전히 미심쩍은지 줄곧 근심이 담긴 혼잣말을 했다. 연인은 개의치 않는 듯했다. 교수를 상대로 설득하기를 포기한 대신 자신을 향해 단호한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좀처럼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없는 연인이라 약간 쉰 듯한 외침 소리는 낯설었다. 바로 코앞에서 거칠게 뿜어지는 숨결 또한 어딘가 위화감이 들었다. 그립고 익숙한 체취건만, 눈을 감고도 확연히 알 수 있는 연인의 강렬한 수컷 냄새건만, 목소리만으로는 어쩐지 미심쩍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떠 확인하고 싶었지만 줄줄 흘러내리고 있는 뜨뜻한 피가 무서웠다.

“……으…… 괘…… 괜찮으니깐…… 조금…… 여기 벤 거 같은데…….”

뒤에서 누군가의 팔이 뻗어와 양쪽 겨드랑이를 쥐고 부축을 했다. 덕분에 자유로워진 연인의 손이 허리를 틀어쥐는 대신 위로 이동해 양쪽 뺨을 움켜쥐었다. 눈가의 상처를 살피는 듯싶었다. 바로 코앞에서 연인의 거친 호흡이 토해지고 있었다. 자신의 얼굴과 채 10센티도 떨어져 있지 않은 것 같다. 연인이 새된 호흡을 토할 때마다 아릿한 입안의 단내가 고스란히 맡아졌다. 땀내가 섞인 강렬한 체취는 말할 것도 없었다. 황당하고 아프고 쪽 팔린 와중에도 가슴이 몹시 설레었다. 마치 키스하기 직전인 것만 같았다. 달콤하고 낭만적인 상상이 머릿속을 뒤죽박죽 떠돌았다. 다리에 풍선을 매단 것처럼 몸이 붕붕 떠오르는 착각에 전율했다. 마치 스위치가 켜지듯, 온몸의 감각이 연인의 갑작스러운 접속에 자지러졌다. 연인이 만지고 있었다. 자신의 몸을 상냥하고 조심스레 어루만지고 있었다.

“뼈를 맞출 테니까 잠깐만 참아보세요.”

나지막하고 단호한 명령이 떨어졌다. 연기처럼 아련하게 넋을 사로잡고 있던 백일몽이 순간 파도처럼 출렁였다. 눈동자엔 이상이 없다고 판단해선지 연인의 목소리는 평소의 안정적인 톤으로 되돌아와 있었지만, 탁한 쇳소리의 여운은 여전했다. 가까스로 화를 누르고 있는 기색이 역력해서 조금 불안해졌다. 다행히 손수건 같은 것으로 대강 피가 닦여나가 실눈을 뜨고 연인을 훔쳐볼 수 있었다. 땀으로 뒤범벅인 얼굴이 보였다. 격렬한 운동의 자취임에 분명한, 붉게 달아오른 뺨이며 눈시울도 보였다. 너무나 바짝 다가와 있어 표정이나 눈빛을 정확히 살필 수는 없었다. 자신을 삼킬 듯이 응시하는 흑요석처럼 새까만 눈동자만 겨우 인식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참으세요. 금방 끝납니다.”

뺨에 닿아 있던 손가락들이 어깨로 내려갔다. 재차 단호하게 내뱉어지는 연인의 명령이 무얼 의미하는지는 알고 싶지 않았다. 노곤하고 달콤한 백일몽이 더 소중했다. 몸에 닿아 있는 연인의 손길만이 유일한 현실이었다.

“……으…… 하지 마…… 놔…… 으…… 아아아악!!!”

엄청난 악력이 팔과 어깨뼈를 치고 들어왔다. 눈앞에서 번개가 번쩍 내리꽂혔다. 끔찍한 통증이었다. 아픈 곳은 어깨인데 머리를 망치로 두들겨 맞은 것 같은 쇼크가 전신의 신경줄을 타고 순식간에 뻗어갔다. 순간적이었지만, 그 이상으로 압도적인 통증에 저도 모르게 입술이 벌어지며 괴성에 가까운 비명이 터졌다.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연인의 무자비한 손길은 탈구된 두 뼈에만 집중돼 있어, 버둥거리는 사지를 다른 덩치 둘이 틀어쥐며 옴짝달싹 못 하게 했다. 자신이 듣기에도 혐오스러운 단말마의 괴성이 연달아 입술을 타고 터져 나왔다. 한 번에 맞춰지지 않아 연인이 재차 힘을 주었기 때문이다.

결국 두 번의 무자비한 시도 끝에 끔찍한 통증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마치 요술 같았다. 왼쪽 어깨엔 여전히 뻐근한 둔통이 남아 있었지만, 찰나 전까지 무시무시한 통증을 전해주던 자리라고는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였다. 사기꾼에 엄살꾸러기가 된 기분이었다. 까마득히 어린 후배들 앞에서 눈물 콧물 다 쏟고 놔달라고 애걸복걸까지 했으니, 수치도 이런 수치가 없었다. 핏자국 외에도 뺨엔 엄살의 잔재인 눈물얼룩투성이겠지.

“어서 병원부터 가라. 많이 다치지 않은 거면 좋겠는데…… 창일이도 같이 따라가보고.”

“예, 교수님.”

“너희들은 빨리 여기 정리하고! 여학생들 다 내보내! 천천히 질서 있게 하라구!”

“네에!”

“예, 교수님!”

“천천히 내보내, 천천히!!! 차례대로!!! ……새끼들이 말이야, 이게 웬 난리법석이야! 게임 잘 뛰어놓고!”

“예!!! 죄송합니다, 교수님!!!”

“가요. 걸으실 수 있죠?”

“……어…… 어어…….”

조심스레 몸 여기저기를 찔러보며 상태를 살피던 연인이 물어왔다. 고개를 끄덕이자 탈구된 어깨 반대편 팔을 움켜쥐고 부축을 하고 있던 덩치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땀에 푹 젖은 파란색 유니폼을 보니 그네도 바로 조금 전까지 코트를 누비던 선수 중 한 명인 모양이었다. 연인이 눈짓을 하자 뒤에서 부축하던 덩치의 손길도 떨어져 나갔다. 옆에서 자신의 허리를 감싸 쥔 채 걸음을 떼놓는 연인을 따라 몇 걸음 전진했다.

확실하게 확보된 시야로 들어오는 뭇 시선들에 저절로 얼굴이 빨개졌다. 경기장 정리에 들어간 선수들이며 운영진들에 의해 하나둘 쫓겨 나가곤 있었지만, 어깨 너머로 인환을 바라보는 얼굴엔 한결같이 인심 좋은 동정심이 담겨 있었다. 개중에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는 남학생들도 있었다. 확실하게 다리를 저는 모습에 사태를 이해한 듯했지만 그렇다고 흥을 깨버린 데 대한 면죄부는 될 수 없을 터였다. 아아, 이렇게나 쪽 팔릴 노릇이라니! 그저 고개를 땅바닥으로 떨군 채 시선을 피하는 도리밖엔 없었다. 연인의 얼굴을 바라볼 용기 또한 물론 당연히 생길 턱이 없었다.

눈가의 상처에서 다시금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다리가 붕 뜬 듯 시야가 흐릿했다. 자신의 움직임도, 옆에서 무리를 지어 따라오는 발자국 소리도 그저 몽롱하게만 느껴졌다. 광대뼈 부근도 약간 쓰라렸지만 피는 눈썹 꼬리 부근에서 훨씬 많이 번져 나오고 있었다. 연인이 대준 손수건으로 상처 부위를 누르고 있자니, 한쪽 시야가 완전히 가로막혀 좀처럼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어쩐지 어지럼증까지 느껴져서 잠시 비틀거리자, 느닷없이 몸이 번쩍 들어 올려졌다. 연인이 자신을 통째로 안아 든 것이다.

“……아, 저기……!”

여기저기서 여학생들의 신음 같은 탄성이 들려왔다. 파이팅을 외치는 오빠 부대들이었다. 당황한 와중에도 무슨 파이팅이란 말인가 하고 기가 막힌 나머지 혀를 찼다.

“……괘…… 괜찮아, 위야. 거…… 걸어갈 수 있어!”

“중심을 못 잡으시잖아요. 가만히 계세요. 달리 다친 곳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전창일, 너 면허 있어?”

인환의 당혹한 만류를 단칼에 잘라낸 연인이 바로 옆에서 종종걸음으로 따라오고 있던 우량아에게 물음을 던졌다.

“아, 있어. 차 가져오신 건가? 잘됐다. 버스 타고 가긴 그렇고, 여기 택시도 잘 안 잡히니까.”

우량아의 어조는 지금까지 들어본 중에 가장 심각하고 진지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인환의 상처를 걱정해서라기보다는 연인의 서슬 퍼런 저기압 때문이다. 너무나 화려해서 웃음을 자아내는 응원단복에 알록달록 페인팅까지 돼 있는 얼굴로 심각한 표정을 지으니, 인환으로선 지금까지 보아온 우량아의 어떤 익살보다도 더 코믹하게 느껴졌다.

“제일 가까운 병원 알아?”

“글쎄, 신림역까지 나가면 금방 찾을 수 있지 않을까?”

“…….”

“걱정이네……. 피가 멎지를 않잖아. 잘 치료하지 않으면 흉터가 생길지도 모르겠는걸.”

“…….”

“……그래도 천만다행이다. 자칫하면 큰 사고가 날 수도 있었는데……. 하여간 여자애들이 문제야. 화장품 냄새를 떼거지로 맡으니까 새끼들까지 오버해서는…….”

“…….”

시야가 좀 더 밝아졌다. 체육관 밖으로 나온 것 같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어깨에 둘러멘 크로스백이 아래로 축 늘어진 채 괘종시계의 바늘처럼 이리저리 출렁거렸다. 흘러내리는 핏방울 때문에 계속 눈을 뜨고 있기가 힘들었다. 연인의 빠른 걸음걸이 때문인지 탈골됐던 어깨도 계속 삐걱거리며 뻐근한 아픔을 주고 있었다. 한 시간 가까이나 전력투구를 하고서도 어디서 이런 힘이 나오는 걸까, 새삼 연인의 에너지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50킬로가 훌쩍 넘는 장정을 떠안고 있는데. 토해지는 숨결만 약간 거칠어졌을 뿐, 평소보다 훨씬 빠른 연인의 걸음걸이에 옆에서 맨손으로 따라오는 우량아가 더 헐떡거렸다.

“……어디 달리 아픈 곳은 없으십니까? 어지럽다거나 머리가 아프진 않아요?”

“……아니…… 벼…… 별로…… 위야, 이제 진짜 걸을 수 있으니까…….”

“…….”

여전히 화가 잔뜩 들어앉아 있는 연인의 목소리며 어조가 몹시 불안했다. 재차 토해진 내려달라는 부탁의 말에 대한 대답은 완강한 침묵의 거절로 되돌아왔다. 다친 상처보다도 연인의 기분이 더 신경이 쓰인다는 걸 왜 모르는 걸까?

“……우아!!! 멋져, 문위!!! 힘내!!!”

“보디가드 같아!!! 짱이다!!!”

“어떡해∼∼∼. 치료 잘 받으세요!!!”

“빨리 완쾌하세요!!!”

가까이 다가온 발자국 소리와 함께 오빠 부대의 열렬한 성원이 이어졌다. 인환을 걱정한다기보단 연인을 향한 추파의 성격이 분명할 감미로운 격려도 들려왔다. 대단한 여학생들이었다. 아직 흩어지지 않은 몇몇이 연인의 뒤를 졸졸 따라오고 있었다.

“문위, 파이팅!!!”

“아웅, 나도 다치고 시퍼어∼∼.”

“괜찮으실 거예요! 힘내세요!”

“닥쳐!!!!!!”

갑자기 벽력같은 고함 소리가 사방을 진동시켰다. 피크로 치솟은 화를 그대로 폭발시킨 연인의 일갈이었다. 외치는 순간 연인이 걸음을 멈추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 어마어마한 성량에 기절초풍을 하고 말았다. 감미로운 소프라노로 합창을 거듭하던 오빠 부대는 물론, 옆에서 따라오고 있던 우량아까지 순간 걸음을 멈췄을 정도로 경악을 한 것은 물론이었다.

줄곧 감고 있던 눈꺼풀을 들어 연인의 얼굴을 살폈다. 차갑게 일렁이는 새까만 눈동자가 죄 없는 오빠 부대 여학생들을 사납게 노려보고 있었다. 평소 거의 표정이 없는 연인의 얼굴이라곤 도저히 믿기지가 않을 만큼 격분한 모습이었다.

심장이 탱크처럼 요란스레 뛰었다. 눈가의 상처를 누르고 있던 손가락이 저절로 부들부들 떨렸다. 여학생들이 아니라 인환 자신이 연인의 분노를 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연인의 무시무시한 눈동자가 노려보고 있는 상대란 그녀들이 아닌 자기 자신 같았다. 자신이었다.

찬물을 끼얹은 듯한 침묵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살기등등한 연인의 눈빛에 그 자리에서 얼음땡이 돼버린 여학생들의 얼굴은 아예 잿빛이었다. 뛰어난 외교관 기질의 우량아조차 벙하니 입을 벌린 채 할 말을 잃은 모습이었다.

영원처럼 정지된 것 같던 시간이 비로소 흐름을 재차 시작했다. 여전히 사납게 얼굴을 구긴 채, 연인이 다시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창백하게 질린 채, 혹은 새빨갛게 얼굴을 붉힌 채 얼음땡이 된 여학생들은 더 이상 연인을 따라오지는 않았다. 그녀들로부터 10여 미터쯤 떨어졌을까, 연인의 몰상식과 비신사적인 행태를 규탄하는 그녀들의 원성이 흐릿하게 들려왔다. 물론 연인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사랑이 깊으면 배신도 크다 했거늘, 머잖아 서울대 여학생들 대부분의 적이 될 연인이 안 봐도 비디오였다.

“……좀 참지, 왜 그랬냐? 쨍알대는 게 귀여워 죽겠더만. 짜식이 아주 배가 불렀어요, 불렀어.”

“…….”

“……여자애들 책임도 아니고…… 그냥 사고일 뿐이잖아. 재수 없어서 그런 걸 어떡하냐. 다행히 선배님도 많이 다치신 것 같지 않으니까…….”

“왜, 책임이 아냐?! 개떼들처럼 몰려들어서 이렇게 된 거 아냐?! 그리고 다친 사람을 앞에 두고 저게 할 짓이야?! 다들 제정신인 계집애들인가?!”

거듭 토해지는 사나운 일갈에 성격 좋은 우량아도 더 이상은 대거리를 하지 않았다. 당장은 무슨 말로도 연인의 화를 누그러뜨리기 힘들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차를 주차해둔 정문 근처까지 오자 연인이 안고 있던 팔을 풀어주었다. 여전히 바닥이 좀 흔들리고 있었지만 정신은 한결 맑아진 것 같았다.

“키 주세요.”

연인의 명령이 떨어지자, 재킷을 체육관 바닥에 버려두고 온 것이 비로소 기억났다. 차키는 재킷 호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더듬더듬 사정을 말하자 연인의 눈이 우량아를 향했다. 가져다줄래? 하는 구체적인 부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곧바로 체육관을 향해 달음박질을 시작한 우량아는 2∼3분 만에 재킷을 들고 되돌아왔다. 크림색 재킷은 입고 있던 바지와 마찬가지로 먼지투성이가 돼 있었다.

호주머니를 뒤져 차키를 건네자, 우량아가 미끈한 BMW의 차체를 훑어보며 길게 휘파람을 분다. 선배님, 부자시네요 하는 애교 섞인 감탄과 함께. 운전석으로 들어가 앉는 우량아를 따라 인환을 뒷좌석에 밀어 넣은 연인 역시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자 차가 출발했다.

몇 분 만에 도착한 신림역 사거리에서 병원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얼핏 눈에 들어오는 전문 병원들을 제치고 연인이 택한 곳은 5층짜리 건물 하나를 통째로 쓰고 있는 자그마한 개인 종합 병원이었다. 외과로 가야 할지, 성형외과로 가야 할지 망설이던 두 사람의 예비 의사로선 당연한 결정인지도 몰랐다.

일단 응급실로 들어가 접수를 마치고 치료를 받기까지는 의외로 꽤 시간이 걸렸다. 눈두덩 아래 광대뼈 부근도 다섯 바늘을 꿰매야 했고, 그보다 심한 눈썹 꼬리 부근은 무려 열네 바늘이나 꿰매는 중상이었던 때문이다. 인턴이 상태를 살피곤 성형외과 전문의가 와 바느질을 해주었다. 상반신 엑스레이까지 찍어보았지만 다행히 탈구되었던 어깨뼈 이외에 또 다른 뼈의 외상은 없었다. 주변 인대의 손상도 경미해서, 연인은 응급조치를 잘했다는 의사의 칭찬을 받았다(물론 그래도 다음부턴 함부로 치료를 시도하지 말고 즉시 병원부터 오라는 잔소리 역시 빠트리지 않았다). 어깨뼈엔 당분간 수시로 냉찜질을 하라는 조언과 함께 항생제와 소염제 처방을 받고 퇴원을 하니, 병원 문밖으론 해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저녁 7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여전히 우스꽝스러운 응원단복을 입은 채로 얼굴에서 페인팅도 지우지 않은 우량아가 병원 주차장에서 연인과 인환을 맞아주었다. 학교로 먼저 돌아가도 됐으련만 30분이 넘게 기다려준 것도, 연인의 서슬 퍼런 저기압을 묵묵히 견뎌준 것도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화 좀 풀린 모양이네요, 짜식?”

“……아, 네…….”

운전할 수 있다는 인환의 만류를 사양하며 다시 운전대를 잡은 우량아가 쾌활하게 말을 건넸다. 얼굴 상처 이외엔 달리 다친 곳이 없는 인환의 상태에도 안심한 듯했고, 무엇보다도 기분이 많이 누그러진 연인의 모습에 본래의 익살꾸러기로 돌아갈 결심을 굳힌 모양이었다. 백미러를 통해 눈이 마주친 우량아의 얼굴은 활짝 웃고 있었다.

“헤헤, 말씀 낮추세요. 까마득한 후배인데요, 선배님.”

“……그…… 럴까?”

“하여간 녀석이 화내는 거 처음 봤네요. 고함지르는 것도요. 생전 감정을 드러내지 않을 타입일 줄 알았죠. 근데 녀석도 화를 낼 줄 아는군요. 그것도 되게 무섭게요. 아이고, 아까는 내가 다 얻어맞는 줄 알았습니다.”

“…….”

“너 이제 큰일 났어, 인마! 내일부턴 여학생들이 단체로 너 따 시키려 들 거다. 폭력 파쇼에 싸가지 마초라고.”

“…….”

“하여간에 배가 불렀어요, 배가. 아무리 짜증이 나도 그렇지. 표정 관리를 그렇게 못 하냐, 그래? 엉? 이 성격 좋은 전창일을 그렇게 좋아해줬어봐! 씨바, 나 같으면 한 달 만에 하렘 하나 꾸리고 만다!”

“…….”

“헤헤, 녀석이 선배님 되게 좋아하는가 봐요. 그쵸?”

두근…….

“어떻게 친해지셨는지 궁금하네요. 저 녀석 진짜 차갑잖아요.”

두근…… 두근…… 두근…….

“전 녀석이 친구 하나 없을 줄 알았어요. 단짝은커녕 그저 표면적으로 어울리는 애들도 별로 없을 줄 알았는데…… 근데 아니네요.”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정말 형제처럼 가까워 보이세요. 후후, 선배님이 위험에 처하면 목숨이라도 걸 것 같은걸요? 아까도 선배님 못 일어나실 때 녀석, 완전 사색이 돼서는…….”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부럽네요. 저도 친구는 많지만 그 정도로까지 의리 있는 녀석은 별로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고딩 때도 공부만 파느라…….”

“어딜 가는 거지? 체육관 쪽이 아니잖아!”

연인의 날카로운 일갈이 우량아의 수다를 멈추게 했다. 차는 어느새 서울대 정문을 지나 오른쪽 순환 도로로 빠지고 있었다.

“으악!!! 미안!!! 그만 버릇이 돼서…… 으하하, 수업 끝난 지가 언젠데…….”

우량아는 좀 더 직진한 다음 비교적 넓은 공터가 나오자 유턴을 해서 다시 체육관 쪽으로 되돌아갔다. 차가 멈추고, 먼저 내린 연인과 우량아만이 체육관 안으로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였다. 터질 것처럼 두근거리는 심장과,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흥분으로 혼미해진 넋은 감히 연인의 뒷모습조차 좇을 엄두를 못 냈다.

진녹색의 관악산 자락 위로, 주홍빛으로 변한 하늘이 보였다. 아름다웠다. 얼마 후면 검붉은 색으로 변해 점점 밤의 장막 속으로 삼켜질 아름다움이었다. 마취의 여운이 쓰린 아픔과 함께 조금씩 부어오르기 시작하는 왼쪽 눈두덩에 여전한 이물감을 주었다. 눈가로 손을 가져갔다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들에 꿰맨 상처가 스치고 말았다. 찌릿찌릿한 아픔이 지나갔지만 인환은 입술 끝을 말아 올린 채 저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녀석이 선배님 되게 좋아하는가 봐요…….

천국이 다시 보이고 있었다.

―……정말 형제처럼 가까워 보이세요…….

도저히 믿을 수 없지만, 그러나 의외로 천국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까이 다가와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절대로 보일 것 같지 않던 희망이 저 앞에서 찬란히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선배님이 위험에 처하면 목숨이라도 걸 것 같은걸요…….

……그런가? 다른 사람 눈에는 그렇게 보이나? 혹시…… 혹시…… 너무나 열심히 연인을 보느라 바빠, 정작 보아야 할 연인의 진심은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가슴의 고동은 여전히 빠르기만 하고, 숨 또한 더더욱 가빠지기만 했다. 조금이라도 떨림이 가라앉을 것 같아 양손을 마주 쥐어보지만 역부족이었다.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들고 차 밖으로 나왔다. 손가락의 떨림 탓에 라이터는 좀처럼 제 위치를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일렁이기를 반복했다. 겨우 불이 붙은 담배를 부지런히 빨아들였다. 한 개비를 순식간에 다 피우고 두 개비째 물 무렵이 되니 간신히 흥분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천국의 기분은, 그러나 여전히 넋을 사로잡아 전신을 노곤한 열락에 빠트리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가장된 천국이 아니었다. 억지로 이끌어낸 천국이 아니었다. 천국의 순간이다 하는 판단조차 확실히 내릴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들떠서 거의 광란에 가까운 열락을 선사해주고 있었다.

두 개비째를 거의 다 피울 무렵, 체육관 정문에서 연인이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주홍색 노을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가까이 다가오는 연인을 홀린 듯 응시했다. 파란색 민소매 유니폼 대신 오늘 자신이 사준 베네통의 최신 유행으로 도배가 되어 있는 근사한 ‘모델’이었다. 시원한 바다색의 반팔 풀오버와 느슨하게 골반에 걸쳐지는 새하얀 스트링 팬츠 자락이 연인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이리저리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허리선에서 끊긴 짧은 풀오버 자락은 연인이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빗어 넘길 때마다 늘씬한 근육으로 뭉친 아랫배를 살짝살짝 보여주고 있었다. 그때마다 드러나는 오목하게 파인 배꼽이 소름이 끼칠 만큼 선정적이었다. 여전히 땀에 젖어 가닥가닥 붙어 있는 야성적인 머리카락은 부러 무스라도 바른 것마냥 화려한 옷차림과 기가 막힐 정도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내내 붉은 기를 띠고 있던 낯빛은 어느새 본래의 황금빛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격렬한 운동의 뒤끝이라거나, 자신을 안고 병원으로 달려간다거나 하는 과격한 움직임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어느새 서늘하게 내려간 기온 탓이리라.

느지막이 귀갓길에 오른 듯한 근처의 몇몇 사람들이 어김없이 연인을 힐끔거리며 지나갔다. 남녀 불문, 연령 불문이었다. 청바지 차림의 남학생들도, 머리가 하얗게 센 슈트 차림의 교수들도, 해맑은 모습의 여대생들도 다르지 않았다.

“담배요…….”

코앞까지 다가온 연인이 느닷없이 손을 뻗어 입에 물려 있던 자신의 담배를 가져갔다. 몽롱하게 백일몽에 취해 있던 정신이 비로소 화들짝 깨어났다. 연인의 손에서 비벼지고 있는 담배를 보니, 과연 필터 거의 가까운 곳까지 타들어간 꽁초 수준이었다.

자신을 굽어보는 고요하고 담담한 남창의 시선에 얼굴로 화끈한 열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넋을 잃은 채 연인을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을 연인이라고 모를 리 없었다. 새삼 부끄러울 일은 없지만, 자신의 뻔뻔스러운 기대감까지 읽혔을까 겁이 났다. 희망이 보인다고, 어쩜 연인이 다시 자신을 좋아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천국의 기대로 기뻐 날뛰는 터무니없는 작태를 알고 기막혀할까 무서웠다.

“……그…… 그럼 집에 갈까?”

허둥지둥 운전석 문을 여는데 왼쪽 팔꿈치에 조심스러운 악력이 느껴졌다.

“정말 운전할 수 있으시겠어요? 어깨도 그렇고, 눈도 마취 풀리기 전까진 시력에 지장이 있을 텐데요?”

살피는 듯한 시선이 얼굴이며 어깨 근처를 핥고 지나간다. 걱정이 담겨 있음이 분명한 말투요, 목소리여서 천국에 오른 듯한 기고만장한 기분이 온몸을 짜릿하게 점령했다. 마치 오르가슴에라도 오른 것 같았다.

“괘…… 괜찮다니깐…… 고작 얼굴 좀 긁힌 거 같고…… 어깨도 참을 만한데 뭘…….”

해바라기 같은 웃음으로 활짝 피어난 얼굴엔 숨길 수 없는 환희가 드러나 있을 터였다. 잠시 미심쩍은 눈빛을 했을 뿐 연인은 자신의 명랑한 활기를 믿기로 한 모양이었다. 운전석에 자리를 잡는 자신을 따라 얌전히 조수석에 오르더니 안전벨트를 매는 연인이다.

“……저녁 먹고 들어가자. 배 많이 고프지?”

“…….”

“뭐가 좋을까? 역시 한식이 좋겠지?”

“…….”

“테헤란로에 한식 맛있게 하는 집이 있거든. 네 마음에도 들 거야.”

“…….”

여전히 자신 혼자만 앵무새처럼 떠들고 있지만 개의치 않았다. 연인의 여전히 완강한 침묵도 자신의 천국을 몰아낼 수는 없었다. ……미움받고 있는 게 아니라 미워하는 척하고 있는지도 몰라…… 정말 그런지도 몰라…… 왜 아니겠어……? 그렇게 좋아해주었었는데 하루아침에 마음이 싹 바뀔 수가 있을까……? 그야…… 그야 많이 밉기는 하겠지만…… 미워하는 것도 사실이긴 하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바보처럼 비실비실 웃음이 나와서 참을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연인이 자신의 웃는 얼굴을 훔쳐보고 화를 낼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운전하는 내내 정면만을 고집스레 응시하는 연인의 버릇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평소라면 연인의 무정함에 가슴이 시렸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조차도 연인의 자신에 대한 호감의 증거처럼만 여겨졌다).

배가 고팠다. 왜 이렇게 시장기가 느껴지는지 이상할 지경이었다. 밥 두세 공기도 너끈히 해치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차는 어느새 강남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생각해둔 한정식 식당이 조만간 나타날 것이다. 마취가 풀려가며 따끔따끔 아픔을 주고 있는 눈언저리도, 핸들을 돌릴 때마다 욱신거리는 왼쪽 어깨 관절도 마냥 기분 좋게만 느껴졌다. 영광의 상처였다. 연인의 변함없는 우정을 재확인할 수 있게 해준 소중하디소중한 상처였다. 어째서 좀 더 아프지 않은 걸까 하고, 내심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영광의 상처라면 좀 더 아파야 마땅했다. 차라리 흉터라도 지게 치료를 게을리 해볼까 하고 조금 위험한 음모도 꾸며보았다. 물론 그 방법은 별로 유익한 대가가 아니라는 데 생각이 미쳐 곧바로 포기했다. 고통이야 얼마든지 참을 수 있지만, 얼굴이 여기서 더 미워지면 연인의 미움 역시 더 깊어질지 모르는 노릇이었다.

차가 테헤란로로 접어들기 위해 우회전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회를 놓칠세라 변태처럼 힐끔거리며 연인의 프로필을 훔쳐보았다. 그림처럼 아름답고 섹시한 콧날과 입술과 눈매에, 아랫배 쪽으로 욱신 하며 짜릿한 쾌락이 스쳐 지나갔다. 당장이라도 만지고 싶은 욕구로 핸들을 쥔 양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물론 참아야 한다. 참을 수 있었다.

파란 신호등이 켜졌다. 의기양양, 핸들을 꺾는 자신의 오른팔이 문득 몹시 강인해 보였다. ……나갈나갈칭. 나갈나갈쵸. 나갈나갈 친친 쵸쵸쵸……. 예과 B팀 응원단의 구호가 귀에 쟁쟁했다. 마치 인환 자신을 향한 파이팅 구호이기라도 한 듯, 가슴이 마냥 두근두근 뛰었다.

……나갈나갈칭! 나갈나갈쵸! 나갈나갈 친친 쵸쵸쵸! 나가자, 싸우자, 예과 B!!! 훌라훌라 예과 B, 야!!! 나갈칭! 나갈쵸! 나가자, 싸우자, 장인환!!! 훌라훌라, 장인환, 야!!!!!!

식사를 마치고 성북동 아틀리에로 돌아오니 밤 9시가 넘어 있었다.

식욕이 이끄는 대로 양껏 먹은 탓에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속이 거북했다. 물론 후회는 하지 않는다. 과연 몇 달 만에 먹어본 맛있는 밥인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했으니 말이다.

차를 주차시킨 후 대여섯 개쯤은 될 쇼핑백들을 양손 가득 들고 안으로 들어가니, 경비 아저씨가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왔다. 요즘 늘 그렇듯이, 연인과의 관계를 확연히 짐작하고 있는 듯한 거리감 있는 태도요 웃음이었다. 모르는 척 형식적인 답례를 던지고 집 현관 앞으로 걸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열쇠를 딸 생각도 앉은 채 자신을 기다리고 선 옹고집쟁이 연인이, 양손 가득 움켜쥔 쇼핑백들을 서둘러 받아 든다.

“절 부르시죠. 탈구된 어깨 쪽은 되도록 쓰지 않는 게 좋습니다.”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린 채 딱딱한 잔소리를 던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게 열쇠를 따지도 않을 바엔 왜 먼저 들어가, 들어가길. 선물들에 대해선 까맣게 잊은 건지, 뒷좌석의 수북한 쇼핑백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먼저 빌라 안으로 사라졌던 연인에게 속으로 불만을 던져본다. 말이 불만이지, 입가로 연신 번지는 자신의 웃음을 보면 그저 형식적인 투정에 불과한 것 같다. 하! 연인에게 투정을 낼 정도로 기분이 들떠 있는 자신에 새삼 놀라고 만다. 너무 기대하는 거 아냐? 내지는 괜히 헛물켜는 거면 어쩌려고 그래? 따위 위험스러운 경고는 돌아다볼 생각조차 않는 자신 또한 한가지다.

생각하고 싶지 않다. 경고를 가장한 다른 불길한 가능성 따위 단 1분 1초도 뇌리에 떠올리고 싶지 않다. 그저 이 놀라운 기쁨에 마냥 취하고 싶을 따름이다. 도대체 이게 몇 달 만이란 말인가. 도대체 그 몇 달 만에 자신은 진심으로 행복에 겨운 웃음을 짓고 있단 말인가. 뻔뻔스럽지 않느냐고?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 아니냐고? 제기랄, 다시 지옥에 떨어지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그만이다!!!

산더미 같은 쇼핑백들이 부담스러운 듯, 여전히 조금 미간을 구기고 있는 연인을 향해 생글 웃어준 다음, 잠금 장치의 비번을 눌러 집 안으로 들어갔다.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한 일은 음악을 튼 것이었다. 턴테이블에 이미 걸려 있었던 존 레논의 「Imagine」이 아틀리에 가득 퍼졌다.

“……내일은 꼭 잊지 말고 가져가야 해, 위야? 기분 나쁘다고 안 입고 다니는 거 아니지?”

자신의 뒤를 따라 느릿느릿 움직이는 연인에게 다짐을 주었다.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거실 소파 위에 쇼핑백들을 내려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주에 만날 때도 꼭 입고 오고. 연회색 슈트 있지? 단추 하나 달리고 바지 통 좁은 그거. 그거 입고 와봐, 위야. 진짜 근사할 거야.”

어딘지 붕 뜬 듯한 자신의 태도가 기묘해 보였는지 연인의 시선이 심상찮다. 살피는 것 같기도 하고, 황당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조금 걱정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봤자 여전히 철통 같은 무표정이라서 정확히 속내를 읽어 내릴 수는 없다. 그냥 대충 두들겨 맞혀서 그렇다는 얘기다. 외상은 없지만 혹시 머리라도 다친 게 아닌가, 의심하는 기색인 듯해서 웃음이 나왔다. 킬킬거리며 터뜨리는 팔푼이 웃음을 보더니 연인의 미간이 조금 찌그러진다. 아! 저건 확실히 예전의 ‘쪼잔 무표정’에 많이 가깝다. 뭔가 마음에 안 들거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 있어 삐질 때는 늘 저런 표정을 지었었다.

“……먼저 씻어도 될까요? 땀을 많이 흘려서 좀 불쾌하군요.”

여전히 키들키들 원인 모를 웃음을 방실거리니 신경을 끊기로 작정했나 보다. 딱딱한 어조로 밉살스럽게 물어오는 연인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자신 역시 적잖이 땀을 흘린 날이라 샤워가 아쉬웠지만 연인만큼 급하랴 싶었다.

대꾸가 떨어지자마자 침실에서 파자마를 들고 나와 곧바로 욕실로 들어가는 연인의 모습을 힐끔힐끔 훔쳐보았다. 물론, 자꾸만 히죽거리는 바보 웃음을 그가 보지 않도록 최대한 몸을 사리면서. 흐릿하게 들려오는 욕실에서의 물소리와 존 레논의 목소리 중 어느 게 더 감미로운지 모르겠다. 연인과 함께 있다는 산 증거인 물소리도 천국이고, 존 레논도 천국을 노래한다. 둘 다 천국의 음색이라는 것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오디오에선 어느새 다 돌아간 「Imagine」 대신 「Crippled inside」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존의 노래야 다 좋지만 그래도 지금은 오직 천국의 노래만을 듣고 싶다.

주야장천 「Imagine」만 흘러나오게 버튼을 누른 다음 다시 처음부터 재생을 시켰다.

Imagine there’s no heaven…… It’s easy if you try…….

……천국이란 없다고 생각해요……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흙구덩이에라도 빠진 것처럼 먼지투성이가 된 바지와 재킷을 벗은 다음 편한 하늘색 트레이닝팬츠와 새하얀 면 티로 갈아입었다.

마취가 완전히 풀려 그야말로 본격적으로 쑤시기 시작한 얼굴을 상기하고, 처방해온 약을 기분 좋게 먹어주었다. 항생제라 역시 뒷맛이 쓴 게 장난이 아니다. 앗싸. 달콤한 딸기 몇 개를 입가심으로 먹어주는 건 자신의 혀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는감? 냉장고 문을 열자마자 달려드는 서늘한 기운도 그저 마냥 기분 좋기만 한걸?

연인이 욕실에서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멋들어진 골반 스트링 팬츠와 바다색 풀오버를 팔에 건 연인은 그에 비해 좀 멋이 떨어지는 청회색 파자마를 걸치고 있었다. 파자마 역시 백화점을 뒤져 고르고 골라 사준 최고급 브랜드지만 외출복만큼이야 멋지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 아까워라. 뭐, 하긴 연인이야 뭘 입어도 그림인 아도니스가 아니더냐. 여전히 보기만 해도 눈이 이리 황홀한 것을, 너무 욕심 부리지는 말자. 

기특한 생각을 곱씹으며 연인과 바통 체인지를 해서 욕실로 들어갔다. 기분이 좋은 김에 허브향이 물씬 풍기는 에션셜 오일을 욕조에 듬뿍 넣고 거품 목욕을 시도했다. 욕실 가득 들어찬 허브향이 좋아서 숨을 깊게 들이쉬며 이런저런 통증으로 노곤해진 몸을 욕조에 묻었다. 어깨에 감긴 압박 붕대며, 퉁퉁 부어오른 눈가의 상처가 신경 쓰였지만, 그럭저럭 참을 만했다.

똑똑.

느닷없는 노크 소리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얼굴에 물 닿게 하지 마세요, 선생님. 상처에 안 좋습니다. 어깨에 감아둔 붕대도 풀지 마시고요. 완치될 때까지 조심하지 않으면 상습적으로 탈구될 수도 있습니다.”

문 밖에서 싹수없을 정도로 딱딱한 어조의 명령이 떨어진다. 철렁 내려앉았던 심장은 이번엔 요란스러운 소리가 들릴 것처럼 빠른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아무리 냉담하고 건방진 말투지만 저건 영락없는 자신에 대한 염려의 소리였다. 아아,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다!

“……어…… 어, 응…… 그럴게, 위야.”

목욕을 끝내고 밖으로 나가니, 연인은 자신의 작업대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방해가 안 되게 살금살금 가까이 걸어가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픈, 엄청난 두께에 온통 깨알 같은 영어가 즐비한 토플 교재다. 그렇게 격렬한 운동으로 하루를 보내고도 쉴 생각을 않는 괴물이라니 싶어 또 속으로 투정을 했다. 좀 흐트러질 때도 있어봐라. 이 지독하게 성실한 내 연인아. 내 영웅아!!!

연인이 숙제나 공부를 시작하면 자신이 할 일이라야 빤하다. 연인을 모델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역시 방해가 될까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인 채 뒤로 물러 나와, 소파 구석에 처박힌 스케치북을 펼쳐 들었다.

거의 마른 듯했지만 아직 축축한 물기가 느껴지는 암갈색 머리카락이며, 약간 측면을 보이는 뚜렷한 이목구비며, 샤프펜슬을 쥔 아름다운 손가락, 그리고 천천히 책장과 노트를 뒤적이고 있는 차분한 팔의 움직임들을 하나하나 쫓아간다. 등을 반듯이 펴고 앉은 꼿꼿한 자세며, 그럼에도 유연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늘씬한 덩치를 화폭에 담는다. 부드러운 면 파자마의 하늘거리는 흐름은 바람의 묘사로 대신해본다.

사실적인 세밀화는 하도 많이 해서 이젠 좀 질린 상태다. 요즘 연인의 얼굴이며 몸은 거의 표현주의 기법으로 넘어가 있다. 이대로 가다간 60년대풍 앵포르멜이나 추상표현주의로까지 진화하게 될지 모른다. 연인이 자신의 작업에 손톱만큼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 몹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초상화랍시고 묘사된 자신의 모습을 봤다간, 놀라기까지는 않더라도 꽤나 불쾌해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프란시스 베이컨 풍으로 분해되고 단순화된 형태는 그렇다 쳐도, 일반인들이 보기엔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만큼 한결같이 야하고 관능적인 분위기가 난무하는 그림 일색이다. 딱 보기에도 포르노나 춘화도를 연상시키는 데다, 더 나쁜 건 그게 엄청 리얼하게 다가온다는 거다. 차라리 포르노야 그 비현실적인 장르의 특성상 그저 웃고 넘어간다 치지만, 역시 본격 예술은 충격의 강도에 있어 판타지완 비교할 수가 없다.

“통증은 견딜 만하십니까?”

두근…….

어느새 작업에 깊이 빠져들어 있었던가 보았다. 뻐근한 어깨 통증도, 바늘로 쿡쿡 찌르는 것만 같은 눈가의 아픔도 까맣게 잊을 정도였으니 연인의 기척을 자각했을 까닭이 없다. 혼비백산해서 고개를 들자, 책을 덮은 채 연인의 고요한 눈이 자신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어…… 응. 괜찮아, 위야.”

“다행이군요. 안 주무십니까?”

“……어……? 어, 아니. 자야지. 너…… 너도 잘 거야?”

“예.”

작업 중이던 스케치북을 부랴부랴 치우며 헐떡이듯 되묻자, 담담한 대꾸가 돌아온다. 심장이 미친 듯이 북을 치고 있는 것만 같다.

잘 거라는 연인의 선언이 사랑을 나누자는 의미로 들리니 확실히 자신은 가슴에 바람이 잔뜩 들어간 게 틀림없다. 외교관 기질의 동기가, 듣기 좋으라고 한 것인지도 모를 입에 발린 소리에 필요 이상으로 의미를 두는 게 아닌가 싶다. 지난 한 달간과 별다를 게 없는 연인의 서늘한 태도요, 표정이건만 자신은 어째서 이렇게까지 심하게 동요를 하고 있는가. 기대를 하는가.

……하지만 기뻐……. 너무 기뻐……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어……. 정말 몇 달 만에 다시 숨을 쉬는 기분이야…… 다시 살아난 기분이야……. 그냥 조금만 더 기뻐하면 안 돼? 진짜 천국 같은데 좀 착각하면 안 되나……? 자아비판의 소리는 다시금 비굴한 자기변명의 유혹에 굴복하고 만다. 오디오에선 여전히 존 레논이 천국을 노래하고 있었다.

주섬주섬 작업대 위의 책과 노트를 챙겨 책 배낭에 넣는 연인을 쫓아 자신도 부지런히 잘 준비를 했다. 아직 많이 아쉬운 존 레논의 오디오를 끄고, 욕실로 들어가 오줌을 누고, 행여나 연인이 볼까 봐 작업했던 스케치북을 선반 깊숙이 쑤셔 넣고, 마지막으로 침실로 들어가 파자마로 갈아입었다. 벗어둔 실내복을 콘솔 위에 개켜두고 있는데 연인이 들어왔다. 움찔 긴장해서는 얼굴이 빨개졌다. 엉큼한 속내를 들킬까 봐 연인의 얼굴은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다. 오늘 밤은 다 잤다는 암담한 절망을 씹으며 비칠비칠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갔다.

“잠깐만요, 선생님.”

두근…….

막 몸을 눕히려는데 다가와 박힌 연인의 일갈은 정말 살인 무기와 다르지 않았다. 아아,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다 못해 짜부라지는 것만 같다.

“……왜…… 왜애……? 왜 그러는 건데?”

긴장으로 삑싸리를 타는 목소리가 느껴지지만, 그에 신경 쓸 경황이 아니었다. (참으려 해도 참아질 수 없는 자율 신경의 결과인) 벌겋게 달궈진 얼굴로 마지못해 연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침대 가에 선 채, 연인은 말짱 담담한 남창의 사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상처 좀 보겠습니다. 어깨도 자기 전에 한 번 찜질을 해둬야 할 거 같고요.”

허파에서 바람 빠지는 듯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순식간에 긴장이 탁 풀리는 바람에 한동안은 생각의 갈피도 잡을 수가 없었다.

멍하니 연인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는데, 연인이 천천히 침대 위로 올라서더니 마주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제야 연인의 손에 들린 두툼한 타월 뭉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얼음을 가득 채운 비닐 팩이 담긴 타월이었다.

얼떨떨한 얼굴로 타월만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뻗어온 연인의 양손에 또 한 번 흠칫 놀라고 말았다. 자신의 양쪽 뺨을 움켜쥔 채 연인의 얼굴이 바짝 다가들었기 때문이다. 10센티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자리한 뚜렷한 이목구비에 심장이 또 극심한 난동을 일으켰다. 아아, 안 돼……. 뒷골을 스치고 지나가는 낭패감에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연인은 바로 몇 시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눈가를 살피고 있었다. 바로 코앞에서 연인의 잔잔한 호흡이 토해지고 있었다. 연인이 호흡을 토할 때마다, 민트 향의 치약 냄새가 뒤섞인 달콤한 단내가 고스란히 맡아졌다. 늠름하고 단단한 몸에선 몇 시간 전의 땀내 섞인 강렬한 체취 대신, 라벤더의 샤워 코롱 냄새가 은은하게 풍겨오고 있었다. 가슴이 몹시 설레었다. 마치 키스하기 직전인 것만 같았다. 달콤하고 낭만적인 상상이 머릿속을 뒤죽박죽 떠돌았다. 다리에 풍선을 매단 것처럼 몸이 붕붕 떠오르는 착각에 전율했다. 마치 스위치가 켜지듯, 온몸의 감각이 연인의 접촉에 자지러지고 있었다. 꿈이 아니었다. 연인이 만지고 있었다. 자신의 몸을 상냥하고 조심스레 어루만지고 있었다.

긴장이 극에 달해 눈을 더는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파르륵 떨리는 눈꺼풀을 질끈 감은 채 연인의 부드러운 접촉을 견뎠다. 착각하지 말라고, 거듭거듭 정신없이 자신을 질책했다.

……어느 날인가 당신도 깨닫게 되리란 걸 알아요…… 그러면 모두 하나가 되어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오디오를 끈 게 확실하건만, 존 레논은 여전히 어디선가 천국을 노래하고 있었다. 그 어디란 자신의 귓속인 것 같았다. 아니, 어쩜 미친 듯이 속도를 높이고 있는 자신의 심장 속일지도 몰랐다.

뺨을 쥐고 있던 연인의 손가락이 아래로 내려갔다. 천천히 파자마 단추를 푸는 조심스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마지막 한 개를 남기고 모두 풀린 단추 탓에 잠자리 날개보다도 더 힘이 없을 실크 파자마의 상의는 단숨에 허리 아래로 뚝 떨어지고 말았다. 양쪽 팔꿈치에 소매가 걸려 있어 완전히 벗겨지진 않았지만 그게 차라리 더 야하게 보일 터였다. 한쪽 얼굴은 새까만 실밥이 고스란히 보일 만큼 바느질이 된 채 퉁퉁 부어 있고, 또 한쪽 어깨는 푸르딩딩한 압박 붕대가 칭칭 감겨 있으니 야해 봤자 얼마나 야하겠냐마는, 그래도 부끄러운 기분은 여전했다. 물론 그 부끄러움만큼 달콤하고 몽롱한 상상이 배가되는 것 또한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한 손으로는 팔꿈치 안쪽을 힘 있게 쥐고 있고, 나머지 한 손으론 탈구됐던 위치를 살피듯 조심스레 어루만지던 연인이 이윽고 넓게 펴진 타월을 어깨 위에 내려놓았다. 타월로 둘러싸여 있다고 해도 역시 얼음주머니인지라 피부에 닿자마자 설핏 몸서리가 쳐졌다. 몽롱했던 감각도 기절초풍했지만, 연인의 부드러운 마사지에 이내 안정을 되찾았다. 다치지 않은 오른쪽 팔꿈치를 잡은 손가락도, 찜질 수건을 마사지하듯 누르고 있는 다른 손가락도, 부드럽고 상냥한 움직임엔 다르지 않았다. 다시금 달콤하고도 음험한 상상이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처럼 넋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녀석이 선배님 되게 좋아하는가 봐요…….

그저 상체를 움직이지 않게 고정하기 위한 손놀림일 뿐이라곤 믿기 힘든 애무가 여린 피부 위를 깃털처럼 쓸고 있었다.

―……정말 형제처럼 가까워 보이세요……. 

한숨처럼 신음을 흘리자 겨드랑이 가까이 옮겨가 있던 음란한 손가락에 왈칵 힘이 주어졌다. 저릿한 쾌락이 전신의 신경 줄을 타고 순식간에 척추와 사타구니 틈바구니까지 전해졌다. 흥분으로 잔뜩 색색거리는 숨결을 도무지 억제할 수가 없었다. 감긴 눈꺼풀을 누군가가 억지로 뜨게끔 강요라도 하는 것처럼 있는 힘껏 즈려 감았다. 연인의 얼굴을 절대로 쳐다보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 뻔뻔스러운 욕망을 들킬까 두려워, 혹은 천국에서 내쳐질까 두려워. 공포를 동반한 어마어마한 쾌락이 온 넋을 회초리처럼 후려치고 있었다.

―……선배님이 위험에 처하면 목숨이라도 걸 것 같은 걸요……

앞쪽을 찜질하던 수건이 등 뒤쪽으로 넘어갔다. 손이 뒤로 넘어가니 자연스레 연인의 상반신이 자신을 덮치는 것처럼 가까이 밀착하게 되었다. 두려움과 욕망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던 몸은 그 와중에도 뒤쪽으로 상체를 기울이며 어떡하든 연인의 접촉을 피해 보려 기를 쓰고 있었다. 연인의 다른 한 손이 반대편 어깨를 움켜쥐며 옴짝달싹 못 하게 앞으로 끌어당긴 것은 물론이었다. 결국, 상반신이 거의 껴안기다시피 연인의 품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침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체중을 지지하고 있던 서로의 다리 또한 어쩔 수 없이 뒤엉켜 들었다. 정강이뼈 안쪽에 연인의 단단한 근육으로 뭉친 허벅지가 찍어 누를 것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오른쪽 목덜미와 어깨 중간 오목한 부분에 거의 달라붙어 있던 연인의 입술에서 뜨거운 숨결이 내뿜어지고 있었다. 숨결은 뜨거운데, 전신으로는 오소소 소름이 달려 나갔다. 숨이 저절로 멈추어졌다. 히끅거리는 음란한 신음이 다시 한 번 토해졌다. 부끄러움으로 새빨개진 열기가 또 한 번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얼음 타월은 여전히 부드럽게 어루만지듯 탈구됐던 관절을 쓸고 있었다.

목덜미 근처에 토해지는 연인의 숨소리 역시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었다. 오른쪽 어깨를 움켜쥐고 있는 손가락에도 아픔이 느껴질 만큼 억센 악력이 가해지고 있었다.

아주 약간 고개를 틀기만 하면 연인의 입술과 접촉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약간 손을 뻗기만 하면 연인의 몸을 안을 수 있을 것이다.

절대로 먼저 고개를 튼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런 상상만 했을 뿐이었다. 한데 어느새 상상 그대로 연인의 입술이 자신의 입가를 누르고 있었다. 그저 조금 손을 부르르 떨었을 뿐인데 어느새 허리는 연인의 억센 손아귀 아래 끌려 들어가 있었다. 입가를 핥는 축축한 혀의 감촉이 느껴졌다. 아랫배가 찌르르 전율하며 하반신이 요동을 쳤다. 바짝 일어선 자신의 생식기가 생생히 자각되었다. 아랫입술로 이동한 혀의 움직임은 벙하니 벌어진 입술 틈을 비집고 순식간에 안으로 파고들었다. 윗잇몸을 뱀처럼 훑어 올리는 음란한 움직임에 저절로 숨넘어가는 교성이 터졌다. 허리가 경련하듯 심하게 흔들렸다.

달콤한 타액과 함께 혀 안쪽 깊은 곳으로 쓸고 들어온 연인의 혀와 자신의 혀가 얽혀들었다. 자신의 쾌락을 선연히 알고 있는 명백한 유혹의 키스였다. 몇 번 이리저리 움직이며 자신을 빨아들이던 연인은 마침내 자신이 못 견뎌 하는 깊이까지 힘껏 박혀 들었다.

“……아……! 하응……!”

뒤로 활처럼 넘어가는 상반신을 용서 없는 완력으로 끌어당겨 품는 연인의 양팔에, 거의 사정을 할 것처럼 눈앞이 노래졌다. 연인의 손이라는 지지대를 잃은 얼음 타월이 어깨 아래로 흘러 침대 바닥으로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 뒤엉킨 허벅지와 사타구니 사이로 단단하게 발기한 연인의 음경이 짓이겨지고 있었다. 피가 뛰는 소리가 폭포수 소리처럼 격렬하게 귓속을 찢어댔다. 아픈 어깨도 안중에 없이 미친놈처럼 연인에게 달라붙었다. 연인의 파자마 단추를 찢고 손을 밀어 넣은 뒤 굶주렸던 욕구를 가득 채웠다. 날씬한 허리 근육을 어루만지고, 아랫배를 비비고, 등 뒤로 손을 돌려 매끄럽고 탄탄한 등 근육을 힘껏 끌어안았다. 연인에게 지지 않을 기세로 연인의 입술을 탐하는 것은 물론이었다.

다급하고 안타깝고 격렬한 욕구로 눈이 뒤집히는 것만 같았다. 뒤엉켜서 뱀처럼 꿈틀거리는 움직임조차 둔하게 느껴진 나머지 미칠 지경이었다. 서로 맞붙은 채 비벼지고 주물럭거려지는 소리가 낯 뜨거울 정도로 요란했다. 탐욕스레 서로를 물고 빨아대는 음란한 교성이 침실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입안 곳곳이 남김없이 들쑤셔졌다. 목구멍 깊은 곳까지 침범해 들어와 가차 없이 짓밟았다. 이리저리 옮겨가기를 거듭하다 그만 못 견뎌 목구멍 안쪽으로 삼켜진 서로의 타액은, 그조차 버거워지면 서로의 입술 끝을 지나 턱 언저리로 줄줄 흘러내렸다. 허리를 우악스럽게 당겨 안았던 연인의 손은 이제 온몸 곳곳을 배회하며 피부를 쓰다듬고 있었다. 단 한 개의 단추로 마지못해 몸과 붙어 있던 파자마 상의는 어느새 벗겨진 채 침대 발치를 구르고 있었다. 언제까지고 먹어치울 기세로 격렬하게 입술을 빨아대던 연인의 입이 관자놀이를 지나 귓바퀴를 씹어 삼켰다. 귓속 깊은 곳까지 파고든 혀에 그만 또 자지러져 경련을 일으키자 공격은 목덜미 아래로 이어졌다. 측면과 그 반대쪽 측면, 그리고 목젖이 돌출한 중앙부들을 회오리처럼 빙빙 돌아다니며 빨고 깨무는 연인의 식탐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다시 귓바퀴로 이동해 잘근잘근 귓불을 씹어대던 입이 혀를 쭉 뽑아 귓구멍 깊이 욕망을 쑤셔 넣었다. 극점까지 몰려 불끈거리던 자신의 자지는 결국 참지 못하고 폭포수 같은 정액을 분출해냈다.

“……흐…… 으…… 흐아악!!!!!!”

비명 같은 교성이 침실 안을 메아리쳤다. 사지가 뻣뻣하게 위로 쭉 뻗치며 눈앞이 하얘졌다. 아릿한 통증이 다친 어깨를 관통했지만 거의 의식조차 하지 못했다. 간질 환자처럼 격하게 꿈틀거리던 몸은 이내 힘을 잃고 뒤로 넘어갔다. 그러나 연인의 용서를 받기엔 그도 한참은 모자랐던 모양이었다. 활처럼 뒤로 휘어진 허리를 원위치시킨 연인의 입술이 벙긋하게 벌어진 채 침을 줄줄 흘리고 있던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곤 처음부터의 음란하고 집요하고 광적인 유린이 다시금 시작되었다.

정액과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파자마 하의가 찢어발겨 질 것처럼 벗겨져 나갔다. 물어뜯을 것처럼 입술에 키스를 거듭하면서도 그로썬 부족한지, 연인의 탐욕스러운 손길은 가슴 산과 아랫배와 사타구니 사이를 정신없이 오가며 주린 불길을 일으키고 있었다. 숨을 쉬기조차 버거웠다. 연인의 격렬한 움직임을 따라가는 데만도 벅차 애무를 되돌리는 따윈 좀처럼 시도할 수가 없었다. 끊임없이 기갈에 날뛰는 정열적인 입맞춤도 가뜩이나 바닥난 기력을 더더욱 고갈시키는 엄청난 소모전이었다. 그런데도, 더듬이처럼 오소소 일어나고 있는 온몸의 솜털과 한가지로, 축 늘어져 있던 자지는 다시금 천천히 비굴한 각도를 세우고 있었다.

빈틈없이 상반신이 껴안긴 상태로 침대에 몸이 눕혀졌다. 위로 올라탄 반라의 연인은 여전히 키스를 거듭하며 거대하게 부푼 치부를 자신의 사타구니 사이에 찍어 누르고 있었다. 얇은 파자마 천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팽팽해진 자지가 막무가내로 서로를 뚫고 들어갈 기세로 격렬하게 꿈틀거렸다. 눈앞이 노래지는 자극을 견디다 못해 약간 다리를 오므리는 자세를 취하자, 연인의 허벅지가 가차 없는 기세로 찍어 눌러왔다. 탱크처럼 깔아뭉개지니 하반신을 옴짝달싹할 수 없는 것도 당연했다. 탱크는 맹렬하게 허리를 흔들며 안타깝고 허기진 마찰을 시작하고 있었다. 파자마 천 한 겹을 사이에 두고 날 것 같은 생짜 욕망이 태풍처럼 서로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침대가 들썩들썩 춤을 추고 있었다. 삐걱삐걱 울리는 스프링 소리는 서로의 입술이 맞붙어 쏟아 내는 쯉쯉거리는 흡착음보다도 더 추잡하고 음탕하게 들렸다.

“……못…… 참겠어…… 드…… 들어가겠습니다…….”

자신의 입술에 스스로를 꼭 붙인 채로 신음 같은 웅얼거림이 토해졌다. 팔을 위로 쭉 뻗어 침대 머릿장을 더듬는 연인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연인의 거대하게 부푼 흉기는 연인이 상반신을 약간 위로 끌어올리는 바람에 자신의 사타구니 대신 명치끝을 누르게 되었다. 덜컥거리는 소리가 잠시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아래로 끌려 내려온 연인의 몸이 다시금 자신을 찍어 누르기 시작했다. 다친 눈두덩 주변을 제외하곤 온통 연인과 자신의 타액으로 범벅이 돼 있는 얼굴로, 다시금 연인의 입술이 떨어진 것과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아래로 손을 뻗어 파자마를 벗어 던지는 연인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허벅지 아래까지 끌어내려 진 파자마는 정강이와 발목의 몸부림에 가까울 꼼지락거림에 의해 간신히 침대 바닥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완전히 벌거벗은 연인에 의해 다리털과 치모의 까칠한 감촉이 다이렉트로 피부 위를 전율시키고 있었다. 생식기를 짓누르는 거대한 불끈거림 또한 일체의 숨김없이 적나라하게 전해졌다. 한계까지 발기해 경련을 일으키는 연인의 자지도, 숱 많고 거칠거칠한 치모도, 약간 조여진 듯 바짝 굳어 발기해 있는 큼직한 불알도, 모두 혼이 빠질 만큼 몸서리쳐지는 자극이었다. 잠깐, 그 전율할 듯한 감촉을 음미하듯 허리를 맹렬하게 흔들며 서로의 치부를 비벼대던 연인이 이윽고 손안에 쥐고 있던 윤활제의 뚜껑을 열었다. 손바닥 위에 듬뿍 쏟아진 윤활제는 잠시 전까지 연인의 음부로 유린당하던 자신의 사타구니 사이에 통째로 발라졌다. 뜨겁게 달구어진 철판에 물방울이 떨어지듯, 그것은 또 다른 엄청난 자극이었다. 차갑고 미끈거리는 점액질의 액체가 자지와 불알과 회음, 그리고 치모까지 빠짐없이 문질러졌다. 엉덩이 틈, 움찔거리는 겁먹은 주름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안쪽 깊이까지 용서가 없었다. 듬뿍 묻힌 윤활제로 중무장한 검지와 중지는 내벽 안쪽 깊은 곳은 물론 익히 알려진 포인트까지 파고들어 가차 없이 긁어내렸다. 히끅거리는 음탕한 교성을 거듭거듭 토하며 양다리를 쫙 펼친 채로 자신은 그 환희에 찬 침입을 기꺼이 맞아들였다. 기특하다는 듯, 은밀한 구멍을 빠져나온 피아니스트 신동의 아름다운 손가락이 허벅지 안쪽과 회음부를 빨아들일 기세로 애무했다. 윤활제 범벅이 돼 있는 자지와 불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마치 마사지를 하듯 손안 가득 움켜쥔 연인이 용두질을 치며 희롱을 시작하자 눈앞에서 폭죽이 터진 것처럼 숨 막히는 쾌락이 엄습했다.

“……흐으으…… 응…… 후윽…… 아앙…… 앗……!”

“……안 돼…… 이번엔 같이 가요…….”

잔뜩 쉬어터진 짐승의 소리가 귓가에서 토해졌다. 막 절정을 향해 가던 욕망은 어마어마한 기세로 요도가 틀어 막히는 바람에 소금 맞은 지렁이처럼 괴성을 지르며 사납게 꿈틀거렸다. 쾌락 대신 고통이 전신을 사로잡아 수치도 잊은 채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여전히 탐욕스레 달라붙어 있는 연인의 입술에 매달리며 비굴한 애원을 거듭한 것은 물론이었다.

두 다리가 활짝 벌어진 채 연인의 어깨 위에 걸쳐졌다. 연인의 양팔이 상반신을 받쳐 드는 것처럼 자신의 등줄기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들어갑니다…….”

허스키한 신음이 입가에 웅얼거린다고 설핏 자각한 순간 어마어마한 충격이 하반신을 꿰뚫고 들어왔다.

“……흐…… 흐아아악!!!”

단숨에 뿌리 끝까지 밀어붙인 사나운 삽입이었다.

“……흡!!!”

“앗……! 흐윽!! 흐앗!! 아아…… 악!!!”

쾌락으로 노곤하게 풀려 있던 온몸이 무서리를 맞은 것처럼 기절초풍한 것도 당연할 노릇이었다. 바짝 일어서 있던 자지도 순식간에 힘을 잃고 쪼그라들었다. 한 달 전 단 한 번 마지못해 범해진 이외엔 전혀 사용되지 않은 몸이었다. 거의 1년 만에 섹스다운 섹스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익숙해질 수는 없을 배덕적인 결합에 긴 공백, 더군다나 쉬이 감당이 안 되는 연인의 압도적인 크기다. 괄약근이 잔뜩 긴장한 채 벌벌 떠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읍……! 흐윽……! 좀…… 조금만 참고…… 흐읍……! 윽……! 힘을 빼세요…….”

연인 또한 고통스러운지 키스를 멈춘 채 거친 호흡을 토해냈다.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 때마다 땀으로 범벅이 된 채 가닥가닥 달라붙어 있는 머리카락에서 사방으로 땀이 튀었다. 쾌락의 고통으로 붉게 상기된 얼굴이 잔 경련을 일으키며 자신의 목덜미를 비벼댔다. 격정을 못 이긴 듯, 간간이 살점을 물어뜯는 이빨의 감촉도 어렴풋이 느껴졌다.

헐떡이듯 숨을 고르며 옛 감각을 기억해내기 위해 기를 썼다. 마치 격려를 하는 것처럼 부드럽게 등줄기를 쓰다듬는 연인의 손길에 의지해 차츰차츰 하반신의 경직을 풀어나갔다. 다시 입술에 탐욕스러우면서도 달콤한 키스를 되풀이하기 시작한 연인의 몸짓도 온몸의 긴장을 풀어 내리는 데 도움을 주었다. 연인이 조금씩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통증과 부담감은 여전했지만, 거대하고 따스한 기둥이 내벽을 쓸고 지나가는 몸서리쳐지는 자극은 그 이상의 기쁨이었다.

“……흑…… 흑…… 윽…… 욱욱…… 흐끅……! 흣…… 읍…….”

“…….”

“……흣……! 으…… 윽…… 하악……! 아……! 거기……! 거……!”

“…….”

고통은 거의 사라지고 쾌락만이 남았다. 꼭 달라붙어 완벽하게 호응하는 자신의 몸에, 연인 역시 쾌감만을 느끼는 듯 거친 숨소리 외엔 일체의 신음조차 뿜어내지 않았다. 그저 느리고 빠르게 완급을 조절해 허리를 앞뒤로 쳐올릴 뿐이었다. 자신의 몸을 덮치듯 껴안은 자세로 책상다리하고 앉은 연인의 체위는 조금 불편해 보였는데, 그것이 자신의 다친 어깨를 배려한 자세라는 걸 인환은 쾌락으로 넋이 완전히 미쳐가는 와중에도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흑……! 윽! 윽……! 흐앗……! 악……! 거기!! 흐윽……! 아……! 아아…… 좋아……! 악!!!”

“…….”

“……더…… 흑……! 거기…… 응…… 흑…… 흐앙…… 아앙…… 앙…… 우왓!!!”

“…….”

풉. 풉. 붑. 찌걱. 찌걱. 찌걱. 끽끽. 푸풉. 붑. 찌걱. 찌걱.

내벽과 자지가 맞붙어 비벼지는 음란한 소리가, 침대 스프링이 짓눌려 울부짖는 소음들이 귓전을 가득 채웠다. 탱크처럼 요란스레 헐떡이는 연인의 숨소리도, 끊임없이 입술을 빨고 혀를 물어뜯는 질척한 소리도 견디기 버거운 극한의 자극이었다. 내벽 깊숙이 들어와 박힌 연인의 자지가 도로 빠져나갈 때마다 끈끈한 액체가 회음을 타고 주변을 질척하게 흘러내렸다. 연인이 공격해 파고들면 몸 안의 모든 세포가 연인에 짓이겨진 듯 짜부러 들었고, 연인이 도로 후퇴하면 가차 없는 저 겁탈이 못내 그리워, 배웅하듯 괄약근을 밖으로 딸려 보냈다. 후퇴했던 연인은 물론 그 이상의 힘과 정렬로 다시금 맹렬하게 파고들었다. 전립선이 찔러 올려질 때마다 잔뜩 발기한 자신의 자지도 그리운 곳으로 발딱 치솟았다. 사랑하는 연인의 탄탄한 아랫배에 퉁겨지는 귀두의 감촉은 연인의 흉기에 의해 짓이겨지는 전립선이 선사해주는 쾌락과 거의 다르지 않을 어마어마한 기쁨이었다. 

“응…… 응…… 으헉……! 흐으으…… 앙…… 앙앙…… 흐아아…… 아앙…… 으아앗……!”

“……으…… 흡……!”

“……으헉……! 아아, 거기!! 거…… 거기……! 더…… 더 세게……! 아악!!! 아아악!!!”

“……읍…… 흡…… 윽…… 웃……!”

“……앙…… 세게…… 더…… 더…… 박아……! 박아줘…… 거기…… 흑…… 흐악……! 아…… 좋아……! 조…… 좋아…… 위……! 위위……!”

“……읍……! 윽……! 헉……!”

“……아…… 아아…… 나와…… 나…… 나와…… 지금…… 흐악……! 제발!! 나와……! 흐앗!!!”

“…….”

“……위…… 위야……! 거기!!! 악!!! 흐…… 흐아아아악―!!!!!!!!!!”

연인의 아랫배를 들쑤시며 요동치던 자지가 미친 듯이 용트림을 해댔다. 하반신이 바스러지는 것만 같은 쾌락이 엄습했다. 심장이 멈춰 이대로 죽는 것이 아닐까, 진심의 불안이 설핏 의식을 스쳐 갔다.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듯한 오르가슴의 폭풍을 어떡하든 견디고 싶어 연인의 등줄기를 휘감은 손가락에 필사적으로 힘을 주었다. 피부 깊숙이 박혀 든 손톱이 연인의 살점을 힘껏 긁어내리고 있었지만, 그를 제어할 의지력은 눈곱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사방에서 축포가 터진 것만 같았다. 천지가 새하얀 빛으로 가득했다. 갈가리 부서지는 몸을 가누지 못해 뒤로 넘어가는 몸을 여전히 극도로 흥분한 연인의 팔이 강철처럼 조여들고 있었다. 연인의 어깨 위에 겨우겨우 걸쳐졌던 두 다리는 물살을 타듯 바닥으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아마도, 극점에 도달하려면 아직 한참은 더 자신을 짓밟아야만 할 연인은, 삽입을 방해하는 불안정한 체위에 잔뜩 불만을 품은 것 같았다. 자신의 상반신을 꽉 끌어안은 자세로 등을 대고 침대에 몸을 눕히는 연인의 움직임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격하게 꿈틀거리며 분수처럼 정액을 토해내고 있는 자신의 몸부림은 개의치 않는 듯싶었다. 경련하는 몸은 자연스레 연인의 몸 위로 겹쳐졌고, 연인의 손은 가차 없이 자신의 한쪽 허벅지를 들어 올리더니 반쯤 빠진 스스로의 흉기를 단숨에 꽂아 넣었다. 꿈틀거리고 있는 경련 탓에 결합이 풀리지 못하게끔 양팔로 사슬처럼 상반신을 조인 것은 물론이었다. 결국, 옴짝달싹할 수도 없이 연인에게 달라붙은 채 격렬한 오르가슴을 견뎌내야만 했다. 정액은 미련이라도 남은 듯 몇 번에 걸쳐 되풀이, 되풀이 연인의 배 위로 뿜어져 내렸다. 경련을 동반한 사정이 이루어질 때마다 과도하게 조여지는 항문에 연인은 꽤나 고통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모든 악조건들에도 불구하고 연인은 여전히 격렬한 피스톤질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내벽 깊숙이 찔러 들어오는 거대한 살점의 감촉이, 아득히 멀어지는 의식의 틈을 비집고 들어서고 있었다. 얼굴 전체를 씹어 삼킬 것처럼 빨아대는 연인의 입술 또한 어렴풋이 느껴졌지만, 그 모든 자극도 태풍처럼 강력한 오르가슴의 여운을 막아내 주지는 못했다. 사지를 활짝 벌린 채 아래로, 아래로 날고 있었다. 온몸의 털이란 털이 보드라운 미풍에 날려 간질간질 감미로운 기쁨을 주었다. 곤두박질치는 여행의 끝은 영원히 없는 것 같았다.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자신은 진짜 날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증거로 사방이 새하얀 빛투성이였다. 솜뭉치처럼 커다랗고 하얀 뭉게구름투성이였다. 뿐이냐, 존 레논까지 있었다. 저기 멀리 아득한 구름 위에서 존 레논이 피아노를 치며 천국을 노래하고 있었다.

물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저 아래 땅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좀 더 빼고 보니 녹음이 울창한 계곡을 따라 휘도는 자그마한 개울이 보였다. 언젠가 연인과 보성에 놀러 갔을 때 본 그 개울 같기도 하고, 달리 처음 보는 개울 같기도 했다. 하나 가득 내려앉은 숲 그림자 탓에 물빛은 녹색이었다. 너무나도 평온하고 행복한 기분을 주는 그런 녹색이었다. 살포시 몸을 날려 개울가에 내려앉았다. 날개를 퍼득거리며 착지할 때 겨드랑이 틈을 어루만지는 부드러운 바람결이 기분 좋았다. 개울가에 쪼그리고 앉아 한참 동안 멍하니 개울물을 바라보았다. 문득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빼고 허공으로 시선을 가져가자, 물빛과 똑같은 울창한 녹음이 보였다. 짙은 녹색의 이파리들 틈으로 물비늘처럼 새하얀 햇빛이 반짝반짝 비쳐들었다. 눈부신 아름다움에 가만히 손을 위로 뻗다가 홀연 눈물이 나왔다. 뿌리까지 자각되는 고독감에 가슴이 저릿하게 아파졌다. 낭패감이 들었다. 따끔거리는 눈시울도 아팠지만 어쩐지 울면 안 될 것 같았다. 한번 울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어질 거라는 위기감이 전신을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필사적인 의지를 기울여 하늘로 붕 몸을 띄웠다. 양다리로는 땅을 박차고 두 손은 위로 쭉 뻗었다. 물비늘 같은 빛살을 손바닥 가득 움켜쥐자 단숨에 빛 가운데 도착했다. 끊어졌던 존 레논의 피아노 선율이 다시금 감미롭게 귓전을 파고들었다.

그랬다. 자신은 이미 천국에 도달해 있었다.

온몸이 망치로 두들겨 맞은 것마냥 나른했다. 눈두덩의 아픔은 거의 가라앉았지만 어깨 관절에서 느껴지는 동통은 어제보다 심해진 감이 있었다. 확실히 관절을 다친 환자의 입장을 고려치 않은 과격한 섹스임에 틀림이 없었다.

물론 후회는 없다. 간밤의 기쁨과 행복을 위해서라면 까짓 어깨뼈쯤은 얼마든지 희생해줄 용의가 있다. 탈구가 아니라 부러진다고 해도, 아니, 아예 떨어져 나간다 해도 기꺼이 감수할 터였다.

물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소리의 진원지는 당연히 욕실이었다. 연인의 소리였다. 천국의 소리였다.

빙그레 번지는 웃음을 내내 매달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시계를 보니 8시다. 좀 놀랐다. 눈부신 아침 햇살로 가득한 창 밖을 보고 대충 짐작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의외가 아닐 수 없다. 그간, 새벽 어스름도 채 가시기 전에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가버리던 연인의 무정한 작태를 생각해볼 때, 기적이라고밖에 생각 안 할 수가 없다. 아침 8시까지 연인이 자신의 집에 죽치고 있어주다니. 분명 아침밥도 먹어주고 돌아가겠지. 팔푼이 같은 웃음이 좀 더 짙어진다.

하긴, 어떤 기적이 있어 간밤의 기적 이상일 수 있겠는가. 다시금 연인과 사랑을 나눈 것이다. 진심으로 자신의 몸을 원해준 연인이었다. 결코, 먼저 유혹을 해온 쪽은 자신이 아닌 연인이었다.

―……녀석이 선배님 되게 좋아하는가 봐요…….

무려 열 달 만이었다. 열 달 만에 나눈 정열적이고도 애정 넘친 사랑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마냥 꿈만 같았다. 기절하듯 잠에 빠진 자신을 깨워 자정이 넘도록 걸신들린 듯이 탐하던 연인은, 그도 모자랐는지 바로 몇 시간 전인 새벽녘에도 자신을 깨우더니 또 한 번 허겁지겁 파고들었었다. 마지막엔 기운이 달린 나머지 그만하자고 애원을 했을 정도였다.

―……선배님이 위험에 처하면 목숨이라도 걸 것 같은걸요…….

억제하려고 해도 도저히 억제가 안 되는 바보 웃음을 매달고, 침대 발치에 너덜너덜 늘어져 있던 파자마를 주워 입었다. 움직일 때마다 욱신거리는 하반신의 통증은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이 또한 뿌듯하기 짝이 없는 영광의 상처가 아닐 수 없었다.

근데, 가만. 파자마를 입으며 보니 가슴이며 아랫배, 팔목 안쪽 등 예민한 부분은 전부 벌레에라도 물린 것처럼 울긋불긋한 키스 마크 천지다. 콘솔 위 벽거울에 비춰 보니, 안 보이던 목덜미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맙소사. 까뭇까뭇 꿰맨 실밥이 그대로 보이는 눈가는, 그 대가이기라도 한 듯 보기 흉할 지경으로 부풀어 있다. 흉악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우씨, 씨버럴. 차라리 나머지 어깨 하나가 더 고장 날 것이지 이 웬 프랑켄슈타인이란 말이냐. 이래서야 연인의 얼굴을 마주 대할 수나 있겠느냐구. 가뜩이나 오늘 같은 축제의 날에. 기적의 아침에.

속으로 배부른 투정을 읊조리고 있는데 욕실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100미터 경주를 앞두고 있는 달리기 주자처럼 심장을 두근거리며 연인에게로 시선을 가져갔다.

베네통 가운을 입고 나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어제 벗어둔 하얀 스트링 팬츠와 풀오버 차림이다. 만세. 생각지도 못한 눈요기에 저절로 환한 웃음이 터졌다. 조금씩 물방울이 뚝뚝 듣는 머리카락엔 타월이 감긴 채 연인의 부지런한 손놀림을 받고 있었다. 시선을 느낀 듯, 머리카락의 물기를 부지런히 닦고 있던 동작이 일순 멈칫한다. 고요한 눈동자가 자신을 빤히 응시해왔다.

두근…….

갑자기 심장이 이상한 방향으로 뛰었다. 잠시 전처럼 세차게 속도를 높이는 건 같은데 뭔가가 이상했다. 마치 200킬로가 넘는 속도로 앞을 향해 전력 질주를 하다 급회전을 한 자동차 속에 들어앉은 느낌이었다. 만약, 심장을 휘돌아 나가는 피의 흐름이 거꾸로 방향을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 순간이 바로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멍하니 생각했다.

얼굴의 추한 부기가 새삼스레 유난히 의식되었다. 활짝 올라간 채 웃음을 머금고 있던 입술은 그대로 굳은 채 어색하게 떨고 있었다. 연인이 추한 상처를 보지 못하도록 약간 고개를 측면으로 튼 채 시선을 바닥에 던졌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뭔가가 잘못됐는데 그 뭔가가 뭔지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었다.

“……바…… 밥 차려줄게…… 머…… 머…… 머…… 먹고 갈 거지?”

맙소사, 왜 이러는 거지? 왜 이렇게 떨리는 거지? 무서운 거지? 말은 또 왜 더듬는 거야, 갑자기? 너 등신이니? 쪼다야? 왜 이래? 왜 이러는 거야? 이 좋은 날에 미치기라도 한 거니……?

초조감과 불안감은 자꾸만 증폭하는데 좀처럼 잘못된 점을 찾아내질 못하는 스스로에게 맹렬한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보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서늘하고 담담한 남창의 어조로 깍듯하게 물어온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아니, 바로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거듭 되풀이해 들어온 탓에 이미 귀에 인이 박일 지경임에도, 어쩐지 그 딱딱한 어조에 위화감을 느끼는 자신이 있었다. 천국의 아침이라면 절대로 보일 리가 없는 단단한 성벽이 연인의 목소리며 어조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아, 그렇다! 그렇지! 이제 알겠다! 원인은 연인의 말투였다. 태도였다. 아니, 그보다 먼저. 저 냉담한, 타인을 바라보는 듯한 저 차분하고 무감정한 시선이 원인이었다. 바로 어제 아침까지, 아니, 저녁까지도 계속 유지되던, 자신을 향한 한결같은 시선이었다. 연인을 배신한 이래, 연인의 처절하고 독한 절교 선언을 들은 이래, 내내 끊임없이 되풀이되던 완강한 벽 쌓기가 여전히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었다.

믿어지지가 않았다. 지옥이 다시 아가리를 벌리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건 순간의 천국이 아니었다. 자신은 이미 영원한 천국에 도달해 있었다. 영원한 곳에서 내쫓긴다면 그건 이미 영원한 곳이 아니란 소리였다. 그렇다면 자신은 사기를 당한 것인가? 그런가? 아니야. 아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아무리 다시 생각해봐도,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그건 연인이 먼저 손을 내민 천국이었다. 연인이 먼저 내민 손길엔 사기란 있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어설프게 급조해낸 모조 천국이 아니었단 말이다. 수시로 우려먹는 자기기만이란 결코 발붙일 수가 없는, 너무나 선명한 공간이 자신을 향해 활짝 손을 내밀어주고 있었던 거다. 결코 다신 내쫓길 리가 없는 절대 공간이었던 거다. 그런데 그게 거짓말이라고? 사기라고? 어째서? 도대체 어째서?!!!

“……어…… 어어…… 괘…… 괜찮아…… 바…… 밥 차려줄게…… 머…… 머머…… 먹고 갈 거지?”

“집에 가서 먹겠습니다. 새삼스럽게 폐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폐…… 폐라니…… 그…… 그런 얘긴…….”

“……어젯밤엔 저도 몹시 즐거웠습니다. 앞으로는 선생님께서도 욕망을 참지 마시고 어제처럼 발산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솔직히 요즘 욕구 불만으로 제어가 안 될 때가 많거든요. 다른 고객이나 가벼운 상대와의 섹스를 금지시키셨으니까 선생님께서도 그에 합당한 조처는 취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를테면 어제처럼 조금이라도 충족될 수 있게끔 허락을 해주십시오.”

“…….”

“……선생님의 뜻이나 의지가 의미하는 것은 저로선 절대로 드릴 수가 없습니다. 괜한 고집 부리지 마시고 선생님께서도 편해지세요. 어젯밤, 정말 즐겁지 않으셨습니까?”

“…….”

“……서로 쾌락을 취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 제 몸을 마음에 들어 하시듯이 저도 선생님 몸에 그럭저럭 순응하고 있습니다. 저로선 하루빨리 선생님께서 마음을 정하시고 편해지셨으면 합니다.”

“…….”

“……어젯밤을 생각해보세요, 선생님. 재회한 이래 서로가 그처럼 즐거웠던 적도 달리 없었지 않습니까? 모두 선생님 마음에…….”

“……아냐…….”

“……?”

“……별…… 별로 즐겁지 않을 거야…….”

그토록 사시나무처럼 떨리던 온몸의 떨림이 겨우 가라앉기 시작했다. 등신처럼 걷잡을 수 없이 더듬거리던 말투도 가까스로 정상을 찾아가고 있었다.

“……네가 용서해주지 않으면 어제처럼 안겨도 그렇게 즐겁지는 않을 거야…….”

그렇지. 언제나 그랬다. 납득하고 나면, 지옥을 납득하고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고 나면, 몸은 훨씬 편하게 반응을 하곤 했다. 마음의 고통 역시 그럭저럭 견딜 만하게 느껴지곤 했다. 고통이란, 저항하면 할수록 더 극심한 공격의 발톱을 세우곤 한다는 것을 자신은 그 얼마나 뼈저리게 자각하고 있는가.

“……그냥…… 지금까지처럼 기다릴래…… 네가 용서해주면 만질 거야…… 내가 만져도 네가 끔찍하게 여기지 않게 될 때…… 그때 만질 거야.”

“……그건 별로 현명한…….”

“아냐, 내 말 들어, 위야. 네가 마음에서 우러나서 안아주면 그때 가서 안길게. 나 용서해주고 다시 좋아해주게 됐을 때, 그땐 정말 매일매일 네 몸 만질게. 그럴게.”

“…….”

“……물론 네 욕구 불만에 대해선 미처 생각 못 했어, 위야. 그건 정말 미안해. 역시 이번에도 내 입장만 생각했나 보구나.”

“…….”

“대신 너도 성욕이 생기면 언제든지 날 가져. 내 소원하고 그건 별개니까. 네 말대로 난 정말 네 몸이 좋아. 사랑하는 것도 맞지만 정말 너와 섹스 하고 싶어서 못 견딜 때도 많거든. 그런 나니까 네가 성욕 배출구로 날 이용한대도 정말 감지덕지할 일이지.”

“…….”

“정말이야. 내 쪽에서 네 몸을 추행하는 일은 없을 거야. 앞으로도. 이건 나 자신과 한 약속이니까 네가 그것까지 신경 쓸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 다만, 말했듯이 네가 동했을 땐 날 어떻게 해도 좋아. 뭐, 솔직히 어젯밤처럼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지도 모르지…….”

“…….”

“둘 다 마찬가지지 그게 무슨 차이냐고 따지지 마. 그럼 많이 슬플 거야, 위야. 난 정말 너 사랑하고…… 너무너무 사랑해서…….”

“…….”

“……아무튼 그래서 널 남창 취급하고 싶지 않아. 그야…… 한 달 전엔 나도 널 차지하고 싶어서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깐…… 하지만 앞으로 같은 실수를 하진 않을 거야, 절대로.”

“……선생님께 매달 돈을 받고 8천만 원의 빚이 있는 이상 남창이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담담하긴 했지만 역시 칼처럼 날이 선 어조였다.

“……응, 그래. 물론 그것도 부정하진 않아. 생각하면 무척 가슴 아픈 일이지.”

“…….”

“근데 정말 밥 안 먹고 갈래? 나 진짜 너 아침밥 먹게 해주고 싶은데…….”

“…….”

웃음은 정말 신기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퍼져 나왔다. 처음, 그렇게 발악하듯 현실을 부정하고 싶던 순간에는 말도 못 하게 굳어들었던 입가가 이젠 아예 고무줄처럼 사방팔방으로 죽죽 늘어나고 있었다. 물론 맹세코 거짓된 웃음은 아니었다. 가슴은 찢어지다 못해 너덜너덜 빈사의 신음을 토해내고 있는데, 얼굴로는 벙싯벙싯 잘도 천국의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아뇨. 역시 집에 가서 먹는 편이 마음이 편합니다.”

예상한 대로의 대꾸가 연인의 섹시하면서도 금욕적인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또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미간이 사납게 구겨져 있었다. 평소라면 또 두려움에 차서 전전긍긍 연인의 눈치를 살펴야 했겠지만, 그것에까지 신경 쓰기엔 자신의 넋은 너무나 극심한 상처를 입고 있었다.

“……하하, 고집쟁이 같으니라구. 알았어. 나 용서하기 전까진 절대로 아침밥은 안 먹고 갈 작정인 거지? 정말 독종이 따로 없다니까. 최 씨도 아니고 경상도 출신도 아니면서 웬 고집이 그리 독한 거야? 하여간 나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한동안 있는 대로 얼굴을 구긴 채 짜증을 참고 있던 연인이 커다란 발걸음으로 침실을 나갔다. 집으로 돌아가나 보다 하며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데, 잠시 후 침실 문이 열리며 다시 연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연인의 손에는 어제의 얼음찜질 수건이 들려 있었다.

“……혼자 하시기 힘들 테니까 찜질해드리고 가겠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 잠시 휘둥그레졌던 눈을 원위치시킨 후, 침대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귀찮으시더라도 2∼3일 간은 수시로 찜질해두세요. 오늘 병원에도 가보시구요.”

“어, 그래. 고맙다, 위야.”

맞은편 10센티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연인이 앉아 있었다. 어젯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서로의 자리요, 자세라 인환은 기묘한 데자뷔를 일으켰다.

바로 코앞에서 연인의 잔잔한 호흡이 토해지고 있었다. 연인이 호흡을 토할 때마다, 민트향의 치약 냄새가 뒤섞인 달콤한 단내가 고스란히 맡아졌다. 그 언젠가 천국에서의 그것과 같은 감촉에, 같은 향취였다. 늠름하고 단단한 몸에서 은은하게 풍겨오는 라벤더의 샤워 코롱 냄새도 다르지 않았다. 자신을 만지는 손길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자신의 가슴은 그 먼 기억 속의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조금도 설레지 않고 있었다. 달콤하고 낭만적인 상상도, 숨 막히는 기대감에 전율하는 일도 물론 없었다.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연인의 손길에 자지러졌던, 그 먼 기억 속의 등신이 그저 마냥 터무니없게만 느껴졌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보려 해도, 어디서 존 레논의 노래가 들려왔는지 좀처럼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연인의 아름다운 얼굴이 보였다. 서양인처럼 이목구비가 뚜렷한, 서늘하고, 완강하고, 표정 없는 얼굴이었다. 몸서리쳐지게 욕구를 자극하는 섹시한 얼굴이었다. 철벽처럼 고집스럽고 단호한 한 마리 짐승. 자신의 연인이자 영웅인 남자. 그러나 절대로 자신을 사랑해줄 리 없는 잔인한 남자였다. 극악무도한 적이었다. 그저 그뿐이었다. 그게 현실이었다. 천국 따윈 어디에도 없었다.

물론 미련퉁이에다 외길밖에 바라볼 줄 모르는 어떤 얼간이는 찜질이 계속되는 20여 분 남짓, 하염없이 연인을 마주 보며 존 레논이 다시 노래를 들려주길 기다렸던 것 같긴 하다. 혹시나 놓칠세라, 귀를 쫑긋 세운 채 제발 들려라, 들려라, 간절히 기도를 했다는 풍문이 들리기도 한다. 물론 얼간이는 그저 얼간이였을 뿐이라, 기적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얘기다. 그런 우스꽝스러운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고 한다. 존 레논의 「Imagine」에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상냥한 남창의 태도로 정성껏 찜질을 마친 연인이 이윽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응, 그래. 고맙다.”

“고맙긴요. 상태 수시로 체크 해보시구요.”

“응, 그래.”

침실을 나가는 연인을 따라 거실로 걸어 나왔다. 바닥을 딛는 병신 다리가 어딘가 붕 뜬 것처럼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자신의 몸인데도 자신의 몸 같지가 않았다.

거실은 침실과 다름없이 환한 아침 햇빛이 가득 들어앉아 있었다. 연인이 책 배낭을 어깨에 둘러메고 운동화 끈을 고쳐 신는 일련의 움직임을 거듭할 때마다, 햇빛에 비친 먼지 입자가 섬세하게 춤을 추었다.

“아, 이거 가져가야지, 위야!!!”

막 현관문을 밀고 나가려는 연인을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

연인의 무심함에 의해 방치된 어제의 쇼핑백들을 건네주기 위해서였다.

“아……!”

나지막한 감탄사를 대꾸로 던지며 귀찮은 듯 받아 드는 연인이다. 이럴 줄 알았다 싶으면서도, 혹시 고의가 아닐까 쪼금 의심이 가기도 했다. 정말은 얼마나 받고 싶지 않은 선물일 것인가.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응, 그래. 조심해 가, 위야. 다음 주에 보자.”

“예. 전화 드리고 오겠습니다.”

“응. 바이바이!”

혹시라도 한 번 더 돌아볼까 싶어, 연인의 단단한 목줄기며 등판을 뚫어져라 응시했지만 얌전히 닫히는 현관문으로 보답이 왔다. 아주 잠깐, 걸음을 옮기는 연인의 미세한 기척이 들리는가 싶더니 그조차도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시곗바늘은 정확히 8시 5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현관 앞에 우두커니 선 채로 한동안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냈다. 문득, 소음 하나 들리지 않는 적막이 무서워져서 부랴부랴 오디오로 다가가 음악을 틀었다.

별로 반갑지 않은 존 레논이 또 흘러나올 줄은 몰랐다. 정말이다. 맹세할 수 있다. 하지만 막상 첫 소절을 듣고 보니 도저히 판을 바꿔 끼울 수가 없었다. 손가락 하나조차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전신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천국이란 없다고 생각해요……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더 버티다간 쓰러져버릴 것만 같아서 오디오 장식장을 잡고 의지한 채 조심조심 바닥에 주저앉았다.

배가 고픈 것 같았다. 꾸르륵거리는 소리도 설핏 들려온 것 같았다. 그러나 당분간은 도저히 먹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음식 생각만 해도 어쩐지 속이 메스꺼웠다. 냉장고엔 오늘도 여지없이 거절당한 김천댁 아줌마의 떡갈비가 가득 들어앉아 있을 것이다. 그 밖에 연인이 좋아하는 된장찌개며 삼겹살이며 갓 담근 겉절이 김치도 한시바삐 먹어주길 잔뜩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여지없이 또 쓰레기통행이라는 것을 아직 그네들은 모를 것이다.

무언가 뺨을 간질이는 바람에 손가락을 가져갔다가 그것이 눈물이라는 것을 비로소 자각했다. 이상했다. 조금도 슬프다곤 생각하지 않는데 눈물이라니. 기막혀하며 파자마 소매 끝으로 쓱 눈가를 문질렀다. 순간 꿰맨 자리로 지독한 아픔이 달려 나갔다. 어찌나 아픈지 눈물이 쏙 뽑힐 지경이었다. 아뿔싸, 그렇군. 이 눈물은 꿰맨 상처 때문인가 보았다. 소리 없이 막무가내로 쏟아져 내리는 걸 보면 빤했다. 자신은 그 얼마나 엄살쟁이인지. 아무렴. 울 엄마도 두 손 두 발 다 든 응석받이가 바로 나 장인환 아니더냐.

무릎을 구부린 채 태아처럼 몸을 말고 웅크렸다.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으면, 이렇게 꼭 웅크리면 아프지 않을 것 같았다. 눈물을 멈출 수 있을 것 같았다.

……괜찮아. 괜찮아, 장인환. 괜찮아…….

……그냥 잠깐 또 지옥인 것뿐이야…… 그런 것뿐이야…….

……그럼, 그렇고말고…… 새삼 아프지 말자…… 아프지 마…… 그냥 다시 시작하는 거야…… 다시 시작하는 것뿐이야…… 그냥 처음처럼 열심히 사랑하면 되는 거야…….

주기도문 하나를 되풀이, 되풀이해 곱씹었다.

「Imagine」 한 곡만으로 고정된 턴테이블이 문득 몹시 지겹게 생각되었다.

아침에 듣기엔 너무 슬픈 음악이 아닌가 하고 눈물 콧물 범벅인 얼굴을 훔치며 투정도 해보았다.

그랬다.

창 밖은 이미 눈부신 5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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