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 1991년 5월. 문위(文偉) (24/129)

24. 1991년 5월. 문위(文偉)

“……많이 기다리긴! 별로 오래 안 기다렸어, 위야. 한 5분 전쯤에 왔나?” 

습관적으로까지 느껴지는 그의 익숙한 대꾸를 건성으로 흘려들으며 의자에 몸을 묻으려다 말고, 위는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리고 말았다.

무심코 건너다본 남자의 얼굴이 고작 일주일 사이에 반쪽이 돼 있었던 때문이었다. 알이 큰데다 짙은 회색으로 코팅된 선글라스를 써서 반쯤은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자신의 예리한 시선을 속일 수는 없었다. 지난 한 달 가까이 조금씩 살이 찌며 간신히 1년 전의 체중을 되찾아가는 듯싶던 남자는 다시금 얼굴이 해골처럼 마른 채 창백한 낯빛을 하고 있었다. 4∼5킬로쯤은 도로 빠진 것 같았다. 맙소사. 고작 1주일 사이에 4∼5킬로가 빠질 정도라면 이 남자는 도대체 어떻게 몸을 굴리고 있단 말인가? 어떻게 막 굴렸기에 1주일 만에 이 지경으로 만들어버린단 말인가, 이 한심한 사람은! 또다시 자신에게 무슨 시위라도 할 작정을 하고 있단 말인가?!!!

어차피 타인이자 고객일 뿐인 사내라고, 휘둘리지 말자고, 아무리 마음의 평정을 찾으려 해도 따귀라도 얻어맞은 듯한 황당한 불쾌감은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왜 자신이 늘 이 남자의 안위에 조바심을 내야 하고, 마음 아파해야 하고, 또 줄곧 보호해줘야 한다고 여길 만큼 책임감을 느껴야만 하는지, 생각하면 할수록 짜증이 치밀었다. 자신의 사나운 심사를 귀신같이 읽고 잔뜩 쫄아서는, 안절부절 눈치를 살피는 저 등신 같은 작태도 짜증을 부채질하는 데는 한가지였다.

“……밥은 먹었니? 안 먹었으면 어디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먹었습니다.”

벌써 3시다. 이 시간까지 점심도 먹지 않고 누군가만을 해바라기처럼 기다릴 등신이 당신 말고 또 있단 말인가? 주문을 외듯 속으로 ‘고객’이다, ‘고객’이다, ‘고객’일 뿐이다, 를 열댓 번 되풀이하는 것으로 간신히 화를 삭인 다음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역시 귀신처럼 자신의 마음속을 읽는 남자라, 어느 정도 가라앉은 자신의 분위기를 감지하곤 이내 편안한 표정이 된다. 하. 말이 편안한 표정이지, 시체처럼 안색이 나쁜 얼굴로는 설령 광대처럼 웃는다 해도 위태위태 불안정한 인상만을 줄 뿐이다. 실밥도 뽑고 부기도 좀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불그스름한 상처 자국을 보이고 있는 눈가도 파리한 안색에 불길한 기운을 더하고 있었다. 그나마 색이 짙은 선글라스가 가려주고 있어 쓰라린 자신의 속내를 새삼 긁지 않는 것이 다행일 것이다.

그랬다. 완전히 담담해질 수는 물론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기를 쓰고 노력을 해본들, 남자가 자신에게 가하는 자극이나 상처에 완벽하게 무심할 수는 절대로 없다는 것을, 요 근래 위는 뼈저리게 깨달아가고 있었다. 특히 지난주 체육관에서의 자신은 거의 반쯤 넋이 나가지 않았던가. 바닥에 넘어져 도무지 일어날 줄을 모르는 피투성이 남자를 발견했을 때,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얼어붙는 듯한 쇼크와 공포감을 맛보아야만 했었다. 결국 그 공포와 충격이 남자를 미친 듯이 범하게 했고 다음 날엔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에 치를 떨어야 했다. 물론 남자에게 선언한 대로, 그간의 욕구 불만 또한 남자를 범한 데 대한 충분한 이유가 되긴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자신이라 해서 왜 모르겠는가. 충격을 받고, 안절부절못하고, 마침내 상처가 별것 아니라는 의사의 확진을 받고 나선,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기쁨과 환희를 만족시키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리고 그것이 남자를 향한 끓어오르는 욕망으로 변태한 것도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결과였을 터였다. 남자도 욕망을 참을 수 없는 얼굴이었고, 자신 또한 인내심이 바닥을 치고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눈앞에 온전한 모습으로 앉아 사랑스러운 웃음을 흘리고 있는 남자가 고맙고 기뻐서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었다. 그만해주길 천만다행이라고, 심장이 부서지는 줄 알았다고, 속으로 저 철부지마냥 대책 없는 남자를 향해 얼마나 거듭 뇌까렸던가.

그런데 또 일주일 만에 이 지경이다. 여봐란 듯이 가시가 돼 나타나다니. 제기랄.

“……뭐라도 마시지 그러니? 목마르지 않아?”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걸리는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물어온다. 아, 그렇지. 이것도 또 짜증이 난다. 지금 자신이 걸치고 있는 이 치렁치렁한 연회색 슈트가 그것이다. 이 더위에(오후 1시쯤에 이미 수은주가 30도를 넘어섰다고 한다) 아무리 캐주얼이라곤 해도 슈트임엔 분명한 것을 셔츠까지 덕지덕지 갖춰 입었으니 그야말로 설상가상이었다. 생전 처음 입어보는 양복인데다, 한술 더 떠 바지는 다리선이 그대로 드러날 정도로 통이 좁았다. 통풍이 잘 안 되는 것은 물론이었다. 그나마 까칠한 마 느낌이 나는 걸 보면 여름 양복임이 분명했지만, 자신에겐 방한복마냥 거추장스럽고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어제 전화로 반드시 이걸 입고 오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하늘같은 고객의 명령이니 어쩌겠는가. 덕분에 오늘 하루 종일 흘린 땀만 해도 한 바가지가 넘을 터였다. 뿐이냐, 잔뜩 멋을 부린 야한 차림을 하고 학교엘 가니 평소의 배도 넘을 시선 공격을 받기까지 했다.

“물 마셨으니 됐습니다. 나가시죠?”

다시 차가워진 어조가 남자를 불안하게 만드는 모양이었다. 마시고 있던 아이스티 잔을 만지작거리는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한숨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주스가 좀 마시고 싶긴 하네요. 주스 시키겠습니다.”

마지못한 선언을 하자 남자의 얼굴에 간신히 안도감이 비쳤다. 기분을 맞춰주기로 작정한 자신을 역시 정확히 읽어내는 남자다. 젠장. 그랬다. 눈치를 보는 것은 남자뿐만이 아니었다. 손에 잡힐 듯이 드러나는 남자의 감정을 살피느라 자신 역시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되도록 남자에게 불필요한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자신 또한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얘기. 그야, 자신의 불편한 기분과 답답한 상황이 목을 짓누르는 것같이 느껴질 때는, 어쩔 수 없이 솔직한 감정을 드러냄으로써 남자를 심하게 상처 입히게 되긴 하지만 말이다.

탁자의 버튼을 누르자 깔끔한 유니폼을 갖춰 입은 웨이터가 메뉴판을 들고 나타났다. 오렌지 주스를 주문하니 허리를 90도 각도로 굽힌 정중한 인사와 함께 친절한 인사말이 보태졌다. 과연 특급 호텔의 로비 라운지답게, 깔끔하고 세련된 장식이 돋보이는 실내 풍경에 더해 서비스 또한 특급이 아닐 수 없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배시시 웃음을 머금은 채 자신의 눈을 응시하는 남자의 눈에 설핏 기쁨이 비친다. 자신의 염려가 기쁜 것이다. 욱신……. 젠장, 제발 좀 자신의 언동 하나하나에 저렇게 일일이 기뻐하거나 행복해하지 좀 말라고, 탁자라도 후려치고 싶다. 제발 자존심을 지키라고, 스스로를 세우라고, 멱살이라도 움켜쥐고 잘근잘근 흔들어주고 싶었다. 도대체 언제나 돼야 이 남자는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을까. 언제나 돼야 자신을 잊어줄까. 사랑을 멈출까. 이 숨통을 죄는 것만 같은 고통스러운 그것을.

“응, 그럼. 벌써 3시잖아.”

역시 익숙한 거짓말이 술술 흘러나온다. 늘 잠자코 있으니까 자신이 정말 속고 있는 줄 아는가 보다.

“주스 마시고 나가서 밥부터 먹어요.”

“어? 왜? 너 밥 먹었대며?”

“배가 고파졌어요. 식당에서 우동 한 그릇으로 때웠더니 속이 허전하네요.”

“저런. 거봐. 내가 구내식당만 이용하면 좀 그럴 거랬잖아. 게다가 우동이라니……. 차라리 밥이라도 먹지…….”

남자가 잔소리를 안 해도 면류 따윈 입에 대지도 않는다. 오징어볶음에 우거지탕을 곱빼기로 먹고 온 자신이지만 남자를 위해서 자신 또한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분명 이 시간을 기대하느라 거의 하루 종일 음식이라곤 입에도 안 댔겠지. 하긴 오늘 하루뿐이겠는가? 저 해골처럼 마른 몸을 보면 일주일간 무얼 먹기나 했을지 심히 의심스럽다. 오늘 또 지겨운 미술관 순례를 한다고 하니, 중간에 지쳐 쓰러지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예. 역시 밥이 나은 것 같더군요.”

“후후, 그럼 어디 갈까? 저번에 먹었던 그 한식집 갈까? 테헤란로에 있는?”

“여기서 그 멀리까지 갈 필요 있나요? 근처 아무 데나 선생님 좋은 곳으로 하죠. 초밥도 좋고요.”

고작 밥 한 끼 사 먹으러 명동에서 테헤란로까지 이동한단 말인가? 가끔씩 자각하곤 하는 일이지만 확실히 남자와 자신은 태생부터가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그 시간이며 돈이며, 무엇보다도 임금님 수라상도 그보다 더하진 않을 것 같던 호화찬란한 밥상이라니 말이다. 먹는 양보다 버리는 양이 열 배로 많을 것 같던 저 ‘테헤란로의 밥상’을 대하고, 자신은 포만감보단 죄의식을 먼저 느껴야만 했었다.

“정말 초밥도 괜찮아?”

“네. 요샌 별로 먹어본 기억이 없어서 좀 땡기네요.”

남자의 식성을 염두에 두고 슬쩍 질러본 말인데, 역시 잘한 것 같다. 환하게 퍼지는 미소로 봐서 그나마 좀 식욕을 느끼는가 보았다.

종일 굶었을 남자를 생각하니 어쩐지 초조한 기분이 들어서 반쯤 남은 오렌지 주스를 원샷으로 비워냈다. 주스 잔을 테이블 위에 놓자마자 몸을 일으켜 세운 것은 물론이었다. 느긋하면서도 품격 있는 라운지 분위기가 좋은지, 자꾸 미적거리려는 남자를 채근해 롯데호텔을 빠져나왔다.

남자의 BMW를 타고 곧바로 이동한 곳은 명동 뒤쪽의 작지만 깔끔한 퓨전 레스토랑이었다. 초밥과 회는 남자를 위해서, 그리고 등심 요리는 자신을 위해 주문한 남자는 생각만큼 음식을 입에 대지는 못했다. 고작 회 몇 점과 초밥 서너 개, 그리고 샐러드 반접시 정도를 마지못해 넘긴 수준이었다. 그야말로 병아리 모이만 한 수준이었다. 그조차도 힘이 드는지, 30분이 넘는 시간 동안 때때로 긴 한숨까지 토해가며 겨우겨우 먹어치웠다. 부른 배에, 입에 잘 맞지도 않는 등심 아스파라거스를 억지로 꾸역꾸역 삼킨 것보다도 남자의 상태에 더 속이 상했다. 강제로 병원에라도 데리고 가서 종합 진찰을 받아보게 해야 하는 건 아닌가, 남자를 굽어보며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나마 기분은 무척 즐거운 것 같아, 자신 또한 최선을 다해 남자의 기분을 맞춰주자고 작정을 했다. 물론 자신의 인내심이 언제까지 갈지 확신을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오늘만큼은 남자를 금쪽처럼 보호해야만 할 것 같았다.

식당을 나와 순례한 곳은 당연히 인사동과 관훈동 화랑가였다. 화랑가를 죽 둘러본 후엔 자신도 익히 알고 있는 선 화랑으로 찾아가, 화랑 주인인 선배에게 인사를 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러나 갈수록 남자의 체력이 달리는 바람에, 계획엔 약간의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애초에 계획해두었다던 서너 군데는커녕, 단 한곳을 둘러보는데도 남자는 벅차했다. 결국 남은 세 개의 갤러리 중, 남자가 좀 더 관심 깊어 한 작가들의 그룹전이 열리고 있는 화랑 하나를 택해, 남자는 느리고 꼼꼼하게 관람을 마무리했다. 조금도 바라지 않았건만, 아리송한 그림 앞을 지날 때마다 자신에게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작품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을 덧붙여준 것은 물론이었다.

새삼 의미 없을 일을 왜 하는가 싶기도 했지만, 어차피 남자도 제멋대로 자신을 대하기로 작정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오늘처럼, 남자는 마음 내키는 대로 자신을 데이트에 끌어내고, 원하는 대로 최고급 음식과 고가의 옷들을 선물하고, 자신이 싫어하든 말든, 고백이 하고 싶어지면 가슴이 절절할 정도의 진심을 담아 노도처럼 분출하기 일쑤였다. 자신의 용서가 떨어질 때까지 몸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터무니없는 고집 또한 남자 멋대로의 결정이었다.

그저 종속된 시간을 견딘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기에 그런 남자를 굳이 저지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모든 일련의 행동 또한 자신을 산 고객의 마음이었다. 욕망이었다. 자신은 그저 고객이 원하는 방식대로 따라주면 그뿐이었다. 그랬다. 진짜로 신경을 써야 할 것은 자신의 내면, 바로 자신의 평상심이었다. 수시로 자신의 영역을 침범해 들어오며 넋을 들쑤시곤 하는, 저 대책 없는 ‘고객’에게 휘둘리지 않기 위한, 자신의 철통같은 의지였다.

차는 어느새 의정부를 지나 포천 시내로 접어들고 있었다.

저녁 8시가 넘어 느지막이 서울을 출발한데다 (주말 덕을 톡톡히 입은) 길까지 막혀 의정부를 지날 무렵엔 이미 밤 10시가 넘어 있었다. 전형적인 변두리 소도시 특유의 나지막한 건물들이 죽 늘어서 있는 포천 시내를 지날 무렵, 다시 한 번 시계를 확인하니 15분 전 11시였다.

이동하는 두 시간 30분 내내, 줄기차게 수다를 떨어대던 뒷좌석의 여자들도 마침내 지친 모양이었다. 쌕쌕거리는 안정된 숨소리와 더불어 아직 멀었냐는 투정만이 간간이 넘어왔다. 룸미러를 통해 보니 둘 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눈치였다.

하긴, 말처럼 기운이 넘치는데다 어린애처럼 호기심만 많은 그 성질머리에, 졸지 않고서야 그 수다스러운 입을 다물 까닭이 없을 터였다. 남자나 자신이나, 이리 밤늦게 내키지도 않는 소도시 여행을 하게 된 것도 결국 저 뒷좌석의 뻔뻔스러운 두 여자들 때문이었다.

기하 선배라고 하는 중년 사내는 그 온화한 기질답게 완곡한 표현으로 여자들을 말리며 자신들을 돌려보내주려고 했지만, 드센 여자들에겐 먹혀들 턱이 없었다. 여자 둘(나경자와 한상희)은 눈만 껌뻑거리며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남자를, 의리니 뭐니를 들먹이며 즉시 성토하고 나섰다. 그야말로 벌떼처럼 들고일어나 남은 사내 둘(몇 달 전 선 화랑에서 안면을 튼 일이 있는 우은표와 오늘 처음 소개를 받은 남상욱)까지 충동질한 끝에 결국 남자를 승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자신 또한 울며 겨자 먹기로 끌려오게 된 것은 물론이었다.

표면적인 빌미야 물론 남자였다. 같은 미술 동인으로서 동료 한 사람의 임박한 전시회에 도움을 줄 필요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귓전으로 들은 얘기로는, 친구든 동료든 가능한 한 다 동원해 달라붙어야 겨우 예정된 기일에 맞출 수 있다고 했다. 남자의 몸 상태를 배려한 권 사장(기하 선배)이, 남자는 애초에 끼워 넣을 생각도 없었다며 극구 손사래를 쳤지만 여자들은 막무가내였다.

물론 알고 있었다. 여자들의 진짜 목적은 남자가 아닌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자신을 끌고 가고 싶어, 여자들은 애꿎은 남자에게 피곤할 정도로 의리를 들먹이며(최근 1년간 남자는 모임에 꽤 불성실했던 모양이었다) 닦달을 해대고 있었다.

남자 또한 거의 울상이 돼선 자신의 눈치만을 살피고 있었다. 남자라고 여자들의 빤한 속셈을 모를 리 없었다. 그 스스로도 내킬 리가 없었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이 꺼려할 것을 훤히 아는 남자로서, 이도저도 결정을 못 한 채 갈팡질팡하는 것은 당연했다. 결국 결정은 자신의 몫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별로 망설이진 않았다. 여자들의 자신에 대한 호기심이야 이미 이골이 나 있는 형편이고, 드센 기질에 비해 그녀들의 관심도 비교적 순수한 쪽이었다. 로맨틱한 연애 감정의 느낌도 별로 없고(설령 있다손 치더라도 친구나 동료들이 그득한 무리 틈바구니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낼 수도 없었으리라),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도 그저 탐미적인 호기심 이외에 다른 질척한 욕구는 읽기 힘들었다. 마치 그림의 모델을 바라보기라도 하는 듯한 담백한 호기심에 불과했다는 얘기다. 물론, 그 모든 이유들을 넘어, 일단 남자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싶은 기분이 강했다. 적어도 오늘만이라도 남자를 금쪽처럼 보호하자고 작정한 것이 바로 몇 시간 전의 일이 아닌가 말이다. 그저 조금 성가실 뿐인 하루를 참는 일인데 못 해줄 것도 없었다.

결국 자신의 예스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안도한 듯 편안한 표정을 만들어내는 남자였다. 여윈 얼굴에 아련히 떠오르는 부드럽고 환한 미소에, 독한 연민의 감정으로 속이 쓰리면서도 내심 잘했다고 스스로의 결정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것이 바로 세 시간 전쯤인 8시 무렵, 남자의 개인전이 치러졌던 선 화랑 사무실에서의 일이었다.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한쪽 손으로 자꾸만 눈을 비비는 모습이 걱정돼 조용히 물음을 던져보았다. 몹시 피로해 보였다. 저 몸으로 오후 내내 전시장을 돌고, 게다가 세 시간을 내리 운전까지 했으니 남자의 상태가 적이 짐작이 갔다.

30분 넘게 서로 깊은 침묵에 잠겨 있던 터라, 남자는 움찔 어깨를 떨며 조금 놀란 몸짓을 했다. 허나 이내 평온한 어조로 대답을 돌려준다.

“……응. 조금 그러네. 도착하자마자 바로 자야겠다. 그지?”

“그러게 여자들한테 운전을 맡기시지요. 다들 면허도 있다면서요.”

룸미러를 통해 시선을 맞춰오며 남자가 환하게 웃는다.

“……후후, 그래도 여자잖아. 명색이 나도 남자인데 건강한 손 두고 여자들을 부려먹을 수야 없지. 저 봐. 벌써 곯아떨어졌잖니. 드세 보여도 실은 얼마나 섬세한 친구들이라구.”

‘건강한 손’?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고도 저런 말이 나올까 싶다. 선글라스까지 벗으니 해골 같은 인상은 그야말로 더더욱 적나라하게 두드러지고 있었다.

“……아무튼 가는 거 허락해줘서 고마워, 위야. 별로 내키지 않았을 텐데. 게다가 내일까지도 추가로 봉사해줘야 하고.”

“됐습니다. 그만두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 얘긴.”

잠이 들었다곤 하지만 혹시나 모를 일이었다. 남자와 자신의 관계를 연상시키는 대화는 가급적 피해야 할 터였다. 역시 단숨에 자신의 의중을 캐치한 남자는 약간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가 이내 쑥스러운 듯한 웃음을 보내왔다.

“그래. 내가 주책이지? 역시 좀 피곤해서 정신이 없구나.”

“…….”

여자들을 뒤에 태우고 대화를 나누는 것은 그리 현명한 처신이 아니라고 판단한 듯, 남자는 그대로 입을 다문 채 운전에 열중했다. 여전히 가끔씩 눈을 비벼대서 걱정도 되고 속도 쓰렸지만 모르는 체하기로 했다. 지금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이번 여름방학엔 운전면허를 따두자고, 이제 그럴 때도 됐다고, 차창 밖, 시커먼 밤의 장막이 내려앉은 산길을 굽어보며 멍하니 생각을 흘렸다.

10여 미터의 간격을 유지하며 앞서가던 권 사장의 차가 마침내 속도를 더 줄이기 시작했다. 목적지에 거의 다 도착한 것 같았다. 포천 시내에서 지방도를 하나 타고, 작은 산을 하나 넘고, 이어 나타난 자그마한 시골 마을 하나마저 더 넘어왔었다. 마을 끝에서 다시 지방도 하나를 타고, 지금은 또다시 나타난 산 하나를 넘는 중이었다. 꽤 복잡한 여정인 셈이었다. 자가용 없이 대중교통으로 찾아오기엔 좀 무리가 있어 보였다. 아무리 서울 근교라지만 이렇게 교통이 불편한 곳에서 개인전이라니, 화가가 너무 무모한 게 아닌가 싶었다. 하긴 대형 설치 작품전이라면 평범한 상식으론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노릇이리라. 딱 한 달로 끝나버린 미술부 수업을 통해 주워들은 상식으로, 역시 화가들의 세계란 자신에게 있어 접근이 불가능한 아리아드네의 미궁처럼만 느껴졌다.

산을 거의 다 넘은 것 같았다. 차는 월봉국민학교라는 이정표가 적힌 가로등을 막 지나쳐 국민학교 방향으로 우회전을 하고 있었다. 드문드문 늘어선 가로등 외엔 온통 칠흑 같기만 하던 주변이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인가의 불빛이었다.

얼추 보이는 빛의 숫자로 미루어 총 스무 채도 못 미칠 매우 자그마한 시골 마을이었다. 마을 소로로 접어들고 나서 처음 지나친 집 담벼락엔 ‘민박’이라고 적힌 넓적한 간판이 붙어 있었다. 서너 번째 집을 지나칠 때도 같은 간판이 붙어 있는 걸 보면 근처에 관광지가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서울 근교 그린벨트 지역이다. 거의 대부분의 녹지가 관광지화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였다.

차가 멈춰 섰다. 권 사장의 검정색 그랜저 꽁무니를 따라온 지 무려 세 시간 10여 분만의 일이었다.

“……어? 응? 다 왔어? 어디야?”

“일어나, 아가씨들! 다 도착했다구!”

남자가 깨우기도 전에 차가 멈춰 서는 기척을 귀신같이 알아챈 여자들이 입가의 침을 닦으며 비척비척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남자는 권 사장의 그랜저가 세워진 바로 옆에 얌전히 차를 주차시켰다. 이내 원기왕성해진 여자들이 시끌시끌 뭐라고 수다를 떨어대며 먼저 차에서 내렸고 이어서 자신이, 그리고 남자가 차례로 차 안을 빠져나왔다.

주차장 맞은편 정면으로 보이는 것은 장방형의 아담한 모양새를 갖춘 2층 민박 건물이었다. 객실 수도 열댓 개를 넘지 않고, 총 건평 수 또한 200 정도 될까 싶을 작은 규모였지만, 관광지의 전형적인 펜션풍 민박답게 나름대로 아기자기한 외장으로 마무리한 흔적이 역력했다. 주차장(이라기보다는 거의 공터에 가까운 뜰) 앞, 100평에 가까울 널찍한 화단에는 각종 이름 모를 꽃들과 허브들, 그리고 상추나 쑥갓 같은 소채류가 각자 영역을 차지한 채 탐스럽게 자라나고 있었다. 건물 안에서 흘러나오는 어슴푸레한 불빛 외엔 사방이 칠흑 같은 어둠뿐이라 그 이상 정확한 외양이며 주변 풍경들을 살펴볼 수는 없었다. 아마도 남자의 동료들이 작업 마무리 기간인 며칠 동안 묵을 숙소인 모양이었다.

“인환이 수고했다. 따라오느라 힘들었지?”

다른 사내 둘과 그랜저에서 내린 권 사장이, 걱정이 들어간 부드러운 표정으로 남자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웃고 있긴 했지만 출발 전보다 한결 창백해진 남자의 안색에 좀 놀란 듯했다.

“저런, 얼굴이 말이 아니네? 빨리 들어가서 쉬어야겠다.”

“헤헤, 괜찮아요, 형. 자고 나면 거뜬해져요. 오늘 좀 많이 돌아다녀서요.”

“……그래, 그래야지. 하여간 어서 들어가자. 길이 꽤 막혀서 나도 좀 고생했다.”

“예, 그렇죠?”

“아니, 근데 이 자식들은 왜 코빼기도 안 비쳐?! 차 소리가 났으면 내다는 봐야 할 거 아냐! 좌우당간 선배를 영 우습게 알아요, 까져가지곤…….”

권 사장이 채 말끝을 맺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 모텔 현관문이 활짝 열렸다. 웅성거리는 말소리와 함께 일단의 사람들이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왔다. 얼핏 보니 사내가 대여섯에 여자가 둘이었다. 한결같이 얼굴에 발그레한 기운이 도는 걸 보니 술파티를 벌이던 중이었나 보았다. 대부분은 모르는 얼굴들이었고, 그중 유일하게 기억에 있는 얼굴과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치게 되었다.

흡혈귀처럼 새하얀 낯빛의 사내였다. 키가 제법 큰 탓에 유난히 더 말라 보이는 근육질의 몸집이 눈에 익었다. 자신을 바라볼 때의, 약간 입술이 비틀리며 비웃는 표정이 되는 재수 없는 인상 또한 그러했다. 결코 잊을 리가 없었다. 한세혁이라고 했던 것 같다.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는 자신이 놀라웠다. 당시 워낙 기분이 나빴던 때문이리라.

문득 뒤에서 자신의 재킷 자락을 살며시 움켜쥐는 부드러운 악력이 느껴졌다. 돌아보지 않아도 남자의 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잠깐 남자가 왜 사람들 앞에서 신경 쓰이는 행동을 하는가(이를테면 자신과의 관계를 의심받을 만한) 하는 의문과 짜증이 일었다. 도착하기 직전 차 안에서의 남자를 생각하면 이런 짓을 하는 남자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행히 주변은 손님을 맞아들이고, 또 도착했다고 신고식을 하는 양쪽의 소란스러운 인사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술기운까지 가세했으니 그 떠들썩함과 오버액션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자신의 뒤에 살며시 날아든 남자의 기묘한 행태에까지 관심을 기울이는 이는 없었다. 아니. 하나가 있긴 있는 것 같았다. 단 하나의 시선이, 자신의 어깨 너머로 남자의 얼굴을 빤히 굽어보고 있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 자신의 시선을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받아내던 싸가지 없는 환쟁이였다.

사내는, 그러나 표정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비웃는 눈빛 대신 약간의 동요가, 비틀린 입술 대신 벙긋하니 벌어진 얼간이 입매가 그러했다. 그 모두 사내가 품고 있을 어떤 세밀한 감정을 대변하고 있는 듯해서, 위는 새삼 눈을 가늘게 뜨고 사내를 응시해야 했다. 사내의 시선을 따라, 뒤에 숨어든 남자에게 시선이 옮겨 간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을 터였다.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당황이 드러난 얼굴이었다. 서로 시선을 맞대고 있는 한세혁의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될 극심한 동요가 남자의 눈빛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자신의 재킷 한 자락을 생명줄처럼 쥐고 있는 손은, 관절이 하얗게 드러나 보일 정도로 힘이 들어간 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무언가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스멀스멀 척추를 타고 지렁이가 기어 올라오는 듯한 그런 이상야릇한 불쾌감이었다. 자신의 시선조차 좀처럼 눈치를 못 챌 정도로 남자는 한세혁에게 전적으로 집중하고 있었다.

부드러움을 가장한 냉혹함으로 남자의 손길을 단숨에 뿌리친 것은 그저 단순히 불쾌감 때문이었다. 지렁이가 전신을 기어 다니는 듯한…… 축축하고, 차갑고, 끈적끈적한 그런 불쾌감. 절대로 남자 때문이 아닌, 그런 야릇한 자신의 감정 때문이었다.

가차 없이 밀어내자, 겨우 남자의 얼굴이 자신에게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남자의 얼굴은 따귀라도 맞은 것마냥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물론 따귀를 때린 놈은 자신이었다.

남자의 눈시울이 보였다. 상처와 혼란과 고뇌와 두려움이 회오리처럼 뒤엉켜 극심하게 흔들리고 있는 눈시울이었다. 휘둥그레져서 한동안 자신을 절실하게 응시하던 그것이 다시금 사내에게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등을 타고 올라간 지렁이가 머릿속으로, 겨드랑이 틈으로, 옆구리를 거쳐 사타구니 속으로 숨더니 이내 허벅지 아래까지 파고들었다. 온몸이 지렁이 천지인 것만 같았다.

삐죽 하고 사내의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가는 게 보였다. 자신에게도 익숙한, 상대의 인격을 인정사정없이 깔아뭉개고 지배하기 위한 용도로나 쓸 법한, 그런 야비한 비웃음이었다. 비웃음이 던져진 곳은 짐작대로 남자의 눈동자였다. 자신은 이해할 수 없는 혼란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바로 조금 전에 자신이 따귀를 날린 바로 그 남자였다.

배 속이 들쑤셔지는 것만 같았다.

불쾌감이 걷잡을 수 없으리만큼 치솟고 있었다.

“인환이 진짜 오랜만이네?! 오느라 고생했지? 어라?! 근데 얼굴이 왜 그러냐?! 아주 백짓장이구만! 괜찮냐?!”

현관 앞의 떠들썩한 무리 중 한 사내가 남자를 향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사내의 외침을 계기로 무리 대부분의 시선이 한꺼번에 이쪽(남자와 위 자신이 서 있는 뜰 한구석)으로 쏟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어디 다친 거냐? 눈가는 또 왜 그래? 몇 바늘 꿰맨 거 같네?”

“웬일이래?! 장인환 너도 얼굴 깨질 때가 다 있냐?! 꽤 터프해 보인다?!”

“뱃멀미 했나 보네?! 얼굴이 아주 노랗다, 야!”

“인환이가 배 타고 왔냐? 뱃멀미를 하게?”

“어? 참치잡이 배 탔다며? 바다 구경 실컷 하고 올 거라더니?”

“새끼, 완전 맛이 갔구만. 그건 대철이 얘기잖아.”

“어, 그런가? 인환이 아녔어?”

“하하, 취했구만, 짜식. 민규 빨리 데려다 재워야겠다.”

“취하긴요, 기하 형. 아직 한참 더 마실 수 있어요. 아까부터 형들 기다리고 있었는데…….”

“안 취하긴 뭘 안 취해? 중심도 못 잡고 섰는 놈이. 그리고 나도 오늘은 피곤해서 그냥 잘 거야. 너희도 그만하고 끝내. 석주 도와주러 뭉쳤지 놀자고 뭉친 줄 알아?”

“헤헤, 역시 울 기하 형밖에 없어요∼∼∼.”

“야, 쏘주 사 오라고 한 놈은 너다, 송석주!”

“어라? 근데 저 꽃미남은 머냐?”

“글게? 어서 영화라도 찍냐? 아주 번쩍번쩍하누만?”

“어, 진짜 취했나? 티브이에나 나올 미남이 있어요, 저기.”

“쟨 누구야? 누가 달고 왔어?”

“인환이 후배래.”

“후배?”

“근데 인환인 얼굴이 왜 그 모양이냐?”

“작년부터 저 지경이라고 했잖아. 붓만 들면 몸이 꼬치꼬치 마르는 최악의 슬럼프에 빠졌다고.”

“인환이가 왜? 전시회도 그만하면 성공인데 뭐가 아쉬워서?!”

“내 말이 그 말 아니냐. 왜 저러나 몰라요. 몇 달간 10호짜리 캔버스 하나도 다 못 채웠다잖냐. 아주 한심해 죽겠어, 새끼.”

“남 말 할 처지냐? 그림은 뒷전이고 맨날 오락실에서 죽 때리는 놈이?”

“나야 워밍업이지. 대작 들어가기 전에 에너지 좀 비축해두겠다는데 지랄이야.”

“영도, 너야말로 슬럼프인가 보네?”

“으악! 슬럼프라뇨, 기하 형! 무슨 그런 지독한 저주를! 말이 씨가 되는 거 몰라요?!”

“하하, 슬럼프라고 정직하게 찔러줬다가 저 맞아 죽는 줄 알았다구요, 형.”

“살 빠진 거 그대로네? 얼굴이 아주 죽상이다, 인환아. 진짜 어디 많이 고장 난 거 아니냐? 종합 검진이라도 받아보지?”

“……어, 아냐. 그냥 운전을 좀 오래 했더니 살짝 피곤해서 그래. 오랜만이다, 석주야.”

위의 뒤에서 벗어나 천천히 동료들 쪽으로 다가가며 남자가 대꾸했다. 동요가 가신 태연한 어조였지만 남자의 흐느적거리는 발걸음은 유난히 불안정하게 느껴졌다. 뒤따라가 부축을 하고픈 욕구로 잠시 마음이 흔들렸지만 여전히 불쾌한 감정적 앙금이 사지를 묶고 있었다. 비웃음을 머금은 환쟁이의 오만한 시선 또한 여전히 뚫어질 듯 남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좇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꺄, 그러게 그 몸으로 뭘 하겠다고 내려오냐? 방해나 안 되면 다행이겠구만, 금방 쓰러질 거같이 생겨가지고…… 딸기밭에서 초상 치를 일 있냐?”

“……괜찮다니깐. 그나저나 기대가 크다, 석주야. 크게 벌일 모양이네?”

“크긴 뭘. 그냥 한번 질펀하게 놀아보자는 취지지.”

“저 꽃미남은 누구냐니까? 인환아, 델꾸 왔으면 소갤 시켜줘야지!”

“인환이 고등학교 후배라니까, 언니는∼∼! 이번에 대학 들어간 초 영계라우. 기하 선배네 들렀다가 내빼려는 걸 경자랑 내가 간신히 끌고 왔어. 우리 잘했지?”

“와우, 스무 살 꽃띠?”

“응. 유전자 조합이 환상 아니유? 완전 아트요, 아트! 증말 이뻐.”

“오호호호, 과연 얼마 만에 해보는 눈보신이란 말이냐?”

“칼쑤마가 장난 아니네?! 아가 주제에 진성 마초라니!”

“위 군?! 문위 군, 이리 와봐! 울 이쁜 누나들 소개시켜줄게!”

서울에서부터 동행한 여자 둘이 호들갑스레 손을 흔들자, 여자들뿐 아니라 불콰한 알코올기가 선연한 사내들의 시선까지 일제히 자신에게 쏟아졌다. 동료들 틈새에 섞여 여전히 창백한 낯빛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 남자의 불안정한 시선도 자신을 향해 있었다.

“이리 오라니까. 우리들 자네 안 잡아먹어요. 누드 모델이라도 서달라고 떼쓸 거 같아? 왜 거기서 혼자 주뼛거려?”

펜션 안에서 나온 여자 중 하나가 성희롱에 가까울 발언을 하며 이기죽거렸다. 약간 혀가 말린 어조는 물론, 발그레하게 상기된 얼굴을 보니 여자 또한 꽤나 취한 듯싶었다. 가뜩이나 불쾌한 기분에 속을 끓이고 있던 터라, 반쯤 정신이 방기된 술꾼들에게 싹싹한 사교를 베풀 마음 따윈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동기들에게 하듯 뒤틀린 속내 그대로 저들을 완전히 쌩깔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무리 대부분이 20대 중 후반인(그중 한둘은 30대 초반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연장자들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오늘은 최대한 남자를 배려해주자고 작정한 때문이었다. 되도록 상처 주지도 말고, 되도록 원하는 것을 들어주자고. 솔직한 속내를 드러내 새삼 남자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도 애처럼 치졸한 짓거리일 터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문위라고 합니다.”

허리를 30도쯤 굽힌 깍듯한 인사를 던진 후 가까이 다가갔다. 권 사장이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일일이 소개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개될 때마다 남자들과는 악수를, 여자들과는 목례를 나누었다. 대부분은 남자와 같은 동료 화가들이었고, 미술 잡지 기자와 전시 기획자도 한둘 끼어 있었다. 다들 술에 취해 있어선지 아니면 기질 문제인지, 십년지기 친우를 대하듯 격의 없고 천진스러운 저들의 태도는 꽤나 거북살스러웠다.

다르지 않았다. 남자의 동료들도 남자와 다름없이 자신에게 지나치게 관대했다. 천진스러운 아이들마냥 너무 쉽게 타인을 믿고, 너무 쉽게 타인을 받아들였다. 기성 세대 특유의 권위주의라곤 일체 읽을 수 없는 철없고 발랄한 순수의 아우라가 무리를 감싸고 있었다. 유일하게 적대감을 드러내는 사내 한세혁조차도 어딘가 딴 세상 사람 같은 탈속의 아우라에 있어선 그닥 다르지 않았다. 그것이 예술가들 특유의 분위기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히 위는 저들에게 있어 생뚱맞은 이방인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서로 계통이 다르다는 자각은 자신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몇 마디 말과 표정을 교환한 것만으로도 무리들 또한 예술에 무지한 위의 범속한 천품을 어느 정도 파악한 듯싶었다. 물론, 몇 달 전 권 사장의 갤러리에서 저들 중 일부와 안면을 텄을 때부터 자각을 한 사실이기에 새삼 자격지심을 느낀다거나 불쾌해할 일은 아니었다.

다만, 자신을 닳고 닳은 속물 보듯 하는 한세혁의 시건방진 작태는 도저히 용납이 되질 않았다. 시선을 줄 가치조차도 못 느낀다는 듯, 사내는 노골적으로 위를 무시하고 있었다. 우연히 시선이 부딪치면 어김없이 한쪽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비웃는 표정을 연출하곤 했다. 마치 벼락 졸부라거나 안하무인 골목대장을 대하는 듯한 무례한 작태에 한편 기가 막히기도 하고, 한편 울화가 치미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떠들썩한 와중에도, 한 마디 말도 없이 줄곧 남자만을 뚫어질 듯 응시하고 있는 음습한 작태 또한 짜증스럽긴 한가지였다.

더 울화가 치미는 까닭은, 남자 또한 한세혁의 시선에 심하게 동요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자신과 함께 있을 땐 온통 자신에게만 향해 있곤 하던 남자의 레이더가 현재 거의 작동 불능 상태인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확실히, 지금 이 순간 남자의 의식을 사로잡고 있는 존재는 위 자신이라기보다 저 재수 없는 환쟁이였다. 위가 모르는 무언가가 저들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게 무엇이 됐건 자신에게 있어선 틀림없이 불쾌한 종류의 사건임엔 다르지 않을 터였다.

속이 뒤틀리다 못해 아플 지경이었다. 남자를 그만 쳐다보라며 한세혁에게 따귀라도 갈기고픈 욕구로 손이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었다. 어째서 이렇게 부아가 치미는지, 고작 자아 도취에 빠진 화가 나부랭이일 뿐인 사내에게 어째서 이렇게까지 혐오감이 느껴지는지, 변덕스럽기 짝이 없는 스스로의 기분 상태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평정을 잃고 있는 자신에게조차도 짜증과 초조감이 솟구쳤다.

펜션 현관 앞에 죽 늘어선 애어른들의 수다는 그들과 일일이 안면을 트고 나서도 20분쯤은 더 계속되었던 것 같았다. 간단한 내일 일정부터 작업 진행 정도, 혹은 새벽 일찍 서울로 올라갈 몇몇 이들과의 작별 인사들 같은, 꼭 필요한 것에서부터 뜬금없이 개구리 소리가 듣기 좋다는 둥, 별이 별로 안 보여 가슴까지 황량하다는 둥, 유치하지만 애끓는 탄식에 이르기까지 그 주제들도 다종다양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남자는 관자놀이 부근을 손가락으로 누르며 눈에 띄게 피로를 드러내고 있었다. 동료들의 수다에 미소를 머금은 채 싹싹한 응대를 해주곤 했지만, 낯빛은 점점 더 창백해지고 있었다. 분노와 짜증, 그리고 남자에 대한 걱정으로 초조감이 극에 달할 무렵 겨우 구원이 왔다.

“벌써 자정이네? 그만 들어가서들 자자.”

권 사장이었다.

벌써 자냐는 둥, 아직 술이 꽤 남았다는 둥, 몇몇 반항적인 툴툴거림은 새벽같이 깨워 부려먹겠다는 권 사장의 엄포로 흐지부지 꼬리를 감추게 되었다. 남자의 동료들 중 거의 유일할 상식인이리라고, 위는 온화한 용모의 중년 사내에게 높은 점수를 던져주었다.

“어때? 그럭저럭 잠은 잘 수 있겠지?”

거푸 하품을 쏟아내며 권 사장이 남자에게 동의를 구하고 있었다. 권 사장이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서자, 권 사장의 등판에 한동안 가려 있던 시야가 비로소 탁 트이며 방 안의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일곱 평이 채 될까 말까 한 좁은 원룸 안에 더블 침대 하나와 옷장 하나, 그리고 싱크대와 선풍기와 냉장고가 나름대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소박한 펜션형 숙소였다.

“그래도 너 온다고 석주가 특별히 따로 잡은 방이라더구나. 우린 완전 군대 내무반 수준이다. 시꺼먼 사내놈들이 열 명이서 옹색하게 구겨 자게 생겼어. 늙은 선배라도 얄짤없더구만, 짠돌이 자식. 이 나이에 MT 오게 생겼냐?”

“그랬어요? 그럼 이 방은 기하 형이 쓰세요. 저희도 큰방에서 자도 돼요.”

“니 얼굴이나 보고 말해. 짜식들 꽤 퍼마신 것 같은데, 코고는 놈들이 한둘이 아닐 거다. 예민한 네가 한숨인들 잘 수 있겠어? 쓰러지기라도 하면 그게 더 늙은 선배 고생시키는 짓이야.”

“……정말 괜찮은데…….”

“괜찮지 않아. 아무튼 오늘 밤은 푹 쉬고…… 내일 상태 봐서 정 못 견디겠다 싶으면 일찌감치 서울로 올라가라. 경자랑 상희도 괜히 들떠서 그렇지, 막상 일 도와주다 보면 딴 데 신경 쓸 여유 없을 거야. 천하의 리버가 데이트를 신청한대도 일이 우선일 여류들 아니냐? 하하…….”

권 사장의 웃음 띤 시선이 힐끗 ‘딴 데’를 살피며 덧붙였다. 시종 ‘딴 데’의 눈치만을 살피던 남자도 파리하게 따라 웃는 게 보였다.

“……경자가 그러는데 리버(타계한 청춘 배우 리버 피닉스를 말함. 1991년 당시엔 생존)보다 위가 더 근사하게 보인대요.”

“엑?!!! 그 정도야?!!!”

“예. 월요일에 위 수업이라도 없었으면 예서 오도가도 못 하게 발이 묶였을 거예요.”

“하, 대단하네? 요새 여류들이 한창 기염을 토하고 있는 포름(forme. 조형미술 용어로 시각에 근거한 일정한 크기를 가지는 형태. 여기선 배우 리버 피닉스를 의미)보다 낫다니. 앞으로 조심해야겠는걸, 위 군? 영감 끌어내겠다고 여류들이 툭하면 자네 불러낼지도 몰라.”

“헤헤, 그러게요.”

“……쉬어라. 얼굴이 진짜 말이 아니다, 인환아.”

“예. 안녕히 주무세요, 기하 형.”

“위 군도 편히 쉬고.”

“안녕히 주무십시오.”

연달아 터진 하품에 살풋 진저리를 치던 권 사장은 남자 못지않게 꽤 피로해 보였다. 자신과 남자가 던진 깍듯한 인사도 받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눈꼬리에 매달린 하품의 잔재를 훔치며 서둘러 방을 나갔다.

“……피곤하지? 오늘 땀도 많이 흘리던데…… 얼른 샤워 해, 위야.”

힘이라곤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은 목소리가 채근했다. 권 사장이 나가자마자 방 안의 창문부터 열던 남자는 여전히 조심스레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선생님부터 하세요. 많이 피곤하시잖습니까.”

아무리 남자의 비위를 맞추자고 스스로를 억눌러도 말투엔 어쩔 수 없이 가시가 돋친다. 겁에 질린 토끼처럼 안절부절못하며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남자의 등신 같은 작태가 새삼 울화를 부채질하고 있었다. 그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남자의 상태에 대한 쓰라린 연민이나 근심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도대체 남자는 자신의 무엇을 이렇게까지 두려워하는가. 남자의 두려움과 저 시건방진 화가와는 또 무슨 관계가 있는가.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남자는 저렇게 겁에 질린 눈으로 자신을 살피는가 말이다, 젠장. 남자를 다그쳐서 당장 까닭을 캐고 싶으면서도, 솔직히 ‘고객’의 개인사 따위에 연연해하는 자신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고객’보다도 그것에 이렇게까지 짜증을 내는 스스로가 차라리 더 어이없는 쪽이었다.

“……너만 괜찮으면 난 그냥 자고 싶은데, 위야. 지금 샤워 할 기운 없어서…….”

아마도 확연히 구겨졌을 자신의 표정에 거의 울상이 되다시피 한 남자가 겨우 대꾸했다. 땅속으로 꺼지는 것처럼 힘이 없는 목소리였다.

목구멍을 확 틀어막는 분노의 응어리를 지그시 눌러 참으며 방문 옆에 붙은 욕실로 들어섰다. 좌변기 하나와 세면대 하나, 그리고 샤워 꼭지 하나가 겨우 설치돼 있는 손바닥만 한 욕실엔 옷을 벗어 걸어둘 행거는커녕 변변한 욕실장조차 마련돼 있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다시 욕실 밖으로 나가니, 침대에 쓰러지다시피 엎드려 있던 남자가 힘겹게 고개를 치켜드는 것이 보였다. 시체처럼 파리한 그 안색을 보면 또 복장이 터질 것 같아, 모르는 체 외면하고 벗은 옷가지들을 옷장 안에 쑤셔 넣었다.

애절하고 가슴 아픈 시선이 내내 따끔따끔 뒷덜미를 쑤시고 있었다. 피곤으로 죽을 것 같은 몰골을 하고 있으면서 잘도 그런 마음이 드는군. 한 치도 움직일 줄 모르는 남자의 질긴 연정에, 속으로 위악적인 비웃음을 던지는 자신이 있었다. 남자에게 휘둘리지 않기 위한 자기보호 본능일 것이다.

갈아입을 속옷도, 양말도 없다는 자각은 양말과 팬티만을 걸친 우스꽝스러운 차림새로 다시 욕실에 들어서고 나서야 들었다. 오염된 속옷으로 이틀을 버티느니 내일 아침 축축한 팬티를 입는 편이 훨씬 덜 찝찝할 것이다. 팬티와 양말을 벗어 비누로 깨끗이 문질러 빤 후 세면대 위에 널었다. 치약은커녕 칫솔도 없지만 그나마 비누라도 구비돼 있는 것이 천만다행이라 생각되었다. 큰방에 몰려 있을 남자의 동료들에게 가면 세면도구쯤이야 쉬이 빌릴 수 있었겠지만, 다시 또 그 무리들과 접촉하고픈 마음은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실은 한세혁의 시건방진 낯짝을 보고 싶지 않은 것이 이유일 테지만). 어차피 미리 계획돼 있던 여정이 아니니 약간의 불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몇 번이나 비누칠을 해서 꼼꼼하게 샤워를 했다. 하루 종일 땀으로 범벅이 돼 있던 몸은 단 5분 만에 깨끗이 물로 씻겨나갔다. 복잡하고 울적한 심사까지 샤워로 말끔히 날려버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속이 후련하랴. 그러나 남자와 함께인 한은 전혀 불가능한 일일 터이다.

따로 걸칠 옷이 있을 리 만무한 알몸에 수건으로 치부만을 가린 채 욕실을 빠져나왔다. 반사적으로 침대를 살피니, 이미 깊은 잠이 든 듯 남자는 침대에 엎드린 자세 그대로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침대로 가까이 다가가며 자신도 모르게 발소리를 죽이고 있었다.

물방울이 뚝뚝 듣는 머리카락을 문지르던 손놀림도 잊은 채, 베개에 파묻히다시피 한 남자의 창백한 얼굴을 한동안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남자에 대한 쓰라린 연민과 어떡해도 자제가 안 되는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혐오감이 극과 극으로 시소를 탔다.

“……옷 벗고 주무세요.”

“……zzzz…….”

“……불편하실 겁니다. 벗고 주무세요.”

“……zzz…… zzzz…….”

정말로 남자를 깨우고자 던지는 질문일 리는 없다. 그렇다면 이렇게까지 숨죽인 소곤거림을 할 까닭이 없으니까. 확신이 필요했을 것이다. 자신이 조금 만져도, 이렇게 실컷 바라봐도 절대 남자가 깨어날 리 없다는 확신.

망설이던 손을 남자의 여윈 어깨 위에 뻗었다. 막연한 망설임은, 그저 덧옷을 벗겨 편한 숙면에 들도록 하기 위한 남창으로서의 배려일 뿐이라는 대답으로 납득시켰다. 엎드려 있던 남자의 상반신을 껴안듯이 끌어당겨 바로 눕혔다. 자신의 팔 안에서 물 먹은 솜처럼 무겁게 늘어지는 몸은 역시 깨어날 기미라곤 보이지 않았다. 흐릿하게 뿜어지는 숨결이 아니었다면 죽은 시체로 봐도 무방할 정도라, 안고 있는 자신의 팔이 불안으로 조금 떨렸다. 코 안 가득 밀려드는 남자의 달달한 체취에 온몸의 감각이 반응하며 기쁨을 호소했다. 남자를 도로 침대에 눕히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품에 끌어안고 싶은 욕구를 떨치기 위해 한참을 고민했다. 순식간에 반쯤 일어선 하반신의 짐승 또한 좀처럼 가라앉지가 않았다. 점입가경이었다.

사나운 욕설을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던진 끝에, 겨우 남자를 바로 눕히고 카디건의 단추를 풀어 헤쳤다. 어째서 손가락 끝이 이렇게 떨리는가는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까닭 모를 수치심과 자격지심은, 역시 생리적인 반응일 뿐이라는 변명으로 얼버무렸다.

카디건을 조심스레 벗기자 V넥의 새하얀 민소매 티가 남자의 가무잡잡한 어깨를 선명히 드러내며 시야로 파고들었다. 탈구가 됐던 왼쪽 어깨엔 더 이상 압박 붕대가 감겨 있지 않았다. 이만하길 다행이라고 다시 한 번 그 누군가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무럭무럭 솟았다.

티셔츠의 눈부신 흰빛 때문인지 부드러운 근육이 잡혀 있는 어깨도, 지나치게 마른 팔 근육도 유달리 매끈하고 단정해 보였다. 과하게 태닝이 돼 있던 피부도 얼추 본래의 피부 톤을 되찾고 있었다. 본래의 체중만 회복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완벽한 몸뚱이일 것이다. 거품이 보글보글 이는 맥주 빛깔 같은 옅은 갈색의 피부는 뭇 여자들의 크림색 피부들보다도 더 지독하게 섹스를 자극했다. 손바닥으로 만지고 싶었다. 입술로 문질러도 보고, 종내는 빨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젠장. 다시 화장실로 가 뽑아내지 않으면 절대 잠들 수 없을 것 같다.

쇠사슬 장식이 붙어 있는 벨트로 손을 뻗어 남자의 블랙 진을 벗겨내는 데는 더한 인내력이 요구되었다. 보통보다 확실히 가늘고 매끈한 허벅지며 종아리긴 해도 명백한 사내의 그것이었다. 바짝 응축된 엉덩이 근육도, 수직으로 뚝 떨어지는 밋밋한 힙 라인도, S자를 그리는 여자의 부드러운 굴곡과는 영판 달랐다. 그럼에도 자신의 짐승스러운 성욕을 증폭시키는 데는 한 치의 부족함도 없었다.

벗겨낸 바지를 침대 발치에 내던지고도 한참 동안 남자의 늘씬한 다리를 굽어보았다. 입고 있는 삼각팬티에서조차 남자의 섬세한 멋부림이 느껴져서, 가파른 상승 곡선을 타고 있는 성욕에도 불구하고 쓴웃음이 일었다. 허리 밴드에 캘빈클라인 로고가 선명한 검정색 삼각팬티는 오른쪽 밑단에 금색의 번개무늬 자수까지 놓여 있는 화려한 것이었다. 까만 바탕에 아래로 쭉 뻗어 있는 금색 번개무늬가 또 묘하게 섹시해서, 그곳에 이를 박고 싶은 원초적인 욕구가 간절해졌다.

홀린 듯 남자의 두 다리를 벌리고 있는 자신의 손이 어쩐지 낯설었다. 섹스를 할 생각은 없다. 분명히 없다. 고집부리지 말고 편해지라고, 서로 쾌락을 취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남자에게 궤변을 늘어놓은 것도 그저 감당하기 힘든 당혹감을 떨치기 위한 변명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꼴리면 언제든 스스로의 몸을 이용하라던 남자의 저 가슴 저린 허락이 없었더라도, 자신은 절대 남자를 성욕 배출구로 취급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남자를 위해서라기보단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원인 때문이었다. 그날처럼 제정신이 아니었다면 모를까, 남자가 요구하지도 않는데 자신의 의지만으로 남자와 몸을 섞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위험…… 하다……. 내부의 무언가가 스스로에게 경고를 주고 있었다. 어떻게, 무엇이 위험하다는 건지 정확히 납득할 순 없었지만, 어쨌건 위험한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

30도쯤 다리를 벌린 음란한 자세로 남자는 무방비하게 잠에 빠져 있었다. 새하얀 스판의 민소매 티는 눈이 부시고, 배꼽을 살짝 드러내고 있는 까만 팬티는 도발적이었다. 자연스레 양옆으로 늘어져 있는 두 팔도, 갸름하고 예쁜 손가락도, 부드러운 근육이 느껴지는 가무잡잡하고 매끄러운 다리도, 까만색 실크 양말에 감싸인 두 발도 오싹오싹 욕망을 흡입했다.

입안의 침이 마르는 것만 같았다. 귓전에 울리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드럼 소리처럼 요란했다. 저 몸 위에 눕고 싶었다. 빈틈없이 겹치고 싶었다. 아니, 아니. 저 안으로 깊숙이 뚫고 들어가 하나가 되고 싶었다. 가능할 일이었다. 손만 뻗으면, 이렇게 부들부들 떨고만 있을 게 아니라 그저 조금만 더 앞으로 뻗기만 하면, 남자는 기꺼이 몸을 열어주겠지. 저 예쁜 다리로 자신의 허리를 감싸줄 거고. 힘껏 달라붙어줄 터다. 그럴 것이다.

똑똑.

느닷없이 들려온 노크 소리에 흠칫 어깨가 떨릴 정도로 소스라쳤다. 심장이 걷잡을 수 없으리만큼 쿵쾅거렸다. 남자의 모습에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터라, 금지된 장난을 치다 들킨 악동처럼 막연한 수치심과 두려움에 몸서리를 쳤다. 얼마나 오랫동안 남자를 들여다보고 있었던 건지 짐작조차 불가능했다. 하. 미친 저질 변태 얼간이가 따로 없었다.

똑똑.

처음보다 강도를 높인 노크 소리가 다시 한 번 되풀이되었다. 수건 한 장으로 간신히 가려진 치부는 돛대처럼 우뚝 솟은 상태였다. 다행히 권 사장이 나가고 본능적으로 방문을 걸어 잠근 기억이 되돌아오지 않았다면, 아마 패닉으로 온몸이 굳어들었을 것이다.

사위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욕실로 들어갈 때만 해도 내내 이어지던 시끌벅적한 소음이 사라진 걸 보니, 남자의 동료들 역시 잠자리에 든 것 같았다. 벽에 걸린 시계로 시선을 가져가니 새벽 1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똑똑.

노크 소리는 낮고도 집요했다. 설령 상대가 잠들었다 해도 깨우려는 심보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고집스러움이었다. 물론 열어줄 생각은 없다. 어쩐지 문 밖의 불청객을 알 것 같았다. 애초의 패닉은 당혹감으로, 당혹감은 다시 걷잡을 수 없는 불쾌감으로 건너뛰었다. 단 몇 초 만의, 폭풍 같은 변화였다.

“……누구십니까?”

낮게 으르렁거리는 자신의 목소리엔 숨길 수 없는 분노가 드러나 있었다.

“……선생님께선 주무시는데요?”

“…….”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아침에 뵈었으면 합니다만.”

“……열어봐.”

만만치 않은 으르렁거림이 문밖에서 들려왔다. 한세혁이었다. 깔아뭉개는 듯한 놈 특유의 명령조에, 내장이 확 꼬이는 것만 같았다.

“주무시니 내일 말씀하십시오.”

“열어, 꼬맹이.”

“…….”

“정말 자는 게 맞아? 그럴 리 없는데?”

“…….”

“나 신경 쓰느라 쉽게 잠들 수 없어, 인환이. 열어봐.”

저의가 담긴 도발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현명할 처신보다는 놈의 뻔뻔스러운 자만심을 후려치고픈 어리석은 욕구가 더 강했다. 자길 신경 쓰느라 못 자? 하! 피크로 치솟은 분노 게이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잔뜩 부풀어 있는 하반신도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보여주고 싶었다. 남자와 이런저런 수작들을 하고 있다는, 아니, 앞으로 할 예정이라는 사실을 여봐란 듯이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의 입장도, 남자의 처지도 알 바 아니었다. 동성의 섹스 파트너라는(정확히는 남창과 고객 사이라는) 저 움직일 수 없는 수치스러운 현실이 남자의 동료들에게 적나라하게 드러난대도 전혀 개의치 않을 것이다.

찰칵.

잠금쇠가 풀리는 금속성 소리가 요란했다. 호전적인 흥분으로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손잡이에 거칠게 힘을 가하자 방문은 여봐란 듯이 활짝 열어젖혀졌다.

60와트가 채 안 될 뿌연 조명이 펜션의 2층 복도를 어슴푸레 밝히고 있었다. 펜션 현관 앞에서 처음 봤을 때의 차림 그대로, 사내는 검정색 팬츠에 검정색 폴로셔츠를 걸치고 있었다. 몇 달 전, 선 화랑에서의 첫 대면 때도 블랙 일색으로 도배를 하고 있던 사내였다. 까마귀처럼 불길하고 재수 없는 분위기엔 딱이라고, 위는 강박증임에 분명할 놈의 패션 취향부터 실컷 비웃어주었다.

“그럼 직접 확인해보시죠.”

최대한 감정을 가라앉힌 나지막한 대꾸에, 한세혁의 시선이 자신의 전신을 짧게 훑고 지나갔다. 자신의 벌거벗은 알몸에도, 허리에 둘러진 수건 위로 선명한 발기의 자취에도, 사내는 그리 당황하지 않았다.

……역시 알고 있다. 자신과 남자와의 관계를 어떤 형태로든 알고 있었다, 이 자식은…….

사내의 무위한 시선으로 해서 막연했던 짐작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확신은 내면의 호전적인 불길에 왈칵 기름을 부어주었다. 놈이 자신을 팽팽하게 의식하듯, 자신 또한 온몸의 감각을 일깨우며 놈의 모든 것에 더듬이를 세우고 있었다. 적대감과 공격성이 한계까지 치솟았다.

시체처럼 새하얀 안색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술 냄새가 진동하는 몸이 자신을 스쳐 방 안으로 들어섰다. 약간 불안정한 걸음걸이랄지, 신발을 신지 않은 맨발의 모양새만이 사내가 취한 것을 희미하게 증거해주고 있었다.

술꾼이라니, 더더욱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어느새 놈은 침대 가까이 다가가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놈의 뒷덜미를 잡아채 복도로 내던지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물이 끓는 것처럼 쉭쉭거리는 소리가 숨길을 타고 흘러나왔다. 호흡을 하는 게 아니라 열기를 뽑아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놈이 침입하기 직전까지 자신의 눈을 홀리던 남자의 무방비한 몸뚱이가 놈의 시야 속으로 고스란히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핥아 먹는 것처럼 탐욕스러운 시선이었다. 젠장할. 커튼이 쳐지는 것처럼 놈의 눈에 떠오른 것은 명백한 욕망이었다!!!

정수리 끝까지 끓어 넘친 열기가 눈시울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있었다. 손가락이, 주먹이, 팔이, 독이 퍼지듯 점점 뻗어 올라가며 부들부들 떨렸다. 막아야 했다. 이 순간, 누군가 놈의 눈을 후벼낼 수 있게만 해준다면, 혼이라도 팔 수 있을 터였다.

평온을 가장한 얼굴로 침대 가까이 다가갔다. 남자의 아래 깔린 시트를 단숨에 벗겨 남자의 몸에 둘렀다. 얼굴까지 다 덮어씌우고 싶었지만, 그것은 명백히 속 보이는 짓일 터였다. 목 끝까지 시트를 덮어준 다음, 몸의 실루엣조차 잘 드러나지 않게끔 풍성하게 바람을 넣어 시트를 정돈했다.

놈에게 저지라도 당했다면 참지 못하고 주먹이 올라갔겠지만 다행히 놈은 묵묵히 자신의 몸짓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랬다. 놈이 도발하지 않는 한 자신은 참을 수 있었다. 참을 것이다. 흔들림 없이 태연하게, 동료의 착실한 후배 역을 연기하겠다. 이 순간, 만약 자신이 동요하고 있다는 걸 놈에게 눈치채인다면, 자신은 목이라도 매고 싶을 정도로 절망할 것이다.

“……달콤하지 않아?”

흐릿하고 나른한 쇳소리가 천천히 놈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헤테로가 보기에도 꽤 먹음직한 육체라고 생각하지 않나, 꼬맹이? 아, 이미 맛을 본 건가? 그렇겠지?”

“…….”

“……이 예쁜 가슴이 널 담고 있다면 난 셋도 상관없어.”

“?!!!!!!”

“넌 빌어먹을 헤테로 마초고 별로 내 타입도 아니지만 인환이가 목매는 놈이라는 데야 할 수 없지. 트리플도 환영이야.”

“…….”

“가만있어. 나도 맞고만 있지는 않아. 인환이 깨우고 싶진 않지?”

“…….”

“역시 어리군. 병신 같은 새끼가 빠져도 꼭 지 꼬락서니답게 빠져요. 저밖에 모르는 어린놈 따위…… 그러니까 이렇게 휘둘리지.”

“…….”

“가만있으래두. 아무리 애송이라지만 참을성은 좀 보여야지. 아니면 역시 뭐든 주먹으로 해결 보자는 무식한 타입인가?”

“…….”

“……왜냐?”

“…….”

“이반도 아닌 놈이 왜 호모는 갖고 놀아?”

“…….”

“호기심이냐?”

“…….”

“이 새끼 좋아해?”

“…….”

“그렇지. 헤테로가 호모를 좋아할 리 없지. 그럼 왜 알짱거리는 건데? 이 새끼 왜 못살게 굴어, 너?”

“…….”

“가뜩이나 새가슴인 놈인데 괴롭혀서 뭔 재미를 보겠다고? 밟아봤자 밟는 재미도 없어, 이 새끼. 천하에 약골 도련님이라고.”

“…….”

“섹스 때문이냐? 호모라 색다른 자극이 된다 이건가?”

“…….”

“아, 난 좋아하거든, 이 새끼. 그럼 간섭할 자격 있는 거겠지?”

“…….”

“……정말 좋아, 새끼…… 좆같은 약골이지만 환장하게 달콤한 향내를 풍기지. 별당아씨 사모하는 돌쇠의 심정이랄까…… 정숙하고 겁 많은 아씨의 옷고름을 갈기갈기 찢어발겨서 맘껏 범하고픈 그런 거…… 너 알아? 발가벗겨서 진흙탕에 굴리고 또 굴리고픈 그런 환장할 기분…… 모르지?”

“…….”

“아직 멀었군. 역시 형편없는 애송이야.”

“…….”

“……셋이 하면 더 짜릿할 거야. 골수 헤테로도 뿅 갈 대단한 컬처 쇼크지. 어때, 애송이?”

“…….”

“아아, 나야 당근 넌 싫지. 하지만 할 수 없잖아? 이 새끼가 너 좋다는데. 네놈 아니면 안 되겠다는데. 할 수 없이 내가 숙이고 기어들어가야지, 뭘. 내 사랑은 수비 범위가 아주 넓고도 깊거든.”

“……나가.”

“싫은가? 특별한 자극을 원하는 게 아니었어?”

“당장 나가.”

“아, 그럼 역시 인환이만 따로 꾀어야 하나? 하긴 요즘 많이 허술해졌지, 이쁜 새끼. 아주 위태위태하거든. 생각보다 쉬이 넘어올지도 몰라. 그건 네 덕분이란 얘긴가?”

“나가!”

“……맞고만은 안 있는댔지?”

나지막하게 으르렁거리는 놈의 시선이 찍어 누르듯 달려들고 있었다. 폭발 직전의 분노는, 그러나 놈의 상처 입은 듯한 눈빛에 부딪친 순간,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극심하게 요동을 쳤다. 그랬다. 남자를 깨울지 모른다든가, 수치스러운 소동을 일으킨다든가 하는 소시민적 염려들은 이미 핀트가 뽑혀버린 인내심엔 속수무책이었다. 놈의 뻔뻔스러운 낯짝으로 당장이라도 내리꽂히려던 주먹을 제지한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바로 놈의 눈빛이었다.

슬픔이 들어앉은 습한 눈시울이 보였다. 한 움큼의 상식조차 묻어 있지 않던 위악적이고도 퇴폐적인 발언을 툭툭 뱉어내던 환쟁이의 그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축축하게 젖어든 눈초리는 컬트가 아닌 신파였다. 사랑밖엔 난 몰라. 어느 먼 곳에서 누군가의 애절한 뽕짝 가락이 흐릿하게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나가!!!”

간발의 차이로 풀어진 주먹은 놈의 머리통을 갈기는 대신 놈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맞고만 있지는 않겠다던 엄포도 그저 허세에 불과했는지, 놈의 몸뚱이는 너무나 쉽게 자신의 손아귀 아래 굴러 떨어졌다.

알코올 냄새가 진동하는 몸을 질질 끌고 방문 앞까지 단숨에 내달렸다. 저항의 몸짓은 그저 알몸의 피부 위를 미끄러지는 의미 없는 허우적거림에 불과했다. 문 밖으로 내던지자 휘청거리던 몸은 2∼3미터쯤 뒤로 물러나 구겨지듯 바닥에 나뒹굴었다. 부드러운 카펫이 깔린 복도 바닥은 180센티의 거구가 무너지며 일으키는 요란스러운 소음을 온전히 흡수하지는 못했다. 둔탁한 파열음이 고요한 침묵에 싸였던 펜션 안을 거칠게 진동시켰다. 탱크처럼 차오른 숨길을 가까스로 가누는 동안, 복도 양옆으로 죽 늘어서 있던 방문 중 어느 하나도 열리는 일은 없었다. 숨소리뿐이었다. 놈과 자신이 뿜어내고 있는 화덕 같은 숨소리 외엔, 사위는 다시금 무덤 같은 침묵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밤이 늦었군요. 안녕히 주무십시오, 선배님.”

지렁이처럼 꿈틀대며 상반신을 일으켜 세우던 중인 변태 놈에게 깍듯한 인사를 던지고 방문을 닫아걸었다. 문틈으로 히히거리는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파고들었다. 마지막까지 자제심을 놓지 않은 것이 과연 잘한 짓인가를 의심하게끔 하는 빈정거림이 선명하게 읽혔다. 개새끼. 트리플이라고? 셋도 좋다고? 안 되면 그를 꾀어낸다고? 하! 미친 새끼! 미친 변태 새끼! 이런 별 미친 더러운 변태 호모 자식이 다 있나!!!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욕을 속으로 뇌까린 적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흥분한 수퇘지처럼 사납게 날뛰는 감정을 삭이기 위해 그토록 오랜 시간 기를 썼던 적도 물론 아마 없었던 것 같다. 일곱 평 크기의 좁은 방 안을 벌거벗은 몸으로 부지런히 맴도는 미친 짓을 한 것도 역시 태어나 처음일 일이었다.

그랬다. 모두가 처음이었다. 처음이라 이다지도 힘겨운 것이다. 어째서 이렇게 기분이 엿 같은지, 어째서 이렇게 초조해 미칠 지경이 되는지, 변태 환쟁이 놈의 말을 하나하나 꺼내 소처럼 되새김질을 하며 울화통을 터트려야만 하는지, 그저 모두 처음이라 혼란스럽고 쉬이 진정이 안 되는 것일 뿐이다. 저런 변태 호모 새끼도 처음이고, 저 더러운 새끼가 옛 친구를 욕보이는 것도 처음이고, 앞으로도 욕보이겠다고 뻔뻔스럽게 선언하는 것도 처음이고, 이런 지랄 같은 경우를 당하는 것도 처음이고, 자신의 인생과는 하등 상관없을 이상야릇한 인간들 비위를 맞추러 생판 낯선 곳에 끌려온 것도, 그래서 이렇게 미친놈처럼 벌거벗고 맴을 돌아야 하는 것도 처음이다. 그리고 그 모든 환장할 처음들의 처음일 바로 저 남자. 그래, 그래. 바로 자신의 옛 친구였던 저 침대 위의 남자야말로 이 모든 엿 같은 처음들의 원흉이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새삼 침대 위에서 곤한 잠에 빠진 남자에게 불길 같은 증오가 치솟았다. 저 남자 때문이었다. 저 남자 때문에 끌려와야 했고, 저 남자 때문에 변태 호모 놈을 봐야 했고, 저 남자 때문에 추악한 제의를 받아야 했다. 변태 호모 놈과 저 남자가 또 다른 변태 하나를 보태 트리플 포르노를 연출하는 역겨운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쳐가는 것도, 다 저 남자가 원인이었다. 이렇게 구역질을 일으키며 격분하면서도, 상상 속의 추악한 장면을 강박처럼 되새김질하고 있는 까닭도 다 그렇다.

썅. 트리플 섹스라니. 섹스라니. 용서할 수 없다. 하물며 키스도 환장하겠는데 섹스라니. 제기랄, 섹스라니. 다른 놈과 말이냐? 다른 더러운 호모 놈들과 말이냐? 용서 못 해. 자신이 길들인 몸이었다. 키스도, 애무도, 섹스도 다 자신이 가르쳤었다. 자신만 아는 몸뚱이였다. 그런데 감히 어떤 새끼가 건드리겠다는 거냐. 개새끼. 개새끼, 개새끼, 개새끼. 개돼지만도 못한 변태 새끼. 변태 호모 새끼들. 죄다 에이즈에나 걸려 뒈져버려라. 용서 못 해. 용서 못 해. 용서 안 해. 건드리기만 해. 건드리기만 해봐라. 죄다 박살을 내줄 테다…….

눈시울이 뜨겁고 아팠다. 심장은 탱크처럼 요란스레 뛰고, 온몸이 부들부들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뇌 속을 터트릴 것만 같은 고통스러운 상상들은 도무지 멈출 줄을 몰랐다.

언젠가 남자의 포르노테이프들을 통해 본 3P 섹스의 더러운 장면들이 고스란히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금발을 한 서양 여자의 축축한 질 속에는 여자를 가운데 끼우고 샌드위치처럼 겹쳐진 채 피스톤질에 여념이 없는 백인 남자 둘의 거대한 페니스가 한꺼번에 틀어박혀 있었다. 낑낑거리는 여자의 교성은 교성이라기보다 거의 숨이 넘어가는 짐승의 그것처럼 들렸었다. 어느새 주연 배우들의 모습은 남자와 변태 환쟁이들로 완벽하게 대체돼 있었다. 거대한 페니스 두 개를 삼킨 남자의 벌어진 아누스가 커다랗게 클로즈업 되는 장면이 눈에 선했다. 내장이 딸려 나올 것처럼 난폭하고 거칠게 주름을 헤치며 드나들고 있는 새끼는 한세혁이었다. 다른 낯모르는 변태 호모 놈도 남자의 아래서 남자의 겨드랑이 틈에 양쪽 손바닥을 착 붙인 채 추삽질에 여념이 없었다. 숨넘어가는 남자의 교성이 귀청을 찢을 것처럼 쟁쟁했다.

가능성의 문이 열린 이상 그것은 더 이상 상상이 아닌 생생한 현실이었다. 미칠 것만 같았다.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가위눌림처럼, 정신없이 방 안을 맴도는 스스로가 너무나 무서워졌다. 악몽이 따로 없었다.

이를 악물고 숨을 가다듬었다. 비 오는 듯한 땀방울이 어느새 벌거벗은 전신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발걸음을 멈췄다. 당장 답답증이 치솟았지만 다시 걷고 싶은 욕구를 필사적으로 참아냈다. ……진정해. 진정하라구, 등신아…….

상상력의 폭격을 차단하기 위해 눈을 감은 채 오랫동안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째깍거리는 시계 초침 소리가 거대한 종소리마냥 증폭돼서 귓전을 때리고 있었다. 거칠게 요동치는 심장 소리도 한가지였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었던 걸까. 추악한 악몽은 더 이상 시야를 괴롭히지 않았다. 심장이 저리는 듯한 기묘한 고통은 여전했지만, 강박 같은 끔찍한 상상이 물러간 것만 해도 감지덕지라는 생각을 설핏 흘렸다. 아마도 잔뜩 온몸을 긴장시켰던 후유증이겠지만, 극심한 탈력감이 전신을 사로잡았다. 증기 기관처럼 헐떡대던 호흡은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조금씩 비칠거리는 몸을 침대 가까이 끌고 갔다. 베개 쿠션에 푹 파묻힌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턱 언저리까지 시트로 꽁꽁 휘감긴 몸은 시체처럼 미동조차 없었다. 남자의 심장 가까이 귀를 가져간 것은 무의식적인 몸짓이었을 것이다. 희미하게 율동을 거듭하는 남자의 심장 소리에 안도의 한숨을 흘리는 자신이 있었다. 천치 같은 짓거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릿한 심장의 통증이 더더욱 심해지는 것만 같았다. 본능처럼 앞으로 손을 뻗었다.

시트를 걷자 무방비하게 늘어진 마른 몸이 시야로 뛰어들었다. 조금만 더 살이 찌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완벽한 몸이었다.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 분신이었다. 짝짝이인 다리조차 자신에겐 그저 눈을 홀리는 또 다른 매혹일 뿐이었다. 아무렴. 자신이 길들인 몸이었다. 키스도, 애무도, 섹스도 다 자신이 가르쳤었다. 자신만 아는 몸뚱이였다. 누가 뭐래도 자신만 만질 수 있었다. 저릿한 심장의 통증이 거짓말처럼 수그러들고 있었다. 행복한 충만감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팬티를 벗겼다. 새하얀 민소매 티를 벗기는 것은 팬티보단 좀 더 번거로웠지만 기쁨으로 벅찬 나머지 그조차도 잘 의식하지 못했다. 귀찮은 듯 흐릿한 잠꼬대를 흘리는 몸뚱이에 나지막한 속삭임으로 안심을 시켰다. 몇 번이나 입을 맞추고, 몸 이곳저곳을 쓰다듬고 애무를 해도 예쁜 몸은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별로 섭섭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잠들어 있다 해서 자신의 것이란 사실이 변하지는 않을 터였다. 쓰러질 만큼 피곤에 지쳤던 몸이니 계속 곤히 자주는 게 차라리 고마울 뿐이다. 결합도 최대한 조심스럽고 상냥하게 해볼 요량을 세웠다.

방 안 어디를 둘러봐도 윤활제로 쓸 만한 것이 없는 것은 아쉬웠다. 손바닥에 침을 듬뿍 뱉은 후 회음부 사이로 가져갔다. 한쪽 허벅지를 들어 자신의 어깨에 걸치자, 불안한 자세가 싫은지 예쁜 분신은 다시 한 번 흐릿하게 잠꼬대를 흘렸다. 회음부와 섬세한 주름 사이를 부드럽게 문지르자 움찔움찔 허리를 뒤틀며 얼굴을 찡그리는 것이 보였다. 귀엽다는 생각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중지와 검지에 다시 침을 듬뿍 묻힌 후 따뜻한 내벽으로 파고 들어갔다. 흐릿한 신음과 함께 바짝 조이는 손가락이 느껴졌다. 찌르르한 전율이 페니스 끝으로 치달렸다. 기분 좋은 흥분은 아랫배를 찌를 것처럼 한계까지 페니스를 부풀렸다. 좀 더 입구를 이완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설핏 뇌리를 스쳐갔지만 이리저리 버둥거리며 파고들 곳을 찾는 자신의 하반신이 더 절박했다. 양쪽 허벅지를 활짝 벌리고 중심에 자리를 잡았다. 허리 아래로 두 손을 밀어 넣어 삽입이 용이하게끔 골반의 각도를 세웠다. 천천히 허리를 밀어붙이자 딱딱한 흉기로 변한 페니스는 무리 없이 동공 속을 파고들었다.

“……아…… 응…….”

비몽사몽 아픔이 느껴지는지 그의 부드러운 입가가 벌어지며 허스키한 비음이 흘러나왔다. 단숨에 한계까지 밀어붙이고픈 욕구를 참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소중한 몸을 상처 입히는 것은 그보다 더 괴로울 것이다. 천천히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허리를 밀어 넣었다. 영원처럼 길게 느껴지던 진입의 순간이 지나자 황홀한 열락이 전신을 사로잡았다. 뇌수를 녹일 듯한 기쁨이었다. 자신을 뿌리 끝까지 삼킨 아름다운 몸뚱이가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양팔을 소중한 것의 등 뒤로 교차시켜 품 안 가득 끌어안았다.

내 것이었다. 내 분신이었다. 아니, 내 몸이었다. 촉촉하고 따스하게 자신을 감싸고 있는 부드러운 내벽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어쩐지 거친 피스톤 운동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렇게 나사처럼 꽉 맞물린 채로 내 것의 따스함을 실감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꿈처럼 행복했다.

“……흑……! 으…… 흐…… 하아…….”

“…….”

“……아…… ……? 위…… ……? 흑……! 위…… 야……?”

“…….”

자잘한 진동으로 내벽을 짓누르기만 하는 페니스에, 내 것은 꽤 고통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본능처럼 자신의 등을 휘감아오는 소중한 이의 팔에 조금씩 힘이 실리고 있었다. 무자비한 잠의 폭격에 침몰당한 나머지, 눈을 뜨기조차 힘겨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려앉은 눈꺼풀이 파르륵 떨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잘 알고 있는 전립선을 힘껏 튕기자, 외마디 비명과 함께 사정없이 내벽이 조여들었다. 황홀한 쾌락에 눈앞에서 번개가 내리친 것처럼 전율이 일었다. 어느새 바짝 일어선 그의 페니스가 아랫배를 치는 감촉도 몸서리쳐지게 좋았다. 너무나 좋아서 당장 죽는대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조금씩 이완하는 괄약근을 따라 반쯤 밖으로 빠져나왔다가 다시금 안으로 힘껏 진입했다.

“……흐흑!!!”

등을 휘감고 있는 그의 팔과, 페니스를 감싸고 있는 그의 내벽이 동시에 빨판처럼 자신을 조여댔다. 다시 한 번 눈앞에서 번개가 쳤다. 온몸이 가루로 부서지는 것만 같았다.

분별력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저 본능이 시키는 대로 맹렬하게 안으로 쑤셔들었다. 신음 같은 교성을 흐느끼며 그는 활짝 몸을 열고 있었다. 오로지 자신만을 받아들이겠다는 듯, 자신만큼 기쁨에 떨며 결합을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어떡하면 결합이 더 깊어질까 사랑스러운 몸뚱이는 달라붙고 또 달라붙었다. 자신 역시 다르지 않았다. 개처럼 끙끙거리며 페니스로 쑤셨다. 허리를 밀어 넣었다. 혀를 꽂았다. 올리고 또 올려붙였다. 그가 먼저 사정하고, 간발의 차이로 자신도 오르가슴에 올랐다. 애초부터 체력이 바닥이었을 소중한 이는 당연한 것처럼 혼절해버렸다. 물론 환장할 것 같은 자신의 기갈이 그 단 한 번으로 만족할 리는 없었다.

기절한 몸을 부여안고서 색광처럼 범하고 또 범했다. 몇 번이나 사정을 했던지, 그의 사타구니 근처는 자신의 정액으로 온통 범벅이 되어 있었다. 어쩐지 아쉬운 마음이 들어, 질척질척한 아래를 손바닥에 듬뿍 묻힌 다음 소중한 몸뚱이 구석구석에 발랐다. 신기하게도 더럽다거나 찝찝한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자신의 정액과 그의 땀이 뒤섞여 부드럽게 미끈거리는 피부를 쓰다듬는 것이 너무나 좋았다. 자신의 정액으로 이 몸에 낙인을 찍을 수 있다면, 더 이상 소원이 없을 거라는 병적인 상상도 했다. 상상만으로도 몸서리쳐지는 기쁨이 일었다.

흥건한 정액이 윤활제가 되어 더 이상 그를 아프게 하지 않고 맘껏 진입할 수 있는 것도 또 다른 몸서리쳐지는 기쁨이었다. 처음처럼 팔다리로 자신의 온몸을 친친 감아주진 않았지만, 따스하고 질척한 내부는 여전히 깊게 자신의 딱딱한 욕망을 품어주고 있었다. 파고들고 또 파고들다 보면 페니스만이 아니라 자신의 전부가 소중한 이의 몸 안에 들어가 있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앞으로 꼭 껴안고 하고, 뒤로도 하고, 옆으로도 쑤시고 들어갔다. 기진맥진해지면 엎드린 몸 위에 자신을 겹친 채 오랫동안 그저 깊이 박고만 있기도 했다. 환장한 게 아닐까 싶었다. 아니, 환장한 게 틀림없었다. 마침내 더 이상 허리를 돌릴 힘조차 없이 침대 바닥에 널브러졌을 땐, 창 밖으로 푸르스름한 여명이 비쳐들고 있었다.

묵직한 두통이 심박수에 맞춰 관자놀이 근처를 부드럽게 치고 있었다. 전신은 손가락 하나 들 힘도 없을 만큼 기운이 없었지만, 정신은 유리알처럼 맑았다. 일체의 번민이 끊어진 대신 그저 소중한 이와 함께라는 저릿한 충족감만이 칼처럼 벼려진 의식을 맴돌고 있었다. 대자로 사지를 뻗고 눈을 감은 채, 기운이 회복되기를 기다렸다.

도중에 복상사를 일으킨대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기막힌 폭주였다. 자신의 안에 들어앉아 있으리라곤 꿈조차 꾼 적이 없는, 섬뜩할 정도로 병적인 성욕이었다. 잠시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스쳐갔지만, 더 이상 생각의 고리를 더듬는 짓은 그만두었다. 위험했다. 아무렴. 위험한 짓거리였다. 여기서 더 생각을 거듭한다면, 자신을 분석하기 시작한다면, 분명 치명적인 어떤 것이 자신을 송두리째 집어삼킬 터였다.

30분쯤 깊게 호흡을 고르고 나니 겨우 몸을 움직일 기운이 모였다. 물론 기운이 돌아오자마자 한 일은 기진맥진 잠이 든 소중한 몸뚱이를 다시금 품 안으로 끌어당긴 일이었다. 자신의 정액과 땀과 침으로 범벅이 돼 있는 축축한 몸뚱이였다. 망가진 인형처럼 더러워진 무저항의 사지를 품에 꼭 껴안았다. 양팔로는 상반신을, 다리로는 하반신을, 입술로는 얼굴 곳곳을, 빠져나가지 못하게끔 칡뿌리처럼 얽었다. 빠져나가지 못하게끔, 달아나지 못하게끔, 멀리멀리 달아나 어느 변태 호모 새끼들에게 더럽혀지지 않게끔, 철저하게 품어야 한다. 감시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어루만지고 있는 등줄기며 엉덩이며 허벅지 사이가 축축하고 끈적끈적했다. 기름이 발라진 것처럼 온통 매끄러운 몸뚱이였다. 물론 자신의 기름이었다. 저도 모르게 입가에 빙그레 웃음이 맺혔다. 소중한 몸뚱이가 오로지 자신의 체액만으로 더럽혀져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만족스러울 수가 없었다. 정수리 근처를 떠돌던 입술을 좀 더 아래로 내려 그의 벌어진 입술에 키스했다. 입가를 핥고,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차례로 물어뜯고, 혀를 점막 안 깊숙이 밀어 넣어 다시금 자신의 타액으로 범벅을 만들었다. 조금씩 마르기 시작한 뺨과 이마에도 혀를 움직여 침투성이를 만든 다음에야 만족스럽게 키스를 마쳤다.

그의 부드러운 숨소리며 심장 소리에 멍하니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차츰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간간이 하품도 비어져 나왔다. 물론 잠을 잘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곧 아침이 닥칠 것이다. 더러운 변태 호모 놈들이 출몰할 시간이다. 확실해진 한세혁 새끼 말고도 아직 드러나지 않은 호모 놈들이 달리 또 있을지도 모른다. 서울로 올라갈 때까지는 이 소중한 몸뚱이에서 잠시도 눈을 떼선 안 된다.

힐끗 시계를 살피니 시곗바늘이 6시를 지나가고 있었다. 옳거니. 고작 한두 시간만 버티면 될 일이었다. 오전까지는 어쩔 수 없겠지만 점심때는 넘기지 않게끔 이 사람을 채근할 것이다. 잔뜩 심술이 난 것처럼 난처하게 만들어야지. 냉랭한 자신의 태도로 상처를 입히긴 싫지만 이번만은 감수할 수밖에 없다. 좌우간 최대한 빨리 서울로 데리고 올라가는 게 급선무였다. 서울로 간다고 안전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나중의 일은 그때 가서 심사숙고해보면 달리 방법이 보일 터였다.

거듭 쏟아지는 하품에 짜증이 났다. 잠을 쫓기 위한 방법으로 뭐가 있을까를 잠시 더듬다가 얼마 전부터 시작한 토플 공부를 뇌리에 떠올렸다. 교재 중 하나인 「토플 1000단어」 첫 페이지를 펼쳐들었다. 목차부터 차례로 읽어내려갔다. ……introduction…… Chapter 1. Structure Type…… Chapter 2. Written Expression Type…… Chapter 3. reading…… structure…… essay…… Choose the synonyms…….

눈꺼풀이 자꾸 무거워졌다. 관자놀이를 쑤시는 두통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미간에 주름을 세우며 다시금 기억을 더듬었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따스한 체온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코끝으로 파고드는 달콤한 체향은 역시 만져지는 감촉 이상으로 기분 좋다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due…… a) stationary…… b) deserved…… c) unpromising…… d) miserly…… spout…… a) step…… b) maneuver…… c) gush…… d) adorn…….

하품으로 비어져 나온 눈물을 닦기 위해 손가락을 들어 올리려고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머릿속이 점점 더 몽롱해지고 있었다. 몇 번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기억 속의 다음 장을 펼쳐 들어보지만 이미 외워둔 단어의 나열이 지겹게 생각되었다. ……Choose the one word which has not the same meaning with other words…… uprising…… a) disturbance…… b) ability…… c) chaos…… chao…… s…… d)…… d)…… turbulence…… turbulence…… turbu…… len…… turbul…… en…….

시커먼 먹물 같은 잠이 묵직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단숨에 절벽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듯한 전율이 전신을 강타했다. 경련처럼 크게 몸서리를 치는 사지에 위는 소스라치듯 잠에서 깨어났다.

이름 모를 갖가지 새소리들이 요란스레 귀청을 때리고 있었다. 마치 바로 귓가에서 재재거리는 것만 같았다. 잔인할 정도로 눈부신 햇빛이 화살처럼 눈시울을 쪼아댔다. 수면 부족의 육체엔 과도하기 짝이 없는 감각적 폭력이었다. 치뜬 즉시, 공격을 견디다 못해 다시 감겼던 눈시울은 다음 순간, 벼락처럼 휘둥그레졌다. 품 안에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반사적으로 가져간 시선의 끝에 걸린 벽시계 바늘은 7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젠장할! 결국 버티지 못하고 잠에 빠져버린 모양이었다!

부랴부랴 몸을 일으켜 세우며 주변부터 살폈다. 침대는커녕 방 안 어디에도 찾는 몸뚱이의 자취는 없었다. 젠장할! 젠장할, 젠장할, 젠장할!!!

잊혔던 초조감이 스멀스멀 뒷덜미를 치고 올라왔다. 욕실로 달려가는 발걸음은 좋지 않은 컨디션을 반영하듯 조금씩 휘청거리고 있었다. 머리가 양쪽에서 나사처럼 조여대고 있는 것처럼 무거웠다. 수면 부족의 피로감을 고스란히 증거하는 눈꺼풀은 뻑뻑하기가 모래알이 잔뜩 들어앉은 신발 같았다.

소변을 본 후, 세면대에 널어두었던 속옷과 양말을 갖고 다시 나와 부랴부랴 주워 입었다. 덜 말라 축축한 팬티의 감촉에도, 정액과 땀이 곳곳에 말라붙어 있는 몸의 불쾌감에도 제대로 신경이 가 닿지 않았다. 샤워를 할 마음의 여유 따위 남아 있을 턱이 없었다. 그저 그를 당장 찾아내야만 한다는 강박적인 초조감만이 뇌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옷장에서 셔츠와 바지를 꺼내 대강 걸친 후, 다시 욕실로 들어가 눈곱만 떼는 고양이 세수를 했다. 찬물을 적셔선지 뻑뻑했던 눈꺼풀의 피로감이 조금 견딜 만하게 느껴졌다.

덜 신긴 신발을 질질 끌다시피 복도로 나왔다. 그의 동료들이 묵고 있는 방을 찾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맞은편 객실 문 두 개를 지나 활짝 열린 방문 앞에서 낯익은 얼굴의 여자 하나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어젯밤 안면을 튼 미술 잡지 기자였다.

“일어났어요?!”

활짝 핀 미소에선 약간의 쑥스러움이 느껴졌다. 숙취의 기색이 완연한 창백한 안색이며 막 잠에서 깬 부스스한 용모가 꽤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초조한 심사를 가까스로 억누르며 깍듯하게 인사를 건네자,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길을 터주었다.

“……카레 좋아해요?”

“……?”

“아, 아침 메뉴가 카레거든요. 안에서 총각들이 솜씨 발휘를 하고 있어요.”

“…….”

“……난 카레 싫은데. 해장국 잘하는 데 어디 없나 몰라…….”

“…….”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는 여자를 무시하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과연, 30평쯤 될 널찍한 원룸 안에선 카레 냄새가 막 익기 시작한 듯한 밥 냄새와 함께 진동을 하고 있었다. 3단짜리 싱크대 옆에 놓인 큼직한 장방형 식탁 근처에서 두 명의 사내가 칼질을 하며 식사 준비를 하고 있고, 냄새와 소음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불을 둘둘 만 채 잠들어 있는 사내도 몇 보였다. 여자들은 자신들처럼 딴 방에 머물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젯밤에 봤을 때보다 좀 줄어든 머릿수는 새벽에 서울로 올라간 두세 명 때문인 것 같았다.

조급한 시선이 단숨에 방 안의 얼굴들 전부를 살폈지만 자신이 찾는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한세혁 변태 놈의 얼굴조차 보이질 않았다. 초조감에 침이 말랐다.

깨어 있는 주방 쪽 두 사람에게 깍듯한 인사를 하고 그의 자취를 물으려는데, 마침 욕실에서 걸어 나오고 있는 권 사장과 눈이 마주쳤다.

“어, 위 군. 잘 잤어? 어째 얼굴이 푸석하네? 눈도 빨갛고?”

자신과 달리, 숙면을 취한 듯한 사내는 상쾌해 보였다. 막 세수를 끝냈는지, 물기가 남아 있는 긴 머리가 사내가 움직일 때마다 어깨 아래서 부드럽게 찰랑거렸다.

“예, 사장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하하, 여전히 딱딱하다니깐. 사장님이 뭐야, 사장님이. 언제 기하 형이라고 부를래?”

“…….”

“와 앉아라. 아침 먹어야지?”

“……저, 선생님은 어디 계신지 혹시…….”

“선생님? 아, 인환이?”

“예.”

“어, 아까 세혁이랑 밖으로 나가던데. 산책하려나 보던데? 아마 냇가 쪽에 있을 거다.”

“……냇가…… 요?”

저도 모르게 주먹이 꽉 쥐어졌다. 태연해 보이려고 기를 쓰고 있지만, 목소리가 사나워지는 것까진 막을 수가 없었다. 인상 좋은 권 사장의 눈동자에 잠깐 의문이 떠올랐지만, 이내 무심한 대꾸가 돌아왔다.

“음, 어제 지나쳐 온 진입로 반대편으로 쭉 올라가다 보면 계곡이 있거든. 10분쯤 가다 보면 보일 거다.”

“예.”

“보거든 와서 밥 먹으라고 그래라. 인환인 괜찮지만 세혁이 놈은 부려먹을 일 많으니깐 농땡이 피우지 말라고 하고.”

허둥거리지 않게 최대한 자제하며 방을 나서는데 권 사장의 한가한 목소리가 뒤따라왔다. 대꾸를 하는 둥 마는 둥, 가빠지는 호흡을 가라앉히는 데만 집중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다시금 악몽 같은 트리플 섹스 비디오의 잔상이 뇌리를 점령하기 시작한 때문이었다.

어떻게 펜션을 빠져나왔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현관 앞 정원 비치파라솔 아래 앉아 있던 두 여자가 뭐라고 아는 체를 하는 것 같았지만 건성으로 흘려버렸다. 그들이 아는 여자들인지 아닌지도 불확실했다. 아마도 아는 여자들이겠지. 알 게 무어람.

오솔길이니, 가로수들이니, 나지막한 크고 작은 밭이랑들이니, 마치 만화경처럼 주변 풍경들이 시야를 스쳐 지나갔다.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그저 권 사장이 제시해준 이정표들만 찾아 허겁지겁 발길을 재촉했다.

얼마를 걸었을까, 제법 시끄러운 물소리가 귓전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야트막한 산과 밭들이 사방을 병풍처럼 싸고 있는 10여 미터 폭의 시냇물(이라기보다 이미 강물의 수준)이 전방에 나타났다. 맞은편 어귀는 잣나무와 느티나무 천지였고, 이쪽 편 어귀는 길게 뻗쳐 있는 둔덕을 따라 배추며 무, 파 같은 야채들이 풍성하게 자라고 있는 밭이랑 천지였다. 빨갛고 파란 기와지붕을 인 시골 농가들이 드문드문 보이는 외엔 그저 녹색 천지인 걸 보니 포천 시내에서도 한참을 들어온 모양이었다. 오른편으로 보이는 거대한 녹색의 병풍은 명성산이라고 했다.

오솔길을 벗어나 밭들을 가로질러 냇가로 내려섰다. 색이 옅은 바짓가랑이는, 갖가지 잡초들이 머금고 있던 이슬방울로 순식간에 푹 젖어들고 말았다. 냇물 폭만큼이나 넓은 조약돌밭을 따라 다시 몇 분쯤을 더 걸은 것 같았다. 찾고 있던 인영은 냇가에서 몇 미터쯤 벗어난 둔덕 위, 꽤 넓게 펼쳐진 고추밭과 상추밭 이랑 사이에 서 있었다.

오른쪽 측면에 떠 있는 태양빛이 군데군데 군락을 이루고 있는 잣나무며 소나무에 가로막혀 밭이랑에 기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대부분이 짙은 녹색을 띠고 있는 아침 풍경 속에서, 그저 새까만 얼룩무늬로만 보이던 사람의 자취는 점점 가까이 다가갈수록 구체적인 형태를 띠어가고 있었다. 익숙한 블랙진에 하늘색 카디건 차림인 하나와, 역시 블랙 일색으로 도배를 하고 있는 다른 하나였다. 자신의 소중한 몸뚱이와 저 재수 없는 호모 새끼가 틀림없었다.

희생자를 뒤쫓는 연쇄 살인마처럼 필사적으로 찾아 헤맨 끝에 발견한 목표인 터라 당장은 안도의 한숨부터 터져 나왔다. 악몽 속 트리플 섹스의 장면만 내내 리플레이 시키고 있던 시야는 또 오죽할까. 제대로 옷을 갖춰 입은 둘의 모양새에 쾌재라도 부르고 싶을 지경이었다. 천만다행, 늦은 건 아니었다. 적어도 시야 내에 붙잡아두었으니 여차하면 언제라도 둘을 갈라놓을 수 있었다.

흥건하게 맺힌 얼굴의 땀을 훔쳐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도 손가락으로 빗질하듯 점잖게 가다듬었다. 손등의 반을 덮는 실크의 셔츠 소매는 팔꿈치까지 접어 올리고, 엉덩이를 덮은 채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던 셔츠 자락도 비로소 허리춤 안에 깔끔하게 집어넣었다. 초조감과 불안감이 역력하게 드러나 있을 표정은 최대한 무표정하게 정리했다. 쫓기는 토끼 새끼처럼 망연자실한 꼬락서니를 보여줄 순 없었다. 자신의 것에게는 물론, 더러운 호모 놈에겐 더더욱 그러했다.

물소리 때문인지 무언가 옥신각신하는 둘은 좀처럼 자신의 기척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점점 가까이 다가갈수록, 거의 울상이 되다시피 해서 빠르게 말을 뱉어내는 내 것의 혼란과 당혹이 손에 잡힐 듯 전해졌다. 그에 비해 더러운 호모 놈의 태도는 느긋하고 편안해 보였다. 숙취의 기색은 역력했지만, 여유롭게 담배를 피워 물고 있는 작태를 보니 그리 피곤을 느끼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술이라곤 입에도 대지 않은 내 것이 더 힘들어하고 있었다. 낯빛도 어젯밤에 비해 그리 나아진 것 같지 않았다. 창백한 안색처럼 입술에도 핏기가 별로 없었다. 자신이 괴롭히는 내내 잠에만 빠져 있었다곤 해도, 역시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턱이 없었다. 가뜩이나 체력이 바닥으로 떨어진 사람이 아닌가. 섹스를 할 만한 형편이 아니란 것은 누구보다도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잠시 죄책감이 엄습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스스로에게 변명했다. 어차피 제정신이 아니었던 거다. 의지를 세우기는커녕 세워야 한다는 생각조차 까맣게 잊혔지 않은가.

물소리 때문에 대화를 엿듣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그럼에도 저절로 귀를 쫑긋 세우는 자신이 비겁하단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알아내고 싶었다. 왜 자신의 것이 그렇게 호모 놈을 두려워하는지, 빚쟁이에 쫓기는 채무자처럼 전전긍긍해하는지 알고 싶었다. 아니, 정확히는 호모 놈과의 관계를 알고 싶었다. 자신이 처음이라고 하더니, 그리고 앞으로도 유일할 거라더니, 이렇게 뒤통수를 치는 까닭을 알고 싶었다. 설마, 세상에 호모들이 이렇게 넘쳐났던가 싶게, 아찔하고 불안한 기분을 선사해준 저 소름 끼치는 변태를 어째서 곁에 두는지, 그 기막힌 사정을 못 견디게 알고 싶었다.

저들이 서 있는 밭이랑 10미터쯤 앞까지 접근했다. 그저 불분명한 두런거림으로 들릴 뿐 구체적인 대화 내용은 여전히 파악하기 힘들었다. 자신의 존재를 충분히 인식할 거리인데도 둘은 좀처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서로에게 집중을 하는 것 같아 속이 있는 대로 뒤틀렸다. 사정을 알아내고 싶은 마음과, 당장 변태 놈을 떼어놓고 싶은 마음이 주도권을 놓고 머릿속에서 충돌을 일으켰다. 초조한 나머지 마른침만 꿀꺽꿀꺽 삼키고 있는데, 호모 놈의 손이 우악스레 내 것의 손목을 붙잡는 것이 보였다. 입안에 품고 있던 담배 연기를 내 것의 얼굴을 향해 단숨에 뿜어낸 것과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순간, 새빨간 장막이 커튼처럼 시야를 뒤덮었다. 불같은 증오가 머리꼭대기까지 치솟았다. 새파랗게 질린 채 잡힌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던 내 것이 뭐라고 웅얼거리는 것이 흐릿하게 보였다.

“한 선배님, 사장님께서 부르십니다!!!”

자신의 커다란 외침 소리가 산기슭을 후려치며 강으로 흘러들어가는 냇물 소리를 뚫고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펄쩍 뛸 것처럼 소스라치는 그와, 역시 꽤 당혹한 몸짓을 보이는 호모 놈이 동시에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휘둥그레진 눈들이 멍하니 자신을 굽어보고 있었다. 이토록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자신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터라 더 경악한 모양이었다. 쓰러지는 게 아닐까 싶게 새파래진 그는 안타까웠지만, 역시 휘둥그레진 호모 놈의 표정에선 만족감이 느껴졌다. 그의 손목을 굳건히 쥐고 있던 호모 놈의 손은 힘이 풀린 채 어느새 옆으로 축 늘어져 있었다.

“권 사장님께서 부탁할 일이 많으신가 봅니다. 빨리 오시라는데요?”

자신의 표정은 아마도 딱딱하게 굳어 있을 것이다. 싸늘하긴 하지만 별로 감정이 드러나 있지도 않을 것이다. 불길 같은 증오심에 치를 떨면서도 충분히 자제력을 발휘하고 있는 자신이 지극히 만족스러웠다.

변태 놈의 시선이 한참 동안 자신의 시선을 잡고 있었다. 망연자실했던 표정은 제정신을 찾았는지 이내 비웃는 듯한 놈 특유의 그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흔들리지 않고 마주 바라봐주었다. 상대를 비웃고 깔아뭉개는 표정쯤이야 자신 또한 얼마든지 만들어줄 수 있었다.

피식 하고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을 터트린 놈이 이윽고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열댓 걸음 만에 자신을 스쳐가는 놈의 몸에서 스킨 냄새에 뒤섞인 담배 냄새, 그리고 술 냄새가 진하게 풍겨왔다.

“정말 기하 형이 날 불렀나?”

조롱하는 듯한 뉘앙스가 도마뱀 꼬리처럼 길게 늘어졌다. 대답해줄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다.

“재밌어, 꼬맹이…….”

반쯤 남은 담배를 입으로 가져가는 놈의 얼굴이 보였다. 킥킥거리는 조롱을 흘리고 있는 그 입을 한 대 후려치고픈 욕구를 누르기 위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여전한 술 냄새에도 불구하고 취기는 가셨는지 놈의 걸음걸이는 꼿꼿한 편이었다. 취해도 하얗고 안 취해도 하얀 낯빛이라니, 음흉하고 재수 없는 새끼답다고, 자신 역시 조롱을 답으로 건네주었다.

시야에서 꽤 멀어진 변태 놈에게서 자신의 소중한 것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쇼크가 좀 가셨는지, 그는 평정을 가장하려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젠장. 얼굴만 담담하면 뭘 하나. 손이며 어깨를 저렇게 떨고 있으면서. 딱딱한 표정을 풀고 그를 안심시키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목 끝에 걸린 채 차마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질문들이 여전히 심사를 뒤틀리게 했다. ……저 사람 뭡니까? 당신과 무슨 관계인가요? 혹시 제가 알아야 할 일들이 두 분 사이에 있는 것 아닙니까? 당신과 섹스를 하고 싶다고 하던데 당신도 혹시 그런 마음입니까? 저 사람 좋아해요? 저 사람과 섹스하고 싶습니까……? 목에 칼이 들어와도 결코 뱉어내는 일이 없을, 한결같이 유치하고 구역질나는 질문들뿐이었다.

“……자…… 잠 별로 못 잤나 봐, 위야. 눈이 빨개…….”

“…….”

긴장된 침묵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그가 마지못해 운을 떼고 있었다. 꺼질 듯한 목소리에 말까지 더듬는 걸 보니 역시 동요가 만만치 않은 모양이었다. 이 순간, 그가 두려워하는 게 저 호모 놈일까, 아니면 자신일까 몹시 궁금했다.

“……불편하고 답답하지? 점심때라도 올라갈래?”

“…….”

“……그…… 그래. 그럼 석주랑 기하 형한테 말해놓을게.”

다행이로군. 점심엔 올라갈 수 있겠어. 만족감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그의 파리한 안색에도 안심한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쉴 새 없이 자신의 눈치만을 살피던 시선이 살며시 바닥으로 깔리더니, 문득 생각난 듯이 부지런히 바지 뒷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자신 앞에서까지 담배를 피우려는 걸 보니 어지간히 불안한 모양이었다. 짜증은 저만치 뒤로 몰러가고 대신 울적함만 앙금처럼 남았다.

“……다…… 담배…… 좀 피울게, 위야. 냄새 싫을 테니까 조금만 떨어질래?”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이려던 그의 시도는, 그러나 자그마한 은색의 담배 케이스가 땅바닥에 떨어지며 무위로 그치게 되었다. 그의 손가락은 여전히 가련하게 떨렸고, 열댓 개의 가느다란 담배가 이슬을 듬뿍 머금은 잡초 위에 눈처럼 뿌려졌다. 그보다 먼저 허리를 굽혀 재빨리 주운 뒤, 고맙다며 손을 내미는 그를 무시하고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식전에 담배는 좋지 않습니다.”

담담하게 대꾸하자 그의 얼굴에 비친 것은 원망 섞인 안타까움이었다.

“아래는 괜찮으십니까?”

“……?”

“꽤 많이 해댔는데요?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걷기 불편하지 않으세요?”

잠깐 어리둥절한 표정이 됐다가 이내 홍당무처럼 새빨개지는 그다. 워낙 핏기가 없던 터라, 얼굴이며 목덜미 할 것 없이 순식간에 붉게 물드는 모습은 차라리 경이롭기까지 했다. 그게 또 너무나 귀여워서 아랫도리에 짜릿하게 피가 몰려드는 것이 느껴졌다. 어이가 없었다. 환장한 색마처럼 날밤을 까면서까지 해대고도 여전히 날뛰고 있는 짐승이라니.

“걸음 불편하시죠?”

“……그냥…….”

재차 다그치자 애매하게 말끝을 흐린다. 한동안 제대로 걷기조차 버거우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젠장. 역시 그렇겠지. 손톱으로 할퀴는 것처럼 속이 쓰렸다.

수줍게 붉힌 얼굴과 달리 슬쩍 아래로 깔린 눈에 비친 것은 미미한 슬픔이었다. 젠장. 역시 그렇겠지. 그렇겠지. 모르지 않는다. 성욕 배출구로 쓰인 것이 달가울 리가 있나.

젠장. 성욕 배출구라니. 생뚱맞고 천박한 그 어감에, 지우개로 지울 수만 있다면 자신의 머릿속을 박박 지워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입 밖에 내뱉기는커녕 뇌리에 떠올리기조차도 싫은 어휘였다. 아니, 단지 싫다는 느낌뿐만이 아니라, 지독하게 찝찝하기까지 했다. 무언가 아귀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 조립을 끝낸 플라모델 비행기에서 빠져버린 정체불명의 부품 하나. 혹은 질 줄 뻔히 알면서 어쩔 수 없이 말려들어가고 있는 도박 게임 같은 것. 불길함. 초조함. 음울한 전조…….

“가시죠. 아침 준비 거의 다 된 것 같더군요.”

“…….”

부축하듯 그의 팔을 잡고 반대편 허리를 감싸 안자 그의 몸이 움찔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괜찮은데…….”

“기대세요. 저야말로 괜찮습니다.”

“……그게 아니라…… 친구들이 보니까…….”

“…….”

확실히 이상해 보이긴 할 것이다. 다 큰 남자 둘이 연인처럼 붙어 다닌다면. 젠장. 이상해 보이라지. 대상 없는 욕설을 뇌까릴 정도로 부아가 치밀었다. 자신이 그렇게 창피하단 말인가? 이렇게 필사적으로 관계를 숨길 만큼 수치스러운 존재란 말인가? 그의 사랑은 그렇게나 나약하고 비겁한 실존에 불과하단 것인가?

“몸이 불편해서 부축을 해드리는 건데 뭐가 어때서요?”

부축의 의미라기보단 확실히 포옹의 의미가 더 강한 자세를 부러 취하며 고집스럽게 일갈했다. 어딘가 사나워진 기색을 귀신처럼 읽은 그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얌전히 자신의 팔에 체중을 실어오며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확실히 보통보다 불안정한 걸음걸이였다. 울퉁불퉁한 경사로를 올라갈 때나 내려설 때, 흐릿하게 찡그려지는 얼굴만 봐도 아래쪽의 불편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역시 짐승 짓을 해댄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신이 그의 기도를 들어주었는지는 몰라도 식사가 준비되고 있던 큰방에 도착할 때까지 그의 동료들과 마주치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펜션까지의 십여 분 거리도 그러했고, 펜션 앞마당에 도착해서도 사람의 그림자는 찾을 수 없었다. 이른 아침인데다, 남자의 동료들 외엔 펜션에 다른 손님이 없기 때문인 것 같았다. 아래층 방에 여장을 푼 여자들까지 모두 2층 큰방에 모여 있었으니, 사람 모습을 볼 수 없었던 것도 당연했다.

막상 펜션 앞마당에 들어서니 그는 완강하게 자신의 부축을 거절했다. 역시 친구와 동료들의 시선이 신경 쓰이는가 보았다. 이미 한번 심술궂은 객기를 부린 것으로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분노는 가라앉았기에, 자신 역시 그의 허리에 휘감았던 팔을 선선히 풀어주었다.

몇 걸음 뒤처진 채, 확연히 뒤뚱거리는 걸음걸이로 간신히 뒤따라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여전히 손톱으로 할퀴는 것처럼 속이 쓰렸다. 간밤의 짐승을 후회하는 것조차 염치가 없었다. 걸음을 멈추고 다시금 그를 부축하고 싶은 욕구로 괴로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불편한 몸보다 불편한 마음이 더 고통스러울 그라는 것을 자신이라고 왜 모르겠는가.

“오, 마침 찾으러 갈 생각 했다, 인환아. 위 군도 어서 와 앉아라. 밥 먹자.”

숙소 안으로 들어서니, 국자와 밥공기를 양손에 든 권 사장이 쾌활한 어조로 자신들을 맞아주었다. 모여 있던 다른 일행들도 간단한 일별과 고갯짓으로 아는 체를 했다.

방 안 한가운데에 장방형으로 길게 신문지가 펼쳐져 있고, 그 위에 열세 명분의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방 안은 카레 냄새와 콩나물국 냄새, 그리고 밑반찬 냄새들이 어우러진 퀴퀴한 음식 냄새로 진동하고 있었다. 식욕보단 오히려 희미한 토기가 느껴질 만큼 강렬한 냄새였다. 잠을 자지 못한 것이 식욕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갈 때 이불을 도롱이처럼 만 채 잠들어 있던 몇몇도 푸석한 얼굴로 임시 밥상 앞에 모여 앉아 연신 하품을 토해내고 있었다. 사내들은 대부분 숙취로 부대끼는 듯했고, 여자들 셋만 화장까지 마친 멀끔한 얼굴들이었다.

밥상 너머에서 여자 둘이 호들갑스럽게 손을 흔들며 아는 체를 했다. 나경자와 한상희였다. 일어나자마자 복도에서 마주쳤던 미술 잡지 기자는 과연 같은 사람인가 의심스러울 지경으로 화사한 모습이었다. 변태 호모 놈은 활짝 열린 창가에 홀로 외떨어져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11월의 가로수처럼 헐벗고 황량한 얼굴이었다. 고독한 예술가인 척 궁상떨지 마, 새꺄. 속으로 악의적인 비웃음을 날려주었다.

괜찮으냐는 염려의 소리들에 부드러운 미소로 답을 하며 자리를 잡고 앉는 그를 확인한 다음 권 사장에게 다가갔다. 옅은 그린 계열의 세련된 아웃도어 차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곰살궂은 몸짓으로, 권 사장은 다른 사내 둘과 함께 싱크대 옆 식탁 위에 놓인 커다란 냄비에서 부지런히 카레를 퍼 담고 있었다.

“……사장님, 세면 도구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여벌 칫솔이 있으시면…….”

“어, 있지, 물론! 어이쿠, 그러고 보니 미처 생각을 못 했네? 니들은 갑자기 내려와서 이것저것 불편했을 텐데…… 칫솔이랑 치약만 주면 되나?”

“면도기도 있으시면…….”

당장 미안한 얼굴이 된 권 사장이 국자를 내려놓곤 싹싹하게 되물었다. 대꾸가 떨어지기도 전에 곧바로 방 안 한쪽 구석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배낭 뭉치로 다가가더니 그중 하나를 뒤져 원하는 것들을 꺼내주었다.

치약과 칫솔, 그리고 일회용 면도기 하나와 덤으로 애프터셰이브 로션까지 받아들곤 곧바로 자신들의 숙소로 갔다. 그의 안전을 확인하고 나니 문득 더러운 몸이 견딜 수 없게 생각되었다. 식사보다도 씻는 것이 더 간절했다. 하루 종일 그의 곁에 붙어서 지키려면 지금밖에 틈이 없을 거라는 자각을 하고 보니 마음은 한층 더 조급해졌다.

부랴부랴 욕실로 들어가 면도를 하고, 이를 닦고, 마지막으로 샤워를 하는 내내, 불안감은 여전히 앙금처럼 남아 배 속을 쪼아댔다. 설마 여럿이 모여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별일이야 있을까 싶으면서도, 워낙 속을 알 수 없는 변태 호모 놈이니 방심은 금물이었다.

15분이 넘을까 말까 한 사이에 초스피드로 씻기를 마치고, 다시 부랴부랴 옷을 주워 입은 후 큰방으로 되돌아갔다. 덜 마른 머리카락에선 움직일 때마다 뚝뚝 물방울이 떨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안으로 들어서니 다행히 아직 식사가 한창이었다. 몇몇 식탁에 따로 떨어져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방바닥의 임시 밥상에 앉아 두런거리는 수다와 함께 덧밥을 먹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소중한 사람부터 찾았다. 식사는 끝낸 모양이었지만, 여전히 젓가락을 쥔 채 마주 앉은 사내 하나와 무언가 수다를 떨고 있었다. 갑자기 배 속 통증이 거세졌다. 그의 오른쪽 옆, 겨우 한 사람이 끼어 앉을 수 있을까 말까 한 공간만을 남기고 저 시커먼 변태 놈이 붙어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위야, 왔네?! 위야, 빨리 와! 어서 와 앉아! 카레 다 식었겠다! 따뜻하게 새로 데워줄까?!”

“잠 설친 모양이네? 안색이 안 좋다, 미남군?!”

한상희인지 나경자인지 둘이 쌍으로 앉아 요란스레 러브콜을 보내고 있었다. 옆에 와 앉으라는 듯, 홍해처럼 갈라지며 그녀들 가운데로 자신이 앉을 공간을 만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여자들 말고도 몇몇 사내들이 친근감이 드는 인사를 건넸지만 그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귀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칼끝처럼 긴장한 신경줄은 오로지 그와 변태 놈에게로만 집중되고 있었다. 몹시 마른 여자나 사춘기 애들만이 겨우 비집고 들어앉을 수 있을, 저들 사이의 좁은 빈 공간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그가 상반신을 문 쪽으로 약간 틀며 살짝 시선을 보내왔다. 여전히 창백한 안색에, 여전히 불안감이 느껴지는 표정으로 조심스레 자신을 살피고 있었다. 젠장할. 지금이라도 당장 저 몸뚱이를 낚아채 어디로든 끌고 갈 수만 있다면!

국그릇을 들고 부지런히 숟가락질을 하던 변태 놈의 고개가 슬쩍 그를 향하는 것이 보였다. 자신에게 시선을 보내고 있어, 그는 미처 변태 놈의 도둑 같은 음침한 주시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저절로 양미간이 찌푸려지며 이마의 힘줄이 곤두섰다. 내장을 할퀴는 울화통이 명하는 그대로 성큼성큼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맞은편에서 여자들이 뭐라뭐라 쨍알대고 있었다. 아마도 옆에 와 앉으라는 의미일 것이다. 무시하고 그와 변태 놈의 사이에 다리를 디밀었다. 똑바로 그의 시선을 주시하면서 곁에 앉겠다는 의지를 전하자, 휘둥그렇게 눈을 뜬 그가 왼쪽으로 비척비척 엉덩이를 움직여 갔다. 단 몇 초 만에 충분한 공간이 확보됐고, 자신은 미련 없이 그곳에 둥지를 틀었다.

그도, 맞은편의 여자들도, 또 오른쪽 옆의 변태 놈도 따귀라도 맞은 듯 황당한 표정을 만들고 있었다(아마도 자신에 대한 열렬한 환영 의식 때문이겠지만). 여류들의 꽃미남 밝힘증을 성토 중이던 다른 몇몇 사내들의 표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설마 여자들의 노골적인 초대를 무시하고 그의 옆에 자리를 잡을 줄은, 다들 예상 못 한 듯싶었다. 별것 아닌 행동이지만, 확실히 세속적인 예의범절에선 벗어난 싸가지 없는 짓임엔 분명했다. 연장자고, 무엇보다도 여자들이다. 순수한 호의를 마치 요부들의 초대처럼 과민한 거절로 반응한 것과 별로 다르게 비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해명이 떨어지길 바라고 있는 듯한 열두 쌍의 시선이 동시에 자신의 얼굴에 내리꽂히고 있었다. 지겨운 생각이 들었다. 역시 한시라도 빨리 그를 데리고 올라가야만 하겠다는 결심을 새삼 다졌다.

“여자분들은 무서워서요.”

무뚝뚝하게 원하는 답을 들려주자 좌중이 싸하게 얼어붙었다. 막연한 호기심을 담고 있던 눈들은 이젠 아예 경악으로 휘둥그레졌다. 젠장. 마지못해 한마디를 더 보탰다.

“……제가 좀 부끄러움을 많이 타거든요. 여자 옆에 앉으면 떨려서 밥을 잘 못 먹습니다.”

그러나 최대한 성실하게 뱉어진 변명에도 불구하고 얼어붙은 실내는 좀처럼 녹을 줄을 몰랐다.

뇌가 눌리는 것 같은 묵직한 두통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젠장. 달리 변명거리를 찾아보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미간에 힘이 들어가며 짜증이 솟구치려는 찰나, 맞은편 여자들에게서 푸하 하는 웃음보가 터졌다. 그게 도화선이 되었는지, 여기저기서 큭큭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전염병 같은 폭소가 좌중을 휩쓸었다. 여자들은 아예 손바닥으로 바닥을 치며 경기가 들린 것처럼 웃어댔고, 사내들은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여린 녀석이라는 둥, 어디 다른 데 가서 그딴 소리 말라는 둥, 그러다 바보 취급 받는다는 둥, 생짜 마초처럼 생긴 주제에 엽기라는 둥, 자기도 그 기분 안다며 딱하다는 둥, 진심으로 애도에 찬 반응들을 보여주었다.

설마 이 사람들이 자신의 변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건가 싶어 기막혀하면서도, 일견 딴 세상 사람들 같은 이들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그냥 모른 체했다.

폭소와 더불어, 자신을 향한 유치하고 짓궂은 놀림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별로 불쾌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쨌건, 얼토당토않을 임기웅변으로 해서 자신은 저 어딘가 바보스럽고 어딘가 선량한 애어른들에게 좀 더 호감을 주게 된 모양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자신 역시 저들에게 호의를 품었냐 하면 절대 아니올시다였다. 상식에서 벗어난 집단이란 언제 어떻게 뒤통수를 칠지 모를 일이었다. 바로 자신의 오른쪽 옆에 앉아 있는 이 변태 호모 놈처럼. 신뢰가 바탕에 없는 호의란 거울에 비친 이미지처럼 실체가 없는 허상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은 저들을 믿어주고픈 마음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이해해줄 마음 또한 결코 없었다. 저들은 그저 자신에게 있어 모두 잠재적인 적에 불과했다. 언제 어느 때 타락한 퇴폐의 발톱을 드러내 내 것을 할퀼지 모르는 위험한 적이었다. 탐내고, 더럽히고, 종내는 빼앗을 계획을 호시탐탐 세우고 있는 도둑이자 강도들이었다. 바로 옆자리의 변태 호모 놈처럼.

“별로 많이 안 드셨네요, 선생님?”

동료들과는 달리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자신의 눈치만 살피고 있던 그에게 상냥하게 물음을 던졌다. 최대한 상냥하고 달콤하게. 오른쪽의 변태 호모 놈이 귀를 세우고서 듣고 있었다. 여봐란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하긴 선생님 좋아하시는 반찬이 별로 없죠? 많이 드시고 얼른 살이 더 붙어야 하는데요.”

어리둥절한 눈빛은 여전했지만 자신의 입에 발린 소리에 꿈처럼 행복한 미소를 끌어오는 그다. 찌릿 하고, 순식간에 하반신으로 피가 몰렸다. 입안에 굴러다니는 음식 맛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음식 대신 그가 먹고 싶어졌다. 밀어붙이고, 껴안고, 입술을 맞댄 채 그를 사냥하고 싶었다. 안으로, 안으로 파고들어가 따스하게 꿈틀대는 혀를 통째로 씹어 먹고 싶었다.

“……아냐, 많이 먹었는걸. 너야말로 잠 설쳐서 별로 입맛 없겠다. 그래도 많이 먹어, 위야.”

애정이 듬뿍 담긴 그의 목소리는 노랫소리마냥 고왔다. 간질간질하고 달달한 전율이 미세한 신경줄을 타고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졌다. 아아, 먹고 싶었다. 간절하게, 간절하게 그가 먹고 싶었다. 빨리 서울로 데리고 올라가야지. 벌써 몇 번째인지도 모를 다짐을 강박처럼 되뇌었다.

조롱하는 듯한 변태 호모 놈의 시건방진 시선이 가끔씩 자신의 얼굴로 떨어지고 있었다. 도발임에 분명했지만 전처럼 그렇게 속이 들쑤셔지지는 않았다. 확실히 그를 가드하고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자신을 훔쳐보는 거야 얼마든지 상대해줄 수 있었다. 그 더러운 눈길로 내 소중한 것만 쳐다보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현재 자신은 확실히 놈의 시선을 차단하고 있지 않은가.

차분하게 신경이 가라앉았다.

보기만 해도 온몸이 노곤해지는 내 것의 얼굴을 안주 삼아 맛대가리 없는 카레 밥을 말끔히 비워냈다. 계집애처럼 입맛 타령이나 하며 밥투정을 할 계제가 아니었다. 전투였다. 계엄령이었다. 빨리 서울로 데리고 올라가야지. 고맙게도 여전히 한결같은 숭배와 사모의 시선으로 자신만 바라봐주기까지 하는 내 것이었다. 내 소중한 것이었다. 자신의 의지대로 소중한 것을 조종하는 일은 식은 죽 먹기보다도 쉬웠다. 브라보.

사기충천이었다.

“아냐, 석주야! 근사해! 진짜 굉장하구나…… 나 몰랐어……!”

“칫, 별거 아니라니까…….”

“……멋지다…… 진짜 너무 너무 이쁘다, 석주야! 진짜…….”

“짜식, 붉은색이 좀 강렬하잖냐. 쉽게 시선을 끌 수 있는 이미지지. 계속 두고 보면 뭐, 그저 그래…….”

“아니라니깐. 정말 멋져. ……틀림없이 사람들도 놀랄 거야. 신인상 같은 것도 노려봐도 되겠다.”

“상은 무슨. 그냥 좀 그럴듯하게 한번 해보고 싶었던 건데. 돈 없어서 당분간 이렇게 큰 건 손 못 댈 테니까.”

“아무튼 진짜 멋져. 난 설치는 버거워서 손 안 댈 생각이었는데 이거 보니까 한번 해보고 싶다, 야. 부러워.”

“헤헤…….”

연신 코를 만지작거리며 쑥스러운 듯 웃는 사내는 이번 모임의 주인 격인 송석주였다. 아낌없이 쏟아지고 있는 그의 진심이 담긴 감탄과 칭찬에, 부끄러워하면서도 뿌듯한 만족감과 기쁨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과연 사내가 그렇게까지 칭찬받을 만한 작업을 하고 있는지는 미술에 문외한인 자신으로서야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모여든 무리들 대부분이 호평을 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성공적인 작업인 것은 틀림없어 보였지만, 거듭되는 그의 감탄 섞인 칭찬의 말들은 어쩐지 듣기에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정말로 매혹된 듯이 이리저리 작품 주변을 맴돌며 홀린 시선을 던지는 그도 마땅치 않기는 한가지였다. 줄곧 자신의 모습만을 눈에 담고 또 신경 쓰고 있던 주제에, 현재 그의 관심은 온통 송석주의 작품에게로만 쏠리고 있었다. 실용적이지도 못한 괴상한 잡동사니가 그렇게 좋을까 싶었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송석주와 권 사장의 재촉으로 나머지 아홉 명의 환쟁이들은 각자 가져온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뒤, 갖가지 도구들을 챙겨 차를 타고 송석주의 작업장으로 이동했었다.

비디오카메라를 짊어진 여자(미술 잡지 기자) 하나를 빼면 다들 행색이 완벽하게 일용직 노무자 수준이었다. 대부분 농사꾼들이나 쓸 법한 밀짚모자를 덮어쓰고 수건까지 목에 두르고 있는데다, 준비해 갖고 가는 도구들도 한결같이 삽이니 네일러니 끌, 해머드릴, 니퍼, 펜치, 스패너 등등, 무슨 집짓기 공구들 일색이었다. 차 한 대의 트렁크엔 붉은색 광목천이 촘촘하게 말려 있는 상자가 가득이었고, 다른 차엔 아마도 미리 제작해놓은 듯한 붉은 색조의 갖가지 잡동사니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송석주의 작업장은 숙소인 펜션에서 명성산 자락을 타고 4∼5분쯤 더 안으로 들어간 산중턱에 있었다. 당장 시야를 가득 메운 것은, 3만여 평쯤에 달할 드넓은 능선을 타고 조성된 대단위 딸기 농장이었다. 비닐하우스의 새하얀 아치만도 얼핏 열댓 개가 넘고, 하우스 옆 노지에 조성된 진녹색 딸기 밭뙈기들도 시원스레 시야를 압도하고 있었다. 화가들의 행색 그대로, 밀짚모자와 수건들로 얼굴을 가린 중년의 시골 아낙들이 밭에 주저앉아 부지런히 딸기를 따고 있는 모습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일행을 실은 차는 농장을 좌측으로 가로질러 200여 미터쯤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차 두 대가 아슬아슬하게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좁은 비포장 진입로를 다시 50여 미터쯤 더 들어간 자동차는, 정면으로 기묘한 붉은 구조물이 보이는 제법 너른 공터에 멈춰 섰다.

진입로에 들어설 때부터 평범한 시골 농로(農路)라고 보기 힘든 붉은색의 장식물들이 울타리처럼 길 양쪽에 죽 늘어서 있어 기묘한 느낌을 자아냈는데, 무엇보다도 주변 딸기밭을 배경으로 파상적인 모양새로 죽 늘어서 있는 열댓 개의 붉은 구조물들이 강렬하게 시선을 사로잡았다. 진입로에서부터 쭉 따라온 붉은 울타리(플라스틱 파이프들이 얼기설기 얽혀 있는 1미터 폭의 그로테스크한 밧줄 모양이었다)는 공터를 감싸듯 돌아 첫 번째 붉은 구조물 앞에서 맥이 끊겨 있었다. 50평이 조금 넘을 듯싶은 공터엔 잿빛의 자잘한 조약돌들이 깔려 있었는데, 조약돌 바닥 역시 첫 번째 구조물이 서 있는 위치에서 마치 벽에 부닥치듯이 뚝 끊겨 있었다. 갑작스러운 단절을 채우는 것은 역시 녹색의 딸기밭이었다.

구조물들은 얼추 총 열여섯에서 열일곱 개로 보였다. 규칙성을 찾을 수 없는 파상적 형태로 500평쯤에 달할 딸기밭 군데군데에 해괴한 불협화음을 일으키며 우뚝 서 있었다. 골조를 이루고 있는 것은 비닐하우스의 골조로 쓰일 법한 회색의 철제 파이프였고, 거의 장방형으로 보이는 외벽을 붕대처럼 감싸고 있는 것은 피처럼 붉은 광목천이었다. 각자 모서리를 지지하고 있는 철 골조 기둥의 높이는 10미터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외벽을 싸고 있는 피붕대의 높이는 3미터로 균일했지만, 각각의 구조물들의 단위 면적은 조금씩 미세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각각의 구조물들은 세심한 날짜 차이를 두고 규칙적으로 조성된 것이라고 했다. 물론 그 날짜의 차이에 걸맞게 피붕대에 둘러싸인 벽 안쪽의 딸기들은 햇빛이 완전히 차단된 채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작가가 의도하고 있는 주제가 죽음의 문제인지, 아니면 시간의 문제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구조물 안에서 시간차를 두고 죽어가는 딸기를 관람할 수 있게끔, 북쪽에 면한 피붕대 벽의 일부엔 고만고만한 기하학적인 구멍들이 뚫려 있었다. 그 뚫린 구멍들조차 의도된 형태를 취하고 있어, 광선의 각도에 따라 너덜거리는 붕대 조각이 어딘가 섬뜩한 분위기를 풍겼다.

느닷없고, 기괴하고, 악취미적인데다 불안하기까지 했지만, 확실히 장엄하고 인상적인 작품임엔 틀림이 없어 보였다. 드넓은 푸른 초원을 배경으로 풍성하게 자라나고 있는 빨간 딸기들은 용트림하는 생명력 그 자체였고, 작가의 구조물들은 그와는 확연히 대조되면서도 또한 어딘가 닮아 있는 묘한 이중성을 느끼게 했다. 일단 거대한 붉은 물결만으로도 대단히 아름답고 가슴을 압도하는 강력한 임팩트를 주고 있었다.

전시는 다음 주말인 모양이었다. 작가가 설치해야 할 구조물은 두 개가 더 있었고, 오늘은 그중 한 개를 더 설치할 모양이었다. 일행 중 몇은 딸기밭 가운데에 지정된 장소에 쇠기둥을 박아 피붕대를 감는 일을 돕고, 나머지 대부분은 매표소 겸 휴게실을 공터에 짓는 일에 투입된다고 했다(물론 간이 매표소조차도 작가가 치밀하게 디자인한 기괴한 구조물들 중 일부였다).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조차 작품의 일부인 듯, 비디오카메라를 든 여기자는 작가가 정해준 시간과 위치를 따라가며 일행의 작업 과정을 섬세하게 필름에 담았다.

일행 중 유일하게 작품을 처음 보는 듯한 그는, 당연한 것처럼 작품에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걷는 것조차 힘겨워했던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이리 기웃 저리 기웃 안 끼는 데가 없었다. 송석주의 악취미에 동참해 딸기를 죽이는 작업을 들여다보기도 했다가, 때론 나무와 철 골재와 갖가지 공사 도구들로 즐비한 공터로 돌아와 설계도를 펼쳐들고 의논을 하거나, 이미 골조를 세우기 시작한 인부들 틈에 섞여 잔심부름을 하거나 했다. 그의 부실한 몸 상태를 아는 동료들은 그저 방해만 될 뿐이라며 구경이나 하라고 핀잔을 주었지만, 이미 한껏 기분에 취한 그를 말릴 수는 없었다.

그랬다. 예의를 벗어나지 않는 수준에서 형식적인 도움만 보태려 했던 자신이, 어쩔 수 없이 땀을 뻘뻘 흘릴 수밖에 없었던 건 그런 열받는 까닭이 도사리고 있었다. 혹시라도 무리해서 쓰러지지는 않을까, 혹시라도 제 힘에 부친 무거운 자재를 들고 넘어져 다치지나 않을까, 줄곧 그의 주변을 떠돌며 감시를 해야만 했다(물론 가장 신경 쓰고 있는 감시 사항은 솔직히 저 변태 호모 놈이 혹시라도 그에게 가까이 접근하는가 하는 문제였지만). 점심때만 지나면 이 우습지도 않은 일도 끝이니 그나마 참을 만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손목시계를 살피니 1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네 시간쯤을 그늘 하나 없는 뙤약볕에서 종종거리고 나니, 입고 있던 셔츠와 바지는 또다시 땀투성이가 되었다. 수은주도 벌써 30도가 넘은 듯했다. 그나마 펜션으로 되돌아갔던 일행 중 하나가 모자를 하나 가져다줘서 얼굴이 익는 것은 막을 수 있었지만, 찌는 듯한 더위는 좀처럼 참기 힘들었다. 5월 말로 접어들었을 뿐이라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불면의 후유증일 두통까지 겹치니 몸 컨디션은 점점 더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하룻밤을 새운 것 정도로 이렇게까지 피곤할까 싶었는데, 곰곰 생각해보니 원인은 다른 데에 있는 것 같았다. 느닷없는 육체 노동보다도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좇으며 지키는 일이 더 피곤했다.

수시로 더듬이에 감지가 되는 변태 호모 놈의 시선은 여지없이 그에게로 향해 있기 일쑤였다. 아주 가끔씩, 놈의 손이나 팔이 마치 우연처럼 그를 스치고 지나가면 극심한 불쾌감과 증오심이 전신을 사로잡곤 했다. 뫼르소는 더위 때문에 살인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본인은 자각조차 못 한 누군가에 대한, 아니, 무엇인가에 대한 극렬한 증오심으로 방아쇠를 당겼겠지.

욱신거리는 두통과 스트레스를 참기가 힘들었다. 뭔가 겪어보기라도 한 상황이라면 어떻게든 마음을 다스릴 방안이라도 세울 텐데, 도무지 생전 처음일 감정에 이성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런 자신이 낯설었다.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진 것만 같았다. 자신이 아닌 것만 같았다. 단 한순간도 그를 생각하거나, 혹은 바라보거나, 또 혹은 감시하지 않는 때가 없었다. 그만으로 뇌 속이 가득 차서, 어느 순간엔 자기가 자기 자신인지 그인지 그저 아리송하기만 했다.

수시로 시계를 살폈다. 세 시간만 버티면, 두 시간만 버티면, 아니, 한 시간만, 아니, 아니, 이제 30분만 버티면 끝이다 하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더 이상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그에게 낙담하는 것도, 변태 호모 놈을 죽이고 싶도록 증오하는 것도 이제 곧 끝이 난다.

그랬다. 그렇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스트레스를 견뎌냈다.

오후 1시를 조금 넘긴 시각, 점심 먹고 하자는 권 사장의 쾌활한 외침으로 지옥 같은 고문이 마침내 막을 내리게 되었다.

숙소로 되돌아오는 기분은 그야말로 날아갈 것만 같았다. 다시금 자신만을 시선에 담기 시작한 그의 태도도 만족스러웠고, 무엇보다도 곧 서울로 뜨게 된다는 사실이 몸서리쳐지게 즐거웠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코끝으로 파고들던 삼겹살 굽는 냄새도 기분 좋게 식욕을 자극했다. 샤워를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픈 결벽증이 불쑥 고개를 쳐들었지만, 몇 걸음 뒤처져서 자신을 따라오던 그가 바로 큰방으로 들어가버리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자신도 큰방으로 되돌아갔다. 하긴 어차피 갈아입을 옷 따윈 없었다. 곧 움직일 테니 서울에 도착해 편안한 마음으로 깨끗이 씻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삼겹살 냄새가 진동하는 방 안으로 들어서니, 먼저 돌아와 식사를 준비 중이던 여자 하나와 사내 하나가 떠들썩한 수다로 일행을 맞아주었다. 아침때처럼 방 안 한가운데에 신문이 쭉 깔리더니 제법 화려한 점심상이 마련되었다. 주메뉴는 삼겹살과 된장국, 그리고 접시에 수북하게 담긴 딸기였다. 일행 중 일부는 상차림을 도왔고, 일부는 방 안의 화장실 두 곳에 번갈아 들어갔다 나오며 손을 씻고 세수를 했다.

동료들과 수다를 떨면서도 줄곧 피로한 표정이 되는 그가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았고, 행여 그의 옆자리를 놓칠세라 자신도 바로 그 옆에 자리를 잡았다. 시커먼 변태 놈은 저 멀리 구석진 곳에서 책상다리를 접고 있었다.

육체노동의 뒤끝에 먹는 식사란 역시 꿀맛이 따로 없는지, 일행 대부분이 식사 당번에게 덧밥까지 달라고 조르며 왕성한 식욕을 보였다. 자신 역시 아침의 저조했던 식욕이 의심될 만큼 포만감 있는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암만 생각해도 불면 때문이라기보다는 기분 문제였던 모양이었다.

식사 시간 내내 수다를 떠는 것은 아침과 마찬가지였지만 분위기는 많이 달랐다. 화제도 우스갯소리나 누군가의 가십, 혹은 정치 얘기처럼 세속적인 것에서 벗어나, 오로지 진행 중인 작업에 대한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얘기하는 자세도 꽤나 진지하고 신중했다. 어젯밤이나 오늘 아침에 느꼈던 철부지 놀자 판의 한량 분위기는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자신에게 노골적인 호감과 호기심을 드러내던 여자들조차 자신보단 일 얘기에 더 열성을 보였다. 역시 그 방면 전문가들임엔 분명한 것 같았다. 좋아하는 일에 대한 야심이나 정열, 그리고 근성은, 그저 피상적으로 내비치는 저들의 말랑한 기질과는 무척 대조적이었다. 저들의 그런 점은 확실히 내 소중한 이의 그것과 많이 닮아 있었다. 소중한 이 또한 평소엔 바보처럼 느껴질 때가 많을 정도로 말랑하고 온순하지만, 일단 일 문제에 있어선 무서울 정도의 정열과 집중력을 보여줬다.

“위 군은 집이 어디야?”

“……?”

“나, 관훈동에 취재 갈 일이 있거든. 지금 출발하면 약속 시간이 빠듯할 거 같은데, 집까지 데려다줄 수 있을지 모르겠네?”

“……?”

식사의 끝 무렵, 맞은편에 앉은 화려한 용모의 여기자가 느닷없이 던진 질문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왜 여자가 자신을 바래다준다는 걸까? 잠시 막연한 생각을 굴리다가 벼락처럼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강타했다. ……설마……?!!!

“고척동인데 좀 멀죠, 손 기자님? 그냥 전철 타기 편한 곳에서 내려주세요. 위 대중교통 잘 타고 다니니까 상관없어요. 서울까지만 데려다주시면 됩니다.”

제기랄!!!!!!

옆에서 자신 대신 대꾸를 흘리는 그로 인해서, 불길한 예감은 잔인하게 확인 사살을 당하고 말았다.

평온했던 심장이 두근두근 불길한 율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딸기 바구니로 가져갔던 손이 몇 번 의미 없는 헛손질을 하다간 맥없이 제자리로 되돌아왔다. 손가락 끝이 조금씩 떨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단순한 자신의 착각일까?

“안타깝네, 고척동이라니. 일단 종로나 명동 근처에서 내려주면 되겠지?”

“……선…… 생님은 지금 올라가시는 거 아닙니까?”

생글거리는 미소를 보내오는 여기자의 따귀라도 갈기고 싶었다.

“어, 위야. 난 내일 올라가려구. 석주 작업 과정을 좀 더 지켜보고 싶거든. 내 대신 손 기자님께서 안전하게 데려다주실 거야. 괜찮지? 어제 잠도 설치구 고생했을 텐데……. 일찍 올라가서 쉬어라. 내일 수업에 지장 없어야 할 텐데, 걱정이네.”

……침착해…… 침착하자, 문위…… 침착해……. ……진정하고 방법을…… 방법을…….

“……저도…… 내일 선생님과 함께 올라가면 안 될까요? 여기 공기도 맑고 놀러 온 것 같아서 정말 기분이 좋거든요. 일 도와드리는 것도 재미있고요. 폐만 안 된다면…….”

점점 더 휘둥그레지는 그의 눈동자가 보였다. 자신의 예상치 못한 대꾸에 혼란을 넘어 불안감까지 느끼는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던 얼굴은 조금씩 굳어들고 있었다.

“……위야……? 하지만 아까…….”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젠장.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 누가 알았나!

“그럼, 그럼! 공기 좋고, 물도 맑고, 밥맛도 좋고, 다 좋지! 이따 밤엔 바비큐 파티까지 할 건데?! 잘 생각했어, 위야! 하루 더 있다가 가!”

맞은편의 나경자가 신이 나서 맞장구를 쳤다. 지나치게 친한 척을 하며 엉겨 붙는 저 요란스러운 여자가 처음으로 귀여워 보였다.

“하하, 그래, 위 군. 잘 생각했어. 뭐 좀 중노동인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해보니까 꽤 재밌지? 순수미술도 따분한 것만은 아니라구.”

“어, 힘 좋고 부지런한 일꾼이 하루 더 일해주겠다는데 나야 환영이지. 버뜨, 그러나! 밥 세끼 외에 일당은 없어, 위 군! 뭐, 솔직히 공짜로 수학여행 온 셈이지 뭘. 심오한 예술의 세계를 공짜 밥 먹으며 배울 수 있게 됐잖아?”

털털하게 웃으며 맞장구를 쳐주는 이가 권 사장, 시원스레 공치사를 날리는 사내가 송석주, 이 모든 짜증스러운 해프닝의 총지휘자일 사내였다.

요란스레 쿵쾅거리던 심장의 고동이 비로소 정상을 찾아가고 있었다. 태연한 척, 다시금 딸기 바구니로 옮겨가는 자신의 손끝도 더 이상은 떨리지 않았다. 긴 한숨이 소리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일 수업은…….”

자신에게만 들릴 정도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살며시 토해졌다. 당혹감은 사라졌지만 곤란한 기색이 역력했다. 자신을 배려한 곤란함인지, 아니면 그 스스로가 곤란한 것인지, 집요해지려는 생각의 고리를 끊어냈다. 집요해져봤자 짜증과 초조감만 가중된다.

“……내일 수업은 어떻게 하려고 그래, 위야…… 그…… 그리구 많이 피곤할 텐데…… 갈아입을 옷도 없잖니…… 찝찝한 거 무척 싫어하면서…….”

물론 자신이 꺼리는 악조건들로만 똘똘 뭉쳐 있는 여행길이라는 걸 안다. 무엇보다 어린 동생들을 버려두고 이틀씩이나 외박을 하게 된 것이다. 자신이라고 이 상황이 달가울 까닭은 없었다. 하지만 그 어떤 불유쾌한 상황도 내 것을 늑대 소굴에 혼자 남겨두는 것 이상으로 최악인 것은 없었다.

비교적 평온해진 시선으로 내 소중한 것에게 시선을 가져갔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며 핼쑥하게 마른 창백한 안색에 여전히 속이 상했다. 언제쯤 다시 살이 찔 수 있을까, 이 사람은. 그가 싫어하는 삼겹살 냄새가 역해서였는지 그 앞에 놓인 밥그릇은 채 반도 비지 않았다.

“교양 수업이니까 한두 시간쯤 제껴도 상관은 없습니다.”

단호한 의지를 담아 나지막하게 속삭이자, 마지못한 체념의 빛이 파리한 얼굴에 떠올랐다.

“……그렇구나…….”

무언가 우물우물 더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그 조용한 목소리는 마침 좌중을 사로잡은 떠들썩한 웃음소리에 완전히 파묻히고 말았다. 온 신경을 그의 얼굴과 목소리에 집중시키고 있었기에, 어렴풋이나마 입술을 읽을 수는 있었다.

―그래도 불편할 텐데…… 재미있다니 다행이지만…….

대충 그런 의미인 것 같았다. 건조하게 마른 듯한 그 입술이며 갸름한 콧날, 그리고 자신에게서 시선을 내려 무심히 밥상을 내려다보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눈시울에 이르기까지, 핥듯이 주시하는 자신이 있었다. 불그스름한 흉터를 남기고 있는 상처 자국이 아쉬워 무심코 손을 가져가려다가, 다시 터진 왁자한 웃음소리에 놀라 문득 정신을 차렸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루 종일 시도 때도 없이 반응하고 있는 짐승의 그것이었다. ……제정신이 아니야…….

낯설었다. 낯설기 짝이 없는 짐승이 아닌가. 도무지 이 병적인 성욕을 이해할 수가 없다. 혼란을 납득할 수가 없다.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지지 않고서야. 자신은 자신이 알고 있는 자신이 아닌 것만 같았다. 단 한순간도 그를 생각하거나, 혹은 바라보거나, 또 혹은 감시하지 않는 때가 없었다. 툭하면 가슴을 두근거리고, 툭하면 물건을 세워댔다. 별것 아닌 표정에도 감미로운 전율을 느끼고, 늘 들어왔던 나지막한 목소리에도 물밀듯이 밀려드는 행복감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만으로 뇌 속이 가득 차서, 어느 순간엔 자신이 그인지, 그가 자신인지 아리송하기까지 했다. 이상했다. 자신은 정말 어딘가 이상해진 것이 틀림없었다.

떠들썩한 소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여기자가 서울로 올라가기 전에 모인 사람들을 기록한다며 비디오카메라를 돌리고, 다른 사내 하나는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일행들을 찍고 있었다. 좌중을 돌던 카메라들이 자신과 그에게도 도착했다. 포즈를 취하라는 여자와 사내의 주문에, 자연스럽게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너무나 좋아하는 가냘픈 어깨가 손바닥에 닿는 감촉은 황홀했다. 좀 더 품 안으로 끌어당기자 그의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이 어깨 근처에 와 닿았다. 머릿속이 몽롱해진 느낌이었다. 웃으라는 주문에 멍하니 따라 하자 장내는 또다시 커다란 폭소로 가득 찼다. 위 군, 무슨 웃음이 그따위냐고 하길래, 어떤 웃음을 웃어야 ‘그따위’가 아닌 걸까 잠시 고민했다. 불안한 듯 행복한 듯, 꿈처럼 달콤한 웃음을 웃는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곤 겨우 ‘그따위’가 아닌 웃음을 만들 수 있었다. 아니, 부러 만들지 않아도 저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저절로 입술이 크게 벌어지며 환한 기쁨의 미소가 떠올랐다. 이번엔 그의 짓궂은 동료들도 웃지 않았다. 놀리지도 않았다. 비디오카메라를 들이댄 여기자도, 폴라로이드를 찍어 인화된 사진을 건네주는 사내도 희미하게 얼굴을 붉히며 쑥스러워했다. 진짜 사람 잡을 친구네, 사내가 머리카락을 긁적거리며 더듬거렸다. 위 군, 진짜 이쁘구나, 여자는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헐떡이듯 감탄했다. 나경자와 한상희는 다시 웃어보라며 괴성에 가까운 비명을 질러댔다. 여류들 난리 나겠네, 사내들은 시종 헛기침을 해댔다. 카메라들의 피사체가 다른 이들에게로 옮아가고, 자신의 손안엔 사내가 쥐여준 사진 두 장만이 남았다. 하나는 ‘그따위’ 웃음, 다른 하나는 ‘그따위’가 아닌 웃음을 웃는 자신이 들어 있었다. 그 옆엔 행복한 듯 환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도 함께였다. 한참 동안 멍하니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정말로 맘에 드는 사진이었다. 이제까지 찍은 것 중 최고라고 할 만했다.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칙칙한 즉석 사진인데도 어쩐지 그런 기분이 들었다. 여전히 자신의 팔 안에 갇혀 있던 그가 몸을 꼼지락거리며 위야 하고 나지막하게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이제 놔달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못 들은 척, 내내 사진만 굽어보았다. 사진만 바라보는 한은, 언제까지나 그를 품고 있을 수 있으니까.

4시가 조금 넘은 것 같았다.

그가 숙소로 돌아간 지 한 시간쯤 지난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핑계를 대고 그를 쫓아가도 별로 의심을 받지 만큼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되었다. 그야말로 피가 마르는 한 시간이었다.

점심을 끝낸 직후, 서울로 올라간 두 사람을 뺀 나머지 일행은 다시 작업장으로 몰려와 별 대화도 없이 진지하게 일에 빠져들었다. 그 역시 오전과 마찬가지로 이리저리 종종거리며 작업을 구경했지만, 2시가 지나자 피크로 치솟은 땡볕의 열기를 못 견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30분쯤 더 독하게 버티는 것 같더니, 결국 하얗게 질린 얼굴로 권 사장에게 피로를 호소했다. 작업 과정에 그렇게나 흥미를 보인 그였지만, 역시 바닥까지 떨어진 몸 상태론 무리였을 것이다.

바래다주는 한상희는 물론 남은 일행들에게 몹시 미안해하며 그는 가서 쉬겠다는 말을 남기고 숙소로 되돌아갔다. 멀어지는 차의 뒤꽁무니를 배웅하는 기분은 지랄 같았다. 초조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당장 그를 따라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이 재미있다고 핑계를 삼은 주제에,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뻔뻔스러움이 아닌가. 그나마 변태 호모 놈이 따라가지 않은 것에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었다.

전전긍긍 분초를 재며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렸다. 게으름을 피우기 시작했고, 여봐란 듯이 더위에 지친 듯한 실감나는 연기까지 선보였다. 4시 반, 들어가겠다는 의사를 미적미적 내비치자, 의심할 줄 모르는 권 사장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기대했던 답을 주었다. 한상희가 차로 데려다줄까 물어왔지만 거절했다. 고작 걸어서 20∼30분 거리였다. 아무리 마음이 급하다 해도 일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들을 부릴 만큼 염치가 없지는 않았다.

이미 외출복이라기보단 작업복으로 전락해버린 연회색 슈트의 바짓가랑이를 무릎 위까지 걷어붙인 다음, 셔츠를 완전히 벗어 던진 반라 차림을 하고 펜션까지 뛰었다. 시뻘건 눈을 하고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죽어라 뛰어가니, 완전히 돈 놈의 꼬락서니였으리라. 도착하기까지, 밀짚모자를 뒤집어쓴 늙은 농부 둘과 맞닥뜨린 외엔 달리 사람과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다행이라 생각도 됐다가 아무렴 어떠냐 하는 호전적인 기분이 되기도 했다.

걸어서 20∼30분의 거리는 뛰면 10여 분으로 단축될 수 있는 거리였다. 숨은 턱 끝까지 차고 돈 놈 같은 너절한 행색은 더 짙어졌지만, 익숙한 2층 건물이 단숨에 코앞에 나타나니 그저 반가운 마음만 들었다.

펜션에 도착하자마자 살핀 것은 앞마당에 주차돼 있는 그의 BMW였다. 됐다. 어쨌건 그는 숙소 안에 있다는 뜻이 된다. 자신은 모르는 어떤 곳을 헤맬 정도로 기력이 넘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기운이 빠져 혹 쓰러지기라도 했다면 펜션의 주인장이거나 기타 등등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졌을 거다. 안도한 나머지 굳었던 자신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땡볕에 무기력하게 지쳐가고 있는 듯한 소채류와 허브들이 오밀조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정원을 지나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여전히 그의 동료들 외엔 다른 숙박객이 없는 모양인지, 펜션 내부 또한 무덤 같은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단숨에 2층 계단을 뛰어오르는 자신의 발소리가 유달리 크게 울렸다.

방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아무리 여행지라지만 그의 부주의함에 혀를 찼다. 여관만을 골라 터는 도둑이나 강도들이 꽤 있다는 걸 모른단 말인가, 그는? 나중에 반드시 주의를 주자고 생각을 다지며 안으로 들어선 다음 문을 걸어 잠갔다.

한눈에 들어오는 일곱 평 크기의 자그마한 공간이라 그를 찾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그는 침대 위에 모로 누운 채 곤히 잠이 들어 있었다. 허리까지 덮인 시트 위로 새하얀 민소매 티를 걸친 가무잡잡한 상반신이 눈으로 돌진하듯 밟혀들었다. 침대로 다가가는 자신의 발걸음이 조금 불안정하게 휘청대는 것을 느낀다. 머릿속은 다시금 몽롱해지고, 가슴은 봄바람처럼 설레었다.

싱크대 옆에 있는 선풍기가 느릿하게 돌아가며 방 안에 유일한 움직임을 만들고 있었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침대보 자락이 보일 듯 말 듯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햇빛이 싫었는지, 커튼이 꽁꽁 쳐진 방 안은 꽤 어둑했다. 그래도 그의 갸름하고 섬세한 이목구비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한동안 우두커니 서서 내려다보다가 서서히 평정을 찾아가는 심장을 자각한 후, 바닥에 앉아 또다시 한참을 굽어보았다. 안개가 낀 듯 머릿속은 그저 몽롱하기만 한 채, 그 어떤 논리적인 사고도 거부하고 있었다. 그저 이 순간이 마냥 행복하다는 강박만을 달콤하게 곱씹었다. 안전하게 지키고 있으니 더 이상 초조하지도 않고, 또 보고 싶은 만큼 실컷 보고 있으니 눈 또한 즐거웠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울 뿐이었다. 편안하고 충만했다.

그렇게 사냥개처럼 그를 지키고 앉아 얼마의 시간을 흘려보냈는지는 기억에 없다. 조금씩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그제야 씻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렇게나 다리를 뻗고 앉은 자신의 방만한 몸을 살펴보았다. 끈적한 땀과 오물 범벅인 반라의 몸이 보였다. 구두를 벗고 맨발로 딸기 밭을 돌아다닌 덕분에 두 발은 거의 진흙 범벅이었다. 역시 흙과 잡초로 얼룩투성이인 바지는 잔뜩 구겨진 채 허벅지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아직까지 한 손에 움켜쥐고 있던 셔츠 자락 또한 한가지였다.

‘그것’은, 비척비척 일어서서 욕실로 들어가던 중 발견하게 되었다.

쇼핑백이었다. 무려 세 개나 되는 커다란 그것은 눈에 잘 띄도록 욕실 문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맨 앞의 것에는 자그마한 메모지도 붙어 있었다.

―위야, 시내 나가서 갈아입을 옷 대강 사 왔어. 어제 오늘 많이 불편했지? 샤워 하고 갈아입어. 속옷도 사 왔으니까 다른 것도 열어보고. 나 좀 많이 잘 거 같으니까 저녁에 안 일어나도 깨우지 말아줄래?

목구멍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순식간에 시야가 흐릿해졌다. 어이가 없었다. 시내라면 포천 시내다. 지나올 때 보니 20분 이상을 운전해서 가야만 하는 거리였다. 다 죽을상을 하고, 한상희의 배웅까지 받아가며 돌아온 주제에 또 혼자 차를 몰고 시내로 나갔단 말인가? 고작 자신에게 갈아입힐 옷을 사러? 기가 막혔다. 정말로 기가 막히고, 한심하고, 대책이 안 서는 사람이었다. 이런 등신 같은 작자라니. 등신 같은 사랑이라니!!!

후둑후둑 닭똥처럼 줄줄 떨어지는 눈물을 채 닦을 생각도 못 하고서 쇼핑백의 옷을 꺼내 들었다. 보기만 해도 편안한 헐렁한 면바지에 흰색의 반팔 면 티였다. 속옷은 자신이 즐겨 입는 흰색 삼각팬티였다. 역시 멋을 부릴 여유까지는 없었던가 보았다. 지난주에 청담동에서 떠안긴 옷들에 비하면 너무나 평범하고 소박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 따스한 배려심과 깊은 애정에 있어선 둘 다 한 치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쓰라린 가슴의 통증에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내면의 견고한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부서지고 있었다. 무너지고 부서지는 고통과 혼란은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너무나 아프고 아파서 도대체 왜 무슨 이유로 아파야 하는지조차 도저히 가늠이 되지 않았다.

휘청거리는 몸을 끌다시피 욕실로 기어들어갔다. 흐느끼며, 떨며, 몸부림치며, 오랫동안 통곡 같은 샤워를 했다. 눈물을 멈출 수 있을 때까지, 아픔을 멈출 수 있을 때까지 온몸 구석구석을 씻고 또 씻었다. 더 이상 씻어 내릴 더러움이라곤 찾을 수 없어져서, 그냥 멍하니 타일 바닥에 주저앉아 비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는 샤워 물줄기에 온몸을 내맡겼다. ……안 돼…… 안 돼…… 그럴 수 없어, 안 돼…… 그건 절대로 안 돼…… 안 돼…… 안 돼…….

무너지면 안 된다. 부서져서도 절대 안 된다. 그게 무언지는 좀처럼 기억해낼 수 없지만, 그것이 자신에겐 절대로 금지된 치명적인 것이라는 사실만은 알았다.

의식이 혼미했다. 아무래도 잠을 자둬야 할 것 같았다. 갑자기 스위치가 뚝 끊기듯 온몸의 에너지란 에너지가 다 빠져나간 것만 같았다. 심리적인 공황 상태라는 게 어렴풋이 자각되었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는 둥 마는 둥, 욕실을 빠져나왔다.

그가 보였다. 너무나 좋아하는 얼굴이 보였다. 내 것이었다. 내 소중한 것이었다. 눈을 뜨기조차 힘겨웠다. 비칠비칠 침대 가까이 다가가 시트를 걷어낸 다음 그의 곁에 몸을 눕혔다. 그의 전신을 바짝 끌어당겨 품에 안으니 너무나 기분 좋은 살 냄새가 폐부 가득 파고들었다. 더 깊이 끌어안기 위해 덮치듯 사지를 뻗어 마른 몸을 친친 동여맸다. 만져지는 감촉도, 따스함도, 너무 좋아서 몸서리가 쳐졌다.

미소를 지었던 것 같다.

…… 아직은 괜찮아…….

누군가 등을 두드리며 안심을 시켜주고 있었다.

…… 그래, 아직은 괜찮아…… 그냥 다 잊어버리고 푹 자는 거야…… 푹 자고 나면…… 깊이깊이 잠들고 나면…… 그래, 그럼 다 잊을 수 있어…… 몰랐던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어…… 그래, 그럴 수 있어…… 넌 그럴 거야…… 그래야 해…… 아무렴…… 그렇고말고…… 그래, 문위…… 그래…….

다정하고 상냥한 누군가였다. 혹은 음습하고 비열한 누군가이기도 했다. 그건 자기 자신일 수도, 혹은 자신의 소중한 사람일 수도 있었다. 어쩜 그 둘 다일 수도 있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밤인 모양이었다.

번쩍 눈을 뜨고 보니 사방이 새까만 어둠이었다. 익숙한 불길함이 스멀스멀 명치끝을 조여오고 있었다. 품 안도 공허했고, 만져지는 옆자리도 싸늘하게 식은 시트의 감촉뿐이었다.

더 이상 동요하지는 않기로 했다. 스스로가 느끼는 공포와 전율을 멀찍이 물러서서 차분히 관조할 수 있을 정도로, 심리적 공황 상태는 어느새 익숙해져버린 오래 입은 옷가지 같았다.

비칠비칠 일어나 방 안의 불을 켰다. 시계부터 살폈다. 바늘은 8시 1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두세 시간쯤은 잔 것 같았다.

쇼핑백의 새 옷을 꺼내 천천히 주워 입었다. 움직일 때마다 머리가 지끈지끈 쑤셔댔다. 잠들기 전보다도 두통은 더 심해져 있었다. 그럭저럭 초조감을 잘 다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데도, 바지 지퍼를 올리는 자신의 손가락은 여전히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괜찮을 것이다. 아마 큰방에 있겠지. 동료들의 술 파티에 끼어들었겠지. 저것 봐. 두런거리는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방문 틈을 비집고 흐릿하게 퍼져들고 있지 않은가.

방문을 열고, 복도를 가로질러 큰방으로 갔다. 노크를 할 필요조차 없었다. 복도까지 번지는 시끌벅적한 소음들로 미루어 보니 역시 술판이 벌어진 게 틀림없었다.

“어? 위야, 일어났네?! 좀 괜찮아졌니? 근데 어째 얼굴빛이 더 안 좋다? 눈은 또 왜 그렇게 부었어? 설마 운 건 아니지?”

“오! 위 군, 와서 저녁 먹어라. 진짜 눈 많이 부었네? 곤히 자는 것 같길래 안 깨웠는데. 우린 먼저 먹었다.”

“옷 갈아입었구만? 후후, 시원하니 보기 좋아 뵌다, 위 군. 인환이 시내 나갔다 왔다더니, 갈아입을 옷 사러 갔었나 보구나.”

“들어와! 뭐해?!”

“들어오라니까? 밥 차려줄까? 하긴 챙기고 자실 것도 없네. 저기 식탁에 덮어놨으니까, 찌개만 데워 먹으면 될 거다.”

“위야?”

더 이상의 판에 박힌 아는 체는 귓전에 전해지지 않았다. 심해 속에 가라앉은 것처럼, 웅웅거리는 둔중한 소음이 욱신거리는 두통과 겹쳐지고 있었다. 눈앞에 어둠침침한 막이 쳐진 것처럼 시야도 어두워졌다.

방 안에서 술판을 벌이고 있는 인원은 일행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절망적인 현실은 그의 부재였다. 더더욱 절망적인 현실은 한세혁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 이외, 두세 명이 더 빠진 것도 같았지만 그들이야 자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선생님은…… 선생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탁하게 가라앉아 있는 자신의 목소리는 어딘가 음산하게 느껴졌다. 차갑게 얼어붙은 표정 역시 한가지일 것이다. 과연, 밝고 호의적이었던 연장자들의 얼굴엔 의아한 빛이 떠올라왔다. 인사도 생깐 자신의 시건방진 태도에도 희미한 불쾌감을 느끼는 듯했지만 그보다는 걱정이 담긴 얼굴들이었다. ……알 게 무어람. 저들이 자신을 뭐라 생각하든 알 바 아니었다. 예의고 나발이고 더 이상은 없다. 앞으론 다신 보지 않을 것이다. 저들이 뭐라 해도 이번만큼은 찾는 즉시 데리고 올라가겠다…….

마치 저들이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기라도 한 양, 저들에 대한 증오심이 순간적으로 강렬하게 끓어올랐다.

“……어, 아마 석주 작업장에 갔을걸? 작품 보고 싶다고.”

“그러고 보니 얘네들 늦네? 땅거미에 스러지는 ‘빨간색’을 꼭 봐야겠다더니, 땅거미는 벌써 졌잖아. 하긴, 달빛에 떠오르는 포름도 꽤 멋지긴 할 거야?”

“멋지지. 석주 새끼 이번 건 진짜 대박이라니까.”

더 이상 같잖은 자화자찬을 들어줄 필요는 없었다. 바로 되돌아 나오자, 뭐라 뭐라 나불대는 헛소리들이 들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걸어서 20∼30분의 거리는 뛰면 10여 분으로 단축될 수 있는 거리였다.

달이 밝았다. 보름달에서 손톱 모양으로 조금 떼어먹힌 모양새의 짝퉁 보름달이었는데, 밝기는 보름달 이상으로 밝게 느껴졌다. 그건 주변이 인가는커녕 가로등 하나 없는 시꺼먼 시골길이어서일 것이다. 시커먼 가운데, 간혹 드문드문 점처럼 뿌옇게 퍼져 있는 빛은 민박집이나 농가의 그것일 것이다.

창백하고 교교한 달빛은, 시야 끝까지 음산하게 뚫린 오솔길이며 멀리 비닐하우스들의 희뿌연 아치들까지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있었다. 바닥에 밟히는 조약돌의 크기나 잡초들의 모양새까지 섬세하게 읽힐 정도였다. 푸르스름한 필터를 낀 것처럼 사위의 풍경이 몽롱하고 조용했다. 헐떡이는 자신의 숨소리와 바닥을 박차는 힘 있는 발자국 소리는, 그래서 무지막지한 폭격 소리처럼 더더욱 요란스레 들렸다.

오른쪽으로 틀어진 길 끝 모퉁이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시커먼 형상의 그것은 느긋한 품새로 이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두 사람의 인영이었다. 기쁨에 들떴던 것도 잠시, 이내 그는 아니라는 자각이 왔다. 그는 저렇게 걷지 않는다. 애처로운 불구로 묶인 다리가 저렇게 힘차고 단호한 걸음걸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자신이 뛰고 있는 덕분에 인영들은 삽시간에 얼굴 형태를 살필 수 있을 만큼의 거리로 좁혀졌다.

“……위 군?”

“진짜 위야네? 어딜 그렇게 뛰어가? 무슨 일 있니?”

“……혹 인환이 찾는 거냐?”

몽롱하고 혼란스러운 의식의 끝으로 권 사장과 나경자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설핏 스쳐간 얼굴도 그들의 얼굴인 것 같았다. 대꾸라도 하고 달려야 한다는 생각이 바람처럼 스쳐갔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다. 아니, 후회니 뭐니 생각이라는 것 차체가 불가능했다. 그저 몽롱했다. 찾아야 한다는 집념만이 몽롱해진 머릿속에 폭풍처럼 소용돌이쳤다. 자신을 부르는 두 사람의 외침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역시 무시했다.

희뿌연 비닐하우스들이 무덤처럼 죽 늘어서 있는 평원이 보였다. 창백하게 빛나는 반원형의 돔들은 마치 눈이 내린 것만 같았다.

작업장으로 꺾어드는 진입로가 보였다. 구불구불한 내장이 꼬인 듯한 모양새의 파이프 울타리도 보였다. 그 애초의 붉은색은 달빛의 도움을 받아 거의 검정색에 가까운 검붉은 핏덩이로 보였다. 몸서리가 쳐질 만큼 섬뜩하고 불길한 잡동사니가 아닐 수 없었다.

공터에 접어드니, 거의 형태를 갖춘 기괴한 원추형의 돔 모양을 하고 있는 간이 휴게실과 매표소가 눈에 들어왔다. 자신이 숙소로 돌아가고 나서 지붕을 이었는지, 기괴한 모양새의 가건물은 거의 완공 단계로 보였다. 가건물의 그로테스크함은 그러나, 바로 그 뒤편, 광활한 딸기밭 한가운데 펼쳐진 들쑥날쑥한 장방형 구조물들의 그것과는 비할 바가 못 됐다. 검붉은 피붕대로 친친 감긴 장방형의 사각 상자는 마치 묘지를 휘돌아 나가는 상여처럼 불길했다. 교교한 달빛이 붉은색 주검들을 뱀처럼 서늘하고 축축하게 핥고 있었다.

두런거리는 흐릿한 말소리는 장방형의 상여들이 방사형으로 뻗어 있는 딸기밭 한가운데로부터 들려왔다. 사방이 그 흔한 느티나무 한 그루 없는 그저 드넓은 밭이랑들뿐이라, 사람의 자취를 가려줄 엄폐물이래야 3미터 폭의 피붕대가 감싸고 있는 상여들 외엔 없었다. 말소리는 오른쪽 측면 대여섯 번째쯤에 우뚝 솟은 상여 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무턱대고 발걸음을 옮기는 자신이 있었다. 몽롱해진 머릿속은 짙은 안개라도 낀 듯 그 어떤 생각의 갈피도 건져지지 않았다.

온통 거무스름한 골을 이루는 딸기 밭이랑 천지였다. 들쑥날쑥한 상여들 천지였다. 흐느끼는 듯한, 내 소중한 것이 절망적으로 내지르는 외침 소리 천지였다. 불길한 구멍을 만들며 너절하게 찢긴 피붕대 조각들이 미풍에 깃발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자신의 발바닥에 짓눌려 무자비하게 으깨져 터지는 딸기들의 감촉이 선연했다. 내 것이 내는 소리임에 분명한 비통한 울음이 순간적으로 끊겼다. 신음 소리 같기도 하고 비음 소리 같기도 한 이상야릇한 소음이 그 뒤를 이었다. 형태는, 크게 한 발을 내딛어 모퉁이를 돌자마자 곧바로 시야 가득 뛰어 들어왔다.

아련한 비음 소리는 이내 다시 흐느낌 소리로 바뀌었다. 상반신을 틀며 몸부림치는 내 것의 입술이 다시금 한세혁의 입술로 틀어막히고 있었다. 몇 번 거세게 몸부림치며 저항을 거듭하던 내 것은 이윽고 모든 의지를 상실한 듯 물 먹은 솜처럼 사지를 축 늘어뜨렸다.

내 것과 한세혁의 키스는 아마 그리 길게 계속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럴 것이다. 몽롱한 머릿속은 시간관념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었지만, 그저 막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면 그는 내 것이기 때문에. 나만이 만질 수 있고, 나만이 키스할 수 있고, 나만이 안을 수 있는 그런 것이니까. 그런 내 것이 나 이외의 사내에게 오랫동안 입술을 허락할 리는 없다. 그러니 저것은 그저 오류일 뿐이다. 버그고, 모독이고, 훼손일 뿐이다.

차분했다. 이상할 정도로 차분해진 정신으로 조용히 기다렸다. 내 것이 기운을 회복하고 오류를 정정할 때까지 자신은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사내의 손이 내 것의 등과 엉덩이를 쓸고 있었다. 사타구니 틈으로 손을 집어넣어 치부를 주무르고 있었다. 괜찮았다. 아직은 더 두고 보겠다. 탐욕스럽게 입안을 휘젓던 입술은 온 얼굴을 헤매 다니며 내 것의 구석구석을 빨고 있었다. 사내의 타액으로 금세 범벅이 된 내 것의 얼굴로 달빛이 비쳐들어 창백하게 빛을 발했다. 입고 있는 흰색의 민소매 티가 마치 인광처럼 푸르스름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허리춤을 더듬던 사내의 손이 티셔츠를 비집고 들어가는 게 보였다. 가슴을 쓰다듬고 젖꼭지를 지분거리는 것도 보였다. 아무렴. 아직 괜찮다. 좀 더 기다려주겠다. 자신은 꽤나 관대한 남자가 아닌가. 몽롱했던 머릿속 안개가 천천히 걷혀들고 있었다. 느릿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휘돌아나가는 안개처럼, 시야 가득 들어앉은 사물들의 형상을 느릿하고 정교하게 살피고 있는 의식의 흐름이 느껴졌다. 감정은 여전히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정신은 유리알처럼 맑았다.

내 것의 상반신을 거세게 움켜쥐고 있던 사내의 움직임이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었다. 짐승처럼 내뿜어지고 있는 사내의 숨소리며 키스 소리가 낯이 다 뜨거울 지경이었다. 그래. 꽤나 발정한 모양이로구나, 더러운 변태 호모 새끼. 딸기 더미 한가운데에 내 것의 몸을 거칠게 쓰러트리고 있는 놈은 거의 광란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키스부터 해야 할지, 애무부터 해야 할지, 아니면 한계까지 부푼 저 더러운 욕망을 비벼대야 할지,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패닉에 빠진 듯 뻣뻣하게 몸을 굳히고 있는 내 것의 상황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검붉은 진흙과 잔뜩 으깨진 시퍼렇고도 붉은 딸기물이 내 것의 새하얀 민소매 티를 흠뻑 적시고 있었다. 더러워라. 사내의 타액으로 범벅이 되고 있는 얼굴과 목덜미도 사정은 마찬가지. 씨팔. 개새끼. 좀 더 기다려보기로 한다. 이제 곧 버그를 수정해줄 내 것의 움직임을.

“……윽……! 웁……! 흐웁……! 그…… 안……!”

“……인환아…… 인…… 움…….”

“……싫……! 그…… 안 돼……! 싫…… 훕……! 그……! 하지 마!!!”

“……인…… 가만……!”

“싫어! 싫어! 싫엇!!! 놔!! !그만해!!!”

“인환아……! 인환아……! 새꺄…….”

“그만해!!! 그만해!!! 그만!!! 키스만 한댔잖아!!! 키스만 한다고!! 아악!!! 싫어!!! 죽여버릴 거야!!! 죽여버릴 거야, 비열한 새끼!!! 손대면 죽일 거야!!! 으아아아아아!!!!!!”

됐다. 오류는 수정됐고, 버그도 치료됐다. 모독은 복수하면 되고, 훼손된 건 고치면 된다.

단숨에 꿈틀거리고 있는 몸뚱이들에게 내달렸다. 내 것의 허리춤을 속옷과 함께 허벅지 아래까지 끌어내리고 있던 사내의 더러운 손마디부터 뒤로 잡아 꺾었다.

“으아아아악!!!!!!”

숨넘어가는 비명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개의치 않고 힘을 더하자 삐꺽 하고 사내의 어깨뼈가 탈구되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패닉에 빠진 듯, 사내는 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뒤집혀진 사내의 멱살을 고쳐 쥐고 가차 없이 안면을 강타했다. 퍽. 퍽. 퍽. 샌드백처럼 몇 번 연타를 날리자 뜨뜻한 게 손가락에 감지가 됐다. 사내의 코와 입술은 어느새 피로 범벅이 된 것 같았다. 갑자기 사타구니 틈으로 지독한 아픔이 달려 나갔다. 사내의 허벅지가 있는 힘껏 걷어찬 때문이었다.

급소를 차인 충격과 아픔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눈앞이 캄캄해지며 왈칵 생리적인 눈물이 치솟을 정도였다. 휘어잡고 있던 사내의 멱살을 마지못해 놓아준 채, 치부를 감싸 쥐고 한참 동안 충격을 견뎠다. 기회를 놓칠세라 옆구리며 등짝으로 놈의 발길질이 사정없이 내리꽂혔다. 비열한 놈. 싸움 방식도 비열하기 짝이 없군. 몸을 웅크린 채 시간을 벌고 나니 겨우 충격이 가라앉았다. 막 내리꽂힌 사내의 오른 발목을 단숨에 낚아챈 후 반동으로 땅바닥에 메다꽂았다. 무성한 군집을 이루는 딸기와 진흙들이 충격을 흡수해서 별다른 고통을 못 느끼리란 것을 알았다. 몸을 일으키려 버둥대는 놈의 가슴에 힘껏 발길을 내질렀다. 다시금 귀를 찢을 듯한 비명이 사방으로 메아리쳤다. 연타로 몇 번 더 발길질을 계속했다. 저항할 수단들을 우선 해제시킬 것이다. 치부가 걷어차이는 아픔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다, 젠장.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처절한 비명 소리도 연달아서 귀청을 때려댔다. 충격과 고통으로 제정신을 잃고 꿈틀거리는 몸을 느긋하게 두 손으로 끌어올렸다. 여전히 검정색 셔츠를 입어주니 고맙다. 덕분에 이렇게 제대로 붙잡을 수가 있으니까. 흐릿하게 시선을 맞춰오는 피투성이 얼굴에 히죽 웃음을 보내주었다. 물론 제대로 먹힌 카운터와 함께. 흐끅거리는 신음을 토해내며 몇 발작 뒤로 나뒹구는 사내를 따라갔다. 상체를 굽혀 막 사내의 멱살을 움켜쥐려는데 허리춤을 잡는 필사적인 악력이 느껴졌다.

“그만해!!! 그만해, 위야, 그만해!!! 그만!!!!!!”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귀를 간질간질하게 한, 내 것의 처절한 비명 소리다. 하도 절박하고 비참하게 토해지는 오열에, 잠깐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지만 이내 외면했다. 복수는 아직 멀리 있었다. 자신의 허리를 빨판처럼 감고 있던 내 것의 팔을 거칠게 뿌리치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가만. 아뿔싸. 내 것에 의식을 집중하는 사이 사내도 조금 힘을 비축한 듯싶었다. 사내의 셔츠 자락을 움켜쥐려는 찰나 사내의 주먹이 턱밑을 후려쳤다. 눈앞에서 번쩍 불이 일었다. 아, 이런. 정말 싸울 맛 난다. 그렇지. 너무 쉬우면 복수하는 재미도 없는 법이니까.

얼마 동안 난타전이 계속됐다. 때린 만큼 얻어맞는 파상 공세에 자신 또한 꽤나 상처를 입었다. 입술이 깨지고 광대뼈가 짓이겨졌다. 명치와 옆구리를 걷어차여 어쩌면 금이 간 곳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사내가 입었을 피해에 비하면 자신의 그것은 모기에 물린 수준에 불과할 것이다. 오랜만에 고삐가 풀린 폭력의 광기가 전신을 사로잡고 있었다. 사내는 짐승 같은 광기에 사로잡힌 복수심의 상대는 결코 되지 못했다. 얼마 안 가 기진맥진 헐떡이는 사내의 몸은 저항할 의지를 잃은 채 밭고랑에 널브러졌다. 비로소 잘 차려진 밥상이었다. 마음이 명하는 대로 신이 나서 발길질을 해댔다. 너덜너덜, 더 이상 일어설 수 없을 때까지. 몸서리쳐지는 나머지 더 이상 내 것을 넘볼 엄두도 못 내게 될 때까지, 밟고 또 밟았다.

“그만해!!! 그만해, 위 군!!! 자네, 미쳤나?!!! 미쳤어?!!!”

낯선 외침 소리와 더불어 허리가 틀어 잡혔다. 막 사내의 옆구리를 걷어차기 위해 들어 올렸던 다리 또한 필사적인 두 팔에 친친 휘감겼다. 중심을 잃은 몸은 몇 번 앞뒤로 허우적거리다간 이내 뒤로 나자빠졌다. 뒤에서 허리를 껴안고 있던 권 사장과 한쪽 다리를 친친 휘감고 있던 내 것도 함께 나뒹굴게 된 것은 물론이었다. 일어서기 위해 상체를 버둥거려보았지만 권 사장의 완력은 만만치 않았다. 아예 두 다리를 한꺼번에 틀어쥔 채 하반신을 덮치고 있는 내 것의 기세 역시 필사적이어서, 가뜩이나 지친 몸은 더 이상의 저항이 불가능했다. 아니, 지쳤다기보단 아마도 그럭저럭 만족한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 적당히 복수심을 충족시켰기에, 이쯤에서 손을 털고픈 자비로운 생각도 설핏 들어선 것일 테지. 죽일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놈의 숨통을 끊어놓겠지만 그럴 수야 없는 노릇이겠지, 물론. 나는 관대한 남자가 아니던가.

“맙소사, 이게 웬 난리야?! 왜 이래, 위 군?!! 뭔지 모르지만 말로 해야지!! 세혁이 너도 어린애처럼 이게 무슨 짓이야?!!! 도대체 정신이 있는 거냐?!!!”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사내새끼들은 이래서 안 돼!!! 툭하면 주먹질에, 힘자랑에…… 이따위가 용기냐?!!! 기백이야?!!! 고상하고 관대한 가부장 마초?!!! 이게 그 잘난 니들의 페니스라구?!!! 씨팔, 새대가리만도 못한 마초 새끼들!!! 지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다 다들 나가 뒈져버려라!!! 아, 숨통 막혀!!! 증말 짜증 나!!! 잘 순화됐나 싶으면 결국은 제자리야!!! 예술이니 탐미니 그저 빙글빙글 미꾸라지 새끼처럼 돌다가도 멈추는 곳은 결국 거기뿐이지!!! 니들이 문제야, 새끼들아!!! 세계 평화가 오지 않는 건 다 니들의 그 잘난 팔루스파시즘 때문이야!!! 잘라버려야 해!!! 그놈의 잘난 물건들, 죄다 거세시켜버려야 돼!!! 그래야 세계가 조용해져!!!!!!”

몇 미터 앞 밭고랑에서, 나경자가 사내의 몸을 부축해 일으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무척 화가 난 듯, 이리저리 삑사리를 타는 새된 목소리엔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꿈틀거리며 신음을 흘리고 있는 사내도, 쪼그리고 앉아 있는 나경자도 시커멓고 붉은 내장 덩어리로만 보였다. 저승길 같은 진입로를 죽 잇고 있던 파이프 울타리처럼.

시선을 들어 올려다본 하늘 끝에 걸린 달이 밝았다. 창백하고 교교한, 광기를 품고 있는 달이었다. 주변에 달무리가 휘황한 걸 보니 내일은 비가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서쪽 끝에서 북쪽 끝으로 제법 빠르게 이동하고 있는 구름 떼를 보니 더욱 그런 예감이 짙어졌다.

흥분으로 한동안 부들부들 떨고 있던 몸이 차츰 진동을 멈추고 있었다. 증기기관차처럼 헉헉대던 소란스러운 호흡도 천천히 잦아들었다. 허리춤에서 감지되던 완력이 사라지는가 싶더니, 권 사장이 비척비척 자신의 상반신을 옆으로 밀었다. 더 이상 미친개처럼 날뛰진 않으리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권 사장이 몸을 일으키자, 필사적으로 두 다리를 옭아매고 있던 그도 팔을 풀곤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반쯤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뺨은 눈물콧물 범벅이었고,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새하얀 민소매 티는 시커멓게 더럽혀진 채였고, 풀린 허리띠며 벌어진 바지 지퍼 틈으로 캘빈클라인의 로고가 붙은 검정 팬티가 확연히 들여다보였다. 누가 봐도 겁탈 직전의 처녀였다. 젠장. 흥분하지 마라. 복수하지 않았나. 죽일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숨통을 끊어놓겠지만 그럴 수야 없는 노릇이겠지. 그랬다간 여러 가지로 불편해지겠지. 내 것도 패닉을 일으킬 거고, 무엇보다도 동생들이 걸린다. 살인죄로 감옥엘 가면 동생들은 누가 먹여 살리겠나 말이지. 아무렴, 그렇지. 됐어. 그만하면 된 거야. 나는 관대한 남자가 아니던가.

상반신을 일으켜 세우자 몸 여기저기가 삐걱거리며 통증을 호소했다. 고교 시절 교내 양아치 놈들과 한판 붙었던 때 이래 처음일 꽤 만만찮은 부상이었다. 별로 못 참을 정도도 아니라서 조금씩 내부의 통증을 관찰하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부러진 곳은 없는 것 같다. 내장에 구멍이 뚫린 곳도. 그렇다면 통증만 요란했지, 별 큰 부상도 아닌 셈이다.

간질간질 인중을 자극하던 핏무덤을 손으로 쓱 훔쳐냈다. 찢겨지고 이지러진 입술 끝에서 동일한 간지러움을 선사해주고 있던 것은 혀를 움직여 핥아 먹었다. 비릿하고 찝찔한 쇠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벌벌 떨며 파랗게 질린 얼굴로 자신을 굽어보던 내 것이 문득 몸서리를 치는 것이 보였다. 저 예쁘장한 눈시울에 떠오른 것은 확연한 두려움과 혐오감이었다.

찌릿하며 심장이 울었다. 돌처럼 무감각해졌던 마음이 조금씩 기지개를 켜며 깨어나고 있었다. 끊어졌던 생각의 흐름도 다시금 스위치가 켜지듯 번뇌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저건 마땅치 않다. 내 것의 겁에 질린 표정을 싫다고 판단하는 자신이 있다. 가슴 근처가 아린 것은 부지불식간에 입은 마음의 상처를 반영하는 것이겠지. 내 것이 날 두려워하는 것이 싫다. 혐오감을 느끼는 것도 아프다. 늘 그렇듯이, 끔찍스러울 정도의 극진한 애정으로만 자신을 바라봐주기를 원한다. 숭배와, 찬양과, 맹목적인 이해만 선사해주기를 탐욕스레 희구한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몸에 손을 뻗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어 어딘가 도망칠 곳도 없건만, 흠칫 소스라친 몸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는 것이 보인다. 찌릿하며 심장이 또 한 번 운다. 젠장.

반사적으로 사납게 얼굴을 구겼나 보다. 그야말로 소스라쳐서 허겁지겁 마주 손을 뻗어오는 내 것이다. 따스하고, 부드럽고, 섬세한 내 것의 손. 손가락. 파르륵 떠는 그것을 힘껏 움켜쥐곤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앙상하게 마른 몸이 별 저항도 없이 주르륵 딸려온다. 옆구리를 달리는 통증에 잠깐 신음을 흘리다가 이내 내 것을 감싸듯 끌어안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집에 가야지. 비로소 올라갈 수 있게 되었다.

당혹한 얼굴로 이쪽을 굽어보는 권 사장이 보였다. 좋은 사람 같다. 친구 하면 정말 좋을, 제법 넉넉하고 관대한 인품. 따스한 인간성. 하지만 그뿐이다. 알 게 무어람. 아무리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인품이라도 더 이상은 없다. 앞으론 다신 보지 않겠다. 변태 호모들이 득실거릴지도 모르는 곳의 수장 따위, 사절이다. 내 것을 데리고 올라갈 거다. 이번에야말로. 당신이든, 아니면 다른 누구든, 뭐라 뭐라 주절거리며 항의를 한대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거다. 가둬버려야지. 데리고 올라가서…… 내 안에만 꽁꽁 가둬둘 거야. 당신들이 다신 못 찾아내게. 만나지 못하게…….

“……그래서…… 윽……! 큿…… 새꺄…….”

웅얼웅얼 가래가 끓는 듯한 괴괴한 신음성이 발목을 잡았다.

“……결국 버릴 거잖아…….”

절뚝절뚝 심하게 키질을 하며 질질 끌려오다시피 걷던 내 것의 발걸음도 자신을 따라 멈췄다. 끌어안고 있는 허리며 손목을 통해 내 것의 경련 같은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남풍이 불고 있었다. 한결 빨라진 바람이었다. 빨라진 공기의 흐름 속에서 흐릿하게 비 냄새가 풍긴다고 느낀 것은 착각이었을까?

“……흐…… 윽…… 욱…… 씨팔…… 재수 없는 헤테로 마초 새끼들이란 죄다 그렇잖아…….”

너덜너덜 찢긴 피붕대에 감싸인 상여들이 시체를 한 구씩 품고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꼴리면 희희낙락 잠깐 갖고 놀고…… 그러다 좀 불리해지면 언제 그랬냐 싶게 적반하장 뒤통수를 치지…… 네가 꼬셨잖아, 이 호모 새꺄…… 같이 좋아라 붙어먹은 주제에 책임은 전부 호모한테만 떠넘겨…… 가증스러운 헤테로 마초 놈들…….”

깃발처럼 휘날리는 거대한 붉은 휘장들이 와, 와, 붉은 함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머릿속이 쪼개지는 것처럼 아파왔다. 저 새끼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저 더러운 변태 호모 놈이 지금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는가?

“……사랑하면 다냐, 새꺄? 버릴 거지? 네놈도 인환이 버릴 거지? 언제 붙어먹었더냐 싶게 시침 뚝 떼곤, 더러워진 걸레짝처럼 가차 없이 쓰레기통 속에 쑤셔 박아버릴 거잖아? 안 그래?”

미친놈. 사랑해? 누가? 내가 말이냐? 내가 사랑을 한다구? 누굴? 도대체 누굴? 인환이? 인환이가 누구야? 도대체 누구야? 하. 살다 살다 별 해괴한 소릴 다 듣겠네. 내가? 내가 누굴 사랑해? 아가리 닥쳐, 이 씨팔 변태 놈아. 어디서 함부로 주둥이를 놀려. 내가 네놈 같은 변태인 줄 알아, 새꺄?

“썅!!! 버릴 거면서 왜 찝쩍대?!!! 왜 신나게 굴리고 다녀?!!! 호모가 그렇게 만만하냐?!!! 그래?!!!”

아가리 닥치랬지? 나 꽤 관대한 남자거든? 근데 전혀 관대해지지 않으려고 그러네?

“내가 먼저 좋아했어, 새꺄!!! 너보다 더 훨씬 오래전에!!! 니 새끼가 엄마 젖 빨 때부터 좋아했다, 새꺄!!! 어디서 함부로 까불어, 이 좆만 한 새꺄!!!!!!”

닥치랬다, 좋은 말로 할 때. 그만해. 그만 개겨, 이 변태 환쟁이 놈아. 아, 젠장. 머리가 왜 이렇게 아픈 거지? 저 깃발은 또 뭐야. 정말 구역질이 나는군. 저 따위가 무슨 작품이란 말이냐?

“어디서 굴러먹다 껴들어선…… 좆같이 재수 없는 헤테로 마초 새끼 주제에…… 너 따위한테 굴려지라고 아껴온 줄 알아, 새꺄?!!! 참은 줄 알아, 새꺄?!!! 이 씨팔 놈의 개새꺄!!!!!!”

……안 돼…….

“왜 울려?!!!!!! 왜 괴롭혀, 이 썅놈아?!!!!!! 호모가 그렇게 만만해?!!!!!! 호모가 네놈들 노리개야?!!!!!!!!”

……안 돼…… 안 돼…… 그럴 수 없어, 안 돼…… 그건 절대로 안 돼…… 안 돼…… 안 돼…….

“지랄!!! 호모가 어떻다는 거야?!!!!!! 호모는 사랑하면 안 되냐?!!!!!! 사랑받을 자격, 그렇게 없는 거냐?!!!!!! 굴려먹고, 울궈먹고, 붙어먹고, 그러다 질리면 내버리고!!! 호모는 늘였다 줄였다 니들 맘대로 해도 되는 고무줄 똥구녕이라는 거냐?!!!!!! 저주받을 변종이니까, 니들 헤테로 마초들은 휴지처럼 마음대로 쓰다 버릴 권리라도 있다는 거야?!!!!!! 그런 거냐?!!!!!!”

현기증이 일었다. 붉은 깃발들이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얽혀들기 시작했다. 적동색의 선명한 피가 철썩철썩 온몸을 때려대고 있었다. ……안 돼…… 하느님, 안 돼…… 그건 절대로 안 돼…… 그럴 리 없어……. 부서지고 있었다. 부서지는 소리가 사방에서 낙뢰처럼 대기를 때리고 있었다. 달무리 사이로 구름이 재빨리 지나갔다. 시커먼 산기슭이, 멀리 잣나무 숲이, 희뿌연 비닐하우스들이, 만화경처럼 뒤엉켜 빙글빙글 돌았다. 두통이 극심한 나머지 위가 뒤집히는 것처럼 구역질이 났다. ……막아야 돼…… 막아야 돼…… 안 돼…… 하느님, 절대로 안 돼…….

“씨팔, 그럼 그 호모랑 붙어먹는 너 같은 헤테로 새끼들은 뭔데?!!!!!! 응?!!! 뭐냐구?!!!!!! 더럽다면서 왜 붙어먹어?!!!!!!! 붙어먹을 땐 더럽지 않은가 보지?!!!!!! 아니, 아니, 아니지!!! 사랑한댔지, 참!!! 붙어먹을 때만 사랑한댔지!!!!!! 이런, 개, 씹탱 같은 경우가 있나?!!!!!! 버릴 때 버리더라도 일단 붙어먹는 한에는 내 소중한 자기야란 말이냐?!!!!!! 씨팔, 엿이나 처먹어라, 이 썅놈의 새꺄!!!!!!!!”

아아, 닥쳐. 닥쳐, 새꺄. 닥치지 못해? 보자보자 하니까……. 도망쳐야 했다. 더 이상 저 개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으로, 불안하지 않은 곳으로, 싫은 생각이 들지 않는 곳으로, 반드시 가야만 했다. 멀리멀리 가야만 했다.

“……위야…….”

아득한 부름이 멀리서 가물가물 들려왔다. 내 것의 소리였다. 자신을 걱정하는, 극진한 애정과 숭배와 그리움과 이해가 담긴 사랑스러운 목소리였다.

“……위야…….”

자신을 겁내는, 부정당하고 경멸받고 내쳐질까 전전긍긍하는 애처로운 목소리였다.

“……위야, 미안…….”

필사적으로 귀를 기울였다. 저 소리만이 현실이었다. 저 소리만이 구원이었다. 빛이었다. 필사적으로 귀를 기울이고 또 기울였다.

“……미안…… 진짜 미안…… 미안…… 이러려던 거 아닌데…… 아닌데…….”

새까맸다. 소리는 들리는데 볼 수가 없었다. 내 것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손을 잡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가냘프고 따스한 허리를 안고 있다고 여겼는데, 주변은 그저 텅 빈 시커먼 암흑뿐이었다. 어렴풋이 또 공황 상태에 직면한 것을 깨달았다. 한 발자국도 앞으로 뻗을 수 없는 극심한 두려움과 공포가 전신을 채찍처럼 후려치고 있었다.

“……우리 관계 알려질까 봐…… 너 곤란하게 할까 봐,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그런 건데…… 키스 한 번만 해주면 소문 안 내겠다고 막…… 막 그래서……. 세혁 선배 장난이니깐…… 놀리고 있는 거니깐…… 그냥 가볍게 즐기는 사람이라서…… 진짜야, 위야…… 키스 한 번만 해주면 그냥 묻힐 거라서…….”

내 것의 아름다운 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소리만 들리고 만져지지 않는 안타까움에 미칠 것만 같았다. 나갈 수 없었다. 한계였다. 앞으로도, 뒤로도, 혹은 옆으로도 시커먼 벽이 가로놓여 있었다. 피할 수 없는 벽이었다. 무너뜨려야만 했다. 부서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알았다. 그래야만 앞으로 나갈 수 있었다. ……안 돼…… 안 돼…… 그럴 수 없어, 안 돼…… 그건 절대로 안 돼…… 안 돼…… 안 돼…….

빈사에 허덕이는 자기보호 본능이 여전히 헐떡이며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다. 무너지면 안 된다고, 부서져서도 절대 안 된다고, 네 자신을 생각하라고, 비겁하게 속살거리고 있었다. 장래를 생각하고, 동생들을 생각하고, 윤열이 형과 성준이를 생각하라고. 강이 형을, 엄마를, 아버지를 기억하라고, 다정하게, 교활하게, 때론 엄격하게 자신을 꼬드기고 있었다. 그게 무언지는 좀처럼 기억해낼 수 없지만, 그것이 자신에겐 단연코 금지된 치명적인 것이라는 사실만은 알았다. 부서지는 순간, 예전의 자신은 죽고 없으리라. 안전한 요람에서 보호를 받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으리라. 낙원 추방. 봐라. 봐라, 문위. 저기 저 붉은 상여들의 행렬을 봐라. 저것이 바로 네 관이다. 네 상여다. 죽어 없어질 네 모습이다. 그래도 좋은가? 그래도 부서지겠는가? 무너지고 말 텐가……? 하지만 부서져야 했다. 무너져야 했다. 지금 하지 않으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은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이 옴짝달싹할 수 없는 검붉은 피무덤에 갇혀, 마침내 발광하고 말 것이다. 발광해버린다. 그럴 것이다…….

“……무슨 헛소리야…… 좋아했다구? 나를? 비열하게 협박이나 하고, 나쁜 자식이…… 누가 사랑한다는 거야…… 정말 이젠 선배도 아니야, 그 인간…….”

한쪽 벽면을 막고 있던 시커먼 장막이 와지끈 깨지고 있었다. 눈을 찌르는 눈부신 빛이 화살처럼 날아들고 있었다.

“……진짜 미안해, 위야…… 이따 기하 선배랑 경자 불러서…… 둘 다 이해심 많은 사람들이니깐…… 사정 얘기하면 이해해줄 거야…… 비밀 지키라고 할게…… 꼭 그럴게, 위야…… 그렇게 할게…… 안심해…… 소문 안 날 거야…….”

…… 사…… 랑…… 을 하나……? 

양옆을 가로막고 있던 벽도 단숨에 가루로 부서졌다. 곧이어 뒤에서도 산산이 부서져 회오리를 일으키더니, 빠르게 북쪽으로 날아가는 남서풍에 떠밀려 아득히 멀어졌다. 빛은, 이제 산지사방에서 인정사정없이 내리쪼이고 있었다. 빠르고 날카롭게 전신을 찌르고 파고든 수천 수만 개의 빛살은 마침내 자신을 죽이고 있었다. 자신의 전 존재를 찌르고 쑤시고, 갈아붙여 더 이상 형체를 찾을 수 없는 것으로 변모시켜갔다. 멀리, 피붕대를 깃발처럼 매단 상여 한 대가 천천히 자신의 앞으로 돌진해 들어오고 있었다.

“……어떡해…… 예쁜 얼굴이 엉망이 됐어…… 어디 부러지기라도 한 거면 정말 어떡해…… 씨이…… 미안해, 위야…… 미안…… 그 인간 진짜 가만 안 둘 거야…… 그럴 거야…… 맞아도 싸…… 하나도 안 불쌍해, 그 인간…… 절교야, 이제…….”

……사랑…… 하고 있나……?

절망이 시커멓게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사랑하고 있나, 이 사람을……?

죽음은 가차 없었다.

……사랑해……?

절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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