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2003년 4월. 김강원(金鋼圓)
“아, 결과는 말 안 해도 알겠어. 간신히 설득을 하긴 했지만 분통이 터져 못살겠다는 거지? 응, 김 선생? 가뜩이나 담배도 못 피우고, 지금 죽을 맛이지?”
막 지하 창고에서 분류 작업을 끝내고 올라온 모양으로, 만족한 듯 실실 웃음을 흘리고 있는 르네 마르티네즈의 얼굴은 땀범벅이었다. 옅은 하늘색의 우아한 투피스며, 50을 바라보는 나이가 무색할 지경으로 젊고 아름다운 얼굴이며, 그에 어울리는 밝은 갈색의 머리카락은 중노동의 흔적을 보여주며 제법 흐트러져 있었다.
에너지에 있어서만큼은 웬만한 남자들은 발치에도 못 미칠 정도로 자신이 있는 강원이었지만, 이 현대미술의 열정적인 전도사이자, 독립 큐레이터들의 살아 있는 전설인 여장부의 에너지엔 자신으로서도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가 없다. 갤러리 현대가 한시적이나마 그녀를 디렉터로 지명한 것은,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외압이 판을 치는 한국 미술계의 선택치곤 참으로 귀하고 현명한 판단이 아닐 수 없었다.
“한국에서 1년만 살아보세요, 르네. 어떤 놈이 발등에 불똥을 내던져도 실실 웃을 수 있게 됩니다. 그게 미술관의 후원회 놈들이라고 하면 더더욱 말이죠.”
갤러리 현대의 지상 4층에 마련된 자신의 부실로 가기 전, 강원은 외근 보고도 전할 겸, 칙칙한 기분도 가라앉힐 겸 해서 잠깐 디렉터실에 들렀었다. 역시 짐작대로,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여자는 생글생글 미소를 흘리며 강원의 약부터 올리고 있다.
“오오, 자신만만하군. 정말 열 안 받았어? 조카 작품 끼워달라는 청탁은 어떻게 거절했어?”
“흠, 그건 직업적인 기밀 사항입니다. 당신은 제 몇 안 되는 라이벌이니까, 골치 아픈 어르신네를 다루는 노하우 따위 그냥은 흘릴 수 없어요.”
솔직히 편한 사정은 절대 아니다. 그녀가 감지한 대로, 강원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내를 삭히느라 필사적이었다. 쌍무식 졸부 비위 하나도 못 맞추고 개차반 성질을 드러내는 통에, 이렇게 자신으로 하여금 뒤처리를 하게 만든 분도 자식을 흠씬 두들겨 패주고 싶을 정도다.
뭐, 그래도 원하는 건 손에 넣었으니, 열받은 심사쯤이야 좋아하는 컬렉션이 모여 있는 갤러리 하나를 찜해 서너 시간 죽 때리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이기도 하다. 바로 한 시간 전, 저 ‘골치 아픈 어르신’이 사인한 따끈따끈한 기부 명세서는, 강원이 매고 있는 두툼한 크로스백 안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 이로써, 올가을에 있을 대규모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데 따른 한고비는 간신히 넘긴 셈이다.
“……골치 아픈 어르신네야 어디에나 있지. 한국은 조금 양상이 다르긴 해도 말야. 그래도 실은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지 않아? 여건 좋은 자리도 마다하고 귀국한 걸 보면 꽤 가능성을 점친 거겠지?”
“흐응…… 요즘 유행은 글로벌리즘이 아닙니까? 아시아권도 대등하게 주목을 받고 있으니까 경험을 넓힐 겸 해보고 싶었을 뿐이지요. 유럽이나 미국과 비교해서 더도 덜도 없습니다. 솔직히 애국심이란 쥐똥만큼도 없단 말입니다.”
“으하하, 하여간 냉소적인 건 알아줘야 해, 김 선생.”
“그야…… 몇몇 관심을 끄는 작가들이 아주 없다고는…….”
“그럼 그렇지. 잘난 체하기는, 풋내기같이…….”
으하하 하는 활기찬 웃음보를 마무리로 또 한 번 크게 터트리며, 르네는 강원의 등을 팡팡 때렸다. 하이힐을 신고도 겨우 160센티를 넘기는 작은 체구라, 한국인치곤 드문 장신에 속하는 강원의 옆에 서니 마치 어린아이처럼 연약한 분위기마저 풍긴다. 물론 그녀가 들으면 또 가소롭다는 듯 으하하 하는 폭소를 터트리겠지만.
“그렇담 툴툴거리지 말고 빠릿하게 움직이라구! 할 일이 태산이야. 당장 마인 아트 스페이스에서도 협조 요청이 들어온데다……. 아, 그렇다! 자네, 오늘 중으로 또 다녀와야 할 데가 있어!”
“……?”
콧마루 중간까지 한참 흘러내린 안경을 부지런히 치키던 르네는 생각에 잠긴 표정이 되었다.
“저 ‘마인 아트’의 소유주를 알아, 김 선생?”
“글쎄요……. 어젯밤 먼발치로 본 적이 있습니다. 마인 아트의 시상식장에서요. 문위라는 사람으로, 요즘 꽤 주가가 오르는 중인 미국의 젊은 사업가라는 건 압니다. 미국 여자와 결혼해서 도미해 국적을 바꾸고 그곳에서 성공을 거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혼한 후부터 한국에서도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다더군요. 마인 아트 스페이스를 인수한다든가, 몇몇 영향력 있는 갤러리들에 꽤 많은 액수의 투자를 한다든가 하는, 문화 사업에도 손을 뻗고 있고요.”
“호오, 제법 소상하게 꿰고 있군.”
“요즘 같은 불황엔 드문 케이스니까요. 호기심이 생겨서 꼼꼼히 자료를 읽어둔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왜……?”
“음, 아까 전화를 받았어. 오늘 중으로 자네를 꼭 만나고 싶다더군. 아주 정중하고 간곡한 부탁이어서 듣고 있는 쪽이 되레 황송할 지경이었지. 매력 있던걸? 물주다운 거만함도 없고, 프랑스어 악센트도 꽤 훌륭했고 말이지……. 자네를 지명하지 않았으면 오히려 이쪽에서 달려가주고 싶을 정도였어, 으하하! 10년만 젊었더라도…….”
“르네…….”
“으하하, 농, 농……! 아무튼 잠깐이라도 틈을 내서 가주라. 자네 시간에 언제라도 맞추겠다고까지 하는 걸 보면 그리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을 거야. 일단 마인 아트 쪽에도 관여하고 있는 우리니까 안면을 터두면 요모조모 쓸모도 있을 테고 말야.”
오늘의 최종 스케줄은 장인환의 아틀리에를 방문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고 있었기에, 르네의 말은 그리 달갑게 들리지 않았다. 처리해야 할 서류도 산더미고, 작가들과의 인터뷰도 꽤 밀려 있다. 그래도 역시 현실적인 우선순위를 따진다면 물주 쪽이 더 급할 것이다.
“저녁에 시간을 내보겠습니다. 애들더러 약속 잡으라고 하지요.”
대충 급한 서류부터 처리하고 인터뷰를 내일로 미루면 그럭저럭 장인환과 물주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겠지.
“으하하, 그래, 그래……!”
선선히 오케이를 하자 르네의 ‘으하하’는 유난히 더 떠들썩해졌다. 어쩐지 수상쩍은 사심마저 느껴져서, 강원은 자신의 비장의 무기인 ‘살인미소’를 그녀에게 한 방 날려준 뒤(솔직히 먹고 싶은 상대가 아니라면 잘 쓰지 않는 낯간지러운 무기다), 얼이 빠진 표정으로 신기한 듯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여장부에게 심술스러운 아듀를 고했다.
“울지 마. 그 덩치로 울면 보는 쪽이 괴롭다네, 분도 군.”
니코틴 부족 증세가 피크를 향해가고 있어 사소한 일에도 자주 짜증이 나곤 하는 요즘이었다. 참을성도 떨어지고 집중력 또한 현저히 저하되는 것만 같아(완전히 금연에 성공한 다음에야 어떨지 몰라도) 강원은 근래 들어 인내를 요할 만남들은 되도록 피하고 있었다. 그런 강원의 처량 맞은 사정을 옆에서 뻔히 지켜봤을 놈이, 일까지 치는 것도 모자라 지금 자신의 위로를 구하며 펑펑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180이 넘는 덩치에 그 이상 사내다울 수도 없을 얼굴을 하고서 말이다.
간신히 잠재운 울화통이 다시금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이 느껴졌지만, 분도 놈도 저 재수 만땅의 졸부와 마찬가지로 가능한 한 참아내지 않으면 안 될 자신의 업보일 것이다.
“……죄…… 송…… 흑…… 끅…… 죄…… 죄송…… 합니다……. 죄…… 송 합니다, 선생님……. ……윽…… 욱…… 흑…….”
햇빛 한 점 들지 않는(작품의 손상을 막기 위해 조명과 통풍 시설에는 아낌없는 투자를 하고 있었다) 지하 저장 창고 안으로 꺼이꺼이 울려 퍼지는 사내의 울음소리란 기괴하기 짝이 없다. 가뜩이나 무명 작가들의 시퍼런 한이 서린 장소가 아닌가 말이다(지하 창고야말로 제대로 빛을 보지도 못하고 창고의 목록으로만 기록된 채 서서히 잊혀가는 작품들의 무덤과 다름없다. 하긴, 무덤이라니 말이지만, 여자의 울음소리라면 그 섬뜩함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할 것 같긴 하다). 명색이 저도 미(美)를 먹고 사는 큐레이터라면, 외경까지는 아니더라도 예의는 갖추어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어디 장소가 없어서 침통한 미(美)의 발할라에까지 들이닥쳐 지지리 궁상을 떨고 있나 말이다, 궁상을.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건지, 상식이 통하지 않는 건지,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놈이 아닐 수 없다.
“……잘 해결됐으니까 다음에나 잘하면 돼. 좋은 경험이 됐겠지. 우린 작가가 아니야. 지랄 부린다고 누가 멋지다며 떠받들어줄 줄 알면 큰코다친단 말이지.”
불도 붙이지 않은 담배 한 개피를 꺼내 애인 몸뚱이 만지듯 섬세하게 쓰다듬어본다. 아아, 딱 한 대만 피워 물면 소원이 없겠구만, 젠장……. 환장할 것 같은 금단 증상을 지그시 누르며 강원은 마지못해 놈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장인환의 아틀리에에서 물주의 사무실까지 두 탕을 뛰려면 슬슬 움직여야 할 시간이라, 부드러운 스킨십으로 놈의 궁상에 쐐기를 박고 싶었다. 물론, 성급했던 강원의 의도는 눈을 번쩍번쩍 빛내며 고개를 쳐든 놈에 의해 단숨에 박살이 났다.
“서…… 선생님……!”
맙소사! 신파의 절규와 함께 첫사랑에 빠진 열혈 소년 모드로 강원의 상반신을 답삭 끌어안는 요게 무어냐!
“……죄송합니다…… 너무 죄송합니다……. ……선생님께 실망을 드려서…… 저는……. ……욱……! 흑…… 그게 너무 괴로워서……. 흐으으…… 윽…… 우웃…… 창피합니다…… 너무 창피해서 죽고만 싶습니다, 선생님…….”
젠장, 기회 잡았다, 분도 놈!
강원 못지않게 단단한 근육질의 팔을 등에서 교차시켜 억세게 포옹을 해오는 놈의 하반신은 이미 뻔뻔스러울 정도로 크게 부풀어 있었다. 의도하지 않은 순수라는 게 더 열이 받는다, 제기랄.
“……또 섰어……. 설마, 정말 미안해하고는 있는 건가, 분도 군?”
“……흑……! 죄…… 죄송한 건 죄송한 거고 사랑은 사랑입니다, 선생님……. 흑…… 으…… 우…… 흑…….”
허……!
“……나는 탑이야. ……자네도 그렇지?”
“……취…… 취향은 습관 들이기 나름으로 알고 있습니다…… 흑…….”
“취향 바꿀 마음 없어. 나는 여자를 좀 더 좋아하니까.”
“……선생님께서 원하신다면 여자가 돼드릴 용의도 있습니다…….”
“이봐, 이봐, 185센티의 키에 80킬로 나가는 등발의 여자란 호러가 따로 없다구. 섹스 하고 싶지 않으리라고 절대 장담할 수 있네.”
“재능 있는 큐레이터란 전복적인 사고를 통해 세상에 충격을 주고 바람직한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위대한 전통을 존중해주는 것도 큐레이터의 의무야.”
“선생님!!!”
“분도 군!”
심각한 어조로 내쏘았지만 실실 터지려는 웃음을 참기가 힘들다. 어두컴컴한 창고 구석에서, 멀대같이 큰 덩치 둘이 포옥 껴안은 채 이 무슨 웃기는 짜장이란 말이냐.
놈과 말장난을 하는 사이, 그토록 자신을 초조하게 만들던 금단 증상조차 저만치 물러간 느낌이다. 놈의 지지리 궁상 또한 언제 그랬냐 싶게 태연하다.
아이고, 젠장. 고의성이 없다는 게 그만 또 용서가 안 돼. 열받는다, 제길. 나이를 스물댓 살이나 처먹고도 어떡하면 그리 순진할 수가 있는 게냐, 노분도(盧奮道)!!!
“……좋아합니다…….”
“…….”
“……좋아해요…… 진심입니다, 선생님……. 진심이에요……. 이런 기분…… 정말 모르겠어요…… 정말로 어떡하면 좋은지 잘…… 남자를 상대로…… 정말 저는…….”
“…….”
“……책임질게요…… 평생 책임질 수 있습니다…… 맹세해도 좋아요…….”
“나 애 안 가졌네. 생리도 안 해.”
“선생님!!!”
안타까운 듯 울먹이는 절절한 신파에도 불구하고, 짜부라트릴 것처럼 조여대는 놈의 포옹은 여전하다. 강원의 목줄기에 얼굴을 파묻은 채 오밀조밀 입술을 눌러대는 엉큼한 작태도.
키 차이가 별로 없어, 잔뜩 부푼 놈의 것은 강원의 사타구니 사이를 지그시 눌러대며 말보다도 절절한 진심의 소원을 전해주고 있었다. 놈도 사내인지라, 어떻게 하면 사내의 기분이 달뜨는지 뻔히 알고 하는 수작이다. 솔직히 놈보다 심한 등발을 안은 경험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고 로맨틱한 환경이 가져다주는 분위기도 있어서, 강원 역시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있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분명, 이 순수하고도 꾸밈없는 영혼은 자신을 열광적으로 숭배하고 있었다. 존경이 지나쳐 사랑이 된 케이스.
몸이야 취향이 아닐지언정, 그 거칠고 투박한 거죽을 한 꺼풀 벗기고 보면 그럭저럭 강원의 탐미적 성향을 만족시켜주고도 남을 아름다운 내면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라도, 강원은 이 사랑스러운 후배의 소원을 더더욱 들어줄 수가 없었다. 끝이 뻔히 보이는 순간적인 욕정에 휩쓸려 재능 있는 후배를 망칠 정도로 강원은 어리석지 않았다. 물론 어리지도 않았다. 한 걸음만 떼고 밖으로 눈을 돌리면 차고 넘치는 게 놀이 상대였다. 적어도 이놈은 강원에게 있어선 그 몇 십 배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으…… 역시 도저히 못 참겠어……!”
“……?”
슬며시 허리를 비틀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자 순식간에 몸을 굳힌 놈이 포옹을 풀며 시선을 맞춰왔다.
“……자네 불 있나? 지금 나가서 까다로운 작가를 하나 섭외해야 하는데, 이래서야 될 일도 안 되겠어…….”
소중하게 틀어쥐고 있던 담배를 놈의 눈앞에 들이대자 금세 사색이 된다. 알코올 중독자처럼 손마디를 바르르 떠는 오버액션도 슬쩍 취해보았다.
“안 돼요, 선생님! 그간 얼마나 힘들게 버텨오셨는데요!!!”
아니나 다를까, 외마디 비명과 함께 강원의 손에서 단숨에 담배를 빼앗아간다.
“돌려줘∼∼∼!”
애절하게 부르짖으며 놈에게 손을 뻗으니, 입고 있던 블루 그레이의 슈트 재킷을 슈퍼맨 망토처럼 펄럭이며 놈이 재빠르게 출입문 쪽으로 달아난다.
“안 된다니까요! 저…… 저기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니코틴 패치 하나 갖다드릴게요!!”
큭큭큭큭큭…….
잔뜩 발기한 탓에 어기적어기적 불안정한 걸음으로 달아나는 폼이 거대한 오리가 따로 없다.
“기…… 기다리세요! 잽싸게 가져올게요……!”
창고 문이 닫히고, 초조한 여운을 남기는 상냥한 다짐까지 완전히 멀어진 다음, 강원은 마침내 배를 쥐고 웃어댔다.
오후 4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아뇨…….
―아뇨…… 제 생각에 크기는 파워예요……. 기껏해야 50호밖에 소화 못 하는 화가와 200호, 300호짜리를 매번 멀쩡하게 뽑아내는 화가란 격이 다르죠…… 하늘을 다 가릴 만큼 커다란 오브제를 다루는 쪽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문득, 어딘가 신경줄을 자극하는 어눌한 말투가, 웃음의 발작으로 느슨해진 기억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음, 동의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언젠가 큰 걸 터트리게 되면 그때야말로 제 쪽에서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흥, 절대로 흔적도 안 남기고 사라져버릴 양반이……!”
혼잣말을 하듯 되뇌는 강원의 표정에선 이미 유쾌한 여흥의 기분이란 말끔히 사라지고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이맛살이 찌푸려지며 까닭 모를 짜증이 치솟는다. 이 짜증은 어딘가 잡히지 않는 안타까움이다. 설명하기 힘든 불안감이다.
드물게 욕심이 나는, 간절히 손에 넣고 싶은 극상의 무언가가 저 앞 어딘가에서 위태롭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낚아채지 않으면, 손안에 쥐었다고 생각한 그것은 신기루처럼 자신을 기만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제기랄, 더 이상 노닥거릴 틈은 없다!
문득 초조해진 나머지, 강원은 후배가 막 빠져나간 출입문 쪽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뿌연 살구색 조명이 은은하게 감돌던 지하 발할라는, 강원이 전원 스위치를 내리자마자 다시금 무덤 같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부천으로 가는 내내, 몇 분 간격으로 계속 장인환의 집에 전화를 했지만 여전히 받지 않았다.
출발 전에 확인한 바로는, 마인 아트의 서 실장 역시 통화가 잘 안 된다며 곤혹스러운 기색이었다. 직장인 카센터로도 연락을 취해봤지만, 그곳에도 아직 출근을 하지 않아 주인이 분통을 터트리고 있노라고 했다. 휴대전화도 없는 친구라 집 전화가 불가능하다면 다른 날로 약속을 잡는 것이 어떠냐고 조심스럽게 운을 떼는 서 실장의 말을 일축하고, 강원은 곧 부천으로 차를 몰았다. 세속적인 예의범절에 얽매일 남자가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전화로 방문 허락이 떨어지길 기다렸다간 평생이 걸려도 남자의 코빼기조차 볼 수 없으리라는 사실도.
시상식장에서 기절을 하는 종류란 아무리 생각해도 몹시 위태롭다. 특별한 질병이 아니라고 해도 그만큼 자기관리가 허술하다는 뜻이니, 자기관리가 허술한 작가란 앞날이 뻔하다. 특히, 강원이 짐작하는 바 그대로의 성향을 가지고 있는 정신이라면 말해 무엇 하랴.
절망이 그림을 그릴 창의력까지 몽땅 다 갉아먹게 되는 순간, 그와 더불어 생명력까지 끌고 가버리는 경우를 강원은 꽤 자주 보아왔었다. 힘이든 독창성이든 그중 어느 한 가지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작가라면, 그야 애석한 일이긴 해도 강원이 일일이 구제해줄 의무는 없다. 자신은 자선 사업가가 아니니까.
그러나 장인환의 경우는 다르다. 적어도 아주 간만에 강원의 심장을 두근거리게끔 만든 확실한 소스임엔 틀림이 없었다. 물론 나머지 작품들도 확인을 해봐야 좀 더 명확해지겠지만, 강원은 자신의 동물적인 감을 정확히 자각하고 있었다.
저건 진짜다. 너무나 확실해서 차라리 눈을 흐리는 신기루일까도 의심이 될 만큼의 진짜배기.
수많은 전시회며 비엔날레를 구석구석 뒤지고 돌아다녀봤지만 꽤 오랫동안, 정말로 흥미로운 어떤 이벤트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아니, 실은 너무나 흥미로운 것에 치중한 나머지 흥미가 사라지자마자 곧 지루하고 맥 빠진 흥분제의 주입과 고만고만한 작가들의 마스터베이션이 답습되고 있을 뿐이었다.
강원은 새롭고도 진지한 커뮤니케이션을 야기할 어떤 계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스페인과 남미, 그리고 한국을 포함하는 동양권에서 몇몇 가능성의 조짐을 포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조짐을 확고히 해주는 이정표처럼 다가온 것이 장인환의 작업 방식이었다.
마인 아트 스페이스의 협조 요청으로 작품 선별에 관여하게 되면서, 가득 모인 설익은 작품들 사이를 별 기대도 없이 누비던 강원은, 단순한 모노크롬 기법으로 표현된 100호 크기 캔버스 앞에서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마냥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슴이 뛰었다. 숨이 콱 막히는 것 같고 순식간에 솟아난 식은땀에 축축해진 손가락은 수전증 환자처럼 부들부들 떨렸다. 쩍 갈라진 정수리 틈으로 불길이 확확 치솟았다. 이거다! 이거야……! 하고 멍하니 되뇌며, 강원은 몽롱하게 혼미해진 넋을 추스를 생각도 못 한 채 하염없이 화폭을 굽어보았다.
막연히 추측하고 예감했던 새롭고도 거대한 흐름이, 구체적인 하나의 결과물로 응축된 증거를 발견하는 일은 큐레이터에겐 최고의 행운과 다름없을 것이다. 건축과 설치는 물론, 최근 좀 더 각광을 받고 있는 사진이나 영상물도 아닌, 지극히 전통적인 회화 예술의 양식에서 새로운 언어를 발견하다니 그 사실마저도 기분 좋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관여하고 싶다…… 고 생각했다. 이 영혼을, 마치 강원의 불분명하고 몽환적인 뇌 속을 그대로 스캔이라도 한 것마냥 명징하게 짚어내는 이 장렬한 작가를 자신의 내면에 끌어들이고 싶다고.
……꽃을 피우듯, 아이를 낳듯 소중하게 가꿔서 세상에 내놓아야만 한다…….
세상에 자극을 주고, 담론을 일으키고, 또 다른 아름다운 영혼(예술가)으로 하여금 그에 대한 화답일 강렬한 충동을 일으키게끔 해야만 한다. 그래. 그렇게 하기 전에는 절대로 그가 꿈꾸는 휴식을 허용해선 안 된다.
고통이 현재의 성취를 일궈냈다고 해서 반드시 죽음에 이르도록 고통을 끌어안게 할 필요도 없다. 물론 원하는 대로 그를 자신이 속한 삶의 영역으로 이끌 수 있을지는 강원으로서도 확신은 없었다. 이런저런 종류의 절망으로 죽거나 사라지는 작가야 이 바닥에선 발에 차일 정도로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 각각의 케이스를 하나의 범주로 환원할 수 없는 것 또한 이 바닥의 불문율이었다.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주목해왔던 그 어떤 작가 이상으로 자신이 그의 세계와 공명하고 있다는 점이 치명적이었다.
물론 언제나처럼 본능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리라. 장인환의 존재와 언어와 몸짓에 자신의 에너지를 더해 완전히 새로운 황금 덩어리로 창조하는 것. 죽음에 밀접하게 다가가 있는 작가인 만큼, 매우 섬세하고 까다로운 주의력을 요할 위험천만한 연금술이 될 것임엔 틀림이 없다. 만일 그를 살리는 데 실패할 경우 자신 역시 어마어마한 대미지를 입으리라는 사실 또한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분명한 것은, 드물게 매혹된 극상의 것이므로 절대로 놓아줄 마음 따위 없는 강원 자신의 의지였다. 그리고 의지를 세운 이상, 강원은 그 어떤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한계까지 스스로를 몰아붙일 자신을 알고 있었다.
아름다움이란, 아니, 예술이란, 극한으로 대치 중인 전쟁터와 한가지로 피비린내 나는 갈등과 화해의 드라마와 다름없는 것이다. 마치 역동적인 삶의 모습이 그러하듯이.
별로 길이 막히지 않아 강원은 출발한 지 약 30분 만에 부천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원미동 동사무소 근처에 차를 세운 다음, 서 실장이 적어준 주소에만 의지해 장인환의 아틀리에를 찾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난개발로 지은 아파트며 빌라가 즐비한 탓에, 드물게 오래되고 낡은 2층 단독 주택인 아틀리에는 비교적 쉽게 눈에 띄었던 것이다.
우중충하고 허름하기 짝이 없는 집의 모양새에 잠시 당혹해하고 있는 사이, 마침 대문 밖으로 나오던 중인 젊은 여자에게 장인환의 거처를 물었다. 한눈에도 물장사를 나가는 여자라는 게 확실한 요란스러운 옷차림의 여자는, 처음엔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이내 찐득한 교태를 담고 강원의 얼굴을 홀린 듯 들여다보았다.
“……아, 그 다리 저는 아저씨요……? 그 아저씨라면 저기 옥탑방에…….”
강원이 재차 질문을 던지자, 여자는 히죽거리는 수줍은 미소를 얼굴 가득 끌어오며 말끝을 흐렸다.
“……근데 계실지 모르겠네……? 낮엔 일하러 나가시는데요…….”
“그렇습니까? 일단 들어가보지요.”
호객이거나 추파의 기색이 역력한 여자를 냉랭하게 따돌리고, 강원은 제법 가파른 철제 계단을 따라 옥상으로 올라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끽끽거리는 소음이며, 군데군데 심하게 부식되고 녹이 슨 계단의 모양새에 아슬아슬한 위기감마저 느꼈다.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장인환의 아틀리에는 강원이 상상한 이상으로 열악한 것 같았다. 단순히 낡았다거나 비좁다는 의미뿐만이 아니라, 집의 구조 자체에서 풍기는 암담한 인상이 더더욱 강원의 심사를 불편하게 했다. 무엇보다도 먼저 아틀리에를 옮기도록 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십니까……?! 계세요?!! 장인환 씨……?!”
현관문 옆에 설치된 초인종을 아무리 눌러도 집 안에선 당연한 것처럼 인기척이라곤 들리지 않았다. 물론 강원은 그럼에도 그의 존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장 선생님, 계십니까……?! 장 선생님……!”
귀찮아서라도 문을 열 수 있게끔 그를 들볶을 심사로 요란스레 목소리를 높이며 문을 두드렸다. 놀랍게도, 혹시나 해서 돌려본 문손잡이는 아무런 저항 없이 돌아갔고, 이어 빼꼼 틈을 만들며 강원을 안으로 인도했다.
―마음에 안 들어…….
무심코 이맛살을 찌푸리며 강원은 현관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부실한 자기관리의 흔적을 또 한 번 발견한 터라, 수월한 접근에도 불구하고 기분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외계에의 두려움이 없는 인간이란 희망 또한 가지고 있지 않은 법이다.
늦은 오후의 부드러운 햇살이 남쪽으로 난 거실 창문을 통해 집 안 가득 들어와 있었다. 밝고 밝은 빛은, 온갖 잡동사니가 어수선하게 널려 있는 초라한 아틀리에를 인정사정없이 까발리고 있었다. 둘러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한눈에 파악이 되는 무질서와 황량함에 혀를 차며 강원은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섰다. 맞은편 활짝 열린 방문 너머, 거실과 별다를 바 없는 무질서를 연출하고 있는 방 안 풍경이 설핏 보였다.
“……장 선생님……?”
게으른 화가는 짐작대로 방 한쪽 구석에 자리한 싱글 침대 위에 죽은 듯 누워 있었다. 이불인지 시트인지 분간이 안 가는 누르스름한 천 쪼가리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둘둘 말고 있어, 마치 모로 누운 미라 같았다. 강원의 조심스러운 부름을 분명 들었을 텐데도 미라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장 선생님, 괜찮으십니까? 잠깐 들어가 뵈어도 될까요?”
여전한 무반응에 초조해진 나머지, 방 안으로 다가가는 강원의 발걸음은 자신도 모르게 조급해졌다. 발치에 걸려 순간 중심을 잃을 뻔하게 만든 화가의 감색 슈트 재킷이라거나, 같은 색의 팬츠며 셔츠들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팽개쳐져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만 해도, 강원은 그것이 무자비한 강간의 흔적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침대 발치에 떨어진 새하얀 팬티쪼가리를 설핏 보았을 때에도 그저 화가의 자포자기한 무력감만을 읽고 쓴웃음을 지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비로소 자세히 들여다본 침대의 사정은 확연히 달랐다. 코에 익숙하게 다가드는 선명한 섹스의 잔향을 포함해서, 화가의 몸을 도롱이처럼 말고 있는 얇은 차렵이불은 검붉은 선혈로 낭자했던 것이다.
숨이 막히는 것만 같은 탁한 충격이 목울대를 찌르며 지나가는 것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제기랄……!”
사나운 기세로 불쑥 토해지는 욕설의 의미도, 전신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순식간에 덮쳐드는 뜨거운 열기의 정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강원은 도롱이처럼 말린 이불을 정신없이 풀어 헤쳤다.
등을 꼬부린 채 모로 누워 잠이 든 장인환의 얼굴이 드러났다. 축축한 습기로 푹 젖은 머리칼이 까치집처럼 뒤엉킨 채 창백한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 콧대가 주저앉았나 싶은 의심이 들 정도로 불그스름한 피멍을 머금고 있는 얼굴 정중앙부를 비롯해서 양쪽 광대뼈 부위도 푸르뎅뎅한 피멍 자국으로 가득했다. 목덜미며 가슴이며 어깨며 할 것 없이, 강원의 시선 아래 드러난 피부란 피부는 새빨간 키스 마크들로 가득 뒤덮인 채, 광기에 가까울 정도로 범해진 화가의 몸을 여실히 증거하고 있었다. 확인 사살을 당하는 심정으로 들춰본 하반신 역시 강원의 예상에서 한 치도 빗나가지 않은 무참함 그 자체였다. 엉덩이의 굴곡을 지나 허벅지 아래쪽까지 사방으로 뱀처럼 구불거리는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은 정액과 뒤섞인 불그스름한 핏자국이었다. 안을 살펴보지 않아도 당장 치료를 요할 만큼 상처가 심하다는 것은 낭자한 핏자국만으로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미처 싸움의 태세를 갖추기도 전에 카운터를 맞은 황망함이었다. 졸지에 당해버려 화를 내야 할지, 화를 내기 전에 전열부터 재정비를 해야 할지, 제대로 된 판단도 못 하고서 갈팡질팡 흔들리는 얼간이가 된 듯한 모멸감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울화통이 터질 까닭이 없다!
아마도 강간범을 향해서임이 분명할 욕설을 속으로 수도 없이 뇌까리며 강원은 맹렬하게 폭주하기 시작한 감정적 동요를 삭히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침착해야만 했다. 분명 남자는 그렇게까지 치명적인 상해를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희미하게 코를 골기까지 하며 자고 있지 않은가. 외양이야 강간의 모양새를 취하고 있지만 서로 합의하에 과격한 플레이를 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치정 사건으로 감옥에까지 간 남자였다. 강원의 상상 이상으로 문란한 섹스를 즐기는 종류일지 또 누가 알겠는가. 무엇보다 앞으로의 작정이야 어떻든, 강원은 아직 그의 삶에서 제 3자나 다름이 없었다. 필요 이상으로 감정을 드러낸다는 것은 그야말로 수다쟁이 아줌마처럼 우스꽝스럽고 주제넘은 짓이 될 터였다.
“……선생님! 장 선생님! ……괜찮으십니까?! 장 선생님!!”
꽤 오랫동안 감정을 삭였음에도 더딘 이성의 작용 때문인지 남자의 어깨를 흔드는 강원의 몸짓엔 자신도 모르게 거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장 선생님! 장인환 씨!!!”
“……으…… 하…….”
마치 잠자는 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고집스러울 정도로 눈을 감고 있던 그는 강원이 마지막으로 가볍게 때린 오른쪽 뺨이 아팠는지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불분명한 신음을 흘렸다.
“장인환 씨!!!”
제대로 박힌 귀라면 도무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톤을 높여 부르자 그의 퉁퉁 부은 눈꺼풀이 마지못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몽롱하게 취한 초점 없는 눈이 바로 코앞으로 다가든 강원의 얼굴을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었다.
“……정신이 드십니까? 상처가 심해요. 병원에 모셔다드리겠습니다.”
“…….”
“장 선생님……?”
“…….”
잠시 의식을 집중하는 듯하던 몽롱한 시선은, 그러나 다시금 두껍게 내려앉은 눈꺼풀에 의해 묵직하게 가라앉아갔다.
“장 선생님!”
“……시끄러워…… 좀…… 자게 둬요…….”
“당장 치료를 받으셔야 합니다. 일어나세요.”
“……놓…… 으…… 아악!!!”
무의식적으로 이불을 끄집어 올리는 손목을 틀어쥐고 상반신을 일으키게 하자 그의 입술에서 자지러지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순간 팔에서 힘을 뺐지만 이미 새하얗게 질린 얼굴은 잔뜩 일그러진 채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강원의 재킷 자락을 움켜쥔 손아귀며, 피가 배어나올 정도로 깨문 입술에선 참기 힘든 고통의 흔적이 역력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치료를 받으셔야 해요. 조금 있다가 옷을 입혀드릴 테니까 천천히 움직여보세요.”
달래듯 여윈 등줄기를 쓸어주며 부드럽게 속삭이자 남자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통에 대한 자각이 그를 지배하고 있던 수마를 몰아낸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외적인 상처보다도 강원을 더더욱 초조하게 만든 것은 그의 비정상적인 수면 욕구와 더불어 방기된 의식 상태였다. 분명 그는 강원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몇 분 동안 강원의 품에 상반신을 기댄 채 통증을 수습하더니, 마치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마냥 방 한쪽 구석에 멍하니 시선을 준 채 미동도 않고 있었다. 생각을 더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화를 낸다거나 울음을 터트린다거나 하는 히스테릭한 반응도 없었다. 자발적인 즐김의 자취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는 그의 태도에, 잦아들어가던 노기가 다시금 강원의 전신을 사로잡았다.
―가만두지 않겠어…….
―제기랄, 어떤 놈인지 찾아내서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해주지……!
목울대가 얼얼할 지경으로 울컥거리는 심사를 가까스로 달래며 강원은 평소의 자신이라면 상상도 못 할 어린애 같은 살의를 거듭 불태우고 있었다. 소중하게 아껴오던 첫사랑의 소녀가 눈앞에서 윤간을 당했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눈에서 불이 나지는 않을 터였다. 분명, 마음에 든 작가에 대한 반응치고는 도가 지나칠 정도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아무리 드물게 매혹적인 작품 세계를 가지고 있다 해도, 자신의 이런 반응은 상식 이하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는 것도. 그럼에도 스스로의 감정에 이성적인 제동을 걸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또한 그러한 자신의 감정을 분석하거나, 납득 가능한 설명을 스스로에게 하고픈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저 당했다는 열패감, 당한 이상으로 미친 듯이 되갚고 싶다는 동물적인 복수심만이 온 넋을 지배하고 있었다.
“……옷 입혀드릴게요. 새 옷은 옷장 속에서 찾으면 됩니까?”
강간을 연상시키는 방바닥의 옷가지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강원이 물음을 던지자, 그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한 한 부드럽게 상반신을 놓아주고, 초라한 모양새로 방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갈색 비닐 옷장을 뒤져 낡은 면바지 하나와 울 스웨터를 꺼냈다. 마른 타월도 하나 찾아내, 주방에서 물에 적셔 가져와 더럽혀진 남자의 하반신을 조심조심 닦아냈다. 낯선 타인에게 치부를 드러내는 일이 수치스러울 법한데도, 그는 타월의 서늘한 감촉에 잠깐 얼굴을 찌푸렸을 뿐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길이며 굵기며 현저하게 차이를 보이는 두 다리는 뼈마디가 보일 정도로 앙상하게 말라 있다. 피부는 탄력을 잃은 채 흐늘거렸고, 역시 지나치게 마른 탓에 적당히 근육이 붙어 있어야 할 가슴팍도 새가슴처럼 움푹 튀어나온 쇄골 뼈만 두드러져 보인다. 작은데다 모양도 볼품없는 거무스름한 생식기며, E.T.처럼 볼록하니 튀어나온 기형적인 똥배며,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은 중년 남자의 말라비틀어진 몸 어디에서도 무자비한 성욕을 불러일으킬 만한 매혹을 찾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젊었을 때라면 어땠을지 몰라도, 작고 갸름한 형태의 얼굴 역시 막노동에 종사하는 평범한 중년 남자의 그것과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잡티와 잔주름투성이로 검게 그을린 채, 그가 흘려보낸 험난한 인생의 굴곡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아니었다. 암만 생각해도 아니었다. 희한한 욕망 구조를 가진 변태가 아니고서야 이렇게까지 볼품없는 몸을 유린할 까닭이 없다!
개새끼가 아닌가! 힘으로밖에는 여자를 굴복시킬 줄 모르는 변태 마초 새끼들은 깡그리 물건을 잘라 쓰레기통 속에 처박아야 해! 씨발, 개새끼들! 개돼지만도 못한 새끼들! 똥물이나 처먹여야 할 놈들……!
어린애처럼 온갖 종류의 상소리들을 변태 강간범에게 쏟아내며 강원은 새삼 치를 떨었다.
“……옷 입혀드릴게요. 천천히 일어나보세요.”
대강 뒤처리를 마친 후, 여전히 넋을 놓고 있는 그의 몸을 조심스럽게 안아 일으켰다. 이상할 정도로 가벼웠다. 175센티는 족히 될 키를 가지고도 마치 수수깡을 둘러멘 것처럼 무게감이 없는 남자에 기가 막혔다.
강원의 어떠한 몸짓에도 순종적으로 따라오는 그를 안심시키듯 최대한 부드러운 동작으로 천천히 옷을 입혀주었다. 하반신에 약간이라도 힘이 가해질 때마다 억눌린 신음을 흘려대는 통에, 단지 팬티와 바지, 스웨터 하나를 입히는 데만도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소모되었다. 피멍 가득한 얼굴만 빼면 그럭저럭 강간 피해자처럼 보이지는 않는 모습으로 거듭난 그의 몸을 들쳐 업었을 무렵엔, 강원의 얼굴도 그 못지않게 구슬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혼자서는 단 한 걸음도 제대로 떼지 못하는 몸을 들쳐 업고 차를 세워둔 원미동 동사무소 쪽으로 달려갔다. 가까운 외과 병원에 들를까 하고도 생각했지만, 역시 전문 병원이 나을 듯싶어 가끔씩 억누른 신음을 흘리는 그를 뒷좌석에 눕힌 후, 시내 쪽으로 차를 몰았다. 사무실에 전화를 해서 평판 좋은 항문외과의 위치를 묻자, 비서실 미스 안이 대경실색한 어조로 까닭을 물었다. 강원의 험악한 기색을 알아차리자마자, 부천에서 20여 분쯤 떨어진 위치에 있는 모 대학 부속 병원의 위치를 잽싸게 알려준 것은 물론이었다.
치료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외래 환자가 뜸할 저녁 무렵이라 기다리는 데 별로 시간을 뺏기지 않은 탓이었다.
마인 아트의 물주와 약속한 시간이 점점 가까워오고 있었지만 강원은 이상할 정도로 태연했다. 모든 약속을 캔슬한 뒤, 상처 입은 남자를 보듬고 싶은 욕구로 한순간 흔들렸지만 역시 어리석은 짓이 될 터였다. 자신이 오늘 할 수 있는 배려란 여기까지였다. 더 이상의 접근은 그가 어느 정도 제정신을 차린 후에나 가능할 것이다.
병원 대기실에 앉아 그를 기다리며 마인 아트에 전화를 걸었다. 사정이 생겨 한 시간쯤 늦어지겠다 양해를 구하자 수화기 너머 정중한 어조의 목소리는 상관없다며 예의 바른 대꾸를 해주었다. 마침 남자 간호사의 어깨에 몸을 의지한 채 치료실을 빠져나오던 중인 그에게 시선이 간 나머지, 강원은 곧 찾아가겠다는 인사말을 무성의하게 던진 후, 겸손한 물주와의 통화를 끊었다.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힌 채 비틀거리는 몸을 간호사로부터 돌려받아 부축했다. 간단한 주의 사항을 말해주는 간호사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꾸만 바닥으로 까라지려는 몸을 대기실 의자에 앉혀주었다.
“……약 타 가지고 오겠습니다. 여기서 잠시 기다려주세요.”
끙끙대며 의자에 길게 드러눕는 남자는 대답할 여력도 없어 보였다. 축축한 식은땀이 가득한 얼굴은 뿌연 형광등 불빛을 받아 해골처럼 창백한 빛을 뿌렸다. 여전히 표정이 없는 시선은 강원의 어깨 너머 어딘가를 멍하니 굽어보고 있었다.
“……뭐라도 좀 드시겠습니까? 오늘 하루 종일 굶으셨지요?”
차가 부천으로 접어들기 직전, 마침 눈에 띈 한식집 간판을 발견하고 운을 떼어보았지만 남자는 대답이 없었다. 걱정은 됐지만 하루쯤 굶는다고 목숨에 지장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음식보다도 더 그에게 시급한 것은 어딘가 멀리 도망쳐버린 넋이었다. 이제나저제나 눈치를 살피며 아무리 기다려보아도 그는 좀처럼 제정신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야, 강간이 충격적인 사건일 수는 있어도, 다 자란 성인 남자로 하여금 이렇게까지 넋을 빼놓을 만큼 대미지가 크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강원이 모르는 다른 내밀한 원인이 있을 테지만, 이유를 불문하고 그에 대한 걱정이 증폭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무엇보다도 현재의 자신으로서 어떻게도 도움을 줄 수 없다는 무력감이 강원을 괴롭게 했다. 별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뛰어난 작가 하나를 허무하게 잃는 것은 아닌가 하는 위기감마저 느꼈다. 대충 짐작은 했었지만 그의 알몸 곳곳에 남아 있던 자해의 흔적들은 강원의 예상치를 훨씬 웃도는 것이었다. 물론 대부분의 흉터들이 적어도 5∼6년은 훌쩍 넘겼을 법한 오래된 것들이긴 해도, 그가 언제 다시 죽음의 유혹에 사로잡힐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명색이 아틀리에라고 하는 형편없는 오두막에 차가 도착했을 무렵, 시간은 저녁 7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막 해가 떨어진 터라, 어둑어둑한 땅거미의 세례를 받은 집은 낮에 볼 때보다도 더욱 을씨년스러운 기운을 풍겼다. 집 바로 앞에 차를 세우고, 어느새 잠이 들어버린 골칫덩어리 화가를 안아 옥탑방으로 옮겼다.
“먹는 약은 하루 세 번씩 식후에 드시면 됩니다. 연고는 적어도 다섯 번 이상 수시로 상처에 바르라고 하더군요.”
방 안에 내려주자마자 엉금엉금 침대로 기어드는 남자를 향해 짤막하게 주의를 주었다. 극심한 수마에 침몰당한 눈이 게슴츠레 강원을 굽어본다.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내일 전화 드리고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몸조리 잘하세요.”
목구멍이 간질간질한 초조감과 무력감에 마지못해 내뱉어지는 강원의 어조는 퉁명스러웠다. 결국 남자는 마지막까지 강원의 기대를 배반하고 있었다. 차라리 지금처럼 병적인 수면욕에라도 빠져 있어주기를 기대해야 할 판이었다. 언젠가 제정신이 들어, 극단적인 생각 끝에 또 손목이라도 그을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강원은 치가 떨렸다.
“……내일 전화 드리고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단호하게 되풀이해보지만 멍하니 초점을 잃어가는 눈에선 여전히 그 어떤 대꾸도 읽을 수 없었다.
“……장 선생님…….”
분명 여기까지였다.
“……이봐요…… 인환 씨, 내 말 들려요……?”
더 이상 그를 위해 할 일은 없었다. 설령 그가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하고 어리석은 유혹에 굴복한들, 그건 강원이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한심스러운 일이지만, 단숨에 우주의 신비를 꿰뚫을 재주를 가지고도, 새끼손가락에 돋은 종기의 고통만으로도 작가는 죽을 수 있었다.
“제기랄……!”
그럼에도 분노를 참기가 힘들었다. 어떻게든 남자의 절망을 되돌리고 싶은 절박한 욕구로 온몸의 피가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전신을 휘돌았다.
―이대로는 안 돼!
“흐악!!!”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던 남자의 상반신을 거칠게 안아 올리자마자, 귀청을 찢을 듯한 비명이 방 안 가득 울려 퍼졌다.
―절대로 맥없이 뺏길 수는 없어! 굴복할 수 없어!!!
“제발 정신 좀 차려요!!! 죽을 겁니까?!!! 그래요?!!!”
남자의 어깨를 움켜쥐고 사정없이 앞뒤로 흔들어댔다.
“흑……! 윽……! 아악!! 그…… 아…… 아파……! 아파!! 아파!!! 뭐…….”
“아파요?!!! 예, 아프죠?!! 아플 겁니다!!! 내가 당신을 괴롭히고 있으니까!!! 보여요?!!! 보입니까?!!! 당신을 괴롭히고 있는 내가 보여요?!!!”
“……하…… 하지…….”
“아뇨! 계속할 겁니다! 제정신을 차릴 때까지 계속 괴롭힐 거예요! 아프게 할 겁니다! 그러니까 돌아오세요! 돌아와요!!!”
“……제…… 발…… 아…… 아아…… 악……!”
“안 놔줘요! 돌아오기 전에는 놔주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오세요!!! 오시라구요!!! 제발 돌아와!!!”
“으…… 아아아…… 흑……! 누…… 뭐야…… 당신…… 으악!”
“내가 누구냐고요?!!! 모르십니까?!!! 어제 인사를 드렸어요!!!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김강원입니다!!! 김자, 강자, 원자, 큐레이터죠!!! 당신 그림에 반했어!!! 하루 종일 들여다봐도 질리지가 않아!!! 목줄기가 콱 하고 단숨에 잘리는 것 같지!!! 사타구니가 쿡쿡 쑤시면서 요동을 쳐대!!! 당장 아무에게든 쑤시고 들어가고 싶어 미치지!!! 내장이 뒤틀려버릴 것 같다고, 기뻐서!!! 기뻐서 환장을 하는 거야!!! 일점(一點)!!! 일점!!! 무슨 뜻인지 알아들어요?!!!”
“……그…… 그…… 흑……! 제…… 강…… 원…… 김…… 강원……!”
“그래요!!! 김강원입니다!!! 당신이 열어준 통로로 들어가봤어요!!! 나도 봤다구!!! 당신만이 아니야!!! 나도 같아!!! 같은 것을 봤어요!!! 그러니까 돌아와요!!! 내가 본 게 착각이 아니라고 말해줘요!!!”
“……흐…… 으…… 윽…… 웃…….”
제정신이 아닌 것은 상처 입은 화가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강원의 광포한 복수심은 남자의 고통이 자지러질수록, 수수깡처럼 맥없이 까라지는 비참한 몸뚱이를 선명하게 자각할수록 점점 더 증폭되고, 남자의 어깨를 뒤흔드는 손에 실린 힘도 제동이 불가능할 지경으로 폭주했다. 숨은 턱 끝까지 차고, 뜨거운 열기는 전신을 태워버릴 것처럼 휘몰아쳤다.
구하고 싶다! 구하고 싶다! 살리고 싶어! 이 사람을 살리고 싶어! 아니, 아니, 살고 싶다! 살고 싶어! 아아, 나는 살고 싶다구!!!
저항할 엄두도 못 내고서 그저 흐느끼듯 애원과 비명을 번갈아 토해내던 남자의 얼굴에서 비로소 흐릿한 표정의 징후가 포착됐다. 휘둥그렇게 뜬 남자의 두 눈이 강원의 시선을 붙들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쳐대고 있었다.
“……으…… 욱…… 흑……! 그…… 조…… 좋…… 아요……? 그건…… 좋은…… 좋은…… 일입니까……?!”
끊어질 듯한 호흡의 사이를 뚫고 남자가 울부짖었다.
“……당신을……. 기…… 기쁘게 하는 일…… 인가……!”
기가 막혔다. 생사를 초극한 대담한 영혼이 아니고선 이루기 힘든 성취를 거머쥐고서도 화가는 소인배처럼 겁에 질려 있었다. 비굴하게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의 가치를 구걸하고 있었다. 기쁘게 하는 일이냐니, 좋은 일이냐니, 맙소사, 도대체 이 남자는…….
“……으…… 우…… 흐으으…… 보여…… 줄게요……. 나…… 많이…… 아직…… 태우지 않은 게 아직 좀 더……. 흑…… 윽……!”
“…….”
“……마…… 많으니까…… 우…… 우앗……! 윽……! 흑……! 많아…… 아직…… 아직…… 흐으…… 웃……! 보…… 보여줄게…… 괜…… 윽…… 욱…… 괜…… 찮죠……?”
“…….”
“……어…… 어디 갔지……? 안 보여…… 윽…… 흑…… 아…… 저기…….”
“…….”
필사적으로 강원을 좇던 시선은 어느새 무언가를 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리저리 허공 속을 맴돌고 있었다. 홍수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는 눈물 탓에 제대로 초점을 맞추기도 힘이 든 것 같았지만, 무엇보다도 남자를 사로잡고 있는 전율이 사리 분별에 맞는 행동을 할 수 없게끔 만드는 것 같았다. 짐승의 울부짖음에 가까울 꺽꺽거리는 흐느낌 소리는 남자의 말이 끊길 때마다 그로테스크한 울림을 만들어내며 비좁고 황량한 화가의 아틀리에를 뒤흔들고 있었다.
“……없네…… 없어…… 없…… 다…… 윽…… 흑…… 흐아아…… 앗…… 아…… 어디…… 윽…… 어…… 아, 그렇구나……! 그 사람이야……! 그가 가져갔어요……!”
“…….”
“……아뇨…… 아니요…… 다시…… 그리면 되니까……. 강원…… 김…… 강원…… 강원 씨…… 곧…… 그려드릴 테니까…….”
절망에 차서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던 시선이 비로소 다시 강원의 눈을 붙들었다. 변명하듯 남자는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다시 그려서 보여주겠노라는 다짐을 되풀이했다. 어떻게든 자신의 말을 믿게 만들려는 듯한 비굴한 시도는 너무나 심각했고 또한 너무나 참혹했다. 궁지에 몰린 쥐새끼처럼 필사적으로 맴을 돌며 강원의 관심을 구걸했다. 살아도 되냐고, 자그마한 한 귀퉁이, 슬쩍 끼어들 틈을 남겨주겠느냐고, 뱀처럼 눈치를 살피며 강원의 자비를 구걸했다.
마침내 무당의 염불 소리와도 같은 웅얼거리는 다짐과 함께 남자가 강원의 품에서 미끄러지듯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감사의 의미인지 구애의 의미인지 분간이 안 가는 몸짓으로 강원의 무릎 사이에 머리를 박은 채 남자는 한동안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윽고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치켜들더니 가까이 늘어져 있던 강원의 오른손을 끌고 가 정신없이 비벼대기 시작했다. 코를 문지르고, 눈가를 쓸고, 눈물인지 땀인지 분간이 안 가는 액체로 흥건해진 뺨을 강원의 손바닥에 비벼댔다. 그게 지루해지면 입을 맞춰왔다. 손가락을 깨물고, 손바닥을 핥고, 쪽쪽거리는 소리가 날 때까지 미친 듯이 빨아댔다.
……구걸하지 마, 일개 큐레이터 따위에, 개 버러지 같은 속물 떼들에, 도시에, 똥 덩어리가, 생살 썩는 악취가 들끓는 이 똥통 같은 도시에, 고개 따위 숙이지 마…… 왜 당신이 빌어야 하나…… 추한…… 추악하고 추악한 것들이…… 괴물들이…… 찜질방에…… 인터넷에…… 유원지에…… 롯데월드…… 증권가에…… 국회에서…… 지독한 트림을 해대며, 방귀를 뀌어대며…… 잘살고 있잖나…… 제기랄, 악마는 없어…… 없어…… 오로지 추함이 있을 뿐…… 추악한 것들…… 저마다 아우성을 쳐대며 제 추함을 자랑하기에 급급한 것들…… 그것이 악(惡)…… 악마다…… 왜 빌어야 하나…… 언제까지 그것들에 당신의 자리를 내줘야 하나…… 입을 처닫고, 숨을 죽이고…… 저들이 내뿜는 독가스를 울며 삼켜야 하느냐……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제정신이 아닌 것은 상처 입은 화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화가의 비참한 몸부림이 거듭될수록 피를 토하는 응어리가 강원의 의식을 갈아 마시고 있었다. 으깨지고 버무려지고 종내는 블랙홀처럼 삼켜진 넋 속으로 화가의 처절한 기원이 고스란히 스며들어오고 있었다. 끔찍스러운 일체감이었다.
축축하고 뜨거운 그의 입술을 손바닥 가득 느끼며 강원은 회오리처럼 치밀어 오르는 욕정에 전율했다. 단숨에 그를 바닥에 쓰러트리고 내장 끝까지 밀고 들어가고픈 짐승스러운 욕구로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때리고, 물고, 빨고…… 깊이깊이 쑤셔 박은 뒤에 질릴 때까지 흔들고, 또 흔들 것이다! 한번 박아 넣었으니까…… 환장하게 좋으니까, 이대로 영영 나오지 않을 거다! 절대, 절대로 달라붙어서 영영 떨어지지 않을 테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바로 몇 분 전까지, 그토록 원한에 차서 이를 갈아붙였던 강간범과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웃음이 나왔다. 결국 강간범에게까지 일체감을 느껴야 하다니. 미쳤나 보다. 아아, 정말 미치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없다…….
한계까지 발기한 사타구니 사이로 자유로운 나머지 한 손을 가져간 후 맹렬하게 훑어 올렸다. 옷감 아래 둔하게 다가오는 감촉이 답답해진 나머지 벨트를 풀고 맨살에까지 직접 파고들었다. 강원의 돌발 행동에 문득 얼굴을 들고 시선을 보내오는 그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이젠 자신과 한 몸이나 다름없는 영혼이 아닌가.
온통 젖어 있는 중년 남자의 가무잡잡한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새빨갛게 충혈된 눈시울은 여전히 눈물로 가득해서 겁에 질린 토끼 같았다. 사랑스러웠다. 자각된 감정과 함께 찌르르한 쾌락이 아랫배를 강타했다. 홀린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토끼를 자신도 모르게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가냘픈 몸과 접촉하는 순간 손가락 사이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던 음경 끝이 요동을 치며 뜨거운 액체를 질금질금 쏟아냈다. 찌릿찌릿한 쾌감이 요도를 지나 단전을 치고, 이어 척추 끝 신경줄을 차례로 건드리며 정수리 위까지 뻗쳤다. 화가의 허리를 감고 있던 팔에 힘을 주었다. 막 사정을 하려는 음경과 빳빳하게 굳은 음낭을 한꺼번에 틀어쥐고 절정을 향해 달렸다. 무심코 신음을 흘리는 그의 젖은 입술에 망설임 없이 자신을 내리눌렀다. 짭짤한 눈물 맛이 느껴지는 입술을 빨고, 어리둥절해하는 혀뿌리를 핥고, 욕심껏 깊이 파고들었다.
하반신이 요동을 치며 오르가슴이 왔다. 전율이 격해진 나머지 쪼그리듯 앉은 자세를 더 이상 지탱할 수가 없었다. 넋을 잃고 꼼지락거리는 그의 몸을 결사적으로 끌어안은 채 바닥으로 쓰러졌다. 몸서리가 쳐지는 쾌감이었다. 눈앞이 붉게 변하며 온몸이 미라처럼 죄어들었다. 제기랄, 품 안의 축축한 생물이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 물 밖으로 뛰쳐나온 숭어처럼 꿈틀대는 몸을 가까스로 가누며, 화가의 상처투성이 얼굴에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입을 맞췄다.
서서히 이성을 찾아가는 듯한 정신에, 그래서 아마도, 잔뜩 겁에 질린 나머지 토끼처럼 휘둥그레진 눈을 굴리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건드리지 않는다고, 그저 조금 흥분했을 뿐이라고, 자신은 일반이니 안심하라고, 입에 발린 거짓말을 줄줄이 쏟아내며 화가의 입술을 빨았다. 키스하고 또 키스했다. 그 어떤 교활한 거짓을 끌어다 붙여서라도 이 달콤한 순간을 연장시키고 싶어하는 스스로의 광포한 욕망과 함께, 강원은, 자신이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4월이었다.
2003년 4월, 여기는 파리가 아니다.
이렌느와 이혼한 지는 2년이 채 안 되지만, 사랑은 그보다도 더 오래전에 사라져버렸었다.
10대 소년처럼 가슴이 설레었다.
몰락해가는 화가의 황폐한 아틀리에 가득, 시커먼 밤의 장막이 도둑처럼 숨어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