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2003년 4월. 문위(文偉)
허기는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아마도 영원히 채워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안아도, 안아도……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흐름만큼 공허가 밀려들 테니까.
그렇게까지 정신을 잃을 정도로 섹스에 탐닉을 한 것은 아마도 몇 해 만이었을 것이다. 언젠가 뉴욕의 한 난교 파티에서 자신을 방기해본 이래로, 아마도 처음일 과도한 접촉에도 불구하고 내장 어느 한구석이 뻥 뚫린 것만 같은 허기는 여전했다. 노곤한 몸 상태며 여전히 하반신에 남아 있는 뿌듯한 쾌락의 기운이 그를 안았다는 믿을 수 없는 현실을 희미하게나마 증거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그야 별로 기대는 하지 않는다. 찾아내기 전부터 어느 정도는 각오를 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죄의식과 회한에 몸부림을 치다가 혼자서 죽어갔을 거라고, 아니면 그저 몸뚱이만이 살아남아 생기를 잃은 짐승처럼 긴 시간을 견디고 있을 거라고. 그래, 그렇지. 마치 자신이 그래왔듯이.
물론 그렇게 사는 것마저 순탄치는 않았을 것이다. 고통과 그리움은 순간순간 그의 목을 죄었을 터. 아마도 필사적으로 잊기를 노력했겠지. 잊지 못한다면 죽을 것이고, 잊는다면 살 것이다…….
결과적으로 위의 예상은 단 한 치도 빗나가지 않은 것 같다. 자신에 대한 사랑이란 까맣게 잊은 채, 그는 흐리멍덩한 눈의 늙은 고양이처럼 공허한 삶을 견디고 있었다. 물론 그따위를 알량하게 삶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지만.
자신은 체념을 한 순간이 있었던가?
더 이상 그를 찾을 수 없으리라고, 아마도 이제쯤은 죽었으리라고, 기를 쓰고 놓지 않으려던 손을 마침내 놓아주리라고 결심한 순간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을까?
모를 일이다. 어쩌면 한두 번쯤은 의지가 약해진 순간이 있었을지도. 만약 그러한 순간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다면, 아마도 그것은 질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자신의 존재를 잊기보다는 차라리 죽어주기를 바랐던 그 단 한순간.
자,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소원대로 그는 죽었다. 죽어 있었다. 더 이상 어떤 기대가 있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다시 살리겠다고? 하! 과연! 뻔뻔스럽게도, 이제 와서 그게 가당키나 한 욕심일까? 기를 쓰고 그의 사랑을 죽이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종국엔 목적을 이루고, 사랑을 죽이는 것도 모자라 그의 영혼마저 삼켜버렸다. 얼간이가, 결국은 그게 제 목을 조르는 짓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그래, 더 이상 되돌아올 수 없는 지점까지 그를 몰고 가버린 거다. 결국 박살이 나지 않았나. 그도, 그리고 나 자신도…….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갤러리의 내부를 밝히고 있는 조명은 지나치게 어두웠다.
백 관장 말로는 그게 그림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그래서야 제대로 그림을 볼 수나 있을까, 괴이쩍은 생각이 든다. 보여지는 것으로써 그 가치가 입증되는 예술이라면 보여지는 데 대한 어느 정도의 편의는 보장받아야 되는 게 아닌가. 향유가 먼저, 보존은 차후의 문제다. 어차피 존재는 영원하지가 않다. 종내는 먼지로 스러질 것들을 기를 쓰고 막아내려는 인간들의 몸짓이란 한결같이 부질없고 객쩍다.
전용 면적 200여 평에 달하는 장방형의 방 두 개가 기역자로 연결되어 있는 마인 아트 스페이스의 7층 갤러리는, 막 전시 일정을 끝낸 어느 유명 작가의 설치 작품을 철거하는 중이라 마치 공사 현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어수선했다.
오늘 아침, 그의 아틀리에에서 가져온 캔버스들은, 언젠가부터 기를 쓰고 모아온 그의 옛 작품들은 물론이고 세 점의 공모전 출품작과 더불어 장방형의 방 두 개중 좀 덜 수선스러운 동쪽 방 한구석에 차례로 걸려 있었다. 위가 차에서 부지런히 끌어 내린 작품들을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갤러리 직원들은, 위의 개인적인 부탁이라는 전제하에 한시적으로 그림을 걸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물론 김강원이나 다른 몇몇 평론가들에게 보여주고 자문을 구한 후엔 연희동 집으로 바로 옮길 예정이다.
대부분의 직원이 퇴근을 해버린 갤러리는 무덤 같은 정적에 사로잡혀 있었다. 가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려 휘황한 도시의 야경을 굽어보기도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위의 시선은 다시금 뿌연 살구색 조명을 받고 있는 캔버스 위로 되돌아오곤 했다. 꾸르륵거리는 배 속 신호로, 저녁 식사는커녕 하루 종일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식욕은 조금도 동하지 않았다. 홍제동 사옥에서 나와 바로 청담동의 마인 아트로 이동한 후, 위는 내내 그의 그림들만을 들여다보며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본들, 새삼 그가 감춘 암호가 읽힐 까닭이 없다. 인상적인 색채라거나 화려함만큼 센세이셔널한, 말 그대로 싸구려 형상이 아니고선 그림이 말하고 있는 고상한 언어 따위 위는 알지 못한다. 그나마 위가 어렴풋이 감흥을 불러올 수 있을 법한 시각이란 고작해야 인상파까지. 그야말로 박물관에나 가서 입을 딱 벌릴 소박한 관객의 수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거듭거듭 잡고 싶은 암호는 숨바꼭질을 하듯 달아나버리고, 대신 돌아오는 것은 초조하고 안타까운 맹인의 절망이다.
무엇보다도 견디기 힘든 것은, 이해 불가능한 그의 분신들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면 할수록 실물의 그를 보거나 만지고 싶은 고통스러운 욕망이다. 그야, 우선순위가 무엇인지쯤은 위도 알고 있다. 암호를 해독하고 난 후엔 자신은 다시금 질릴 때까지 실물의 그를 안을 것이다.
물론 딱히 기대는 가지지 않는다. 아니, 가지지 않으리라고 자기최면을 건다. 죽은 삶이란 너무 많은 기대를 가져선 곤란하니까. 다만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고 싶은 이 기원을 무어라 말하면 좋을까? 미련인가? 아니면 회한?
띠리리리∼∼∼.
요란스레 울리는 전화벨 소리가 무덤 같은 정적을 깨트렸다. 출입구 쪽 테이블에 설치된 구내 전화였다.
“여보세요?”
[예, 이사님. 로비입니다. 손님이 도착하셨는데 모시고 올라가도 될까요?]
“네. 부탁합니다.”
전화를 끊고 3∼4분이 지나자 입구 쪽에 다부진 몸집의 장신의 사내 하나가 나타났다. 옆에 서 있던 제복 차림의 사내는 깊숙이 고개를 숙인 인사와 함께 엘리베이터 쪽으로 되돌아가고, 장신의 사내만이 위가 서 있던 갤러리 한복판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리놀륨 바닥을 밟는 사내의 묵직한 발자국 소리가 갤러리의 고요를 한층 더 부각시키고 있었다.
연회색의 고급스러운 싱글 슈트는 물론, 강렬한 자주색 넥타이가 사내의 수려한 외모와 어우러져 무척 화려한 인상을 주었다. 능력 있는 큐레이터가 아니라 무슨 영화판의 카사노바가 아닌가 하고 순간 의심이 들 정도여서 위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외모에 대한 부당한 선입견은 위 스스로도 꽤 자주 당하는 일이면서도, 자신 역시 어쩔 수 없이 첫인상에 좌우되곤 한다.
“김강원 선생님?”
“……예. 많이 늦었습니다. 김강원이라고 합니다, 이사님.”
정중하게 악수를 청하자 사내는 활짝 미소를 터트리며 마주 손을 뻗어왔다.
“너무 오래 기다리시게 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만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겨 결례를 범했습니다. 전화 드렸을 때 너무 편하게 말씀을 해주셔서……?!”
힘찬 악력이 들어간 악수를 끝내며 무심코 벽면을 향하던 사내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이 보였다. 순식간에 핏기를 잃어가는 얼굴과 함께 사내의 입술에서도 언어가 사라졌다. 아마도 눈앞에 선 위의 존재까지 저 멀리로 차버렸을 터이다.
아침에 가져온 캔버스 앞에서 사내는 발에 못이라도 박힌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얼굴은 백짓장처럼 창백해지고, 숨이 가쁜 듯 길고 거친 호흡을 몇 번씩이나 토해냈다. 양옆으로 축 늘어진 두 주먹을 계속 쥐었다 폈다 하더니 땀이 차는지 재킷 앞자락에 초조한 기색으로 열심히 문질러댔다. 마침 콧등과 이마에까지 맺힌 식은땀을 닦기 위해 위로 뻗은 손은 본래의 목적 대신 아우터로 세련되게 커팅 된 사내의 새까만 머리카락 속으로 파고들어갔다. 빗질이라도 하는 것처럼 이마로부터 정수리 쪽으로 정신없이 머리칼을 긁어 올리는 사내의 긴 손가락은 수전증 노파마냥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사내가 받은 충격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일련의 몸짓들이 끊임없이 변화를 되풀이할 동안에도, 당연한 것처럼 사내의 시선은 화폭에 고정된 채로 움직일 줄을 몰랐다. 캔버스에서 캔버스 사이, 몇 분의 간격을 두고 사내가 걸음을 옮길 때를 제외하고는.
사내가 연출하고 있는, 숨 막히는 흥분과 감동의 드라마가 어느 정도 잠잠해질 때까지, 위는 사내의 일거수일투족을 좇으며 차분히 시간을 건네주었다.
2차원의 화폭을 매개로, 사내와 그 사이에 이루어지는 전율적인 교감을 지켜보며, 위로선 난생처음 경험할 기묘한 열패감을 조금도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 될 것이다. 교감은커녕, 자신으로선 전혀 짐작도 못 하는 세계를 생판 남일 이 낯선 사내가 주무르고, 찌르고, 집중해 들어간다는 사실에 일말의 질투심조차도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진지하게 스스로의 기분 상태를 들여다보기도 전에, 아마도 오래전에 잊혔을 풋사랑다운 감정은 이미 모래알처럼 흩어져버렸다.
“……걸작이라거나 졸작이라거나 하는 판단엔 관심이 없습니다.”
아마도 금연 중인 모양으로, 사이드포켓에서 꺼낸 담배 한 개비를 입술에 가져다댄 채 바닥에 쭈그리고 앉는 사내를 향해 위는 비로소 운을 뗐다.
“……제가 알고 싶은 것은, 다만 작가의 의식 상태입니다. 작가에게 그림이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세상에 대고 무얼 말하고 싶어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그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일인가…….”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듯하던 사내의 시선이 비로소 화폭을 떠나 위를 굽어보았다. 캔버스가 걸린 벽면으로부터 5∼6미터쯤 떨어져 앉은 자세라 고개는 생각보다 높이 쳐든 상태가 아니었다. 화폭 간 거리보다 좀 더 멀리 떨어져 있는 위를 향한 만큼, 사내의 고개는 옆으로 비스듬히 기울었을 뿐 시선은 그리 피곤하지 않은 듯했다. 첫인상에서 받았던 카사노바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무섭도록 진지한 수컷의 얼굴이 위를 살피고 있었다.
“……그도 아니면 그저 본능의 행위일 뿐인가……. 먹고, 싸고, 자고 할 수밖에 없듯, 그저 그리지 않으면 살지 못하니까…….”
“…….”
“……가능한 한 작가의 옛 작품들은 물론 최근 것까지 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구해보았습니다. 물론 김 선생님께서 적극 추천하신 걸로 알고 있는 이번 공모전 출품작을 포함해서요.”
“…….”
“여러분들께 듣기로, 김 선생님께선 이 작가에 대해 상당한 관심과 호의를 갖고 계시다고 하더군요. 안목도 높으신 것은 물론이고요. 다른 몇몇 평론가분들께도 조언을 구할 예정이긴 합니다만,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김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싶었습니다. 호의를 지니신 만큼 좀 더 섬세하게 작품 분석을 해주실 것 같아서요.”
“…….”
“……앞서 말씀드린 외에 제가 또 궁금해하는 것은 ‘시간’입니다. 옛 작품과 현재의 것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아니, 정확히 말씀드려서, 작품을 통해 드러나는 작가가 가진 생각의 변화입니다…….”
단단하게 굳은 얼굴로 위를 빤히 굽어볼 뿐 사내는 오래도록 대꾸가 없었다. 사무적인 위의 질문이 되풀이될수록 사내의 무표정한 시선 속에 담긴 냉담한 벽도 점점 더 강하게 느껴졌다.
잔뜩 경계를 드러내는(아니, 실은 공격성마저 느껴지는) 사내의 태도에 대한 의문은 얼마 안 가 곧 풀리게 되었다.
“……당신이 한 짓인가?”
“……?”
여전히 입술 끝에 담배를 매단 채로 사내가 불쑥 내뱉었다. 간신히 억제되고 있었을 사내의 공격성이 손끝까지 선명하게 전해졌다.
“……강간을 하고, 작품을 훔치고……. 꽤 저질이로군, 당신…….”
무례한 의미와 달리 어조는 시니컬하게 들릴 정도로 이성적이었다. 물론 그것이 사내의 조용한 선전 포고라는 것을 같은 싸움꾼인 자신이 못 알아들을 리는 없었다. 새삼 미간을 좁히며 사내의 모든 것에 의식을 집중했다.
공격성이라거나 적의 따윈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다. 위의 관심을 끈 것은 사내의 감정 상태였다. 정확히, 그에 대한 사내의 내밀한 감정.
보통, 영향력 있는 물주를 상대로 일개 미술관의 큐레이터가 감정을 드러내는 일은 상식 이하다. 사내는 얼간이는 아니다. 얼간이가 아니면서 상식 이하의 발톱을 드러낸다는 것은 사적인 감정 이외에 다른 까닭은 없다.
사내의 냉랭한 시선을 붙든 채 위는 꽤 오랫동안 면밀한 주시를 계속했다. 명확한 의도를 지닌 평가의 시선을, 사내는 만만치 않은 발톱을 가진 용맹스러운 수컷답게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맞받아치고 있었다.
“……강간이 아니다. 훔치지도 않았고.”
변명도 아니요, 거짓도 아닌 조용한 선언에 사내의 시선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한순간 머리꼭대기까지 치솟은 사내의 불같은 격정을 위는 읽었다.
“우리는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긴 시간이 사이에 있지. 경솔한 판단으로 그 사람과의 관계를 망치지 마라.”
‘위와 그’가 아닌, ‘사내와 그’를 배려해주는 것은 결코 배부른 자의 위선은 아니었다. 사내가 그에 대해 품고 있을 감정이 어떤 형태의 것이든 위로선 그 모든 것이 중요했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감정이든, 그와 관련된 그 어떤 것이라도, 위는 결코 놓칠 생각이 없었다.
위의 생각을 알 리 없는 사내는 당연한 것처럼 진심으로 격분했다. 차디차게 가라앉아가는 사내의 얼굴을 건너다보며 위는 새삼 쓸 만한 수컷이라고 감탄을 했다.
“그 ‘긴 시간’을 알아낼 때까지 판단은 보류하도록 하지요. 그러나 치료도 하지 않고 내팽개쳐둔 건 어떻게 변명하실 셈입니까? 욕심만 채우고 나면 여자의 몸 따위야 어떻게 돼도 상관이 없다는 주의인가요? 그는 일어나 앉지도 못할 상태였습니다.”
아마도, 위의 내장을 갈기갈기 찢어발길 작정을 단단히 하고 있을 수컷치고는 상냥하다고까지 느껴질 정도로 태연한 대꾸였다.
“……그래야 도망가지 않을 테니까. 자네를 만나고 곧 곁으로 돌아갈 요량이었다. 긴 숨바꼭질은 괴로운 것이다.”
“하! ‘긴 시간’! ‘긴 숨바꼭질’! 그래, 어디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두고 보지, 이사님!”
사내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신랄하게 내쏘았다. 입가를 떠나지 않고 있던 담배는 허리가 부러져 두 동강이 난 채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입구 쪽으로 등을 돌리는 사내의 팔을 무심코 잡아당기자, 당연한 것처럼 주먹이 날아왔다.
악수에서 감지했던 사내의 만만치 않은 악력이 그대로 실린 카운터펀치였다. 눈앞에서 불꽃이 번쩍 하는 충격과 함께, 위의 몸은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나둥그러졌다.
“죄송합니다, 이사님. 요청하신 질문에 대한 제 견해는 기분을 가라앉힌 후에 다시 찾아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이래저래 운수가 사나운 날이라서요. 부디 넉넉한 아량으로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일간 전화 드리겠습니다.”
꽤 강렬한 일격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으로, 예의 바르게 내뱉는 사내의 어조는 시원스러웠다. 위가 얼얼한 아픔을 주는 턱 끝을 어루만지고 있는 사이, 리놀륨 바닥을 묵직하게 흔드는 사내의 발걸음 소리는 차츰 멀어지고 있었다.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 하고 몸을 일으켜 세웠을 무렵엔, 갤러리도 다시금 무덤 같은 고요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기대하던 대답을 듣지는 못했지만 어쩐지 기대 이상의 무언가를 들은 것처럼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견제를 당하고, 비웃음을 듣고, 마침내는 얻어맞았다. 무슨 좋아하는 여자애 하나를 놓고 결투를 벌이는 열여섯 사내아이라도 된 것 같지 않은가.
웃음이 나왔다. 하하, 정말로 그런 사내아이가 될 수만 있다면 당장 혼이라도 팔아치울 것이다! 인생을 몽땅 다 리셋해서 새로운 밑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다시 여자들에게 몸을 팔고, 그를 처음 만나고, 그의 열광적인 숭배와 사랑을 한 몸에 받고, 그리고, 그리고, 또 그리고…….
보자마자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사내가 몸을 떨기 시작했던, 50호짜리 캔버스 위에 이마를 기댄 채, 위는 하염없이 상념을 흘려보냈다. 방향을 잃은 넋은, 그의 몸 안으로 당장이라도 파고 들어가고 싶은 미칠 듯한 욕구와, 손끝 하나 까딱하기 힘들 정도로 지쳐버린 무력감 사이를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인환아…….”
“……인환아…….”
“……인환아…… 불러…….”
“……불러…… 어서…… 어서…….”
“……불러야 가지…… 갈 수가 있지…….”
“……인환아…….”
“……인환…… 아…… 인…….”
아마도 저 멀리 다른 건물에서 들리는 미세한 소음이었을 테지만 막연히 그의 부름이라고 믿어버린다.
가까스로 고개를 들고, 걸음을 옮기고, 재킷을 걸치고, 갤러리의 불을 끈다. 묵직한 쇳덩이가 달린 것 같은 다리를 한 발, 한 발, 숨을 세듯이 세며 복도를 걸어간다. 엘리베이터까지만 가면 기운은 돌아올 것이다. 발목에 매달린 쇳덩이도 벗어 던질 수 있겠지.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열, 열 셋, 열일곱, 여덟, 아홉……. 아, 그래. 도착했다…….
땡 하고 열리는 엘리베이터 문과 함께 온몸을 짓누르던 쇳덩이 같은 족쇄는 다행히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