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2003년 4월. 장인환(張仁歡)
남아 있던 캔버스 몇 개 중 가장 커다란 P80호 크기 하나를 이젤에 걸고 물감을 풀었다.
적색과 청색 중 어떤 것으로 할까 한동안 망설이다가 그저 먼저 눈에 띄었다는 이유로 홀바인 프러시안 블루를 병 속에 풀고 기름과 달걀을 섞어 개었다.
텅 빈 캔버스가 안겨주는 무력감에 저항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재빨리 작업을 개시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몸 상태가 여의치 않았다. 걸음을 옮기는 것도, 그렇다고 의자에 앉는 것도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는 고통이었다. 그나마 서 있는 것이 좀 더 견딜 만했기에, 인환은 이젤의 높이와 기울기를 조절하고 양쪽 손가락에 농담을 달리해서 물감을 묻혔다. 정신이든 육체든 건강 상태가 안 좋을 때는 브러시나 나이프보다 손가락을 쓰는 것이 좀 더 섬세한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자연광에 가까운 백열등이 얼굴 가까이 사방에서 빛을 내쏘고 있어, 열중하는 사이 전신은 땀범벅이 되었다. 물론 단지 열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화폭 위에서 점점 구체화돼가고 있는 형태에 집중하다 보면 자꾸만 몸 상태를 잊어버리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큰 동작으로 몸을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마다 찌르는 듯한 통증이 하반신을 공격했고, 결국 인환은 표피적인 통각과 고도의 집중력 사이에서 만만치 않은 씨름을 벌여야만 했다.
시간을 잊었다. 자신에게 진심으로 손을 내밀어준, 그래서 그림으로의 도피를 다시금 상기시켜준 어느 친절하고 열정적인 큐레이터의 얼굴도 잊혔다. 몇 번이나 전화벨이 울렸지만 받아야 한다는 절박감은 들지 않았다. 머릿속을 관통하는 무아의 이미지를 화폭에 잡아놓는 일에만 기를 쓰고 몰두했다.
어느덧 시간이 만들어낸 효과를 확인하기 위해 뒤로 한 발 물러섰을 때, 온몸은 땀범벅이었고 허벅지 안쪽으로는 축축하고 뜨끈한 액체가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다시 상처가 터진 모양이었다.
새삼 자각된 지독한 통증과, 마무리되지 못한 작업에 대한 초조감 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밖에서 철제 계단을 밟는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올 사람이 없는데……? 하고 멍하니 되뇌고 있는 사이, 현관문이 열리고 장신의 남자 하나가 낮은 문설주를 피해 상체를 약간 앞으로 숙인 채 집 안으로 들어서는 게 보였다. 남자가 입고 있는 싱글 슈트의 짙은 울트라마린이 방금 전까지 몰입돼 있던 프러시안 블루와 뒤섞여, 밤처럼 까맣게 거실 가득 퍼졌다.
현관 안으로 완전히 들어서자마자, 남자는 인환을 향해 정면으로 시선을 보내왔다. 남자의 깊은 시선에 붙들린 순간, 작업을 할 때 빠져들었던 황홀한 몰입 상태가 거짓말처럼 사라지며 지옥 같은 현실이 단숨에 다가들었다. 그였다.
순식간에 힘이 풀려버리는 다리를 어쩌지도 못한 채 인환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다이렉트로 전달되는 하반신의 충격을 견디지 못해 끙끙거리는 신음이 절로 터졌다. 어질어질한 열기가 전신을 삼켜버리는 것만 같다.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며, 인환은 시퍼런 물감이 피처럼 뚝뚝 듣는 양손으로 바닥을 짚고 엎드린 채 가까스로 고통을 삭였다.
물소리가 들렸다. 주방 개수대의 수도는 밤이 되면 수압이 더 세지기 때문에 마치 폭포수 소리처럼 귀가 시리다.
“……그림은 몸이 회복된 후에 그리세요. 시간은 얼마든지 드릴 테니까.”
어느새 다가왔는지, 그가 바로 앞에 쭈그리고 앉으며 정중한 일침을 던진다.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차디찬 목소리에 문득 소름이 끼친다. 차마 눈을 마주 볼 수가 없어 여전히 바닥에 시선을 준 채 벌벌 떨기만 했다.
한동안 인환의 정수리로 따끔따끔한 시선을 보내던 그가 인환의 양손을 끌어당기더니 물수건으로 차례차례 닦아주기 시작했다. 꼼꼼한 손질 끝에, 손톱 안쪽까지 파고든 물감을 제외하곤 양손은 어느덧 유용한 화필의 역할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푸른 얼룩투성이가 된 수건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곧 바지 앞섶으로 손을 뻗는 그에게 기겁해서 몸을 움츠리자, 조용하지만 단호한 명령이 칼처럼 던져졌다.
“아래를 좀 보겠습니다. 피가 묻어나는 것을 보니 상처가 터졌나 봅니다.”
설령 본능적으로 그를 거부하는 몸짓을 한다고는 해도, 절대로, 그가 어떤 행동을 취하든 반항을 할 생각 따윈 없다. 다짐하듯 부지런히 고개를 끄덕이며 인환은 무시무시한 심판관에게 자신의 충성스러운 노예 근성을 알렸다.
긴장으로 막대기처럼 뻣뻣해진 인환의 몸을 엎드리게 한 그가 바지와 속옷을 무릎까지 내리고는 엉덩이 사이를 살폈다.
치부 사이로 다가와 있는 그의 얼굴에 다시 한 번 소름이 끼치며 몸이 떨려왔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병원 다녀오셨지요? 처방받은 약은 어디 있습니까?”
큐레이터가 복용법을 설명해주며 어딘가에 놔둔 것 같은데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머릿속이 그저 백지가 된 것마냥 아득하다.
“……몰라…….”
제대로 기억을 해내지 못한다고 그가 화를 낼까 두렵다. 인환의 양쪽 치골을 쥐고 있던 그의 손이 떨어져나가더니 잠시 후 다시 물소리가 들린다. 그가 몸을 움직이라고는 하지 않았기에, 엉덩이를 반쯤 하늘을 향해 쳐든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조금씩 몸을 떨며 기다렸다. 다행히 오래지 않아 사타구니와 허벅지 사이로 차가운 물수건의 감촉이 전해졌다. 이어 연고를 듬뿍 묻힌 그의 손가락 두 개가 입구에 닿아왔고 인환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고통스러운 접촉을 견뎠다. 몹시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손길이었지만 찢어진 입구는 물론이고 안쪽 깊은 내벽에까지 파고든 손가락은 공포 그 자체였다. 단지 표피적인 통증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눈물 두 줄기가 눈꼬리를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다. 그가 치료를 마치고 화장실로 가 손을 씻을 동안에도 인환은 개처럼 엎드린 자세 그대로 멍하니 기계적인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식사합시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들지 않았죠?”
어느새 다가온 그가 옷을 다시 입혀주며 조용한 물음을 던졌다. 뭐든지 다 알고 있다는 듯 단정적인 말투였지만 오만한 위압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양쪽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넣어 상반신을 일으킨 후 가볍게 안아 올리더니 거실 한가운데로 인환을 데려갔다. 그나마 잡동사니의 침입을 덜 받고 있는 테이블 옆이었다.
“……의자에 앉는 것보다는 바닥이 편할 겁니다.”
조심스럽게 인환을 바닥에 내려놓곤 현관 쪽으로 가더니 바닥에 놓여 있던 쇼핑백 두 개를 가져왔다. 도시락이었다. 인환의 맞은편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포장을 풀고 동봉돼 있던 나무젓가락을 꺼내 인환의 손에 쥐여주었다.
“드세요.”
“…….”
“드세요.”
“…….”
“……억지로라도 드세요. 빨리 먹고 출발합시다.”
“……?”
“그림 도구들은 사람들 시켜서 천천히 옮길 테니까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나머지 잡동사니야 두고 가도 상관은 없겠죠.”
“……어…… 디로 가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한 담담한 어조에 노예 근성이 잠시 주제도 모르고 고장을 일으킨다.
“우리 집.”
우리…… 집……?
우물우물 기계적으로 음식을 씹어 삼키는 그 역시 식욕은 없어 보였다. 칼처럼 냉정한 눈초리로 가끔씩 인환을 응시하며 식사를 재촉할 때를 제외하면,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하는 것처럼 방 한쪽 구석에 시선을 준 채 그는 묵묵히 의무적인 식사를 계속하고 있었다.
우리 집이라니 무슨 우리 집……? 하고 반문을 한다거나, 내가 왜 가야 돼, 혹은, 가고 싶지 않아 라는 거부의 말을 시험 삼아 던져본다는 것도 차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어차피 해석이 불가능한 사형 집행인이었다. 그저 집행인이 하라면 하라는 대로, 가라면 가라는 대로 따르는 것이 더럽고 추악한 죄인이 할 도리였다. 언젠가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처벌이 이루어져 마침내 사형 집행인의 자비로운 용서가 떨어질 때까지는.
“그만 울고 먹어, 어서!”
멍하니 넋을 놓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자니, 소름이 끼칠 정도의 냉랭한 호통과 함께 다시금 그의 무시무시한 주시가 쏟아졌다. 기겁을 해서 부지런히 젓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눈물은 계속 흘러내렸지만 목이 메진 않았다. 자기연민이나 설움을 느낀다는 것은 그야말로 뻔뻔스러운 작태가 아닐 수 없다. 어디 감히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릴 수가 있단 말인가. 그야말로 포식한 악어 새끼의 눈물과 무엇이 다른가 말이다.
그러니 울지는 않는다. 않을 거다. 다만 이것은 그저 생리적인 반응일 따름이다. 그저 불가사의한 사형 집행인에 대한 공포와, 다시금 처절하게 자각된 과거에 대한 회한이, 그만 악어 새끼의 중추 신경을 자극하고 만 거다.
아마도 호텔에서 사 왔음직한 최고급 도시락의 맛은 먼 옛날의 기억을 떠올릴 만큼 솜씨가 좋았던 것 같다. 담백한 일식이나 프랑스 요리를 주로 편식하던 인환의 입맛을 기억하고 있을 리도 없거니와 설령 기억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특별히 자신의 입맛에 맞춰 음식을 사 왔을 것 같지도 않았지만, 인환은 우습게도 10년도 더 전, 자신의 성북동 아틀리에에서 그와 격렬한 섹스를 나눈 뒤에 함께 먹곤 하던 단골 일식집 도시락 맛을 떠올리고 있었다. 가슴 시린 데자뷔가 아닐 수 없었다.
“……더 드세요.”
채 반도 비워지지 않은 도시락을 힐끗 굽어보며, 그가 젓가락을 내려놓는 인환을 향해 명령한다. 그의 도시락은 이미 말끔히 비워져 있었다.
“……많이 먹었는데…….”
“좀 더 먹어!”
“…….”
다시금 무시무시해지는 어투가 아려, 마지못해 젓가락을 집어 들고 좀 더 먹자 그의 강압적인 눈길이 비로소 거두어졌다.
“약 드세요.”
남은 음식과 포장지들을 치운 뒤, 약봉지와 물 컵을 내밀며 그가 명령했다. 얌전히 복종했다.
“팔, 내 목에 감아요.”
약까지 먹고 나자 역시 고통스러운 신음을 삼키는 인환의 몸을 가차 없이 안아 든 그가 재차 명령했다.
명령이 아니라도,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하반신에서 쓰라린 아픔이 올라왔기에, 인환은 본능적으로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매달렸다. 인환을 안아 든 채 집 안의 불을 끄고 현관문까지 꼼꼼히 잠그기를(집 현관 열쇠는 놀랍게도 그의 바지 주머니에서 나왔다!) 마친 그는,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와 집에서 세 블록쯤 떨어진 유료 주차장 쪽으로 걸어갔다. 12시가 가까워오는 늦은 시각이라 인적은 드물었지만 가끔씩 마주치는 사람들은 어김없이 그를 힐끔거리며 지나갔다. 그냥도 뭇 시선을 끄는 그인데다 멀쩡한 중년 남자를 안고 가니 기괴하게 비치기도 했을 것이다.
“……어?! 아저씨……?! 인환이 아저씨! 아저씨!!!”
막 곁을 스치고 지나간 오토바이에서 낯익은 부름이 들려왔다. 멍해진 의식의 틈을 비집고 들어선 또 다른 현실에, 인환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빼고 그의 어깨 너머, 150cc가 겨우 넘을 싸구려 오토바이 한 대로 시선을 보냈다. 재식이가 뒤에 여자친구인 주영이를 태운 채로 시끄러운 엔진음을 뿜어내며 방향을 틀고 있었다. 아마도 무단 결근을 해버린 자신의 집을 찾아가던 중이었으리라.
“……재식아…….”
나지막한 인환의 부름에 다행히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지만 그는 인환의 몸을 내려주지는 않았다. 결국 그에게 안긴 채 어정쩡하게 몸을 튼 자세로 손짓을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집에 가는 길이었니?”
“……어…… 아…… 예에…….”
의외의 상황에 재식이는 조금 말문이 막힌 모양이었다. 멍하니 입을 벌린 채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와 인환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하구나. 걱정했지? 사장님 화 많이 나셨니?”
“……어…… 예에…….”
“에…… 얼굴이 난장이에요……! 지랄, 어느 새끼가 그렇게 조졌대요?! 많이 다치셨어요, 아저씨?!”
재식의 뒤에서 빼꼼 얼굴을 내민 주영이가 대신 끼어들었다. 휘둥그레진 눈은 주영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근깨투성이에 통통하게 살집이 있는 열일곱 살짜리 가출 소녀는 재식이와 마찬가지로 미인은 아니었지만 붙임성 있는 순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허벅지가 거의 다 드러나는 아슬아슬한 데님의 미니스커트도, 풍만한 유방에 딱 달라붙어 있는 요란한 핑크색 톱과 니트도, 언제나처럼 한결같이 조악한 모양새라 인환의 가슴을 아리게 한다.
“아, 그냥 조금……. 주영이 오랜만이네? 살 좀 빠진 거 같다?”
“헤헤, 그래 보여요? 다이어트 했걸랑요. 3킬로 뺐어요.”
“야아, 3킬로나?”
“아우, 죽는 줄 알았어요, 밥 먹고 싶어서!”
“……다치신 거면 연락이라도 해주셔야죠. 전화도 하루 종일 안 되고…… 걱정했다구요.”
비로소 정신을 수습했는지, 물끄러미 자신들을 굽어보는 그의 눈치를 슬슬 살피며 재식이가 볼멘소리를 한다.
“……대박 났으니까 벌써부터 맘이 콩밭에 가 있는 거라고, 사장님이 오늘 진종일 구시렁거렸단 말예요. 하필이면 손님은 또 어찌나 많은지 이제야 보내주더라구요.”
“……그랬어?”
“그럼요, 사장님 쪼잔한 거 아시잖아요. 아저씨 편들어주느라고 얼마나 진땀났는데요……. 근데 정말 괜찮으신 거예요? 누구랑 싸웠어요?”
“어, 그냥 조금……. 아무튼 미안하구나. 내일은 꼭 나갈 테니까…….”
“그만두신다고 대신 전해주시겠습니까? 장 선생님은 사정이 생겨서 더 이상 출근하실 수 없다고요.”
느닷없는 고요한 선언에 인환은 물론 순박한 커플들의 눈이 더더욱 휘둥그레졌다.
“보시다시피 장 선생님의 건강이 무척 안 좋으십니다. 전해주실 줄 믿고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위…… 위야……!”
더 이상의 대화는 불가능했다. 거침없이 돌아선 그는, 얼이 빠진 듯 할 말을 잃고 있는 재식 커플에게는 아랑곳 않고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안타까운 나머지 이리저리 몸을 비틀어보지만 인환을 안아 든 그의 팔은 완강하기만 했다.
“……여…… 연락할게, 재식아! 사장님 찾아뵙고 말씀드린다고 꼭 전해주렴!”
어쩔 수 없이 목을 길게 빼고 점점 멀어져가는 아이들을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
“아…… 아저씨……?”
“……그만두는 거 아니야! 절대 아니니까……!”
“……어디 가시는데요? 내일은 집에 계세요……?”
“……전화할 테니까……!”
“사장님한텐 뭐라고 얘기해요?! 예?……! 아저씨……!”
“…….”
갑자기 목이 메어온다. 그에게 뭐라 반박도 못 하고 기가 죽어 서 있는 아이들을 보며, 인환은 기묘한 비애감에 채 말을 맺지도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절박하게 그의 말을 정정했지만, 다시금 평온하고 고요한 옛 일터로 되돌아올 수 있을지는 조금도 확신할 수가 없다.
셋방을 옮기고 너그러운 사장님과 착하고 우직한 재식이와 함께 언제까지고 부지런히 몸살 난 차들을 고치리라는 소박한 계획이 그의 거침없는 걸음걸이를 따라 단숨에 부서지고 있었다.
기가 막혔다. 지난 몇 년 동안 그렇게 기를 쓰고 불러들였던 평화가 너무나 간단하게 쑥대밭처럼 유린되고 있었다.
막힘없이 빠지는 올림픽도로를 타고 20여 분쯤을 이동한 것 같았다.
뒷좌석에 거의 파묻히다시피 몸을 누이고 온 터라 방향 감각 따윈 조금도 알 수가 없었다. 마침내 차가 멈추고, 그가 차 문을 열곤 다시금 몸을 안아 들었을 때에야, 인환은 어딘가 낯익은 골목 풍경을 발견하고 아득한 데자뷔를 일으켰다. 가슴이 떨렸다. 목구멍으로 묵직한 응어리 하나가 치밀고 올라오는 것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고풍스러운 주택가였다.
새롭게 개축된 신형 빌라들이 골목의 양쪽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지만, 두서너 채 남아 있는 옛 모양새의 집들만으로도 기억의 갈피를 펼치기엔 무리가 없었다.
연. 희. 동. 이었다!
“……다시 찾았구나…….”
멍하니 중얼거리는 인환을 힐끗 내려다보았을 뿐, 그는 짙은 암청색 페인트가 칠해진 육중한 철문을 향해 서둘러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빈손의 그가 뛰어넘기엔 도무지 거대하고 단단하게만 느껴지던 잿빛 화강암 담장이 철문을 따라 양쪽으로 길게 늘어서 있는 게 보였다. 높디높은 담장 너머 신기루처럼 보일 듯 말 듯 삐죽 솟아 있는 회색 박공지붕은, 인환의 판단이 절대로 틀리지 않았음을 여실히 증거해주고 있었다. 말없이 사라진 그를 찾으러, 가슴을 졸인 채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찾아온 곳이었다. 막다른 절벽마냥 어둑어둑한 담장 아래, 길 잃은 아이처럼 쭈그리고 앉아 하염없이 어딘가를 노려보던 그 황량한 눈길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틀림없이, 죽음을 맞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인환은 이 집을 결코 잊을 수 없을 터였다.
그가 열쇠를 밀어 넣어 돌리자. 굳건하게 버티고 서 있던 요지부동의 철문이 철컹 하는 울음소리를 내며 활짝 열어젖혀졌다.
―되찾을 겁니다, 반드시…….
피를 토하듯 절절하게 되풀이되는 계약의 맹세가 귓전을 두드리고 있었다. 넋을 잡아 찢는 것만 같은 생생한 데자뷔였다.
―언젠가 이 집을 되찾게 되는 날엔 더 이상 쓰레기들에게 밟히는 일도 없겠죠…….
꽁꽁 감춰졌던 깊은 상처를 마침내 온몸으로 드러내며, 지나치게 조숙한 사내아이는 이를 갈고 있었다.
세상에 대한 맹렬한 복수심을 차마 다 가누지 못해, 눈시울은 불처럼 이글거리고, 얼굴은 밀랍처럼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아무도 막지 못해요…… 못 하게 할 겁니다, 누구도…….
―이 집을 되찾게만 되면 더 이상…… 더 이상 아무도 날 짓밟게 두지 않아…….
피가 뚝뚝 떨어지는 맹세는, 마치 악마와 계약을 맺는 사제의 그것처럼 비정하고 처절하기 그지없었다…….
15년 만에 간신히 들어와볼 수 있었던 한 서린 집의 내부는, 그러나, 웃음이 나올 정도로 아늑하고 소박한 모양새의 2층 박공집이었다. 그의 부모가 세세한 부분까지 직접 디자인하고 설계에도 참여했다는 사랑의 집.
어림잡아 250평 남짓할 대지엔 전부 잔디가 깔렸고, 소나무와 전나무 몇 그루,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몇몇 유실수가 심어진 이외엔 이렇다 할 조경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대문에서부터 현관까지 거무스름한 현무암 징검돌이 아기자기하게 깔려 있는 것도 그저 소박하기만 했다. 1층 테라스 아래, 옹기종기 박힌 새하얀 나무 울타리 너머 화단의 흔적으로 보이는 빈 공터만은, 여름에 꽃이 만발하기만 한다면 단조로운 정원에 화사한 생기를 부여해줄 것도 같았다.
주변 정원보다 1.5미터쯤 높게 쌓아올린 현무암 석축 위로 아늑하게 들어서 있는 박공집은, 하얗게 빛나고 있는 외벽과 달리 창문이란 창문은 모두 불이 꺼진 채 묵직한 어둠에 싸여 있었다. 달리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면 자신을 여기 데려올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가 그렇게나 되찾기 위해 기를 쓰던 영원한 스위트 홈에 그 혼자라는 사실도 좀처럼 믿어지지가 않는다.
아마도 이미 결혼을 했으리라고, 자신이 그토록 흙탕물 범벅으로 휘저어놓았을지언정, 그라면 저 지독하고 견고한 의지력으로 어떻게든 그녀를 다독여 결혼을 성사시켰을 거라고 막연히 추측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혹은 그녀의 아이는? 그녀는 다시금 그의 아이를 갖지 않았을까? 부디 그래야 할 텐데……. 자신에게 속한 핏줄에 대해서만은 강렬한 집착과 사랑을 베풀어주는 그다. 그든 그녀든, 그대로 닮았다면 정말로 예쁘고 사랑스러운 용모의 아이들일 터…… 모두가 부러워하는 단란한 가정을 꾸렸을 테지, 틀림없이……. 아, 그래, 동생들도 있구나, 참. 그들은 또 어떻게 됐을까? 자신보다도 더 끔찍이 동생들을 아끼는 그니까 설령 결혼을 했더라도 따로 살고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더구나 혜윤이라면…….
불현듯 치밀어 오르는 고통스러운 상념에, 인환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세차게 도리질을 했다.
―하느님, 생각하기 싫어……! 생각하고 싶지 않아!!!
동요하는 인환을 문득 지그시 내려다보는 그의 눈길엔 여전히 그 어떤 감정의 징후도 없다. 가슴을 찌르는 고통스러운 죄의식에 차마 마주 보지도 못하고서 초조하게 입술만을 깨무는 자신이 있었다.
인환을 안은 채로, 아마도 지문 인식으로 열리는 듯싶은 현관문을 간단히 열고 그가 집 안으로 들어섰다.
자동 센서가 설치되어 있었는지, 두 사람이 들어가자마자 현관이며 거실로 환하게 불이 들어온다. 남쪽 벽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는 아치형의 창문은 물론, 벽난로가 있는 서쪽 벽에 길게 터놓은 두 개의 격자무늬 창문에도 커튼은 달려 있지 않았다. 흰색 페인트칠이 된 벽면이며, 원목색 그대로인 2층으로 난 계단과 천장이며, 한결같이 너무나 청결해서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커튼이 없다는 것도 그랬지만, 거실 한가운데에 마지못해 놓아둔 듯한 적갈색의 마호가니 소파와 응접 테이블 이외엔 가구라곤 찾아볼 수가 없는 거실 풍경만 해도,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점에선 다르지 않았다. 마치 부자연스럽고 서늘한 인테리어 잡지 한 페이지를 그대로 카피해 온 듯한 느낌…….
인환을 잠시 바닥에 내려놓은 후 현관문을 꼼꼼히 잠근 그가 다시 인환을 안고 들어간 곳은 거실 오른쪽에 면한 주 침실이었다.
들어서자마자 켜지는 뽀얀 불빛에 의해 드러난 침실 풍경 역시 거실과 한가지. 테라스가 건너다보이는 창문 아래 놓인 퀸사이즈 침대 하나와 한쪽 벽면을 몽땅 다 차지하고 있는 붙박이장 외엔 달리 가구라곤 없는, 삭막한 기운이 돌 정도로 텅 빈 공간이었다.
집 안 풍경을 통해 조금이라도 그의 생각을 읽어보려던 인환의 막연한 의식은, 그러나 인환을 침대에 내려놓자마자 너무나 자연스러운 태도로 옷을 벗기기 시작하는 그에 의해 박살이 나고 말았다. 양팔이 들린 채 끌려 올라가는 스웨터를 자각했을 무렵엔 낡은 잿빛 울 스웨터는 이미 침대 발치에 떨어지고 난 후였다.
애초부터 기계처럼 그의 명령을 따르던 몸이었다.
새삼 기겁을 해서 몸을 떨기 시작했다고 한들 이렇다 할 저항이 있을 까닭은 없었다. 침대에 밀어 눕혀졌을 때에도, 바지가 끄집어 내려지고 이어 양말과 팬티마저 벗겨져 순식간에 알몸이 되었을 때에도, 그저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며 눈을 질끈 감았을 뿐이었다.
감은 눈 너머로, 옷을 벗고 있는 그의 동작이 손에 잡힐 듯 전해져왔다. 그다지 서두르는 기색도, 그렇다고 느릿느릿한 기색도 아니었다. 재킷과 넥타이, 셔츠와 팬츠들이 차례로 바닥에 떨어졌다. 양말과 팬티까지 바닥에 던진 후, 인환과 마찬가지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 나무토막처럼 굳어진 인환의 몸 위로 천천히 자신을 겹쳐왔다. 코끝으로 확 다가드는 땀과 샤워 코롱 냄새가 아릿하게 뒤섞인 그의 체취에선 어젯밤처럼 여자의 향수 냄새는 조금도 맡아지지 않았다.
압도적인 체중이 양쪽 다리와 아랫배, 그리고 가슴을 지그시 누르며 압박해 들어왔다. 사타구니 사이에 이미 터질 것처럼 발기해 있는 그의 섹스가 허벅지 안쪽을 쿡쿡 찌르고 있었다. 맞닿은 피부들이 마치 불에 데기라도 한 것마냥 뜨겁게 느껴졌다.
“……눈 떠.”
“…….”
“눈 떠!”
부르르 진저리를 치며 마지못해 눈을 뜬다. 짐작대로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아름다운 얼굴이 조용히 자신을 굽어보고 있었다. 양팔로 인환의 상반신을 덮치듯 안은 채 고개만을 치켜든 불안정한 자세였음에도 숨 막히는 주시는 꽤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삽입하진 않을 테니까 그만 떨어.”
담담한 선언이 거짓은 아닐 것이다. 다만, 패닉에 빠진 육체가 단지 하반신의 통증 때문만이 아니듯, 아무리 그의 명령을 따르고 싶어도 부들거리는 몸은 좀처럼 진정이 되질 않았다. 숨넘어갈 듯이 빠르게 팔딱거리는 심장 역시 외부와 연결된 자동 모터라도 달린 것만 같다.
한동안 인환이 진정되기를 기다렸음직한 발기한 남자가 이윽고 체념한 듯 입술을 내린다.
오랜 키스는 몹시도 격렬하고 깊었다. 입안 구석구석을 한 치의 틈도 남김없이 그의 혀가 핥고 지나간다. 얼얼한 아픔이 느껴질 만큼 혀가 강렬하게 깨물리고 빨렸다. 몇 번이나 잇몸이 더듬어지고 이가 핥아졌다. 숨이 턱에 차오를 때면, 탐욕스러운 입은 마지못해 조금 간격을 두며 입술 바깥쪽을 빨아들였다. 마음껏 쭉쭉 빨고 빨리는, 음란하고 축축한 신음 소리가 퍼지면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타액이 홍수처럼 서로의 얼굴을 적시며 사방으로 흘러내렸다.
위에서 입술이 욕심껏 제 갈 길을 가는 동안, 크고 마디가 있는 아름다운 두 손은 위쪽과 보조를 맞추기라도 하듯 탐욕스레 아래를 더듬고 돌아다녔다. 등줄기를 쓸고, 옆구리 갈비뼈를 악기처럼 섬세하게 어루만지고, 엉덩이 둔덕으로 파고들어 수치도 모른 채 주물럭거렸다. 살점이 삐죽삐죽 손가락 사이로 비어져 나올 만큼 힘을 주다가는, 깃털처럼 부드럽게 쓸어대기도 했다.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다 질리면 가운데, 검고 가는 음모가 숲을 이루고 있는 둔덕으로 파고들어 아픔이 느껴질 정도로 쥐어뜯었다. 좀 더 아래로 내려가, 축 늘어진 음경과 고환을 한 손 가득 움켜쥔 채, 불에 덴 것처럼 뜨겁고 쓰라린 나머지 훌쩍이며 애원의 울음을 흘릴 때까지 사정없이 주무르고 비벼댔다. 허벅지 안쪽을 딱딱하게 찌르던 그것이 마침내 한계에 다다라 인환의 아랫배를 짓누른 채 미친 듯이 왕복 운동을 시작할 때까지, 음란하고 격렬한 접촉은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흐으윽…… 윽…… 큭…….”
짐승의 신음 소리가 온통 벌겋게 달아오른 채 비 오듯 땀을 쏟아내고 있는 남자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아랫배를 태울 듯이 영원처럼 비벼지던 그것이 극점에 도달했는지 뱀처럼 꿈틀거리며 요동을 치고 있었다. 침대 시트를 죽어라 하고 움켜쥐고 있던 인환의 한 손을 흥분한 남자의 미친 듯한 손길이 끌어당겼다.
“으으…… 우앗……! 악……! 흐아아아악!”
사타구니 사이, 몸서리치고 있는 자신의 분신을 감싸 쥐게 한 남자는 소리소리 짐승 같은 비명을 내지르며 오르가슴을 맞고 있었다. 인환의 손등 위로 겹쳐진 그의 손에 억센 힘이 가해지자, 꿈틀대는 검붉은 생명체가 손바닥 가득 뜨겁게 감겨들었다. 거대한 남자의 음경이 뇌수 깊이 파고드는 것만 같은 까마득한 어지럼증을 느끼는 순간, 뜨거운 액체가 뭉클뭉클 터지며 손바닥을 가득 적셨다. 인환의 상반신을 껴안고 있던 남자의 손에 거센 악력이 들어가며 인환의 몸은 남자의 몸에 빈틈없이 달라붙은 채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사정의 여운은 꽤 오래 지속됐던 것 같다. 남자의 품에 얼굴이 통째로 틀어박혀 숨도 제대로 쉬기 힘든 나머지, 가쁜 호흡을 내뱉을 무렵이 돼서야 남자는 비로소 조금씩 포옹을 풀며 인환의 얼굴 곳곳에 정신없이 입술을 눌러대고 있었다. 길고 격렬하게 계속되던 남자의 몸부림이 차츰 잦아드는 것이 느껴졌다. 거의 뜯어먹을 것처럼 반사적으로 빠르게 짓눌러오던 키스도 점차 완만한 호흡으로 느려졌다.
머리가 뜨거웠다. 먹먹한 둔통마저 느껴졌다.
남자의 육중하고 압도적인 체중에 짓눌린 채, 멍하니 천장을 굽어본다. 원목색 옹이가 들어간 루바로 마감된 노르스름한 천장 가운데, 뿌옇게 퍼지고 있는 할로겐 불빛이 아프게 눈을 찌른다. 줄곧 입안을 빨고 있던 남자의 입술이 인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눈꺼풀 위로 올라와 한참을 빨고 핥았다. 축축하고 뜨거운 타액은 이어 코끝으로, 다시 뺨으로, 나머지 이마와 턱 언저리까지 빠짐없이 흔적을 남기며 차츰차츰 아래로 미끄러졌다. 목덜미와 쇄골 뼈와 가슴팍에도 한결같았다. 손가락에서부터 다시 시작된 애무는 자해의 흉터로 가득한 손목과 겨드랑이 안쪽, 옆구리를 거쳐 젖꼭지를 택해 좀 더 오래 머물렀다. 도드라져 그의 입안 가득 밀려들어간 표면이 쓰리고 아팠다. 인정사정 안 봐주고 욕심껏 깨물리고 빨린 때문이었다. 다시 아랫배로, 허벅지로, 마침내 생식기까지 내려간 굶주린 입은 젖꼭지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시간과 끈기를 투자해 마음껏 스스로의 욕망을 채웠다.
축 늘어진 채 요지부동인 거무죽죽한 물건이 그렇게 맛이 있을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오럴이라니, 노골적인 혐오감을 감추지도 않은 채 고개를 내젓기만 하던 어린 그였었다. 감히 자신을 애무해주는 따위 꿈도 꾼 적이 없다. 조마조마해서 눈치를 살피며 그를 빨기를 부탁하는 것만도, 그래서 마지못해 허락이 떨어지면, 황송한 나머지 눈물이 글썽해서는 마치 성전처럼 경건하게 그의 성기를 입안에 품는 것이 고작이었었다.
이해할 수가 없다. 그야, 어차피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고 하지만, 그래도, 아스라한 기억의 파편들과 거센 충돌을 일으키는 현재가 정신 착란을 일으킬 것처럼 혼란스러운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영원 같은 혼돈의 시간 끝에, 앞을 다 먹어치운 그가 이번엔 몸을 돌려 눕히더니 뒤를 먹기 시작한다. 발가락과 발가락 사이, 뒤꿈치와 종아리를 거쳐 무릎 안쪽에 차례로 닿아오는 혀의 감촉이 간지러운 나머지 허리를 활처럼 휘며 몸서리를 친다. 얄팍한 허벅지 근육과 엉덩이 굴곡 위로 가차 없이 씹어대는 치아의 감촉이 아팠다. 도드라진 등뼈가 문질러지고, 툭 튀어나온 견갑골이 그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뜨겁고 씩씩대는 가쁜 호흡이 목덜미를 태울 듯 집어삼켰다. 어느새 다시 일어선 그의 거대한 음경이 엉덩이 굴곡 틈으로 밀려든 바람에 인환은 본능적으로 몸을 굳히며 이를 악물었다. 다행히 삽입하지 않겠다는 약속은 지킬 모양인지, 인환의 등에 몸을 꼭 붙인 그는 인환의 엉덩이 사이, 갈라진 틈에 사타구니를 밀어붙인 자세로 맹렬하게 비벼댈 뿐 더 이상의 진행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상처가 꽤 심한 터라 단지 과격한 흔들림만으로도 쿡쿡 찌르는 통증이 척추 끝을 타고 전신으로 퍼졌다.
억눌린 신음 소리를 통해 참기 힘든 고통을 어느 정도 감지한 듯, 그가 다시금 인환의 몸을 정면으로 돌려 눕혔다. 아마도 대부분은 그의 것임에 분명할 땀과 침과 정액 덩어리인 몸 위로 다급하게 자신의 체중을 실은 것은 물론이었다. 집요하고도 변태적인 키스와 애무와 접촉이 다시 한 번 되풀이된 후, 두 번째 사정이 이루어지기까지는 그로부터 채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인환의 전 존재를 먹어치우기라도 할 듯이 억세게 죄어 안은 채, 그는 길게, 길게 울부짖으며 죽음 같은 오르가슴을 토해냈다.
아마도 별다른 변화 없이 반복적으로 되풀이되는 그의 자위행위가 그럭저럭 그에 대한 두려움을 완화시켜준 때문이었을 것이다. 거의 날이 밝을 무렵까지 지치지도 않고 계속된 그의 광기 어린 추행에도 불구하고, 인환의 정신은 점점 더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나중에는 인환의 얼굴에 성기를 밀어붙인 채 거꾸로 엎드려 굶주린 듯이 인환의 것을 빠는 그의 격정에도 아랑곳없이 꾸벅꾸벅 졸기까지 한 인환이었다. 입안을 가득 채운 거대한 음경이 거칠게 피스톤질을 하는 통에 구역질을 일으키며 깨어나고, 빠져나간 그것이 뺨과 코언저리를 맹렬하게 문지르는 아릿한 감각과 함께 까마득한 졸음에 추락하기를 시계추처럼 반복했다. 축축하고 뜨뜻한 애액이 얼굴 가득 뿌려지는 것을 어렴풋이 자각하며 다시 깨어나고, 머리 꼭대기부터 발끝까지 지칠 줄 모르고 되풀이되는 지루한 애무에 겨운 채 다시 잠에 빠졌다.
도무지 몇 번인지 헤아리는 것조차 잊어버린 그의 짐승스러운 절정의 포효가 아득하게 멀어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폭군처럼 달려드는 수마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의식을 놓아버릴 무렵, 창 밖은 이미 푸르스름한 여명으로 가득 차 있었다.
혹시 의외로 너그러운 심판관인 것은 아닐까, 가물가물 멀어져가는 의식의 끄트머리에서 인환은 막연히 기대하고 있었다. 단지 이렇게 더러운 걸레처럼 자신의 몸을 욕망의 배출구로 사용하는 것으로 그의 용서가 떨어질 수 있다면 하고.
그야, 언제부터 그가 취향을 바꿔 남자를 탐하게 된 것인지는 몹시 괴이쩍고 으스스한 일이긴 하다. 허나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차피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더럽혀진 죄인의 몸이다. 쓰레기를 쓰레기 취급한다고 해서 딱히 억울해할 일도, 패닉에 빠질 일도 아니었다. 패닉은커녕, 저 대단하고 대단한 자신의 옛 영웅이 뒷걸레로라도 자신의 몸을 사용해준다니 되레 감지덕지할 일이 아닌가 말이다. 자신은 조금이나마 죄의식을 덜어서 좋고, 그로서도 그럭저럭 자신을 짐승 취급하는 것으로 복수심을 충족시켜서 좋고, 그야말로 일거양득이 아니겠냐는 말이지.
어쩐지 만족스러운 100호짜리 작업을 끝내기라도 한 것마냥 노곤한 뿌듯함이 전신으로 퍼지고 있었다.
저 깊숙한 영혼의 한 모퉁이, 비참하게 떨고 서 있는 무언가에 대해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눈꼬리를 타고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는 쓰라린 눈물의 의미 따위 모르면 그만이었다.
“……훅…… 윽……! 크윽……! 우으…… 우아아악!”
복수심에 불타는 무시무시한 심판관의 포효가 아득히 멀어지고 있었다.
참기 힘든 수마 속으로 마지못해 침몰해 들어가는 인환의 입술 끝은 조금 웃고 있었다.
설핏 찬바람이 드는 피부에 문득 몸서리를 치며 눈을 떴다.
옹이가 들어간 천장 루바의 노르스름한 원목 빛깔이 부드럽게 시야를 메워왔다. 낯설기만 한 방 안 풍경에 잔뜩 미간을 좁히며 어리둥절해진 눈을 이리저리 굴려보았다. 새하얀 페인트칠이 되어 있는 청결하고 살풍경한 방 안 한구석, 벌거벗은 장신의 남자가 우두커니 서 있는 게 보였다. 눈이 시릴 정도로 가득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 한낮의 햇살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는 남자는 인환 쪽으로 등을 돌린 채 멍하니 창 밖을 굽어보고 있었다.
인환을 깨운 찬 기운은 활짝 열린 아치형 창문 밖에서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4월이라곤 해도 맨살에 직접 닿는 바람은 얼음처럼 차게 느껴졌다. 허리께로 내려가 있던 시트와 담요를 본능적으로 가슴까지 끌어올려 덮었다. 기척을 느꼈는지 남자가 문득 돌아본다.
금방이라도 쓰러져버릴 것 같은 참담한 표정이 마치 꿈처럼 순식간에 사라지며, 남자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가면 같은 무표정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깊은 음영이 드리운 커다란 눈시울이 멍하니 인환의 시선을 빨아들인다. 눈동자는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검고 맑았다. 선이 굵은 뚜렷한 이목구비가 문득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근육으로 뭉친 늠름한 몸도, 햇빛을 받아 투명하게 떠오르는 황금빛 피부도, 마치 신기루처럼 서럽게 아름답다고.
블랙홀처럼 빨아들인 인환의 시선을 꽤 오래도록 움켜쥐고 있던 남자가 신음 같은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다가오는 게 보였다.
얼음처럼 서늘하게 굳어버린 표정은 더 이상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남자가 한 발, 한 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물결치는 허벅지의 근육이며, 점점 더 각도를 틀며 일어서는 생식기에서 겨우 남자의 의도를 읽을 뿐이다.
침대 바로 앞까지 걸어온 남자가 인환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고 상반신을 천천히 일으킨다. 하반신의 통증에 문득 찌푸려지는 인환의 얼굴을 살피며 조심스레 침대 위에 앉히고는, 자신도 묵직한 체중을 실어왔다.
인환의 양쪽 뺨에 그 커다랗고 긴 손바닥을 가져다대고는 끌어당겨 키스했다.
키스는 부드러웠다.
그저 위아래 입술을 빨고 혀를 쓰다듬을 뿐인 조용한 접촉. 눈을 뜬 채 키스하는 남자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긴 속눈썹이 아치처럼 늘어서 있는 눈꺼풀이 꼭 감긴 채 파르르 떨고 있다.
입술이 떨어지며 감겼던 눈꺼풀도 서서히 기지개를 켠다. 키스하는 내내 뺨을 쓸고 있던 손이 귓불을 만지작거리고, 이어 관자놀이 사이 짧게 자른 인환의 머리카락 틈으로 숨어 들어가 부드럽게 주물럭거린다. 어린아이처럼 새까만 눈은 바로 코앞에서 따스하게 시선을 맞춰오고 있다.
“……반항하려는 게 아니라면 조금이라도 반응을 하려고 노력해봐.”
노곤한 애무처럼 허스키하게 잠긴 목소리가 달콤하기 그지없다. 연인처럼 다정한 어조로 가슴에 서늘한 비수를 꽂아 넣는다.
“……빚을 갚아야 하잖아, 장인환. 창피도 모르는 호모 새끼답게 열심히 발정을 해야지.”
“…….”
“……죽어도 놔주지 않을 거니까 도망칠 궁리는 단념하고 제대로 봉사하는 방법을 배워.”
“…….”
“……입 벌려.”
“…….”
어미 새의 모이를 기다리는 새끼처럼 명령대로 입을 크게 벌리고서 어떻게 해야 제대로 봉사를 하는 걸까 열심히 생각한다.
꿈틀거리며 파고 들어온 남자의 혀가 뜨겁게 욕망을 토해낸다. 허리를 부러트릴 것처럼 조여대는 남자의 품 안이 답답하지만 열심히, 열심히 생각한다.
밀어붙여진 사타구니 사이, 거대하게 발기한 수컷이 지난밤 그렇게 탐하고도 못내 아쉬웠던 찌꺼기를 다시금 맹렬하게 뿜어낸다.
피부가 한 꺼풀 벗겨진 듯 시린 몸뚱이 위로 탐욕스레 감겨드는 입술이 아리지만 기를 쓰고, 악착같이 궁리에 궁리를 거듭한다.
버둥거리는 손가락 사이로 마디가 있는 기다란 손가락이 족쇄처럼 깍지를 껴온다. 낙인 같은 키스가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격하게 입안을 틀어막는다. 맞물린 나사처럼 극단으로 죄어드는 하반신에 풀이 죽은 나머지, 섹스는 그저 벌벌 떨며 심판관의 자비만을 구걸한다. 해는 아직 하늘 가운데 떠서, 오래된 죄악의 구석구석을 남김없이 까발리고 있다…….
다시 잠에서 깨었을 때는 밤이었다.
코끝으로 다가드는 달콤한 음식 냄새에 배 속이 요동을 치며 까라지려는 의식을 두들겨 깨웠다.
“……먹어…….”
등에 찰싹 달라붙은 채 뻗은 그의 손에 들린 것은 햄버거였다. 롯데리아, 롯데리아, 롯데리아……. 눈앞에 다가든 로고를 멍하니 되뇌며 허겁지겁 씹어 먹었다. 목이 메려는 찰나 그가 콜라가 든 컵을 입에 대어준다. 정신없이 마셔댔다. 사레가 들려 캑캑거리자 무자비한 손길이 가차 없이 등으로 떨어진다. 말끔히 비워져 쓰레기더미로 남은 종이컵과 봉지가 그의 손에 의해 침대 밑으로 던져진다.
등에 여전히 찰싹 달라붙어 있는 그가 조금씩 미끄러지려는 인환의 상반신을 바짝 끌어당겨 안는다. 반쯤 접힌 채 하반신을 감고 있는 그의 다리에도 좀 더 힘이 가해진다. 도무지 수그러들 줄 모르는 그의 딱딱한 음경이며 고환이 은근한 리듬을 타며 꼬리뼈 근처에 비벼지고 있다. 아랫배와 가슴으로 촉수처럼 감겨든 손은 집요하고도 가혹하게 살점들을 주물럭거린다.
뒤로 고개가 활짝 넘어가더니 기다렸다는 듯 그의 입술이 내려온다. 그의 입안에서도 자신이 방금 전에 먹은 햄버거 냄새가 난다. 롯데리아, 불고기버거.
아프게 혀뿌리를 씹어댄 치아가 목덜미 사이로 미끄러진다. 축축한 그의 타액이 피처럼 줄줄 늘어진다. 머리가 몽롱하다. 숨을 쉬는 것도 힘겨울 정도로 너무나 피곤하고 졸리다. 제발 그만해주면 좋을 텐데……. 아니, 조금이라도 자고 일어난 후에만 해준대도 그의 발가락을 핥을 만큼 고마워할 텐데……. 새까맣게 덮쳐드는 몽마에 다시금 빠져들어가며 인환은 간절히, 간절히 빌었다.
“……아니, 아직 못 봤어요. 요즘 좀 정신이 없어서……. 평이 그렇게 안 좋아요?”
[…….]
“아, 그러지 마세요. 지은 씨 연기 멋집니다. 신문 평이야 늘 그렇죠. 이것저것 못 알아들을 외국 이론을 끌어다가 잘난 체나 하는 바보들이랍니다. 흔들리지 마세요. 신문사 기자들보다도 정확한 게 영화 팬들이에요.”
[…….]
“그래요. 당연하지요. 초등학생이라도 아는 얘깁니다.”
[…….]
“음, 네. 알아요. 나도 사랑해요, 지은 씨.”
[…….]
부드럽고 온화한 음성이었다. 어렴풋이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거라고 착각이 들 만큼 생소한 남자의 목소리에, 한동안은 줄기차게 눈을 감고 있던 자신이었다.
“……네…… 그래요, 나도 기대하고 있어요.”
[…….]
“네, 사랑합니다…….”
[…….]
아, 또 나왔다. 사랑이란 단어……. 설령 꿈속이라 할지라도 도저히 남자의 입에서라면 나오지 않을 단어다.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훌쩍 잠이 달아난다.
“……아니, 그렇지 않아요, 지은 씨. 생각처럼 곤란한 상황은 아니니까 그렇게 걱정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
“아뇨, 나오지 마요. 곧 탑승 수속입니다. 공항에 도착하실 때쯤엔 이미 하늘을 날고 있을 거예요.”
[…….]
“하하…….”
[…….]
“네, 그래요. 가 있는 동안은 일에 전념하고 싶으니까 따로 전화는 하지 않을게요. 서운하더라도 기다려줘요.”
[…….]
“하하, 고작 사흘인걸요, 지은 씨. 그것도 못 참아요?”
[…….]
“……네, 그럴게요. 걱정 마요.”
[…….]
“바이.”
[…….]
전화 통화를 마치는 남자의 얼굴엔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 통화하는 내내 꿀처럼 달콤할 다정(多情)을 아낌없이 쏟아내던 남자의 얼굴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는다.
지금 공항에서 탑승 수속을 밟고 있는 중이라는 남자는, 인환의 몸을 바싹 끌어안은 채 여전히 지치지도 않고 발정하고 있었다. 멍하니 자신을 들여다보는 인환의 얼굴 곳곳에 쪼는 듯한 입맞춤을 거듭하며,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귀찮다는 듯 침대 발치로 내던지고 있었다.
다시 아침이었다.
눈을 찌르는 아침 햇살이 방 안 가득 어김없이 밀려들어와 있었다.
만 나흘을 벌거벗은 채로 침대 위를 뒹굴었다. 수시로 울려대는 휴대전화를 받거나 인환이 잠든 틈틈이 음식을 사러 나가는 것 이외에, 섹스에 환장한 이상한 남자 역시 줄곧 알몸으로 인환의 몸만을 미친 듯이 탐했었다.
“……오늘은 조금이라도 걸을 수 있겠습니까?”
아랫입술을 택해 좀 더 세심하게 빨아 당기며 남자가 물어온다.
“……대답해요. 괜찮아요?”
“……조금은…….”
“그래요. 그럼 나가서 외식합시다.”
곧바로 자리를 털고 일어날 것만 같던 담백한 어조와는 달리 아랫배에 닿아오는 남자의 성기는 막대기처럼 딱딱해져 있다. 가볍게 시작됐던 키스가 짙어지며 이미 남자의 정액으로 범벅이 돼 있던 인환의 손바닥은 다시금 뻣뻣해진 사타구니 속으로 끌려갔다. 짐승처럼 헐떡이는 남자의 신음이 귓가를 뜨겁게 태운다.
마치 개미지옥에라도 빠진 것 같다.
시야는 암흑처럼 깜깜하고, 코며 입이며 깔깔한 모래가 가득 들어차 숨을 제대로 쉬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이젠 어느 정도 익숙해져버린 색정광의 압도적인 몸이 거대한 모래괴물처럼 자신을 삼키고 있었다.
개미지옥이다.
아니, 지옥이다……!
욕실로 끌려 들어가, 다시 한 번 능욕을 당한 뒤 비로소 몸이 씻겨졌다.
환장한 색마에서 담담하고 스토익한 신사로 변신한 남자는 자신이 나흘 동안 더럽힌 몸을 꼼꼼하고 세심한 주의력으로 정성껏 씻어주었다. 어느새 보송보송하게 세탁이 돼 있는 바지와 스웨터들까지 주워 입고 나니 매음굴에서 실컷 농락당한 더러운 몸뚱이라고는 잘 믿어지지 않았다. 샤워와 면도를 하고, 말끔한 회색 콤비 슈트까지 갖춰 입은 남자 역시 절대 발정 난 색귀로는 보이지 않았다.
거울 너머로 들여다본 얼굴의 멍은 여전했지만, 하반신만은 연고를 부지런히 바른 탓인지, 의자에 앉거나 천천히 걷는 정도는 가능할 만큼 그럭저럭 회복이 돼 있었다. 남자의 부축을 받아 현관 밖까지 나오긴 했지만, 막 걸려온 전화를 받고 집 안으로 되돌아간 남자를 기다리는 동안, 인환은 노곤하게 내리쬐는 봄볕을 맛나게 받아먹으며 단조롭고 소박한 모양새의 미니 정원을 천천히 산보했다. 최근에 심은 것인지, 비교적 어린 전나무 대여섯 그루가 담을 따라 쭉 늘어서 있는 뒤뜰을 둘러보고, 다시 집 앞으로 돌아와 테라스 맞은편에 옹기종기 박혀 있는 새하얀 나무 울타리들의 숫자를 멍하니 헤아렸다.
철겅 하는 묵직한 대문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높고 커다란 만큼 꽤 귀에 거슬리는 소음을 만들어내는 대문이 활짝 열리며 몹시 낯이 익은 장신의 청년 하나가 성큼성큼 들어왔다. 갑자기 심장이 저 아래로 툭 떨어지는 듯한 아득한 충격이 머릿속을 강타했다.
무심히 고개를 쳐든 청년의 시선이 인환의 것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점점 더 휘둥그레지는 눈동자와 더불어 청년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창백해졌다.
캐주얼한 데님 재킷에 티셔츠와 청바지를 간편하게 걸치고 있는 모습이 생경하지만, 단단하고 압도적인 근육질의 몸집이며 190센티에 가까운 장신의 키는 조금 전 집 안으로 사라진 청년의 형과 판박이처럼 흡사하다. 선이 굵은 단아한 얼굴도, 숱이 많은 암갈색 머리카락도 영락없는 붕어빵. 다만 피부가 좀 더 희고, 감정이 쉽게 드러나는 순수한 표정만은 형과 10년쯤은 더 나이가 터울 져 있다 해도 믿을 만큼 몹시 어려 보인다.
벼락을 맞기라도 한 것처럼 충격을 받은 청년은, 온몸을 굳힌 채 한동안 인환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떡 벌어진 입술은 부들부들 떨리고, 부리부리한 눈에선 새빨간 증오가 용암처럼 콸콸 쏟아져 나왔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어본들, 청년을 사로잡고 있는 격렬한 살의가 사라질 까닭이 없다. 문득, 웅얼거리는 듯도 하고, 흐느끼는 듯도 한 괴성이 청년의 뻥 뚫린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큰 걸음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청년의 커다란 몸집을 어렴풋이 감지한 순간, 인환은 복부를 찌를 듯이 파고든 극심한 통증에 허리를 꺾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눈앞이 하얗게 변하며 숨길이 틀어막혔다.
“이…… 이 씨발 개새끼가!!! 여기가 어디라고!!! 어디라고 감히!!!”
찢어지는 고함 소리와 함께 옆구리 쪽으로 처음과 다름없는 끔찍한 타격이 연거푸 가해졌다. 본능적으로 몸을 둥글게 말며 인정사정없이 떨어지는 청년의 발길질을 피해보려 안간힘을 써보지만, 이미 처음의 카운터펀치에 반쯤은 넋을 잃어버린 인환이었다. 한동안 막혔던 숨이 간신히 되돌아왔을 무렵엔, 돌처럼 굳어진 몸뚱이 위로 소나기처럼 퍼부어지는 청년의 발길질을 피하거나 조금이라도 충격을 완화시킬 만한 방법이란 단 한 가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로지 자각되는 것이라곤 고통, 영원히 되풀이되는 단말마의 고통뿐이었다!
“뭐냐, 또 무슨 짓을 하려구 나타났어?!!! 누굴 또 잡으려구, 이 병신 새꺄!!! 이 씹새꺄!!! 너 오늘 잘 걸렸다!!! 너 그거 알어?!!! 내가 10년 동안 너 벼른 거 알어?!!! 어?!!! 너 잡아내기만 하면 갈기갈기 찢어서 회 쳐 먹으려구 이를 갈아붙인 거 알어?!!! 모르지?!!! 몰랐지?!!! 이 씹새꺄!!! 모르니까 또 이렇게 나타난 거지?!!! 엉?!! 이 개새끼!!! 절름절름 잘도 나타나서!!! 씹쌔가!!! 개씹, 다 조져버릴 새끼가!!!”
“휘야!!!”
“조져버릴 거야, 개섹!!! 혜윤이가!!! 우리 혜윤이, 불쌍한 우리 혜윤이를!!!”
“휘!!!”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제발 죽어, 이 병신 변태 호모 새꺄!!!”
“그만두지 못해?!!!”
“……휘…… 휘?!! 무슨……?”
“놔!!! 이거 놔요, 형!!! 죽일 거야!!! 내가 죽일 거야!!! 이 개새끼 내가 죽일 거야, 지금!!!”
“휘야!!!”
“진정해, 문휘!! 너 미쳤어?!!!”
“미쳤냐구?! 그래, 나 미쳤어!!! 미쳤다!!! 미쳤다구요, 성준 형!!!”
“문휘!!!”
전신에 소나기처럼 퍼부어지던 극심한 충격들이 문득 사라졌다. 살이 찢기고 뼈가 부서지는 고통은 여전했지만 고통보다 더한 고통일 격정의 회오리는 또 다른 장신의 남자 둘에 의해 가까스로 뜯어말려지고 있었다.
아무리 기를 쓰고 눈을 떠보려고 하지만, 하얗게 흐려지는 정신 때문에 절대로 뜰 수가 없다. 아무리 기를 쓰고 몸을 일으켜보려 하지만, 근육을 지탱해줄 뼈가 몽땅 다 흐물흐물 녹아버린 것처럼 힘이 풀려 절대로 설 수가 없다.
아프다. 아프다. 너무 아프다. 여기가 어딜까? 도대체 어딜까? 이 새까맣고 새까만 개미지옥은 어떻게 해야 빠져나갈 수 있는 걸까?
……그림을 그려야 돼…….
“이 새끼 봐요!!! 이 미친 사이코 변태 호모 새낄 보란 말예요!!! 또 나타났어!! 우리 앞에 또 나타났다구!!! 우리 혜윤이 잡은 것만으로도 모자라서 또 누구 귀신 만들려구 나타난 거란 말예요!!! 엉?!!! 안 보여요?!! 이 병신 새끼 안 보여요, 형?!!!”
……그림을 그려야 돼…….
“내가 데려왔다!!!”
“?!!!”
“그래, 내가 데려왔어!!! 내가 죽이려고 데려왔다구!!!”
“……?”
“위……?”
……그림…… 그림…… 그림…… 느낌이 사라지기 전에 재빨리 그리지 않으면 안 돼…… 잡아놓지 않음 안 돼…….
“죽여?! 네가 죽인다고?!!! 이 사람을?!!! 네가 왜?!!! 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건 나야!!! 나뿐이야!!!!!”
“위……!”
“……무…… 무, 무…… 무슨…….”
“내가 해!!! 죽이는 것도 나고, 살리는 것도 나야!!! 내가 할 거란 말이다!!!”
“……무슨 소리야, 형?……! 지금 그게 무슨…….”
……사라져버려…… 그래…… 그건 너무 찰나의 순간이라서…….
“죽이고 싶어?!!! 그렇게 죽이고 싶어 환장하겠냐, 휘?!!! 그래, 너도 자격은 있지. 이 사람을 상처 입힐 자격 정도는 충분히 있어!!! 혜윤이는 네 동생이기도 하니까!!! 그렇지만 아냐!!! 그 이상은 아냐!!! 아무도 못 죽여!!! 이 사람은 아무도 못 죽여, 나 말고는!!!”
“형!!!”
“……위…….”
……있는 듯도 하고, 없는 듯도 하고…….
“자, 때려, 휘야!!! 발로 차고, 차고, 또 차서 영영 일어나지도 못하게 아주 짓밟아버려!!!”
“위!!! 너 지금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사라지기 전에 번개처럼 화폭에 담아두지 않으면…… 담아두지 않으면…….
“얼마든지 때려!!! 살이 문드러지고 피가 사방에 튀고, 뼈가 부서져서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어디 마음껏 패보라구!!! 하지만 거기까지야!!! 거기까지다, 휘!!! 그렇게 마음껏 요리한 다음엔!!! 그다음엔!!!”
……만약 그렇게 하면…….
“……형……?!”
“그래, 그다음엔 내게 넘기고 다신 돌아보지 마!!! 더 이상 상처 입히지도 말고, 더 이상 손대지도 마!!! 알아들어?!!! 만약 더 이상 이 사람에게 손을 댔다가는…… 손가락 하나라도 건드렸다가는…… 그래, 그땐 내가 널 죽일 거다, 휘!!!”
점점 흰 공간이 좁아들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새까만 허공 속으로 쑥 꺼지는 듯한 전신을 어렴풋이 자각하며 인환은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