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2003년 4월. 김성준(金星俊)
“보기엔 험악하지만 말했다시피 큰 내상은 없어. 뼈에 금이 간 곳도 없고. 엑스레이 필름은 너도 봤잖아.”
“……힘을 전혀 못 써. 잠도 잘 못 자고. 억지로 먹이지 않으면 식사도 안 하려고 들지.”
피로감이 역력한 건조한 목소리였다.
성준은 차트를 들여다본다는 핑계로 줄곧 외면하고 있던 눈을 들어 마지못해 녀석을 바라보았다.
아직 오후 시간대건만 잔뜩 먹장구름을 품은 채 비를 뿌려대는 날씨 탓인지 진료실 안은 어둑한 습기로 가득했다. 한동안 잠잠하더니 다시금 거의 이틀에 한 번꼴로 비를 뿌려대는 변덕스러운 날씨는 흡사 장마철을 방불케 했다. 요즘 부쩍 우울증 환자가 늘어난 것도 날씨의 영향이 클 터였다. 춥고 질척거리기만 하는 봄비도, 눈앞의 녀석도 문득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은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성준의 맞은편 의자에 구겨지듯 몸을 묻고 있었다. 바로 몇 분 전까지 절름발이 화가가 앉아 있던 바로 그 자리였다. 심각한 우울증의 침해를 받고 있는 환자 특유의 나른한 태도로 화가는 힘겹게 말을 뱉어냈었다.
안 본 지 고작 나흘이 지났을 뿐이건만 녀석의 얼굴은 그새 몰라볼 정도로 초췌해져 있었다. 창백한 낯빛이며 움푹 그늘이 진 눈매며, 한눈에 보기에도 피로의 기색이 역력했다. 수려하고 균형 잡힌 외모에 딱 들어맞는 암청색 슈트 차림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제대로 잠을 못 자는 것은 막다른 골목에 떨어진 가련한 화가뿐만이 아닌 듯싶었다.
반칙이 아닌가.
먹먹한 질투심과 환멸감으로 자신 또한 지난 나흘 밤낮을 번민에 시달린 것이 사실이지만, 저 얼굴을 보고도 가슴이 아리지 않을 수는 없다. 피붙이한테나 품을 수 있을 법한 사심 없는 연민이, 녀석에 대한 불온한 애증을 그나마 가라앉혀주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건 맞은 것 때문이 아니야.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었더군. 꽤 오래되었다던데?”
“…….”
“알고 있었어?”
“……대충은. 자취방에서 데시플라민(desipramine. 항우울제의 일종)을 봤어. 얼마나 오래된 거지?”
“7∼8년쯤. 증상이 나타난 건 아마도 그 이전부터겠지. 감옥에선 몇 번씩이나 자살 기도를 했다고 하니까. 아침에 공주(공주치료감호소)에서 진단서를 보내왔어. 꽤 심각했더군.”
“……심각했다는 건…… 지금은 괜찮다는 뜻인가?”
녀석답지 않은 애원조의 물음에 성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뭐 그럭저럭. 당장 빌딩에서 몸을 날릴 정도는 아니니까.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우울증은 예후가 나빠. 일종의 낙인이지. 한번 병력이 생기면 평생을 괴롭히며 따라다니니까. 다행히 예술가라는 점이…… 그나마 그림을 놓지 않고 있었던 것이 지금까지 그를 버티게 할 수 있었겠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어. 당장의 증세도 심상치가 않고.”
“…….”
험악하게 구겨지는 녀석의 얼굴에 통렬한 만족감을 느낀다. 아프냐, 새꺄? 그래, 나도 아프다. 너만큼 아프다, 이 박정한 새꺄.
“……뭐,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버텨온 것 같은데 언제 그때와 똑같은 상태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어. 못 먹고, 못 자고, 무기력증에다…… 틀림없이 점점 더 나빠질 거야.”
따귀를 갈기는 심정으로 단언해도 녀석의 얼굴에 기대했던 절망적인 표정은 떠오르지 않았다. 처음보다 약간 더 창백해지긴 했지만 험악하게 구겨져 있던 얼굴은 차츰 평온을 되찾고 있었다. 하긴, 궁지에 몰릴수록 더 악랄해지는 녀석이었다.
“그러기 전에 돌려보내.”
건네준 차트를 멍하니 들여다볼 뿐 녀석은 좀처럼 대꾸가 없었다.
“어쩌자는 거야, 이제 와서? 설마 정말로 그를 죽이려는 건 아니겠지?”
죽인다니, 혜윤이의 복수라니, 그저 코웃음만 나온다. 이혼 후, 녀석이 한동안 반쯤은 미쳐서 그를 찾았던 까닭은 혈육의 정으로부터 비롯된 알량한 복수심 따위가 아니었다. 휘건 윤열이 형이건 여타 사업 파트너들이건 녀석이 다른 모두를 속여도 자신만은 속일 수 없었다. 신애와 이혼을 한 진짜 이유도…… 바윗돌 같은 침묵으로 일관하며 녀석이 기를 쓰고 속내를 털어놓지 않았어도, 성준은 손으로 만지는 것처럼 속속들이 녀석의 집착을 읽고 있었다.
나락으로 떨어진 화가가 수감될 무렵, 녀석은 여봐란 듯이 신애와 결혼식을 올렸다. (틀림없이 결혼으로 인해 녀석에게 주어진 포상 가운데 하나일) 매리어트 파이낸셜 그룹의 일원이 되고, 졸업과 동시에 도미해 사업에 뛰어들었던, 그 6년의 시간을 대체 어떻게 참아냈을까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막연히 짐작했던 것처럼 파국은 꽤 빨리 찾아왔다.
신애는 녀석의 마음이 자신에게로 향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차츰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녀석이 신애와의 결혼을 강행한 까닭은 현실적인 여러 이해득실을 떠나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신애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다는 사실도. 물론 그녀가 놔주지 않는 한 녀석이 평생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는 것도 영리한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자존심이 강한 그녀가 그 사실을 알고도 결혼 생활을 계속 유지할 수는 없었으리라. 녀석에 대한 그녀의 애정이 지극했던 만큼 배신감은 그 이상으로 컷을 테니까.
결국, 몇 번의 별거와 눈물겨운 화해를 거듭하던 끝에 부부는 합의 이혼을 했다. 결혼한 지 6년째 되던 해의 일이었다.
이혼과 동시에 귀국한 처음 1년 동안, 녀석은 온통 그를 찾아내는 일에만 매달렸다. 물론 한창 상승 가도를 타기 시작한 사업체까지 함께 끌고 다녀야만 했으니, 녀석 같은 독종이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그토록 무거운 중압감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유능한 흥신소란 흥신소는 돌아가 의뢰를 하며 그의 자취를 추적했지만 그는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그림자조차 잡히지가 않았다. 그야, 작정을 하고 모습을 감춘 이를 찾아내기가 그리 녹록할 까닭이 없었지만, 흥신소마다 채 한 달을 버티지 못하고 손을 든다는 것도 기묘한 일이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혹은 운명이 녀석과 그를 떼어놓으려 작정이라도 한 것만 같았다.
물론 녀석은 포기하지 않았다. 심부름센터며, 흥신소며, 사설 경호업체며, 나중엔 고위 경찰 간부까지, 부릴 수 있는 사냥개는 모두 풀어 그를 추적했다. 미쳐버린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들 만큼 무시무시한 집착이었다.
마침내 그를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현실을 어느 정도 자각하고 나서, 녀석이 품게 된 끔찍스러운 절망까지도 성준은 신물이 날 정도로 생생하게 지켜봐왔다.
생의 의욕을 잃고 시체처럼 점점 시들어가는 녀석에게 그나마 구원이 되어준 것은 일이었다.
사업을 확장시키고, 이런저런 정치가들과 손을 잡고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해가는 것으로 녀석은 차츰 안정을 찾아가는 듯 보였다. 애초에 녀석이 세워두었던 인생 설계 그대로를 착실히 밟아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성준은 내심 안도하고 있었다.
열심히 뛰다 보면 언젠가는 잊게 될 거라고 믿었다. 반미치광이였던 절름발이 화가 따윈 말끔히 잊고 다시 건강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아무리 절절한 애정이라고 해도, 집착이라고 해도, 시간을 당해낼 장사란 없는 법이라고. 인간의 마음이란 그렇게 간사하고 이기적인 것이라고.
최근 주가를 올리고 있는 여배우와 모처럼 염문을 뿌리는 것을 보았어도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애써 스스로를 독려했던 성준이었다. 어차피 녀석에게 자신은 연애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친구 관계인 것은 아마도 자신들이 무덤에 들 때까지 영원히 지속될 터였다.
별로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연애는 오래가지 않는다. 쉽게 부서지고 쉽게 남남 사이로 돌변하는 불안정한 것이 바로 연애다. 하지만 자신과 녀석의 관계는 전적으로 달랐다. 죽을 때까지 결코 부서지는 일도, 생면부지의 남남으로 갈라서는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녀석 앞에 그 어떤 여자들이 나타난다고 해도, 설령 녀석이 재혼을 하는 일이 생긴다고 해도, 녀석에게 있어 최우선 순위는 자신이 될 터였다.
그랬다.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다만 그 사람만 아니라면……. 녀석의 마음을 온통 휘어잡고 있는 저 미치광이 화가만 아니라면, 그가 녀석의 앞에 영영 모습을 드러내지만 않는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최근 몇 년 동안 행운은 성준을 향해 미소를 보내주고 있는 듯 보였다. 녀석의 사업은 나날이 번창했고, 녀석은 어떤 확고한 야망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청춘의 한때를 태웠던 지독한 연애 사건쯤은 그저 추억의 한편으로 차츰 묻히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게 보였다.
물론, 그것이 그저 형편 좋을 대로의 백일몽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나흘 전 녀석의 집에서 그 사람과 직면하는 순간 적나라하게 까발려지고 말았지만.
순식간에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녀석의 이혼 이래, 어느 순간부터 가슴 한가운데에서 조금씩 키워왔던 꿈의 구슬 하나가 단숨에 박살이 나며 사방으로 흩어지는 소리를 성준은 멍하니 듣고 있었다.
“……뭐가 설마라는 거야. 달리 그를 살릴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여전히 차트를 향해 고개를 떨군 채로 지친 목소리가 판에 박힌 대꾸를 한다. 핏기를 잃은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가며 자조적인 웃음까지 걸린다. 주제에 양심은 있는지, 그를 원하기 때문이라는 자백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너희들은 안 돼.”
사실이다.
“……서로 너무 다쳤어. 그 사람이나 너나 극복할 수 있는 무게가 아니야.”
과장이 아니다.
“……신애 씨는 이미 과거의 사람이니까 그렇다 치자. 하지만 혜윤이 일은? 너 평생 그 사람 원망 안 할 자신 있어? 휘는 또 어떡할 거야? 정말 인연이라도 끊을 셈이냐?”
협박이 아니다.
“……뭐, 좋아. 너한테 그 사람이 어떤 존재라는 거 아니까…… 그래, 좋다구. 넌 극복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너야 원래 독한 새끼니까. 하지만 그는? 그가 널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아니,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진단서를 봐. 이미 만신창이다. 그림만 아니라면 벌써 무덤에 들었을 사람이라구.”
과장일지도 모른다.
“정말로 그 사람을 아낀다면 놔줘. 이제야말로 진심으로 용서하고 놔줘. 여기서 놔주지 않으면 넌 정말 그 사람을 죽이게 돼.”
협박이어도 좋다. 협박에 넘어가 그를 떠나보낸다면 그것으로 족하니까.
“……14년이야…….”
마주 앉은 성준을 향해 비로소 고개를 든 녀석이 조용히 대꾸했다.
낮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별로 기가 죽은 목소리는 아니었다. 독한 놈.
“……14년이면 노력할 만큼 한 것 아닌가?”
“……?”
“……우린 이미 하나야.”
“?!”
“14년이다. 14년을 그렇게 기를 쓰고 떼어내려고 해도 안 됐어. 설령 다시 떼어낸다고 해도 그건 그저 몸뿐이겠지.”
기가 막혀서 노려보지만, 똑바로 성준의 시선을 받아내고 있는 깊은 눈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너 지금 그게…….”
오히려 동요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었다. 깔깔한 쇳소리가 섞인 자신의 목소리는 어딘가 멀리서 들리는 이명처럼 불분명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 안 해. 이제 그런 어리석은 노력 따윈 안 해.”
“위……!”
“죽인다고? 내가 그를 죽이게 될 거라고? 하, 이미 죽은 목숨들인데 새삼 두려울 게 뭔가?”
“문위!”
“계속 떨어져 지내느니 차라리 그게 더 나을지도 모르지. 차라리 죽여서 영원히 내 걸로 만들어버리는 거야.”
담담한 어조에 농담기는 조금도 들어 있지 않았다. 소름이 끼쳤다. 정말 미쳤어. 이 새끼들은 둘 다 제정신이 아니야!
“……미…… 미친 자식…… 그걸…….”
침착하자고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당부했다. 흥분해선 안 될 일이었다. 미친 자식들의 장단에 말려들어가는 정신과 의사라니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불쌍한 혜윤이는 어떡하고? 휘는? 정말 동생들을 배신하겠다는 거냐?! 인연을 끊을 셈이냐구?!”
나는?! 나는 어떡할 건데, 이 새꺄?! 나도 버릴 거냐?!! 그럴 거냐, 이 미친 새꺄?!!!
차마 입에 담지 못했던 응어리를 가까스로 삼키느라 얼굴로 뜨거운 열기가 끼쳐들었다. 열기는, 예민한 눈가를 쑤셔대며 금방이라도 절망에 찬 눈물을 쏟아낼 기세로 거칠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혜윤이는 휘가 돌보면 돼. 휘도 이젠 어린애가 아니니까 가장 역할쯤은 충분히 해낼 수 있어.”
“문위!!!”
“설령 아직도 돌봐야 할 의무가 있다손 치더라도 할 수 없어. 내가 돌봐야 할 사람은 이제 단 하나밖에 없으니까. 더 이상 동생들을 위해 나를 억누르지는 않아.”
흥분한 자신과 달리 밉살스러울 정도로 침착한 눈이 담담하게 선언하고 있었다. 특별히 힘주어 말하지 않는 자연스러움으로 해서 선언의 무게는 오히려 다른 대안이라곤 없는 확고부동한 현실인 것처럼만 들렸다.
기가 막혔다. 정말로 저게 진짜 녀석인지 알 수가 없다. 그 무엇보다도 동생들을 우선시하던 책임감의 화신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감정보다 이성이 먼저고, 이성보다 야심이 우선시하던 녀석이 어느새 저렇게까지 돌아버린 걸까? 아니, 어느새 중독돼버린 걸까, 그 남자의 광기에?
“……극복할 수 없는 무게라고?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무게에 짓눌려서 짜부라져버릴지도. 하지만 이제 더 이상 혼자는 아니야. 짜부라지더라도 함께 짜부라질 거다.”
“그는 더 이상 널 사랑하지 않아!”
녀석의 굳건한 눈길이 비로소 희미하게 동요하는 것이 보였다.
잔혹한 만족감이 목젖을 치고 올라왔다. 눈물이 솟구칠 지경으로 통쾌하다고 생각했다.
“……울면서 애원하더라, 제발 널 설득해달라고…… 네가 무서워서 소름이 끼친대. 네 용서를 받고 헤어질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다더라. 그는 진심이야.”
가차 없이 연타를 날렸다. 점점 사색이 되어가는 녀석이 가엾다는 기분은 결코 들지 않았다.
“널 사랑하지도 않는, 아니, 사랑은커녕 귀신 보듯 두려워하는 상대랑 뭘 더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오래도록 대답이 없었다. 창 밖으로 시선을 둔 채 제법 굵어진 빗줄기를 응시하고 있던 녀석이 이윽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상관없어.”
대답과 함께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성준에게 시선을 맞춰왔다. 황폐한 눈길이었다. 몇 년 전, 혈안이 돼서 그를 찾아 헤매던 때 그대로, 극도의 굶주림 끝에 숨져가는 무표정한 야수의 눈길.
“……상관없다. 그저 함께 있으면 돼. 원래 한 몸인 그대로 그냥 함께 있는 거야. 그거면 충분해.”
“위!”
“간다. 처방전이나 끊어줘.”
“위야……!”
“일단 일주일치만 먹여보고 다시 데려올 테니까 상담 일정 조정해라. 어차피 계속 치료를 받게 해야 할 텐데 풋내기한테 맡기고 싶진 않아.”
“누가 계속……!”
“아, 그리고 수면제도 좀 부탁해. 여전히 못 자는 것 같으면 당분간 먹이는 것도 좋겠지.”
“다른 병원으로 가! 계속 그 남자 상담해줄 생각 없어!”
천천히 출입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녀석이 일순 움직임을 멈췄다. 신중한 몸짓으로 성준을 돌아보았지만 황량한 눈길에 동요는 보이지 않았다.
“왜?”
“몰라서 묻는 거냐? 나도 그 사람을 용서한 게 아냐. 사감을 가지고 환자를 치료할 순 없어.”
변명만은 아니었다. 아무리 그의 처지가 바닥에 떨어졌다고 해도 연민과 증오심은 별개의 문제였다. 혜윤이를 그렇게 만들어버린 것도 이유이거니와, 무엇보다도 녀석의 마음을 전부 차지해버린 그에게 헌신적인 치료를 감행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자신은 성인군자가 아니니까.
“……부탁이다. 그를 돌려보내. 너희들은 안 돼…… 안 된다구…….”
“…….”
“……너 망가지는 거 못 봐. 더 이상은 나도…….”
울 수는 없다.
어릴 때처럼 녀석의 몸을 만지작거리며 어리광을 부릴 수도 없다. 묵직한 시간의 두께는 성준으로 하여금 끝없이 낭만적인 꿈을 꾸게끔 온전히 내버려두지를 않고 있었다. 움직여야 했지만 더 이상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해바라기처럼 한 방향만 보며 살아왔다. 이 녀석만 바라보고 살았다. 이제 와서 어떻게 방향을 틀 수 있단 말인가. 아니, 방향을 튼다고 해도 도대체 어디로 튼단 말인가…….
“……미안하다…….”
“…….”
“……성준아…….”
“…….”
“……너도 내 가족이야. 휘나 윤열이 형과 마찬가지로……. 할 수 있는 한 끌어안고 갈 테지만 더 이상 내게 기대는 하지 마라…….”
“…….”
“……나는 그 사람 거다. 14년 전부터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
“……못 받아들이겠다면 휘처럼 너도 날 버리면 돼.”
“…….”
“간다. 또 연락하마.”
“…….”
문이 열렸다가 조용히 닫혔다. 녀석의 묵직한 발자국 소리가 점점 멀어져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될 때까지 성준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한참을 울었다.
노크 소리와 함께 간호사 하나가 들어왔다가 당황을 드러내며 다시 진료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몇 분 후, 간호사는 인터폰을 통해 외래 환자 몇이 진료를 기다리고 있다고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아무리 아파도 의무를 미룰 수는 없다. 일만은, 일에 있어서만큼은 완벽하게 이정표를 세우고 싶었다. 꼴사납지 않은가. 나이 서른둘에 동정 딱지조차 떼지 못한 강박증 게이라니. 서른둘씩이나 나이를 처먹고도 첫사랑에 대한 집착을 어쩌지 못해 어린애처럼 훌쩍거려야만 하는 못난 꼬락서니라니.
그럼에도 성준은 좀처럼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자신의 고통만으로도 절망감이 너무 커서 도무지 환자들의 호소에 집중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몸이 안 좋아서 오늘은 더 이상 진료를 할 수 없겠습니다. 일찍 퇴근하려고 하니까 외래 쪽은 전부 전 선생과 문 선생 쪽으로 돌려주세요.”
거의 신음 소리 같은 성준의 대꾸를 간호사는 제대로 알아들은 것 같았다. 입이 가벼운 여자에게 우는 모습을 보인 것은 껄끄러웠지만 변명이 잘 먹히는 걸 보니 전화위복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의례적인 걱정의 말을 줄줄이 쏟아내는 여자를 가까스로 중단시키고 나니 이번엔 휴대전화가 울었다. 윤열이 형이었다.
사타구니 사이로 찌르르한 전율이 일며 불순한 욕망이 치솟았다. 그저 발신자 표시 전화번호를 본 것뿐인데도 자신의 치부를 꽉 틀어쥔 부드러운 손가락의 감촉이 생생히 떠올랐다. 땀 냄새와 비누 냄새가 적절하게 뒤섞인 익숙한 체취도. 작달막하게 마른 새까만 몸이 축축하게 젖은 채 자신의 아래에 짓눌리는 감촉까지 생생했다. 몸 안의 모든 감각이 그저 음란하기만 한 기억을 좇아 전속력으로 돌진했다.
젠장. 이 인간은 어쩜 이렇게 눈치가 없는 걸까? 어쩜 이렇게 형편 나쁠 때만 등장해서 사람을 더 비참하게 만들곤 하는 걸까? 간신히 억눌러놓은 절망감이 다시금 목젖 아래에서 치밀고 올라온다.
[호랭이가 칵 씹었다가 뱉을 요 문딩아! 와 이제 받어야?! 귓구녕을 얻다 걸어두고 있능겨?!]
전화를 받자마자 고막을 찌를 듯이 외쳐대는 목소리에 성준의 아랫도리는 더욱 팽팽하게 발기를 하고 말았다.
“…….”
[얼레?! 대답 안 혀?!]
“…….”
[……잘못 걸렸능가……? 거기 누구십니까? 김성준 박사 휴대전화가 아닌가요?]
시골스럽던 말투가 금세 신입 아나운서의 세련되고 무게 있는 톤으로 돌변한다. 작고 야무진 뱁새눈을 이리저리 굴려가며 경계 태세를 갖추는 귀여운 모습이 눈에 선하다.
“큭큭…….”
[여보세요?]
정감 넘치는 사투리도, 고지식한 아나운서 말투도 성준은 다 좋아한다. 이 인간의 것이라면 그저 뭐든 다 기분이 좋다고 생각한다. 녀석이 고통일 뿐이라면 이 인간은 위안이요, 평화다.
“……만나고 싶다…….”
[!]
“……오늘 올 수 있어?”
[……목소리가 워째 그려? 감기 걸렸어야?]
“……와……. 한 번만 하자…….”
[무작시런 눔! 나가 니 정액받이가?! 툭 허면 냄새 고약헌 지 부랄꼬펭이나 만져돌라고 생떼를 쓰게?!]
“……제발 목소리 톤 좀 낮춰. 옆에 보좌관들 없어? 로비스트들은? 국회의원이 매일 친구 동생 꼬추나 만져준다고 스캔들 나면 어쩌려고 그래?”
[쪼엇 겉은 새끼, 쪼엇 겉은 소리 허고 자빨셌네. 근디, 위는 만났어야? 그 육시럴 잡놈 정태근이 새끼, 아니, 그 새끼 딸년 얘긴 혀봤고? 약혼헌다는 기 사실이당가?]
“…….”
[앗따, 싸게 싸게 주둥이 놀리지 못혀?! 물어봤어야?]
“……바보가……. 그 여자 따윈 문제도 아니라구…….”
[……뭐라? 잘 안 들려야?]
“……큰일 났다니까…….”
[뭐라구? 안 들린당께?!]
“…….”
[성준아이?]
“…….”
[?!!!]
“…….”
[성준아…….]
“…….”
[……니 우나, 지금?]
“…….”
[……워따, 천불이 솟는구마잉. 또 무신 일이당가, 요 잡눔이…….]
가는 쇳소리가 섞인 힘찬 목소리가 차츰 기운을 잃어가고 있었다. 사심 없는 걱정과 연민이 고스란히 담긴 한숨 소리에 그저 지저분한 욕망을 세울 뿐인 자신이 비참했다.
원하고 또 원하는 사랑은 산산조각으로 부서져버리고, 남은 건 그저 추악하고 짐승스러운 몸의 쾌락뿐이다.
“……어떡하지……? 그 자식을 어떡하면 좋아……?”
[…….]
“……아니, 난 이제 어떡하지……?”
[……언제 퇴근허냐? 나가 때맞춰 갈탱께…….]
“……못 참아…… 더 이상 못 참을 것 같다구…….”
[좃겉은 새끼, 그만 좀 징징대야?! 간다고 허는 소리 못 들었능가?!]
“……오지 마…….”
[성준아.]
“오지 마!”
[성준아, 나 시방 그리로…….]
더 이상 듣지 않고 통화를 끊었다. 얼마 후에 다시 벨이 울렸지만 받지 않았다. 그 인간의 고집답게 벨소리는 꽤 오랫동안 끈질기게 되풀이되었다. 차마 전원을 끌 수도 없었다. 킥킥. 휴대전화 소리를 안주 삼아 수음을 하는 정신과 의사라니, 그런 성도착 환자의 사례는 들어본 적도 없다.
너무 좋아한 게 탈이었다. 너무 좋아하고 또 좋아한 게, 사랑한 게 잘못이었다.
정도 이상 사랑하면 도착이 생긴다.
강박이 되고 편집증이 나타난다.
녀석을 너무 좋아했다.
너무나 사랑을 했다.
그래서 이젠 녀석을 두고 수음조차 할 수 없는 강박증 환자가 돼버린 거다.
창문을 때리는 빗줄기 소리가 요란했다. 눅눅한 습기는 살풍경해 보일 정도로 청결한 진료실 안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마침내 벨소리가 끊겼다.
한계에 도달한 하반신이 몸서리를 쳤다.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 뜨겁고 축축한 액체가 뭉클뭉클 쏟아져 내렸다. 책상 위에 머리를 처박은 채, 성준은 전신이 부서지는 듯한 끄트머리에 올랐다. 눈물범벅인 얼굴이 절름발이 화가의 진단서가 접힌 차트를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사방이 수분투성이였다. 비라면 이제 지긋지긋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