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2003년 4월. 장인환(張仁歡) (30/129)

6. 2003년 4월. 장인환(張仁歡)

병원에서 나오니 시야를 가득 메운 장대비가 기세 좋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가 차를 세워둔 주차장까지 채 50미터도 안 될 거리였지만, 나가는 즉시 홀딱 젖어버릴 것이 틀림없었다. 망연해져서 잠시 멈칫거리고 있는 사이, 머리 위로 무언가가 뒤집어씌워졌다. 그의 슈트 재킷이었다.

제대로 인식을 하기도 전에 그의 단단한 팔이 재킷을 뒤집어쓴 인환의 어깨를 감싸 안곤 주차장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괜찮다고 말할 기회는 놓치고 말았다. 부지런히 그의 보폭을 따라가는 와중에 힐끗 보니 그의 새하얀 셔츠는 벌써 흠뻑 젖어들고 있었다. 초조한 마음에 보폭을 넓혀보지만 아무리 해도 절름거리는 다리는 어쩔 수 없었다. 군데군데 그의 피부를 드러내며 찰싹 달라붙는 셔츠도, 자신의 보폭에 맞춰 속도를 조절하는 그의 배려도, 불안하긴 매한가지였다. 그의 이런 사소한 친절들이 차라리 거칠게 대할 때보다 자신을 더더욱 공포에 떨게 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는 걸까?

장마철도 아니건만 거의 이틀에 한 번꼴로 내리는 어마어마한 장대비였다. 냇물처럼 모여든 빗물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방으로 물방울을 튀겨댔다. 간신히 차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을 무렵엔 인환의 바짓가랑이도, 머리에 뒤집어쓴 그의 재킷도,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었다.

차 안에 비치된 타월로 역시 생쥐 꼴인 머리카락을 부지런히 털어내고 있는 그는 사정이 훨씬 고약했다. 부드러운 감촉의 실크 셔츠는 그의 근육질의 몸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피부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넥타이색은 더 짙어졌고, 무릎 아래 바짓가랑이를 비롯해 구두까지 인환과 마찬가지로 흠뻑 물기를 머금고 있는 것은 물론이었다. 타월 한 장으로 해결될 만한 사정은 아니어서 몇 번의 손놀림으로 셔츠를 닦아내던 그도 곧 포기하곤 차의 시동을 걸었다.

히터를 틀자 비릿한 습기를 품은 그의 익숙한 체취가 한층 더 생생해졌다. 문득 몸서리가 쳐졌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또다시 자신을 안겠지.

그의 집에 붙들려 온 지 오늘로 정확히 며칠째인지 잘 알 수가 없다. 몇 번의 밤과 낮이 번갈아 지나갔는지도 잘 모른다.

처음 며칠은 하루 종일 그에게 안겨 지냈고, 그다음 며칠은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다. 아마도 그의 동생에게 얻어맞은 때문인 것 같았다. 별로 어디가 부러진 건 아니어서 몸의 부기가 가라앉자마자 다시금 탐욕스레 달라붙는 욕망의 장난감이 되었다. 그게 어제의 일인지 그제의 일인지도 잘 모르겠다. 수면 부족으로 머리는 멍하고 온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누워 있고만 싶은데 잠은 잘 오지 않는다. 몽롱한 백일몽을 꾸고 있는 것처럼 사방이 그저 뿌옇기만 했다.

한동안 미세한 진동이 일으키며 도로를 미끄러지던 차가 마침내 멈춰 섰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지만 병원을 나올 때보다는 한결 기세가 꺾여 있었다. 다시 그의 재킷을 뒤집어쓴 채 그에게 안기다시피 이끌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그가 인환의 몸을 소파에 앉히더니 젖어버린 바지며 양말을 벗긴다. 자신보다도 훨씬 생쥐 꼴인 그가 더 급한 것 같은데 신경도 안 쓰는 눈치다. 내리깐 아름다운 속눈썹 아래 그늘이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하얗게 질린 입술도. 그가 처음 재회했을 때보다 꽤 초췌해 있다는 사실을 인환은 문득 깨달았다.

복수란 당하는 쪽보다도 하는 쪽을 더 마모시킨다고 알고 있다. 죄의식과 증오심 가운데 더 영혼을 파괴시키는 게 어느 쪽일까 하고 잠시 생각한다.

행복하지 않은 것이다. 그도 자신만큼. 아니, 어쩜 자신 이상으로.

팬티까지 다 젖은 옷을 다용도실로 가져가 세탁기에 넣은 그가 이번엔 침실로 들어가서 마른 옷을 가지고 나왔다. 며칠 전부터 침실 벽장의 거의 대부분을 꽉 메울 정도로 가득 채워진 자신의 새 옷들 가운데 하나다. 시간의 흐름 따윈 제대로 납득하지 못했는지, 10년도 더 전에 자신이 즐겨 입곤 하던 멋쟁이 브랜드 일색이다.

중년 남자의 시든 육체엔 도무지 광대 꼴일 뿐이라는 걸 그는 모르는 걸까? 뭐, 상관이 없다고는 생각한다. 그가 광대를 원한다면 광대가 돼주면 그만이니까.

“……입어.”

금방 또 벗겨낼 거면서 고집스레 옷을 입히려는 그의 행동도 우습기는 마찬가지. 24시간 중 태반을 벌거벗은 채 서로 뒤엉키고 있는 마당에 그나마 맨 정신일 때는 예의 바르고 고상하기 짝이 없는 신사가 된다. 입히고 벗겨내고, 또다시 입히고 벗겨내기를 반복하니 마치 인형놀이에 참가한 바비 인형이 된 기분이다. 시꺼멓게 그은, 볼품없는 중년 남자 모습의 바비 인형이 있다면 말이지만.

굼벵이처럼 꿈지럭거리며 옷을 주워 입는 인환을 한동안 물끄러미 굽어보더니 비로소 그가 욕실로 들어갔다.

옷을 벗는 소리에 이어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소리가 들렸다. 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까지 합쳐져 사방이 칙칙하고 추운 습기를 느끼게 했다. 시계를 보니 겨우 4시를 지났을 뿐인데 해 질 무렵마냥 사방이 어둑어둑했다. 한동안 멍하니 소파에 앉아 있다가 거실의 불을 켰다. 한결 견딜 만했다. 뽀얀 크림색의 불빛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기분을 느끼게 했다.

욕실 문이 열리더니 그가 적동색 바스 가운 차림으로 걸어 나왔다.

머리엔 타월이 감겨 있었다. 욕실의 온기 탓인지 파랗게 질려 있던 안색은 옅은 홍조로 물들어 있다. 늠름하고 굵은 목줄기를 타고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문득 섹시하다고 생각했다. 선이 강하고 뚜렷한 이목구비는 아름답기가 그림 같다. 쌍꺼풀이 없는 흑요석 같은 눈매가 확인하듯 인환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평소처럼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몽롱하게 방기된 의식 탓이리라. 그의 죽마고우인 정신과 의사에게 어느 정도 심중을 털어놓으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에너지를 몽땅 다 써버렸다. 새삼 그를 두려워할 기운은 없었다.

먼저 시선을 돌린 그가 감고 있던 타월을 풀어 한동안 머리를 털었다. 대충 물기가 마른 암갈색 머리카락이 그의 수려한 이마 위를 부드럽게 덮고 있었다. 앞머리를 내려서인지 좀 더 앳된 인상이 되었다. 정력적으로 과중한 수업을 좇기에 여념이 없던 그의 의대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머리를 말린 다음, 소파에 앉아 있던 인환의 옆에 몸을 묻은 그는 이번엔 휴대전화를 들고 몇 군데에다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전화기를 쥐지 않은 손을 뻗어 인환의 허리를 바싹 끌어안은 것은 물론이었다. 허리춤을 헤매던 부드러운 손길은 이어 등줄기를 더듬고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대화가 끊어지는 틈틈이 뺨과 입술을 핥는 그의 촉촉하고 따스한 혀끝이 느껴졌다.

전화 상대는 세탁소와 회사 사람들이었다. 세탁소에 드라이클리닝을 부탁하는 것엔 1분도 걸리지 않았지만, 회사 사람들과의 통화는 한 시간 이상 계속되었다. 총알처럼 달려온 세탁소 점원에게 젖은 슈트를 건네준 그는 다시금 인환의 몸을 끌어안은 채 오랜 통화를 했다. 영어로 말하는 걸 보니 대부분 국제 전화인 것 같았다. 김성준을 통해 그가 의사의 길이 아닌 사업가의 길을 걷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별로 실감을 하지 못했었지만, 싸늘할 만큼 이성적인 어투로 내뱉는 그의 능수능란한 영어를 통해 인환은 비로소 그의 180도로 뒤바뀐 현실을 뼈저리게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긴, 그저 유능한 의사가 되는 것만으로 충족되기엔 그의 야망은 훨씬 크고 복잡한 모양새를 취하고 있긴 했었다. 당시 맨주먹이었던 그가 믿을 것이라곤 그저 똑똑한 머리뿐이었으니, 의대를 지망하는 것만이 그로선 최선의 선택이었겠지만, 그녀를 만나게 되면서 모든 것이 달라진 것이다. 그녀는 그에게 있어 야망을 향한 초고속 제트기에 승선할 수 있는 최상의 티켓이었으니까.

꼬리를 물고 올라오는 아픈 기억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인환은 다시금 그의 통화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언어도 어느새 영어가 아닌 한국어로 바뀌어 있었다. 실장이란 호칭이며 하대하는 말투로 미루어 보아, 이번 통화 상대는 그의 비서인 모양이었다. 그가 내일부터 출근을 하게 되리라는 통보와, 일주일 후에 있을 미국 본사 출장에 대비한 꼼꼼한 명령들이 차례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가 출근을 하게 되면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걸까 멍하니 생각했다. 다시 원미동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는 걸까 하고 비현실적인 상상도 해보았다. 물론 그가 돌아가게 가만 놔둘 리는 없었다.

―그럼 그동안 난 무얼 하고 지내면 되지……?

하루 종일 이 무덤 같은 집에서 혼자 시간을 채워야만 할 미래가 문득 두려워지기까지 했다. 그와 꼭 달라붙은 채 알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속을 떠돌다 보니 그가 없는 매 순간이란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끔찍스럽게 두려운 상대이건만, 이렇게까지 자신을 길들인 그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귓불 근처를 어슬렁거리던 입술이 문득 인환의 것을 덮쳤다. 허리를 부러뜨릴 기세로 끌어당기는 그의 두 팔을 통해 인환은 비로소 그가 통화를 끝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숨쉬기 버거운 키스가 언제까지고 계속되고 있었다. 어차피 인환의 반응을 끌어낼 수는 없으리라고 체념을 한 후부터, 그의 키스는 그저 스스로의 격렬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난폭한 것으로 변해갔다. 그가 키스를 좋아하는 타입이라는 것도 재회한 후에 알게 된 일이었다. 오래전 그토록 자신을 들뜨게 했던 부드럽고 기술적인 혀놀림은 그저 고객들의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한 제스처에 불과했고, 실제 그의 취향은 훨씬 더 난폭하고 격렬한 쪽이라는 사실도.

가쁘게 몰아쉬는 숨결을 통해 온통 그의 체취가 밀려들었다. 너무나 익숙해져버려서 이젠 그의 체취인지 자신의 것인지조차 분간이 안 되는, 비릿하면서도 알싸한 호색한의 낙인이었다.

혀뿌리가 얼얼할 지경으로 빨리고 물어뜯겼다. 넘어온 그의 타액이 쉴 새 없이 목구멍 안쪽으로 삼켜지고도 모자라 입가를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숨이 찬 나머지 도리질을 하면 잠시 떨어져 숨을 고르다가 다시금 입술을 겹쳐오는 그였다. 수염 자국이 파르스름한 그의 턱 끝이 정신없이 뺨을 비벼댈 때마다 얼얼한 아픔이 느껴졌다.

뜨거운 용광로 같았다. 사납게 휘몰아치는 해일 같기도 했다. 도무지 성적인 느낌을 가질 수가 없는 격렬하고 난폭한 키스는 그저 힘겨운 고문에 지나지 않았다. 어떡하면 숨쉬기가 편해질까 하는 생각에만 골몰한 채 헐떡이며 시간을 견뎠다.

바지 지퍼가 내려가고 허리춤을 떠돌던 그의 손길이 다리 가운데로 파고들었다. 허벅지 안쪽 예민한 곳이 쓰다듬어져도, 회음을 거쳐 생식기에 이르기까지 노골적으로 더듬어져도, 그저 잠을 자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어느새 소파 위로 밀어붙여진 몸은 그의 잔뜩 발기한 성기 밑에서 힘없이 짓눌리고 있었다.

“……나를 안아.”

잔뜩 쉬어 터진 흥분한 목소리가 초조하게 명령했다.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몸을 굳히고 있는 자신이 영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손가락 하나 꼼짝할 기운이 없었지만 가까스로 팔을 둘러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제법 열심히 그의 등을 쓸어주기도 했다. 아랫배에 닿아오는 그의 흥분한 몸은 이미 한계 상황에 도달해 있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한동안 굶주린 듯이 키스와 애무에만 몰두해 있던 그가 엉덩이 아래 걸쳐져 있던 인환의 바지와 팬티를 한꺼번에 벗겨 내렸다(글쎄, 부지런히 옷을 입혀주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나 말이다).

마주 안겼던 몸이 성급하게 뒤집혔다. 엉덩이 근처를 배회하며 두껍게 변한 그의 흉기는 불끈거리는 용트림을 몇 번 되풀이하더니 단숨에 인환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얼굴을 쓰다듬고 있던 그의 손가락 두 개가 동시에 입안으로 밀려들어왔다. 그의 벌거벗은 가슴팍이 인환의 등에 빈틈없이 달라붙으며 포옹을 깊게 했다.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 어떻게 해도 부담스러운 크기에 저절로 이가 악물리며 신음이 새어나왔다. 입안으로 파고든 그의 손가락을 어쩔 수 없이 깨물게 되었어도 그는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뱀처럼 미끄러지며 입안 곳곳을 애무하는 그의 손가락에선 찝찔한 피 맛이 났다.

병원에 가기 직전, 이미 한 차례 그의 몸을 품었던 하반신은 아직 축축하게 젖은 채여서 그가 빠른 속도로 허리를 돌리며 속사포처럼 쑤셔대도 그다지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얻어맞은 후유증으로 온몸에 열이 나던 것이 가라앉으면서 그는 다시금 삽입 섹스를 시도해오고 있었다. 그게 이틀 전인지 사흘 전인지는 분명치 않았지만, 밤낮 없이 되풀이되는 행위 끝에 인환의 좁은 구멍은 그럭저럭 그에게 익숙해지고 있었다.

처음처럼 난폭하게 파고들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 삽입 직전에 충분한 윤활제가 발라지는 때문이기도 했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고문임엔 변함이 없었지만 그나마 고통을 덜 느낀다는 점에선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창 밖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빗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아주 그친 것 같지는 않았다. 가랑비로 변해 여전히 사방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을 터였다.

정신없이 흔들리는 통에 머릿속은 더더욱 멍해지고 있었다. 가쁜 호흡 때문인지도 알 수 없었다. 후배위로 시작했던 체위가 정상위로, 다시 개처럼 뒤집혔다가는 이어 소파 위에 걸터앉은 그의 위에 말 타듯 겹쳐 앉은 자세로, 몇 번인가 체위가 바뀌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가슴이 뻐개질 것처럼 숨이 가쁜 걸 보면 거의 끄트머리에 도달한 것 같았다.

밧줄처럼 인환의 상반신을 죄며 그가 짐승 같은 교성을 토해내고 있었다. 크게 회전을 하듯 율동을 거듭하나 싶더니 이윽고 그의 음경이 쏜살같이 하반신을 빠져나갔다. 균형을 잃은 인환의 몸은 소파 위로 비스듬히 무너져 내렸고 그 위로 맹렬하게 체액을 뿜어내는 근육질의 거대한 몸이 꿈틀거리며 자신을 밀어붙여왔다. 상반신은 바스러질 듯 끌어안겼고, 입술과 얼굴 할 것 없이 소나기 같은 키스의 세례가 떨어졌다.

숨넘어가는 육체의 쾌락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그가 전율하고 있었다. 빈틈없이 맞닿은 피부 위로, 크게 물결치는 근육의 움직임들이 그의 환희에 찬 오르가슴을 선명하게 전해주고 있었다. 마라톤을 끝낸 육상 선수처럼 토해지는 사나운 호흡에서도 한껏 만족을 취한 수컷의 기쁨이 여과 없이 뿜어 나왔다.

행복한 것 같았다.

적어도 섹스를 하는 동안은, 그는 몹시 행복해 보였다.

그나마 다행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코끝에 다가든 새콤한 오렌지 향이 문득 정신을 일깨웠다.

“……마셔.”

땀범벅인 아름다운 얼굴이 인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깐 잠이 들었던 건지 아니면 정신을 잃었던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눈을 뜨고 보니 그가 인환의 상반신을 안은 채로 입가에 오렌지 주스 잔을 대주고 있었다. 여전히 노곤한 섹스의 자취를 간직하고 있는 그의 상기된 얼굴이며, 양쪽 팔꿈치까지 흘러내린 채, 땀으로 번들거리는 근육질의 몸을 온통 드러내주고 있는 그의 바스 가운 차림만 봐도, 정신을 놓고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지는 않았다.

그가 잔을 기울여주는 대로 얌전히 주스를 받아 마셨다. 너무나 기운이 없어서 그저 목구멍을 움직여 몇 모금을 삼키는 것뿐인데도 몹시 숨이 찼다.

“……다 마셔.”

“…….”

“어서!”

마저 마시고는 싶지만 그만한 기운도 없다는 걸 그는 모른다. 위압적인 기세에 눌려 다시 입술을 움직였지만 노란 액체는 그대로 입술 사이로 빠지더니 턱 끝을 적시며 줄줄 흘러내렸다. 그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지는 것이 보였다. 그가 때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꽤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대로 팽개쳐질 줄 알았던 상반신은 여전히 그에게 안긴 채였다.

문득 입술을 핥는 따스한 혀의 감촉이 느껴졌다. 눈을 뜨고 보니 그가 주스로 더럽혀진 인환의 입가며 턱 언저리를 부드럽게 핥고 있었다. 길고 아름다운 속눈썹이 아치처럼 싸고 있는 그의 눈시울엔 여전히 깊은 그늘이 드리워 있었다.

자신만큼은 아닐지라도 그 역시 많이 지쳐 보였다. 왜 아니겠는가. 그의 동생이 피습을 해온 이래, 인환이 그렇듯 그 역시 잠을 제대로 못 이루고 있었다. 우주엔 단 한 치의 오차도 존재하지 않는 것, 복수를 당하는 자 이상으로 복수를 하는 자 역시 황폐해지긴 매한가지이다.

말끔히 흔적을 지운 그가 눈을 뜬다. 그대로 시선이 마주쳤지만 이번엔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가 때릴지도 모른다고 의심을 해버린 자신이 문득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처럼 맑고 아름다운 눈동자 속에 담긴 자신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본다. 거울처럼 그저 자신을 비출 뿐인 그의 말간 눈동자엔 그 어떤 감정도 드러나 있지 않았다. 수수께끼처럼 불가사의하고, 신비스러울 정도로 음험했다.

자신의 눈은 반대로 그에게 어떻게 비치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와는 달리 무언가 속내를 숨길 의도도 의욕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자신이니, 아마도 감정을 읽기는 몹시 손쉬울 것이다. 볼모로 끌려온 지난 며칠, 그가 자신에게 취한 일련의 행동들을 보면 그건 거의 확실해 보였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인환을 자유자재로 조종하고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능수능란하게 인환의 행동이며 감정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 무엇도 숨길 수 없었고, 그의 의사에 반한 그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그저 꼭두각시였다. 그의 처분만을 바라고 숨죽인 채 말라가는 무능한 꼭두각시.

“……옷 입어.”

오랜 탐색전 끝에 먼저 시선을 돌린 쪽은 그였다. 담담한 어조였지만 어쩐지 지친 기색이었다.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시들시들 늘어지는 인환의 몸을 소파에 앉힌 그가 또다시 바비 인형 놀이를 시작했다.

소파 밑에 팽개쳐두었던 팬티와 바지를 차례로 입혀주더니 자신도 침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연회색 캐시미어 팬츠에 받쳐 입은 적갈색 항공 재킷엔 터프한 모양새의 로고가 몇 개 붙어 있었다. 남성적인 실루엣이 강조된 그것은 배우가 무색할 정도로 단정하고 강렬한 그의 용모와 어우러져 몹시 화려한 느낌을 주었다. 슈트 차림일 때보다도 그의 숨겨진 야성이 오히려 더 드러나는 듯해서, 인환은 자신도 모르게 오소소 몸을 떨었다.

무언가 할 말을 고르고 있는 듯, 한동안 인환을 물끄러미 굽어보고 있던 그의 예리한 시선이 아직 양말을 신지 않은 인환의 맨발에 가 머물렀다. 따스한 그의 손이 닿아오고 나서야 인환은 자신의 발이 얼음장처럼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파 밑의 양말 두 짝도 금세 제 주인을 찾아간 것은 물론이었다.

소파에 앉은 인환의 앞에 무릎을 꿇은 자세로 양말을 신겨주는 그의 모습은 어딘가 그로테스크해 보였다. 차게 식은 두 발을 차례로 부드럽게 마사지해주는 다정한 몸짓도, 무언가 신성한 의식을 치르는 듯 천천히 양말을 신겨주는 정중한 손놀림도 섬뜩한 위화감을 주기는 마찬가지였다.

“……희망을 주지…….”

양말을 다 신기고도 한참 동안 인환의 한쪽 발을 감싸 쥔 채 고개를 떨구고 있던 그가 문득 입을 열었다.

“……이렇게 시들어가면 너무 빨리 결판이 나버릴 테니까 그건 내가 손해야…….”

“……?”

“……오래 오래 괴롭혀줘야 좀 더 만족스러울 텐데, 초장부터 이렇게 죽어간대서야 더 이상 괴롭힐 맛이 나겠어?”

“…….”

“우선 1년을 두고 보지.”

“……?”

“1년 동안 내게 만족스러울 만큼 봉사를 해주면 그땐 모두 용서하고 널 놔주는 걸로.”

“?!!!”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로 자신의 발을 어루만지고 있어 그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말에 담긴 뜻이 무엇이라는 것쯤은 격한 핏줄기가 전신에 휘몰아치는 것만 같은 아득한 전율만으로도 정확히 알 수가 있었다.

뛰기를 포기한 듯 차츰차츰 느려지던 심장이 전기 충격을 받은 것처럼 쿵쿵거리며 갑작스레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공기라곤 하나도 들어오지 않던 폐로 알싸한 생기가 순식간에 가득 들어차오기 시작했다. 어슴푸레한 희망의 불꽃이 저 멀리서 꺼질 듯 꺼질 듯 일렁이며 인환을 부르고 있었다. 손가락 끝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막상 시작된 떨림은 손목으로, 팔로, 이어 가슴으로, 종내는 급격한 파동을 일으키며 전신으로 퍼져갔다.

“……저…… 저…… 정…… 정…… 정…… 말……? 정말……?”

“그래.”

“……위…… 위…… 그…… 내가…….”

“물론 만족스럽지 못할 땐 기간 연장이야. 그다음은 4년이지.”

“…….”

“지금처럼 재미없게 굴면 4년 연장, 4년 내내 또 같은 꼬락서니면 그땐 평생이고.”

“…….”

“어때? 과거에 네가 날 샀던 때와 동일한 조건이지?”

“……그…… 그…… 난…….”

“……계약할까?”

비로소 그의 고개가 들렸다.

선이 굵은 뚜렷한 이목구비가 고요하게 인환을 굽어보고 있었다. 뜨겁고 축축한 호색한의 자취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는, 담담하고 스토익한 얼굴이었다. 먼, 먼 과거의 옛 영웅이 홀연 되돌아와 있는 것만 같았다.

“위위…….”

“……전제 조건 네 가지. 밥 꼬박꼬박 먹을 것. 잠 꼬박꼬박 잘 것. 우울증 치료도 열심히 받을 것. 물론 그림도 부지런히 그릴 것.”

“…….”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조건 하나. 최선을 다해 나를 즐겁게 해줄 것.”

“…….”

“어때? 할 수 있겠어?”

“…….”

대답을 해야 했지만 마치 실어증에라도 걸린 것마냥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저 그의 어린아이처럼 맑은 눈동자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정신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혹시라도 그의 마음이 변할까 두려운 나머지, 혹시라도 없었던 얘기로 하잘까 두려운 나머지, 자동인형처럼 끄덕이고 또 끄덕여댔다.

미친 듯이 흔들리던 고개를 그의 두 손이 뻗어와 감싸 쥐었다. 플라토닉한 느낌이 들 정도로 부드러운 키스에, 자신도 모르게 긴장했던 몸이 풀어지며 격한 전율이 흘렀다.

울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기를 쓰고 참아냈다. 희망이 내려앉았다. 기묘한데다 어딘가 미심쩍기까지 했지만 희망임엔 틀림이 없었다.

“……배고프지 않아요?”

오랜 입맞춤 끝에 입술을 떼어낸 그가 조용히 물어왔다. 살피는 듯한 눈길이 인환의 창백해진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밥 꼬박꼬박 먹을 것.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이 눈치채일까 봐, 그의 눈길을 피한 채 조용히 몸을 떨었다. 여전히 숨은 차고 심장은 북소리처럼 빠르게 쿵쾅거렸다.

“……나가서 식사할까요? 일어설 기운 있어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요. 아무래도 지금은 무리일 것 같군요. 아쉬운 대로 중국요리라도 시키겠습니다.”

“…….”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 전화번호부를 뒤지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인환은 천천히 2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 어지럽긴 했지만, 희망이 생긴 탓인지 몇 시간 전처럼 기력이 아주 없진 않았다. 꿈을 꾸는 듯한 기분으로 계단을 오른 뒤, 복도 끝에 면한 방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코끝으로 확 끼쳐드는 물감이며 기름 냄새에 심장이 조여드는 것만 같은 그리움이 일었다. 어림잡아 35평이 조금 넘을 이 널찍한 공간이야말로 그가 꾸며준 인환의 새 아틀리에였다(원미동 옥탑방에서 가져온 그림 도구는 물론, 그가 새로 구입한 고급 화구들이 질서정연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절대로 자신의 아틀리에라는 기분은 들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방 안 곳곳을 이동하던 인환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가 닿은 것은 방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던 이젤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미완성인 채로 이젤 위에 걸린 ‘프러시안 블루’의 캔버스였다.

딱히 그림을 완성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저 본능이 이끄는 대로 천천히 몸을 움직여나갔다.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작업 테이블과 의자를 이젤 옆에 끌어다놓고, 선반이며 서랍을 뒤져 원하는 물감을 찾아낸 다음 기름에 개었다. 계란이 없어 같은 배율의 색감을 살리기도 불가능했거니와 당시의 감도 놓쳐버린 상태였다. 아예 다른 주제로 파고들지 않으면 이리저리 휩쓸리다 공간의 노예가 되기 십상이었다.

손끝으로 축축하고 미끈한 물감의 감촉을 느낀 것을 마지막으로 의식의 흐름이 끊어졌다.

오랫동안 푸른 공간 속에 떠 있었던 것 같다.

수많은 방과 방들을 지나 마침내 가장 마음에 드는 방을 찾아내 한참 동안 춤을 추었던 것도 같다. 온갖 새와 나비, 잠자리가 하늘 가득 날아다녔다. 형형색색의 꽃들이 활짝 만개했다. 꿀처럼 달콤한 향기를 내뿜는 과육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깃털처럼 가벼워진 몸은 벌처럼 붕붕거리며 사방으로 튀었다.

튀다, 튀다, 기운이 딸린 나머지 바닥에 주저앉아 쉬었다.

몹시 숨이 찼다. 북소리처럼 빠르게 쿵쾅거리는 심장이 불안했다. 길을 잃어선 안 되는데……. 화가로서의 자의식이 불쑥 끼어들었다. 공간의 노예가 되면 안 되는데…….

“……아름다워……!”

억눌린 신음 소리 같은 탄식이 문득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누군가 손을 뻗어왔다. 크고, 늠름하고, 야수처럼 힘이 넘치는 남자였다.

“……하느님, 너무나 아름다워!!!”

무뢰한의 손길에 갑자기 끌어당겨져서 인환은 가차 없이 현실로 곤두박질쳤다. 새하얀 불빛이 눈을 찌를 듯이 다가들고 있었다. 천장이 보이고, 벽이 보이고, 창문이 보였다. 푸른 방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가 꾸며준 낯선 아틀리에가 한눈에 다가들었다.

숨이 찼다. 견디기 힘들 정도로 숨이 찼다. 온몸은 얼음장처럼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더 이상 손끝 하나 움직일 기력이 없었다. 그래도 좋았다. 아직 희망은 존재하고 있었다. 멋진 ‘푸른 방’이 저기 있었다. ‘방’을 지은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인환아…….”

흐느끼고 있는 듯한 무뢰한의 목소리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힘껏 안아주는 팔은 따뜻해서 기분이 좋았다.

“……인환아…… 인환아…… 인환아…….”

“……졸려…….”

“……인환아…….”

“……졸려…….”

―잠 꼬박꼬박 잘 것.

아, 이번엔 거짓이 아니다.

“……위야, 좀 잘게…….”

짭짤한 소금 맛이 나는 뜨거운 입술이 자신을 부드럽게 덮고 있었다. 기분 좋은 만족감과 함께 인환은 죽음 같은 잠 속으로 깊이 빠져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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