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2003년 5월. 장인환(張仁歡)
똑똑.
“……선생님…… 장 선생님…….”
아득히 먼 곳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식사하세요……. 점심상 차려놨습니다, 선생님……. 꼭 지금 드시게 해드리라고 사장님께서 전화하셨어요. ……장 선생님……?”
고단한 삶의 굴곡을 지나온 사람 특유의 겁 많고 겸손한 주저가 애처로웠지만 행복한 놀이터를 떠나오기는 너무나 싫었다. 여전히 무아지경으로 화폭 속을 떠돌던 찰나의 순간, 그것이 파출부의 부름이라는 데에 언뜻 생각이 미쳤다. 작업에 몰입돼 있던 의식이 흩어지며 순식간에 현실이 다가들었다.
화살처럼 아픈 정오의 햇살이 창문을 통해 가득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얼룩 한 점 없이 말끔히 청소가 돼 있는 낯선 아틀리에에 새삼 의아해했다가 다시금 현실을 자각하고 실소를 지었다. 벌써 보름 가까이, 잠을 자거나 그에게 안기는 시간 이외의 나머지 모든 시간을 보내는 공간임에도 여전히 생경함을 느끼는 자신이 우스웠기 때문이다.
7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십 번도 더 이사를 다니며 이리저리 떠돌던 인환이었기에 거주 공간에 대한 특별한 집착은 없는 편이었다. 오래 머물든, 혹은 재빨리 뜨게 되든, 금방 새집에 적응을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두고 온 공간 역시 금세 잊어버리곤 했었다. 한데, 이상할 정도로 그의 집인 이곳은 아무리 해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별로 원미동 옥탑방을 그리워할 까닭이 없는데도, ‘여긴 아니다’ 하고 무의식중에 뇌까리곤 한다.
아마 자신의 아틀리에라고 하기엔 너무나 청결하고 질서정연한 것이 끈질긴 위화감의 1차적 원인일 테지만, 그보다는 좀 더 근본적인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되었다.
“……장 선생님, 바쁘시더라도 한술 뜨시고…….”
파출부의 목소리가 점점 더 당혹스러워지고 있었다.
“예, 지금 내려가겠습니다, 아주머니.”
“예에∼∼. 방해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선생님…….”
문 너머로 서둘러 대답을 던지자, 비로소 안도한 듯 파출부의 어조에서 웃음기마저 묻어났다.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발소리에서도 시원스러운 힘이 느껴졌다.
거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흐름이 끊긴 것이 안타까웠지만 할 수 없었다. 식사를 거르는 일을 그는 절대로 용납하지 않고 있었다.
인환은 체념하고 브러시를 내려놓은 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가 출근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붙여준 파출부는 수더분한 성격에 별로 말이 없는 40대 후반의 여자였다. 아침 6시에 와서 퇴근하는 오후 2시까지 요리와 집 안 청소, 그리고 세탁 등등의 잡일을 부지런히 해주고 있었다. 그가 제법 까다롭게 고른 사람임을 암시하듯, 여자는 성실하면서도 눈치가 있었다. 그에게서 언질을 받기도 했겠지만 꼭 필요할 때 이외엔 말을 붙이는 일도 없었다. 음식 솜씨도 꽤 좋은 편이어서 의무적으로라도 먹어야만 하는 인환에겐 여러모로 고마운 사람이었다.
다만, 지금처럼 혼자 하는 점심 식사의 경우,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채근을 하는 것이 불만이었는데, 아마도 그건 그의 탓일 것이다. 매일 집으로 전화를 걸어 주의를 주니 여자도 좀 노이로제를 일으키는 모양이었다.
“전골은 양념을 해서 냉장고에 넣어두었으니까 냄비째 꺼내셔서 바로 끓이시면 됩니다. 고추전은 그냥 두는 게 맛이 변하지 않으니까 저녁에 드시고 남는 게 있으면 그때 냉장고에 넣어두세요. 무조림도 냉장고에 안 넣는 게 맛있어요. 드시기 전에 따뜻하게 데워 드세요, 선생님.”
“예, 아주머니.”
인환이 식사를 하는 동안 아틀리에 청소까지 마친(여자가 매일매일 쓸고 닦아 이미 먼지 한 톨조차 없는데도) 여자는, 그새 인환이 비운 그릇 설거지까지 말끔히 끝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돌아갈 채비를 했다. 식탁에 앉아 여자가 타준 식후의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던 인환을 향해 저녁 식사 메뉴에 대해 꼼꼼하게 주의를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월요일엔 특별히 드시고 싶은 음식 있으세요?”
앞치마를 벗고 여자의 유일한 백인 장바구니를 집어 들며 여자가 물었다. 작달막하고 통통한 몸매에 짧은 파마 머리를 한 수더분한 얼굴이 조심스럽게 인환을 바라보고 있었다.
“……글쎄…… 전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같은 것을 물을 때마다 거의 같은 대답을 하는데도 고지식한 여자는 매일 묻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아마 이것도 그가 여자에게 주지시킨 의무 사항일 것이다.
“쌀국수를 좋아하신다고 사장님께서 그러시던데 점심땐 그걸로 준비해드릴까요?”
또 좀 멍해진다. 10년 전에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일. 자신의 취향이며 입맛까지, 그는 어떻게 이토록 사소한 것까지 다 알고 있는 것일까? 아니, 어떻게 기억을 하고 있는 걸까? 자신조차도 까맣게 잊어버렸던 작고 무의미한 사실들을…….
“아, 네에…… 뭐…….”
“그럼 주말과 휴일 잘 보내세요, 선생님. 전 모레 오겠습니다.”
“예. 조심해 가세요, 아주머니.”
퇴근하는 여자를 눈으로 배웅한 뒤, 인환은 마시고 있던 반쯤 남은 커피 잔을 설거지통에 넣었다. 곧바로 아틀리에로 올라가서 작업을 끝내고도 싶었지만 모처럼 나온 해에 일광욕을 하고픈 유혹도 함께 느꼈다. 소화도 시킬 겸 잠깐 쉴 요량으로 인환은 테라스에 면한 남쪽 창문 하나를 열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바야흐로 계절의 여왕인 5월에 접어들었음에도,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은 아직 좀 쌀쌀했다. 아마도 비 온 뒤끝이라 더 그러할 터였다.
아틀리에와 마찬가지로 거실 역시 구석구석 비쳐든 밝은 햇빛으로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처음 이 집에 온 날, 소파 하나와 응접 테이블 이외엔 아무것도 없던 거실 한쪽이 어느새 거실장이며 TV, 오디오, 홈시어터 같은 가전 기기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갖가지 화분 열댓 개가 적당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아치형의 창문을 따라 크림색의 이중 커튼도 우아하게 매달려 있었다. 벽난로 위 선반에 죽 늘어선 작은 사진 액자들도 보인다. 그의 동생들이며 타계한 부모와 형, 그리고 인환도 알고 있는 죽마고우 정신과 의사를 비롯한 몇몇 친구와 선배들 사진이었다(당연한 것처럼 인환의 사진은 없었다).
그럭저럭 사람 사는 집의 모양새를 갖추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어딘가 황량한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가구’는 있으되, 이 집에 ‘가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멍하니 거실을 둘러보는 사이, 어쩔 수 없이 다가드는 우울한 상념에 쫓긴 나머지, 인환은 바닥에 앉은 지 채 10분도 안 돼 자리를 털고 말았다.
주말이었다. 이틀 내내 그와 붙어 지내지 않으면 안 되리라. 거의 막바지에 다다른 200호 크기 캔버스를 그가 오기 전에 끝내려면 서둘러야만 했다.
‘푸른 방’을 완성한 날 이래로, 그는 어쩐 일인지 작업 중인 인환을 지켜보는 악취미가 생겼다. 그가 퇴근할 땐 한창 몰입해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가 대부분인 인환이었기에, 그가 정확히 언제 들어오곤 하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저녁 8시일 때도 있고, 때론 자정을 넘긴 시각일 때도, 어떨 땐 10시였다가 또 어떨 땐 아직 초저녁인 6시경일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인환은 어김없이 아틀리에 한쪽 구석에서 자신을 뚫어져라 지켜보고 있는 그의 무시무시한 시선과 마주쳐야만 했다.
워낙에 무서운 남자인데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는 것도 그렇지만, 집어삼킬 듯이 활활 타는 그 눈을 마주하고, 심장이 내려앉을 정도로 놀라지 않을 수는 없었다. 옷도 갈아입지 않은 비즈니스 슈트 차림 그대로인 걸 보면 막 퇴근한 것처럼 보이지만 정확하진 않았다. 도대체 언제부터, 얼마나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었을까를 상상하면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자신에 대해 무언가 불온하고 악의적인 음모를 꾸미고 있기라도 한 것만 같아서 한동안은 필사적으로 그에 대한 거부감과 두려움을 숨기는 것이 고작이었다.
차라리 점심을 먹고는 아예 작업을 하지 말까도 작심해보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단 한순간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혼자 있는 시간이면, 인환은 당장 캔버스로 도망치고 싶은 욕구로 온몸이 근질거리기 때문이었다.
그저 그림만이 위안이었다. 그림만이 행복이요, 그림만이 평화였다. 강제로 틀어 잡힌 수인의 신세로서는.
시계를 보니 아직 2시 반이었다.
오늘은 이례적으로 그가 퇴근하기 전에 작업을 끝낼 수 있을 것 같다. 열흘간의 강행군이 결실을 보는데다, 모처럼 그를 신경 쓰지 않고 캔버스 위에서 뛰어놀 걸 생각하니 잔잔한 기쁨마저 일었다. 아틀리에로 향하는 발걸음이 자신도 모르게 빨라지고 있었다.
광선의 상태가 변하기 전에 끝을 본 것이 다행이었다.
막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지만 남향인 아틀리에의 구조상, 또 남쪽 벽이 온통 커다란 아치형 창문으로 넓게 트여 있어, 광선은 충분했다. 마지막 터치를 끝낸 후 모필을 내려놓은 인환은 이젤에서 뒤로 몇 발짝 물러나 완성된 그림을 평가하듯 굽어보았다. 초월 상태에서 들여다보곤 하는 의식 세계의 완벽한 재현은 물론 아직 인환으로서도 무리이지만, 그럭저럭 흉내는 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 2년간, 손놀림은 좀 더 정교해졌고 눈도 점점 더 정확해지고 있었다.
200호 크기에, 크림옐로와 그레이가 어우러진 밝은 주제는, 처음 다루는 것이었던 데 비해 결과가 매우 만족스러웠다. 그가 사다준 고급 화구 중에 섞여 있던 올이 성긴 200호 크기 마 캔버스도 처음 써보는 것치곤 의외로 감각이 들어맞은 때문이리라.
문득, 찌르는 듯한 시선이 얼굴에 느껴졌다.
작업용 앞치마를 벗은 후, 더럽혀진 모필과 팔레트들을 치우기 위해 막 작업대 쪽으로 뻗던 인환의 손이 저도 모르게 부르르 떨렸다.
오른쪽으로 약간 시선을 틀자 무시무시한 시선의 주인공이 보였다. 물감통과 기름통들이 죽 늘어서 있는 선반 옆 방바닥에 한쪽 무릎을 세운 채로 그가 앉아 있었다.
두근…….
재킷은 벗어두었는지 옅은 하늘색의 드레스셔츠에, 스트라이프 문양이 들어간 암회색 넥타이를 반쯤 풀어 헤친 편한 모습으로, 역시 퇴근하자마자 바로 올라온 모양이었다. 어둠 같은 암청색 팬츠도 아침에 입고 나간 그대로, 자신을 굽어보는 눈매의 음습한 열기도 그대로였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한순간에 기가 질린 속내를 들킬까 두려운 나머지 심장이 급격하게 요동을 치고 있었다. 방심했던 만큼 동요는 더욱 컸다.
―아, 도대체, 왔으면 왔다고 얘기를 하면 좀 좋아……!
그의 눈길을 피하는 것을 그가 싫어한다는 걸 알면서도 이 순간만큼은 어떻게 해도 그를 마주 보기 힘들었다. 흘낏 시선을 비낀 채 떨리는 손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하던 일을 계속했다.
“……와…… 왔니……?”
“…….”
“……피…… 곤하지……?”
“…….”
쥐어짜듯 입가에 미소를 끌어오자 그의 시선에서 차츰 무시무시한 열기가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알고는 있다. 그렇게 바라본다고 해서, 시선이 말해주듯 그가 자신에게 무언가 무시무시한 짓을 하지는 않으리라는 걸. 설령 그럴 의도가 있다 하더라도, 그건 그의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치는 상념일 뿐이고, 당장에 그가 인환에게 보여주는 행동은 반대로 매우 나이브하다는 것도. 마치 다정한 연인인 것처럼 군다. 그와 자신 사이에 있는 깊은 골만 아니라면, 정말로 연인이라고 착각이 들 정도로 정열적이고도 헌신적인 연기를 펼쳐 보인다. 물론 언젠가 적당한 기회가 오면 저 숨겨진 증오가 폭발하리라. 억눌리고 억눌려서 더 이상 제어가 안 될 즈음, 그는 치명적인 일격을 가해 자신을 산산조각으로 부서트릴 것이다. 그게 그의 의도요, 또 복수의 참모습이리라.
평온을 찾은 듯, 담담한 표정의 그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가 팔을 뻗기 전에 먼저 손을 뻗어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여전히 떨리는 심장 탓에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는 못했지만 그가 요구하는 상냥한 태도는 언제든 보여줄 수 있었다.
“……다 완성하신 겁니까?”
“……그래.”
힘 있는 팔이 인환의 상반신을 부서트릴 기세로 마주 안아온다. 이어질 탐욕스러운 입맞춤에 대비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잘됐군요.”
“…….”
별로 자신의 그림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뭐가 잘됐다는 건지 모르겠다. 부지런히 그림을 그리길 바라는 그의 의도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작업 중인 인환을 들여다보는, 불처럼 탐욕스러운 시선에 비할 때 그가 인환의 그림에 쏟는 관심은 TV 쇼 프로그램이나 싸구려 드라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인환의 어깨 너머 크림옐로의 캔버스를 건성으로 한 번 쓱 훑어보았을 뿐, 그는 곧바로 입술을 겹쳐왔다.
라벤더의 샤워 코롱과 땀 냄새가 짙게 밴 그의 체취가 폐부를 찌르는 것만 같다. 마주 안은 등에서 땀에 젖은 그의 실크셔츠가 만져졌다. 겨드랑이 사이도 약간 젖어 있는 걸 보니 그는 벌써 여름을 느끼는가 보았다.
섹스는 되도록 밤에만 해주었으면 싶지만, 결코 입 밖에 낼 수는 없다. 퇴근 후의 단순한 인사 키스가 농도 짙은 애무를 동반하는 건 당연했고, 그가 흥분을 참지 못하게 되는 것도 거의 정해진 코스였다. 그나마 오늘은 침실로 옮겨 갈 이성은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틀리에 바닥을 덮고 있는 고급 양탄자 위에 떨어진 그의 정액을 파출부로 하여금 매번 닦게 하는 건 아무래도 껄끄러운 일이었으니까.
숨 막히는 키스를 몇 번 되풀이한 끝에 그가 인환을 번쩍 안아 올리고는 아틀리에 바로 옆방인 손님용 침실로 데려갔다.
침대로 떠밀린 채 정신없이 옷가지가 벗겨져 나갔다. 성급한 그의 손길을 도와, 대신 그의 옷을 벗겨주는 동안에도 그의 굶주린 듯한 키스는 계속 이어졌다. 열심히 혀를 얽고 키스를 되돌렸다. 넥타이를 풀고 셔츠를 벗겨내자 그의 아릿한 살 냄새가 더욱 짙어졌다. 땀이 밴 매끄러운 등의 감촉이, 그림처럼 완전하게 균형이 잡혀 있는 가슴과 아랫배의 근육들이 흥분으로 꿈틀거리는 것이 생생했다. 벨트를 풀고 속옷과 바지를 함께 벗겨 내리니, 잘 발기된 그의 남성이 아래로 떨어지듯 출렁 흔들린다. 단순하고 위험하고 동물적인 힘이 느껴지는 그것은 10년 전과 다름없이 여전히 아름답고 굳건했다. 격정을 이기지 못해 막무가내로 공격해 들어오는 성난 음경에서도, 까칠한 털로 뒤덮인 완강하고 우악스러운 허벅지에서도, 감당하기 버거운 수컷의 에너지가 넘치고 있었다. 지배하고, 요구하고, 복수하고, 멸할 뿐인 팽창의 에너지였다. 팽창하는 화살에 직격으로 관통당한 몸은 그저 새가슴처럼 파닥파닥 떨며 휘몰아치는 고통을 견뎠다.
신음 같은 교성을 흉내 내고, 문어처럼 바짝 죄고, 죽어도 떨어지지 않을 흡반이 되어 몸 안 깊숙이 빨아들였다. 등을 할퀴고, 어깨를 깨물어주었다. 열병 환자처럼 헐떡여도 주었다.
수컷은 진심으로 자지러졌다.
단순하고 위험하고 동물적인 에너지에 진실은 감상일 뿐이었다. 감상은 고통보다도 더 나빴다.
“……근처에 있는 스포츠클럽에 등록을 해두었습니다.”
인환의 안에 깊숙하게 페니스를 파묻고도 그의 어조는 마냥 평온하기만 했다.
욕조 안에서 거품투성이가 된 채로 인환은 다시 한 번 그의 몸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한 시간이 족히 넘을 침실에서의 섹스로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몸이건만, 씻겨주겠다는 무뚝뚝한 선언과 함께 욕실로 끌고 온 뒤 그는 침실에서의 과정을 고스란히 되밟고 있었다.
이미 그가 14년 전 처음 만났을 때의 저 금욕적인 영웅은 더 이상 아니라는 걸 뼛속 깊이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인환은 그의 멈출 줄 모르는 과도한 색탐에 매번 기함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굴이나 몸은 그대로이건만, 속은 어떻게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가 있는 것인지 그저 수수께끼만 같다. 처음부터 속내를 숨겨왔던 건지, 아니면 헤어져 있던 9년 동안 차츰 변해왔기 때문인지 그 정확한 변화의 정체도 알 수 없었다.
하긴, 인환이 상관할 일은 아니리라. 그의 정체가 본래 어떤 것이었든 자신은 그저 계약만 충실히 지키면 그만이었다. 그가 원하는 장난감으로, 최선을 다해 그에게 봉사해주면 그것으로 족할 터였다.
“……당신은 운동을 할 필요가 있어요, 여러 가지로.”
그가 다시 한 번 담담하게 덧붙였다. 역시 제안이라기보단 명령에 가깝다.
뒤에서 인환을 안은 채 그는 부드럽고도 느린 속도로 허리를 돌렸다. 그의 허벅지 위에 걸터앉은 자세로 결합돼 있는 탓에 그리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내부에 느껴지는 부담은 여전했다. 빨판처럼 자신에게 달라붙어 있는 그의 몸도 답답하기 그지없고, 욕실 가득 들어찬 김도 그저 숨이 차기만 했다.
“……수영이라면 다리에 무리도 안 갈 테니 오전에 한 시간씩은 반드시 하고 오세요.”
명령이다.
“……아…… 핫……!”
양쪽 갈비뼈를 틀어쥔 채 그가 깊숙이 찔러오는 바람에 대답은 힘겨운 신음 소리로 묻혀버렸다.
“……수영하실 수 있죠?”
“흑……! 그…… 흐웃……!”
수영이라니……. 도무지 무슨 속셈인지 알 수가 없다. 그를 즐겁게 하기 위해 운동까지 해야 한다면 할 말이 없긴 하지만 자신의 불감증이 그런 걸로 나아질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대답해요. 하실 수 있죠?”
“흐윽……! 읏……! 아아…….”
연거푸 계속된 날카로운 공격에 단말마의 비명 같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팔을 앞으로 교차시키듯 인환의 상반신을 끌어안고 있어 옴짝달싹할 수도 없었다.
“……운동은 우울증 치료에 효과적입니다. 빠지지 말고 하세요.”
“……읏……! 흑……! 윽…… 아…… 흐윽……!”
“……후…… 좋아…….”
“……하아…… 학……!”
“……좋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들려, 네 신음 소리…….”
“……아……! 흑……! 아파…….”
“……아픈가……?”
“아앗……! 그…….”
“……네 잘못이다…… 안 그러면 이렇게 좋은 소리를 내주지 않으니까…….”
“……흑……! 그…… 만…….”
“……다시…… 한 번만 더…… 다시…… 그때로…… 10년 전처럼…… 흡……!”
“아아……! 악……!”
“……그 소리들…… 네 신음 소리…… 한 번만 더…… 그때처럼 들을 수 있다면…… 날 물고…… 좋아서…… 좋아서 엉엉 울던 그때…….”
“……흐으…… 그만…… 우윽!!!”
“……그래…… 느끼는 것처럼…… 후읍……! 윽……!”
“아앗……! 그만……! 아…… 아파……!”
“……느끼는 것처럼……! 흡……! 욱! 웃……! 인환아…….”
“흐아…… 아아아…… 웃……!”
거칠게 쑤셔대는 내부가 더 아픈지, 인정사정없이 쥐어뜯기는 젖꼭지와 생식기가 더 아픈지 잘 알 수가 없다. 물어뜯기는 목덜미가 더 아픈지, 씹혀지는 혀뿌리가 더 아픈지도 잘 모르겠다. 떠밀리고 떠밀려서 어디까지 가야만 하는 걸까? 온몸엔 힘이 하나도 없고 숨은 머리 꼭대기까지 차올라서 그저 멈추고만 싶은데. 어디든 막다른 절벽에 돌진해서 마냥 부서지고만 싶은데. 그러면 그도 더 이상은 떠밀지 않겠지. 버겁다. 위험하고 본능적인 수컷으로 돌변해서 막무가내로 유린해 들어오는 그의 모든 것이 버겁다. 거대한 암반처럼 자신을 찍어 누르는 그가 아프다. 아프다. 오로지 아플 뿐이다!
“……그래…… 소리쳐…… 그렇게…… 날 사랑하는 것처럼…… 좋아서…… 울고…… 울부짖고…… 사랑하는 것처럼……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다시…… 다시…… 인환아…… 인환아…… 인환아……!”
“……하지…… 우아…… 아악!!!”
“흑……! 그래…… 그렇게……! 흐앗……! 흡……! 인…….”
“……아아! 아악!!! 우아!! 아파!! 악!!!”
“……하…… 우앗……! 큭……! 인환……! 인환…… 아!! 인…… 흐아악!!!”
욕조의 물이 출렁이며 솜방망이 같은 거품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인환의 가슴을 움켜쥔 채 뒤로 활처럼 허리를 휘며 그가 절정을 맞고 있었다. 용수철처럼 허리를 튕기는 그의 극심한 전율과 함께 몸속 깊숙이 쏟아져 들어오는 뜨거운 체액이 느껴졌다. 그답지 않은 일이었지만 미처 음경을 뺄 겨를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인환의 입구와 단단히 결합한 채로 그의 온몸은 섬광처럼 단숨에 뻣뻣해졌다.
관장을 받을 걸 생각하면 괴로웠지만 그나마 재빨리 사정을 해준 것만도 다행이다 싶었다. 답답했던 욕실 공기도, 점점 걷잡을 수 없이 난폭해지기만 하던 그의 피스톤 운동도, 더 이상 견디기 힘들 만큼 한계치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유난히 격한 오르가슴을 느끼는 모양인지 그는 몸서리를 치며 몇 번에 걸쳐 사정을 거듭했다. 인환의 목덜미와 등과 머리카락 사이를 떠돌던 그의 입술 역시 물결치듯 잔 경련을 거듭하고 있었다. 욕조의 물이며 거품들이, 흡사 파도처럼 튀었다가 가라앉고 다시 튀어 오르길 반복했다. 몇 번이나 고개가 뒤로 꺾인 채 그의 격렬한 키스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가슴이며 아랫배며 치부 할 것 없이 쓰라린 아픔이 느껴질 정도로 거칠게 쓰다듬어졌다. 팔 안쪽이 꼬집히고 머리카락은 쥐어 뜯겼다. 사냥감을 발견한 굶주린 늑대처럼, 급하고 격하고 후들거리는 그의 숨소리가 음습한 욕실 안을 언제까지고 가득 채웠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흥분이 가라앉는지 그의 애무가 차츰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졸음이 탱크처럼 눈 속으로 밀려들었다. 온몸이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뻐근했다. 깜빡깜빡 잘게 명멸하는 의식의 틈으로 미끄러지듯 빠져나가는 그의 페니스가 느껴졌다. 겨드랑이 틈으로 파고 들어온 그의 두 손이 인환의 몸을 천천히 돌려세웠다. 찰랑대며 피부를 간질이는 물거품의 감촉이 노곤했다. 부드럽게 끌어안겨지고, 등줄기가 쓰다듬어졌다. 그저 입술만을 빠는 부드러운 키스에 인환은 무기력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더 이상은 못 해…… 위야, 제발 이제 그만…….
소리 없는 애원을 담아 멍하니 흔들렸다.
“……안 해…… 씻겨주려는 거다…….”
낮게 속삭여주는 허스키한 목소리는 눈물이 나올 만큼 다정하게 들렸다. 먹물처럼 깜깜한 잠에 침몰해 들어가는 눈꺼풀을 간신히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흠뻑 젖은 채 수초처럼 흔들리고 있는 머리카락 틈으로 고요하게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흑요석처럼 깊고 정갈하게 빛나는 옛 영웅의 눈동자였다.
……안녕, 안녕……. 안녕, 위위…… 안녕…….
슬픔을 삼킨 애달픈 그리움이 저 안쪽 깊은 곳에서 살며시 번지고 있었다. 저절로 입술에 걸리는 자신의 미소가 어쩐지 가슴 아팠다.
엉덩이 안쪽이 벌어지며 그의 두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파고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불쾌한 감각에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파득파득 몸을 뒤채며 저항해봐도 거대한 흡반처럼 감겨드는 졸음을 피할 수는 없었다.